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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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뒤덮고있는 원시림속을 그들은 전진해가고있었다. 등자에 발을 걸고 허리를 잔뜩 굽히며 거의나 말갈기에 얼굴을 묻고 나무가지들을 헤쳐나가야 하는 고된 행군이였다. 걸음마다 진대통을 타고넘지 않으면 안되였다. 대오의 맨 선두에는 탄장(련대장) 박락권이 왜놈들에게서 빼앗은 센다이산 백마(중국식으로 《백전마》라고 불렀다.)를 타고갔다. 피가 말라붙은 시꺼먼 손으로 고삐를 감아쥔 그는 새매같은 눈으로 부러진 나무가지들이며 가랑잎무지를 파헤친 말발굽자리 혹은 바위의 이끼들이 벗겨진것 등을 재빨리 살피군 하는데 가끔 말총같이 뻣뻣한 턱수염을 넙적한 손바닥으로 문지르기도 했다. 그의 뒤에서는 련락병 왕진이 눈과 귀를 밝히며 바투 따르고있었다. 이제 겨우 열여덟살난 중국인소년으로서 박락권이 주보중부대의 경위중대장을 할 때 왜놈들의 말방목지에서 병들어 죽어가던것을 구원해주었었다. 그때부터 왕진은 박락권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있었다. 잽싸고 꾀빠른 소년이여서 지금 박락권부대의 유일한 중국인이나 조선말도 잘했다. 놀라운것은 열여덟살 나이에 벌써 거미줄같은 주름살이 얼굴을 덮고있는것이였다. 그는 박락권의 그림자였다. 박락권의 눈빛 하나 그는 놓치지 않았다. 박락권이 말고삐를 당겼다. 축축한 땅우에 돌멩이처럼 널린것을 살피는데 어느새 왕진이 말에서 뛰여내렸다. 고양이처럼 날래게 소리도 없이 내리자바람으로 가랑잎무지에 널린 말똥 하나를 주어왔다. 박락권이 그것을 받아 손으로 눌러보고 냄새도 맡아보았다. 그것이 언제 싼것인지 알아보려는것이였다. 잠시후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중대장을 불렀다. 《중대장, 놈들이 10리이상 앞서가고있소. 제길할!… 아무리 쫓아도 거리가 좁혀지질 않아. 도대체 어떻게 된 셈판인가. 분명 놈들이 피똥을 싸고있겠는데 계속 한본새로 달아나니…》 중대장 김영걸은 말라터진 입술을 혀로 추기며 말대가리를 툭툭 두드려주고있을뿐 애당초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명령하고 대답할뿐 하루종일 말한마디 없을 때가 드문하다는 괴짜였다. 어릴 때부터 말몰이군으로 일하면서 동북땅 각지를 메주밟듯 했다는 사람이다. 아직 글을 배우지 못한 까막눈이나 싸움판에서는 표범 한가지였다. 《가만 중대장!》 박락권이 급히 물었다. 《여기서 곧추 나가면 어데요? 부락이 있던가?》 《…》 여전히 김영걸은 대답할념을 안했다. 박락권도 그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옳아. 화전현 쟈피거우지.》 박락권이 재빨리 생각을 굴리며 말했다. 《한번 지나간 일이 있었어. 음- 생각나. 쟈피거우에서 북쪽… 아니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로진창, 반대로 서남쪽으로 빠지면 백리쯤 더 가서 나루훈!… 그래 중대장, 놈들이 어데로 갈것 같은가? 말해보-》 중대장 김영걸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탄장이 《말해보-》했으니 대답할 때가 된것이다. 《나루훈이지요.》 《옳소, 나루훈이요. 언제보나 중대장이 내 생각과 꼭 같거든.》 김영걸은 덤덤했다.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다. 박락권이 계속했다. 《지금 나루훈에 유명한 <송나라미인>패가 있다고 했지. 그것들과 합세하자는거요. 제길할! 그 고다마란놈이 정말 여우 같거든. 왜놈치고도 아주 꾀바른 놈이야!…》 지금 그들은 《꽃나비》라는 시적인 이름을 가진 토비무리를 보름째 추격하고있다. 원래 《꽃나비》의 《큰 주인》(두목)은 라대호라는 만주국관청에 근무하다가 형사범으로 수배받은 중국인이였는데 얼마전 그가 체포되여 처단되고 일본군패잔병들이 무리에 쓸어들면서 고다마라는 일본군대위가 두목노릇을 하기 시작하였다. 놈들은 박락권의 맹렬한 추격에 몰리여 안도현의 오도양차, 한총구를 축으로 원시림속을 향방없이 돌다가 드디여 다푸쟁허를 거쳐 화전현으로 넘어왔는데 고다마는 자기 무리를 나루훈의 《송나라미인》패와 합쳐 박락권을 저지시키고 《소멸》하려고 꾀하는것이였다. 박락권은 이를 사려물었다. 이것은 단순히 토비숙청일뿐아니라 일제패잔병들을 소멸하는 동북해방작전의 중요한 한고리였다. 사실 중국처럼 토비가 많은 나라는 없다. 흔히 마적떼라고 불리우던 이 토비들은 최근 동북지역에서 특히 성행하기 시작하였는데 큰 패당은 3천∼5천명의 인원에 중포까지 가지고 몇개의 현을 차지하고있었다. 처음엔 일본놈들도 치고 공산당이건 국민당이건 다 반대하다가 차츰 위만군, 경찰, 헌병, 특무들과 일제패잔병들까지 흡수되면서부터 정치적색채가 농후해졌다. 박락권이 쫓고있는 《꽃나비》무리만 해도 연길현의 여러 지역을 휩쓸며 새로 세워진 인민정부를 들부시고 수많은 조선인부락을 재더미로 만들었다. 현정부, 구정부의 간부들을 집단적으로 참혹하게 학살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길동분구사령부에서 파견하는 공작원, 련락원들을 무시로 살해했다. 그리하여 일제를 격멸하던 부대들이 토비숙청에 달라붙게 되였다. 길동분구사령관 강건은 수하의 탄장들인 박락권, 최광, 남창수에게 연길, 돈화, 교하 등 각기 활동지역을 맡겨 토비들을 철저히 소탕할것을 명령했다. 박락권은 동만각지에서 몰려든 삼도만의 일본군과 세차례의 격전끝에 역시 세번째로 삼도만을 해방한 직후였으나 계속하여 토비숙청에 달라붙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수많은 끄나불들을 가지고 바람처럼 새여나가군 하는 토비들을 단숨에 소탕하기 위하여 유명한 계주식추격전을 벌렸다. 놈들을 일정한 지역에 몰아넣고 보병중대들은 요소마다에 매복조를 펴고 기마중대는 교대로 끈덕진 추격전을 벌리게 했다. 한 소대가 하루 또는 이틀간 맹렬히 추격하고는 그 바통을 새 소대에 넘겨주었다. 열흘, 스무날 놈들이 한잠도 자지 못하고 솥을 걸어 밥을 끓일 여유도 주지 않고 추격하는 한편 차츰차츰 포위망을 좁혀들어갔다. 극도로 지친 놈들은 손을 들고 투항하면서 졸음과 굶주림에 못이겨 눈을 감고 자거나 퍽퍽 쓰러지군 했다. 악착하고 교활한 놈들이였지만 유격전의 전문가들앞에서는 꼼짝 못했던것이다. 사실 그 토비들때문에 패망전까지 일본놈들은 수많은 부대들을 동원하던 끝에 《수매정책》 즉 돈을 뿌려 손들게 하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그러나 끝까지 애를 먹이는 놈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고다마의 《꽃나비》무리이다. 기마부대인 이놈들은 포위당하면 원시림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새여나가서는 약속된 장소에 다시 모이군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뿌리내린 일정한 활동지역에서 결코 벗어나려 하지 않는 다른 토비들과는 달리 줄곧 서남방향으로 이동하고있다. 1,000여명에 달하던 놈들이 300명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놈들을 끝까지 소탕하지 않고서는 말에서 내릴수 없는 박락권이였다. 역시 계주식추격전이다. 교대가 없고 휴식이 없는것은 도망치는 놈들과 탄장인 박락권뿐이다. 《쟈피거우로 질러가야겠소.》 그는 성이 난듯 시꺼먼 턱수염을 문지르며 말했다. 《어디 길이 있을거요. 숲에서 빠져야겠소.》 한시간후 그들은 쟈피거우에 이르렀다. 험준한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마을이였다. 쟈피거우란 이름처럼 이 세상 한끝과 같은 막바지였다. 동북지방엔 많은 현들에 쟈피거우라는 마을이 있다. 옛적부터 승냥이를 비롯한 짐승들의 가죽을 이기는 골짜기를 쟈피거우라고 불렀던것이다. 나루훈으로 빠지려면 이 골짜기 외통길을 지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놈들이 나루훈으로가 아니라 썩 북쪽인 로진창, 류스허즈를 거쳐 교하를 목표로 했다면?… 박락권은 머리를 저었다. 여우 같은 고다마가 송화강이 앞을 막고있고 토비숙청의 된바람이 일고있는 교하쪽으로 갈리는 만무하다. 그놈은 기어이 일본군패잔병들이 몰켜있는 통화쪽을 최후의 희망으로 보고있을것이다. 골짜기입구에서부터 마을이 들어앉은 함지박 같은 골안에까지 량쪽바위츠렁들에 기관총좌지를 정하고 소대와 분대들을 배치했다. 만일을 생각해서 한개 소대만 말고삐를 잡고 마을어귀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중대장을 불러 매복조들은 수류탄을 기본무기로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30분쯤 지나면 나타날거요. 그동안 난 좀 자겠소. 놈들이 나타나면 깨워주.》 《저… 그러다 놈들이 다른데로 빠지면…》 《온다니까!… 인젠 더 말 시키지 마오.》 말끝이 흐려지며 눈이 감겼다. 어쩔새 없이 고개를 푹 떨구며 비스듬히 모로 넘어졌다. 그는 중대장이 말안장을 내려 머리에 고여주는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그를 깨운것은 련락병이였다. 귀전에 대고 《탄장동지, 놈들이…》 하고 말을 떼기 바쁘게 눈을 떴고 어느새 벌떡 뛰쳐일어났다. 깔끔거리는 두눈을 비비며 골짜기입구를 바라보았다. 수백명의 토비들이 말우에서 끄덕끄덕 졸고있다가 마을이 나타난것을 보고 속도를 높이고있었다. 추격부대가 자기들을 앞질러 와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것이다. 누런 군복을 입은 왜놈들도 많았다. 박락권이 손을 내밀자 눈치빠른 련락병이 목에 걸고있던 쌍안경을 벗어주었다. 그는 놈들의 대렬속에서 고다마란 대위놈을 찾고싶었다. 그러나 대위견장이 눈에 띄지 않았다. 교활한 놈이여서 박락권추격대의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하는것 같았다. 흐릿해진 해가 뉘엿뉘엿 지고있었다. 놈들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겨질것이다. 쟈피거우부락을 짓뭉개고 실컷 략탈을 하고 말을 갈아타고 외통길을 빠지면 다시는 포위속에 들 념려가 없게 되는것이다. 말탄 놈들이 차츰 더 가까와졌다. 누런 군복, 위만군복, 새까만 다부산자, 목에 감은 녀자목도리, 쏘련군대의 족두리모자도 있고 어느새 솜동복을 걸친 놈도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놈이 별스레 낯익어 보였다. 항일련군시절의 빨간별모표를 달고 목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있었는데… 피뜩 보이고는 앞의 놈들에 가리워 더는 찾을수 없었다. 그는 놀라서 쌍안경을 내리고 머리를 세게 흔들고는 또 그것을 눈앞에 가져다대였다. 그놈은 다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쌍안경을 련락병에게 넘겨주었다. 바람같이 내달리며 전투를 벌릴 때엔 그것도 거치장스러웠기때문이다. 어느새 안장을 올려놓자 련락병이 재빨리 말의 배띠끈을 매주었다. 말에 뛰여오르자 언제나처럼 량손에 싸창을 뽑아들었다. 매복권안에 다 들어온 놈들이 두눈을 흡뜨며 뻔히 쳐다보는 그 앞에서, 바로 놈들의 코앞 바위우에서 돌연 두개의 싸창으로 련발사격처럼 퍼부었다. 《앞으로!-》 하고 웨친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였다. 기관총들이 울부짖고 우박처럼 수류탄이 뿌려졌다. 잇달아 터지는 폭음, 불기둥, 사나운 말투레질소리와 비명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그러나 피할길 없는 죽음의 함정에 빠졌다는것을 알자 놈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돌진해왔다. 박락권의 싸창들이 련달아 불을 토하고 마을어귀에서 대기하고있던 예비대가 말에 올라 질풍같이 내달렸다. 아츠러운 총알의 휘파람소리가 귀전을 지지고 말들이 서로 뒤엉켜 돌아가며 울부짖었다. 말편자들이 불꽃을 튕기며 바닥에 떨어진 부상자들의 몸뚱이를 걷어찼다. 피투성이가 된 한놈이 눈을 싸쥐고 악-악 부르짖으며 정신없이 뛰여나오다가 풀썩 고꾸라졌다. 놈들속에 뛰여든 기마소대가 총을 쏘고 총탁으로 후려치며 얼이 빠진 놈들을 요정내고있는것이였다. 그때 박락권은 개바닥으로 뛰여내려 저쪽의 무성한 새초밭으로 말을 달리는 놈들을 발견하였다. 순간 고삐를 채여 발뒤꿈치로 말배때기를 걷어차자 《백전마》가 네굽을 놓기 시작했다. 바위츠렁을 날아넘고 어느새 개바닥으로 뛰여내렸다. 다급해진 련락병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따라섰지만 그는 벌써 량손에 틀어쥔 싸창을 멀리 앞에서 얼씬거리는 말궁둥이며 그우에 납작 엎드린 놈들에게 겨누고있었다. 아니 별로 겨누지도 않았다. 왼손잡이인 그는 그쪽에 고삐와 싸창을 같이 틀어쥐였지만 오른손 못지 않게 재빨리 어김없는 명중탄을 날려보내였다. 아마도 그처럼 말우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기민하게 싸창 두개로 총탄을 퍼붓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역시 그처럼 놀라운 사격술을 가진 사람도 드물것이다. 연길현 쓰팡대에서 나서자란 그는 어릴때부터 말을 탔고 자라서부터는 말도적패들을 쫓아 마을에서 훔친 말들을 찾아다주는 일에서 소문을 냈었다. 열다섯살때 벌써 억대바우같은 말도적패두목을 갈구리바줄로 걸어 떨어뜨리고 꽁꽁 묶어왔던것이다. 그리고 사격술로 말하면 열일곱나이부터 스물여덟살이 된 오늘까지 그가 쏜 총탄을 다 합치면 몇십대의 수레에도 싣고 남을것이다. 귀전에서 죽음의 휘파람소리가 윙윙 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 맨 앞에서 달리던 놈이 마지막으로 말에서 굴러떨어져 울퉁불퉁한 개바닥옆으로 질질 끌려갔다. 박락권은 좀해서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 코밀이하며 끌려가던 놈이 물황철나무밑둥을 부여안으며 멈춰서자 그자의 앞에서 말을 세웠다. 처음엔 중국말로 다음엔 일본말로 일어나라고 소리쳤으나 그놈은 죽은듯 기척을 안했다. 땅!- 총소리가 울리며 그자의 코앞 돌멩이를 박산내였다. 그자는 와뜰 놀라며 물이 즐벅한 자갈판에 머리를 틀어박더니 중국말로 새되게 부르짖었다. 《쏘지 마시오. 제발!… 난 당신을 아오. 박락권동지!》 《네가 나를 어떻게 알아?》 《압니다. 알구말구요. 말을 타면서도 싸창 두개를 쏘는거야… 당신밖에 더 있소?…》 《일어 낫!… 누군가 보자.》 아까 쌍안경으로 피뜩 보았던 그자였다. 어느새 모자를 잃고 맨머리바람이였는데 오른쪽 이마우로 엇비듬히 질러간 흉터가 낯익었다. 상의는 위만군장교복이였고 장화는 일본군대의것이였다. 항일련군때의 빨간별모표가 붙은 모자까지 쓰고있었더라면 누구든 그자의 경력을 글로 읽듯 우에서부터 차례로 엮을수 있을것이다. 코잔등에서 피가 흐르는 그자의 얼굴을 쏘아보면서 박락권은 침을 퉤! 하고 내뱉었다. 한없는 혐오감, 싸늘한 분노… 어쩐지 눈보라를 들쓴것 같이 등골이 시려났다. 《제석하대대장?!…》 그렇다, 한때 그는 주보중휘하의 항일련군대대장이였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것이 41년 가을이였던것 같다. 박락권이 주보중의 생명을 두번째로 구원해 준 잊을수 없는 그날… 그날 쏘련 훈련기지 북밀영에서 도보로 떠난 주보중일행은 모두 다섯이였다. 경위중대장인 박락권과 주보중의 련락병들 그리고 독립대대장이였던 제석하… 쏘만국경을 넘을 때는 이른 아침이였다.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렵던 숲속의 밀로… 그런데 일본놈들이 그 밀로를 알아낸것 같았다. 매복하고있던 《토벌대》기마병들이 숲속공지에 이른 그들을 포위하고 달려들었다. 《손들엇!… 움직이면 쏜다.》 격발기들이 절컥거리고 위협사격을 하는 기총탄환이 발치에서 픽-픽 먼지발을 일으켰다. 꼼짝할수 없었다. 너무도 뜻밖의 정황이여서 뒤통수를 얻어맞은듯 뻥해져있었다. 하는수 없이 총을 놓고 손을 들었다. 항일련군의 지도적위치에 있던 주보중마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뿐… 군도까지 빼들고 가까이 다가선 적들이 말에서 뛰여내려 그들을 포박하려 했다. 그 순간 박락권은 눈앞에 다가선 놈의 면상을 돌덩이같은 주먹으로 들이치고 주보중의 팔을 와락 당겨 놈들이 타고온 안장이 빈 말잔등에 올려뿌렸다.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한 주보중을 무슨 힘으로 어떻게 말잔등우에 떡자루같이 올려던졌던지… 다음 순간 그는 몸을 날려 안장우에 뛰여오르며 말배때기를 힘껏 찼다. 《다들 뛰라!-》 이렇게 부르짖으며 거구의 주보중을 꽉 붙들고 말을 달렸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일본놈들은 미처 총을 쏠념도 못하고있었다. 잠시후에야 짙은 안개를 파헤치며 총소리가 터졌는데 그때 박락권은 이미 원시림속으로 깊숙이 들어서고있었다. 아마도 제석하는 그때 놈들에게 체포되였을것이다. 그다음 일은 묻지 않아도 뻔하다. 왜놈들에게 투항변절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살아있을수 없는것이다. 《제석하!》 박락권이 으름장을 놓듯 그를 불렀다. 《왜놈들의 개노릇을 했지?》 《하는수 없었소. 그건 당신도 알겠지만…》 《그담은 또 토비가 되구?… 그래 여기서 뭘 해먹었어?》 《<탄두>노릇을 했소.》 《탄두》란 정규군부대의 작전부장과 같은것이다. 비로소 박락권은 이 《꽃나비》패당이 그렇게도 애를 먹인 까닭을 알게 되였다. 《항일련군의 독립대대장이 토비무리의 탄두를 했다?… 대단한걸. 그것도 왜놈두령밑에서…》 《어쩌겠소. 그렇게 된걸… 그렇지만 항일련군 8군장을 하던 사문동도 토비로 되지 않았소.》 《잔말 말앗!… 어서 걷기나 해, 가서 네놈을 심판하고 뼈에 사무친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겠다. 어서 걸어!》 박락권의 《백전마》가 사납게 코김을 불며 그놈을 밀어갔다. 제석하는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품고 자기가 왜놈들과 피흘려 싸운걸 생각하라느니 들리는 말에 사문동도 체포되였지만 용서받았다느니 하고 중얼거렸다. (후일 사문동이 국민당군 제5집단군 사령관으로 되리라는것까지 알았더라면 그는 혀를 빼물며 발광하였을것이다.) 그자의 말대로 하면 처음 토비로 되였다가 《중화민국륙해군 대원수》로까지 된 장작림의 경우를 비추어보아도 토비라는것이 세상에 명성을 날리기 이전의 필수적인 도약대라고 해야 할것이다. 청나라 숙친왕의 열번째 딸로서 한때 일본에서 《동방의 마타하리》 혹은 《만주의 쟝 다르끄》라고 요란스레 불리우던 절세가인 녀간첩 김벽휘 (일본이름은 가와시마 요시꼬, 어릴 때의 본명은 아이신죠로 현자)도 열하 《안국군》총사령이 되기전엔 한동안 토비두령을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토비들은 자기네 무리명칭을 살륙과 략탈의 피비린내가 덜나게 보다 시적으로, 녀성적으로 지어 괴상하게 《큰 처녀》, 《빨간 국화》, 《하늘의 령혼》, 《송나라미인》, 등으로 붙여부르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락권은 그러한 명칭따위나 그 누구의 기괴한 운명과 놀라운 소문따위엔 애당초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싸움을 위해, 오직 전쟁을 위해 태여난듯 싶은 그는 무섭게 적을 치고 승리를 거두면 그만이였다. 자나깨나 그의 머리속에서 움트고 자라고 나날이 커가는 생각은 다른데 있었다. 마음속에 품고있는 그 하나의 간절한 생각때문에 낮이고 밤이고 그는 쉼없이 싸우고 또 싸우는것이였다. 뒤늦게야 따라섰던 련락병이 앞에 막아서있었다. 지척지척 걸음을 옮기던 제석하가 돌연 몸을 돌리며 박락권을 향해 부르짖었다. 《왜 내가 죽어야 해, 10년간이나 왜놈들과 싸웠던 내가!… 여보게 박락권, 날 주보중동지한테 보내주게, 응?… 부탁하네. 자네가 쪽지까지 써주면 더 좋고… 그는 자네 말이면 다 들어주지 않나!》 《걸어라. 그냥 걸어!》 그는 가까스로 이렇게 말했다. 변절자, 배신자들의 지겨운 꼴을 적지 않게 보아왔지만 이렇듯 뻔뻔스러운 놈은 처음인듯 했다. 박락권의 손이 혁띠에 찌른 싸창을 더듬는것을 보자 제석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코잔등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입안에서 꾸르륵 거렸다. 《가만, 여보게, 한마디만 더…》 《걷지 못하겠어?》 거쉰 소리가 터져나갔다. 마침내 제석하는 악에 받쳐 부르짖었다. 《너희들은 왜… 왜 가질 않고 주인행세인가? 응?!… 자네야 늘 조국에 가고싶어 했더랬는데… 조선이 해방된 오늘까지도 가지 않고 여기 남아 주인노릇 하는건 무엇때문이야. 왜 못 살게 굴어?!…》 박락권은 순간 온몸의 피가 얼굴에 솟구치는듯 했다. 입술을 앙다물고 그자를 노려보다가 말에서 뛰여내렸다. 천천히 다가가 그자의 멱살을 틀어쥐며 낮게, 무섭게 속삭이였다. 《가고싶다. 하루빨리 조국으로, 우리 장군님께로 가고싶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여긴 우리 땅이나 같은거야. 200만이나 되는 조선사람들이 여기에 있어. 알겠어, 개자식!… 왜놈들과 너같은 개자식들을 다 잡아죽일 때까지 우린 가지 않는다.》 틀어잡았던 멱살을 놓았다. 돌덩이같은 주먹으로 대갈통을 바수어놓고싶었지만 가까스르 분노를 눌렀다. 계속해서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적의무에 대하여,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의 혈연적관계에 대하여 더 말해주고싶었지만 그것을 설득력있게 표현할 말마디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싸움군이였지 연설가는 아니였다. 말로써가 아니라 총으로 대답하는데 습관되여온 박락권이였다. 《걸어라.》 어깨를 돌려놓았다. 《저- 벼랑쪽으로!》 그자를 벼랑밑에 끌어다 세웠다. 그제서야 제석하는 무엇인가 깨달은듯 했다. 몸부림치며 달아나려는것을 세괃게 움켜잡아 바위모서리에 짓쪼았다. 《좀 얌전하게 굴지 못하겠어?》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떼였다. 전장에서 말과 무기들을 거두고 포로된 놈들을 끌어가는 소음이 골안을 메우고있었다. 마을사람들까지 하얗게 쓸어나와 웅성거리고있었다. 이제 저 사람들을 다 불러오자, 더러운 변절자를 심판하고 인민들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주자.…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말에 오르려고 하였다. 그때 등뒤에서 피거품을 문 웨침소리가 날아왔다. 《박락권 이 새끼야, 난 대대장이였다. 너보다 못지 않게 왜놈들과 싸웠다. 그래두 날 죽이겠어?》 제석하가 고함치고있었다. 《난 중국사람이야. 너희들한테선 죽구싶지 않다. 이 새끼야, 다 꼴보기 싫다. 네놈들은…》 미처 말끝을 맺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는것이 보였다. 그자의 오른쪽이마에서, 왜놈의 칼에 맞은 흉터에서 이번엔 검붉은 피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련락병이 참다 못해 싸창을 빼들고 쏴갈겼던것이다. 《왕진?!…》 열여덟살난 왕진의 얼굴은 근엄하고 비통하기까지 해보였다. 그는 자갈밭에 구겨박혀 푸들쩍 푸들쩍 마지막경련을 일으키고있는 제석하의 몸뚱이를 향해 또 한방 갈겼다. 몸뚱이가 굳어져버리는것을 보고서야 으스스 몸서리치는듯 하더니 싸창을 집어넣었다. 박락권은 아무 말없이 말에 올랐다. 얼마쯤 앞서나가자 련락병이 따라와 옆에 나란히 붙어갔다. 그의 얼굴은 퍼릿퍼릿했고 두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왜 그래?》 박락권이 물었다. 《탄장동지, 못견디겠어요. 막 메슥메슥한게…》 《그런데 무엇때문에 네가 그놈을?》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그는 흐느끼듯 하면서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우리 고향 쌍성엔 뱀이… 많았어요. 내가 제일 무서워하던… 그런데 그자가 꼭 세모난 대가릴 쳐든 뱀처럼… 보이더군요. 막 몸서리나는게…》 중대장련락병이 말을 달려와 큰소리로 보고했다. 《탄장동지, 몽땅 잡아치웠습니다. 포로된 서른두명을 내놓군 다 뒈졌습니다. 고다마란놈두 눈알이 튀여나와 뒈져있었습니다. 포로들이 확인했습니다. 기관총 6문, 보총 200자루, 수류탄 600개!》 하고는 또 귀가 먹은듯 팔을 내저으며 마치 고함치듯 했다. 《기관총 하나는 이상한겁니다. 소총 열두자루도 그렇구… 미국제 같습니다.》 《미국제?…》 《옛, 국민당군대까지 끼워있었습니다. 중대장동지는 지금 포로들을 심문하고있습니다.》 《?…》 박락권은 생각에 잠겼다. 국민당특무들이 도처에서 잡히기 시작한것은 8.15후부터였다. 그러나 장개석군대까지 토비무리에 끼워있었다는것이 놀라웠다. 그것들이 언제 어떻게 되여 여기 동북땅에 왔는가?… 박락권은 머리를 흔들고 행군준비를 명령했다. 나루훈의 《송나라미인》패당까지 소탕해버릴 결심이였다. 련락병들을 파하여 다른 중대들도 행군로정을 나루훈방향으로 돌릴것을 명령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웠다. 강낭떡과 짠무우쪼각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 안주머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았다. 휴식은 전부대가 집결한 후에 하기로 했다. 30여호밖에 안되는 쟈피거우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시를 받은 중대장이 호기있게 웨쳤다. 《승마!》 전체 기병중대가 일시에 말에 올랐다. 악질토비들을 끝내 소멸하여 기세가 오른 전사들이였다. 그러나 쟈피거우를 떠나 10㎞이상 행군해갔을 때 길동분구사령관 강건이 파한 련락원과 남장을 한 처녀가 말을 타고 쫓아왔다. 련락원은 강건의 편지를 가지고왔고 처녀는 몸에 꼭 맞게 지어입은 솜동복잔등에 무선기를 지고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다고 한다. 거품을 우그그 입에 물고 꼬리가 축 늘어진 말들을 살펴보고 박락권은 오늘전투에서 로획한 말들중에서 마음에 드는것을 골라 바꾸어타라고 했다. 행군을 멈추지 않고 가면서 소식을 듣기로 했다. 박락권은 련락원이 가져온 편지를 받아들고는 새로 나타난 처녀의 옆모습을 흘끔 치떠보았다. 무선기가 차례진 기쁨으로 말한다면 당장 무선수를 얼싸 안고싶었지만 부대에 오직 하나뿐인 처녀를 어떻게 건사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구두솔 같은 턱수염이 그의 손바닥밑에서 또 부스러져내렸다. 《남자무선수는 없었는가?》 그의 성난듯한 물음에 처녀는 먼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어둠속에서 가지런한 하얀 이들을 드러내며 처녀는 말했다. 《그 편지에 다 적혀있을겁니다. 탄장동지.》 말을 타고가면서 편지를 뜯었다. 련락병에게 전지를 가져오라고 소리치자 처녀가 또 말했다. 《제게도 있습니다.》 《그럼 좋소. 동무가 읽소.》 처녀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한동안 아무말없이 갔다. 편자신은 말들이 투덕투덕 땅을 구르는 소리가 조화로운 음향의 강물을 이루어 골안을 메우며 흘렀고 하늘에서는 뭇별들이 첫 추위에 흐느끼듯 가물거리며 소리없이 따라섰다. 박락권은 처녀가 읽는 편지내용을 귀를 강구며 듣고있었다. 그것은 편지라기보다 인편으로 보낸 전문과 같은것이였다.
《박락권동지, 지금 조국에서는 군건설을 힘있게 내밀고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맡은바 임무를 속히 수행하고 군건설사업에 참가할것을 요구하고있다. 장군님께서 림춘추동지를 파견하시였음. 무선수가 도착하는 즉시 사령부와 련계를 가질것. 구체적인 차후활동방향을 주겠음. 비밀과 관련되는 내용은 일체 인편을 금할것. 강건》
박락권은 짧은 그 편지를 곱씹어 읽게 했다. 터질것 같은 흥분에 심장이 아프게 뛰놀았다. 그는 목이 쉰것처럼 힘들게 소리쳤다. 《중대장, 대오를 멈춰세우시오. 휴식!-》 이어 처녀에게 빨리 무전을 치라고 독촉했다. 처녀가 너무 늑장을 부리는것 같아 직접 안테나선을 나무에 던져주기까지 했다. 조절기를 돌리며 레시바를 낀 귀전에 손을 가져다 대고있는 무선수처녀의 얼굴을, 영채도는 새까만 두눈과 꼭 다물린 작고 뾰족한 입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출력표시등의 파란 불빛이 처녀의 두눈에서 빨갛게 사물거렸다. 련락병 왕진이 피워놓은 화토불이 처녀의 여윈 얼굴을 얼추 비치고있기때문인지 아니면 그 불빛이 본래 빨간색이였는지… 처녀는 별로 고와보이지 않았다. 작고 연약하고 무척 여윈데다가 얼굴은 좀 메마르고 딱딱한것이 고집센 사내애 같았다. 그러나 박락권은 단 한순간도 처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있었다.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전건을 두드리는 소리를 이 세상 제일 아름다운 선률로 새겨들으며 바라마지 않던 소식을 가슴조이며 기다렸다. 드디여 교신이 끝났다. 처녀가 그에게 강건에게서 받은 전보문을 천천히 읽어주었다. 그것은 변천되는 동북정세에 대한 개괄로 시작된 장문의 전보였다. 박락권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가 피흘리며 헤쳐나가는 조국에로의 길에 얼마나 엄중한 정세가 조성되고있는가를 알게 되였던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