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편
1
두사람은 무남이동네를 벗어나자 어둠속에서 굳게 손을 틀어쥐였다. 곽병철은 몸은 체소하지만 그의 손은 크고 완전히 뼈로만 된듯이 아귀차게 느껴졌다. 《태혁동무, 걱정말고 돌아가십시오. 이제는 우리 힘으로도 능히 수습할수 있습니다.》 병철은 태혁의 손우에 다른 손을 덧포개여쥐며 갈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내 사령부에 돌아가면 장군님께 백바위골인민들의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정말 이번에 잘 싸웠습니다.》 태혁이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병철의 앙상한 어깨를 굳게 그러안았다. 《우리는 장군님께서 그 위험한 고비를 그렇게 멋이 있게 헤쳐나가신것을 보니 막 날것 같은 심정입니다. 뭐 이제는 무슨 일을 당해도 못해낼 일이 없을것 같습니다.》 《사실 김일성장군님 아니시고야 그 누가 그런 묘수를 생각해낼수가 있겠습니까. 허허허. 걱정마십시오. 이제 장군님 모시고 꼭 백바위골로 다시 오게 될것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류창표동무도 돌아올것이며 정귀하로인네들도 꼭 해방된 백바위골에서 장군님을 맞이하자고 할것입니다.》 지난 사흘동안 실로 초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여 백바위골일대의 혁명조직을 위기에서 건져낸 그들은 이제 헤여지게 된 이 마당에 이르러서야 나누고싶은 말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았다. 그날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뒤쫓아간 《토벌대》들은 한밤중에 겨우 《유격대》를 따라잡아 대접전을 벌린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피투성이가 되여 돌아왔다. 그 전투는 근 2시간이상 계속되였는데 나중에 창격전을 벌리게까지 되였을 때야 보니 여태까지 죽고 죽이고 한 상대가 조선인민혁명군이 아니라 13도구방향에서 급보를 받고 백바위골 방향으로 쳐나오다가 조선인민혁명군의 과감한 반돌격에 된벼락을 맞고 쫓겨가던중 12도구어방에서 겨우 멎어서가지고 숨을 태우고있던놈들이였다. 백바위골의 혁명조직을 지키기 위하여 음력설대목의 강추위속에서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이사를 조직하느라고 바삐 돌아치던 한태혁과 곽병철은 한밤중에 동네마다 달구지를 동원하여 실어나르는 송장들을 보고 통쾌감을 금할수 없었으며 힘든줄도 모르고 그 모든 복잡하고 다사한 일들을 꼼꼼히 처리해나갔다. 류창표는 가족들의 뒤를 따라 12도구의 동업자 집으로 가산과 함께 옮겨갔으며 무남이의 정귀하로인네는 주종섭로인네 일가와 함께 13도구 노루개라는곳에 옮겨앉았다. 그밖에 권만수며 치백, 룡덕이 등 장기덕에게 로출된 모든 조직원들은 반연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갔다. 지금 두사람은 갑손이네 일가가 국내로 이사가는것을 도와주고나선길이다. 대장간집같이 갑자기 어찌는수가 없는 집들은 림시 사람들만 빼돌리고 곽병철이도 그날 저녁으로 가족들을 일단 이웃동네로 보냈다가 다시 얼마 멀지 않은 락수동 처가집에 다 데려다주고 왔다. 수색은 이튿날부터 진행되였는데 동네를 이잡듯이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없으니 방아간에 드나들거나 대장간출입을 많이 하던 사람 몇을 잡아가고 방아간과 곽병철이네 집 그리고 대장간을 불살라버렸다. 그리고도 매일같이 두눈에 쌍심지를 켜댄 경찰, 헌병, 특무놈들이 돌아쳤지만 별수 없었다. 백바위골을 흽쓴 백색테로의 미친 바람은 일단 잔듯하였다. 장기덕이란놈을 찾아내려고 그 바쁜속에서도 눈을 밝혔지만 그놈은 그날 어깨와 다리에 부상을 당하여 그대로 병원에 실려가서 백바위골어방에는 얼씬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놈이 지껄이는 정보는 날에날마다 벌어지는 사건에 낱낱이 반영되였다. 태혁이와 곽병철 그리고 류창표는 진옥의 행처를 알아내려고 여러곳으로 줄을 놓아보았으나 묘연하였다. 그대신 정지성의 매부였다는놈이 종시 왜놈 《토벌대》의 통역으로 굴러떨어져 《토벌》에 묻어다니다가 전날 그 피어린 접전속에서 개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알아냈다. 무엇인가 인간의 운명에 대해 생각케 하는 소식이였다. 진옥이문제는 부득불 후날로 미룰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진옥이가 지키자고 목숨바쳐나선 그 혁명을 우선 지켜야 한다. 말없이 이러한 보복심리에 휩싸인 그들은 여느때보다 더욱 침착하고 랭정하게 일들을 처리해나갔으며 끔찍한 참극들을 태연한 태도로 맞이하였다. 적들은 부산히 돌아쳤다. 대도로로 끊임없이 산포, 야포를 끈 부대들이 이동해가는것을 보면 놈들의 관심은 여전히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령부를 추격하는데 쏠리고있는것 같았다. 《내 가는길에 락수동에도 들려보겠습니다. 이 추위에 갑자기 큰 식솔이 몽땅 쓸어갔으니 처가집에서 얼마나 곤난하겠습니까?》 태혁은 그냥 쥐고 놓지 않는 병철의 터슬터슬한 손을 쓸며 나직이 말하였다. 《그런 걱정 마십시오. 그게 그래도.》 하고 병철은 게면쩍은듯 어둠속에 흰이를 드러내고 히죽이 웃으며 말하였다. 《정 주변이 없는 축은 아닙니다. 제 집인데 뭐랍니까? 그러게 난 한동안 들어가지 않을 작정입니다.》 《곽동무가 뒤일을 수습해야 하니 집에 붙어있을 사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아주머니가 걱정을 하겠는데 가끔가끔 들려야지요. 여기서 산으로 질러가면 멀지도 않지 않습니까? 하여간 내 가다가 들리겠습니다.》 두사람은 다시한번 손을 잡고 흔든 다음 서로 어깨를 그러안았다. 그러나 리별은 그렇게 쉬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과 들에 눈이 덮여 사위는 훤하였지만 그믐께라 숲속에 난 오솔길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태혁이가 내고 간 큼직큼직한 발자국을 따라 발을 옮겨짚으며 곽병철은 그냥 따라왔다. 《들어가십시오.》 태혁은 모자끈을 죄여매며 뒤돌아보고 말했다. 《어서 가라구요.》 곽병철은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떡끄떡해보인다. 그러면서도 발은 그냥 앞으로만 나갔다. 《왜 그럽니까? 이제 곧 만나겠는데… 어서 들어가십시오.》 태혁은 우뚝 걸음을 멈추어섰다. 병철이도 따라 멎어섰다. 《간다니까요. 허 참, 어서 가십시오. 먼길을 갈 사람이 서둘러야지…》 곽병철은 좀 쑥스러운듯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잠시 말없이 서있던 태혁은 이윽고 뚜벅뚜벅 되돌아왔다. 《곽동무.》 하고 태혁은 고개를 숙이고있는 곽병철의 두어깨에 손을 얹고 다감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제 혁명이 승리하는 날 곽동무의 여덟남매, 아니 아홉남매를 다 데리고 우리 김일성장군님께 함께 큰절을 드립시다. 곽동무, 내 곽동무를 잊지 않겠습니다.》 《태혁동무.》 곽병철은 와락 태혁의 가슴에 매달려 흐느끼는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김일성장군님께 우리 열식구가 모두… 우리 심정이야 태혁동무가 잘 알지 않습니까. 내 심정을 전해주십시오.》 태혁은 말없이 체소한 병철의 모습을 어둠속에 바라보았다. 눈부리가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별일이다. 사나이들끼리 헤여지기가 왜 이리 힘이 드는가. 그는 성이라도 난듯이 병철의 손을 와락 그러잡고 흔든 다음 이번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락수동으로 뻗어있는 산모퉁이 눈길로 걸음을 다그쳤다. 락수동은 전날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추격하다가 저희끼리 맞불질을 하여 눈벌을 검붉게 물들인 그 싸움터에서 골짜기 하나를 넘어서서 있는 외딴 동네였다. 불과 40~50호의 조선사람들이 사는 그 동네는 큰길과 그리 멀지 않았지만 세상과 거의 동떨어져있는듯 한 느낌을 주는 산으로 둘러막힌 한적한 동네였다. 태혁이가 홀로 낯선 산길을 걷다보니 락수동이 멀리 바라보이는 높은 산등에 섰을 때는 그믐달이 잠간 솟아올랐다가 벌써 반쯤 기울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동네에 들어가자면 날이 밝기전에 가대야 하겠기때문에 태혁은 서둘렀다. 그런데 먼데서 불빛이 훤히 비쳐왔다. 12도구방향이였다. 거리가 멀어서 똑똑치는 않았지만 불도 이만저만 한 불 같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떠나온 뒤쪽에서 또 총소리가 자지러졌다. 얼핏 돌아보니 멀지 않은 대도로연선을 타고 거의 동네마다에서 불길이 타오르는것이였다. 《〈토벌〉이다!》 이런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대책을 세울만큼은 세웠다지만 놈들이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전면《토벌》을 할줄은 미처 몰랐다. 불길이 타오르는것은 비단 대도로연선만이 아니였다. 조선사람들이 모여사는곳이면 어디서나 거의 같은 시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어쩔것인가? 백바위골에는 혹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곽병철이 있으니 수습하겠지만 이 엄동설한에 인민들이 겪을 재난을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그렇다고 몇십리사방에 널린 불길을 혼자 끌수도 없고 우선 어디로 갔으면 좋을지 그것조차 질정할수가 없었다. 별안간에 발밑에서도 확―하고 불이 달려오르더니 총소리가 자지러졌다. 《이놈들이!》 락수동까지 《토벌》대상이 됐다는것을 알게 된 한태혁은 더는 주저할 새가 없어 곧바로 산등성이를 달려내려갔다. 락수동은 완전히 무방비상태에 있었다. 왜놈들이 이 외딴 동네를 《토벌》할만한 리유나 구실은 전혀 없었다. 하기는 짐승같은놈들이 조선을 침략할 때 무슨 구실이나 리유같은것을 가렸겠는가? 문제는 락수동에 조선사람들이 산다는데 있다. 태혁은 내림받이를 달리다가 눈구뎅이에 묻혀 한참 허우적거렸다. 그러다가 숫제 눈우에 드러누워 디굴디굴 굴었다. 눈사람꼴이 돼가지고 굴러내리면서도 권총을 더듬어찾아 틀어쥐였다. 너울너울 불길이 그믐밤의 어둠을 이리 쓸고 저리 쓸고 한다. 총소리가 울린다. 보매 구식보병총소린데 몇자루 되는것 같지는 않았다. 동네가 하도 작으니 《토벌대》도 몇놈 보내지 않은것 같다. 《빌어먹을놈들! 내가 총을 못쏘아서 몸살이 나는 판인에 어디 견디여봐라!》 태혁은 눈을 털고 불타는 동네로 곧장 달려나가며 혼자 웨쳤다. 한군데 모록이 모인 집이 스무나문채 되고 나머지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동네인데 불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어딘가 어딘지 분간할수가 없었다. 그저께밤에 곽병철이와 함께 순애를 업고 또숙이를 안고 찾아왔을 때 곽병철이네 처가집앞에 키큰 버드나무가 서있던 생각이 나서 어방대중하고 한 불무지쪽으로 달려갔다. 어디선가 아이와 어른들이 서로 찾고 부르는 목소리가 와지끈와지끈하는 불소리와 마구 쏘아대는 총소리속에 엇갈려 들려온다. 목에서 겨불내가 나도록 달려서 동네앞 눈구뎅이에 엎드리니 개털외투를 뒤집어쓴 꼭 메돼지꼴을 한 경찰놈 셋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동네 한복판으로 달려가는것이 눈에 띄였다. 태혁은 목표를 발견하자 가슴이 안정되였다. 그는 서둘지 않고 짚이영을 올린 담모퉁이로 돌아서려는 맨 앞놈의 뒤통수를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그놈은 이미 불이 달린 담장의 이영을 잡아벗기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피를 본 짐승처럼 마구 불속으로 달려가던 두놈이 주춤 멎어섰다. 사격에는 안성맞춤의 목표였다. 태혁은 별로 묘준도 하지 않고 거퍼 방아쇠를 당겼다. 두놈 다 어디서 날아오는 총알인지 알지도 못하고 길바닥을 핥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태혁은 눈무지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은 어떻게 되였는가? 다시 가슴이 안타깝게 죄여든다. 그는 세놈의 경관 시체를 뛰여넘어 동네 한복판으로 달려갔다. 불방망이를 든놈이 피뜩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마당에서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가 흰 보퉁이를 안고 나오다가 비칠거린다. 주춤 멎어섰던 태혁은 우선 불뭉치를 든놈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나서 그놈이 사라진쪽으로 몇걸음 달려나갔다. 확확하고 단김이 매운 연기, 재가루와 함께 산더미처럼 앞을 가린다. 어디서 불티가 튀였는지 우지직하고 머리칼이 타들어왔다. 태혁은 어느새 한절반 불덩어리가 된 털모자를 와락 벗어가지고 눈에 비벼 다시 뒤집어썼다. 불방망이를 든놈은 이미 더 불붙일데가 없어 아무데나 마구 휘둘러대더니 저앞에서 아이 업은 아낙네와 무엇인가 둘러멘 남정네들 한무리가 지나가자 불방망이는 아무데나 집어던지고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앉아 총을 겨누어댄다. 태혁은 그놈이 장총으로 인민들을 겨누고앉은 거리보다 자기 권총으로부터 그놈까지의 거리가 훨씬 멀다는것을 총망중에 재여보며 불타는 집앞에 우뚝 멈추어섰다. 초조감때문인지 손이 떨린다. 너울거리는 불빛속에 그놈이 완전히 사격자세에 들어간것을 확인하는 순간 지그시 방아쇠를 당겼다. 그놈은 땅바닥에 펄썩 주저앉으면서 총구를 하늘에 대고 야무진 발사소리를 내였다.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와 앞뒤에 박힌다. 무엇이 자기를 발견했다는것을 깨달은 태혁은 골목길을 갈지자로 내달렸다. 피유―땅! 땅! 피유, 피유 귀부리로 아츠러운 바람소리를 지르며 총알이 지나가고 감궂은 연기와 너울거리는 불길이 앞을 막았다. 태혁은 불속을 뚫고 한참 달리다가 어디선가 울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듯하여 멎어섰다. 길가집에서 우지직하고 헛간이 무너져앉았다. 한절반 타버린 이영이 바람을 맞아 불길과 함께 통채로 하늘을 향해 들고 일어났다. 《엄―마―》 우지끈하고 서까래 허물어지는 소리속에서 외마디비명이 울리더니 뚝 멎어버린다. 문득 태혁은 눈앞에 솟아있는 버드나무를 보았다. 헐벗은 버드나무우듬지에는 까치둥지가 매달려있는데 그채로 불이 달려 불꽃을 날리고있다. 《순애야, 철봉아― 석봉아―》 태혁은 저도모르는 사이 떠오르는대로 아이들의 이름을 목터지게 부르며 불타는 집안으로 뛰여들었다. 《효숙아, 또숙아―》 뭉클하고 검은 연기와 함께 검붉은 불길을 내뿜는 정지문앞에서 태혁은 한팔을 눈앞에 갖다대고 불밑을 살피며 다시 불렀으나 우지직거리는 불소리뿐 아이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피유―하고 총알이 연거퍼 날아오더니 불달린 용마루에 박히는 모양 하르르 하고 불무지가 허물어져내렸다. 《막봉아―》 태혁은 무작정 불속으로 뛰여들었다. 정지바닥은 도가니속 같았다. 웃방에서는 이글거리는 불길이 거대한 혀바닥처럼 뚫린 구멍마다 널름거리며 내뻗쳤다. 《금봉아― 은봉아―》 태혁은 이미 갈린 소리로 목터지게 부르며 웃방으로 한발을 들여놓았다. 그러자 정지간 중방곁에서 무엇인가 물큰하는것이 정갱이에 와닿았다. 탕! 탕! 바로 골목앞에서 정통으로 집을 향해 갈기는 놈들의 총소리가 울린다. 그러나 탄알은 어디에 박히는지 알수 없었다. 태혁은 그 모든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제꺽 무릎을 꿇고 손으로 더듬어보니 한 애가 다른 한 애를 업고 나오다가 쓰러져있었다. 아직은 업은 애가 누구고 업힌 애가 누군지 대중할길이 없었다. 척 늘어진 두 아이를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안고 일어서니 비로소 총알이 집안으로 마구 날아온다는것이 느껴졌다. 태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정지를 나와 아직 불이 달리지 않은 외양간옆벽을 힘껏 내찼다. 두어번 내차니 나갈만큼 구멍이 뚫렸는데 바깥벽에 세워놓은 나래가 또 불을 피워올리고있다. 그러나 다른데로는 바이 나갈길이 없다. 태혁은 등에 업은 아이마저 앞으로 돌려끼고 제 큰저고리자락에 감싸안은 다음 너울거리는 불속을 달려나갔다. 바깥에 나서니 또 불타는 집이 있었다. 그 추녀밑을 끼고도는 순간 《저기다! 저리로 뛴다!》하는 왜놈의 악다구니소리와 함께 또다시 총소리가 자지러졌다. 그러나 태혁은 이미 맞서서 싸울 손이 더는 없었다. 그는 될수록 몸을 낮추고 눈을 걷어차며 언덕쪽으로 뛰였다. 언덕을 달리는 동안은 위험하겠지만 거기만 넘어서면 다음은 산에 잇달려있고 나무와 바위가 있어서 훨씬 안전할것 같았다. 뒤에서 아득히 《순애야―》하고 부르는 녀인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혹 곽병철이네 아주머니가 아닐가? 그러고보면 이 애들중 하나는 순애일는지 모른다. 기척없이 품에 안긴채 늘어져있는것들이 과연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렇게 생각하고보니 한쪽은 계집애같고 한쪽은 사내애같다. 이 애가 순애라면 순애를 업고 나오다가 불을 맞고 쓰러진것은 은봉이나 철봉일것이다. 몸매의 크기로 보면 철봉이에 더 가까울것 같다. 한쪽 애가 꼼지락거린다. 손더듬으로 어깨어방을 더듬는것이 알린다. 살아있구나! 이런 환희의 웨침이 가슴가득이 차오르는 순간 태혁은 잔등에 쇠몽둥이가 쾅 내려치는것 같은 충격을 받고 언덕받이 꼭대기에서 모로 쓰러졌다. 밑은 내림받이였다. 한순간에 의식을 잃어버린 태혁은 역시 의식을 잃은 두 생명을 가슴에 꽉 그러안은채 눈우를 굴러내려갔다. 2
관동군사령관 명의로 된 총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유격대를 최종적으로 《소탕》하기 위하여 보병, 포병, 기병, 경찰, 위만군, 자위단, 비행대 그밖에 무력이라고 이름지을수 있는 모든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향하여 진공하였다. 지금 현재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는 장백―림강도로부근 야산지대에 있다는것으로 통보되였다. 그리하여 곰의골 대밀림지경까지 오중흡련대를 따라갔던 혼마려단도 간삼봉방향으로 돌아서고 무송지경까지 8련대를 추격해갔던 무다구찌려단도 돌아섰다.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쨍하니 얼어붙은 하늘을 썰고다니며 유격대의 흔적을 찾았다. 왜놈 비행사들은 날개를 기우뚱거리며 천개밖으로 대가리를 내밀고 숲속을 살피다가 노루라도 껑충 뛰는 기미만 보이면 폭탄을 내려뜨렸다. 그렇게 해서 유격대들을 찾아내보자는것이였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숲속에서 노루 뛰는 흔적이나마 찾아내기가 헐치 않았다. 그러면 놈들은 폭탄대신 삐라뭉테기를 내던졌다. 사나운 겨울바람은 눈보라와 함께 그 삐라들을 사방으로 뿌러던졌다. 7도구골짜기를 따라 동북쪽으로 부후물등판을 끼고 들어가면 울창한 잣나무숲이 나타난다. 수백년을 묵은 이 잣나무숲은 천연의 숲으로서는 너무나 방정한 줄을 이루고있었고 또 그 첩첩한 년륜에 비해서는 너무나 배좁게 들어섰다. 여름이면 해빛 한점 새여들지 못하고 겨울이면 사나운 바람도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였다. 청봉이라 이름부르는 이 숲속은 지금 흰눈을 들써서 이름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외모를 하고있었다. 청봉의 밀림속에도 왜놈의 《투항권고문》이 여러장 날려왔다. 최남선이요, 김동환이요 하는 이를테면 개창자에 사람가죽을 해씌운것같은 《명사》들 30여명이 련명한 그 글쪼박에는 대세가 이미 결정되였다는것을 력설하고있었다. 일본제국은 《동양평화》와 《세계신질서》수립을 위한 《성전》을 착착 완수하고있고 만주국은 《5족협화》, 《왕도락토》의 리념에 따라 나날이 그 《웅자》를 세계우에 드러내고있는데 《무적황군》에 비하면 《창해일속》에 불과한 무력으로써 이에 저항한다는것은 시대착오적인 행동이라 그렇기때문에 이미 만주일판에 산재하던 반일무력들이 자취를 감추고있는 형편이라는것이였다. 그러한 까닭에 저네들은 하루바삐 총을 놓고 그리운 부모처자들이 기다리는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오기를 《동포애》의 심정으로 간절히 바란다고 떠벌이였다. 보초를 서고있던 리성림은 멀지 않은곳에 삐라 한장이 떨어지는것을 보았다. 털외투의 소매에 두팔을 잔뜩 끼고 그사이에 총을 그러안고 서있던 그는 몸이 떨려나고 끝없는 무료와 고독감에 시달리던차라 별생각없이 삐라가 떨어진곳으로 걸어나갔다. 하늘에서 날려올 때는 바로 코앞에서 떨어지는것 같았는데 정작 찾아가보니 근 1,000메터나 되였다. 흰 눈판에 삐라 두장이 겹쳐진채로 발칵발칵 뒤집히며 굴러가고있었다. 성림은 그것을 주어 한번 죽 훑어본 다음 코를 풀어 던져버렸다. 나머지 한장은 또 휴지로 쓸 료량으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코웃음을 탁 치고 돌아서기는 했으나 역시 속은 삐라를 읽기전과 같지 못했다. 어디선가 또 비행기소리가 우르르 하고 숲정수리를 울리였다. 성림은 긴장되여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총총한 잣숲에 가리워 하늘이라는것이 도무지 손바닥만하게 틔여있을뿐이였다.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손바닥만한 하늘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어수선한 기류는 충분히 느껴졌다. 그의 생각에는 이 청봉밀영이라는것이 결코 마음놓고 지낼만한 곳이 못되는것 같았다. 날마다 나타나는 비행기가 언젠가는 밀영의 흔적을 발견할것이였고 《토벌대》의 발자취도 차츰차츰 다가오는듯 하였다. 사흘전에는 《토벌대》의 한 부대가 어디서 들추어낸 산림대를 추격하여 불과 10리도 못되는곳을 지나갔다. 그리 크지 않은 접전이 있은듯 먼곳에서 총소리도 울려왔었다. 그 산림대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는지는 몰라도 그들 역시 이러한 밀영속에서 한겨울을 나자고 들어박혀있다가 그렇게 쫓긴것이 틀림없었다. 그날부터 밀영책임자 엄광호는 밀영의 모든 성원들이 자기 승인없이는 일체 밀영밖을 나다니지 못하게 단속하였고 보초소의 수를 늘이였다. 땔나무도 가까운곳에 구획을 정해놓고 거기서만 해오도록 하였다. 엄광호네가 남패자에서 오기전까지 밀영을 책임지고있었다는 손재연은 그지간 내내 몸이 좋지 않아서 모두 로약자들과 부상병들만 모인 밀영생활을 거의 방임상태에 내버려두고있었는데 그사이 김정숙동지께서 집행하시던 학습을 이제는 자기가 할수밖에 없다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학습을 집행하러 다녔다. 그들은 당장 적이 쳐들어올것처럼 부산을 피우고 돌아가지만 성림이 보기에 정작 《토벌대》가 달려든대도 별수가 있을것 같지 않았다. 그는 7도구치기에서 전투부대를 떨어져나온것을 이제 와서 후회하였다. 그때는 동상이 심했고 그 행군을 도저히 견딜것 같지 못해 지휘관들이 가라는대로 못견디는것처럼 하고 따라왔지만 막상 청봉에 도착하고보니 생각했던것과는 모든것이 달랐다. 우선 엄광호가 그닥 좋은 기분으로 맞아들이는것 같지 않았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하지만 밀영에 남아있는 식량도 집도 재봉대의 녀대원들과 부상병들이 들어오는바람에 대단히 어렵게 됐다는것을 말끝마다 비쳤다. 밀영은 녀성들을 위하여 반토굴식으로 대충 지었지만 약도 없다, 식량도 없다, 그러나 모두 극복하며 함께 견디여 나가야지 어찌겠는가 하는따위 말을 기회있을 때마다 늘어놓는데 그것은 어쩐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옹색하게 만들어놓았다. 《별난 사람이야, 리론수준이 높은 사람이 돼서 그러는지 난 암만해도 속을 모르겠어.》 제속을 감출줄 모르는 금숙은 오는 첫날 벌써 이런 말을 하였었다. 성림이는 다른 의미에서 엄광호를 만나는것이 달갑지 않았다. 《봄에 가서 보자고 했지. 뭐 동상을 당했으니 행군을 못하게 된것은 하는수 없다 치고 청봉의 겨울도 그리 헐치는 않을거요.》 도착한 이튿날 단둘이 만났을 때 엄광호는 위로하는조로 히죽이 웃음을 지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성림은 얼굴만 붉혔을뿐 한마디 대답도 못했다. 그대신 속으로는 밸이 울컥하였다. 동무가 그 눈속을 한번 걸어봐라, 눈속에 묻혀서 동상을 입는거야 생리적인 현상이 아닌가, 내가 특별히 각오정도가 낮아서 그런것이 아니라는것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이 밀영에 몇달째 누워있다는 유명한 전투원들이 일부러 적탄을 맞은것이 아니라는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속으로 항변하였지만 역시 엄광호의 동정하는듯 한 그 애매한 웃음은 보고싶지 않았다. 이러한 감정을 가진것은 비단 성림이 한사람만도 아닌것 같았다. 엄광호가 그닥 좋은 기분으로 대하지 않는다는것을 금숙이가 말했을 때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를 엄하게 나무라시면서 밀영의 질서를 모범적으로 지키고 책임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타일렀다. 사실 엄광호의 말은 외관상 대범하고 서글서글하였으며 걱정을 한다는것도 롱조에 훌 얼버무려넘기기때문에 흠잡을데라고 별로 없었다. 그런데 김정숙동지께서 학습을 해야겠다고 손재연이에게 제기하시고 그것이 엄광호에게도 알려져서 처음으로 감정이 조금씩 얽혀들기 시작하였다. 태반이 부상병인데다 적극적인 치료를 해줄 마련도 없어서 억지로 신음소리를 씹어삼키고있는 형편에 무슨 일과를 요구하며 학습은 또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그들이 말했을 때 김정숙동지께서는 크게 엇서지 않았다. 정 심하게 앓는 동무들은 그냥 두더라도 재봉대에서만은 학습을 하겠다고 하시였다. 그러면 재봉대의 학습에 남자들도 성한 사람들은 참가시키자고 락착을 지었다. 그래서 재봉대 병실에서 학습을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손재연이가 아직 앓아누워있을 때라 김정숙동지께서 강사로 출연하시였다. 리성림은 학습회에 몇번 참가해보고 은근히 놀랐다. 그가 보기에는 김정숙동지께서 유명한 정치공작원이기는 해도 퍽 소박하고 아름다운 녀자였지 리론수준이 굉장히 높은 사람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학습회를 끌고가시는것을 보니 누구나 알아들을수 있는 쉬운 말을 하는데도 딱딱 사개가 물려드는것이 리론수준이 보통 높지 않다는것이 첫눈에 알려졌다. 그래서 학습회가 여간 재미있지 않았다. 그러던것이 손재연이가 정식 학습강사로 나타나고 여기에 엄광호까지 끼여드는바람에 자주 론쟁이 붙었다. 교재로 취급하는 김일성동지의 로작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마당거우밀영학습 때부터 공부해온 녀대원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내용이였다. 그런데 엄광호는 번마다 어느 고전의 명제를 끌어대여 무정부주의가 어떻고 청산파가 어떻고 하면서 곁가지를 쳐놓는가 하면 통일전선문제는 전술문제로 보는것이 맑스―레닌주의자들의 원칙적립장이다하는 따위 말을 해서 물의를 불러일으키군하였다. 손재연이라는 사람은 원래 중대장까지 지내다가 부상을 당하여 밀영에 온 사람인데 벌써 1년반을 누워있다보니 그사이 적잖게 정세발전에 어두워진데다가 엄광호가 김일성동지로부터 직접 과업을 받고왔고 자기보다 급이 높은 간부라는데서 적지 않게 그의 권위에 추종하는 눈치였다. 그러다나니 엄광호의 토론에 의견을 품고있던 사람들은 학습강사가 번마다 엄광호의 의견에 따라 결론을 짓는것을 보고 뒤에서 쑥덕거리군하였다. 얼마전에는 뜻밖에도 성림이자신이 옥금이와 론쟁을 하게 되였다. 그때도 통일전선문제를 가지고 토론하였는데 종교인들과의 사업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대목에서 옥금이가 매우 과격한 토론을 하였다. 종교는 아편이며 오늘 민족주의의 탈을 쓰고있던 많은 종교인들이 그 본색을 드러내여 왜놈의 개로 전락되고있다고 몹시 감정을 가지고 규탄하면서 종교의 위선의 가면을 무자비하게 까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림은 그것이 김일성장군님의 사상과 잘 맞지 않는다고 보았기때문에 종교자체와 종교인에 대한 문제는 구별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엄광호가 그 말을 받아서 소부르죠아들의 과격한 리론은 그 흔들리는 계급적토대의 반영이라고 말하였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딱히 몰랐지만 어쨌든 옥금이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후에 알고보니 옥금이는 삼촌이 목사였다. 그때문에 그는 근거지시기에 《민생단》으로 몰리여 하마트면 처단당할번하다가 김일성동지께서 다홍왜와 요영구 회의에서 반《민생단》투쟁을 바로잡아주신 다음에야 구원된 사람이였다. 요즘은 또 재봉대에서 군복을 짓겠다고 나서서 새로운 말썽이 생겨났다. 지난해까지 이 밀영을 건설한 군수처일군들은 감자농사를 잘 지어놓았을뿐아니라 적지 않은 천까지 마련해놓고 사령부의 소환에 따라 부대로 떠나갔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오는 봄에 부대가 조국으로 진군하기 위해서는 여름군복을 지금부터 마련해놓아야 한다고 하면서 천을 내줄것을 제기하였다.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천이 모자라겠으니 지방조직에 나가 부족되는 천도 해결할겸 사령관동지께서 지시하신대로 파괴된 지방조직들을 수습하고 정치사업도 활발히 벌려나가야겠다고 제기하시였다. 그러나 그 제기는 단호히 거부당하였다. 밀영에 있는 천은 일부 내주겠지만 오는 봄에 무엇이 어떻게 되겠는지 알고 귀한 천을 다 소비하겠는가, 그것도 그것이려니와 지금 형편에서 조직을 수습하러 지방에 나간다는것은 절대로 허용할수 없다는것이였다. 그 문제는 그날저녁 학습토론에서 복잡하고 첨예한 론쟁을 불러일으켰다. 김정숙동지께서 천문제때문에 엄광호를 찾아가셨을 때 겨우 광목 몇끝을 내주고 모든 제기를 밀막아버린데 대해 격분한 옥금이가 들고일어났다. 《동무들,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를 이 안전한 밀영으로 들여보내시면서 그저 한가히 놀라고 보내신것이 아닙니다. 부상당한 동무들은 상처를 하루빨리 고치고 모든 동무들이 정치사상적으로 더 튼튼히 무장해서 다가오는 춘기대공세에 부대와 함께 조국으로 진군하도록 준비할 과업이 나서고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귀중한 식량만 축내고있겠습니까? 지금 전투부대동무들은 우리 혁명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정말 말할수 없는 고생을 하고있어요.》 옥금은 격하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방안은 몹시 긴장되였다. 그때 엄광호가 탁한 기침을 깇더니 웅글게 말하였다. 《그러게 앓는 동무들까지 이렇게 학습이랑 하지 않소. 너무 그러지 마오.》 엄광호의 말은 성림이에게도 이상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몹시 건드렸으리라는것은 능히 짐작할만 한것이였다. 그래 성림이가 긴장되여 방안을 둘러보니 아니나다를가 금숙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엄광호를 쏘아보고있었다. 《아닙니다.》 하고 옥금이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동무들은 장군님을 모시고 조국으로 나가기 위하여 허리를 치는 눈속을 굶다싶이하면서 수십만의 적을 달고 싸워나가고있어요. 그런 전우들을 우리가 만났을 때 우리가 지금같이 살아가지고는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남패자회의에서 군사활동을 더욱 강화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치공작을 활발히 벌려 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주고 혁명투쟁에 더욱 용감하게 떨쳐나서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무엇때문에 지방공작에 나갈수 없다는것입니까. 우리가 지방조직과 련계를 맺고 천을 해결하여 새 군복을 지었다가 겨우내 고생한 전우들에게 갈아입히여 산뜻한 새옷차림으로 조국에 나간다면 조국인민들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리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우리가 7도구를 떠나올 때 우리 동무들의 옷은 모두 판이 나서 이 엄동설한에 생살을 드러내놓고있었어요.》 옥금의 말은 사람들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그것이 낮에 김정숙동지께서 하신 제기의 계속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할 때 엄광호는 기분이 나빴다. 그는 다시 탁한 목소리로 두어번 큰기침을 깇었다. 그러자 학습강사 손재연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동무, 지금은 학습회요. 그런 실무적인 문제는 회의때나 혹은 개별적으로 제기하고 지금은 리론문제를 풀란 말이요. 동무는 오늘의 국제국내정세의 특징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오?》 옥금은 불의의 질문을 받고 얼떨떨해서 잠시 입을 다물고 서있었다. 엄광호가 껄껄 웃으며 혼자 중얼거리듯 한마디 하였다. 《세련이 부족하니 그럴수도 있지요. 사실 오늘 혁명정세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확하게 푼다는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요. 동무, 모르겠으면 그렇게 서있지 말고 앉소. 물론 옥금동무가 말하는것도 일리는 있단 말이요.》 그때 금숙이가 창끝처럼 날카롭게 일어섰다. 《전 옥금동지가 말하는것이 어째서 학습회에서 말해서는 안될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학습은 김일성장군님께서 밝히신 전략전술을 잘 연구해서 그것을 실천할 대책을 정확히 세우기 위한것이 아닙니까? 사실 옥금언니… 저 옥금동지가 말한것은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업을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대책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밀영의 간부들은 괜히 까박이나 붙이고…》 《동무,동무.》 엄광호가 틀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금숙의 말을 누르고나섰다. 《동무, 정 그렇다면 계선을 똑똑히 갈라놓고 말해야겠소. 이것은 무슨 흥정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학습회요. 그러니까 동무가 말한대로 우리 학습회는 김일성동지의 전략전술을 연구하고 그것을 관철할 제 대책을 강구 수립하는것이라고 합시다. 그런 관점에서 례를 들어 동무들이 거듭 집요하게 제기하는 천문제를 두고 말해보잔말이요. 그래 동무들은 우리 방면군의 군복을 해결할데 대한 과업을 사령관동지로부터 받고왔단말이요?》 엄광호의 질문에 금숙은 말문이 막히고말았다. 사실 성림이도 아는바이지만 사령관동지께서는 재봉대의 녀동무들과 허약자들을 청봉으로 보내시면서 그들이 전투부대를 떨어져서 고생을 할가봐 더 많이 심려하시였고 가는 도중에라도 무슨 일이 있을세라 거듭 걱정하시면서 비상식량을 있는대로 다 모아 지워보내시기까지 하시였다. 학습과 치료를 잘할데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정 곤난하면 지방인민들과 관계를 가지고 애로를 풀며 조직이 파괴된 경우에는 가는곳마다에서 조직을 일으켜세우고 인민에게 의거해서 싸워나가야 한다고 당부하시였다. 대오를 책임지고 오신 김정숙동지께서 따로 무슨 과업을 받았는지는 모르나 지금 재봉대원들이 군복을 짓겠다고 나선것은 사령관동지를 다소라도 기쁘게 해드리고 조국으로 나갈 때 새옷을 갈아입은 전우들을 보고싶다는 녀대원들의 갸륵한 심정에서 출발한것이였다. 그날 김정숙동지께서는 웬일인지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계시였다. 녀대원들은 모두 자기들의 정성이 짓밟힌것만 같아 숨을 할딱거렸으나 모두 김정숙동지를 바라볼뿐 더는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엄광호는 다시한번 껄껄 웃더니 천천히 일어나서 훈시조로 말하였다. 《에―일반적으로 말해서 혁명의 전략전술과 그 과업은 당대사회의 계급호상관계와 조성된 정세에 의존되는것입니다. 우리가 삼천리금수강산을 해방하고 또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여기 일부 동무들이 말하는것처럼 몇개의 지방에 조직을 꾸리고 새 군복을 지어입고 조국땅으로 나가고싶다는것이 아무리 열렬한 희망이라 하더라도 몇몇사람들이 주관적으로 그것을 희망하는가 안하는가에 따라 그런것이 해결되는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 혁명은 준엄한 시련의 시기에 놓여있습니다. 이것은 김일성동지께서도 명백히 지적하신바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혁명은 1936~7년도의 고조기로부터 점차 퇴조기에 들어섰습니다. 이것은 주로 강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야망이 전례없이 커지고 그 성격이 가일층 야수화된데 원인이 있습니다. 이러한 혁명의 퇴조기는 그에 상응한 전략전술과 과업을 우리앞에 제기하는것입니다. 어험, 어험.》 엄광호는 이쯤 말하고나서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퇴조기라는것은 말하자면 우리 혁명이 내림받이에 들어섰다 그말입니까?》 김정숙동지께서 앉은채로 조용히 물었다. 그것은 그날의 분위기나 엄광호의 어마어마한 말투에 비추어볼 때 뜻밖이리만큼 침착하고 생활적인 말투여서 오히려 듣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엄광호자신에게는 뜻밖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된타격으로 된듯싶었다. 그러기에 그는 방금까지 틀스럽게 굴던 몸가짐이 적지 않게 허물어져서 허둥거리는것이 눈에 알렸다. 《내림받이라기보다도… 이런 리론문제에서는 그러한 범박한 일반용어가 잘 들어맞지 않지요. 례를 들면 레닌의 ,일보 전진 이보 퇴각〉을 두고 봅시다. 우리가 1936~7년에 1보 전진했다면 지금은 2보 퇴각을 하는 그런 전술적단계에 처했다고 보는것입니다.》 그럭저럭하다나니 그날 학습회는 시간도 오래 끌고 또 문제가 너무 복잡하게 엉켜들어서 손재연은 똑똑한 결론을 짓지 않은채 끝내버리고말았다. 그러나 그 학습회를 계기로 밀영에서는 두가지 서로 다른 견해와 립장이 정면으로 대결된듯 한 느낌을 주었다. 그날부터 엄광호는 자꾸만 성림을 꼬드겼다. 동무만한 리론적준비가 있는 동무가 이런 때 침묵을 지켜서야 되겠는가, 모르는 동무들을 깨우치는것은 혁명가의 의무다. 이런 식으로 부추기기도 하고 소부르죠아란 기회주의울타리를 벗어나기 힘드는것이라고 까박을 붙이기도 하였다. 엄광호가 그러는데는 까닭이 있었다. 원래 밀영에는 십여명의 부상병들과 환자들이 있었지만 엄광호나 손재연은 그저 《경각성》《경각성》하고 조심할것만 당부했지 그들의 치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김정숙동지께서 오시여 팔을 부르걷고 나서시였다. 그이께서는 입맛을 더친 환자들을 위하여 잣죽을 끓여먹였고 초약들을 구해서 부상병들을 치료하시였다. 손재연이자신이 그런 잣죽을 먹고 얼마간 몸을 추세웠다. 4사에서 온 한 아바이와 철구아주머니에게는 꼭 웅담이나 저담 같은것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김정숙동지께서는 몇번 약을 구하러 가시겠다고 나섰다가 거절당하시였다. 그런것을 다 아는 기왕의 밀영성원들은 모두 엄광호의 처사에 의견을 품고있었다. 그 눈치를 챈 엄광호가 한사람이라도 자기 주위에 끌어붙이자고 그런 소리를 한다는것을 성림은 모르지 않았다. 이래저래 성림이는 심정이 복잡하였다. 오늘은 이른아침부터 비행기가 돌아치는데다 더러운 수작을 늘어놓은 삐라까지 읽고보니 갑절이나 마음이 산란하였다. 그는 팔장을 끼고 찬바람을 피하느라 게걸음을 치면서 자기 위치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다가 무엇이 발에 걸채서 허공 눈우에 나가번져졌다. 한순간에 몸이 눈구뎅이에 절반나마 묻히고말았다. 한참 눈속에 묻힌채 누워있었다. 무엇때문엔지 와짝 짜증이 나면서 일어날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양으로 오래누워있을수는 없었다. 우선 털모자짬으로 눈이 스며들어 목덜미가 얼얼해났다. 눈을 털며 일어나서 발에 걸채인 물건을 돌아보니 무엇인가 두두룩한것이 누워있다. 누가 나무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라고 생각한 성림은 별생각없이 한번 툭 걷어찼다. 수북이 쌓인 눈무지가 허물어지면서 발끝에 푹신한 촉감이 느껴졌다. 이상한 생각이 든 성림은 다시한번 눈을 걷어찼다. 그리고는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검은 털외투가 뭉그러져있다. 아니 털외투가 뭉그러진것이 아니라 검은 털외투를 입은 사람이 쓰러져있는것이다. 성림은 머리끝이 쭈빗해지는것을 느끼며 무의식중에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것이 사람이 확실한 이상 똑똑히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눈을 헤치고 보니 마치 방금 자기가 걸어오던 모양 비슷하게 팔짱낀 소매사이에 구식보총을 그러안은채 꼬꾸라져서 그대로 얼어죽은 산림대였다. 외투주머니를 뒤져보니 투전장이 나왔다. 꽁꽁 얼어서 잘 펴지지 않는 사지를 억지로 제끼고 얼굴을 들여다보니 새까맣게 언채로 굳어져서 어딘가 얼음우에 가죽을 해씌운듯 번들거리는데 눈만은 감지 못하여 숨지기직전의 끝없는 절망과 정신적허탈상태를 너무나 생동하게 드러내고있었다. 성림은 사흘전에 《토벌대》에게 쫓겨서 튕겨달아난 산림대가운데 한사람이 어둠속에 길을 잘못들어 혼자 헤매다가 이렇게 얼어죽었다는것을 긴 추리없이도 제깍 머리속에 그릴수 있었다. 그렇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절로 다리가 떨려났다. 사람이란 이렇게 허망하게 죽기도 하는구나 하는생각, 만일 자기가 보지 않았다면 이 주검은 이대로 눈속에 묻혀있다가 봄과 함께 흙으로 변했으리라는 련상이 연줄연줄 떠오르면서 저 역시 이러한 주검으로 변할번했던 지난 행군길이 선명히 그려지는것이였다. 성림은 아무 까닭도 없이 떨려나는 다리를 접고 주검앞에 앉았다. 공허와 절망이 너무나 생동한 그 눈이 보고싶지 않아 감겨보려 하였지만 그것은 이미 사람의 눈가죽이 아니라 얼음으로 변해있어서 말을 듣지 않았다. 눈가루가 불룩하게 들어가 쌓인 털외투의 자락을 털어 여며주고 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여 얼굴을 덮었다. 바람이 손수건을 날리기때문에 총을 가슴우에 올려놓고 그 끝으로 손수건을 지질렀다. 그 을씨년스러운 표정이 가리워지니 다소 머리속이 침착해지는듯 하였다. 아무튼 밀영에 알려야 한다. 주검을 묻어주기도 해야겠지만 밀영주변에 이러한 정황이 있었다는것도 모두 알고있어야 할것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성림은 남에게 알리고싶지 않는 그 무엇이 제 가슴속에 싹트는것을 느꼈다. 그것이 동요라는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소스라쳐 사위를 살폈다. 고개를 드는데 마침 보초소부근에서 사람들이 얼씬거렸다. 자기를 찾는 눈치같다. 그러나 성림은 지금 저자신이 체험하고있는 놀라운 충격때문에 의례 그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달려올것으로 생각하였다. 아니나다를가 소리도 치지 않았는데 그쪽에서 한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온다. 이쪽저쪽 살피며 분주히 틀스럽게 걸어오는 모양이 보지 않아도 엄광호였다. 다른 두 사람은 무엇때문인지 저쪽으로 멀어져간다. 《여기 있습니다.》 성림은 그가 자기를 찾는다는것을 느끼고 퍽 가까이 왔을 때 가만히 말했다. 엄광호는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대뜸 권총집에 손을 가져갔다. 그제야 성림은 긴장되여 벌떡 일어났다. 《여기 사람이 죽었습니다.》 성림은 당황하여 이렇게 말하며 엄광호를 향해 몇걸음 뛰여갔다. 엄광호는 엄격한 표정으로 말없이 다가왔다. 《왜 이런데까지 왔소? 초소를 비워놓고…》 《저… 여기 사람이 죽었길래…》 성림은 특별히 꾸며대자는 생각도 없었지만 어망결에 이렇게 말해버렸다. 《사람이?》 엄광호는 의심쩍게 성림을 한참이나 흝어본 다음에야 눈우에 누운 주검을 내려다보았다. 《산림대로군, 그저께 쫓겨간 그 패들인 모양이군.》 《그런것 같습니다.》 《재미없소. 하여간 눈으로 우선 가리워놓소. 그런데 동무는 어떻게 여기까지 나왔소?》 엄광호는 다시 엄격한 표정으로 돌아가 성림을 똑바로 쏘아보며 물었다. 《그저… 하도 추워서… 서성거리다나니… 그러다가 이상하게 눈이 두두룩해서 나와보았습니다.》 엄광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성림의 눈을 지켜보기만 한다. 어쩐지 자기의 흔들리는 마음속을 꿰뚫어보는것만 같은 그 눈이 두려웠다. 《동무는 제자리에 가 서오. 경각성을 더 높여야겠소.》 성림이가 더는 엄광호의 눈힘에 이기지 못하여 고개를 숙이자 비로소 엄광호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물었다. 《그런데 김정숙동무를 못봤소?》 《못봤는데요.》 성림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쳐들었다. 《망태기로군. 보초는 10리씩 산보를 하지. 새벽에 나갔다는 사람은 학습시간이 다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지. 무슨 판인지 모르겠다니까…》 엄광호는 돌아서며 혼자 두덜거렸다. 《벌써 학습시간이 됐는가요? 그런데 정숙동무가 어디 갔습니까?》 《학습시간이 아직 멀었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이 없으니 문제아니요.》 엄광호는 돌아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저 강쪽으로 가지 않았을가요?》 성림은 엄광호의 성을 가라앉혀볼양으로 바삐 옆에 따라서며 말했다. 《김정숙동무는 새벽마다 일어나서 잣따러 다니군했습니다. 그래서 앓는 동무들에게 잣죽을 쑤어먹였지요. 그런데 이제는 이 아근에 잣이 다 없어졌다고 걱정하는것을 들었습니다. 저쪽 강비탈에 아직 잣나무가 남아있으니까 혹시…》 《닥치오! 지금 그따위 한가한 소리 하게 됐소? 눈앞에 송장을 두고도 이게 무슨 판인지 모르겠소?》 엄광호는 화가 나서 빽 돌아서더니 소리쳤다. 성림은 찔끔하여 멎어섰다. 이때 한방의 총소리가 얼어붙은 공기를 째며 울려왔다. 두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무기를 더듬어쥐고 총소리가 울려온 서북쪽 강가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야 다시는 다른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엄광호는 강가를 향하여 달려갔다. 3
곰은 눈구뎅이에 풀썩 주저앉는것 같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새까만 털속에 난 새까만 눈알이 불을 뿜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놈이 정통을 맞지 않았다는것을 깨닫자 잣나무뒤에서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오시였다. 곰은 김정숙동지을 발견하더니 으르릉 하고 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길다란 주둥이를 찢어질만큼 벌렸는데 그속에서 피를 머금은것처럼 시뻘건 입천장이 드러나고 새빨간 혀가 널름거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나무를 등지고 무릎을 꿇으시였다. 그놈이 달려들자면 몸을 일으킬것이다. 그 순간에 총알을 안기면 제아무리 우둔한놈이라도 견디지 못할것이다. 어찌다 눈벌에 기여나온 곰은 엄청나게 컸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꺼칠한 털과 비릿한 맹수의 냄새 그리고 사납게 벌린 시뻘건 입이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총신을 거쳐 목표를 겨누고계시는 김정숙동지의 눈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서늘하였다. 낭떠러지우에 외따로 서있는 잣나무들에 아직 잣송이들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고 어둑어둑한 새벽에 이 비탈로 올라오신 김정숙동지께서는 몇번이나 벼랑을 굴러떨어지면서 꽤 많은 잣을 따시였다. 그러다가 바로 이 나무우에 올라가서 휘청거리는 잣가지끝에 매달린 잣송이 하나를 마저 따려고 막대기를 뻗치는 순간 얼어붙은 개울바닥으로 으슬렁으슬렁 내려가는 곰을 발견하신것이였다. 《웅담!》 김정숙동지의 머리속에는 번개같이 이런 생각이 떠오르시였다. 지금 밀영에는 전문의사는 없었지만 홍두산전투때 다리를 부상당하여 지금껏 누워있는 7련대 4중대의 박아바이가 침깨나 놓을줄 알았다. 그는 채옥이의 눈도 철구아주머니와 4사 아바이의 부종도 웅담만 있으면 문제없다고 했다. 그밖에 전부터 밀영에 누워있는 사람가운데는 어혈이 진 사람들이 많은데 웅담이 그중 효험이 있다는 말을 하면서 입맛을 다셨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나무아래 두고온 총을 내려다보시였다. 그놈과의 거리는 100메터가량 되였다. 가만 내버려두면 그만한 거리를 두고 나무옆을 지나쳐 저쪽 벼랑밑으로 사라져갈것이였다. 혼자몸으로 서뿔리 총질을 했다가 혹 실수라도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총이 있는이상 그까짓 짐승쯤 문제가 없을것 같았다. 말끝마다 《조심》《조심》하는 엄광호의 말도 떠올랐다. 그러나 기껏해야 한두발의 총소리가 울리겠는데 이런 밀림속에서 그 총소리를 듣고 적이 나타날 때이면 총소리가 안난다한들 밀영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동지들을 하루빨리 추세워야 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다가오는 봄에 모두 건강한 몸으로 다시 만나 함께 조국으로 가자고 말씀하시였다. 지금은 웅담도 절실히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동무들도 아침저녁 감자와 강냉이만 먹다나니 앓는 동무들이 모두 기름기가 나날이 빠져간다. 곰을 잡기만 하면 실로 많은 문제가 풀릴수 있다. 사개맞지 않는 한두사람의 말때문에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수 없다고 생각하신 김정숙동지께서는 재빨리 아스라한 잣나무 우듬지에서 미끄러져 내려오셨다. 그런데 첫발이 목덜미어방에 가 맞았는지 짐승은 아래배쪽으로 피줄을 그으며 달려 올라온다. 비린내가 확 풍긴다. 맹수의 사나운 상통과 거칠은 입김이 얼굴에 와닿자 김정숙동지의 미간은 가볍게 찌프려졌다. 마침내 곰은 산이 허물어질듯이 으르릉 소리를 지르며 앞발을 번쩍 쳐들었다. 흰털이 듬숭듬숭한 앞가슴이 총구앞에 드러나는 순간 김정숙동지께서는 방아쇠를 당기시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날려 아름드리 잣나무밑둥뒤로 돌아서시였다. 곰은 다시한번 사납게 부르짖으며 앞발로 잣나무를 덮쳤다. 풍성한 나무가지에서 눈더미가 우수수 떨어졌다. 곰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곰의 두터운 발앞에 잣송이가 수북이 담긴 배낭이 놓여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이마에 내돋은 땀발을 손등으로 훔치고나서 배낭을 끌어당겨 어깨에 메시였다. 곰을 어찔것인가? 죽어늘어진것을 보니 웬만한 암소만하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끌어갈것 같지 못하셨다. 문득 동쪽을 바라보시니 해가 꽤 높이 솟아올랐다. 학습시간이 멀지 않았다는것을 깨달으신 김정숙동지께서는 곰을 그대로 두고 눈을 퍼덮으시였다. 눈속에 감추어두었다가 후에 가져갈 생각이였다. 그런데 우르르 동무들이 달려올라왔다. 곰을 보자 모두 환성을 질렀다. 너무나 좋아서 껑충껑충 뛰는 동무들까지 있었다. 엄광호만이 뒤전에서 네발을 묶이우고있는 곰을 쓰거운 표정으로 기웃이 넘겨다보았다. 곰을 잡았다는것은 그에게도 좋았다. 그러나 그것을 김정숙동지께서 잡으셨다는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밀영에 돌아오자 오래간만에 기뻐서 돌아가는 동무들을 향하여 엄광호는 싸늘한 목소리로 리성림을 검토해봐야겠다고 하면서 보초를 교대시켰다. 한편 얼어죽은 산림대원의 주검을 매장하도록 하였다. 얼마간 있는 남자들은 태반이 부상병들이 아니면 환자들이라 녀자들이 나가서 언땅을 팠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는 몰라도 일제의 침략과 억압을 반대하다가 불행하게 죽은 사람이라 생각하니 동정심을 금할수 없으시였다. 그래 양지바른 산기슭을 골라 언땅을 깊숙이 파고 정성들여 묻었으며 후날 혹시 연고자가 찾아와도 알아볼수 있게 소지품을 함께 묻고 돌을 세워 표적을 만드시였다. 이날 학습회는 그럭저럭 하다나니 퍽 늦어서 시작되였다. 사람들의 가슴은 웬일인지 긴장되였다. 무엇인가 알수 없는 험악한 분위기가 처음부터 좁은 방안을 지지누르고있었다. 오늘 학습제목은 김일성동지의 로작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가운데서 그 넷째부분에 해당하는 우리 나라에 혁명적맑스―레닌주의당을 창건할데 대한 과업부분이였다. 《당창건의 조직사상적기초를 튼튼히 닦는데서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서 반드시 종파주의적경향을 극복하는것이 중요합니다.》 하고 엄광호는 방안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도 아마 이 문제를 강조하셨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 혁명대오에는 여전히 고질적인 종파주의의 잔재와 후과들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시오.》 하고 손재연이 번쩍 고개를 들고 말하였다. 이마우에 드리워있던 연한 머리칼이 뒤로 젖혀지면서 날카로운 눈빛이 엄광호를 겨누었다. 엄광호는 말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 혁명대오내에서 종파는 기본적으로 청산되였으나 민족개량주의자로, 정탐배로 전락된 옛종파분자들이 공산주의대렬을 내부로부터 와해하려고 갖은 책동을 다한다는데 대해서 지적하셨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사소한 종파적행동에 대해서도 혁명적경각성을 가지고 이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대오내에 그러한 경향이 있다면 이건 아주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동시에 즉시 극복해야 할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시오.》 손재연이 다시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것은 두사람이 꼭 짜고나온 말은 아니였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부터 끌려오는 감정의 굴곡이 있고 특히는 바로 어제 똑똑히 아퀴를 짓지 못한채 흐지부지해버린 론쟁의 여운이 있는만큼 무엇인가 의도가 느껴지는 말들이였다. 사실 엄광호로서는 일정한 의도가 있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는 재봉대원들이 청봉에 나타난 이래 자꾸만 꿀려드는 자기 립장을 추세워보려고 여러가지로 복잡한 궁리들을 하고있었다. 그는 남패자를 떠날 때 사령관동지로부터 회의의 결정을 정확히 침투시키고 밀영성원들에게 백절불굴의 혁명정신과 승리의 신심을 키워주어서 겨울동안 완강한 투쟁으로 모두 건강을 회복하여 다가오는 춘기공세에 대처하도록 하라는 간곡한 과업을 받았던것이다. 사실 남패자에서 겹겹이 포위한 적의 대군을 보고 놀랐으며 앞선 전투들에서 이미 적잖게 주눅이 들어버린 그는 자체의 힘으로 적의 대공세를 물리치고 혁명을 위기에서 구원하자는 회의의 결정을 리해할수 없었기때문에 방면군편성때 여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러한 과업을 받고보니 기쁘고 반가와 선뜻 그 과업을 접수하였었다. 그러나 정작 와보니 밀영의 형편이 무슨 정치사업을 벌릴만한 형편이 못되는데다 뜨뜻한 귀틀막에서 쩍쩍 갈라지는 감자를 구워먹으며 며칠 푹 쉬고나니 일시 조여맸던 마음의 탕개가 다시 풀리고말았다. 암담한 이해겨울의 표정이 을씨년스럽게 떠올랐고 밀림을 향하여 짓쳐 들어오는 일제군대의 군화소리가 비단이부자리에서 맑스의 책을 읽고 감격해버린 그의 두텁지 못한 흉벽을 짓밟아뭉개버릴것만 같은 환영을 불러왔다. 그는 밀영성원들의 요구에 따라 남패자회의소식을 전하기는 하였으나 회의에서 취해진 조직적대책만을 개략적으로 전달하고 회의에서 천명된 원칙과 방침은 언급을 피하였다. 리해할수 없었던 회의정신을 정확하게 전달할수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도 그것이 두려웠다. 그는 혁명적경각성을 높여 이해겨울을 어떻게 하든지 무사히 지내자는것이 마치 남패자회의방침인듯이 설명했고 그때까지 밀영을 책임지고있던 손재연에게는 쉬쉬 하면서 꿈쩍했다가는 마지막이다, 온 만주땅에 왜놈 《토벌대》가 널렸다, 항일련군부대들은 벌써 태반 멸살되고 남아있는것은 조선인민혁명군뿐인데 이해 겨울을 나는가 못나는가 하는것이 문제다, 그러니 아무도 옴짝달싹 못하게 해야 한다, 지금 왜놈들은 넓은 만주벌판을 빗으로 훑듯이 뒤지겠다고 그래서 《비류식토벌》이라는 문자까지 내놓았다, 이런 식으로 귀띔해주었다. 손재연은 그렇게 무딘 사람도 아니였고 엄광호처럼 비단이부자리에서 맑스나 레닌의 이름을 외워가지고 혁명을 하러 나선 사람도 아니였지만 오래동안 누워있다나니 정치문제에 어두워질수밖에 없었다. 그는 엄광호의 말을 듣고 분하여 이를 갈았으나 지조를 굽히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를 하고는 모든 문제를 엄광호가 하자는대로 내맡겼다. 엄광호 역시 처음부터 혁명을 도피해보겠다는 꿍꿍이를 의식적으로 가지고있은것은 아니였다. 그저 지치고 거칠어진 몸을 푹 좀 쉬우고싶었고 불안스러운 이해겨울의 결말을 랭정히 살펴보고싶었다. 그런데 아무 예고도 없이 사령부 재봉대의 녀대원들과 로약자들이 김정숙동지의 인솔밑에 밀영에 도착하였다. 그때부터 코코에 말썽이 일어났다. 자기 말만 믿고 고분고분하던 사람들도 차츰 의심쩍은 눈초리를 돌리기 시작하였으며 첫째 남패자회의에서 천명하신 김일성동지의 새로운 방침을 정확히 알자고 캐고들었다. 엄광호는 차츰 앞뒤 맞지 않는 소리를 저도모르게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을 스스로 느낄수록 울화가 치받쳤다. 모든것은 김정숙동지를 비롯한 녀대원들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차츰 변해갔다. 어느덧 엄광호의 견해는 이해겨울이 만주에서의 유격투쟁의 마지막 겨울이라는데로 기울어져가고있었다. (사실 랭정히 생각해볼 때)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만주를 통채로 삼키고 중국대륙의 복판을 단숨에 흽쓸어버린 일제가 딴 일에 바빠서 본격적으로 손을 쓰지 않으니 유격대도 있고 지하조직도 있는것이지 올겨울처럼 마음을 먹고 모든 힘을 다 동원하면 어느 구석에서 유격대가 배길수 있단말인가.)이렇게 생각한 엄광호는 어떻게 하나 이 겨울을 무사히 나서 케를 보다가 국경을 넘어 쏘련쪽으로 뛰든지 정 뭣하면 어느 깊숙한 산골에 들어박혀 《토벌》바람이 잦기를 기다릴 심산이였다. 그런 그의 립장에서 볼 때 봄이 오면 당장 무슨 큰일이나 날것처럼 서둘러대는 김정숙동지이네와 그를 따라나선 적잖은 대원들의 생각이 너무나 철없어보였다. 더구나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지방공작을 나가겠다, 군복을 짓겠다 하고 떠드는가 하면 식량을 아껴먹자, 학습교재를 찍어낼 대책을 세우라 하는 요구를 날마다 들고나오는데는 골치가 아팠다. 그것을 눌러놓으면 무슨 반혁명분자취급을 하자고든다. 그는 애초에 녀대원들을 무슨 리론수준이 굉장히 높은 동무들로 생각지 않았었다. 고작해야 유격대에 입대하여 국문을 해득한 녀자들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중 김정숙동지가 좀 헐치 않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근거지 초시기나 그 이후 지방공작을 할 때 만나본 인상으로는 복잡한 리론문제를 가지고 론쟁을 할 대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었다. 그래 적당히 구슬리느라고 서뿔리 몇마디 말을 했더니 벌떼처럼 들고일어나는데 말끝마다 땅땅 여문것이 속을 띠끔띠끔하게 찔렀다. 엄광호는 비로소 자기 립장이 위태롭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녀대원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눌러놓을가 하고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 이미 옥금이가 반《민생단》투쟁시기에 중대한 혐의자로 몰린적이 있다는것을 알아냈고 금숙이가 자기 말과 손재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했다는 말도 여기저기서 들추어냈다. 문제는 김정숙동지이였다. 때마침 오늘아침은 기회가 좋다. 녀대원들이 산림대를 묻으러 나간 사이 성림이를 따로 불러 따졌더니 왜놈들의 삐라장을 내놓았다. 이렇게 놓고보면 김정숙동지께서 정해진 구획밖으로 나가 총을 쏘았다는것도 달리 해석을 가할 여지가 생기는것이다. 잣을 따서 중환자에게 잣죽을 끓여먹인다든가 생광스럽게 곰을 잡아왔다든가 하는 후광을 무자비하게 잡아벗기고 규률위반자로, 지어는 도피분자로 몰수 있다.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해도 어쨌든 옴짝달싹 못하게 눌러놓을수는 있을것 같았다. 김정숙동지만 눌러놓으면 다른 녀대원들은 저절로 수그러들것이였다. 엄광호는 학습강사가 요구하니 자기로서는 구체적인 자료를 들고싶은 생각이 별로 없지만 하는수없다는듯이 뜨직뜨직 일어났다. 《그야 그것을 꼭 종파행위로 찍어서 규정하겠는가 하는것은 문제지만 례를 들어 저 재봉대의 옥금동무나 금숙동무가 뒤에서 밀영간부들을 헐뜯는 행동이라든지 또 일부 녀대원들속에서 끼리끼리 싸고돌면서 원칙적인 비판의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것 같은 현상들을 나는 대단히 위험한 경향이라고 보는것입니다.》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는듯이 시작한 말이였으나 차츰 그의 눈에는 붉은 빛이 돌았고 입귀에는 가는 게거품이 배여나왔다. 그에 따라 목소리도 높아졌다. 《나는 물론 처음에는 이것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인 현상이라고 보았고 그래서 하나하나 개별적인 비판이나 충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먹어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례를 들면 어떤 동무가 지방공작을 나가겠다고 제기해옵니다. 나는 그가 혁명하겠다는 주관적 의도밑에 그런다고 좋게 생각하고 그가 수준관계상 잘 모르는 혁명의 전술문제를 장시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혁명이란 덮어놓고 앞으로 나가는것이 아니다, 정세가 불리할 때는 한걸음 나갔다가 두걸음 물러설수도 있는것이다, 그래서 레닌도 1보 전진 2보 퇴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고말입니다. 그런데 그 동무가 돌아가면 다음날은 엄광호가 남패자회의정신을 외곡한다, 그의 말은 김일성동지의 연설내용과 맞지 않는다 하는 말이 떠도는가 하면 이번에는 다른 동무가 나타나서 군복을 짓겠으니 천을 내놓아라, 밀영에 천이 없으면 지방에 나가 공작해오도록 하자 하고 제기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거듭될수록 나는 문제를 더 좀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어떤 개별적인 동무들의 개별적인 결함때문이 아니라 우리 혁명운동에 고질적으로 남아있는 분파주의경향이 여기에 끼여든것입니다. 보십시오.》 하고 엄광호는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키며 목청을 가다듬어 웨쳤다. 《재봉대녀성들과 한패가 되여 밀영에 들어온 리성림이라는자는 일제가 뿌린 삐라를 주어 읽고 도주하려고 기도하다가 나에게 들켰습니다. 그는 김정숙동무가 잣을 따러 간다는 미명하에 금지된 구획에까지 나갔지만 보초를 서면서도 그것을 보지 못했거나 고의적으로 융화묵과했습니다. 김정숙동무는 또 곰을 발견하였다는 구실을 대고 총을 쏘았습니다. 나는 그가 총을 쏘아서 우리 밀영을 로출시키고싶던차에 마침 곰이 그앞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 밀영에서 불과 1,000메터도 못되는 거리에서 산림대의 시체가 발견되였습니다. 왜놈들이 별로 주목도 하지 않는 산림대조차 쫓겨다니다가 얼어죽는 이판에 이와 같이 밀영의 질서를 파괴하고 혁명적경각성을 높일데 대한 밀영간부들의 말을 매번 까박을 붙이는 행동들이 모두 김정숙동무가 인솔해온 동무들가운데서 체계성을 띠고 나타날 때 이것을 단순한 현상이라고 나는 볼수가 없습니다.》 엄광호는 이와 같이 자기 말을 맺고 불손한 눈길로 방안을 한번 훑어본 다음 일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틀스럽게 천천히 앉았다. 아닌게아니라 그의 어마어마한 문제제기는 괜찮게 효과가 있는듯 하였다. 녀대원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으며 앓는다고 누워있던 철구아주머니와 채옥이도 슬그머니 일어나앉아 동무들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리성림이 도주하자고 한것이 사실일가 하고 그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중환자들을 격리시키던 외딴 병실에 따로 연금되여 반성문을 쓰고있었던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만이 여전히 침착하게 앉아 자기 학습장을 열심히 들여다보고계시였다. 《옳소.》 하고 손재연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엄광호동지의 토론은 우리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였소. 토론을 해도 이렇게 무게있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단말이요. 학습이라고 해서 빈말공부를 하는데가 아니란것을 알아야 하오. 자,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의견들을 말해보시오. 과연 우리 밀영에 종파주의적요소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큰 문제요.》 그는 담요 한장을 접어서 씌운 궤짝을 두드리며 방안을 훑어보았다. 《저는 의견을 말하기전에 질문을 하겠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용히 일어나서 말씀하시였다. 그의 눈빛은 평소의 그 서늘하던 눈빛과는 너무나 달랐다. 긴 살눈섭밑에서 똑바로 바라보는 그 눈은 조용한 말소리에도 불구하고 그이께서 어떤 결심을 품고 일어나시였는가 하는것을 너무나 잘 말해주고있었다. 《누구에게말이요? 나에게말이요? 혹은 엄광호동지에게말이요?》 하고 손재연은 처음부터 일부러 경박한 어조로 까다롭게 굴면서 되물었다. 《동지에게말입니다.》 《뭐 나에게?》 손재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되물었다. 그는 엄광호가 꼬드기니 큰소리는 탕탕 치고 어마어마하게 굴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결정적인 공격을 불의에 받고 태연히 마주바라볼만 한 배심은 없는 인간이였다. 《그래 뭐요? 물어보시오.》 그는 어망결에 이렇게 말하고 김정숙동지의 불을 뿜는 눈을 겨우 마주 바라보았다. 《동지는 지금 우리 혁명의 사령관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로작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있습니다. 그런데 한개 후방밀영의 책임자라는 사람을 비판한것이 무엇때문에 종파로 되는지 그것을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십시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 어느 대목에 안일해이하고 무책임하며 자기 사업을 태공하는 사람을 비판하는것이 종파적행위로 된다고 규정되여있습니까?》 《동무, 그거 무슨 소리요?》 손재연이 한쪽무릎을 일으켜세우며 부르짖었다. 그러자 엄광호가 벌떡 일어났다. 《동무들, 보란말이요. 이것이 종파적행동이 아니고 뭐요! 동무! 그래 손재연동무나 내가 안일해이한것이 무엇이요? 무책임하다는것은 또 뭐요? 도대체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거던. 동무의 오늘 행동은 그게 뭐요? 밀영안에서 총소리를 울리지 못하게 되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무는 고의적으로 총소리를 울렸지?》 엄광호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삿대질을 하며 나섰다. 그러자 손재연이도 자제력을 잃고 총알같이 내쏘았다. 《동무는 조직과 규률을 뭘로 알고 그렇게 함부로 야단이요. 이제 질문에 대답하오. 도대체 어디서 그따위 버릇을 배웠는지 모르겠거던.》 김정숙동지께서는 일어난채로 서있었다. 두사람이 한바탕 폭발적인 말을 퍼붓고 숨을 씩씩거리며 입을 다물자 비로소 김정숙동지께서는 말씀을 시작하시였다. 《동무들은 나에게 많은 말을 하였지만 결국 동무들이 옥금동무나 금숙동무 그리고 우리 밀영의 많은 대원들을 종파로 몰만 한 근거는 전혀 못가지고있으며 더구나 리성림동무를 잡아가둘 근거는 하나도 없다는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리성림동무가 보초소를 떠난 까닭을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주머니에서 왜놈의 삐라가 나왔다는것때문에 그를 잡아가둔다면 어째서 여기 앉아있는 엄광호동무나 손재연동무 그리고 많은 남성동무들은 잡아가두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동무들이 왜놈의 삐라를 주어서 담배를 말아피우는것을 자주 보아왔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그런 삐라를 가진 동무들이 모두 도망을 치기 위하여 삐라를 주었다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삐라에 있는것이 아니라 재봉대와 함께 온 동무들이 엄광호동무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이제 강사동무는 나에게 그러한 버릇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우리 혁명대렬의 통일과 단결을 파괴하는 행위와 비타협적으로 투쟁할데 대한 사상을 바로 지금 우리가 학습하고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 에서 배웠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종파분자들의 죄악을 력사적으로 푸시면서 특히 혁명대오를 말아먹은 많은 실례를 드시였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종파사대주의자들은 민족배타주의자들을 등에 업고 반〈민생단〉투쟁을 자기들의 종파적목적달성에 악용하여 수많은 우수한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을 희생시키고 혁명대오내에 리간과 반목, 불신임을 조성하여 대오의 통일단결을 약화시키는 엄중한 죄악적행동을 감행하였다고 하시면서 만약 그때 원칙적인 투쟁을 벌리지 않았더라면 공산주의운동이 어떻게 되겠는지 모를 엄중한 사태를 빚어냈을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와 같이 종파주의적행동과 원칙적으로 투쟁할데 대해 가르치시면서 우리 당원들과 인민혁명군전사들이 맑스―레닌주의와 조선혁명에 대한 로선, 전략전술로 무장하여 사상, 의지, 행동의 통일을 보장해야 한다고 간곡히 가르치시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밀영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먼저 김일성장군님으로부터 과업을 받고 이리로 떠나온 엄광호동무가 과연 비판받을만 한 근거가 없습니까? 나는 이리로 떠나올 때 김일성장군님으로부터 이곳 밀영성원들앞에 제기하신 과업을 들었습니다. 엄광호동무는 응당 남패자회의에서 천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새 방침을 침투시키고 부상당하여 누워있거나 앓고있는 동무들에게 우리 혁명의 새로운 전략전술과 승리의 신심을 넣어주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엄광호동무가 여기서 한것이 무엇입니까?》 김정숙동지의 눈길은 조용히 엄광호에게로 돌아갔다. 그에 따라 군중의 눈길도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언제나 언터구만 잡히면 반격할 차비로 고개를 쳐들고있던 엄광호는 당황하여 얼굴을 숙여버렸다. 《다음 엄광호동무는.》 하고 김정숙동지께서는 똑같이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피동에만 빠져있지 말고 지방혁명조직을 정리수습할데 대한 과업도 받았습니다. 후방밀영은 또 이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부상병들의 치료문제도, 식량문제도 해결할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엄광호동무는 밀영에 도착한 때로부터 단 한걸음도 밀영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동무, 사람을 무근거하게 헐뜯지 말란말이요. 적들이 코앞에서 설치고있는데 나가기를 어디로 나간단말이요.》 엄광호는 악을 쓰며 부르짖었다. 그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의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으시였다. 《그는 밀영생활자체도 정확하게 조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혁명가들이며 이곳에서 생활하는것도 모두 김일성장군님의 명령지시에 의한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바삐 건강을 회복하여 자기 대오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밀영에서의 생활은 안일하고 무질서하게 흘러갔을뿐 치료도 학습도 생활도 되는대로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엄광호동무의 과오는 허다합니다. 그는 우선 남패자회의에서 천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새로운 전략전술을 모르고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말끝마다 우리 혁명의 앞길에 대해 확신을 못가지고 동요하는 말들을 하고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동요하는 립장을 변명하기 위하여 레닌의 말을 끌어대기 좋아합니다. 오늘도 엄광호동무는 우리 혁명이 퇴조기에 들어섰다고 하면서 이러한 퇴조기에는 한걸음 나갔다가 두걸음 물러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레닌이 쓴 〈일보 전진 이보 퇴각〉의 내용이라고 몇번이나 강조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일보 전진 이보 퇴각〉의 내용에도 맞지 않으며 더구나 우리 혁명의 실정에는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해 겨울에 우리들이 두걸음 물러설것이 아니라 더욱 유격투쟁의 불길을 높이고 정치사업을 강화해서 우리 혁명을 한층 더 높은 단계에로 앙양시켜야 한다고 남패자회의에서 천명하셨습니다. 엄광호동무는 한때 국제당로선이라고 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그것을 곧 대사변의 도래로 보고 〈열하원정〉로선에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좌경모험주의로 나갔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동무가 오늘은 왜 갑자기 혁명의 퇴조기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는것입니까? 그리고 레닌의 〈일보 전진 이보 퇴각〉을 왜 자꾸만 끌어댑니까? 엄광호동무는 레닌의 책을 끌어대면 여기 모인 모든 동무들이 무조건 자기 말을 믿을줄 아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수 없습니다. 나는 엄광호동무가 그 책을 다시한번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물론 리론적수양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내가 김일성장군님으로부터 배운데 의하면 레닌은 〈일보 전진 이보 퇴각〉에서 한걸음 나갔다가 두걸음 물러서라고 한것이 아니라 멘쉐비크들의 기회주의로선에 타격을 주면서 맑스―레니주의당의 조직적기초를 밝혔습니다. 맑스―레닌주의당이 혁명을 승리에로 이끌고나가기 위해서는 당을 구락부화하려는 경향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하면서 모든 조직은 중앙에 복종하고 개인은 조직에 복종하며 하급조직은 상급조직에 복종하고 소수는 다수에 복종하는 강한 민주주의적중앙집권적규률을 확립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엄광호동무가 내세우기 좋아하는 〈일보 전진 이보 퇴각〉을 놓고 보아도 그는 대단히 위험한 사상상태에 있다고 봅니다. 청봉밀영은 응당 우리 혁명의 사령관이신 김일성동지께서 천명하신 로선과 전략전술에 충실해야 합니다. 또한 청봉밀영조직은 하급조직이고 지방조직인만큼 사령부의 명령지시를 무조건 철저히 집행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여기서 김일성장군님의 과업을 충실히 집행하자는것은 절대다수이며 그것을 반대하는것은 엄광호동무를 비롯하여 몇몇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직권을 악용하여 옳은 말을 하는 원칙적인 동무들을 누르려고 합니다. 엄광호동무는 자기의 이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밀영밖에서 벌어지고있는 정세를 과장하며 좁은 구획을 그어놓고 사람들을 얼씬못하게 강압합니다. 그럼 여기서 혁명의 원칙과 규률을 위반한것은 엄광호동무입니까? 아니면 아글타글 노력해서 다소나마 김일성장군님의 명령지시를 충실히 수행하고 오는 봄에 그이께 떳떳한 보고를 드리자는 재봉대의 녀대원들입니까?》 술렁대던 방안은 엄숙해졌다. 엄광호가 눈을 힐끔거리며 손재연과 눈을 맞추려고 애를 썼으나 손재연은 얼굴이 핼쑥해서 입술만 짓씹고있을뿐 딴 사람의 눈치를 살필 경황이 없었다. 《동무, 누구를 걸고들지 말고 제 할 말이나 하오.》 손재연은 잠시 침묵이 흐르자 이렇게 한마디 하였으나 이미 독기는 적잖이 죽어있었다. 그 역시 자기의 경솔한 언행이 어떤 어마어마한 결과를 빚어낼것만 같은 예감을 느꼈던것이다. 김정숙동지의 론박은 조용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사리정연하였으며 빈틈이 없었다. 힐끔 돌아보니 엄광호는 얼굴이 수수떡처럼 검붉게 질려서 숨만 씩씩거리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여전히 침착한 어조로 자기 말씀을 맺으시였다. 《오늘 우리는 우리 혁명대오의 통일단결을 강화할데 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사상을 배우고있습니다. 엄광호동무도 입으로는 통일단결에 대해 말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혁명대오의 통일단결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엄광호동무가 말하는것 같은 기회주의적이며 투항주의적인 주장에 맹종맹동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우리 혁명의 사령관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두리에 철통같이 뭉침으로써만 이루어지는것입니다. 동무들이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리해하고 해결하겠는지 그것은 동무들의 사상적각오정도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한걸음도 양보할수 없습니다. 동무들은 왜놈들이 살판치는 이 겨울이 끝없이 계속될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봄이 다가온다는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김일성장군님을 만나게 될것이며 그때면 모든 문제가 정확하게 해결될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책임있는 동무들이 제때에 자기의 사상적병집을 고치고 돌아서는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첨예한 정세의 반영인 청봉밀영에서의 사상투쟁은 이날 김정숙동지의 토론을 계기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엄광호의 사상적본질은 어느 정도 명백해진듯하였으나 생활은 복잡한것이여서 모든 일이 말과 같이 짝짝 갈라져나가는것은 아니였다. 손재연은 자기가 잘못하다가는 엄광호와 함께 기회주의의 무서운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기 쉽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더럭 무섬증이 난 그는 이날 학습회를 어물어물해서 넘기고말았다. 그렇지만 그후에도 그냥 묻어다니는 엄광호를 매정하게 잘라버릴수 없었으니 그는 이미 엄광호의 비원칙적인 처사에 너무나 깊이 발을 들이밀었던것이다. 그는 그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것을 생각하면서도 녀대원들 특히 김정숙동지의 입을 봉해야 한다고 우기는 엄광호의 말에 엉거주춤 따라다니였다. 두 중간에 끼여서 애매한 립장에 서있던 적지 않은 남대원들은 김정숙동지의 주위에 집결되였다. 그러나 조직에 매인 몸인 그들은 또 밀영책임자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점에서는 김정숙동지 역시 같은 립장이시였다. 사나운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깊으나 깊은 밀림속, 전세계가 전쟁의 불덩어리를 안고 몸부림쳐도 인적 하나 얼씬않는 태고의 밀림속에서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알길 없는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날카로운 싸움이 이렇게 벌어지고있었다. 4
《좀 휴식시키지 않겠습니까?》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오백룡을 돌아보시였다. 어쩐지 그이의 눈길에는 미안해하시는듯 한 기색이 어리여있었다. 《행군속도가 지내 빠른것 같습니다. 이제는 밀림지대에 들어왔으니 크게 덤빌것이 없지 않소.》 사령관동지께서는 앞을 막아서는 울창한 백설의 밀림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알았습니다.》 오백룡은 보고를 드리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사실 행군속도가 그닥 빠르다고 할만 한것은 없었다. 장백―림강 대도로부근 락수동어방에서 앞뒤에 달린 적을 쳐서 저희들끼리 싸움을 붙여놓고 밀림으로 들어온 첫날의 행군속도는 실로 초인적인것이였다. 그러나 밀림에 쏠렸던 적들이 거지반 야산지대로 내려갔다는것이 여러가지 징조로 나타난 나흘전부터 부대는 천천히 간삼봉방향으로 이동하고있었다. 적들의 동태도 살필겸 다시 기회를 봐서 적들을 밀림깊이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어제부터 자주 행군속도에 대해 걱정하신다. 어제 락수동을 비롯하여 일련의 큰길가 부락들에 대한 적의 야수적인 《토벌》이 있었다는 소식을 통신원이 가지고왔었다. 그때 사령관동지께서는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더니 모두 근심걱정에 싸여있는 동무들에게 확신성있게 말씀하시였다. 《인민들이 이 추위에 집을 잃고 가산을 불태웠으니 큰 고생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조직이 있으니 인명피해는 크게 없을것입니다. 일없습니다. 거기에는 한태혁동무가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한태혁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자주 재영이며 박인섭을 불러 그와 헤여지던 때 정황을 캐묻군하시였다. 그때부터 행군속도에 대해서 자주 걱정하시였다. 위태로운 싸움길에 떠나보내신 전사를 기다리시는 사령관동지의 심중을 생각할 때 오백룡은 시원히 제눈으로 백바위골 형편을 가보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그이께서 감추시려는 마음속을 무엄하게 간참하는것 같아 혼자 누를수밖에 없었다. 행군대오는 멎어섰다. 오백룡이 대렬중간으로 돌아오니 사령관동지께서는 커다란 진대통우에 걸터앉아 남쪽을 바라보시고계시였다. 여기는 룡간산맥과 장백산맥이 한데 어울리는 높은 고원지대였다. 아늑한 숲의 바다가 흰눈을 쓰고 동서남북으로 끝없이 뻗어나갔는데 특히 남쪽 시야가 환히 열려있었다. 재작년 여름 국경을 넘어온 함흥련대를 몰살시킨 간삼봉도 동남쪽 머지 않은곳에 있을터이지만 여기서는 자욱한 눈안개에 가리여 잘 보이지 않는다. 강봉수는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급히 대렬 후위쪽으로 달려가고 재영은 불을 피우고있다. 진대통 한끝에서는 상철이가 배낭을 뒤지다가 울상이 되여 이쪽을 돌아본다. 이제는 사령관동지께 올릴 식량마저 떨어진것이다. 백바위골에서 이동할 때 부피 큰 물자들은 눈속에 묻고 꽤 많은 쌀과 가루를 나누어지고 떠나왔지만 그때로부터 벌써 이레나 지났으니 부대에 량식이 남아있을리 없었다. 제가 먹을것을 제가 지고 전투를 하면서 하루에도 몇백리씩 눈속의 강행군을 해야 하는 유격대에서 아무리 해도 푼푼한 식량예비를 가지고 다닐수는 없다. 그러기에 유격대는 부단히 전투를 해야 하며 인민들과의 련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사령관동지께서는 늘 가르치고계신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이 장백―림강 깊은 밀림에 한벌 덮이다싶이한 적들을 평지로 따돌리기 위하여 은밀한 행군을 하고있는 조건에서는 달리 어찌는 방법이 없다. 오백룡은 나어린 전령병의 그렁한 눈길을 마주바라볼수가 없어 외면하였다. 《재영동무, 불은 두어두고 박인섭동무와 정지성동무를 불러오시오.》 《옛, 알았습니다.》 재영은 제몸에는 너무나 커보이는 태혁의 기관총을 진대통가에서 찾아들고 차렷자세를 취하더니 기관총분대와 비서처가 있는 후미쪽으로 달려갔다. 태혁의 기관총은 백바위골에서 철수할 때 림시 정지성에게 맡기였으나 그는 역시 비서처의 일이 아름차기때문에 태혁이가 돌아올 때까지 재영에게 돌려주도록 한것이였다. 《중대장동무, 이리 와 앉으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진대통에서 내려앉으시여 재영이 피우다 만 불을 손질하시며 말씀하시였다. 《암만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소. 우리가 백바위골을 떠난지 벌써 여드래째요. 한태혁동무의 걸음으로 이렇게 늦어진다는것은 생각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이께서는 아직도 저쪽에서 배낭을 뒤적거리고있는 상철이가 들을가봐 저어하시듯 목소리를 낮추시였다. 사실 그러한 불안을 오백룡이 느낀것은 닷새도 전부터였다. 그러나 그때는 사령관동지께서 아무일 없다, 한태혁이가 그쯤한 정황을 처리못할 사람이 아니다 하고 오히려 위안을 하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 한태혁의 신상에 대해 걱정하시는 눈치를 뚜렷이 느끼게 된것은 역시 락수동일대에 대한 전면적인 무차별《토벌》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어온 다음부터였다. 《나는 딴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동무가 인민들의 재난을 보고 참지 못하는 동무이기때문에… 글쎄 그거야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전사들의 누구나가 가지고있는 품성이기도 하지만… 어떨것 같습니까?》 《글쎄말입니다. 혹시 부대를 아직 못찾아서 어디 산속을 헤매고 있지나 않는지요…》 오백룡은 전혀 자신없는 말을 한마디 여쭈었다. 《아니요. 동무도 우리 태혁동무를 잘 알지 않소? 나는 필요하다면 비행기라도 잡아타고 찾아올 동무라고 생각하고있습니다. 오직 혁명의 리익만이 그 동무의 걸음을 지체시킬수 있을것입니다. 그럼 지금 정황하에서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한태혁동무가 저놈들에게 붙잡힌것이나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태혁이가 놈들에게 붙잡힌다는것을 상상이나 할수 있소?》 오백룡은 김일성동지의 말씀을 들을수록 이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더 절실하게 느끼였다. 사실 김일성동지께서 태혁이를 믿고 사랑하시는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것을 너무나 잘 아는 오백룡이였고 그자신 태혁이에게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잔소리를 하였지만 지금 당장 태혁이가 옆에 없고보니 어쩐지 빈 집에 들어선듯이 허전한 느낌을 받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한태혁이가 정말 이렇게 오래도록 부대에 돌아오지 않아서 사령관동지께 심려를 끼쳐드린적이란 단 한번도 없다. 엄벙덤벙하는 성미때문에 자주 비판도 받고 직접 김일성동지로부터 타이르심도 들었지만 언제나 싱글벙글하고 세상 모든 일이 쉽고 유쾌한것으로만 보고있는 그가 무엇에 걸리여 이렇게도 수많은 사람들의 애간장을 말린단말인가. 《내 그래서.》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은근히 오백룡의 눈치를 살피며 말씀하시였다. 《그때 함께 지방공작을 나갔던 박인섭동무와 정지성동무를 그쪽 방향으로 보내자는것입니다. 가서 그곳 조직들의 형편도 알아볼대로 알아보고… 또 정지성동무에게는 딴 사정도 있지 않소. 중대장동무 생각에는 어떻소?》 《참, 그것이 좋겠습니다.》 《생각하면 내가 너무 태혁동무를 믿은것이 그의 몸에 어떤 위험을 조성시키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그러나… 좌우간 사람을 보내봅시다.》 얼마후 박인섭과 정지성이 거의 동시에 사령관동지앞에 나타났다. 때마침 상철이 얼마간의 미시가루를 들고 그이 앞으로 주춤주춤 다가왔다. 《이것은 무어요? 미시가루요? 마침 잘됐소. 그런데 량이 좀 적구만, 이것밖에 없소?》 재영이 사령관동지께서 받아드신 미시가루와 상철의 표정을 살피더니 단호한 어조로 말씀드렸다. 《없습니다.》 《그럼 동무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상철이 선뜻 앞으로 나섰다. 《저기에 좀 남겨놓았습니다.》 《그래?》 그이께서는 지금 배낭속에 미시가루고 뭐고 아무런 식량도 남아있지 않다는것을 잘 알고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따로 좀 남겨놓았다는 상철의 말에 속는척하실수밖에 없었다. 《그럼 동무들은 강봉수동무랑 중대장동무와 함께 먼저 요기를 좀 해야겠소.》 아직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불리여온 박인섭이도 정지성이도 어떻게 처신했으면 좋을지 몰라 쭈밋거렸다. 《불곁에 나와 앉으시오. 많지 못한것이지만 조금씩이라도 들면 몸이 한결 풀릴수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사령관동지께서는 두사람앞으로 미시가루를 봉지채 밀어놓으시고 물주전자를 고깔불우에 올려놓으시였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소대에 돌아가면 식사가 있습니다.》 하고 박인섭이 앉자던 허리를 도로 일으키며 말하였으나 사령관동지께서는 그의 팔을 잡아 앉히시였다. 정지성은 벌써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엉거주춤 불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소대에 무엇이 있겠소? 식량형편을 내가 대충 압니다. 저 조진범동무의 얼굴을 보시오. 군수관이 저렇게 하고 앉았는데 어디에 식량이 있겠소?》 조진범은 상철이와 재영이가 마주앉아 따로 불을 피우고있는 진대나무끝에 아무렇게나 펄썩 주저앉아 멍하니 앞산을 바라보고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산우에는 또 눈을 담아부을 구름이 짙게 깔려있었지만 낟알 한톨 못가지고있는 군수관의 눈에 그 구름이 어떤 모양으로 비치겠는지 누구도 상상할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사코 미시가루를 들려고 하지 않았다. 군수관의 표정도 표정이지만 맹물을 끓이고있는 꼬마들의 모양을 눈앞에 보면서 그들이 사령관동지께 올린 그 미시가루에 차마 손을 댈수가 없었던것이다. 《내가 동무들의 심정을 몰라서 이것을 권하는것이 아닙니다.》 《사령관동지, 무슨 임무든지 주십시오. 어김없이 수행하겠습니다.》 두 전사는 한꺼번에 벌떡 일어났다. 스스로 인테리의 나약성을 아직 다 벗지 못했다고 생각해오던 정지성이도, 갓 입대하여 내내 어리어리해 돌아가던 박인섭이도 어느새 강한 용수철처럼 탄력있고 패기있는 유격대원이 되였다. 지난 두달여의 행군은 간고하였지만 그 내용의 풍만성은 실로 그 간고성과 정비례한다고 사령관동지께서는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며 두사람의 어깨를 다정히 쓸어보시였다. 너무도 옷이 험해졌다. 그속에서 만져지는 몸도 가슴아플만큼 여위였다. 그러나 눈구뎅이에 내굴리여도 능히 땅을 차고 일어날만 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한태혁동무를 찾아와야겠습니다. 한태혁동무에게 무슨 일이 생긴듯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태 부대를 못찾아올 동무가 아닙니다. 내 말을 알아듣겠소?》 《알겠습니다. 사실 저희들도 내내 한동무 걱정을 했습니다.》 하고 정지성이 피뜩 박인섭이쪽을 돌아보며 대답하였다. 《그럼 긴 설명이 필요없겠습니다. 지금 곧 떠나도록 하시오. 부대는 이 산을 중심으로 해서 사흘동안 기다리겠소. 그쯤 알고 행동계획을 면밀히 세워서 떠나도록 하시오. 내 생각에는 우선 놈들의 〈토벌〉이 있었던 지방으로 곧장 나가는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도중에 혹 단속에 걸리더라도〈토벌〉맞은 피난민으로 가장할수 있고 또 실지 피난민들을 만나 무슨 소식이라도 얻어듣기가 쉬울거요. 백바위골에는 직접 들어가지 않는것이 좋겠소. 정지성동무에게는 괴롭겠지만 당분간은 참고 그대신 그 장기덕이라는놈의 동태를 잘 알아보시오. 우리 혁명은 기어코 그놈을 용서치 않을거요.》 《알았습니다.》 두사람이 한꺼번에 대답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윽히 두사람을 바라보시더니 진대통우에서 전투가방과 함께 놓여있는 보꾸레미 하나를 집어드시였다. 《이것을 가져가시오. 혹시 한동무가 어떤 형편에 놓여있겠는지 모르겠는데 소용될지도 모릅니다. 전날 재영동무가 입고 왔던 농민복이요.》 《사령관동지.》 두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맺지 못하였다. 《어서 떠나시오. 날이 저물기전에 숲을 벗어나서 얼른 인가를 찾아내야 하오. 산을 벗어나서는 부대가 행군해온 길을 버려야 합니다. 놈들이 지금쯤은 우리가 야산지대에서 떠났다는것을 눈치챘을수도 있소.》 두사람은 울먹거리는 심정으로 사령관동지께 보고를 올리고 뜨겁게 잡아주시는 그이의 손에 두손으로 매달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들의 뒤모습이 나무그루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한자리에 서계시였다. 두 전사들이 떠나간 서남쪽 하늘아래서는 구름이 재빨리 달음박질치고있었다. 눈을 걷어가는것인지, 아니면 또 새 눈을 몰아오려는지… 5
자지러지는 총소리가운데 《엄마》하는 가냘픈 목소리와 흐느낌소리가 간신히 울리여왔다. 등으로 해서 겨드랑이로 빠져나간 관통상을 입고 언덕너머 눈무지로 굴러떨어졌던 태혁은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모든 감각기관은 다 의식을 잃었지만 의무감만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눈을 뜨고보니 동네의 불길은 한결 가라앉은듯 한데 총소리는 산쪽에서 울리여왔다. 아마 그쪽으로 피신한 인민들을 따라가서 쏘는 모양이였다. 태혁이가 몸을 뒤척거려 일어나려고 해보니 어느새 피가 얼어붙어 앞자락을 헤쳐놓았던 큰저고리가 몸에서 벗어져나갔다. 얼어붙은 저고리를 떼내여입기도 헐치 않았다. 그가 꿈지럭거리자 눈판을 엉금엉금 기여가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고 돌아본다. 분명 철봉이였다. 또 한 아이는 꽤 멀리까지 걸어가서 철봉이를 향해 돌아서있다. 번개같이 기억이 되살아났다. 철봉이가 불속에서 순애를 업고나오다가 허물어지는 서까래나 이영에 깔려서 넘어진듯하였는데 어딘가 상해서 정신을 차리고도 걸어갈 형편이 못되는 모양이다. 《얘들아, 순애야, 철봉아,》 태혁은 바싹 말라드는 입안을 억지로 추기고 다시 불렀다. 《너희들 날 모르겠니? 나 김일성장군님의 유격대다. 이리 오너라!》 《앗!》 아이들은 그제야 태혁을 알아보고 달려왔다. 희미한 불빛속에 아이들을 안고 살펴보니 순애는 머리카락과 저고리가 좀 불탔을뿐인데 철봉이는 아래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아이들은 태혁이가 자기들의 몸을 더듬어보는 동안에도 내내 겁질린 얼굴로 아직도 걸찍한 피가 배여나오는 그의 앞가슴과 겨드랑을 흘끔흘끔 살펴보고있었다. 태혁은 그제야 자기 몸이 험상궂게 변했다는것을 깨닫고 앞뒤로 손을 가져가보았다. 겉은 껑껑 얼어붙었는데 속에서는 그냥 피가 배여나온다. 손을 대기가 끔찍하였다. 등쪽은 그럭저럭 얼어붙은대로 피가 멎은듯도 하지만 겨드랑쪽은 펑하니 헤쳐진 창상이 너덜너덜한것이 도무지 기분이 나빠서 만질 재미가 없었다. 상처도 어지간해야 피를 멈추고 어쩌고 해보겠는데 들이밀면 주먹이라도 들어갈것 같은 구멍을 무슨 수로 틀어막는단말인가. 옆구리를 더듬어보니 어망결에 찔러넣은 권총이 그대로 있다. 태혁은 안주머니를 더듬어 우선 예비탄창을 갈아끼웠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얘, 어머니는 어디 갔니?》 《어머닌 방이 좁아서 아저씨네 집에 막봉이랑 또숙이랑 데리고 갔어요. 효숙이도 거기 있어요.》 철봉이가 근심에 싸여 불타는 동네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정은 인차 리해되였다. 친정집이라고 여덟―아니 아홉이나 되는 아이들을 끌고 들어갈 방이 있겠는가? 친정에도 올망졸망한 조카, 동생들이 수두룩하다는 말을 곽병철이에게 들었었다. 《그럼 금봉이와 은봉이는 어디로 갔니? 그리고 차숙이는?》 《갓난이랑 수동이랑 업고 뛰였어요. 할아버지는 수길이 안고 뛰다가 죽었어요.》 태혁은 멍하니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불길속을 헤쳐나올때 아이들을 애타게 부르던 녀인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는 몸을 움죽거려보았다. 천근같이 무겁다. 한태혁이 꼴이 왜 이 모양이 됐는가? 그는 몽당치마를 입고 눈우에 맨발로 서서 떠는 순애를 이윽히 바라보았다. 총소리는 그냥 산속에서 자지러진다. 아이들에게 부모를 찾아주어야 할것이지만 지금 이 마당에 부모를 찾아다니다가는 모두 목숨을 구하기가 어려울것 같다. 그는 털모자를 벗어 철봉이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리고 순애를 불러 목도리로 찬찬히 얼굴을 싸매였다. 피가 배여 꾸덩꾸덩 얼어붙은 제 큰저고리를 벗었다. 그것을 입히려드니 순애는 싫다고 꼼지락거렸으나 태혁이가 찬찬히 바라보니 가만 있었다. 태혁이 몸에도 훌렁훌렁한 그 큰저고리를 여섯살짜리 소녀에게 입혀놓으니 두루마기보다도 더 컸다. 그것이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아래자락으로 발등까지 묻히게 감아놓고 제 신의 감발을 풀어 칭칭 동였다. 철봉이에게는 신이 없는것이 문제였다. 하는수없이 발싸개를 풀어 대충 감아놓고 두 아이를 다 우묵진 비탈턱에 들어다 나란히 앉혔다. 《내 인차 돌아올게, 여기서 꼼짝 말아라. 왜놈들이 와도 소리치지 말고 고개를 푹 숙이고있어라. 너희들은 김일성장군님의 아동단원들이다. 알아들었느냐.》 《예.》 아이들은 비상한 시기에 알맞게 비상한 결의가 느껴지는 대답을 하였다. 태혁은 맨발에 맨머리를 하고 피흐르는 겨드랑을 한손으로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불타는 동네로 되돌아갔다. 동네는 감궂은 연기와 재티만 흽쓸어다닐뿐 인적이라군 없었다. 구새통굴뚝이 마지막 타고있는 어느 길가집에 오니 야웅하고 절반나마 털이 그슬린 고양이가 쏜살같이 골목을 누벼나갔다. 무엇에 의지하고있는지 용마루 하나가 허공에 걸려 불타고있었다. 버드나무 선 곽병철이네 처가집은 벌써 풀썩 무너져앉아 한무지의 재가 되고말았다. 수길이를 안고 나가다가 죽었다는 할아버지의 형체는 보이지도 않는다. 태혁은 기력이 진하는것을 느끼며 버드나무줄기에 의지하려고 손을 댔다가 흠칠하고 물러섰다. 버드나무는 선채로 숯이 되였다. 정수리에 있던 까치둥지는 잔가지채 어디로 흩날려버렸는지 꼭 큰 장승목신같은 강대 한그루가 서있을뿐이였다. 많이도 겪고 보아온 정경이지만 새삼스럽게 이가 갈리였다. 그러나 비분에 주저앉기에는 태혁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너무나 완강한 신경을 가진 인간이였다. 그는 잠시 숨을 톺자 재무지로 변한 집을 한바퀴 돌았다. 건져낼만 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까 빠져나오던 외양간도 산자와 함께 흙마저 불타버렸는지 풀썩 허물어져서 반쪽으로 켠 귀틀 몇대가 매운 내를 피워올리고있다. 굴뚝 개자리옆에서 푸실푸실 연기를 피우는것이 있어서 가보니 헌 빨래뭉치가 겉에 불이 달려서 아직 타고있다. 태혁은 그것을 끌어내여 녹아내린 흙물에 불을 껐다. 앞마당으로 돌아나오다가 생각하니 혹시 아이어머니가 돌아오더라도 일단 아이들이 살아있다는것만은 알려야겠기에 불타버린 버드나무아래 큼직하게 《철봉이와 순애는 살아있습니다.》 하고 새겨놓았다. 건질만 한것은 인명도 재산도 아무것도 없었다. 총소리는 아직도 산기슭쪽에서 울리는데 대체 거기서는 무슨 참극이 벌어졌을것인가. 조선인민혁명군전사가 여기에 살아있어가지고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서있어서야 무슨 혁명을 하겠는가?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제몸 하나도 가눌만 한 기력이 없었다. 그는 동네로 올 때보다 몇갑절 더 숨이 가빠져 언덕까지 돌아가는데 몇번이고 비칠거리며 넘어졌다. 언덕우에 서서 내려다보니 눈구뎅이에 옹송그리고 붙어앉아있던 아이들이 발딱 일어난다. 태혁은 마음이 급하여 미처 중심을 바로잡기도전에 달려내려가려다가 또다시 뒹굴어서 구뎅이까지 미끄러져내려갔다. 그래도 마주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니 반가왔다. 태혁은 히죽이 웃으며 앞가슴으로 새여든 눈을 털어내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이제는 떠나야 한다. 우선 총소리가 나는곳을 에돌아서 인민들이 피해간곳을 찾아 아이들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어야 할것이다. 태혁은 굴뚝밑에서 얻어온 타다 만 누데기를 펼쳐보았다. 걸레로도 쓸만 한것이 별로 없는 아이들이 입다가 다 쳐뜨린 바지가랭이가 하나 있고 역시 아이들의 솜저고리 앞섶이 하나 있었다. 나머지는 찢어서 끈으로나 쓸밖에 없다. 바지가랭이와 앞섶을 적당히 잘라서 두 아이의 발을 처맸다. 그리고 자신은 유격대의 속옷자락을 찢어서 겨드랑을 틀어막고 등때기로 해서 대충 한벌 동였으나 워낙 넓은 둘레를 한번 감아놓으니 피에 얼어붙은데만 남아있지 딴데는 그대로 흘러내렸다. 그러나저러나 이제는 찢어낼 천도 없으니 별수 없다. 동네의 불이 꺼지니 차츰 사위는 어두워진다. 총소리는 점점 멀어져가더니 끊어지고말았다. 이 밤중에 어디에 가서 아이들의 어머니를 찾겠는가. 한밤중의 강추위에 맨머리, 맨발로 펄럭거리는 저고리자락밑에 알몸을 드러낸 한태혁은 철봉이를 업고 순애를 안고 일어났다. 두아이 다 너무나 참혹한 형상에 차마 업힐 생각을 못하고 몸을 사렸으나 태혁은 엄하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아동단원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전같으면 눈깜짝할 사이에 넘어 설 산 하나를 1시간이상 걸려서 넘었다. 산등에 올라서니 몸에서는 식은땀이 비오듯하는데 그 식은땀만큼 맥이 빠져나가는지 산정을 울리며 지나는 바람에도 몸을 가누고 서있기가 힘들었다. 그믐달이 떠올랐다. 밤도 퍼그나 깊어진 모양이다. 이번에는 내림받이를 가야 하였다. 눈이 허리까지 친다. 등에 업힌 아이를 추스르면 앞의 아이가 눈속에 묻힌다. 젠장, 이 일을 어찐단말인가? 《얘 철봉아, 등을 타고 올라서 내 목에 걸터앉아라.》 철봉이는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어깨우에 올려대고 퍼렇게 얼어든 태혁의 얼굴에 귀를 갖다댔다. 커다란 털모자가 옆으로 돌아가고 따뜻한 아이의 볼이 터슬터슬 나무껍질처럼 튼 볼에 와닿자 태혁은 왜 그런지 가슴이 찌르르해지면서 눈굽에 물기가 핑 어리였다. 손이 하나 더 있어서 그 포근하고 정다운것을 꼭 끼여안아주지 못하는것이 서러웠다. 《철봉아, 우리 김일성장군님께 가자.》 《그래요?》 철봉이는 놀라서 두 팔로 태혁의 목을 꼭 죄여안고 물었다. 순애도 가슴에서 고개를 쳐들고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는 김일성장군님께 가나요?》 《그래, 저 총소리나던 고개옆에 가서 사람들을 찾아보고 가자. 그러니 철봉이는 내 목말을 타고가자. 너 무동 타봤니?》 《타보지 않구, 그런데 아저씨, 어떻게 견디나?》 《아저씨가 어떻게 견디다니? 빨리 어깨로 올라가라. 그리구 빨리 저 고개를 넘어서자.》 철봉이를 목말을 태워놓으니 한결 행동하기가 쉬운것 같았다. 그러나 태혁의 몸에서는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동상에 감각을 잃어버린 발은 공연히 비칠거리군하였고 팔에서도 맥이 빠져 아이를 떨구기도 하였다. 비칠거려 넘어질 때도 아이들이 다칠가봐 그게 언뜻 머리속에 떠올라 펄썩 정신을 가다듬군 하였다. 고개를 하나 넘고나니 동쪽하늘이 희붐히 밝아왔다. 총소리가 자지러지던 그 골짜기도 어디였는지 도무지 대중할수 없고 골짜기바닥에 새로 난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진것을 보면 여기에도 피난민들이 들어왔던 모양이나 지금은 찾을길이 없었다. 30~40호의 동네에서 뿔뿔이 흩어져간 사람들을 이 밤중에 어떻게 찾겠는가. 잘못 헤매여다니다가는 아이들을 얼굴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제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수 있을 동안에 어떻게나 아이들의 운명을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순애의 운명에 대해서 그처럼 근심하시던 사령관동지의 말씀이 아직도 귀전에 쟁쟁히 울리여왔다. 만일에 태혁에게 이것저것 구체적인 조건들을 따져보고 타산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면 아무리 그의 성미가 덜퉁하다 해도 간고한 행군길에 있는 사령부로 아이들을 데리고 갈 생각은 안했을것이다. 그러나 지금 태혁에게는 아이들의 미래를, 조선사람들의 모든 운명을 오직 김일성장군님께 의탁해야만 한다는 개념화된 한가지 결론만이 마지막 기력이 빠져나가는 머리속에 끝까지 남아있을뿐 다른 모든 생각은 이미 떠오르지 못하거나 어느 정도 죽어버린 상태에 있었다. 그는 순애의 볼에 단김을 덮씌우며 봉우리 하나를 또 넘었다. 태혁의 생각에는 처음 무남이에서 곽병철이와 헤여질 때 사령부로 가는 방향이라고 작정했던것이 어렴풋한 잠재의식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그 잠재의식에 따라 덮어놓고 앞으로 갔다. 그바람에 가깝고 쉽게 갈수 있는 길도 더 힘들게 걷기도 하였다. 자질구레한 잡념들이 심한 고열에 다 녹아없어지고보니 사령관동지의 품에 아이들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은 어찌나 외곬으로 뚫렸던지 바위도 벼랑도 키를 넘는 진대통도 곧바로만 넘어서려 하였다. 처음에 장군님께로 간다는 말을 듣고 좋아하던 아이들도 눈속에 넘어지고 쓰러지며 깊은 산속으로만 들어가는 태혁의 몸이 어떻다는것을 차츰 눈치채게 되였다. 그것이 자기들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 떠오를 나이는 아직 못되였지만 우선 무서웠다. 그러나 태혁의 형상이 너무나 진지하고 너무나 필사적이였기때문에 하나는 태혁의 목우에서, 하나는 골풀무처럼 들먹거리는 가슴우에서 불안한 눈길을 반짝거리고있을뿐이였다. 《…우리는 동기군정훈련을 조직하여 전체 대원들을 어떠한 적과 맞서도 맡겨진 전투임무를 훌륭히 수행할수 있고 어떤 어려운 정치공작임무도 능히 감당할수 있는 준비된 혁명가로 믿음직한 전투원으로 키워야 한다.》 마당거우밀영학습초기에 하신 김일성동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자기가 학습에 그닥 큰 열성을 내지 않은때문인지 오백룡중대장도, 강철룡소대장도 몇번이고 이 말씀을 곱씹어 전해주었다. 그런데 군정학습기간이 끝난지 오래고 이제는 정말 그 학습에서 배운 사상과 리론, 지식과 사격술로 제기된 모든 과업을 능숙히 수행해야 할 이 마당에 와서야 그 말씀이 이처럼 생동하게 떠오르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자기는 아직 임무를 끝내지 못했으며 공작도 그닥 잘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바로 그 말씀이 생각난것이다. 진대통이 가로누워 그의 판단이 옳다는듯이 하늘을 쳐다보고있다. 어디선가 노을빛이 흘러든다. 옆구리로 눈을 밀어제끼고보니 진대통의 굵기가 가슴노리까지 친다. 태혁은 동기군정훈련 때 성실히 배우지 못한것때문에 직접 장군님으로부터 걱정을 들은적이 몇번 되였다. 장군님께서는 진대통 하나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자기임을 너무나 잘 아셨기때문에 그렇게도 가슴을 안타까이 태우시며 가르치려 하셨는데… 고생을 해서 싸지… 이런 생각을 하며 순애를 진대통우에 올려놓았다. 그다음 철봉이를 또 그옆에 나란히 올려세웠다. 아이 둘의 무게가 몸에서 빠져나가니 금시에 날아갈것만 같다. 그러자 아버지가 어느 유리창을 해끼운 양철지붕아래서 떡 한쪼박을 얻어들고 눈물짓던 어느 추운 겨울날의 일이 떠올랐다. 어린 태혁은 울면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눈오는 언덕길을 넘어갔었다. 귀를 싸맨 목자수건매듭에 눈물이 떨어져 맺히던 그 몇칠후에 아버지는 죽었다.(아버지는)하고 태혁은 진대통우에 나란히 서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두 아이를 이윽히 들여다보며 생각하였다. (왜 혁명할 생각을 못했을가…) 이어 아무 맥락도 없이 7도구치기에 어리였던 삼엄한 분위기가 떠올랐다. 독소금을 앞에 놓고 깊이 머리숙이고있던 자기 모양은 마치 다른 사람의 형상처럼 선명히 눈앞에 떠오르는데 그때 가슴을 저미는것 같던 그 아픔은 그대로 현실적인 감각으로 느껴졌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면 네가 무슨 꼴이 될번했는가? 그 사랑을 저버리다니… 네 여기서 쓰러진다면 사람이 아니지, 사람이 아니야…) 이것은 누구의 말인가? 태혁의 가슴속에 또하나 더 억센 태혁이가 살아있어서 방금 숨을 거둘것만 같은 현실의 태혁을 채찍질하는것이였다. 태혁은 그 말에 힘을 얻어 턱을 치받치는것 같은 진대통을 다시금 쓸어안았다. 어떻게 진대통을 기여올라갔는지 가까스로 웃몸이 나무허리에 놓인다고 느끼는 순간 악―하는 아이들의 부르짖음이 귀전을 스치고 동시에 아래다리가 나무초리를 단단히 치면서 허공에 내휘둘린다는 생각이 떠올랐을뿐 다음은 의식을 잃고말았다. 태혁은 커다란 진대통밑에서 정신을 잃은채 깊으나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마침내 날이 활짝 밝았다. 바람도 자고 오래간만에 해가 솟아 기웃이 밀림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태혁이가 두 아이를 업고 헤쳐온 숫눈길우에 밤사이 그가 흘린 새빨간 피방울이 연연한 줄이 되여 골짜기로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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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아저씨! 사람들이 와요!》 이런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를 세차게 잡아흔드는바람에 태혁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드러누운채 눈을 떠보니 파란 하늘 한쪼박이 눈덮인 나무가지사이로 내려다보고있다. 《아저씨, 저기 사람들이 와요.》 철봉이가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태혁은 벌떡 일어났다. 순애와 철봉이는 꼭 그러안고 태혁의 가슴우에 몸을 포개고있었다. 간밤에 씌워주었던 태혁의 털모자는 제 머리에 씌워져있고 순애에게 입혔던 큰저고리는 제 가슴우에 덮어져있었다. 그리고 어린것들 둘이 서로 그러안고 저희들의 체온으로 자기를 덮혀주고있는것이다. 태혁은 아이들을 이윽히 들여다보았다. 《얘들아!》 태혁은 두 아이를 한꺼번에 그러안았다. 《아저씨! 저기 사람들이 와요.》 철봉이는 태혁의 가슴에 와락 매달리며 다시한번 속삭였다. 《그래?》 그제야 태혁은 아이들의 눈길을 따라 자기들이 넘어온 골짜기쪽을 돌아보았다. 아닌게아니라 두사람이 무엇인가 살피며 눈길을 헤치고 온다. 아무리 봐야 움직이는것은 두사람밖에 안된다. 왜놈같지는 않다. 혹시 특무같은것일가? 그러나 둘쯤은 특무라 해도 크게 두려워할것이 없다. 《얘들아, 꼼짝말고 이 나무뒤에 단단히 숨어있어야 한다.》 태혁은 다시 모자를 벗어 철봉이에게 씌워주고 큰저고리를 순애에게 입혔다. 아이들은 싫다고 발버둥질을 쳤지만 태혁은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지어가며 두 아이를 단단히 감싸준 다음 진대통밑에 엎드려있게 하고 자신은 배밀이로 기여서 저쪽 나무그루뒤로 돌아갔다. 이제는 퍽 가까이 다가온 두사람이 진대통앞에 와서 어물거릴 때 옆으로 내갈기자는것이였다. 나무그루뒤에 편안히 자리를 잡고 권총을 더듬어찾는 태혁의 가슴은 떨리였다. 어쩐지 사격에 자신이 없었다. 앉아서는 아무래도 단발에 맞혀낼것 같지 못하다. 그는 안전장치를 풀며 피뜩 다가오는 발자국소리쪽을 돌아보았다. 안경알이 유난히 눈에 띄였다. 아니 저게 누군가? 허름한 조선바지저고리에 조끼를 입고 망태같은것을 하나 졌는데 누런 개털모자밑에서 해빛을 받아 번쩍거리는것은 정지성이 곧잘 쓰군하던 변장용 안경이 아닌가? 그 다음 저 등이 구부정해서 뭐라고 말을 섬기며 앞장서 내달려오는것은 ―그것은 박인섭이였다. 《동무들―》 한태혁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나 일어나는 순간 눈앞이 휘―내둘리는바람에 그냥 나무그루를 쓸어안고 갈린 목소리로 웨쳤다. 《나 여기 있소, 에익― 사람들도…》 박인섭과 정지성은 우뚝 한자리에 멎어서더니 다음 총알처럼 달려왔다. 태혁이가 히죽이 웃으며 나무를 안고 서있는 앞에까지 오자 다시 우뚝 멎어섰다. 그것을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형상을 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태혁동무!》 정지성은 잘못 다치면 부스러질가봐 겁이 나듯 조용히 태혁을 그러안았다. 인섭은 대번에 눈물을 찔끔 짜더니 피자박이 되여 얼어붙은 그의 겨드랑밑과 등을 두손으로 감싸안았다. 《아직도 살아있구만.》 인섭은 제속에 있는 말을 감출줄 모르는 사람이라 이렇게 중얼거렸다. 《죽다니?… 내가 죽는단말이요?》 태혁은 이미 비칠거리며 주저앉으려는 자기 몸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지성이가 락수동에 들렸다는것이며 거기서 태혁이가 써놓은 글을 보았다는것이며 그곳 인민들의 피해정형을 대충 이야기했지만 태혁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아이들을 데려다놓고 사령관동지께서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 가져가라고 보내주셨다는 옷을 펼쳤을 때 거기서 한이삭의 강냉이가 나타나자 태혁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목메여 불렀다. 《장군님, 제가 언제면 장군님께 이런 근심을 끼쳐드리지 않게 되겠습니까?》 재영이가 변장용으로 입었던 그 옷가지들은 태혁의 장대한 몸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아이들에게 입히고 태혁의 큰저고리와 모자를 도로 그가 입고 쓰게 되였다. 고로쇠나무를 쳐서 들것을 만들어 거기에 태혁을 눕히고 두 아이를 한사람씩 나누어 업은 박인섭과 정지성은 사령부를 찾아 길을 떠났다. 강냉이 한이삭은 비록 큰 식량은 못되였으나 그것이 한홉의 미시가루를 나누어먹을 때 장군님께서 말씀하시던 바로 그 강냉이임을 짐작한 정지성과 박인섭은 그 강냉이 한이삭에 깃들어있는 장군님의 사랑을 아이들에게도 태혁이에게도 이야기하였으며 그리고 자기자신들의 가슴에도 거듭거듭 속삭여 새겨넣었다. 6
날이 저물기전에 부대는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산 하나를 넘었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고 너머편 골짜기에서 숙영준비를 하였다. 떠나온 산에서 발자국을 지워버리고 그대신 왕청같은 방향으로 새 발자국을 내놓았다. 한태혁을 찾아 떠난 두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골짜기바닥은 비교적 잠풍하였다. 맞춤한 빈터에 눈을 쓸어내고 진대나무와 진대나무 사이에 숙영지를 꾸렸다. 우등불을 피워놓으니 제법 아늑한 잠자리가 마련되였다. 하늘은 캄캄하였다. 그러나 별이 한둘 나타나기 시작하는것으로 보아 구름은 어딘가로 흩어지는 모양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일기를 간단히 정리해놓으신 다음 우등불에 손을 뻗치시였다. 한태혁에게는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겼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하늘을 바라보시며 이런 생각을 하시다가 전투가방에서 지도를 꺼내시였다. 우등불빛이 험준한 산맥의 우불구불한 등고선우에 진한 명암을 그리며 춤추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나온 행군길을 지도우에서 뽐으로 재이시며 대충 거리를 가늠해보시고나서 다시 한곳을 이윽히 들여다보시였다. 그이의 안색에는 준엄한 빛이 어리여있었다. 전령병들은 숨소리를 죽이고있다. 얼어붙은 은하수가에서 별 하나가 떨고있었다. 삼태성이 기울자 이깔나무끝에서 파르르 빛나던 그 별도 숲너머로 사라졌다. 땅에서 날리는것인지 하늘에서 내리는것인지 눈가루가 훨훨 날아다녔다. 별안간 숙영지가 떠들썩해졌다. 전령병들은 벌떡 일어났다. 재영은 달려나가고 상철은 배낭들을 거두었다. 강봉수는 사령관동지의 분부를 기다리며 그이의 뒤에 붙어섰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보시던 지도를 그냥 들여다보시며 무엇인가 기다리시는듯 하시더니 이윽토록 다른 소식이 없자 지도를 움켜쥐시고 벌떡 일어서시였다. 《강동무,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태혁동무가 돌아온것이 아닙니까?》 그이의 말씀은 생각탓인지 전에없이 급하게 울리였다. 강봉수는 아직도 술렁거리기만 하는 경위중대 숙영지쪽으로 달려나가려고 하였다. 이때 어둠속으로 천천히 들것 한채가 다가왔다. 앞채를 메고 고개를 푹 떨군 얼굴에서 정지성의 모습을 알아보신 김일성동지께서는 한순간 눈을 감으시고 얼굴을 뒤로 젖히시였다. 좋지 못한 예감은 잘 들어맞는법이다. 아침나절부터 발목에 감기여 떨어지지 않던 태혁의 모습이 언뜻 그이의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들것은 그이앞에 와서 조용히 멎어섰다. 《사령관동지.》 하고 정지성은 들것을 멘채 보고를 드리였다. 《한태혁동무를 찾아왔습니다. 락수동〈토벌〉에서 이 아이들을 구원해가지고 오다가…》 사령관동지께서는 들것을 내려다보실 생각을 않으시고 얼어붙은 입때문인지 가쁜숨때문인지 자꾸만 더듬거리는 지성의 보고를 참을성있게 기다리시였다. 《이 아이들을 김일성장군님께 맡겨달라고 부탁하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백바위골 곽병철동지의 아이들입니다.》 들것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섰건만 정지성의 보고가 끝나자 갑자기 온 세상이 침묵해버린듯 조용해졌다. 숨소리,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정지성과 박인섭의 등에 업힌 두 어린것들마저 꼼지락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디서 만났습니까?》 한참이나 숨가쁜 침묵이 흐른 다음에야 그이께서 조용히 물으시였다. 《락수동에서 산을 두개 넘어오다가 찾았습니다. 처음 백바위골에 가서 찾다가 놈들의 전화를 도청했습니다. 그가운데 락수동 〈토벌〉 때 유격대가 나타나서 여섯놈이나 죽었다는 말을 듣고 락수동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토벌〉맞은 곽병철동무의 처가집마당에서 태혁동무가 아이를 데리고 간다는 글발을 적어놓은것을 발견했습니다. 〈토벌〉때 아마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것 같습니다.》 《그래 의식을 잃은지 오랩니까?》 《저희들을 만나서… 옷을 갈아입히고… 저희들은 락수동뒤산에서부터 줄곧 태혁동무가 흘린 피자국을 더듬어갔습니다. 그랬더니 태혁동무는 제 옷과 모자를 다 벗어서 아이들을 감싸주고 자신은 살을 다 드러낸 속옷바람으로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사령관동지께서 주신 옷으로 아이들과 태혁동무를 갈아입히려고 하자 그속에서 강냉이 한이삭이 나타났습니다. 태혁동무는 그것을 안고 사령관동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장군님께 맡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똑똑히 말도 하고 웃기조차 하였습니다. 그런데 들것을 만들어가지고 산 하나를 넘어선 다음 하도 조용하길래 자세히 보니 이미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럼 상당히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급히 들것우에 한손을 뻗치시며 말씀하시였다. 지성이와 인섭은 들것을 어깨에 멘채 고개를 떨굴뿐 대답을 못드렸다. 그들의 심상찮은 표정을 주의깊게 살펴보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들것채를 쥐신 손을 가볍게 떠시며 침착하게 말씀하시였다. 《어서 내려놓으시오. 그리고 아이들도 내려놓으시오.》 조용하나 무겁게 울리는 그이의 목소리에 따라 두사람은 기계적으로 들것채를 조심히 내려놓고 아이들을 풀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마음속에 벌써부터 무겁게 덮쳐드는 좋지 못한 예감을 누르시기 위하여 일부러 아이들쪽에 먼저 손을 내미시였다. 지성의 등에 업혔던 순애는 새까만 털목도리로 얼굴을 단단히 감싸주어서 눈만 빤하였지만 그 눈도 지금 자기가 처하여있는 운명의 국면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듯 깊은 빛을 담고있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김일성동지께서는 재영의 변장용 농민복으로 무릎까지 돌려감은 아이를 품에 받아안으시고 그의 살눈섭에 낀 길다란 성에를 비벼주시며 물으시였다. 《순애.》 아이는 또박또박하게 대답하였다. 붕어같이 나불거리는 그 입에 하얀 눈송이 하나가 날아들어갔다. 《순애? 그럼 네가 조복순아주머니의 딸이 아니냐?》 장군님께서는 와락 두손으로 아이를 그러안고 바투 들여다보며 물으시였다. 순애는 커다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장군님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렇구나. 네가 바로 조복순아주머니의 딸이였구나.》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애의 털목도리를 만져보시며 혼자말처럼 외이시다가 다른쪽 손을 뻗치시였다. 박인섭의 등에서 내린 철봉이는 땅바닥에 내려서자 비척거리며 모로 쓰러졌다. 《웬일이요? 이 애도 부상당했소?》 사령관동지께서는 급히 철봉이를 한팔로 부축하여 안으시며 인섭을 돌아보시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아마 〈토벌〉 때 그렇게 된것 같습니다.》 정지성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드렸다. 《철봉이는 날 업고나오다가 넘어졌어. 이만한 불이 뚝 떨어졌어.》 별안간 장군님 품에서 순애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 애는 불이 굉장히 크다는것을 표현하려고 두팔을 짝 벌렸으나 땅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쓰러지군하는 소년의 눈물겨운 노력만큼은 실감을 자아내지 못하였다. 《알겠다. 그러니까 철봉이가 너를 업고나오다가 불을 맞았구나.》 사령관동지께서는 비척거리는 철봉이를 얼른 다른 팔에 안아드시며 순애에게 말씀하시였다. 《참, 장하다. 너희들은 다 훌륭한 조선의 아이들이다.》 두 아이를 한품에 안으신 장군님께서는 문득 가슴에 한가득히 괴여오르는 기쁨과 슬픔을 어떻게 주체하실수가 없었다. 손으로 겨우 털외투의 섶을 더듬어 가슴깊이 품으시니 새새끼처럼 파고도는 두 어린것들의 따뜻한 체온이 온몸으로 퍼져왔다. 이 따뜻함, 이 순결함을 위하여 그렇게도 억센 사나이 한태혁이 넘치도록 많고 뜨거웠을 그 피를 다 흘려버렸단 말인가! 사령관동지께서는 조용히 아이들을 강봉수와 조진범의 가슴에 하나씩 넘겨주시고 태혁이 누운 들것앞에 가앉으시였다. 가슴우에 덮어놓은 큰저고리는 포대기만큼 두툼한것이였으나 지금은 온통 피자박이 되여 마치 붉은기를 씌워놓은듯 어룽어룽 불빛을 반사하였다. 큰저고리를 들치니 장대한 체구를 뻗치고 누운 태혁의 모습은 얼핏 보매 히쭉 웃는듯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울거리는 우등불의 조화였다. 아니다, 웃음만은 분명 입가에 떠있었다. 그러나 그밖의것은 너무나 참혹하였다. 겨드랑을 헤치고 나갔다는 상처는 그만 두고라도 얼굴과 팔다리, 눈에 뜨이는 모든곳에 동상과 화상이 범벅이 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던 그의 모상은 거의 알아볼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큰일은 아니다. 155절짜리 노래를 제힘으로 지어 부르던 부대기농사군의 아들이, 열두살에 어른들과 맞목고를 멨다는 이 억센 사나이가 심장만 살아있다면 그쯤한 상처를 털고 일어나지 못할것인가. 그러나 그의 심장에는 이미 피가 남아있지 않는것이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아이들의 발감개를 하느라고 다 찢어내버린 태혁의 속옷을 조용히 헤치시고 번들거리는 구리빛가슴에 귀를 갖다대시며 손목을 더듬어 맥을 찾으시였다. 그러다가 흠칫 놀라시며 고개를 드시였다. 태혁의 손에서 무엇인가 굴러떨어졌다. 그것은 강냉이이삭이였다. 뒤에서 누가 흑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보지 않아도 상철이라는 짐작이 가시였다. 왕가점부근에서 상철이에게 쥐여주신 강냉이가 지금 태혁의 손에서 굴러난 그 강냉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막막하게 죄여드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시고 다시 태혁의 손목에서 맥을 더듬어 찾으시며 가슴에 귀를 가져다대시였다. 바람은 숲우를 조용히 흔들며 지나갔다. 눈가루는 훨훨 춤을 추며 우등불속으로 날아들기도 하고 답답한 사람들의 숨결에 날려 다시 허공중으로 떠돌기도 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윽토록 귀를 기울이시였으나 아무것도 느끼실수 없으시였다. 오직 혁명만을 생각하던 태혁의 억센 그 넋은 이미 갈갈이 찢어진 가슴에서 저 눈가루처럼 허공으로 날아나버린것인지… 아니면 눈을 움켜먹으며 한치한치 배밀이로 앞을 헤치던 고난속에서도 히쭉 웃으며 떠들던 지꿎고 장난궂은 그의 성미 그대로 지금도 이 숨가쁜 비애의 숲언저리 어디에서 숨박곡질을 하고있는것인지… 문득 사령관동지께서는 태혁의 가슴우에서 눈송이가 녹아내리는것을 보시였다. 사령관동지의 눈은 한순간에 빛을 뿜으시였다. 태혁의 가슴에서 눈이 녹는다. 그럼 아직 체온이 남아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의식을 잃은후에도 저 산을 몇개씩 넘도록 체온을 간직하고있었다면 무엇때문에 우리 태혁이가 죽었다고 단정할 필요가 있는가? 하기는 태혁의 가슴에서 뚜렷이 심장의 박동이라고 느낄만 한것은 없다 해도 그 강철같은 구리빛 근육과 뼈마디속에서 죽음의 정적이 느껴지는것은 아니였다. 김일성동지의 가슴은 숨가쁘시도록 죄여들었다. 태혁이가 아직도 살아있는가.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그이의 가슴에서는 심장이 쿵쿵 소리칠만큼 세차게 고동쳤다. 그 박동때문에 실지 태혁의 손목에서 맥박이 뛰는듯 한 느낌조차 드시였다. 그러나 잠시후 김일성동지께서는 슬그머니 태혁의 손목을 놓으시고 헤쳐놓으셨던 큰저고리자락을 여며놓으시였다. 눈송이는 태혁의 가슴우에서만 녹는것이 아니였다. 어느새 하늘땅을 메우기 시작한 풍성한 함박눈은 우등불두리 아무데서나 부드럽게 내려앉아서 허무한 꿈처럼 녹아 없어졌다. 질쩍하게 녹은 거칠은 풀밭우에서도, 숨죽이고 모여선 인민혁명군전사들의 털외투우에서도 녹아내렸다. 눈은 우등불의 화기와 가냘프게지만 다가오는 봄계절의 입김에 불리여 그렇게 소리없이 내렸다가 소리없이 사라지군한다. 죽어서도 진정할줄 모르는 열정과 대담한 웃음을 입가에 남긴채 한태혁이는 죽었다. 그 죽음의 뜻을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우등불가에 사령관동지의 모포를 돌려감고 눈만 반짝거리고있는 두 어린것이 말없는 가운데 그 죽음의 리유를 말해주고있을뿐 아직은 누구도 한태혁이 같은 사나이조차 죽을수 있다는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기 힘들어한다. 《태혁동무에게 기발을 덮어주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용히 일어서시여 잠시 고개숙이고 서계시다가 누구에게라없이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그리고는 홀로 눈오는 저쪽 산정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나가시였다.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듣고서야 태혁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깨닫게 된 지휘관, 전사들이 한꺼번에 태혁의 들것에 덮치듯이 다가들었다. 《태혁아!》 《태혁동무!》 《한태혁동지!》 오백룡이, 박인섭이, 김재영이들이 저마다 창자를 비틀어짜는듯 한 소리를 지르며 태혁을 불렀다. 그래도 태혁은 히쭉 웃는 그 얼굴로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하늘을 꼿꼿이 바라볼뿐 아무런 기척도 없다. 그는 이미 죽은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거듭 마음속으로 되뇌이시며 자꾸만 뒤로 끌리는 발길을 한걸음한걸음 눈속에 묻혀드는 산정을 향해 옮겨놓고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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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전사와의 영결은 힘겹게 이루어졌다. 6도구, 7도구, 부후물, 12도구, 13도구, 간삼봉, 압록강줄기와 그 무수한 지류들 그리고 혁명의 성산 백두산과 강건너 그리운 조국땅이 바라보이는 산우에 고인의 열정과 체구에 알맞도록 큼직하게 무덤을 팠다. 그 누구도 말 한마디 안했지만 총창으로 언땅을 깊이깊이 파헤치는 전우들의 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홀로 산정에 오르시여 무덤자리를 잡아주시고는 그길로 내려오시여 일체 일에 간참을 안하시였다. 그리고 정지성과 박인섭을 다시 부르시여 적정을 물으시였다. 그이의 안색은 매우 조용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남다르게 저려드실 그이의 마음을 더 강조해주는것만 같아 정지성은 죄지은듯 더듬거리는 어조로 보고를 드리였다. 《적들은 아직 정신이 떨떨해있는것 같습니다. 이제야 야산지대로 내려온것이 또 유격대의 수에 걸려든것이라는 눈치를 채고 다시 숲으로 들어올 차비를 하는 모양 같습니다만 정작 행군하는 부대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대도로부근으로 내려오는 부대까지 있는 형편입니다.》 정지성은 너무나 답답하고 긴장된 분위기에 압도되여 무엇부터 말씀드릴지 몰라 잠시 더듬거리다가 다시 보고를 이었다. 그의 말은 매우 실무적인 내용을 담고있었지만 이 슬픔이 함북 가라앉은 눈발속에 이러한 실무적인 보고를 요구하시는 그이의 심정에 자기의 억누를수 없는 비애가 겹쳐 왕청같은데서 격정을 폭발시키군 하였다. 《백바위골에서 전화도청을 하니 13도구에 한개 대대가 〈토벌〉에서 돌아왔는데 산속에서 희생을… 너무 많이 뒈져서 전투력이… 없어져서 제 본거지인 장백쪽으로 래일 떠난다고 합니다.》 《뭐요?》 눈발속에 엇비듬히 돌아서시여 지성의 더듬거리는 보고를 참을성있게 듣고계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불시에 분노를 터뜨리시며 이쪽으로 몸을 돌리시였다. 《그놈들이 장백으로 돌아가서 편안히 지내겠단 말입니까? 안됩니다. 그놈들은 기어이 숲속으로 우리를 따라 들어와야 합니다. 중대장동무를 부르시오. 13도구에 대한 정찰을 조직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얼마후 기관총분대의 김태규분대장과 박인섭이 13도구 방향으로 떠나갔다. 두사람은 떠나기에 앞서 아직도 우등불가에 뉘여놓은 태혁의 들것곁에 나란히 섰다. 인차 영결이 있을것이지만 그들은 참가하지 못한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아래 탄알자국이 숭숭 헤치고간 붉은기발을 덮고 누운 태혁은 그들이 돌아올 때는 이미 얼어붙은 땅속에 누워 있을것이였다. 조용히 마음속 인사나 나누고 떠나자던 인섭은 붉은기발아래 깊이 가라앉은 죽음의 침묵이 참을수가 없어 쓰러지듯이 눈우에 무릎을 끓고앉아 기발을 벗기였다. 《태혁동무, 이게 어찐 일이오다? 나를 주저앉았다고 장군님 사랑을 잊어버렸다고 욕하더니 이제는 태혁동무가 땅속에 누울 차비우다?》 허옇게 눈을 쓰고 호상을 서있는 재영이도 지성이도 인섭의 푸념을 막지 못했을뿐아니라 오히려 돌아서서 제눈굽에 소리없이 미음도는 눈물을 거듭거듭 들이마셔야 했다. 김태규분대장이 인섭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사령관동지께서 가까이 계신다고 일깨워주어서야 인섭은 진정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성기게 들어선 이깔나무사이에 눈을 맞으시며 지금도 홀로 서계시였다. 인섭은 얼른 눈과 코를 아이들처럼 소매자락으로 이쪽저쪽 번갈아 훔치더니 갑자기 꽉 잠겨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 사람두, 그렇게 장군님의 가슴을 아프게 허벼놓고 가다니… 그러나 어찌겠소다, 혁명의 길이 간고하다는것을 이제는 나도 아오다. 내 태혁동무 말대로 끝까지 주저앉지 않고 태혁동무처럼 노래랑 부르며 용감하게 걸어가겠소다. 그리고 금숙동무 만나면… 참 일도… 아무튼 내 잘 말하겠으니 마음놓소다.》 그리고 두사람은 13도구방향으로 떠나갔다. 밤이 훨씬 깊어서 태혁이와 영결하는 유격대의 소박한 의식이 거행되였다. 제물도 제구도 제관도 없는 장례였다. 눈만이 풍성하게 내리고 내려서 쌓였다. 눈속에 지낸 이해 겨울치고도 드물게 보는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펑펑 쏟아졌다. 슬픔에 터갈린 가슴들을 어루만지듯 덜퉁하면서도 정깊던 사나이 한태혁의 마지막 웨침인양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던 기관총으로 쏘아대는 조총이 울리였다.
가슴쥐고 나무밑에 쓰러졌다 혁명군 가슴에서 흐르는 피 푸른 들을 적신다
총소리의 뒤로 가슴을 비트는듯 한 비애의 선률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그것은 슬픔에 눌리여 눈에 묻힌 자욱과 산과 하늘언저리를 정처없이 떠도는듯 하더니 이윽고 총소리도 함박눈도 억세게 디디고 하늘높이 나래쳐올랐다.
머나멀리 고향산천에 부모형제 다 버리고 홀로 선 나무밑에 한을 품고 쓰러졌다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말아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눈은 밤새도록 내렸다. 바람 한점없는 하늘을 자욱히 메우며 내린 눈은 그대로 산을 덮고 숲을 덮었다. 높다란 산정도 눈에 묻히여 부옇게 흐린 하늘아래 부드러운 륜곽을 드러내고있다. 새로 쓴 태혁의 무덤에도 눈이 내려 붕굿하게 솟아올랐다. 잔디도 입힐수 없어 시뻘건 황토가 그대로 드러난 봉분을 흰눈이 포근히 감싸주었다. 숙영지는 천길 나락속처럼 깊은 정적에 휩싸여있다. 불무지들에서 이따금 불꽃이 탁탁 튈뿐 사람들의 말소리는 하나도 울려오지 않는다. 만물이 잠들어버린듯 조용한 밤, 그러나 사람마다 가슴에 차고넘치는 비분을 달래지 못하여 잠못이루는 밤이였다. 태혁의 무덤에는 정갈한 흰눈이 쌓이고 덧쌓이여 점점 부푸는것만 같다. 초간이 떨어져 외롭게 선 한그루의 나무에도 눈이 쌓이여 얼핏 보매 나무라기보다 돌로 깎아세운 비석같은 인상을 준다. 그 나무앞에 김일성동지께서 홀로 서계시였다. 영결이 끝난 그때부터 한자리에 서서 움직일줄 모르시는 그이의 군모우에도 어깨우에도 눈은 그냥 내려서 쌓였다. 부드러운 함박눈이 두텁게 쌓이여 제무게에 허물어져내려도 그이께서는 움직일줄 모르신다. 자욱히 흐려서 눈을 퍼붓는 저 하늘처럼 막막하고 숨가쁜 가슴속 사연을 그이자신께서도 똑똑히 느끼시지 못하시였다. 그것이 슬픔인지, 그것이 분노인지, 혹은 못다한 정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가려내실수가 없었고 가려내실 생각도 안하시였다. 작년 이맘때 정안툰싸움에서 최경화를 잃었을 때는 가슴속깊이에서 솟구쳐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느끼시였고 밤새 눈오는 우등불가에서 추도문을 쓰시며 그와의 마음속 대화를 나누시기도 하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감각이 강직되여버린듯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으시였다. 무슨 까닭인지 아버님의 체포소식을 들으시고 이처럼 눈오는 산과 령을 넘어 끝없이 걸어가시던 14년전 이맘때의 그 사무쳐 풀리지 않던 가슴속 옹이가 생각나시였다. 그 옹이는 끝내 풀리지 않은채 이듬해 아버님의 서거와 함께 더욱 크게 엉키고 맺히여 지금도 가슴이 비좁도록 큰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그리고 눈속에 떠오르는 아찔한 개고령과 오가산의 험산준령을 홀로 걸어가실 때처럼 아득한 천리길이 지금도 눈앞에 솟아있는것만 같으시였다. 문득 숙영지가 조용히 설레인다. 저만치 떨어진 나무밑에서 움직일줄 모르던 눈사람 하나가 숙영지쪽으로 간다. 오백룡이다. 김태규네가 돌아왔다는것을 눈치채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침내 리별의 시각이 다가왔음을 깨달으시였다. (태혁아.)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전사를 부르시였다. (내 너를 여기다 묻고 조국땅을 밟을 때 그 쓰릴 가슴을 누구에게 터놓으면 좋단말이냐.) 문득 히쭉 웃으며 155절짜리 《세계혁명가》를 신이 나서 불러제끼는 태혁의 모습이 부옇게 흐린 하늘에 떠올랐다. 날선 비수로 박―긋듯이 가슴이 쓰려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소스라쳐 고개를 드시였다. 그이의 군모에서, 털외투우에서 우수수 눈무지가 허물어져내렸다. 그이께서는 가볍게 소리내여 말씀하시였다. 《태혁동무, 이제 우리는 전투에 떠나가오. 그러나 이것은 동무에 대한 복수전은 아니요. 우리는 놈들에게 많은 빚을 지워놓았소. 그 모든 빚을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최후섬멸로써 받아내겠소. 지금은 저놈들을 편안히 쉬지 못하도록 이 숲으로 끌어내기 위한 전술이요. 이 전투소식을 들으면 동무가 사랑하는 전우들도 먼곳에서 달려올것이니 이제 우리는 다시 집중하여 분산된 적들을 쓸어눕히자는것이요. 그리고 동무가 목숨으로써 구원한 순애와 철봉이에게 약을 주고 식량을 주기 위해서도 필요한 전투요. 생전에 우리 혁명을 위해 많이 걷기도 하였는데 이제는 마음놓고 푹 쉬오. 동무의 원을 우리가 풀어주겠소.》 말씀을 마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무덤앞에 서계시다가 결단성있게 돌아서시였다. 눈은 아직도 멎지 않고 그냥 한본새로 내린다. 7
13도구는 하강일대에서는 가장 큰 거리로서 1급경찰서에 세관이 있었고 최근에는 위만군의 려단지휘부가 자리잡고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림강을 벗어나 장백현내에 들어서자 수많은 일제무력이 장백일대에 집결하였다. 얼어붙은 강 하나를 건너서면 바로 신갈파였다. 만주나 조선의 군사, 경찰 전문가들은 13도구 즉 장백 하강구일대와 신갈파가 조선인민혁명군과 조선국내인민들을 련결하는 중요거점이요 통로라는것을 이미 1937년봄부터 눈치채고있었다. 그렇기때문에 평소에 경비와 감시를 강화하는중에도 특히 이 일대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방대한 무력을 배치하고있었다. 때마침 조선에서는 갈리여간 고이소의 뒤를 이어 새로 조선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나까무라대장이 서울에 오자바람으로 국경경비의 철벽화를 가장 큰 사업으로 내몰고있었다. 그는 하시모도의 입김을 걸음마다 느끼고있었고 그의 고충도 대략 짐작하고있었다. 그러기에 겨울이라고 지지하게 끌고있는 갑무경비도로의 완공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특히 주목되는 혜산일대와 신갈파일대에 아낌없이 병력을 투입하였다. 하시모도의 주선으로 《도강장군》하야시의 내각에서 륙군대신을 지낸바 있는 그는 관동군의 고충을 곧 자기 고충으로 받아들일만 한 《의리》는 있는 인간이였다. 따라서 13도구는 청하여도 유격대가 오지 못할곳쯤으로 인정되여 교대하거나 철수 혹은 휴식하는 부대들이 들려가는 중간역참 비슷하게 되였다. 바로 그때문에 유격대가 오지 못하는 대신 유격대공작원이나 지하조직의 활동이 그 어느 지방보다도 활발한곳으로 알려져있었고 그에 대처하여 군대, 경찰의 밀정망들이 그물처럼 덮여있는곳이기도 하였다. 지금 13도구경찰서에서는 류진옥을 심문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고있었다. 장기덕의 끄나불로 뽑혀갔던 여치다리를 통하여 김일성장군의 사령부를 거의 알아내게 된 마당에 류진옥이때문에 다 놓치고 오히려 백바위골, 락수동일판을 조선인민혁명군이 흽쓸고 가버렸다는것을 알게 된 13도구경찰서에서는 서장이하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게다가 13도구경찰서는 허정학사건이래 구면인 류진옥이였다. 그때문에 책임추궁이라도 돌아올것 같아 한시바삐 무슨 단서를 잡아내자고 서둘렀다. 그런판에 장기덕이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장기덕은 한태혁에게 총을 맞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그날밤 통화로 실려갔었다. 거기서 며칠간 치료를 받고있는데 창상이 미처 아물기도전에 모리가 나타났다. 모리는 신경까지 불리여가서 하시모도로부터 미친개 몰리듯 욕을 먹고 돌아오는길이였다. 큼직한 입을 닭의 밥집처럼 만들어가지고 당장 집어삼킬듯이 노려보는 모리앞에서 치료를 더해야겠다고 말할 용기도 나지 않았지만 저쪽에서 먼저 옷을 입으라고 추상같이 호령하는바람에 입 한번 달싹해보지 못하고 절뚝거리며 따라섰다. 백바위골은 《토벌》의 재티만 날려다닐뿐 류창표도 곽병철이도 아무도 없었다. 장기덕이가 평소에 좀 수상하다고 본 정도의 사람들조차 자취를 감추고말았다. 가네꼬대위와 분서장 진가는 그날 유격대를 따라갔다가 락수동근방에서 제편끼리 싸우는통에 류탄을 얻어맞아 대가리와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있었다. 결국 남아있는 줄은 여치다리에게 내맡긴 류진옥이뿐이였다. 모리는 그날로 13도구경찰서까지 장기덕을 데리고 와서 경찰서를 한바탕 휘저어놓은 다음 수일내로 유격대와의 련락선을 알아내여 보고하라는 으름장을 남겨놓고 사라졌다. 그리하여 장기덕은 지금 닷새째 류진옥을 고문하고있었다. 류진옥이문제에 이럭저럭 관계가 있는 여치다리와 전번의 취급자였던 벽돌대가리도 곁에 붙어있기는 하였으나 그자들은 시중이나 들었고 간혹 장기덕이가 제 상처의 고통때문에 나가번져지면 그가 다시 일어날 동안 대신 매채를 잡는 정도에 불과했다. 계장이란놈은 같지 않은것이 남의 경찰서에 나타나서 주인행세를 하는것이 아니꼬와선지 일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나니 장기덕은 진옥에게뿐아니라 13도구서의 경관, 형사들에게도 완전히 폭군노릇을 하였다. 《야, 저년의 아가리를 벌리고 집게로 혀를 뽑아내라, 제가 말을 하나 안하나 어디 보자.》 상처가 쑤시는바람에 오만상을 찌프리고있던 장기덕은 별안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 그래도 진옥은 투박한 걸상에 오라를 지고 붙들어매인채 고개를 외로 꼬고있을뿐 입을 벌리지 않았다. 여치다리에게 붙들려온 그날부터 벌써 열흘이상 물을 먹고 불에 지지우고 공중에 달아매이고 한 진옥의 몸은 말이 아니였다. 보매 그는 결코 굉장한 투사는 아니였고 최형사를 쏘아죽인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녀자공산당원 같지도 않았다. 정말 가냘픈 들국화처럼 애처롭게 보이는 처녀였다. 그런 그가 벽돌대가리에게 닥달릴 그때와 꼭 같이 입을 봉하고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신음소리를 내거나 고통에 악물린 이짬으로 피가 배여나오는거며 물을 두어초롱 먹이면 인차 까무러치는것으로 보아 남달리 예민한 감각기관을 가지고있고 그때문에 고문에서 오는 고통을 여느 사람보다 훨씬 많이 느끼는 녀자였다. 몸매나 손을 보아도 곱게 자란 녀자였다. 이를테면 고문의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날 그런 형의 인간이다. 그러나 어떤 고통도 어떤 위협도 그의 입이 벌어지게는 하지 못하였다. 《뭣해! 집게로 혀바닥을 잡아뽑으란말야!》 장기덕이가 숨을 씩씩거리며 재차 소리치자 설마해서 빨갛게 달군 불갈구리에 담배불을 붙이고있던 여치다리가 화닥닥 놀라 불갈구리를 집어던졌다. 그는 아니꼽게 장기덕을 한번 가로 떠보고나서 고문기구들이 널려있는 구석지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이 어리석은년아, 너도 좀 생각해봐라.》 하고 장기덕은 이제 집게만 가져오면 모든 일이 다 제 생각대로 된다는듯이 쏘아나는 다리를 앞으로 내뻗치며 훈계조로 말했다. 《글쎄 전번에는 네가 어린체 하고 무슨 동정심이나 있어서 허정학이를 우연히 구원해준것처럼 꾸며대가지고 여기 얼뜨기들을 업어넘겼지만 그런 수로 나를 업어넘기려고 생각한다는것은 천만의 말씀이야. 흥 어림도 없지.》 장기덕은 어이없다는듯이 시퍼렇게 이물린 진옥의 얄팍한 옆얼굴을 쏘아보며 담배 한대를 붙여물었다. 여치다리가 그사이 말편자 신기는데 쓰는 대장간의 집게같은 우둔한 쇠집게를 가지고 와서 어찌라느냐는듯이 절컥거렸으나 장기덕은 못본것처럼 하고 말을 이었다. 《나도 백바위골의 조직원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야. 내가 유격대원호물자를 지고 어디까지 갔다왔다는것을 너도 알지? 그러니까 나도 유격대에 대해 알만큼은 다 안단말야. 그러니 내가 뭐 아는게 없어서 너더러 련락소를 묻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해야. 나는 네 정직한 마음을 보고싶단말이야. 자, 어서 말해보라구. 네가 련락소를 댔다고 해서 죄가 더 중해질것도 없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유격대토벌에 리용하지도 않는다는것을 내 알아들을만큼 말했지? 김일성장군도 유격대도 이제는 다 없어. 모두 끝장났단 말이야. 그러니 너도 이제는 아는것 모르는것 다 내놓고 진정한 황국신민이 돼야 한단 말이야. 자, 어서 대라구.》 장기덕이가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때 그린듯이 앉아서 움직일줄 모르던 진옥의 얼굴에는 한가닥 변화가 나타났다. 그것을 장기덕은 놓치지 않고 알아보았으며 진옥의 약점을 이제야 정통으로 찔렀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래 그는 서둘로 여치다리의 손에서 집게를 더듬어 움켜쥐고 바싹 진옥이곁으로 다가들며 간사한 목소리로 숨가쁘게 주어섬겼다. 《내가 그날저녁에 원호물자를 지고 사령부로 가게 되여있었던것을 너도 알지 않나? 내가 내 눈으로 사령부까지 다 보고 와서 이제는 싹 쓸어버렸는데 네가 고집을 부려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이야. 한다하는 유격대원들도 다 이 장기덕이 수에 넘어가는판에 네가 나를 속이자고 드는게 너무 어리석지 않는가. 이제는 사령부도 없고 곽병철이도, 너 아저씨 류창표도 다 잡혔어. 그 공작원들도 다 체포됐단 말야.》 진옥은 무엇인가 말을 하고싶은듯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왜 물이 먹고싶어? 얘 물 한잔 따라주라구.》 장기덕은 송곳처럼 진옥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그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당장 집게로 혀를 잡아뽑겠다고 절컥절컥 쇠소리를 내던놈이 벽돌대가리가 가져온 물잔을 제손으로 받쳐 진옥의 입가에 갖다댔다. 그의 생각에는 김일성장군도 유격대도 다 없어졌다는 말이 오늘에야 진옥에게 실감을 자아낸것으로 믿었다. 하기는 우연히 뱉어놓은 말이지만 자기가 사령부를 다 가보고 사령부도 조직원도 다 요정을 내버린듯이 꾸며댄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희한한 착상이였다. 보매 진옥은 확실히 큰 충격을 받은듯하다. 진옥은 13도구경찰서에 다시 잡혀온 그날부터 죽음을 각오하고있었다. 전번때와는 놈들의 고문하는 잡도리부터가 달랐다. 하기는 이것이 그때처럼 무슨 의심이 간다거나 한다리건너 사람의 일이 아니라 모든것이 적의 특무놈 눈앞에서 진행된 일이요, 그것도 김일성장군님의 사령부와 직접 관련된 일이라 이러나저러나 살아서 경찰서문을 나서기는 어려울것이였다. 죽음을 각오하고나니 어떤 고문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조직에서 장기덕의 정체를 알아냈는지, 사령부와 유격대가 위기를 모면했으며 조직이 무사히 살아남았는지 하는것만이 한없이 궁금하였다. 진옥은 죽더라도 장군님의 안부를 알고 편안히 눈감고싶었다. 이제 이 세상에 마지막소원이 남아있다면 장군님께서 그 위기를 모면하시여 유격대를 이끄시고 조국으로 나가셨다는 소식, 그 대오속에 지성이도 섞여 씩씩하게 무산 옥암동에도 들리였다는 소식을 듣고싶은 그것이였다. 그러나 암만 봐야 그것은 가망없는 소원이였다. 그래서 차라리 이 흉악한놈이 제먼저 지쳐서 하루빨리 내다죽일 그때만 안타까이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장기덕의 입에서 엄청난 수작들이 터져나왔다. 제눈으로 사령부를 다 봤다고 한다. 유격대공작원들도, 곽병철이도, 아저씨도 다 잡혔다고 한다. 진옥의 가슴속에는 커다란 바위돌이 굴러떨어진것처럼 숨이 칵 막혔다. 진옥의 머리속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갖가지 기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고 사건과 현상들의 련계가 서로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면서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자, 물을 마시구… 진정해서 차근차근히 말해보라구. 말만 하면 내가 결코 해롭게는 하지 않을테니까. 내가 허줄한 가게방을 차리고있었지만 그렇게 따라지신세는 아니야.》 장기덕은 물잔으로 다시한번 누런 물집이 엉겨붙은 진옥의 입술을 건드렸다. 진옥은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장기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닷새만에 처음 마주보는 눈길이였다. 장기덕은 너무나 반가와 어금이의 금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진옥은 잠시동안 장기덕의 까칠하게 피기 가신 상판을 측은한 눈길로 지켜보다가 스스럼없이 물을 마셨다. 고문때 쓰는 물이지만 끓는 도가니를 삼킨듯 달아오르는 가슴을 식히는데는 시원하고 달았다. 참으로 물맛이 달았다. 큼직한 차잔의 물을 절반이나 마신 진옥은 고개를 들고 또다시 기대에 차서 감질나게 파고드는 장기덕의 눈길을 조용히 마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을 잘 알아요.》 하고 진옥은 침착하게 입을 뗐다. 하도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라 어느덧 진옥의 목소리를 잊어버릴번했던 장기덕을 비롯하여 13도구서의 두 형사놈들까지 이 만신창이 된 처녀의 입에서 그처럼 맑은 목소리가 울려나오자 모두 눈을 흡뜨고 놀랐다. 《그래, 잘 알지, 잘 알수밖에 없지.》 장기덕은 선뜻 긍정하고 진옥의 앞으로 한걸음 더 제 걸상을 잡아끌었다. 《당신은 그날 혼이 났지요?》 《뭐? 혼이 나? 내가 왜 혼이 나?》 장기덕은 그날 류진옥이가 자기 이름을 불러대며 개라고 소리치는바람에 내뛴 생각이 피뜩 머리속을 스쳤으나 아닌보살하고 뒤를 다우쳤다. 《쓸데없는 수작 말고 묻는 말이나 대.》 《당신은 나한테 너무 많은 말을 했어요. 당신은 설사 개라는것이 드러나지 않았다 해도 사령부를 제눈으로 보지는 못해요. 당신은 정체가 드러나서 총을 맞았지요? 그래서 다리를 그렇게 절고 어깨에 붕대를 처맸지요.》 《뭐, 뭐? 이년이 미치지 않았어?》 《당신이 나한테 사령부에 가봤다느니 누구누구를 다 잡았다느니 하고 말한것은 큰 실수였어요. 그들을 다 잡았다면 무엇때문에 그사람들은 다 두고 그렇게 편찮은 몸으로 나 하나를 못살게 굴어요? 사실 나는 내 목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을가봐 은근히 걱정이였어요. 그러나 이제는 마음이 놓여요.》 《이년! 아가리를 닥치지 못해! 이건 전투부상이란말이야!》 장기덕은 발작적으로 부르짖었다. 방금까지 얼뜨기취급을 해온 13도구경찰서의 두놈앞에서 자기 실책이 여지없이 드러나자 그는 모든 리성을 한꺼번에 불태워버린듯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팔딱팔딱 뛰며 울부짖었다. 그럴수록 진옥의 목소리는 침착하였고 그만큼 잘 울리였다. 《이제는 당신 요구대로 입을 다물겠어요. 나한테서 이제는 아무말도 들을 생각 마세요.》 그리고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지은채 처녀는 침묵하고 말았다. 여지없이 패배당한 사나운 폭한은 너무나 가냘프면서도 너무나 자랑높은 처녀앞에 휘두를 무기가 조잡한 고문도구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처럼 을러메던 집게로 정작 혀를 잡아뽑을수는 없었다. 장기덕은 너무나 분하여 미친듯이 치고박고 패고 두들겼다. 진옥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그도 물탕이 질척거리는 콩크리트바닥에 한쪽무릎을 꿇고 주저앉아버렸다. 마치 천주학쟁이가 기도를 드리는 꼴을 한 장기덕은 여치다리가 진옥이에게 물을 끼얹는것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장형, 이제는 그만하고 저녁이나 합시다. 열시가 넘었는데…》 벽돌대가리가 귀전에 대고 속삭였으나 그는 말뜻을 새겨듣지 못하여 그대로 앉아있었다. 이때 정복경관 한놈이 헐레벌떡 뛰여들지 않았던들 장기덕은 몇시간이고 그런 꼴로 앉아있었을는지 모른다. 《저 군대장교나으리들이 왔습니다.》 《장교?》 장기덕은 감전된듯이 벌떡 일어났다. 《누구야?》 《잘 모르겠습니다. 안경을 꼈는데 저 녀자에 대해 알아보겠답니다.》 《저 녀자에 대해?》 모리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 장기덕은 허둥지둥 벗어붙였던 웃도리를 찾아 입었다. 모리가 그에게 말미를 준것이 바로 오늘까지였다. 모리는 정확하게 심문결과를 받아내러 찾아온것이다. 장기덕은 겨우 정신을 차린 진옥을 피끗 돌아보고 괜히 두 형사놈에게 《빨리,빨리.》하고 다그쳐대며 복도를 뛰여나갔다. 될수만 있으면 모리를 고문실로 끌어들이지 않고 다른 방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문밖에 나서는데 벌써 컴컴한 복도 저끝에서 낯익은 장교외투를 걸친 안경쟁이가 두사람의 수원을 거느리고 마주걸어왔다. 얼핏 그 걸음걸이만 보아도 벌써 성미가 돋았다는것이 알려졌다. 장기덕은 엉겁결에 인사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미처 허리를 구부리기도전에 우악스런 손이 그의 가슴을 고문실안으로 떠다박질렀다. 안경쟁이의 뒤로 따라오던 상사견장을 단 사나이가 덮어놓고 그렇게 밀어던진것이였다. 장기덕이가 고문실안으로 떠밀리여 들어오자 뒤따라 왜놈군복을 입은 세사람도 덮치듯이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출입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그제야 세사람을 똑똑히 살펴본 장기덕은 비로소 안경쟁이가 모리가 아니라 웬 낯선 대위라는것을 알아보았다. 그밖의 한사람은 소위이고 다른 한사람은 장기덕이를 떠밀치던 그 상사였다. 장기덕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쭈밋거리는데 대위가 장갑을 벗으며 일본말로 소리쳤다. 《네놈이 장기덕인가?》 《예, 제가 바로…》 《개같은놈! 뭘 꾸물거리고있는가!》 장교는 흰 장갑을 한손에 움켜쥐고 덮어놓고 장가의 볼따귀를 후려쳤다. 그사이 옷을 주어입으려고 허둥거리던 벽돌대가리와 여치다리는 장가가 겪는것을 보고 두려움에 차서 후들후들 떨기만 하였다. 《이 녀자를 구원하려고 기도했다는 그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 《구룡리 김창수말입니까? 그놈은 지금 감방에…》 여치다리가 떠듬떠듬 대답했다. 《감방에? 누가 열쇠를 가지고있는가? 가서 꺼내왓!》 그러면서 장교는 상사견장을 단 그 우악스런 사나이에게 턱질을 하였다. 그가 여치다리의 뒤를 따라 돌아서는 순간 장기덕은 악―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왜놈군대 상사가 아니라 바로 백바위골에 나타났던 유격대공작원 박인섭이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여치다리는 벌써 바깥에 나갔고 뒤따라 박인섭이도 안내해온 경관을 데리고 복도로 나서며 문을 쾅 닫아버렸다. 장기덕이가 《유격대다!》 하고 째지게 소리를 쳤지만 여기는 고문실이라 아무리 발악을 해도 바깥에까지 새여나지 못하게 방음장치가 되여있었다. 어느새 대위군복의 안경쟁이는 권총을 뽑아들고 다가오더니 그의 허리에서 권총을 떼내여버렸다. 《개같은놈!》 하고 그는 조선말로 소리쳤다. 《네따위가 다 유격대를 해쳐보자고…》 그것은 정지성이였다. 이때 왜놈소위로 변장한 김태규는 눈이 화등잔같이 되여 떨고있는 벽돌대가리의 가슴에 총을 겨누어대고 한쪽구석으로 밀어갔다. 《태규동무, 지금 10시 40분이요. 복도쪽을 잘 감시하시오.》 이렇게 말한 정지성은 비로소 눈을 몽롱하게 뜨고있는 진옥을 바라보았다. 반실신상태에 있는 진옥의 참혹한 형상을 보자 피가 거꾸로 흐르는듯하였으나 그는 임무를 정확히 집행하기 위하여 감정을 눌렀다. 장기덕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내뛸 틈만 엿보고있다. 지성은 장교용 군도로 콩크리트바닥을 똑똑 구르며 그놈의 상판을 들여다보다가 다시한번 시계를 꺼내본 다음 불시에 군도를 쑥 뽑아들었다. 시퍼런 칼날이 눈앞에서 번쩍하자 장기덕은 으악―하고 숨을 들이그으며 눈을 흡떴다. 《이놈! 더러운 왜놈의 개! 네 손으로 저 바줄을 끌러라! 당장 끌러!》 칼날이 연신 눈앞에서 도깨비불같은 빛을 뿌리는바람에 장기덕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뒤걸음질했다. 《이 자식아! 네 손으로 끄르라는데 모르겠어!》 김태규가 정갱이를 걷어차며 소리치자 장기덕은 화닥닥 놀라 뛰여오르며 진옥이곁으로 다가갔다. 장기덕이가 자기를 걸상에서 풀어낼 때까지도 진옥은 영문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가까스로 정신이 든 그는 방안에 왜놈장교복이 얼씬거리는것을 보고 또 새로운 인백정들이 나타났겠거니만 생각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다가 이상한 목소리들이 연방 울려오는바람에 눈에 정기를 모으고 앞을 바라보니 방금 자기에게서 포승을 풀어낸 장기덕이가 그 바오래기를 두손에 받들어쥔채 웬 왜놈장교복앞에 서서 화들화들 떨고있다. 그 왜놈장교복은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금시 장기덕의 정수리를 겨누어 내려치려는참이였다. 《지성동무, 시간이요. 빨리 처단해버리오.》 이런 목소리가 구석쪽에서 들려오는바람에 돌아보니 거기서도 왜놈장교복을 입은 사람이 권총으로 벽돌대가리를 겨누고있었다. 이때 멀지 않은 거리어방에서 꽈르릉 하고 천둥소리같은게 울리여왔다. 그러자 바로 경찰서 앞마당쪽에서 별안간에 총소리가 자지러졌다. 《이놈아! 네놈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령부를 찾아다녔다지. 지금 13도구는 김일성장군님의 유격대에 의해 포위되였다. 이제라도 할 수작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해보아라!》 안경알을 번쩍거리는 왜놈장교복이 소리친다. 몹시 낯이 익다. 목소리도 귀에 익다. 왜놈장교를 내가 어떻게 알가… 진옥이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장기덕이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복도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시퍼런 군도가 허공에서 뿌연 빛으로 반원을 그었다. 《 아 아 아―ㄱ!》 왜놈의 더러운 개 장기덕은 검붉은 피를 콩크리트바닥에 뿌리며 불맞은 송충이처럼 두어바퀴 뒹굴더니 차츰 사지를 뻣뻣하게 내뻗쳤다. 동시에 구석쪽에서도 총소리가 울리였다. 《진옥동무!》 그제야 진옥은 자기앞으로 다가오는 왜놈장교복의 얼굴에서 그리운 정지성의 모상을 알아보았다. 《아…》 진옥은 너무나 큰 가슴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그만 다시 의식을 잃고 지성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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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이 얼어붙어있는 조건에서 대안 신갈파의 적들이 증원을 올수 있는만큼 13도구진공전투는 바람같이 치고 바람같이 빠져나와야 한다는 김일성동지의 분부대로 진행되였다. 그러기에 모든 전투조직이 번개처럼 번쩍번쩍 서둘것을 요구하였다. 한개 소대를 이끌고 적 수비대병영으로 진공한 오백룡이네 주력은 포대폭파를 신호로 두문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일제히 정문으로 쳐들어갔다. 낮에 한개 대대의 왜놈 《토벌대》가 출발한 뒤끝이라 병영안에 남아있는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큰 부대가 들고나고하는 부산통에 어지간히 규률도 해이된 판이라 유격대의 돌격함성이 병영안을 울리자 마치 물먹은 흙담처럼 맥없이 허물어져버렸다. 유격대원들은 저항하는놈은 말할것 없고 뛰는놈, 꿇어엎드리는놈 할것없이 모조리 쏘아눕혔다. 전사들의 가슴마다에 차고넘치는 비분은 독한 기상이 되여 전투장에 무시무시한 음영을 드리웠다. 《모조리 쏘아죽여라!》 평소에 그리도 진중하던 중대장 오백룡이 어느새 기관총 한정을 빼앗아 들고 병영현관으로 달려들며 유리창이 쩡쩡 울리게 웨쳤다. 《전우들의 원쑤를 갚자!》 김재영이 역시 기관총의 불을 뿜으며 복도의 유리창문을 발길로 걷어차고 창턱에 뛰여올라 불줄기를 내뿜었다. 《일제침략자들을 소멸하라!》 그 누가 벌써 불뭉치를 안고 병영에 불을 지르며 소리소리 지른다. 어느새 거리쪽에서도 불길이 솟아올랐다. 세관, 자위단, 《민회》, 큰 상점들, 적 기관마다 유격대원들이 돌개바람을 일구며 휩쓸어나갔다. 한편 경찰서앞에서는 한동안 치렬한 사격전이 벌어졌다. 여태 주둔하고있던 《토벌대》가 떠나간 지금 13도구의 가장 큰 적 무력집단은 사실상 경찰서였다. 그러기에 2소대장의 지휘하에 끌끌한 전투원들이 여기에 망라되였다. 경찰놈들은 집안에 들어박혀 한동안 집요하게 맞불질을 해댔다. 그러나 건물안에 이미 들어와있던 김태규네 습격조가 안에서 불을 달아놓고 등에다 총알을 내갈기는바람에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인섭은 여치다리를 끌고 일부러 경찰서안을 빙빙 돌며 시간을 끌다가 류치장에 가서 김창수를 확인한 다음 13도구진공전투의 신호소리가 울리자 그놈을 처단해버렸다. 그리고 복도 이쪽저쪽에 대고 권총을 내갈기며 이방저방 뛰여들어 총을 쏘고 불을 달아놓았다. 박인섭이가 방방으로 돌아가며 달아놓은 불은 방마다 그들먹이 쌓인 서류뭉치에 옮겨지자 이어 바싹 마른 목조건물을 널름거리는 불길로 핥아대기 시작하였다. 인섭이는 그달음으로 류치장에 달려갔다. 총을 들고 마주 달려오는 계호계 순사놈을 단방에 요정내버린 그는 그놈의 보총으로 류치장의 자물쇠를 짓마스기 시작하였다.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유격대다!》,《유격대다!》하고 살창너머로 손을 내뻗치며 소리쳤으나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었다. 불길이 집안을 흽쓸자 적들은 허둥지둥 거리로 달려나갔다. 바깥에서는 경찰서를 삥 둘러싼 유격대원들의 총이 그놈들의 가슴을 노리고있었다. 총소리는 차츰 앞거리쪽으로 멀어져간다. 탁탁 하고 천정에서 서까래가 허물어지고 검은 연기가 타래져오를 때에야 인섭은 가까스로 류치장구석에 쓰러져누웠던 김창수를 마지막으로 업고 거리로 달려나왔다. 13도구의 밤거리는 장관이였다. 낮까지 원쑤들이 도사리고있던 집마다 불이 달려서 음침하고 살벌한 거리를 환히 밝혀주고있었다. 어느새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겨우내 꽁꽁 닫아맸던 문들을 활짝 열어젖히고 사람들이 달려나왔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골목마다에서 유격대원들을 둘러싼 인민들이 입을 모아 장군님의 안부를 묻는다. 장군님께서 건재하시다는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한꺼번에 두손들을 번쩍번쩍 쳐들고 만세를 불렀다. 《김일성장군님 만세!》 《항일유격대 만세!》 인섭은 무엇인가 등을 자꾸 잡아흔드는바람에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나 황홀한 광경에 넋을 빼앗기고있던 그는 자기가 지금 고문에 쓰러진 청년을 업고있다는것도 그리고 왜놈군복으로 변장하고있다는것도 잊어버리고있었다. 《동무, 장군님께서 건재하시다는것이 사실이요?》 김창수는 안타깝게 인섭의 등을 잡아당기며 꺼져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장군님말이요? 건재하시구말구… 장군님께서 바로 동무같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전투를 벌리셨단 말이요.》 인섭은 왜 그런지 가슴이 찡해오는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나를 좀 내려주시오.》 《왜 그러오?》 인섭은 이렇게 물으면서도 창수의 요구가 너무 절박하게 울리여 조심스럽게 그를 땅우에 내려놓았다. 이때 골목을 메우며 달려오던 거리의 인민들이 두사람앞에 멈추어서더니 어느새 담을 쌓았다. 웬 할머니가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 《이사람 창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머니.》 청년은 쓰러지려던 몸을 가까스로 가누어잡더니 그 할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목메여 말했다. 《유격대가 왔어요, 정학형님이 말한대로 김일성장군님께서 유격대를 이끄시고 이리로 오셨대요.》 《그래, 나도 자네때문에 거리에 들어왔다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길이네. 그런데 이 사람도 유격댄가?》 할머니는 창수의 몸을 부축해 안으며 엄한 눈매로 인섭을 뜯어보았다. 성성한 백발에 비해서는 너무나 꿋꿋한 기상이였다. 인섭이도 생면부지의 이 할머니가 보통 할머니가 아니라는것을 인차 알아보았다. 그는 서둘러 왜놈의 군모와 어깨의 견장을 잡아뜯으며 정중히 머리숙여 절하였다. 《그렇소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전사오다. 어머니, 그리고 여러분, 얼마나 고생들을 했소다?》 인섭이의 소박한 사투리는 곧 사람들에게 친숙감을 자아내였고 눈물겨운 정을 빚어냈다. 《이 사람아, 기어이 왔네그래. 응.》 할머니는 그리도 강직해보이던 얼굴에 어느새 두줄기 눈물자욱을 번쩍거리며 인섭의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우리가 얼마나 속을 태우며 기다린줄 아나. 저놈들이 가재수에서 어쨌다 락수동에서 어쨌다 하고 떠드는바람에 에미애비들이 얼마나 애를 말린줄을 아나?》 《아오다. 그러기 이렇게 오지 않았소다.》 인섭은 소매로 눈귀를 뻑 문지르며 목메인 소리로 대답하였다. 《장하이, 장해. 꼭 오리라고 우리는 믿었네. 저놈들이 아무리 미쳐날뛰고 별 거짓말을 다 퍼뜨려도 우리는 자네들이 오리라고 믿었네. 그래 우리 장군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여기 이 거리에 계시우다. 여러분네들, 우리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 거리에 나와계시우다.》 인섭은 저도 모르는 사이 군중앞에 주먹을 높이 쳐들어 흔들며 웨쳤다. 《여기 이 어머니 말씀과 같이 우리 인민들이 기다린다는것을 잘 아시는 우리 장군님께서는 유격대를 없애보려고 미쳐날뛰는 수십만의 왜놈군대를 마구 쓸어눕히시고 이렇게 우리들을 이끌고오셨소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 13도구거리에 오셨을뿐아니라 이 달음으로 또 왜놈들을 족치시며 우리 조국으로 나가시는 길이우다. 그렇게 해서 빼앗긴 우리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우리 장군님께서 말씀하셨소다. 여러분! 우리 조선사람이 살길은 모두가 김일성장군님을 따라 혁명에 떨쳐나서는 길밖에 없소다.》 인섭의 소박한 선동연설은 경찰서앞 골목을 불도가니마냥 혁명적열정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김일성장군님 만세!》 《조선민족은 총동원하여 항일대전에 떨쳐나서자!》 구호와 만세소리가 타번지는 경찰서의 불길을 눌렀다. 이러한 인민들의 웨침소리는 골목마다, 거리마다에서 터져올랐다. 무시로 울려퍼지는 만세소리, 흥분해서 웨치는 선동연설, 부서져라 쳐대는 박수소리―어디선가는 《적기가》의 노래소리까지 울려오는 들끓는 분위기속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앞을 다투어 질문을 들이대는 인민들의 소박한 청을 들어주기에 한참 땀을 흘리던 인섭은 그렇게 하나하나 질문에 대답해가지고는 이 밤이 열개가 있어도 모자라겠다는것을 깨닫고 인민들의 끝없는 궁금증을 한꺼번에 풀어주기 위하여 남패자회의에서 밝히신 김일성장군님의 방침을 해설하였다. 그러나 그 해설만 가지고는 인민들도 그자신도 성차지 않았다. 그래 이번에는 그 결정을 집행하기 위한 이번 행군길에서 장군님께서 쓰신 기막힌 전술들을 신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한창 부후물등판에서 쓰신 망원전술이야기를 하고있는데 거리 한끝에서 구성진 나팔소리가 울려왔다. 상철이가 부는 철수신호나팔이였다. 인섭은 말을 중단하고 잠시 뒤쪽을 돌아보다가 별안간 섭섭한 표정을 짓고 말하였다. 《장군님께서 부르시오다.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들, 동생들, 누이들, 모두 잘 있소다. 아무리 세상이 험해도 우리 장군님을 믿고 꿋꿋이 살아주오다.》 인섭이가 정중히 머리숙이자 어느새 뒤전에서 쿨쩍거리는 소리가 울리여나왔다. 《이 사람아, 어서 가게.》하고 아까 그 할머니가 인섭의 어깨를 떨리는 손으로 어루더듬으며 말했다. 《우리 걱정일랑 말고 어서 가게. 이 땅에 우리 장군님께서 계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겁내겠나. 우리는 장군님 분부대로 살겠네. 부디 자네들이 장군님 잘 모시고 몸성히 싸워주게.》 《어머니, 고맙습니다.》 인섭은 제 어깨를 더듬는 그 할머니의 앙상한 뼈마디투성이손등을 쓸며 다시한번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장군님 뵈옵거든 구룡리 허정학이의 늙은 에미가 아직도 살아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장군님 만수무강만을 빌고있다고 전하여주게.》 또다시 나팔소리가 울린다. 유겪대원들은 골목마다에서 집결장소를 향하여 달려나갔다. 인섭이도 창수를 업고 달려갔다. 두번 세번 작별의 인사를 거듭하였건만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정에 끌리여 13도구거리의 인민들도 그냥 유격대원들의 뒤를 묻어간다. 원호물자를 진 사람들, 로획품 소바리를 끈 사람들, 이번에는 기어코 입대한다고 신들메를 죄여매고 떨쳐나선 청년들― 13도구의 불길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데 조선인민혁명군은 인민들의 안타까운 정에 끌리듯 바래고 따라나선 사람들의 긴 행렬을 뒤에 끌며 이윽고 거리 뒤산을 굽이돌아갔다. 8
13도구가 하루밤사이에 된불을 맞았다는 급보가 그 밤중으로 사처에 날아갔으나 일제 군사경찰관계자들은 그 누구도 선뜻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도대체 청해도 유격대가 오지 못할곳이라고 저마다 장담하던 그 13도구에 어떻게 유격대가 제발로 찾아올수 있는가. 장백, 림강 대도로연선을 샅샅이 뒤져도 흔적조차 볼수 없다던 그 유격대가 어디서 그렇게 불쑥 나타났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였다. 그것도 방금 주둔하고있던 무다구찌려단산하의 한개 대대가 거리를 떠나서 100리도 못간 때에 불의에 달려들어 큼직한 거리를 완전히 점령하고 하고 싶은 일을 다한 다음 원호물자를 지고 따라나선 수백명 인민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전투를 김일성장군자신이 직접 지휘하였다는것도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 확증되였다. 모리중좌는 데라시마중장으로부터 가장 모욕적인 추궁을 받았다. 《당신은 제발 사령부로 돌아가주지 않겠는가? 당신네 그 소위 정보라는것이 없었으면 나는 숲속에 겨우 자리잡은 부대들을 불러내지도 않았거니와 또 며칠 뒤져보지도 않고 다시 숲으로 들어가라고 내몰지도 않았을거다. 나는 당신네들에게 결코 큰것을 바라는것이 아니다. 그저 방해만 놀지 말아달라는것이다.》 모리는 늙다리를 탁 쏘아주고싶었으나 그자신 자기 실책을 너무나 뼈아프게 느끼고있던차라 겨우 푸념을 한마디 했을뿐이였다. 《각하, 중장각하께서 불렀다는 부대는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겨우 동강부근까지 갔던 무다구찌소장이 돌아왔을뿐인데 그는 오자마자 드러누워버렸습니다. 한개 려단이 들어가서 겨우 두어개 대대가 되나마나하게 남아온것이 또 전투를 못하겠다고 해서 장백으로 내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즉 숲으로 들어가고 나가고 한 중장각하의 관하부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그 부대들을 좀 보기만이라도 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신경에 돌아가겠습니다.》 《무다구찌는 왜 하필 건드리는가? 그가 따라간것은 비록 김일성장군의 사령부는 아니였지만 박덕산이라면 유격대에서는 큰 인물이다. 그만큼 따라간것만 해도 무다구찌니까 가능했다고 나는 본다. 나는 중좌 당신의 말버릇을 이제 더는 참을수 없다. 나는 중좌의 지시를 받기 위하여 중장의 견장을 달고있지 않다. 그러니 제발 앞으로 내 지휘부내에서 얼른거리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모리는 데라시마에게 욕을 퍼부으며 현장까지 달려갔으나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가 저희네 종심을 치고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는것을 이모저모로 확인했을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다 타버린 경찰서의 페허에서 장기덕을 비롯한 형사놈들의 숯으로 변한 시체를 내려다 보다가 뿌옇게 흐린 하늘을 향하여 울음섞인 한숨을 지었다. 《나무아미타불…》 설사 김일성장군의 사령부를 지금 당장 알아냈다 한들 무엇하겠는가. 김일성장군의 사령부를 알아내기만 하면 큰일이나 칠것처럼 팔을 부르걷고나서던 인간들이 어찌나 된코를 싸리웠던지 모두 입을 하― 벌리고 놀라있을뿐이였다. 안되는 놈의 집안에 싸움이 잦다고 사사건건에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어쨌든 김일성장군의 사령부가 13도구를 철수하여 간삼봉방향으로 철거했다는것이 뚜렷한 이상 거기에 해당한 군사행동을 벌리지 않을수 없었다. 겨우 밀림에서 벗어났다고 한시름 놓았던 모든 부대들에 또다시 숲으로의 진공명령이 떨어졌다. 8련대를 따라 동강부근까지 갔다가 기껏 얻어맞고 돌아온 무다구찌려단도 례외가 아니였다. 전시편제로 치면 련대정원도 되나마나한 인원으로 줄어든데다 그것마저 온통 부상과 동상으로 온 부대가 붕대부대로 변해버린 무다구찌려단은 려단장 무다구찌가 6도구에 나가 드러눕는바람에 련대편제로 줄여버렸다. 그중 한개 대대가 장백으로 휴식하러 나가다가 100리쯤 나간 도로에서 13도구의 불길을 보게 되였는데 뒤미처 기마전령이 따라와서 그 길로 곧장 간삼봉방향으로 진출하라는 데라시마중장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붕대투성이 대대는 길바닥에 펄쩍 주저앉아 새로 대대를 지휘하게 된 전 1중대장이 말우에서 고개를 푹 떨구고 우중충한 산발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선 꼴을 지켜볼뿐이였다. 이무렵 자기네야말로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를 추격하고있다는 생각으로 저희딴에는 온갖 간난신고도 달게 여기며 이 겨울에 누구보다도 개고생을 해온 혼마려단은 곰의골밀림까지 다 갔다가 결국 추격하고있는것이 김일성장군의 사령부가 아니니 돌아서라는 명령을 받고 간삼봉방향으로 이동중이였다. 혼마려단의 이 이동은 그야말로 피투성이 로정이라고 말할만 한것이였다. 그들이 오중흡련대를 따라갈 때는 그래도 유격대가 낸 길을 따라갔고 보급물자도 그럭저럭 따라왔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은 그들자신이 길을 내야 하였으며 빨리 돌아서라는 명령을 정확히 집행시킬 심산에선지 보급물자마저 그들자신이 찾아가야 얻어먹을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그런대로 그저 힘껏 걸어서 돌아오기나 하는 길이면 별문제였다. 전쟁을 하면서 그만한 고생도 못참겠다고 할수는 없는것이다. 문제는 방금까지 그냥 숲으로 초인적인 속도를 내여 달려가던 유격대가 이번에는 돌아서서 걸음마다 발목을 감아채는것이였다. 발목을 감아챈다는것은 거창한 전투력을 가진 증강된 한개려단의 경우를 두고 하는 형상적인 말이지 매 병사의 경우에는 그것이 항상 목숨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전투와 습격으로 나타나는것이였다. 13도구전투가 있은 이튿날 밤 혼마려단은 간삼봉동북방 약 60키로 지점에 있는 밀림속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고있었다. 려단장 혼마소장은 데라시마의 거듭되는 독촉을 받고도 결코 행군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그대신 유격대가 아무리 뒤를 쳐도 그역시 될수록 응전을 피하는 방향에서만 지휘를 하였다. 그의 부대조법이나 지휘는 그에게 그 무슨 군사적타산이나 딴 배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수십년의 전투경험을 가진 로련한 군인으로서 벌써 김일성장군의 부대를 《소멸》하자는것이 마치 말똥구리가 수레바퀴를 굴리자는것과 비슷한 노릇임을 느끼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는 될수록 부대의 손실을 적게 내려고 애썼고 무모한 짓을 피하려고 꾀를 피울수 있는대로 피웠다. 그는 령하 40도의 혹한속에서도 웃동을 벗고 눈으로 온몸을 문대는 독한 인간이였으며 끌날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젊은 참모놈들의 허풍을 꿰뚫어볼줄 아는 약삭바른 늙은이였다. 그렇기때문에 상사말뛰듯 하는 젊은 장교놈들을 달래고 눌러서 비록 한개 대대가량의 손실을 보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직 려단의 면모를 유지하고있는것이였다. 그는 곰의골에서 돌아서라는 데라시마의 첫 명령을 받았을 때 벌써 이판이 개판이라는것을 깨닫고 모든 행동의 중심임무를 부대전투력의 보존에만 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심 많은 놈의 잘 빠져들어가는 함정이였다. 공개적으로 터놓지 못하는 혼마의 타산은 려단장이 지쳐서 전투명령집행을 태공하고있다는 여론을 젊은 장교들속에 떠돌게 하였고 이것은 그대로 전부대를 안일하게 만들었다. 2월초의 혹한속에서 끝모를 대밀림을 지나고있는 부대가 안일해졌다는것은 붕괴직전에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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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마려단이 돌아서는바람에 오중흡은 당황해났다. 그는 7도구치기에서 사령부와 헤여진 이래 내내 통신원을 보내여 전투정형을 보고드리고 사령부의 이동방향도 알고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헤여진지 한달이 넘는데다 사령부가 야산지대로 내려간 다음부터는 련계를 지을수가 없었다. 그럭저럭하다나니 련대는 지양개치기까지 이르렀다. 사령부의 소식을 모르는것은 여간 궁금하고 답답한 일이 아니였지만 적의 《토벌》무력가운데서도 중추를 이루는 혼마려단이 계속 검질기게 따라올뿐아니라 하늘에 비행기까지 까맣게 덮쳐들고 앞뒤로 증강무력이 자꾸만 늘어나는것을 보면 마음이 놓이였다. 하루에도 수십차례씩 전투를 하면서 달리는 걸음이라 먹을 새도 쉴새도 없고 먹을래야 먹을것이 없기도 하였지만 적을 쳐서 식량과 탄약을 해결하며 줄곧 강행군을 들이대는 그 고생이 곧 사령부의 안녕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발걸음이 가벼웠다. 낯익은 곰의골에 들어서면 그 첩첩한 밀림속에 적들을 감쪽같이 끌고가서 눈속깊이 구겨박아버리고 돌아설참이였다. 그런데 적들은 오중흡의 마음속을 미리 점쳐 보기라도 한것처럼 밀림에 들어서서 얼마가 못되여 발걸음을 삑 돌리고말았다. 습격조를 파견하여 아무리 뒤를 조겨도 그냥 달아나기만 한다. 하도 이상해서 장경수를 거리에 내보내여 알아보았더니 가재수부근에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가 있다는것을 알고 밀림에 깊이 들어갔던 《토벌》무력들이 일제히 장백―림강사이의 대도로로 이동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리고보니 적들이 달아나는 꼴이 무슨 이동명령을 받은게 확실한것 같다. 사령부로 가장하는 행군은 이제 끝이 났다. 어떻게 할것인가? 오중흡은 머리를 싸쥐였다. 모든 적들이 사령부로 쏠리고있을것은 뻔하다. 그런데 사령부에는 탐탁한 전투력이라고 없다. 사령관동지께서 경위중대의 끌끌한 대원들을 다 바꾸어주시고 남은 그 인원을 데리시고 수십만의 적을 겪으실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중흡이 우등불앞에 앉아 한달동안에 몰라보게 두드러져오른 관골을 두눈과 함께 싸쥐고 막막한 생각에 잠겨있는데 강철룡이 헐떡헐떡 달려왔다. 《련대장동무, 소식 들었소다?》 《소식이라니?》 오중흡은 볼에서 손바닥을 떼지 않은채 눈을 치떠보았다. 그에 따라 귀덮개가 떨어진 털모자가 너풀거린다. 강철룡이도 못쓰게 되였다. 워낙 장대한 사람이 살이 다 빠지자 그슬리다 만 강대나무같은 인상을 주는데 거기에 솜이 광주리속같이 피여난 군복을 걸치고 피곁으로 동여맨 신을 신고있다. 하기는 그가 이번 행군길에 쏘아제낀 기관총탄알을 다 지고가자면 실한 황소라도 나가넘어질것이다. 사람이니 그만큼 견디지 미물이라면 제아무리 실한 짐승이라도 진작 눈구뎅이에 묻히고말았을것이였다. 《참 굉장한 소식이오다. 잠간… 내 숨을 좀 태우고…》 강철룡은 오중흡이 괴로와하고있다는것을 알기때문인지 별로 수선스럽게 굴며 우등불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워낙 조용하지 못한 성미이지만 그래도 다른 대원들이 옆에 없으면 함께 전사시절을 보낸 옛정의도 있고 해서 정색하여 말하기를 거북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지금 숨을 가쁘게 들이쉬며 갑자르는것을 보면 무슨 체면같은것을 돌아볼 경황이 있는것 같지를 않다. 《대체 어떻게 된거요? 소대에서는 뭘 좀 먹기나 했소?》 오중흡은 우묵하게 패워들어간 철룡의 부리부리한 눈을 주의깊이 살피며 물었다. 그는 그저께부터 적이 돌아서서 뛰는바람에 사령부 걱정만 내내 하다나니 미처 소대들의 식량형편도 알아보지 못했다는것을 깨닫고 면구스럽게 생각하였다. 《뭐 그럭저럭 먹었겠지오다. 헌데 이거 굉장한 일이 생겼소다.》 강철룡은 그역시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수 스쳐버리고 다시 수다스럽게 떠들기 시작하였다. 《여보, 소대장동무, 말을 하겠으면 좀 시원히 말하오. 무엇이 굉장하단 말이요?》 오중흡은 마침내 볼을 받치고있던 손바닥을 훌 떼며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또다시 털모자의 귀덮개가 너풀거린다. 《련대장동무, 좀 가만있소다. 이거 나도 너무 희한해서 그러쟁이요. 내 방금…》 하고 강철룡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나서 다시 덤비며 말을 시작하였다. 《저놈들이 무엇때문에 그렇게도 급히 내뛸가 하는것이 궁금하기도 하고 어디 좀 답새겨줄데는 없을가 해서 숙영지를 나가보지 않았겠소.》 《소대장동무가 직접 갔단 말이요?》 《그렇지요. 날강냉이를 두어이삭 뜯어먹었더니 속도 트직하고… 참 아까 련대장동무가 뭘 좀 먹었느냐고 물었지요? 우리도 어제 산림대밀영에서 얻어낸 그 강냉이로 요기를 했소다. 그래 속도 삭일겸 그놈들 숙영지로 나가보았지요. 했더니 뭐 아주 태평스럽게 판을 벌리고 자빠져자는데 드문드문 선 보초라는것들도 불을 피워놓고 끄떡끄떡 졸고있더란 말이오다. 습격을 몇번씩이나 받으면서도 그 모양인걸 보니 이제는 아주 지쳐빠진것 같소다.》 오중흡이에게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였다. 그에게는 강철룡이 자신이 적진속까지 들어갔다 나왔다는것 자체가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 적정으로 말하면 벌써 초저녁에 정찰을 내보내여 그러루한 정도의 자료는 알아가지고 왔었다. 지금 적과 아군의 숙영지는 1,000메터 되나마나하게 떨어져있어서 그럴 생각만 있다면 놈들의 숙영지를 한바퀴 돌고오는것쯤 그리 큰 문제로 될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속이 클클하다 하더라도 소대장자신이 그속에 들어간다는것은 좋은 일이 못된다. 단지 리해되는것은 그역시 자기 못지 않게 사령부를 향해 달려가는것이 분명한 놈들을 잡아붙들지 못해 안타까와하는 그 심정이였다. 오중흡은 참을성있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저놈들의 숙영지 한복판까지 들어갔다가 그냥 돌아온다는것이 어째 밑지는것 같아서 몇놈 쏘아눕히고 올가 하다가 가만 생각하니 련대장동무가 노할것 같아 그냥 빈손으로 돌아섰소다.》 《그런데 소식은 무슨 소식이요?》 오중흡은 우등불을 와락 잡아헤치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런데말이우다.》하고 강철룡은 오중흡이 역증을 내건말건 바싹 다가앉으며 생살이 드러난 그의 무릎을 잡아흔들었다. 《한 우등불가에서 적들이 몇놈 둘러앉아 수군수군 수작질을 하더란 말이우다. 보아하니 졸병들은 천막이 없어서 그렇게 불을 피워놓고 들어엎뎄는데 하도 추우니 잠은 못자고 넉두리만 하더란 말이요. 그 넉두리속에서 한놈이 우리 장군님께서 13도구를 들이쳤다고 말하더란 말이우다. 내가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서 후닥닥 들고뛰는바람에 저놈들 숙영지가 한동안 떠들썩했수다. 글쎄 우리 장군님께서 13도구거리를 들이쳐서 숱한 왜놈들을 쓸어눕히셨단 말이우다. 이게 그래 굉장한 소식이 아니란 말이요?》 강철룡은 아까부터 잡고있던 오중흡의 무릎을 세차게 잡아흔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덧 흐느낌으로 변해가고있었다. 《그게 정말이요?》 오중흡도 강철룡의 무릎을 마주잡아 흔들며 목메여 소리쳤다. 《정말이 아니구요.》 《우리 장군님께서 13도구를 치셨단 말이요?》 《그렇다니까요.》 《사람두…》 오중흡은 뼈마디투성이 강철룡을 와락 그러안았다. 그러자 강철룡은 마치 어린애처럼 흐느낌을 터뜨리며 오중흡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말았다. 소식은 삽시에 숙영지에 퍼져갔다. 13도구전투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자고 여러 중대장들과 소대장들이 찾아왔고 련대장 오중흡자신이 두번 세번 캐여물었지만 강철룡이 겨우 얻어들어온것은 김일성장군님께서 몸소 이끄신 유격대가 한밤중에 13도구거리를 들이치고 수많은 적을 쓸어눕힌 다음 바람처럼 사라졌다는것뿐이였다. 전투내용에 대해서는 너무나 알려진것이 없어서 어딘가 아쉽고 성차지 않았지만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데는 그것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립고그리운 장군님께서 건재하실뿐아니라 몸소 13도구전투를 조직지휘하셨다는것이 우선 모든 전사들의 가슴을 기쁨에 설레이게 하였다. 숙영지는 흥성거렸다. 밤이 깊었건만 지휘관들도 전사들도 잠들줄 몰랐다. 그저 한마디―장군님께서 13도구를 치셨다는 밑도 끝도 없는 소식을 가지고 온 밤을 지새우며 많고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웃으며 떠들었다. 이때 오중흡은 밀림속을 홀로 거닐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크나큰 충격과 기쁨이 온 몸을 굽이쳐간 뒤로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는 커다란 의문이 머리속을 채웠다. 아무리 사령부의 위치가 한번 드러났다고 해서 그놈들을 다시 따돌리지 못하실 장군님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몸소 13도구로 진공하셨을가? 13도구에 그 어떤 커다란 전략적목표나 작전적의의가 있다고 볼만 한것은 남패자회의에서 밝히신 사령관동지의 방침에 비추어볼 때 아직은 있어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신호가 아닐가? 가재수 구가점부근에서 사령부의 위치가 드러났다니 그때 벌써 7련대가 사령부로 가장하는것은 무의미하게 되였다. 혼마려단이 돌아선것도 그때부터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전부대가 다시 모여들어 사령관동지의 구상을 옆에서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그것은 멀리에 계시는 사령관동지께서 자기들을 부르시는 신호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령부로 쏠리는 적들을 앞질러가서 사령부를 지켜야 한다. 이제는 적들을 돌려세우려고 발목이나 잡아챌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전투를 벌려야 한다. 사령관동지께서 몸소 전투에 진입하신 이상 한놈이라도 그쪽으로 다가가는 적을 쓸어눕히면서 사령부를 보위하러 한시바삐 장백, 림강 대도로 부근으로 먼저 진출해야 한다. 오중흡의 머리속에 떠오른 이런 섬광같은 구상은 모든 지휘관들의 생각과 신통히도 맞아떨어졌다. 시간을 지체할새가 없었다. 밤중으로 전투서렬을 펼치고 강철룡을 책임자로 하는 습격조가 적의 숙영지 한복판으로 잠복해들어갔다. 귀신도 혹한에 이를 맞쫏는다는 새벽 세시경 강철룡과 장경수는 놈들의 숙영지 한복판에 사격좌지를 차지하고 번번한 눈벌에 널린 천막들과 우등불무지를 향하여 기관총의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이어 좀 떨어진곳에 매복한 최병규네가 또 반대쪽 천막들에 대고 불을 퍼부었다. 적들은 어느때나 유격대와 대치된쪽에만 일정한 전투경계를 배치할뿐 숙영은 여름날 양떼처럼 한곳에 모여서 하였다. 그것은 무시로 있는 야간습격을 막자는 타산에서 나온것이였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습격을 당하고보니 마치 장사귀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파리떼가 한 파리채에 얻어맞은것처럼 단꺼번에 풍지박산이 되여버렸다. 《오―이, 유격대다! 산으로 붙으라!》하고 천막에서 군복웃도리를 한쪽소매만 꿰고 달려나오다가 한방 맞고 나가번져지는놈이 있는가 하면 두팔로 대가리를 싸쥐고 장경수의 기관총을 향하여 엉금엉금 기여오다가 문득 고개를 쳐들어보고 뒤로 번져지는 놈도 있다. 그중에는 독한 놈도 있어서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마구 휘두르다가 탄알을 맞자 칼을 지팽이삼아 비칠비칠 걸어나오더니 《천황페하 만세》를 부르고 모재비로 꺼꾸러지는 놈도 있었다. 강철룡이 한참 신나게 기관총사격을 퍼붓고있는데 장경수가 기여왔다. 《소대장동무, 이거 야단났습니다.》 《뭘 그래, 바빠죽겠는데… 보오, 동무가 맡은놈들이 뛰지 않나. 모두 산쪽으로 몰아야 이제 련대장동무가 답새길거 아닌가, 저 벌판으로 뛰는 놈들을 후려갈기라니까…》 《그런데 기관총이 안나가오다.》 《기관총이 안나가다니?》 《아마 얼어붙은것 같소다.》 《놀구있다. 여태 쏘던 기관총이 얼어붙기는 어째 얼어붙어? 고장이 난게지.》 강철룡은 벌떡 일어났다. 《소대장동무, 이쪽도 좀 봐주시우다. 내 제꺽 가서 하나 빼뜰어 오겠소다.》 장경수는 몹시 미안해하며 말했다. 《기관총이 어디 있소?》 《저기 한놈 가지고 뛰는걸 내 쏘아눕혔는데 가져오겠소다.》 《젠장 모르겠다. 여기서 새여나가는 놈은 모두 장경수 책임이다.》 강철룡은 화가 나서 도로 눈판에 들어엎디더니 기관총을 삑― 돌려대고 벌판쪽으로 내뛰는 적들의 머리우에 불줄기를 뿜어보냈다. 장경수가 어둠속을 더듬어 겨우 기관총 한자루를 얻어메고 달려왔을 때는 적들도 그럭저럭 전렬을 수습하였다. 습격조원들은 적들을 대부분 산턱으로 몰아붙였으나 그래도 벌판쪽으로 새여나간놈들도 있어서 결국 적들은 두패로 갈라졌다. 습격조원들은 이제는 더 사격을 퍼부울 필요가 없게 되였다. 산우에서는 련대장 오중흡이 자꾸만 내달리려고 들먹거리는 전사들의 덜미를 겨우 눌러잡고있었다. 동이 훤히 터왔다. 적들은 피로 얼룩진 광야에 누데기쪼박처럼 흩어져누운 주검들을 보고 겁에 질려 우들우들 떨다가 겨우 제편들을 찾아 모여들었다. 바로 그때를 기다리고있었던 오중흡은 권총을 하늘높이 쳐들고 돌격신호를 울렸다. 나팔수가 잦은 가락으로 맵짠 돌격나팔을 불어제꼈다. 《만세―》 산이 허물어져내리는듯 유격대원들의 돌격서렬이 사태져내렸다. 혼마려단은 통채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뿔뿔이 흩어져서 눈속으로, 벼랑으로 마구 내뛰였다. 기꾸찌는 단숨에 펑퍼짐한 고개 하나를 달려넘어 눈앞에 가로질린 절벽앞에 서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양말 하나를 신고 속옷바람으로 허리까지 치는 눈속을 달렸는데도 춥기는커녕 목에서 단내가 확확 풍겨오고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땀은 속옷에 닿자마자 꾸등꾸등 얼었지만 조금도 시원한 맛이 안났다. 간밤에 술을 지나치게 퍼먹었다는 생각이 났다. 그는 갈증이 나서 눈을 한줌 움켜먹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에도 사람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선가 총소리는 그냥 울리였다. 필시 유격대는 사람들이 몰켜있는곳으로 추격해갔을것이다. 그러고보니 외딴곳으로 혼자 내뛴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수염이 꺼칠한 턱에서 눈이 녹아 흘러내렸다. 이제는 어떤 계집이 모양을 봐줄 까닭도 없으니 수염을 깎을 필요도 없었지만 꺼칠한 수염은 태반이 야생화된 밀림속의 《황군용사》들을 통솔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실상 끼꾸찌의 수염은 장부다운 숱도 길이도 없었고 다만 지쳐빠진 애숭이의 게으름이 배여도는 노리께한 소털같은것에 불과하였지만 그자신은 어느 전쟁영화에서 본 용사의 모양으로 자기를 상상하고있었다. 불시에 어깨가 으시시해났다. 그렇게 덥던것이 방금전 일인데 미쳐 숨도 가라앉기전에 아래다리부터 저려들어온다. 양말바람인 발끝은 막 아프기까지 하다. 《으흐흐흐.》 기꾸찌는 본능적으로 진저리를 치며 몸을 까짓것 옹송그려봤으나 추위는 가속도적으로 심해왔다. 그것은 벌써 추위라고 할 그런것이 아니였다. 춥다기보다 아프고 저리고 아무튼 발끝과 뒤꿈치는 지어 따갑게까지 느껴지는데 대기속에 드러난 볼과 손끝은 날이 선 칼로 싹싹 저며내는것 같다. 아니 무슨 감각이 느껴지는데는 그래도 나은편이였다. 머리속이 웅― 하고 얼어든다. 그것은 꼭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랭동기가 돌아가는 소리같이 느껴졌다. 가슴속도, 심장이며 페며 밸까지 다 얼어든다. (큰일났구나!) 기꾸찌는 눈과 코구멍에 꽉 막히도록 달라붙는 성에를 문질러 떼며 무작정 뛰였다. 한참 뛰다가보니 벼랑으로 나서고있었다. 그러나 머리속이 랭동되여버려서 그런지 기꾸찌는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텀벅텀벅 눈속으로 들어가서 주르르 벼랑을 타고 미끄러져내렸다. 서너길 미끄러져내리고나니 머리가 얼떨떨해졌으나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만은 검질기게 남아있어서 이번에는 두손으로 넙적다리를 치는 눈을 짚으며 또다시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벼랑앞에서 무엇이 꽥 하고 소리를 친다. 돌아봐야 사람은 보이지 않고 또 자기를 향해 뭐라고 하는것 같지도 않았다. 잠시 주밋거리다가 추위의 공포에 쫓긴 기꾸찌는 또다시 터벅터벅 눈을 헤치며 나갔다. 《아, 중대장님!》 분명 이런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방금 자기가 굴러떨어진 벼랑에 잇달려서 너럭바위가 추녀처럼 내뻗어나왔는데 그밑은 눈도 없고 우선 아늑해보였다. 거기서 지금 미즈시마 2등병이 털외투를 입고 한절반 뒤로 넘어져있는데 어떤자가 그의 한쪽다리를 쳐들고 털군화를 벗기고있었다. 자세히 보니 곤도소위였다. 그 역시 발은 맨발이였지만 아래우에 군복은 걸치고있었다. 간밤에 미즈시마는 불침번을 서고있었다. 아니 미즈시마는 장교침실에서 항상 불침번을 서야 했다. 그러니 그는 외투도 입었고 털군화에 털모자까지 쓰고 게다가 그 볼꼴 사나운 녀자의 털속옷까지 목에 감고있었다. 《소대장님, 이거 벗으면 나는 어찌합니까? 아 중대장님!》 미즈시마는 곤도에게 신을 벗기우지 않으려고 발버둥질이다. 그러면서 연방 기꾸찌를 돌아보는 품이 자기더러 도와달라는것이다. 기꾸찌는 방금까지 떨던 사람답지 않게 그 바위밑으로 틀스럽게 걸어갔다. 곤도는 단단히 졸라매였는데다 버드럭거리는바람에 벗겨내기가 힘들어 낑낑거리던 미즈시마의 군화를 두손으로 움켜쥔채 다가오는 기꾸찌를 쏘아본다. 그 눈에는 동물적인 증오와 함께 자기보다 훨씬 더 한심한 꼴을 한 기꾸지에 대한 모멸감이 로골적으로 드러나고있었다. 《흥, 중대장님도 꽤 춥겠수다그려. 이놈의 외투나 벗겨입수다.》 곤도는 자기앞에 와서 말없이 떡 뻗치고 서는 기꾸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 중대장님!》 자기를 도와주러 오거니만 생각하고있던 미즈시마는 곤도의 말에 놀라 한손으로 털외투자락을 부둥켜쥐였다. 기꾸찌는 잠시 두놈의 꼴을 번갈아보았다. 곤도의 퍼리우리 언 뻔뻔스러운 상판이나 공포에 질린 미즈시마의 개상이나 하나같이 사람다운데는 없고 무엇때문엔지 악착하리만큼 짓밟아뭉개버리고싶은 증오심과 정의가 끓어오를뿐이였다. 코물이 괴죄죄하게 흘러내려서 얼어붙은 기꾸찌의 꼴 역시 어느 구석에도 귀족적인데는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야수적인 감정을 제꺽 알아본 곤도는 제잡담 미즈시마의 군화를 비틀기 시작하였다. 《아야야―》 미즈시마는 비명을 지르며 한바퀴 눈우를 딩굴어났다. 새하얀 개털을 댄 털외투자락이 눈가루를 날리며 펄럭거렸다. 이지러진 미즈시마의 얼굴이 눈무지를 핥으며 눈앞에 떠올랐다. 동향인이라고 그렇게 각근히 돌봐주던 생각이 얼핏 머리속을 스치고지나갔다. 그 순간 군화 한짝이 곤도의 털부숭이 손아귀에서 붙잡힌 군화 한짝이 흔들흔들 빠져나가는 모양이 눈동자를 지졌다. 곤도를 말릴 아무런 정의도 권위도 힘도 자기에게는 없다는것을 통감하는 순간 기꾸찌는 와락 달려들어 미즈시마의 외투자락을 잡아챘다. 마침 복사뼈가 비틀리는바람에 뒤채눕는 미즈시마의 몸에서 털외투는 쉽게 벗어져나왔다. 털외투뿐아니라 목에서 녀자속옷바지까지 풀려나왔다. 《살려주―》 미즈시마는 서럽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기꾸찌는 돌아보지도 않고 초조히 떨리는 손으로 우선 털외투를 제몸에 걸쳤다. 그리고 눈우에 풀려나서 딩구는 녀자속옷바지를 껴입었다. 그때가지도 곤도는 군화 한짝을 다 벗기지 못하고있었다. 복사뼈를 겨우 빠져나오자 발가락이 어찌다 신끈에 걸려 거들거렸다. 기꾸찌는 자기 발이 이제는 몸의 어느 부분보다도 가장 시리고 또 앞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요긴한 부분이라는것을 깨달았다. (역시 저놈은 엉큼한 놈이야,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거던.) 이렇게 곤도를 바라보며 생각한 기꾸찌는 그놈이 다른 한쪽에 마저 손을 뻗치기전에 한짝이라도 자기가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기꾸찌는 껑충 뛰여 맥을 놓고 뻗어있는 미즈시마의 한쪽발에서 불의에 신끈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뒤축에 손을 대고 힘을 주자 문제없이 미끄러져나왔다. 《중대장님, 고맙수다.》 곤도는 겨우 한짝을 벗겨들자 신을 사이도 없이 아직 채 벗어져나오지 못한 나머지 한짝에 손을 뻗쳤다. 그도 기꾸찌의 의도를 짐작한것이다. 《아니 이건 내거야.》 기꾸찌는 오늘아침 두놈을 만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빽하고 소리쳤다. 《뭐요?》 곤도는 쉰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더니 한걸음 물러섰다. 기꾸찌는 얼른 한손을 속옷허리에 찔렀다. 아침해가 숲정수리를 기웃이 넘겨다 보고있었다. 엷은 해발을 타고 쌀쌀한 바람이 눈벌로 기여나와 폴폴 눈가루를 날리는데 그속에 연하디연한 노을이 물들어있었다. 어디를 둘러봐야 사람의 흔적이라군 보이지 않는다. 《개새끼! 못놓겠니!》 곤도는 불의에 기꾸찌를 덮쳤다.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기다리고있던 기꾸찌는 놈이 덮치는 순간 권총으로 면상을 후려갈겼다. 《버릇없는 놈? 상관도 몰라보는가!》 《상관? 개떡같다. 너 이새끼, 나를 가방끈으로 쳤지?》 어느덧 두놈은 군화를 쥐여뿌리고 마주 그러안았다. 기꾸찌는 힘에 있어서 곤도의 적수가 못되였다. 그러나 곤도가 달려드는 순간에 권총으로 박아준것이 마침 눈통을 짓이겨놓아서 곤도는 그때문에 피를 흘리며 비칠거렸다. 《이자식아! 부대에 가서 보자!》 기꾸찌는 이를 으드득 갈며 윽 별렀다. 곱게 다듬어졌던 이틀에서 피와 거품이 함께 배여나와 입귀에 갈품처럼 뿌지직뿌지직 괴여올랐다. 그우에 곤도의 눈통에서 흘러내린 피가 또 볼을 뻑 문대여놓았다. 《부대가 어데 있어! 이 자식아! 부대가 어데 있느냐말이야!》 곤도는 마침내 기꾸찌를 깔고타더니 목줄기에 손아귀를 들이밀며 따지고들었다. 기꾸찌는 그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그놈의 손이 턱밑으로 기여들기만 하면 마지막이다. 기꾸찌는 아까 미즈시마의 발목이 돌아가듯이 턱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거미다리처럼 버드럭거리는 곤도의 손이 어찌다 제 코밑을 스치는 순간 온 몸의 힘을 다하여 그것을 입에 물어넣는데 성공하였다. 《악―아―ㄱ―》 곤도는 화닥닥 몸을 뒤채며 비명을 질렀다. 이때 미즈시마는 자기의 신을 두고 피투성이싸움을 벌리고있는 중대장과 소대장을 남겨두고 천천히 눈벌로 기여가고있었다. 그도 지난밤 전투때 어지간히 얼이 나가버린데다 방금 본 끔찍한 광경앞에서 너무나 진저리가 나 온 몸에서 맥이 다 빠지고 없었다. 유격대의 돌격나팔소리가 울린 그때부터 달려왔으니 힘도 진할만큼 되였다. 그는 일어서는것이 두려웠다. 일어서려 해도 신이 없었지만 일어섰다가는 그 누구에게 또 들키여 깝대기를 아예 벗기울것만 같았다. 총을 끌고 기여가기란 여간 불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군인의 본능으로서 그것을 버릴 생각은 영 떠오르지 않았다. 뒤에서는 기꾸찌와 곤도의 비명이 번갈아 들려왔다. 그러나 미즈시마는 돌아도 보지 않았다. 돌아볼 맥도 없었지만 돌아보기가 끔찍하였다. 그는 숨을 씩씩거리며 묵묵히 기였다. 털외투를 벗기우고 신까지 벗은 몸으로 온 몸이 다 묻히는 눈벌을 한참이나 기고나니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빠직빠직 흘러나와 그대로 성에로 변하는데 아래도리부터 차츰 감각이 없어져간다. 틀림없이 얼어드는것이다. 마침내 밋밋한 언덕 하나를 넘어섰다. 이제는 누구의 목소린지 구별도 안되는 비명이 떠나온 벼랑밑에서 가까스로 들려오더니 이어 잠잠해졌다. 죽음의 격투가 이제는 끝난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청각이 이제는 아주 얼어붙어버렸는지 알길이 없다. 미즈시마는 별로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힘있는껏 기였다. 그는 자기가 기여가는 목표도 목적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아직 살아있으니 기여가는것이였다. 사실 그가 언제 버젓이 일어서서 걸어본적이 있었던가. 그는 세상에 태여나서 이날이때까지 그렇게 기여왔다. 언덕은 어느새 내림받이로 되였다. 고개를 쳐들었다. 무수한 발자국이 그 언덕을 따라 숲속으로 향해 들어갔다. 해는 등뒤 어방에서 비치고있었다. 그러고보니 자기는 깊은 숲을 향해 기여가고있는것이였다. 발자국은 새벽에 돌격해내려왔던 유격대가 철수해간 발자국이 틀림없었다. 미즈시마는 그 자리에 들어엎드려 한참 생각하다가 특별한 리유도 없이 방향을 돌리려고 미미적거렸다. 그런데 눈우에 이상한 글자가 깊숙이 새겨져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밑천이 밭은 미즈시마로서 더구나 정신이 가물거리는 지금 그 글자들의 뜻을 인차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전세계 무산청년들아!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총을 들고 일어서라!》 이러한 뜻을 겨우 새겨본 미즈시마는 무엇때문엔지 자기 손에 아직도 튼튼히 틀어쥐여져있는 육중한 보총을 내려다 보았다. 그는 그 총을 슬그머니 끌어당겨보았다. 무거워서 잘 끌려오지 않는다. 격발기가 눈무지를 파헤치며 총구가 겨우 머리 있는데까지 끌려왔을 때 미즈시마는 맥을 놓고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이제는 몸이 절반이상 얼어버렸다. 자기는 여기서 얼고 굶어서 죽어버리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도 별로 슬픈 생각은 없고 어쩐지 효고산골의 자기 집 사림문앞에서 몬뻬를 걸치고 물지게를 진 안해가 인기척에 놀라 뒤를 돌아보는 현실 같기도 하고 환영같기도 한 형상이 눈우에 그려졌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별안간 미친놈의 웃음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얼핏 돌아보니 곤도가 자기의 녀자속옷을 목에 걸치고 군화를 한손에 한짝씩 들고 눈우를 갈지자로 비척거리며 걸어온다. 그의 상통은 갈갈이 뜯기우고 헤쳐져서 마치 고양이가 훔쳐먹다가 들켜서 뱉어버린 물고기대가리 같은 인상을 자아냈다. 미즈시마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제발 다른데로 가주었으면…) 그것은 미즈시마가 살아서 이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기원이였다. 그는 30평생 내내 빌며 살아왔지만 한번도 이루어본적 없는 마음속기원을 이번만은 이룩할수 있었다. 곤도는 미친 웃음소리를 눈벌에 끌면서 털군화를 한손에 하나씩 쥐고 맨발로 밀림속 깊이깊이 빨려 들어가고있었다. 그리고 미즈시마는 그 멀어져가는 웃음소리에 마음을 놓고 10분후에 완전히 얼어붙어버렸다. 9
아무리 굉장한 사건과 사변들이 세상을 뒤흔들고있어도 그 파문이 청봉의 울창한 수림속까지 미쳐오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절해고도와 같이 세상과 동떨어진 이 숲속에도 자기나름의 사건과 사변들이 날에날마다 일어나서 저대로 들끓고있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있는곳이면 크건작건 하나의 사회를 이루게 마련이고 사회를 이루는 이상 사회적인 관계가 생기기때문이였다. 전날 철구아주머니와 채옥이가 누워있던 아래목에는 지금 옥금이와 금숙이가 누워있다. 철구아주머니의 부위가 좀 내리고 채옥이의 눈도 좋아졌으며 독소금에 중독되였던 그의 속이 어느 정도 편해진것도 사실이였지만 아래목을 내준것은 그때문이 아니였다. 지금 금숙이와 옥금은 엄광호의 고문에 상하여 운신을 못하게 되였다. 녀대원들의 병실이 통채로 감방으로 변해버린 형편에서 고문을 당한것은 그들 두사람만이 아니였지만 엄광호는 유독 그들에게 심하게 굴었다. 그래도 그들은 일을 놓지 않는다. 손가락끝마다 송곳으로 들쑤셔놓는바람에 손끝에서도 피가 배여나왔지만 옥금이도 금숙이도 그런 손끝에 골무처럼 두툼하게 천을 감고 김정숙동지께서 둘러내신 군복의 혼솔을 마무리하기도 하고 시침을 해주기도 한다. 금숙이는 김정숙동지께서 억지로 일감을 빼앗으시면 돌아누워 군모의 오각별을 정성스레 수놓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정 일감이 떨어지거나 마음이 산란해지면 눈에 묻히여 겨우 웃전만 드러나는 반토굴병실의 뙤창밖을 내다보며 가만히 노래를 불렀다.
이십세기 용감한 녀성투사들 문명한 활무대에 나서 싸우자 로동자와 농민의 자유해방은 무산자의 굳고굳은 단결에 있다.
이렇게 한참 이 노래 저 노래를 부르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 태혁의 《세계혁명가》를 몇절씩 부르기도 하였다. 다른 노래를 부를 때는 모두 조용조용히 따라부르다가도 《세계혁명가》가 나오면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나 하도 간절한 심정이 된 금숙은 그런것도 모르고 혼자 몇절씩 부르다가 제김에 낯을 붉히며 노래를 그쳤다. 그러면 동무들은 까르르 웃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미소를 짓기도 하였다. 《참 무슨 인간이 그럴가?…》 오늘은 아침부터 왜 그런지 무거운 생각에 잠겨 노래도 부르지 않고 누워있던 금숙이가 오각별을 수놓던 새 군모를 가슴우에 놓으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것이 엄광호를 두고 하는 말임을 인차 짐작하셨으나 못들은체하고 재봉기만 두르셨다. 바깥에는 엄광호가 보낸 보초가 둘이나 서있다. 그들은 무슨 악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교대할 때마다 엄광호에게 불리여가서 《감방》안의 분위기며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다 고해바치게 되여있다. 만일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근무태만으로 규탄을 받는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삼엄해진 밀영의 사태를 바로잡는데 그러한 말을 주고받는것이 좋을것도 없었다. 김정숙동지께서 가만히 계시고 다른 동무들도 묵묵히 일손만 놀리고있으니 금숙은 이쪽으로 돌아누웠다. 《언니.》 《왜 그래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재봉침에 묻어나오는 북실을 물어끊으며 얼굴을 돌리셨다. 담요로 가슴우까지 가리우고 누운 금숙은 그렇게 억실억실하던 처녀가 말아니게 축가서 훨씬 나이들어보인다. 그러나 수건우에 나래를 펼친 머리만은 여전히 탐스럽다. 《그놈이 처음부터 반혁명분자가 아닐가요? 언니는 그놈을 전부터 잘 안다지요?》 역시 엄광호에 대한 말이다. 이제 녀대원들은 아무도 그를 이름이나 직명으로 무르지 않고 《그놈》이라고 불러내치군 했다. 《…글쎄 처음부터 어쨌는지 그것은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지금은 매한가지지. 우리 혁명이 꼭 승리한다는 신심을 잃으면 모두 그렇게 되는가봐. 언젠가 장군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신념을 잃어버리면 타락한다고 말씀하셨어.》 《정말 어쩌면 그놈은 우리 혁명이 승리한다는것을 믿지 못할가? 매일 하늘에서 왜놈들의 비행기소리가 울려오기때문일가…》 아닌게아니라 하늘에서 적기들이 숲속을 뒤지며 돌아가는 폭음이 울려왔다. 한동안 뜸해졌던 적기들이 요즘 또 이 아근에 나타나서 분주탕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엄광호도 더 사납게 군다. 바깥에서 누군가를 향하여 빨리 숨으라고 소리치는 엄광호의 석쉼한 목소리가 울려오고 어딘가로 내뛰고 와당탕거리는 여러 사람의 발자국소리도 울린다. 그러나 녀대원들은 잠자코 일손을 놀릴뿐이였다. 그날 학습회가 있은 다음부터 엄광호는 로골적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각성이 부족하고 의식수준이 낮은 신대원들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우격으로 내리눌러서 김정숙동지를 비롯한 녀대원들을 모해하는데 리용하려고 하기도 하였다. 그는 성림을 잡아가두고 고문을 들이댔다. 성림이가 초소를 떠난데다 그의 주머니에서 삐라가 나왔다는것이 일부 사람들의 의심을 자아내기도 하여서 엄광호는 거기에 등을 대고 마음대로 성림이를 다룰수 있었다. 그는 본시 성림이의 약점을 알고있었다. 며칠동안 재우지 않고 들볶아놓으니 별의별 소리를 다 주어섬겼다. 녀대원들이 밀영간부들을 모해할 음모를 꾸몄다는것이며 옥금이가 적과 내통하고있다는것이며 간부들을 독살하자고 자기를 꾀였다는것이며 이쪽에서 요구하는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엄광호는 그것을 언터구로 삼아 재봉대원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여 《자백》을 받아내자고 고문을 들이대는데까지 이르렀다. 물론 옥금이나 금숙이는 말할것 없고 엄광호가 그중 푸수하게 본 철구아주머니나 채옥이까지도 그의 반혁명적행동을 규탄할뿐 한마디도 요구하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결국 녀대원들의 병실은 감옥이나 다름없이 되였다. 엄중한 감시가 세워졌고 진짜 감옥처럼 식사도 줄이고 불가피한 바깥출입도 단속되였다. 재봉대원들은 그런속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재봉기를 돌렸다. 엄광호는 그들이 사령관동지의 지시에 따라 군복을 지어야겠다고 내우기자 그것만은 말리지 못하게 되였다. 손재연이도 녀대원들이 일을 하거나 학습을 하는거야 진짜 감옥에서도 시키는것인데 어찌겠는가 해서 하는수없이 내버려두게 된것이였다. 그런 과정에 새로 지은 군복은 재봉대원들이 겪은 고통의 량과 정비례하여 높이 쌓여갔다. 최근에는 김정숙동지께서 따로 건사하여오신 천으로 사령관동지의 봄외투를 짓기 시작하시였다. 이 군복과 노래는 녀대원들의 불굴의 지조와 신심을 말해주는 반면에 엄광호에게는 가슴을 찌르는 비수로 되였다. 그리하여 엄광호는 문제가 크게 번지기전에 일을 끝장낼양으로 최근에는 와짝 고문의 강도를 높이였다. 그바람에 옥금이도 드러눕고 금숙이조차 쓰러졌다. 처음에 말이 나기 시작한것이 그들 두사람이기때문에 그런 점도 있지만 김정숙동지와 직접 마주서는것을 그도 어쩐지 꺼려하는 눈치였다. 어쨌든 엄광호가 무슨 수를 꾸미고있다는것은 김정숙동지께서도 짐작이 갔다. 그래 그이께서는 요 며칠동안 불안한 마음을 누르시며 어떻게 하면 이 사태를 수습할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엄중한 사태를 장군님께 알릴것인가 하고 궁리하고계셨다. 그러면 헤여진지 두달나마 되여오는 사령부에 대한 그리움, 엄광호의 수작대로 하면 적의 《대토벌》이 산과 들을 샅샅이 훑어내는 이때 사령관동지께서 건강하실가 하는 불안이 갈마드는것이였다. 엄광호가 지금 당장 무슨 수를 쓰지 않는다 해도 계속되는 고문을 그냥 버려두면 그 채찍아래서 모두 쓰러져 죽을것만 같았다. 혁명하겠다고 이 길에 나서서 꽃다운 청춘을 아낌없이 바쳐가는 이들이 반혁명분자의 손에 걸려 오히려 반혁명의 루명을 쓰고 이런 인적없는 산속에서 죽어버린다면 그처럼 분하고 원통한 일이 또 어데 있을것인가. 별안간 반토굴출입문이 와당탕 하고 열리였다. 누워있던 동무들도 모두 놀라서 돌아보았다. 손재연이가 대원 세사람을 데리고 들어섰다. 그들은 녀성병실이 《감방》으로 변한 다음부터 일체 난다든가 기척을 내는 법이 없었다. 손재연은 날카로운 눈길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모조리 뒤져!》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뒤따라온 대원들이 우르르 병실우로 뛰여올라와서 벽에 나란히 정리해세운 배낭과 사품들을 잡아헤쳤다. 《이게 무슨 일이예요?》 김정숙동지께서 벌떡 일어나시여 그들의 앞을 막아나서며 소리쳤다. 《비키오. 사품을 다 검열해야겠소.》 손재연이가 문쪽에 등을 대고 서서 엄격하게 말했다. 《무엇때문에 검열해요? 녀자들의 사품에 함부로 손을 댈 권리가 누구에게 있단 말이예요?》 《권리? 흥.》 하고 손재연은 코웃음을 탁 치더니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쳤다. 《반혁명분자들에게 제재를 가하는데 무슨 권리가 필요한가말이요. 일체 사품을 뒤져서 독약을 압수하라는 밀영책임자동무의 긴급지시오.》 《독약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기계적으로 물으시였다. 《시치미를 뗄 때는 이미 지나갔소. 리성림이가 다 불었단 말이요. 리성림이가 밀영간부들을 독살하라고 주었다는 독약을 내놓소. 자발적으로 내놓으면 뒤질 필요도 없소.》 김정숙동지께서는 눈을 감으시였다. 또 무슨 음모를 꾸미겠지 하고 생각은 하셨지만 이렇게까지 치사하고 너절한 음모를 꾸밀줄은 차마 생각 못하시였다. 그래도 한때는 공산주의를 한다고 떠들고다니던 인간이 정세가 좀 어려워졌다고 이렇게도 뻔뻔스럽고 야비한 짓을 아무 꺼리낌없이 할수 있을가. 김정숙동지께서는 결연 앞으로 걸어나갔다. 《어디를 가오?》 손재연이가 그앞을 가로막아나서며 따졌다. 《비켜요. 난 밀영책임자를 만나야겠어요.》 《흥, 갇혀있는 몸으로 가길 어디에 간단 말이요. 못가오. 이 동무를 끌어넣소.》 손재연은 데리고온 대원들을 호령하며 김정숙동지의 앞길을 다시 막았다. 손재연의 언행도 전에없이 거칠어졌다. 본시 수준이 어린데다 정세에 암둔하여 엄광호의 장단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도 어딘지모르게 기연가미연가 해서 떨떠름해있던 그가 이처럼 거칠게 나오는것을 보면 리성림이가 자백했다는 《독살음모》며 독약이며 하는것들때문에 대단히 흥분한 모양이다. 그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물러서실수 없었다. 《길을 내지 못하겠어요?》 하고 김정숙동지께서는 똑바로 손재연을 쏘아보시였다. 그 서느럽게 빛나던 눈에서는 황황 불길이 타번지는듯 하였다. 평소에 김정숙동지을 잘 알고있고 그에 대한 소문도 들은바 있는 대원들은 감히 그 곁에 다가서지도 못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손재연을 당장 불태워버릴듯 그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보며 날카롭게 말씀하시였다. 《동무는 이게 김일성장군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동이라는것을 정말 모르겠어요? 동무도 공산주의를 배웠지요? 어디에 이런 무례하고 야비한 행동이 있단 말이예요? 원쑤들과 싸울 생각은 하지도 못하면서 죄없는 녀자들을 가두어놓고… 동무가 무슨 권리로 내 앞길을 막아요? 동무가 사령부재봉대를 지휘할 권한이 어디 있어요? 동무가 도대체 언제부터 혁명을 했기에 철구아주머니나 옥금동무같은 혁명선배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예요? 비켜요!》 손재연이가 너무나 세찬 반격에 얼떨떨해서 미처 대답할 말을 못찾고있는데 어느새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의 옆을 칼날처럼 째고 씽하니 문밖으로 나가시였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적기들이 날개를 기우뚱거리며 날아다니고있었다. 그 폭음에 휘말려든듯 밀림에서는 눈보라가 기둥처럼 피여오르고있었다. 그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꼿꼿이 엄광호의 반토굴로 걸어가시였다. 손재연이가 그랬듯이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방안에 들어서자 마주앉아있던 두사람이 소스라쳐 일어났다. 저쪽구석에서도 방금 보초교대를 하고 돌아온 두사람이 놀라서 엉거주춤 허리를 일으킨다. 리성림은 고문에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책상 한끝에 불편스럽게 앉아 무엇인가 쓰고있고 엄광호는 털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앉아 리성림이가 써낸것을 들여다보고있었다. 《동무가 어떻게 왔소? 어서 문부터 닫소.》 엄광호는 문턱에 선채 똑바로 쏘아보시는 김정숙동지를 보자 몹시 당황한듯 이렇게 말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손을 뒤로 돌려 쾅 하고 문을 닫으신 다음 조용히 말했다. 《동무를 만나러 왔어요.》 《나를? 그럼 이리 와 앉소. 그런데 손재연동무가 가지 않았소?》 《왔어요. 밀영책임자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짐승같이 굴길래 그것이 동무의 명령이 확실한가 알아보기 위해서 왔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빈 걸상 하나를 끌어당겨 엄광호와 마주앉으며 말했다. 《짐승같이 굴었다? 그건 무슨 말이요? 그건 혁명가에 대한 지나친 표현이 아니요?》 《나는 그 사람을 이제는 혁명가로 보지 않아요.》 《흠, 흥미있군. 성림동무, 보란 말이요. 이 동무들의 관점은 바로 이렇소. 그러니 동무들은 나도 혁명가로 보지 않겠군.》 《두말할것도 없지요. 혁명하겠다고 목숨을 내바친 동지를 이렇게 백정처럼 고문하고 혁명의 사령부에서 보낸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인간들을 어떻게 혁명가라고 말할수 있겠어요. 당신들은 이 너절하고 추잡한 음모를 얼마나 계속할 작정이예요?》 《흥, 정면도전이군.》 엄광호는 차츰 제정신이 돌아오자 불그레한 눈알에 음울한 웃음을 짓고 책상우의 봉지를 더듬었다. 《그래, 그렇다면 이러한 독약으로 조직의 간부들을 독살하려 한 당신들은 무어요? 그건 반혁명적행동이 아니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엄광호가 헤쳐놓는 한봉지의 발그스레한 가루를 피끗 돌아보고 이어 리성림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연필로 무엇인가 긁적거리고있던 성림은 김정숙동지께서 나타나신 그 순간부터 온 몸이 굳어져버린듯 고개를 푹 떨군채 까딱도 하지 못하였다. 《그게 뭔가요?》 《이건 이자가 가지고 들어온 독약이요. 이자는 밀영간부들을 살해하기 위하여 이 독약을 녀동무들에게, 바로 동무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것을 자백했소. 이것이 바로 그 자백서요. 이것을 래일 전체 밀영성원들앞에서 읽고 독약을 보인 다음 동무들의 처리문제를 다수의 의견을 물어 결정하겠소. 그래 무슨 의견이 있소?》 《그래 우리한테 그따위 가루가 없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없기는 왜 없겠소, 나누어주었다는데… 만일 배낭속에 없다면 어디다 감추어둔게지… 허허허.》 엄광호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눈앞이 아찔하시였다. 무슨 가룬지 모르겠지만 내막을 잘 모르는 대원들,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한 부상병들과 환자들에게 충분히 의심스러운 소문을 돌려놓고 《자백서》를 읽으면서 이런 가루를 내돌린다면 당장 죽이라는 소리가 터져나올것이 뻔했다. 반《민생단》투쟁 때의 삼엄했던 나날들이 선히 눈앞에 떠올랐다. 《저 사람이 그것을 자백했는가요?》 《그렇소. 저자가 다 자백했소. 이렇게 쓰기까지 하였소.》 엄광호는 자랑스럽게 연필로 쓴 글자들이 비뚤비뚤 널려있는 종이장을 눈앞에 들고 흔들었다. 《그렇다면 그건 당신이 다 책임져야겠군요.》 《그건 또 무슨 왕청같은 소리요?》 《왜 왕청같은 소린가요? 저 사람은 당신이 입대시켰지요. 저 사람의 혁명성이 대단하다고 나한테 소개한것은 바로 당신이 아니던가요? 당신은 벌써 남패자에서 처음 만나던 때 일을 잊어버렸어요? 우리는 당신의 말을 믿었기때문에 다 죽어가는 저 사람을 일부러 업고왔어요.》 《허튼소리 그만둬! 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 엄광호는 아픈데를 찔리자 오만상을 찌프리며 빽하고 소리쳤다. 《당신은 일제교형리처럼 녀자들을 야수적으로 고문하더니 말버릇도 왜놈들을 닮아가는군요. 좋아요. 나도 당신같은 인간들과 더 할말이 없어요. 그대신 저 사람에게 한마디만 말하겠어요.》 그러나 엄광호는 책상을 탕 치며 다시 부르짖었다. 《썩 물러가지 못해, 그렇지 않으면 당장 묶어서 땅굴에 처박겠다.》 《무섭지 않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벌떡 일어나서 마주 소리치시였다. 《너는 뭐냐? 네가 뭐기에 나를 호령해! 너는 이 겨울이 무한정 길고 우리 혁명이 끝장난줄 알지만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기어코 우리를 찾아오실것이다. 설사 네가 우리를 죽인다 해도 네놈의 죄는 감추어지지 않을것이다. 혁명이 있는 이상 혁명가들을 학살한 네놈들이 어떻게 살아난단 말이냐. 혁명이 죽는 법은 없다. 이 땅에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우리 혁명은 기어코 승리한다. 너는 그날을 믿지 않고 이제는 그날을 제일 두려워하겠지만 그날은 기어코 오고야말것이다.》 그러면서 김정숙동지께서는 리성림을 돌아보시였다. 고개를 푹 떨구고 나무등걸처럼 숨기 없이 앉아있는 그가 한편 가엾게도 보였다. 《리성림동무, 그렇게 살고싶어요? 동지들을 팔아서 죽이고 더러운 인간들과 한짝이 되여 혁명을 배반하면서 그렇게 살고싶어요?》 《아― 난… 난―》 성림은 별안간 구원을 청하듯 두팔을 쩍 벌려 내대고 무엇인가 알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그 손으로 골을 싸쥐고 엎드려 흐느껴버렸다. 펼쳐댄 성림의 손바닥에는 못을 쳤는지 쇠줄을 꿰였는지 맞구멍을 낸 험한 상처가 나있었다. 《더러운것들!》 김정숙동지께서는 추상같이 두 인간을 쏘아보신 다음 삑 돌아섰다. 《서라!》 뒤에서 엄광호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권총을 더듬어 찾는듯 한 기척이 느껴졌으나 김정숙동지께서는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시였다. 순결하고 청신한 눈세계가 김정숙동지의 답답한 눈길앞에 펼쳐졌다. 그 정갈한 눈벌우로 배낭을 진 세사람이 꼿꼿이 걸어오는것이 보였다. 밀영에서는 낯선 모습이였다. 누굴가? 김정숙동지께서 방금 옮겨놓으려던 걸음을 멈추고 눈부신 백설의 송림사이를 지켜보는데 막 녀대원들의 감방에서 나온 손재연이네 일행도 멎어서서 그쪽을 지켜본다. 이윽고 손재연이네와 마주선 세사람은 일일이 악수를 나누더니 녀대원들이 갇힌 병실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것을 손재연이가 가로막아나서서 무어라고 수작하더니 모두 이쪽으로 걸어온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발볌발볌 그쪽으로 다가가시였다. 마주오는 사람과의 거리가 50메터가량 되였을 때였다. 별안간 일행가운데서 한사람이 쏜살같이 달려온다. 《아니?》 김정숙동지께서 놀라서 우뚝 멎어서시는 순간 《누나―》하고 부르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재영아》 김정숙동지께서는 저도모르는 사이 마주 소리치며 달려가시였다. 《어떻게 된 일이예요?》 《누나 잘 있었어요?》 두사람이 손을 마주잡고 깡충깡충 뛰는데 어느새 일행이 옆에와 멎었다. 《김정숙동무, 안녕하셨습니까?》 이런 목소리에 돌아보니 정지성이였다. 그옆에서 박인섭이는 히죽이 웃으며 경례를 붙인다. 《아,― 동무들.》 김정숙동지께서는 너무나 반가와 돌아가며 손을 맞잡으시다가 어느새 볼편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입안으로 흘러드는바람에 웃으며 눈굽을 훔쳤다. 병실쪽에서 손재연의 다급한 보고를 들은 엄광호가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되여 정지성이앞에 서더니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잡아흔들었다. 《반갑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않아도 사령부로 통신원을 보낼가 하던참인데 사령관동지께서 먼저 통신원동무들을 보내주셨군요. 지금 밀영은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습니다.》 《그렇겠지요. 전투력이 없는 집단에서 시련을 견디여내기가 어려울것입니다.》 정지성은 밀영에 들어서는참 이상한 공기가 떠도는것을 벌써 눈치채고 이러한 말로 인사를 대치하며 사람들의 표정을 주의깊이 살폈다. 《그런 일반적인 시련우에 우리 밀영에는 반혁명집단이 나타나서 지금 첨예한 투쟁을 벌리고있습니다. 그래 사령관동지의 결론을 받자던참입니다.》 《반혁명집단이요?》 정지성이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밀영간부들을 헐뜯고 종파행위를 하다가 마침내 독살음모까지 꾸몄습니다.》 엄광호는 김정숙동지의 입이 벌어지기전에 이 사태를 먼저 고발하여 제립장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만들어보려고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주어섬겼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이제는 그놈이 무슨 수작을 해도 두렵지 않으시였다. 《그 반혁명집단의 두목이 나라는거예요. 동무들, 그건 그렇고 어서 사령부의 소식이나 알려주세요. 사령관동지께서는 건강하신가요?》 정지성은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듯 엄광호의 피가 진 얼굴과 기쁨의 눈물이 글썽거리는 김정숙동지의 맑은 눈을 번갈아보았다. 그의 순하고 어질게 생긴 얼굴에는 눈에 알릴듯말듯 분노의 빛이 피여올랐다. 그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우선 들어갑시다.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방안에 들어가니 리성림이가 아직도 아까 그 모양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세사람의 통신원은 다시 주춤하고 멎어섰다. 지성의 얼굴에는 확연히 노기가 서리고 재영이와 인섭이는 벌써 숨을 씩씩거렸다. 그럴수록 김정숙동지께서는 마음이 송구하시였다.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받들고 건전하고 혁명적으로 싸우며 살아나가는 밀영이 아니라 이렇게 흐린 공기로 가득찬 밀영을 그이의 뜻을 받들고 온 통신원들에게 보여준다는것이 더없이 가슴아프시였다. 그이께서 미안하고 송구한 생각에 얼굴을 못들고 가슴만 조이고계시는데 바깥에서 우르르 하고 달려오는 발자국소리가 울리여왔다. 어느새 사령부통신원들이 왔다는 소문이 밀영에 퍼진것이다. 달려오는 사람들가운데는 아직도 몸을 바로 쓰지 못하는 부상병들과 환자들이 많았다. 특히 그속에서도 눈에 두드러지는것은 감방을 뛰쳐나온 녀대원들이였다. 보초가 말렸겠지만 뿌리치고 달려나온 그들은 태반이 고문에 어혈이 져서 제대로 걷지 못하였다. 그중에서도 바로 걸을수가 없어 눈우를 비칠거리는 금숙이와 옥금이의 형상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아니 죄수들을 왜 내놓았소? 어서 나가보시오.》 엄광호가 소스라쳐 손재연을 보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손재연이도 그 말만은 못들은척하였다. 《저 동무가 금숙동무가 아닙니까?》 정지성은 가슴에 칼이라도 맞은듯이 눈을 감았다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말하였다. 《그냥 두시오, 저 동무들에게 보내시는 사령관동지의 선물이 있습니다.》 《허지만 저 동무들은…》 엄광호가 좀 불복인듯이 더듬거리자 정지성은 날카롭게 그를 돌아보았다. 《저들이 다 반혁명분자들입니까?》 《그렇지요, 증거가… 뚜렷한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 그건 이따가 봅시다.》 사람들이 방안에 하나가득 들어섰다. 금숙이와 옥금이는 겨우 문안에 들어섰으나 뒤벽에 기대여 그냥 흐느끼고있었다. 인섭이와 재영이가 분노를 참을길없어 숨을 가쁘게 쉬고있다가 앞에 나와선 사람들을 헤치고 그들을 앞으로 내세웠다. 정지성은 그들을 념려하시던 사령관동지의 뜨거운 말씀을 상기하였다. 그리고 혁명을 위하여 웃으며 죽어간 한태혁을 생각하였다. 밀물처럼 분노가 온 몸을 굽이쳤다. 그러나 아직은 조직책임자의 엄중한 문제제기를 묵살해버리고 자기 생각을 그대로 드러낼수는 없었다. 《동무들!》 정지성은 안타깝게 모여드는 여위고 주눅이 든 여러 시선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무겁게 입을 떼였다. 《사령부는 동무들과 헤여진후 부후물전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남패자회의결정을 힘차게 관철해나갔습니다. 사령관동지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전법에 의하여 놈들은 이르는곳마다에서 무리죽음을 당하였으며 적의 중중첩첩한 포위를 뚫고 우리는 인민들속으로 깊이 들어가 활발한 정치공작을 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것은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최근 진행된 13도구전투에 대해서만 말하겠습니다. 13도구는 동무들도 다 잘 아는것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최근까지 적들이 야산지대에 있으면 밀림으로 들어가고 적들이 밀림으로 들어오면 아군은 야산으로 내려가는 신출귀몰한 전술을 주로 쓰시면서 적들을 눈속으로 이리저리 끌고다니시며 족치시기도 하시고 기껏 지치게 하고 얼어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다가 13도구에서 적들이 휴식을 위하여 후방으로 들어간다는 정찰보고를 들으시고 단연 공개적인 진공전투를 벌리실것을 결심하시였습니다. 이에 대해 아직 구체적인 말씀은 계시지 않았지만 적들이 사령부를 찾아헤매다가 지쳐빠진 이때 이번에는 아군이 사령부의 위치를 드러내면서 적들의 중심적인 거점을 쳤다는 사실은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수많은 시련의 고비를 넘어온 우리들의 가슴을 무한히 격동시켰습니다.》 와그르르 박수가 터져올랐다. 한쪽에서는 너무나 기뻐 흐느끼는 동무들도 있다. 채옥이와 철구아주머니였다. 두손을 다 상한 금숙이와 옥금은박수를 칠수 없으니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였다. 정지성은 그 모양을 보니 더구나 가슴이 찢어지는듯 하였지만 다시한번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사령관동지께서 몸소 지휘하신 13도구전투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적들의 수비대와 경찰을 모조리 쓸어눕히고 인민들을 해방하였으며 불행에 우는 우리 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 전투에서 우리는 후방물자도 적지 않게 해결하였습니다.》 여기서 지성은 잠시 말을 끊고 숨을 톺다가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우리가 13도구에서 로획한 쌀로 사령관동지께 처음으로 더운 밥을 지어올렸더니 그이께서는 종시 수저를 드시지 못하시고 7련대 동무들이랑 무엇을 먹기나 하는지 모르겠다고 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더니 그 길로 저희들을 부르시여 청봉의 동무들에게 밀가루와 사탕가루 그리고 약들을 보내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번에 여러가지 약도 많이 해결했습니다.》 《사령관동지!》 모여들었던 동무들이 모두 흐느끼며 목메인 소리로 그이를 불렀다. 재봉대의 녀동무들은 마침내 목놓아 울기 시작하였다. 옥금이와 금숙이는 흑흑 흐느끼며 어깨를 물결쳤다. 그들이 흘리는 구슬같은 눈물방울이 고문에 터갈린 손등우에 질펀하게 괴여서 넘쳐흘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두손을 가슴에 모두어잡고 입안의 말로 가만히 《장군님!》하고 속삭이시였다. 그렇게 애를 태우고 속을 썩였건만 누구 하나 돌봐주지 않을뿐아니라 오히려 반혁명분자로 몰아 죽이겠다고 날뛰는 험악한 분위기속에 지내온 그들이였다. 머나먼곳에서 그 누구보다 힘겨운 사업과 전투를 몸소 지휘하시면서도 안전한곳에 떠나보낸 재봉대원들과 부상병들을 잊지 못하시여 이렇게 사람까지 보내주시고 약이며 밀가루, 사탕가루까지 보내주시는 그이의 어버이사랑을 말로써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힘들었다. 《이것이 약이고 이건 량식들입니다. 환자들이니 밀가루와 사탕가루가 필요할것이라고 하시면서…》 정지성도 격정에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고 사람들앞에 배낭 세개를 나란히 갖다놓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천천히 배낭앞에 무릎을 꿇고앉으시였다. 유격대원의 거칠은 배낭천은 아무리 쓸고 매만져야 투박한 천의 껄껄한 느낌밖에 주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우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시며 볼을 비비고 또 비비시였다. 모두 차례로 나가 배낭을 매만져보았다. 그러나 두 녀자만은 너무나 목이 메여 한자리에 엎드려 그냥 울고만 있다. 지성이가 더는 참을수 없어 그들앞에 배낭을 내려다 놓으며 갈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장군님께서 바로 동무들을 위하여 보내신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동무들이 보지 않고 누가 보겠습니까.》 지성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하여 배낭아구리를 풀어헤치고 장군님의 사랑 그것인듯 새하얀 밀가루와 사탕가루를 한줌 집어 주르르 흘리기도 하고 고급포장을 한 약곽들을 이것저것 들추어내여 그들앞에 될수록 많이 보이도록 펼쳐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금숙이와 옥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 이제는 눈물이 동이 터진듯 쏟아져나와 새하얀 밀가루우에, 사탕가루우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들은 배낭 한개씩을 부등켜안고 끝없이 그렇게 앉아 울기만 하였다. 10
김재영으로부터 청봉밀영의 엄중한 사태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는 김일성동지의 안색은 퍽 긴장되신듯 하였다. 그래서 재영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말이 잘되지 않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법랑보시기속만 들여다보시고 계신다. 그이께서는 지금 자그맣게 피운 고깔불우에 장사귀보다 작은 법랑보시기를 들여놓고 콩기름에다 아연화가루를 섞어 고약을 만들고계시였다. 13도구전투에서 김태규분대장이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경찰서안에서 벌어진 혼전때에 그렇게 된것이였다. 13도구에서 많은 후방물자와 함께 약도 적지 않게 해결되였으나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한 외상용 고약만은 없었다. 그래 그이께서는 이렇게 손수 고약을 만드시여 김태규의 부상을 치료해주시는것이였다. 마침내 고약이 다 끓자 김일성동지께서는 옷자락으로 보시기 한끝을 감싸쥐시고 땅우에 얼른 꺼내놓으시였다. 그리고 손끝을 후후― 부시는 그이를 뒤에서 상철이와 영남이가 지켜보다가 얼굴을 맞대고 웃었다. 《어디 한번 풀어봅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벌써부터 몸을 뒤로 젖히려드는 태규의 옆으로 바싹 다가앉으시여 붕대의 한끝을 푸시였다. 《아픕니까?》 《사령관동지, 좀 천천히… 아이구…》 태규는 오만상을 찌프리며 어깨를 가드라뜨렸다. 《아프다는것은 상처가 그리 대단치 않다는것을 말해줍니다. 기관총분대장 김태규가 이렇게 엄살군인줄 알면 적들이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겠는데… 좀 참으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아무 사정 보지 않고 떡판같은 등에서 붕대를 다 풀어내자 기왕 붙여놓았던 고약을 떼시였다. 분홍빛 새살이 맑고 푸른 대기속에 생생하게 돋아나고있다. 쌀쌀하나 서기가 피여오르는듯 한 바람이 억세인 힘을 가지고 싹트는 새 생명―새싹에 대지의 훈훈한 입김을 불어넣는듯 하다. 때는 벌써 3월이였다. 립춘이 지나자 절기는 눈세계우에서도 달음박질쳤다. 벌써 경칩에 땅이 들레여 눈이 자욱했던 개울바닥에 구멍이 뚫려지기 시작했다. 《그래 대체 그자는 뭣때문에 유격대에 들어왔다고 합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처치를 다한 태규의 저고리를 어깨우에 걸쳐주시고나서 눈으로 손을 씻으시며 비로소 재영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시였다. 《전 주로 부상병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자의 이야기는 정지성동지와 박인섭동지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지성동지가 말하는것을 들으니 행세식으로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유격대에 들어온것 같습니다.》 《그런데 리성림이는 무엇때문에 그 벼랑을 굴러내렸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상철이가 내미는 수건에 물기 묻은 손을 훔치시며 이렇게 물으시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시였다. 《저 동무들이 또 아이들을 가지고 노는군. 태규동무, 동무가 가서 아이들을 너무 뛰지 못하게 하시오. 아직 뼈마디가 굳지 못한것들을 꼭 자기만큼씩 생각하는 모양이군. 난 오백룡이 같은 뚝보가 그렇게 아이들을 고와할줄은 몰랐습니다.》 태규는 좀 거북한 동작으로 일어서더니 보고를 드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깔깔거리는 숲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서는 지금 오백룡이며 강봉수들이 순애와 철봉이를 데리고 유격대의 춤을 가르치느라고 법석거리고있었다. 《그래 이것이 그 독약입니까? 올해는 무슨 독약놀음이 이렇게 많습니까? 우리가 독소금에 한번 놀랐으니 독약이다 하면 펄쩍 뛸줄 아는 모양인가.》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재영이가 갖다바친 엄광호의 근거문건이며 중거품들속에서 가루봉지를 헤쳐보시며 물으시였다. 재영이가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앉아있으니 그이께서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 발그스레한 가루를 손수 찍어 입으로 가져가시였다. 《아!》 하고 김재영이가 놀라서 말리려 하였으나 그이께서는 벌써 《독약》맛을 보시고 약간 미간을 찌프리시였다. 《흥, 라이온치마분이로군. 그래 그자는 왜 벼랑으로 갔다구?》 김일성동지께서는 역겨우신듯 치약가루 묻은 손을 탁탁 터시며 다시 물으시였다. 재영은 안도의 긴숨을 내쉬며 잠시 갑자르다가 입을 벌렸다. 《아마 량심의 가책에 견디지 못해서 죽자고 한것 같습니다. 김정숙동지가 그를 죽음에서 구해주었고 녀대원들이 모두 그를 얼마나 잘 돌봐주었습니까. 그런데 난관에 동요한데다가 엄광호의 위협공갈과 무지한 고문을 받고 그만 눈알이 뒤집혀버린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령관동지의 선물과 말씀을 전달받고보니 너무나 부끄러워 사람들앞에 나설 체면이 없다고 생각한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희들은 엄광호와 손재연이때문에 그자에 대해서는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있었는데 밤중에 훌 없어졌습니다. 그런걸 김정숙동지가 인차 눈치를 채고 곧장 그 벼랑으로 달려가서 강에 난 얼음구멍으로 막 굴러떨어지려는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무섭게 비판했습니다. 자기가 더럽게 살았다는것을 깨달았으면 용감하게 자기 과오를 씻을 생각을 해야지 비겁하게 죽을 생각을 왜 하느냐고말입니다. 혁명이 무슨 멋을 내기 위한 놀음인줄 알았더냐고 비판을 막 무섭게 했습니다. 그 사람은 정숙동지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기만 했지 말 한마디 못했습니다.》 《할 말이 없을수밖에… 하기는 기나긴 겨울이였지. 시련을 겪어보지 못하고 신념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겨울이였지. 정숙동지의 말대로 그런 인간들도 이 겨울을 겪어보았으니 만일 용기만 잃지 않는다면 혹 달라질지 알겠소. 혁명이 하루이틀에 끝날것도 아니고 겨울이 한번밖에 없는것도 아닌데…》 김일성동지께서는 맑게 개여오른 남쪽하늘을 바라보시며 감회깊이 말씀하시다가 재영이쪽으로 눈길을 돌리시였다. 그이의 입가에는 알릴듯말듯 부드러운 웃음이 떠돌고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옵니다. 재영동무, 우리는 백바위골 뒤산에서 그것이 법칙이라고 말했지? 보시오, 그놈들은 이 겨울이 영영 계속될것처럼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봄은 이미 시작되였소. 여기에도 이렇게 새싹이 트지 않았소?》 사령관동지께서는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한곳을 가리키시였다. 그것은 고로쇠며 개암이며 물매채따위 잡관목들이 우거져서 말라붙고 댕댕이덩굴이 쇠줄타래처럼 엉켜붙은 봇나무숲의 양지바른 공지였다. 밋밋한 남쪽비탈은 그러한 덩굴과 관목줄기들이 뒤엉켜서 지붕같이 눈을 쓰고있는데 묵은 줄기들은 낮동안 녹아내린 눈물로 깨끗이 씻겨져서 마치 새순처럼 매츨해보였다. 락엽교목들의 성긴 아지사이로 엇비듬히 뻗쳐들어온 해빛이 오히려 뿌리 어방을 더 잘 비쳐주는지도 모른다. 장군님께서 그렇게 엉켜붙은 댕댕이덩굴을 헤치시자 바로 그밑에서 노리께한 새싹이 바늘끝처럼 뾰족뾰족 돋아나고있었다. 잔디같기도 하고 달래같기도 한 그것들은 지금은 너무나 연약하여 찬바람만 만나면 그 자리에서 시들어버릴것 같았다. 그러나 그 연약한것들은 너무나 큰 힘을, 너무나 억센 지향을 반영하고있었다. 《야― 새싹이다!》 김재영이는 저도모르게 부르짖었다. 상철이도 영남이도 달려와 장군님의 손밑을 들여다보았다. 그이께서는 웃으시며 새싹처럼 생동한 꼬마전사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시였다. 《그렇소. 이제는 봄이 왔소. 한때 혁명한다고 돌아치던 엄광호가 그런 죄악의 길을 걷게 된것은 이러한 봄이 온다는, 우리 혁명의 최후승리가 반드시 오고야만다는 신심이 없었기때문이요. 우리는 이 겨울에 고생도 많이 하였지만 또한 많은 진리를 증명하기도 하였소. 우리 꼬마들이 이렇게 자라난 반면에 엄광호같은 인간들이 결국 제 본성을 드러내고만것은 혁명의 시련이 참다운 인간들은 더욱 완성시키고 성장시키지만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을 못가지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치 않는자들에게는 수백만년전의 원시상태로, 짐승의 상태로 재빨리 되돌아가게 한다는것을 보여주었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묵은 덩굴밑의 새싹을 다시한번 이윽히 들여다보시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계시던 그이께서는 조심스럽게 그 새싹들을 묵은 잎과 덩굴들로 덮어주시고나서 일어서시였다. 《청봉으로 다시 가서 엄광호를 체포해오시오. 몇동무 데리고 가서 거기 동무들도 불러와야겠소. 아직 심하게 앓는 동무들은 돌볼 사람을 붙여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부대로 돌아오도록 하시오. 금숙동무와 옥금동무는 아직 몸이 다 추서지 못했더라도 될수 있는대로 데려오는 방향에서 힘써보시오. 그들도 다가오는 이 봄에 조국으로 함께 나가야 하지 않겠소?》 《알았습니다. 사령관동지! 금숙동무와 옥금동무도 올수 있습니다. 제가 떠나올 때 좀 절뚝거리면서도 걸어다녔습니다.》 김재영은 기쁨에 넘쳐 온 숲이 다 울리도록 힘차게 대답하였다. 《좋은 일이요. 그럼 그 동무들도 꼭 데려오시오. 그리고… 가만, 저리로 갑시다. 7련대와 8련대에도 통신원을 보내야겠소. 그 동무들이 사령부의 위치를 찾느라고 헤매일수 있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오는곳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11
북극의 봄은 더디다. 축축한 안개에 젖은 남해가의 산기슭에 진달래가 피여나서 한물 지고 창경원에 벗꽃이 한창일무렵에도 눈덮인 밀림에는 침울한 재빛하늘이 낮추 드리워있다. 이따금 그 찌프린 구름 한귀퉁이가 찢어지면서 파란 하늘이 드러나기도 하였지만 거기서 쏟아져내리는것은 봄의 훈향이 아니라 비수같이 날카로운 칼바람이였다. 겨울은 이 엄청나게 크고 웅심깊은 밀림에 등대고 배수진을 치고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가을 압록강을 건너온 순진한 곰은 기나긴 겨울이 하도 지루하고 시장하여 행여나 하고 서뿔리 굴속에서 기여나왔다가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보고 넋이 빠져서 달아난다는것이 눈구뎅이에 빠져 얼어죽고말았다고 한다. 그대신 대륙의 봄은 장엄하다. 지심깊이 간직한 봄의 열정을 한꺼번에 뿜어대는데 겨우내 짓눌려있던 지열이 분노를 터뜨리듯 하루아침에 얼음산을 터뜨리고 눈구뎅이를 허물면서 겨울이 근 반년동안이나 얼구고 뭉쳐놓은 땅우의 모든것을 단숨에 팥죽처럼 허물허물하게 녹여버린다. 겨울은 더는 물러설 땅이 없으니 이 엄청난 지열을 맞받아 밤이면 이를 갈며 독을 피웠다. 그러나 첩첩한 눈구름을 헤치고 태양이 이 수난의 대지우에 사랑의 입김을 불어대며 웃음짓는것이였다. 길이 넘게 쌓였던 창백한 눈무지가 거죽부터 거무스레해지더니 산탄의 일제사격을 뒤집어쓴듯 까만 구멍들이 숭숭 났다. 뽀얀 성에에 덮여있던 잣나무며 소나무의 까칠한 잎들이 나긋나긋해지면서 볼에 대고 찔러도 아프지 않게 끝이 부푸는가싶더니 뾰족뾰족한 침엽수림의 앙상한 우듬지끝에도 그런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것이 봄의 표정임을 재빨리 간파한 다람쥐가 구새통에서 얼어붙은 눈을 박박 헤집고 까만 눈알을 데룩거리며 하늘을 쳐다본다. 그러나 심술궂은 겨울이 그 길고 지루한 낮과 밤에도 못다 퍼부은 눈을 한꺼번에 내쏟았다. 부풀었던 망울은 다시 얼어붙고 얼음산은 또다시 풍성한 눈단장을 하였다. 그것은 겨울과 봄의 마지막 판가리싸움이였다. 대지는 인내성있게 눈을 쓰고 다시금 싹을 틔우고 봄의 즙액과 훈향을 가꾸어나간다. 자꾸만 부풀어나는 봄기운을 누르려고 눈은 쌓이고 또 쌓인다. 이때 자욱히 흐린 눈안개를 뚫고 천지를 한꺼번에 들었다 놓는 뢰성벽력이 터졌다. 우뢰소리는 저 남해기슭으로부터 씨비리 동토대까지 장중하게 울려갔다. 그것은 봄을 선포하는 태양의 선언이였다. 펑펑 쏟아지던 눈이 진눈까비로 변하더니 별안간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졌다. 아직도 차겁고 날카로우나 면바로 얻어맞아도 아프지 않는 그 비발에는 신선하고 부드러운것이 깃들어있었다. 비와 함께 마파람이 불어왔다. 한겨울에도 보지 못한 맹렬한 바람세였다. 밀림은 설레이고 눈더미는 사태져 허물어져내렸다. 눈속에 앙상하게 서있던 강대가 선채로 부러져나가고 마른 삭정이, 묵은 잡초넝쿨이 꺾어지고 휘말려서 공중높이 날려올랐다가는 형체도 없이 내뿌리웠다. 소나기의 뒤로 장엄한 눈석이가 시작되였다. 장백이라 기나긴 눈산에 골짜기도 많아 이름짓기도 귀찮아서 7도구요 13도구요 하고 불러내치는 그 엄청나게 많고 크고 깊은 골짜기마다에서 미처 녹지도 못한 눈더미를 그대로 밀어헤치며 시뻘겋게 흐린 탕수가 와―와― 소리치며 흘러내렸다. 산비탈에 서있던 나무들이 뿌리채 뽑히여서 흘러내리고 그 휘청거리는 가지우에서는 함빡 젖은 메새들이 이 엄청난 대동란에 놀라 날아가는 재주도 잊어버린듯 눈만 반짝거리고있다. 산도 골짜기도 밀림도 온통 탕수에 젖고 눈석이에 잠겨버렸다. 간삼봉에서 뽑히운 나무가지는 점점 넓어지는 탕수에 떠밀리여 어느덧 호호바다같은 하구를 지나 압록강에까지 흘러들었다. 대지는 자욱한 안개에 뒤덮이고 산맥은 탕수에 흐려서 온통 젖고 질쩍거리고 부산스럽다. 패잔하는 겨울의 아우성, 승전고를 울리는 봄의 대합창으로 출렁거리고 으르릉거리며 속삭이고 설레이는 대지에 인간들이 깊숙한 발자국을 찍고 서서 생각깊은 눈매로 변모하는 세계를 이윽히 바라보고있다. 얼음과 눈은 통채로 허물 벗듯 벗기우고말았다. 그러자 대지는 동상이라도 입은듯 꺼멓게 그슬린 생살을 드러내놓았다. 마치 개미가 역사를 한 뒤끝인듯 좁쌀알만 하게 몽그러진 까만 흙덩이들이 스스러운듯 비개인 푸른 하늘아래 드러났다. 부등깃처럼 보드라운 그 흙을 한줌 움켜쥐고 이윽히 들여다보느라면 웬일인지 다감한 가슴들은 핑하니 물기에 젖어든다. 봄― 그것은 봄의 대지였다. 그 살진 땅속에서 어느새 씨앗이 애기잠을 깨듯 눈을 뜨고 노란 새순을 내밀고있었다. 대지와 마찬가지로 동상에 벗겨진 꺼먼 살갗을 아직도 차고 신선한 봄바람에 드러내놓고 그 새싹들을 들여다보며 코에 갖다대보기도 하는 유격대원들의 접어올린 누데기 털모자의 귀덮개우에서 온갖 새들이 지지배배 지저귀며 커다란 사내들이 우는 모양 보라고 야단스레 돌아친다. 《청명이 멀지 않았군.》 슴슴한 흙냄새를 다시한번 코에 대고 맡아보며 홀로 중얼거리는 유격대원의 목소리는 석쉼하게 갈려있다. 겉보기는 보숭보숭하나 정작 내짚으면 걸찍한 물기가 헐어빠진 신창으로 스며드는 그 땅에 큼직한 발자국들이 새겨졌다. 봄의 훈향이 미음돌듯하는 산과 숲 나무와 바위― 어디서나 젖고 번쩍거리는 숲속으로 조선인민혁명군전사들은 기쁨에 떠밀리듯 웃음을 끌고 북대정자를 향하여 행군하고있었다. 사령부의 품으로 제일먼저 돌아온것은 7련대였다. 간삼봉부근까지 혼마려단을 추격하여 등심뼈를 도끼로 찍어내듯이 그 기본집체를 하루밤에 요정내버린 그들은 바로 그날밤에 곧장 부후물방향으로 이동해오다가 김일성동지께서 보내신 통신원을 만났었다. 북대정자로 가는 어느 산기슭에서 사령부를 만나던 그때 오중흡은 사령관동지앞에 보고를 드리고나서 너무나 감격하여 외면한채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단정하고 희던 그 얼굴은 꺼칠하게 여위고 푸르죽죽해졌는데 어지러운 솜이 비죽이 내밴 군복우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중흡동무, 잘 싸우고 돌아와서 울기는…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좋소.》 이렇게 말씀하시며 중흡의 두어깨를 한품에 감싸안으시는 사령관동지의 두눈에도 이슬이 번쩍거리고있었다. 련대장뒤에 나란히 선 중대장들과 소대장들, 모든 전사들의 눈에도 다 눈물이 어리여있었다. 《사령관동지!》 중흡은 어지러워진 소매로 뻑 하고 눈물을 훔치며 울먹울먹한 소리로 말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 건강하신것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그놈들이 갖은 악담을 퍼붓고 삐라를 뿌리고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던지…》 《그만 하시오. 나역시 건강한 동무들을 보니 마음속이 이상해집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눈을 슴뻑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니 오중흡의 귀덮개 너덜거리는 털모자를 벗겨드시였다. 《여전히 그 모자를 그대로 쓰고있군. 내 그러리라 짐작하고 모자를 하나 장만해놓았소. 우리가 13도구를 들이칠 때 그놈들의 피복창고를 점령했소. 상철동무, 련대장동무의 모자를 가져오시오.》 《알았습니다.》 상철이가 달려가자 이어 사령관동지께서는 군수관 조진범을 부르시였다. 《다른 동무들도 다 내주시오. 호수가 헛기지 않도록 이름을 써놓은대로 주어야 합니다.》 이윽고 상철이가 나무껍질로 동인 새 군모와 군화 한컬레를 가지고왔다. 《써보시오. 모자랑 군화랑 대충 짐작해서 골라놓았기때문에 맞겠는지 모르겠소.》 오중흡은 말 한마디 못하고 연신 울대뼈를 꿈틀거리며 모자와 군화를 받았다. 모자귀덮개 한옆에 《7련대장 오중흡》이라고 박아쓴 글자를 보았을 때 그의 두눈에는 걷잡을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은 너무나 낯익은 사령관동지의 필적이였다. 그렇게 하나하나 이름이 적힌 모자와 군화를 받은 7련대전사들이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있었다. 이때 옆에서 재깔거리는 색다른 목소리를 들은 장경수가 눈이 둥그래서 돌아보았다. 철봉이와 순애였다. 《옳지, 요것들이 불속에서 살아나온 그 꼬마들이겠구만. 흠― 만만찮게 생겼는데, 괜찮아, 이런 아이들을 위하여서라면 우리 태혁이가 죽을만도 하지. 어디한번 안아볼가?》 장경수가 다가가니 철봉이도 순애도 헐어빠진 군복에 유난히 모자와 신만 번쩍거리는 커다란 사나이가 어색해보였던지 뒤걸음질을 쳤다 《이늠아, 한번 안아보자!》 《싫어요.》 《싫기는 왜 싫어, 그럼 너 좀 안아보자.》 이번에는 순애쪽으로 팔을 뻗쳤으나 순애는 더 멀리 물러섰다. 《나도 싫어요.》 《야― 이것봐라. 내가 인심을 단단히 잃었구나.》 이때 《그애들이 어디 있나?》하고 강철룡이 달려왔다. 아이들은 눈이 둥그래서 멎어섰다. 강철룡은 두 아이를 한꺼번에 그러안을듯 두팔을 쩍 벌리였다. 《너희들이 방아간마을의 아이들이지. 우리 태혁이가 목숨바쳐 구해낸 아이들이지. 이 처녀가 작년에 포대를 까부신 그 아주머니 딸이라면서? 야― 신통하구나. 얘들아, 내가 조선인민혁명군 소대장 강철룡이다. 알겠느냐? 너희 어머니가 도끼를 가지고 포대를 까부시는것을 내가 다 봤다.》 이러면서 강철룡은 순애를 번쩍 안아올렸다. 순애는 강철룡의 밤송이같은 수염이 볼을 꼭꼭 찔렀지만 그 거칠은 볼에 자기의 얘리얘리한 볼을 꼭 대고 목을 꽉 그러안았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전사들의 이 모든 눈물겨운 상봉의 광경을 하나하나 지켜보시며 곡절많은 혁명의 길우에 송이송이 피여나는 아름다운 꽃송이들을 생각하시였다. 이해 봄바람과 함께 백화가 다투어 피여나고 뭇새가 우짖을것이다. 하늘은 푸른 장막을 펼치고 강물은 만물을 깨끗이 가시여낼것이다. 그속에서 피여나는 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수많은 노래가 지어지고 두툼한 책들이 씌여질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시련을 웃으며 헤쳐온 저 투박한 사나이들이 해여진 군복짬으로 삐여져나온 살과 살을 맞대고 그러안은 저 상봉에 비길 아름다움을 제아무리 풍만하고 광대무변한 자연인들 만들어낼수 있을것인가? 진정으로 아름다운것은 인간에 의해서만 창조될수 있다! 박덕산이 8련대와 독립대대를 이끌고 돌아온것은 북대정자가 멀지 않은 어느 숙영지에서였다. 12
다시 사령관동지의 품으로 모여들어 새움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숲속을 누벼가는 행군길은 즐거웠다. 사령관동지께서 새 군화와 모자만은 다 마련해주셨지만 그밖에는 만났다고 해서 갑자기 해여진 옷이 해결된것도 아니고 식량이 푼푼해진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쌓인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듣고싶은 소식이 얼마나 많은가. 그 가운데는 기쁘고 통쾌한 이야기만 있는것도 아니였다. 지나온 어떤 고통보다도 더 심한 아픔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슬픈 소식도 없지 않았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웃으며 눈물지으며 천천히 북대정자로, 북대정자로 다가가고있었다. 행군속도를 높이지 말라는것은 사령관동지의 분부시였다. 그래서 부대는 산기슭을 빙빙 돌며 자주 숙영지를 잡고 쉬였다. 아직 불편한 몸으로 부대에 돌아와야 할 재봉대동무들을 생각하여 사령관동지께서 일부러 행군속도를 조절하신다는것을 잘 아는 모든 전사들이 한결같이 청봉쪽을 돌아보며 그들을 기다렸다. 북대정자가 지척에 바라보이는 어느 산기슭에서였다. 마침내 앞쪽에서 《재봉대가 돌아온다!》 하는 목소리가 울리여왔다. 사령관동지 이하 조선인민혁명군 전체 대원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재봉대가 온다는 동남쪽 숲속으로 우르르 달려나갔다. 봄이 온 산속, 저녁노을이 곱게 깔린 버드나무숲속으로 단정하게 군복을 차려입고 큼직한 짐들을 진 녀대원들이 한줄로 서서 달려오고있었다. 맨앞에서 달려오는 김정숙동지의 별처럼 빛나는 눈에는 벌써 이슬이 맺혀 반짝거렸다. 바로 그뒤에서 기관총을 메고 제몸만큼 큰 무슨 짐인가를 진 김재영이가 달리고 그뒤에 또 정지성이와 박인섭이가 좀멋적은듯 한 웃음을 짓고 울먹한 표정으로 따라섰다. 철구아주머니와 옥금이, 금숙이, 채옥이 등은 벌써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온다. 옥금이와 금숙이는 아직 다리를 조금씩 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마주 걸어오시는 사령관동지의 환히 웃으시는 모습을 나무그루사이로 뵈옵게 되자 주춤 멈추어서시였다. 그러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발이 지쳐서 비칠거렸다. 너무나 감격하여 몸의 균형도 바로잡기가 힘드시였다. 《천천히, 모두 천천히 오시오. 이제는 다 왔는데…》 김정숙동지께서는 마침내 김일성동지앞에 대렬을 정돈시켜놓고 보고를 하러 나오시였다. 그러나 모자채양끝에 한손을 갖다붙이고 경례를 하시였을뿐 그이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새여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발등을 적시고 흐느낌에 온 몸이 떨릴뿐이였다. 《됐습니다. 내가 그곳 형편을 다 들어서 알고있습니다. 대렬을 헤치시오.》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령관동지께서도 눈시울을 슴뻑거리시며 외면하시였다. 그래도 재봉대 대렬은 그냥 그 자리에 서있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거리는 녀대원들을 굽어보시다가 한사람한사람 그들앞으로 다가가시였다. 《이제는 눈이 다 나았습니까? 밤에도 똑똑히 보입니까?》 이러한 사령관동지의 따뜻한 물음앞에 채옥은 고개를 들고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눈앞은 뿌옇게 흐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채옥은 그렇게도 잘 보이던 눈이 지금은 눈물때문에 아무것도 가려볼수 없는것이 안타까와 숨가쁘게 말했다. 《그전보다 더 잘 보입니다. 정말입니다. 지금은 그믐밤이라도 적을 쏘아잡을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철구아주머니는 살이 더 오른것 같군. 이번에 행군할 때는 고생을 안했습니까?》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연방 코를 들이마시는 철구아주머니앞에 서시여 그의 어깨를 다정히 쓸어주시였다. 《사령관동지,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제 나이 든것이 이렇게 심려를 끼쳐드려서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별말을 다 합니다. 철구아주머니가 다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옥금이와 금숙은 나란히 서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들앞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겨 계시다가 뒤따라선 김정숙동지를 돌아보시였다. 김정숙동지 역시 그들처럼 고개를 숙이고계시였다. 《동무들, 고개를 드시오. 고개를 높이 드시오. 동무들이 혁명을 그처럼 견결히 지켰기에 이 땅에 봄이 왔습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승리의 봄이 왔소. 우리는 혁명의 지조를 끝까지 굽히지 않은 동무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금숙동무, 고개를 드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들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여러가지로 왼심을 쓰셨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녀대원들의 어깨는 더욱 세차게 물결칠뿐이였다. 상봉의 저녁참은 늦은 점심 겸사겸사 좀 일찌기 치를 작정이였으나 이래저래 늦어졌다. 작식대원들은 무엇인가 이 즐거운 분위기에 알맞는 특식들을 마련하느라고 새로 인계받은 식량과 취사도구를 가지고 구구한 토론을 거듭하는 사이 어느새 날이 저물게 되였다. 조진범은 중대마다 돌아다니며 잔소리를 하고 남자들이 할 때보다 훨씬 일손이 굼뜨고 서툴다고 까박을 붙였으며 경위중대에 와서는 지어 세계적인 료리사는 모두 남자들이라는 소리를 조심성 없이 내뱉었다가 철구아주머니에게 주걱으로 등판을 얻어맞기까지 하였다. 즐겁고 흥성거리는 휴식참이였다. 바람은 아직 쌀쌀하였지만 하늘에는 부드러운 노을이 비꼈다. 이러한 때 노래가 어찌 없을수 있겠는가. 채옥이도 강철룡도, 정지성이며 철구아주머니까지 불리여나가 노래를 불렀다. 장군님품에 안긴 순애와 철봉이는 짜락짜락 손벽을 치며 좋아하였다. 그러다가 애들도 차례로 불리여나가 《유희곡》이며 《무산아동가》를 불렀다. 다만 유감스러운것은 한태혁의 《세계혁명가》가 울리지 않는것이였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청에 의해 《작은 한태혁》으로 불리우는 김재영이가 《세계혁명가》를 대신 불렀는데 그 형상수준이 결코 한태혁이만 못하지 않았지만 오락회장의 분위기는 별안간에 가라앉고말았다. 한태혁의 잊을수 없는 모습이 떠올라 모든 사람의 눈앞을 흐리게 했다. 그 신명나는 가락을 섬겨대는 재영의 빛나던 눈조차 물기에 글썽거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뒤전에 서있던 금숙이가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것을 보시고 아이들을 철범의 무릎우에 옮겨놓으시였다. 그리고 금숙이가 사라진 숲속으로 천천히 걸어가시였다. 저녁으스름이 이른봄의 싱그러운 바람결을 따라 은초사처럼 흐느적거리는 숲속으로 금숙이는 고개를 한옆으로 숙이고 걸어간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아픈 마음을 달래야 할 쓰라린 의무를 통감하시였다. 그러나 그를 잡고 무슨 말을 할것인가. 참으로 태혁이같은 사람을 잃은 저 아름다운 처녀의 가슴속 상처를 어루만져줄 그러한 말이 어디에 있을것인가. 그것은 다시는 보상할길 없는 손실이며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였다. 금숙은 새움이 돋느라고 가지마다 물기가 부풀어올라 휘청거리는 버드나무밑에 쪼그리고앉아 땅을 후비고있다. 먼발치에 서시여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침내 마음을 다 잡으시고 가까이 다가가시였다. 《무엇을 합니까?》 약간 갈리신듯 한 그이의 목소리를 듣자 금숙은 놀란듯 소리없이 일어섰다. 《왜 혼자서 이런데까지 나왔습니까?》 《사령관동지, 산나물이 돋았습니다. 냉이도 있습니다. 아침에 냉이국을 끓이자고…》 금숙은 손에 한줌 쥐고있는 나물을 주무르며 조용히 대답하였다. 《벌써 냉이가 이렇게 돋았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정말 놀라시여 금숙의 손에서 냉이 몇줄기를 받아쥐시고 냄새를 맡아보시였다. 《양지쪽이 돼서 그런지 파랗게 돋아났습니다. 전에 누가 부대기를 일군 자리같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담담하게 울리는 처녀의 목소리를 다시금 가슴에 에이는듯 한 아픔과 함께 들으시였다. 《참, 냉이국을 한사발씩 먹이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럼 어서 뜯읍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달빛에 은은하게 떠오르는 냉이밭에 무릎을 꺾고 앉으시였다. 《일없습니다. 그만두십시오. 이제 정숙동무가 나올것입니다. 아까 뜯자고 약속했습니다.》 금숙이가 당황하여 말리였으나 그이께서는 못들은척 하시고 맨손으로 나물을 해나가시였다. 금숙이도 하는수없이 옆에 앉아 나물을 캐기 시작하였다. 그는 미리 준비해가지고온 조그마한 손칼로 재게 나물밑을 우벼내는데 어찌나 일손이 날랜지 맨손으로 뿌리채 뽑아나가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정말 금숙이가 지금 나물을 캐는 일밖에 다른 아무런 생각도 안하고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시였다. 《청봉에서 그놈들과 참 잘 싸웠습니다. 그놈이 나를 만나겠다고 울며불며 애원한다는것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래일은 회의를 합시다. 그때 금숙동무도 토론을 하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융단처럼 촘촘히 널려있는 나물을 하나하나 세듯이 뽑아나가시며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알겠습니다. 전 이번 일을 통해서 세상을 더 깊이 안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난날 그렇게 똑똑히 살지 못했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저희들은 그때 장군님께서 그렇게 통신원동무들을 보내주시고 물건을 보내주실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숙동무, 왜 동무들에게 믿음이 부족하겠습니까? 믿음이 부족했다면 동무들이 어떻게 그처럼 용감하게 싸웠겠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 나무라시듯 엄하게 말씀하시자 금숙은 멍하니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버렸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초생달이 솟아올랐다. 은초사같은 초생달빛은 산비탈에 진한 그늘을 드리웠다. 어디선가 봄바람뒤로 싱싱― 하고 잠자리를 펴는 대지의 미묘한 숨결이 들려왔다. 《사령관동지!》 문득 금숙은 재게 놀리던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사령관동지를 우러러보는 그의 눈에는 그렁하니 달빛이 어려있었다.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저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모든것을 다 들었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 그 동무앞에 눈을 맞으시며 홀로 서서 한밤을 새우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금숙동무, 내 동무에게 할 말이 없소.》 그이께서는 민감한 처녀가 먼저 이야기를 터놓는바람에 저으기 마음이 놓이시면서도 새삼스럽게 엄습해오는 상실의 아픔때문에 갈린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사령관동지, 아직도 저녁바람이 맵습니다. 어서 우등불앞으로 돌아가주십시오. 저는 결코 슬픔에 눌러있지 않겠습니다.》 《고맙소. 금숙동무, 정말 고맙소.》 《저는 여태 철부지였습니다. 그 동무에 대한 생각이 제 생활에서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것도 미처 모르고있었습니다. 이제 그 동무가 없어진 지금에는 그 생각들이 저에게 아픔만 주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사령관동지께서 걱정해주시는 그만큼 그 사랑이 귀중합니다. 저는 사령관동지께서 사랑하시던 그 동무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동무가 못다한 충성을 제가 사령관동지께 다하겠습니다.》 금숙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는듯 하였으나 한마디도 흐린데 없이 또박또박 조용히 울려나왔다.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처녀의 사무친 마음인듯 눈에 맺힌 이슬이 달빛을 받아 그렁그렁 빛날뿐이였다. 《금숙동무, 잊지 맙시다. 나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 힘겹게 헤쳐온 이해겨울의 행군에서 태혁동무가 이룩한 위훈과 그 노래, 그 웃음을 영원히 잊지 맙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싸늘하게 식어든 금숙의 손을 감싸쥐시였다. 나물을 하느라고 흙이 묻은 처녀의 손은 와들와들 떨고있었다. 《왜 이럽니까? 춥지 않습니까? 불 있는데로 돌아갑시다.》 장군님께서는 놀라서 말씀하시였다. 《아닙니다. 하나도 춥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나물을 하겠습니다. 이제 정숙동무가 올것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처녀의 손이 그렇게 떨리는것은 사실 추위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격정때문이라는것을 짐작하시고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알겠소. 그럼 난 돌아가겠소. 그러나 일찍 돌아오도록 하시오. 다른 동무들이 알아도 재미없으니…》 《인차 돌아가겠습니다. 장군님, 그런데 저에게 한가지 소청이 있습니다.》 금숙은 별안간 수집음을 띠며 힘겹게 말씀드렸다. 《무엇입니까? 금숙동무의 청이 무엇입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너무나 반가우시여 기쁨에 넘치신 목소리로 물으시였다. 한걸음 다가서시는 그이를 우러러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금숙은 이윽고 꺼져들어가는듯 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후날 말씀드리자고 했는데… 이제 반공격으로 넘어갈 때 저 철봉이와 순애를 제가 집에 데려다 주도록 해주십시오. 전, 혁명이 승리하는 날 순애와 같이 살고싶습니다. 제 그 말을 곽병철동지에게 하겠습니다.》 금숙이의 마지막 말마디는 마침내 흐느낌소리에 삼켜지고말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처녀의 씹어삼키는 울음소리를 들으시며 삑 몸을 돌리시였다. 가슴이 찢어지는듯 하시였다. 초생달은 지새여간다. 저멀리 솔밭속으로 총총히 다가오는 발걸음소리가 울리였다. 김정숙동지께서 오는 모양이였다. 어서 말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면서도 김일성동지께서는 차마 금숙이의 그 절통한 소원을 마주서서 승인하시기가 힘드시였다. 달빛을 우러러 무겁게 걸음을 옮겨놓으시는 그이 앞에서 마주 걸어오던 김정숙동지이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소랭이를 한옆에 끼고있었다. 《정숙동무.》 김일성동지께서는 갈리신 목소리로 조용히 부르시였다. 《사령관동지, 웬일이십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놀라서 그이의 안색을 살폈다. 《저 앞에서 금숙동무가 기다리고있습니다. 벌써 나물을 꽤 많이 해놓은것 같습니다.》 《…》 《금숙동무에게 내가 모든것을 승인한다고… 그의 생각을 모두 지지한다고… 우리 혁명의 모든 성스러운것을 바쳐 그의 거룩한 념원을 성취시켜줄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주시오.》 말씀을 마치시자 그이께서는 우등불이 세차게 타오르는 오락회장을 향하여 힘있게 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이의 말씀을 새길수가 없으시였다. 그러나 달빛에 젖어 우렷이 떠오르는 그이의 뒤모습에서 무엇인가 가슴을 치는 위대한 사랑의 거세찬 흐름을 느끼시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실줄 몰랐다. 13
사흘후 북대정자에서 력사적인 조선인민혁명군 간부회의가 열리였다. 장군님께서 몸소 마련하신 새 군화와 모자 그리고 재봉대원들이 반혁명분자와 불건전한자들의 박해속에서도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충성의 한마음을 고이 간직하고 밤밝혀 지어낸 새 군복들로 갈아입은 전사들은 모두 회의가 열리고있는 먼 숲쪽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장군님의 말씀이 여기까지 들려올리도 없고 회의장조차 나무에 가리여 보이지 않았지만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전사들은 조선의 운명이 결정될 북대정자 봉우리의 그 등성이에서 눈길을 뗄수가 없었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이때 조선인민혁명군의 이해 동기군사행동을 총화하시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고계시였다. 장군님께서 높은 메등에 올라서시자 새움이 돋기 시작한 이깔나무사이로 재봉대원들이 청봉의 시련속에서 새로 지어올린 보위색 봄외투자락이 펄럭거리였다. 장군님께서는 남패자에서 북대정자에 이르는 간고한 로정을 개괄하신 다음 말씀하시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제놈들의 대륙침략계획실현에서 <암>으로 되고있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완전소멸>하려고 발광하였으나 결국 녹아난것은 그들자신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가렬한 전투와 시련속에서 불패의 혁명대오로 더욱 단련되였으며 우리의 지휘관, 병사들은 강철의 전사로 자라났습니다.》 우렁찬 박수가 터져올랐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해 겨울에 달성된 성과가운데서 중요한것은 유격전쟁의 특성을 잘 살려 적의 대부대의 발악적인 집중공격을 령활한 전략전술로 물리치고 완전히 주도권을 틀어쥐게 된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경험은 비록 적은 력량이라 할지라도 조성된 정황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그에 적응한 전략전술을 세우고 적의 약점을 리용하여 적극적인 행동으로 돌진한다면 력량상 우세한 적을 격파하고 능히 주도권을 장악할수 있다는것을 명백히 실증하여주었다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사령관동지께서는 이해 겨울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과 전사들이 발휘한 모범을 하나하나 드시고나서 다시 적들의 더러운 음모를 낱낱이 폭로하시였다.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켜보려던 놈들의 너절한 술책을 속속들이 발가놓으신 그이께서는 이러한 적들의 간계에 속아넘어가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을 잃고 변질타락한 엄광호를 비롯한 일부 인간들의 죄행을 준렬히 규탄하시였다. 회의장은 숭엄한 분위기에 흽싸였다. 바람에 설렁거리던 나무아지들도 일시 숨을 죽이고 서있는듯 하였다. 잠시 엄숙한 분위기가 떠도는 회의장을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앙양된 목소리로 조선인민혁명군앞에 나서는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우리앞에는 고난의 행군의 빛나는 성과에 기초하여 적들을 련속 타격하고 조국으로 진군하여야 할 과업이 나서고있습니다. 적들은 동기<토벌>작전에서 만회할수 없는 참패를 당하고 사방에 분산된채 제 소굴에 처박혀있습니다. 우리는 적들에게 숨돌릴틈을 주지 말고 적극적인 반격전으로 넘어가 일제침략자들에게 련속 타격을 가하고 조국으로 또다시 진군하여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당면하게 압록강연안과 국경일대의 적의 요충지들을 타격하는 춘기공세를 전개하여 적들을 피동과 수세에 몰아넣고 국내진공작전준비를 빈틈없이 갖추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만단의 준비를 갖춘 다음 무산지구에로 진공할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였다.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여 정치공작원들을 국내각지에 파견하여 혁명조직들을 내오게 함으로써 광범한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이루어 조선인민혁명군의 무장투쟁과 배합하여 각종 형태의 조국광복운동을 세차게 전개하도록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무산지구진공후 백두산동북부에서 대부대에 의한 새로운 작전을 전개할데 대한 웅대한 구상을 펼쳐보이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러한 무거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모든 유격대원들이 자기의 정치군사적수준을 더욱 높일데 대하여 강조하시고나서 우렁찬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연설을 맺으시였다. 《동무들! 오늘 우리 앞에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위기에서 구원하며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어올려야 할 무겁고도 영예로운 혁명과업이 나서고있습니다. 우리의 혁명도상에는 엄혹한 시련과 난관이 가로놓일수 있으며 희생도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난관 앞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투쟁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것입니다. 모두다 조국진군의 길에서 무비의 용맹과 헌신성을 발휘하여 일제침략자들에게 련속 심대한 군사정치적타격을 가함으로써 놈들의 멸망을 촉진시키고 조선혁명을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엄광호는 회의결정에 의하여 처단되였다. 이날밤 방면군 당위원회가 열리였다. 여기에서는 춘기대반격과 국내진출에 대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토의되였으며 일련의 조직문제들이 비준되였다. 손재연과 리성림은 여기서 다시 비판을 당하고 출당철직의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비판과 처벌을 달게 접수하였으며 조선인민혁명군전사의 고귀한 품성을 소유할수 있도록 기회를 줄데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피타는 목소리로 청원하였다. 회의는 그들의 청원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손재연은 8련대의 평대원으로 편입시키고 리성림은 독립대대에 배치할것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둘 다 사령관동지께서 이어주신 정치적생명을 다시는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혁명의 한길에서 충성다할것을 굳게 결의하였다. 춘기대반격의 첫타격은 조선인민혁명군의 동기작전에 눈물겨운 감회와 참혹한 상처를 빚어낸 가재수 백바위골에 린접한 적의 군사요충지에 지향하기로 결정되였다. 14
초저녁까지 구질구질 내리던 비는 멎고 철을 재촉하는 소쩍새소리가 구슬피 울리는 가운데 아래가 약간 이지러진 달이 백바위 동쪽령마루에 솟아올랐다. 지난 겨울 피로 얼룩진 만단 사연을 새겨놓던 눈무지는 어디로 갔는가. 푸른 달빛아래 은은하게 떠오르는것은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야산 봉우리와 그너머 더 좀 희미한 륜곽을 드러내는 밀림뿐이였다. 백바위골의 등불도 훨씬 줄어들었다. 그대신 구가점의 포대에는 대낮같이 불을 밝혀놓았고 수비대병영에서는 무슨 지랄이 났는지 마당에 황황 불길이 타번지고있다. 북대정자에서 곧장 압록강기슭을 향하여 남하해오던 조선인민혁명군은 초저녁에 백바위골 뒤산에 도착하여 전투준비를 갖추고 정찰병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김태규분대장을 조장으로 하고 박인섭, 김재영 등 백바위골의 옛 공작조성원들을 조원으로 하여 구성된 정찰조는 부대가 도착하기 한걸음 앞서 샘골과 구가점 거리로 내려갔었다. 이윽고 정찰병들이 돌아왔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지금 수비대에는 6도구에서 증강되여온 일제군대의 한개 대대가 래일새벽 밀림으로 떠나기 위하여 마당에서 야영을 하고있으며 경찰분서에는 별다른 정황이 없고 관동군의 고관 한놈과 수비대장, 경찰분서장이 《취락정》에서 술을 퍼먹고있다는것이였다. 그전날 조선인민혁명군과 깊은 인연을 맺고있던 샘골이며 백바위골의 혁명적인민들은 지난번 《토벌》이래 어디론가 모두 뿔뿔이 흩어져가서 아무도 찾아볼수 없었다고 한다. 백바위골에 가슴아픈 추억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은 많다. 박덕산이며 정지성이, 이번에 정찰을 갔다온 박인섭이, 김재영이 밖에도 류진옥이와 금숙이 그리고 철봉이와 순애는 남다른 사연을 간직하고있었다. 진옥은 13도구전투때 구원되여 그때부터 유격대와 함께 행군하였다. 이른새벽 어느 산기슭을 돌 때 흔들리는 들것우에서 눈을 뜬 진옥은 소스라쳐 몸을 일으키려 하였었다. 그러자 《가만히 누워있소. 인차 휴식하게 되겠는데 그때 상처를 치료하도록 합시다. 이제는 유격대에 와있으니 급해할것이 없습니다.》하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리여왔다. 그다음 진옥은 다시 정신을 잃고말았었다. 그것은 극도로 지친 몸때문만이 아니였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가 집을 뛰쳐나와 거칠은 이역산천을 정처없이 헤매여다닐 때 마음속 깊이깊이 품고다닌 그 끌수 없는 지향이 마침내 이루어졌다는것을 말해주었었다. 유격대ㅡ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고 정지성이가 있는 유격대, 그 유격대의 품에 안긴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온갖 시름과 근심걱정이 다 사라져 한평생 잠이라고 자본 사람같지 않게 곤한 잠에 떨어졌었다. 장군님을 만나뵈온것은 간삼봉부근의 산기슭에서였다. 사령관동지께서 부르신다기에 옷매무새랑 바로잡고 머리를 빗어넘기며 사령부의 우등불로 조심스레 다가간 진옥은 깜짝 놀라 한자리에 못박혀서버렸다. 지휘관들과 이야기를 나누시고계시던 사령관동지께서 진옥이가 온것을 아시고 반갑게 일어서시여 마주나오시는데 《어서 오시오. 벌써 혼자 걸을수 있게 됐다니 마음이 놓입니다.》하시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며 활달한 몸가지심은 어디라 꼭 짚어 말할수는 없어도 분명 13도구전투가 있은 그 새벽의 산기슭에서 손수 들것채를 들고가시던 그분이시였다. 진옥은 너무나 황송하고 너무나 감격하여 그만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울어버렸었다. 《허, 용감한 지하공작원동무가 이렇게 울어버릴수야 있소.》 장군님께서도 눈을 슴뻑이시며 돌아서시였다. 그날 사령관동지께서는 진옥을 위하여 많은 시간을 내시였으며 마감에 그의 입대청원을 선선히 받아주시였다. 군복을 처음으로 타입은것은 북대정자에서였다. 그러나 오늘 이 그리운 산기슭에 서고보니 자기가 바로 이 자리에 총을 들고 나서기 위하여 바로 이 군복, 이 총을 메고 수천, 수만리를 걸어온듯 한 느낌이 들었다. 방아간도 집도 그리운 사람들도 다 없어졌다는 동네, 오직 원쑤들만이 아직도 피를 물고 날친다는 잊을수 없는 마을을 바라보는 진옥의 눈은 보복의 일념에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군복을 입고 총을 틀어쥐고 선 그에게서 이제는 들국화같은 가냘픈 느낌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서리발같은 증오가 뭉치여 빚어진듯 한 날카로운 선이 달빛아래 선명히 떠올랐다. 그 푸른빛 도는 모습은 진옥의 본래의 아름다움우에 힘과 신심이 보태여져서 후광처럼 빛나고있었다. 아저씨도 작은어머니도 곽병철이네 내외며 그 아이들 그리고 무남이의 지성이네 식구들도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지금 진옥은 그 하나하나의 정을 따라 흩어지려는 마음을 입술을 악물고 한가슴에 움켜안았다. 우리 사람 누구에겐들 저 짐승같은 놈들에 대한 피맺힌 원한이 없겠는가. 나는 조선인민혁명군 전사이다. 나는 모든 조선인민의 원한을 풀어주고 그 자유를 찾기 위한 혁명대오의 한 전사이다. 이렇게 생각한 진옥은 아직도 몸에 배지 않는 총을 억세게 틀어잡았다. 밤이 깊었을 때 춘기대반격의 첫 신호총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함께 북문포대밑에 바싹 다가가 붙어있던 강철룡의 기관총이 포대꼭대기를 향하여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반대쪽 성벽밑에 매복해있던 성문포대파괴조가 그틈에 담장을 뛰여넘었다. 맨먼저 담장우에 올라선 장경수가 병영 한복판에 대고 기관총의 불벼락을 안겼다. 널다란 마당에 불을 피워놓고 사방에 몰켜자던 적들이 벌둥지를 쑤셔놓은듯 갈팡질팡 내뛰였다. 총알이 안팎으로 긴 예광탄줄기를 그으며 마구 엇갈렸다. 그러거나말거나 최병규는 포대문으로 다가가 수류탄묶음을 집어던졌다. 꽈르릉하는 굉음이 터져오르자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포대의 기관총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느새 강철룡이 자기 소대를 병영문으로 이끌어들였다. 그무렵에 경위중대가 담당한 경찰분서에서는 벌써 삼단같은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샘골초입의 네거리 질쩍거리는 땅우에 무릎을 꿇고앉아 권총손잡이를 매만지고있는 오중흡은 초조하여 반대쪽골목에 들어차있는 8련대와 박덕산정위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침착한 박덕산의 성품 그것처럼 침묵이 그들먹이 가라앉아 있다. 불시에 성문이 환해지더니 강철룡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리여왔다. 《조선혁명 만세―》 문이 열린것이다. 구가점의 포대는 점령되였다. 오중흡은 반사적으로 권총을 높이 쳐들고 돌격구령을 웨쳤다. 《조선혁명 만세―》 《일제침략자들을 타도하자!》 기나긴 겨울 참고참아오던 분노가 탕수져 흐르던 눈석임물마냥 사태를 일으키며 쏟아져내렸다. 어느새 박덕산은 육중한 몸을 날려 병영담벽에 올라서서 소리높이 웨치고있다. 《춘기대반격 만세! 사랑하는 부모형제자매들의 원쑤를 갚자! 한놈도 살려두지 말자!》 병영은 불바다로 변하였다. 적들은 결코 작은 병력이 아니였을뿐아니라 장비에 있어서 오히려 유격대의 몇갑절이나 되였다. 그러나 하늘을 찌를듯 한 기세로 덮쳐드는 유격대의 화력앞에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때문에 곳곳에서 처참한 몰골이 되여 죽어너부러졌다. 가네꼬대위의 방에 주인 대신 틀고앉았던 소좌 한놈이 일본도를 뽑아들고 뛰지 말라고 소리치며 마당으로 달려나오다가 교차화력에 걸리여 삽시에 헌 누데기쪼각처럼 갈가리 헤쳐지고말았다. 한편 《취락정》의 구석진 방에서는 초저녁부터 틀고있던 세놈이 모두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한절반 쓰러져가고있었다. 가네꼬는 벌써 세번째 변소에 드나들면서 토하고난 길이라 장지에 비스듬히 기대여 술잔을 매만지고있었고 두꺼비는 술상에 연신 턱방아를 찧으면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는것이 상우에 다 엎지르고 빈잔을 핥아대고있었다. 모리는 느침을 흘리며 상우에 엎드려있었다. 그러나 썩은 붕어눈같긴 해도 눈만은 아직 뜨고있었다. 《흥,… 흥안령 뻗어내린 저 벌판을… 까.》 모리가 코웃음에 섞어 《관동군의 노래》한구절을 중얼거리는데 파랗게 얼어든 상을 하고 장지에 기대여있던 가네꼬가 게슴츠레 풀어졌던 눈을 똑바로 떴다. 《…풍운에 몸바치는 관동군이다. 이자식아! 풍운에 몸바친단 말이다. 풍운에…》 가네꼬는 틀림없이 이상한 소리가 들린듯 하였는데 모리가 이렇게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술상을 두들겨대는바람에 실머리를 놓치고말았다. 그는 무슨 까닭인지 별안간 마음이 뒤숭숭해지는것을 가라앉힐수 없었다. 얼핏 돌아보니 구질거리던 날씨가 어느새 개이여 달빛이 창문에 하나가득 어리여있다. 이때 거리쪽에서 꽈르릉하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이어 콩닦듯 하는 총소리도 들려온다. 가네꼬는 화닥닥 뛰여일어났다. 《뭐야 이건, 앙?》 모리가 취중에도 총소리는 가려들었는지 구렝이처럼 대가리를 쳐들었다. 《좋아 좋아, 내 목을 달아매도 얼마든지 좋아나하다.》 두꺼비는 연신 빈 잔을 빨아대더니 총소리를 듣자 모든것을 쾌히 단념하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가네꼬는 전투부대의 군인다운데가 있었다. 빈 술잔을 매만지고있던 그는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더니 대뜸 칼자루를 움켜쥐고 문을 차고나갔다. 그런데 뻐개지듯 하는 그 문을 누가 바깥에서 움켜잡더니 웬 사람 셋이 뛰여나가려는 가네꼬를 떠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두꺼비는 아직 무슨판인지 똑똑히 판단을 할새가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손을 옆구리에 가져갔다. 그보다 더 날쌘것은 역시 모리였다. 그는 눈이 개개 풀리여 엎디여있었고 방금 포대가 무너지는 소리조차 무슨 영문인지 가려듣지 못했으나 가네꼬가 덜미를 잡히여 되밀리여 들어오는 눈치를 채자 한순간에 도정신을 하여 일어서는참 술병으로 등불을 쳐 깨뜨려버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바깥은 희미하게나마 달빛이 깔려있어서 얼씬하면 얼씬하는쪽에서 기관총의 련발사격소리가 울리여왔다. 《꼼짝 말앗!》 총소리뒤로 이런 야무진 소리가 울리여왔다. 모리는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앉아서 죽을수는 없었다. 그는 불이 꺼진 첫 몇순간의 어둠을 리용하여 뒤창을 걷어차고 바깥마당으로 뛰여내렸다. 뒤따라 두꺼비도 허둥지둥 굴러떨어졌다. 《재영동무, 이렇게 내뜨리지 말고 생포하라구, 생포하라고 하지 않어.》 뜨락에 떨어지자 벌써 여섯발이나 명중탄을 맞고 속 파낸 썩은 박통처럼 된 분서장놈을 깔고 타며 박인섭이가 소리쳤다. 그러나 실상 재영의 기관총은 어찌나 정확했던지 넙적가재미처럼 방바닥에 엎드린 가네꼬의 군복등때기를 째놓아서 그놈은 더는 뛸 궁리를 못했다. 모리만이 컴컴한 뒤마당 정원의 어둠을 리용하여 구석에 있는 뒤문을 걷어차고 골목으로 내뛰였다. 그는 질쩍거리는 강낭밭고랑을 엎어지며 자빠지며 향방도 모르고 달렸다. 자기 인생의 종점이 눈앞에 이르렀다는것을 느끼자 발악적인 용기가 솟아났다. 얼핏 고개를 들어보니 수비대도 경찰서도 몽땅 불타고있었다. 유격대들의 돌격함성이 밤하늘에 메아리쳐 귀가 웅웅한다. 모리는 이런 때 밝은곳으로 나갔다가는 영낙없이 덜미를 잡힌다는것을 깨닫고 될수 있는대로 어두운쪽을 향해 뛰였다. 강낭밭이 끝나자 달구지길이 나타났다. 샘골에서 백바위골로 건너가는 길이였다. 그 끝에 전날 장기덕이가 벌려놓았던 구멍가게가 아직 빈집채로 남아있었다. 모리는 반드시 그 집에 숨자는 생각을 한것도 아니였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쪽으로 날쌔게 달려갔다. 어쨌든 그 집은 빈집이며 한두번 들린적도 있는 집이다. 그러면서도 외따로 떨어진 서글픈 초가마가리라 유격대원들이 주목할것 같지 않은 집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리답지도 않은 부정확한 타산이였다. 갈림길인 그 집앞에는 방차대가 배치되여있었다. 게다가 유격대에는 그 집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 한두사람이 아니였다. 모리가 극도로 조심을 두면서도 군인다운 민첩한 동작으로 길 한옆을 소리없이 달려 그 빈 집앞에 이르자 절컥하는 총소리와 함께 야무진 녀자의 목소리가 쨍하니 울려왔다. 《섯, 손들엇!》 《앗.》 모리는 어망결에 골을 싸쥐며 진창투성이 길바닥에 엎드렸다. 《아니 이놈이 ,취락정〉에 있다더니… 이놈아, 골을 쳐들엇!》 이런 소리와 함께 한 녀자가 총을 내대고 다가왔다. 모리는 손가락짬으로 안경알을 바로잡아쓰고 다가오는 녀성유격대원을 바라보았다. 푸릿한 달빛아래 뚜렷이 떠오르는 그 얼굴에 눈길이 멎자 모리는 소스라쳐 벌떡 일어나앉았다. 《아, 네년이?… 역시 그랬구나…》 이렇게 이짬으로 씹어뱉듯이 중얼거린 모리는 언젠가 백바위골경찰분서 대기실에서 자기 머리에 그처럼 강한 인상을 새겨놓던 처녀의 얼굴을 상기하고 무릎을 철썩 쳤다. 《그렇다, 나다. 네놈이 내 뒤를 캐자고 이 가게방에 장기덕이를 박아넣었지만 그놈은 13도구에서 먼저 죽었다. 이제는 네놈이 죽을 차례다.》 류진옥은 모리 이사무의 가슴팍에 총창을 갖다대고 이렇게 말하면서 동무들을 돌아보았다. 《금숙동무, 이놈이 <취락정>에서 술을 퍼먹는다는 관동군의 그 우두머리놈이예요. 끌고갈가요?》 《죽여버려요. 이제 조국까지 단숨에 달려가야겠는데 언제 그런놈을 끌고다니겠어요.》 금숙은 쌀쌀하게 대답했다. 15
김일성동지의 친솔밑에 춘기대반격에 떨쳐나선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이 4월 8일 가재수전투를 시작으로 4월 12일 구가점전투, 4월 26일 15도구전투 등 련속적인 전투를 치르면서 압록강기슭의 적 요충들을 짓뭉개버리고 소덕수 마등창에서 이해의 5.1절경축대회를 성대히 가진 다음 한창 조국진군준비를 다그치고있을 때였다. 신경역의 귀빈대합실 한칸에서는 전 관동군사령부 부참모장 하시모도 간지소장이 유골상자 하나를 앞에 놓고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배웅을 나온 참모장 이소다니중장이하 관동군의 고급막료들도 모두 입들을 봉하고 빨리 차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있었다. 그것도 그럴밖에 없는것이 만주를 쥐락펴락하고 나아가서는 일본정계와 군부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있던 하시모도가 일조에 목이 달아나 일본제국륙군의 가장 빛나는 자리에서 병기본부창근무라는 군인으로서는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자리로 따돌리운것이였다. 만주에서 관동군의 작전능력에 대한 그의 평가의 허위성과 특히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동기작전 실패의 책임자를 내지 않을수 없었던 이다가끼며 도죠는 때마침 강인노미야참모총장의 불쾌한 기분에 승세해서 하시모도를 희생자로 밀어넣었던것이다. 신흥전쟁상인들의 압력에 의하여 동남방향으로의 진출을 결정하지 않을수 없었고 그 전단계공작으로서 5월 12일의 아모이 프랑스조계사건을 일으키고 이어 천진외국조계봉쇄를 획책하고있던 도죠의 립장에서 볼 때 관동군에게 손도 못대게 구는 하시모도가 시끄러운 존재이기도 하였다. 김일성장군의 위명을 잘 알고있는 그는 하시모도의 론거를 반박할만 한 힘이 없었다. 그런차에 마침 좋은 구실이 생긴것이다. 배웅나온 인간들가운데 민간인으로서 두드러질뿐아니라 침울한 분위기를 비웃듯이 명랑한 표정을 짓고있는 인간이 둘 있었으니 하나는 만영 리사장 아마가스였고 다른 하나는 화려한 봄철치포로 단장한 진백란―이찌가와 요시에였다. 진백란의 명성은 그 명성의 인공적조작자인 하시모도의 예상을 초월하였다. 일본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수많은 속물들이 이르는곳마다에서 진백란의 이름을 외우고 젊은 계집들은 그의 옷맵시와 화장법, 걸음걸이, 말투를 본땄으며 그가 부른 노래는 노래마다 레코드 값을 올렸다. 그리하여 지금 진백란은 일본의 큰 흥행단체의 초빙을 받아 도꾜에서 독창회에 출연하기 위하여 가는길이였다. 반년도 못되는 지난겨울에 하시모도는 진백란을 도꾜려행의 길에 심심풀이로 함께 데리고 가려고 자기 방에 불러다놓은적이 있었다. 그때의 진백란은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수 있는 하나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었다. 때마침 7도구치기에서 김일성장군의 유격대에 의한 《토벌작전》의 참패소식이 들어와서 하시모도는 진백란이같은 녀자에게도 자존심이 있을수 있다는것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고 모욕적으로 내쫓아버렸었다. 바로 그날의 보복인듯 지금 진백란은 푹신한 안락의자에 화려한 육체의 선이 다 드러나는 치포자락이 무릎우까지 끌려올라가게 두다리를 포개고앉아 아마가스에게 추파를 던지고있다. 《너무 장난이 지나쳤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말야. 이제 두고보게만 사건은 불가피하게 점점 확대될걸세.》 아마가스는 친구를 위로하듯이 이런 말을 하였지만 실상 그것은 그의 기분이 더할나위없이 좋다는것을 말해줄뿐이였다. 그가 장난이라고 말한것은 지난 1월 도꾜에서 그 누군가에 대한 앙심을 잔뜩 품고 돌아온 하시모도가 23사단장 고마쯔하라에게 귀띔을 하여 마침내 지난 11일날 노몽한강류역 할힌골에서 히가시기병련대와 야마가다보병련대를 동원하여 몽골국경경내로 쳐들어가게 만듦으로써 지금 한창 만몽국경일대에서 벌어지고있는 쏘몽군과 일만군 사이의 군사적충돌을 말하는것이였다. 하시모도는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도꾜에서 생각했고 그전날 내각이 뒤집힐 때 머리속에 떠올라 사단장회의에서 암시한적도 있는 이러한 사건은 사실 관동군을 딴 전선에 빼돌릴수 없다는 구실이나 만들면 족했지 이렇게까지 수만의 쌍방군대가 본격적인 충돌을 일으킬 종류의것은 아니였다. 그는 장고봉사건정도의 파문이면 능히 그 목적을 달성할수 있으리라고 내다보았던것이다. 그러나 군국주의의 독소에 의해 리성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움직임을 그가 다 계산해낼수 없는것은 우유부단한 저능아 도죠 히데끼가 일약 일본제국의 대표적인 인물로 두드러져오르는 희비극을 보고 이미 통감한바이였다. 모든것이 돌이킬수 없고 인간으로서는 막을수 없는 일이다. 하기에 지금 그의 잔꾀에 의하여 노몽한과 할힌골의 두 강물이 일본제국의 미치광이군인들의 피로 붉게 흐리고있다는것쯤 별로 따갑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의 생각은 자기 가슴앞에 놓여있는 흰 상자속의 백골―기꾸찌 고사부로대위의 유골에 쏠리고있었다. 주린 까마귀가 뜯어먹다 남은 기꾸찌의 송장이 실려왔을 때 군의들은 목줄기를 눌러죽인 자리와 물어뜯긴 자리가 뚜렷한만큼 전사로 보기가 힘들다고 증언하였지만 기꾸찌백작의 아들의 죽음은 역시 페하를 위한 성스러운 충혼의 발현으로 보아야 한다고 인정되여 정국신사에 유해를 안치하기로 결정되였다. 기꾸찌대장은 자신이 직접 올수 없는 로구임을 헤아려 인편에 유골을 보내달라는 간절한 편지를 우에다사령관과 하시모도부참모장앞으로 썼는데 그 편지를 받는 날 하시모도를 해임조동하는 군령이 발표되였던것이다. 하시모도는 흰 보자기속에 감싸인 백골상자를 이윽히 들여다보노라니 마치 그속에 들어가있는것이 한개 애숭이대위가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라는 착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시간이 감에 따라 착각은 점점 더 커졌다. 마침내 그는 그 상자속에 들어가있는것은 자기도 기꾸찌대위도 아닌 바로 일본제국자체라는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아직 시간이 멀었는걸요. 뭘 벌써 일어나세요?》 같은 차를 타고 한차칸에서 가게 된 진백란이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이였다. 송장우에 피여난 꽃처럼 진백란의 모습은 풍만하였고 독스럽게 아름다왔다. 하시모도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아무렴 내가 일본제국을 유골상자속에 메고 이 대륙에서 쫓겨나고만단 말인가. 아니다, 나는 기어코 돌아올것이다― 이렇게 비수같은 생각을 품고보니 자기가 이 땅에서 꼭 해두어야 할 마지막 일 한가지가 남아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이소다니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말하였다. 《각하, 제가 한가지 잘못 처리하고 가는 일이 있는데 중장각하께서 바로잡아주시기바랍니다.》 《그게 뭔데…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응당 해야지.》 이소다니중장은 아직도 하시모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던 지난날의 버릇이 남아있어서 선뜻 응해나섰다. 《제가 수일전에 보도과장 모리중좌를 해임조동하는 문건을 만들어올려보냈습니다. 그 문건이 아마 지금쯤 중장각하의 책상우에 놓여있을것입니다. 그것을 기각해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하여간 그를 신임하시고 그의 뒤를 잘 보살펴주기바랍니다.》 하시모도는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그를 절대로 해임시키지 말아달라는 말을 차마 그대로 할수가 없어 이런 정도로 맺었다. 이소다니는 그의 청을 쾌히 승낙하였다. 하시모도는 사실 노몽한에서 사건이 본격화되기전인 4월말에 압록강연선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련속적인 타격소식을 듣고 책임을 추궁하려고 아무리 찾아도 일부러 피해다니는듯 나타나지 않는 모리를 화김에 내쫓아버리기로 마음먹었던것이다. 이제 독한 마음을 먹고 다시한번 이 대륙에 돌아올 그날을 생각하니 역시 믿고 박아둘만 한 인물은 그래도 모리만 한것이 없다고 생각되였다. 이소다니의 승낙을 받은 그는 진백란이야 따라오건말건 배웅나온 사람들에게 군인답게 절도있는 인사를 하고 표표한 기상으로 유골상자를 메고 구내로 걸어나갔다. 그가 소장의 견장에 어울리지 않는 백골상자를 메고가는것은 그 상자를 대장 기꾸찌백작에게 갖다안김으로써 지난날 황도파의 맹장의 한사람이였던 그 늙다리의 영향력을 리용해보자는 속심이 있었기때문이였다. 16
간밤부터 흐린 날씨더니 새벽이 되여도 개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립하가 지나 소만이 래일모레로 다가왔건만 5월 18일 목요일날의 이른새벽 강기슭은 바람기가 쌀쌀하였다. 그래도 청신한 물소리가 가슴을 쿵쿵 친다. 그것은 압록강 물소리였다. 눈덮인 만학천봉에 위훈의 발자국을 아로새기며 100여일에 걸쳐 천여리 혈로를 헤쳐온 조선인민혁명군 대오는 마침내 조국대안 구시등판에 서서 날밝기를 기다리고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밤중에 강건너로 장경수와 함께 정찰을 보낸 정지성과 류진옥 등 세사람의 정찰조원이 돌아오는것이 궁금하시였다. 한편에서는 12도구 부근에서부터 여러곳으로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실 때 13도구 비석골에 지방조직도 수습할겸 아이들을 맡기라고 떠나보내신 금숙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는것에 마음이 쓰이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강을 건너올 정찰조원들을 기다리시며 자주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시였다.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눈석임물로 불어난 압록강의 거밋한 수면우에 아지랑이와도 같은 물안개가 굼실굼실 피여오른다. 왼쪽으로 5호물동이 있고 그앞에서 소백수물이 갈라져나가는데 강을 건느자면 물동으로 막아놓은 이 어방이 그중 적합하였다. 날이 밝음에 따라 소백수물가운데 비죽비죽 솟아난 바위돌도 바라보이고 물가에 치렁치렁 늘어진 물버들가지들이 흐느적거리는것도 바라보인다. 어느새 조선인민혁명군대원들은 강가에 주런히 나섰다. 모두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겨우내 힘겨운 전투에서 빼앗아낸 새 기관총이며 만탄창을 한 탄띠들을 엇갈아 띤 그들의 모습은 이 봄날의 아침공기처럼 청신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운데는 13도구의 창수를 비롯한 신대원들의 얼굴도 적지 않게 석여있었다. 슴슴한 물비린내가 풍겨온다. 번쩍번쩍 흰 갈기를 일으키며 여울을 건너뛰는 물결이 마치 고기비늘처럼 엷은 해빛을 반사한다. 날은 다 밝았으나 하늘은 여전히 흐려있어 강우를 천천히 흘러가는 물안개너머로 조국의 모습은 어슴푸레한 륜곽을 드러내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고개를 드시여 하늘을 바라보시였다. 두꺼운 구름장이 동남쪽하늘가로 줄달음치고있다. 피어린 싸움길을 헤쳐온 이 슬기로운 전사들에게 활짝 개인 그리운 조국의 모습을 보여주고싶으시였다. 100만년의 인류력사에 혹한과 기아와 고난에 대한 인간의 쓰라린 기억이 어찌 적다고 할수 있으랴. 그러나 지난 넉달동안 조선인민혁명군이 겪은 시련은 그 고난자체가 어려웠던 그것보다도 그것이 가장 위대한 인간정신의 발현과정이였으며 우주의 온갖 요인에 비한 인간의 제1차성과 그 찬란한 승리의 과정이였다는 그것으로 하여 특출하며 전무후무할것이다. 그러한 위훈을 세운 우리의 전사들에게 밝은 해빛아래 빛나는 아름다운 조국을 보여주고싶으신 김일성동지의 간절한 심정이시였다. 그것은 장군님자신의 심정이시기도 하였다. 락수동을 지나 12도구를 바라고 선풍을 휘몰아가는 강행군의 로상에서 지난겨울 격전장에서 잃어버린 김재영의 신을 찾아내여 대렬이 한동안 떠들썩했을 때도 그이의 가슴에는 그러한 념원이 간절해지시였다. 뒤에 적을 달고 달리다가 마주오는 적과 부딪치여 판가리싸움을 벌렸을 때 재영이는 어느 다박솔에 걸리여 신을 잃었었다. 그런데 눈이 다 녹은 이 봄에 보니 그의 신은 락락장송의 상아지끝에 걸려있었다. 재영이가 다박솔이라고 생각하고 껑충껑충 뛰여넘은 그 나무는 사실은 두길도 넘는 큰 소나무였다. 봄바람 설레이는 소나무가지에 걸려 흔들리는 그 검정고무신은 기관총을 메고 선 어엿한 유격대원 김재영의 신이라고 생각기에는 너무나 작아보였다. 허지만 그 신은 불과 달반전에 분명히 그가 신고있던 신이였다. 엄청난 눈더미우에서 지나간 간고한 시련의 겨울, 투쟁의 겨울, 성장의 겨울이였다. 하기에 그 나무가지에 고무신이 매달린 기이한 광경을 보고는 지나치는 대렬마다 걸음을 멈추고 야―야- 환성을 지르며 떠들었다. 그날은 마침 장군님께서 스물일곱번째 생신날을 맞이하신 뜻깊은 날이였다. 아무에게도 터놓지 않으셨지만 장군님께서는 가슴에 하나가득 괴여오르는 감회를 지그시 누르시여 헤쳐온 눈길, 싸움의 험한 길을 되돌아보시였던것이다. 이제 만경대를 떠나 실로 15년의 기나긴 싸움길을 거쳐 다시 그리운 이 강기슭에 서시고보니 그이의 가슴에는 크나큰 감회가 저리도록 차넘치였다. 한 나라의 인민이 혁명승리의 참된 열쇠를 자기 손아귀에 튼튼히 틀어쥔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적인 판도에 널린 부르죠아련합의 어마어마한 대포와 군함과 비행기와 그 수백만 고용군대, 무수한 철창과 교수대에 비해볼 때 여섯자 인간의 힘은 얼핏 보매 너무나 보잘것 없는것 처럼 생각될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인민혁명군은 지난 넉달동안에 자유와 해방을 이룩하려는 인민의 투쟁정신이야말로 가장 위대하다는것을 더할나위없이 과학적으로 론증하였다. 그 과정은 가장 위대한 진리의 탐구과정인만큼 여느 과학에서 시약과 추리로 진행하는 과정을 가장 슬기롭고 아름다운 인간들의 피와 생명과 청춘을 바쳐 이룩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 위대한 진리는 탐구된것이라기보다 창조되였다고 말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위대한 진리의 창조자이신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진리가 창조된 천리혈로에 펼쳐졌던 만단 사연을 돌아보시며 지금은 가고 없는 혁명의 전사들과 아직도 생사존망의 갈림길에서 숨죽이고 누워있는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시는것이였다. 《야― 구름이 갈라진다. 해가 솟는다!》 깊은 명상에 잠기셨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재영의 이런 부르짖음에 문득 고개를 드시였다. 《야― 멋이 있구나. 저쪽을 보라구. 저게 물동이로구만. 그리고 뒤로 솟은게 포태산이지?》 누군가가 옆사람의 어깨를 잡아흔들며 강가로 위태롭게 다가선다. 아닌게아니라 구름장은 삽시에 서남쪽으로 줄달음쳐지나가고 그뒤로 5월의 푸른 하늘이 점점 넓게 열리여갔다. 《사령관동지.》 하고 뒤에서 박덕산이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무리 침착한 그도 이 순간만은 마음속의 흥분을 감출수 없었던지 목소리가 떨리였다. 《저기 백두산이 보입니다.》 덕산이 이렇게 말하며 그이 앞에 손길을 들어 동북쪽 하늘을 가리키자 모두 숨을 죽이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눈에 정기를 모으시고 백두산이 솟아있을 하늘중천을 바라보시였다. 해는 황금빛 광망을 온 누리에 뿌리며 아직도 우중충한 산발들우로 불쑥 솟아올랐다. 그 빛발을 받아 여태 트이지 못한 북쪽하늘가의 흰 뭉게구름떼가 찬란한 조형을 이루며 뒤번지였다. 조종의 성산 백두산은 바로 그 구름우에 만년설을 이고 높이 솟아 머나먼 싸움길을 헤치고 돌아온 조국의 아들딸들을 한품에 안아주듯 숭엄한 자태를 드러내는것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환성을 지르며 껑충껑충 뛰는 전사들을 굽어보시였다. 겨우내 얼어터졌던 몸이 봄을 맞자 허물을 벗듯이 한꺼풀피부가 벗어지기 시작한 그 모습들을 보실 때 문득 그이의 눈시울은 뜨거워올랐다. 김재영은 새로 탄 기관총을 하늘높이 쳐들고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있다. 그옆에서 박인섭이와 상철은 껑충껑충 뛴다. 채옥이와 철구아주머니는 더 좀 높이 키돋움을 하려고 이깔나무를 그러안고 한손을 쳐들어 흔들어댄다. 그들과 함께 손을 흔드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만 두눈을 감싸쥐고 고개를 숙이시였다. 그도 눈물이 절로 나는 모양이다. 옥금이 역시 손을 높이 쳐들어 흔드는데 그 눈귀에 핑하니 물기가 어리여있다. 김일성동지의 바로 옆에 옹위해선 오중흡이며 박덕산이며 오백룡이, 강철룡이 같은 묵직한 지휘관들도 아이들처럼 진정할줄을 모른다. 참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이였다. 이러한 기쁨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혁명대오는 다시 지난 겨울과 같은 기나긴 시련의 겨울을 열번 백번을 더 겪는 한이 있더라도 싸움의 길, 혁명의 길, 자유와 해방을 위한 한길을 웃으며 걸어갈것이다. 《사령관동지!》 또렷한 녀자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사령관동지께서 고개를 돌리시니 어느새 새 군복으로 갈아입은 금숙이가 경례를 붙이고 서있다. 《13도구 공작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참 수고했습니다. 그래 아이들은 어떻게 했소? 누구에게 맡겼소?》 그이께서는 가슴을 들먹거리는 녀전사의 두손을 잡아주시며 급히 물으시였다. 지휘관들과 다른 전사들도 모두 금숙이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고있다. 《비석골에서 마침 류창표동지를 만났습니다.》 하고 금숙은 흥분한 목소리로 보고를 드렸다. 《류창표동무를 만났단 말이요? 류창표동무가 어떻게 비석골에 왔단 말이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너무나 뜻밖의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며 다우쳐물으시였다. 《백바위골〈토벌〉이 있기 전날 그리로 옮겼답니다. 옮겨오자마자 조직을 수습하는 일을 얼마나 잘했는지 벌써 13도구조직은 상처를 거의 다 털어버리게 되였습니다. 저는 주변부락들을 돌아다니며 북대정자회의에서 제시하신 사령관동지의 방침을 침투하고 돌아왔습니다. 류창표동지의 말에 의하면 곽병철동지도 백바위골에 드나들면서 여전히 완강하게 싸우고있고 그 가족들은 락수동에 새로 집을 짓고 들어앉았답니다. 지금쯤 아이들은 부모들에게로 돌아갔을것입니다. 아이들은 저와 헤여지면서 장군님께 돌아가겠다고 발버둥질을 쳐서…》 금숙은 사업에 대한 보고를 할 때는 그처럼 또박또박 말하던것이 아이들 이야기에 이르자 더듬거리며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속이 언짢으시여 외면하시였다. 그러다가 금숙의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곽병철동무는 훌륭한 혁명가입니다. 철봉이와 순애가 돌아가면 얼마나 좋아하겠소? 태혁동무가 참 훌륭한 일을 했소.》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태혁이가 누워있을 먼 서북쪽산발을 바라보시였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깃들었다. 《그래 태혁동무한테는 들려봤습니까?》 이윽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외면하신채 물으시였다. 《예, 아이들과 함께 떼랑 입히고 왔습니다.》 금숙의 대답소리는 뜻밖에도 밝았다. 그는 구가점전투후 15도구 방향으로 향해가던 숲속에서 비석골로 나가라는 사령관동지의 임무를 받았었다. 거기서 13도구로 내려가는 길목에 태혁의 무덤이 있었다. 철봉이와 순애는 낯익은 산봉우리를 인차 알아보았다. 봉분은 눈석이에 씻기여 좀 꺼지기는 하였으나 겨울에 쓴 무덤 같지 않게 우뚝 솟아있었다. 금숙은 아이들과 함께 떼장을 떠다 옮긴 다음 종시 전하지 못하고만 담배쌈지를 그앞에 묻었다. 그리고 아이들 몰래 눈물을 머금고 생전에 말할수 없었던 살뜰한 말을 마음속으로 주고받았다. 그러고나니 한결 마음속이 가벼웠다. 이제 사령관동지의 안색이 흐리신것을 보니 금숙의 마음은 송구하였다. 그는 잠시 쭈밋거리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사령관동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금숙을 돌아보시였다. 《저 제가 로인 한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로인이란 어떤 로인입니까?》 《류창표동지의 백부님이랍니다. 제가 지방조직을 돌아보고 떠나오는 날 마침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할아버지 말씀이 진옥동무를 찾으려고 백바위골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리 유격대가 구가점을 들이치는 총소리를 듣고 또다시 그리로 달려갔답니다. 그런데 유격대는 벌써 간곳이 없고 하여 하는수없이 돌아서오다가 다시 호동구전투소식을 들었답니다. 그래 로인은 그때부터 줄곧 전투가 있었던곳을 더듬으며 유격대의 뒤를 따라왔답니다. 류창표동지도 할아버지도 진옥동무가 살아서 유격대에 있다는것을 가맣게 모르고 있다가 제가 그 소식을 알려주자 로인이 기어코 장군님을 찾아뵙겠다고 해서…》 《그래 그 로인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바로 저기… 아니 벌써 여기로 옵니다.》 금숙은 자기가 기다리라고 일러둔 으슥한 나무그늘을 가리켰으나 그때 류석진로인은 벌써 의관을 정제하고 두손을 배허벅우에 올려 읍을 하며 숙연한 걸음으로 장군님앞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아직 새벽어둠이 연하게 깔려있는 숲속에 새하얀 두루막을 입은 로인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날의 뜻을 상징하는듯 한 느낌을 주었다. 유격대원들은 로인의 걸어가는 길을 틔워주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로인의 거동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시고 서둘러 마주 달려가셨으나 어느새 로인은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였다. 《무산 옥암동 사는 농민 류석진이 김일성장군님 존전에 삼가 문안을 드립니다.》 《아버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서 일어나십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전에없이 당황하시여 로인의 완강하게 뻗대고앉은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세우시였다. 그러나 로인은 일어서가지고도 읍을 한채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적 드문 심산유곡에 구차한 생을 도모하고있는 이 늙은 백성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장군님의 존안을 이렇게 문득 뵈옵게 되니 항공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사무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거니와 이 늙은것이 살아생전에 우리 배달민족의 구성이신 장군님을 뵈옵게 될줄이야 어찌 꿈엔들 기약할수 있었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지난 가을에 받은 로인의 편지에서도 느낀바이지만 어찌나 고정하고 결곡한 성미인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로인과 생활적인 분위기에서 허물없는 이야기를 나눌수 있을가 하여 딱한 생각만 앞서시였다. 《아버님, 너무 이러지 마십시오. 실은 지난해 가을에 아버님 편지를 받고 인차 회답을 드리지 못해 늘 마음속이 무거웠는데 이렇게 만나뵈오니 우리가 더 반갑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이 부근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밝다고 하여 정지성과 류진옥을 장경수와 함께 정찰에 떠나보내신것을 상기하시고 유감스러운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아버님께서 모처럼 이렇게 찾아오셨는데 공교롭게도 진옥동무가 없어서 안됐습니다. 그러나 인차 돌아올것입니다. 아버님께서 잘 아시는 정지성동무도 함께 갔으니 이제 다같이 만나보시게 될것입니다.》 로인은 련민의 정 넘치시는 장군님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우러러보더니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제 이미 들어서 알고있습니다. 장군님, 제발 이제는 심려를 놓아주십시오. 장군님을 만나뵈온 이 자리에서 제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실은 이 주책없는것이 문득 앞날이 멀지 않은 생각만 하고 나라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 마당에 자식을 보러 먼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세상에 귀중한것이 무엇이라는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님, 제 자식을 생각하는것이 어찌 잘못된 생각이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후들거리는 로인의 손을 따뜻이 쓸어주시며 부드럽게 말씀하시였다. 《아니올시다. 그 미거한것이 장군님 교화를 입어 나라를 위한 싸움에 떳떳이 나섰다는 말은 이미 들었습니다만 그 철없는것이 항차 치마를 두르고나서서 무슨 일을 온전히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집안에 장군님 위업을 받드는 아이가 났다는것은 대대로 나라에 충의를 지켜온 우리 류씨문중의 자랑입니다.》 로인의 목소리는 그처럼 강직하게 울렸으나 어느덧 떨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명주수건을 꺼내여 눈굽을 가리웠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아버님들의 그러한 마음에 떠받들리여 우리 혁명군은 자랄것이며 기어이 조국을 광복하고야말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물결치는 로인의 어깨를 다정히 어루만지시며 깊이 고개를 숙이시였다. 《이 나라 백성되여 어찌 장군님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지 않을수가 있겠습니까? 내 잠간 비석골에 머무는동안에만도 장군님께서 왜놈관가의 소와 백성들의 소를 일일이 갈라보시고 백성들의 소를 돌려주셨다고 장군님을 칭송하는 함지골농민을 만나보기도 하였고 짐을 지고 산중까지 따라갔다 왔다는 새신랑도 만났습니다만 그들이 모두 입을 모아 한결같이 여쭙는 말씀이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단지 축지법과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승패를 임의로 하시는 만고의 명장이실뿐아니라 이 나라 백성들의 아픔을 너그럽고 자애로우신 손길로 어루만지시는 성인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제 좁은 소견에 하늘이 만물을 냄에 그 령장을 먼저 내고 천하에 나라가 서고 민족이 일어남에 먼저 그 령도자가 나서는것은 떳떳한 리치라 한생을 이 나라의 중흥륭성을 갈망하다가 많지 못한 여생을 남긴 이때 저 찬연한 해님과 같이 이 땅에 솟아오르신 장군님을 뵈옵게 된 이 마음을 무엇에다 비기겠습니까…》 로인은 마침내 장군님의 군복자락에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쏟으며 흐느껴울었다. 어지러이 지저귀던 새소리도 가뭇없이 조용해지고 꽝꽝 울리던 강물소리도 땅속깊이 가라앉은듯 숲속은 괴괴해졌다. 오직 백두산우에 높이 솟아오른 태양만이 이 땅의 구석구석을 그 광휘로운 빛발로 들이비쳐 숲도 강도 산과 들도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도 격정으로 뒤설레이게 하였다. 로인은 문득 주위에 모여선 유격대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종의 산 백두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물이 줄줄이 흘러내리는 볼을 두루막자락으로 훔치더니 두팔을 높이 쳐들었다. 《구국안민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 만세!》 격정에 떨리는 로인의 목소리에 이어 남녀유격대원들의 폭풍같은 만세소리가 터져올랐다. 《조선혁명의 위대한 령도자 김일성동지 만세!》 《항일대전의 승리 만세!》 만세소리를 싣고 압록강 물결은 도도히 굽이치며 흘러갔다. 때마침 정찰조가 돌아왔다. 류석진로인이 손녀 진옥이와 정지성을 한꺼번에 그러안는 감격의 순간을 오래오래 바라보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감격과 기쁨의 한귀라도 허물어질가 저어하시여 장경수를 한옆으로 조용히 불러내시였다. 강건너 채벌장들에서는 어제 첫떼가 내렸다고 왜놈들이 몽땅 그 축하랍시고 잔뜩 술들을 처먹고 아직도 늘어져있으며 경찰, 군대 무력들은 주로 앞서 전투가 진행된 구가점, 15도구 대안인 신갈파, 호인, 혜산 방면으로 증강중이라는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이윽고 활짝 개인 조국산천을 바라보시며 마침내 진군명령을 내리시였다. 아침 아홉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어머니 젖줄기처럼 온몸에 스며드는 압록강물을 건넜다. 겨우내 자랐다고는 하지만 상철이나 영남이는 아직 깊은 곬을 건느기가 쉽지 않았다. 총을 든 팔을 높이 쳐들고 가슴을 치는 물살에 떠밀려내려가는 상철을 보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닁큼 전령병을 안아드시였다. 소백수 여울에 들어서자 강물은 발밑을 간지럽히고 정갱이를 어루만지며 무엇인가 귀전에 정다운 말들을 속살거렸다. 뒤척이며 맴돌며 물결따라 춤추는 모래까지 다 들여다보이는 소백수 맑은 물우에 급작스레 연분홍빛 찬란한 그늘이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강기슭에 넘치도록 진달래가 피여나 김일성장군님을 맞이하는 이 나라의 마음인양 떨기떨기 웃음을 짓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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