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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편

 

1

 

잔뜩 수그리고 씩씩거리며 걸어가던 박덕산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동무들, 좀 쉬여가기요. 이젠 헤여지겠는데…》

그는 눈무지우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으며 말하였다.

《누가 담배 좀 없소!》

강철룡이 그옆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쌈지를 꺼냈다.

다른 지휘관들도 눈우에 털썩털썩 퍼더앉았다. 불과 100메터도 안되는 저앞 사령부에서 방금 간부회의를 하고 돌아오는 그들은 수백리 행군을 하고난 뒤끝보다 더 지쳐보였다. 모두 강철룡의 쌈지에 손을 내밀었다. 지어 담배를 끊은지 오래된 오중흡이조차 큼직하게 한대 말아물고 뻑뻑 빨아댄다. 독한 써레기연기를 찬바람과 함께 들이마신 중흡은 마치 아이들처럼 사레가 들려서 밭은 기침을 톺았으나 웃는 사람도 없었다.

오중흡이자신도 여전히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오늘 전투때 수류탄에 맞아 한쪽 귀덮개가 너덜거리는 털모자로 입귀를 한번 훔쳤을뿐 그냥 담배를 뻑뻑 빨아댄다.

《그래 말해보오. 이렇게 헤여져서 일없겠소? 사령부가 일없겠느냐말이요?》

박덕산이 별안간 울부짖듯이 말하였다.

우람찬 몸집을 가지고도 입이 무겁고 무슨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조용히 부드럽게 말하던 그가 그처럼 격한 목소리를 지르기는 처음이였으나 그것 역시 아무도 이상스럽게 생각지 않았다.

《사실 오늘만 해도 그렇지 않소?》

하고 덕산은 이번에는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독소금까지 들이민 그 악착한 적의 포위속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분은 바로 김일성동지이시였소. 사령관동지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루종일 적탄이 비발치는 싸움터의 맨 앞장에 서계셨단말이요. 사람들이 이 일을 알면 우리를 용서하겠소? 아니 우리가 사람으로서 무슨 렴치로 세상에 나서겠소. 그런데 이제 사령관동지의 안전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대책이 없이 우리만 떠나가도 일이 없겠소. 어디 말들 좀 해보오.》

그러나 아무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덕산의 말은 꼭 집어서 누구를 비판한것도 아니였으나 모두 가슴이 찔리여 서뿔리 입을 벌리게 되지를 않았다.

8련대 정위동지 말이 정확하오.》

이윽고 오중흡이 고개를 숙인채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다. 속삭임소리같은 그 소리는 마음속 깊은곳에서 울려나오는듯 사람들의 가슴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들때문에 일신상의 위험도 돌보지 않으십니다. 사실 저녁때 그 마지막전투 생각을 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만일 김정숙동무가 골짜기로 기여드는 놈들을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일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난 사령관동지의 품속에서 자랐습니다. 내가 혁명의 길에 나서서 오늘까지 사령관동지의 사랑을 받은걸 생각하면…》

중흡의 목소리는 차츰 더 낮아지더니 마감에는 옆사람도 알아듣기 힘든 속삭임으로 변하고말았다.

덕산은 무엇인가 말을 하고싶었으나 어쩐지 입을 벌릴수가 없었다.

오늘저녁때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자 혼마소장은 초조감에 볶이여 마지막수를 썼다.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의 위치는 하루종일 계속된 전투과정에 드러나있었다. 혼마는 사령부가 위치한 눈벼랑으로 대대들을 엇바꾸어 내몰면서 밀려드는 어둠을 리용하여 예비대에서 생신한 중대를 골라 깎아지른 벼랑뒤쪽으로 은밀히 진출시켰다. 놈들은 끓어번지는 총소리속에 눈벼랑을 몰래 기여올라 거의 산턱우로 고개를 내밀게 되였다. 만일 그때 김정숙동지께서 언제나와 같이 전투원들에게 더운물이라도 끓여주려고 늘 버릇된대로 후미진 골짜기쪽에 내려가지 않았던들 사태는 어떻게 번질지 모를번하였다. 그때까지도 안전지대에서 쓰러진 대원들때문에 돌아가던 박덕산과 오중흡은 날이 저물어들면서 급작스레 자지러지는 총소리를 듣고 오랜 전투속에서 발달된 륙감이 곤두섰다. 난데없는 권총소리가 낭떠러지쪽에서 울려오자 오중흡이와 박덕산은 눈우를 딩굴다싶이 달려나갔다. 덕산은 그렇게 숨가쁘게 달려가서 사령관동지옆에 붙어섰다. 뒤쪽에서 김정숙동지의 웨침소리와 야무진 권총사격소리가 울리여왔다. 벼랑턱가까이까지 기여오른 놈들은 김정숙동지의 정확한 사격에 의하여 쓰러지고 벼랑을 도로 미끄러져내려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놈들은 한개 중대나 될뿐아니라 하루종일 푹 쉬고난 예비대였다. 가뜩이나 전투원이 부족한 릉선에서 앞뒤로 적을 겪게 되였으니 실로 사태는 위급하게 되였다. 이때 오중흡은 앓던 동무들가운데서 따라나선 몇동무들을 데리고 《사령부를 보위하자!》는 구호를 웨치며 벼랑아래로 굴러내려갔다. 은밀히 골짜기로 기여들자던 놈들은 성난 사자처럼 무섭게 덮쳐드는 오중흡이네를 보고 기겁하여 수많은 송장을 남긴채 내뛰고말았다. 오중흡의 털모자 귀덮개가 적탄에 헤쳐진것도 그때의 일이였다.

이러한 광경을 사령관동지 곁에서 낱낱이 보아온 박덕산은 그때 사령관동지께 말씀드린대로 그 위급한 사태를 타개한것은 오중흡동무자신이라고 말하고싶었으나 중흡의 말이 너무나 가슴을 저미고드는바람에 입을 벌릴수가 없었다.

오늘 전투는 아침부터 날저물 때까지 열시간가까이나 진행되였다. 아마 조선인민혁명군이 치른 전투가운데 이처럼 치렬하고 오래 끈 전투는 없었을것이다.

그렇게 총소리가 요란스럽던 골짜기가 가뭇 조용해지고 하늘에서 살판치던 적비행기들도 까마귀와 함께 제 둥지로 돌아가버렸으니 이제는 쉬여도 될것 같았다.

그러나 사령관동지께서는 그길로 간부회의를 소집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렇게도 정세의 변화가 심하고 정황도 몹시 변하였건만 7도구치기골짜기 초입에 들어섰을 때 내놓으신 방침대로 부대를 세개방향으로 분산하여 활동할데 대한 문제를 토의에 붙이시였다. 적은 날이 저무니 어쩔수없이 공격을 중단했지만 다시 접어들것이다. 이러한 때 부대가 하나로 뭉쳐있으면 행동하기가 불편하고 포위를 뚫고나가기 힘이 든다. 적들이 우리를 포위하기 위하여 힘을 한곳에 집중하여 공격해오는 조건에서 우리는 재빨리 부대를 나누어 놈들을 갈갈이 헤쳐놓아야 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러한 방침에 근거하시여 7련대는 적을 달고 상강구방향으로 빠져나갈것이며 8련대와 독립대대 역시 적을 달고 동강방향으로 나가고 사령부는 경위중대와 함께 림강―장백일대를 선회할데 대한 구상을 짜시였다. 그것은 어제 진행하려던 전투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폭이 넓은 구상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 어려운 전투를 몸소 치르시면서도 처음 내놓으신 구상을 그때문에 중단하시거나 규모를 줄이신것이 아니라 더욱 크게 번져놓으신것이였다. 부대가 이렇게 갈라지게 되면 적들의 력량은 분산될것이지만 그대신 전투와 행군강도는 더욱 높아질것이다. 그러니 겨울이 가고 봄이 와서 부대가 다시 모여 공세로 넘어갈 때까지 부상병들과 허약자들, 재봉대의 녀성동무들은 청봉후방밀영으로 가서 이미 농사를 지어놓은 식량으로 겨울을 나야겠다고 말씀하시고 그 책임자로 김정숙동지를 지적하시였다.

그다음에 또 뜻밖의 일들이 벌어졌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자신께서 데리고 다니실 경위중대와 기관총소대에서 끌끌한 대원들을 다 떼내여 7련대와 8련대를 든든히 꾸리시고 그대신 거기서 나이 어리거나 갓 입대한 신대원들을 모두 자신께서 맡아안으시였다. 그래서 장경수며 최병규며 하는 이름난 전투원들은 가고 그대신 7련대의 박인섭이같은 신대원과 상철이, 영남이 또래 꼬마들만 수두룩하게 경위중대에 몰려들었다. 저번 남패자에서부터 세간을 나기 시작한 기관총소대는 이번까지 헤쳐지니 결국 분대규모로 줄어들고말았다.

이렇게 부대를 개편하신 사령관동지께서는 밤중으로 출발준비를 다 갖추었다가 새벽에 적을 치고 빠져나가도록 지휘관들을 자기 위치로 보내시였다.

자기 련대나 중대로 가자면 사령부앞에서 각각 헤여져야 하였다. 그러나 지휘관들은 헤여질수 없었다. 모든 문제가 아무리 명백하다 해도 사령부를 지킬 대책이 뚜렷하지 않는 이상 무턱 헤여질수 없는 그들의 심정이였다 .그래서 누가 부른것도 아닌데 이처럼 한자리에 모여앉게 된것이다.

《오백룡동무, 그래 자신이 있소? 이제 우리가 믿을건 동무뿐인데 동무의 대답을 듣지 않고는 떠날수 없소. 어떻소? 속시원히 좀 이야기를 해보오.》

덕산은 고개를 떨구고 앉아 눈을 한줌 쥐고 주무르는 오백룡의 팔소매를 쥐여당기며 물었다.

오백룡은 덕산이 잡아당기는대로 큰 몸집을 내맡기고 그냥 눈덩이만 주무르고있다. 크고 두툼한 손바닥에서 녹아난 눈이 터실터실 튼 손등으로 넘어나서 해여진 무릎우에 뚝뚝 떨어졌다. 사람들은 그 물방울이 떨어지는것이 무슨 큰일이기나 한듯이 침을 삼키며 오백룡의 험하게 갈라진 손을 지켜보고있다.

《왜 말을 못하오. 참 답답하다구야.》

강철룡이 마침내 증이 나서 담배를 눈구뎅이에 한자나 되게 깊이 구겨박으며 볼멘 소리를 질렀다.

오백룡은 놀란듯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다가 일제히 자기를 바라보는 지휘관들의 눈길에 당황하여 허둥지둥 눈을 내리깔았다.

지휘관들은 실망하여 입맛을 다시며 외면하였다. 오늘 회의에서 오백룡은 집요하리만큼 거듭 일어나서 사령부호위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때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를 제지하시였고 마감에는 그에게 언권조차 주시지 않으시였다.

사령관동지의 비장하신 심중을 리해하는 지휘관들은 오백룡의 딱한 립장을 생각하여 자기 의견을 말하면서 슬쩍 오백룡이 하고싶은 말들을 대변하였지만 하나도 받아주시지 않으시였다.

오중흡이가 말할 때도 박덕산이나 강철룡이 그러루한 의견―무엇보다도 사령부호위부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할 때도 그이께서는 매번 오백룡을 돌아보시며 나무라시였다.

지금 오백룡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으리라는것은 누구에게나 뻔했다. 그의 안타까운 심정에 비추어볼 때 결의를 따지는것 같은 질문이 다소 가혹한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원만한 성격인 덕산이조차 오백룡의 심중이 괴로우리라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혹 떠올랐다 해도 하는수 없는 일이였다. 자기들은 이제 몇시간후이면 조선인민혁명군의 기본력량을 다 이끌고 떠나버릴것이다. 그러면 이 눈덮인 북덕령숲속에 태반이 신대원과 꼬마들로 구성된 경위중대만 남아서 그이를 모시게 되는것이다. 바로 이러한 안을 내놓으시고 그처럼 강력하게 집행하시는분은 다름아닌 사령관동지자신이시였다.

《내 무슨 말을 하라오.》

불시에 오백룡이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부르짖었다.

《장군님께서 이런 조치를 취하신것이 백번 옳다고 생각하는 내가… 우리 장군님께서 어떻게 틀린 일을 하실수 있겠소. 그러니 난 그걸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충실히 집행해야겠는데 이것이 위험하다는것을 나도 안단말이요. 이게 딴 일이라면 내 죽기를 두려워하겠소? 그러나 이건 우리 혁명의 사령부의 안전에 대한 문제가 아니요. 내 뭐라고 말하라오? 일이 없다고 하라오, 일이 있다고 하라오?》

오백룡은 마침내 주무르던 눈덩이로 제 가슴을 꽝꽝 쳤다. 다져졌던 눈가루가 산산이 흩어져 달아났다.

《오동무, 뭘 그러오?》

하고 덕산은 오백룡의 손을 두손으로 움켜잡았다.

《우리가 동무심정을 몰라서 그러는줄 아오? 사람두 참…》

《나도 정위동무 심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우다. 이건, 이건 너무하단말입니다. 적이 수십만씩 달렸는데 어떻게 우리 혁명의 사령부를 신대원들로만 지켜낸단말입니까? 그래 조선에 그렇게 사람이 없단말입니까? 억울합니다. 난 우리 장군님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는 래년봄에 꼭 만나게 될것입니다. 그것은 장군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때문에 틀림이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무사히 만나서도 내 이 말은 꼭 하겠습니다. 우리 장군님께서 저 꼬마들과 신대원들을 데리고 남으실 결심을 하시였을 때 경위중대장인 나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고말입니다. 우리 혁명이 승리한 다음에라도 나는 기어이 처벌을 받고야말겠습니다.》

오백룡의 피를 토하는듯 한 울부짖음은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덕산은 슬그머니 오백룡의 소매를 놓고 또다시 강철룡의 쌈지에 손을 뻗쳤다. 사령부쪽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령관동지께서 누구를 찾으시는것이나 아닌지… 휘유―하고 아츠러운 바람소리가 울리여온다. 하루종일 전투에 시달리고 일부 동무들은 배앓이에 볶이우고 했는데 그들이 지금 저 바람을 어떻게 겪고있을것인가? 우등불도 마음대로 피우지 못하고 저녁도 짓지 못한 밤이였다.

《정위동무, 내 한가지 의견이 있는데…》

하고 오중흡이 고개를 들었다. 모든 눈길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이건 그리 신통한 수는 못됩니다만 그래도 사태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뭐요? 어서 말해보시오.》

박덕산은 믿음에 차서 중흡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겸손하고 빈틈없는 중흡이 무슨 안을 생각해냈다면 충분히 기대를 걸만 한것이다.

《그런데 사령관동지께서 아시면 허락하시겠는지… 하여튼 지금 행군계획은 전투부대가 먼저 떠나고 사령부가 나중에 떠나기로 되여있습니다. 난… 우리 련대가 맨 마감에 떠났으면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걸 허락받아야 합니다.》

오중흡은 언제나와 같이 조용하게 그러나 확고부동한 결의가 느껴지는 간명한 투로 말하였다. 그의 말은 너무나 요약되여있어서 만일 오중흡이라는 사람자체를 잘 모른다면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리해하기 힘들었을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사령관동지의 명령지시를 집행하는데서 말없이 실천을 앞세우며 가장 어려운 대목에는 언제나 그가 요진통을 막아나선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지휘관들은 인차 오중흡이 무엇을 념두에 두고있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옳수다.》하고 강철룡이 무릎을 짚고 나앉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련대장동무의 의견이 진짜오다. 어떻게 하든지 사령관동지께 말씀드려서 먼저 떠나시도록 해야 하오다. 그렇게만 돼도 한결 숨이 나갈것 같소다. 문제는 저놈들이 우리 사령부만 노리니까 잘만 하면 적들을 몽땅 달고갈수도 있을거오다.》

덕산은 찬찬히 오중흡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선비처럼 단정하게 생긴 얼굴에 단단한 중키를 가진 이 청년의 어디에 그렇게도 웅숭깊은 생각이 깔려있었던가싶었다. 실로 조선혁명의 사령부를 호위하는 중대한 의견을 내놓은 지금 그에 따르는 온갖 간난신고와 치렬처절한 싸움을 그는 누구보다도 현실적으로 그리고있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조용한데 약간 우수가 비낀듯 한 넓은 이마에 굶다랗게 푹 찍힌 눈섭만이 드놀지 않는 결의를 말해주듯 두드러져보였다.

《자신있소?》

덕산은 모든 말을 생략해버리고 물었다.

《어떻게 자신있다고야 말하겠습니까? 목숨이 붙어있는 한 해내야지요.》

흡은 고개를 들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덕산은 들어보나마나한 대답이였으나 그 대답의 무게를 가늠하듯 이윽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움쭉 일어섰다. 오중흡이 언제 자기 결의를 요란한 말로 표현해본적은 없다. 그의 결의는 항상 실천속에서 표명되였다.

《련대장동무, 그럼 사령부로 가봅시다. 오백룡동무도 같이 갑시다. 문제는 경위중대장동무가 어떻게 하든지 이 제기를 사령관동지께서 승인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세 지휘관은 일어서서 사령부쪽으로 걸음을 옮겨놓다가 문득 멈추어섰다.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여러 지휘관들의 간절한 눈길을 느꼈기때문이였다. 이제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동무들이다.

《동무들!》

덕산은 뚜벅뚜벅 되돌아와서 7련대의 중대장과 소대장들의 손을 틀어잡았다.

《동무들은 련대장동무를 잘 도와야 하오. 련대장동무가 아니고 누가 이런 생각을 해내겠소. 우린 아무래도 먼저 떠나게 되겠는데 사령부를 잘 지켜주오. 우리 어디 가든지 사령관동지를 직접 모시고있는 심정으로 싸움을 잘합시다.》

흡은 묵묵히 다른 부대 지휘관들과 작별인사를 하였다. 오백룡이도 동무들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사령관동지를 잘 모셔주십시오.》

《잘 가게. 상처가 도지면 어떻게 하겠나?》

《중대장동지, 우리 영남이를 부탁합니다.》

눈보라가 차츰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눈가루가 뽀얗게 휘말려올라가면서 서로 굳게 그러안은 전우들의 달아오른 볼을 식혀주었다. 동상과 상처로 하여 더뎅이가 앉은듯 거칠어진 그 얼굴들의 모상은 똑똑지 않았으나 누군가가 성급히 빨아대는 담배불빛에 번쩍거리는 두줄기 눈물이 드러났다. 입으로는 흔연스레 인사의 말을 주고받지만 사실 이 리별끝에 무엇이 오겠는지 아무도 기약하기 어려운 길이였다.

이러한 순간에 서로 즐거웠던 나날을 상기하는것은 좋았지만 서로의 손을 그러잡고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을 더듬어볼 때 문득 하치 않은 일로 상대를 섭섭하게 했다든가 학습회같은 때 론쟁이 번져 과격한 말을 했다든가 하는 일들을 상기하게 되면 가슴이 언짢았다. 그러나 그것을 간단히 잊어달라고 말할 계제도 못되였다. 그래서 서로 해여진 군복을 쓸어보고 꼼꼼히 여며주면서 《사람두…》하고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물러서는것이였다.

박덕산과 오중흡 그리고 오백룡은 함께 사령관동지 앞에 갔다. 세 사람의 제기를 들으신 그이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시였다. 덕산이도 중흡이도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었다. 오백룡은 한옆에 서서 침울한 표정으로 하늘만 지켜본다. 그이의 허락을 받기전에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세 지휘관의 결의가 말없는 가운데 풍겨나왔다.

《그래 동무들은 내가 떠나는것을 봐야 마음을 놓겠다는것입니까?》

그이께서는 특별히 누구에게 질문하는것도 아니라는듯 자그맣게 피운 우등불을 헤치시며 말씀하시였다. 세사람은 입을 다문채 피뜩 고개를 들어 그이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이의 안색을 통하여 지금 그이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계시는지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특별한것도 아닌데… 동무들을 남겨두고 내가 먼저 떠나면 나역시 마음을 못놓을것 아닙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여전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사령관동지.》

세 사람은 한꺼번에 부르짖었다.

《저희들은 적들이 그렇게 주목하는것도 아니고… 적들은 기어이 우리 혁명의 사령부를 해치려고 발악하고있습니다. 이것은 저희들 세 사람의 청이 아닙니다. 사령관동지, 사령관동지의 안전은 조선혁명의 안전입니다.》

덕산이 일어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리자 오중흡이도 나란히 일어섰다.

《앉으시오. 무엇때문에 문제를 그렇게 엄중하게만 봅니까? 사태가 좀 어렵게 된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잠시 헤여지는것인데 섭섭지 않는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혁명이 그렇게 요구하는것이니 하는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 누가 맨마감에 떠나겠다는것입니까?》

《오중흡동무가 남았으면 합니다.》

《오중흡동무가?》

김일성동지께서는 짤막하게 되물으시며 말없이 서있는 오중흡을 바라보시였다. 그러시다가 다시 불을 헤치시며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내 오늘 보니 적의 지휘관이란놈이 여간 교활하지 않소. 화력구성도 괜찮습니다. 아마 우리와 결판을 내자고 꽤 많이 긁어모은 모양입니다. 1년동안이나 내한훈련을 했다고 떠벌이지만 그것은 별것 아닙니다. 그놈들 집적거리는데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가는 피동에 빠집니다. 그놈들은 우리를 기껏 지치게 하자는것이 기본전략이니까 거기에 대처해서 우리가 하고싶을 때 전투를 하고 우리가 하기 싫을 때는 그놈들을 질질 눈속으로 끌고다니면서 오히려 그놈들의 맥을 기껏 빼놓아야 합니다.》

오중흡의 긴장됐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제기는 승인하신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절대적인 담보는 안된다 하더라도 어쨌든 적의 기본집체를 다른데로 끌고갈 가능성이 생기는것이다. 그는 제꺽 수첩을 꺼내여 그이의 말씀을 적어나갔다.

《오백룡동무, 그럼 우리가 먼저 떠나기로 합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경위중대장을 쳐다보시며 뜻밖에도 간단히 분부하시였다.

《알았습니다.》

《그대신 강철룡동무와 기관총 한개 분대를 7련대에 더 보내주시오. 아마 중흡동무는 힘겨운 전투를 치러야 할것 같소.》

《예?》

이렇게 반문한것은 오백룡이가 아니라 오중흡이였다. 덕산이도 놀라서 다시 벌떡 일어났다.

《사령관동지, 그렇게 되면 사령부에 기관총이 한개분대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걸로 오백룡동무가 임무를 어떻게 수행합니까?》

오중흡은 굳어진 표정으로 그이를 간절히 바라보았으나 김일성동지께서는 더는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기하지 못하게 막으시고 뜻밖의 질문을 하시였다.

《오중흡동무의 모자는 오늘 전투에서 그렇게 됐습니까?》

《예? 예, 아마 탄알이 좀 스친 모양입니다.》

중흡은 어리둥절하여 제 모자를 손으로 더듬어보며 대답하였습니다.

《아주 위험했습니다. 어디 봅시다.》

이렇게 말씀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오중흡이 엉거주춤 내미는 모자를 받아쥐시고 너덜거리는 귀덮개를 헤쳐보시였다.

《기울나위도 없게 되였군. 앞으로 전투를 하면 련대장동무의 모자를 우선 해결해야겠소. 우리가 여태까지 오는 동안은 비록 조직은 피해를 입었지만 개별적인 조직원들은 살아있어서 우리에게 후방물자도 보내주고 적정도 알려주었습니다. 먼저 내보낸 정치공작원들의 보고를 봐도 사령부가 나가는 로정은 그전에 우리와 련계를 많이 가지고있는 주민지대로 나가는것만큼 조직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을수 있을것이요. 그러나 7련대와 8련대는 적들을 달고 끊임없는 전투를 해야 하니 탄알뿐아니라 후방물자도 전적으로 적들에게서 로획하는 길밖에 없을것입니다. 어려운 길인데 옷이랑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도 관심을 많이 돌려야겠습니다.》

그이께서 담담하신 어조로 이런 말씀을 하시자 지휘관들은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어떻게 말씀드렸으면 그이의 심려를 덜어드리겠는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숨가쁘게 침묵하고있는 그들을 보시자 사령관동지께서는 곧 안색을 고치시였다. 그러시고는 오중흡에게 모자를 돌려주시면서 덕산을 향하여 말씀하시였다.

《내가 한가지 못하고 떠나는 일이 있는데… 최춘국동무에게 사람을 보내봤으면 했지요. 그런데 지금 위치가 똑똑치 않고 적당한 동무를 빼낼 형편도 못됩니다. 덕산동무가 동강쪽으로 나가면 그쪽에서도 돈화방향으로 나가겠으니 혹 련계를 취해볼수 있지 않겠습니까?》

《알았습니다. 꼭 알아보겠습니다.》

박덕산은 기가 꺾인 목소리로 대답을 드렸다. 이로써 사령부호위문제는 아퀴를 짓고만셈이였다.

그날은 바람사나운 날이였다. 자정이 깊어 북덕령숲속에는 눈보라가 치고 사태가 허물어졌다. 곡절많은 민족의 호곡인듯 밀림은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중흡이.》

바람세찬 산등에서 덕산은 오중흡을 힘껏 그러안았다.

봄이 오거든 우리 모두 장군님 품에 돌아와 다시 만나기요.》

내 기어이 저놈들을 다 끌고갈테니 마음 푹 놓소.》

중흡이도 덕산을 와락 그러안고 속삭이듯 말하였다.

두사람은 삑 돌아섰다. 멀찌감치까지 따라나온 오백룡은 천천히 다가왔다.

《부탁한다, 백룡아.》

중흡이 간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더듬어쥐자 덕산이도 그의 다른쪽 손을 틀어쥐였다.

《념려들 놓소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전까지는 우리 혁명의 사령부는 안전할거오다.》

《고맙네.》

《고맙소.》

세 사람은 눈보라속에 한덩어리가 되여 서로 볼을 맞비비였다. 쩝쩔하고 달짝지근한것이 괴여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2

 

새벽에 8련대가 동북방향의 적을 치고 빠져나가자 감투봉언저리에 우글거리던 적의 큰 집체가 허둥지둥 그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생긴 공간으로 재봉대와 로약자들이 청봉밀영을 향해 떠났다. 적정을 탐지할겸 전선지대를 벗어날 때까지 재봉대를 호송할 임무를 받은 태혁은 어느 산모퉁이에서 여태 끼고 오던 철구아주머니의 어깨를 옥금에게 넘겨주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쉬 발길이 돌아서지 않아 한동안 그들과 함께 걸었다. 남대원들이 서너명 있다지만 모두 리성림이같이 제몸도 가누기 힘들어하는 로약자들이라 이렇게 험한 날씨에 녀자들끼리만 보내는것이 어쩐지 가슴에 걸렸다. 청봉에 도착하기만 하면 푹 쉴수도 있고 식량문제도 해결되겠지만 100리가까운 눈길을 걸어간다는것이 이들에게 헐한 일같지 않았다.

그래서 사령관동지께서도 마음을 못놓으시고 위험구역만은 같이 가라고 자기를 딸려보내시였다. 그리고 부대에 얼마간 남아있던 식량의 예비를 톡톡 털다싶이하여 지워보내시였다. 그때문에 작식대동무들은 또 사령관동지께서 식사를 건느시게 됐다고 걱정들을 하였다. 대렬이 출발한 다음 김정숙동지께서 따로 재영이를 불러 무엇인가 자꾸 당부하시는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보나마나 사령관동지의 식사를 걱정해서였을것이다.

녀자들의 마음이란 애바른것이다. 아무러면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있는 기본대렬이 식사를 굶기까지야 하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모두 손을 잡고 눈물이 그렁해서 사령부의 걱정만 한다. 태혁이는 히쭉히쭉 웃으며 그런 걱정 말고 몸이나 내서 오는 봄에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실상 그의 가슴도 알찌근하였다.

어느새 대렬은 산굽이를 돌아가고 앞을 못보는데다 독소금바람에 사경을 헤매이던 채옥의 들것이 눈덮인 바위비탈에 절반이나 가리워졌다. 뒤채를 잡으신 김정숙동지께서 돌아보신다. 손은 흔들지 못하고 고개만 끄떡거리시는데 먼 눈에도 가볍게 웃으시는 그 하얀 이속이며 물기 그렁한 빛나는 눈이 그렇게도 뚜렷이 안겨지는것은 무슨 까닭일가.

태혁은 엉거주춤 한손을 쳐들고 저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으려고 했으나 무엇이 목젖을 굴꺽하고 울리며 넘어가는바람에 어색하게 입귀를 씰룩거리며 눈만 끔쩍끔쩍하였다.

《이제는 어서 돌아가요.》

금숙이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태혁이가 기본대렬에서 후위에 서듯 금숙은 두대의 재봉기와 얼마 되지 않지만 일행의 식량과 후방물자를 산더미같이 짊어지고 맨 후위에 섰다.

만일 사령부가 행동을 개시할 시간만 아니라면 다문 10리라도 짐을 더 져다주고싶지만 그럴수가 없다.

《빨리 따라가오. 벌써 산굽이를 다 돌아섰소.》

마음과는 달리 태혁의 입에서는 이런 퉁명한 소리가 튀여나왔다.

《동무나 빨리 가요. 사령관동지께서 기다리시면 어찌겠어요.》

금숙은 힐끔하고 태혁이를 치떠보며 쌀쌀하게 말했다. 굽슬굽슬한 머리가 군모채양밑으로 삐여져나와 눈바람에 날렸다. 그 끝에 불린 성에가 바람결에 흩어져 길다란 살눈섭에 껍진껍진 달라붙는다.

(그것도 멋인가. 넨장 세여버린것 같군.)

태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알싸해지는 코구멍을 우악스런 주먹으로 뻑 문질렀다. 얼얼하다. 정말 이들이 가다가 눈구뎅이에서 동상이라도 입으면 야단 아닌가. 사내들하고 달라서 녀자들의 얼굴에 동상이 온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문제이다.

하늘을 쳐다보니 당장 눈보라가 터질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 빚진것 있지?》

태혁은 또 속에도 없는 말을 한마디 툭 뱉었다.

《무슨 빚?》

금숙이는 시치미를 빡 따고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그의 발갛게 언 볼편에는 더욱 붉게 홍조가 번져갔다.

실상 금숙이의 가슴은 지금 바로 그 《빚》때문에 세차게 두근거리고있었던것이다.

《모른척하는군. 쌈지말이야, 내 담배쌈지 기워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언제 기워주겠다고 했어요? 제혼자 꿍꿍이지.》

《이것봐라. 정 이러기야?》

《이러지 않으면 별수 있어요. 지금 어느때게 쌈지타령이예요. 담배가 있기나 해요?》

태혁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말았다. 어쩌면 저 배낭 어느 구석에 찔려있음직도 한데 도무지 곁을 안주니 손을 대여볼수가 없다. 금숙이가 쌈지를 깁고있다는것은 철구아주머니의 귀띔이나 채옥이의 종작없는 말을 통해서도 능히 짐작할수 있는 일이였다. 하지만 본인당자가 이렇게 시치미를 빡 따고드니 재간이 없지 않는가.

두사람은 입을 다물고 숨만 씩씩거리며 걸었다. 꼭 싸우고난 사람들처럼 곁을 돌아보지도 않고 수걱수걱 걷기만 하는데 웬일인지 고개를 오를 때처럼 숨결만 가빠진다.

이윽고 아까 김정숙동지께서 돌아서서 웃으시던 그 바위벼랑까지 왔다.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적의 움직임도 그렇지만 첫째 사령부가 행동해야 할 시간이 박두하여온다.

태혁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금숙이도 우뚝 멎어섰다.

두사람은 말없이 마주보았다. 그리고 똑같이 마른침을 삼키며 외면하였다.

《어서 가보오. 난 돌아가야겠소.》

한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 태혁이 처음으로 진정을 담아 석쉼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숙은 고개를 떨구었다. 군복주머니에 찌른 손이 연신 무엇인가 만지작거리고있었지만 종시 꺼내지는 못하고 서있더니 조용히 말하였다.

《조심하세요. 사령부를 호위하는 책임이 더 무거워지지 않았어요. 이젠 사령관동지께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고맙소. 내 동무들의 몫까지 사령관동지를 잘 모시겠소.》

사나이답게 입술을 꾹 다물고 서있는 태혁을 금숙은 눈이 부신듯 실눈을 지어 바라보았다. 입귀가 바르르 떨린다. 그러나 이어 외면하더니 새끼손가락을 일으켜세운 한손을 쳐들어 성에 불린 이마전의 머리카락을 군모밑으로 밀어넣었다. 그것으로써 이야기는 끝난셈이였다. 그 손이 방금까지 군복주머니속에서 담배쌈지를 주무르고있었으리라는것을 태혁은 짐작했지만 새로 흥정을 벌릴 시간은 없다. 저멀리 눈덮인 산정으로 아침해가 불그레 한귀퉁이를 내밀었다.

태혁이 돌아갈 길을 얼핏 가늠해보는데 호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금숙은 결단성있게 어깨의 짐을 한번 추슬렀다. 절컥하는 보총의 격발기가 재봉침의 굳은 틀에 부딪치며 야무진 소리를 냈다.

《봄을 기다리겠어요. 뭐 봄이 그렇게 멀겠어요.》

금숙은 힐끔하고 태혁을 쳐다보며 웃더니 이렇게 말하고 종종 걸음을 쳤다.

《봄?》

태혁은 잠시 영문을 몰라 받아외우다가 기계적으로 몇걸음 금숙의 뒤를 따랐다. 금숙은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커다란 짐만 나무그루사이에 얼씬거리더니 그것마저 눈벌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봄이라…》

태혁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한번 중얼거린 다음 히죽이 웃었다. 금숙이 담배쌈지를 종시 꺼내지 못한 그 심정을 태혁은 짐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꺼낼 기회를 놓쳐버린데 대해 그가 벌써부터 가슴을 앓는다는것도 짐작이 갔다.

여느때 같으면 그때문에 더 세찬 반발을 받더라도 그거 뭘 그러느냐, 어서 내놓아라 하고 손을 뻗쳤을 태혁이였다. 그러나 이때 태혁은 실상 금숙이이상으로 긴장되였고 처녀이상으로 수집어져서 뻔한 그 속을 환히 들여다보면서도 입안이 말라들고 혀가 굳어져 씨먹은 말 한마디 못했다.

그런데 금숙이는 용감하게 말했다.

《봄을 기다리겠어요.》

이것이 얼마나 뜻깊고 값진 말인가. 생각하면 담배쌈지보다도 훨씬 절절하고 따뜻한 정이 깃들인 말이다.

그렇다. 봄이 기다려진다. 봄이 오면 우리는 다시 사령관동지의 품속에서 만나게 될것이다.

태혁은 힘차게 돌아서서 뚜벅뚜벅 눈벌을 혼자 걸어갔다.

《봄이라… 뭐 그렇게 오랜것도 아닌데… 제아무리 겨울이 길면 얼마나 길텐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고보니 별안간 마음속이 확 열리는 한편 별로 초조해진다. 그는 두주먹을 불끈 쥐고 냅다 달리기 시작하였다.

3

 

북덕령 깊은 숲속으로 사령부는 멀어져간다. 눈덮인 이깔나무숲속에 잠시 가리워졌던 행군대렬이 다시 밋밋한 등판에 나타나자 오중흡은 발돋움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눈정기를 모아도 이제는 사령관동지의 모습을 가려보기 어려웠다. 한시바삐 이 위험한 골짜기를 벗어나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 가슴이 죄였지만 점점 멀어져가는 사령부의 대렬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중흡의 눈굽은 젖어들었다. 안타깝게 발끝을 저겨디디니 헐어빠진 투박한 신이 눈속에 푹 빠져들었다. 그래도 대렬 맨 뒤에서 누가 돌아보며 손을 흔드는것만 같아 마주 손을 흔들며 뭐라고 웨치고싶었으나 지금은 절대로 소리칠수 없는 정황이였다. 누구였을가? 그 먼데서 이 나무밑에 아직 서있는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준것은 누구였을가? 맨뒤에 섰으니 혹 오백룡이였을가? 아니면 혹시 사령관동지께서 그렇게 손을 저어주신것이나 아닐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서 돌아가라는 그이의 분부일수도 있다. 그렇다, 지금은 이렇게 정에 끌려있을 때가 아니다.

중흡은 간밤에 사령부가 위치해있었고 지금은 그자신의 련대가 자리잡고있는 골짜기쪽을 뒤돌아보았다. 한줄로 이어진 발자국이 아득히 뻗어있다. 그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다. 그것은 방금 사령부가 행군해간 발자국이였다.

중흡은 아까부터 꺾어가지고있던 소나무가지를 두툼하게 한손에 뭉그려쥐였다. 그리고 눈우에 깊숙깊숙이 박힌 발자국을 쓸어나갔다.

흔적도 없이 지워버려야 한다. 적들이 아무리 뒤져도 찾아내지 못하게 말끔히 없애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 골짜기에서 뻗어나간 발자국은 오직 7련대와 8련대, 특히 7련대의 발자국만 남겨놓아야 한다.

지금쯤 적들은 벌써 숲을 뒤지기 시작했을것이다. 8련대와 독립대대가 한개 려단의 적을 달고 갔지만 놈들의 주력은 여전히 이 골짜기어방에 틀고앉아 사령부를 노리고있다. 개같은놈들! 독소금까지 써가며 전쟁을 하자는 네놈들이 이번에는 골탕을 좀 먹어보아라.

오중흡은 마음속으로 외우며 이미 찍힌 발자국을 따라 한걸음 두걸음 물러섰다. 어찌나 꼼꼼하게 쓸었던지 한참 내려오다가 문득 허리를 일으키고보니 자기 혼자 숫눈길을 걸어가다가 서버린듯 번번한 눈벌이 공허하게 가로누워있다. 불시에 중흡의 가슴은 찌르르 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언덕아래로 떨어졌으니 사령부의 행군대렬이 보이지 않는것은 하는수 없는 일이지만 사령관동지께서 찍어놓고 가신 발자국을 제손으로 매워버린것이 어쩐지 한스럽게 생각되였다.

그는 허리를 일으키고 뒤를 돌아보았다. 발자국은 아직도 멀리까지 이어져있다. 그 수많은 발자국가운데 어느것이 사령관동지의 발자국인지 가려낼 길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그가운데 사령관동지의 체온이 어리였던 발자국이 있는것이다.

오중흡은 다시한번 멀리까지 발자국을 더듬었다. 어차피 지워야 할 발자국이다. 지워도 말끔히,  손댄 흔적도 안남게 지워버려야 한다.

생각하면 지난 전투의 수천수만리에 그러한 일을 수많이 해왔고 그자신 그런 수를 써서 적을 족친 일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때는 내내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다녔었다. 그렇기때문에 그게 특별한 일같이 생각되지도 않았었다. 이제 사령관동지께서는 멀리 떠나가시고 자기는 또 그보다 더 멀리 떠나가서 봄이 오기전에는 만날것 같지 못한 이 마당에 그이께서 남기신 그 발자국을 그이의 안전을 위하여 제손으로 지우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하니 무엇인가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았다.

《련대장동지!》

불쑥 숲속에서 강철룡이 나타나더니 숨가쁘게 달려온다.

번거로운 생각을 쫓으며 다시 발자국을 쓸어나가던 중흡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웬일이요?》

《적이 나타났습니다.》

강철룡은 숨을 가쁘게 테며 말하였다.

《어디쯤까지 왔소?》

《어제 저녁때 전투를 하던 그 벼랑턱에 다시 기여올라왔습니다.》

《그럼 아직 멀었구만, 알겠소. 먼저 내려가오.》

《먼저 내려가다니요? 여기서 뭘하오다?》

강철룡은 급한 정황보고를 받고도 그냥 솔비질만 하고있는 련대장을 알수 없다는듯이 바라본다.

《보면 모르겠소, 그놈들을 될수록 많이, 될수록 가깝게 다가세워야 하오. 그랬다가 들고쳐야 한단 말이요.》

《그렇다고 련대장동무가 이 일을 직접 해야 하오다?》

강철룡은 뭐가 좀 섭섭한 모양인지 련대장의 구부정하게 구부린 등을 똑바로 지켜본다. 중흡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람도 참, 그게야 내 마음이지 그렇게 각박하게 물을게야 있소. 저도 하고싶으면 소나무 한가지 꺾어서 하면 될것 아니요.》

그들은 한때 몹시 친한 사이였다. 지금은 서로 책임진 일이 달라져서 자주 만날 기회가 적었지만 한부대에 있을 때는 너나들이로 함께 딩굴던 사이였다.

《내 본시 성미가 덜퉁하다나니 이런데 어디 생각이 미치는가 말이요.》

강철룡은 볼멘 소리로 중얼거리며 소나무를 찾았다. 소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련대장동무가 귀띔을 해줘야지… 적을 코앞에 두고 제손으로 하다니…》

강철룡은 소나무가 있음직한 곳으로 걸어갔다.

《가긴 어딜 가? 소나무 꺾자고 하다가 또 발자국을 내놓으면 그걸 내가 또 지우라오?》

《자, 이렇다니까…》

강철룡은 오도가도 못하고 한자리에 서버렸다.

《허허허, 한다 하는 기관총소대장 강철룡이 꼴이 좋다. 여기 있소. 이걸 절반 가지고 초벌 쓸어나가오. 내 뒤따르며 고를테니…》

그들은 댓걸음 사이를 두고 눈을 쓸어나갔다.

《여보 강동무, 그렇게 반반히 쓸어버리면 내 발자국만 남지 않소, 초벌 대충 쓸란말이요.》

《너무 그러지 마오다. 그게야 내 마음이지…》

잠시후 그들은 나란히 뒤로 물러서나가며 눈을 쓸었다. 그러면서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탕에 본때있게 조겨야 하오. 장경수와 최병규를 각각 다른 방향에 배치했지?》

《련대장동무 하라는대로 다 해놓았수다.》

《전투를 본때있게 하면서도 말이요, 진짜 사령관동지께서 조직하시는 전투답게 깨끗하게 해야 한단말이요. 너절하게 하면 그놈들도 속지 않소.》

《한개 중대가 련대맞잡이로 해야지오다. 모두 그럴 잡도리오다.》

《강동무, 잘해보기요. 동무도 뭐 사령부에서 떨어져나왔다고 심드렁해있지만 말고 멀리 있지만 실상 우리가 사령부를 직접 보위하는것이라고 생각하란 말이요.》

《련대장동무, 그게 사실이지요. 멀리 가기는 하지만말이우다… 그런데 마음속이 아무래도…》

《에이 참, 무슨 소리 자꾸 하오. 사람 속상하게시리…》

《그게야 피차일반이 아니요.》

《허허허, 하는수 없군. 그럼 우리 다른 동무들한테는 그런 눈치 보이지 말기요.》

이윽고 두사람은 숙영지초입에 이르렀다. 전사들은 모두 매복진지를 차지한듯 인적없이 조용한데 등판기슭쪽에서 적들이 떠들어대며 다가오는 소음이 퍽 가까이 울려왔다.

두사람은 손에 쥐고있던 솔가지를 각각 눈구뎅이 깊숙이 파묻어버리고 툭툭 손을 털었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다가 어색하게 외면하였다. 둘다 눈등이 불깃하여 얼얼한 마음속을 아무래도 감출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잠시후, 적들은 3면으로 압축해왔다. 긴장하게 숨죽이고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왔다. 웩웩 고아대는 적의 지휘관놈들의 목소리가 울리여온다.

오중흡은 엎드려있던 나무뒤에서 불쑥 몸을 솟구며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러면서 산천이 쩡쩡 울리게 웨쳤다.

7련대는 정면돌격, 8련대는 좌우로 우회하여 퇴로를 차단하라!》

가뭇 조용하게 누워있던 눈벌에서 한꺼번에 기관총이 불을 뿜어댔다. 장경수, 최병규의 교차화력에다 7련대 기관총수들이 정면으로 적을 답새겨댔다. 아직 어디쯤에서 유격대가 나타날지 몰라 엉거주춤 꽁무니를 뒤로 내밀고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던 적들이 맹렬한 일제사격에 넋이 빠져 주저앉자 세개방향으로 갈라져있던 각 중대들이 한꺼번에 돌격에 떨쳐나섰다.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드높고 피맺힌 증오는 독이 서려 적들은 허물어지는 산병선을 수습해볼 사이도 없이 나가번져졌다. 종심깊이 둘러친 포위진이 사방에서 꿰여져나가고 그 짬으로 유격대들이 바람처럼 치고 달려가버린 다음에야 놈들은 가까스로 전렬을 일단 수습하고 숨을 톺았다.

그러나 혼비백산한 놈들이 오래 펄쩍하니 앉아있을 여유는 없었다. 수색전투의 결과를 보고받은 혼마소장은 오중흡련대가 칼날처럼 째고나간 방향을 날카롭게 가리키며 당장 추격할것을 명령하였다.

김일성사령부는 비록 포위진을 빠져나갔지만 이제는 한개 련대에 불과한 력량이다. 최후승리를 위하여 앞으로!》

이리하여 혼마려단은 더 따져볼것도 없이 모두 떨쳐나서 7련대가 새기고 간 발자국을 따라 동쪽으로 맹렬한 추격전을 들이댔다.

4

 

숲속의 정황은 여전히 긴장하였다. 오중흡련대가 사령부로 가장하여 적의 기본집체를 끌고 동쪽으로 멀리 빠져나갔지만 놈들의 《요점배치》전술에 의하여 골짜기마다에 우물거리는 놈들이 한두개의 중대가 아니였다.

며칠전만 해도 실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사령관동지의 놀라운 전술에 의해 모면할수 있었다.

사령부와 경위중대가 부후물등판으로 이동하고있을 때 그 발자국을 발견한 적들이 뒤를 따라왔다. 보고를 받으신 사령관동지께서는 통나무 몇대를 찍게 하시고는 그채로 산기슭을 끼고 돌게 하시였다. 그렇게 한바퀴 산기슭을 돌자 이미 내놓은 발자국자리에 들어서게 되였다. 으스름이 밀려드는 저녁녘이였다. 적들은 유격대가 낸 발자국만 졸졸 따라오다나니 자기들이 한번 지나친 곳을 다시 돈다는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왔다. 때마침 앞쪽에서 새로운 적 한패거리가 또 나타났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때를 타서 메고오던 통나무를 놓고 감쪽같이 산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하시였다. 유격대가 숲속에 다 사라진 다음 걸쳐놓았던 통나무를 치워버리니 유격대는 간곳 없는데 발자국은 그냥 산기슭을 끼고 돌아갔다. 적들은 부지런히 쫓아갔다. 그러다가 마주오는 적과 부딪치여 냅다 불질을 해댔다. 상대편도 유격대를 찾아다니는 《토벌대》라 가만 있을리가 없었다.

맹렬한 화력전이 벌어졌다. 부후물등판 깊숙한 숲속에서 그 꼴을 지켜보던 인섭은 너무나 놀라고 너무나 감탄하여 무릎을 연신 내리쳤다. 그 통나무는 바로 그자신이 벤 나무였다. 잔뜩 피곤하고 허기진데다 맨 신대원판인 경위중대만으로 어떻게 이 행군을 해낼가 하는 걱정때문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나무를 베여냈던 그는 그 하잘것 없는 몇대의 나무가 이처럼 굉장한 결과를 빚어낼줄은 생각도 못해봤던것이다.

그때로부터 벌써 닷새가 지났건만 저희들끼리 맞불질을 하여 무리죽음을 당하던 적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집이 흔들거려 견딜수 없는 인섭이였다.

《참, 사령관동지께서 축지법을 쓰신다는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바로 그게였단 말이요. 내 그때 정말 간이 요만했댔소.》

본시가 순박한 그는 무엇이나 한번 가슴에 새기면 잊어버릴줄을 몰랐고 감출줄도 몰랐다.

제 간이 얼마나 졸아들었는가 하는것을 새끼손가락끝으로 짚어보이는 그를 힐끔 돌아보며 태혁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하던가?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우리가 사령관동지의 뜻만 잘 받들어나가면 문제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게말이요. 그런데 이거 난 암만해도 단련이 부족해서말이요… 지금도 정 못견디겠다니까…》

인섭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괴로운 상을 지었다.

《또 그 소리, 한참 잘 걷더니 왜 또 그 모양이요? 그래서는 똑똑한 혁명가가 되지 못해.》

한태혁은 자꾸만 어깨를 파고드는 기관총을 추스르며 의젓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도 몹시 지치고 허기진것을 다 감추어내지는 못했다.

태혁은 겨드랑밑으로 식은땀이 쭈르륵 미끄러져내리는것을 느끼며 버릇처럼 옆차기를 뒤져보았으나 먹을만 한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못해 쓰려나면서 눈앞에 무언가 비누거품같은게 아물아물하였다. 칠색무지개빛이 도는 그런 무늬가 눈앞에서 가물거리기 시작한것은 그저께부터인데 이제는 그 무늬가 눈앞에서가 아니라 머리 한복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듯 하다.

입도 벌리기 싫었다. 어쩌다가 눈속에 묻혀있는 진대통이라도 만나면 그것을 기여넘는데 한참이나 애를 써야 하였다. 나이 어린 꼬마들은 등을 밀어주어도 그냥 미끄러져내리며 넘어서기 어려워하였다. 그런 대원들을 몇사람씩 건네놓고나면 이번에는 자기가 넘어갈 힘도 다 빠져버리군 하였다.

박인섭은 덩지가 크다보니 힘도 썼지만 그대신 시장기를 더 느끼는 모양같다. 그래서 연신 비틀거리며 눈우에 자주 주저앉군 하였다.

몇걸음 앞섰던 한태혁은 어쩐지 뒤가 괴괴한것을 느끼고 기관총을 추스르고나서 힘겹게 돌아보았다. 이렇게 기력이 진했을 때는 한번 고개를 돌리는것도 여간 힘드는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보니 박인섭이가 눈우에 주저앉은채로 고개를 떨구고있다.

《아니, 왜 그러고있소? 어서 일어나오.》

태혁은 멀어져가는 대렬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소리쳤다. 힘껏 소리치느라고 했지만 목소리는 터실터실 튼 입술의 보풀에 걸려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낼뿐 시원스럽게 울려주지 않는다. 정말 인섭은 그 말을 못들었는지 고개를 그냥 떨군채로 앉아있다.

《아니, 어떻게 된거요?》

태혁은 다시한번 대렬을 돌아보고 인섭에게로 다가갔다. 한번 대렬을 떨어지기만 하면 태혁의 힘을 가지고도 따라잡기가 만만치 않았다.

《어디 다치기라도 했소?》

태혁은 허리를 구부리고 수그린 인섭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인섭은 간신히 고개를 젓는다. 사실 후위임무를 같이 서고있기는 하지만 적정이 별로 없는 이때 인섭이가 갑자기 부상을 당할 까닭은 없었다.

《그럼 왜 그러오? 빨리 일어서오. 우린 너무 떨어진것 같소.》

태혁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혁동무, 난 아무래도 견디여낼것 같지 못하오.》

인섭은 고개를 푹 떨군채 꺼져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요?》

태혁은 버럭 소리쳤다. 그렇게도 터져나오기 힘들어하던 목소리가 별안간 턱없이 크게 울린다.

인섭은 말없이 태혁을 올려다보았다. 주먹같이 불거진 관골에 동상이 와서 꺼멓게 죽어들었는데 그때문에 눈확은 더 깊이 꺼져든것 같다. 그 우묵하게 패인 눈확속에서 황소눈같이 커다란 눈이 그렁그렁 물기를 담고 애원하듯 바라보고있다.

문득 바람부는 낯선 동구길에서 배고픔을 하소연하던 누이동생 필네의 눈이 떠올랐다. 그때만 하여도 다 자라지 못한 소년의 가슴이였지만 태혁은 갈비뼈가 우직우직하는듯 한 아픔을 느꼈었다.

지금 장사같이 기골이 장대한 유격대원의 눈에서 필네의 눈과 같은 그런 측은한 정상을 읽은 태혁은 그만 저도 함께 주저앉아 마주 그러안고 울고싶은 심정이 되였다.

이게 벌써 며칠째를 굶는가. 7도구치기에서 독소금을 먹고 모두 늘어졌던 그때로부터 쳐도 이레째나 된다. 게다가 인섭은 그날 독소금을 직접 먹고 떠나갔던 7련대습격조의 한 성원이였다. 그러니 전에 먹은것도 없었지만 독소금바람에 있는것 없는것 다 게워놓기까지 하였다.

주저앉지 않는것이 차라리 이상할 지경이다.

《인섭이 일어나라구.》

태혁은 공연히 힘을 써서 큰소리를 친것을 후회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부축해줄양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인섭의 한팔을 제 어깨에 걸쳤다.

그러나 인섭은 일어날 차비가 아니였다.

《태혁동무, 날 내버려두고 가주오.》

그는 리별의 이 마당에 고맙게 굴어주던 다정한 동무의 모습을 가슴깊이 새겨두려는듯 태혁의 얼굴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대렬에서 떨어지겠단말이요?》

태혁은 홱 몸을 돌리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인섭은 이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말할 기력마저 다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그 말만은 차마 대답할수가 없었던지 그저 고개를 푹 떨구고 간신히 혀를 내둘러 묵묵히 얼굴을 둘러싸고있는 눈을 힘없이 빨아들일뿐이였다.

《에이,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태혁은 왁살스럽게 인섭의 팔을 집어내치더니 벌떡 일어났다.

《네따위가 혁명을 해? 장군님의 그 사랑에 목메여울던 네가… 여기서 판안히 주저앉겠다고? 어디 밸대로 해봐라!》

태혁은 정말 성이 퍼렇게 나서 방금까지 그처럼 힘겨워하던 사람답지 않게 와락와락 눈을 걷어차며 걸어갔다.

대렬은 이미 저앞 산굽이를 마지막 돌아가고있었다.

어느새 태혁이도 멀리 사라져간다.

인섭은 막막한 눈벌우에 홀로 남은 스스로를 강렬하게 의식하였다. 인간세상에서 완전히 동떨어져버린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이 아닌가. 설사 목숨이 붙어있다 해도 이런 눈벌에 홀로 남아있는것을 어찌 산 사람이라 하겠는가.

인섭은 진작 이렇게 되리라는것을 은근한 공포속에 예감하고있었다.

이제는 그도 전투는 그닥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다.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있기만 하면 장군님께서는 신출귀몰한 전술과 전법을 얼마든지 가지고계셔서 축지법을 쓰는것보다 더 묘하게 적들을 요정내신다. 아무리 적들이 많이 접어들어도 그것은 문제가 아니였다.

그러나 자기자신의 몸만은 어찌할수가 없었다. 사실 독소금을 먹기전부터 그는 견디기 힘드는것을 자주 느껴왔었다. 그런데 부대가 세개방향으로 갈라진 다음부터는 도무지 제몸 하나를 건사할수가 없었다. 더구나 괴로운것은 자기때문에 동무들에게 페를 끼치고 더욱 죄송스러운것은 장군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것이였다. 가만 보아야 제몸 하나 건사 못하는 저같은 인간이 똑똑한 혁명가구실을 하기에는 애초에 케가 틀렸다. 그럴바에는 어차피 뻔한 끝장인데 남까지 괴롭힐 까닭이 있는가…

(잘 가오. 태혁동무, 헌데 그렇게 성까지 낼기사 있소. 난들 왜 동무들과 같이 갈 생각이 없겠소…)

인섭은 크게 맺혀드는 눈물방울을 통해 점점 멀어지고 점점 흐리마리해지는 태혁의 뒤모습을 더듬으며 마음속에서도 힘겹게 중얼거렸다.

(내가 장군님의 그 사랑을 잊어버렸다고… 그게야 너무한 말이지, 내가 차마 어떻게…)

인섭은 어느새 고개를 맥없이 떨구었다. 그러자 눈발이 그의 고개를 차겁게 받쳐주었다.

(그 사랑을 내가 저버리다니… 그런 배은망덕을…)

허탈에 빠진 인섭의 머리속에 막막한 눈벌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부후물등판가까운 으슥한 이깔나무숲속에 어둠을 불사르며 타오르던 우등불이 떠올랐다.

앞뒤로 발자국을 따라 쫓아오는 적들을 제놈들끼리 맞부딪치게 만들어놓으신 장군님께서는 그 밤으로 부대를 이끄시여 적들이 우글거리는 등판을 벗어나시였다.

그것은 아름드리 이깔나무가 빽빽이 죄여선 천고의 밀림속이였다. 적들을 멀리 떼여버리기 위한 간고한 행군뒤끝이라 모두 극도로 지쳐서 우등불가에 쓰러져있었다.

오직 사령관동지께서만이 진대통우에 지도를 펴놓으시고 래일의 행군로정을 구상하고계시였다.

무엇인가 사령관동지께서 말씀하시는것 같아 인섭은 내리감고있던 눈을 떴다.

아닌게아니라 장군님께서는 마주서있는 상철에게 조용조용히 말씀을 건네고계시였다. 모두 잠든 깊은 밤이라 그렇게 조용히 하시는 말씀이 낱낱이 들리는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미시가루입니까?》

무엇이라고 드리는 상철의 대답소리는 똑똑지 않으나 어쨌든 장군님께 비상용미시가루를 갖다드린 모양 같았다.

인섭은 괴로운중에도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지금 대오에 낟알이라고 한알도 없다는것을 그자신도 잘 안다. 그러니 자기들과 함께 사령관동지께서도 줄곧 끼니를 건네오셨던것이다. 자기들이 굶는것과는 생판 문제가 다르다. 장군님께서 하루 걸으시는 량이라든가 생각하시는 시간같은것은 묻지 않고라도 첫째 장군님께서 건강하셔야 조선혁명이 있고 이 고생스러운 행군끝에도 승리가 있는것이다. 꼬마들이 김정숙동지께서 청봉으로 떠나간 뒤로 장군님의 식사를 받들면서 그래도 여태 비상용미시가루를 떨구지 않았다는것은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상철동무.》

천천히 불앞으로 다가가시는 사령관동지의 모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옛!》

급히 고깔불을 피워놓고 젖은 신발을 말리우고있던 상철은 벌떡 일어났다.

《이거 어디서 난것입니까?》

상철은 사령관동지께서 이렇게 정중한 어조로 말씀하실 때면 너무나 긴장해서 선뜻 입을 벌리기 힘들어하였다. 그런줄 번연히 아시면서도 사령관동지께서는 다시 말씀하시였다.

《이걸 동무들의 배낭에서 털어냈습니까?》

《옛, 그렇습니다.》

상철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씀드렸다.

《그럼 동무들은 여태 무엇을 먹고 이렇게 남겼습니까?》

상철은 울먹울먹해서 말을 못하고 갑자르다가 대답을 독촉하시듯 이윽히 지켜보시는 사령관동지의 눈길을 못이겨 꺼져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사실은 군수관동무가 준것은 저희들이 다 먹었습니다. 그것은 따로 가지고있던것입니다.》

《어떻게 따로 가지고있을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저…》

《알았습니다. 재영동무의 배낭에서 나왔겠습니다?》

《…》

《재영동무는 전부터 그런것을 가지고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하고 상철은 전과는 딴판으로 똑똑히 대답하였다.

《그것은 이번에 부대가 갈라지면서부터 재영동무 배낭에 있었습니다.》

《그럼 상철이도 그게 미시가루라는것을 알고있었구만?》

사령관동지께서는 두 나어린 전령병의 깜찍한 수를 다 밝혀내신 다음에야 가정적인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으시였다.

상철은 사령관동지의 안색을 살피다가 얼핏 재영이쪽을 돌아보았다. 재영이는 사령관동지와 상철이 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가는지 전혀 짐작을 못하고 열심히 책들을 간종그려서 배낭속에 다시 꾸리고있었다.

《저렇게 책밑에 감추고다녔습니다. 저한테도 들킬가봐 절대 손을 못대게 했습니다.》

《흠―그러니 상철이는 자기가 알고있다는 말을 여태 안했구만.》

《제가 그런 말을 하면 펄쩍 성을 냅니다.》

《왜?》

《제가 입이 가벼워서 인차 말을 옮긴다는것입니다.》

상철은 다시 재영이쪽을 돌아보면서 좀 시뚝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건 재영이가 상철이를 잘못보고 그러는군. 사실 상철이가 입이 가벼웠다면 내가 여태 그것을 몰랐을가. 그러니 강봉수동무도 그 미시가루주머니를 모르는 모양이군?》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야단났습니다. 사실 저는 입이 가볍습니다.》

《그건 왜?》

《사실 사령관동지께서 이젠 그 미시가루의 비밀을 아셨으니 재영동무는 저를 혁명동지라고 생각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재영이는 그것을 사령관동지께 드리려고 얼마나 배고픈것을 참고 얼마나 애를 태우면서 깊이깊이 감추어왔는데…》

《그만두라구…》

사령관동지께서는 벌떡 일어나시였다.

인섭이도 어느새 상반신을 일으켰다. 꼬마들의 정상을 생각하니 그의 가슴도 칼로 에이듯이 아팠다.

사령관동지께서 얼마나 측은하시면 저렇게 말씀을 못하시고 먼산만 바라보실가…

《상철아.》

사령관동지께서는 불곁으로 다시 돌아서시여 고개를 깊이 수그린 소년의 머리를 정답게 쓰다듬으시며 부드럽게 부르시였다.

《내 재영이에게 비밀을 지키지. 그리고 사령관이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한것은 입이 가벼운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입이 가벼운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절대로 안돼. 알겠나?》

《알았습니다.》

상철은 대답을 힘차게 했으나 역시 밝은 기색은 아니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잠시 상철의 모습을 지켜보시더니 불곁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였다.

《가만 저 동무들은 저기서 뭣들을 합니까? 강동무도 재영동무도 다 이리 오시오.》

사령관동지께서 부르시자 그러지 않아도 물주전자에 눈녹인 물을 옮겨담고있던 강봉수와 재영이가 얼른 다가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전령병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시였다. 시장기를 눈치채우지 않으려고 배나 부른듯이 어깨를 뒤로 젖히는 재영이의 행동은 지나치게 과장되여서 인차 부자연스러운것이 두드러졌지만 강봉수는 제법 입가심이나 한듯 한 표정을 짓고 태연히 서있다.

《이리 둘러앉소. 그래 동무들은 몇끼를 굶었소?》

《사령관동지, 우린 먼저 먹었습니다. 사령관동지의 분만이 남았습니다.》

세사람이 앉으려다말고 일제히 대답한다. 그중에도 상철이는 방금 한 말이 있어서 그런지 기세가 자못 대단하다.

《그러니 나 혼자만 먹으란말이지… 더는 없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상철의 긴장한 표정을 슬쩍 살펴보시며 물으시였다.

《더 없습니다.》

상철이 황급해서 재빨리 대답하였다. 김일성동지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으나 억지로 참으시고 진중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자, 그럼 동무들의 배낭을 가져와보시오.》

세사람은 모두 눈이 둥그래서 서로 돌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강봉수가 아무 꺼리낄것이 없다는듯 진대통옆에 세워놓은 배낭가운데서 자기것을 가지고왔다. 사령관동지의 작전에 필요한 지도며 자료집, 탄약 같은것이 주로 들어있고 침구를 말아서 달아매고 다니는 그의 배낭속에 특별한것이 없으리라는것을 사령관동지자신께서도 잘 아시였지만 그이께서는 꼼꼼히 그속을 다 뒤적거려 보시였다.

《정말 먹을만 한것은 아무것도 없구만. 상철동무 배낭도 이리 보내시오. 오늘은 말짱 뒤져봅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주로 생활도구들을 건사해가지고다니는 상철의 배낭도 죄다 살펴보시였다. 거기서 빈 쌀주머니 하나를 찾아내신 그이께서는 속까지 뒤집어보시였다. 다음 그이께서는 재영이앞으로 손을 뻗치시였다. 얼굴이 빨개진 김재영은 세 배낭중에서도 제일 큰 자기 배낭을 거북살스럽게 내밀었다. 그것은 주로 학습자료들이 들어있는 배낭이였다. 신문, 잡지들, 정치서적들과 발취자료들이 차곡차곡 채워져있는데 쌀주머니는 어디다 어떻게 감추었는지 좀체로 드러나지 않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묵은 잡지들과 신문들을 하나하나 꺼내놓으시였다. 애가 말라서 숨을 죽이고 서있는 세 전사의 긴장한 눈길이 그이의 손길을 지켜보고있었으나 그이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듯 책들이며 학습장들을 다 꺼내시였다. 그이께서 요구하시는 책이며 자료들을 제때에 꺼내드리려고 자주 보시는 책이며 신문, 잡지들을 될수록 우에다 놓고 비교적 덜 찾으시는 책들을 밑에 깊숙이 간수한 재영의 꼼꼼한 성미가 누구에게나 느껴지는 그 배낭을 하나하나 뒤지시는 김일성동지의 모습을 볼 때 인섭은 정말 가슴이 한줌만하게 죄여드는것을 느꼈다.

《이게 뭐요?》

마침내 찾으시는 미시가루주머니를 배낭 맨 바닥에서 집어내신 그이께서는 그것을 불빛에 내드시였다. 그러시고는 몹시 놀라신듯 흠칫하시였다. 인섭이도 놀랐다. 그것은 너무나 낯익은 쌀주머니였다. 지금은 청봉후방밀영에 가계실 김정숙동지께서 사령부작식대에서 근무하실 때 바로 그 쌀주머니를 소중히 간직하고다니는것을 누구나 다 보았다. 그때 그 쌀주머니와 함께 건사해가지고다니던 사령관동지의 식기며 수저도 그 주머니속에서 나왔다.

인섭은 대번에 그 미시가루가 근본은 김정숙동지의 배낭속에서 나온것임을 짐작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 청봉으로 갈라져가실 때 식기와 함께 저 미시가루주머니를 맡기며 무슨 당부를 했으리라는것도 짐작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도 그것을 모르실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아무런 내색도 안하신다.

《이게 미시가루가 아닙니까?》

그이께서는 매우 기쁘신듯 이렇게 물으시였으나 세사람은 머리를 깊숙이 수그리고있을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짐작에 미시가루는 한홉가량 돼보였다.

《내 재영동무 배낭속에 무엇이 있을줄 짐작했습니다. 자, 모두들 깨우시오. 하루종일 굶었으니 얼마나 시장들하겠습니까? 아마 잠못든 동무들이 많을것입니다. 모두 깨우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큰 목소리로 사위를 둘러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사령관동지, 이것을 가지고 모두 깨워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홉도 되나마나한데…》

강봉수가 당황하여 이렇게 말씀드렸으나 그이께서는 듣지 않으시였다.

전령병들은 하는수없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우등불들을 찾아갔다.

인섭은 얼른 모포를 뒤집어썼다. 그러나 그 주변에 널려 자는 동무들은 사령관동지께서 몸소 흔들어깨우시기때문에 어쩔수없이 일어났다. 모두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듯이 그이께서 부르시는 불곁으로 다가가기는 하였으나 태혁이의 눈을 봐도 그렇고 정지성이의 눈을 봐도 그렇고 누구 눈이나 방금 물기를 훔쳐낸 자리가 뚜렷하였다.

전령병들은 그럭저럭 여라문명의 대원들을 깨워왔다. 그밖의 사람들은 도저히 깨울수가 없다는것이였다.

《하는수 없지, 속담에도 나간 사람 몫은 있지만 자는 사람 몫은 없다고 했으니 우리끼리 나누어먹읍시다. 자, 이리들 앉으시오.》

영문을 알고 온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이께서 가리키시는 우등불두리에 엉거주춤 둘러앉았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거의 울상이 되여 서있는 전령병들의 손목도 끌어당겨앉히시였다. 마침 배낭에서 꺼낸 신문지가 펄럭거리고있었다. 그것을 두툼하게 펴고 그우에 미시가루를 쏟으시는 그이의 손길도 떨리는듯하였다.

《이게 좀 많으면 좋겠는데 어찌겠소. 이것을 한말쯤 되는것으로 생각하고 먹으면 배가 부를거요.》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종이숟가락을 만드시여 둘러앉은 사람마다 몫을 나누어주시였다.

《유격대의 식량이란 있다가도 먹어버리면 없어지고 또 없다가도 전투를 잘하면 절로 해결되기도 하는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없어지면 큰일난다는 생각만 하지 말고 이것을 먹고 기운을 내여 원쑤를 칠 생각을 합시다. 문제는 우리가 오늘 나누어먹는 이 미시가루가 그저 낟알을 닦아서 빻은 가루가 아니라 혁명전우에 대한 동무들의 뜨거운 사랑이 뭉쳐있다는것, 그렇기때문에 이것은 돈이나 금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귀중한것이라는것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그이께서는 즐거우신듯 이렇게 말씀하시며 상철의 배낭에서 손수 물잔을 꺼내시여 일일이 더운물을 따라주시였다.

유격대원들은 그저 당황하여 허둥거릴뿐 뭐라고 말들을 못한다. 강봉수가 자기앞에 덜어놓은 몫이 너무 많다고 다시 그이앞으로 덜어내자 모두 그 본을 따랐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얼마 되지도 않는것을 가지고 오래 시간을 지체시켰다가는 대원들을 더욱 난처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셨는지 이번에는 아예 물잔에다 가루를 타서 돌려주시였다. 마감에 얼마 남지 않은 가루를 자신께서도 물잔에 타서 드시였다.

인섭은 눈물과 함께 그 미시가루물을 들이키였다. 방금까지 그리도 못견딜것 같던 시장기는 거짓말같이 다 사라지고 명치끝까지 뜨겁고 격렬한 그 무엇이 하나가득 차오르는것을 느끼였다.

《어서 식기전에 훌훌 마시오. 미시가루는 원래 여름에는 시원한 맛으로 먹고 겨울에는 뜨끈뜨끈한 맛으로 먹는것입니다.》

하고 호탕하게 말씀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대원들이 어쩌는수없이 미시가루잔에 입술을 갖다대는것을 보시자 비로소 가슴이 좀 열리시는듯 말씀을 이으시였다.

《언젠가 우리가 장백에서 서강쪽으로 들어가던 해에도 몹시 식량사정이 곤난해서 애를 먹은적이 있습니다. 봉수동무는 생각이 납니까?》

《예, 재작년겨울입니다. 그때 서강에서 회의를 하고 나와서 보천보전투를 했습니다.》

강봉수가 물잔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정색해서 말씀드렸다.

《틀림없습니다. 재영이도 상철이도 이따 전달장동무한테 그 이야기를 잘 들어보는것이 좋습니다. 그때 어느 산전막에서 누룩을 얻어내여 구워먹던 생각이 납니다.》

사령관동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며 웃으시자 강봉수와 김재영은 얼핏 고개를 들었다가 도로 숙여버렸다.

우등불두리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중에도 상철의 표정은 심각하였다. 미시가루에 대해 그이앞에 터놓은것때문에 아직도 괴로와하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속이 풀리니 우리 재미있는 옛이야기나 하나 해보는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대원들을 돌아보시였다. 진작 다 마신 물잔을 만지작거리고있던 동무들은 모두 얼굴을 들었다. 상철이만이 그냥 고개를 숙인채 눈만 한번 치떠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진대통옆 새초줄기로 번져나오는 불길을 장작가치로 비벼끄시며 가벼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우리 나라 옛말에 쌀가마니를 져나르다가 밤을 새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이제 그이야기를 하겠으니 들어보시오.》

인섭은 태혁의 무릎을 꾹 짚고 힘을 주었다. 태혁이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장군님의 웃음어린 얼굴을 지켜본다. 그 역시 한잔의 미시가루물에 얽힌 사연을 다 아는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시였다.

《옛날에 의좋은 형제가 있었답니다. 형은 웃마을에 살고 동생은 아래마을에 살았는데 한해 가을을 해놓고보니 형은 동생 생각이 나고 동생은 형 생각이 났다는것입니다. 형은 생각하다가 자기가 죽을 좀 먹더라도 새로 살림을 난 동생을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벼가마니를 하나 지고 아래마을로 가서 몰래 동생네 벼가마니우에 쌓아놓고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와보니 벼가마니가 줄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 한가마니 더 갖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또 져다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벼가마니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장군님께서 이야기를 시작하시자 상철이는 비로소 눈을 반짝거리며 얼른 미시가루물을 마셔버리고 바싹 그이의 무릎곁으로 다가앉았다. 강봉수는 우등불에 장작을 지피며 눈길만은 김일성동지의 자애로우신 모습에서 한순간도 떼지 못하고있었다. 재영은 바람받이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데 좀 불리하였다. 그래 한손으로 연기를 날리며 사령관동지곁으로 한걸음한걸음 다가앉았다.

장군님두리에 모여앉은 대원들은 모두 가슴에 무둑한 감격을 삭이기 힘들어 연신 눈을 슴뻑거리며 그이의 조용하신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이게 참 별일 아닙니까?》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가난한 농사군이 가을을 했다고 해서 벼가마니가 굉장히 많을것도 아닌데 가마니를 헛볼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래 형은 이번에는 아예 가마니수를 똑똑히 세여놓고 제꺽 고개를 넘어갔다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가마니부터 세여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그대로 있었습니까?》

상철이가 참을수 없어서 물었다. 그무렵에는 상철이곁에 바싹 다가앉은 재영이가 씩 웃으며 《그것도 몰라? 그대로 있었기에 이야기지뭐.》하고 아는체를 하였다.

《흥.》하고 상철이는 재영을 돌아보며 시뜻하게 코방귀를 불었다.

《재영동무가 맞혔습니다. 벼가마니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형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어서 한참 궁리하다가 또 동생의 어려운 살림이 걱정스러워서 다시 벼가마니를 지고 고개를 넘기 시작하였습니다.》

《야, 참 무던하네.》

재영이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그렇습니다. 형의 마음은 그렇게 무던했습니다. 밤사이 벼가마니를 지고 몇번씩이나 고개를 넘어 아래마을로 오르내리자니 힘도 들었을것입니다. 그래도 형은 힘든줄 모르고 또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고개마루에 올라서자 달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아래마을쪽에서 웬 사람이 지게에 무엇을 지고 고개를 올라오는것이 보였습니다. 형은 놀라서 우뚝 멎어섰습니다. 달이 환하게 밝아서 올라오는 사람의 모양이 똑똑히 보였습니다. 그 사람도 무척 힘이 드는지 비척거리는데 가만히 보니 지고오는것은 벼가마니였습니다.》

《야ㅡ 동생이다!》

이번에는 상철이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상철이를 한옆에 꼭 그러안으시며 기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그렇습니다. 상철이가 참 잘 알아맞혔습니다. 그 사람은 동생이였습니다. 동생도 가을을 해놓고보니 식구가 더 많은 형네 집 생각이 나서 벼가마니를 형네 집에 갖다줄 생각이 났던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의좋은 형제는 달빛아래 서로 그러안았습니다.》

《참 우리 나라에는 모두 가난하게 살지만 그런 형제들이 많습니다.》

정지성이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잠시 잊어버리고있던 나무를 지피며 생각깊은 소리로 말씀드렸다.

《그런데 난 그렇지 못했어요.》

하고 상철이는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상범이를 때려주기도 하고 놀려주기도 하고… 그런데 그 앤 그만 왜놈들에게 죽고말았으니…》

《상철이도 동생을 아주 사랑했기때문에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것입니다.》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수그린 소년의 머리를 다독거려주시며 부드럽게 말씀하시였다.

《내가 보기에 이 이야기는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유격대에서 혁명동지사이에 나타나는 혁명적동지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례를 들어 우리는 아까 말한것처럼 한쪼각의 누룩을 구워놓고 여러 사람이 서로 양보하는바람에 여러 시간 걸려서야 없앤 일도 있습니다. 지금 상철이는 자기가 형제간에 사랑이 부족했다는듯이 생각하고있는 모양인데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오늘밤, 우리 상철이가 어떤 동무인가? 어떤 사람들은 상철이가 나이 어리다고 아직 철이 없는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하는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냥 옹색해하는 상철이를 돌아보시며 말씀을 시작하시였다.

《우리가 왕가점집단부락을 치고 숲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여러날째 행군을 시작했을 때 식량사정이 어렵게 되였습니다. 그때 작식대에서 나한테 강냉이 몇이삭을 구워왔습니다. 내가 그때 전투를 조직하느라고 좀 바빠서 돌아가다가 미처 그 강냉이를 먹지를 못하고 다시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7련대에 가보니 그때 상철동무가 련대장전령병으로서 아래우로 남보다 훨씬 많이 뛰여다니는데 점심을 건는것 같아서 그 강냉이를 주었습니다.》

상철이가 무슨 말씀일가 하고 거북한 자세로 듣고있다가 불시에 고개를 탁 숙였다. 유격대원들은 김일성동지의 말씀을 들으며 상철이쪽을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그이께서 전에없이 이렇게 상철이를 옆에 앉혀놓고 그를 칭찬하시는 까닭을 잘 알수가 없어서였다.

상철이는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상철동무에게는 지금도 그런 부족점이 있습니다. 사령관이 주면 싫든좋든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상철동무는 기어이 받지 않겠다고 막 떼를 썼습니다. 허허허.》

사령관동지께서는 소리내여 웃으시며 상철이의 푹 수그린 얼굴을 사랑에 넘쳐 들여다보시였다.

《그래 내가》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때와 같이 엄한 목소리를 내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단단히 비판을 하고 강냉이 한이삭을 억지로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되는 전투와 행군때문에 나는 그 일을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감회깊은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사흘전에 상철이가 구운 강냉이 한이삭을 나한테 가져왔습니다. 동무들은 이 일을 압니까?》

강봉수도 김재영이도 깜짝 놀라 사령관동지와 상철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전혀,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강봉수가 이렇게 대답을 드리자 재영이도 어리둥절해서 대답하였다.

《저도 몰랐습니다.》

상철의 고개는 점점 깊이 숙어졌다. 그를 돌아보는 재영의 눈길에는 방금 사령관동지께서 상철이를 잘못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자기를 두고 하신 말씀인것만 같아 미안하고 송구해하는 기색이 력력히 어리여있었다.

《나도 몰랐습니다. 다시 굽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내가 왕가점부근에서 몇알 떼먹은적이 있기때문에 똑똑히 기억하고있는 바로 그 강냉이였습니다. 동무들, 보시오. 이것이 형제간에 서로 벼가마니를 날라다준 옛이야기에 비길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우리 동무들의 혁명동지에 대한 사랑, 인민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혁명에 대한 사랑, 이런 혁명적인 사랑에는 끝이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사랑으로 하여 혁명전우를 위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계급과 혁명을 위하여 자기의 피를 아낌없이 흘리고있으며 목숨도 서슴없이 바치고있습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고귀한것이고 위대한 힘을 낳는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깊이 간직하고있을 때 비록 어떤 험산준령이 앞을 막아나서도 뚫고 나갈수 있습니다.》

사령관동지의 말씀은 유격대원들의 얼굴을 억세게 쳐들게 만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여태까지 비껴있던 그늘이 말끔히 가셔지고 정말 사령관동지께서 부어주신 위대한 사랑을 안고 혁명의 한길을 굴함없이 달려가리라는 굳은 결의가 어리여있었다.

《그러니 보십시오.》하고 그이께서는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오늘 우리는 비록 한홉되나마나한 미시가루를 나누어먹었지만 여기에 깃들어있는 혁명전우들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값진것을 먹은것으로 됩니까? 부르죠아들이 배터지게 먹는 진수성찬이 이런 고귀한 사랑의 량식에 비하면 얼마나 구역질나는것입니까?》

우등불은 어두운 밤하늘을 불태울듯 세차게 타올랐다. 밤은 깊어갔다.

잠들수 없는 밤이였다. 모두 사령관동지곁에서 헤여져왔지만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인섭은 목메인 소리로 태혁이도 뻔히 다 아는 이야기를 거듭거듭 되뇌이며 말했었다.

《우리 죽더라도 사령관동지의 이 사랑만은 가슴깊이 간직하고 죽어야 하오다. 그렇지 않소. 태혁동무?》

그러던 인섭이 네가 어찌 이럴수 있는가 사령관동지께서 저앞에서 부르시는데… 인섭은 그날 바로 그 미시가루물을 마시고났을 때처럼 명치끝이 무둑해지고 찌르르해나서 견딜수 없이 소리쳤다.

《태혁동무, 같이 가오다!》

무엇때문엔지 잔걸음질만 칠뿐 도무지 멀어지지 않던 태혁이가 홱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쳤다.

《내 박인섭이 목소리는 듣고싶지도 않다!》

《옳소, 난 배은망덕한놈이우다. 그래도 한번만 같이 가주오다.》

인섭은 두손을 쳐들고 비칠거리며 조급하게 눈을 걷어찼다.

《또 넘어지겠다. 성화라구야…》

태혁은 갓난애 바라보듯 인섭을 미타하게 바라보더니 도무지 기다릴수 없다는듯이 달려왔다.

《이 미련한것아, 혼자 눈속에 주저앉아서는 어찌자는거야?》

태혁은 인섭을 와락 그러안으며 소리쳤다.

《그러기다 내 본시 그런 인간이라고 하쟁이오.》

잠시후 두 사람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싶게 서로 다정하게 의지하고 눈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인섭은 얼마를 못가서 또 무엇엔가 걸려 벌렁 나가넘어졌다.

《아니 어쩌자고 또 넘어졌소?》

태혁이가 일으켜세우려고 하니 인섭은 뿌리치고 제 힘으로 벌떡 일어났다.

《넨장, 보오. 무엇이 되게 생겼나. 둘이 똑같이 걸어가는데 왜 하필 내 발에만 걸리는가말이요.》

그는 성이 퍼렇게 나서 앞에 묻혀있는 돌무지같은것을 걷어찼다.

《허허허, 박인섭이 밸이 대단하다. 그렇게 밸을 쓰니까 걸음마다 무엇을 걷어차지.》

태혁은 이렇게 놀려주며 그의 소매를 끌었다.

《그런데 한동무, 이거 좀 이상하지 않소?》

인섭은 성이 나서 침을 뱉고 돌아서려다가 방금 걷어찬 눈무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또 이상하오? 동무는 오늘 무슨 사설이 그리 많소?》

태혁은 자꾸 지체되는바람에 정말 성가시여서 짜증스럽게 말하였다.

《아니, 저걸 좀 보오. 난 여태 털이 난 돌멩이는 보지 못했는데… 참 이 모퉁이에는 별난 돌도 있다―》

인섭은 한쪽팔을 끌리우면서도 다시한번 돌을 걷어찼다. 눈무지가 허물어져내리자 돌의 형체는 더 좀 뚜렷해졌다.

《차 이것 보오. 털이 제법 부르르하쟁이오.》

그제야 태혁이도 인섭의 소매를 놓고 털이 부르르 난 돌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어디 돌이요? 털이 난 돌이 어디 있단말이요?》

태혁은 환성을 올리며 소리쳤다.

《그럼 이게 뭐란말이요?》

《그게 메돼지가 아니요?》

《메돼지? 그러고보니 메돼지같다.》

두사람은 얼른 허리를 굽히고 눈을 헤집었다. 거의 송아지만 한 메돼지가 죽어넘어져서 눈을 쓰고있었다.

《메돼지가 옳군, 그럼 이걸 어떻게 한다?》

인섭은 저으기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긴? 먹어야지.》

《먹는데는 들고 가야 할것 아니요.》

《참 걱정도 팔자군. 접때 노루처럼 각을 떠야지. 이건 꽁꽁 얼어서 각을 뜨기가 여북 좋아. 그 톱을 꺼내오.》

두사람은 삽시에 기운이 나서 돼지의 각을 뜨기 시작하였다.

《가만있자. 이놈이 무엇때문에 이 숲속에 번져졌을가? 포수 총알에 맞았나?》

한참 톱질을 하던 태혁이 문득 손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하기는 상했을수도 있는데… 공연히 죽었겠소.》

본시 의심 많은 인섭은 또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마주 중얼거렸다. 두사람은 다시 메돼지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깐깐히 살펴보았지만 총맞은 자리도 다른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아래우로 배를 갈라놓고보니 살은 깨끗하게 얼어붙어버렸는데 다만 밸속에 꺼뭇한 열매 몇알이 들어있는것이 수상쩍게 보이였다.

《가만.》

태혁은 그 열매 한알을 꺼내여 쥐고 말하였다.

《내 제꺽 가서 보고를 드리고 올테니 여기서 마저 켜오.》

태혁은 부리나케 걸음을 다우쳐 대렬을 따라갔다. 둘이 후위로 처졌기때문에 워낙 거리가 벌어져있는데다 인섭이 두번이나 넘어지고 어찌고 하는바람에 어지간히 지체하였건만 산기슭 하나를 돌아가니 기본대렬은 불과 100여메터앞을 걸어가고있었다.

아니나다를가 거기에는 인섭이보다 더 지친 사람들이 많았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상철이와 영남이를 한옆에 하나씩 끼고 가시는데 그이의 어깨에는 또 정지성의 출판도구들이 덧얹혀있었다.

그러한 김일성동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태혁은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눈앞에 핑하고 안개가 서리며 가슴이 죄여들었다. 무엇인가 분하고 안타까왔다.

(우리에게는 왜 이렇게도 힘이 없는가? 그이를 기쁘게 해드리고 그이의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드릴 방법이 과연 없겠는가?)

태혁은 여태까지 달려오던 기쁨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이 앞에 나서는것이 송구한 생각만 들어서 무겁게 걸음을 옮겨놓았다.

메돼지 한마리면 한두끼는 잘 먹을수도 있다. 더구나 부후물전투가 있은후 적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하여 장백의 혁명조직들과 련계를 짓기까지는 극력 전투를 피하시려고 하는 사령관동지의 의도를 알고있는 태혁은 비록 한마리의 메돼지이지만 당장 굶어서 쓰러져가는 대오에 얼마간의 힘을 보탤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리도 기뻐서 달려왔던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군속도로 이 밀림을 언제나 벗어날것이며 또 밀림을 벗어난댔자 적의 포위가 인차 뒤따를것이니 그 자리서 공세로 넘어갈수도 없을것이였다.

태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이 그리웠다. 봄을 앞당겨 불러올 방법은 없는가? 어쩐지 이해따라 겨울이 더 길고 더 사나운듯하였다.

《태혁동무가 웬일이요? 무슨 정황이 있습니까?》

대렬뒤를 살피시던 사령관동지께서 고개를 수굿하고 따라오는 태혁에게 물으시였다.

태혁은 여전히 머리를 숙인채 그이 앞으로 달려가 보고를 드리였다.

《사령관동지, 메돼지를 한마리 발견했습니다.》

《메돼지를? 무슨 메돼지요?》

사령관동지께서는 태혁의 말이 선뜻 리해되시지 않아 되물으시였다.

태혁은 뜨직뜨직 메돼지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다 말씀드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그가 내미는 열매를 받아 찬찬히 살펴보시였다. 꺼뭇하게 얼어붙은 거죽을 비벼내시니 호두알같은것이 불거졌다.

《이거 가래열매로군, 메돼지가 가래를 먹고 쓰러진 모양이요.》

《예? 메돼지가 가래를 먹고 쓰러집니까?》

태혁이가 가래라는 말씀에 호기심이 동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메돼지라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래열매는 속살은 맛이 있는것이지만 이 꺼먼 겉살은 아주 독한것입니다. 메돼지란놈이 하도 굶주려서 마구 주어먹은것 같습니다. 참 사납고 긴 겨울입니다. 메돼지도 먹을게 없어 독열매를 먹고 죽는 형편이니… 아마 눈속에서 잘 랭동되였겠습니다. 고기는 상하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기는 생생합니다. 그래서 지금 인섭동무가 각을 뜨고있습니다.》

그사이 지휘관들이 모여들어 메돼지배속에서 나온 열매를 번갈아 바라보며 사령관동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메돼지를 잡았다는바람에 대렬이 모두 멎어서서 웅성거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군. 메돼지는 한마리밖에 없소?》

사령관동지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겨계시더니 태혁에게 물으시였다.

《네, 한마리입니다. 한마리이지만 60근이나 나갈놈입니다.》

《그것 참 대단하오. 지금 우리에게는 식량이 하나도 없어서 곤난한데 메돼지고기가 60근이나 생긴다면 굉장한것입니다. 그렇지만 더 있을수도 있소.》

사령관동지의 말씀에 태혁이도 다른 지휘관들도 뗑해서 서로 번갈아보았다.

《동무들, 생각해보시오. 메돼지란 혼자서 다니지 않는놈입니다. 그놈이 가래열매를 어디서 먹었다면 반드시 딴놈도 먹었을것입니다. 중대장동무, 대렬을 세우시오. 그리고 태혁동무와 같이 몇동무 더 가서 그럼직한곳을 찾아보도록 하시오. 아마 눈속에 여러놈이 쓰러져있을수 있소.》

사령관동지의 명령이 전해지자 대렬은 활기에 넘쳐났다. 방금 쓰러져가던 동무들도 휴식할 생각을 않고 눈속으로 달려나갔다.

사람을 선발할 사이도 없이 저마다 눈속으로 달려가는바람에 앞뒤 척후만 경계근무를 세워놓고 모두 눈구뎅이를 발길로 걷어차며 이 구석 저 구석을 뒤졌다. 어디서 날쌔게 나무막대기를 꺾어 조금이라도 두드럭해보이는데는 다 찌르며 돌아가는 동무들도 있었다.

한참 메돼지 각을 뜨며 앉아있던 인섭은 앞서갔던 대렬이 와―하고 흩어져내려오는바람에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다가 사령관동지께서 메돼지가 더 있다고 말씀하셨다는것을 전해듣자 벌떡 일어났다. 거의 손질이 다 되여가는 메돼지를 쥐여뿌리고 일어서는 인섭을 보고 태혁은 또 땡헤졌다.

《아니, 인섭동무, 왜 그러오?》

《가만 있소. 참 세상에… 사령관동지의 말씀이 아니더면 내가 창피만 당하고말번했당이, 틀림없다니까…》

인섭은 똑똑한 대답을 할 짬도 없다는듯이 떠들어대는 동무들을 헤치고 달려갔다.

《아니, 저 동무가 왜 저래?》

《메돼지를 한마리 잡아내더니 골이 좀 돈게 아니야?》

모두 웅성웅성하며 떠들었다.

인섭은 그러거나말거나 방금전 그렇게도 힘들게 헤쳐온 눈길을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느새 앞질러가서 눈속을 뒤지고있는 동무들도 있었다.

《동무, 그쪽으로는 가지 마오. 그쪽은…》

인섭은 기관총분대의 한 동무가 저앞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것을 보자 큰일이라도 난듯이 손을 내저으며 달려갔다. 그 동무는 떨떨해서 달려오는 인섭을 보고 물었다.

《뭘 어쨌다오?》

《거긴 내가 머스가이해둔데랑이, 건드리지 마오.》

그래도 기관총분대동무는 영문을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머스가이가 어디 있는가 해서였다.

그러는 사이 인섭은 아까 넘어져서 일어서느니 마느니하고 한태혁이와 옥신각신하던곳에 달려가더니 제잡담 눈무지를 두손으로 잡아헤쳤다.

《있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환희에 찬 웨침이 터져오르자 태혁은 비로소 영문을 알아차리고 하늘을 향해 크게 웃었다.

《저 동무 오늘 돼지꿈을 꾸었군. 두번 다 메돼지에 걸려 넘어졌으니… 하하하.》

사방에서 《있다―》, 《메돼지다》하는 소리가 터져올랐다. 깡그리 얼어붙어서 숨죽이고있던 밀림은 웃음과 기쁨으로 끓어올랐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눈속을 껑충거리며 달아다니는 대원들을 자애에 넘치시는 눈길로 바라보시며 미소를 짓고계시였다.

정지성은 자기의 출판도구를 기어이 갈라지시고 그렇게 서계시는 그이의 모습에서 언제나 식지 않고 끓어번지는 사랑의 저류를 엿보는듯하였다.

문득 그의 귀전에는 그날 아버지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지성아.》

하고 피맺힌 시련의 그 7도구치기골짜기에서 아버지는 목메여 말했었다.

《우리 부자가 장군님의 이 사랑에 어떻게 보답하겠느냐. 다른것이 없다. 네가 우리 장군님을 모시고있는것이 우리 집안의 큰 자랑이다. 그저 목숨을 내놓고 장군님을 잘 모시고 받들어라. 나도 이제 돌아가서는 오직 장군님께서 가르치신대로만 살겠다.》

주종섭로인도 새벽바람 살을 에이는 눈벌에서 오래오래 지성의 손을 놓지 않고 장군님의 은덕에 대해 말했었다.

종일 피어린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두 로인은 배를 부둥켜안고 돌아가는 습격조성원들을 구완하노라고 바삐 돌아치면서도 자기들이 지고 온 소금때문에 마음이 숯등걸처럼 타들어갔었다. 그런데 전투가 가까스로 가라앉은 밤에 사령관동지께서는 두 로인을 부르시더니 인차 돌아가서 집을 옮기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였다. 왜놈들이 저렇게 독소금을 로인들도 몰래 지워보낸것을 보면 필경 뒤를 밟혔겠는데 그냥 두면 가족들이 재미없겠다는 말씀이시였다. 그 치렬처절한 싸움속에서도 그처럼 세심한 관심을 돌리고계셨다는것을 깨닫고 두 로인은 목이 메였다.

다행히 주로인의 처가집이 구가점어방에 있는데 언제부터 함께 모여살자는 말이 있었던만큼 우선 두 집이 다 그리로 옮아가기로 작정되였다.

《그것참, 아주 잘됐습니다. 시간을 지체하지 마십시오. 땅이라든가 집같은것을 크게 생각지 마시고 우선 몸부터 피해야 합니다. 필시 그놈들이 특무를 박아놓았을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몰래 몸부터 빠져야 합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렇게 신신당부하시고나서 이사에 보태쓰라고 군수관을 통해 적지 않은 돈까지 내주시였다. 두 로인이 펄쩍 뛰였으나 그이께서는 지고 온 량식값으로 생각하고 받아두라시며 등을 밀어 골짜기바닥까지 배응해주시였다.

아버지와 주로인은 그렇게 떠나갔다.

이제 환히 웃음짓고 서계시는 장군님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지성의 눈앞에는 독소금을 먹고 분노한 대원들앞에 서있던 자기 부자의 참혹했던 처지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인간의 예지가 도달할수 있는 높이는 어디까지이며 그 사랑이 오를수 있는 상상봉은 과연 얼마나한 높이에 솟아있는가.

지성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어느 정도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터득하고있다고 자부하고있었다. 뿐만아니라 인간의 힘을 위대한것으로 보시는 그 사상에 감동되였기에 그 어려운 소금공작에 내보내주시기를 간청하기도 했던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였는가.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정성을 다하여 구해온 그 소금으로 하여 그 자신은 말할것 없고 아버지와 주로인, 지어 태혁이까지 혁명의 배신자로 락인찍힐번하였다.

그 사건을 통하여 지성은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의 끝 모를 높이와 깊이를 다시한번 체험하였다. 지금에 와서 그는 생각하는것이였다.

(인간은 위대하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인간이 나타낼수 있는 능력의 한계는 그를 령도하는 사상의 높이에 의해 규정되는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민을 이끄시는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의 높이는 측량할 길이 없으며 따라서 장차 우리 인민이 발휘할 기적은 그 한계를 내다볼수 없는것이다.)

지성의 생각은 숨가쁘게 달려오는 두 전령병때문에 중단되였다.

《사령관동지!》

상철은 아직 스무걸음도 나마 되는곳에서부터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불렀다.

《메돼지를 잡았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상철이와 재영은 제몸만 한 메돼지 한놈을 잡아서 다리를 하나씩 잡고 눈우로 끌고오는판이였다.

《그걸 동무들이 잡았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활짝 웃음을 띠우시며 서둘러 달려나가시였다.

《잡기는 뭘… 찾아낸걸 가지고 그래.》

재영이가 상철의 옆구리를 찌르며 흘겨본다. 그러나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런것은 못본척하시고 꼬마들이 끌고온 돼지를 만족해서 바라보며 말씀하시였다.

《참 대단하오. 우리 상철이보다 훨씬 더 큰것 같소. 이것을 우리 꼬마들이 잡았단말이요?》

상철은 재영의 핀잔을 받고보니 다시 잡았다고 말씀드리기가 힘이 들어서 재영의 눈치만 힐끔힐끔 살피였다.

《상철동무가 막대기로 쑤시다가 찾아냈습니다. 처음에는 돼진줄 모르고 그냥 지나칠번했습니다. 너무 꽁꽁 얼어서 막대기끝에 닿는것이 꼭 바위같았습니다. 그런데 상철동무가 제꺽 알아채고 눈을 헤쳐보았습니다.》

재영이가 똑바로 서서 기운차게 대답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재영의 슬기롭게 반짝거리는 눈을 들여다보시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보시오. 우리 상철이가 얼마나 똑똑한가… 허허허, 메돼지가 아무리 눈속에 숨어봤자 피할수 없습니다.》

《사령관동지.》

상철이가 시무룩해서 또 뭐라고 말씀을 드리려 하였으나 재영이가 연방 흘겨보며 소매끝을 잡아당기는바람에 종시 입을 벌리지 못하고말았다.

재영은 저희끼리 각을 떠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사령관동지께서 무슨 도구가 있느냐고 물으시자 재영은 옆에 차고 다니던 왜놈들의 총창을 내들어보이였다.

《그걸로 하다가는 탕을 치겠습니다. 그러나 해보시오. 탕을 친것은 오늘 먹어버리면 됩니다.》

마침 오백룡이 달려왔다.

사령관동지께서 마주다가가시니 그는 모처럼 돼지고기도 생겼는데 여기서 숙영을 하면서 하루밤을 쉬였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이미 찾아낸 돼지만 해도 큰 수돼지가 두마리, 걸구가 한마리, 새끼가 세마리나 된다는것이였다.

《그렇게 하시오. 참 박인섭동무가 오늘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동무에게로 가봅시다.》

뒤에서는 두 꼬마들이 돼지의 각을 뜨느라고 총창을 갖다대고 막대기로 내리조기고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그들의 말다툼소리가 들려왔다.

《왜 자꾸 나만 놀려주는가말이야. 내가 어린앤줄 알아?》

칼을 돼지배에다 갖다대고 빤히 쳐다보며 쏘아붙이는것은 상철이였다.

《왜 자꾸 그래? 칼을 바로 쥐라구 하지 않아. 넌 사령관동지께서 한번 장한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자꾸 이러쿵저러쿵하는 버릇을 떼야겠어. 사령부 전령병은 그러면 못쓴단 말이야!》

어디서 꺾어온 봇나무막대기를 도끼처럼 휘두르며 이렇게 타이르는것은 재영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정지성을 돌아보시였다.

지성은 그이의 눈길속에서 《자, 보시오. 우리 아이들이 어떤가?》이렇게 자랑하고싶어하시는 어버이의 감출수 없는 심정을 느끼였다.

 

5

 

오늘은 인섭이에게 무엇이든지 잘되는 날인 모양이다. 취사장을 꾸리려고 으슥한 골짜기로 내려갔던 그는 뜻밖에도 산비탈에 묘하게 들여세운 밀영을 발견하였다.

밀영을 비운지는 꽤 오래된것 같았으나 워낙 알뜰하게 꾸린 귀틀집이여서 불기 하나 없는데도 아늑하였다. 혹시 무슨 딴 흔적이 없을가 해서 돌아가다가 산비탈에 묻어둔 밀가루 두포대와 감자 한가마니를 또 찾아내였다.

인섭의 말을 듣고 달려온 동무들은 모두 눈이 둥그래서 저마다 떠들어댔다.

《박인섭이 손에 거름이 묻었다!》

《저 사람이 간밤에 헛소리를 치더니 도깨비하구 사돈을 맺은게 아니야?》

7련대에서 박인섭이 박인섭이 하더니 다 쪼간이 있었군.》

모두 웅성거리면서 이게 어떻게 된 밀영일가 하고 공론들을 하는데 보고를 받으신 사령관동지께서는 산비탈을 더듬어보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허허허, 오늘은 박인섭이 날이군.》

그러시면서 다시 밀영을 살펴보시고 방위를 가늠해보신 그이께서는 감회깊은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이게 아마 이번에 소환되여온 지방공작조동무들이 만들어놓은 밀영인것 같습니다. 그 동무들이 지금은 모두 전투부대에 갔지만 작년에 청봉에 있을 때부터 농사도 여기저기 많이 지어놓고 후방물자도 넉넉하게 해결했습니다. 그것들을 사방에다 밀영을 짓고 묻어두었다고 보고를 해왔습니다. 그때 이 근방에도 밀영 하나를 지어놓았다고 하는것을 들었는데 그게 틀림없이 이 밀영인것 같습니다. 이것을 보니 청봉에 보낸 동무들에 대해 좀 마음을 놓게 됩니다. 이 밀영 하나만 봐도 청봉에 살림살이를 잘 꾸려놓았으리라는것을 짐작할수 있지 않습니까. 자, 구들에다 불을 지핍시다. 틀림없이 잘들것입니다.》

사령관동지의 말씀과 같이 불은 지피자마자 황황 고래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오래 얼었던 구들같지 않게 삽시에 후끈한 김을 피워올리며 더께앉은것 같던 성에를 녹여내였다.

흥성거리는 하루의 휴식이 시작되였다. 그런데 모든것이 다 잘되여가는듯 한 이때부터 오히려 갖가지 말썽이 생겨났다. 첫째 오래간만에 사령관동지를 뜨뜻한 아래목에 모시고 오붓이 모여앉아 만두국을 맛있게 먹자고 하던 노릇이 저마다 만두를 빚겠다고 나서서 분주탕을 피우는바람에 시간을 끌어서 워낙 아침은 좀 늦은편이고 점심으로는 좀 이른편이던것이 웬걸 점심도 퍽 늦은 점심이 되고말았다. 아무리 허기져도 먹을것이 없을때는 그런대로 참아오던 시장기가 구수한 만두국냄새를 맡자 더는 참을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래서 공연히 맛을 본다 어쩐다 하고 시간을 끄는 군수관 조진범을 모두 못마땅하게 바라보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조진범은 평시에도 대범하게 스치고 지나가던 검식이요, 식사순서요 하는 까다로운 격식을 꺼내놓고 안달이나게 만들어놓았다.

그럭저럭 식사는 끝났다. 말썽이 많고 어쩌고 하지만 실상 푸짐한 식사였다. 또 조진범이는 말할것 없고 강봉수나 박인섭의 만두빚는 솜씨가 괜찮은데다 한태혁이 역시 결코 조진범이나 작식대의 녀대원들만 못지않은 음식솜씨를 가지고있었다.

오래간만에 기름진 식사를 하고났기때문에 식곤이 온데다 뜨뜻한 구들이 모처럼 차례진 이런 때 응당 좀 쉬여야 할것이였다. 그래서 모두 자리들을 잡고 담배들을 한대씩 붙여물었으며 박인섭이 손이 정말 걸찍한 손이라고 새삼스럽게 감탄들을 하고있는데 별안간 바깥에서 왁작―떠드는 소리가 울려왔다.

무슨 일인가 해서 내다보던 동무들은 처음에는 모두 코웃음을 치며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러나 바깥의 소음은 갈수록 고조되는데다 하나둘 부시럭거리며 바깥으로 달려나가는 동무들까지 있어 도무지 잠들게 되지를 않았다.

바깥에서는 뽈을 차기 시작한것이였다. 처음에는 재영이가 각을 뜨던 걸귀에서 오줌개를 꺼내두었다가 장난으로 차기 시작한것인데 여기에 태혁이가 달려들어 냅다 한대 질렀더니 고무풍선처럼 불어난놈이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서 아찔한 소나무가지우에 걸리고말았다. 저도 한번 차보겠다고 따라오던 상철이는 말할것 없고 그 언저리에서 서성거리던 동무들이 모두 태혁을 흘겨보았다. 지어 숙영지를 돌아보고 흡족해서 걸어오던 오백룡이조차 태혁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그가 상철이 같은 심정일수는 없겠지만 그 역시 왕철시절부터 이름있는 축구선수라 무엇이든지 걷어차는 물건을 보기만 하면 공연히 승벽을 내는것도 사실이였다.

이래저래 립장이 딱하게 된 태혁이였으나 그렇다고 쭈그러들 그가 아니였다.

그는 제꺽 취사장으로 달려가서 조진범의 승인도 받기전에 그의 배낭을 들추었다.

각가지 총부속들이며 천쪼박, 실타래, 종이퉁구리에다 크고작은 쌀주머니 등 속이 빼곡한 틈바구니에서 이제는 차본지도 퍽 오래된 축구공을 끄집어낸 태혁은 아직도 오백룡이 귀틀집문전에서 서성거리는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얼굴이 시뻘개서 바람을 불어넣었다.

소나무밑에서는 나무가지에 걸린 오줌개를 떨구겠다고 눈덩이를 뭉쳐서 연신 팔매질을 하는데 나무에서 떨어지는 눈가루가 해빛을 받아 무지개빛으로 아롱졌다.

맑은 하늘에, 시원한 바람에 젊은 마음들은 부풀어나고 무쇠같은 몸에서는 근질근질할지경으로 피가 끓었다.

여기에 태혁이가 내지른 뽈이 날아왔다. 그것도 순하게 날아온것이 아니라 바로 오백룡의 머리우로 날아왔다.

오백룡은 나무밑에서 아이들처럼 떠들어대는 대원들을 바라보며 억지로라도 휴식을 시킬것인가 말것인가 망설이고있는데 왕청같이 뒤쪽에서 뽈이 날아오는바람에 어쩔 겨룰이 없었으나 역시 옛솜씨는 속일수 없었다. 어망결에 발을 갖다댄것이 정통을 찔러서 뽈은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하늘높이 솟아올랐다.

정지성이 이를 쑤시고있다가 마침 날아오는 뽈을 머리로 한대 받아놓아서 인적없는 밀림속 눈판에 웃음통이 터져올랐다.

어느새 밀영안에 들어가 누웠던 동무들도 모두 떨쳐나섰다.

당장 쓰러질것 같던 참혹한 형상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너덜너덜하는 신에 감발을 단단히 하여 죄여신고 탁탁 땅을 굴러보기도 하고 나무가지를 향해 손을 뻗치며 껑충껑충 뛰여보기도 하는 그 기세를 보면 사뭇 큰 시합에 나가는 선수들 같다.

처음에는 둥그렇게 벌려서서 마구 차대던것이 차츰 승벽들을 내기 시작하여 어찌나 요란스레 떠들어대는지 도저히 그냥은 가라앉힐수가 없게 되였다. 마침내 사령관동지를 모셔내여 편을 가르고 정식 시합을 하게 되였다.

이제는 한개 분대밖에 남지 않은 기관총소대에다 비서처와 전령병들이 다 여기에 붙어 한편이 되고 나머지 경위중대의 기본성원이 다른 편이 되였는데 오백룡은 자기자신이 참가하는것은 말할것 없고 경기자체도 반대하였지만 사령관동지께서 몸소 바깥에 나서시고보니 어쩔수없이 웃동을 벗어붙이지 않을수 없었다.

경기장은 무한정 넓은데 단지 꼴대만은 적당한 자리에 있는 적당한 나무 두대사이를 정하고 나머지 규칙은 심판인 정지성이 대단히 엄격하게 본다는 선언 하나로 대치해버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커다란 흥미를 가지시고 경기를 바라보시였다.

우선 구경스러운것은 경위중대편의 주장으로 자진해나선 오백룡의 표정이였다. 심판의 신호에 따라 마주나온 상대편 주장은 의례 나오려니 한 한태혁이나 강봉수가 아니라 김재영이였다. 오백룡은 당장 썩은 콩을 씹은듯 오만상을 찌프렸으나 이제는 뒤로 움츠릴 겨룰이 없었다. 그는 저쪽에서 신들메를 조이며 문지기 상철에게 무엇인가 연신 지껄이고있는 태혁을 쏘아보았다. 워낙 처음에 자기에게 뽈을 차던진것부터가 도전적인것으로 치부하고있는 오백룡은 경기판에서 톡톡히 맛을 보여주리라 별렀던것인데 상대가 이쯤 짜고들어 골탕을 먹이리라고까지는 차마 예견하지 못했던것이다. 심판의 구령에 따라 재영이와 주먹가위를 내댈 때 그의 둥글넙적한 얼굴은 수수떡빛이 되였다. 그러나 어쨌든 이기기는 이겼다. 그래서 경위중대쪽에서 먼저 공격을 하게 되였는데 오백룡의 기분이 처음부터 순하지 못하다보니 린접이고 련락이고 다 내 알바 아니라는듯 곧장 기관총소대 꼴문을 향해 뽈을 몰고가다가 강봉수가 우습게 발길질을 하는데 걸려 뽈을 빼앗겼을뿐아니라 눈판에 미끄러져서 넘어지기까지 하였다. 밀림이 떠나갈듯 한 웃음이 터져올랐다. 모두 좋아서 몰이군처럼 떠들며 껑충껑충 뛴다. 이판에 성이 난것은 박인섭이였다. 아무러면 중대장체면을 그렇게 깎아내리는 법이 있는가. 그래서 인섭은 죽자고 달렸지만 슬프게도 그의 축구기술은 재영이만도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판에서는 축구기술이 문제가 아니다. 제아무리 명수라도 정갱이까지 치는 눈판이라 재간을 피워볼데가 없는것이다.

오백룡이 제 성미에 녹아나듯이 한태혁이도 바로 제 성미에 녹아났다. 죽자고 뽈을 따라잡아서 젖먹은 힘까지 다 쓰고 내질러보아야 뽈은 눈가루를 피워올리며 한참을 굴러가다가 싱겁게 눈속에 구겨박히는판이니 제아무리 허재비문지기라도 못잡을수가 없는것이다.

그런판에 박인섭이가 뒤뚝거리며 달려가다가 때마침 문지기 상철이가 넘어지는 틈에 우습게 한꼴을 내버렸다.

이날은 정말 박인섭이판이였다. 날이 저물 때까지 사령관동지께 시간을 물어가며 몇번씩 연장전을 들이댔지만 종시 그 어떤 《명수》도 인섭이가 낸것과 같은 진짜 꼴을 내지 못했다.

그바람에 그날저녁 그는 오락회판에 맨먼저 불리여나와서 진땀을 빼였다.

인섭이가 그래도 오락회같은 판에 내놓을만  한 노래라고는 평안도수심가 하나가 있을뿐인데 이것은 사상적내용이 모호하기때문에 감히 사령관동지 앞에서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나 다 아는 《자유가》를 불렀더니 이게 또 대인기라 연방 재청재청하고 소리치는데 본시 노래밑천이 밭은 인섭은 뻔히 아는 노래도 미처 부르지 못하고 땀만 뻘뻘 흘리였다.

너무 혼이 난 그는 마감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두고보라구, 이다음에 메돼지 맞다들려도 모른척하고 지나치지 않나…》

 

6

 

하시모도는 도꾜에서 적잖이 쓴맛을 보았다. 그가 신경에서 이럭저럭 꾸물거리다가 다시 조선에 가서 하루를 지체하고 도꾜에 날아가니 조각의 명령은 이미 히라누마에게 떨어져있었다. 히라누마가 내각총리대신이 됐다고 해서 크게 좋을것도 없고 크게 나쁠것도 없었지만 내각개조문제에 하시모도가 개입할 구석은 저으기 좁아진것이 사실이였다. 부랴부랴 서둘러서 도죠들이 이미 가지고있던 안을 성숙시켜 일곱명의 대신을 그대로 류임시킨 새 내각을 발족시키기는 하였지만 그 과정 역시 그닥 유쾌하게 진행된것은 아니였다. 만주에 리권을 가지고있는 재벌들이나 우둔한 군부의 늙다리 우두머리들은 여전히 관동군의 실력과 그 선전을 그대로 믿고 알랑거렸지만 실권자들까지 속일수는 없었다.

《그래, 자네 생각에는 어떤가? 우리가 로씨야와의 관계를 완화시켰다고 비난이 대단한데 자네들의 말을 믿고있다간 나까지 랑패할것 같네. 그래 조선빨찌산을 없애는것이 그렇게도 힘이 드는가?》

도죠는 자기 방에 오래간만에 들어선 하시모도에게 직판 이런 쓰거운 소리를 하였다. 하시모도는 마치 자기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희떱게 구는 도죠의 잠자리대가리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도수경속에서 무지가 감출수 없이 드러나는 눈이 무표정하게 바라보고있었다. 얼핏 보매 무표정한듯 한 그 눈에 살기가 어리는 날이면 그는 그 어떤 엄청난 일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해치우는것이다.

얼핏 보매 어디에도 《면도칼》이라고 불리울만 한 지성이 깃들어보이지 않는 그 눈속에 어쩌면 그런 간계와 음모가 감추어져있는지 리해할수 없었다.

언젠가 도죠의 동창생이 유년학교시절의 그의 일화 한가지를 들려준 일이 있다. 그때까지 도죠는 가장 심한 렬등생이였다. 한번은 도화시간에 사생을 하게 되였는데 교관이 그림을 다 거두어서 보니 한 종이에는 동그라미 스무개를 한줄에 그려놓은것이 있었다. 이름을 보니 도죠 히데끼였다. 이게 무슨 사생인가고 물으니까 도죠는 《모자걸개입니다.》하고 힘차게 대답했다고 하면서 덧붙여 중얼거렸었다.

《이를테면 이런것이 그자가 바보이라는것과 함께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라는것을 말해주거던. 그렇다고 생각만 하면 덮어놓고 내우기는 곰같이 우직한자말이야.》

하시모도는 진실이 아니라 언제든지 그것이 비록 엄청난 허구일지라도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모든 일이 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광신자앞에서 아무런 효과가 없을줄 알면서도 관동군이 겪고 있는 고충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는 만주대륙에서 일정한 전선을 펴고 정규적인 전쟁을 하는것이 아니라 현대적무기들을 전혀 쓸모없는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유격전쟁에 끌려들고있다. 그들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이 없어지기전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그 전쟁을 중단하지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령도자 김일성장군이 제국과의 타협없는 싸움에로 그들을 부르기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동기대토벌》의 주력을 김일성사령부에 집중시켰던것인데 제국이 가지고있는 모든 위력이 여기서는 하등의 효과도 나타내지 못하고있다. 방대한 무력도 현대적인 무기도 이 전쟁에서는 거치장스러울뿐이다. 그들은 싸우다가도 형세 불리하면 뿔뿔이 흩어져버린다. 어찌다가 한두사람의 유격대원을 발견했다고 해도 거기에다 대포를 쏠수는 없는것이고 혹 쏘았다해도 세상앞에서 제국의 체면을 깎아내릴뿐이다. 그들이 흩어졌다고 해서 아군이 따라 흩어지면 어느새 그들은 또 모여들어 아군의 약한 고리를 들이친다. 아군이 숲에 들어가면 그들은 평지에 내려오고 아군이 평지로 돌아서면 그들은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이 걷잡을수 없고 예측할수도 없는 자유분망한 전술은 근 10년래 제국을 약화시키고있지만 아직 제국은 이 전술에 대처할만 한 전략전술원칙을 못가지고있을뿐아니라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운영할만 한 장군을 못가지고있다. 그리하여 이해겨울에 관동군이 의거하게 되는 《전면토벌》전략이 나온것인데 그 방대하고 변화무쌍한 광활한 전선에서 이 전략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대륙의 규모에 상응하는 대병력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것이다…

하시모도는 이러한 내용의 말을 하면서 될수록 도죠자신이 관동군참모장시절에 자주 입에 올리던 말을 상기시켜 그의 마음을 돌려세워보려고 하였다.

도죠는 하시모도가 자기의 말을 옮길 때마다 눈알을 굴렸다. 렌즈같이 두꺼운 안경알속에서 눈알이 구을 때마다 하시모도는 기대와 함께 전률을 느끼였다. 미치광이에게 특유한 거칠은 빛살이 향방없이 내뻗치는데 그것은 안정을 잃은 병든 정신의 진통을 말해주는듯 하였다.

아니나다를가 도죠는 하시모도의 설명이 미처 끝나기도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찢어지는듯 한 고음으로 소리쳤다.

김일성빨찌산을 병력으로써 제압하지 못한다는 귀관의 설명이 옳다면 더구나 관동군이 20개이상의 사단을 유지해야 한다는 근거는 없는것일세. 지금 산업계에서는 남방의 고무와 석유를 절실히 요구하고있네. 제국의 경제적위력없이 우리의 군사적위력이 지탱될수 없다는것은 귀관도 잘 아는 리치가 아닌가. 해군에서는 더 많은 함선을 요구하고 륙군에서는 신형땅크를 요구하네. 또 렬강에 뒤지지 않을 공군을 우리는 가져야 하네. 그런데 그 고무와 석유를 우리는 돈을 주고 사올것이 아니라 전리품으로서 로획해야 하네. 우리는 물론 제국의 위력을 지탱할 그러한 물자들을 장차 씨비리와 우랄에서 해결할 희망을 버릴수 없네. 그것은 우리 국체로부터 흘러나오는 국가적인 리념이네. 그렇기때문에 제국은 일관하게 관동군을 강화하는 방침을 취하여온것이 사실이네. 허지만 조선과 만주땅은 관동군에게 단 한번도 안정된 출병기지로 되여주지 않았네. 김일성유격대가 제국에 준 타격은 단지 목하 신질서수립을 위한 일대 성전에 내달리려는 제국군대의 발밑에 함정을 파고있는 거기에만 있지 않단 말일세. 지금 렬강사이에는 식민지의 분할과 재분할문제를 둘러싸고 치렬처절한 싸움이 붙었네. 세계에 신질서수립의 기운이 태동하고있는 이 마당에 제국이 한걸음이라도 뒤진다면 그것은 그 어떤 리권의 손실에 머무는것이 아니라 그 루가 장차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데까지 이르리라는것을 명심해야 하네. 오늘 제국이 씨비리와 우랄을 건너다보며 손가락을 빨고 렬강이 동남아의 무진장한 자원을 덮치는것을 부럽게 바라보고있는 사이 그 자원으로 무장한 렬강이 래일은 제국자체를 삼키려고 들것은 불을 보는것보다 명백한것이네. 그런데 제국이 공산로씨야의 소멸을 위하여 준비한 관동군의 방대한 무력을 한사람도 써보지 못한채 오늘 다른 방향에로의 진출조차 임의로 할수 없다는것은 제국이 만주를 식민지화함으로써 얻은것보다 잃은것이 오히려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김일성유격대문제, 다시말해서 만주에서의 치안숙정문제가 이처럼 심각하다는것을 다른 사람은 물라도 아마 귀관의 명석한 두뇌로써 판단하기는 어렵지 않으리라고 보네. 거듭 말하지만 제국은 오늘의 국제력량관계의 상황하에서 앞으로 만주에서 계속 100만의 군대를 유지하기가 어렵네. 알겠나? 이번 겨울이 마지막 기한이라는것을 나는 똑똑히 언명해두네. 그러한 각오하에 이번 〈대토벌〉을 결속짓기 바라네. 만일에 그것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 거듭 말하지만 그 후과는 실로 제국의 국책수행전반에 루를 미칠것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추궁은 엄격할것일세. 우리는 귀관의 성실한 노력을 전제로 하고 벌써 로씨야와 화평교섭을 시작했네.》

쏘만국경에 평화분위기를 조성해놓고는 관동군을 빼돌리겠다는 위협이였다. 화평교섭을 시작한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만주에서 누구보다도 혼이 난 도죠가 과연 관동군을 약화시킬 용단을 내릴수 있겠는가 하는것은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김일성장군의 유격대를 《소멸》하지 못했을 때 그 책임을 넘겨씌우겠다는것은 단순한 위협으로만 생각할수도 없었다.

하시모도는 무엇인가 서글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독하게 맺혀지는 보복심리를 가슴에 안고 도꾜를 떠났다.

그는 신경에 돌아오자 도꾜에서 계획했던 일이 다 잘된것처럼 우에다와 이소다니에게 말하고 이어 사단장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는 여기서 장고봉사건에 대한 쏘련과의 외교적타결에 욕설을 퍼부으면서 군부의 강경한 립장이라는것을 날조해서 력설하였다.

그리고는 앞으로 있을수 있는 사태에 대처하여 관동군의 위세를 강화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일것이며 특히 국경안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사단장병들에게 제국의 안전을 털끝만큼이라도 침범당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응당 죽음으로써 갚을 충성심이 있어야 할것이라고 어떤 바보도 알아들을만큼 도발에로 꼬드겨놓았다.

이렇게 연연 수만리 쏘만국경에 걸핏하면 불이 터질 긴장성을 조성해놓는 한편 조선인민혁명군의 《소멸》을 기정사실화하는 방침을 내밀었다. 온갖 선전수단들을 총동원하여 《토벌》작전에 동원된 부대들의 전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표창사업을 들이댔으며 경축연회를 도처에서 베풀게 하였다.

한편에서는 선무공작반을 보강하여 내보내고 경축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위안공연을 조직하였다. 이렇게 겉으로는 떠들어대면서 뒤에서는 조선주둔군사령부에 련락하여 조선의 국경경비를 철통같이 만들어놓고 중국깊이에 들이밀었던 부대들 그리고 위만군과 경찰무력을 깡그리 긁어서 숲으로 내몰았다. 하시모도자신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해겨울에 조선인민혁명군을 사실상 없애버려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였던것이다.

그러나 벌써 10년째 계속해온 이 노력이 과연 그러한 결심이 부족해서 열매를 맺지 못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자 다시 초조감에 볶이여났다.

그는 신경에 앉아서 데라시마와 혼마 그리고 모리를 다그쳐대다가 도무지 마음을 놓을수 없어 직접 데라시마의 지휘부로 내려갔다.

데라시마의 지휘부는 6도구에서 멀지 않은 어느 토성에 자리잡고있었다. 그때 마침 6도구에서는 진백란을 중심으로 한 황군위문이동연예대가 데라시마사단 관하부대들앞에서 공연을 하고있었다.

《데라시마군은 물론 잘 알고있겠지만 이 6도구라는데는 재미가 적은곳이요.》

하고 하시모도는 10년이나 년장자이며 한때 자기의 교관이였고 또 지금도 중장의 견장을 달고있는 데라시마에게 이런 투로 말하였다.

《교도관 기시중위가 작년봄에 전몰한것이 바로 이 6도구였지?》

하시모도가 이렇게 묻자 서류철을 끼고 옆에 대기해 서있던 모리 중좌가 차렷자세를 취하며 대답하였다.

《네 그렇습니다. 작년 4월말에 김일성장군이 직접 부대를 데리고 6도구를 습격했습니다. 압록강연안의 거리나 마을치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습격을 받지 않은곳이 거의 없다지만 6도구에서의 참변은 실로 황군장병들의 각오를 높이게 하는바가 큽니다. 아무튼 희생자는 말할것 없고 수비대전원이 고스란히 줄을 서서 무장해제를 당했으니까요.》

《아 좋다, 좋아. 아무렴 사단장이 그만한것도 모르고 지휘부를 여기다 정했겠느냐?》

하시모도는 점잖게 모리를 제지하고나서 새삼스럽게 벽에 걸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아무튼 나는 데라시마군이 자기 지휘부를 너무 자주 옮기는것은 찬성할수 없어. 내 말뜻을 짐작하겠소?》

데라시마는 하시모도의 웃는 입모습과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길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좋을지 몰라 몇번 밭은 기침을 깇다가 가까스로 입을 뗐다.

《본관은 다만 본관의 부대가 싸움을 하는곳에 자기 지휘부를 정할뿐이요. 아마 부장각하의 말뜻은 여기 이 일대에서 우리의 토벌작전을 결속지었으면 좋겠다는 의향같은데 본관은 두말할것도 없이 그러한 각오하에 작전을 추진시키고있는바요.》

《로장 데라시마다운 말이요. 나는 사실 우리 지휘관들이 모두 이러한 각오를 가지고있다면 진작 전 동양을 제패했으리라고 생각하오. 그런데 혼마는 지금 어떻소? 그는 몸을 좀 아끼는게 아니요?》

하시모도는 약간 성이 난듯 한 데라시마의 부석부석한 얼굴을 이윽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혼마야말로 군인이지요.》

하고 데라시마는 볼부은 소리로 대답하였다.《그 사람은 아마 지난 초겨울에 내가 가만 내버려두었으면 남패자에서 김일성장군의 부대를 완전소멸했을거요.》

《허허허, 가만 내버려두지 않은거야 데라시마군이 아니지. 그러한 권한은 한개 사단장에게 주어져본적이 없으니까.》

하시모도는 껄껄 웃으며 데라시마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은근히 남패자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을 놓친 책임을 추궁하자던 데라시마는 하시모도의 말 한마디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눈줄곳을 몰라 허둥거렸다.

《하기는 사단장각하가 안타까와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하고 모리가 옆에서 간사한 목소리로 참견을 하였다.

《하지만 그후에 사령부의 방침을 충실히 집행한 부대도 있습지요. 례를 들면 야마시다련대는 1방면군을 검질게 물고늘어져서 결정적인 타격을 안겼으니까요.》

《아, 아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 1방면군이 된타격을 입은것은 사실이지만 그 잔여부대는 여전히 저항을 계속하고있지 않나. 물론 야마시다는 용감한 군인의 귀감인것은 사실이지만…》

하시모도는 신경에서 꾀병을 앓다가 패잔병을 긁어모은 새 련대를 끌고 마지못해 숲으로 다시 들어간 야마시다를 생각하고 속으로 쓰겁게 웃었지만 겉으로는 점잖게 자기의 심복을 눌러놓고나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혼마는 괜찮게 싸우고있겠군?》

《지금 혼마려단에서 장교 세사람이 승급 임관을 받기 위해 6도구에 와있소. 실정을 알아보고싶거든 직접 그들을 만나보는게 좋을것같소.》

데라시마는 두놈이 자기를 이리 치고 저리 구슬리는것에 잔뜩 비위가 동해 씹어뱉듯이 말했다. 자기가 눈물을 머금으며 들은 그들의 참담한 체험을 한번 들어보고 누가 잘 싸우니 못싸우니 하는 수작을 해보라는 배심이였다.

《참, 부장각하, 그 전날 사령부에 왔던 기꾸찌군이 대위로 승진되여 이곳에 와있습니다.》

모리가 옆에서 귀띔을 하였다.

《기꾸찌가? 내 그런 내신서를 보았소. 그 사람들을 한번 만나볼가…》

하시모도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나서 데라시마를 정색하여 바라보았다.

《이번에 새로 증강된 부대들과 위만군려단 그리고 경찰대들을 전부 데라시마사단에 배속시키고 그 작전지휘권을 데라시마중장에게 위임하라는 우에다사령관각하의 명령을 전하는바요. 지금 해당한 명령서가 작성되여 부대들에 하달되였소. 그러니 데라시마군은 오늘 즉시에 그 부대들의 작전지역을 할당해야겠소.》

우울하게 앉아있던 데라시마는 벌떡 일어났다. 방금까지 하시모도와 무슨 싱갱이질이라도 하는듯 한 기분에 사로잡혀있던 그는 비로소 자기 처지를 통감하였다.

《황송합니다. 각하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도록 몸을 마스고 뼈를 깎겠습니다.》

데라시마의 소학생같이 흥분한 시뻘건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하시모도의 얼굴에도 화기가 떠올랐다.

《하여간 데라시마군이 대단하오. 내가 알건데 지금 무적을 자랑하는 황군에서 한개 전쟁을 담당한 사령관도 이러한 병력을 지휘하는 사람은 없소. 20만이상이 되는 병력이니까… 구라파의 많은 나라들가운데는 전쟁시기에도 이만 한 군대를 못가진 나라가 허다하단 말이요.》

《황송합니다.》

데라시마는 점점 굳어져서 다리를 떨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우둔한 그로서도 한개 사단장에게 이만 한 병력을 맡겨준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 뒤끝에 올것이 무엇이라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데라시마사단의 지휘부가 여기서 다시 옮기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하오. 즉 이 장백, 림강 일대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은 완전히 소멸돼야 한단말이요. 지도를 가져오시오.》

하시모도의 어조는 데라시마의 가뜩이나 성치 못한 심장에 지나치게 센 자극을 주었다. 늙은 중장 데라시마는 부관을 부를 생각도 못하고 노복과 같이 허리를 구부정해가지고 손수 지도를 가지러 갔다.

 

7

 

이튿날 하시모도는 혼마려단에서 왔다는 세사람의 장교를 자기 숙소로 불렀다. 기꾸찌는 대위로 승급되고 곤도와 또 한사람은 하사관으로부터 소위로 제발되여 새 군복에 새 견장을 달고 나타났다.

그는 신경에서 헤여진지 두달 되나마나한 사이에 벌써 혁혁한 무훈을 세워 소대장으로부터 중대장으로 발탁된것만큼 사기왕성하고 패기에 넘치는 청년장교를 만나리라고 기대했었다. 신경에서 두번째 헤여질 때만 해도 아직 순진한 애숭이때를 벗지 못했던 기꾸찌였다.

그 용솟음치는 공명심과 혈기를 누르지 못해 날뛰던 철부지의 무모성에다 숲속에서의 두달반의 실전경험이 보태여졌다면 끌끌한 장교가 될수도 있을것이였다. 그러나 정작 눈앞에 나타난 기꾸찌와 다른 두 사람의 신임장교들을 보았을 때 하시모도는 지그시 입을 다물었다. 전투손실에 대한 어떤 수자로도 표시할수 없는 패전의 흔적이 세 장교의 모습에 너무도 뚜렷이 인찍혀져있었던것이다.

《소장각하, 기꾸찌 고사부로대위이하 2명은 임관인사차 알현하였습니다.》

주정뱅이같이 갈린 목소리로 이와 같이 보고하는 기꾸찌의 얼굴에는 전날 처녀와 같이 곱게 보이던 발깃한 혈색은 간곳 없고 푸르죽죽하게 얼어붙은데다 눈속에서 매대기를 치는바람에 성에가시에 긁힌 자리가 헌데딱지처럼 널려있었다. 맑고 푸르던 눈에는 얼기설기 피발이 건너갔는데 그것은 인생에 타락해버린 인간들이나 투전군들이 화술과 난봉에 지친것과 같은 살벌한 그 무엇을 드러내고있었다. 머리도 깎고 새 군복과 새 견장까지 달았지만 색이 진한 그 새것들이 오히려 완전히 야생화돼버린듯 한 인간들의 갈갈이 찢겨진 넋을 다 강조해주는듯싶었다.

《축하한다.》

하고 하시모도는 랭랭하게 말했다. 전같으면 의례 《오래간만일세.》이러한 투로 인간적인 인사를 건넸을테지만 무엇때문인지 완전히 타락해버린듯 한 이 인간들앞에서 그가 아무리 기꾸찌대장의 아들이라고 해도 동정심과 같은 부드러운 감정이 품어지지가 않았다. 다만 어떻게 하면 하나의 인간이 석달 못되는 사이에 이렇게도 변해버릴수가 있을가 하고 놀라운 생각만이 떠올랐다.

《나는 너희들 려단의 형편을 좀 알고싶다. 너희들이 실지 진행한 전투이야기를 좀 해주기 바란다.》

하시모도는 당초에 계획했던 실무적인 실태보고보다도 그들을 그렇게도 심하게 변모시켜버린 그 원인을 알고싶었다.

그자신은 물론 전호속에 엎디여본적도 없고 사관학교나 륙군대학시절을 제외한다면 군사복무때문에 육체적으로 고생해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전투, 특히 불리한 전투가 군인들의 정신과 육체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한 군인들과 군인집단을 그는 중국과 만주에서 무수히 보아왔다.

신경에 앉아가지고도 례컨데 야마시다 련대장같은 인간을 얼마든지 만날수 있고 여기 와서도 이를테면 악전고투에 지쳐버린 허다한 장교들과 병사들을 만날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 김일성장군의 부대를 따라다니며 전투를 치르고 온 이러한 형상들을 보기는 처음이였다.

《뭐, 전투라고 할만 한것이 그리 많지는 못했는데요.》

하고 기꾸찌는 하시모도의 눈치를 힐끔 살피더니 교활한 웃음을 입가에 띠며 대답하였다. 그것도 전에 없던 표정이였다.

《무엇이든지 좋다. 겪은것, 느낀것, 본것, 무엇이든지 생각나는대로 죄다 말해보아라.》

하시모도는 담배재를 신경질적으로 털며 역증스럽게 말했다.

기꾸찌는 한참 생각하더니 뻔뻔스러운 어조로 얼마전에 진행된 7도구치기에서의 격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하시모도가 이미 전투보고를 들었고 따로 모리와 그밖의 밀정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한 전투내용이였다. 그런데 기꾸찌는 그것을 턱없이 과장하여 묘사하였다.

《적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아군의 돌격이 너무 맹렬했기때문에 견딜수가 없어 연방 진지를 내주고 내뺐습니다. 그날 우리 소대만해도 여섯개의 고지를 점령했습니다. 아무튼지 적의 시체가 눈우에 죽 널렸으니까요.》

《너는 그때 낮잠이라도 자고있은게 아닌가?》

하시모도는 쌀쌀하게 물었다.

《네?》

하고 기꾸찌는 놀라서 되물었다.

《낮잠이라도 잤기에 그런 꿈을 꾸었지. 전투이야기는 그만해라. 그래 너희들이 조선의 빨찌산들을 똑똑히 보기는 했느냐?》

하시모도가 초조해서 묻자 기꾸찌는 비로소 하시모도가 그 어떤 진실을 찾고있다는것을 느꼈는지 쓰거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곤도가 쭈밋쭈밋하며 입을 벌렸다.

《각하, 저는 중국전선에서도 2년이상 싸웠고 이 상처가 말해주는바와 같이…》

하고 곤도가 군복자락을 들치려 하자 하시모도는 빽하고 소리쳤다.

《버릇없이 굴지 말고 사실을 말해봣!》

《넷.》

곤도는 발딱하고 바로서더니 이번에는 몹시 수집은 태를 지어보이며 말하였다.

《사실 저는 빨찌산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그들의 뒤를 불과 한키로 되나마나하게 따라가기까지 하였으니까요. 한키로라고하지만 어떤때는 번번한 등성이기때문에 환히 내다보입니다. 또 어떤 때는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숙영할 때도 있는데 그런 때면 그들이 식사요, 오락회요, 학습회요 하고 모였다 헤여졌다 하는것도 다 볼수 있습지요. 한번은…》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느냐? 그럴 때 냅다 치면 될것 아닌가?》

하시모도는 참을수가 없어 소리질렀다.

《냅다 치다니요? 빨찌산을 말입니까? 헤헤헤, 그것은 그들이 일부러 그렇게 하는것이기때문에 매번 냅다 칠수 없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우리 편이 습격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지요. 례를 들어 적이 한키로쯤 앞에서 행군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들이 내놓은 길을 따라 일직선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따라서 1,000메터 뒤에서 맨 후위의 적을 겨누어 쏜다 해도 맞지는 않고 겨우 거리를 좀 좁혀놓으면 어느새 적의 매복이 우리를 향해 냅다 갈깁니다.》

《왜 그러는가 말이다. 무엇때문에 적이 내놓은 길을 졸졸 따라가는가? 그럴 경우에 앞질러간다든지 우회를 할수는 없느냐?》

하시모도는 책상을 탕 치며 부르짖었다.

《소장각하!》

기꾸찌가 딱하다는듯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마치 어린애를 타이르는듯 한 어조로 말하였다.

《지금 산속은 눈이 길넘게 쌓이고 얕은데라야 무릎을 칩니다. 그런곳에서 우회를 하자고 들다가는 적의 총알을 맞기전에 몽땅 죽어버릴것입니다. 꼭 눈속에 빠진 노루신세가 될테니까요. 다행히 빨찌산들이 길을 내주어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갈수밖에 없습니다. 우회는커녕 빗서기도 힘들게 되여있습니다.》

《그런데 빨찌산들은 어떻게 숫눈길을 가는가말이다. 그들이 설마 너희들보다 더 잘먹고 더 잘입지는 못했을것 아니냐?》

하시모도는 어쩐지 같잖은것들한테 놀리우는것 같아 매섭게 쏘아보며 따졌다.

《글쎄요. 그건 그런데… 우리도 그것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세 장교는 동시에 침울한 표정이 되여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들도 인간이 아니냐, 어디 말해보아라, 빨찌산들은 내가 알기에는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그렇게 가는데 너희들은 왜 못하느냐 말이다! 건달같은놈들!》

하시모도가 아무리 악을 써도 그들은 다시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보매 그 질문에 대답 안하는것은 엇서보자는 심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자신 이상하게 생각은 하면서도 해명을 할수가 없기때문인듯하였다.

담화가 끝날무렵 기꾸찌는 눈치를 살피더니 자기들이 부대로 돌아가는데 사흘동안만 말미를 주도록 사단에 좀 이야기해달라고 청을 드렸다. 사실은 오늘중으로 후방물자를 싣고 가는 치중대와 함께 부대로 돌아가게 되여있다는것이였다.

하시모도는 당장 거절하고싶었다. 한때 신경의 사령부에서 함께 근무하자고 권고할 때는 그처럼 도고하게 뿌리치고 큰 공이나 세울것처럼 떠나가던 기꾸찌였다. 그런 장교가 이제와서 사흘동안의 안일을 위하여 온갖 자존심을 다 쥐여던지고 이러한 청을 대는것을 보니 화가 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시 딱 잘라 거절하게는 안되였다.

《좋다. 하루동안만 더 쉬였다 가거라. 이제 다시 만날 짬은 없다. 돌아가거든 너희들 려단장한테 내가 건달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그대로 전해라.》

기꾸찌들이 떠나간 다음 하시모도는 혼자 방안을 거닐었다. 데라시마나 혼마가 다소나마 전투를 성실히 하고 모리공작반이라는것이 여기 나와 반년이상을 돌아치면서 무엇인가 해놓은것이 있다면 조선의 빨찌산들이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을뿐아니라 관동군의 선발된 련대와 려단들보다 체력이나 사기에 있어서 훨씬 더 우월할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어디서 식량을 구하며 어디서 군복을 구하는가? 식량이 전혀 공급되지 않는다는것은 사실인듯하다. 모리는 자기 책임이 있는것만큼 이 문제에 대해 무던히 꼼꼼하게 자료를 만들어 올려보냈다. 지어 빨찌산이 낟알을 전혀 못먹고있다는것을 그들의 숙영지에서 발견한 취사장과 변소의 자료를 가지고까지 증명하였다. 전사자들의 시신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아도 그것은 아마 사실인듯하다.

그렇다면 빨찌산들은 잘먹고 잘입은 일본군대도 걸어가지 못한다는 눈길을 몇달을 두고 내처 한모양으로 걸어가는 그 완강성을 어디서 길러냈단말인가. 작전이나 전술을 두고 말한다면 하시모도는 김일성장군의 전법이 신기할 정도로 오묘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기에 데라시마나 혼마가 비록 일본에서는 손꼽히는 지휘관들이지만 그들이 이 부면에서 무엇인가 할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번 7도구치기전투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그때는 독소금을 들여보내자는 계책이 하도 묘하게 느껴졌기때문에 그자신이 깊이 끌려들었고 큰 기대를 걸었던것이 사실이지만 역시 그 독소금때문에 타격을 입은것은 유격대가 아니라 서뿔리 접어든 제국군대였다. 지금도 하시모도는 김일성장군이 어떻게 그 사태를 수습했는지 알길이 없었다. 그러나 혼마가 쳐들어간것은 독소금을 먹고 늘어져 있는 유격대가 아니라 일본군대가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고있는 강화된 매복진이였다. 동서의 전쟁사를 적잖이 뒤적거린 하시모도지만 적의 2중3중의 계책을 다시 뒤집고 역리용하여 잡으러 오는 적을 오히려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김일성장군의 지략이나 작전지휘능력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수 없었다. 김일성장군과 같은 명장을 전략이나 전술로써 제압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있어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타산우에 선것이 하시모도의 이번 동기작전의 골자였다. 그는 개별적인 전투에서의 성과를 그닥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그대신 전면적으로 포위하고 전면적으로 봉쇄하여 빨찌산들로 하여금 자지도 먹지도 쉬지도 못하게 하여 스스로 쓰러져버리게 하자는것이였다. 이에 근거하여 수십만의 대부대를 동원시켜 실로 지난 세계대전때에도 볼수 없었던 광대한 전선을 설정하고 유격대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전선에서 벗어날수 없도록 사면팔방에 《토벌》무력을 배치하였으며 한편 잠시도 멈출수 없도록 이 광대한 작전구역을 끝까지 뒤를 물고 따라다니는 장거리추격부대를 배치하였다. 여기에는 군사력량뿐아니라 이 작전지역의 모든 권력기관들을 다 발동시켜 빨찌산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집단부락을 만들고 작통법과 련좌법을 강하게 집행시켰으며 도처에 밀정, 특무들을 박아넣어 《통비분자》들을 잡아내게 하였다.

실로 물샐틈없는 군사, 정치, 경제적인 대포위전이였다. 그 매고리가 큰 실수없이 죄여만진다면 빨찌산은 응당 지금쯤 적어도 절반이상은 죽어야 옳을것이다. 그것이 과학적이며 론리적인 결과일것이다. 그런데 하나하나 나타나는 사태는 계산과는 전혀 맞지 않는것들뿐이다. 이것이 무슨 조화인가? 복잡한 전술문제라면 혹 우연적인 요인도 작용하겠지만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명백한것이다. 어디서 계산이 빗나갈 구석이 전혀 없지 않는가. 호수의 물고기를 잡는데 낚시나 그물을 가지고 접어들었다면 혹 이러저러하게 새여버릴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곬에 그물을 쳐넣고 깡그리 물을 말리우는것과 같은것인데 실수가 있을수 없지 않는가. 이제 물은 거의다 쪄간다. 말하자면 물을 찌을수 있는 철―겨울도 한물이 지났다. 대소한이 지나고 벌써 이월에 접어들었으니 머지 않아 이 혹한의 숲속에도 봄이 돌아올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물을 퍼도 소용이 없다. 하늘은 푸는것보다 더 많은 물을 자꾸만 내려보낼것이다. 그런데 물이 다 졸아서 호수바닥이 드러날 지경이 되였는데도 고기는 보이지 않는다는것이다. 참으로 모를 일이다.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 김일성장군이 정말 축지법이라도 쓰는게 아닌가?

《아니다!》

하고 하시모도는 고개를 내저었다.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비록 유격대에 어느정도 비상한것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뛰여넘을수는 없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는 이미 과학이 해명한바이다. 우리의 전략이 최대오차를 두고 타산한것인 이상 동요할 필요는 결코 없다. 그렇다! 결국 그들도 인간일것이다.》

그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이미 필요이상 조치를 취했다고 보았다. 이제 더 할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들을 철저히 사상적으로 봉쇄하고 인민들과의 련계를 끊어버리는것이다. 이것은 그들자신이 말하고있는바이다.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듯이 유격대는 인민을 떠나서 살수 없다.》고…

그리하여 하시모도는 부랴부랴 6도구거리로 달려나갔다. 《서륭태》라는 큰 포목상의 안채에 모리중좌의 사무실이 나가있었다.

그는 서둘러뛰여나오기는 하였으나 특별히 이렇다할 구상이 있는것은 아니였다. 그저 초조하고 안타깝고 불안한 생각에 내몰리여 찬바람 회오리치는 거리로 달려나온것이였다.

휙 하고 볼을 쳐갈기는 눈바람에 얻어맞자 숨이 딱 막히였다. 하시모도는 몽유병자처럼 비틀거리며 군대들이 붐비는 거리를 맹목적으로 걸어갔다.

머리속에서 무엇인가 웅웅한다. 잡힐듯잡힐듯하면서도 꼭 쥐여지지 않는 그 어떤 령감같은것이 머리속을 온통 휘저어놓으면서 오히려 뒤죽박죽을 만들어놓았다.

조선인민혁명군을 소멸하는데는 물을 찌워서 고기를 잡듯이… 그것도 아니다. 무엇인가 혼돈속에서 번쩍거리는것이 있다. 번쩍하고 뒤죽박죽이 된 사색의 저 밑바탕에서 무엇인가 둔한 빛을 뿌린다. 그것이 무엇인가, 어쨌든 군대를 무한정 풀어헤치고 탄압을 강화하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거야 이미 해본 놀음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거리에 밀려다니는 졸병들과 누데기를 걸친 사민들은 번쩍거리는 장령견장을 단 사나이가 무엇을 홀로 중얼거리며 미친듯이 걸어가는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눈이 휘둥그래서 경례를 붙이는 그것들의 놀란 화상들이 하시모도에게는 마치 어느 음침한 가게방에 진렬된 오지병사리나 튀겨놓은 돼지며 오리따위로 보이였다.

그가 《서륭태》의 공작반 사무실에 불쑥 들어서니 모리 역시 머리를 움켜쥐고 무테안경너머로 한곳을 멍하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전화통이며 꽁초가 수북한 재털이, 쓰다가 쥐여뿌린 색연필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책상우에는 한자루의 목갑총이 놓여있었다.

《무엇을 하는가?》

하시모도는 방심한 모리를 보자 제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쳤다.

《옛!》

모리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찬찬히 쏘아보는 하시모도의 눈길을 바라보더니 무엇인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것처럼 외면하였다.

《무엇을 하는가말이다?》

하시모도는 재차 소리쳤다.

《예, 실은 이 권총이 하도 신기해서…》

하고 모리는 눈길로 책상우의 목갑총을 가리켰다.

《그게 뭔가?》

《며칠전 무송방향에서 무다구찌소장이 보내온것입니다. 한 산림대를 포위하여 소멸했는데 그중 한놈이 이 권총을 차고있었답니다.》

모리는 괴로운 고백이라도 하듯이 얼굴이 해쓱해지면서 힘들게 말하였다.

《그런데?》

하시모도는 모리의 허둥거리는 눈길을 쏘아보며 손을 뻗쳐 목갑총을 집었다. 집어봐야 특별한 구석은 별로 엿보이지 않는 보통 모제르권총이였다.

《거기에 김일성장군의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

모리는 외면하며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뭐, 김일성장군의 이름?》

하시모도는 기계적으로 받아외우다가 잠시후에야 그 말뜻을 감각적으로 깨닫고 목갑속에서 권총을 꺼냈다. 손잡이끝에 붉은 천이 매달려있는 그 권총은 꽤 잘 건사한 괜찮은 물건이라는것이 한눈에 알려졌다. 그러나 세상에 이름난 명장이나 사령관의 권총이라고 볼만 한 구석은 따로 없었다.

《어떻게 된건가?》

하시모도는 권총손잡이 한끝에 정성스럽게 새겨진 김일성이라는 세 글자를 손바닥으로 비벼보며 신경질적으로 다우쳤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김일성장군의 명성에 매혹된자가 자기 무기를 장식하기 위하여 새겨넣은것 같습니다.》

모리는 무엇때문엔지 몹시 갑자르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여 이마에 내밴 가는 땀방울을 훔쳤다.

《흠―》

하시모도는 무슨 꿍꿍이가 깃들어있는것이 분명한 모리의 얼굴과 권총을 번갈아보며 신음소리를 내였다. 또다시 머리속이 응응한다. 거리를 달려올 때 머리속에 소용돌이치던 이상한 빛이 다시금 섬광을 뿜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혼돈속에서지만 더 좀 형체가 뚜렷한 하나의 생각이 구체화되는것을 느꼈다.

《그래 자네는 무슨 궁리를 하고있는가?》

잠시후 하시모도는 이미 침착성을 회복하고 그 랭철한 본래의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생각하게 여유를 주십시오.》

모리는 쓰러지듯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두손바닥으로 이마를 싸쥐였다.

《흥, 자네의 생각은 명백한거야.》

하고 하시모도는 차겁게 내뱉으며 방안을 뚜벅뚜벅 거닐었다.

《말하자면 이 권총을 리용하여 김일성장군의 사령부가 이미 없다는 연극을 만들어내자는것이지?》

《예?》

모리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흠, 이 세상에 생각하는것은 모리 이사무중좌만이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하여튼 이 문제는 연구해볼 가치는 있는거야. 단지 그 효과가 얼마나 가겠는가 하는것이지. 김일성장군이 지금처럼 계속 산으로 들어가있는 조건에서는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김일성장군에게서 떼여낼수 있다고 봐야 할거야. 그러나 만약에 그 허위가 드러나는 날에는 그에 대한 반발이 더 커질수 있다는것을 마땅히 고려해야 한단말이야. 더구나 우리는 이미 재작년 여름에 이러한 연극을 꾸민바 있지. 그때도 반발이 더 컸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허지만 각하, 그 반발이 있기전에 우리의 이번 작전은 모두 끝나야 하지 않을가요? 1937년의 그 계책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또 좀 서툴었지요.》

모리는 아까의 동요하던 태도는 어느새 싹 씻어버리고 열정적으로 자기 주장을 엮어댔다.

《우리의 군사작전이나 선무공작이 이처럼 공을 이루기 힘드는것은 전적으로 김일성장군의 명성때문입니다. 그러니만큼 김일성장군에 대한 기대를 무자비하게 잘라버리면 그것은 마치 외로운 성에 포위된 군사에게 원군이 올 길을 끊어버리는것과 같이 될것입니다.》

《하여간 좋아, 나도 생각해보겠지만 이에 대한 전면적인 계획을 세워보게.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나와 단 둘이서 다시 의논해보잔말야. 성공여부는 어떻든 이러한 계책을 궁리했다는것은 모리군이 앞으로 이 부면의 사업에서 더 많은 일을 할수 있음을 시사해준다고 나는 보네.》

하시모도는 이쯤 모리를 칭찬해주고나서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올때와는 달리 매우 뚜렷하고 확고하고 구체적인 생각이 머리속에 무르익어갔다. 그에 따라 기분은 더없이 쇄락해졌다.

 

8

 

련대는 폭풍과 같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압록강연안의 밀림과 부락과 포대들을 치고 헤치며 달려갔다. 간편한 행장에 왕성한 사기에 게다가 강철룡, 장경수, 최병규 같은 명사수들까지 보강하여 천하에 거칠것이 없었다. 더구나 사령관동지께서 몸소 총을 잡으시고 위기에 처한 저들의 목숨을 구해내셨다는것을 아는 모든 전사들은 사령부로 쏠리는 적의 압력을 저희들이 달고 감으로써 사령관동지를 보위한다는 높은 자각과 긍지로 하여 세상에 무서울것이 없었다. 사령부로 가장하고 떠난 길이지만 실지 사령부는 아니였다. 그러니 행동하기가 여간 편한것이 아니다. 그저 적을 치고 달리고 또 치고 달리면 되는것이다. 조심할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대원과 나어린 대원들까지 모두 사령관동지께서 맡아안으셨으니 부대에는 펄펄나는 전사들뿐이라 오중흡은 때로 하루에 100여리식 내달리기도 하였다.

무릎까지 치는 눈을 헤치며 이렇게 내달리는것이 말과 같이 쉬울수는 없다. 더구나 혁명군 전사들은 남패자를 떠난 이후 여태 단 하루도 편안히 쉬여본적이라군 없었고 내내 식량곤난을 겪었으며 옷도 다 해여지고 신발도 판이 날대로 나버렸다. 그러나 이 강행군을 그중 견디기 힘들어하는것은 적들, 구체적으로는 오중흡련대를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로만 알고 죽을 기를 써서 뒤쫓아오는 혼마려단의 장병들이였다. 그놈들도 처음에는 부지런히 따라왔고 하루에도 몇번씩 후위에 접어들어 불질을 하군하였다. 그러나 부후물치기를 썩 벗어나서 북대정자어방에 이르자 차츰차츰 걸음발이 떠져서 늑장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강동무, 이거 어떻게 된 모양이요?》

오중흡은 행군대오를 멈추어세워놓고 후위의 소식을 기다리다 못해 강철룡에게 물었다.

《뭐, 따라오겠지오다. 이런 눈구뎅이를 헤치며 오는게 그리 쉬울것 같소다?》

강철룡은 담배 한대를 큼직이 말아물고 시들하게 대답하였다.

《아니 그놈들이야 우리가 내놓은 길을 따라오는건데 우리보다 더 힘든단말이요? 게다가 그놈들이야 말파리로 쌀을 날라다먹이며 행군을 시키니 우리 동무들처럼 맥이 빠질것도 없지 않소.》

《참 련대장동무도.》

오중흡의 말투가 날카로와지자 강철룡은 어이가 없다는듯 멍하니 바라보더니 허구프게 웃었다.

《그렇다면 나를 그놈들한테 무슨 정치위원 같은걸로 파견한다든지 하오다. 그놈들이 못따라오는거야 내 어떻게 책임지라오.》

《강동무, 이게 무슨 롱담인가 하지 마오. 그놈들이 이렇게 굼떠진게 다 원인이 있단말이요. 안되겠소. 강동무가 누구 좀 데리고 가서 그놈들 정신이 번쩍 들게 좀 답새기구 오오. 그놈들이 빨리 따라와야지 아직도 사령부가 활동해야 할 어방에서 우물거린다는것은 좋지 않단말이요.》

《나 참― 그렇다면 좀 답새기구 와야지요.》

강철룡은 모처럼 말아문 담배를 절반도 못태우고 일어났다. 그는 담배불을 비벼끄자 절도있게 바로서서 보고를 하였다.

《련대장동지, 소대장 강철룡은 적들을 답새겨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놓고 오겠습니다.》

《좋소. 정신이 번쩍 들게 할뿐아니라 바싹 우리를 따라오게 해야 한단말이요. 알겠소?》

《알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해서 우리를 바싹 따라오게 하겠습니다.》

《좋소. 좋소. 어서 가보오.》

강철룡이 사라지자 오중흡은 또 뒤짐을 짚고 눈우를 조급하게 오락가락하였다.

《이거 장경수는 왜 이렇게 굼뜬가? 하루에 300리씩 간다는 사람이…》

오중흡은 혼자 중얼거리며 떠나온 7도구치기 우중충한 밀림너머를 바라보았다.

사령부와 헤여진지 어느새 열흘이 되여온다. 오중흡은 궁금증에다 조급증까지 겹쳐 도무지 안절부절 못하였다. 적들이 부지런히 따라올 때는 모든게 다 마음이 놓이고 즐겁지만 이놈들이 늑장을 부릴 때면 행군이 헐해지고 몸이 편한 대신 마음은 걷잡을수 없이 불안해졌다. 지금쯤 사령부는 어디에 있을가? 사령관동지께서는 무사하실가? 혹시 저놈들이 무슨 눈치라도 채서 이렇게 따라오는데 열성이 적어진게 아닌가? 왜놈들이 이해겨울의 가장 큰 전략목표로 내세운것이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를 《토벌》하는것이라는데 이렇게 놀양으로 해서 김일성장군님의 사령부를 없앨수 있으리라고야 아무리 어리석은놈들이라도 생각할것 같지 않았다. 궁금증에 견딜수 없이 볶이여난 오중흡은 그저께 장경수를 불러 사령부로 보냈다. 사령부로 가되 그저 멀리서 사령관동지의 안부를 알아만 가지고 오라고 든든히 일렀다. 만일에 셈평좋은 친구가 또 덥적덥적 사령관동지를 찾아뵙게라도 되면 그이께 또 어떤 새로운 심려를 끼쳐드릴지 모른다. 잘못하다가는 장경수우에다 또 한태혁이나 강봉수까지도 보내시려고 하실지 십상 모른다. 오중흡은 이렇게 생각하고 당부를 했는데 장경수가 또 너무 쉽게 말귀를 알아듣고 떠나자는바람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자기가 왜 사령관동지를 만나뵙지 말라고 하는가 하는데 대해 설명을 했더니 장경수가 섭섭하다고 한참 노여운 소리를 하였다.

《나도 사령관동지의 품속에서 이만큼 자란 사람입니다. 내 그만 한것도 모르고 여태 기관총을 메고 다닌줄 아십니까? 난 사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내가 련대장동지의 명령을 받았을 때 속으로 좀 기뻐한거야 사실이지요. 그야 터놓고 말해서 이 장경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령부에 가보고 오라는데 나빠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사령관동지를 또 찾아뵙고 무엇인가 타내여올가봐 걱정한다는것은 너무하단말이우다. 내가 그래서 좋아하는건 절대로 아니우다.》

오중흡은 또 장경수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노라고 한참 많은 말을 한후에 그를 부후물쪽으로 떠나보냈다. 그런데 여태 소식이 없는것이다.

하기는 아무리 장경수가 날고뛴대도 벌써 돌아올수는 없다. 부후물어방에서는 바싹 꼬리를 물고 늘어진 적들과 십여차례씩 전투를 하면서 눈속을 헤쳐오자니 하루에 40~50리 나가기도 힘들었지만 어제오늘은 근 100리씩 달렸다. 그러니 아무리 우불구불한 길이라도 부대가 열흘을 행군한 로정을 사흘동안에 갔다오라는것은 상대가 아무리 장경수라 할지라도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오중흡은 스스로 그런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자꾸 그쪽으로만 돌아가는것이였다.

얼마후 오중흡은 상철이대신 역시 경위중대에서 넘어온 믿음직한 전령병을 데리고 부대를 돌아보았다. 모두 나무밑에 모여앉아 쉬고있는데 아직 숙영할 시간은 못되였기때문에 전투준비를 갖춘채로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붙이고있다. 피곤과 허기가 력력히 어려있다. 얼굴들이 얼어서 꺼칠해지고 군복은 불성모양이 됐다. 그렇지만 어느새 발싸개만은 다 말려 신고 신들메도 든든히 하고있다. 다른것은 몰라도 발만은 어느때나 잘 건사해야 하는것이 유격대생활의 철칙이다.

《동무들, 자, 이렇게 앉아있을게 있소. 노래라도 부르잔말이요. 적들이 지쳐서 꼼짝 못하는것 같길래 내 강철룡동무를 그놈들 부르러 보냈소. 이제 그놈들이 끌려올게요. 그때까지 우리는 여기서 노래라도 부르기요.》

그러자 방금 나무밑에서 얼굴이 해쓱해 앉아있던 4중대 1소대의 선동원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이제 적들이 오겠군요? 그렇다면 노래를 불러야지요.》

그는 마치 여태 그것을 모르고있었기때문에 노래부를 생각을 못하기나 한것처럼 전사들앞에 나서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자, 내 한번 불러볼테니 섭섭잖게 박수들이나 치오.》

그러더니 그는 심중한 낯빛으로 다시한번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뽑아올렸다.

 

새세상 동터온다 어서 마중가

무산청년 우리모두 앞서나가자

 

오중흡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기웃했다. 괜찮은 노래였다. 목소리는 약간 갈렸지만 누가 청하기전에 제먼저 나설만큼 멋이 든 가락이였다.

한참 턱을 끄떡거리며 가락을 맞추던 중흡은 저도 모르는 사이 코소리로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산청년이니 무산청년답게

우리는 근로대중의 청년전위대

 

노래는 어느덧 합창으로 변하였다. 다른 나무밑에서도 전사들이 모여왔다. 노래판은 점점 커졌다. 《무산청년가》가 《반일전가》로 다시 《조국광복회10대강령가》로 변해가서 한창 손벽장단을 치며 노래판이 고조되여갈 때 봉우리 하나 넘어 서쪽에서 총소리가 울리여왔다. 강철룡네 습격조가 주저앉은 적을 치는것이였다. 그래도 노래는 그칠줄 모르고 더욱 고조되였다.

이윽고 강철룡이 돌아왔다. 그는 주저앉은 적을 겨우 두들겨깨워서 달고 왔으나 불과 10리도 전진하지 못해서 날이 저물어 다시 행군을 멈추지 않을수 없었다.

오중흡은 부대를 숙영시키고나서 또 불안한 생각에 잠겼다. 적들은 왜 저렇게도 빨리 지쳐버렸는가? 아무리 제국주의군대라고 해서 상부의 명령을 집행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일수야 없지 않는가. 이런 의문은 련대장 오중흡이뿐아니라 련대의 모든 전사들이 다 느끼고있는 의문이였다. 적들보다 몇십배 간고한 조건에서 행군하고있는 그들로서는 설마 적들이 벌써 지쳐버려서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이것이 사령부의 안녕에 대한 심려와 겹쳐 여러가지 불안스런 억측들을 빚어내게 하였다. 이 억측들은 그날밤에 장경수가 돌아오는바람에 깨끗이 해명되였다.

사실 오중흡은 장경수를 목마르게 기다렸지만 정작 그가 우등불앞에 나타났을 때 너무나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왜 되돌아왔소?》

그는 어망결에 이렇게 물었다.

《되돌아오다니요 련대장동지, 명령대로 사령부의 이동정형을 알아보고 왔습니다.》

《아니, 그럼 사령부까지 갔다왔단말이요?》

오중흡은 달구지저고리를 입은 장경수의 널직한 어깨를 덥석 그러안고 볼을 비볐다.

《고맙소. 수고했소. 그래 사령관동지께서는 안녕하십니까?》

《그럼요. 북덕령에서 부후물로 옮기셨습니다. 얼마전에 부후물에서 큰 전투가 있은 모양인데.》

《아니 그건 또 어떻게 된거요. 사령부에서 또 큰 전투를 치른 모양이요?》

오중흡은 밝아졌던 얼굴에 다시금 그늘을 지으면서 다우쳐물었다.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가 7도구에서 놈들이 짐바리를 끌고 부후물치기까지 갔다왔다는 사람을 붙잡고 꼼꼼히 따져보니 아마 그놈들의 한패가 사령부 발자국을 발견하고 뒤를 따른 모양입니다.》

《저런! 그래서 어떻게 됐다오?》

《그런데 그만 사령관동지의 기묘한 수에 걸려든것 같수다. 그놈들은 멋도 모르고 발자국만 부지런히 따라갔다지요. 그런데 웬 영문인지 따라가다보니까 아까 돌아갔던 그자리로 되돌아갔다는겁니다. 아무리 살펴봐야 딴 길로 갈라진데는 없고… 그래서 지휘관놈이 빨리 따르라고 내몰았답니다. 그런데 얼마를 못가서 한 대렬이 마주오더라지요. 그래 덮어놓고 답새겼는데 그때는 이미 날이 어슬어슬 저물어갈 때라 상대를 똑똑히 알아보지도 못했다거던요. 근 한시간이상을 불질하다가 상대가 어지간히 기가 죽은것을 보고 돌격으로 넘어가서 보니까 그게 다 제편이더랍니다. 아무튼 수태 죽은 모양이우다.》

장경수가 목도리를 끌러 한옆에 놓고 갈증을 덜기 위하여 더운물을 따라 마실 때까지도 오중흡은 입을 벌리지 못하였다.

너무나 감격하고 너무나 행복해서였다.

《그러니 사령관동지께서는.》

하고 오중흡은 자기도 장경수처럼 시원하게 물을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부럽게 생각하며 목이 타드는 소리로 속삭였다.

《총 한방 쏘시지 않고 적들을 그렇게 잡으신셈이군. 참 어떻게 하면 그런 묘한 수를 생각해내실수가 있을가.》

오중흡은 장경수가 내놓은 물잔에 눈을 녹여 끓인 물을 따르며 꿈꾸듯이 황홀해서 중얼거렸다.

《그러니 인민들이 모두 축지법이다 하고 소문을 낼밖에, 허허허… 그래 장군님 모습을 뵈옵기는 했소?》

오중흡은 물잔너머로 넌지시 장경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떠나보낼 때 자기가 한 말이 있기때문에 선뜻 물어보기가 저어되였던것이다. 장경수 역시 그런것을 눈치채고 우물쭈물 갑자르더니 여전히 조심을 두어가며 말하였다.

《사실 이런 임무는 누구나 해내기는 어려운거우다.》

《글쎄 누가 그렇지 않다오. 여북하면 사령관동지께서 동무를 우리 련대에 보내주셨겠소.》

오중흡은 장경수에게서 진속을 뽑아내기 위하여 슬쩍 올려추었다.

《내가 뭐 그런 소리나 듣자고 하는 말인줄 아십니까? 그래서 힘든다는게 아니라 사령부를 눈앞에 두고…》

《음―알겠소.》

오중흡은 신음소리처럼 한마디 중얼거리고는 우등불주위를 거닐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제 듣고보니 자기가 얼마나 힘든 과업을 주었는가 하는것이 알려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인정없는 명령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사령관동지께서 우리들때문에 더 심려를 하시고 무엇인가 또 보태주시지 못해 애를 쓰실것이 틀림없는데야…

《사령관동지께서는.》

장경수는 잠시 입을 다물고있더니 고개를 떨구고 천천히 말하였다.

《건강하십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식사를 여러끼 건늬신것 같습니다.》

《그래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누구한테 물어보았소?》

장경수는 오중흡을 피뜩 마주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물어보기는 누구한테 물어본단말입니까? 나혼자 그렇게 생각했지요. 사령관동지께서는 전령병들을 다 어디로 보내시고 홀로 숲속을 거니시였습니다. 그다음 지도를 펼치시고 지형을 살펴보셨습니다.》

《그래서?》

《사령관동지의 안색은 대원들앞에 계실 때하구는 어딘가 달라보였습니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먼눈에도 뚜렷이 알려졌수다.》

장경수의 말을 듣는 우등불가의 분위기는 삽시에 물을 뿌린듯 가라앉았다. 모두 숨소리조차 죽여버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동쪽을 오래오래 바라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련대가 떠나온 그 방향이였습니다.》

《사령관동지!》

오중흡은 저도모르게 눈굽을 적시며 조용히 입안으로 불렀다.

다른 지휘관들도 모두 울먹울먹해서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 그렇게 서계시더니.》

장경수는 말을 잇다가 다시 답답해난듯 숨을 톺고나서 겨우 뜨직뜨직 이었다.

《돌아서시였습니다. 대원들이 있는곳으로 가시다가 눈을 움켜자셨습니다. 아마 갈증이…》

모두 가슴을 에이는듯 한 생각에 점점 고개를 깊이 수그렸다. 우등불만이 탁탁 기세좋게 타올랐다.

장경수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털썩 우등불앞에 주저앉아버리였다.

지휘관들은 모두 등을 돌려대고 앉거나 서서 먼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높이 개인 밤하늘에 차겁게 얼어붙은 별들이 반짝이고있었다.

이튿날 새벽 오중흡은 중대규모의 큰 습격조를 짰다. 그때는 벌써 동이 훤히 터오는 때라 습격을 나가기는 지내 늦은 때였다. 그러나 어제는 아직 해가 남아있는 저녁켠에 습격을 들이대기도 했으니 혹 그럴수도 있지 않을가 하고들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기웃거려졌다. 사실 어제저녁켠은 그놈들이 하루종일 진행된 전투와 행군에 지쳐 퍼더앉아있을 때였다. 그런데 아침이면 그놈들도 생기가 돌아서 팔팔할 때이다. 거기에 몇사람의 습격조가 가는것도 아니고 한개 중대씩이나 달려든다면 그건 본격적인 전투로 번지기가 쉬울것이였다. 그래도 사령부를 보위하기 위하여 필요한 전투라면 이것저것 캐고 따질 생각을 하지 않는 지휘관들이였다. 게다가 련대장 오중흡이 밤새도록 우등불가에서 뜬눈으로 밝히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것을 모두 보고 들어서 알고있었다. 그래 구체적인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있는데 오중흡은 그 습격전을 자기가 직접 지휘하겠다고 나서는것이였다. 그제야 지휘관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4중대장이 일어나 심중한 낯빛으로 말하였다.

《련대장동무가 우리 하는 일이 시원치 않아뵈여서 그러는것 같은데 이번에는 꼭 잘해보겠습니다. 련대장동무가 습격조까지 직접 지휘할거야 없지 않습니까? 제 잘해보겠습니다.》

강철룡이도 일어났다.

《타격을 좀 세게 줄 필요가 있다면 우리 기관총수들을 더 보내주시우다. 련대장동무야 사령부보위를 위해서 더 크고 중한 책임이 있지 않소다?》

그러나 오중흡은 손을 저으며 지휘관들을 제지시켰다. 그리고는 확고한 결심이 느껴지는 조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였다.

《내 동무들의 전투하는 본때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게 아니요. 그게야 어디 그럴수가 있소? 그런게 아니라 내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놈들이 우리를 좀 의심하는 눈치가 아무래도 느껴진단말이요. 그야 그럴수밖에 있소. 우리가 아무리 잘 싸우니 사령관동지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전투같이 묘하고 깨끗할수야 있는가말이요? 어제 부후물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지? 그런판에 걸려든 적들이라면 그게 규모가 크든 작든 이건 김일성장군이다 하는것을 제꺽 눈치챈단말이요. 그런데 우리야 그런 묘수를 쓸 방법이 있소. 그러니까 다른 수라도 써보자는거요. 적들가운데는 나를 아는놈들이 더러 있을거요. 그래 내 일부러 그놈들앞에 나가보자는거요. 오중흡이 습격전투에 나타났다, 그렇게 되면 이건 김일성사령부가 틀림없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할게 아니요. 그래서 일부러 훤한 새벽에 련대장이 지휘하는 습격전투답게 좀 큼직하게 습격을 해보자는거요. 적을 많이 잡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저놈들에게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받고 련대장이 습격전투에 나왔더라는 인식은 꼭 주어야 한단말이요. 이제 보오, 꼭 효과가 있을거요.》

오중흡의 설명을 듣자 지휘관들은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령부를 호위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일부러 적의 면전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겠다는 그 결심을 누가 꺾을수도 없는것이고 꺾이지도 않을것이며 또 꺾어서는 안될것이였다. 게다가 적들이 오중흡을 잘 안다는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조선인민혁명군의 가장 믿음직한 지휘관가운데 한사람인 그를 잡기 위하여 사진을 내돌리고 현상까지 건 적들이다.

지휘관들은 련대장의 결심이 정당하고 확고부동하다는것을 느끼자 모두 그 습격전투에 함께 나가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오중흡은 이미 조직한대로 1중대만 데리고 떠나기로 선포하고 해당한 명령을 떨구었다.

습격전투는 이른아침에 진행되였다. 일부러 드러내자는 전투라 특별히 롱간을 부릴것도 없었다. 기관총수들을 앞세우고 맞바로 적숙영지로 쳐들어가니 한창 행군준비를 갖추느라 분주히 돌아치던 적들이 깜짝 놀라 처음 한동안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였다.

오중흡은 공격명령을 내리는동시에 적지휘부라고 짐작되는 한가운데 천막쪽을 향하여 내달리며 권총을 갈겼다.

다른 천막들은 거지반 철수되였거나 한창 거두는판인데 유독 홀로 남아있는것으로 보아 지휘부가 틀림없었다.

1중대, 적 지휘부를 쳐라! 기관총은 우측의 적을 갈겨라! 련대 돌격 앞으로!》

오중흡은 사자와 같이 펄펄 뛰며 적진 한복판으로 뛰여들었다.

적들은 한동안 갈팡질팡하다가 습격조가 숙영지 한복판을 짓이겨 놓고 사라진 다음에야 가까스로 전렬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당장 추격할념은 내지 못했다.

오중흡의 타산은 들어맞은듯하였다. 아침나절 아무리 돌아보아야 감감 반응이 없던 적들이 점심때쯤 되자 바싹 뒤를 조이고 들었다. 그때부터 적들은 부지런히 후위에 접어들었고 싸움은 날을 따라 치렬해졌다. 그것은 오중흡의 행복이였다. 그러나 그 행복을 위하여 오중흡련대는 새하얀 눈벌우에 피로 발자국을 새기며 한걸음한걸음 낯익은 곰의 자리 옛 밀영지 방향으로 다가가고있었다.

 

9

 

기꾸찌는 하루동안의 휴가를 뜻깊게 보내기 위하여 돈을 아끼지 않았다. 숲속에 들어간 이래 두달동안의 밀린 봉급과 아버지에게서 보내온 적지 않은 돈을 처넣어 6도구같은 촌거리치고는 꽤 때를 벗은 《강상월》이라는 료리점을 하루밤 도거리로 떼내였다. 마침 6도구부근에 대부대가 머물러있는 때라 괄세 못할 손님들이 무시로 찾아드는만큼 주인놈은 여간해서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곤도가 새 군도를 뽑을 차비까지 하며 울러멨지만 주인놈은 믿는 구석이 든든히 있는지 눈섭도 까딱하지 않았다. 기꾸찌가 시퍼런 새 지페뭉치 세개를 련달아 꺼내서 주인놈의 상판을 후려치자 그놈은 별안간에 명주고름처럼 나긋나긋해져서 돼지같은 화상에 매우 순진해보이는 웃음까지 짓는것이였다.

다음부터 주인놈은 몇십근 잘 나갈것 같은 엉뎅이를 갑삭갑삭 까불면서 빈지를 쳐닫는다, 앞치마를 주무르며 음식쟁반을 손수 날라들인다, 계집애들을 호령해서 한방 끌어들인다 하고 마치 종놈처럼 시중을 들었다.

《흥, 세상에 기꾸찌백작을 못알아보는놈도 있다니까―쳇, 건방진 자식들!》

술이 몇순배 돌아가자 곤도는 연신 딸꾹질을 해가며 은근히 하시모도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는 벌써 사단에 올라오자마자 숲속생활에서는 미처 몰랐던 기꾸찌의 어마어마한 배경이 가지는 위력을 느꼈지만 특히 오늘 《강상월》같은 큰 료리점을 통채로 깔고앉은 기꾸찌의 배심에 탄복해버렸던것이다. 그런 기꾸찌도 감히 머리를 못쳐들던 하시모도란 존재가 얼근히 취한 곤도에게는 이상야릇하게 생각되였고 맞가짢게 느껴졌다.

《일이 있나, 그까짓것들이 구들우에서 뻐기겠으면 실컷 뻐개보라지. 제국의 운명은 어쨌든 구들우에서가 아니라 저기 저 눈덮인 밀림에서 결정될테니까… 오이, 꾸냥! 노래나 한마디 하라구. 눈물겨운것말이다. 눈물나는 노래가 듣고싶단말이다.》

기꾸찌는 그닥 많지 못한 주량에 처음부터 호걸티를 내노라고 지나치게 큰 잔으로 들이대서 벌써 메슥메슥해오는 속을 억지로 누르며 눈을 비수처럼 까부장해가지고 소리쳤다. 한방 모여든 《강상월》의 촌뜨기 기생들이 얼룩덜룩한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호궁을 타고 쟁을 치며 비린청으로 중국노래를 불렀으나 초조감만 보태주었지 눈물도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원체 녀자들은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이 사나이들이 무서워서 마치 독사앞에 나선 새새끼들처럼 오돌오돌 떨고있는 형편이라 눅거리 잡가나마 제대로 번질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래도 기무라란놈은 좋다고 입을 헤벌리고있더니 옆에 앉은 까칠한 계집년을 안고 술을 먹이겠다고 야단을 치며 돌아갔다. 원래 아끼다의 산골에서 왔다는 이 촌놈은 어찌다 장교로 제발된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소위가 무슨 대신이나 되는듯이 별안간 점잔을 빼며 돌아가던놈인데 술자리에 앉자 촌놈본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술은 퍼먹을수록 속만 달이게 하였지 덜미를 잡아누르는듯 한 알수 없는 불안을 잠재워주지 않았다. 무의미한 생의 발버둥질을 합리화하는데는 술도 맥을 못추는듯 하였다.

《에이, 더럽다, 더러워. 내 진짜 미인을 보여주지. 미인이 어떤것인지 너희들은 모를것이다. 오이, 주인놈은 어디 있느냐? 주인놈을 불러라.》

기꾸찌는 별안간 술잔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주인놈은 누가 찾으러 가기전에 제꺽 떡반죽같은 얼굴에 조그만 입을 헤벌리고 나타났다.

《상관님, 부르셨습니까?》

《오, 불렀다. 너 이제 제꺽 〈압강객잔〉에 가서 진백란을 불러오너라. 이 기꾸찌 고사부로가 부른다고 말하고 데려오너라.》

《진백란이라니? 저 신경에서 온 유명한 가수말씀입니까?》

주인은 놀라서 입을 하 벌리고 물었다. 놀란것은 주인뿐아니였다. 누렇게 뜬 얼굴에 진 화장을 하고 억지로 웃으며 노래하던 촌기생들도, 혀가 꼬부라져가지고 연신 무엇인가 처먹고 지껄이기에 여념이 없던 신출내기 두 장교놈도 모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왜 보느냐? 흥, 진백란이가 무슨 공주인줄 아느냐? 되지 못한것들! 백작댁 도련님도 토벌대에서 뒹굴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인데 제까짓 한개 류행가수가 뭐란말이냐? 불러왓!》

《허지만 덮어놓고 오라면…》

그렇게 고분고분하던 료리점주인놈도 이 분부만은 어떻게 하기 어렵다는듯이 손을 내밀고 바라보았다. 기꾸찌는 약이 올라서 벗어붙였던 저고리를 말코지에서 벗겨들고 소리쳤다.

《왜 못가겠단말이냐? 이 기꾸찌가 그까짓 계집년 하나 부를 처지가 못돼봬서 그러느냐 좋다! 그럼 이 편지를 가지고 가서 덮어놓고 그 녀자에게 전해라! 그대신 올 때는 네놈이 업고와야 한다.》

얼마후 주인놈은 기꾸찌가 명함 뒤등에 갈겨쓴 글쪽지를 들고 고개를 기웃거리며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압강객잔》으로 갔다.

이 조그마한 사건은 광기가 넘치던 방안에 이상한 진정작용을 놀았다. 게걸스럽게 무엇을 처먹으며 옆에 오는 계집년마다 끌어안자고들던 기무라도, 연신 누군가를 윽벼르며 술잔을 기울이던 곤도도 그리고 한방 둘러앉은 기생들도 모두 기꾸찌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며 목소리를 크게 내기를 두려워하였다. 기꾸찌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자기 주위에서 무엇이든지 설설 기게 만들고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아끼고싶지 않았다. 이제 보면 그의 인생이라는것은 이미 목적을 상실한 뜻없는 달음박질에 지나지 않았다. 세상사람들을 놀래울만 한 공훈을 숲속에서 절대로 찾아내지 못할것은 말할것 없고 이제는 물러나고싶어도 물러날수 없는 그 구렁텅이에 자기 청춘과 영예를 다 제물로 바치게 됐다는것을 깨닫게 된 이 마당에서는 차라리 발악이라도 해볼판이다. ―이러한 배심으로 앉아있는 기꾸찌였으나 한편에서는 자기의 영예와 가치를 한꺼번에 달아보는듯 한 아슬아슬한 긴장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과연 그 녀자가 와줄가? 자기의 무례한 행동을 그 녀자가 받아줄가? 신경에서 처녀공연을 할 때와는 불과 두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두달사이에 피차의 처지는 너무나 달라졌다. 자기를 이제는 아무도 기꾸찌대장의 아들인 전도유망한 청년장교로 알아주지 않는 대신 그 녀자는 세상에 이름이 뜨르르하게 났다. 하시모도의 표변한 태도로 미루어볼 때 그 녀자가 코웃음을 탁 치고 심부름군을 돌려보낼수도 충분히 있는것이다. 지금의 형편에서는 그것이 제일 있음직한 경우였다. 거절을 하는 경우에도 그 녀자가 듣기 좋은 구실이라도 그럴듯하게 만들어보냈으면 작히나 좋을가, 기꾸찌는 속으로 이런 생각까지 해보았다. 틀림없이 하시모도와 모리의 비호를 받고있을 그 녀자가 무엇이 안타까와 《토벌대》의 한개 하급장교에게 호의를 보일것인가…

그런데 얼마 못있어 현관에서 인력거를 멈추어세우는 주인놈의 호기있는 목소리가 울리더니 귀익은 이찌가와 요시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이층에까지 울리여왔다.

기꾸찌는 감전된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순간 자존심이라는 커다란 무게에 눌리여 도로 주저앉았다. 이윽고 요시에가 화려한 육체를 흔들며 방안에 들어섰다.

《아이, 기꾸찌상, 정말 오래간만이예요.》

이렇게 수선을 떠는 요시에를 멍하니 바라보며 기꾸찌는 입안이 바짝 말라드는것을 느꼈다.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입안이 말라들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왁살스럽게 술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고나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요시에를 올려다보며 《앉으라구.》하고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엉거주춤 일어나서 이 귀한 손님을 맞이하였던 두 장교와 기생들이 비로소 활기를 띠고 저마다 자리를 마련한다, 목도리를 벗긴다 하며 무엇으로썬가 호의를 보이려고 애를 썼다. 요시에는 그사이 길이 잘 들어서 중국사람이 일본말을 하는지 일본사람이 중국말을 하는지 얼핏 분간하기 어려운 반반짜리 절충어를 능숙하게 재깔거리며 마치 제 집 아래목에나 온듯이 자연스럽게 굴었다.

요시에는 무엇이나 기꾸찌의 청을 다 들어주었다. 노래하라면 노래하고 술을 먹으라면 술을 먹고 춤을 추라면 춤을 추었다. 그리고 돌아갈 때 돈을 요구하였다. 그 녀자는 새날이 잡혀가는 그때 또 데라시마중장을 찾아가야 한다는것이였다.

기꾸찌는 주머니에 남아있던 마지막 돈뭉치를 선뜻 내주고 미련없이 그와 헤여졌다.

두달사이에 자기보다 훨씬 더 타락한 인간―신경의 처녀공연을 하던 날,《은영장》에서 하루밤을 같이 보냈을 때의 그 녀자를 아직 인간이였다고 할수 있다면 자기가 자존심있고 야심있는 한 청년장교로부터 이렇게 촌 료리집을 턱없이 큰 돈으로 하루밤 세내여 질탕치는것을 인생의 락으로 삼는 인간으로 변해버린 그사이에 그 녀자는 황금을 먹고 사는 하나의 고기점으로 변해버린것이였다. 요시에는 헤여질무렵에 하시모도를 원망하였다. 그가 일본으로 같이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해놓고 배신했다는것도 이야기하였다. 그 어조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하시모도의 품을 그리워하는 빛이 풍기고 있었다.

《더럽다! 에익―더럽다! 술이다. 술이나 먹자. 그리고 새벽에 우리는 숲으로 가자, 숲속에서 차라리 죽어버리는게 좋겠다.》

기꾸찌는 술상을 탕탕 치며 목메여 부르짖었다.

 

10

 

작년 섣달에 새로 영업허가를 얻어 간판을 내건 《취락정》에 련사흘째 왜놈장교들과 분서장, 자위단장 같은 이를테면 《유력자》들이 모여들어 술판을 벌리였다. 아래마을 샘골의 수비대병영에서도 왜놈군대들이 술을 처먹고 만세를 부르는가 하면 거리에 뛰쳐나와 주정을 하였다.

구가점이나 백바위골같은 산골에 이러한 소문이 인차 퍼지지 않을수 없는데다 왜놈들은 특별히 감출것도 없다는듯 저희들이 김일성장군의 유격대를 다 《소멸》한 전공을 축하하여 경축연회를 한다고 떠들어댔다.

개같은놈들, 또 개수작한다고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소문이 처음 난것도 아니였다. 백바위골에서 구가점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갈림길가에 새로 구멍가게를 낸 장기덕이가 장사거래때문에 6도구에 드나들더니 거기서는 벌써 여러날전에 그런 술추렴을 더 크게 벌리고있더라는 소문을 가지고 왔다. 들리는 말에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는 이미 없고 김일성장군님께서 쓰시던 권총이 관동군 손에 들어왔다고도 하는데 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 하고 장기덕이 자신도 떨떠름한 소리를 했다. 그런데 며칠전에는 무송에서 친정나들이를 온 웬 아낙네가 바로 무송근방에서 그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아간다고 말하였다.

구가점 백바위골일대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조직원들도 모여앉으면 한숨만 내쉬였다. 결패가 사나운 철봉이 아버지 곽병철이는 그게 다 왜놈들이 꾸민 허튼 수작이 뻔한데 그따위 수작을 옮겨놓은 장기덕이란 인간이 오히려 수상하다고 이를 북북 갈았지만 뒤로뒤로 들려오는 흉한 소식에 압도되여 그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왜놈들이 《취락정》에서 경축연회를 벌리고있다는 정보를 다름아닌 그의 안해가 알아낸것이였다. 가난한 살림에 여덟형제를 기르는 그의 안해는 구가점까지 근 십리나 되는 길을 오가면서 《취락정》에서 허드레일을 거들어주고있었다.

진옥은 기가 막혔다. 이제 이 세상에 무엇을 더 믿을것이 있는가. 옥암동을 떠나 강을 건늘 때는 말할것 없고 우연히 허정학의 최후에 관련되여 한달나마 류치장살이를 하고 나온 다음에도 13도구 구룡리의 언덕우에서 허정학의 어머니와 함께 다진 맹세도 그것이였다. 김일성장군님의 유격대를 찾아가자,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이 원통하고 서러운 마음들을 다 풀수 있을것이다. 그리하여 허위단심 백바위골로 찾아왔다. 예견했던대로 5촌아저씨 류창표는 조직을 튼튼히 꾸리고있었으며 백바위골조직은 놈들의 살기띤 탄압속에서도 살아서 활발히 움직이고있었다.

유격대는 지난 여름 서쪽으로 나간 다음 소식이 끊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련계가 지어질것이다.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13도구경찰서에서 조회가 온 이야기도 하였다. 알고보니 역시 방아간집 주인으로서 이 일판 세력가들과 다 넓은 교제를 가지고있는 아저씨가 백바위골 분서장을 통해서 힘을 쓴 결과 그렇게 느닷없이 석방된것이였다. 옥암동에도 조회는 갔다. 그러나 혼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집에서 뛰쳐나왔다는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였기때문에 별로 문제될것이 없었다.

5촌아저씨네 집에서 진옥은 한동안 정신적안정을 얻었으며 고문에 치여났던 몸도 어느 정도 추섰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경찰분서로 호출을 당하였다. 13도구경찰서에서 가는곳마다 신고를 내라고 하였지만 이곳 경찰분서의 진가란 분서장놈은 아저씨의 술을 얻어처먹고 적잖게 술살이 오른놈이라 어느 술자리에서 아저씨가 그런 말을 비쳤더니 다 안다고 장담했다는것이였다.

그러던게 별안간 나오너라 들어가라 하고 시끄럽게 굴었다. 진가의 말인즉 수비대에 새로 온 가네꼬대위라는 대장놈이 여간 말째게 굴지 않는다는것이였다.

진옥은 하는수없이 경찰분서에 나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뚱뚱한 몸집에 무테안경을 낀 왜놈중좌와 맞다들렸다.

그날부터 진옥은 다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그자가 특별히 까다롭게 군것도 없고 오히려 시끄럽게 굴던 수비대장놈을 눌러놓았다는것도 후에 알게 되였지만 무테안경알속에서 넘겨다보던 뱀눈깔같은 눈을 잊을수 없었다.

그럴바에는 미리 몸을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작은 어머니는 걱정하였지만 진옥은 이곳을 떠날수 없었다. 아직 조직이 살아움직이고있는 이곳을 떠나서 달리 유격대와 련계를 지을 줄을 찾을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놈들이 유격대를 다 《소멸》했다고 떠벌이는것은 새삼스러운것도 아니였지만 이렇게 굉장히 연회판을 차려놓고 떠들어대는데다가 김일성장군님의 권총까지 나졌다니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들었다.

그렇다면 모든 희망은 다 깨여지고만것이다. 옥암동에 얼룩진 동지들의 피도, 허정학이며 수많은 동지들이 압록강에 실어보낸 피맺힌 기원도 다 헛된것이다. 구룡리언덕우에 성성한 백발을 날리며 그리도 꿋꿋하게 서있던 로부녀회원의 사무친 원한도, 어수선한 시절에 들국화처럼 자기 가슴에 수집게 피여난 꿈도 모두 헛되이 흘러가고 허망하게 짓밟혀버릴것이다.

진옥은 너무나 가슴이 답답하여 집을 나섰다. 작은 어머니는 저놈들이 눈을 까뒤집고 돌아가는데 나다니는것이 재미없다고 말렸지만 좁은 방안에서는 한숨에 짓눌리여 오히려 질거죽을것만 같았다. 방아간에 나가 무엇이든 일손을 잡고있으면 차라리 마음이 좀 안정될는지 모른다.

방아간은 동네를 벗어나서도 한참 골짜기로 들어가 외진 벼랑가에 있었다. 물방아라 물곬을 의지하자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진옥은 별로 급한 걸음도 아니기때문에 볼을 찌르고드는 추위도 못느끼고 천천히 얼어붙은 눈길을 걸어갔다.

바람은 별로 없는데 날씨는 몹시도 매웠다. 솜저고리, 솜바지에 검정토목치마를 입고 아저씨의 달구지저고리까지 껴입었지만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듯이 추위가 엄습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말초의 감각일뿐 그것때문에 고통스럽다는 생각은 없었다. 사실 지금 진옥에게는 그런 육체적인 고통이 지배할 마음의 어유가 한쪼박도 남아있지 않았다.

얼굴을 절반이나 휘감은 목도리에 허옇게 내불리는 성에를 무심히 내려다보니 문득 재빛 눈안개속에 어슴푸레 드러나는 산줄기와 밀림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저절로 눈길이 돌아갔다.

며칠전만 해도 저 허연 산발속에 김일성장군님께서 거느리시는 유격대가 붉은 기발을 휘날리며 싸우고있다는 생각으로 그리도 유정하게 바라보이던 산이였다. 그가운데 정지성이도 끼여있어 평소에 그리 든든하지 못했던 그가 어떻게 이 추위에 저 험한 산줄기를 타랴 하고 눈물이 그렁해서 바라보던 밀림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험하고 을씨년스럽고 매몰스럽게만 보이는 산이였다.

깡그리 얼어서 선채로 죽어버린듯 한 오리나무숲을 지나 앙상한 싸리밭모퉁이를 돌아가니 저만치 맥바위가 우뚝 솟아났다.

진옥의 걸음은 아주 멎어버리였다. 물소리가 높았다. 바닥까지 얼어붙은듯하던 개울이 백바위밑을 굽이돌아 세길나마 되는 시꺼먼 너럭바위로 허궁 뛰여내리는 폭포에 이르러서는 땅속을 누비고 스미면서 참고참아오던 울분을 터뜨리듯 소리소리 웨치고 길길이 치솟으며 흘러가는것이였다.

방아간은 그렇게 흘러내린 개울물이 크지 않은 소를 이루어 굽이 돌다가 다시 여울로 굴러떨어지는 바위벼랑옆에 있었다.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난 장수가 무디고 부러진 온갖 병장기들을 물가에 내던진듯 폭포와 소의 기슭에는 날이 선 얼음장들이 비죽비죽 돋아나있는데 백바위는 허리에 두손을 짚고 서서 다시 혈전이 벌어질 싸움터를 살펴보는 장수와 같이 만물이 숨죽인 백설의 강산에 우뚝 솟아있었다.

백바위는 말이 바위이지 실상 산턱이 깎이여 생긴 아찔하게 높이 솟은 낭떠러지였다. 그것을 백바위라고 부르는것은 여느 산처럼 황토나 보통바위가 드러나있는것이 아니라 시허연 바위가 드러나있기때문이였다.

동네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방아간에서도 두어마장 올라가야 하는 이 백바위에 이고장사람들의 눈길은 언제나 쏠리여있었다.

백바위는 이곳 혁명조직과 유격대를 련결하는 비밀련락장소였다. 백바위를 돌아가면 그뒤에 꽤 큰 바위 하나가 외따로 있었다. 그우에 때로 돌이 놓이군한다. 그것은 유격대공작원이 내려왔다는 신호였다. 그것을 보고 마을의 조국광복회에서 인차 련락원을 보내여 신호를 하면 백바위뒤에서 기다리고기다리던 유격대공작원이 미더운 모습을 나타내는것이였다. 지난 이태동안 그 바위우에 돌이 놓이고 그것을 신호로 하여 유격대와의 련계가 지어지고 이렇게 차례가 거듭되면서 백바위골의 혁명조직은 자라났으며 마을은 혁명화되여갔다. 백바위는 이 구석진 산골동네의 생활에서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게 되였으며 누구든지 일을 나갈 때나 들어올 때면 의례 한두번은 백바위어방을 살펴보게 되였다. 보천보전투에 대한 통쾌한 소식도 백바위밑에서 전달되였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를 비롯한 김일성장군님의 중요한 말씀이나 방침들도 이 백바위밑에서 넘겨받았다. 그리고 유격대원호물자를 진 조국광복회원들이 이 백바위밑에서 유격대원과 만나 산으로 들어갔으며 마을의 청년들이 유격대로 뽑혀간것도 이 백바위밑이였다. 조복순아주머니가 샘골의 포대문을 도끼로 까부시고 유격대를 이끌어들였다는 통쾌한 전투때도 유격대와 조직사이에 미리 이 백바위밑에서 련계가 취해졌다는것이다.

그렇게 생활이 넘치고 감격에 들끓던 백바위가 작년가을부터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속에 내버려진 존재처럼 우두커니 서있게 되였다.

영원히 입을 다물어버린듯 한 백바위는 형체가 우람찬 그만큼 더 서글퍼보였다.

진옥은 이곳 조직에 속하게 되면서 주로 백바위 련락장소를 감시하는 분공을 맏게 되였다. 여름철이라면 그 언저리에 밭뙈기들도 있고 또 나무들이 무성하여 누구나 자연스레 지나칠수 있는곳이지만 지금은 잡관목들이 다 헐벗어서 휑한데다 백바위방향으로 나들구실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었다.

진옥이가 방아간집식구니까 방아간에 일하러 나드는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데다 일단 방아간쪽으로 꺾어들기만 하면 아무 눈에도 띄우지 않고 백바위뒤까지 돌아갈수 있었다.

조직의 위임에 의하면 하루건너 한번씩 가보면 되였다. 그이상 자주 다니는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진옥이는 어떤 날은 세번씩 가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 봐야 휘몰아치는 바람, 태질하는 눈보라속에 휘말려든 바위정수리는 반반할뿐 아무런 색다른것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바람에 불리다 남은 눈뭉치가 마치 돌덩이처럼 얼어붙어서 그게 혹시 돌이나 아닌가싶어 바위꼭대기까지 올라가본적도 있었다. 얼어붙은 눈가루에 미끄러지면서 가까스로 기여올라간 바위우에서 한줌의 눈덩이를 움켜쥐고 눈물에 젖어 점도록 숲속을 바라보기도 한 진옥이였다.

오늘도 백바위는 말없이 서있고 신호돌은 보이지 않는다.

진옥은 고개를 팍 숙이고 시름없이 골짜기를 도로 내려왔다. 얼음에 덮여 번들거리는 너럭바위를 지나니 물방아가 저만치 바라보였다. 얼음기둥에 매달린듯 한 물방아의 나래는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을 수염처럼 날리면서 천천히 반원을 그었다. 아무리 빠른 개울이라 하지만 역시 겨울이라 물이 많지 못하였다. 그래서 방아도 힘이 부치여 연신 삐걱거리면서 힘겹게 돌아갔다. 방아가 힘들어하는 겨울일수록 일거리는 밀렸다.

새초이영을 두툼하게 올린 방아간앞에는 방금 소를 갖다맨듯 한 달구지 두채가 서있고 그옆에는 빈 말달구지가 뉘여있는데 소달구지는 당장 떠날 차비인듯 소가 멍에를 멘채 새김질을 하고있었다. 겨불연기가 피여오르는 함실아궁에서는 여물냄새와 겨 타는 구수한 냄새가 알싸하게 코를 찌른다.

방아간안을 기웃해보니 풍구앞에서 서너명의 농민들이 풍구질을 하고있고 한쪽에서는 쌀을 퍼담은 마대아구리를 마무리하고있다.

류창표아저씨는 풍구에서 까불려나오는 쌀을 되고있었다.

방아확에서는 누구의것인지 수수를 타개고있는데 돌보는 사람이 없고 몽땅 풍구곁에 모여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보매 이야기군은 서른안팎의 딴 동네사람인데 침발을 튕겨가며 덤벼치는 품이 몹시 흥분한듯하였다.

진옥이가 들어가니 한발로 마대를 누르고 서서 팔을 휘둘러대며 이야기를 섬기고있던 암팡지게 생긴 그 농민은 문득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없네. 이사람아, 저 처녀는 이 령감 조칼세.》

하고 웃골의 만수아저씨가 진옥에게 알은체를 하며 이야기군의 어깨를 툭 쳤다.

《진옥이는 왜 나왔느냐?》

풍덩이를 푹 내려쓰고 뻐끔뻐끔 담배를 빨던 아저씨가 이렇게 말하며 눈짓을 하였다. 그역시 쌀을 되던 말은 한옆에 밀어놓고 이야기를 듣고있었던것 같다.

진옥은 괜히 어른들의 이야기판을 깨뜨린것이 미안하여 소리 안나게 방아쪽으로 돌아갔다. 방아확옆에서 몽당비자루를 찾아쥔 그는 누구것인지도 모르는 수수쌀을 쓸어넣으며 다시한번 뿌연 눈안개속에 어슴푸레 떠오르는 산발을 바라보았다. 새김질을 하던 소가 목을 휘두르니 워낭소리가 절렁절렁하였다. 누가 당장 떠날듯이 소잔등에 길마를 지워놓고 저렇게 이야기판에 정신을 팔고있을가?… 그런데 정작 그 이야기판은 한번 깨여진 흥이 아직도 살아나지 못한듯 서먹서먹한 공기가 떠돌았다.

《그래, 그 령감들이 부후물을 떠난것이 언제쯤 된다던가?》

기다리다못하여 이렇게 뒤를 재촉하는 권만수아저씨의 감질난 목소리가 울려온다. 이어 백바위골에 사는 치백이와 룡덕이의 목소리도 울린다.

《그 령감들이 자네네 무남이동네에 이사온것이 열흘이나 됐다면 그 령감들이 장군님을 뵈웠다는것은 아마 달포가까이나 됐겠군그래?》

《무슨 달포까지 갈게 있다구그래? 장군님께서 나가는길로 곧장 이사를 하라고 말씀하셨다니까 돌아오자바람으로 짐을 쌌을것 아니여?》

장군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진옥은 바싹 귀가 강구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무남이에서 왔다는 사람의 눈길이 자기 등으로 쏠리는것이 느껴진다.

(저 사람은 무엇때문에 나를 꺼려할가? 내가 장군님의 소식을 이렇게도 궁금하게 기다리고있다는것을 아저씨는 왜 한마디도 안해줄가?…)

진옥은 한손으로 이미 반반해진 방아확기슭을 공연히 쓸고 또 쓸면서 한손으로는 방아보다 훨씬 세차게 쿵쿵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이사람아, 어서 이야기하게. 여기 장군님 소식을 들어서 안될 사람은 없네. 마음놓고 이야기하게.》

아저씨가 비로소 무거운 입을 열어 한마디 하였다.

《그렇지 않구. 갑손이 이사람아, 그런 소식은 자네 혼자 가슴속에 묻어가지고 다닐것이 못되네. 지금 우리 백성들이 모두 장군님의 소식만 기다리고있는 판인데 자네가 그런 소식을 혼자만 알고 묵새겨버려서야 되겠나. 더구나 저 원쑤놈들이 천하에 못된 소리를 지어내서 퍼뜨리고있는 이때에말일세. 어서 이야기하게.》

만수아저씨도 한마디 더 보탰다.

《내가 뭐 감추어둔게 있나요? 말할게야 벌써 다 했는데요.》

하고 무남이의 농민 갑손이가 불시에 어줍어진 말투로 발명을 하더니 뒤를 이었다.

《허지만 조심은 해야 해요. 그 령감들이 그러는데 장군님께서도 조심하라고 거듭거듭 당부하시더라거던요.》

《그러게 우리가 그런 소식을 어디 딴데 가서 말하라던가? 여기야 백바위골 물방아간이 아닌가? 이게 어떤곳인지 자네가 설마 모르지야 않겠지?》

만수아저씨가 또한번 윽박지르다싶이 해서야 갑손이는 다시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허 참, 이거 공연히 말 꺼냈다가 단단히 욕을 봅니다요. 이젠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데… 참 그 싸움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시겠소? 그게 일본놈의 설대목이라니까 이제는 그럭저럭 달포가까이 된셈이지요. 아무튼 7도구치기로부터 부후물까지 왜놈들이 쫙 덮였는데 감투봉이요, 북덕령이요 할것없이 어디서나 꽝꽝 총소리가 터져오르더랍니다. 주종섭이라는 령감은 전책개나 읽는 령감인데 그 령감 말이 어디 적벽대전이면 그렇게 요란하겠는가고 혀를 내갈깁디다.》

《그럼 그런속에 우리 장군님께서 계셨단말인가?》

평소에 그리도 침착하던 아저씨가 성급하게 뒤를 조이며 물었다.

《그러게 내가 뭐랍디까?》

하고 갑손은 말을 이었다.

《장군님께서 이렇게 한손을 척 쳐드시면 난데없이 눈무지속에서 유격대군사들이 우르르 쓸어나와서는 왜놈들 뒤통수를 냅다 조기고 한번 소리를 치시면 아무것도 없는것 같던 산우에서 또 군사들이 쓸어내려가는데 가만 보자니까 나무들이 모두 군사로 변하는게 아니겠어요.》

어느덧 갑손이의 말은 다시 열을 뿜기 시작하였는데 그에 따라 말투는 전달자의 립장으로부터 목격자의 립장으로 변해갔다.

《아니 이사람아.》

치백이가 약간 당황한 투로 물었다.

《아까 자네가 말하기는 왜놈들이 독을 친 소금을 먹고 유격대원들은 다 앓고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참 답답하다구야. 그러기에 축지법이라는것이지. 아 성한 사람들을 불러내는게야 무슨 축지법이라고 하겠나. 눈벌에서 군사가 쓸어나오는것은 또 약과야.

한번은 장군님께서 왜놈들을 아주 넋을 훌 빼놓아야겠다고 생각하시고 그놈들을 바싹 끌어당기셨단말이야. 그런데 왜놈들이 척 보니까 허연 눈산에 장군님께서 홀로 서계신단말이거던. 이놈들이 무서운중에도 설마 장군님께서 홀로 계시는데야 당하지 못할가 생각하고 기가 돋아서 접어들었지. 허 참, 미친놈들 다보지. 죽자고 환장을 하면 그렇게 하늘도 두려운줄 모른다니까…》

갑손이가 너무 어처구니없어 제김에 중얼거리자 안달이 난 룡덕이가 또 뒤를 죄였다.

《이사람아, 그래 거기에 정말 장군님께서 홀로 서계셨단말인가? 어서 말을 하게. 이사람, 별스레 갑자르는군.》

《갑자르기야 내가 무엇을 갑자른다고 아까부터 자꾸 구박인가? 모든 이야기가 다 순서와 리치가 있는 법인데 항차 이게 무슨 이야기라고 앞뒤를 뒤섞어놓는단말인가?》

갑손이가 룡덕이의 말을 맞받아치는바람에 이야기판은 헝클어졌다.

《아, 아 이사람아, 뭘 역증을 내면서 그러나? 룡덕이 이사람도 너무 궁금해서 하는 소리 아닌가. 어서 딴길로 달아나지 말고 마저 아퀴를 짓게. 그래 장군님께서 홀로 서계시는데 그놈들이 접어들었다 그말이지?》

《허참, 보자보자하니까… 하여간 룡덕이 자네도 말 좀 삼가하게, 말이란 탁 해서 다르고 툭 해서 다른 법인데 그렇게 남의 말허리를 자르는 법이 없네.》

갑손이는 바로 점잖게 룡덕이를 한마디 눌러놓고나서 정색하여 말을 이었다.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때 유격대원들은 왜놈들이 들여보낸 독소금을 먹고 모두 기신을 못차리고었었단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면 팔방으로 몰려드는 왜놈들을 모두 장군님께서 홀로 겪으셨거던요. 어떤놈들은 축지법을 써서 눈구뎅이에 훌 파묻어버리기도 하시고 어떤놈들은 나무군사로 냅다 조기기도 하시고… 그렇게 혼자서 수만대군을 물리치시는중에 이번에는 또 딴수를 쓰셨단말입니다.》

《어떻게? 이사람아, 이게야 어디 답답해서 견디겠나?》

방금 핀잔을 받은 룡덕이 푸접좋게 바싹 다가들면서 물었다.

갑손은 룡덕이를 시쁜듯이 피뜩 돌아보더니 외면하며 룡덕이 몰래 씩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왜놈들이 산을 까맣게 덮으며 올라오는데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산등에 척 서계신단말입니다. 왜놈들이 총질을 마구 해대지요. 나무가지가 뚝뚝 부러져나가고 눈무지가 마구 파헤쳐지는데 웬일인지 탄알이 장군님께서 계시는 어방에 와서는 이렇게 빙―돌아서 날아가더란말입니다.》

《저런! 이사람아, 그것도 축지법인가?》

《그럼 그 총알도 장군님을 알아본단 말이 아닌가?》

권만수와 치백이가 한꺼번에 물었다. 류창표도 룡덕이도 턱을 바싹 쳐들고 마른침을 삼키고있다.

진옥이 역시 숨이 가쁘도록 가슴이 죄여들었다.

《암, 여부가 있습니까? 탄알이 어떤놈은 꼿꼿이 오다가 별안간에 길을 돌려꺾는바람에 휘파람소리를 막 냅디다요.》

갑손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하도 열중해버린 틈에 저로서는 듣지도 못했고 볼수는 더구나 없는 이야기를 마치 방금 보고오기나 한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엮어댔다.

《허, 그러니 장군님께서 쓰시는 축지법이 보통 땅을 주름잡는따위가 아니구만. 그렇거니… 그러기다 왜놈들이 몇십곱씩 되는 군사를 가지고 에워싸고도 무리죽음을 당하지. 땅만 주름잡아가지고야 그렇게 될수가 없다니까…》

권만수가 이번에는 혀를 끌끌 차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건 아직 약과란말입니다. 탄알이 장군님 곁을 돌아갈 때까지도 왜놈들은 당장 제 몸뚱이를 쏘지 않으니까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그냥 기여바라올랐단말입니다. 그런데 웬걸, 왜놈들이 바싹 접어들어서 이제는 단번에 요정을 낼만하게 되자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척 한손을 쳐드시더란말입니다.》

갑손은 한팔을 곧추 앞으로 쳐들어 둘러선 사람들에게 일일이 가리켜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게 글쎄 조화가 아닙니까? 장군님의 손끝에서 속새포처럼 불줄기가 마구 뻗어나오는데 그게 그대로 탄알이더란말입니다. 그러니 왜놈들이 어떻게 됐겠어요?》

갑손이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가 주종섭로인과 정귀하로인에게서 들었다고 전제하면서 하는 말은 그래도 다 현실적근거가 뚜렷하지만 마치 제눈으로 본듯이 섬겨대는 이야기에는 이미 전설화되여 사람들의 입에 쉼없이 오르내리는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근엄한 류창표도 갑손이가 30리길을 날저물기전에 가대야 하며 그래서 소를 이미 메워놓았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있었다.

얼마나 듣고싶던 이야기인가? 왜놈들이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악랄한 헛소문을 꾸며내여 민심이 흉흉해진 이때 장군님께서 친히 조선인민혁명군부대를 이끄시고 멀지 않은 7도구치기까지 나오셨다고한다. 그저 나오신것이 아니라 이리떼처럼 몰려드는 왜놈군대들을 그야말로 삼대 쓸어눕히듯 하시여서 7도구치기와 부후물일판의 골짜기는 송장으로 덮였다고 한다.

그것을 직접 보고 온 사람들이 있다는데 믿지 못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물론 갑손이란 사람이 본시 말이 좀 헤프고 어디서 비슷한 소리만 들어도 제눈으로 본듯이 내우기는 성미인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는 어쨌단말인가? 아무리 갑손이가 실없는 소리를 잘한다기로서니 설마 장군님께서 장백지경에 들어서시였다는것까지 꾸며낼수가 없지 않는가?

추위와 눈보라에 얼어터지는 이 장백땅에 김일성장군님께서 들어서시였다는것이야 누가 감히 지어낼수 있단말인가? 모든 움직임이, 인심도 천심도 바람소리, 눈소리조차 장군님께서 장백땅에 들어서시였다는 이 소식이 사실임을 말해주고있지 않는가?

어느덧 이야기판의 주인은 바뀌여 갑손이는 뒤전으로 밀려났지만 그는 돌아갈 생각을 가맣게 잊고 연줄연줄 달려나오는 새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맨 처음 판을 막고 나선것은 권만수아저씨였다.

이제 갑손이가 우리 장군님께서 쓰시는 축지법이 보통 축지법이 아니라고 말했네만 내 장군님께서 분신술 쓰시던 이야기를 하나 하지.》

만수로인은 별안간 점잖게 큰 기침을 톺으며 벼섬우에 한쪽다리를 올리괴고 뒤로 젖혀앉았다.

《분신술이라는건 어떻게 하는거요?》

이번에는 갑손이가 안달이 나서 바싹 다가앉았다.

《임잔 아직 분신술도 모르나? 허―한심한 내기로군. 우리 장군님께서 쓰시는게 축지법보다는 오히려 분신술이 더 많다는것을 알아야 해.》

권만수는 잔뜩 업신여기는투로 갑손이에게 지청구를 대면서 말을 이었다.

《분신술이라는게 뭔고하니 쉽게 말해서 몸은 한몸인데 한꺼번에 여기도 나타나고 저기도 나타난다는것이네. 전번에 무송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고 하니… 왜놈 수비대에 전화가 왔단말일세. 송수진에 김일성장군이 나타났다―이래서 쩔쩔 매며 그쪽으로 원군을 다몰아 보냈을것 아닌가. 그런데 전화통을 놓기가 바쁘게 이번에는 시난차에서 파발말이 달려들었네. 또 김일성장군이 나타났다는게거던, 왜놈대장놈이 성이 꼭뒤까지 올라서 이놈아, 김일성장군이 방금 송수진에 나타났는데 웬 김일성장군이 시난차에 또 나타난단말이냐 하고 멱살을 틀어쥐였을밖에… 그러자 그놈이 틀림없이 제눈으로 봤다는것 아니겠나, 그런데 송수진으로 달려가던 왜놈의 원군이 도중에 또 김일성장군을 만났거던. 자, 이게 무슨 판인가 해서 정신이 떨떨해있는데 웬걸 이번에는 그 바로 무송소남문거리로 김일성장군님께서 군사를 이끄시고 쳐들어오셨다는것이네. 이런게 바로 분신술이라는거야.》

《자, 그러니 조화가 아니요? 왜놈들이 수태는 죽었겠소다?》

룡덕이가 또 입이 가려워 이렇게 말하면서 미처 권만수가 대답할사이도 없이 제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분신술은 그렇다 하고 종이장 한장으로 압록강을 건느신것은 무슨 수요? 이걸 누가 알아맞춰보란말이요.》

《아니 그건 또 어떻게 된 이야긴가?》

이번에도 갑손이가 선참 감질이 나서 바싹 다가들었다.

《이건 별로 오래된 이야기두 아니란 말이우다. 바로 장군님께서 우리 고향에 무슨 볼 일이 계셔서 강을 건너오셨더란말이우다.》

《아니 장군님께서 자네네 풍산땅엘 다 다녀오셨단말인가?》

치백이가 금시초문이란듯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왜? 우리 풍산땅은 장군님께서 못오실곳인가? 우리 풍산땅이 좀 구석지기는 해도 그런곳이 아닐세.》

룡덕이는 아까 갑손이가 자기를 구박하듯 치백이를 점잖게 제지하고나서 말을 이었다.

《듣자니까 그때 장군님께서는 무슨 볼 일이 계셔서 함흥쪽으로 나가셨다가 돌아오시는길이였다네. 함흥에서 제일 큰 왜놈의 려관에서 보름동안이나 류숙하시다가 나오실 때 명함 한장을 두고 오셨다거던. 그 명함을 받아든 려관주인놈이 너무 놀라서 절을 깊숙이 하였다네. 그리고 장군님께서 다 떠나신 다음에야 허겁지겁 경찰에 뛰여갔지. 자, 그러니 함경도경찰이 다 떨어났을게 아닌가. 이놈들이 뒤를 따라라 해서 산이고 들이고 까맣게 덮였지. 이때 우리 장군님께서는 풍산읍내 리발소에 들려 리발까지 척 하시고 길에 나서시였다네. 그제야 경찰놈들이 알아보고 바싹 뒤를 죄였다는군.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뒤도 돌아보시지 않고 훨훨 산길을 가시는데 아무리 기를 쓰고 따라가도 따라잡을수가 없더라는거야. 그러다가 어언 압록강가까지 나오고말았다네. 그제야 됐다 하고 이놈들이 바싹 다가가 보니 장군님께서는 강가에 조용히 서시여 조선지도를 그리고계시더라지 않겠나. 우리 장군님께서는 그렇게 지도를 품에 간수하고 다니시는데 그게 실상은 조선의 정기를 한품에 안고 다니시는것이라네.》

《옳거니…》

권만수가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류창표도 갑손이도 치백이도 모두 그럴상싶다고 고개를 끄떡거렸다.

신이 난 룡덕이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말을 이었다.

《왜놈들은 처음에는 너무나 태연하게 홀로 앉아계시는 장군님을 보니 어쩐지 겁이 나서 감히 접어들 생각을 못했지. 그런데 정신빠진 상관놈이 나가라고 소리를 쳐대는바람에 모두 강가로 달려들었다네. 그제야 장군님께서는 그 종이장을 물에 척 띄우시고 그우에 선뜻 올라서시더라네. 그러자 종이장이 쏜살같이 달려가지 않겠나, 왜놈들이 너무나 놀라서 입만 쩍 벌리고있다가 뒤늦게야 허겁지겁 배를 얻어타고 따라갔지만 어느새 장군님께서는 강 저쪽에 척 올라서셨는데 웬걸 바람 한점 없는 강 한복판에 파도가 길길이 치솟더라는거야. 그게 바로 장군님께서 종이장을 건사하시는바람에 일어나는 멀기라거던. 그 파도가 어찌나 세차던지 왜놈들의 배가 몽땅 뒤집혀서 그놈들이 모조리 고기밥이 된것은 말할것 없고 그때 강가에 있던 왜놈의 주재소까지 물속에 잠겨서 후에 옮겨다 지었다는군.》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오직 김일성장군님 한분만을 믿고사는 그들의 마음을 밝게 비쳐주며 서로 전하고 알리는 이야기는 모두 새롭게 신기하고 그래서 갈길도 일감도 다 잊어버리게 하였다.

바깥에서는 저녁바람이 터지는듯 다시 눈보라가 울붓짖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장백땅인민들에게 보내는 유격대의 우렁찬 함성같이 기운차게 울리였다.

 

11

 

갑손이가 돌아가자 엇바뀌여 조선바지저고리에 허름한 잠바를 껴입고 회색목도리를 칭칭 두른 사나이가 방아간에 나타났다. 샘골 변측인 구가점가까이에 새로 구멍가게를 냈다는 장기덕이였다. 며칠전에 벼 세가마니를 싣고 온걸 지금 한창 군용미조달이 밀려서 며칠 기다려야겠다고 했더니 그것때문에 찾아온것 같다.

갑손이에게서 들은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흥분된 심정들을 나누고싶었던 류창표네들은 새로 나타난 손님이 썩 달갑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내쫓을수도 없는 일이라 모두 아닌보살하고 수걱수걱 일손들을 놀렸다.

《이거 날세가 꽤 맵습니다. 그래도 방아간은 경기가 괜찮은가보군요.》

장기덕이는 사람들의 눈치야 어쨌건 삽삽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경기래야 그렇지오다. 어떻게 가게를 비우고 올라오시우?》

류창표는 곽병철의 말도 있었던만큼 정체모를 사나이와 깊이 상종하는것을 피하기 위하여 어정쩡하게 말을 받았다.

《가게에 뭐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줄 아시우. 얼어죽을놈 있으면 나오라는 판인데 어떤 시러베아들이 찾아오겠나요.》

장기덕이는 밭은 미간을 찌프리며 내뱉더니 벼가마니우에 펄썩 주저앉아 옆차기에서 희연봉지 하나를 꺼냈다. 그는 올적마다 이렇게 새 희연을 한봉지씩 가져와서 테놓군하였다.

《자, 담배들이나 태우시우. 넨장, 장사를 해먹는것도 배경이 있어야지 이건 사흘도리로 불리여다닐래기 뽕빠지겠다니까…》

장기덕이는 누구에 대한 무슨 불평인지 모를 소리를 혼자 중얼중얼하며 신문지를 쪽 찢어내여 류창표앞으로 내민다. 류창표는 그것을 못본체하고 제 주머니에서 곰방대를 꺼냈다. 권만수가 신문지를 받아들고 담배봉지에 손을 뻗치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장사를 잘못 벌린셈 아닌가? 하기는 우리네 농사군이 뭘 가진게 있어야 점방을 찾아다니지.》

《왜 아니래요. 내 처음부터 이 모퉁이에 자리를 잡는게 꺼림직해서 아예 구가점거리에 들어갈가 했댔는데 거기는 벌써 가게방이 다섯, 여섯씩 되길래 샘골쪽에 자리를 잡았더니 웬걸 여기는 푼푼한게 그저 왜놈… 아니 그 군대들뿐이라니까요.》

장기덕이는 하마트면 실수할번한 말끝을 겨우 얼버무려넘기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룡덕이도 치백이도 못들은것처럼 시치미를 따며 담배들을 말기 시작하였다.

《그 내 부탁한것은 아직 차례가 멀었겠수다?》

잠시후 장기덕은 자기가 져다놓은 벼가마니를 힐끔 돌아보며 슬쩍 물었다.

《좀더 기다려야겠소. 이렇게 군용미가 들이쌓이니 나도 용빼는수가 없구만. 저 권만수아저씨네 수수는 워낙 몇말 되지도 않거니와 그 집 사정이 지금 말이 아니요. 그래 번을 어기고 먼저 좀 타겠는데 량해하소.》

류창표는 짙은 눈섭밑에서 슬기롭게 빛나는 눈으로 장기덕을 찬찬히 뜯어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뭐 량해고 말고 할게 있나요. 난 그리 바쁠것도 없어요. 당장 녀편네가 신갈파에서 건너오겠다, 작은 집을 차린게다 이러며 바가지를 긁어대니 뭘 좀 장만해놓을가 해서 그러는거지요. 헌데 이거 군용미라는건 그냥 들이쌓입니다그려? 전날 있었던것은 다 찧어보내고 또 실어왔는가요?》

《그렇소.》

《허 미친놈들, 쌀을 먹기도 먹는다. 그러니 이 백바위골에도 군대가 약차하게 있는 모양이지요?》

장기덕은 바싹 턱을 쳐들고 류창표의 낯빛을 살폈다.

《내 그걸 어떻게 알겠소. 많겠기에 이렇게 날마다 찧어대도 모자라겠지요.》

《허 참, 그놈들이…》

장기덕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갑자기 중둥무이하고 사위를 살피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외면해버렸다. 놀아나는 꼴이 수상쩍게 보였다.

류창표는 갑손이가 덜어내놓고 간 쌀 몇되박을 옮겨놓을양으로 마대 하나를 찾아들고 얼기설기 건너간 거미줄이 먼지와 함께 춤을 추는 썰렁한 겨간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뒤쪽에서 장기덕이가 권만수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여왔다.

《아저씨, 그 소문 들었나요?》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말인가?》

《내 이번에 또 6도구에 가지 않았겠나요. 음력 설대목 아닌가요. 했더니 이번에는 또 판판 다른 소문이 떠돕디다. 난 전번에도 말했지만…》

말소리는 뚝 끊어졌다. 류창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장기덕은 권만수의 소매를 붙잡고 사위를 둘러본다. 류창표와 눈길이 마주치자 그는 약간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짓더니 침을 꿀꺽 삼키였다. 무엇때문엔지 분위기가 갑자기 긴장되였다.

《아바이, 이거 내 너무 희한한 소식이 돼서 혼자만 알고 지날수가 없더라니 이렇게 찾아왔는데 제발 딴 사람 귀에 들어가지 않게 좀 해주시오.》

장기덕은 평소의 경박한 말투는 싹 가시고 별로 강개한 낯빛이 되여 사정하는 투로 말하였다.

《아니 무슨 소리를 들었기다 그러나?》

권만수는 벌써 무슨 예감을 느끼고 류창표쪽을 돌아보며 다우쳐 물었다. 룡덕이도 치백이도 그리고 방아확곁에 앉아있는 진옥이도 숨소리를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장기덕이란 사람은 그렇게 모든 사람의 주의를 자기에게 끌어붙이는 재간이 있는 사람이였다. 하기는 그것이 무슨 재간이 아니라 지금 이고장사람치고 누구나 그 무슨 소식을 안타까이 기다리고있는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방금 갑손이에게서 들은 소식때문에 확하고 달아오른 그들의 머리는 아직 식지 않았다. 그런판에 또 새로운 소식이라니 모두의 머리에 첩경 먼저 떠오르는것이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생각이였다.

류창표는 마대를 손에 쥔채 되돌아왔다. 그가 풍구옆에 다가서서 걸음을 멈추자 장기덕은 입을 벌렸다.

《내 전날 6도구에 다녀와서 그놈들이 경축대회를 열고 야단들치는데 멀쩡한 수작같다고 말씀드렸지요? 헌데 이번에 가보니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라는것이 드러나지 않았겠나요.》

《어떻게?》

류창표는 너무 긴장되여 좀 뚝뚝하게 물었다.

《내 아는 사람이 장거리에 목노판을 내고있지요. 거기에 별의별 사람이 다 드나들지 않겠나요. 그런데 요 얼마전에 7도구치기에서 왜놈들과 유격대 사이에 대판으로 싸움이 붙었다우다. 그래서 왜놈들의 송장을 몇달구지씩이나 실어냈다우.》

네사람은 무어라고 대척을 할 말을 찾을수가 없어 꿀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끔쩍끔쩍하였다.

진옥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가까스로 들려오는 말소리를 가려들을래기 온몸이 다 귀가 돼버린듯이 잔뜩 강구고있었다.

《그런데 그 싸움을 김일성장군님께서 몸소 지휘하셨다지 않나요.》

김일성장군님께서?》

듣던 사람들은 한꺼번에 받아외웠다. 상대가 아직 집갠지 들갠지 모를 사람이라 이런 때의 감정을 어떻게 나타냈으면 좋을지 몰라서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서로 눈치만 힐끔힐끔 살폈다. 그러자 장기덕은 더 열을 올렸다.

《저놈들이 김일성장군님의 사령부를 어쨌다, 유격대는 이미 없어졌다 하고 떠벌이지만 어림이 있나요, 그 사람이 말하기는 자기 집에 단골로 다니는 군대가 여럿인데 하나같이 외우더라거던요. 김일성장군님은 진짜 축지법을 쓴다고말이요. 그런데 내 또 오다가 달구지로 왜놈들 짐을 실어나르고 온다는 유성촌의 한 령감도 만났는데 그 령감도 똑 같은 소리를 해요. 그러니 장군님께서 건재하시다는게 틀림이 없어요.》

류창표는 속에서 끓어번지는 격정을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이사람 고맙네. 내 이렇게 하게를 해서 안됐네만 자네가 우리 고장에 거접해서 같이 살게 된것이 기쁘네.》

그러면서 류창표는 장기덕의 손을 잡고 그의 약삭발라보이는 얼굴을 눈물이 그렁해서 바라보았다.

《좋은 소식 들려주어 고마우이.》

권만수도 치백이와 룡덕이도 저마다 장기덕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에게 곁을 안주던 백바위골사람들은 대번에 장기덕을 자기편 사람으로 치부하게 되였다.

이제는 누구를 꺼릴 필요도 없으니 마음놓고 궁금하던 가슴속을 터놓자고 모두 새로 담배들을 말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저 아래 비탈길로 눈을 걷어차며 분서장 진가의 두꺼비상이 나타났다.

《넨장, 또 술벌레가 동한 모양이군.》

먼저 그놈을 띠여본 류창표가 손바닥을 탁탁 털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모처럼 무르익어가려던 이야기는 이로써 뚝 끊어지고말았다.

 

12

 

진옥은 분서장이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장군님께서 건재하실뿐아니라 적들을 쓸어눕히며 장백땅에 들어서셨다는것이 확실해지자 잠시도 한자리에 앉아배길수가 없었다. 그는 방아간에 나서기가 무섭게 내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7도구치기라야 여기서 굉장히 먼데도 아니다. 그 로인들이 유성촌에서 소금을 지고 갔다는것으로 보면 유격대가 벌써 백바위골을 지나쳐갔을수도 있는것이다. 진옥은 마음이 황황하였다. 그렇게 바삐 뛰면 어딘가 멀지 않은 숲속에서 유격대를 따라잡기라도 할것처럼 숨을 할싹거리며 가파로운 눈길을 달렸다.

백바위로 올라가는 길목을 돌아서니 물소리가 드높이 울려왔다. 문득 장군님께서 그리도 신출귀몰한 싸움을 벌리셨다는 7도구치기의 산발을 되돌아보았다. 바람과 함께 자욱히 흐린 서쪽하늘에 저녁노을이 비꼈다. 그것은 마치 진옥의 막막한 가슴에 전해진 기쁜 소식과도 같이 그윽한 서기를 피워올렸다. 백바위도 노을속에 더욱 선명히 두드러져올랐다.

진옥은 얼마전에 들려본 백바위를 향하여 종종걸음을 쳤다. 그사이 무슨 변화가 있었으리라고는 그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백바위곁에 가있고 싶었다. 장군님께로 이어진 마음이 얽혀있는 백바위밑에 가서 홀로 생각에 잠겨보고싶었다.

두어마장 실히 되는 길을 급히 올라오다보니 숨이 가빴다. 그러나 아찔하게 높이 솟은 백바위밑을 돌아서니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진옥은 숨도 태울겸 신호돌이 놓이군하던 바위가까이까지 가서 오리나무줄기에 등을 대고 기댔다. 그리고 무심히 바위우를 더듬어 보았다.

인제 저 바위우에 돌이 놓일 날도 멀지 않을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던 진옥은 소스라쳐 눈을 흡떴다.

《아니!》

노을빛을 받아 환하게 떠오르는 바위우에 분명 돌 세개가 놓여있는것이다. 내가 마음이 너무 옴해서 헛것을 보는것이나 아닌가? 진옥은 성에가 길다랗게 달라붙은 살눈섭을 두어번 끔쩍거리고나서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분명 돌이 놓여있다. 아까 방아간으로 올라갈 때만 해도 반반하던 바위정수리였다. 감싸쥔 목도리끝을 들어 눈굽을 훔치고 다시 봐도 틀림없는 돌, 그사이 일부러 사람이 갖다놓지 않고는 있을수 없는 신호돌이였다. 돌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는것을 미리 알고 바라보기전에는 조금도 이상한것을 눈치챌수 없도록 극히 자연스레 놓여있는 돌이였다.

진옥은 가슴이 한줌만해져서 돌아서 내뛰자고들었다. 우선 엄엄하고 비상한 그 무엇에 압도되여 제 머리로써는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전혀 가늠을 할수가 없었다. 아저씨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뛰려던 진옥은 두어걸음 못가서 멎어섰다. 아저씨는 지금 한창 두꺼비분서장과 싱갱이를 하고있을것이다. 거기에 그런 소식을 가져갈수는 도저히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을의 조직핵심들중 이런 소식을 전할만 한 사람은 아저씨를 내놓고 보면 샘골의 곽병철이를 꼽을수 있다. 그러나 병철이네 집은 《토벌대》가 들어앉은 토성 바로 밑이라 서뿔리 뛰여갔다가 놈들의 의심을 사기가 쉽다. 그러거나말거나 저것이 과연 신호들이 옳기나 한가?

진옥은 지금 당장 달려갈데도 마땅찮거니와 그 돌의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궁금중에 사로잡혀 공연히 겁먹은 눈길로 사위를 살펴보았다. 솨―솨 개울물 흐르는 소리, 쿵쿵 울리는 폭포소리 그리고 저녁노을과 함께 터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지소리와 눈무지 허물어지는 소리가 간간히 들릴뿐 아무런 인적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옥은 목도리를 한자락 더 돌려감고 꼭 싸맨 다음 강심을 먹고 바위로 다가갔다.

바위밑으로 바싹 다가서보니 정수리끝은 보이지 않았다. 진옥은 거죽이 얼어붙은 눈무지에 정갱이까지 빠지면서도 될수록 자기 발자국을 내지 않을양으로 가파로운 비탈쪽에 붙어서 바위옆으로 돌아갔다. 여느때 같으면 쉽게 오를수 있는 비탈이였지만 흥분과 초조감이 한데 어울려 물매는 훨씬 급하게 느껴지고 곱절이나 숨이 가쁘게 느껴졌다. 겨우 바위정수리가 보일만 한 등판에 올라선 진옥은 한손으로 나무가지를 휘여잡고 눈길을 돌렸다. 세개의 돌이 그대로 놓여있다. 진옥은 그렇게도 숨가쁘게 톺아오르던 비탈을 이번에는 단숨에 바위꼭대기까지 뛰여올라갔다. 바위는 가파로운 비탈에 비죽이 솟아있는데다 산비탈과 바위사이에 한발가까이 되는 틈이 나있고 그속에 눈이 가득 채워져있었다. 그러나 진옥은 그런것저런것 가려볼새 없이 눈구뎅이에 미끄러져 들어갈번하면서도 그냥 돌 있는데로 달려갔다. 돌을 움켜안은 진옥의 가슴은 세차게 고동쳤다. 그것은 이 아근 산비탈에 얼마든지 널려있는 푸석푸석한 석비레쪼박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순간에는 너무나 많은 뜻을 담고있는것이였다.

진옥은 가슴에 움켜안았던 돌에 천천히 한쪽볼을 갖다댔다. 눈바람속에 꽁꽁 언 반드럽지 못한 돌은 차고 거칠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거칠은것속에서 따뜻한 그 무엇이 풍겨나오는듯하였다. 유격대가 마을사람들과 만나기 위하여 일부러 갖다놓은 돌이 틀림없다는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진옥에게는 그 돌이 말못하는 하나의 푸석돌이라고만 생각되지 않았다. 애타게 기다리던 유격대와 숨결이 닿아있고, 그래서 정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그 무엇같기만 생각되는것이였다.

그러다가 진옥은 벌떡 일어났다. 이것은 그렇게 저 한사람의 가슴에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기 위한 돌이 아니였다. 그것은 유격대가, 혹시는 직접 김일성장군님께서 이곳 조직에 보내시는 신호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한순간이나마 바위우에서 어물거린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였다.

그는 가슴에 품어안고있던 돌을 제자리에 놓고 사위를 살펴본 다음 바위에서 내려오려 하였다. 그러나 바위기슭에 나서자 눈앞이 아찔하였다. 한발이나 되게 벌어진 짬을 어떻게 건너뛸것인가? 저쪽에서 넘어설 때는 달리던 그 맥으로 건너뛰는것이여서 한결 쉽기도 하지만 아까는 그런것 저런것 가려볼새도 없이 훌쩍 건너뛰였었다. 이번에는 눈이 메꾸어놓은 심연을 제눈으로 똑똑히 들여다본 탓도 있겠지만 힘을 써보재도 좁다란 바위등판이여서 달려올데가 없다.

진옥은 바위우에서 이쪽저쪽 살펴보며 망설였다. 아무리 살펴보아야 산턱과 잇닿은것은 한쪽뿐이니 뛰다가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쪽으로 뛰여야지 별수 없었다.

진옥은 강심을 먹고 선자리에서 건너편 비탈을 향해 힘껏 뛰였다. 건너뛰고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넓은 거리를 건너짚어서 두발 다 산비탈에 가닿았다. 그러나 애초에 자신을 못가지고 뛰다보니 땅에 발길이 닿자마자 두팔을 내짚고 발을 지나치게 벋디디여서 한쪽발이 눈에 미츠러지기 시작하였다. 진옥은 당황하여 다른 발로 급히 의지할만 한데를 더듬었으나 그럴수록 몸이 아래로 쏠리면서 요행 움켜잡은 싸리나무의 언 가지가 뚝 하고 부러졌다.

진옥은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드는것을 느끼며 부러진 싸리가지가 맥없이 끊어져나가는것을 겁에 질려 바라보았다.

《무슨 장난을 이렇게 하오? 커다란 처녀가?》

누군가가 성난듯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진옥의 덧저고리 등덜미를 움켜잡았다.

대답할새도 없이 산턱에 끌리여올라선 진옥은 자기앞에 우뚝 서있는 총쥔 사람을 보았다. 버릇처럼 무릎의 눈을 털며 허리를 구부리던 진옥은 벌떡 바로 섰다.

솜이 비죽비죽 내밀었지만 분명 군복을 입었고 귀덮개를 올려놓은 털모자의 한복판에는 빨간 융단천으로 오려붙인 오각별이 박혀있었다.

유격대다! 이런 생각이 번개같이 떠오른 진옥은 잠시 입이 벌어지지 않아 말도 못하고 가위눌린 사람처럼 숨만 가쁘게 내쉬였다.

《어서 내려가시오. 처녀가 이런 후미진데서 혼자 돌아댕겨서는 재미없단말이요.》

키가 꺽두룩하게 크고 뼈마디가 굵직굵직한 그 청년은 총을 들어 안전장치를 하더니 어깨에 걸쳤다.

《저 동지는…》

진옥은 그가 당장 어디로 사라질것만 같아 서둘러 한발을 내짚으며 입을 벌렸다. 그러나 말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뭐요? 동지?》

유격대원은 진옥의 입에서 동지란 말을 들은것이 뜻밖이였던지 이렇게 받아외우며 새삼스럽게 진옥의 아래우를 흝어보았다.

《동무는 어데서 사오?》

《전, 전 이 아래 백바위골에서 살아요. 저의 아저씨가 방아간을 하기때문에… 전 그 집 조카예요. 그런데 동지는 저… 이 돌은 동지가?…》

진옥은 무슨 말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두서없이 이 말 저말 섬겨대며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다. 유격대청년의 눈에는 자기를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기색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저하고 무슨 실속있는 말을 할것 같은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동무가 방아간집 조카란말이요? 가만, 그럼 그 주인 이름이 뭐요?》

유격대원은 갑자기 활기를 띠며 똑바로 서서 물었다.

《류창표라구 해요.》

《류창표? 무슨 류자를 쓰오?》

《묘금도류자예요. 백바위골에는 류씨가 서너집 되지만 묘금도류자를 쓰는 류자는 우리 집뿐이예요.》

진옥은 혹시 자기 대답이 굼떠서 유격대원이 훌 떠나버릴것처럼 덤비며 대답하였다.

《그럼 틀림없는데… 가만, 한가지 더 물어봅시다. 방아간은 지금도 돌리는 모양인데 동무네 아저씨가 그것을 돌리고있소?》

《네 그렇습니다. 지금도 방아간에 계십니다. 제가 방금 방아간에서 만나고 왔어요. 지금 분서장이란놈이 방아간에 나타나서 그래 저혼자 집으로 돌아가던길이예요.》

《분서장?》

유격대원이 이렇게 되물어서야 진옥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분서장질을 하는놈이예요. 아마 지금쯤은 내려갔을지도 몰라요.》

《그놈이 방아간에 자주 나타나오?》

《요즘은 자주 나타나는것 같아요. 저도 여기 온지 한달 좀 지나서 잘 모르긴 하지만…》

진옥이가 변명투로 말하자 유격대원은 미심쩍게 잠시 더 살펴보더니 새삼스럽게 심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동무가 여기에는 뭣하러 왔소? 이 바위꼭대기엔 왜 올라왔느냐말이요?》

《사실 전 분공을 받았어요.》

하고 진옥은 울먹울먹해서 말했다.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무엇을 기다렸단말이요?》

《유격대를 말이예요. 유격대를 기다리는것은 조직원들만이 아닙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고있어요. 더구나 요즘은 왜놈들이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악랄한 소문을 돌리면서… 야단치기때문에 안타깝게 유격대를 기다리고들있어요.》

《유격대를 기다렸다? 그런데 여기에는 왜 왔소?》

유격대청년은 시치미를 뻑 따고 다우쳐물었다.

진옥은 다소 원망어린 눈길로 상대를 치떠보다가 의심을 가지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여 다소곳이 대답하였다.

《방금 말하지 않았어요. 여기에 유격대의 신호돌이 놓이는것을 살필 분공을 받았다구요. 그래서 얼마전에도 여기에 왔댔어요. 그런데 방금 방아간에 무남이사람이 와서 김일성장군님 이야기를 한참하다가 갔어요. 유격대가 장백에 들어와가지고 7도구치기에서 왜놈들을 굉장히 많이 때려잡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어요. 그 싸움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 무남이마을에 이사를 왔다는거예요. 그리고 우리 마을 가게방주인도 6도구에서 그런 소식을 들었다고 이제 와서 말하지 않겠어요. 그 소식을 들으니 어찌나 기쁘던지 혹시 유격대가 그 사이에라도 오지 않았을가 해서 미심결에 다시 와보았지요. 그랬더니 글쎄 저렇게 돌이 놓여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전 그걸 선뜻 믿을수가 없었어요. 아무래도 제눈으로 똑똑히 알아보지 않구는 견딜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만져까지 보았군.》

하고 유격대원은 다음말을 받더니 불쑥 딴 소리를 꺼냈다.

《그 무슨 동네? 무남이동네? 거기에 이사왔다는 사람들이 7도구치기싸움을 봤다고 했지요?》

《그래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요. 소금을 지고 유격대에 들어가서 김일성장군님까지 만나뵙고 왔다고 해요. 그 말이 사실이겠지요? 장군님께서 건재하시다는것이 사실이겠지요?》

진옥은 숨가쁘도록 빠른 어조로 대답하고 또 물었다.

《흠, 그 령감들 이름을 알아봤소?》

유격대원은 진옥의 안타까운 질문은 못들은척하고 다시 물었다.

《이름이요?》

진옥은 놀란 사람처럼 되묻고나서 힘없이 대답하였다.

《그건 모르겠어요. 전 아저씨랑 이야기하는걸 옆에서 들었을뿐이니까요. 그러나 이제 곧 알아볼수는 있을거예요.》

《아니, 다시 알아볼 필요는 없소. 참, 우리 저쪽으로 좀 갑시다. 여기 서서 이야기하다가는 사람들의 눈에 뜨이겠소.》

유격대원은 이렇게 말하더니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진옥은 다시 가슴이 죄여드는것을 느끼며 그뒤를 따라갔다. 총대가 흔들리는 유격대원의 등은 떡판처럼 넓고 든든해보였다. 그러나 두툼하게 누빈 솜저고리에 땀얼룩이 져있고 그나마 너들너들 해여져서 마치 솜광주리에서 헌솜이 삐여져나오는듯하였다. 바지도 행전도 다 그 모양이였다. 한쪽다리는 아예 다 판이 났는지 행전대신에 칡넝쿨로 동였는데 그중 눈을 아프게 찌르는것이 신이였다. 그것은 신이라고는 도저히 부를수 없고 차라리 발감개나 혹은 나무발싸개라고 부르는 편이 훨씬 적당할것 같은 그런 몰골이였다. 한쪽은 고무바닥만 남은 로동화를 노끈으로 얼기설기 붙들어매고 설이긴 가죽끈으로 칭칭 동였는데 다른쪽은 노루가죽을 넙적하게 오려서 역시 가죽끈으로 복사뼈까지 묻히게 칭칭 감아맸다. 거기에 눈가루가 뭉치고 달라붙어서 발 한짝이 망짝만하였다.

유격대원은 그런 발을 가파로운 비탈길에 성큼성큼 옮겨놓다가 삑 돌아서서 말하였다.

《사실 내 동무가 조직의 분공을 받고 왔다니 믿고 하는 말인데 우리도 얼마나 인민들을 그리워했는지 모르오. 그래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소.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건재하시오. 아까 그 소문들은 모두 사실이요.》

진옥의 눈굽은 한순간에 핑하니 흐려들었다. 그는 낯선 사람앞이라는것도 잊어버리고 어깨를 들먹거렸다. 걷잡을수 없이 슴새여나오는 눈물이 얼굴을 싸쥔 두손의 손가락짬으로 골을 지어 흘러내렸다.

《장군님께서… 장군님께서…》

흐느낌이 진옥의 목메인 소리를 마디마디 끊어놓았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건재하시는 이상 결코 조선은 죽지 않을것이며 조선사람은 결코 불쌍한 고아와 같은 존재는 아닐것이다. 진옥은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고 말하고싶었으나 말이 되지 않았다. 제 가슴에 품은 격정이 그것만이 아니기때문엔지 뜨거운 눈물은 고마운 생각우에 까닭없이 억울하고 분한 생각까지 드러내는듯 싶었다. 얼마나 악착한놈들이면 우리 장군님에 대해 그처럼 모진 말을 지어낸단말인가. 오직 장군님 한분만을 믿고 사는 조선사람들에게 그렇게 가슴아픈 헛소문을 꾸며내여 퍼뜨린단말인가. 술까지 처먹으면서…그런 속임수에 넘어간것이 분하고 억울하였다.

《됐소, 그만하오. 우리도 그놈들이 그런 못된 소문을 퍼뜨린다는것을 알아냈기때문에 이렇게 찾아온거요. 어서 좀 갑시다.》

유격대원은 세차게 들먹거리는 진옥의 어깨를 눈물이 그렁해서 바라보더니 외면하면서 좀 퉁명하게 말하였다. 그 역시 낯선 처녀앞에서 눈물이라도 보일가봐 일부러 투박한 목소리를 지어내는듯하였다.

진옥은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서둘러 목도리끝으로 두눈을 훔치며 성큼성큼 앞장서 걷는 청년의 뒤를 따랐다.

《인섭동무, 나오라구. 어디 있소?》

머지 않은 이깔나무숲속에 들어서자 유격대원은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꺼리낌없이 소리쳤다.

《자, 이건 꼼짝 소리도 못하게 해놓구선 왜 이렇게 큰소리를 지르오? 바로 코앞에 사람이 있는데…》

아닌게아니라 바로 코앞에 가로누워있는 진대통뒤에서 역시 키가 훨썩 크고 좀 나이들어보이는 유격대원이 허리를 일으켰다. 그 역시 옷은 가슴아프도록 험하게 해여져있었다.

《그저 나하고 같이 다니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렇게 척척 맞아떨어진다니까. 보오. 제창 이런 똑똑한 처녀를 데려오지 않았소? 백바위골의 조직원동무요.》

《아이…》

진옥은 마치 자기와 잘 아는 처지이기나 한것처럼 능청을 떠는 그 말에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외면하였다.

《누구라구?》

진대통뒤에서 나온 유격대원이 미심쩍은 눈길로 두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바로 사령관동지께서 말씀하시던 방아간집의 조카라오. 동무의 아저씨가 방아를 돌린다고 했지요?》

유격대원은 진옥이쪽을 향해 물었다.

《예 그래요. 류창표라고…》

진옥은 사령관동지께서 방아간집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말을 듣자 너무나 놀라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망결에 대답했다.

《그렇단말이요. 이 동무네 아저씨 이름이 류창표라고 하는데 묘금도류자란말이요. 묘금도류자라는것은 아주 귀한 성이란말이요. 그렇지요?》

이번에도 말끝은 진옥이에게로 돌렸다.

《예, 그래요.》

진옥은 다시한번 정신없이 대답하였다.

《가만, 우리 서로 인사나 합시다. 난 한태혁이요. 저 동무는 박인섭동무고… 동무의 이름은 뭐요?》

《전 류진옥이예요.》

《류진옥? 동무도 묘금도류자를 쓰는 류가겠소? 진옥이라―그 이름 좀 이상한데… 난 무슨 옥순이든가, 복순이든가, 갓난이든가, 이쁜이든가 이러루한것은 많이 들어봤지만 진옥이란 통 처음인걸… 하여간 반갑소. 우린말이요…》

하고 태혁은 인섭이쪽을 돌아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말하였다.

《사실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대원이요. 김일성장군님의 명령을 받고 백바위골사람들을 만나보러 왔소.》

《그래요?》

하고 진옥은 부르짖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백바위골사람들을 만나보라고 하셨어요?》

《그렇소, 장군님께서는 백바위골사람들을 잊지 않고계시오. 동무도 알겠지만 재작년에 우리 부대는 이 백바위골에서 큰 싸움을 했댔소. 그때도 여기 인민들이 유격대를 얼마나 지성껏 도와주었는지 모르오.》

《저도 들었어요. 샘골포대의 성문을 열어준 조복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랑…》

《참, 그 어머니가 어떻게 됐소? 아직 살아있소?》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대요. 왜놈들에게 매를 맞은것이 어혈이 져서 내내 누워있었는데 그날 또 총까지 맞다보니 유격대에서 좋은 약이랑 그렇게 보내주셨는데도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는군요.》

《그렇소? 종시 일어나지 못했군. 그러지 않아 사령관동지께서 그 어머니가 혹시 잘못되지 않았는가 하고 몹시 걱정하시더니…》

《그럼 장군님께서도 그 어머니를 잘 아시는가요?》

진옥은 두손을 가슴에 모두어잡고 태혁의 수더분해보이는 얼굴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장군님께서 모르시는 일이 어디에 있겠소. 재작년설에는 그 어머니에게 선물까지 보내셨는데… 물론 장군님께서 그 어머니를 직접 만나보신적이야 없지요. 그렇지만 이 오래는 박덕산정위가 공작하던곳이기때문에 장군님께서는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가락이나 있다는것까지 다 알고계신단말이요.》

《그래요―》

진옥은 황홀해서 속삭였다.

《지금 장군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요?》

《장군님께서요?》

하고 태혁은 담배를 말기 시작하는 인섭을 한번 돌아본 다음 말하였다.

《우리와 함께 숲속에 계시오.》

《숲속에요? 이 엄동설한에 숲속에 계시자니 얼마나 고생스러우실가? 정말 장군님께서는 몸편안하신가요?》

《그렇지 않구. 동무도 아까 들었다고 하지 않았소? 7도구치기에서 왜놈들을 호되게 족치신 이야기말이요. 장군님께서는 언제나 건강하시단말이요.》

《그래요―》

진옥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이 어찌나 행복에 넘치는 간절한 목소리였던지 좀 뚝뚝한 표정으로 담배말지에 침을 묻히던 인섭이도 고개를 들었다.

7도구치기싸움이야기가 벌써 여기까지 퍼졌단말이요?》

인섭이가 성냥을 찾으며 누구에게라없이 물었다.

《그런것 같소.》

하고 태혁이가 처녀쪽을 돌아보며 대답하였다.

《이 동무 말을 들으니 아마 정지성동무의 아버지가 무남이로 이사를 한 모양이요.》

《빠르기는 빠르다.》

《빠르나마나 장군님 말씀인데 누가 끌겠소.》

《하기는 그 령감들이 그런 일을 겪고도 장군님 말씀을 새겨듣지 못한다면 사람이라고 하겠소.》

《참 말도 별나게는 한다―그 로인들이 뭐 꼭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만 그렇겠소? 이 동무 말을 들어보오. 이 백바위골에서만도… 아니 동무, 왜 그러오?》

인섭이와 정귀하로인이야기를 몇마디 주고받던 태혁이는 진옥을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진옥은 너무나 긴장하여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지고 당장 매여달릴것처럼 태혁을 바라보고있었다.

《저 이제 그 로인들이 누구라고 그랬어요? 정말 그 유격대원의 이름을 다시한번 말씀해주세요.》

《어느 유격대원말이요?》

태혁은 눈을 끔뻑거리며 되물었다.

《이제 그 이사왔다는 유격대말이예요.》

《이사온 유격대가 어디 있소? 이사를 왔다는건 동무가 말하지 않았소? 무남이마을에 이사왔다는 로인이 우리 짐작에 저번에 우리 유격대를 찾아왔던 로인같단말이요.》

《이제 누구의 아버지라구 하지 않았어요. 그 유격대원말이예요.》

《아, 정지성동무말이요?》

《그래요. 정지성동무―그 동무가 옳을가요? 그 동무가 정말…》

《그 동무가 옳다니? 동무가 정지성동무를 아오?》

태혁은 눈이 둥그래서 진옥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 동무가 혹시―이렇게 키가 크고 눈이 우묵하게 들어간분이 아니예요?》

《신통한데, 동무가 어떻게 우리 정지성동무를 아오?》

태혁은 이렇게 말하며 인섭이를 돌아보았다. 인섭이는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다말고 호기심이 가득찬 눈으로 진옥을 바라보았다.

진옥은 더는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있었다. 또다시 굵다란 눈물방울이 뚝―떨어져서 얼어붙은 눈벌우에 자그마한 얼룩을 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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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도구치기로부터 머지않은 부후물등판에서 또다시 두개 중대의 병력이 유격대에게 얻어맞아서 풍지박산이 나버렸다는 소식은 하시모도가 아직 6도구에 머물러있을 때 들어왔었다. 그것은 혼마려단과 무다구찌려단이 추격해간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부대들만 결코 못지 않는 큰 력량이 아직도 대격전이 지나간 7도구치기어방에 남아있다는 움직일수 없는 증거였다.

《내가 뭐라고 하던가? 토벌을 하는데는 산불을 끄듯이 해야 한다고 꽁꽁 씹어서 말해주었는데 무엇들을 하고있는가? 불씨 하나만 남겨놓아도 그것이 다시 바람을 만나 큰불로 번져간단말이야. 그런데 이것은 자그마한 불씨가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을 그대로 남겨두었으니 대체 너희들이 일을 어떻게 하자는것인가? 너희들의 눈에는 제국의 운명은 그만두고 제 목을 겨누고 다가드는 유격대의 총칼이 보이지도 않는가?》

하시모도는 모리중좌는 말할것 없고 데라시마중장도 참가한 막료회의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모든 참가자들을 향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6도구일대에는 아직도 수만을 헤아리는 병력이 집결되여있었고 하시모도가 새로 떨군 지시에 따라 다시 수만의 군대가 몰려들고있었다. 군대뿐아니였다. 군량마차, 술통, 군복퉁구리, 털모자, 지어 계집년들까지 차칸에 빼곡빼곡 채워서 들이밀고있었다. 그러한 군량에 배가죽이 두터워진 몸뚱아리를 개털모자와 솜외투로 두툼하게 감고 배갈에 얼근히 취한 《무적황군》의 장병들이 떼를 지어 밀림으로 쓸어들었다. 6도구에서 진백란의 값싼 류행가에 넋을 빼앗긴 이 불쌍한 화상들은 밑이 빠지는줄도 모르고 룡강산맥과 장백산맥의 두 산줄기가 어울리는 대밀림속으로 보무당당히 쳐들어갔다. 숲도 눈도 산세도 다같이 장엄한 이 대자연속에 뿔뿔이 흩어져 시대착오적인 용맹성을 발휘한것들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지 알길은 없지만 저 아득한 지질시대의 무수한 공룡들처럼 필경은 지각속에 파묻힌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대단히 서슬푸른 형상이였고 그 수가 또한 엄청나서 얼핏 보매 장백―림강오지의 밀림을 다 집어삼킬듯 하였다.

적의 발악이 이처럼 절정에 이르자 김일성동지의 기묘한 전술과 전법은 더욱 그 위력을 떨치여 밀림은 《토벌대》의 죽음터로, 눈벌은 놈들의 저승길로 변했다.

김일성동지의 천재적인 전술과 전법에 의하여 유격대는 그 어떤 어려운 형편이 조성되고 앞뒤로 갈길이 절벽처럼 막혀버린 막다른 정황에서도 마치 하늘로 솟아오르고 땅속에 잦아들듯이 한순간에 없어지는가 하면 느닷없이 나타나서 놈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군하였다.

부후물등판을 떠나 얼마를 못가서 밀림속의 정황은 대단히 어렵게 되였다. 적들은 이 일대에 아직도 유격대의 대부대가 남아있다고 떠들면서 수많은 《토벌》무력을 집중시켜 그야말로 발걸음을 옮겨놓을수조차 없게 되였다.

유격대원들의 얼굴색도 달라졌다.

그러나 김일성동지의 안색에는 조그마한 변화도 없으시였다.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신 그이께서는 오히려 웃으시더니 이놈들이 수고스레 모여들었는데 이제는 헤쳐놓아야겠다고 하시면서 오백룡이 인솔한 습격조를 파견하시였다. 그들은 김일성동지께서 가르쳐주신대로 7도구방향으로 대부대가 행군해간듯 한 발자국을 내놓고 반대쪽에 있는 목재소어구에서 적 말파리떼를 습격하여 다섯필의 말을 로획해왔다.

그러자 유격대를 찾아헤매던 적들은 대부대가 7도구방향으로 행군해갔다고 저마다 웨쳐대면서 우르르 그리로 쏠려갔다.

유격대는 말파리떼를 습격하여 해결한 식량으로 한동안 배불리 먹으면서 천천히 장백 깊은곳으로 이동해갔다.

한번은 완전히 포위속에 들번도 하였다. 적들이 하도 많이 우글거리니 때로는 언제 발견되였는지도 모르게 적이 앞뒤로 달릴 때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때는 바로 적이 행군해가는 옆구리에 나타날 때도 있었다. 제꺽 정황을 판단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대원들을 미처 아물지 못한 적 포위환의 짬을 빠져나오게 하심으로써 적들끼리 사면팔방에서 서로 맞불질을 하여 밀림을 저희네 송장으로 뒤덮는 통쾌한 광경을 구경시켜주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처럼 어렵고 힘겨운 행군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적을 피하는데 전투의 목적을 두신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든지 이해 겨울에 적을 험한 눈구뎅이속으로 질질 끌고다니면서 놈들로 하여금 기껏 지쳐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게 만들데 대한 방침을 완강하게 관철해나가시였다. 하기에 적들이 어찌다 아군의 발자국을 놓쳐서 미처 따라오지 못하면 일부러 습격조를 파견하시여 놈들의 숙영지 한복판을 들쑤셔놓게도 하시고 혹은 적의 발자국자리가 대통로처럼 나있는곳으로 행군해갔다가 그 발자국을 다시 적의 발자국자리에 이어놓고 감쪽같이 사라짐으로써 적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고 혼란에 바져 골을 내저으며 주저앉게도 만드시였다. 이렇게 적들이 눈구뎅이에 앉아뭉개면서 갈길 몰라 헤매일 때는 의례 그 뒤통수를 향하여 유격대의 세찬 교차사격소리와 돌격함성이 울리게 마련이였다.

이쯤 들이쳐서 적들이 또다시 밀림을 뒤덮을 즈음이면 놈들의 텅빈 후방에 습격조를 파견하시여 가까스로 밀림속에 숙영지를 잡으려는 놈들을 숨을 태울 사이도 없이 후방방비를 위하여 되달려가지 않을수 없게 하시였다.

적들은 완전히 김일성동지의 손바닥우에서 놀아났다. 그이께서 쥐락펴락하시는데 따라 밀림으로 쓸어들었다가 후방으로 달려갔다가 하는 놀음을 몇차례 거듭하는 사이 적부대들은 초침을 해놓은것처럼 흐물흐물해지고 걸레쪽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사나운 눈보라와 추위, 끊임없이 계속되는 행군과 전투는 유격대원들에게 실로 전고미문의 시련이였다. 그러나 김일성동지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전법에 걸려 박달나무 얼어터지는 대밀림속의 눈벌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왜놈 《토벌대》의 몰골은 그보다 몇갑절 참혹하였다.

그것이 유격대원들의 극도로 지치고 허기진 육체에 힘을 주고 신심을 주고 자랑을 주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 한순간에 일행천리하는 비상한 기동력, 적들의 면전에서 승천입지하듯 사라지는 기적을 빚어내는가 하면 청청하늘에 뢰성벽력을 불러오듯 불의에 적을 들이쳐서 넋을 빼여놓는 용맹과 슬기를 키워냈다.

하시모도는 거듭되는 참패소식에 약이 오를대로 올라 또다시 새 병력을 밀림에 들이미는 한편 후방방비를 철통같이 강화하라고 데라시마와 모리를 다몰아쳤다. 데라시마도 모리도 황급해나서 제놈들대로 일선지휘관들에게 상욕을 퍼붓는가 하면 인민들을 못살게 들볶아댔다.

이러한 때 김일성동지께서는 대원들을 이끄시고 백바위골에서 산 하나를 넘어선 야산기슭의 천막안에 앉아계시였다. 7도구를 떠나서는 처음으로 치는 천막이였다.

《동무들, 풍을 치시오. 저놈들이 이제 모두 밀림속으로 깊숙이 몰려갔으니 우리가 이런 야산에 앉아있다는것을 눈치챈다 하더라도 내려오자면 한참 걸릴거요. 그러면 우리는 또 풍을 걷어가지고 숲속으로 들어가면 되오. 모두 몸들이 얼었는데 풍을 치고 오래간만에 뜨뜻하게 푹 녹입시다.》

사흘전 멀리 동네들이며 포대들까지 바라보이는 산기슭에 나와서 모두 눈이 둥그래있을 때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백바위골은 말할것 없고 장백―림강사이의 큰길이 불과 20리밖에 가로놓여있었다. 수만의 적 《토벌대》가 무시로 밀려다니고 동네마다 완전전투준비상태에 있는 왜놈수비대와 경찰들이 욱실거리는 주민지대의 바로 코앞이였다.

이런 야산기슭에 풍까지 치고 앉았다는것이 대원들을 몹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오백룡과 강봉수는 연기를 피우지 말라는것과 출입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지시를 벌써 몇번이나 곱씹어주었는지 모른다. 나어린 전령병이나 신대원들은 말할것 없고 경험 많은 전투원들도 정작 전투에 들어선 때보다 더 긴장되여있었다.

그러나 사령관동지께서는 웃으시며 적들이 욱실거리는 주민지대에 바싹 붙어앉은것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말씀하시였다.

《속담에도 등잔밑이 어둡다고 하지 않소.》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조용히 타오르는 우등불에 두손을 내대고 전사들을 돌아보시였다.

김일성동지의 말씀은 너무나 수수하고 너무나 간명하여서 그 한마디 말씀속에 깃들어있는 심오한 내용을 당시는 누구도 속속들이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장군님의 그 한마디 말씀속에 얼마나 큰 뜻과 거대한 힘이 요약되여있는가 하는것을 유격대원들은 차츰 느끼기 시작하였다.

다른 동무들과 마찬가지로 사령관동지께서 야산기슭에 천막을 치라고 하실 때 너무나 놀라서 자기의 놀란 심정을 그 누구와 터놓고 이야기해볼 생각도 못했던 정지성도 며칠이 지나 그 말씀의 결과가 엄연한 현실로 눈앞에 나타나자 새로운 놀라움을 가지고 이 겨울에 사령관동지께서 적용하신 전술과 전법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기 시작하였다.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은 오랜 세월을 두고 널리 보급된 말이고 사람마다 생활속에서 그러한 실례를 허다하게 목격해온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한 나라의 운명을 걸고 진행하는 혁명전쟁에서 수십만의 적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위력한 전법으로 전환시킬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상상해보지 못했을것이다.

적들은 그렇게도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를 찾아 온갖 힘과 가능성을 다 동원하였지만 바로 그 혁명의 사령부가 저희들의 코앞에 자리잡고있다는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냥 눈덮인 밀림속으로만 쓸어들어간다. 그들이 어리석어서인가? 물론 인간예지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두고볼 때 그리고 엄연한 현실을 눈앞에 놓고볼 때 그것은 어처구니없을만큼 어리석은것이 사실이지만 그 누가 그러한 정황에서 조선혁명의 사령부가 천고의 밀림속이 아니라 적들의 수많은 《토벌》무력이 도사리고있는 대도로변 야산에 있을터이니 밀림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대도로변을 뒤지라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혹 그 어떤 기적적인 존재가 있어서 그러한 판단을 내렸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좋은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할것이니 만일 적들이 그러한 기도로 나온다면 그때 조선인민혁명군은 또다시 숲속으로 사라지고말것이기때문이다.

전쟁과 전투에서 주동에 선다는것은 이처럼 중요하고 결정적인것이지만 그것을 그 누구나 쉽게 걷어쥘수 있는것이 아니다.

주도권을 틀어쥐기 위해서는 적의 약점과 강점을 샅샅이 꿰뚫고 있어야 하며 아군의 힘과 부족점을 정확히 알고있어야 한다. 만일 적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없다면 약점을 조성시키고 아군의 불리한 점을 유리한 점으로 만들 능력이 있어야 한다. 례를 들어 적은 수십만인데 아군은 한개 중대에 불과하다. 이 수적인 대비는 너무나 엄청나고 본질적인것이여서 이러한 력량상대비를 적의 전술상의 약점으로, 아군의 유리성으로 전변시킬 가능성은 보통상식으로는 있어보지도 않고 또 실지로 인류가 알고있는 그 어떤 전쟁력사에도 그 어느 유명한 병법에도 없었던것이다.

그러한것이 리치상으로 혹 가능한 경우에도 그것이 그 무슨 시험이나 놀음놀이가 아니라 인간들의 생명을 걸고 진행하는 전쟁이고 더구나 한나라 한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쟁일 때 그 운명을 책임진 사령관의 비범한 예지와 초인적인 의지가 없는 이상 실천에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것들이다.

실로 남패자에서 출발하여 장백땅에 이르는 간고한 싸움길에 김일성동지께서 창조하신 전략전술과 전법들은 하나같이 유사이래 처음으로 되는 독창적인것들의 련속이였기때문에 적들은 아무리 골머리를 쥐여짜도 그에 적합한 전략전술적대책을 내세울수 없었고 때로 그 어떤 조치를 취했다 해도 매번 때를 놓치군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적용하신 전술과 전법의 기본특징은 한마디로 말하여 한없이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데 있다. 이 독창성이야말로 사람마다 따를수도 없고 바로 그때문에 그 어떤 강대한 적도 매번 참담한 패배를 맛보게 하는 기본요인이다.

전쟁을 지휘하는 인간치고 그 누구가 싸움마당에서 머리를 쓰지 않을것인가. 하지만 태반의 경우에 그 사색활동은 기성의 경험, 기성의 리론의 테두리를 멀리 벗어나지 못하는것이다.

창조성은 전쟁에서 어느때나 주동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전제이다.

남패자회의에서 적들이 대무력으로써 우리 혁명을 교살하려는 기도에 대처하여 대부대로써 광활한 지역에 유격전쟁을 확대발전시킬 전략을 내세우신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전략을 관철하시는데서 전투국면마다 실로 다시없는 유연성과 자유분방한 전술을 적용해오시였다.

총체적으로 세개의 방면군은 항일전쟁의 전 국면을 놓고볼 때 그 어느때보다 광활한 전선에서 대규모적인 전투를 진행하고있지만 그 하나하나의 전선은 적의 공격성격에 가장 적합한 전투형식으로써 매번 적의 기도와 대무력을 무력한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적이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여 어마어마한 집체를 형성했을 때 아군은 뿔뿔이 흩어짐으로써 놈들로 하여금 엄혹한 추위와 사나운 자연의 제물로 되게 하였으며 적들이 아군을 따라 흩어질 때 아군은 재빨리 집중하여 적을 집중포화속에 몰아넣었다.

그 어떤자가 인간이 진행한 허구많은 전쟁의 력사에 다 통달하여 례컨데 알프스의 험준한 산발을 대담무쌍하게 극복한 사령관이나 적국 수도에까지 쳐들어갔다가 추위와 굶주림때문에 개고생을 하고 돌아온 황제의 경험에서 배우고 동서의 허구많은 병서를 다 뒤적인다 해도 이러한 전략전술과 전법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것이니 그가 오늘의 경험에서 배우고 그에 대처할 유효적절한 전술과 전법 혹은 무기를 만들어냈을 때 김일성동지께서는 또다시 새로운 전략전술과 전법을 내놓으시여 적들로 하여금 바로 그 유효적절한 전술과 전법 혹은 무기때문에 더 큰 타격을 입게 하실것이기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백전백승의 전략전술이다!》

정지성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 백전백승의 전략전술과 전법인즉 바로 김일성동지의 무한히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상에 근원을 두고있기때문에 전쟁과 전투의 국면마다 새롭고 끝이 없으며 그때마다 승리만을 약속하는것이라고 크나큰 자랑속에 확신하는것이였다.

정지성이가 커다란 감동을 가지고 이러한 생각을 하고있을 때 김일성동지께서는 벌써 새로운 정황에 대처한 새로운 사업을 포치하고계시였다.

그이께서는 사령부천막의 우등불가에 지휘관들과 일부 대원들을 불러들이신 다음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이제 우리는 남패자에서 채택한 방침대로 정치사업을 더욱 강화할 때가 되였습니다. 사실 여태까지는 적들을 떼버리기 위하여 계속 전투와 행군을 하다보니 인민들과의 련계를 활발히 짓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놈들이 모두 밀림으로 바라올라갔으니 우리는 지방혁명조직과 사업하는데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내 생각에는 장백땅에 아직도 살아있는 조직이 적지 않을것 같습니다. 공작원들을 더 내보내야겠습니다. 인민들이 지금 적들의 악선전에 좀 떨떨해있을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결심과 방침을 알려주는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만난을 무릅쓰고 국경지대로, 국내로 나가자는것도 구경은 이것을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7도구로부터 15도구에 이르는 넓은 지대에 공작원들이 파견되였다. 정지성이도 김태규도 떠나갔다. 그중의 한조가 백바위골에 나타난 한태혁과 박인섭의 조였다.

백바위골은 거리가 가까운 관계도 있지만 워낙 사령관동지께서 여러 공작조를 내보내실 때부터 이번 공작에서 중심은 구가점, 백바위골일대가 되여야 한다고 생각하신터이였다. 몇해전부터 박덕산을 내보내시여 이 일대에 혁명조직을 꾸리도록 하시고 그 실정을 낱낱이 료해해오신 그이께서는 이번 겨울과 같은 시련속에서도 능히 견디여낼만 한 잠재력이 백바위골일대의 조직에는 있을것이라고 굳게 믿고계시였다. 아니나다를가 한태혁이네는 떠나간지 이틀만에 돌아왔다.

겨울치고도 유난히 사납던 이해겨울 들어서 처음 보는 푸근한 날씨였다. 제법 따뜻한 해빛이 양지쪽을 쬐여 사령부의 천막끝에는 고드름조차 한두개 맺히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비서처에서 올려온 삐라와 학습교재 그리고 정지성이가 그지간 출판물에서 뽑아낸 자료철을 들여다보시다가 등사잉크냄새가 풍기는 그것들을 한손에 집어드시고 천막밖으로 나오시였다. 어디선가 다가오는 봄빛을 느끼시였던것이다.

그러나 천막밖은 여전히 사나운 겨울이였다. 바람이 자고 해빛이 이해겨울치고는 퍽 다양한 날씨였지만 어디에도 봄기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시였다. 성에가시가 가물거리는 해맑게 개인 하늘은 끝없이 높고 한없이 차거워보이였다. 사납고 긴 겨울이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시였다. 어디에도 봄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참으로 겨울다운 그 푸접없는 하늘의 표정에서 그이께서는 봄기운이 아니라 계절의 법칙을 느끼시는것이였다.

바야흐로 절기는 대, 소한의 고비를 넘기였다. 지금 추위는 한창 절정에 이른듯하지만 어차피 봄계절은 다가오는것이고 그러면 땅속에 숨죽인 생명들이 다시 활개를 치며 성장을 위하여 새 년륜을 새길것이다.

《재영동무.》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천막안에 대고 부르시였다. 사령관동지와 함께 대원들에게 나누어줄 학습교재와 지방조직에 내려보낼 삐라를 정리하고있던 김재영은 천막자락을 들치고 고개를 내밀더니 이깔나무옆에 서계시는 사령관동지의 뒤모습을 보자 달려나왔다.

《사령관동지 부르셨습니까?》

《불렀소. 참 상철이는 어디 갔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손짓으로 재영을 가까이 오도록 부르시며 물으시였다.

《저쪽 바위뒤에 갔습니다. 아까 거기다 자그맣게 불을 피우는것을 보았습니다.》

《그건 왜?》

《사령관동지께서 이제 학습한걸 검열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때문에 급해맞아서 그럽니다. 누가 옆에 있으면 머리가 섞갈려서 안된답니다. 불러오랍니까?》

《공부를 한다면 내버려두오. 재영동무 보기에 상철이가 공부를 열성적으로 하는것 같소?》

《………》

김재영은 고개를 떨구고 인차 입을 벌리지 않았다.

《왜? 잘하지 않는 모양이로군. 대답을 못하는것을 보니…》

《아닙니다. 요즘은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늘 하지 않습니다. 마당거우때도 꼭 사령관동지께서 나오셔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놉니다.》

《흠―아주 나쁜 버릇이로군. 워낙 공부해야 할 나이에 공부를 못하다보니 힘이 들어서 그럴거요. 그래 이제는 구구를 거의 다 외웠소?》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 아까도 저 앞을 지나면서 보니까 륙칠이, 륙칠이 하면서 꿍꿍거리고있었습니다.》

《이제 륙칠이라… 그러니 오늘밤까지 다 해낼가? 좀 힘들겠는걸.》

《참 야단났습니다. 구구는 도와줄수도 없습니다.》

김재영이도 걱정스럽게 말하였다.

《도와주다니? 그런것은 도와주면 안되오. 제 힘으로 해내야 합니다. 다른것도 다 그렇지만 특히 학습은 제 힘으로 해서 제 머리에 새겨야 합니다. 상철이 뒤를 누가 한평생 따라다니면서 구구를 대주고 10대강령을 대주고 할수는 없지 않소.》

재영은 자기가 사령관동지를 처음 모시게 됐을 때부터 다른 일에 들어서는 총을 다루는 법으로부터 불을 피우는 법, 눈길을 걷는 법에 이르기까지 번마다 손을 붙여 가르쳐주시고 도와주시면서도 학습만은 엄격하게 요구를 제기하시던 일을 상기하였다.

그때는 사령관동지께서 그런 말씀까지 하시지 않았다. 지금 상철이도 사령관동지의 깊은 뜻은 모르고 그저 그이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꾸중을 듣는것이 두려워 혼자 꿍꿍거리고있다. 그런것을 생각하니 괜히 가슴속이 안타까와났다.

《일없소. 이제 상철이도 재영동무처럼 리론서적을 쫙쫙 내려읽게 될거요. 그런데 아까 우리는 세상이 발전하는데는 반드시 법칙이 있다는데 대해 토론했지. 말하자면 노예사회는 봉건사회로, 봉건사회는 자본주의사회로 그리고 자본주의사회는 반드시 사회주의사회로 발전한다는것 말이요. 재영동무는 오늘 학습회에서 토론하게 되여있지?》

《소대장동무가 자꾸만 하라는데… 야단났습니다.》

김재영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야단날것 있소. 토론을 자꾸 해봐야 합니다. 내가 소대장동무에게 일부러 그런 과업을 주도록 권고를 했습니다.》

《야ㅡ그런걸… 그래서 소대장동무가 그렇게 무섭게 굴었군요. 왜 그렇게 딱딱한가 했습니다.》

《딱딱하다니? 그건 무슨 말이요?》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김재영을 주의깊이 돌아보시였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제가 글쎄 어떻게 사회발전법칙을 가지고 중대학습회에 나가 토론합니까?》

《왜 못한단말입니까? 재영동무, 훌륭한 유격대원이 되고 혁명가가 되자면 그런 때 어떻게 안할것인가 하고 생각할것이 아니라 어떻게 본때있게 해서 여러 사람들을 혁명에 불러일으킬것인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혁명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기회를 만들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합니다. 보시오. 우리 동무들은 지금 적들이 욱실거리는 속으로 인민들에게 혁명을 선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나가지 않소? 그런데 일부러 차려놓고 하라는판에 못한다고 해서야 그게 어디 유격대원의 말이라고 할수 있소?》

《그래도 이건 다 아는 사람들인데요뭐…》

재영은 사령관동지의 말씀이 점점 뜻이 깊은데로 번져가자 난처해져서 고개를 떨구고 사령관동지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응석기어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다 안다 해도 좋은 말을 계속 해주어야 한단 말이요. 그래서 혁명가라는 자각을 늘 가지도록 해야 하오. 사람이란 위대한것이지만 일정한 결함들도 가지지 않을수 없는거요. 그렇기때문에 늘 자기의 훌륭한 본성을 깨닫도록 그리고 그 의무에 충실하도록 해야 하는거요. 자, 이리 오오. 나와 같이 오늘 재영동무가 하게 된 토론문제를 생각해봅시다.》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김재영의 손을 잡아 곁으로 이끄시였다.

《저 하늘을 보오. 몹시 추워보이는 하늘이요. 저기 바늘처럼 반짝거리는것이 모두 공기가운데 있는 물기가 얼어서 저렇게 얼음가시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겨울에 우리는 봄을 내다보고있습니다. 재영동무 생각에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이처럼 추운 겨울에도 봄이 온다는것을 확신한다고 생각하오?》

《그것은 저―》

재영은 뻔한것을 물으시는것 같아 제깍 입을 떼기는 하였으나 정작 대답을 하자니 잘되지 않았다.

《저―그것은 해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추웠다가는 더워지구 그 다음엔 또 추워지구 해마다 그러는데요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제는 그것을 누구나 믿고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똑똑히 모르는 사람들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 까닭을 과학적으로 알고있다면 제가 겪어보지 않아도 그것을 확신할수 있습니다. 가령 북극이나 남극 같은데는 1년내내 추운 겨울이 계속됩니다. 물론 거기서도 기온이 철따라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의 봄이나 여름 같은 날씨는 없습니다. 반대로 저 적도부근에 가면 겨울이라는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곳에 가서 살아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알고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발전하는것도 그 까닭을 똑똑히 알면 공산주의사회에 아직 살아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이 더러운 계급사회를 두들겨엎은 다음에 세워야 할 사회가 사회주의―공산주의사회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자 보오, 저 하늘 한끝에서 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지 않소?》

사령관동지께서는 나어린 전령병의 어깨를 끼시고 아득히 높이개인 하늘을 가리키시였다.

김재영은 사령관동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서서 그이의 손길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륜곽이 흐릿한 겨울날의 해빛이 마주 내려다보고있었다. 지금은 빛이 엷어 그렇게 쳐다보는데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오래 바라보고있노라니 희끄무레한 그 해빛의 한복판에서 무엇인가 이글이글 소용돌이치는듯 한 기운이 느껴졌다. 해빛은 아득한 거리와 사나운 추위속에 가리워져 있어도 정말 하루빨리 봄을 마련하기 위하여 속에서 이글이글 불타고있는것이였다.

《사령관동지, 정말 느껴집니다. 봄이 느껴집니다.》

재영은 제 어깨우에 놓인 사령관동지의 한손을 잡고 몸을 돌려 그이를 마주 쳐다보며 소리쳤다.

《정말 느껴지오? 그렇다면 대단하오.》

사령관동지께서는 기쁨에 넘치신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재영의 어깨우에 한손을 마저 올려놓으시고 대견하신듯 발갛게 익은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시였다.

만약 이때 등뒤에서 여러 사람이 올라오는 발자국소리가 울리지 않았던들 사령관동지께서는 김재영과 함께 봄의 예감을 더 좀 즐기실수 있었을것이다.

오백룡과 강봉수가 백바위골에서 돌아온 한태혁과 박인섭을 데리고 올라왔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보고를 받으신 다음 한태혁과 박인섭의 손을 이끄시고 천막안으로 들어가시였다.

《자, 들어갑시다. 얼굴들이 퍼렇게 얼었군. 그래 내내 한지에서 보냈습니까?》

《아닙니다.》

하고 한태혁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씀드렸다.

《동네뒤에 범굴이 있었습니다. 깨끗하게 모래를 펴놓고 가마니까지 깔아놓았는데 얼마나 뜨뜻한지 모르겠습니다.》

《참, 들은 기억이 나오. 박덕산동무가 여기 나와 공작할 때 그런 굴속에서 지냈다고 말했소.》

사령관동지께서는 피뜩 박덕산이네가 떠나간 동강쪽을 돌아보시며 정에 넘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우리를 안내해준 방아간집주인도 정치위원동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굴속에 아직 커다란 통나무재털이가 그대로 놓여있더군요. 정말 얼마나 담배를 피웠는지 바위짬에 대진내가 배여있는것 같았습니다.》

《허허허, 그럴것입니다. 그렇게 담배를 좋아하던 동무가 마당거우에서는 담배때문에 무던히 고생을 하더니… 지금쯤 독한 엽초라도 한단 구해서 지고 다닌다면 좋겠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측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며 사위여가는 고깔불앞에 가 앉으시였다. 웃으시며 하신 말씀이였으나 어쩐지 물기에 젖어있는듯 한 그이의 목소리에 대원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였다. 해여진 군복에 갈갈이 판이 난 신들을 얼기설기 동여신고 더부룩한 머리를 숙인 그들은 모두 여위였으나 한결같이 뼈마디가 장사같은 큰 사나이들이였다.

하지만 그 억센 가슴들은 모두 정에 헤펐다. 김재영이 고깔불을 살피려고 손을 붙이자 저마다 이 일거리를 놓치지 않을 양으로 장작을 고른다 불을 분다 하면서 부산을 피웠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떨리는 입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저마끔 분주히 돌아가는 대원들을 이윽히 바라보시다가 아무것도 못느끼신듯 밝은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그래 백바위골 물방아간의 주인이 여전히 잘 있단말이겠습니다? 그 동무가 우리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습디까?》

한태혁이와 박인섭은 손에 쥐고있던 장작을 놓고 쭈밋쭈밋 일어났다.

《일없습니다. 앉아서 말하시오. 불을 쪼이면서… 난 백바위골에 대해 묻고싶은것이 많습니다. 조복순아주머니는 아직 그곳에 살고있습디까? 몸은 어떻답니까?》

사령관동지께서 억지로 앉히시는바람에 엉거주춤 앉으려던 두사람은 그이께서 조복순아주머니에 대한 말씀을 하시자 다시 일어섰다.

《왜 그러오? 조복순아주머니가 어떻게 됐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인차 심상치 않은 눈치를 채시고 다우쳐물으시였다.

《작년에…》

태혁은 이렇게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떠날 때 하시던 장군님의 여러가지 당부의 말씀을 상기할 때 유격대의 전투를 돕기 위하여 적탄을 맞으면서도 도끼를 들고 포대의 문을 까부신 그 아주머니를 그이께서 얼마나 걱정하고계신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는 그는 가슴아픈 소식을 낱낱이 찍어서 말씀드리는것이 마치 제 죄같이만 생각되여 차마 입이 벌어지지 않았던것이다.

장군님께서도 더는 말씀이 없으시였다. 스러져가던 고깔불은 다시 기세좋게 타올랐으나 천막안은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있었다.

《그 아주머니에게 조그마한 딸이 하나 있었겠는데…》

이윽고 장군님께서 침묵을 깨치시고 누구에게라없이 물으시였다.

《샘골에 사는 곽병철이라는 조국광복회원이 데리고있답니다.》

하고 이번에는 박인섭이가 짤막하게 대답을 드렸다. 그 말을 한 태혁이가 받아 이었다.

《저희들은 만나보지 못했는데 아주 좋은 사람같습니다. 제 아이만 해도 여덟이라고 합니다.》

《저런, 여덟이면 대단합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다시 밝아진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그래 그 동무가 조복순아주머니의 딸을 맡아 기른답니까?》

《그렇습니다. 아이가 너무 많기때문에 딴 사람들이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뭐 어떻게 고집이 센지 꺾을수가 없답니다. 아이없는 집에 데려가면 부담이 커지지만 아이가 많은 집이야 여덟이나 아홉이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하고 덥석 안고 일어서는바람에 말리지도 못했답니다. 그런데 끔찍하게 잘 기른답니다.》

《그렇습니까? 곽병철동무라…》

사령관동지께서는 한참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곽병철에 대해 이모저모로 더 물어보신 다음 백바위골의 조직과 동네형편을 료해하는데로 넘어가시였다.

백바위골에 조성된 삼엄한 정세에 대해서는 범상하게 들으시던 그이께서 그곳 인민들이 적들의 횡포한 탄압책동속에서 조직을 지키기 위하여 발휘한 용감성과 희생성 그리고 슬기로운 기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면서는 연신 감탄하시며 《대단합니다.》《참 훌륭합니다.》 하고 오백룡과 강봉수를 돌아보시였다. 원쑤와의 싸움에서 인민들이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것이라도 그이께서는 스쳐보내지 않으시였다.

마감에 정귀하로인과 주종섭로인네가 무남이로 이사를 갔다는것과 그들의 입을 통하여 7도구치기전투이야기가 압록강줄기를 따라 쫙 퍼졌다는것 그리고 백바위골에 정지성을 찾는 류진옥이라는 처녀가 있다는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동지께서는 깜짝 놀라시였다.

《류진옥이라니? 그 처녀가 방아간주인의 조카란말입니까? 이것 보시오.》

하고 그이께서는 오백룡의 손을 덥석 잡으시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그럼 방아간주인이 무산 옥암동 사는 류석진로인의 아들이나 조카란 말 아닙니까? 참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류진옥동무는 본시 옥암동에 있을 때도 잘 싸우던 동무입니다. 그 동무와 우리 정지성동무사이에는 상당히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내 언젠가 류석진로인이 우리한테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보시오. 혁명이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기막힌 이야기를 만들어내겠습니까. 혁명이란 참으로 기구하고 곡절 많은것입니다.》

《무산에서 왔다는 편지에 대해서는 저도 여러번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백룡이가 사령관동지의 기쁨에 넘치신 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흥분하여 말씀드렸다.

《옳습니다. 바로 그 편지를 보낸 로인이요. 로인이 손녀가 없어졌다고 몹시 가슴아파하더니 이렇게 살아서 훌륭히 싸우고있는걸 가지고.》

사령관동지께서는 말끝을 흐리시며 이윽히 너울거리는 고깔불의 불길을 바라보시였다.

참으로 기구한 이야기였다.

너울거리는 불길우에 그렇게 기구했던 수많은 리별과 상봉의 장면들이 겹쳐졌다.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시려고 백색테로가 미쳐날뛰고 구국군의 칼부림이 살판치는 안도의 거리와 마을, 소사하의 갈대숲속에서 활동하실 때 량강구로 가는 언덕에서 류충제령감을 만난것은 얼마나 기구한 일이였던가. 그 옛날의 육문중학교 교원이 조선혁명가들을 닥치는대로 잡아죽이는 그 《삼국연의》속의 군대같은 구국군부대의 참모장이 됐을줄이야 누가 알았으며 더구나 그 피비린내나는 언덕에서 그 옛날의 사제지간이 칼을 맞댄 군대들 한복판에서 만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에 짓밟히는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자는 애국의 한마음이 있었기에 그 상봉은 불가피하게 있게 마련이였고 또 바로 그러한 바탕우에 놓인 상봉이였기에 조선혁명가들과 구국군사이의 그처럼 첨예하던 관계도 풀수가 있었던것이다.

다른 종류의 상봉도 있다. 조선혁명의 운명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놓여있던 남패자의 밀림속에 리경락이가 나타난것은 또 얼마나 기막힌 운명의 곡절인가?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피한 상봉이라고 할밖에 없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자는 야수화된 인간이 나라와 민족을 건지자는 사람들앞에 언젠가는 나타나게 마련이기때문이다. 아직 헤여지기만 했지 만나지는 못한 동지들도 있다. 원쑤들도 있다. 언젠가는 그들과도 만나게 될것이다. 이 길은 비록 천고의 밀림속에 허리를 치는 눈을 헤치고 가는 길이지만 력사의 기본줄기를 이루고있기때문에 조선혁명과 인연을 가진 모든 운명이 이 길과 련결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조선혁명과 인연이 없는 그런 조선인민이 어디에 있겠는가. 류진옥이 이 막막한 밀림속에서 정지성이를 찾아내듯이 이 길에 한태혁이의 원쑤도 옥금이의 큰아버지도 다 나타날것이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문득 생각에서 깨여나시여 주위를 둘러보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 생각에 잠기시자 고깔불둘레에 모여앉은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생각을 좇고있었다. 그이께서는 정어린 눈길로 오백룡, 강봉수, 한태혁이, 박인섭 이렇게 사랑하는 대원들을 차례로 굽어보시였다. 조선혁명의 피어린 길우에서 청춘을 맞이하여 머지 않아 장년기에 들어설 그들은 10여년의 간고한 로정에 외양은 거칠어져 살뜰한것이 깃들일 틈이 있어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순박한 소년인 재영이조차 얼마나 뼈마디가 실하게 벌어져가는가. 그러나 그들의 그 구리빛 얼굴에 어리는 웃음과 슬픔은 어느 부드러운 피부에 어리는것보다도 더 숭고하고 아름다운 인간감정이다.

사령관동지게서는 엄숙하게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얼마나 좋은 일이요? 우리가 혁명을 하느라고 고생을 좀 하는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습니다. 류진옥동무가 정지성동무를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보오. 그리고 류석진로인이 손녀를 찾고 우리와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보시오. 그런 일을 위해서라면 이러한 고생쯤 능히 참을수 있는거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런 정도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 조국의 모든 인민들과 그렇게 만나보기 위해서 이 겨울을 싸우고있소. 동무들, 힘이 솟지 않습니까?》

《힘이 납니다.》

대원들은 일제히 힘차게 대답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어 백바위골에서 정치사업을 강화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공작조를 파견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한태혁을 백바위골공작조의 책임자로 임명하시고 여기에 박인섭과 김재영을 포함시키였다.

사령관동지께서 공작조의 성원을 임명하시자 한태혁과 박인섭은 한꺼번에 놀랐다. 태혁은 자기 이름이 불리우자 흠칠하며 고개를 번쩍 쳐드는데 박인섭은 눈이 퀭해져서 뭐라고 대답을 못드리고 멍하니 서있었다.

《인섭동무, 왜 그럽니까? 하기 힘들것 같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며 물으시였다.

《전, 도모지… 전 아직 그런 공작이라는것을 통 해보지 못했기때문에…》

하고 박인섭은 목을 눌린것처럼 연신 고개를 비틀며 더듬거렸다.

《전 이번에 갈 때도 그저 한동무를 따라갔다가 망이나 보고 왔는데…》

《일없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얼마든지 할수 있습니다. 이 일은 인섭동무가 꼭 해내야 합니다. 인섭동무가 나무를 켜는것만큼 정치공작을 하게 되면 우리 혁명의 힘은 갑절이나 커질것입니다. 그런데 내보기에 인섭동무는 나무를 켜는것보다 혁명사업을 훨씬 잘할수 있습니다. 저 태혁동무를 보시오.》

하고 그이께서는 인섭이보다 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태혁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시였다.

《태혁동무는 공작조의 책임을 졌습니다. 이 책임은 그전에 박덕산정위가 졌던 책임입니다. 그럼 한태혁동무가 박덕산정위만큼 그일을 못해내겠는가, 나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김일성동지의 말씀은 너무나 엄청난 과업앞에서 떨떨해있던 대원들을 긴장시켰다. 한태혁이도 김재영이도 차렷자세를 하고 똑바로 섰다. 인섭이 역시 입을 꼭 다물고 한없는 사랑과 믿음이 어린 그이의 그윽한 눈길을 바라보았다.

14

 

폭포에서 흘러내린 개울이 길우로 부풀어오른채 얼어붙어서 동네한복판을 째고나갔다. 이 개울건너에 있는 작은 동네는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는 샘이 있어서 따로 샘골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워낙 백바위골이 이루어지기를 백바위언저리에서 부대농사를 지어먹는 사람들이 한집 두집 늘어나서 생겼기때문에 호수도 많고 동네이름도 백바위골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백바위골을 지배하는것은 썩 후에 형성되고 호수도 절반밖에 안되는 샘골이요 그보다 더 서슬이 푸르기는 구가점이였다.

샘골에는 우선 경찰분서가 있고 구가점에는 작년부터 수비대무력이 한개 중대나 들어앉아있었으며 자위단이요 《민회》요 하는 관청부스레기까지도 몽땅 거기에 있었다.

장백―림강사이의 큰길도 구가점에서 샘골로 갈라져들어와서 경찰분서까지 이어져있었다. 집단부락이 되면서 동네 네귀마다 포대가 일어섰는데 그중 제일 큰 북문포대가 재작년 유격대의 불벼락을 맞은 그 포대였다.

조복순아주머니가 도끼로 포대문을 까부실 때만 해도 그밑에 있는 병영안에는 위만군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위만군들이 산으로 《토벌대》에 내몰려나가고 구가점에서 온 왜놈군대가 들어앉았다.

백바위골공작조가 떠나올 때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잠시 생각에 잠겨계시더니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조복순아주머니의 딸이 몇살이라고 했습니까?》

《새해 들어서 여섯살입니다.》

《여섯살이라… 그 애 이름이 아마 순애라고 하던것 같은데…》

한태혁이네는 잠자코 머리를 숙이고있었다. 이름까지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것이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무슨 생각이 나신듯 천막안을 둘러보시였다. 워낙 소박한 사령부의 살림살이였다. 더구나 두달이상 걸린 간고한 행군끝이라 전령병들이 늘 지고다니는 신문 잡지 퉁구리와 책더미가 한옆에 가려져있고 몇해째 쓰시는 물주전자가 끓고있을뿐이였다. 배낭이며 통나무를 켜놓은 걸상우를 더듬어보시는 그이의 눈가에는 쓸쓸한 빛이 어리였다.

《아무것도 없구만. 어머니는 혁명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는데 우리는 그 아이에게 줄것이 아무것도 없구만.》

사령관동지께서는 가볍게 한숨지으시며 고개를 드시였다. 천막자락이 펄럭거리였다. 바깥에서는 또 미친바람이 터져서 울부짖는다.

공작조성원들은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저미듯 아프게 울려오는 그이의 말씀을 들었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군수관을 부르시더니 돈을 좀 내놓으라고 하시였다. 군수관이 영문을 몰라 내놓는 돈뭉치를 헤여도 보지 않으시고 한태혁이에게 내주시며 김일성동지께서는 말씀하시였다.

《이걸 가지고 가서 공작비로도 쓰고 얼마간 떼여서 곽병철동무의 살림도 좀 보태주시오. 여섯살짜리 아이에게 무엇을 주었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줄것도 없고… 사탕이나 사주면 좋아하겠는지… 허허허.》

김일성동지께서는 쓸쓸하게 소리내여 웃으시였다. 대원들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이께서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시며 조용히 말씀을 이으시였다.

《우리는 많은 빚을 지고있는셈입니다. 그 애들에게 조국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조국을 찾아주면 조국은 그 애들에게 필요한 모든것을 줄것입니다. 곽병철동무에게 나의 뜨거운 인사를 전해주시오. 여덟이나 되는 아이를 기르는 구차한 살림을 하면서도 순애를 맡아 길러준다는 그 동무에게 우리 혁명이 무엇을 주면 그 은혜를 다 갚겠습니까. 내가 어제 밤을 밝히며 그 동무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그 동무 생각을 하니 용기가 나고 승리의 신심이 생깁니다. 그 동무에게 우리의 이런 심정을 꼭 전하시오. 그 동무가 우리 혁명에 준것은 단지 어머니 잃은 한 고아를 길러주는것뿐이 아닙니다. 그 동무는 우리 혁명에 새로운 신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것을 꼭 이야기하시오. 그리고 순애에게… 나대신 그 애가 외로와하지 않을 무슨 좋은 말을 좀 해주시오. 그 애가 기뻐서 웃을수 있는 그런 말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단 말이요.》

《알았습니다.》

공작조원들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대답을 올렸다. 한태혁은 지금 샘골포대가 저만치 바라보이는 신작로를 걸어가면서 사령관동지의 마지막 말씀을 되새겨보았다. 방아간주인 류창표는 공작원들이 성문포대밑까지 가는것을 한사코 말리였다. 지금 동네형편을 보면 거리에 나다니지 않는것이 옳을상도싶었다. 곽병철이를 불러다 만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한태혁은 떠나올 때 하시던 김일성동지의 그 가슴저려하시던 말씀을 생각할 때 꼭 찾아가서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전하며 또 순애의 자라는 형편도 제눈으로 보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 박인섭을 범굴에 떼여놓고 재영이와 함께 샘골로 건너왔는데 아닌게아니라 놈들의 경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은 샘골에 들어서는길로 길가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려 언배 한근과 호콩 한봉지를 샀다. 재영이 깨엿을 또 좀 사자고 해서 깨엿을 아홉아이가 두가락씩 먹을수 있게 스무가락 사고나니 그 옆에 진렬해놓은 고무신을 사고싶은 생각이 두사람 머리속에 똑같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한참 주무르며 서로 눈치만 보다가 종시 그냥 놓고말았다. 아이가 아홉인데 순애것만 산다는것도 별스럽고 아홉아이에게 한꺼번에 신을 사신긴다는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해방되기전에는 무엇을 해줄만 한것이 있어도 마음대로 할수 없다. 정말 사령관동지의 말씀대로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아이들에게 조국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사무쳤다.

그들이 가게방에서 나오자 별로 삽삽하게 굴던 주인이 뒤따라나와 문전에 널려있는 사과궤짝을 안으로 들이였다.

《저 사람이 새로 이사왔다는 그 사람인가요?》

하고 재영이 뒤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 모양이야. 여기 동무들이 좋은 사람같다니 좋은 사람이겠지. 그런데 저쪽 골목에서 또 한놈 나타났다.》

태혁은 바람을 피하는척하고 몸을 돌리며 구가점쪽 갈림길을 곁눈질해보았다.

《나도 보았어요. 자위단원 같아요.》

재영은 돌을 걷어찬듯이 비칠거리며 뒤를 다시한번 돌아보고 중얼거렸다.

허름한 양복에 개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쓴자가 구멍가게어방의 수수바자뒤에 몸을 감추었다.

《내버려둬. 한태혁이를 따라와봐야 총알밖에 얻어먹을게 없을테니…》

태혁은 괴나리보짐을 어깨에 걸친채 잔뜩 팔을 끼고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해제끼면 어떻게 해요?》

김재영이 눈이 올롱해서 만만찮게 되물었다.

《왜 겁이 나?》

《겁이 나긴요? 공작을 못하게 되니까 그러지요. 한동지는 또 싸움이나 한바탕 하고 돌아갈 작정인가요?》 《그랬으면 밤새 계획을 토의했을가. 걱정말라구. 꼭 계획대로 할테니.》

하고 한태혁은 흥얼흥얼 155절짜리 세계혁명가의 한구절을 웅얼거리며 여전히 태평스럽게 걸어간다.

 

곤륜산맥 날아넘어 구름속을 들어가니

높기도 하여라 저 산 이름은 무엇이냐

 

《저자식이 우리를 따라오는게 분명해요.》

재영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한번 뒤를 피뜩 돌아보고 속삭였다.

《가만있으래두, 동무는 동생이니까 형이 하라는대로 하면 될것아닌가. 형하고 같이 가면서 동생이 자꾸 나서면 안되는거야.》

재영은 하는수없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데 저앞에서 총을 멘 경관 두놈을 데리고 험하게 생긴 꽤 높아보이는 경관놈이 칼을 절컥거리며 마주왔다.

재영은 잔뜩 긴장되여 옆구리를 더듬었다. 정말 태혁이 말과 같이 총알이라도 먹이고 뛰여야 할 형편이 될지 모를 일이였다.

경관놈들은 여라문걸음앞에서 있는 갈림길에 서더니 이쪽을 여겨보았다. 보매 저쪽으로 꺾어져가려다가 수상한 사람이 마주오니 멎어선 모양이였다.

《아, 나리님들!》

별안간 한태혁이 팔짱을 끼였던 손을 뽑아흔들며 달려갔다.

《뭐야?》

상관인듯 한 험하게 생긴자가 깨여진 징소리같은 악청을 내뱉었다. 류진옥이가 말하던 두꺼비란놈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한태혁은 싱글벙글 웃으며 바싹 다가가서 구뻑하고 머리를 숙였다. 재영은 얼떠름해서 뒤따라가다가 두어걸음앞에서 멎어섰다. 곁눈질로 뒤쪽을 살펴보니 개털모자를 쓴 자위단놈은 잠시 서서 망설이다가 어느 집 담장밑으로 사라졌다.

《나리님, 말씀 좀 묻겠습니다.》

하고 한태혁은 다시 허리를 구부리며 싹싹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말이야?》

두꺼비는 힘꼴이나 씀직한 태혁의 지나칠만큼 공손한 태도가 오히려 불안한듯 긴장한 눈길로 아래우를 흝어보며 소리쳤다.

《저 경찰서가 어데 있습니까?》

《경찰서? 경찰서는 왜 물어?》

《서장님 좀 만나뵙자구요.》

《서장? 이자식 정신 나간놈 아니야? 여기는 경찰서가 없어.》

분서장 진가는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지 버릇된 거만한 투로 내뱉었다.

《경찰서가 없다니요? 그럼 나리님들은 어디에 다니십니까?》

한태혁은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이놈아, 말귀도 못알아들어? 여기는 경찰서가 없고 분서가 있단말이다.》

옆에 붙어서있던 바닥쇠경관놈이 추운 날 길을 지체시킨다고 역증스럽게 소리쳤다. 그러나 한태혁은 그까짓놈의 표정같은것은 알은체도 않고 말했다.

《네, 그렇습니까? 그거야 경찰서나 분서나 백성들에게야 매일반이지요. 그럼 분서장님이 계실것 아닙니까?》

《너 이놈, 분서장은 왜 찾아?》

두꺼비가 다시 태혁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런게 아니라 우리 형제는 백바위골사람들한테서 분서장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지요. 마음씨가 어질고 백성들의 일을 아주 잘 돌봐준다고들 하더군요.》

《어서 용건부터 말해. 무슨 일로 분서장을 만나자는거냐?》

진가는 벌써 적잖이 서슬이 풀린 목소리로 말하며 발발 동동 구르고 서있는 두 부하를 돌아보았다. 백성들의 평판이 어떤가 잘 들어두라는 표정이다.

《실은 우리 형제가 지금 아주 딱한 사정이 생겼습니다. 본시 우리 고향은 함경도 장진인데…》

《아, 아 언제 그런 긴 이야기를 다 듣겠는가? 간단히 용건을 말해라.》

《그렇습니까? 그럼 간단히 용건만 말씀드립지요.》

하고 태혁은 말투를 다시 가다듬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장백땅에서 살다살다 살길이 없어서 이번에 아버지초상을 치르고난김에 아예 자리를 뜨자구요…》

《아니 이놈아, 간단히 말하라는데 무슨 말을 자꾸 길게 늘어놓는가. 나는 바쁘단말이다.》

두꺼비는 쌩쌩 칼날같은 바람이 째고 지나는 길가에 서있자니 아무리 구수한 이야기를 한마디쯤 들었다 해도 더는 참을수 없었던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럼 경찰분서만 대주십시오. 전 분서장님한테 가서 사정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태혁은 시쁘둥해서 말하였다.

《이놈아, 분서장은 나다. 바로 내가 분서장이란말이다.》

두꺼비는 자존심이 상하여 개털외투를 입은 제가슴에 두들기며 소리쳤다.

《네 그렇습니까? 그럼 진작 그렇게 말씀해주시지 않구…》

하고 한태혁은 헤식은 웃음을 입가에 띠우며 다시한번 허리를 굽석하였다.

《그래 나한테 무슨 용건이 있느냐?》

《저 서장님, 우리 형제가 림강으로 가서 살자고 집을 팔고 세간살이를 몽땅 팔아가지고 길을 떠났는데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무엇이 어쨌단말이냐?》

《글쎄 어제 주막집에서 도적을 만나 주머니를 몽땅 털리고말았습니다.》

《뭐 도적을 만나? 어느 주막에서 그랬어?》

《간판도 없는 집인데 12도구사람들은 봉산주막집이라고 하더군요.》

12도구? 이놈아, 12도구 주막에서 잃은 돈을 내가 어떻게 한단 말이냐? 미친놈같으니라구.》

두꺼비분서장놈은 화가 나서 발을 탕 굴렀다.

《자 이거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사실이야 12도구에서도 경찰서에 갔댔지요. 그런데 거기 경찰은 말도 들어보지 않구 내쫓기부터 하는데요뭐. 그래 길을 오다가 들으니 모두 말들 하기를 백바위골서장님이 인정 많고 인품이 높다고 하면서 찾아가 사정하면 돈은 못찾아도 살아갈 길은 대줄것이라고 하더군요.》

12도구 관내가 원래 그렇다. 하지만 여기도 옛날과는 다르다. 요즘은 내가 너무 분주해서 일일이 백성들의 송사를 들을 짬이 없어.》

두꺼비는 또 백성들이 자기를 나삐 말하지 않는다는 소리에 마음이 누그러져서 제법 점잖게 말했다.

《서장님, 그러지 말고 하다못해 일자리라도 하나 마련해주십시오. 지금 정 바쁘시면 후날 다시 찾아가뵙겠습니다. 이거 이제는 로자도 떨어지고 림강까지 가봐야 살길이 막막한데 마음씨 어진 서장님밑에서 살고싶습니다.》

《아,아, 지금은 바빠서 그런 사정 볼 짬이 없대두. 자 어서 가자.》

두꺼비는 시끄러운 물건을 떼여버리듯 팔을 내저으며 부하들을 호령하여 저쪽길로 갈라져갔다.

《서장님, 안녕히 다녀가십시오. 후에 찾아가뵙겠습니다.》

한태혁은 깊숙이 허리를 구부리며 이렇게 인사를 하였다. 두꺼비는 돌아도 보지 않았다.

허리를 일으키는 태혁의 입가에는 웃음이 어려있었다. 처음에 간이 콩알만해 서있던 재영은 차츰 태혁의 의도를 알아채고 그에 맞추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있다가 같이 허리를 굽히며 웃었다.

《정말 태혁동지는 엉터리예요. 경찰놈앞에서까지 그렇게 우습게 굴줄은 몰랐어요.》

두꺼비네 일행이 저만치 사라지자 재영은 깔깔거리며 말했다.

《우습게 굴다니? 이게 다 필요한거야. 이제 저놈이 우리 보증이라도 서줄테니 두고보라구.》

태혁은 웃지도 않고 시뚝해서 걸음을 옮겨놓았다.

곽병철이네 집은 바로 왜놈수비대가 들어있는 성문포대앞이였다.

지짐냄새가 찬바람속에 떠도는 지저분한 음식점과 달구지채며 바퀴따위가 널려있는 대장간이 나란히 서있는 나무장터 한구석에 울타리도 없는 움막같은 단간집이 옹송그리고 앉아있었다.

류창표에게 세세히 물어오기는 하였으나 이처럼 집 찾기가 수월할줄은 몰랐다.

두사람은 주저할것 없이 문앞으로 다가갔다. 무어라고 주인을 찾을것인가 잠시 망설이는데 얼룩얼룩한 신문지며 광고장같은것들로 더덕더덕 덧바른데다 아래켠에는 무엇이 발로 걷어찼는지 살창채 메진 구멍에 걸레쪼박을 틀어막은 방문이 안으로부터 벌컥 열리였다.

《까꾸야, 까꾸야, 이담에 썰매 빌려달래만 봐라!》

이렇게 약올리는 소리와 함께 새까만 개구쟁이 한놈이 알몸이 드러난 앞가슴을 여미며 뜨락으로 굴러떨어졌다. 이어 방안에서 제법 우악스럽게 생긴 아이놈의 발이 문지방우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이새끼, 너 순애 목도리 자꾸 벗겨가지니까 그러지. 방안에서는 춥지 않니!》

뜨락에 굴러떨어진놈은 일여덟 나보이는데 일어나면서 뭐라고 또 한마디 응수를 하려다가 문앞에 우뚝 서있는 한태혁과 재영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비실비실 쫓기였다. 방금 발길질을 한것은 두어살 더먹어보이는게 형인 모양인데 그 애도 동생을 뒤쫓아나오다가 우뚝 섰다. 피뜩 안을 들여다보니 그보다 두어살 어려보이는 처녀애가 하나 있고 나머지는 모두 서너살 너덧살 나보이는 사내아이와 처녀아이가 한방 오구구 모여앉아 방금 있었던 싱갱이를 두고 짝장구르르 끓고있다.

낯선 사람들이 방안을 엿보는 눈치를 채자 문턱에 나섰던 아이가 앞을 막아서며 적의에 찬 눈초리로 아래우를 훑어본다.

방금까지 싸우던 동생놈도 한쪽으로 비실비실 돌아서며 두사람을 만만찮게 노려보고있다.

《얘, 이 집에 순애라는 아이가 있지?》

한태혁이가 다시한번 방안을 기웃하며 이렇게 물었다.

《없어요. 왜 그래요?》

대뜸 총알같은 대답이 맞받아나왔다.

《없어? 허허허.》

한태혁은 비로소 아이들의 잔뜩 긴장된 눈길을 느끼고 어처구니 없어 웃었다. 그리고보니 어두컴컴한 방안에서도 아이들이 입을 꼭 다물고 반들반들한 눈들을 이쪽에 겨누고있다.

《너 철봉이지?》

한태혁은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물었다.

《아니예요. 그 애는 철봉이가 아니예요.》

문턱에 선놈은 그냥 눈을 지릅뜨고있는데 마당에서 작은놈이 소리쳤다.

《그럼 은봉이로구나. 철봉이는 너냐?》

그러자 그 애는 좀 난처해져서 코를 훌 들여마시며 바지춤을 추겨올렸다.

《얘, 그렇게 쏘아보지 말아. 난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한태혁은 이러며 문턱에 선 은봉이를 방안으로 밀어넣고 제가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재영이, 그 애를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가오. 여기서 우물거리다가는 재미가 없어. 그래 아버지는 산에 나무하러 갔느냐?》

태혁은 칭칭 동인 신들메를 풀어헤치며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왜 남의 집에 막 들어와요?》

은봉이는 문턱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문틀 한짝을 꼭 움켜잡으며 되물었다.

《나?》하고 태혁은 이 집의 당당한 그 나어린 주인에게 말하였다.

《보아하니 은봉이가 꽤 사귈만 한 친구로구나. 내 터놓고 이야기하지. 난 유격대다. 너 유격대가 뭔지 아니?》

《정말이예요?》

은봉이는 피뜩 바깥에 서서 역시 신을 벗고있는 재영을 돌아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 아니구. 너 보겠니?》

한태혁은 은봉이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하여 제 허리춤을 슬쩍 쳐들어보이였다.

새까맣게 윤이 나는 권총을 보자 소년의 눈에는 금시에 환한 빛이 어리였다.

《야―유격대, 그럼 저… 저 형한테도 총이 있나요?》

《총이 있지 않구. 재영이, 보이라구.》

그러자 재영이도 히쭉 웃으며 옆구리에 찌른 권총을 보이였다.

《야―금봉이보다 작은데 총이 있네.》

이번에는 마당에서 철봉이란녀석이 소리쳤다. 그제야 방안 한구석에 오구구 모여앉았던 아이들이 어떤놈은 무릎걸음으로 껑충껑충 달려오고 처녀애들은 아기작거리며 벽쪽으로 붙어나오고 정 어린놈은 기여나왔다.

《야, 이놈들아, 어서 방안으로 들어가자. 경찰놈들이 보면 야단난다.》

한태혁은 아이들을 밀어붙이며 방안에 들어섰다. 뒤따라 철봉이가 달려들어오고 이어 재영이도 방안에 들어앉아 문을 닫았다.

여섯아이와 두 유격대원이 들어앉으니 그야말로 코구멍만 한 방안이 빼곡해졌다.

여기에 아버지를 따라 나무하러 갔다는 맏아들 금봉이와 필경 어머니에게 업혀갔을 막냉이 또숙이 그리고 제일 나이 우인 맏딸 효숙이에 두 부모가 돌아오면 들어앉을 자리도 있을상싶지 않다. 종일 해빛이라고 미친것 같지 않은 구석쪽에 실겅대를 가로매고 문짝처럼 누덕누덕 기운 이불 한채와 신문지로 바른 궤짝 하나를 댕그렇게 올려놓았다. 흙매질을 한 벽에는 홰대를 가로질러놓았는데 헌누데기나마 걸린 옷가지는 보이지 않았다. 실로 서발 막대 휘둘러봐야 걸릴것이라고 없는 방안이였다.

한태혁이 일어서면 머리가 서까래에 가닿을것 같은 낮은 방안이였으나 워낙 벽이 얇아서 그런지 외풍이 세서 그런지 먼지가 폴싹거리는 노전바닥은 싸늘하고 찬기운에 목덜미가 시려날 지경이다. 그래도 은봉이와 철봉이를 내놓고는 몽당치마를 걸친 처녀애들로부터 엉금엉금 기여다니는 세살짜리 총각애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아리를 드러내놓고있었다. 실겅대에 등을 대고 앉아있는 대여섯 나뵈는 처녀애만이 버선을 신고 목도리까지 감고있다.

눈이 오목하고 얼굴이 납죽하게 생긴것이 어딘가 이 집 아이들속에서 류다른데가 느껴져서 그 애가 바로 순애로구나 하는 짐작이 갔다.

《어머닌 어디 갔니?》

태혁은 찬찬히 바라보는 순애의 눈길을 한참 마주보다가 은봉이의 무릎을 툭 치며 물었다.

취락정〉에 일해주러 갔어요.》

《그럼 효숙이도 어머니 따라 갔느냐?》

《효숙이뿐 아니예요.》

하고 철봉이란놈이 슬쩍 가까이 다가들며 대답하였다.

《또숙이도 갔어요.》

《효숙이도 구가점까지 나가서 일하느냐?》

《그럼요.》

은봉이가 대답하였다.

《효숙이는 몇살이냐?》

《열다섯살.》

이번에는 순애와 나란히 앉아있던 처녀애가 대답하였다.

《넌 이름이 뭐냐?》

하고 태혁이가 물으니 그 애는 살짝 낯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쳇 바보같이… 그 애는 차숙이예요.》

한참 누이동생을 지켜보던 은봉이가 두덜거리며 대답하였다.

태혁이가 차숙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번에는 그 애 나이를 묻고있는데 무엇이 옆구리를 더듬었다. 돌아보니 어느새 한쪽구석에 퍼더앉아있던 제일 어린놈이 엉금엉금 기여나와서 제잡담하고 권총을 들추어내자는판이다.

《야, 이놈 봐라, 남의 무기를 막 떼가자는게구나.》

태혁은 벌거벗은 그 애의 넙적다리를 아프지 않게 한대 철썩 갈기고 닁큼 안아올렸다.

《이잉, 나 총 가질래, 총 가질래―》

아이는 태혁의 머리우에서 발버둥질을 하며 소리쳤다.

《야, 막봉아, 총소리 하지 말어.》

은봉이가 엄하게 소리쳤다.

《그래, 형 말이 옳다. 총소리 하면 왜놈들이 달려든다. 가만, 내좋은거 줄게. 재영이, 그 보따리를 끄르라구.》

김재영은 옆에 놓인 괴나리보짐을 서둘러 풀었다. 새까맣게 언배와 호콩봉지가 나오자 기웃하고 들여다보던 철봉이란놈이 벌떡 일어났다.

《야―콩이다. 깨엿도 있다.》

아이들과 사귀기란 식은죽먹기였다. 더구나 곽병철이네 아이들은 이름과 같이 단순하고 솔직해서 낯선 사람이 수상하다고 보았을 때는 곁을 안주었지만 유격대라는것이 명백해지고 저희들을 사랑해준다는것을 느끼게 되자 개구쟁이 본성을 드러냈다. 그중에 좀 숫기가 적고 몸도 약해보이는 넷째 석봉이조차 제몫을 떼울가봐 새까만 손을 보짐속으로 날쌔게 들이미는데 먹어대는 모양이 번개불에 콩구워먹듯하였다. 두 계집애들만은 역시 얌전을 빼였다. 그중에도 순애는 마감까지 미심쩍은 기색을 오목한 눈에 담고있었다.

은봉이는 그런 순애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그 애앞으로 엿이랑 배랑 밀어내놓는다. 그래도 순애가 움직이지 않자 차숙이가 제몫과 함께 그것을 집어서 몽당치마우에 놓고 감싸주었다.

태혁이와 재영은 순애의 아이답지 않은 그런 몸가짐에서 어머니를 잃은 그 애의 슬픈 운명을 보는듯하여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이애, 이리 오너라. 순애야, 이리 와.》

태혁은 손을 뻗치며 아이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여전히 오목한 눈을 치뜨고 바라볼뿐 움직이지 않는다.

《얘 순애야, 너 나하고 친하자. 나하고 친하면 참 좋다. 이리 오너라. 내 좋은 이얘기 해줄게.》

그러자 순애가 무어라고 입을 벌리기전에 철봉이가 비집고 나섰다.

《아저씨는 김일성장군님 알아요?》

김일성장군님?》

태혁은 순애에게 뻗치려던 손을 엉거주춤 멈추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와삭와삭하고 얼음이 박힌 배를 씹고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입들을 멈추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빤히 태혁을 지켜본다.

《알지 않구. 우리는 김일성장군님의 명령을 받고 너희들에게 왔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순애랑 너희들을 모두 좋은 아이들이라고 칭찬하시였다. 이 엿이랑 콩이랑 모두 김일성장군님께서 너희들에게 보내시는거다.》

《야―》

태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환성을 질렀다.

《정말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들을 알아요?》

은봉이가 신중한 낯빛으로 물었다.

《다 아신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모르시는 일이란 이 세상에 없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너희들의 아버지가 아주 훌륭한 혁명가라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저 순애 어머니가 유격대를 돕기 위하여 목숨바쳐 싸운 이야기도 다 알고계신다.》

《정말 아저씨.》

하고 철봉이가 와짝 다가붙더니 큰 비밀이나 대주듯 귀속말로 속삭였다.

《저 순애한텐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댕기가 있어요.》

《그래?》

태혁은 놀라서 부르짖었다.

《정말 저 애에게 댕기가 있을거예요.》

하고 재영이가 귀띔하였다.

《작년설에 사령관동지께서 장백인민들에게 여러가지 선물을 보내시지 않았어요. 그때 조복순어머니네 집에 딸이 있다는것을 아시고 댕기감을 마련해보내시는걸 봤어요.》

《난 김일성장군님하고 친하거던.》

재영이의 말이 끝나자 순애가 그 오목한 눈을 자랑스럽게 빛내이며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야 참, 순애는 좋겠구나. 장군님께서도 너하고 무척 친하다고 말씀하셨다.》

태혁은 이러며 순애의 손을 잡아 자기에게로 끌었다.

《정말?》

순애는 태혁에게 끌려와 무릎에 앉으면서 고개를 꼬고 물었다.

《정말이 아니구. 장군님께서는 우리 순애가 울지 않고 잘 노는지 모르겠다고 몇번이나 말씀하셨어.》

《나도 다 알아.》

순애는 확신에 찬 어조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였다.

《그래? 네가 어떻게 아니?》

《어머니가 말해주었거던. 그리고 아버지도 말해주었거던.》

《아버지?》

《그럼, 아버지가 밤마다 내 귀에 대고 가만히 말해주었거던.》

태혁은 영문을 몰라 은봉이를 돌아보았다.

《그 애는 우리 아버지하고 자요.》

둘째의 이러한 말을 듣자 태혁의 가슴은 다시한번 찌르르해졌다. 어머니를 혁명에 바치고 오직 장군님 한분만을 믿고 살아가는 나어린 소녀의 정상이나 이 가난한 살림에 혁명동지의 딸을 걷어안고 제자식보다 더 사랑과 정을 기울여 길러나가는 곽병철일가의 정상이나 다같이 가슴을 치는것이 있었다.

순애는 치마말기를 더듬더니 자그마한 손수건에 꽁꽁 싼 자주빛비단댕기를 꺼내보였다. 세살짜리 막봉이만이 재영의 권총을 더듬어 내느라고 매달려있고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그 댕기를 들여다보았다.

《정말 곱구나. 장군님께서 순애를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이렇게도 고운 댕기를 보내주셨을가…》

하고 태혁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물었다.

《얘, 그런데 왜 여태 드리지 않니?》

《엄마가 가만히 뒀다가 장군님 오실 때 드리라고 했어. 난 이제 장군님 오시면 어머니에게 머리 곱게 땋고 댕기 들여달랠테야.》

이날따라 곽병철의 내외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았다. 재영이가 부엌을 뒤져봐야 먹을만 한것은 없었다. 그래 은봉이와 철봉이를 내보내여 군고구마를 20전어치 사다가 아이들의 요기를 시켰다.

한태혁은 아이들에게 155절짜리 세계혁명가중 근 20절이나 불러주었으며 재영은 끝내 막봉이에게 권총을 떼웠다. 한태혁이도 자꾸만 달라붙는 아이들의 청을 차마 거절할수가 없어 돌아가며 한번씩 탄알을 뽑은 권총을 쥐여주었다.

범굴에 벌려놓은 일때문에 곽병철은 만나보지도 못하고 일어서는데 아이들이 따라나섰다. 마당가에서 순애는 오목한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해서 물었다.

《아저씨, 장군님께서는 언제 오시나?》

태혁은 돌아섰던 발길을 다시 멈추었다. 그는 순애를 번쩍 높이 안아올리며 볼을 비볐다.

《순애야, 이제 장군님께서는 저 산에 눈이 녹고 봄이 오면 왜놈들을 치시고 여기로 나오실거다. 그때면 순애도 장군님을 만나뵈올수 있다.》

아이들과의 리별은 이러한 감정에 대범한 태혁의 가슴을 몹시 알찌근하게 만들었다. 그는 연신 큰눈을 슴뻑거리며

《얘들아, 씩씩하게 잘 놀아라. 어떤놈한테도 숙보이지 않게 자라야 한다.》하고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15

 

우등불은 캄캄한 하늘을 불태우며 세차게 타올랐다. 발장단, 손벽장단이 너울거리는 우등불에 바람을 몰아주듯 고조되는 노래소리에 따라 불길은 하늘높이 치솟아올랐다. 구새먹은 진대통을 쾅쾅 울리는 동무도 있다. 군수관 조진범이다. 모든 유격대원들이 기뻐하는중에도 군수관의 기쁨은 다른 누구에게 비할바가 아니였다. 오래간만에 지방인민들을 만나 춤추며 노래하는 이 판에 그들이 지고 온 식량과 원호물자가 무둑히 그의 손아귀에 쥐여진것이였다.

 

사람은 사람이라 이름 가질때

자유권을 똑같이 가지고 났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가》를 다 부르고나자 누군가가 다시 《자유가》의 선창을 뗐다. 경쾌하고 희망찬 선률은 신명이 나서 들먹거리는 혁명전사들의 기분에 꼭 들어맞았다. 진대통을 두들겨대던 조진범은 더는 앉아서 견딜수가 없어 두손을 어깨우에 까부려붙이고 한쪽발을 쳐들어 들썩거리며 가운데로 나갔다.

《좋다―》

1소대의 춤명수인 2분대장이 이렇게 소리치며 조진범의 맞은쪽에서 역시 두팔을 쳐들고 우등불가로 나왔다. 인민혁명군대원들 사이사이에 끼여앉은 백바위골의 조직원들도 저마다 어깨를 들썩거렸다.

 

자유권 없이는 살아도 죽은것이니

목숨은 버리여도 자유 못버려

 

노래는 더욱 잦은가락으로 넘어가고 숨가쁜 손벽소리에 눈덮인 숲이 쩡쩡 울리였다.

커다랗게 피워올린 우등불밑에서는 얼음이 녹아내리였다. 춤군들은 하나 둘 늘어나 질쩍거리는 풀밭우에서 진창이 튀였다. 그러나 얼굴들이 벌겋게 익은 인민혁명군전사들이나 백바위골인민들이나 모두 더욱 열을 올려 앉은자리에서도 어깨와 다리를 들썩거리였다. 샘골에 산다는 중늙은이의 풍신 좋은 구레나룻이 너울거리는 불길을 따라 함께 춤추듯 흔들리였다.

한가운데 뻗치고 앉아있던 오백룡이 곽병철의 손목을 잡고 일어서는바람에 춤판은 더욱 고조되였다. 원래 입도 몸도 다 무겁고 육중한 그가 춤판에 뛰여드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무거운 오백룡이의 몸도 들썩거리지 않을수 없는 밤이였다.

《좋다―》

하고 오백룡은 막춤을 한참 추고 돌아가다가 허공에서 손벽을 딱 치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둥그렇게 둘러앉은 군중을 향하여 허리를 꺼꺼부정하게 구부리고 노래 한대목을 뽑아넘기였다.

 

자유권 없이는 살아도 죽은것이니

목숨은 버리여도 자유 못버려

 

뜻밖에도 웅글고 구성진 가락이 굵직하게 울려나왔다. 손벽을 짝짝 쳐대던 전사들은 너무나 놀라 손을 멈추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오백룡이가 이처럼 멋들어진 노래를 부를줄 안다는것은 적어도 박덕산이가 롱담을 한다든가 강철룡이가 눈물을 흘리는것과 맞먹을만큼 놀라운 일이였다. 그는 필요한 때 직접 전투를 하러 나가는 일은 자주 있어도 이렇게 오락회에 참가하는 일은 퍽 드물었다. 사령부호위임무를 책임진 그로서는 모든 전사들이 춤추며 즐길 때에도 경계근무를 짜고 돌아보아야 했으며 남이 보지 못하는데서 래일 있을 일, 앞으로 예견되는 사령부의 행군방향 등을 미리 연구하고 필요한 호위대책을 세워야 했다. 혹 사령관동지께서 몸소 오락회에 참가하시는 경우에조차 그는 그이의 신변을 떠날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김일성동지께서 한태혁의 보고를 처리하시기 위하여 천막에 계시면서 일부러 이러한 모임을 조직하여 인민혁명군전사들과 지방인민들이 함께 즐기게 하라고 과업을 그에게 주신것이였다.

《곽동지, 어떻습니까? 정말 목숨은 버린다 해도 자유는 버릴수가 없지요?》

오백룡에게 끌려나온 곽병철은 얼굴이 새빨갛게 되여 쩔쩔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덟아이를 거느린 아버지로서 째지게 가난한 살림도 돌아보지 않고 혁명동지의 외딸을 서슴없이 걷어안아 기른다는 백바위골의 강직한 조국광복회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전사들은 모두 몸집이 우람찬 호걸같은 사람을 눈앞에 그려보았었다. 그런데 어제 한태혁이가 그사이 진행된 공작정형보고와 함께 원호물자의 일부를 바로 곽병철이에게 책임을 지워 산으로 올려보내였다. 한태혁이와 미리 약속한 지점에 나가 인민들을 맞이한 강봉수는 암호가 다 맞아떨어지고 자기자신이 곽병철이라는 인사의 말까지 들은 다음에도 한동안 떨떨해있었다. 곽병철이는 결코 몸집이 크지도 않았고 호걸같은 거동도 할줄 모르는 보통사람이였다. 몸집으로 말하면 오히려 체소하고 고생살이에 쪼들린 얼굴은 가무잡잡한데다가 추위에 잔뜩 얼어서 가냘파보이기까지 하였다. 목소리는 쎅쎅 갈리는데 자주 기침을 깇었다. 눈도, 코도, 얼굴도 다 자드락자드락한 그에게서 사람을 놀래울만 한 어떤 영웅적인 행동을 기대하기란 애초에 가망없는 일같았다. 그러나 사람의 외양이 어느 경우에나 그 한없이 깊고 넓은 정신세계를 다 반영할수는 없는것이다. 곽병철이가 험악한 세상에 그렇게 고생스럽게 살면서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인정과 혁명적의리를 드팀없이 꿋꿋이 지키고있다는것자체가 김일성동지의 말씀과 같이 벌써 영웅적인것이였다. 실지 그는 거듭되는 시련의 중하를 그 앙상한 어깨우에 떠받들고 백색테로가 피를 물고 날치는 무시무시한 땅에 억세게 일어나 혁명조직을 지켜나가고있다. 류창표의 말에 의하면 그는 조직의 요구라면 어떤 위험도 돌아보지 않고 제기된 과업을 제때에 해결하였는데 정세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함없이 강한 요구성을 가지고 자기자신이나 동지들을 한결같이 엄격하게 대한다는것이였다. 강봉수는 그가 메고온 낟알마대를 억지로 빼앗아 메여보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지난 두달사이의 고난에 찬 강행군에 적잖게 지쳤다고는 하지만 강봉수 역시 유격대에서 힘꼴이나 쓰는 사람이였다. 그런데 그 마대를 메자 허리가 휘청하는것을 느꼈다. 그것을 메고 백바위골에서 여기까지 줄곧 눈덮인 강파로운 올림받이 험한 길을 걸어와가지고도 깍듯이 인사를 차리는 그를 보고 강봉수는 비로소 곽병철이라는 사람의 깊은 속을 들여다본듯하였다.

곽병철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삽시에 숙영지에 퍼져 그가 사령관동지의 접견을 받고있는 동안 전사들사이에도 내내 그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돌아갔다.

그런데 강봉수의 안내를 받아 우등불가에 나타난 곽병철은 어떠한가? 사실 곽병철을 본 모든 인민혁명군전사들이 겉으로 표현을 했든 안했든 모두 강봉수같은 심정이였던것은 숨길수 없었다.

지금도 그는 오백룡이에게 잡힌 팔을 어떻게 건사했으면 좋을지 몰라 쩔쩔매고있다. 하지만 어색해서 허둥거리는 그의 자그마한 눈은 얼마나 맑고 지혜로우며 또 굳센 의지를 담고있는것인가. 그역시 기뻐서 어찌할줄 몰라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씨 어지고 착한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곽병철은 고난앞에서는 용감하지만 즐겁고 기쁜 일에 들어서는 한없이 겸손하고 수집어하는것이다.

이러한 곽병철을 첫눈에 꿰뚫어보신것은 김일성동지시였다.

그이께서는 천막에 들어설 때부터 마치 숫기 없는 소년이 어려운 어른앞에 나서듯이 침착성을 잃고 쭈밋거리는 그에게서 영웅적인것의 너무나 소박하고 평범한 표현형식을 보시였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위대성을 장식하는 아름다움이였다.

《곽병철동무, 반갑습니다. 어서 이리 오십시오.》

그이께서는 서둘러 마주 나가시여 곽병철을 한몸에 꽉 그러안으시였다.

《장군님.》

어리둥절해 서있던 곽병철은 그만에야 김일성동지의 넓은 품에 와락 매달리며 목메여 불렀다.

《고맙습니다. 참말로 고맙습니다. 내 곽동무의 심정을 짐작합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처음 만나시는 곽병철과 오랜 지기인것처럼 그의 속마음을 다 헤아려보시고 말씀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곽병철의 심정이 그렇게도 선명히 리해되시였다. 그것은 그이께서 백바위골 형편에 대해 오래동안 심려를 해오신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워낙 곽병철이와 같은 사람의 심정은 너무나 낯익으신것이였다. 그이께서 만나보신 많은 조선사람, 근로인민의 생활감정이나 사고방식은 꼭 그러하였고 그이께서 무시로 그려보시는 인민의 표상은 바로 곽병철이와 같이 용감하고 억센 넋과 소박하고 평범한 외양을 가진 그러한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와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살림살이형편에 대해서, 동네에 돌아가는 소문에 대해서, 지어 마을사람들의 식구며 아이들의 이름과 성품에 대해서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으시였다. 곽병철이며 다른 백바위골사람들은 장군님께서 너무나 범상한 일상사를 물으시는바람에 처음 한동안 어리둥절하였으나 차츰 그이의 소탈하신 인품에 익숙해져서 꼭 한집안간처럼 모든 이야기를 터놓게 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모든 이야기들에 저으기 마음이 끌리시였다.

《철봉이란놈이 그렇게 장난이 세찹니까? 〈취락정〉간판을 떼다가 헛간에 걸어놓았다니 여덟살치고는 좀 엉뚱하긴 합니다. 그러나 순애를 건드리지 않는다는것을 보면 속이 깊은 아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한 농민이 6도구로 나무를 싣고 가서 팔았으면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다는 말에 대해서는 지금 6도구에 왜놈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기때문에 잘못하면 나무를 아예 빼앗길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씀하시였다. 이처럼 인민들이 살아가는 일에 대해 여러가지로 의견을 주시면서 그 끝에는 반드시 그들이 혁명의 승리를 믿고 조직을 견결히 지키며 조직에서 주는 혁명임무를 어김없이 수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한태혁의 보고를 분석해보시고 해당한 대책을 세우시기 위하여 그들을 먼저 오락회장으로 내보내신 다음에도 그이께서는 곽병철이네들을 잘 돌볼데 대해 오백룡이나 강봉수를 통해 이모저모로 마음을 쓰시였다. 그러시고는 태혁의 공작보고를 읽어나가시였다.

평소의 자기 성미와 같이 수식사 하나 없이 사실만을 적은 태혁의 보고에는 언뜻 눈에 잘 드러나지 않던 그의 성격의 다른 일면이 반영되여있었다. 그렇게 덜퉁한 사나이인 그가 어떻게 그런데까지 주의가 미쳤을가싶을 정도로 백바위골의 적정이며 주목되는 인민들의 동태며 지형이며 돌아가는 소문이며 지어 《취락정》에 드나드는 놈들, 그 집의 하루 매상고까지 다 적혀있어서 구가점이나 백바위골에 가보지 못한 사람도 그 보고를 읽고나면 형편을 제손바닥 들여다보듯 알수 있었다.

그가운데서도 주목되는것은 구룡리조직에 대한 류진옥의 통보였다.

구룡리일대의 조직에 대해서는 그 형편을 알수가 없어 남패자에서부터 여간 궁금해하시지 않던 문제였다. 그래서 이곳에 도착하시는길로 정지성을 그리로 보내시였다. 그러나 지성의 보고에 의하면 허정학이가 마지막까지 절개를 지키고 장렬하게 전사했다는것을 알아냈을뿐 조직자체의 형편은 아직 알길이 없어서 새로 핵심들을 하나 둘 찾아내여 조직을 꾸리는중이라고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허정학의 그처럼 훌륭한 최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또 마지막까지 그를 도와준 류진옥에 대해 새삼스럽게 고마운 생각이 끓어오르시였다. 사실은 그를 위하여 정지성을 소환하시고 다른 동무를 그쪽으로 보내실 생각을 하고계시던 그이시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시고 해당한 지시들을 적어나가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 공작조들에 보낼 통신들과 선전물들을 다 준비해놓으신 다음 강봉수를 데리시고 오락회장소로 나오시니 우등불두리에서는 춤판이 한창이였다. 그이께서는 잠시 흥성거리는 우등불아래를 살펴보시다가 놀라서 말씀하시였다.

《저것 보시오. 곽병철동무가 춤판에 끌려나와 땀을 흘리고있습니다.》

《저것은 경위중대장동무가 아닙니까? 전 경위중대장동무가 춤을 추는것도 처음 봅니다. 괜찮게 추는것 같은데요.》

하고 강봉수도 춤판을 바라보며 놀라서 말하였다.

《오백룡동무야 워낙 춤을 잘 추지요. 노래도 잘합니다. 처음 왕청골안에 있을 때는 5중대에서 손꼽히는 장난군이였습니다. 그런데 혁명이 사람을 저렇게 바위같이 만들어놓았습니다. 지금은 일이 너무 많아서 오락회에도 참가할 짬이 없습니다. 내 오늘저녁은 일부러 오백룡동무를 내보냈습니다. 이런 판에 그래도 조선인민혁명군 전사들의 재간을 보여줄만 한 사람은 오백룡동무만 한 동무가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저 곽병철동무를 보시오. 완전히 끌려다닙니다. 허지만 저 어색한 팔다리의 동작속에 얼마나 진실한 마음이 내풍깁니까?》

우등불의 불그림자가 눈덮인 산정에 미묘한 형상을 그리며 너울거렸다. 바람은 옷깃에 펄럭거리고 푸른 달빛이 앙상한 나무가지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사령관동지께서 우등불가에 이르시니 와―하고 전사들이 일어서서 그이를 에워쌌다. 백바위골인민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이를 가운데 모시였다.

《자, 모두 앉으시오. 모두 이렇게 앉읍시다. 앉아서 노래를 계속 합시다. 참, 이 밤은 좋은 밤입니다. 밤새도록 춤추고 노래해도 지칠것 같지 않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 량옆의 사람들의 팔을 잡아이끄시며 함께 앉으시자 모두 따라들 앉았다. 한가운데 나섰던 오백룡이 다시 노래를 불렀다.

 

항일전쟁 불길 솟네 동포들아 일어나라

 

노래는 다시 메아리를 일으키며 밤하늘높이 울려갔다. 조선인민혁명군전사들은 서로 어깨를 겯고 물결치듯 몸을 흔들며 마음속의 격정을 노래의 가락에 담아 부르고 또 불렀다. 멀리 바라보이는 별빛, 아득히 열려진 밤하늘, 혁명전사들의 마음인양 세차게 타번지는 우등불, 설레이는 나무가지, 흩날리는 눈가루, 어느것이나 다 혁명의 한길우에 청춘을 바쳐가는 그들의 마음을 다정다감하게 만드는것이였다.

문득 오백룡이 다시 우등불앞에 나섰다.

《동무들 우리는 10년간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혁명을 해오지만 이해겨울처럼 간고한 시련을 겪어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있기때문입니다. 동무들, 내 말이 옳습니까?》

《옳습니다!》

산천이 떠나갈듯 한 우렁찬 목소리가 한꺼번에 호응하였다.

오백룡은 잠시 목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정중하게 뒤를 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모두의 이러한 심정을 담아 사령관동지께서 노래를 한마디 불러주셨으면 하고 청하는바입니다. 동무들,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다시 산을 뒤흔드는듯 한 웨침소리가 터져나왔다.

《허허허.》

사령관동지께서는 곽병철을 돌아보시며 너그럽게 웃으시였다.

《나는 우리 경위중대장동무가 뜻밖에 사령관을 추어주기때문에 좋은 일이 있을가 했더니 알고보니 나한테서 노래를 받아내자는 꿍꿍이였습니다. 참으로 빠져나가기 어려운 수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도 오락회에 참가했으니 응당 제 몫을 해야지요.》

사령관동지께서는 서글서글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일어서시여 옆에 선 매칠한 오리나무줄기를 짚으시였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혁띠고리를 만지작거리시며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

대원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설레이던 바람소리도 멎고 나무가지도 까딱 움직이지 않는다. 우등불만이 불티를 튀기며 너울거리는데 하늘에서는 휘영청 밝은 초생달이 온 누리에 은빛날실을 걸어놓고 황금의 바다처럼 헤여가고있었다.

 

내 고향을 떠나올 때 나의 어머니

 

광막한 우주공간처럼 시원하게 열린 장군님의 굵은 목소리가 은은하게 밤하늘 멀리로 울려갔다. 그러자 조용하던 바람이 눈을 뜬듯 천천히 나무가지를 흔들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우등불은 은은한 가락처럼 무겁게 너울거렸다. 별들이 구름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반짝반짝 눈을 깜빡거린다.

 

문앞에서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

 

장엄한 선률이 떨리며 흔들리며 하늘로 숲속으로 퍼져가자 혁명전사들의 가슴마다에 눈물겨운 감회가 넘치도록 부풀어올랐다.

지나온 시련의 수천수만리, 눈덮인 산정에 묻고 온 사랑과 우정과 청춘의 언약들, 력사의 돌개바람속에 흩날려보낸 귀중하고 그리운 그 모든것들의 영상과 추억이 한꺼번에 뒤설레이고 그 모든것들을 피와 눈물 속에 깡그리 묻어버리면서도 오직 하나 가슴속깊이 간직하고 오늘도 이 시련의 눈벌우에 서있는 사랑하는 조국, 위대한 혁명의 진리를 가슴저리도록 다시한번 부둥켜안아보는것이였다.

 

하시던 말씀, 아 귀에 쟁쟁해

 

달빛 푸른 이 밤 사랑하는 전사들을 한가슴에 품으신듯 우등불에 비치는 대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굽어보시며 우리 함께 혁명하자 노래부르시는 김일성장군님의 눈굽에도 젖어서 반짝이는 이슬이 맺혀있었다.

 

16

 

구룡리 고개길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두달전 원한 서린 이 고개길을 넘어가고 넘어올 때 삐걱거리던 좀쓴 달구지바퀴살이 눈물에 흐려보이던 그 산굽이에 오늘은 자욱히 눈이 깔렸다.

그러나 아우성치는 눈보라가 어찌면 이리도 가슴을 후덥게 해주는가.

원쑤들의 악착스런 고문에 숨진 허정학의 그 불멸의 넋이 오늘 이 고개에 혁명의 선풍을 몰아온때문일가, 아니면 아들의 시신을 싣고가면서도 눈물 한방울 안보이던 로부녀회원의 그 억센 기상이 이 장한 눈보라의 아우성으로 느껴지기때문일가.

진옥은 지금 허정학이 남기고간 조직의 보고를 가슴깊이 품고 마방골련락소를 찾아가는길이다.

범굴아지트에서 장군님의 지시를 전달받은것은 지난밤이 늦어서였다. 태혁은 장군님의 지시와 함께 구룡리조직에 보내는 선전물을 넘겨주면서 여러가지 당부를 많이 하였지만 너무나 흥분했던 진옥은 그것을 일일이 기억할수 없었다. 그저 김일성장군님께서 몸소 자기에게 이처럼 중요한 과업을 맡겨주셨다는것 그리고 장군님의 그처럼 큰 믿음속에서 그렇게도 한을 남기고 헤여지지 않을수 없었던 그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됐다는 생각때문에 두텁지 못한 가슴이 당장 뻐개질것처럼 숨만 가빠올랐었다.

그러나 정작 길에 나서니 안개속같이 흐리마리하던 태혁의 엄격한 주의사항들이 하나하나 선명히 떠올랐다. 뒤따르는놈이 없는가 하여 길이 굽이돌 때마다 일부러 나무밑에 앉아 한참씩 쉬다가 불쑥 길우에 나서서 뒤를 살폈다. 경찰이나 자위단 같은것이 보이면 제먼저 찾아가서 길을 묻기도 하였다. 낯익은 그 허정학이네 집에 가서는 더구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진옥은 일부러 길을 에돌아 그 집뒤에서 집안을 엿보았고 별 수상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것을 확인한 다음에도 우물가에 숨어 기다렸다. 낯익은 어머니가 항아리를 끼고 나오는것을 보고야 시간을 맞추어 우물가로 다가갔다.

어머니는 물을 좀 먹자는 낯선 처녀를 경각성있게 돌아보더니 깜짝 놀랐으나 인차 시치미를 뻑 따고 바가지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항아리를 이고 앞서 걸었다. 진옥은 어머니가 집안으로 사라진 다음에도 인차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후 어머니는 함지박을 이고 다시 나왔다.

그리하여 연자막이 저만치 바라보이는 산기슭에서 두사람은 비로소 손을 마주잡았다.

장군님의 소식과 어머니에게 보내시는 그이의 뜨거운 인사를 전하자 그리도 강직하던 로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정학아, 정학아.》하고 아들의 이름을 목메여 불렀다. 진옥이도 따라 울었다.

그러다나니 조직에 대한 보고문건을 넘겨받아가지고 다시 이 고개우에 올랐을 때는 짧은 겨울해가 벌써 서산마루에 기울어가고있었다.

아무리 련락이 다 되여있다지만 낯선 동네에 개를 짖기며 찾아가는것은 어느 모로 보나 재미없는 일이다. 마방골은 구룡리보다도 더 후미진곳이라 하지만 거기엔들 왜놈의 눈초리가 박혀있지 않겠는가, 고개를 넘어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꺾어들면 5리길이라고 한다. 부지런히 걸으면 저물기전에 가댈수도 있을것이다.

진옥은 치마자락에 휘감겨도는 눈보라도 느끼지 못하고 코등에 땀발이 내솟도록 부지런히 걸었다. 자기가 장군님의 소식을 기다리며 안타까이 헤매던 지난 반년동안의 그 쓰라린 시련의 고비들을 생각하면 저보다 몇갑절 더 험한 고초를 겪고있을 혁명동지들을 장군님 곁으로 부르게 될 이 보고를 한시바삐 공작원의 손에 넘겨야 한다. 허정학동지가 묻어두었던 이 보고에는 구룡리조직원들의 동태가 낱낱이 반영되여있다. 파괴된 조직을 두고, 흩어진 동지들을 두고 그리고 알길없는 혁명군의 소식을 두고 안타까이 가슴치며 한숨쉬고있을 그들, 그들에게 장군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리라는것을 진옥은 안다. 그들의 소식을 알게 되셨을 때 장군님께서는 또 얼마나 기뻐하실가.

진옥은 수상하게 볼 눈만 없다면 정갱이를 치는 눈이고 볼을 후려갈기는 눈보라도 아무것도 돌아볼것 없이 주먹을 부르쥐고 내달리고싶었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태혁이가 당부하던 주의사항을 하나하나 머리속에 새기며 마침내 마방골초입에 있는 객주집에 들어섰다.

전날 신갈파에서 넘어오는 소금바리가 이 마방골을 거쳐 무송 등지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 마바리군들이 묵고갔다는 객주집은 지금은 빈집처럼 한산하였다. 기웃해봐야 마방에도 객방에도 손님이라고 있어보이지 않는다.

《주인 계십니까?》

진옥은 사위를 한참 살펴본 다음 정지간앞으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대답도 없이 덜컥하고 바라지가 열리더니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중년사나이가 앉은채로 고개만 내민다.

《하루밤 묵어갈수 있을가요?》

《객주집에 묵어갈데가 없겠소? 어디로 가는 새애기요?》

《구룡리까지 가요.》

《뭐 구룡리?》

객주집주인은 흠칫 놀란 기색이더니 인차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아니 구룡리야 불과 5리남짓한곳인데 여기서 묵는단말이요?》

《먼길을 오다나니 너무 지쳐서 그래요.》

그제야 주인은 벌떡 일어났다.

《정 그렇다면 좀 기다리시오. 객방이 하나뿐인데 바깥손님이 들어서… 내 안방에 가보고오겠소.》

주인이 신을 끌며 마방뒤로 돌아간 다음에야 진옥은 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급한 마음을 안고오기는 하였지만 정작 암호를 교환하는 동안은 가슴이 옥죄여들었었다. 이제는 공작원을 만나 문건을 넘겨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김일성장군님께서 주신 첫 임무를 실수없이 수행하게 되는것이다.

진옥은 비로소 이마며 코등에 맺힌 가는 땀방울을 훔치고 버선목에 달라붙은 눈을 털었다. 그러는데 아까 사라졌던 마방모퉁이에서 주인이 나타나더니 수군수군 귀전에 대고 말하였다.

《저 옆으로 돌아가면 뒤쪽에 방이 있습넨다. 거기로 가시우다.》

불시에 정중해진 객주집주인의 말투가 벌써부터 진옥의 가슴을 다시금 긴장시켰다. 그는 잠시동안 도끼를 찾아들고 장작을 패기 시작하는 주인의 뒤모습을 믿음에 차서 바라보다가 가르쳐준대로 마방뒤로 돌아갔다. 수수깡울바자가 비좁게 들어선 뒤울안에 불이 빤하게 켜진 좁다란 바라지가 하나 있었다. 그앞으로 울바자의 한 귀퉁이가 터져있고 그리로 빠져나가면 곧장 뒤산기슭이였다.

바라지앞에서 기침을 하니 안에서 《들어오시오.》 하는 좀 갈린듯 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조심히 열리였다.

진옥은 소리없이 신을 벗고 버선뒤축을 죄여신은 다음 꽤 높은 문지방을 더듬거리며 올라섰다.

《먼길에 수고했습니다. 몹시 추웠겠는데 이리 와 앉으시오. 여기가 덥습니다.》

문앞까지 마중나온 사람은 기름등잔이 놓인 아래목으로 손을 잡고 이끌었다.

《춥지 않습니다. 오히려 땀이 나는걸요.》

그러면서도 진옥은 어쩔수없이 등잔가까이 가앉았다. 그리고 유격대공작원의 얼굴을 살피였다. 한태혁이와는 달리 후리후리한 몸집에 안경을 낀 젊은 사람이였다. 무엇인가 올려놓고 쓰던 모양인 소반을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그는 말하였다.

《백바위골에서 온다지요? 거기 한태혁동무랑 잘 있습니까?》

《잘 있어요. 제가 떠나올 때 공작원동지의 건강을…》

그러다가 진옥은 입을 벌린채로 숨을 헉하고 들이그었다.

어슴푸레하던 기름등잔불앞에 고개를 쳐드는 공작원의 웃는 얼굴에서 너무나 낯익은 잊을수 없는 특징들을 발견한것이였다.

공작원도 깜짝 놀라 한손을 내짚으며 부르짖었다.

《진옥동무, 아니 진옥동무 아니요?》

《아!》

진옥은 입안에서 부르짖으며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변장용 안경까지 끼고있는데다 4년전 헤여졌던 야학선생시절의 그 창백하던 모습은 다 사라지고 혈전의 자국자국이 새긴 굵은 선과 강철빛으로 변한 얼굴빛은 거의 딴 사람같은 인상을 주었지만 4년동안 한시도 잊을수 없었던 그 얼굴, 바로 정지성이였다. 그 순한 표정, 부드러운 입모습, 정신적미가 내풍기는 열정에 넘치는 눈빛은 그 어떤 풍상고초의 흔적으로써도, 변장도구로써도 가리울수 없었다.

《선생님.》

진옥은 한마디 흐느낌소리를 지르고는 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두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삽시에 어깨가 사나운 풍랑을 만난듯 세차게 오르내렸다.

《진옥동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지성이도 뜻모를 소리를 지르며 처녀의 어깨를 움켜잡고 흔들었다.

《장군님께서… 장군님께서…》

진옥은 지성의 가슴에 쓰러지듯이 고개를 묻으며 목메여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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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동안 그렇게 미쳐날뛰던 눈보라도 멎었다. 하늘에는 보름 지난 달이 솟고 땅우에는 희디흰 눈세계가 끝간데 없이 펼쳐졌다. 후미진 산길이라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 안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아름답고 정갈하고 숭고한 세계는 오직 그들 두사람을 위해서만 마련된듯싶었다. 다만 시간만이 야속하였다. 백바위골 50리가 어느새 절반이나 축가버려서 석달밭동네의 불빛이 벌써 큰길쪽에 저만치 바라보인다.

지성이는 거기서 허정학이 깊이 묻어놓은 한 지하조직원을 만나기 위하여 갈라져 가야 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아직도 끝없이 두가슴에 쌓여있었다. 사실 여태까지는 하고싶고 듣고싶던 요긴한 말들은 별로 비쳐보지도 못한채 길만 축내버렸다. 진옥이가 무남이에 가서 부모님들과 누이를 만나본 이야기, 장군님께 올린 진옥의 할아버지 편지를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 백바위뒤에서 한태혁이를 만나던 날 그 신과 옷을 보고 울어버렸다는 이야기, 허정학의 장렬한 최후와 그 아들의 당당한 어머니인 로부녀회원에 대한 이야기― 긴긴 겨울밤이 깊어가도록 천천히 걸으면서 주고받은 이야기가 결코 적지 않았지만 그들은 둘 다 무엇인가 아직 터쳐놓지 못한 말이 가슴속에 비좁게 틀고앉아서 숨이 가빴다. 이제 리별의 시간은 다가온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것은 이 마당에 꼭 하고 헤여져야 할 그 말이 딱히 무엇인지 그들자신도 알수 없는 그것이였다.

《무남이에 다시 련락갈 일이 생기면》 하고 지성은 한참이나 끈 침묵끝에 말하였다.

《아예 내 말을 하오.》

《아이, 내가 어떻게 그 말을 해요?》

진옥은 달빛아래 흰 얼굴을 돌려대며 지성을 치떠보았다.

《안부를 전하는건데 뭐라오.》

《그래도 싫어요, 누구 딴 사람한테 부탁할래요.》

진옥은 힐끔 지성의 얼굴을 돌아보더니 잘라서 말하였다.

《별스럽게는 구는군. 딴 사람한테 부탁할게면 내가 하지 동무더러 하랄게 있소?》

《마음대로 해요. 난 이제는 안갈래요. 전날도 어찌나 거북했던지… 남의 속은 알지도 못하면서…》

진옥은 원망기어린 목소리로 낮게 속삭이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허허허, 저 혼자 눈을 가진줄 아는군. 우리 아버지가 보통농사군인줄 아오? 며칠전에 태혁동무가 우리 집에 들렸다가 아버지 편지를 받아가지고 와서 보냈습디다. 거기에 벌써 이상한 처녀가 나타났는데 암만봐야 눈치가 수상하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란말요.》

《아이, 이를 어찌나…》

진옥은 삽시에 얼굴이 화끈 달아 밤이라는것도 잊어버리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붉게 달아오른 그 아름다운 얼굴을 조금이라도 엿보고싶다는듯이 달빛은 더욱 밝고 투명한 빛을 뿌린다. 백설의 대지는 저라고 왜 못볼가보냐는듯 거울같이 그 빛을 반사하였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참으로 느끼는것은 아무것도 못보는체 앞만 바라보고 걷는 지성이였다.

어느덧 석달밭주막집의 불빛은 뒤전으로 물러났다.

이 밤이 아무리 길고 이 길이 아무리 멀어도 그는 여기서 멎어서야만 한다. 그리하여 지성은 마침내 눈길우에 걸음을 우뚝 멈추어세웠다. 그러자 소스라치듯 진옥이도 멎어섰다.

《난 가야겠소. 여기서 헤여집시다.》

《어서 가보세요.》

《아직도 20리길인데 일없겠소?》

《전 요즘 내내 밤길을 다녀요.》

그리고는 문득 말이 동강났다. 두사람은 잠시 마주서서 고개를 떨구고 서있었다. 그러다가 하늘을 한번 쳐다본 지성이가 먼저 처녀의 손을 억세게 틀어쥐였다.

《내가 하고싶은 말 알겠지?》

《다 알아요.》

그리도 가슴깊이 쌓이여 불타오르던 그 말이 리별의 이 순간에 마침내 격정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솟아올랐다.

《그렇소. 우리의 이 모든 행복, 이 모든 희망 그것은 모두 장군님께서 주신거요. 우리의 일생을 모두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혁명에 바쳐야 하오.》

《다 알아요. 모든것을, 모든것을…》

《고맙소. 우리가 이렇게 만나고 또 이렇게 헤여지는것이 난 참으로 기쁘오.》

《저도, 저도…》

이렇게 말하는 진옥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어디 고개를 들어보오.》

진옥은 아이들처럼 순순히 고개를 쳐들고 달빛아래 얼굴을 환하게 드러냈다. 들국화처럼 가냘파보이던 그 얼굴은 이제는 신념에 찬, 희망에 넘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하이얀 얼굴에 반쯤 벌어진 입술이 바르르 떨고있었다. 긴 살눈섭이 슴뻑거리고있었다.

 

17

 

백바위골은 말할것 없고 구룡리, 마방골, 석달밭을 중심으로 한 13도구의 혁명조직들은 활발히 숨쉬기 시작하였다. 수족이 갈갈이 찢기다싶이 됐던 조직은 허정학의 깊이 묻어두었던 문건이 정지성을 거쳐 사령부에 들어옴으로써 하나로 이어져 완강한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로 되살아났다. 동네마다 어느 으슥한 정지간이나 마실방 같은데 모여앉아 등디목에 얼굴을 맞대고 사령부에서 내려보낸 선전물을 읽었으며 유격대를 원호할 대책을 토의하였다. 일제의 악선전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목소리가 산속에서, 우물가에서, 객주집마당에서, 골목길에서 울리여왔다.

이런 어느날 정지성은 뜻밖에도 자기가 지도하는 조직의 한 선을 통하여 사령부를 찾아 산중을 헤매고있는 최춘국이 보낸 통신원을 만났다.

때마침 지성은 사령부의 소환에 의하여 이제는 어지간히 강화된 13도구일대의 조직을 김창수라는 구룡리청년에게 넘겨주고 다른 공작지로 떠나기 위하여 류진옥의 마지막련락을 기다리고있는 참이였다.

정지성은 통신원을 숯막에서 만나 힘차게 그러안았다. 1방면군의 통신원 최명호는 더욱더 어렵게 된 1방면군의 소식과 최춘국의 보고를 가지고 사령부로 찾아가는길이였다.

상봉은 감격속에 이루어졌으나 두사람은 곧 가슴답답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럴바에는 빨리 길이라도 떠났으면 좋겠는데 그지간 시간이라고 어겨본적 없는 류진옥이 무엇때문엔지 저물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날이 다 저물어서야 숯막령감이 《오는 모양이오다.》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숨을 헐썩거리며 산을 올라오는것은 류진옥이가 아니라 김창수였다.

《큰일났습니다.》

그는 단김과 함께 이런 말을 내뿜더니 숯막바닥에 두손을 짚고 헐썩거렸다.

《뭐요? 어떻게 된거요?》

지성은 신을 더듬어신으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진옥동무가 체포되였습니다.》

《뭐요?》

지성은 신을 신다말고 벌떡 일어났다.

《언제? 어디서 체포됐소?》

김창수는 가까스로 숨을 톺더니 한손을 방바닥에 짚은채 고개를 들고 말하였다.

《내 석달밭 차동무를 만나러 지게를 지고 산길을 넘어갔지요. 그런데 어디선가 녀자의 웨침소리가 들려온단 말이우다. 하도 이상해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있으니까 무엇이 백바위골쪽으로 내뛰는데 자세히 보니 그 동네에 새로 난 가게방주인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은 허둥지둥 뒤를 돌아보며 산을 내뛰다가 길에 들어가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듯이 의젓하게 걸어갑디다. 그런데 산속에서는 그냥 녀자의 목소리가 울려온단 말이우다. 이게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 있는 놀음이다 하고 산우로 달려가봤지요. 그랬더니 ,장기덕이는 개다!〉 ,장기덕이는 개다!〉하는 소리가 몇번 울리고는 뚝 그치고 맙디다. 백바위골 가게방주인이 장가였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는 소리가 나지 않으니 알수가 있어야지요. 한참 골자기쪽을 더듬고있는데 어느새 13도구쪽으로 난 길우에 꽁꽁 묶이우고 입에 자갈까지 물린 진옥동무가 어떤놈에게 끌려가지 않겠습니까? 자세히 보니 그놈은 13도구경찰서의 여치다리라는놈이였습니다. 우리 동네에도 가끔 나타나던놈입니다.》

《그게 언제쯤 되오? 지금 어디쯤 갔소?》

지성은 옆구리에서 권총을 더듬어찾으며 부르짖었다.

명호도 긴장되여 신을 죄여신는다.

《내 그걸 보자 곧장 이리로 달려왔으니까 지금쯤 비석골나루근방에 가닿았을거우다. 큰길에 나서자 진옥동무는 더 반항하는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자갈을 뽑았는지 바람결에 〈장기덕이는 개다!〉하는 소리가 다시한번 울려왔습니다. 진옥동무는 누구에게든지 그 사실을 알리자는것 같습니다. 내 그 가게방주인이 유격대원호사업에 적극적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이 산을 타고 곧장 가면 삼포동어방에서 따라잡을수 있겠지?》

지성은 숯막의 거적문을 들치며 조급하게 물었다.

《달려가면 문제없지오다.》

창수도 벌떡 일어났다. 명호는 벌써 바깥에 나섰다.

세사람은 눈을 걷어차며 달렸다. 어느새 등성이를 하나 넘었다.

저만치 비석골나루가 바라보이고 얼어붙은 강물이 발밑에 굽어보이는 등성이에서 지성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삼포동은 강을 건너가면 지척이다. 큰길이 바투 스치고 지나가는 그 후미진 골짜기의 어느 산옆에 지키고있다가 달려들면 한놈쯤 제끼는것은 문제도 아닐것이다.

그러나 지성은 눈을 지그시 한번 감았다가 뜨고는 숨가쁘게 달려오는 두사람을 막아섰다.

《동무들, 돌아서오!》

한순간에 돌변한 지성의 말에 두사람은 미처 말도 못하고 숨만 씩씩거린다.

《사령부가 위험하오. 그래서 진옥동무가 그렇게 소리친거요. 그놈은 틀림없이 백바위골조직에 잠입하려고 한 밀정이요. 명호동무, 사령부로 갑시다. 그리고 창수동무는 이 길로 곧장 내려가서 조직을 수습하오. 마방골에도 사람을 띄우시오. 조직을 지켜야 하오. 자, 명호동무, 빨리 갑시다.》

그리고는 오던 길을 되짚어 쏜살같이 달려갔다. 잠시 영문을 모르고 서있던 두사람도 곧 사태의 엄중성을 깨닫고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창수는 숯막어방에서 구룡리쪽으로 꺾어졌다. 지성은 그냥 달리면서 가볍게 한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거려보였다. 아무리 질러가도 산길 50리였다.

어느 산등성이를 넘어서려 할 때 지성은 달리면서 피뜩 옆을 돌아보았다.

달밝은 눈길을 함께 걷던 산길이 그리로 나있었다.

《다 알아요. 모든것을, 모든것을.》

우리 일생을 장군님을 위하여 송두리채 바치자고 그리도 열렬하게 속삭이던 그 밤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방금 전해들은 진옥의 피타는 부르짖음이 흉벽을 쳤다.

정지성은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고 내뛰였다. 그러나 눈만은 황황 불을 내뿜었다. 골짜기고 진대통이고 바위고 가리지 않았다. 사령부를 향하여 있는 힘을 다해 내달리는 그의 발자국은 숫눈길우에 일직선으로 찍혀져있었다.

 

18

 

부대는 행군준비를 갖춘채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기다리고있었다. 정지성이와 최명호가 사령부에 나타난 밤중에 벌써 천막은 거두었고 새벽같이 아침식사도 끝마쳤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때마침 태혁의 보고를 가지고 사령부에 와있던 김재영을 곧 백바위골로 띄우시였다. 장기덕이란 그놈이 백바위골조직에 깊이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원호물자를 지고 백바위뒤에도 한두번 나타났던만큼 우선 위험은 백바위골조직에 있었고 사령부의 위치도 어느 정도는 드러났다고 볼수 있었다. 류진옥의 구원대책도 세워야 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 당장은 그놈을 추격해갔다는 한태혁의 보고가 무엇보다도 안타깝게 기다려지셨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밤중부터 앉아계시던 고깔불앞에 아직도 최명호와 마주앉아계시였다.

마주서자마자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명호의 모습만 보고도 여태까지 그렇게 믿지 않으시려고 애쓰시던 그 모든 흉한 소문들이 진실이였음을 알수 있으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혈로로 떠나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명호를 이윽히 뜯어보시였다. 수많은 격전끝에 많은 동지들과 지휘관들을 잃고 갖은 고생끝에 사령부를 찾아온 그를 될수만 있으면 며칠이라도 끼고다니시며 쉬우고싶으시였다. 그러나 사령부는 당장 이동해야 한다.

사령부에 닥친 위험을 알리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웨친 류진옥의 목소리가 그이의 가슴을 또한 허비고들었다. 그 아름다운 처녀가 어떻게 되였겠는가. 감히 사령부에 잠입하기 위하여 그처럼 교묘하게 위장한놈들의 손아귀에 들었으니 그저 지하투쟁을 하다가 체포된것과는 비교도 할수 없는 위험이 닥쳤다고 봐야 할것이다. 한쪽에서는 지방조직을 지키고 사령부에 조금이라도 시간여유를 주기 위하여 한태혁이네들이 필사적으로 싸우고있을것이다. 이런 때 결단성있는 행동만이 사태를 주동적으로 타개하게 만들것이다.

명호를 곧 떠나보내시지 않으면 안될 까닭은 최춘국의 편지에도 있었다. 거기에는 그냥 일반적인 보고만이 아니라 1방면군관하 부대들의 빈 지휘관자리를 누구에게 맡길것인지 하는 조직상문제며 갈수록 준엄해지는 정세의 반영으로서 남패자회의결정을 이런 형편에서도 계속 집행해야 하는가 하는 론의가 부분적인 동무들가운데 벌어지고있다는 사상상의 문제도 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모든 제기를 그대로 승인하시고 아울러 남패자회의결정을 추호의 동요도 없이 집행해 나갈데 대한 과업을 간단히 편지에 써넣으시였다.

어느새 먼동이 터온다. 오늘도 날씨는 스산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계시던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상철이를 부르시였다. 사령관동지의 배낭이며 공작조에 나간 김재영의 배낭을 지기 좋게 꾸리고있던 상철이가 달려오자 그이께서는 오백룡과 강봉수를 불러오도록 이르시였다.

두사람이 달려올 때까지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고깔불앞에 앉으시여 생각에 잠겨계시였다. 그러시다가 결단성있게 일어나시여 외투의 단추를 채우시였다. 마침 오백룡이가 달려오고 뒤미처 강봉수도 달려왔다.

《행군준비는 다 되였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엄격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예, 다 됐습니다.》

오백룡이 덤빌줄 모르는 그 심중한 낯빛으로 대답하였다.

《그럼 곧 출발해야겠소. 장기덕이가 어떻게 되였든지간에 부대의 위치가 적들에게 로출될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백바위골공작조를 여기서 기다릴것이 아니라 부대가 그리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예?》

오백룡과 강봉수는 한꺼번에 부르짖었다. 옆에 서있는 명호도 상철이도 눈이 둥그래졌다.

《놀랄 필요없습니다. 지금 깊은 산속에는 오히려 적들이 더 주목을 돌리고 쫙 덮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가 저희놈들의 코밑에 앉아있는줄은 꿈에도 모르고있던놈들이 지금쯤 혼비백산해서 사처에 흩어져있는 부대를 불러댈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밀림속으로 들어갔다가는 그놈들과 맞부딪칠수 있습니다. 지금은 빨리 이 지대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자면 행군하기 좋고 아직 방비를 채하지 못한 대도로로 나가야 합니다. 적의 빈틈을 노려 대도로로 일행천리하여 이 지대를 벗어나야 적들이 여기로 모여들무렵에 아군은 다시 밀림깊이 들어갈수 있습니다.》

김일성동지의 대담무쌍한 결심을 들은 오백룡은 아직 그뜻을 잘 새길수가 없어 버릇대로 대답은 드려놓고도 눈을 끄먹거리고있는데 그이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부대가 떠나기에 앞서 최명호동무를 자기 련대로 돌려보내야 하겠소. 중요한 통신을 가지고 가는만큼 적이 준동하는 밀림으로 혼자 떠나보낼수 없소. 그러니 강봉수동무는 경위중대장동무와 잘 토의하여 철저히 호위대책을 세우시오. 내 생각에는 기관총분대에서 강영백동무와 리규찬동무를 함께 딸려보내는것이 좋겠소. 더 좋자면 기관총 한개분대쯤 떼여서 지금 곤난을 겪고있을 그 동무들을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지만 우리에게도 기관총이 이제는 한개분대밖에 없소. 그러니 두어동무만이라도 떼여보냅시다.》

두 지휘관은 그만 입을 다물고 그이의 근엄한 얼굴만 지켜보았다. 최명호는 울상이 되여 아까 그리도 부드럽게 말씀하시던 장군님께 제발 제혼자 떠나게 해달라고 매여달리고싶었지만 그이께서는 일체 다른 의견을 제기하지 못하게 엄격한 안색으로 또 새로운 지시를 연방 내리시였다.

그리하여 오백룡이도 강봉수도 그이의 지시를 하나하나 수첩에 받아쓰며 그 집행대책에 대해 보고를 드릴수밖에 없었다.

10분후 기관총수 강영백과 리규찬은 최명호와 함께 먼저 사령부를 떠나갔다.

그로부터 5분도 못지나 사령관동지께서는 전부대에 백바위골 대도로방향으로 행군할데 대한 명령을 내리시고 몸소 그 앞장에 서시여 힘차게 걸어나가시였다.

야산등성이를 넘어서 백바위골에 거의다 이르렀을 때 박인섭이와 김재영이가 한태혁의 마지막보고를 가지고왔다.

그때 장기덕이란놈은 뻔뻔스럽게도 이날밤 백바위골인민들이 설명절을 유격대와 함께 쇠자고 지성들여 모은 원호물자를 지고 사령부 가까운 비밀장소로 떠나기 위하여 방아간에서 기다리고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재영이가 불쑥 나타나서 비상통보를 전하는 눈치를 채고 제먼저 달아났다.

태혁은 침착하게 정황을 처리하였다. 인섭이와 재영이더러 방아간에 모인 조직원들을 다 돌려보내고 수습한 다음 한시바삐 사령부로 돌아가서 백바위골 조직과 조직원들은 태혁이 남아서 지키겠으니 사령관동지께서 조금도 지체마시고 곧 이곳을 떠나시도록 말씀드리라고 당부하였다. 그때 장기덕이는 이미 산턱을 절반가까이나 오르고있었으나 명사수인 한태혁의 탄알을 피할수는 없었다. 총소리와 함께 분명 비명소리가 울리여오는것을 인섭이도 재영이도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300메터이상되는곳에서 권총알을 맞았으니 치명상일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혁은 그냥 그놈을 추격해갔다. 지금 류창표와 곽병철이도 태혁의 지시에 따라 조직을 수습하려고 동네로 내려갔는데 그들 역시 사령관동지께서 이 위험구역을 어서 피해주셨으면 하고 간절히 부탁한다는것이였다.

인섭은 태혁의 지시에 따라 백바위골조직원들을 일단 모두 안전지대로 대피시켰고 김재영은 곽병철이와 류창표네 가족들이 부락을 떠나는것을 도와주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니 태혁이가 남아서 뒤처리만 잘하면 백바위골조직의 위험은 어느 정도 막아낼수 있을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백바위골조직에 대한 수습대책이 어느 정도 섰다는것을 확인하신 다음에 다소 마음을 놓으시고 그대로 행군을 계속하도록 하시였다.

준엄한 정황의 반영인듯 그이의 안색은 전에없이 비장한 기운을 띠고있었다.

19

 

《야, 저게 뭐야?》

당직감시병은 마루를 구르며 강둥강둥 뛰던 발을 딱 멈추고 소리쳤으나 아래서는 진 연기만 피여오를뿐 대답이 없다.

《오이, 가와시마, 저것 봐라, 저게 뭐야?》

당직감시병은 눈섭에 매달린 송라같은 성에를 쥐여뜯으며 다시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려, 불이 다 죽어간다니까.》

두꺼운 마루창밑에서 이따위 늘어진 소리가 가까스로 울려올뿐 누구도 바빠하는 사람이 없다. 밤중에 여러방의 총소리가 울려오는바람에 근무병들은 여태 수색소동을 벌리노라고 한지에 나가 떨었었다. 어디서 자전거바퀴의 구멍이 뚫어지는 소리라거니 어느 아이새끼가 딱총장난을 한것이라거니 하고 두덜거리며 밤새 보람없는 수색소동에 끌려다닌 졸병들은 그사이 난로마저 죽어가는바람에 바깥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움쩍할 차비가 아니였다.

《오이, 유격대다! 유격대가 간다!》

혼자 긴장되여 눈벌을 쏘아보던 감시병은 갑자기 소스라쳐 울음섞인 소리로 찢어져라 웨쳤다.

《이제 올라간대두 그래.》

망루밑에서는 여전히 가와시마의 약간 짜증섞인 소리가 태평스럽게 울려왔다.

《오이, 가와시마, 유격대다. 유격대래두.》

감시병은 마침내 징징 우는 소리를 지르면서 아래로 통하는 구멍으로 달려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여전히 흉장너머 넓게 열려진 벌판을 살피고있었다.

《뭐?》

배불뚝이난로에 골탄을 집어넣고 감시일지뚜껑으로 부채질을 하고있던 가와시마가 눈물과 검댕이로 매닥질을 한 눈등을 비비며 올려다본다.

《유격대가 지나가! 유격대가 지나간단말이야.》

감시병은 다시한번 소리치고 흉장쪽으로 달려가 앞가슴에 드리운 쌍안경을 눈으로 가져갔다.

《무슨 얼빠진 수작이야?》

가와시마는 방금 뽑아낸 냉과리 한가치를 집어든채 쾅당쾅당 사닥다리를 타고 망루로 달려올라갔다.

흉장곁에 당직과 나란히 선 가와시마일등병은 별안간 앞가슴을 내질린놈처럼 허리를 꼿꼿이 폈다.

《저게 정말 유격대야?》

《그럼 뭐겠나? 총이랑 군복이랑 보라구.》

《그런데 유격대가 어떻게 큰길로 저렇게 행진해갈수 있나?》

《나도 모르겠는걸… 전혀.》

두 왜놈감시병이 망루우에서 기관총을 만지작거리며 호기심에 차서 눈벌을 바라보고있는 사이 김일성장군님께서 몸소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령부직속구분대들은 백바위골앞 눈벌을 곧장 가로질러 림강―장백사이의 대로로로 나섰다. 대오는 그닥 서두르지도 않았지만 행군서렬의 정연성을 흐트리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산굽이를 돌아가고있었다.

하도 놀라서 대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만있던 두 감시병놈은 그제야 화닥닥 놀라서 서로 마주보았다.

《경보! 가와시마, 경보 울렸는가?》

《개자식! 왜 이제사 그 말을 해!》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고 당직하사관놈이 중대장실에 나타났을 때 거기에는 코수염을 쫑긋하게 기른 되바라진 가네꼬대위가 두꺼비분서장놈과 함께 방금 피투성이가 되여 뛰여든 장기덕이를 집어 삼킬듯이 쏘아보고있었다. 장기덕은 태혁이의 추격을 피하노라고 한시간이상 남의 집 짚낟가리속에 구겨박혀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경찰분서로 뛰여들어갔다. 이제는 정보체계고 무어고 돌아볼 경황이 없었다.

모리는 그를 백바위골에 침투시키기 위하여 장기덕자신도 놀랄만큼 세심하고 용의주도하게 일을 꾸몄다. 그래서 그는 힘들게지만 적잖게 백바위골조직의 비밀을 들추어내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였다. 그런것은 알아도 모른척할뿐아니라 공연히 소란을 피우면 재미없으니 경찰에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사령부에 침투하는데 주력하라는것이였다. 그는 이곳 조직의 성원들과 접촉하고 원호물자를 져나르면서 혹시 사령부가 이 어방에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도 너무나 엉뚱한 착상이라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어떻게나 그것을 확정해보려고 온갖 롱간을 다 부렸다. 차츰차츰 그렇다고 볼수밖에 없는 자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러나 딱히 어디라고 짚을수는 없었다. 장기덕이도 안타까왔다. 그렇다고 그것을 확정하기 위하여 서뿔리 들추다가 자칫하면 여태 공들여 얻어낸 신임을 다 허물어뜨릴수 있었다. 오늘저녁 비밀장소까지 원호물자를 지고가는데 끼여들기 위해서만도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 진옥이가 자주 밤길을 다니는 눈치를 챘다. 그의 뒤를 잘 살피라는것은 모리중좌의 중요한 지시가운데 하나였다. 그래 몇번 뒤를 밟아봤더니 어찌나 조심을 하는지 자칫하다가는 제 정체가 먼저 드러날것 같았다. 그래 13도구서의 여치다리를 불러댄것인데 그놈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진옥이가 산길로 접어들었다고 하는것이였다. 오늘 오후의 일이였다. 틀림없이 사령부로 간다고 생각한 장기덕은 여치다리를 저만치 앞세워놓고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만 랑패를 보았다.

진옥이는 무심히 걷는듯 하였지만 자기가 뒤를 밟히고있다는것을 알았던지 어느 산길 굽인돌이에 몸을 딱 붙이고있다가 불쑥 길우에 나타났다. 그바람에 장기덕은 제 얼굴을 드러내고말았다. 하는수없이 여치다리를 시켜 체포해가게 했지만 진옥이가 몸부림치며 필사적으로 웨치던 《장기덕이는 개다!》하는 목소리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백바위골에서는 30리나 되는 산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였다.

누가 들을 사람도 없고 들었대야 영문을 알 사람도 없을것이다.

어쨌든 하루밤이야 못견디랴. 오늘밤 원호물자를 지고가면 사령부의 위치를 면바로 알아낼지도 모른다. 이렇게 타산한 그는 시치미를 뻑 따고 방아간에 앉아있다가 마침내 벼락을 겪고야말았던것이다.

그는 너무나 급해맞아서 경찰분서에 달려들자마자 모리의 극비지시고 뭐고 가릴것없이 진가에게 죄다 털어놓았다. 그리고 경비전화를 쓰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진가란놈은 가네꼬에게 하도 단련을 겪다보니 그를 끌고 다시 수비대로 찾아온것이였다.

《그래 네가 김일성장군을 직접 봤는가?》

가네꼬는 믿을수 없다는듯이 다시 미타한 소리를 한마디 하며 경비전화를 걸것인가 말것인가 망설이는판이였다. 그때 바로 경보가 울리였다. 유격대가 대도로로 행군해가는것을 제눈으로 확인한 가네꼬는 덤비기 시작하였다.

《개자식! 왜 처음부터 똑똑히 말못하는가말야, 바보같은 자식!》

이어 가네꼬는 비상소집호령을 치고 전화통에 매달렸다. 이미 아침일과에 들어선 때라 비상소집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가네꼬는 6도구에 보고를 하고 모리로부터 만나면 당장 쏘아죽이겠다는 욕설을 얻어먹으면서 린근부락들에 널려있는 수비대를 비롯하여 위만군, 경찰, 자위단까지 몽땅 떨어내여 유격대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와 비슷한 전화를 모리는 신경의 하시모도와 교환하였다.

그리하여 밀림깊이 들어갔던 부대들에 장백―림강 대도로변으로 진출하라는 이동명령이 떨어졌으며 백바위골 서쪽의 무력은 동쪽으로, 백바위골 동쪽의 무력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유격대를 끼워칠데 대한 긴급명령이 전화로, 무전으로, 기마전령으로 날아갔다.

20

 

대오는 분노와 슬픔을 안고 묵묵히 산굽이를 돌아섰다. 그러지 않아도 적의 《토벌》무력이 빌 사이 없이 썰고다니는 장백―림강간의 대도로였다. 한두사람의 공작원이 빠져나가기도 힘들다는 이 길로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령부가 백주에 대렬행군을 하고있다.

마음같아서는 백바위골로 단숨에 쳐들어가고싶었다.

흉악한 반역자를 란도질을 해서 처단하고싶었다. 그리고 사경에 처해있을 아름다운 처녀를 구원하고싶었다.

그러나 모든 분노와 슬픔을 혁명을 위하여 참아야 하였다. 참을뿐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이 지대를 한시바삐 벗어나야 하였다.

대도로가까운 야산지대에 틀고있을 때는 그이상 안전한데가 없어 보였지만 일단 사령부의 위치가 폭로되고보니 실로 우수경칩에 장강의 얼음을 건느듯이 발밑이 솔갔다. 적의 포대가 도사리고있는 백바위골 앞벌은 그럭저럭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지금쯤 놈들은 장기덕의 통보를 들었을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포대에서 내다본놈들이 이제는 정신이 들어 발칵 끓고있을것이 틀림없다. 너무나 긴장했던 전사들은 산굽이를 돌아서자 모두 팔다리가 매시시해나서 긴숨을 내쉬였다. 이때 사령관동지께서 엄하게 말씀하시였다.

《오백룡동무, 행군속도를 높이시오. 곧 적의 추격이 있을거요.》

아니나다를가 산굽이를 또 하나 돌아갈 때 적의 추격이 달렸다는 후위의 보고가 들어왔다.

대렬은 맹렬한 속도로 앞으로 나갔다. 번번한 대로로를 가는것이라 어디에 꺾어져들어갈데도 없었다. 한시바삐 위험지대를 벗어나자면 행군하기 좋은 이 길로 냅다달리는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적들 역시 대도로행군에서는 뒤지려고 하지 않았다.

목에서 단내가 확확 풍겨오도록 달린다. 그래도 적의 선두척후는 두어마장 되나마나한 거리에 그냥 달려온다. 이따금 조그마한 부락들이 나지고 촌 주재소의 경관나부랭이들이 앞에서 얼씬거렸으나 정작행군대렬이 눈바람을 일으키며 들이닥치자 어디론가 뺑소니를 치고 없어졌다. 때로는 군용자동차며 마차 혹은 개별적인 왜놈군대들도 길우에서 마주치게 되였다. 설마하니 이런 대낮에 유격대가 대도로로 행군하랴 하고 태평스럽게 경적이랑 울리며 마주오던 군용자동차들은 바투 다가서서야 유격대임을 알아보고 넋들이 훌 빠져서 제김에 자동차를 눈구뎅이에 구겨박아놓고 산으로 들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럭저럭 점심참이 되여서야 뒤따르는 적을 어지간히 떨구어놓았다. 그러나 잠시도 숨을 톺을 겨를은 없었다. 목에서 누린내가 확확 풍겨오면 저마다 길가의 눈을 움켜 목구멍에 틀어막는다.

날이 밝으면서 자욱하게 흐려들던 날씨가 오후에 접어들자 더욱 사나와지기 시작하였다. 눈가루가 폴폴 날리였다. 길가에 외롭게 선 버드나무의 웃초리가 경풍이라도 만난듯 떨고있다. 어느 동네아이가 날려보낸 연꼬리가 그 끝에 걸려 파들파들 몸부림친다. 설핏하게 깔려드는 으스름은 무엇때문엔지 비장한 마음들에 소금물을 뿌리듯 쓰라린 감회를 자아냈다. 해종일 더운물 한방울 못마시고 달렸건만 피로하다든가 허기진것과 같은 구체적인 감각은 느껴지지 않고 오직 분하고 원통하고 돌아서서 따라온다는 놈들과 사생결단을 내고싶다는 절박한 념원이 온몸에, 온 대렬에 굽이쳤다.

큰길이라고 하지만 행인을 만나기도 그리 쉽지 않았다. 하기는 당장 사람죽을 일이라도 없다면 이런 날 이런 날씨에 길에 나설 사람도 흔치 않을것이다. 그러기에 아침까지 풍성한 숫눈에 묻혀있던 길을 바람 혼자 썰고다니며 반반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날이 저물었다.

김일성동지께서도 아무 말씀없이 대렬 한가운데서 걸어가고계시였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 그리도 큰 기쁨을 속삭여주던 진옥이라는 처녀는 지금 원쑤의 손아귀에 들었다.

혁명의 길에 나선 모든 전사들이 일신상의 기쁨과 안락을 멀리 밀어던지고 그 모든것을 혁명승리를 위해 깡그리 바칠 각오를 다지고있지만 그 처녀의 립장에서 볼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자마자 그 참변을 겪는다는것이 얼마나 모진 시련일지 모른다. 게다가 체포된 경위로 보아 가만 내쳐둔다면 십중팔구 죽음조차 갖은 혹독한 고통을 다 겪은후에야 맞이할수 있을것이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아는 정지성의 심중은 또 어떠할것인가.

그의 부모들도 다시 험난한 시련앞에 서게 되였다. 7도구치기에서의 소금사건이래 지성의 신상에 닥치는 련속적인 타격을 생각하시니 김일성동지자신의 가슴이 오히려 답답하고 안타까우시였다. 그러다나니 마치 곧은 막대기처럼 꼿꼿이 걸어가는 지성에게 위로의 말씀조차 쉬 건네실수 없었다.

지성은 가만 봐야 종일 말없이 걸어간다. 앞에서 달리면 그만 한 정도로 달리고 앞에서 걸음을 늦추면 그만 한 정도로 걸음을 늦출뿐 아침나절이나 땅거미가 깔려드는 지금이나 꼭 한본새로 걸어가고있다. 이따금 옆에 전우들이 따라서서 말을 걸기도 하고 무어라고 위로를 하는듯도 하지만 지성은 그저 그렇다든가 아니라든가 하는 짧은 대답을 할뿐이다. 오백룡이도 가끔 나란히 걸으며 눈치를 살폈지만 무어라고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듯 우물거리다가 딴곳으로 가군하였다. 경위중대장의 립장에서 본다면 혁명의 위기를 생명을 무릅쓰고 알려준 진옥에게 남다른 생각이 있을것이지만 이 엄혹한 정황에 극단의 정신적시련을 겪고있는 지성에게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는지 모르겠는 모양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성이가 혹시 저렇게 종일을 반달음질을 하다가 정말 막대기처럼 넘어지지나 않겠는가 하는 위구심이 들기도 하시였다. 그러나 지금형편에서 그를 도와줄 방법은 없다. 오직 자신의 굳센 혁명적의지만이 그자신을 구원하고 그러한 힘이 모여 조선혁명을 위기에서 건지게 될것이다.

《견딜만합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자신께서도 가빠오르는 숨을 테시며 은근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낯익은 그이의 목소리에 지성은 감전된듯 고개를 들었다. 이번 공작과정에 변장용으로 구해 쓴 안경알속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빛났다. 그것은 결코 암담한 운명을 내다보는 그런 눈빛은 아니였다. 그렇다고 그 눈빛이 결코 범상한것일수는 없었다.

《사령관동지.》

측은하게 바라보시는 사령관동지의 눈빛을 간절하게 마주 바라보던 지성은 단 입김과 함께 가쁜 목소리로 불렀다.

《모든 시련을 참고 힘차게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 만단곡경을 다 거친 혁명전사에게 긴 말이 필요없다는것을 느끼시며 터놓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허심하고 솔직한 말씀이 차라리 지성의 가슴을 아프게 치는듯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외면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걸음발을 늦추며 빠른 어조로 말하였다.

《사령관동지, 저한테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무슨 소원입니까? 말하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강한 의욕을 느끼게 하는 지성의 열정적인 목소리에 기쁨을 느끼시며 서둘러 물으시였다.

《제 아침나절부터 주저하며 여러모로 생각했습니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밤이 무사히 끝나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소. 나 역시 이 밤이 간단히 끝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있소.》

사령관동지께서는 지성의 말에 쾌히 동의하시며 점점 심각해지는 그의 얼굴을 어둠속에 이윽히 지켜보시였다. 나약하고 위태로와 보이던 인테리의 허약한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여위였지만 깊이가 느껴지는 뚜렷한 옆얼굴의 선이며 덩실한 코날이며 두드러진 이마의 굴곡들이 재빛 강철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것이 단순히 어둠의 조화때문이 아니라는것을 김일성동지께서는 확신하시였다.

《그래 청이란 무어요?》

《사령관동지, 저에게 기관총을 주십시오.》

《기관총이라니?》

《한태혁동무의 기관총이 있습니다. 태혁동무는 사령부의 안전을 지킬데 대해 거듭 당부했습니다. 저는 그와 친했습니다. 저는 남패자를 떠나서 여태까지 명사수인 그에게서 기관총을 배웠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걸음만 다우치시였다. 뜻밖의 청이였다. 그의 말과 같이 지성은 늘 태혁이와 함께 걸었다. 그래서 그들 둘이 가까운 사이라는것을 누구나 다 알고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자기에게 없는것을 보충하면서 자라나고있다는것도 어렴풋이는 짐작들을 하고있었다. 그러나 155절짜리 태혁의 세계혁명가가 보충되는 사이 태혁의 기관총사격술이 정지성에게 전해졌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하기는 정지성이가 가끔 숙영지에서 기관총을 분해하고 결합하는것을 띠여보신적은 계시지만 그 결과가 오늘 이러한 청으로 나타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시였다.

《사령관동지.》

그이께서 말씀이 없으시자 지성은 더욱 바투 다가서며 안타까운 어조로 말씀드렸다.

《제 심정이 복잡한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청을 드리는것은 결코 제 복잡한 심정때문이 아닙니다. 제 감정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후날 정리해보겠습니다. 지금은 적들의 한복판에서 홀로 싸우고있을 한태혁동무의 간절한 부탁을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외람된 생각같지만 저는 지금형편에서 제가 남 못지 않게 기관총을 잘 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가 힘들었는데… 사령관동지, 제 심정을 살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저멀리 낮게 굽이쳐간 컴컴한 산발우에 깜빡거리기 시작한 별빛을 바라보시였다.

사람들은 혁명의 시련속에서 자라난다. 이 개개의 성장은 곧 인간의 위대성을 이루는 고유한 요소들이다. 원쑤들은 아름다운 처녀를 다시 체포해갔지만 그대신 이처럼 강철로 벼려진 억센 사나이를 배태시켰다.

《사령관동지.》

하고 지성은 그이의 사색과 판단에 방해될가 저어하듯 조용한 목소리로 보탰다.

《다만 제 심정에 대해 한가지 말씀드리고싶은것은… 한태혁동무는 저에게 기관총사격술을 가르치면서 명사수가 되자면 자기는 불사신이라는, 말하자면 어떤 적탄도 자기는 맞히지 못한다는 대담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처음 기관총수로 임명되였을 때 사령관동지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아무리 적탄이 비발치듯해도 결코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을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느끼고있는 심정의 하나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어둠속에 손을 뻗치시여 지성의 손을 더듬어쥐시였다. 지성의 손은 꽁꽁 얼었으나 억센 투지로 다져진듯 굳게 틀어쥐여져있었다.

이때 앞에서 급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숨을 가쁘게 내뿜으며 달려가는 길에 누군가가 되돌아 달려온다는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틀어쥐고계시던 지성의 손을 놓으시고 발걸음소리를 향하여 마주 다가가시였다. 보지 않아도 오백룡의 발걸음이였다. 그가 저쯤 덤비며 달려오는것을 보니 어지간히 급한 일이 나진것이 틀림없다.

아니나다를가 사령관동지를 맞이하여 나란히 선 오백룡은 잠시동안 멍하니 바라볼뿐 입을 벌릴 생각을 못하고있다.

《무슨 일이요?》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것을 대강 짐작하시며 물으시였다.

《적입니다. 앞에서도 적이 나타났습니다.》

《내 그럴줄 알았소. 얼마나 되오?》

김일성동지께서는 여전히 걸음을 다우치시며 침착하게 물으시였다.

《선두척후가 어둠속에서 띠여보자마자 달려왔기때문에 똑똑진 않습니다만 아마 대대력량이상이 되는것 같습니다.》

《그럼 뒤에 달린놈들보다 많은셈이군, 그럴거요.》

그이께서는 혼자말처럼 외우시며 대렬을 돌아보시였다. 어느새 행군속도는 떨어졌다. 뒤에서 달린 적을 떼여버리기 위하여 숨가쁘게 달리는데 앞에서 또 적이 맞받아온다니 실로 나갈 길도 물러설 길도 다 막힌셈이다. 사람들의 눈길은 저절로 산쪽에 쏠리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옆은 나무 한그루 없는 바위산이 아찔하게 솟아 발붙일곳도 없었다. 설사 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다 하더라도 앞뒤에 적이 바투 다가선 이 마당에 옆으로 빠졌다가는 협공에 들어 헤여날 길이 아주 막히고말것이였다.

《사령관동지.》

오백룡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이를 부르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득히 저앞에서 적의 큰 집체가 다가오는 소음이 울리여왔다.

사령관동지를 우러러 바라보는 오백룡의 눈은 그렁하니 흐려서 엷은 별빛을 반사하였다.

사세부득이하여 위험천만한 이날의 행군길에 올랐을 때 누구보다도 불안과 초조 속에 볶이였을 오백룡이였다. 하루종일 달리면서 그가 무슨 생각인들 안했으며 무슨 방책인들 궁리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아무런 수도 써볼새없이 마침내 판가름을 해야 할 때가 닥치고야말았다.

《오백룡동무, 뭘 그러오? 시간이 없습니다. 전투준비를 시키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오백룡의 눈굽에 어리는 별빛을 바라보시자 절로 비장한 생각이 떠오르시여 일부러 엄하게 말씀하시였다.

안할말로 이것이 조선혁명의 기나긴 행군길에서 피눈물로 세워질 마지막 리정표로 되지 않는다고 그 아무도 장담할수 없다. 근 10년을 하루같이 눈덮인 강산을 헤쳐오면서 혁명의 승리만을 애타게 바라던 저 전사들의 순결하고 영웅적인 정신은 마침내 꽃피워보지도 못한채 이 이름없는 황량한 들판에 산산이 흩날려버릴지도 십상 모른다. 소박하고 다정하고 그러면서도 숭고한 그 전사들이 이 눈판에 명색없이 쓰러질수도 있다는것을 생각하실 때 김일성동지의 온몸에서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절대로 그럴수 없다. 무엇때문에 이 사태가 그렇게 절망적이라고만 봐야 하는가?

《정지성동무.》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앞으로 나가시오. 한태혁동무의 기관총은 김재영동무가 가지고 있습니다. 김재영동무를 부사수로 데리고 함께 싸우시오.》

《알았습니다.》

정지성은 절도있게 바로서서 경례를 붙이고나서 눈을 걷어차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때를 같이하여 후위에서 박인섭이가 달려왔다. 뒤따르는 적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서 거의 사격권내에 들어서게 됐다는것이였다.

《좋습니다.》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움직이는 행군대오를 향하여 말씀하시였다.

《뒤에 달린놈들은 우리를 잘 압니다. 저놈들은 우리가 얼마나 되며 얼마나 피로했다는것까지 알고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오는놈들은 우리를 그렇게는 잘 모를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대부대로 가장하고 앞에 있는 놈을 무자비하게 족치며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결정적이고 과감한 돌격만이 우리 혁명을 위기에서 구원할수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사령관동지께서는 몸소 권총을 뽑아드시였다. 이제는 시간이 없다. 촉박한 위기를 말해주듯 멀지 않은곳에서 말발굽소리와 함께 말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전사들은 묵묵히 어깨에서 총들을 내리워 비껴들었다.

적의 발걸음소리는 이제는 저벅저벅하고 뚜렷이 들려온다. 조선인민혁명군전사들은 그닥 빠르지 않는 걸음으로 그 발걸음소리를 맞받아 앞으로 나가고있다. 잠시후 뒤에서 강봉수가 다시 달려왔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후위를 기본대렬에 바투 붙으라고 이르신 다음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이 전투가 마지막전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남패자회의의 결정을 관철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조국에 진출해야 합니다. 조선혁명을 위기에서 구원하기전에는 우리에게 죽을 권리도 없습니다.》

마침내 눈가루가 밀려다니는 번번한 길우에 거무스레한 적의 집체가 나타났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앞으로 나서시여 권총을 내드시였다. 그옆에 오백룡과 강봉수가 바싹 붙어서서 역시 권총과 기관단총을 겨누어 들었다. 한걸음 앞에서는 정지성이와 김재영이 그리고 후위에서 철수해온 박인섭이도 기관총 한정을 가지고 나란히 섰다.

한마당 광풍이 적과 대치된 장바 한기장도 못되는 공간에 자욱한 눈장막을 쳤다. 순간 김일성동지께서는 지그시 권총방아쇠를 당기며 웨치시였다.

《혁명 만세!》

순간 산이 한꺼번에 허물어지는듯 한 함성과 함께 총소리가 밤하늘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종일 울분과 슬픔을 참아오던 전사들이 어둠과 눈무지를 밀어헤치고 걷어차면서 그 어떤 폭풍보다 더 무시무시한 폭풍이 되여 적의 집체를 흽쓸었다. 그것은 마치 장강을 막아놓았던 뚝을 한꺼번에 터뜨린것과 같았다. 분노는 거창한 사태처럼 서뿔리 나타난 적들의 머리우에 허물어져 쏟아지며 태질을 하였다.

적들은 총소리보다도, 예광탄이 긋는 무수한 탄도보다도 우선 이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그리고 증오에 사무친 웨침소리에 넋을 빼앗겼다.

《일제침략자들을 무자비하게 조겨라!》

어둠속에 높이 울리는 오백룡의 이런 구호소리는 마치 혈전의 밤하늘에 기발처럼 날렸다. 어디서 어떻게 뛰여다니는지 적을 찾아 어둠을 누비며 이리 뛰고 저리 닫는 그의 군복은 어느새 적의 상처와 자신의 상처에서 뿜어져나온 선혈에 젖어 거멓게 얼어들고있었건만 그는 자기가 사령부의 호위책임자라는것을 그 피와 탄알과 죽음의 범벅판에서조차 잊지 않고 웨치는것이였다.

《동무들, 사령부를 지키자.》

오백룡의 목소리는 피투성이 싸움속에 뒤죽박죽이 되기 쉬운 전사들의 사격에 침착성을 부여하고 하나하나의 동작과 이동에 기민성을 주었다.

정지성은 말 한마디 없이 눈을 똑바로 뜨고 적이 몰려다니는곳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살과 살을 맞대인 접전이다보니 특별히 좌지를 차지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묘준을 꼼꼼히 할 필요도 없었다. 침착하게 적을 찾아내기만 하면 명중률은 더없이 좋았다. 그런데 이 밤에 누구보다도 침착한것은 정지성이였다. 한참 사격을 하던 그는 눈앞이 흐려지는것을 느끼자 화끈 단 기관총의 총신을 눈우에 눕혀놓고 식히며 이제는 별로 쓸모가 있어보이지 않는 변장용 안경을 찬찬히 닦았다. 적탄이 파헤쳤는지 누군가가 발길로 걷어찼는지 눈가루가 안경알에 자욱히 덮씌워졌다.

《정동무, 뒤에 달린 적들이 닥치기전에 저놈들을 돌파해야 하오. 종심에 탄알을 몰방으로 박아넣소.》

권총을 높이 쳐드시고 앞으로 달려나가시던 김일성동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알았습니다. 재영동무, 예비탄창!》

정지성이가 이렇게 대답을 올리고 탄창을 갈아끼우는데 또다시 김일성동지의 목소리가 밤하늘높이 울리였다.

《동무들, 우리 부모형제자매들의 원쑤를 갚기 위하여 적들에게 무자비한 죽음을 주라!》

《와―》

조선인민혁명군 전사들의 과감무쌍한 돌격에 혼비백산한 적들은 미처 전개해볼 사이도 없이 종심이 허물리여 뒤걸음치기 시작하였다. 등을 돌려댄놈들의 뒤통수에 기관총이 불바람을 안기며 휩쓸어 버리자 놈들은 걷잡을수없이 허물어져서 어둠속을 빳빳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돌격앞으로!》

김일성동지의 힘찬 구령소리가 놈들의 뒤를 조이였다.

드센 돌격함성에 놀라 눈판에 엎어졌다가 짓밟히는놈도 있고 산턱으로, 벌판으로 굴러나는놈도 있었다.

추격은 한시간가까이나 계속 되였다. 뒤에 달린 적들은 앞에서 터져오른 불의의 접전소리에 놀라 잠시 우물거리다가 내처 따라왔지만 적을 맞받아치며 돌격해가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라잡지 못했다.

한옆에 야산기슭이 나타났다. 때마침 달이 솟아올랐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급히 추격을 멈추어세우시고 야산기슭으로 꺾어들라고 명령하시였다. 뒤따르던놈들은 아득히 떨어져버렸다.

전리품들 특히 놈들이 말파리에 싣고오던 식량과 신발들을 걷어지고 눈속을 헤치며 한참 걷는데 날이 희붐하니 밝아왔다.

《아니 재영동무, 신은 어쨌소?》

정지성이 얼굴전체를 덮어버린 성에를 문질러뜯으며 물었다.

《내 신이 어쨌어요?》

그러면서 제 발을 내려다본 재영은 눈이 둥그래졌다. 백바위골공작을 나가느라고 일부러 구해신은 검정고무신 한짝이 어디 갔는지 없고 통버선을 신은 맨발로 눈속을 걷고있었던것이다.

《아차, 아까 처음 싸움이 붙은 그 벼랑턱에서 애솔이 옆구리를 치길래 흘쩍 건너뛰였더니 그때 벗겨진 모양이예요. 참 야단났는데…》

재영은 여태까지 몇십리 잘 걷는 동안 전혀 느끼지도 못하던 맨발이 갑자기 시려나는지 께끼발을 디디며 울상을 지었다.

《사령관동지께서 보시면 또 걱정하시겠소. 유격대원의 발은 새의 날개와 같다고 하시지 않았소, 이 신을 한번 신어보오.》

지성은 전리품 왜놈군화를 재영이에게 내밀었다.

《내 발에 맞을게 뭐예요.》

재영은 수십리 뒤쪽에서 잃어버린 신을 그 언저리에서 찾을것처럼 뒤를 연신 돌아보며 시들한 표정으로 군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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