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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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내리는것이 아니라 허물어져 쏟아졌다. 눈송이는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다. 눈뭉치, 눈사태 같은것이 소리도 없이 그냥 천지를 메우며 끝없이 쏟아져서 쌓이고 또 쌓인다. 그것은 완연 눈으로 된 하나의 크나큰 장벽같은것이였다. 그 눈장벽앞에서 나무들은 마치 흙벽속에 박힌 산자와 같이 형체를 감추고말았다. 평지가 평균 해발 1,000메터를 넘는 룡강산맥의 대밀림자체가 지금 온통 눈속에 묻혀버렸다. 후날 기상학자들과 력사가들이 100년래의 대강설이라고 놀라와한 그 력사의 눈이 지금 통채로 하늘땅을 삼키고있다. 이해 겨울은 시작하는 잡도리가 벌써 심상칠 않다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진작 느끼고 계시였다. 눈은 어느새 길을 메우고 밀림을 메우고 산을 메웠다. 지난겨울 마당거우에서도 겪은바이지만 이렇게 초겨울에 내린 눈은 이듬해 봄이 깊어서야 녹는것이다. 그런즉 이해의 동기작전은 바로 이러한 눈속에서 진행돼야 한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어깨로 눈을 밀며 한걸음한걸음 앞으로 나가고있다. 앞에서는 7련대의 끌끌한 대원들이 눈벌을 딩굴어 길을 다지고있지만 워낙 쏟아지는 눈이 더미로 쌓이고보니 효과는 적었다. 그래도 길은 다져야 하였다. 만약 그대로 걸어나갔다가는 허망을 짚고 어느 벼랑으로 굴러떨어질지 모를 형편이였다. 뒤에는 사흘전부터 야마시다련대가 따르고있다. 남패자골안을 빠져나올 때 최춘국련대가 무찌르고나간 돌파구로 제1방면군은 북쪽으로 룡강산맥줄기를 꿰여 몽강 화전 현계로 들어섰고 제3방면군은 같은 돌파구로 해서 북동쪽 화전방향으로 빠져나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혼마려단의 뒤통수를 조기고 돌아온 제7련대를 야마시다련대와 혼마려단의 전선경계지대에서 기다리셨다가 적들이 혼란에 빠져 오락가락하는 틈을 타서 총소리 한방 울리지 않으시고 제2방면군 전원을 동남방향으로 이끌어내시였다. 앞으로 림강, 장백 땅을 누비면서 국경지대로 진출하자면 우선 룡강산맥줄기를 벗어져나야 하며 그러자면 이도하를 따라 뻗어있는 요구집단부락으로부터 이 일대의 채벌중심지를 련결하는 대도로와 협궤림철을 넘어서야 한다. 이 일대는 그전부터 큰 림산중심지여서 도로망이 발전되여있고 적들의 수비무력이 집중되여있는곳이였다. 따라서 이해 겨울에 조선인민혁명군과의 최종적인 대결을 서두르고있는 적들의 전략작전적 기도로 보아 당면하여 이 일대에 강한 타격집단을 조성했으리라는것은 쉽게 짐작할수 있는 일이였다. 눈이 오지 않는 대낮에도 길을 찾기 어려운 밀림속이건만 대오는 빠르지도 뜨지도 않게 그냥 앞으로 간다. 길라잡이로 맨앞에 서있는것은 장경수이다. 참으로 인간의 재능이란 끝이 없다. 이 눈속에서 어떻게 방위를 가려내며 어떻게 거리를 판단하는것인지 알수 없다. 그래도 장경수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앞장에 서있다. 학교는 고사하고 서당문전에도 못가봤다는 장경수이다. 하지만 그는 오늘 고상한 학문가운데서도 가장 고상한 학문인 맑스―레닌주의리론을 적잖이 풍부하게 소유하고있을뿐아니라 기관총사격에서는 한태혁이와 함께 아마 세계에서 첫자리를 다툴만 한 명사수이다. 그런 그가 장마당시세로부터 산속미립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통하지 않는것이 없고 모르는것이 없다. 어떤 부르죠아가 장경수같은 자질을 한몸에 갖출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람들이 세계의 주인이며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 과연 허황한것인가. 김일성동지께서는 자주 고개를 드시여 앞을 살피시였다. 그러나 장경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제부터 기다리시는 한태혁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태혁은 이도하방향으로의 행군로정이 결정된 그저께 저녁에 상강구와 국내로 한걸음 먼저 떠나보낸 세명의 정치공작원들을 호송할겸 협궤림철연선지대에 대한 정찰임무를 받고 떠나갔다. 그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수는 없겠지만 이 눈속에 필요한 시간까지 돌아올수 있겠는지, 적의 경계가 아무리 엄중하다 해도 정치공작원들을 안전지대까지 데려다주는것은 그에게 큰 문제로 될것이 없다. 그러나 정찰을 끝낸 다음 대밀림조차 삼켜버린 이 눈속에서 혼자 대오를 찾아낼수 있겠는지… 《사령관동지.》 무거운 목소리에 걸음을 늦추시였다. 어느새 커다란 눈사람 하나가 옆에 따라섰다. 박덕산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시였다. 행군도중에 덕산이 옆에 나타난다는것은 곧 그가 책임지고있는 후위련대에 정황이 발생하였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그러나 8련대 역시 하나의 어마어마한 눈수레모양으로 묵묵히 눈속을 따라올뿐 별다른 정황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들이 보입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셨다가 조용히 물으시였다. 《바투 따라왔습니다. 아마 딴 심산이 있는 모양입니다.》 박덕산은 되도록 말뜻을 똑똑히 전해드리기 위하여 눈투성이 팔을 쳐들어 입앞을 가리우고 말하였다. 《무슨 심산말입니까?》 《따라오기 힘든 모양입니다.》 《따라오기 힘들것입니다. 우리 동무들도 퍽 지친 모양인데… 그래 이 눈속에서 불질을 할 눈치가 보입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어이없으시다는듯 박덕산을 돌아보시였다. 《춥고 배고프고 또 앞길도 막막하니 차라리 여기서 끝장을 보자는것이겠지요. 발악해버리면 앞뒤를 가리지 않을것입니다. 지휘관이란놈이 빼빼마른 대좌놈인데 말을 타고 오는것을 어제 치기탄골어방에서 강철룡동무가 쏘아넘겨버렸습니다.》 《흠― 알만 합니다. 그래도 놈들로서는 고분고분 따라오는 편이 훨씬 나을터인데… 미친놈과 무슨 리치를 따지고있겠습니까? 지금 아마 저녁때가 다 되여오겠지요?》 김일성동지께서는 털외투자락을 헤치시고 회중시계를 꺼내보시며 말씀하시였다. 《그렇습니다. 저놈들이 불을 걸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렇게 바투 끌고서는 숙영도 하기 힘듭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세시 좀 넘었습니다. 좀더 가면서 봅시다.》 침묵이 흘렀다. 눈은 하늘의 어디에 그리도 많이 쌓여있었던지 내려도내려도 끝이 없이 쏟아졌다. 대렬뒤쪽에서 술렁거리는 기미가 느껴졌다. 덕산은 권총갑에 한손을 가져가며 사령관동지를 막아섰다. 그러나 대렬이 술렁거리는것은 적정때문이 아니라 이 눈속에 개털모자의 귀덮개까지 제껴올리고 이웃집나들이나 갔다오듯 싱글벙글 떠들며 나타난 한태혁이때문이였다. 《아니 저 동무가?》 덕산은 놀라서 사령관동지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요구방향으로 사흘전에 앞질러나간만큼 응당 앞쪽에서 돌아와야 할것이였다. 그런데 적이 바투 따라오는 뒤에서 나타났으니 누구나 놀라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에―에― 무슨 걸음들을 그렇게도 빨리 걷는지, 사람이 눈속에 묻혀 죽을번 했다니까…》 녀대원들의 대렬곁에 이르자 김정숙동지께서랑 금숙이랑 모두 달라붙어 그의 몸에서 눈을 털어주며 무어라고 한마디씩 하는 모양이였으나 반갑고 기뻐서 떠드는 그 목소리들은 하나도 들리지 않고 오직 희떱게 소리치는 한태혁의 목소리만 크게 울려왔다. 그러다가 김정숙동지께서 사령관동지쪽을 가리키시자 비로서 찔끔해가지고 서둘러 개털모자의 눈을 털어쓰고 달려왔다. 태혁의 표정은 언제 보나 같은 태평스러운것이였으나 그의 정찰보고는 대단히 엄중한것이였다. 요구집단부락은 여기서 약 70리길인데 예견한것보다 훨씬 많은 적들이 요구를 중심으로 이도하기슭을 따라 남북으로 100리길에 전선을 펴고있으며 그 주력은 무다구찌소장이 지휘하는 혼성려단과 정안군 2개 독립대대에 지방자위단과 산림경찰 그리고 통화쪽에서 마의하방향으로 증원되여온 경찰《토벌대》중 2개 중대가 배속되여있다는것이였다. 정찰자료를 토의하기 위하여 불리여온 오중흡이도 오백룡이도 모두 긴장되였다. 사령부가 생각에 잠겨 걷는데 따라 대오전체가 행군속도를 늦추었다. 오랜 전투경험들을 가지고있는 유격대원들은 벌써 한태혁이 가지고온 정찰보고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말 없이도 짐작하는것이였다. 《그래 동무는 어떻게 뒤쪽에서 나타났습니까? 길을 잘못들었습니까?》 모두 요구의 적들을 머리속에 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데 사령관동지께서 무중 이런 질문을 하시였다. 《아닙니다. 일부러 그렇게 했습니다.》 태혁은 태연한 표정으로 쾌할하게 대답하였다. 《일부러라니?》 김일성동지께서는 매우 큰 흥미를 느끼시고 재차 물으시였다. 《그건 저…》 태혁은 좀 게면쩍은지 뒤덜미를 문지르느라고 등에 수북이 짊어지고있던 눈을 허물어내리며 히죽이 웃었다. 《제가 떠날 때부터 눈이 왔습니다. 요구에서 정치공작원들을 먼저 떠나보낸 다음 그 자리에 눌러앉아 하루밤을 묵고 채벌장쪽으로 가다가 가라지툰에서 자위단장 한놈을 꾀여 점심까지 얻어먹고보니 더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 부대로 돌아오자는데 어디 있는지 알수가 있어야지요. 어디 있다고 누가 알려줘도 찾아낼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다른 지휘관들과 전령병들도 한태혁의 말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과연 이 눈속에 밀림속을 끝없이 흘러가는 부대를 제한된 시간내에 어떻게 찾을것인가? 김일성동지께서는 눈더미에 묻힌 얼굴속에서 눈을 반짝거리고있는 재영을 돌아보시며 빙그레 웃으시였다. 《그래 어서 말해보시오.》 사령관동지의 재촉을 받자 한태혁은 시무룩해서 말했다. 《사실 눈만 아니라면 그럴 생각하지도 않았겠는데… 정말 저는 언제나 정찰에 나가면 재수가 없습니다.》 《하기는 그런것 같기도 합니다. 재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것은 요다음 학습시간에 유물론을 공부하면서 토론해보기로 하고 돌아온 경위부터 말해보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너그러이 웃으며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눈길에는 따뜻한 사랑의 정이 감출수 없이 빛나고있었다. 《하는수없이 저는 떠나던 치기탄골로 갔습니다. 거기서 우선 적들을 찾았습니다.》 《흠― 적들앞에는 우리가 있을것이란 말이지?》 사령관동지께서 뒤를 받쳐주시니 한태혁은 다시 신이 나서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적들을 찾아내는것은 문제도 아니였습니다. 누구나 알고있고 아무데나 흔적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놀랐습니다. 적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그앞에 우리 부대가 있지 않겠습니까. 한마장도 되나마나합니다.》 《허허허, 매우 간단한 방법이군. 나는 또 우리 한태혁동무한테 특별한 재간이라도 있는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걸음은 굉장히 걸었겠습니다. 아마 우리의 세곱절은 걷지 않았습니까?》 《그렇게까지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령관동지, 저 제가 보기에는 적들이 형편없이 지쳤습니다. 저도 어지간히 지쳤기때문에 멀리 에돌수가 없어서 한 100메터사이를 두고 옆을 빠져나왔는데 한놈도 골을 쳐들고 보는놈이 없습니다.》 《그래 어떻단 말입니까? 적들에게 휴식을 좀 시키자는것입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별안간 엄한 목소리로 물으시였다. 《휴식보다도 저―》 한태혁은 잠시 갑자르더니 사령관동지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나서 말하였다. 《사실 휴식을 좀 주든지 해야지… 저놈들이 미쳐버릴지 모릅니다.》 《허허허…》 사령관동지께서는 문득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씀하시였다. 《한태혁동무가 궁리를 복잡하게 하는군. 그러나 동무의 의견도 고려는 해보겠습니다. 지휘관동무들, 우선 대오를 멈추어세우고 숙영준비를 시키시오. 아니, 숙영준비를 지금 당장 하자면 어려울테니 우선 좀 쉬게 해야겠습니다. 한태혁동무도 자기 위치로 돌아가서 쉬시오. 우리가 쉬면 한태혁동무의 의견대로 적들도 쉴수 있을것입니다. 만약 놈들이 죽을 궁리만 안한다면 말입니다.》 김일성동지의 명령에 따라 지휘관들은 자기 위치로 흩어져갔으며 잠시후 조선인민혁명군대오는 적을 500메터뒤에 달고 대휴식에 들어갔다. 2
(참, 눈도…) 쳐다보아야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향하여 김정숙동지께서는 혼자 말을 하시였다. 눈무지를 헤치고 겨우 몇가지 얻어낸 삭정이로 밑불을 피우고 고깔불을 놓았더니 어느새 눈무지는 녹아내려 불판이 마치 우물속처럼 패워내려갔다. 대원들은 모두 눈속에서 잠이 들었다. 나무밑의 눈을 대충 밀어내고 노루가죽 한장씩을 깔고 털외투의 자락을 여미자 곧 잠자리가 마련되였다. 총을 그러안고 그대로 뒤로 누워 털모자의 채양을 내리우니 팔짱을 끼기전부터 잠이 찾아왔다. 꼬박 사흘을 못잔것이다. 잠든 대원들의 몸을 메우며 눈이 쌓이고 덧쌓인다. 어느새 밀어냈던 눈무지는 다시 고르로와지고 그우에 두두룩하게 솟아올랐다. 그런 두두룩한 눈무지속에서 드르릉드르릉 코고는 소리가 울려나온다. 한태혁이였다. 《어쩌면, 눈속에서 코고는 소리가 다 들리네.》 고깔불에 발갛게 언 길다란 손가락을 녹이고있던 금숙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하였다. 《그냥 걸어온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한동무가 걸어온 길을 생각해봐요. 얼마나 힘들겠나…》 김정숙동지께서는 고깔불에 걸어놓은 야전밥통에 녹는대로 정갈한 눈을 퍼담으며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그래도 어디 힘들어해요? 무슨 사람이 저럴가…》 금숙은 곱게 휘여넘어간 눈섭을 찡그리며 이번에는 안타까운 어조로 말하였다. 《호호호.》 김정숙동지께서는 웃으시였다. 생각하니 김정숙동지께서도 웃지 않으실수 없었다. 사령관동지곁에서 돌아오자 여기저기서 맡겼던 짐을 찾아내는데 채옥이한테서는 배낭을, 금숙이한테서는 기관총을, 김정숙동지한테서는 탄창을, 옥금이한테서는 군복을 들썩 떠들어대면서 찾아내더니 인차 잠을 좀 자야겠다면서 다시 채옥이한테 배낭을, 또 누구한테는 기관총을 이런 식으로 다시 맡기는것이였다. 누구나 그의 청을 말없이 받아주지는 않았다. 사람좋은 철구아주머니나 옥금동무까지도 한태혁이라면 무엇인가 한두마디 까박을 붙이고야 배겼다. 그래도 그의 청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때문에 강철룡이가 그를 행군때마다 작식대와 재봉대에 배속시키는지 모를 일이지마는 이제는 녀성들속에서 한태혁이는 자기네 대원이나 똑같이 치부되고있었다. 《참 좋은 동무지?》 김정숙동지께서는 웃음을 입가에 지으신채 은근히 금숙이에게 말씀하시였다. 코소리가 드르릉거리는 눈무지를 한심스럽게 바라보고있던 금숙은 김정숙동지의 말씀에 긴장된 눈길을 돌리더니 말없이 눈치를 살필뿐 입을 벌리지 않았다. 김정숙동지께서 가볍게 한쪽 눈귀를 쪼프리며 웃자 금숙은 얼굴이 빨개져서 외면하였다. 그런 금숙이가 김정숙동지께는 무척도 아름답게 느껴지시였다. (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언제 가면 뜻을 이룩할것인가…) 김정숙동지께서는 별안간 가슴이 저려들어 눈길을 돌리셨다. 참, 눈이라니… 세상에 이런 눈이 또 어디 있을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시며 사위를 더듬던 김정숙동지의 눈길은 한곳에 못박혀버리였다. 사령관동지께서 허리까지 치는 눈속을 걸어가고계시였다. 숲인지, 산인지 어딘지 알수 없는 저쪽 밋밋한 언덕을 가로질러 이번에는 반대쪽 릉선으로 헤쳐나가신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한절반 허리를 일으키고 넋없이 바라보시였다. 전령병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분 그이께서 홀로 이 눈속을 거니시며 홀로 허리까지 치는 눈무지속에 서시여 어딘가를 끝없이 지켜보고계신다. 눈은 소리도 없이 쏟아지고 끝없이 쏟아져서 쌓이고 또 덧쌓인다. 어느새 밥통에서는 설설 물이 끓었다. 끼니를 대접할 마련이 없는 지금 더운물이라도 갖다드렸으면 해서 눈을 녹여 끓이기는 하였으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잠시 움직일 생각을 잊어버리고 멍하니 그이를 바라보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깔나무우듬지만 싸리울바자끝처럼 간신히 바라보이는 둔덕우까지 올라가셨다가 천천히 내려오시였다. 그이께서 아까 사령부가 위치했던곳까지 돌아오시는것을 보고서야 김정숙동지께서는 정신을 차리시였다. 《금숙동무, 아무래도 전투가 있을것 같아요. 태혁동무의 기관총 일없을가?》 《그래요?》 언제부터 짬짬이 깁던 쌈지감을 꺼내여 뒤적거리고있던 금숙은 눈을 흡뜨며 사위를 살피더니 사령관동지의 모습을 보자 서둘러 일감을 배낭뒤에 찔러넣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밥통을 벗겨들고 조용히 일어나시였다. 저만치 떨어진곳에서 연기가 피여올랐다. 이깔나무 몇그루가 빽빽이 죄여선 밑에 눈을 쓸어내고 재영이가 불을 피우고있다. 아마 사령관동지께서 쉬실 자리를 마련한 모양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 다가가시니 저쯤에서 장작단을 한아름 안은 강봉수가 눈무지우에 불쑥 솟아올랐다. 《눈속에서 불을 피우는 법을 모르는군. 이렇게 마구 걸치면 내기만 하지 불이 피나.》 사령관동지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볼을 불구어 불을 불고있는 재영을 한쪽으로 밀어내시고 손수 나무가치들을 쌓아나가시였다. 《나무가 다 젖어서 그럽니다.》 재영은 물러나앉아서 눈귀를 쓱 문질러 검댕이자욱을 내면서 고집스럽게 말하였다. 《젖은 나무로 불을 피우는 법을 알아야 진짜 유격대원이란 말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재영의 빨갛게 짓물린 눈을 사랑스럽게 들여다보시며 말씀하시였다. 강봉수가 장작단을 놓고 불앞에 나서자 그이께서는 손을 터시며 다시 말씀하시였다. 《내 말이 미덥지 않거든 이제 이 전달장동무가 불피우는것을 보시오.》 그러시고는 회중시계를 꺼내보시며 눈속에 잠든 대오를 살피시였다. 《정숙동무, 웬일이요?》 김일성동지께서는 이깔나무뒤에 눈을 맞으며 서계시는 김정숙동지를 보시자 놀라신듯 물으시였다. 《저 더운물이라도…》 김정숙동지께서는 맹물을 끓여온것이 죄송하여 꺼져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시였다. 《더운물을?》 김일성동지께서는 강봉수와 재영을 돌아보시더니 기쁨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느새 물을 끓였습니까?》 《방금…》 《그렇습니까. 남들은 다 쉬는데… 하여튼 고맙습니다. 이렇게 몸이 떨려날 때 더운물을 한잔씩 들이키면 몸이 훈훈해지면서 기운이 날것입니다. 어서 이리 오십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정숙동지께서 올리시는 물잔을 받아 후―후― 김을 부시였다. 강봉수도 재영이도 한잔씩 받아들고 마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행복감에 잠기여 기세좋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고깔불에 빨갛게 언 손을 내대시였다. 《에크―에― 뜨겁네.》 재영이가 찔끔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앉으며 눈물이 핑그르르 도는 눈을 딱 감고 고개를 흔들어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 모양이 어찌 야단스럽던지 당장 웃음이 터져나오려는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에― 난 더운 물 자꾸 끓여주는거 싫더라.》 가까스로 급한 고비를 넘긴 재영은 입을 뎄는지 혀끝으로 하느라지를 더듬어보고나서 중얼거렸다. 《싫으면 안마실게지 무얼 자꾸 두덜거리면서 그래?》 강봉수가 엄하게 나무랐으나 재영은 들은체도 않고 소매끝으로 입언저리를 쓱 훔치고나서 또 김이 피여오르는 물잔을 입가에 가져다 댄다. 그 외투소매끝에서 털쪼박이 삐어져나와 너덜거렸다. 《이게 뭐예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사령관동지께 들리지 않도록 조심을 두어가며 그 털쪼박을 흔들어보고 속삭였다. 재영이는 얼른 제손으로 그것을 소매안으로 깊숙이 밀어넣고 사령관동지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중얼거렸다. 《나무에 긁혀서 그래요. 유격대옷이 부르죠아옷같겠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이리 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정말 사령관동지께 또 걱정을 끼쳐드릴가봐 엄하게 속삭이며 재영이를 나무그루뒤로 끌어냈다. 재영이는 시무룩해서 엉금엉금 돌아앉았다. 사령관동지를 비롯하여 모든 유격대원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이 용감하고 슬기로운 소년은 아직도 장난이 궂어 다른 사람보다 곱이나 옷을 더 쳐뜨렸다. 행군을 시작하여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옷이 판이 나기 시작했다는것을 아시면 사령관동지께서 걱정하실것이기때문에 김정숙동지께서는 재영이를 이끌고 슬그머니 나무뒤로 돌아앉았다. 《팔을 이쪽으로 뻗쳐요.》 김정숙동지는 소매끝을 접어올리고 자기 군복 안섶에서 바느실을 뽑아내여 감치기 시작하였다. 《참 누난 이런것만 보네.》 재영은 거북한듯이 한쪽팔을 뻗치고 앉아 퉁명을 부렸다. 《왜 이렇게 옷을 험하게 입어요? 누가 벌써 옷을 쳐뜨린 사람이 있나 보아요.》 《난 소매속에 털이 없어도 일없어요.》 재영은 고집을 부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친누나처럼 사랑해주는 김정숙동지의 앞에서는 갖은 응석을 다 부리지만 그러다가 사령관동지의 눈에 띄면 십상 칭찬받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다. 이때 사령관동지께서는 자욱한 눈안개속에 뽀얗게 피여오르는 물잔의 김을 부시면서 친오누이보다 더 다정한 그들의 말이며 거동을 다 살펴보고계시였다. 그이께서는 김정숙동지께서 실을 물어끊는것을 보시고나서 잠든 대오쪽으로 고개를 돌리시면서 말씀하시였다. 《푹 좀 재웠으면 좋겠는데… 하기는 이런 때 한 10분씩만 눈을 붙여도 한결 나을것입니다. 김정숙동무, 수고스럽지만 물을 좀 끓여보시오.》 김정숙동지께서는 얼른 바늘을 옷섶에 찌르고나서 그이앞으로 다가가시였다. 《눈속에서 자고나면 몸이 떨릴것입니다. 저것 보시오. 박덕산동무와 오백룡동무가 달려옵니다. 전투를 해야겠는데 이런 더운 물을 우리 동무들에게 한잔씩 대접할수 없겠습니까?》 《알았습니다.》 《강봉수동무가 이 나무랑 가져가서 좀 도와주시오.》 《일없습니다. 저희들이 할수 있습니다.》 《아니요,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 그릇에 끓여서 하나씩 나누어 주게 해야 합니다.》 《알았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 강봉수와 함께 장작단을 안고 돌아오시니 옥금이도 철구도 채옥이도 다 깨여있었다. 전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금숙이가 깨운 모양이였다. 금숙이는 깨끗이 닦은 한태혁의 기관총을 제 모포에 싸서 한옆에 밀어놓고 근심어린 눈길로 김정숙동지를 맞이하였다. 유격대의 모든 행동은 재빨라야 한다. 어느새 불판을 넓히고 작식대원들의 배낭에서 떼낸 소랭이들을 주런히 걸어놓으니 무드기 담아부은 눈이 설설 녹아내렸다. 《진짜 전투를 하게 될가?》 철구아주머니가 사령부쪽을 돌아보며 미타하게 말하였다. 고깔불곁에 앉으신 사령관동지께서는 책을 들고계시였다. 그 량옆에 벌려앉은 박덕산과 오백룡은 고개를 숙이고 불을 쪼이고있으며 재영은 어디서 또 나무를 한아름 안고온다. 너무나 조용하고 안정된 분위기였다. 《어서 서둘러요. 정숙언니가 언제 빈 말을 한적이 있어요.》 금숙이가 핀잔 비슷이 이렇게 말하며 뜨거운 양은소랭이를 닁큼 들어 커다란 버치에 물을 쏟고 다시 눈을 퍼담았다. 《하기는… 옳지, 사령관동지께서 시간을 보시는군. 전투가 있기는 있을 모양인데…》 철구아주머니가 미처 말을 맺기도전에 박덕산과 오백룡이 벌떡 일어나 사령관동지께 경례를 하고 달려갔다. 뒤미처 재영이도 7련대가 있는 앞쪽으로 달려간다. 얼마후 기상구령에 의해 눈을 툭툭 털고 일어난 대원들은 더운물 한잔씩을 마시고나자 사위를 둘러보고 저마다 놀라와 하였다. 《아니 아직 날이 저물지도 않았단 말야?》 《하루밤 푹 잔것 같은데 15분밖에 안됐다니… 이거 어떻게 된일이야…》 별안간 후위에서 총소리가 자지러졌다. 대원들은 침착하게 은페진지를 차지하고 눈을 다져 사격좌지를 만들었다. 필요한 시간만큼은 후위에 선 강철룡네가 견디여줄것이며 전투의 전과정은 이미 사령관동지의 가슴속에 그려져있으리라는 확신이 모든 유격대원들의 동작을 하나하나 정확하고 빈틈없게 만들어주었다. 한태혁은 후닥닥 뛰여일어나더니 배낭같은 장구들은 다 밀어맡겨놓은채 기관총만 찾아들고 설설 끓는 물 한잔을 단숨에 쭉 들이키였다. 다 들이키고나서야 코살을 찡그리며 입을 우물거렸다. 《입 데지 않았어요?》 채옥이가 웃음을 참으며 묻자 잔뜩 성이라도 난듯이 소리쳤다. 《뜨거우면 뜨겁다고 할게지…》 총소리가 자지러졌다. 한태혁은 물잔을 금숙이 가슴에 훌 집어던지더니 냅다달려갔다. 한참 허리를 잡고 웃으며 돌아가던 녀대원들은 사령관동지의 명령에 의하여 7련대뒤쪽으로 이동하고 숲속은 삽시에 조용해졌다. 눈발은 한결 가늘어졌다. 눈발과 함께 자지러지던 총소리도 뜨음해지더니 위장포를 쓰고 눈무지에 매복한 유격대원들앞에 박덕산을 선두로 한 후위구분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재빨리 릉선을 넘어 매복선을 벗어났다. 맨 나중에 처져서 오던 강철룡과 최병규를 비롯한 기관총수들이 이따금 돌아서서 어디쯤 있는지 아직은 보이지 않는 적들쪽에 대고 련발사격을 안기고는 재빨리 앞선 대렬을 따라갔다. 강철룡은 마지막으로 릉선우에 서서 한참이나 기관총사격을 퍼붓더니 눈구름속에 삼켜지듯 없어지고말았다. 무드기 쌓인 눈벌우에 부드러운 함박눈으로 변한 눈발이 가볍게 맴을 돌며 차분히 내려앉는다. 무척도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눈세계였다. 눈은 어마어마한 흡수력을 가지고있어서 방금까지 울리던 기관총소리도, 단 입김도, 번쩍거리던 총도 다 삼켜버린듯 눈벌은 가뭇 소리없이 누워있다. 5분 남짓 지나자 어지러운 형상들이 소란한 잡음을 끌고 이 눈세계에 침입해들어왔다. 가늘어지는 눈발속에 형체를 드러낸 적들은 한개 대대가량의 력량인데 두개의 제대로 갈라져서 돌격태세로 달려왔다. 무릎까지 치는 눈구뎅이우로 돌격할 생각을 해낸만큼 적들의 기상은 발악적이고 그만큼 사나왔다. 이미 릉선너머 사라진 조선인민혁명군을 추격하느라고 적들은 단숨에 매복선을 지나 등성이에 올라섰다. 한태혁의 기관총과 어느새 되돌아선 강철룡네 후위성원들의 기관총이 마주 불질을 하기 시작하자 그리도 정갈해보이던 눈벌의 그 태고연한 신비성은 나딩구는 시체와 북북 이를 가는 소리, 아츠러운 비명, 흰눈을 물들이는 피로 산산이 깨여져나갔다. 야마시다련대의 마지막 대대는 이 눈속에 완전히 파묻히고말았다. 3
그 무시무시한 눈이 온 이튿날은 또 사나운 눈보라가 터졌다. 그러나 야마시다련대를 최종적으로 눈속에 쓸어박은 통쾌감에다 그 전투에서 얻어낸 로획품도 적지 않아서 이튿날은 노래랑 부르며 사기왕성하게 눈보라를 뚫고나갔다. 한태혁의 정찰은 정확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사령관동지의 결심에 따라 요구집단부락에 둥지를 튼 무다구찌려단의 주력을 번개같이 들이치고 단숨에 이도하를 건너 적의 림철지대를 극복하였다. 말로만 들었지 여적 김일성사령관께서 몸소 령솔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무다구찌려단의 장병들은 설마설마하고 앉아있다가 된불을 맞아 사등뼈가 부러져나간놈처럼 다시 추어설념을 못하는듯 하였다. 하기는 가혹한 싸움이였다. 그러다나니 아군도 희생자를 내였고 적잖게 부상자도 생겼다. 그렇지만 감히 유격대를 《소멸》해보겠다고 이른바 《요점배치》전술에 따라 그물을 치고 기다리던 놈들의 면상을 정통으로 답새겨 놓은것이 유격대원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하였다. 부대는 장백산맥줄기를 바라고 한동안 야산지대를 행군하게 되였다. 야산지대라 하지만 워낙 태고의 밀림속이라 산의 높이가 전혀 문제로 되지 않는곳이였다. 이무렵 후위에 선 7련대로부터 상서롭지 못한 보고가 들어왔다. 멀찌감치 뒤를 따르는 적의 큰 집체가 있다는것이였다. 그것은 무다구찌려단의 패잔병은 아니고 더구나 이미 섬멸된 야마시다련대는 아니며 어느 모로 보나 남패자에서 7련대와 대치되여있던 데라시마사단의 주력 혼마려단으로 추측된다는것이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혼마려단은 남패자에서 이곳까지 줄곧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라 그 전로정을 다 밟아온것으로 된다. 이것은 놈들이 이번 동기작전에서 추구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전략―작전적기도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즉 놈들은 혼마려단으로 하여금 도중 요소요소에 그물을 늘이고있는 《토벌》집단과는 관계없이 조선인민혁명군을 끝까지 추격하자는것이다. 그러거나말거나 유격대원들은 힘차게 걸어간다. 유격대가 언제 뒤따르는놈이 없는 조건에서 행군해본적이 있는가, 그 뒤따르는놈이 혼마이든 넝마이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만 오늘은 날씨가 괜찮은데 좀 시장하고 대낮부터 눈시울이 자꾸만 내리감기려드는것이 재미없다. 요구에서 격전을 치르고 하루밤에 림철지대를 벗어나느라고 200리길을 단숨에 내뛴데다 이때부터 식사량이 형편없이 줄어들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작식대원들이 맹물만 끓여낸다. 주변좋기로 소문난 군수관 조진범이도 별수가 없는지 성이 잔뜩 난 얼굴로 걸음만 다우친다. 이럴 때 박덕산이가 말파리떼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가지고 왔다. 덕산이도 오중흡이도 습격전투를 조직하자는 의견이였다. 지금 당장 식량이 곤난하기도 하지만 래일쯤부터는 인가와 점점 멀어져 대밀림지대로 들어가야 하겠는데 지금 식량을 해결해야 한다는것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적의 대부대가 뒤를 조이고있는 조건에서 부대를 지체시키는것은 어느 모로 보나 재미가 없다고 생각되시여 날랜 동무들로 습격조를 조직하여 파견하시였다. 습격조책임자로 선발된 강철룡는 여섯명을 골라내였는데 여기에 장경수며 한태혁이며 한다하는 기관총수들을 다 데리고갈 차비라 사령관동지로부터는 일반적인 사업작풍때문에 꾸중을 듣고 오백룡이로부터는 사령부호위에 관심이 적다고 호되게 닦이웠다. 그런 눈치도 모르고 제먼저 따라나섰던 한태혁이까지 곁불에 맞아 눈물이 쑥 나오도록 욕을 먹었지만 검질기게 달라붙어 결국 습격조에 따라가게 되였다. 습격조는 말파리떼를 앞질러가서 기다리고있다가 호위하는 산림경찰 여덟놈을 쓸어눕히고 말 두필에 콩자루와 수수포대를 가득 짊어지고 대오로 돌아왔다. 적의 추격을 떼놓기 위하여 부대는 그대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식량이 해결되였다는 소식이 퍼지자 행군속도는 저절로 빨라졌다. 《하여간 한동무가 장사는 장사야.》 어느새 옆에 와서 무겁게 지고가는 출판기재들을 곁들어주는 태혁을 향하여 정지성은 경탄에 차서 말하였다. 《비서처동지들이 말을 잘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잘하는줄은 몰랐군. 에이 그런 시시한 소리 하지도 마시오.》 한태혁은 정말 화가 난다는듯이 한손을 쳐들어 허공을 베며 와락와락 걸음을 다우쳤다. 그들은 사이가 좋았다. 한쪽이 키꼴이나 한 억센 사나이라면 한쪽은 약골이였고 한쪽은 비위가 노래기회쳐먹을 성미라면 한쪽은 걸핏하면 처녀처럼 얼굴을 붉히는 어질고 성실한 사람이였다. 한쪽은 판무식쟁이로 유격대에 들어왔다면 한쪽은 대학공부까지하면서 온갖 시국풍조에 다 부대끼다가 멀고 험한 길을 에돌아 혁명의 길에 들어선 인테리였다. 어디에도 공통성은 있어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바로 그 차이점때문에 서로 끌어당기고 자기에게 없는것을 서로 보충하며 흡수하는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유난히 사람들의 눈에 뜨일만큼 붙어돌아간다. 한태혁은 제 성미도 다사하지만 소대장 강철룡이 잠시도 한자리에 붙박여있을새 없이 자주 불러댔다. 유격대의 생활에 쓸모 많은 성격과 자질을 타고난 그는 일이 많았다. 정찰도 나가고 눈길을 내는데도 나가고 식량운반도 하고 재봉대에도 동원되고 부상병을 업어나르기도 하고 습격조에도 나가고 전투때면 또 요진통을 막아나서는 식으로 안불려다니는데가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군소리 없이 제기된 과업을 제꺽 해치우고는 자기 위치로 돌아와 정비서를 눈으로 찾는것이였다. 《그 별스레 생각지 말구 총을 이리 주오다. 그 뭐 한다하는 유격대원들도 서로 돕게 마련이지…》 태혁은 이렇게 조심을 두고 말하며 정지성의 총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지성은 그것만은 언제나와 같이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내 무슨 딴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게 아니요. 아직은 나한테 힘이 있소. 한뉘 남의 도움을 받아가며 혁명할수야 없지 않소. 가만 내버려두오. 그대신 노래나 한마디 부르오.》 《허 참, 쇠털 뽑아 제 구멍에 박겠군.》 태혁은 재미도 없다는듯이 중얼거리며 댓걸음 앞서 걸어나가더니 별안간 커다란 목소리로 《세계혁명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5대양 6대주에 붉은 바람 불어온다 세계의 동무들아 무산혁명 떨쳐나자
이 어마어마한 노래는 무겁게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던 사람들의 얼굴을 웃음발로 덮어주었다. 그러나 시련은 날따라 시간따라 간고해졌다. 말파리떼를 습격하여 해결해온 식량도 부대에 골고루 풀어헤치니 이틀이 못가서 바닥이 났다. 숲은 점점 깊어지는데 산막 하나 오솔길 하나 만날수 없었다. 100리안쪽에는 채벌장도 없었다. 적들은 주민지대쪽으로 밀집대형을 짓고 서서 유격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있다. 뒤에서는 혼마려단이 바싹 꼬리를 물고 죄여들었다. 어떤 때는 후위와 놈들의 선두척후의 거리가 5리안쪽으로 다가설 때도 있었다. 이제는 전투의 시작과 끝을 가르기 힘들게 되고 그 회수도 가늠할수 없게 되였다. 거리가 밭아지면 한바탕 불이 오고가는데 행군은 그 전투의 불길속에서도 멈출수 없었다. 눈보라는 사흘째 계속된다. 산천도 밀림도 하늘땅의 모든것이 눈보라때문에 기가 질려버렸다. 무엇이나 머리를 쳐들고는 견딜수 없다. 그렇게 완강한 이깔나무도 사흘 밤낮 눈보라에 시달리자 이제는 공손히 바람이 하자는대로 굽어들고 휘고 종당에는 부러져나갔다. 하늘땅 어디에나 휴―휴― 하고 아츠러운 비명소리가 가득차있다. 그래도 광풍은 성이 차지 않아 그 비명소리를 집어삼키며 우르르 탕탕 하고 마냥 울부짖는다. 눈더미를 덮씌우고 눈가루를 휘뿌려 세상만물을 추위와 공포속에 다 몰아넣을 잡도리다. 제 뜻을 가지고 제 갈 길을 가는것은 인간밖에 없다. 인간만이 눈보라가 쳐오는 방향과는 반대로 후려치는 눈갈기를 헤치며 맞받아 앞으로만 나가고있다. 얼핏 보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치렬처절한 일대격전같기도 하였다. 눈보라는 악을 쓰며 접어든다. 그러나 유격대는 련사흘째 이러한 눈보라의 위협을 못느끼는것처럼 묵묵히 앞으로만 나가는것이였다. 아무도 바로 걷는 사람이 없다. 얼굴을 쳐들고는 눈보라가 쳐갈겨서 한걸음도 발을 옮겨놓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모두 소매로 눈앞을 가리고 모로 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심술스러운 존재와 밀기내기라도 하듯 한걸음한걸음 안깐힘을 써가며 앞으로 나갔다. 그 심술스러운 존재는 와짝 밀면 그리 힘들지 않게 밀어낼수는 있지만 영 물러서지는 않는 검질긴 존재였다. 그렇게 매 걸음을 밀기내기하듯 하는 사이에 진이 빠져서 자칫하면 나간것보다 더 많이 되밀려내려오게 되는것이였다. 정지성은 어깨를 잔뜩 구부리고 어깨밑에 지리끼듯 고개를 파묻었다. 그래도 다리는 뒤로 지치려고만 한다. 등에 진 배낭이 바람을 안고 기울기울하는바람에 가뜩이나 바로 가누기 힘든 몸이 제꺽하면 구겨박힐 차비다. 《에이, 경치게는 미끄럽다!》 지성은 이렇게 중얼거리려 하였으나 목소리는 새여나가지 않았다. 새여나갔다 해도 가려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우르르― 바람소리는 마치 천둥처럼 하늘땅을 울리고있다. 가까스로 한쪽다리를 끌어붙이고 다른쪽 발을 내짚으려 하니 사나운 이리떼같은 눈보라가 발뒤꿈치를 물어뜯는다. 지성은 몸의 중심을 바로잡으려고 뒤뚝거리다가 배낭이 바람을 안고 한쪽으로 쏠리는바람에 눈구뎅이에 태질을 당하고말았다. 한줄로 늘어서서 모재비로 걸어가는 대렬에서는 누가 쓰러지는지 누가 대렬밖으로 나섰는지 가려볼수가 없었다. 하늘땅을 다 삼킨 눈보라는 그속에 오직 하나 제 뜻으로 움직이는 인간들을 제압할 양으로 무섭게 아우성치며 덮쳐들었다. 사태치는 눈속에 앞대렬이 지나간 발자국을 가려딛는것이 고작이라 그 누가 아우성을 친대도 바람소리와 구별해듣기가 힘들었다. 지성은 눈구뎅이에 파묻힌채 물매를 따라 몇바퀴 딩굴다가 멎었으나 인차 일어날수가 없었다. 우묵한 홈타기에 빠져든것 같은데 어느새 사태같은 눈보라가 문다져버려서 번번해졌다. 지성은 눈속에서 꿈지럭거리며 눈과 코에 달라붙은 눈뭉치를 대충 훔쳐냈다. 아직 목덜미와 털모자틈새기에 그대로 눈가루가 뭉쳐있었으나 기력이 없어서 그대로 들어엎디여 숨을 톺았다.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지 않으면 여기서 얼어죽는다.) 그는 몇번이고 자기를 채찍질하였으나 사지는 말을 듣지 않는다. 과연 죽는것이 이보다 더 괴로운것일가? 얼어들고 지치고 허기진 육체는 이렇게 되묻는것이였다. (하기는…) 지성의 넋은 맥없이 중얼거렸다. 손끝에서 감각이 차츰 사라져갔다. 처음에는 따끔따끔한듯 하더니 넋의 마비와 함께 손끝에도 마비가 오는 모양이였다. 그러자 오직 하나 일어나자는 지향을 가지고 용을 쓰던 허리마저 나른해왔다. 《시라소니같은놈! 네까짓게 독립을 할 동안 세상사람들은 다 무엇을 한다더냐? 어디에 너만 못한 사람이 있겠다구 네가 중뿔나게 나서서 사상가행세를 해!》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득한 공간을 뚫고 귀전을 쳤다. 아버지의 분노가 과연 옳았단 말인가. 북청물지게장사의 아들이 독립시킬수 있는 나라라면 왜 다른 사람은 다 이 길에서 물러났느냐고? 그래서 나까지 물러나야 옳았단 말인가! 순간 지성은 허리를 번쩍 솟구었다. 눈무지가 갈라지면서 배낭이 눈구뎅이우에 솟아오르자 그옆을 지나던 8련대의 대렬이 주춤거렸다. 《이게 누구요? 정지성동무 아니요?》 누가 배낭을 끌어당기며 묻는다. 지성은 비칠거리며 끌리는대로 대렬에 들어섰다. 진눈이 달라붙은 눈언저리를 훔치고 돌아보니 뿌옇게 흐린 시야속에 안타깝게 잡아흔드는 성림의 얼굴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그렇지, 이 동무가 8련대에 배치됐다고 했지. 그러니 비서처는 멀리 앞으로 갔군.) 정지성은 속으로 중얼거렸을뿐 아무 대척도 하지 않고 옆을 지나는 대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빨리 걸읍시다. 여기 떨어졌다가는 죽소.》 성림은 이렇게 말하며 배낭채 지성을 흔들었다. 출판도구가 다 들어가있는 배낭은 워낙 부피가 커서 그것이 흔들리는대로 몸도 비칠거렸다. 《고맙소, 걷겠소.》 지성은 바싹 마른 입술을 추기고나서 가까스로 대답하였다. 《참, 정동무같은 인테리에게는 견디기 힘드는 행군이요. 그런데 이건 뭘 이리 많이 졌소?》 지성이 겨우 걸음을 떼여놓았을 때 뒤를 받쳐주려고 배낭밑에 팔을 뻗치던 성림은 놀라서 소리쳤다. 《등사기랑 종이랑… 그런게요.》 《아니, 그러니 넘어질밖에… 이렇게 무거운걸 혼자 지고서야 누가 견디겠소.》 성림이 누군가를 나무라듯 혀를 차며 말했으나 지성은 다시는 대척을 안했다. 우선 대답할 맥이 없었다. 다음 또 나누어 지자는 청을 듣고싶지 않았다. 벌써 태혁이며 김정숙동지이며 여러 사람이 짐을 나누어 지자고 간청하다싶이했지만 완강하게 물리친 지성이였다. 아니나다를가 성림은 의례 좋아하려니 생각하고 그의 배낭을 벗기려들었다. 《왜 이러오?》 지성은 걸음을 멈추고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어떻게 이걸 혼자 지고 가겠소. 나누어 집시다.》 《그만두시오. 난 내 힘으로 내 책임을 다 해내겠소.》 《아니…》 성림은 놀라서 엉거주춤 손을 내뻗친채 멎어섰다. 《내 책임이요.》 정지성은 고집스럽게 이 한마디를 하고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사이 관절이 다 얼어붙어버렸는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눈이 엉겨붙어 주추돌처럼 무겁게 박힌 발을 빼자면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다리를 몇번 버드럭거려야 한다. 그러노라면 가슴과 볼을 사나운 눈보라가 칼날처럼 치고 지나간다. (북청물지게장사의 아들이 어쨌단 말인가? 이 눈보라가 나 한사람만 치는것도 아닌데…) 대렬을 따라잡는다는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다음 휴식때까지 8련대 대렬에서나마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을듯 하였다. 사실 지성이 보기에 딴 동무들은 그리 힘들어하는것 같지 않게 보였다. 아니 본것도 느낀것도 없었다. 온통 눈보라에 다 삼켜져서 일부러 살펴보아야 힘들어하는지 마는지 전혀 가려낼 길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가고있다. 정지성은 여기서 그중 힘들어하는것은 자기라고 생각하는것이였다. 어느덧 그는 성림을 저만치 뒤떨구어놓고 앞으로 나갔다. 그것은 걸어간다기보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비칠거리는 동작의 반복이였다. (이제 당장 휴식이 없으면 나는 넘어질는지 모른다. 사실 이 행군을 내가 견디여낸다는것은 어려울것이다. 허지만 내가 어떻게 넘어진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앞으로 나갔다. 비칠거리는 그 걸음으로 한사람을 앞서고 두사람을 앞서는 가운데 어느덧 8련대의 선두에 나섰다. 50메터이상이나 빈 간격이 눈보라속에 가로놓여있다. (아―) 정지성은 주춤하고 멎어서서 저멀리 나무그루사이로 사라져가는 어느 녀대원의 기폭처럼 휘날리는 치마자락을 바라보았다. (철구아주머니로군, 난 도저히 저기까지 못따라가겠지. 허지만 여기서 주저앉는다면 나는 종시 혁명가가 못되고마는게지.)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몇걸음을 옮겨놓았다. 길이 구부러들면서 맞바로 쳐오던 바람이 옆으로 돌아섰다. 걸음떼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우선 고개를 쳐들수 있다. 그러나 지성은 바람이 돌아섰다는것도 걷기가 헐해졌다는것도 못느끼고 그냥 고개를 한쪽 겨드랑이에 지르끼듯 숙이고 비틀비틀 걸었다. 큼직한 비자루모양의 입김이 숨가쁘게 피여나와 눈앞을 가리웠다. (결국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옳은것으로 될것이다. 아버지의 신념은 생활속에서 굳어진것이니 그만한 근거는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쨌든 철구아주머니같이 나이 많은 녀대원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간 길을 못따라가지 않는가. 하기는 철구아주머니가 어떤 동무인가? 유격투쟁을 벌써 5년째나 해오는 혁명가이다. 그러나…) 지성은 어느새 경위중대와 8련대 사이의 한중간에 나서서 홀로 걸어가고있었다. 이마로 진땀이 배여나오다가 성에로 변해버리군 하여서 털모자의 채양과 눈섭사이에 자그마한 지붕같은것이 생겨났다. 살눈섭에는 성에가 몇겹이나 얼어붙어서 눈시울을 찔렀지만 털어버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성은 지금 무엇을 보고 걷는것이 아니였다. 그는 지금 자꾸만 주저앉으려는 자기라는 인간에 대해 랭혹한 관찰을 계속하고있었다. 그것은 생활에 대한 아버지의 타산과 주장을 검산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람이였다. 후치령이 아찔하게 바라보이는 두메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여난 아버지는 젊었을 때 산속으로 피신해들어온 한 계몽학자로부터 천자권이나 배웠다. 아버지는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강기가 있는 사람이였다. 여름한철 화전농사를 짓고나면 겨울에는 숯을 굽고 나무를 해서 북청읍내나 멀리 신포항구까지 내다 팔고 그대신 어물을 받아 지고는 북수백산밑의 산촌도 찾아가고 부전강기슭도 찾아갔다. 이렇게 뼈를 깎으며 한해를 번 돈이 부자놈 한끼 반찬값도 되나마나했지만 그는 물리지도 지치지도 않고 그 길을 걸었다. 신갈파같은 먼 장을 바라고 떠나면 겨울 한철을 다 보내는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하여 마침내 북청 남대천가에 사나흘갈이 잘되는 땅을 장만했고 조촐한 살림집을 일구어세웠던것이다. 그와 함께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도 제 오륙만 부지런히 놀리며 눈 똑바로 뜨고 살면 남부럽지 않게 살수 있다는 신념이 생겨났다. 지성이 자라자 그는 서슴없이 학교에 넣었고 소학교를 졸업하자 단연 서울로 보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앞으로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사람구실을 하자면 우선 무엇보다먼저 글을 알아야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모든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농사와 집일을 몽땅 안해와 맏딸에게 밀어맡겨버리고 아들과 함께 서울에 나가 삭월세방 한간을 얻어 제손으로 끼니를 끓여먹으며 학비를 벌어댔다. 그는 바로 유명한 북청물지게장사가 된것이였다. 지성은 어릴 때는 그런 아버지가 동무들보기 창피하였고 나이들면서는 아버지가 눈물겹도록 고맙고 미안하였다. 그는 아버지대신 물지게를 지고 나서기도 하고 끼니도 끓였지만 그때마다 아버지의 노염을 샀다. 아버지는 자식이 자기의 로고를 덜어주기를 바란것이 아니라 어엿하게 공부를 하여 하루빨리 공명을 세우기를 바랐던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와 아들의 견해는 대립되였다. 아버지는 학교선생이나 하다못해 무슨 회사같은데 취직할것을 바랐으나 지성은 뿌리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다시는 학비를 벌어댈 생각을 안했고 실지 피천 한잎 보내주지를 않았다. 지성이는 처음부터 그럴 각오였기때문에 고학으로 어느 사립대학에 들어가서 3년을 다녔으나 종시 끝을 보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물지게를 져서 공부를 시킨 아들은 출세의 길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활의 신조를 뒤집어엎자는 사회운동의 길을 걷게 되였던것이다. 아버지는 노하였으나 학생운동에 관련되여 쇠고랑을 차고 조선에 돌아온 아들을 차마 피줄이 켕기여 그냥 둘수가 없었다. 그러나 근근히 차입품을 마련하여 찾아들어간 형무소면회실에서 아들은 엄격하게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면회실의 그 쇠창살앞에서 아버지는 말했었다. 《이자식아, 세상에 무엇을 못해서 사상가노릇을 한단 말이냐. 그것은 돈있는놈들이 배가 불러서 하는 놀음이다.》 아들은 여윈 볼에 홍조를 피워올리며 격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아버지, 저를 꾸짖는것은 좋지만 사상가를 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제 살림만을 생각할 때 사상가는 나라를 생각했고 아버지가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물지게를 질 때 사상가는 조선을 공부시키려다가 쇠고랑을 찼습니다.》 《네가 아직 정신을 못차렸구나. 저 읍내 신문지국 한다는 한룡호는 쑥대밭머리에다 아라사적삼을 입고 사상가노릇을 너보다 더 요란스레 하더니 구경은 기생첩을 하고 들어앉아 미두에 정신이 팔려 돌아가더라. 그 흉내를 내느라고 이 놀음이냐, 이놈!》 면회간수가 아우성을 치고 면회는 중지당하였으며 아버지는 북청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다시는 아들때문에 번민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다지고 다시 생선행상을 시작하였으나 이번에는 매번 손해만 보았다. 게다가 어머니가 울며불며 하는바람에 변호사를 사대야했고 교제비를 쓰지 않을수 없어 차츰 그의 가산은 거덜이 나기 시작하였다. 사상가인 처남때문에 자기 출세의 길이 막혔다고 누이를 구박하던 어느 운송점의 사무원인 매부라는 놈팽이는 해마다 쌀말이나 갖다먹던 처가집에서 논밭을 다 팔아먹고 처음에는 신갈파로 다음은 아예 강을 건너 유성촌에까지 불리여가게 되자 서슴없이 누이를 내쫓아버렸다. 바로 그러한 아버지의 집에 지성은 돌아갔었다. 아버지는 4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을 씁쓸한 표정으로 맞이하였다. 첫날 말없이 독한 써레기담배만 피우고 앉아있던 로인은 안해와 딸이 눈물을 찔끔거리며 청승맞은 넉두리를 늘어놓자 이튿날은 집을 비우고 마실을 나가돌았으며 사흘째되는 날은 마침내 큰기침을 톺으며 아들을 불러앉히였다. 《대체 네가 글개나 읽어서 한 일이 무엇이냐? 집안살림을 불어먹고 제 누이의 신세까지 망쳐놓은것이 고작 네가 배운 재주란 말이냐. 그래 네 생각을 좀 말해봐라! 장차 어떻게 처신할 작정이냐?》 지성은 허약한 몸때문이 아니라 막막한 앞길때문에 번민하고있던 때이라 괴롭게 몸을 뒤채며 말했다. 《어느 산골에 들어가볼가 합니다.》 《여기는 산골이 아니여서 산골을 찾아간단 말이냐?》 아버지의 말은 더욱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뭘하겠습니까? 아버지에게 페나 끼쳤지…》 《그러니 애비나 에미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단 말이지. 애비가 물지게를 져서 공부를 시켜놓으니 한다는 소리가… 이놈, 보기싫다. 썩 없어져라. 제주제에 독립이 다 무엇이냐. 네까짓것들이 찾아낼 독립이면 애초에 잃지부터 않았겠다.》 《아니 여보, 왜 이러슈?》 하고 어머니가 오돌오돌 떨며 가운데 나섰으나 아버지는 성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다 보기싫다. 너희들도 다 제갈데로 가라. 흥, 주제에 사상가라… 저 약수선생은 너같은것은 열개를 합쳐도 못따를 독립지사였지만 늘 수신제가후에 치국평천하라고 하시더라. 제몸, 제집 하나 건지지 못하는놈이 어벌이 크게 나라가 어쨌다고… 북청물지게장사의 아들이 나라를 찾아놓을 때까지 딴 사람들은 다 무얼하고 자빠졌다더냐! 한때는 공산주의를 떠들더니 이제는 독립이라… 독립이라 하고 웨치면 무식한 애비를 업어넘길줄 알았느냐!》 지성이 역시 타협할수 없는 심정이였다. 《그래 아버지는 저더러 저 누이의 신세를 망쳐놓은 최용수 그놈처럼 처신하라는것입니까? 아버지는 저더러 말끝마다 매부를 보라고 말했지요? 중학교도 못나온 용수가 저쯤 살아가는데 대학까지 댕겨서는 무얼하느냐고 편지마다 쓰셨지요? 그래 아버지는 저더러 최용수 그놈처럼 왜놈의 개노릇을 해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무엇이 어째, 이놈!》 아버지는 새끼줄같은 힘줄이 불뚝불뚝 솟아오른 손으로 목침을 움켜쥐고 부르짖었다. 《이 때려죽일놈! 내 비록 망국노로서 구차히 살지만 백성의 도리까지 잊어버린 적신은 아니다. 최용수가 왜놈의 개라면 비록 루만금을 가진 호부자라도 내 딸을 내맡길 내 아니다. 허지만 용수가 왜놈의 개라는것을 네 무엇으로써 장담하느냐? 제 허물을 가리우기 위하여 남을 허는것은 자고로 인종지말이 하는 수작이다. 내 용수 그놈을 잘못보았지. 허나 네놈이 제 허물을 거기다 등대고 가리울수는 없다. 이놈, 애비가 네 누이 신세때문에 애간장을 말리우고있는 이때 그 상처를 허벼야 네놈의 속이 시원하냐, 이 불효막심한 놈!》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노염우에 자기 울화까지 겹쳐 살을 떨었다. 지성은 그런 아버지가 더욱 못마땅하였다. 《이제 두고 보십시오. 머지 않아 그놈은 아버지를 포승줄로 묶자고 들지도 모릅니다.》 누이가 치마폭으로 얼굴을 감싸고 부엌으로 달려나갔다. 어머니도 농짝에 얼굴을 대고 흐느꼈다. 아버지는 목침으로 구들바닥을 쾅쾅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이놈, 말이면 다 하는줄 아느냐? 그놈이 설사 왜놈의 개가 되였다 한들 내 제놈에게 딸을 주고 먹을것을 대주었다고 나를 묶는단 말이냐?》 《아버지, 한번 속아보고도 그놈의 속을 모르겠습니까? 나라를 잃은 백성이 나라를 찾을 생각을 않고 부귀와 영화를 탐낸다면 굴러떨어질 길은 그 구뎅이밖에 없습니다.》 《옳거니, 바로 네놈이 최용수를 빗대놓고 이 애비를 왜놈의 개로 몰 차비겠다. 이놈! 당장 없어져라. 당장 없어져! 네놈이 나라를 찾자고 품을 얼마나 들였는지 모르겠다만 내 장히 무섭지 않다. 나는 독립지사는 못돼도 개노릇은 안한다! 꼭뒤에 피도 안마른 놈이 감히 애비에게 살 도리를 가르치려든단 말이냐! 썩 나가거라!》 부자간은 그날밤 다시는 안볼것처럼 무섭게 싸웠다. 그길로 지성이 집을 뛰쳐나 찾아간곳이 무산 옥암동이였다. (그러나 아버지.) 하고 지성은 그날밤 무섭게 노했던 아버지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며 마음속으로 웨쳤다.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고 칩시다. 그래서 내가 이 눈구뎅이에 구겨박혀 영영 평토가 돼버린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나같이 무지렁이뿐이라면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는겁니까? 그리고 아버지자신은 또 어떻게 될것입니까…) 지성은 구역질과 함께 치미는 쇠비린내를 울컥 하고 눈우에 내뱉으며 얼굴을 쳐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언덕이였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와진 저 앞에서 철구아주머니와 채옥이가 자꾸만 미끄러지는 릉선을 허우적거리며 기여오르고있다. 벙어리장갑이 다 묻히도록 눈을 파헤치며 올라가는 그들을 볼 때 지성은 아득한 생각이 떠올랐다. 순간 한쪽다리가 접철처럼 접히여 비칠하고 옆으로 두어걸음 허우적거렸다. 그러다가 별안간 몸이 똑바로 서더니 제절로 앞으로 나간다. 《조금만 참으시오. 저 언덕만 넘어서면 됩니다. 적들은 10리이상이나 떨어졌습니다. 언덕우에 가서 쉽시다.》 이러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김일성동지께서 외투자락에 재영을 꼭 싸서 끼여안으시고 한쪽손으로 자기 배낭을 밀어주시는것이였다. 지성은 멍하니 그이를 바라보았다. 아까 7련대 전령병 상철이가 왔을 때 그에게 구운 강냉이 한자루를 억지로 떼맡기시며 그 꼬마를 끼여안고 가시는것을 보았는데 어느새 또 뒤쪽에서 오시는가? 《힘이 들지요?》 지성이 말없이 마주 바라보니 그이께서는 배낭을 밀어주시는 팔에 더 힘을 넣으며 말씀하시였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적들은 우리 동무들보다 몇갑절 잘 먹고 잘 입었는데 종시 따라오지 못합니다. 과연 혁명가들의 의지란 무서운것입니다. 자, 조금만 힘을 내서 저 언덕을 오릅시다. 우리도 저기 가서 큼직하게 불을 피우고 쉽시다. 저놈들은 우리가 아무리 불을 피워도 총 한방 쏠 기력이 없습니다. 허허허.》 김일성동지께서는 껄껄 웃으시며 지성의 짐을 힘껏 밀어주시였다. 지성은 아무런 대답도 못드리고 입을 악물며 걸음을 옮겨놓았다. 왜 그런지 얼어붙은 눈시울을 타고 뜨거운것이 미음돌아 배여나왔다. 뜨거운 그 무엇이, 져서는 안된다는 크나큰 의무감이 아득한 가슴밑바닥에서 완강한 견인력으로 머리를 쳐들었다. 4
야마시다련대장이 부상을 당하여 바로 자기 이웃방에 입원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꾸찌는 긴장되였다. 련대장이 부상을 입어 신경까지 후송되여왔다면 전투가 이만저만 가렬하지 않았다는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은근히 그곳 형편도 알아볼겸 만나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아직 인사도 없는 처지에다 상대는 대좌이다. 자기의 문병을 그가 달가와하겠는지 말겠는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그런데 이튿날 야마시다대좌자신이 먼저 기꾸찌를 찾아왔다. 버쩍 마른데다 검버섯이 좁다란 얼굴 여기저기에 마구 널려있는 로인이였다. 자기 소개를 하면서 부상당한 자리를 보이는데 넙적다리에 총알이 스쳐지난 찰과상이 두군데 있었지만 실지 중요한 치료대상은 그것이 아니라 발과 손 그리고 왼편 관골어방에 온 동상이 기본이였다. 찰과상은 군마가 기관총련발사격을 받았을 때 입은것이고 동상은 말우에서 정신을 잃고 굴러떨어져 눈구뎅이에 몇시간 묻혀있었기때문에 입은것이라고 한다. 기꾸찌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상처였지만 붕대를 어찌나 요란스레 감아놓았는지 아이들의 그림에 나오는 《폭탄3용사》를 련상시키는데가 없지 않았다. 야마시다대좌는 자기의 부상을 대단히 흡족해하였다. 그는 무슨 보물이라도 어루만지듯 두툼하게 감은 붕대를 쓸어보며 말하는것이였다. 《참, 자네는 그 젊은 나이에 벌써 영예의 부상을 당하고 훈장까지 탔으니 이제는 확고한 지반을 마련한셈이네. 부상이란 군인의 출세에는 반드시 필요한것이지만 그 정도를 맞추기는 쉽지 않지. 죽어버리거나 병신이 돼버리면 게도 구럭도 다 놓치는셈이니까… 흐흐흐.》 야마시다는 쥐여짜는듯 한 불쾌한 목소리로 웃더니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군인은 용감해야 하거던. 부상은 용감성에 대한 증명이야. 자네가 다시 일선근무를 안나간다 한들 누가 자네의 용감성을 의심하겠나. 허지만 우리는 이미 늦었지. 군사복무의 내막을 알았을 때는 벌써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좋은 자리는 날랜놈들이 다 차지해버렸거던. 보겠나?》 하고 야마시다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병의의 자락을 일일이 들추어 빼빼마른 제몸을 구경시키였다. 아닌게아니라 회를 치다 만것처럼 크고작은 상처가 여기저기에 함부로 널려있었다. 아마 그런 상처 두세개를 들여서 별 한개씩을 얻어 오늘의 대좌라는 자리를 벌어냈을지 모르는 이 늙은이는 지금 하찮은 동상을 입음으로써 이해 겨울에 다시는 그 무시무시한 숲속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일없게 된것을 아이들처럼 기뻐하고있는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추격이 어떻게 됐느냐고 묻고싶었으나 야마시다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고 무엇인가 그냥 지껄여댔다. 하기는 그의 속물적인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의 련대가 남패자어구에서 초벌 된벼락을 맞은데다 눈속으로 행군해가다가 조선인민혁명군의 매복에 걸려 풍지박산이 나버렸다는것은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야마시다는 그런것은 원래 다 그렇게 작정된것이기나 한듯이 대수로와하지 않고 오히려 륙군성군무과장 가게사대좌가 하노이에 가서 중경을 탈출한 국민당부총재이며 행정원 원장인 왕정위를 만나 그를 상해로 끌어온 이야기에 열중해있었다. 《여보게 젊은이.》 하고 야마시다는 붕대투성이손으로 기꾸찌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였다. 《왕정위의 성명을 읽었나? 그게 고노에수상의 〈동아신질서건설성명〉에 맞장구를 친것이거던, 그러니 우리가 1년이상 피를 흘리며 싸워도 이룩하지 못한것을 가게사가 혼자서 해치웠단 말야, 안그런가?》 《련대장각하, 실례입니다만.》 기꾸찌는 모욕감에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수많은 장병들이 피를 흘린 결과에 왕정위가 그런 성명을 내게 된것으로 저는 생각하는데요.》 《허허허, 그게 그 소리야. 둘러치나 메치나 마찬가지거던, 안심하게. 여기는 야스꾸니진쟈가 아니니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 해서 성을 낼 귀신은 없을걸세.》 야마시다와의 대화는 골머리가 아프도록 불쾌하였으나 상대가 추근추근 달라붙는데는 어쩔수 없었다. 이튿날 아직 부목을 떼지 않은 팔을 붕대로 달아맨채 사령부로 갔더니 하시모도소장은 도꾜로 출장중이고 모리중좌만 만났는데 그 역시 야마시다와 같은 소리를 하여 기꾸찌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하시모도소장이 도꾜로 간것도 가게사의 이번 하노이―중경행각과 관련되여있다는것을 은근히 암시하면서 하시모도상이 국책수행에서 비능률적인 현 내각을 뜯어고칠 구상을 안고 갔는데 그것의 성공여부는 어떻든간에 하시모도상이 도꾜 한복판에 나타난이상 군부와 정계에서 일정한 파문이 일지 않을수 없을것이라고 모리는 제일처럼 희떠운 표정으로 장담하였다. 《단지 제국이 대전에로 한걸음 내짚는데 문제로 되는것은 우리가 서있는 이 대륙이네. 이다가끼상도 도죠상도 내심 그게 께름직하단 말일세. 그러니 자네나 내가 무엇을 해야 된다는게 명백하지 않는가?》 기꾸찌는 듣고도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모리는 이제 하시모도가 돌아오면 방침을 받아가지고 곧 현지로 내려가겠는데 그때 같이 가도록 하자고 하면서 조선인민혁명군은 마이허의 무다구찌려단을 무찌르고 멀리 림강―장백현경으로 빠져나가고있으며 혼마려단이 뒤를 조이고있으나 새로운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가게사, 왕정위, 세계대전, 내각갱질, 하시모도와 이다가끼, 도죠― 대체 이것들이 어떻게 서로 맥락을 통하고있는지 기꾸찌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거리에 나오니 또 하나의 이름이 그 알수 없는 줄에 련결되여 떠올랐다. 대동대가의 화려한 진렬장마다에 젖가슴이 불룩하게 치포를 떨쳐입은 중국미인의 사진이 나붙어있었다.
진백란독창회
대륙에 피여난 일만친선의 꽃 명망의 인기녀우는 무엇을 호소하는가? 아름다운 눈동자, 붉은 입술 눈물짓고 웃음지으며 절절히 속삭이는 5족협화 국경없는 사랑의 노래는 누구를 위한것인가!
기꾸찌는 눈앞이 아찔하였다. 눈을 비비며 뜯어보고 뜯어보아야 이찌가와 요시에다. 그날 남호의 만영구내에서 헤여진후 려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던 요시에가 바로 진렬장속에서 치포를 입고 새하얀 이를 드러내보이며 웃고있다. 《진백란이라―》 기꾸찌는 한대 얻어맞은것 같이 골이 뗑하여 중얼거렸다. 《이것도 제국의 정책이란것인가?》 진백란, 아마가스, 하시모도, 다시 이다가끼, 도죠, 이 모든 념불같은 이름들이 한결같이 이 대륙의 평정때문에 한줄에 꿰여돌아간다는것을 과연 몇사람이나 알겠는가. 거리에는 온통 진백란독창회판이였다. 하나의 유명한 가수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모든 선전기관들이 정력을 아끼지 않았다. 진렬장마다 광고가 나붙고 네거리 요소요소와 대건물앞에는 선전판이 나붙었으며 신문들은 석간반면씩을 내여 대대적인 선전깜빠니아를 벌리고있었다. 독창회가 열리는 첫날 기꾸찌는 야마시다대좌에게 이끌리여 극장으로 갔다. 붕대를 하고 극장에 가고싶지 않다고 했으나 지금은 젊은 장교에게 엇달아맨 흰 붕대처럼 녀성들을 끄는 장식은 없다고 야마시다는 내우기는것이였다. 아닌게아니라 새로 탄 금수리훈장이 번쩍거리는 딱 맞는 장교복에 붕대를 감은 팔을 어깨에 달아맨 기꾸찌의 모습은 극장에 모여든 수많은 고관부호들의 부인과 따님들의 축축한 눈길을 끌었다. 기꾸찌가 예견한대로 큼직하게 꾸민 관제독창회라 황제 부의가 안보일뿐 장경혜, 사개석, 희흡을 비롯한 국무원의 우두머리들과 호시노 나오끼, 기시 노부스께 등 만주국의 실권자들, 마쯔오까 요스께, 아유가와 기스께 따위 실업계의 거물들이 다 모이고 여기에 주만대사인 관동군사령관 우에다대장까지 막료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러니 도죠 히데끼 하나를 빼놓고 만주의 이른바 《2끼3스께》가 한자리에 다 모인셈이였다. 만영리사장 아마가스는 검정두루마기를 걸친 최남선이라는 건국대학의 조선인교수까지 데리고 특별석에 푹신히 몸을 파묻었다. 실로 만주일판이 다 모여들어 요시에가 진백란으로 환생하는 이 꼭두각시놀음의 증인으로 나선것이였다. 노래란것은 기교도 성량도 이렇다 할만 한것이 없었고 게다가 곡목이란것이 《나는 열여섯 만주아가씨》나 《군인나으리는 귀여워요》하는따위 일본말이나 중국말 혹은 두 나라 말을 반반씩 섞어부르는 류행가라 어디다 내놓고 독창회라 할만 한것이 못되였지만 관중이 워낙 천하다보니 대단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여기에 방금 조직된 《대지극원》관현악단이 두간두간 류행가며 경음악으로 편곡한 군국주의냄새가 물씬거리는 군가를 두들겨서 독창회는 놀랄만 한 성공을 거두었다. 기꾸찌는 어쩐지 자기라는 인간의 렬등감을 사무치게 느꼈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것을 자기는 왜 굴욕감을 일일이 느끼면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이 자기에게 남아있는 흔히 선배들이 말하는 그 젖비린내나는 《애숭이》기질이라고 문득 깨닫게 된 기꾸찌는 갑자기 가슴을 쑥 내밀었다. 막이 내렸을 때 기꾸찌는 아직 불이 켜지기전에 슬그머니 일어났다. 《이 사람 어디로 가나?》 야마시다가 재빨리 눈치를 채고 또 성가신 친절성을 베풀었다. 《내 저 배우를 좀 만나보겠습니다.》 기꾸찌는 방금 자기가 지은 결론에 따라 아무 거리낌없이 대답하였다. 《자신있는가? 하루밤 데려내오기만 하면 대단하네.》 야마시다는 늙은이답지 않게 음란한 눈짓을 해보이며 말하였다. 《그까짓 중국계집!》 기꾸찌는 모멸에 차서 한마디 내뱉고는 군복자락을 빳빳하게 잡아당겼다. 장담은 크게 하였으나 정작 진백란을 만나기는 헐치 않았다. 화장실앞에는 이미 군복을 입은 장군들, 호복쟁이 신사들, 번대머리들, 기름쥐같은 양복쟁이 귀공자들, 일본옷차림의 늙다리 녀편네들, 녀학생들, 별의별것들이 꽃다발을 들고 지켜서있었다. 밤늦도록 컴컴한 복도 한구석에서 차례를 기다렸더니 진백란이 자신이 먼저 알아보고 달려왔다. 《기꾸찌상! 당신이 다 왔어요?》 《하도 유명하시니… 축하합니다. 꽃다발도 없이…》 기꾸찌는 쓰겁게 한마디 하였다. 요시에는 힐끔 치떠보더니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붕대우로 부상자국을 쓸어보았다. 그때 그 수집어하던 모습은 찾아볼래야 볼수가 없었다. 《부상을 당했군요. 공산군을 봤어요?》 《봤소.》 《그래 어때요? 훈장까지 탄걸 보니 굉장히 잘 싸운 모양이군요?》 《뭘요, 허수아비를 찌르는것과 같은걸요.》 기꾸찌는 다소 량심의 한구석이 찔렸으나 태연하게 말했다. 거짓말하기는 피차일반이 아닌가. 네가 국책수행을 위해 중국계집으로 될 필요가 있었다면 나 역시 국책수행을 위해 무시무시한 공산군도 허수아비로 묘사할수 있고 적의 모양은 보지도 못했지만 수십명을 혼자 요정낸것처럼 떠들어댈 필요가 있는것이다. 우리는 사실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제국이 그러하기를 바라는 바로 그대로 사태를 만들어내는것이 중요한것이다. 그날밤 요시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기꾸찌를 자기 숙소인 은영장(銀映莊)으로 끌고갔다. 어떤 의미에서 요시에는 진백란으로 변신함으로써 더 요염해진듯 하였으나 그의 얼은 이미 아마가스의 침대에서 녹아어없어지고만듯 하였다. 이 백치의 미인과의 교재를 통하여 기꾸찌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론은 인간세상에 진실이란 없거나 적어도 오늘날에는 없어지고말았다는 사실이며 그런즉 그 역시 진실을 추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것이였다. 5
《이를테면 우리가.》 하고 하시모도소장은 지도를 들여다보고있는 두사람에게 타이르는 어조로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이렇게 번져가는 산불을 만났다고 가정하잔말일세.》 모리도 기꾸찌도 하시모도가 손바닥으로 쓸어보이는 지도에서 백두산일대의 대수림지대로 뻗어나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화살표부호를 뚫어지게 지켜보고있었다. 《너희들의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불자체를 두들겨끄는데 정신이 팔려서 불이 번져가는것을 보지 못한 그것이야, 알겠나. 산불이라는것은 두들겨끄면 얼핏 보매 죽은듯도 하지. 그러나 한대의 나무를 두들기는 사이 불티는 벌써 저만치 번져가고 황급해서 그쪽으로 달려가는 사이 이미 꺼진것처럼 보이던 나무에서 다시 불길이 피여오른단 말이거던. 보는바와 같이 김일성장군은 벌써 장백지대로 다 나가버렸단말야.》 하시모도는 말은 누구를 핀잔하는듯 하였으나 실상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필시 모리가 말한대로 이번 도꾜려행에서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 모양이였다. 그렇다고 확실한 짐작이 가는것은 정초에 다시 도꾜에 건너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제발 너희들이 내 립장을 딱하게만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대신자리라도 하나씩 안겨주겠는데 하고 자기의 활동수완을 은근히 암시한것이였다. 《그럼 산불은 어떻게 꺼야 하는가?》 하고 하시모도는 말을 이었다. 《보통 산불이 나면 우선 일정한 둘레를 돌아가며 나무를 쳐서 무목지대를 형성해가지고 불을 포위해야 한단 말이다. 그런 다음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하나의 불씨를 없애버려야 하거던. 그런데 우리의 용사 데라시마중장은 큼직이 번져가는 어마어마한 밑불을 보지 못하고 대뜸 불의 한복판에 뛰여들었단 말이야.》 모리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하시모도는 그후에도 따로 모리를 불러가더니 여러가지 비밀지시를 주는 모양이였으나 기꾸찌는 못본것처럼 하고 지도만 들여다보았다. 그는 어제 마지막으로 붕대를 풀자 곧 부대로 돌아갈 작정으로 인사를 왔었다. 하시모도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으며 도꾜에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부탁한만큼 우에다대장에게 인사를 시키겠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해서 그의 정책강의를 모리와 함께 얻어듣게 된것이였다. 아마 아버지는 군사참의관으로서 아직도 페하의 은총을 받고 있는것이 분명하였다. 천하 없는 인물도 한푼 싸잖게 불러내치는 하시모도가 매번 《자네 춘부장께서》혹은 《기꾸찌대장께서》하고 경의를 표하는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황도파의 맹장으로서 지모있는 젊은 장교들에게서 미치광이취급을 받아오던 아버지의 저돌적인 주장이 이제는 시세를 만난것 같았다. 그러나 사령부에 종합된 데라시마사단의 전선형편은 좋지 못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하시모도들이 대단히 두려워하는 장백, 국경일대로 한걸음한걸음 접근하고있는데 다분히 과장되였다고 짐작되는 전과보고로 봐도 한달여에 걸치는 《토벌》에서 두개의 아군련대가 괴멸된 반면에 적군사상자는 매번 열손가락미만에 들고 생포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동북부방향과 남만방향으로 진출한 제1방면군과 제3방면군의 활동도 제압은 커녕 날을 따라 더 왕성해진다는것이였다. 그러나 하시모도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하였다. 《어쨌든 그들도 인간이다. 그들도 일정한 생존조건하에서만 생을 부지할수 있는 인간이란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쉬지 못하게 한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불을 끄자면 널직이 무목지대의 포위환을 형성하고 날아오는 불티마다 두들겨끄면서 안의 불을 짓밟아버려야 한다. 데라시마사단의 첫째공로는 그가 얼마간의 유격대원을 사살한데 있는것이 아니라 벌써 한달가까이나 그들을 쉬지 못하게 하고 잠들지 못하게 한것이다. 모리중좌, 너희 공작반의 임무는 그들로 하여금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게… 말하자면 무목지대를 튼튼히 형성하는것이다. 알겠는가. 승리는 시간문제이다. 이러한 신념우에서 모든 사업을 유감없이 해나가기 바란다.》 우에다대장과의 상면인사는 매우 무미건조하였다. 그 자리에는 이소다니참모장도 함께 있었는데 두 로인은 입으로 굉장한 찬사를 아버지에게도 자기에게도 늘어놓았지만 전혀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근위사단 복무를 거절하고 이 대륙에 와서 그것도 일선에 나가 싸운다는것이 이만저만한 일이요?》 우에다대장이 짓물린 눈귀를 갑작거리면서 참모장을 돌아보자 참모장이 매우 심중한 표정으로 뒤를 받쳤다. 《왕년에 유신지사들이 그러한 기백을 보여준 이후로는 찾아보기 힘드는 기질이지요. 하시모도군도 아는바이지만… 사실 그때야 대단했습지요.》 유신지사들이 그러한 기백을 보여주었다는 그 당시에는 태여나지도 못했던 하시모도는 입맛을 쩝쩝 다시였으나 그것을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국이 바야흐로 세계를 향하여 그 무위를 떨쳐야 할 이 마당에 유신지사들의 그 기백이 청년장교들속에 다시 소생했다는것은 페하의 홍복이라고 말해야 할것입니다.》 하시모도의 정중한 말에 두 로인은 연신 머리를 끄떡거리며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하고 되뇌였다. 하시모도의 방에 돌아와 작별인사를 하자 하시모도는 그의 어깨를 정답게 두들기며 기어이 가겠는가, 이제는 사령부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다시한번 권했으나 기꾸찌는 눈물이 그렁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진실은 다 없어졌다 해도 제국과 페하를 위하여 제가슴에 간직하고있는 충성심만은 저 눈덮인 밀림에 가서 다시한번 시험해보고싶었다. 그것 역시 허위였는지… 6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단지휘부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 방금 이동해갔다는 몽강현성에 가니 데라시마사단은 또다시 림강방향으로 떠날 차비를 하고있었다. 사단장은 모리의 출현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러나 변덕 많은 늙은이의 기분따위에 흔들릴 모리가 아니였다. 그는 함께 데리고온 기꾸찌중위를 사단에 떨구자 자기 공작반의 심복들에게 새 임무를 주어 여러 차편으로 떠나보내고 자신도 사단을 앞질러 림강으로 나왔다. 그에게는 신경을 떠나던 전날 하시모도와 은밀히 표식을 한 지도가 있었다. 그것은 대본영에서나 쓸 백만분의 일 만주전도로서 중좌따위가 가지고다닐 축척이 아니였지만 실상 자연지형이 그닥 큰 의의가 없는 그의 사업성격으로 보아 그것도 지나치게 큰 감이 없지 않았다. 그 지도에는 최근 3~4년째 유격대의 출몰이 가장 심했던 12도구, 13도구, 가재수, 백바위골, 유성촌 하는 지명들을 적당한 자리에 새로 써넣고 특별히 붉은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그것은 모리의 보고와 이미 참모부에 종합되여있는 자료들에 근거하여 하시모도가 손수 써넣은 지명들로서 그러한 지대들에는 일단 공산주의자들을 끌어붙이는 지하조직이든 그 무엇이든 깊숙이 박혀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그의 견해가 안받침되여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로 진출할 기도를 보이고있는만큼 그들은 틀림없이 이러한 지대들에 발을 붙이자고 할것이다. 따라서 모든 전선을 강화하되 특히 이러한 지대를 사상적으로 보루화하여야 한다. 이러한곳에 함정을 깊숙이 파고 덫을 놓으면 마치 열두대문을 다 닫아매고 오직 한 대문만 열어놓는것과 마찬가지로 적을 쉽게 유인할수 있다… 이러한 하시모도의 주장은 모리의 생각에도 그럴듯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론리적인 그의 말은 리경락사건이후론 그닥 큰 감명을 자아내지 않았다. 리경락이를 남패자에 들여보낼 때의 하시모도의 타산은 얼마나 그럴듯 했는가. 더구나 그 계책이 바로 만주국을 하루밤사이에 집어삼키게 한 그 머리에서 나왔다는것이 절대적인 믿음을 자아냈었다. 그러나 모리가 보기에 음모란 지나치게 론리적일 때 뜻밖의 고리에서 꿰여지기가 쉬운것이였다. 그것은 세상만물의 오묘한 리치를 아무리 명석한 머리라 하더라도 인간은 다 헤아릴수 없기때문이였다. 아니나다를가 그렇게 틀림없어보이던 리경락사건은 하나의 시체를 일본제국에 선물하는것으로 끝나고말았다. 그것은 모리에게도 뜻밖이였다. 그러나 하시모도는 여전히 계책을 꾸며내고있으며 사람들을 호령하고있었다. 그의 권위는 여전히 존재하며 아마 식민지 만주국을 잃어버리는것만 한 실책을 그가 범하기전에는 그 위신은 허물어지지 않을것이였다. 만주사변이 있은지 벌써 7년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파쑈열에 들뜬 청년장교들과 사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하시모도의 존재는 시대의 풍운아로서 절대적인 인기를 차지하고있으며 만철이나 만주중공업에 관계하고있는 신흥재벌들 역시 그들에게 돈벌이의 길을 열어준 하시모도를 거의 우상화하고있다. 하시모도자신은 그닥 훌륭한 가문의 출신도 아니지만 그의 처가가 그럭저럭 황족과 먼 친척벌이 된다는 아리숭한 계보를 들추어내여 하시모도를 귀족취급하자는 기운까지 없지 않다. 그런 하시모도가 실수할수야 없지 않는가. 만일 일이 잘못되였을 때 그 책임은 엉뚱하게도 잘못된 계책을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라 그것때문에 애만 실컷 먹은 아래사람이 지게 되는것이 보통이다. 모리는 속으로 달갑건 달갑지 않건 상관의 명령이라면 적당한 표정을 짓고 물러서는 기교를 가지고있었다. 그는 전에없이 분주탕을 피우면서 소문을 놓고 뛰여다녔다. 자기가 얼마나 하시모도의 계책을 집행하기 위하여 몸바쳐 뛰는가 하는것을 하시모도 당자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나다를가 6도구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끄나불을 통해 모리의 그러한 행장에 대해 보고를 받은 하시모도가 장거리전화를 걸어왔다. 이번 사업은 일체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무엇때문에 소란을 피우느냐는 핀잔을 듣고 대단히 황송해하는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모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하시모도에 대한 공작은 이것이면 족하다. 이제부터 진짜 공산주의자들을 덫에 걸어 넣기 위한 공작에 모든 힘을 다 기울여야 한다. 그는 6도구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중요한 거리들과 물산집산지들, 집단부락들, 밀림가까운 산재부락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 정형을 료해하고 주구들을 불러들여 유격대가 발붙일만 한곳이 어떤곳이니만치 어디에 주목을 돌려야 한다는것을 일일이 씹어서 입에 넣어주듯이 알으켜주었다. 식량, 천, 신, 소금, 성냥 이러루한 생활필수품들을 엄격한 통제하에 두어야 하며 민간에서 흔히 쓰지 않는 약이라든가 종이라든가 불온서적들이 나도는 경우에 무조건 유격대의 활동을 가상해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이러한 방향에서 조선사람들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아야 하며 그들의 말마디나 행동에서 다소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뒤를 캐야 한다고 거듭 타일렀다. 모리는 수정골에 와서 또 이틀을 묵었다. 수정골은 큰 장거리인데다 아직도 집단부락화가 잘 추진되지 않아서 산재부락이 많았다. 이 태반의 산재부락들은 직접 밀림과 잇달려있었다. 여기가 바로 모리의 가방속에 두툼하게 접혀져있는 그 지도에 표식된 지대의 하나였다. 모리는 벌써 몽강에서 가장 쓸모있는 날랜 특무들을 이 일대에 갖가지 명색으로 띄워보냈었다. 아예 이주민으로 꾸며 이사를 시키기도 하고 행상군으로 떠돌아다니게도 하고 장사를 벌리게도 하였다. 그런데 유성촌에서 알아보니 그렇게 박아넣은 장기덕이라는 밀정이 백바위골에 구멍가게를 벌리려다가 수비대에서 말썽을 일으키는바람에 자칫하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생겼다는것이였다. 경찰도 수비대도 전날 모리가 불어넣은 독이 어찌나 효험이 컸던지 믿을만 한 증명서를 다 만들어보냈는데 속아넘어가지를 않는다는것이다. 모리는 성가신 생각이 나면서도 내심 흡족하였다. 장기덕이가 가지고있는 배경과 문건과 계교에도 속아넘어가지 않는 군대와 경찰이라면 유격대공작원이 발붙일만한 빈 구석이 일단 없다고 보아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어쨌든 사태는 수습해야 했다. 마치 모리는 가까이 다가오는 데라시마사단으로 돌아가야 하는 길이라 겸사겸사 들려보기로 하고 차를 백바위골로 내몰았다. 백바위골은 여러차례 유격대의 습격을 받아 수많은 희생을 낸 고장이였다. 틀림없이 유격대와 련결된 조직선이 있을것으로 예견하고 이번에도 집집마다 호적을 들추어가며 캐보았으나 아무 실머리도 잡지 못했다. 전부터 주목해오던 젊은것들은 이미 산으로 다 뛰여버리고 나머지는 흠잡을데가 없는 량민들이라는것이였다. 모리는 그따위 랑만적인 말은 일체 믿지 않았지만 기왕 이 일대에다 덫을 놓는 이상 내버려두리라 작정하였다. 모리가 백바위골의 경찰분서에 들어가니 마침 수비대의 중대장이 나와서 자위단장이며 구장을 불러다놓고 한바탕 훈시를 하고있었다. 난방이 부실하여 찬바람이 휙휙 썰고 지나는 대기실에는 몇사람의 사민이 앉아 수비대장의 훈시가 끝나기를 지루하게 기다리고있었다. 이런 촌구석에서는 만나보기 힘드는 어마어마한 장교가 나타났지만 추위에 잔뜩 가드라든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깨여진 징소리같은 수비대장의 목소리가 울려오는 사무실쪽을 이따금 흰자위를 번뜩거리며 치떠볼뿐이였다. 모리는 저역시 모르는것처럼 하고 개털외투의 깃을 추켜올리며 삐걱거리는 긴 걸상 한끝에 가앉았다. 《겨울이라는것은 동면하는 계절이다. 말하자면 잠자는 계절이란 말이다. 봄, 여름, 가을에 부지런히 벌어서 겨울에는 뜨뜻하게 불을 때고 실컷 자야 하는것이다.》 하고 수비대장 가네꼬대위는 자못 기가 돋아서 웨치고있다. 《그런데 무슨 이사란 말인가! 나들이는 또 뭔가? 령하 40도에 행상을 다닌다는것도 불온한것이다. 아이를 낳는것을 막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친정어머니가 찾아와야 한다는것은 아니다. 내가 거듭 제군들에게 당부하는것은 뢰물을 받아먹고 모가지가 달아나는 참변을 당하지 말라는것이다. 목하 공산유격대와의 치렬처절한 결전을 앞두고있는 이때 뢰물에 눈이 어두워 당국의 방침을 어기는 비국민이 나의 관내에서 나타나기만 하면 나는 그런자를 주저없이 한칼에 두쪽을 내버릴것이다.》 이어 쾅하고 칼집으로 마루바닥을 굴리는 소리가 울려온다. 모리는 빙그레 웃었다. 분서장이요, 자위단장이요, 구장이요 하는것들이 저쯤 단련을 받고있고 관동군사령부에서 박아넣자는 밀정이 이쯤 발붙이기 힘들게 구니 유격대공작원이 제아무리 날고뛴대도 손을 쓰기 힘들리라는 신심이 더욱 굳어졌다. 그런데 옆에서 목수건을 폭 쓰고 앉아있던 녀자가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끝이 내다보이지 않는 가네꼬대위의 연설에 참을성이 진하여 돌아가자는 모양같았다. 흔히 달구지군들이 입는 두툼한 덧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수수한 회색목도리로 얼굴전체를 꽁꽁 싸매고있어서 전혀 주목을 끌지 않던 녀자인데 목도리를 고쳐 감느라고 푸는 짬에 그 얼굴을 스쳐보게 된 모리는 깜짝 놀랐다. 이런 촌구석 경찰분서의 대기실에 나타날것 같지 않는 아름다운 처녀였다. 얼핏 행장을 봐서는 나이든 아주머니같은 꾸밈새였다. 하기는 그래서 어딘가 설음을 머금은듯 한 그 눈이며 가셔낸듯 한 고운 살결이며 잘 자란 몸매며 이러한것들이 더 강조되는것인지도 몰랐다. 모리는 새삼스럽게 대기실안을 훑어보았다. 한가운데 잘 타지 않는 배불뚝이난로가 놓여있고 벽쪽으로는 중국식캉이 뻬치까처럼 붙어있으나 난로앞에 놓인 물통에 살얼음이 잡혀있다. 벽에는 각종 신청서의 양식과 고시판들이 붙어있는데 파리찌가 다닥다닥한 그것들의 발포년대는 만주국 건국초기것들로부터 얼마전에 공안부의 명의로 내려보낸 통비분자단속요령에 이르기까지 형형색색이였다. 눈만 큼직하게 그려놓고 보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네옆에는 제5렬(간첩)이 없는가?》하고 질문하는 새 선전화가 붙어있는가 하면 《5족협화》요, 《왕도락토》요 하는따위 케케묵은 구호들도 붙어있는데 벽에 스미는 습기때문에 하얗게 성에가 불리였다. 그런 얼룩덜룩한 벽밑에는 그만 못지않게 얼룩덜룩한 고달픈 형상들이 고개를 떨구고 제나름으로 퍼더앉아있다. 한손에 새끼퉁구리를 말아쥐고 허리에 낫을 찌른 체소한 중년사나이, 그냥 발장단을 치며 오돌오돌 떠는 명주바지저고리의 곱사등이, 누데기보따리옆에 돌아앉아 아이에게 젖을 빨리고있는 아낙네… 어느 얼굴을 보나 이 을씨년스러운 대기실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형상들이였다. 유독 자리를 차고일어나 막 출입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 처녀만이 웬일인지 모리의 신경을 아프게 긁었다. 그는 까닭없이 하시모도의 대기실에 앉아있던 이찌가와 요시에를 련상하였다. 그때와 같이 무엇인가 어색하게 생각되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끌리는것은 두 녀자가 다 같이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녀성이기때문일가? 《오이 처녀, 이리 좀 와.》 모리는 막 출입문의 용수철이 제자리에 움츠러들려는 순간에 버럭 소리를 쳤다. 용수철은 그러거나말거나 바르르 떨며 제자리에 와 멎고 처녀의 옷자락은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모리는 군도를 잔뜩 움켜쥐고 몸을 도사리면서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이, 들어와.》 살며시 문을 도로 열리더니 눈만 내놓은 처녀의 얼굴이 먼저 나타났다. 긴 살눈섭속에서 슬픔을 머금은듯 한 그 눈이 움직이지 않고 모리를 똑바로 쳐다보고있다. 무엇때문에 찾느냐는것이다. 《왜 가는가?》 모리는 아까 소리치던 품과는 달리 퍽 부드럽게 물었다. 처녀의 머루알같이 검고 유순해보이는 눈은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고 바라보더니 이윽고 한번 슴뻑거리면서 눈시울을 내리깔았다. 만약 그때 처녀가 눈을 내리깔지 않았던들 모리는 별 싱거운 수작을 다 한다는듯 한 그 아름다운 눈의 위압에 눌리여 또다시 발작적으로 소리치거나 아니면 얼굴이 시뻘개져서 제먼저 수집게 외면해버렸을는지도 모른다. 《언제 일을 볼지 몰라서 다시 오자고 그래요.》 처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아직도 가네꼬대위의 호령소리가 그치지 않는 사무실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대답은 또박또박하였으나 낮고 순하게 들렸다. 눈에서 오는 그 이름하기 어려운 위압감은 전혀 없고 어느모로 보나 이런 촌구석의 경찰분서를 찾아오는 시골처녀다운 말투였다. 《흠―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모리는 저도모르게 처녀의 눈길을 따라 가네꼬의 악청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물었다. 《저도 잘 몰라요. 분서장님이 오라고 해서 왔어요.》 여기서 처녀는 약간 불평스러운 기운을 어조에 풍겼는데 그 불평은 분서장에 대한것인지 지금도 소리치고있는 가네꼬대위에 대한것인지 알수 없었으나 어쨌든 무슨 주목할만 한 가치가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 처녀를 도로 불러들인것은 부질없는짓이였던가? 모리는 아무래도 제 륙감에 걸려든 첫인상을 부정해버릴수가 없어 군도의 손잡이를 다독거리며 처녀를 아래우로 훑어보았다. 《이름이 무언가? 나이는 몇살이고…》 처녀는 말없이 모리를 쳐다보았다. 모리가 일부러 눈을 지릅뜨자 단념한듯이 대기실안을 한번 둘러본 다음 입을 벌렸다. 그것은 완전히 그 나이 처녀들의 자연스러운 표정이였다. 《류진옥이예요. 스물두살이예요.》 《호, 스물두살? 좋은 나이로군. 시집을 왜 여태 안갔는가?》 처녀는 외면하며 대답을 피하였다. 모리자신도 불쑥 물어놓기는 했으나 좀 싱거운 질문이였다고 스스로 생각되여 뒤를 다우치지 않고 이야기를 돌렸다. 《어디에 사는가?》 《무산군 옥암동이예요》 《그럼 조선서 건너왔는가?》 모리는 역시 문제가 있는 녀자였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오르면서 자기의 눈도 과히 나쁜 축은 아니라는 자부심을 느꼈다. 처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래 여기는 왜 왔는가?》 《아저씨네 집에 다니러 왔어요.》 《아저씨가 누군가?》 《류창표라고 방아간을 돌려요.》 모리는 다시 칼자루를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다음은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6도구에서 관계관들을 모아놓고 단속을 강화할데 대한 엄령을 한것이 이런 효과를 나타낸것이다. 백바위골의 방아간집 주인에 대한 이야기는 모리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충실하고 군경의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경제토대도 괜찮다는 그를 발판으로 하여 사람이 많이 모이는 방아간에 정보망을 늘일데 대한 방안도 공작반에서 제기된바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장기덕이를 직접 박아넣게 락착을 보았지만 그쯤 물망에 오른 인물이니만치 그의 조카라는 처녀를 달리 볼것은 없을듯도 하다. 보나마나 경찰에서 그를 호출한것은 가네꼬가 호통을 치니 이럭저럭 시비를 캐보자는것이겠지만 거기서 색다른것이 나타날수는 없다. 그저 촌구석 경찰이 할 일이 없으니 심심소일로 시뚝거려보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는 아무래도 한번 곤두선 제 신경을 달랠수가 없었다. 《좋다, 그럼 가보라. 내가 분서장에게 말할터이니 다시 호출이 없으면 여기 또 찾아올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말하고 처녀를 돌려보낸 모리는 그길로 뚜벅뚜벅 사무실에 들어갔다. 얼굴이 대추빛이 되여 소리를 질러대던 가네꼬대위는 모리를 보자 한순간에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서 차렷자세를 취하였다. 황송한 자세로 서있던 분서장 진가며 구장은 너무나 긴장하여 미처 인사말도 하지 못한다. 모리는 구레나룻이 구지레한 분서장의 두꺼비상을 웃음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사무책상우에 장갑을 벗어놓고 털외투의 단추를 끌렀다. 그제야 분서장은 얼마간 온기가 돌아서 제꺽 모리의 외투를 받아들 차비로 두손을 맞비비였다. 《수고들을 한다.》 모리는 이 방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일본사람인 가네꼬대위에게는 일부러 알은체를 않고 두루거리로 치하를 한 다음 제기된 문제가 없는가고 물었다. 주민들에 대한 몇가지 료해자료와 함께 새로 주둔한 수비대의 식량공급문제, 주민들의 채벌신청문건 그리고 구가점샘골에 새로 《취락정》이라는 청료리집을 내겠다는 영업허가신청을 들여다본 모리는 대체로 현지경찰의 의견에 동의를 하고 장기덕이 문제는 너무 까다롭게 굴지 않는것이 좋겠다는 식으로 가네꼬의 완강한 태도를 눌러놓았다. 분서장은 자기들이 치안의 만전을 위하여 기울이고있는 비상한 노력에 대하여 그냥 지껄였다. 《여기는 사실 집단부락이 아직 되지는 못했지만 개미 한마리 얼씬하지 못합니다. 워낙 주민들의 사상동태가 그닥 좋지 못한곳이였는데 이 이태사이에 눈에 띄게 달라졌지요.》 그 이태가 바로 두꺼비같은 분서장의 근무기간과 맞먹으리라는것을 충분히 짐작할수 있는 모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참을성있게 들었다. 《류창표가 요즘도 방아간을 돌리는가?》 한참 관내의 태평무사함에 대하여 열을 올려 주어섬기고있던 분서장은 무중 튀여나온 질문에 떨떨해서 한동안 눈만 꺼먹거리더니 더듬더듬 대답하였다. 《저 아까 말씀드린 그 수비대식량을 모두 그 방아간에서 찧고있는데요.》 《류창표에게 조카딸이 언제부터 와있는가?》 《네? 저…》 분서장은 모리가 그런 문제까지 알고있는데 대하여 몹시 놀란듯 한동안 입을 벌린채 다물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겨우 대답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는데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그냥 마른침을 삼키며 말끝을 온전히 맺지 못하였다. 《저 보름… 아니 아마 한달가까이 되는듯 한테…》 이녀석이 류창표의 술깨나 얻어먹었구나 하고 생각한 모리는 엄격한 목소리로 뒤를 죄였다. 《증명서는 있는가?》 《뭐 별로… 그래서 오늘 불렀는데… 사실은 류창표가 믿을만 한 사람이기에…》 모리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잘라서 말했다. 《그런 충실한 사람의 가족에 대해서는 각별히 편의를 봐주어야 한다. 시끄럽게 오라가라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는 실무적인 몇가지 주의를 주고나서 장갑을 집어들었다. 분서장이 비게가 잔뜩 진 몸을 흔들며 털외투를 벗겨다 어깨에 걸쳐주었다. 모리는 그 길로 수비대장 가네꼬를 데리고 병영으로 걸어가면서 장기덕이문제에 대해 알아들을만큼 귀띔을 해주고 수비대의 전화로 무산 옥암동에 류진옥의 신원조회를 할데 대한 지시를 공작반에 보냈다. 가네꼬는 특별히 자기를 신임하여주는 이러한 처사에 감격하여 모리의 무테안경을 눈물이 그렁해서 바라보았다. 7
숲자체가 형체를 감추고말았다. 령마루에는 그나마 아직 나무같은것이 서있지만 우묵한 골짜기들은 며칠째 눈보라가 쳐갈겨서 온통 번번하게 메워버렸다. 그처럼 장엄하게 펼쳐졌던 숲은 간데 없고 아찔하던 이깔나무들도 눈속에 다 묻혀서 마치 쑥대밭처럼 웃초리만 간신히 드러나 떨고있었다. 대오는 그런 쑥대밭같은 골짜기를 벗어나 파란 하늘아래 위압적으로 솟아있는 령마루를 톺아오르고있다. 제대로 걷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마음이 급하여 허리 웃부분은 앞으로 나가지만 다리는 미처 그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헉 헉 가쁜 숨을 쉬며 유리가루같은 눈을 혀바닥으로 자주 핥게 되는것은 물매가 급한때문만도 아니였고 꽁꽁 얼어붙은 눈판이 미끄럽기때문만도 아니였으며 더구나 겨불내가 치미는 목을 추기고싶다는 욕망때문만도 아니였다. 지금 대오에서 다소라도 육체적여유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장경수, 한태혁이, 김태규 같은 드센 축들은 물론 아직도 다른 사람처럼 눈판을 핥게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남아있는 힘에 비해서는 훨씬 과중한 짐이 덮씌워있었다. 쓰러진 동지들을 업고 가야 하였다. 대오를 몇십리씩 앞질러 정찰을 나가야 하였고 식량공작도 해와야 하였다. 그리고 하루에도 10여차례씩 진행되는 전투를 주장 그들이 감당해야 하였다. 지휘관들도 다 지쳤다. 누구에게나 쓰러진다는것이 놀랍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적 눈구뎅이에 구겨박히지 않고 걸어간다는것이 이상스럽게 생각되였다. 리성림은 그저께 후위에 섰다가 치렬한 전투를 치렀다. 전투가 끝났을 때 기본부대는 거의 5리나 앞서나가있었다. 그 5리를 따라잡는데 남아있던 육체의 예비를 다 짜내버린듯 하였다. 그날부터 성림은 못견디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였다. 휴식을 하다가 출발명령이 떨어졌을 때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동무들을 부축해 일으키군 하던 성림이였다. 그러나 그저께부터는 그 자신이 지휘관들의 그런 고무와 부축임을 받고서야 가까스로 일어나게 되였다. 이 며칠째 그는 자기가 학교에 다닐 때 체육선수로 뽑혀다니면서도 언제나 단거리선수였지 운동장을 두바퀴이상 도는 경기에는 영 성적이 좋지 못했다는것을 상기했다. 자기는 결국 인생에서도 단거리선수인지 모른다. 몇순간에 지나가는 고통은 제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자신이 있었지만 이렇게 끊임없이, 쉼없이 지속적으로 덮쳐드는 고통에는 견디여낼 인내성이 없고 심장과 페의 활량이 모자랐으며 차마 그것만은 인정하고싶지 않았지만 그끝에 오는 영예에 대한 갈망도 그 고통을 이겨낼만큼 강력한것이 못되는듯 하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 이런저런 추리가 있었던것은 어제 오전까지의 일이였다. 비교적 평평하던 눈벌이 심한 굴곡을 그리고 적아의 거리가 밭아지면서 행군속도가 높아지자 모든 사고는 오직 하나 현실적인 고통에로 집중되였다. (아, 나는 못견디겠구나.) 하고 성림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또 한발을 끌어붙였다. 발의 동상이 차츰 장다리쪽으로 번져오는지 무릎이 접히지도 뻗쳐지지도 않는다. 우뚝 걸음을 멈추니 막막한 설원이 펼쳐져있다. 어느덧 경위중대도 다 지나간듯 앞뒤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직 무수한 비수가 한꺼번에 날아드는것 같은 독기서린 추위와 미친듯이 아우성치는 눈바람만 향방없이 뒤설레이고있다. 지금 8련대는 행군대오의 선두에 서있다. 성림이는 한걸음한걸음 뒤지다나니 어느새 자기 대오를 잊어버리고 경위중대와 함께 걷다가 이제는 후위련대와 직속구분대의 중간쯤에서 홀로 걸어가고있는것이였다. 그는 온갖 탕개가 다 풀려서 입을 하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처럼 피여나는 입김이 그대로 얼어붙어 허공에서 반짝거린다. 어제부터 하늘은 개여서 파랗게 틔여있었다. 구름 한점 없는 그 하늘이 오히려 허무감을 자아냈다. 입안으로 한아름 찬바람이 쳐들어오자 그는 헉― 하고 숨을 들이그으며 뒤로 비칠거렸다. 문득 엄광호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두고봐야 해. 동무가 고문도 당해봤다니 모르기는 하겠지만 유격대의 겨울이라는것은 간단한게 아니야. 더구나 금년겨울은 헐하지 않을걸. 봄에 보자구. 그때 가서도 지금과 같은 장담이 그냥 울려나온다면 동무는 한사람의 당당한 유격대원이라고 불리울수 있지. 그전에는 그렇게 장담을 하지 말라구.》 엄광호가 자기네 부대의 간고한 원정길에 대해 말할 때 약간 비판할사했더니 이렇게 속편치 않는 말을 했었다. 남패자를 떠나 림강땅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성림은 엄광호의 말에 마음속으로 코방귀를 뀌였다. 부모로부터 완강한 체구를 물려받은데다 성격이 개방적이고 활달해서 체육도 이것저것 다 건드려본 그는 육체적고통이라는것을 그닥 두려워해본적이 없었다. 농민조합운동이 고향땅을 휩쓸던무렵 소년시절을 과격한 연설과 비합법적회합의 열기띤 분위기속에서 보낸 성림이는 현대인의 가장 두드러지는 멋이 사회운동자들의 내적, 정신적 비범성에 있으며 감옥살이라든가 망명생활과 같은 경력이 반드시 붙어야만 현대지성의 높이에 올라설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였다. 그는 벌써 열여덟에 어렵지 않게 감옥살이를 할수 있게 되였으나 어떻게 된 판인지 주모자로 몰린 읍거리의 양조장집 아들이 먼저 석방되는바람에 류치장에서 매를 좀 맞고 쫓겨나버렸다. 결국 겪고보니 유명한 《주의자》들이 치렀다는 그 영웅적인 옥중투쟁이란것도 그러루한것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자기를 맞이한 동지들이나 친지들이 모두 그런 영웅적인 옥중투쟁을 거친 투사의 계렬에 자기를 끼워넣는 그것이였다. 순진했던 성림은 처음 한동안 계면쩍었다. 그러나 세월에 부대끼는 사이 어느덧 자기절로도 자기의 그 화려한 경력에 습관이 되였으며 나아가서는 자기 체험을 진실하게 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투쟁의 길을 찾으려고 애썼으며 자기가 한 말들에 충실하려고 성의를 다했다. 놈들의 주목속에서 야학도 세워보고 로동판에 뛰여들어 계를 뭇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더는 견디지 못하게 되였을 때 그는 유격대를 찾아 강을 건너왔고 마침내 혁명의 군복을 입었다. 그의 인생행로를 그자신의 성격과 같이 막히는것이 별로 없었다. 재간둥이인 그는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삶에 대해 자신이 있었으며 자부심도 컸다. 그러나 그 모든것은 결국 단거리경주와 같은것이였다. 10년, 20년이 걸릴지 모르는 혁명, 령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대원시림속에서 수십배나 되는 적의 포위와 추격속에서 몇달이 걸릴지 모르는 이런 행군에는 단거리경주와 다른 요인이 너무나 많이 작용한다. (정지성이도 견디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좀 창피하였다. 정지성을 눈속에서 끌어낼 때 그는 그 허약한 육체가 종시 이 무자비한 빙판에 얼어붙고말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지성은 고집스럽게 자기의 그 엄청난 배낭을 그대로 지고 지금도 묵묵히 걸어가고있다. 아까까지 저앞 비서처의 맨 뒤에서 허우적거리더니 이제는 그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누군지 분간하기 힘드는 사람 형체 하나가 시야에서 얼찐거렸다. (누굴가?) 그러나 다음순간 성림은 자신의 고통에로 되돌아왔다. 주저앉으면 죽는다는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안다. 그자신 길가에 쓰러진 동무들을 보고 그렇게 말했었다. 육체에 아직 여유가 있을 때는 그러한 말이나 생각이 효과가 있었던듯 하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이라는것도 큰 의의를 가지지 못하였다. 오직 고통만이 현실적이였다. 시장하다든가 춥다든가 피곤한것과 같은 구체적인 감각은 없다. 덮어놓고 견디지 못하겠다는 미칠것만 같은 충동뿐이다. 무엇인가 열정이 남아있다면 온몸의 마지막 힘을 다쥐여짜서 악― 하고 한마디 비명이라도 지르고 주저앉아버리고싶다는 강렬한 욕망뿐이였다. 성림은 벌써 이러한 종말의 열정, 죽음의 유혹에 이틀째 시달리고있었다. (내가 주저앉으면…) 이렇게 생각하니 눈굽이 찡해올랐다. (어머니는 울것이다. 내가 이름없는 광야에 무주고혼이 됐다고 땅을 치겠지. 참, 불쌍한 우리 어머니…) 발끝에 무엇이 걸채인다. 힘겹게 눈을 떠보니 아까 정지성이대신 시야에 나타났던 그 사람 같다. 사람의 발길에 걸채였는데도 꿈쩍 안하는것을 보니 이미 숨이 진것이나 아닌지…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꼴을 어머니는 머리속에 그리며… 엄광호는 그것을 알고있었다…) 열걸음도 못가서 성림의 생각은 중단되였다. 그가 넘어진 자리는 새로운 눈보라에 묻혀버렸다. 눈보라는 그러고도 파란 하늘에서 끝없이 터져나왔다. 행군대오는 새겨도 새겨도 지워지기만 하는 발자국을 끌면서 천천히 천천히 골짜기를 굽이돌고있었다. 8
마침내 령마루에 올라섰다. 그러나 그 령마루가 행군의 종착점은 아니였다. 날이 저물기까지는 그냥 걸어야 한다. 령마루우에 또 령마루가 나타났다. 이제는 전사와 전사의 거리가 다섯메터, 여섯메터로 늘어났다. 아무도 입을 벌리는 사람이 없다. 설사 누가 무슨 말을 한대도 들리지 않을것이며 혹 들린다 하더라도 그 뜻을 새겨내지 못할것이다. 뜻이 있는것은 추위에서 오는것인지 굶주림에서 오는것인지 한계가 모호한 고통이였다. 모든 고통이 극에 이르면 결국 못견디겠다는 생각에로, 그다음은 완전한 허탈 그리고 죽음과 망각에로 이르는것 같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철구아주머니의 배낭과 총을 껴지시고 아까부터 이미 없는 동생과의 대화를 계속하면서 걷고있었다. (내 힘은 이젠 진해버렸나봐. 하지만 내겐 네 힘이 남아있지 않니. 나는 끝까지 갈거야. 그건 이런 눈속에 너를 묻고 네가 불던 나팔을 가슴에 품고 너한테 다진 맹세였으니까… 내가 쓰러지면 우리 집은 다 쓰러지는걸…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님도 그리고 너까지 왜놈들 손에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주저앉겠니. 아― 하지만 네가 저 령마루에서 그날처럼 누나랑 우리 동무들을 모두 불러일으키는 나팔소리를 울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가…) 어린 동생이 붉은넥타이를 펄펄 날리며 적을 끌고 눈덮인 근거지의 산기슭으로 달려가던 모습이 방불히 눈앞에 밟혔다. 나팔소리가 울린다. 아니다. 그것은 바람소리였다. 동생의 환영은 그날 적탄을 맞고 쓰러질 때처럼 눈보라속에 휘말려들고말았다. 《언니, 철구아주머니가…》 옆에서 누가 안타깝게 소리친다. 무슨 소릴가? 어쨌다는것일가? 대체 이것은 누구인가? 눈시울에 달라붙은 성에를 문지르고 바라보니 온통 눈더미처럼 얼어붙은 금숙이다. 《왜 그래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벙어리장갑을 입앞에 갖다대고 마주 소리쳤다. 《철구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아요.》 말소리는 바람소리가 다 삼켜버리고 철구아주머니라는 한마디를 겨우 가려들었지만 금숙이가 무엇때문에 소매를 움켜잡고 발을 동동 구르는지 인차 짐작이 갔다. 김정숙동지은 놀라서 앞뒤를 살펴보았다. 지금 대오에는 끌끌한 대원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두간두간 늘어선 대오에서 누가 누군지 가려보기도 힘이 든다. 그러나 사나흘전부터 힘깨나 쓰는 남자들은 모두 척후로 앞에 나갔거나 길을 내고있으며 그중 미더운 동무들로써 후위구분대가 조직되여있었다. 대렬에 들어선 동무들가운데 비교적 든든한 동무들은 또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기도 하고 쓰러진 동무들을 부축해주기도 하였다. 자기 한몸을 끌고가는데도 고통의 절정과 싸워야 하는 길이다. 누구든지 멎어서면 죽는다. 조그마한 힘의 여유도 없다. 그러니 누구를 잡고 철구아주머니를 못봤느냐고 물어본다는것부터가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틀림없이 쓰러졌다. 이레째 소금을 못먹었다. 염분탈락이 온 몸들이라 모두 눈이 나빠지고 맥을 추지 못한다. 그런데 대해 작식대원으로서 가슴아파 남먼저 굶기 시작하고 소금기도 끊어버린 철구아주머니였다. 남몰래 한숨지으며 괴로와하던 그의 어진 얼굴이 떠오른다. 이것이 만약 끊임없이 계속되는 행군과정만 아니라면 그는 무엇이든 구해왔을것이다. 그러나 멎어설수 없는 길, 떨어질수 없는 길이기에 그는 몰래 한숨짓고 눈물지으며 남보다 더 나이들고 무거운 몸을 남보다 덜 먹고 소금기도 먼저 빠져서 고통을 씹어먹듯 이를 악물고 따라왔었다. 저 아래 골짜기바닥에서 소휴식에 들어섰을 때 그는 진대나무통에 등을 기대고앉아 먼 하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중얼거렸었다. 《우리가 처음 근거지를 꾸려놓았을 때 정말 이런 세상도 있는가싶더니… 그런 자유천지를 우리 나라에 일으켜세운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힘든 걸음이라도 참을수 있어.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이런 행군에 견디여낼가…》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때 사령관동지의 행전을 손질하느라고 미처 그 말뜻을 깊이 새겨듣지 못했지만 새삼스러운 말같이 생각되여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었다. 철구아주머니는 김정숙동지의 눈길을 느끼자 어설픈 웃음을 입가에 짓더니 자기 배낭속에서 마른 나물 한줌을 꺼내여 김정숙동지의 배낭에 쓸어넣었다. 《이거 참나물인데… 사령관동지께 한번 무쳐드렸으면 어떨가?》 별로 소심하게 어딘가 미안해하는듯 한 그 말투가 그때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철구아주머니는 그때 벌써 무엇인가 예감하고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틀림없이 쓰러졌다. 《이 배낭 좀 부탁해, 총도… 힘들지?》 김정숙동지은 서둘러 철구아주머니의 배낭을 내려 금숙이에게 떠맡기며 말했다. 그의 몸은 어느새 뒤쪽으로 날아갈듯 쏠리고있었다. 《아니 어떻게 하자고 그래요? 언니가 가서 어떻게 하겠어요?》 금숙은 당황하여 김정숙동지의 소매를 틀어잡았으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전에없이 세차게 뿌리치면서 달려가시였다. 띠염띠염 한줄로 늘어선 대렬이 눈에 알릴듯말듯 천천히 움직여간다. 저앞에서 8련대의 척후가 눈우에 딩굴면서 길을 내고있는데 그 속도도 따르지 못할만큼 간신히 간신히 움직여간다. 거의 선자리에서 잔걸음을 치며 우들우들 떨기만 하는 동무도 있다. 해여진 군복자락이 펄럭거리면 그 짬으로 꺼멓게 언 생살이 드러나기도 한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바람을 안고 구을듯이 달려내려가시였다. 망짝만 한 해여진 로동화가 지나간다. 눈덩어리가 갈라진 신창으로 쐐기처럼 박혀서 발이 놓일 때마다 몸이 기울거렸지만 털어버릴 맥도 없는지 그대로 질질 끌고간다. 모로 서서 가재걸음을 치는 한 동무는 군복자락이 말려올라가서 눈가루가 허리로 마구 쓸어들었지만 아무것도 못느끼는듯 그냥 몸을 옆으로만 기울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참혹한 형상을 볼 때마다 눈굽이 저렸다. 그러나 멈추어서실수는 없었다. 달려내려온 이 길을 되돌아갈수 있겠는지, 바로 옆에 사람이 쓰러져도 알길 없는 눈판에서 철구아주머니를 찾아낼수 있겠는지, 더구나 그를 업고 대렬을 따라갈수 있겠는지 김정숙동지께서는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만 그를 버리고 갈수 없다는 한가지 생각이 있을뿐이였다. 《아, 아니 공작원동지…》 누군가 놀라서 소리친다. 입이 얼어붙어 그런지 휘파람소리같은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돌아보시니 무엇인가 많이도 짊어진 장대한 사람이 지나치다가 돌아서서 손을 뻗친다. 어디로 가느냐는것이다. 《인섭동무, 어서 가봐요. 난 저기 사람을 잃어서…》 김정숙동지은 반가왔으나 그와 긴 이야기를 나누실 사이가 없었다. 인섭이가 나타난것을 보니 7련대의 기본대렬도 이제는 마지막인 모양이다. 그다음 5리안쪽에 적들이 달려온다. 적들의 사거리안에 들기전에 철구아주머니를 찾아내야 한다. 인섭은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텅 빈 눈벌이 나타났다. 후위는 강철룡와 한태혁, 최병규였다. 그들은 옆으로 벌려서서 휘적휘적 걸어온다. 역시 끌끌한 그 모양들을 보시니 정말 눈물이 나도록 반가왔다. 《웬일이요?》 강철룡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철구아주머니가 없어졌어요.》 《철구아주머니? 못봤는데… 태혁이 못봤나? 길로 온건 동무지?》 그러자 태혁이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잠시 두사람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봤으면 그냥 있었겠소? 눈에 묻힌거오다.》 《그러게 내가 잘 살피라지 않던가?》 강철룡는 역정스레 팔을 휘젓더니 당장 철구아주머니를 찾아낼것처럼 번번한 눈벌우를 두리번거렸다. 《철구아주머니가 뭐 바늘 같다고 살피며 봐야 알겠소다. 눈구뎅이에 묻혔으니 안보이지… 난산데…》 태혁이도 뒤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한심한 소리 그만두오. 아까 적들이 얼마나 떨어졌던가?》 《한 댓마장 될거오다.》 《좀더 떨굴걸 그랬군.》 두사람이 주고받는 소리를 한귀로 들으시며 김정숙동지께서는 또다시 주먹을 부르쥐고 달리셨다. 발자국은 벌써 메꾸어지기 시작한다. 어찌다 희미하게 한둘 남아있는 그 흔적마저 사라지면 이 눈벌은 방위조차 가려볼수 없는 막막한 공간으로 변해버릴것이다. 한참 달려가던 김정숙동지께서는 낯익은 산굽이가 저만치 바라보이는곳에 이르러 우뚝 서버렸다. 아름드리 이깔나무가 다 눈속에 묻혀 쑥대밭처럼 돼버린 저 골짜기를 벗어날 때 철구아주머니가 한숨 지으며 하던 말이 생각났다. 《이속에 주저앉으면 아무도 못찾겠지… 김정숙동무, 이 배낭 좀… 모두 작식도군데…》 그래서 그의 배낭을 덧짊어졌었다. 철구아주머니가 제먼저 방조를 청한 일이란 거의 없다. 그러고보면 그것은 무슨 인계와 같은것이 아니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이 어방에서 쓰러진것이 분명하다. 뒤로 오던 동무들이 아무도 못본것을 보면 쓰러지기전에 길에서 벗어져난 모양이다. 그래서 갈지자로 이리저리 눈구뎅이를 헤치며 한참 나가는데 바람이 썰고 다니는 눈벌에 무엇인가 천쪼박이 팔락거리는것이 보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무릎까지 치는 눈속을 헤치며 그리로 다가갔다. 가슴은 높뛰고 마음은 급하시였으나 깊숙이 박힌 다리는 좀체로 빠지지 않는다. 가까스로 손을 뻗쳐 그 천을 움켜잡고 잡아당기니 자기 몸이 그쪽으로 끌리는만큼 천이 빠져나오는데 그것은 사람의 목에 감긴 목도리였다. 눈범벅이 된 사람의 머리형체가 드러났을 때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이 섬찍하시였다. 그것은 털모자를 쓴 남자의 머리였다. 게다가 그 입은 아직도 무엇인가 중얼거리고있었다. 《아무래도 마찬가지지.》 다 얼어붙은 시꺼먼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으나 쓰러지기전까지 그냥 중얼거리던 말의 타성인듯 아무런 뜻도 모를 그 중얼거림은 그냥 계속되였다. 있는 힘을 다하여 눈구뎅이에서 몸을 빼낸 다음에야 그것이 8련대에 넘어온 신입대원 리성림이라는것을 가까스로 가려보실수 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렇다는것을 확인한 순간 너무나 기가 차서 두팔을 처뜨리고 서버렸다. 이제는 어찔것인가? 이 동무를 업고 가면 철구아주머니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제 와서 생각하니 사람을 업고 저 눈덮인 령마루를 다시 올라갈수 있겠는가 하는것도 문제였다. 《성림동무, 성림동무!》 어쨌든지 무엇인가 해야 한다. 김정숙동지은 눈으로 매닥질을 한 성림을 세차게 흔들며 안타깝게 불렀다. 《…마지막은 아무래도…》 흔드는대로 이리 기울 저리 기울 하면서 성림의 육체는 중얼거릴뿐 아무런 반응이 없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지으시였다. 철구아주머니를 여기다 버리고가다니… 이제는 원쑤들이 저 산굽이에 나타날 시간도 머지 않았다. 그런데 이 동무는 지금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영영 깨여나지 못할수도 있다. 그럼 철구아주머니는 어떻게 하는가? 철구아주머니는 여기서 불과 100메터 안쪽 어느 눈구뎅이에 누워있겠는데… 《아니 이건 철구아주머니가 아니지 않소다?》 뒤쪽에서 한태혁의 태평스러운 목소리가 울려왔다. 《아, 태혁동무.》 김정숙동지께서는 너무나 반가와 태혁의 소매를 잡고 강둥강둥 뛰였다. 《태혁동무, 정말 고마와요. 이 동무는 리성림동무예요. 이 동무를 업고가 주세요.》 《그럼 철구아주머니는 어떻게 하겠소다? 같이 찾아봅시다.》 그러면서 태혁이는 앞으로 더 나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사이 성림의 목도리를 끌러 다시 얼굴전체를 꽁꽁 싸매주시고 눈에 도로 묻히지 않게 사위를 다져놓으신 다음 태혁이와 반대쪽 길가를 더듬어나가시였다. 철구아주머니는 불과 10메터도 못가서 역시 길에서 벗어난 눈구뎅이에 묻혀있었다. 《이런데 주저앉으니까 모르지, 주저앉을바에는 길복판에 주저앉아야지… 참, 답답한 동무들이군.》 태혁은 그냥 무엇인가 웅얼거리며 육중한 철구아주머니의 몸을 갑삭하게 지고 일어났다. 철구아주머니는 겨우 숨을 쉬는것 같았으나 의식은 전혀 없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앞으로 달려가시였다. 그러니 자신께서 성림동무를 업고가셔야 할 판이다. 그사이 성림이는 정신이 좀 들었는지 눈을 멍하니 뜨고있었다. 《성림동무.》 김정숙동지께서는 반가와서 소리치시며 손목을 잡고 흔드시였다. 《성림동무, 조금만 참아요. 자, 업히자요. 이제 조금만 가면 우등불곁에 갈수 있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등을 돌려대시였다. 그런데 무슨 심산인지 성림은 그이의 등을 밀어던져버렸다. 그것은 물론 빈사지경에 처한 사람의 손짓이라 여느때 같으면 이렇다할 감각이 없겠지만 지금은 너무나 뜻밖이였고 또 김정숙동지 역시 지칠대로 지치시였다. 밋밋하게 다져놓은 눈구뎅이에 비칠하고 주저앉으시는 순간 뚜르륵 하고 기관총련발사격소리가 울리더니 이어 눈가루의 길다란 탄도를 그으며 총알이 귀뿌리를 째고 지나갔다. 눈속에 머리를 묻으시였다가 고개를 돌려보시니 성림이는 여전히 번듯하게 누웠는데 공허하게 뜬 눈으로 이깔나무숲이 쑥대밭처럼 보이는 그 골짜기 굽인돌이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그의 눈길을 따라가면 이미 굽인돌이를 돌아선 적들이 무릎을 꿇고 사격자세를 취하고있다. 한개 소대가량 되여보이지만 우묵하게 꺼져들어간 그 골짜기에 한개 려단이 따라오는것이다. 《태혁동무, 엎드려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적을 바라보는 성림을 한쪽팔로 감싸안으며 소리치셨다. 철구아주머니를 업고 겁석겁석 걸어오던 태혁은 뒤를 돌아보더니 눈구뎅이에 꿇어앉았다. 《김정숙동무, 빨리 업고 뛰오다. 기관총수 한태혁이 여기 있지 않소다.》 그러면서 가슴앞에 걸쳤던 경기를 눈우에 뻗쳤다. 반반한 눈벌우에 돌개바람을 일구며 총알이 날아갔다. 무릎을 꿇고앉아 총질을 하던 적들은 풀떡풀떡 일어나더니 골짜기쪽으로 쫓겨갔다. 그대신 그 골짜기쪽에서 불줄기가 날아왔다. 《빨리 뛰시오. 철구아주머니는 내 업고가지 않으리.》 태혁은 한참 방아쇠를 당기다가 뒤를 돌아보고 손짓을 한다. 김정숙동지께서 바라보니 히쭉 하고 웃기까지 한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만 오열을 터뜨리실번하다가 가까스로 참고 성림을 업으셨다. 몸을 돌려 령마루쪽을 바라보시니 머지 않은곳에서 헤여진 강철룡네도 그리고 지금쯤 령마루를 톺고있어야 할 7련대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시간을 지체한것이다. 하기는 적들이 벌써 저 굽인돌이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김정숙동지께서는 목에서 단내가 확확 내뿜는것을 느끼며 달리셨다. 다져놓은 눈길에 들어서시였으나 어느새 눈보라가 새눈을 덮어버려서 다시 정갱이까지 빠진다. 달린다는것은 마음뿐이고 한걸음한걸음 헤염치듯 해야 가까스로 얼마간 앞으로 나가실수 있었다. 몇걸음 못가시여 성림이가 지쳐내렸다. 저절로 흘러내리는것이 아니라 업혀가지 않겠다고 팔로 등을 뻗치는 모양같다. 뚜루루 뚜루루… 따따따 총소리가 자지러진다. 태혁동무는 어찌되였는가? 발뒤꿈치 어방에서 푹 푹 하고 탄알이 박힌다. 귀뿌리로 쌩쌩― 하고 적탄이 언 공기를 째며 지나간다. 힐끔 뒤를 돌아보시니 아까 언덕밑으로 떨어졌던 적들대신에 이번에는 수백명도 더 되는놈들이 둔덕우에 누렇게 덮였다. 장교놈이 칼날을 번뜩이며 무엇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태혁은 철구아주머니를 업고 일직선으로 달려오다가 별안간 갈지자로 굽어들었다. 뚜루룩 뚜루뚜루 뚜루룩 탕 따따따 탕 탕― 한꺼번에 터져오른 일제사격소리를 들으시며 김정숙동지께서는 눈을 감으셨다. 자기가 엎드려야 한다는 생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저 탄막속에서 태혁이가 어찌되랴 하는 근심이 가슴을 채웠다. 쇠비린내가 풍기는 단김을 꿀꺽 삼키며 다시 눈을 뜨니 또다시 맹렬한 일제사격소리가 터져올랐다. 그런데 태혁은 그냥 달리고있다. 《정숙동무, 빨리 가오다. 왜 서서 그러오다?》 태혁의 목소리는 좀 가쁜듯 하였으나 별로 급해하는 투가 아니였다. 그제야 보니 적들은 모두 대가리를 눈속에 쓸어박고 뒤걸음치고있다. 별일이다. 그래서 다시 앞을 바라보니 일제사격은 령마루에서 울려오는것이였다. 탄막은 옆을 지나 적들을 향해 날아가고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꿈을 꾸시는것만 같아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령마루쪽을 우러러 보시였다. 령마루에 기발이 휘날린다. 여느때는 깊숙이 간수해다니던 그 붉은 기발이 백설의 대지에 뿌려진 선혈처럼 아프게 눈을 찔렀다. 쓰러진 동무들을 혁명에로 부르는 강렬한 호소였다. 문득 김정숙동지께서는 저렇게 눈덮인 령마루에서 울리던 동생의 나팔소리를 생각하셨다. 또다시 일제사격이 터져올랐다. 탄막은 적들이 욱실거리던 굽인돌이를 휩쓸어버렸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산병선은 령마루의 기슭을 따라 길게 옆으로 뻗어있었다. 그 한가운데 붉은 기발이 나붓긴다. 문득 거룩한 영상이 그 기발옆에 떠오르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쌍안경을 드시고 아래를 굽어살피시더니 한손을 높이 쳐들어 손짓을 하시였다. 자기더러 빨리 오라고 부르시는것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 대렬을 떠나올 때까지도 사령관동지께서는 대렬의 맨앞에서 몸소 길을 내시며 나가시였다. 누가 그이께 이 일을 알려드렸는가? 김정숙동지께서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속에서도 이만한 일때문에 그이께 심려를 끼쳐드리고 행군대렬을 몽땅 돌려세우시여 이처럼 믿음직한 엄호사격을 조직하시게 한것이 송구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눈바람을 만나 펄펄 날리는 기발곁에 서시여 그냥 손을 저어 부르신다. 《성림동무, 눈을 뜨세요. 장군님께서 부르세요. 저 기발을 보세요. 장군님께서 저 기발곁에 서계시지 않아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어깨너머로 이렇게 속삭이며 눈을 걷어차고 달리시였다. 9
그날밤은 달밤이였다. 적들은 접전이 있었던 그 쑥대밭같은 골짜기에 퍼더앉아버렸다. 조선인민혁명군도 행군을 계속할 형편이 못되였다. 겨우 두어마장 떨어지나마나한 골짜기에 적들을 내려다보며 조선인민혁명군은 령마루우에 숙영지를 정하였다. 앙상한 이깔나무우듬지끝에 보름 가까운 달이 파르르 떨고있었다. 잔뜩 얼어붙어서 다치면 쟁그렁하고 부서져나갈것처럼 차겁게 보이는 달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외투를 어깨에 걸치시고 맞춤한 나무등걸에 걸터앉으시여 너울거리는 우등불밑에 노트를 펼쳐드시였다. 오래전부터 관습이 되신 일이였으나 오늘따라 어쩐지 선뜻 붓이 나가지 않으시였다. 동상을 입었거나 지쳐서 쓰러진 동무들은 철구아주머니나 성림이만이 아니였다. 밤이 깊도록 그들을 구완하시기 위하여 미음도 손수 떠넣어주시고 몸도 주물러주시였으며 군의나 후방일군들, 지휘관들에게 이것저것 빈틈없는 지시를 주시고 돌아오신 길이였지만 래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였다. 오늘의 로정을 간단히 적어넣으신 그이께서는 한손에 만년필을 쥐신채 어둠에 묻힌 숙영지를 굽어보시였다. 밤은 이미 깊어서 불무지보초들만 남겨놓고 모든 대원들이 다 잠들어버렸다. 여기저기 일어선 도리풍들만이 달빛을 받아 희게 떠올랐다. 풍은 많지 않아서 재봉대나 작식대의 녀대원들과 병약한 동무들에게만 차례지고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로숙을 한다. 령하 40도가 넘는 한지에서 로숙을 한다는것이 어떤것인지 과연 상상해낼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것인가? 그래도 대원들은 그것이 익숙한 생활인데다 오늘은 극도로 지쳐서 불무지를 피워놓자마자 꼬꾸라졌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자신께서 느끼시는 육체적고통만 가지고도 대원들이 지금 어떤 시련앞에 놓여있다는것을 충분히 느끼실수 있었다. 무심히 노트를 펼치시니 토막토막 적어넣으신 일기의 갈피갈피에서 남패자를 떠난 이래 이 한달가까운 사이 부대가 헤쳐온 혈로와 그가운데서 대원들이 겪은 수많은 고통과 슬픔, 그들이 발휘한 초인적인 노력과 영웅성 그리고 아마 력사에 다시 없을 혁명적락관주의정신이 련속화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추위와 허기와 피곤이 이처럼 큰 문제로 나서리라고 어느 혁명가가 생각했을것인가. 아버님께서는 늘 혁명가는 맞아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들의 참뜻이 오늘에 와서 더욱 선명해지는듯 하시였다. 길림에서 《어머니》라든가 《철의 흐름》같은 소설을 읽으실 때 준엄한 정황에서 모대기는 주인공들을 생각하시여 속을 태우시며 그들이 발휘한 영웅주의에 경탄을 금하실수 없었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오늘 이 시련을 꼬주흐같은 사람이 겪는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하고 생각해보시였다. 너울너울 춤추는 불길이 그이의 사색을 점점 깊은곳으로 이끌어가는듯 싶었다. 꼬주흐의 부대가 깝까즈의 산맥을 돌파하는것은 전선을 넘어 자기편 사람들에게로 가기 위한것이였다. 거기에는 따뜻한 잠자리와 식량과 안전이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안정된 자유로운 생활이 있었다. 그러나 철구아주머니나 정지성이가 마지막 육체의 예비를 깡그리 짜내며 과학으로써는 이미 설명할수 없는 힘을 발휘하고있는것은 우리 힘으로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적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대처하여 국내와 국경지대에서 더욱 대규모적인 유격전쟁의 불을 지펴올리기 위해서이다. 이 끈덕지고 악착스러운 포위와 매복, 류례없이 엄혹한 시련을 헤치고 조국에 진출할 때 거기서 기다리는것은 꼬주흐네들을 기다리던 그러한 전선이나 후방이 아니라 더욱 강화된 적의 요새와 피의 접전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이 간고한 행군을 고무하는것은 시련의 저끝에 있을 안식이 아니라 더욱 큰 시련이면서 더욱 큰 의무인, 계급해방과 조국광복에 대한 사명감이다. 아직 앞길은 아득하다. 추위도 더 사나운 절기가 앞에 가로놓여있다. 백두산지구와 국경이 가까와질수록 적의 력량배치는 더욱 조밀해지고 그 간악성은 훨씬 더해질것이다. 그런데 조선인민혁명군은 행군의 절반길에서 이미 힘의 예비를 다 짜내고말았단 말인가? 하늘은 높이 개여오르고 달빛은 청승맞도록 밝았지만 이 나라 반만년력사를 생각하시는 김일성동지의 가슴은 일조에 허물어지는 그 력사의 거창한 무게를 한몸으로 받아안으신듯 답답하시였다. 어디에 2천 3백만겨레의 운명을 건지고 오천년력사의 금자탑을 뻗칠 힘이 있는가. 과연 조선인민혁명군에게 그 크나큰 사명을 감당할 힘이 남아있는가? 그이께서는 노트를 접어드시고 벌떡 일어나시였다. 고달픈 숨소리, 가위눌린 잠꼬대소리, 도리풍속에서 울려오는 신음소리를 하나하나 가려들으시며 천천히 찬서리 내려 얼어드는 숙영지를 거니시는 김일성동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느 불무지곁을 에도시여 번번한 눈벌에 나서시니 앞에는 컴컴한 어둠과 숲속으로 스며든 푸른 달빛 그리고 허연 눈빛이 준엄한 시절을 상징하듯 무시무시한 음영을 이루고있었다. 숙영지를 벗어나신지는 이미 오래 되시였다. 이제 조금 더 가면 내림받이가 나지고 그밑에 개울이 있을것이다. 저녁에 취사장을 꾸렸던곳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귀전을 아프도록 스쳐지나는 눈바람에 화끈 달아오른 얼굴과 답답한 가슴을 식히고싶으시였다. 그러나 아무리 칼바람이 휘몰아쳐도 그이의 가슴속은 마냥 끓어번지기만 하였다. 장백, 국경 일대에까지 나갔다고 해서 끝나는 행군도, 싸움의 길도 아니였다. 그것은 아무리 멀고 험해도 어디까지나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한 한 과정에 불과하다. 이러한 행군이 얼마나 거듭돼야 끝날지 모르는 혁명의 길이다. 남달리 간고한 조선혁명의 길, 그래서 또 남달리 억세지 않으면 안되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후방도 군비도 자금도 없이 오직 혁명하겠다는 열정 하나를 가지고 맨주먹으로 일어나서 세계제패를 꿈꾸는 일본제국주의를 향하여 용감하게 선전을 포고한 조선의 항일유격대원들, 참으로 이렇게 용감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주저앉을수가 있단 말인가. 김일성동지께서는 지그시 입술을 다무시고 칼바람 휘몰려오는 컴컴한 골짜기바닥, 눈빛과 달빛과 어둠이 서로 물고 늘어져서 딩구는것 같은 무시무시한 음영을 쏘아보시였다. 처절한 피투성이싸움을 련상케 하는 그 빛갈들의 끔찍한 조화는 단지 상징적인 느낌뿐아니라 어찌 보면 매우 감각적이고 실지로 격렬하고 생동한 그 어떤 형상을 빚어내는것만 같았다. 이윽히 어둠속을 지켜보시는 김일성동지의 눈앞에 문득 산 인간의 형상이 떠올랐다. 웬 녀대원이 한손을 엉거주춤 쳐들어 허공을 더듬으며 비틀비틀 눈속을 걸어가고있다. 몇걸음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눈속을 더듬어가더니 무엇에 걸렸는지 펄쩍 주저앉았다. 한옆에 끼고있는 무엇이 눈우에 굴러떨어졌다. 절렁하는 소리로 보아 아마 취사장에서 쓰는 소랭이같은것인 모양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진작 생각에서 깨여나시여 그 녀대원의 거동을 자세히 살피고계시였다. 녀대원은 떨어뜨린 소랭이를 찾느라고 두팔로 눈우를 더듬고있다. 언덕우에서 그 형상이 뚜렷이 알려지는것을 보면 그 어방에는 달빛이 환한것 같은데 방금 제가 떨군것을 그렇게도 찾기 힘들어하는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시였다. 녀대원은 앉은채로 자리를 옮겨가며 눈우를 더듬는다. 마침내 서너걸음앞에서 무엇인가 찾아쥔듯 덥석 그러안더니 또다시 눈우를 더듬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그리로 다가가시였다. 발밑에서 뽀드득 뽀드득 눈이 다져지는 여무진 소리가 났지만 바람소리때문인지 너무나 당황해선지 녀대원은 그냥 무엇을 찾고있다. 그것은 재봉대의 채옥이였다. 그가 채옥이라는것을 알아보신 순간 김일성동지께서는 채옥이가 앞을 못본다는것을 눈치채시였다. 요즘 내내 소금을 못먹다나니 염분탈락으로 어지럼증이 나타나고 여러가지 영양실조현상들이 생긴다는것을 이미 알고계시였고 그중에도 채옥이가 심하다는 보고를 어제 받으시였다. 눈이 어두워졌다는것도 그때문에 생긴 영양실조현상의 하나일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눈이 어둡다는 동무가 숙영지밖까지 무슨 일로 혼자 나왔는가? 더좀 가까이 다가가보시니 역시 옆에 끼고있는것은 소랭이였다. 아마 소랭이에 담아가지고온것을 넘어지는바람에 모두 흐트린 모양이다. 김일성동지의 발걸음은 차츰 떠지다가 마침내 한자리에 멎어서고말았다. 순진하고 명랑하던 나어린 처녀가 눈이 멀어 장님보다 더 심하게 허둥거리는 그 모양을 차마 바로 보시기가 힘드시였다. 《아! 있구나…》 채옥이는 눈우에서 잃은것을 찾아낸 모양 기쁨에 겨워 홀로 부르짖더니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한손을 쳐들고 허공을 더듬으며 비틀비틀 걸어간다. 무릎을 펴지 못하고 발끝으로 더듬더듬 눈우를 짚어보며 한걸음씩 한걸음씩 옮겨가는 그의 발걸음은 골짜기바닥으로 향하고있었다. 어디로 가는가? 저녁에 취사장을 차렸던 그 개울가로 가는 모양인가? 그러나 채옥의 발길은 도끼로 얼음을 까놓은 그 개울가와는 왕청같은 방향으로 향하고있다. 숙영지를 꾸리자마자 남대원들이 길을 내고 우물을 만들어준 그 길이라면 몰라도 저렇게 왕청같은 방향으로 나갔다가는 가장 깊은 골짜기쪽으로 떨어지게 된다. 채옥이는 그런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공에 내댄 손끝에 나무가 다쳐지면 그것을 안고 돈 다음 다시 손을 내대여 이쪽저쪽 휘젓고 더듬으며 기슭을 내려가고있다. 《채옥동무!》 김일성동지께서는 더는 그냥 두고 보실수가 없으시여 뚜벅뚜벅 다가가시였다. 채옥은 한손을 쳐든채 멎어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지나치게 높이 쳐들리여 그이께서 다가가시는 모습을 비쳐줄리 없건만 달빛젖은 처녀의 입가엔 서서히 미소가 그려지더니 마침내 기쁨이 활짝 피여났다. 《아, 사령관동지, 사령관동지시지요?》 그이께서는 차마 대답하실수가 없었다. 너무나 밝고 순진한 그 목소리를 들으시니 그이의 가슴은 에이는듯 더 저리시였다. 《어디로 가는 길이요?》 《개울가로 갑니다.》 《개울가엔 왜?》 《김정숙동무랑 옥금동무랑 금숙동무가 빨래하러 먼저 갔습니다. 빨래감들을 걷어모아가지고 가면서 철구아주머니와 저더러만 자라고 하길래 철구아주머니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더는 물으실 말씀이 없었다. 녀동무들이 남자들의 빨래를 해주려고 이 밤중에 얼어붙은 개울가로 나갔다는것도 놀라운 일이였다. 남자들보다 더 많은 짐들을 그 연약한 어깨들우에 지고 남자들과 똑같은 로정을 똑같이 걸어온 그들이다. 오늘 철구아주머니가 그렇게 쓰러진것도 다 까닭없는 일이 아니다. 소금이 없이는 먹은것을 삭이지도 못하겠지만 녀자들은 비위가 약하여 무엇인가 먹을것이 생겨도 소금 없이는 입에 대지부터 못하였다. 그런데 녀동무들은 소금을 떨군것을 마치 자기들의 잘못처럼 생각하고 남먼저 끊어버렸다고 한다. 《개울가로 가자면 저쪽으로 가는것이 좋을터인데 왜 이쪽으로 왔소? 이쪽은 비탈이 심한데… 아마 정숙동무네들은 저 아래쪽에 있을거요.》 사령관동지께서는 차마 눈이 보이지 않는가 하고 바로 물어보실수가 없고 또 그런 눈치를 보인다는것부터가 가슴이 아프시여 이렇게 말씀하시며 처녀의 손에서 소랭이를 받아드시였다. 《나하고 같이 갑시다. 내가 데려다주지, 이걸 나한테 맡기고 날 따라오시오.》 《아이, 일없습니다. 저 혼자라도 갈수 있습니다. 소랭이를 주십시오.》 채옥은 당황하여 손을 뻗치며 재빨리 말하였으나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미 걸음을 옮겨놓고계시였다. 《물론 갈수 있지. 채옥동무는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먼곳이라도 갈수 있소. 그러나 이렇게 같이 가는것이 더욱 좋지 않습니까. 이런 후미지고 험한 길은 혼자 다니지 않는것이 좋습니다. 자 나하고 숙영지로 돌아갑시다.》 채옥은 그이의 물기어린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씀을 듣고 그이께서 이미 자기가 앞을 잘 못본다는것을 알아차리셨음을 깨달았다. 처녀는 갑자기 풀이 죽어 고개를 깊이 숙이고 그이께서 이끄시는대로 힘없이 걸음을 옮겨놓았다. 《자주 어지럽습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그이께서 조용히 물으시였다. 《아닙니다. 가끔 휘 내둘릴뿐입니다.》 《눈은 언제부터 그렇습니까?》 《댓새쯤 된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 생각했을뿐이였는데 요즘은 밤이 되면 잘 안보입니다. 그래도 일없습니다. 언제나 동무들과 함께 있기때문에… 아무 일도 없습니다.》 채옥은 별안간 무슨 용서라도 빌듯 간절하게 말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등불빛이 어룽어룽하는 숲속을 천천히 걸으실뿐 한동안 아무 말씀을 안하시였다. 《전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눈이 다 나을 때까지 혼자 숲속에 나오지 않겠습니다. 철구아주머니랑 말하는걸 들어보니 이제 소금을 좀 먹고 또 고기랑 산채랑 먹게 되면 눈은 인차 낫는답니다. 사령관동지, 다시는 혼자 다니지 않겠습니다.》 《그래 철구아주머니가 그런 일을 당해봤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진정 그 일에 마음이 쓰이시여 급히 물으시였다. 《예, 재작년에 원정부대를 따라갔다가 혼자 떨어졌을 때 한달나마 소금을 못먹고 음식도 제대로 못먹으니 눈이 보이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던게 부대에 돌아오니 인차 괜찮아졌다고 합니다.》 《그렇소? 그럼 채옥동무도 인차 낫겠구만. 참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마 철구아주머니 말이 옳을것입니다. 그 아주머니가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앞못보는 처녀의 얼굴을 자주 뒤돌아보시며 아직 먼 산발너머에서 돌아설 념을 하지 않는 봄을 안타깝게 그리시였다. 꽁꽁 얼어붙는 눈벌우를 걸어가시는 그이의 머리속에는 수많은 대원들의 지친 모습이 모두 채옥이의 형상처럼 떠오르시였다.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모두 소금을 먹일것인가… 사령부천막가까이 돌아오시니 강봉수가 아까 일기를 쓰시던 그 자리에 장작단을 무둑히 쌓아놓고 사위여가는 우등불을 피우고있었다. 《채옥동무, 여기 앉으시오. 몸을 녹이면서 그 빨래들을 말리기라도 합시다. 이렇게 말리기만 해도 한결 나을것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강봉수옆에 다가앉아 사위여가는 우등불을 후―후― 불어 살구시며 채옥이를 옆으로 부르시였다. 처녀는 다소곳이 그이곁에 와 앉았다. 이글이글 불담이 좋아지자 그이께서는 손수 채옥이의 소랭이에서 빨래를 펼쳐드시였다. 채옥은 그 눈치를 채고 질색하여 그이의 손에 매달렸다. 《사령관동지, 제가 하겠습니다. 이제는 불앞이 돼서 잘 보입니다. 사령관동지, 제발 이것만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채옥의 목소리는 울음에 가까왔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슬그머니 손을 떼고마시였다. 그것이 앞못보는 처녀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한다면 차라리 손더듬으로라도 제가 하고싶은대로 맡겨두고 그 정성스러운 마음을 지켜주는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였다. 채옥은 사령관동지께서 손을 떼시니 마음이 놓이는지 얼굴이 밝아지고 침착해져서 익숙한 솜씨로 빨래들을 불앞에 펼쳐들었다. 불앞이 돼서 이제는 잘 보인다는것이 사실일가? 그러나 구불떡하고 불길이 제앞으로 숙어져도 손을 움츠릴 생각을 않고있다가 소스라쳐 물러나앉군 하는것을 보면 낮에도 앞을 잘못보는것이 분명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처녀의 아픈 마음을 더는 건드리고싶지 않으시였다. 그래 부지깽이로 될수록 불타는 장작가치를 멀리 밀어내시고 숯불을 골라서 그앞에 펼쳐주시였다. 어느새 부지깽이에 붙어오른 불을 눈속에 비벼끄시며 생각하시니 래일부터의 행군로정은 채옥이의 눈을 위해서 더욱 불리해질것이 예견되시였다. 얼마간의 소금이라도 구할수 있는 주민지대와 점점 멀어져서 더 깊이 대밀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것이다. 적들을 깊은 눈구뎅이에 처박아넣기 위해서는 우선 아군이 먼저 그 눈구뎅이를 헤치고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비교적 행군하기 쉬운곳으로만 빠져나간다면 그것은 적에게 더 유리할것이다. 그러나 차츰 앞못보는 대원이 늘어나고 어지럼증을 느끼는 전사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대렬을 그대로 대밀림속으로 끌고갈수 있겠는가? 그들이 과연 견디여줄것인가, 지금 당장 채옥은 앞을 못본다. 이러한 전사들을 데리고 적의 큰 집체를 숲속깊이 끌어들였다가 적도 아군도 한꺼번에 쓰러지는 참담한 결과가 빚어지지 않는다고 그 누가 장담할것인가. 적들도 약화되겠지만 그만 못지 않게 아군도 손실을 낸다고 보는것이 과학적일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미 예견하고계시던 행군로정을 두고 갈수록 번거로와지는 생각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늘을 우러러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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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머지않은 곳에서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울리여왔다. 돌아보시니 으슥한 나무그늘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우등불 하나가 타오르고있다. 거기서 쇠붙이 다루는 소리가 난다. 기관총을 분해해놓고 청소를 하는 모양이였다. 그런데 기관총주인인 한태혁은 불을 쪼이고있고 재영이와 정지성이 열심히 부속들을 닦기도 하고 조립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자, 이제 기관부는 다 됐어요. 어디 한번 동작해봐요. 보라요, 내 말이 틀리나…》 재영이가 정지성의 손끝을 주의깊이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더니 다시 총신을 닦기 시작한다. 태혁은 빙그레 웃을뿐 말이 없다. 《그런데 참.》 잠시후 또 재영이가 입을 벌렸다. 《태혁동지는 정말 힘들지 않아요? 왜 말이 없어요?》 그래도 태혁은 씨물씨물 웃기만 한다. 《정말 한동무, 이야기 좀 해보오, 남보다 더 많이 뛰여다니면서도 전혀 힘들어하는것 같지 않으니 그게 이상하지 않소? 한동무 아버지가 장사라더니 한동무도 장사피를 물려받아서 그렇소?》 이렇게 웅글진 목소리로 묻는것은 정지성이였다. 《장사피?》 두무릎우에 턱을 올려놓고 시종 말이 없던 태혁이 어처구니 없다는듯 피씩하고 웃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더니 삭정이를 뚝 분질러 불속에 집어던지며 그답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세상에 장사피라는게 어디 있겠소. 또 그런게 있다한들 이 판에 무슨 맥을 추겠소. 나도 힘이 들지요. 어떤 때는 차라리 주저앉아 꼬꾸라지고싶을 때도 있단 말이우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보다 몇갑절 더 힘드는 일도 있지요.》 태혁은 도로 두무릎우에 턱을 받쳐놓더니 우릉우릉하는 불을 이윽히 들여다본다. 《그래요?》 재영이가 놀란듯이 손에 기관총부속을 쥔채 바싹 다가앉는다. 지성이도 뜻밖이라는듯 태혁의 서글서글한 얼굴을 주의깊이 뜯어본다. 아닌게아니라 그것은 놀라운 고백이였다. 세상에 무사태평하고 갈범처럼 완강해보이는 태혁이가 그러한 고통을 가슴에 품고있을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그게 뭔데요? 이렇게 눈속을 굶으면서 강행군을 들이대는것보다 더 힘드는게 뭔가요?》 잠시후 재영이가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태혁의 거쿨진 얼굴을 빤히 올려다본다. 태혁은 이윽히 재영을 마주 바라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재영이 몇살이지?》 《열여섯살이지 몇살이예요.》 《열여섯살, 그러니 곧 열일곱살이 되겠구만. 그때 내가 그만한 나이만 됐어도 내 가슴에 이렇게 피멍이 들지는 않는건데…》 태혁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삭정이를 또 뚝 하고 분질렀다. 그러면서 침울한 어조로 입을 벌렸다. 《세상이란 험한거야, 재영이도 착취라는걸 받아봤겠지, 억압도 받아보구?》 《받아보지 않구요.》 《그래 받아보니 어때? 견딜만 해?》 《견디지 못하겠으니 혁명을 하러 나섰지요.》 《그렇지, 견디지 못하겠으니 혁명하러 나섰지. 나도 그래 견디는게지 딴게 있나.》 태혁은 잠시 말을 중단하고 생각에 잠겨있더니 지성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 계급적차별이라는게… 난 그걸 겪을 때는 그것이 계급적차별인지 뭔지도 몰랐지만 참 지독하더란 말이요. 그걸 이런 행군에 대겠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채옥이를 돌아보시였다. 처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지마는지 빨래만 말리우고있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장사소리 들었지요.》 하고 한태혁은 뚝뚝 삭정이를 분질러 불속에 던지며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였다. 《곱새 한퉁구리를 틀어서 지붕우까지 힝힝 내던지댔으니까… 허지만 힘이 아무리 세니 무슨 소용 있소. 변주사라는놈은 매끼 그렇게 잘 처먹고도 빼빼마른놈인데 그 깔따구같은놈이 무슨 까닭도 없이 개화장으로 마구 조겨도 아버지는 그저 숨만 씩씩거리며 엎드려있더란 말요. 난 열두엇에 났을 때부터 그런걸 보고 암만해도 알수가 없어서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리 내내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앓는 몸이였지요. 어머니는 우리가 머슴군이고 변주사는 주인이기때문에 그런다고 대답했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어서 다시 아버지한테 물어볼 작정이였소. 아버지는 그때 산판에 가고 없었소. 변주사란놈은 겨울이 되면 머슴들이 크게 할 일이 없으니 소발구를 메워 산판에 이와실이를 보내군 했지요.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런 꼴은 매일과 같이 내 눈에 띄였소. 머지않아 시집을 간다는 누나 순이는 그놈에게 끄뎅이를 들리우고 어머니까지… 어머니가 그놈의 방에 밥상을 들고 갔다가 무엇이 못마땅하다고 떠밀치는바람에 상을 안고 마루에서 토방까지 굴러날 때, 장물이며 국물을 함뿍 뒤집어쓰고 일어나서도 그냥 용서를 빌며 깨여진 그릇쪼박들을 우들우들 떨며 주어모으는것을 보았을 때, 그때 내 어린 가슴에는 벌써 초벌 멍이 들었댔소.》 태혁이 입을 다물자 우등불자리에는 침묵이 깃들었다. 재영이도 지성이도 아까부터 닦고있던 기관총을 그대로 주무르고있는 모양 까딱 움직일줄 모른다. 채옥이는 이미 마를대로 다 마른 빨래를 아직도 그대로 쳐들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도 묵묵히 부지깽이로 우등불밑을 헤치기만 하시였다. 《그런데.》 하고 태혁은 한참이나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다가 뜨직뜨직 말을 이어나갔다. 《기다리던 아버지가 뜻밖에도 한겨울에 돌아왔소. 돌아온것이 아니라 들것에 실려왔지요.》 《아니 어떻게 됐다는거요?》 지성이가 놀란 소리로 물었다. 태혁은 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 무슨 신음소리처럼 갈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무에 치였지요. 내림받이발구길로 통나무를 실은 발구를 끌고 내려오는데 우에서 감독놈이 토장우를 돌아치다가 나무를 굴렸다는거우다. 목재더미가 쏟아져내릴 때야 무섭지요. 그 밑에 깔리는 날이면 누구든지 짓이겨지고만단 말이요. 그런데 요행 우리 아버지는 허리가 부러지기는 하였으나 목숨만은 건졌소. 사람들은 그런 천행이 없다고들 합디다. 천행이 대체 무엇인지… 하기는 일이 그렇게나 끝나고말았다면 괜찮을번도 했지요. 그런데 소가 죽었단 말이우다. 변주사라는놈이 누워있는 아버지한테 나타나서… 그놈은 열을 내며 앓는 아버지를 보고 안됐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 한겨울에 문을 활 열어젖혀놓고 문지방에 걸터앉아서 당장 소값을 물어내라는거요. 내 너무 분해서 문 닫으라고 소리치다가 오히려 어머니한테 욕을 먹었소.》 태혁은 너무나 가슴이 답답한지 한참 숨을 톺은 다음에야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신열이 너무 나서 그랬던지 이제 일어나면 갚아준다고 말을 떼고말았소. 그랬더니 그놈이 그 자리에서 빚문서를 만들어가지고 손도장을 받습디다. 그게 얼마나 되는지 난 모르지요. 아무튼 머슴군이 소 한짝값을 빚으로 졌다면 그건 애초에 갚을 마련이 없는것이지요. 그런판에 누나가 시집갈 날자가 다가왔소. 그때쯤 되니 아버지 신열도 좀 내리고 바깥출입도 하게 되였소. 집안꼴이 무슨 대사를 치를 형편은 못되였지만 어찌겠소. 이미 받아놓은 잔치날인데다 그쪽에서 몹시 바빠하는 눈치였소. 그런데 변주사라는놈이 시집을 못보낸다는거요. 가겠으면 빚을 다 물어놓고 가라는거지요. 아버지가 사정을 했으면 여북 많이 했겠소. 자기 한당대 물지 못하면 태혁이가 커서라도 갚을테니 제발 사정을 봐달라고 빌었지요. 그러나 변주사는 막무가내로 듣지 않더라오. 아버지는 이미 병신이 된것이고 이제 열둘에 난것이 언제 커서 빚을 갚겠는가. 그러니 순이가 그 빚을 져야 한다는거요. 그렇게 옥신각신 날자를 끄는데 마침 산판에서 같이 일하던 이와실이군들이 봄이 되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버지에게 문병을 왔소. 그런데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때 변주사가 소값뿐아니라 우리 아버지 치료비까지 몽땅 받아먹었다는거요. 죽은 소는 채목회사에서 처먹으면 되는것이니 회사놈들도 크게 밑질거야 없을게 아니겠소. 그러니 그통에 허리부러진 우리 아버지만 녹여내는셈이지요. 아버지는 너무 분해서 장사소리 들으면서도 평생 큰소리 한마디 못치던 어른이 앓는 몸을 끌고 변주사의 사랑으로 쳐들어갔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그 단한번밖에 못해본 반항도 너무나 때가 늦었던 모양같소. 변주사놈은 빚문서를 당장 내놓으라는 아버지를 단장으로 후려갈겼소. 아버지는 그놈의 멱살을 틀어쥐고 술상우에 멨다꽂았지만 어찌겠소. 아버지는 허리병신이 된데다가 때마침 그 자리에는 동네의 구장이며 면서기며 하는것들까지 앉아있어서 오히려 란장으로 얻어맞고 경찰에 끌려갔지요. 아버지가 없는 동안 변주사놈은 기어이 우리 누이를 끌어다가 색주가집에 팔아먹어버렸소. 누이는 깨끗하고 얌전한 처녀였지요. 그 곱던 누나는 거간군놈에게 끌려 차를 타고가다가 어느 철교우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물에 빠져 죽어버렸소. 그 소식이 우리 집에 전해졌을 때…》 태혁이는 다시 말을 끊고 한참 우등불만 들여다보더니 뚝 하고 굵은 삭정이를 분질렀다. 《어머니는 악- 하고 외마디소리를 지르더니 다시는 피여나지 못합디다. 어머니를 내다 묻은지 보름이나 지나서 아버지가 경찰서에서 나왔소. 열물을 토하도록 한달동안이나 매를 맞았다오. 그래서 아버지는 아주 페인이 되고말았소. 그때 우리 집에는 필네라는 여섯살짜리 누이동생이 또 하나 있었소. 열세살난 나는 병신이 되였지만 기골이 범같던 아버지를 부축하고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필네를 업고 류랑의 길을 떠났지요… 아버지와 필네에게 한술 밥을 얻어먹이기 위하여 내 있는놈의 문전마다에서 수모를 당하던 생각을 하면… 그 장사같던 아버지가 병신이 돼서 어린 나를 의지하고 걷다가는 내 머리를 쓸며 울던것을 생각하면… 아, 이제는 그만둡시다. 다 지나간 이야기지요. 이제는 아무리 가난하고 불쌍한 조선사람이라도 그렇게는 살지 않을거요. 우리 아버지도… 어느 겨울날, 그날도 요즘처럼 무섭게 눈보라가 치는 날이였소. 아버지는 어느 강가 다리밑에서 거적을 쓰고 누웠다가 우리 오누이를 그러안고 그냥 머리를 쓸더니 내 머리우에 눈물방울을 뚝 떨구며 말하였소. 〈태혁아, 네 저것을 데리고 어찌 살겠느냐? 그래도 혹시 살아남거든 이 애비같이 무맥하게는 살지 말아라.〉 그리고는 고목처럼 넘어져서 숨을 거두고말았소. 강가에서 산까지는 꽤 멀었소. 나는 아버지를 끌고… 난 열세살때도 꽤 큰편이였지만 축 늘어진 아버지를 업고갈 힘은 없었소. 인가를 찾아봐야 보이지도 않고 누가 도와줄것 같지도 않았소. 그래서 우리 오누이는 눈물로 볼을 얼구며 아버지를 끌고 날이 저물 때까지, 그다음 또 밤이 깊을 때까지 산으로 올라갔지요. 강가에 그대로 묻으면 흘러가버릴것 같아서… 그러다가 산중턱에 쓰러져서 죽은 아버지를 그러안고 하루밤을 잤소. 괭이도 삽도 없이 또 하루종일 언땅을 모닥불로 녹여가며 아버지의 자그마한 무덤을 팔 때, 지금도 그것만은 잊을수가 없소만 숨을 거두며 하던 아버지의 그 말이 자꾸만 귀전을 때리는것 같았소.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똑똑히 알지도 못했지요. 허지만 언땅을 후비던 손끝에 피가 흘러도 그 말이 가슴에 맺혀서… 난 아버지에 대한 사랑도 정도 그런것은 모르오. 그러나 아무리 무서운 고통속에서도 그 말만은 잊을수가 없소. 그리고 그때 아버지가 우리 장군님 같으신분을 못만난 그것만은 평생에 잊지 못할 한으로 남아있을거요. 이제는 그만둡시다. 이런 이야기가 누구에겐들 없겠소. 다 그만두고 기관총이나 마저 조립하기요.》 우등불이 또다시 구불떡하고 너울거리더니 사위가 어둠에 묻혀들었다. 불이 사위여가는 모양이였으나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고 누군지 가려들을수 없는 가는 목소리가 무엇인가 묻는듯 태혁이가 말을 이었다. 《필네말이요? 우리 아버지같은 장사가 할일없이 나가넘어지는판에 그 어린것이 살아남기를 어찌 바라겠소. 허지만 사람의 목숨이 질기기도 합디다. 나나 그 애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난 모르겠소. 사실 내 그 애를 위해서 무엇인들 안했겠소. 도적질 하나만 내놓고 세상 못할 짓을 다했지요. 그러는 사이에 그 애도 나이들어 제발로 이 세상을 걸어가게 됐지요. 내가 유격대로 떠나올 때 그애는 열일곱살이였소. 그때 내가 일하던 광산 함바에서 식모노릇을 하댔는데 벌써 4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이야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 애도 이제는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들처럼 살지는 않을거우다. 그 애도 혁명의 맛을 이미 알았으니까요. 내 그 애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근거지를 찾아들어갔을 때 본것이 무엇이였겠소. 헐벗고 굶주리며 갖은 고생을 다해온 우리들이니 근거지의 혁명주권이 우리 오누이에게 잠자리를 주고 옷을 주고 먹을것을 줄 때 그것이 왜 꿈만 같지 않았겠소. 허지만 내가 훨씬 더 놀란게 있지요. 그건 말이우다. 정말 천대와 고생때문에 볼꼴없이 된 우리 오누이를 모두 사람으로 대해주더란 말이우다. 내 태여나서 그때까지 저 더러운놈들의 세상에서 언제 한번 사람대접을 받아본줄 아시오. 그저 이놈아, 이 개같은자식아, 이게 내 이름처럼 돼있었지요. 〈동무, 참 잘왔소.〉 하고 나이 쉰가까이 된 혁명정부 회장이 내 손을 잡아주며 말합디다. 〈너무 어려워 마오. 김일성장군님께서 바로 동무같은 억압받고 천대받는 조선사람들을 위하여 이런 근거지를 꾸리시고 혁명정권을 세우셨단 말이요.〉 내 그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수야 없었지요. 하지만 나같은것을 사람으로 대해주고 나같은것을 위하여 새 세상을 세워주신분이 김일성장군님이시라는 말만은 똑똑히 가슴에 새겼지요. 내 그런 세상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까울게 없다는 결심이 그때 벌써 생깁디다. 사실 지금 우리 조선민족이 모두 전날의 이 한태혁이처럼 살고있지 않소. 그러니 우리 조선인민에게 사람답게 살 새 세상을 주기 위하여 우리가 이 고생을 참아가며 가는게 아니요. 김일성장군님께서 남패자에서 밝히신게 결국은 그게라고 나는 보는데 정비서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결국 조선인민을 해방할 책임에 대한 문제란 말이요. 우리 혈육들이 개 돼지처럼 짓밟히고 목숨을 앗기우는데 누가 우리처럼 가슴이 아파할 사람이 있으며 누가 이런 고생을 참으면서라도 유격투쟁을 더 확대해서 조국으로 나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한들 견디여내겠소. 우리 혁명이 어렵게 됐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난관이라도 뚫고 기어이 우리 인민을 해방하러 조국으로 나가야 한단 말이요. 이게 김일성장군님의 방침이라고 보기때문에 나는 주저앉을수 없단 말이요.》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일어서시여 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채옥이와 한자리에 앉아서는 차마 숨가쁜 침묵을 지키시기가 힘드시였고 또 무슨 말을 하고싶으신 생각도 떠오르지 않으시였다. 걸어가시는 눈길우에 피눈물로 얼룩진 태혁의 인생행로가 그려지시였다. 얼마나 포악한 세상인가. 태혁의 말과 같이 저 어두운 밤, 깜빡거리는 등불아래 우리 겨레의 얼마나 많은 순이들이 다가오는 불행앞에 눈물짓고있는것인가. 얼마나 많은 필네들이 일제와 지주, 자본가의 아가리앞에 연약한 알몸을 드러내고있는것인가. 얼마나 많은 태혁의 아버지같은 장사들이 헛되이 자기 힘을 원쑤를 위해 빨리우고 헐벗고 굶주려 죽어가고있는가. 가야 한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기어코 조국으로 가야 한다. 비록 앞을 막아나서는 시련과 난관이 산같고 바다 같다 한들 한태혁이가, 정지성이가, 김재영이가 불행에 우는 우리 겨레를 구원하고 변주사같은 무리들에게 보복하는 이 행군을 마다할것인가. 한태혁이가 강한것은 아버지로부터 장사피를 물려받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우리의 모든 혁명전사들이 강철처럼 굳센것은 이미 계급해방의 위대한 사상에 눈떴기때문이다. 갑작스레 허둥거리는 발걸음소리가 나서 돌아보시니 채옥이가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비틀거리며 걸어가고있다. 비슷하게 녀대원들의 도리풍방향으로 가기는 하나 통로는 아니였다. 그래서 채옥이는 또 눈우에 넘어졌다. 하지만 처녀는 또다시 일어나 눈을 비비며 허둥지둥 걸어간다. 가슴이 아프시였다. 그러나 이제 가서 다시 길을 이끌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시였다. 채옥이자신에게도 태혁이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부모들이 있고 필네나 순이 같은 형제들이 있다. 그가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지고도 기어이 이 길을 가야 하겠다는것은 그자신이 생활처지가 빚어낸 불같은 지향이다. 다만 이 복잡하고 간고한 행군로정을 그러한 눈으로써 감당할수 있겠는가. 지치고 허기진 모든 대원들에게 날개라도 달아주고싶으신 김일성동지의 가슴에 자꾸만 넘어지며 걸어가는 녀전사의 모습은 아픈 못질을 하였다. 10
소금문제는 절박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적이 바싹 뒤를 조이고있는 조건에서 주민지대로 내려갈 형편도 못되는데다 어찌다 소구분대가 적을 쳐서 다소의 식량을 해결한다 해도 소금은 구할 길이 없었다. 이튿날 숙영준비를 하고있을 때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대원들의 잠자리를 돌아보시는데 박덕산이 슬그머니 옆에 따라섰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습관적으로 사위를 둘러보시며 조용히 물으시였다. 《정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중흡동무는 뭐라고 합니까?》 《7련대를 전투에 내보내주었으면 해서 그러는 모양입니다.》 《어느 부대가 전투를 하는가 하는것이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찬성할수 없다는듯이 이렇게 말씀하시며 잠시 침묵을 지키시였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투를 해봤대야 지금 형편에서는 그닥 신통한 수가 나질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자는것입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의아쩍게 물으시며 박덕산의 기색을 살피시였다. 덕산은 잠시 주저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백바위골어방은 제가 한때 공작하던곳입니다. 그런것만큼…》 《그것은 안됩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덕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전에 잘라 말씀하시였다. 《덕산동무가 인민들속에 많은 련계를 가지고있다는것은 적들도 덕산동무를 그만치 더 잘 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이 지금 우리 뒤만 따라오는것은 내 짐작에 인민들과 우리의 련계를 끊어놓을 흉계를 다 꾸며놓았다는것을 말해주는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간부가 소금을 구하러 들어간다는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러나 사령관동지.》 그처럼 유순하던 덕산은 물러설 차비가 아니였다. 《저는 지금 오는 길에 정숙동무와 채옥동무가 사령관동지께 올릴 고기를 구워놓고 싸리재를 그러모으며 울고있는것을 보았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잠시 말씀을 못하시다가 먼곳을 바라보시며 조용히 입을 여시였다. 《덕산동무, 그 채옥동무는 소금이 없어서 음식을 못먹고 못삭이다나니 눈을 못보게 되였습니다.》 《예?》 덕산은 놀라서 되물었다. 《아마 그런 동무가 채옥동무 한사람만이 아닐것입니다. 덕산동무자신은 어떻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듬직한 덕산의 몸을 살펴보며 물으시였다. 《저야 뭘 그쯤한 일에 못견디겠습니까?》 덕산의 대답에는 당황한 기색이 력력히 어리여있었다. 그것이 김일성동지께는 차라리 가슴아프시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덕산동무에게서도 소금기가 빠졌습니다. 우리 소금을 해결하도록 해봅시다. 누구 유표하지 않은 동무가운데서 적당한 동무가 없겠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딱히 물으시는 어조는 아니면서도 생각깊은 눈매로 앞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정찰보고들을 들어보면 상당히 힘들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경수동무라면 해결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장경수동무라…》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덕산의 말을 받아외우시다가 말씀을 이으시였다. 《물론 장경수동무가 가면 문제없이 해결해올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번 장경수동무 한사람만 가지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내 더 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다음 사령관동지께서는 더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였다. 덕산도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사령부의 장풍속에서는 강봉수가 피워놓은 고깔불이 기세좋게 타오르고있었다. 불앞에 오중흡과 오백룡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였는지 사령관동지의 안색을 살펴보는 두사람의 표정은 어색하였다. 《동무들도 소금때문에 왔습니까?》 《…》 두사람은 다 대답없이 서있을뿐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불앞에 가앉으시며 눈짓으로 박덕산을 불렀다. 《학습들은 합니까?》 《아직 식사전이여서…》 오중흡이 더듬거리며 대답을 드렸다. 《오늘저녁은 우등불을 크게 피워놓고 련대별로 큼직하게 토론회를 가지는것이 좋겠습니다. 〈현정세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 이러한 제목을 놓고 토론을 붙여보시오. 마당거우에서 우리가 학습하던 문제와 이번 남패자회의결정을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결부해서 토론하도록 끌어가십시오.》 지휘관들은 얼른 수첩을 꺼내여 그이의 말씀을 받아적었다. 《동무들.》 그이께서는 은근한 목소리로 부르시였다. 《우리 어떻게 하든지 견딥시다. 우리가 견디지 못하면 조선혁명이 죽고 조선이 죽습니다.》 《사령관동지.》 세 지휘관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푹 잠긴 목소리로 그이를 불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들의 무릎을 따뜻이 쓸어주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우리가 견딜뿐아니라 우리 동무들에게 다 그런 각오를 높여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한쪽으로 문제를 또 풀어야 합니다.》 그이께서는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힘이 드는것이야 힘이 든다고 말해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과학적공산주의자이며 유물론자들입니다. 아무리 혁명정신이 높아도 완전히 굶어가지고는 닷새도 견디기 어렵고 소금을 못먹고 사는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공산주의자들이 만난을 무릅쓰고 견디는것은 굶으면서 사는 방법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혁명적방법으로 해결하기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나라의 혁명을 책임진 간부들이 소금을 구하러 삼엄한 적의 경계망속으로 들어간다는것은 혁명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사령관동지.》 하고 박덕산이 정중히 일어나서 뼈저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이제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사상의 표현입니다.》 《덕산동무, 왜 그럽니까? 어서 앉으시오. 나는 덕산동무가 결코 그런 생각때문에 그랬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어서 앉으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안색이 언짢아지시여 덕산의 무릎을 잡아당기시였다. 덕산은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앉았다. 오중흡이도 오백룡이도 불앞에 손만 내대고 고개를 한옆으로 돌렸다. 그들의 괴로와하는 모습을 보시는 사령관동지의 안색도 흐리였다. 그이께서는 기침을 깇으며 외면하시다가 바깥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으시고 서둘러 말씀하시였다. 《누가 옵니다. 얼굴들을 드시오.》 세사람 다 황급히 흐트러지지도 않은 매무새랑 바로잡으며 매우 기쁜 이야기나 나누고있은듯이 우선우선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풍자락을 들치고 들어선것은 재영이였다. 이날저녁 토론회는 지휘관들의 격동된 마음들이 전해져서인지 전에없이 앙양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였다. 적들의 숙영지가 골짜기를 하나 건너 저편에 빤히 바라보였지만 꺼리낄것 없이 우등불을 집채만큼 큼직하게 피워올렸다. 그리고는 널직이 둘러앉아 토론들을 하는데 불길의 기세가 어찌나 세찬지 그에 따라 토론하는 사람들의 입김도 달아오르는듯 하였다. 이날 경위중대의 토론회에서는 소대장 강철룡의 토론과 재봉대원 채옥이의 토론이 그중 주목을 끌었다. 강철룡는 본시 정치학습에 그닥 열성이 높지 못해서 마당거우학습때부터 자습반에서 자주 말밥에 오르군 하였다. 직접 사령관동지께 불리여가서 학습담화를 당한것만도 몇차례되였다. 그렇기때문에 강철룡이라 하면 무서운 싸움군이라는 인상으로 통했지 그가 그 어떤 선동연설같은것을 할수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삼단같이 너울거리는 불빛아래 우람찬 몸집을 불쑥 솟구어 일어선것이였다. 이날저녁 학습회는 처음 한동안은 다소 리론적인데로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어 뜬 감을 주었었는데 강철룡의 뜻밖의 열변으로 훌 방향을 돌려꺾게 되였다. 그는 우선 김일성동지의 로작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의 중요대목을 뜬금으로 내리외워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어놓았다. 남패자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학습시간이 되면 될수록 뒤자리에 가앉으려고 애쓰던 그였다. 그런 그가 힘겨운 동기행군의 길에 올라 어려운중에도 어려운 후위임무를 줄곧 맡아오면서 시련의 눈보라와 전투로정에 그리도 힘들어하던 정치학습의 높은 봉우리를 마침내 점령하고야만것이였다. 《〈우리 조선민족은 생사존망의 위기에 봉착하였다.〉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찍어서 말씀하시였소. 말하자면 우리 조선이 아주 망하게 됐단 그말이요. 그런데 우리 민족의 앞길을 열어제끼고, 일본제국주의를 때려엎고 우리 로동자, 농민들을 해방해야 할 이 숱한 과업을 누가 해결하겠소? 이 무거운 임무가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어깨우에 놓여있단 말이요. 그런데 우리가 이 눈구뎅이에 주저앉을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럴수 없소. 우리가 주저앉으면 우리 조국은 영영 망한단 말이요. 조국을 우리는 다시 보지 못하게 된단 말이요.》 피를 토할듯이 부르짖던 그는 적들이 밤낮없이 추격해오지만 그까짓것은 이 강철룡이 혼자서라도 능히 때려엎을수 있다고 하면서 기관총을 높이 쳐들었다. 그의 호소에 화답하는 유격대원들의 함성이 메아리를 일으키며 숲을 울리였다. 채옥은 강철룡이와 전혀 다른식의 토론을 하였다. 오목오목 곱지는 못해도 수더분한 마음씨 그대로 시원하고 든든해보이던 그는 나날이 수척하여가다가 요즘에는 붓기까지 하였다. 그런 그가 남의 신세를 안지려고만 하는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동무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가 애쓰며 어두운 밤눈으로 숙영지를 돌아다니면서 발싸개며 신발을 걷어다 말리는 정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차라리 아프게 했었다. 채옥은 원래 목청이 굵고 아무데서나 큰소리로 떠들기를 좋아했지만 이날 세차게 타오르는 우등불앞에 일어서서는 딴 사람처럼 은근하고 차분하게 말하는것이였다. 《우리가 조국에 가면 그때는 봄도 머지 않을거예요.》 채옥은 두손을 가슴우에 모두어잡고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먼 허공을 더듬으며 속삭이듯이 말하였다. 《겨우내 추위와 굶주림에 떨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들이 유격대가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강철룡의 열변이 힘을 자아냈다면 채옥의 속삭임은 눈물을 자아냈다. 그러나 열렬한 사랑이 방울마다에 배인 그 눈물이 또 얼마나 큰 불을 간직하고있는것인가. 채옥은 더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우리 부모들은 고생하고있어요. 힘이 장사같은 아버지들도 왜놈들과 지주, 자본가놈들때문에 억울하게 거리에 쫓겨나 헤매고있고 그놈들에게 매를 맞고있어요. 그리고 고운 처녀들이 물에 빠져죽고있어요. 또 불쌍한 우리 조선의 어린이들을 생각해보세요. 그 애들을 누가 돌봐주겠어요. 불행한 우리 겨레들이 모두 우리 혁명군을 믿고있지 않아요. 온 조선이 오직 김일성장군님 한분만을 바라고 살고있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가 좀 고생스럽다고 주저앉으면 저 불쌍한 우리 부모들과 어린이들이 다 어떻게 되겠어요. 모두 참고 견디자요. 동무들, 우리 어떻게 하든지 불행에 우는 우리 겨레와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조국으로 가자요. 나는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동무들의 씩씩한 발걸음소리와 흥겨운 노래소리만 들으면 천리라도 만리라도 달려갈수 있어요.》 이날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밤이 깊어서 한태혁을 부르시였다. 《우리는 지금 7도구치기를 향해가고있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고깔불앞에 지도를 펴놓으시고 말씀하시였다. 한참 재미있게 자다가 불리여온 태혁은 아직 영문을 몰라 말없이 그이의 말씀을 듣기만 하였다. 《한동무가 이런 공작을 힘겨워하기에 내가 며칠동안 주저하고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래도 주동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것 같습니다. 동무도 오늘 채옥동무 토론을 들었지요?》 《들었습니다.》 태혁은 눈이 커다래져서 필요이상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우리 동무들에게 소금을 먹여야 하겠습니다. 적들을 막연하게 쳐서 소금이 나지기를 기다릴 형편이 못되였습니다. 그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동무가 부대를 앞질러가서 이 12도구나 수정골어방의 인민들과 련계를 맺고 소금을 구하여가지고 우리와 만났으면 합니다.》 태혁의 눈은 빛나올랐다. 《사령관동지, 그것은 문제없습니다.》 《문제가 없다니? 어떻게?》 김일성동지께서는 의아쩍게 되물으시였다. 《유성촌에는 정지성비서동지의 아버지가 살고있습니다. 거기 가서 좀 구해달라고 해서 돌아서면 8도구어방이나 7도구치기에서 문제없이 부대와 만날수 있습니다.》 《허허허.》 사령관동지께서는 어이가 없어 웃으시였다. 《나는 한동무에게서 이처럼 시원한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예?》 태혁은 커다란 눈을 겁석거리며 사령관동지의 안색을 살펴본다. 《태혁동무,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우리에게 소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것은 동무도 잘 알고있습니다. 우리가 소금을 구하자면 인민들밖에 기대를 걸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적들은 우리를 군사적으로 포위하고 추격할뿐아니라 우리의 혁명적인민들을 우리와 갈라놓기 위해서 더 무서운 정치적포위를 치고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동무가 문제를 이처럼 식은죽먹기로 생각하고 들어갔다가는 아마 작년처럼 싸움이나 한바탕 벌려놓고 돌아오기가 쉬울것 같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그런 점에 대해 걱정하는 동무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제야 태혁은 7련대초소에서 돌아오던 남패자의 달밝은 밤에 그이께서 깨우쳐주시던 말씀을 똑똑히 상기하였다. 그리고 부대의 운명이 걸려있다고도 볼수 있는 이 어려운 공작에 자기를 보내시려는 사령관동지의 깊은 뜻을 짐작하였다. 태혁은 사령관동지의 설명을 듣고서야 일이 간단치 않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앉아있다가 이번에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전 처음에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불쑥 대답했습니다만 이제 잘 생각해보니 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할수 있을것 같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고 되물으시였다. 《꼭 해보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정지성동지의 아버지를 찾아가겠습니다. 집만 잘 알아가지고 가면 들어가는것은 문제가 없을것 같습니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사령관동지께서 이번 회의에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전하겠습니다. 그것을 들으면 아무리 완고한 로인이라고 해도 조선을 구하자는 혁명군을 도와줄것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거기에 힘을 얻은 한태혁은 자신만만한 투로 말을 계속하였다. 《그다음 로인을 통해 동네형편을 료해하고 믿을수 있는 인민들에게 정치사업을 하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사령관동지께서 저를 이 공작에 파견해주시려는 뜻을 짐작합니다. 꼭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정치사업의 방법으로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됐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인민대중의 각성을 불러일으키는것외에 지금 우리에게 딴 방법은 없고 또 이것이 가장 힘있는 방법이라는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계속하여 공작과정에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적문제들과 준비에 대해 낱낱이 일깨워주시고 떠나기전에 다시한번 만날 약속을 하신 다음 그를 돌려보내시였다. 그런데 태혁이가 돌아가서 한시간도 못되여 정지성이가 찾아왔다. 그때까지 김정숙동지이가 가지고 돌아오신 작년도판 《신동아》를 읽고계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어줍은 태도로 들어서는 정지성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시였다. 《신동아》의 한 론문에서 민족개량주의로 굴러떨어진 리아무개라는 작자는 고대조선과 일본의 문화적련계를 고고언어학적으로 풀면서 일제의 배신적이며 강도적인 본성을 규탄하는 응당한 론리적귀결을 억지로 외면하고 오히려 거기서 《동조동근》의 력사적근원을 찾으려고 가소로운 붓장난을 하고있었다. 만일 재영이라도 잠에 곯아떨어지지 않고 옆에 앉아있었다면 그이께서는 격분을 참지 못하시고 무엇인가 말씀을 하셨을것이였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마 부대내에서 력사문제에 대해 제일 리해가 깊다고 보아야 할 정지성이가 나타난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라고 할수 있으시였다. 그러나 다 지새여가는 이 깊은 밤에 그가 스스로 나타났다는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서 이리 와 앉으시오.》 바깥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 바재이다가 들어온 모양으로 가뜩이나 여윈 얼굴이 퍼렇게 얼어서 주글주글해보이는 지성의 싸늘한 손을 잡아 불곁으로 이끄시며 사령관동지께서는 다시 물으시였다. 《어떻게 이 밤중에 찾아왔습니까?》 《래일아침에 오자고 했는데 또 행군이 있을것이고… 어쩐지 잠들수 없어서… 그런데 사령관동지께서 쉬시지 않으시는것 같길래…》 정지성은 사령관동지께서 따라주시는 더운 물잔을 매만지며 더듬더듬 말하였으나 어느 한마디도 맺지를 못하였다. 한참이나 주의깊이 들어서야 결국 그가 찾아온것은 자기를 소금공작에 내보내달라는 청을 드리기 위한것임을 아시였다. 《한태혁동무와 토론을 하고 왔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신중한 빛으로 물으시였다. 《아닙니다. 한동무가 우리 집 형편을 묻길래 다 대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주겠다고 약속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동무는 잠들어버렸습니다. 저는 편지를 쓰자고 앉아있었는데 저의 아버지의 완고한 성격으로 보나 제 립장으로 보나 기어이 제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워낙 허약한 체질에다 최근의 시련과정에 더 약해져서 불면 날아갈것 같은 수척한 몸매와 이번 행군과정에 우묵한 눈확이 더욱 꺼져들어간 지성의 근엄한 얼굴을 이윽히 바라보시였다. 《정동무, 내가 이 문제를 놓고 생각하면서 왜 동무생각을 안했겠습니까. 동무의 말은 리치상 옳고 또 동무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것이 당연하다고도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서서 딴 문제도 생각해야 합니다. 동무의 개인의 립장에서 볼 때는 이것이 한 지식인의 량심에 대한 문제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볼 때는 우리 부대의 전투승패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령관동지, 저도 그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과연 이 과업을 맡아나서서 해결할수 있겠는가 하고 따져보았습니다.》 《그래 따져보니 어떻습니까?》 《제가 능히 할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동무는 지금 홀몸으로 대오속에 섞여 행군하는것도 힘겨워하고있습니다. 정동무의 각오정도가 높으니 그렇지 사실상 동무의 몸은 이미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 몸으로 부대를 수백리 먼저 앞질러가서 위험한 공작을 하여 무거운 소금을 몇말씩 지고 홀로 부대를 찾아올수 있단 말입니까?》 정지성은 사령관동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움푹 패워들어간 눈에 불타는 열정이 어려있었다. 《사령관동지, 다른 길도 있지 않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이야기가 간단히 끝나면 다시 보실 작정으로 들고계시던 《신동아》를 한쪽으로 밀어놓으시고 정색해서 물으시였다. 《다른 길이란 어떤것입니까?》 《다른 길은.》 하고 정지성은 잠시 갑자르더니 말하였다. 《전혀 막연한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무들이 이처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것을 보았을 때 저는 인간을 위대한것으로 보시고 그힘에 의거하여 혁명을 밀고나가시는 사령관동지의 사상의 깊이를 어느정도 깨달은듯 합니다. 저도 인간입니다. 저도 아름답게, 힘차게,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인간입니다. 저에겐들 왜 기적적인 힘이 없겠습니까. 저는 제가 인간이라는것을 믿습니다. 저도 결코 추악한 인간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령관동지, 인간이 위대하다는 사령관동지의 명제는 저에게도 해당되여야 할것이 아닙니까.》 정지성의 눈에는 핑하니 물기가 괴여올랐다. 유격대오에 인테리들도 많았지만 평소에 그처럼 과묵한 인테리는 드물다고 생각해오신 정지성이였다. 그런 그가 눈물을 흘리며 불을 뿜듯 열변을 토하는데는 놀라지 않으실수 없었다. 《지성동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진정해서 피차 찬찬히 생각해봅시다.》 사령관동지께서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것을 느끼시며 저쪽으로 외면하시고 말씀하시였다. 《나도 공상을 좋아하고 랑만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정지성동무도 겉보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이 동기행군자체가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검토하는 과정이라고도 볼수 있습니다. 나는 정지성동무의 말을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실무적인 문제가 있는것만큼 결론은 래일 짓기로 합시다. 그리고 오늘저녁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와 력사문제에 대해 좀 토론해봅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정지성의 손을 가볍게 눌러주시고나서 접어놓았던 잡지를 다시 펼쳐드시였다. 《그래 정지성동무는 영덕에 있다는 우두산이라는 산을 압니까? 그 산 이름이 고어로는 고즈산이라고 불리웠는데 저 아마데라스오오미가미의 동생인 스사노오노미꼬도라는 귀신이름이 바로 고즈노미꼬도라는것입니다. 그래서 조선과 일본이 동조동근이라면 지금도 우리 후방밀영이 있는 우두정자도 소대가리라는 뜻인데 이것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즉 이자는 자칫하다가는 동양 3국을 모두 〈동조동근〉으로 만들 작정이 아닙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정지성을 력사의 세계에로 이끌어들이시기 위해 열정을 담아 말씀하셨지만 지성은 종시 자기대로의 흥분에서 깨여나지 못하여 이야기는 자주 동강났다. 이튿날 사령관동지께서는 행군도중에 한태혁과 정지성을 함께 부르시였다. 두사람 다 자기대로 출발준비를 갖추고있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들 두사람으로 짝을 무어 함께 공작에 내보내시였다. 11
아버지의 집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유성촌 막치기 수정골 뒤산에 해는 저물고 하얗게 눈을 쓴 산비탈의 귀틀집에서는 따뜻한 불빛이 새여나왔다. 마을이라야 여기저기 몇집씩 널려있는 산재부락인데다 날씨까지 차고보니 들이고 행길이고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 안했다. 그러나 지성은 지금 장거리 어느 객주집에서 기다리고있는 한태혁과 단단히 약속을 한만큼 참을성있게 날 저물기를 기다렸었다. 그런데 해는 지고 어둠이 눈덮인 골짜기를 다 삼켜버렸건만 그의 발길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네해전 지성은 바로 이 무덤옆 노가주나무밑에서 이렇게 아버지의 집을 바라보았었다. 그때도 산에 짓눌린것 같은 자그마한 귀틀집의 문턱은 가슴을 치받치듯이 높게 느껴졌었다. 가산을 다 불어먹고 징역살이까지 하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맞이해줄것인가. 더러운놈에게 시집이라고 갔다가 버림을 받고 돌아왔다는 누이와 그 누이를 잡고 무시로 울기를 잘한다는 어머니는 또 이 아들을 어떻게 맞아줄것인가. 네해전 그때 그리도 발목을 무겁게 잡아누르던 생각은 이제는 없다. 그때는 아무리 그것이 가슴아픈 생각이라 해도 자기 한개인의 문제였다. 그러나 오늘의 이 걸음은 자칫하면 조선혁명전반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중대한 걸음이다. 만일 아버지가 그때처럼 완고한 립장을 고집한다면 부자간의 의에 금이 가는것은 말하지 말고라도 사령관동지앞에 그처럼 굳게 다진 맹세를 실천할 길이 막히고마는것이다. 이제 아버지를 만나면 형무소 면회구에서나 옥암동으로 떠날 때처럼 거칠은 마음이 아니라 김일성동지께서 거느리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어엿한 전사로서 아버지의 악마디진 손발과 함께 굳어진 그 《생활의 신조》를 자식으로서의 억누를수 없는 련민의 정과 확고부동한 혁명의 신조로써 녹여 그 불행의 옹이를 뽑아던질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아버지의 귀틀집문턱은 아직도 지성에게는 서뿔리 넘어서기 어려운 운명의 문이였다. 낮에 유성촌에 도착한 한태혁과 그는 장거리와 가게방들을 돌면서 이곳에 왜놈들의 큰 부대가 둥지를 틀고있고 특무, 밀정들이 수많이 박혀있다는것을 알았다. 소금을 파는 가게방을 몇군데 들려봤으나 까근까근 따지며 몇홉씩 파는데 낯선 사람이 한꺼번에 많은 량의 소금을 팔라고 하면 당장 신고가 될것이 뻔했다. 우선 뜨내기행세를 하고 거리로 나다니는것부터가 조심스러웠다. 한태혁은 당장 수정골로 갈것을 권하면서 아버지와 절대로 다투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전처럼 아버지를 노엽혔다가는 일이 랑패라는것이였다. 하기는 지성이 보매도 다른 길로 소금을 구하기는 거의 불가능할것 같았다. 그러니 아버지와 순순히 이야기를 해서 아버지의 힘을 빌어야 하겠는데 과연 아버지가 자식의 이 안타까운 마음을 리해해주겠는지… 정지성은 해저물기전에 수정골뒤산 무덤가의 노가주나무그늘에 몸을 숨기고 앉아 빤히 바라보이는 집의 동정을 지금까지 살피고있었다. 몇해사이에 허리가 굽고 쪼그라들어 먼눈에도 퍽 작아져보이는 어머니가 한번은 무슨 낟알을 가달박에 담아가지고 나와 토방에서 한참 키질을 하다가 들어갔고 또 한번은 버치의 물을 수채에 쏟고 들어갔다. 골목길에서 이웃녀인이 세차례 찾아왔다가 잠간씩 지체하고 돌아갔는데 모두 바가지나 소랭이에 콩나물같은것을 담아들고 나갔다. 그러는것으로 보아 어머니는 아마 콩나물장사나 숙주나물장사를 하는 모양이였다. 해가 설핏해졌을 때 누이가 커다란 함지박을 끼고 돌아왔다. 누이는 서른고개를 갓 넘어섰는데 벌써 중늙은이티가 풍기였다. 누이가 끼고온 함지박을 보니 콩나물이나 숙주나물을 기르는것은 어머니이고 내다 파는것은 누이인것 같았다. 누이는 달구지저고리를 벗고 나오더니 인차 동자질을 하는 모양으로 자주 정지문을 열고 바깥으로 드나들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모습은 얼씬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때 미리 들어가 어머니와 누이를 만날것인가? 그들의 고생스러운 생활상을 가만히 엿보고있노라니 웬일인지 눈굽이 달아오르면서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앙상한 어깨들을 쓸어주고싶었다. 그러나 아직 이웃사람들이 나타날수도 있고 혹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형편이라 날 저물기를 기다렸다. 해가 저물어서야 아버지는 말달구지를 끌고 동구길에 나타났다. 웬 달구질가? 후치령밑에 살 때처럼 또 나무를 팔러 다니는것이나 아닐가? 그렇다면 말은 어디서 났으며 또 달구지는 웬것일가? 아버지는 풍뎅이를 푹 내리쓴 머리를 깊이 수그리고 팔짱을 끼고 앉아있더니 달구지가 집앞에 이르자 훌쩍 뛰여내렸다. 여전히 장대한 기골에 펄펄한 기상이였다. 지성은 그런중에도 마음이 놓이였다. 아무리 세상이 험해도 제오륙만 아끼지 않으면 살길이 열린다는 아버지의 신념이 말없는 가운데서 강하게 안겨져오는 형상이였다. 날이 저물자 바람이 터졌다. 밤하늘은 높이 개였는데 별빛이 차겁게 여물어가고있다. 밤도 어지간히 깊었다. 지성은 반나절이나 한곳에 앉아 동네와 집안동정을 살피느라 몸도 얼고 어지간히 오금도 저려났다. 그는 가까운 집들의 불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하자 마음을 다지고 몸을 일으켰다. 지성은 소리없이 정지문가에 붙어서서 잠시 귀를 기울였다. 두런두런하는 아버지의 말소리가 울리여나온다. 《…나올 때가 더 심하더라. 저 다양개촌의 정술이 애비는 몸뒤짐을 안당하겠다고 하다가… 이런 말세에 리치가 통하지 않느니라…》 잇달아 누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몇마디 울리였으나 말뜻은 가늠할수 없고 어머니가 푸념비슷한 소리를 하면서 조심하라고 당부하는것이 알려졌다. 《조심은 무슨놈의 조심, 내가 내 몸 놀려서 벌어먹는데 제놈들이 무슨 시비를 건단 말이야.》 아버지의 말소리는 여전히 걸걸하다. 어머니와 누이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잠시 주저하던 지성은 조심스럽게 정지문을 잡아당겼다. 소리 안나게 연다는것이 삐걱하고 큰 소리를 내였다. 《그 누구요?》 지성이가 미처 들어서기도전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지성은 아무 말없이 등디목에 나섰다. 달구지에 쓸것인듯 피곁으로 바를 들이고있던 아버지는 일손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본다. 마주앉아 빨래를 손질하고있던 어머니와 누이도 의아쩍게 쳐다본다. 지성은 천천히 성에 불린 개털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추위에 퍼렇게 언 아들의 여위고 고집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이게 누구냐? 지성이가 아니냐?》 이렇게 소리치며 허둥지둥 정지목으로 먼저 달려나온것은 누이였다. 그제야 어머니도 벌떡 일어났다. 삼모자가 안고 돌아가는것을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고있던 아버지는 허리를 잠간 들썩하다가 돌아앉아 곰방대를 붙여물었다. 지성은 아버지앞에 나갔다. 《아버지, 그새 편안하셨습니까?》 정귀하로인은 아들이 절을 하자 기침을 톺으며 다시한번 무릎을 돌려 꺾어앉았다. 《쯧쯧 성미두…》 하고 어머니가 혀를 차더니 들으란듯이 날카롭게 말했다. 《어서 이리 오너라, 손발이 꽁꽁 얼었는데 어서 몸부터 녹여라.》 어머니는 아들을 아래목에 끌어내려다 앉혀놓고 연신 손발을 쓸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혀를 차고 옷고름을 눈가에 가져가군 하였다. 누이는 서둘러 정지에 나섰다. 밤중에 연기를 피우는것이 재미없을듯 하여 말렸으나 한사코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시종 말이 없었다. 바를 들이던 자새도 웃목에 밀어놓고 올방자를 이쪽저쪽 고쳐틀면서 담배만 피워댔다. 구수한 토장국냄새가 방안을 채우고 김이 서려올라 정지문에 새롭게 성에가 내불리면서 등대의 불빛을 흐려놓았다. 보매 집안은 비좁고 어디라없이 침침해보였으나 아버지의 옹이박힌 주장을 대변하듯 무엇인가 많았다. 집안의 세간붙이 모두가 단간귀틀방에 다 모여들고보니 벽에 주렁주렁 굵고 가는 바줄도 걸려 있고 새끼줄타래며 쇠줄퉁구리, 마철, 낫, 호미 따위가 걸려있는가 하면 선반우에는 크고작은 함지박에 항아리등속이 덧포개져있는데 함지박은 꿰매고 항아리는 회가루땜을 한것이 눈에 띄였다. 실겅우며 해묵은 반닫이우에도 무엇인가 올망졸망 쌓여있다. 마치 부엉이네 둥지속 같다. 군색스럽고 답답한 그러면서도 근하고 고집스러운 살림군의 완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방안이였다. 저녁상을 물린후 지성은 다시 아버지앞에 나앉았다. 《그래 이제는 아주 왔느냐?》 아버지의 첫물음을 통해서는 그 마음속을 가늠할 길이 없었다. 서울에 함께 따라가 물지게를 져서 학비를 벌어댈 때도 살뜰한 말이란 한마디도 할줄 모르던 아버지였다. 《아직 아버지슬하에 아주 돌아오지는 못했습니다.》 지성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로인은 힐끔하고 아들을 돌아보았다. 천천히 흩어져가는 담배연기속에서 진한 눈섭이 꿈틀하였다. 그가운데 흰것이 몇대 삐여져오른것이 지성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아버지도 늙으셨구나.) 이렇게 생각한 지성은 다시 외면해버린 아버지의 추위와 해빛에 탄 거칠은 청동색얼굴을 바라보며 한동안 입을 다물고있었다. 《나도 네가 돌아오는것이 달갑질 않다.》 아버지는 벽쪽으로 외면해 앉은채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여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슈? 4년만에 돌아온 자식앞에서…》 어머니가 한팔을 내짚고 앉으며 참견을 하였다. 어머니로서는 놀랄만큼 대담한 행동이였다. 일생을 드센 남편의 손아귀아래 오돌오돌 떨며 살아온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였기에 더구나 아버지의 분노를 자아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라 폭발적으로 부르짖었다. 《닥치지 못해! 시라소니를 낳아가지고도 부끄러운줄을 모르구… 지금 이 어방에 왜놈군대가 한벌 덮였단 말야, 한벌 덮였어. 고분고분하지 않는것은 엿장사도 끌어가는판인데 또 못난 자식 옥바라지 안한다고 울고불고 할 작정이야. 그래도 무엇을 해놓은게 있다면 또 몰라라… 흥!》 로인은 흰 장미를 푸들거리며 소리치더니 마감엔 코웃음을 탁 치며 돌아앉았다. 지성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었다. 여전히 완고하고 여전히 괄괄한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서뿔리 한마디 했다가 벼락을 맞자 찔끔해서 돌아앉더니 또 옷고름을 눈가에 가져갔다. 누이도 벽쪽으로 돌아앉는품이 눈물을 흘리는 모양이다. 《아버지.》 하고 지성은 침착하게 말하였다. 《저도 이제 오면서 이곳 형편을 대충 알아보았습니다. 이곳 형편이래야 별다른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나라 어디를 가나 경찰과 감옥, 군대가 살판치고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다시 잡히는 날이면 그전날처럼 아버지가 가산을 다 기울여 옥바라지를 해주신다 해도 살아날 길이 없을것입니다.》 아버지는 한번 눈을 치떠보았을뿐 담배대만 빨아댄다. 지성은 말을 이었다. 《제가 집에 돌아오지 못한것은 그놈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그 왜놈들을 우리 나라 강토에서 내몰지 못했기때문입니다.》 《이놈아!》 정귀하로인은 담배대로 재털이를 딱 치며 마주 돌아앉았다. 《사람이란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 내 일상 내 자식이면서도 네놈을 어줍잖게 보아온것이 바로 그때문이다. 네가 그래 처음에는 사상가입네 하고 돌아다니고 다음은 또 독립입네 하고 나돌아다닌끝에 이루어놓은것이 무엇이냐? 네가 만약시에 그럴 재목이 돼서 큰일에 한몫 맡아나섰다면 내 네놈의 옥바라지가 아니라 업고라도 다닐터이다. 허지만 네 한다는 수작이 어느한마디나 씨가 박힌 소리가 있느냐, 옛날에 장사소리 듣던 독립군들은 다 물러나앉고 약수선생같은 고명한 선생도 한갖 산골늙은이로 여생을 마쳤는데 네따위가 중뿔나게 나서서 독립운동을 한다니 그게 누구를 우습게 보고 하는 수작이냐.》 아버지와 아들의 견해는 4년전 지성이가 옥암동으로 떠날 때와 같은 수준에서 대립되였다. 지성은 오늘에 와서 생각해볼 때 당시의 아버지 견해는 일련의 타당성이 없지도 않다고 너그러이 생각하였다. 아닌게아니라 그때 아들의 젊은 가슴에 불타고있는것이 비록 깨끗한 애국심과 정의감이였다 하더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아버지의 관점에서 볼 때는 지팽이로 기울어지는 집을 뻗치려는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것이다. 게다가 아버지가 아는 유명한 사상가란 읍내에서 신문지국을 하던 한룡호같은 인간이였다. 이른바 《맑스머리》를 하고 루바쉬까를 떨쳐입고 돌아다니며 《만국의 프로레타리아》가 어찌고어쨌다고 떠벌이던끝에 류치장신세를 두어번 지더니 기생첩을 하고 나앉아버린 그런자들을 아버지이상으로 지성이도 미워하였지만 아버지는 행세식맑스주의자들의 행장에서 곧 자식의 미래를 내다보았던것이다. 원체 아버지의 눈에 비친 아들은 사상가도 독립지사도 못되였다. 그의 뿌리깊은 생활의식에는 사상가나 독립운동자라 하면 우선 보통사람이 아니여야 하였다. 한룡호는 돈이라도 있고 독립군들은 힘이라도 있어서 제멋에 겨워 돌아치다가 나앉으면 그만이겠지만 정귀하네 집안은 그런 엄청난 외도를 감당할 밑천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때문에 제 집안이나 제 자식이 그런 길에 나선다는것은 못난 자식이 류행을 따라 개화장을 짚고 개화경을 끼는것과 같은 쓸개빠진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집안에 들어와서나 밖에 나가서나 량순하고 내성적인 지성은 다른 모든 견해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혹은 검질기게 반발할수 있었지만 자기에 대한 이러한 류의 태도에 대해서는 민감한 자존심을 억지로 달래며 참을수밖에 길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조선인민혁명군사령관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펴나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자존심때문에가 아니라 바로 혁명을 위해서 아버지의 견해를 두고 옳고 그름을 똑똑히 밝혀야 하였다. 지성은 서둘지 않고 아버지의 말을 주의깊이 들었다.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돌아온 아들에게 너무 모진 소리 한것이 스스로도 언짢았던지 아래목을 향해 랭수 한그릇을 청해 마시고 저쪽으로 돌아앉았다. 잠시 담배를 빨며 침묵을 지키고있던 아버지는 다시 뜨직뜨직 말하기 시작하였다. 《네 보아 짐작할테지만 이 애비는 달구지군이 되였다. 누구는 날더러 달구지를 끌고다닐것까지야 뭐 있느냐고 말하더라만 나는 내 분수가 달구지군신세를 넘어선다고 생각질 않는다. 내 근본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그러기에 나는 내 자식을 공부를 시키면서도 내 집에서 무슨 감사나 군수가 태여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난들 왜 제자식 잘되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허지만 사람이 제 근본을 어찌 버릴수가 있느냐말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드놀지 않는 그만큼 건전한 생활의식이기도 하였다. 오금에 바람이 찬 인간들을 생리적으로 미워하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 건전하다는 생활의식은 바로 아버지의 완강한 보수성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였다. 《아버지.》 지성은 부드럽게 아버지를 불렀다. 《제가 아버지 뜻을 받들지 못하는것은 결코 감사나 군수가 돼보겠다는 허황한 꿈때문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오늘 이렇게 어렵지 않게 살림을 꾸려놓으신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나라를 잃은 우리 겨레가 저마다 이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또 아버지나 어머니, 누이의 평생에 걸치는 로고를 생각할 때 이것이 어디 공정한 생활이라고 볼수 있습니까. 또 제가 비록 한 일은 없다 하더라도 어쨌든 동생이 나라를 찾자고 뛰여다닌것때문에 누이가 저렇게 새파란 나이에 생과부로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이 공정한 세상이라고 볼수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내 뭐라더냐? 일찌감치 제 분수를 알고 채심을 했더라면 집안꼴도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것 아니냐? 네 누이 신세로 말하면 그것은 별문제다. 그 용수란놈이 네 말과 같이 아직 나를 묶으러 오지는 않았다만 왜놈을 등에 업고 무슨 협잡군노릇을 한다더라.》 그것은 지성에게 결코 뜻밖의 소식이 아니였다. 한때 처남매부의 인연이 맺어지기는 했지만 일본에 건너가있었던 관계로 한번도 만나본적 없는 그 인간을 그는 처음부터 왜놈의 개로 전락할 인간이라고 보고있었다. 《집문제도 그렇습니다. 제가 주저앉아있다고 우리 집이 굉장히 잘살게 되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개가 되지 않는 이상 누이는 어차피 그런 인간과 살수 없고 아버지는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놓고 이 세상을 살아갈만큼은 살림을 장만하지 못합니다.》 《그래, 그러니 네가 그것을 바로잡겠단말이지? 네가?》 아버지는 다시금 담배대로 재털이를 두들겼다. 《왜 저 하나뿐이겠습니까? 저는 큰 바다에 비긴다면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놈을 내몰고 이 세상을 뒤집어엎어 가난한 인민들을 구원하자는 혁명가는 무수히 많습니다.》 지성의 확신에 찬 말에 귀하로인은 어이가 없는지 잠시 멍하니 바라보더니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하였다. 《철없는 소리 작작해라. 네놈은 세상을 그렇게 돌아다녔다는놈이 귀도 없고 눈도 없느냐? 내 오늘 장거리에서 듣자니 저 유격대의 큰 간부 한분이 류수하근방에서 싸움끝에 운명을 했다더라. 왜놈들이 이름만 듣고도 부들부들 떨던 무서운 인물이라더라. 그런 큰분들도 왜놈의 군대에 둘러싸여 신고를 하다가 군사를 다 잃고 최후를 마쳤다는것이다. 들리는 말에는 그 몸에서 칡뿌리만 나왔다고 하더라. 그런판에…》 《아버지, 그게 정말입니까?》 지성은 한순간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아버지의 무릎을 잡아 흔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라고 내가 빈 말을 한단 말이냐. 지금 거리에는 별의별 흉한 소문이 다 돌아간다. 저놈들이 떠드는것을 보면 지어 김일성사령관께서 어찌되셨는지 알수 없는 형편이다.》 지성은 고개를 쳐들었다. 적들이 갖은 요사스런 소문을 퍼뜨려 인민들의 마음을 불안속에 몰아넣고있다는 말은 부대에서도 들어왔지만 제귀로 직접 그 말을 듣고보니 치가 떨리였다. 《아버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고 지성은 부르짖었다. 귀하로인은 아들의 단호한 말에 놀란듯이 고개를 돌려 마주보았다. 지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건재하시며 겨레들을 건지기 위하여 다시 조국으로 나오고계십니다.》 《네 그것을 어떻게 알고 그러느냐?》 로인은 무엇인가 마치는 생각이 있어 주의깊이 아들의 표정을 살폈다. 지성은 잠시 주저하다가 어차피 터놓아야 할 일이므로 마음을 다지고 엄숙하게 말하였다. 《제가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있습니다. 저는 장군님의 전사입니다.》 《무엇이 어째!》 정귀하로인은 한쪽무릎을 일으켜세우고 나앉더니 아래목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와 누이도 놀란듯이 일손을 멈추고 이쪽을 지켜보고있다. 로인은 목소리를 낮추어 숨가쁘게 물었다. 《이 어찌된 일이냐? 설마 지어낸 말은 아니겠지? 그래 김일성장군님께서 건재하시다는것이 적실한 말이냐? 네가 그분의 수하에서 싸운다는것도… 그럼 전번에 네가 왔을 때도 바로 그분의 령을 받고 왔더란말이냐?》 아버지의 엄하고 침울한 눈빛은 간데 없고 그 나이에 이르도록 한번도 본적 없는 활달한 기운이 넘쳐났다. 한꺼번에 퍼붓는 질문에서 마음속 심연에 간직하고있던 아버지의 민족혼을 느끼는 지성은 행복하였다. 그는 따뜻이 아버지를 마주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제가 어찌 우리 겨레의 존망문제를 가지고 희롱의 말을 하겠습니까?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지난해 이 압록강기슭을 끼고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왜놈들을 수많이 쓸어눕혀 중국침략에 미쳐날뛰는 적들의 뒤통수를 호되게 조기신데 뒤이어 올해에는 다시 적들의 한가운데를 가르고 지금 조선으로 나오고계십니다. 일제는 단숨에 중국까지 먹어보자고 서둘렀지만 김일성장군님의 령활한 전략전술에 두발을 얽매여 옴짝달싹 못하게 되자 조선인민혁명군과 결사적인 대결의 길에 나섰습니다. 왜놈들은 간교하게도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민심을 돌려세우고 유격대와 인민을 갈라놓기 위해 집단부락을 만들고 5가작통이요 10가련좌법같은것을 만들어내여 모든 사람들의 손발을 얽어매는 한편 우리 유격대에 대한 천추에 용서 못할 헛소문을 꾸며내고있습니다. 만약에 그놈들 말과 같이 김일성장군님께서 거느리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그렇게 모두 산속에서 얼어죽어버렸다면 저놈들이 무엇때문에 이 산속 간곳마다 저렇게 많은 군사를 둔쳐놓고있겠습니까?》 《옳거니… 듣고보니 그럼직하군. 하긴 그놈들이 어찌 하늘이 낸 우리 장군님을 당할수 있단 말인가…》 로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리더니 별안간 눈을 부릅떴다. 《네 이놈! 네 그 소리를 왜 이제야 하느냐! 애비를 업수이봐도 분수가 있지… 애비가 아글타글 밥을 벌기 위해 사람같지 않은 행세를 하니 그래 나라도 몰라보고 백성된 도리도 모를는줄 알았더냐. 네 진작 김일성장군님 수하 군사라는것을 말했던들 어찌 우리 부자지간이 이렇게야 소홀해졌겠느냐. 괘씸한놈!》 아버지는 성이 나서 다시 저쪽으로 돌아앉아 담배를 뻑뻑 빨아댔다. 그러나 그 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 장군님께서 지금 어디쯤 계시느냐? 그이께서 정정하신것이 사실이겠지?》 로인은 담배대를 쑥 뽑고 아들곁으로 바싹 몸을 끌며 귀속말로 속삭였다. 지성은 눈물이 날만큼 행복감을 느끼며 아버지의 담배진이 밴 독특한 체취를 마시였다. 《아버지, 념려마십시오. 머지 않아 장군님께서는 이고장에도 들리실지 모릅니다. 이리로 나오고계시니까요.》 《우리 고장에?》 로인이 펄쩍 뛰자 정지목에서 어머니와 누이도 눈길을 마주치며 놀란 낯빛이 되였다. 《그게 언제쯤 될것 같으냐? 일이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가만 앉아있어서야 되겠느냐? 에이구 자식두, 어찌면 이렇게두 덜퉁하단 말이냐.》 아버지는 벌써 허둥지둥하며 안절부절 못해 돌아갔다. 그날밤 아버지와 아들은 실로 10여년만에 자리를 나란히 하고 누웠다. 그러나 잠을 청할수는 없었다. 아들의 곡절 많은 사상의 편력기를 아버지는 누워서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들었다. 무산 옥암동에서 다시 강을 건너 저 흥안령산줄기까지 조국광복의 길을 찾아 헤매다가 북만원정의 길에서 돌아오시는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는 대목에 이르자 로인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앉더니 희슥이 달빛이 지새는 성에불린 창너머 북쪽을 바라보며 깊이 머리를 숙이고 속삭였다. 《장군님, 제 미거한 자식을 건져 거두어주시니 이런 고마울데가 어데 있겠습니까, 장군님, 고맙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누워 뒤를 독촉하는것이였다. 《그래 그 다음은 줄곧 장군님슬하에서 싸웠느냐?》 《그렇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로인은 슬그머니 목침을 빼고 아래목을 내려다보더니 안해와 딸이 기척이 없자 바싹 아들의 귀곁에 입을 갖다대며 물었다. 《내 한가지 조용히 묻는다만 장군님께서 축지법을 쓰시는것을 네 곁에서 본적이 있느냐? 그이께서 백두산에서 도를 닦으신것이 혹 어떤 사람은 10년이라고도 하고 혹 어떤 사람은 간지를 따라 60년을 채웠다고도 하는데 어느쪽이 적실한지 모르겠더라.》 지성은 빙그레 웃었다. 걷잡을수 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호기심은 눅잦힐길이 없었다. 그는 소박한 인민들의 전설에 금가지 않도록 조심을 두어가며 김일성장군님께서 밝히신 혁명의 대강과 그이께서 진행하신 통쾌한 전투이야기를 날이 밝도록 아버지에게 들려주었다. 12
하시모도는 이와구니대좌가 도죠의 특사랍시고 갑작스레 들이닥친 그 순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와구니가 가지고온 편지내용도 불쾌한것이였고 이와구니란 인간자체도 달라는것 없이 미웠다. (이따위 경박한 인간을 도죠같은 날카로운 사람이 심복으로 기른다는것은 모를 일이다.) 그는 빤빤하게 밀어낸 아래턱이 퍼러스름한데다가 코수염을 기르고 아무데서나 향수냄새를 물씬물씬 피우는 아직도 젊은 대좌를 곁눈질해보며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을 놓고보면 그가 이와구니를 두고 경박한 인간이라고 생각할만 한 근거는 없었다. 그가 참모본부에 있을 때 륙대전술강좌에 있는 이와구니를 몇번 만나본적이 있을뿐으로 면식이란 없고 전번 도꾜에 가서 그중 깊이 사귀였다고 봐야 하겠는데 그때는 도죠의 부관처럼 나돌아서 아무런 불쾌감도 주지 않던 인물이였다. 다만 상당한 정도로 기밀을 보장해야 할 문제토의에 그를 참가시킨것을 보면 지금 륙군군무국에서 그중 믿을만 한 인물인 모양이라고 직감적으로 느낀 인상이 남아있을뿐이였다. 문제는 도죠의 편지에 있었다. 도죠는 편지에서 지금 군부와 정계의 일치한 배격을 받고 물러나 앉은 로장 우가끼일파가 잔당을 그러모아 반공격을 꾀하고있는중에 한때 황도파에 속해있던 일부 인물들이 거기에 가담하여 당면한 내각개조문제가 적잖은 파란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보인다고 깊은 우려를 표시하였다. 도죠도 편지에서 지적하였지만 하시모도가 보기에도 우가끼당자나 그를 추종하여나선 군의 로페우들은 별로 문제가 될것이 없었다. 다만 골치거리로 되는것은 현내각수상 고노에는 말할것도 없고 후계내각을 내맡기자는 히라누마까지도 지난날 그처럼 북벌을 고창하여 천하의 여론이 들끓는가운데 만주를 삼키고 마침내 중국에까지 전쟁의 불집을 퍼뜨려놓은 관동군출신의 통제파 중심인물들이 최근에 와서 남진론을 들고나온 까닭을 의문시하고있는것이였다. 이 문제는 일, 독, 이 3국방공협정의 대상국을 쏘련만으로 제한하자는 온건파와 미, 영 량국을 다 포괄시켜야 한다는 급진파의 대립으로 표현화되였는데 팽창야욕에 눈알이 뒤집힌 신흥재벌들은 남방의 석유와 고무 자원을 탐내여 적극 남진파에 가담하였지만 현군부의 실권을 쥔 이다가끼나 도죠의 지난날의 호언장담을 곧이곧대로 믿어온 완고한 정객과 군의 상층부에서는 여전히 씨비리출병을 제국의 제1국책으로 삼아야 한다는 립장에 매달리고있었다. 이 로인들은 그처럼 패기에 넘치던 관동군의 《꽃》들이 유럽에 든든한 군사동맹이 형성된 오늘 무엇이 두려워서 중국과의 전쟁도 흐지부지하고 장고봉사건에서는 그런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씨비리의 비옥한 땅을 강건너에서 바라보기만 하느냐 하고 오만상을 찌프린다는것이다. 《물론 우리의 계획은 단행될것이지만》 하고 도죠는 내각개조문제를 시사하면서 이러한 정계와 군부의 복잡한 움직임에 대처하여 시급히 관동군의 후방안전을 도모하는데 만전을 기하는것이 오늘 제국앞에 나선 급선무라고 안타까운 어조로 호소하였다. (이를테면 책임추궁이로군…) 하시모도는 편지를 다 읽기도전부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처럼 《시급히》될수 있는 일이면 그자신은 왜 몇해씩 있으면서 하지 못했는가.) 도죠에게 이처럼 귀먹은 욕을 퍼부어봤지만 문제는 여전히 문제대로 남아있었다. 《눈 꾹 감고 한 두어개사단 더 풀어보시지요. 그런 예산쯤 어떻게 하나 우리가 변통해보겠습니다.》 전쟁이라는것을 책상우에서만 해본 이 사무원군인은 마치 장사밑천이나 대주는것처럼 이따위 사설까지 늘어놓는것이였다. (그래 우리가 조선인민혁명군과의 작전에 20여만의 일만군대를 풀어놓은것이 아직도 소극적이란 말인가? 그럴수만 있다면 나는 100만이라도 들이밀 결심이 있다. 하지만 어디에 그 군대를 들이민단 말인가? 전선이 없는 전쟁, 유격전쟁의 난점을 모르는 이러한 전술교원들에 의하여 훈련된 장교들이 장차 제국군대를 지휘하게 될 때 나무아미타불, 제국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것인가, 건방진 자식!) 하시모도는 불쾌하였지만 도죠에게 전해질 그의 보고를 생각해서 매우 신중히 듣고 차후 작전에 참고할듯 한 표정을 짓지 않을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에게 사령관도 동석시킨 연회를 차려주지 않을수 없었으며 마감에는 제 차에 태워 호텔침실에까지 모셔다주지 않을수 없었다. 밤이 깊어 충령탑아래 있는 자기의 한적한 관사에 돌아와 일본잠옷으로 갈아입고보니 웬일인지 인생의 비애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그는 간단히 목욕을 하고 기계적으로 저녁상을 받았으나 아무것도 당기지 않았다. 연회에서는 술도 음식도 삼갔지만 반주로 나온 양주를 량껏 들이키고 아무렇게나 침대에 쓰러져버렸다. 눈알이 세개 있고 입이 가로 찢어진 계집같기도 하고 짐승같기도한 괴물에게 쫓겨다니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식은 땀을 함빡 흘리며 깨여나보니 동이 훤히 터오는 모양인데 머리맡에 놓인 전화가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대단히 중요한 전화이지만 이런 밤중에는 울려본적이라고 없는 지휘전화였다. 《나다!》 하고 하시모도는 벌떡 일어나 한손으로 군복을 끌어당기며 수화기를 들었다. 혼마일것인가? 모리일것인가? 지금 이러한 시간에 지휘전화로 그를 호출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란 그들 두사람밖에 없었다. 《무엇이?》 하시모도는 수화기를 다른손으로 바꾸어잡고 다급하게 웨쳤다. 상대는 모리였다. 《공작원은 못잡았는가?》 하시모도의 이런 질문에 모리는 안타까운듯이 갑자르더니 다시 유성촌에 일어난 사태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장거리에서 갑자기 소금매상고가 높아진것이 첫째 단서였다. 이어 한 특무망에 련결된 시계포주인령감이 신고를 해왔는데 자기와 잘 아는 란전주인이 장을 담그겠다고 소금 한말을 사달라는 부탁을 했다는것이다. 그 청을 받아들인 다음 뒤로 줄을 놓아 알아보니 지금은 장 담글 철도 아닌데다 그 령감네 집에서는 가을에 이미 장을 담갔다는것이 판명되였다. 모든 자료를 종합해본 결과 소금은 틀림없이 유격대로 갈것이 예견되는데 이 줄을 들추어서 공작원을 잡을것인지 아니면 소금을 그냥 들여보내되 그 소금을 먹고 유격대가 쓰러지도록 독을 칠것인지 당장 결론을 달라는것이였다. 하시모도는 오래 생각할것도 없이 소리쳤다. 《그만한것도 판단하지 못하겠는가? 소금을 들여보내게. 적당한 독을 치되 유격대에서 마음놓고 그 소금을 먹을수 있게 잘 처리해야 하네. 내 오늘중으로 그런 부면의 전문의사를 보낼터이니 그와 잘 의논해서 실수없이 일을 꾸미게. 데라시마에게도 필요한 지시를 보내겠네.》 모리의 긴급전화는 그의 불쾌하고 흐리터분하던 생각을 날려버렸다. 하시모도는 즉시로 현지의 데라시마혼성사단지휘부와 혼마려단지휘부를 호출하여 유격대로 하여금 잠시도 잠들지 못하고 쉬지 못하게 추격과 돌격을 끊임없이 들이댈것이며 모리의 요구에 따라 필요한 작전을 진행하도록 지시를 주었다. 한편 기왕부터 이런 일에 쓸모 있다고 보아온 륙군병원의 군의 한놈을 불러 의견을 물어본 다음 극비지시와 함께 자동차에 태워 모리에게 보냈다. 일찌감치 사령부에 나오니 또하나 좋은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제1방면군을 추격하여 화전현 회성천부근에서 고전하고있던 야마시다련대로부터 경위려단의 소구분대를 포위하여 그중 10여명을 사살하였는데 여러가지 자료와 부검까지 해본 결과에 의하면 그중 한 시체가 틀림없이 련대장의 시체라는것이 판명되였다고 한다. 보고와 함께 올라온 자료들을 감정해보니 그들이 적어도 1주일이상 굶은끝에 최후를 마쳤다는것이였다. 《흠― 시사깊은 자료이다. 한개 방면군의 중추적역할을 수행한 지휘관이 이러한 최후를 마쳤다는것은 군사적의미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전과이지만 그보다 유격대 역시 인간이라는 관점과 그런 관점우에 선 이번 동기작전에 밝은 전망을 열어준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 흡족하여 대령한 참모에게 이와 같이 말한 그는 쇄락한 기분으로 이와구니대좌를 만나 제국의 정책문제에 대해 허심히 터놓고 의견을 나누었으며 도죠에게 정중한 회답서한을 썼다. 13
하시모도가 일부러 보내준 군의중좌는 외관상으로는 퍽 초라하였지만 확실히 인간유기체에 미치는 화학물질의 반응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은 사람이였다. 그러나 건강관리라든가 섭생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견해를 많이 가지고있었다. 그는 이러저러한 약들이 협잡군들의 돈벌이를 위해서는 효과를 나타내겠지만 일단 맞다들린 병을 고치는데는 전혀 효과가 없거나 거의 없다고 말하면서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소량의 식사와 좋은 공기와 적당한 운동에 기대를 많이 거는것이 좋다고 충고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자신은 아무런 운동도 할줄 몰랐고 찬 바람을 맞기를 질색하였으며 식사도 절제할줄 몰랐다. 속탈이 있다고 그냥 호소하면서도 점심때 통닭 한마리를 다 먹고 거기에 진한 생선국 한그릇과 밥 세공기를 게눈감추듯 하였으며 반주를 할 때도 안주를 골고루 다 집어먹었다. 그리고는 또 가방을 들추어 이 약 저 약 한데 뭉그려 한줌이나 입안에 털어넣고 물을 두잔이나 마셨다. 일은 오래 걸릴것이 없었다. 그가 도착하기전에 소금은 미리 다 거두어들였었다. 소금은 엄격한 통제품이라 허가를 받은 상점이 거리에 세집밖에 되지 않았다. 몰래 파는 란전이 더러 있겠지만 그것은 그리 큰 문제로 될것이 없었다. 소금에 약을 적당히 조제해서 섞는 일은 모리의 립회하에 그가 직접하였다. 《아비산이라고 할 때 정확하게는 3산화비소 즉 ASO4O6 혹은 ASO2O3 로서 무수아비산이라고도 하지요.》 하고 군의중좌는 연신 껄―껄― 트림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부적당합니다. 나는 하시모도소장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제꺽 무수아비산을 써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얻었지요. 치사량이 0.06그람이니까 극히 소량을 섞는다 해도 인차 죽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전체 비중이 퍽 낮아지도록 하자면 그걸 골고루 섞어내는것이 곤난하지요. 과학사업이란 엄밀할것을 요구하니까요. 그런데 그 점심에 먹은 소고기는 확실히 암소고기입니까? 물론 암소고기일테지요. 그러나 난 그렇게 연한것도 삭여내지 못합니다. 군대복무 20년에 나의 건강은 아주 판이나버렸지요.》 모리는 밀봉한 약주머니를 터쳐서 약저울에 조금씩 갈라 올려놓고 핀세트로 파리눈깔만 한 분동을 올려놓았다 내려놓았다 하는 그 버쩍 마른 사나이를 내려다보며 하시모도가 귀신같이 사람을 골라 보냈다고 생각하였다. 《나야 물론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요. 내가 견장을 달고있으니까 어떤자들은 나더러 산병선이 어떻고 포격이 어떻고 하며 말을 걸어오지만 그때마다 나는 대답하지요. 그런것은 다 인간이 미개했을 때의 방법이고 오늘날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전쟁을 하지 않으며 적어도 나는 그것을 반대한다고말입니다. 포사격에 얻어맞아 산산쪼각이 난 인간의 생체라든가 오랜 문화유산이 들어찬 거리를 생각해보십시오. 몸서리가 쳐지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모리중좌나 나는 자기 사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깨끗하고 보다 인도적인 방법이니까요.》 그는 이 비밀을 장차 바깥에 나가서 루설하지 않기 위해선지 그냥 지껄여댔다. 모리는 팔짱을 끼고앉아 소화장애에 시달리면서도 비상한 정력을 퍼부어 새하얀 독가루를 정확하게 달아서 섞어내는 그 꼼꼼하고 정교한 일솜씨를 경탄을 가지고 들여다볼뿐 아무런 간참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하시모도로부터 받은 임무를 정확하게 료해하고있었다. 그리고 모리가 무엇을 물어볼 사이도 없이 제입으로 자기의 타산을 낱낱이 지껄여댔다. 《이것은 5산화비소 즉ASO2O5 입니다. 비중은 4.09인데 물에 섞이면 곧 비산으로 되지요. 그러니 이만한 정도로 섞어놓으면 한시간내지 두시간동안은 이렇다할 중독증상이 나타나지 않을것입니다. 중독증상이란 개인차가 많은것이지요. 례를 들어 모리상이 이 소금을 먹었다고 하면 아마 두어시간 지나야 배를 안고 돌아갈것입니다. 그러나 나같은 경우는 한시간이면 충분히 구토설사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의견 같아서는 소금을 언제 먹는가 하는것을 잘 감시해야 합니다. 소금을 먹고 한시간반이후로부터 2시간반 늦어도 세시간이내에 돌격으로 이전하면 당신들이 기대하는 결과를 충분히 얻을수 있습니다. 화학반응이란 엄밀하고 법칙적인것이기때문에 여기에는 틀림이 있을수 없습니다. 례를 들어 지구의 력사도 어떤 의미에서는 물질의 화학적반응 즉 산화반응의 력사라고 볼수 있으니까요. 화학반응에 그 어떤 례외나 예상외의 결과가 있을수는 없는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이고장의 음료수는 좋지 못하군요. 나는 속이 쓰려서 대단히 견디기 어렵습니다. 저녁식사는 물론 일곱시가 지나야 하게 되겠지요?》 그가 걱정하는 모든 문제는 이미 필요한 준비가 다 갖추어져있었다. 약을 친 소금은 엄밀히 가게방으로 되실려갔으며 그것이 팔려서 산으로 운반되고 유격대에서 그 소금을 어느때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것을 감시할 줄도 다 늘여놓았다. 그다음 데라시마와 혼마에게 필요한 군사적명령도 떨어져있었다. 그러니 버쩍 마른 수도승같은 그 군의중좌의 말대로 화학적엄밀성에 비길만 한 결과를 충분히 기대할수 있을것이였다. 게다가 그처럼 중요한 일을 해제낀 군의를 기쁘게 해줄 저녁식사도 일곱시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인차 할수 있게 준비되여있었다. 군의중좌는 식탁에 앉자 또다시 자기의 소화기관이 남달리 약한데 대해 푸념을 널어놓으면서 갈비며 생선회를 연신 집어먹었고 전골남비에 뻔질나게 저가락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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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하시모도의 새로운 지시에 따라 군사행동을 적극화하게 된 혼마려단에서는 그 새로운 지시의 의도가 극비에 붙여졌기때문에 작전수행에서 일정한 곤난을 가져왔고 적지 않은 장교, 병사들의 불평을 불러일으켰다. 하시모도는 종전에 배가해서 추격과 돌격을 들이대여 유격대로 하여금 잠시도 쉴수 없게 하라고 호통쳤지만 그것을 집행하는 현지에서는 한번의 추격이나 돌격이 언제나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하지만 하시모도는 사소한 여유도 주지 않았다. 려단 장병이 몽땅 죽어도 좋으니 유격대를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게 하라는것이였다. 남패자에서 떠난이래 처음 한동안 기꾸찌는 자기 소대가 그러한 전투에 선발되기를 원했고 전투에 나가기만 하면 공을 세울듯이 생각했다. 그러나 마이허어방에서 부대를 따라잡아 6도구치기까지 오는 어간에 그의 눈앞에서 소대는 거의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동상에 쓰러진자, 추위와 허기와 과로에 나가넘어진자, 공포에 얼이 빠진자― 이런것들을 골라내고 남은것들이 겨우 전투 비슷한 흉내를 내다가 또 유격대의 기관총세례를 받고 눈벌에 나딩굴었다. 어제 혼마소장은 관하장교들을 불러놓고 끊임없는 추격과 정찰전으로써 적을 최대한으로 약화시켜 미구에 닥칠 결정적인 공격에 대처해야 한다고 매우 확신에 차서 새로운 방침을 제시하였다. 여태까지 혼마소장은 적을 바투 따라서지 않으며 전투는 될수록 미리 요소요소에 배치해놓은 다른 부대들에게 시키는 방향에서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러기에 가와사끼나 야마시다 부대들이 풍지박산이 된지 오랜 오늘날까지 혼마려단은 기본서렬을 유지하면서 적을 집요하게 따라가고있는것이였다. 이것은 부대내 장교들속에서 혼마소장의 위신을 높여주었고 어찌다 차례지는 술잔이라도 기울이게 되면 혼마소장의 건강을 위하여 한잔 들자는 제기도 나오군 하였다. 그러한 혼마가 단호한 새 방침을 내놓았으니 이것은 필시 무슨 일이 벌어질 징조라고 생각들하였다. 하지만 그 《끊임없는 추격과 정찰전》에 자기의 중대나 소대가 선발되는것은 누구나 달가와하지 않았다. 기꾸찌 역시 그러한 기분에서 례외는 아니였다. 하지만 군인의 자존심을 깡그리 집어던진 그러한 도피행위를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고있던 그는 려단장이 자원해나서는 장교는 없는가 하고 몇바퀴째 장내를 둘러보고 차츰 그 갱핏한 얼굴에 살기가 떠오르자 저도모르게 벌떡 일어나 《저의 소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소리쳐버렸던것이다. 지금 흰 백포로 위장을 하고 단김을 내뿜으며 눈벌을 기여가는 기꾸찌는 자기의 참을성없는 결기에 수치감을 느끼며 구역질을 억지로 참았다. 유격대는 산등에서 휴식을 하고있다. 우등불을 피운것으로 보아 한동안 쉴 차비이다. 이쪽 떠나온 령너머 골짜기에서도 연기가 피여오른다. 추격하는 혼마려단관하의 대대와 중대들도 길다랗게 늘어서서 휴식에 들어갔다. 이제 자기네 소대가 전투를 하기 위해 떠나왔으니 필경 그들은 거기서 래일아침까지 편안히 쉬게 될것이다. 자기의 경솔성과 철없는 협기만 아니더면 자기 소대와 자기는 지금쯤 천막속에 불을 피워놓고 배갈로 얼어든 속을 녹일수도 있었을것이다. 《오이 곤도.》 한참 기여가다가 홈타기에 들어선 기꾸찌는 뒤따르는 부하들이 꺼꺼부정하게 기여오는 몰골을 바라보며 상사를 불렀다. 《불렀습니까?》 곤도는 개털모자의 귀덮개와 그밑에 싸맨 어지러운 붕대를 밀어제끼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듣기 싫은 소리는 언제나 그 붕대와 개털모자 핑게를 대고 뭇들은척한다. 《어떻게 될것 같은가?》 《글쎄요.》 곤도는 잠시 눈을 감더니 침을 탁 뱉었다. 그는 침을 뱉어서 그날의 길흉화복을 점치군 하였다. 어리석고 흉측하게 생긴 로하사관의 일부러 지어보이는 진지한 표정과 도고한 태도를 보자 기꾸찌는 자기가 그러한 질문을 한것을 혀를 깨물고 후회하였다. 곤도가 땅바닥에 침을 탁 뱉고나서 《오늘 미다니는 조심해야겠군.》혹은 《강에 가면 재미가 없네, 강가에서 휴식하게 되면 될수록 뒤전에 자리를 잡아야 하네.》하는 따위 수작을 할 때 얼마나 그를 경멸했던가. 그러나 곤도는 부대의 가장 우수한 하사관이고 그와 잘못 맞다들면 장교도 목을 잘리우고만다는 무서운 인간이였다. 기꾸찌의 전임 소대장이 바로 곤도에게 잘못 걸려 헌병대에 드나들더니 결국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말았다는것이다. 기꾸찌는 지금도 부임 첫날 그자의 따귀를 갈겨놓은것만은 썩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했는가? 혹 자기의 마음이 약해진것이나 아닌가? 이러한 의문은 미즈시마 2등병의 녀자속옷으로 둘러감은 목도리에 대해서도 느껴졌다. 처음 그 꼴을 보았을 때 기꾸찌는 구역질을 참을 길이 없었다. 아니 구역질은 지금도 난다. 바로 눈앞에서 미즈시마가 유난히 굼뜨고 미타한 동작으로 홈타기에 들어서는데 그 목에 감긴 이제는 퍽 퇴색하고 너덜너덜해진 녀자속바지가 생선 씻은 물을 마신것처럼 비위를 돋군다. 그렇지만 그는 거기에 대해 미즈시마의 따귀를 쥐여박지 못하였다. 고드름투성이가 된 그의 꺼칠한 입수염과 코구멍, 눈섭을 볼 때 그리고 중요하게는 그가 자기의 생명의 은인이라는것을 생각할 때 차마 따귀를 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녁에 숙영지에서 은근히 역증을 담아 그것을 풀어버리지 못하겠는가고 한마디 하였지만 미즈시마는 히죽이 웃었을뿐 이튿날은 또 그것을 감고 나섰다. 미즈시마의 목도리같은것은 소대의 병사마다가 다 가지고있었다. 따라서 미즈시마의 목도리를 벗기지 못하다보니 소대자체가 그러한 누데기를 감고다니는 형편이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어느새 기꾸찌자신 그러한 몰골에 익숙해졌고 생리적으로 치미는 구역질에도 익숙해진 그것이였다. 아마 그러한 관습이 오늘 뜻 아니게 곤도의 점괘를 묻게 만든것인지도 모른다. 하기는 불안하였다. 경험으로 보아 아무런 승산도 없어보이는 이러한 추격과 전투에 대해 기꾸찌가 위안을 느끼는것이 있다면 추격하는 우리가 이쯤 죽어가는이상 추격받는 유격대는 더 죽어가리라는 한가지 추측뿐이였다. 《이거 침이 얼어붙어서… 이건 아침에 조용히 쳐야 맞는것인데…》 곤도는 이미 돌아보지도 않는 기꾸찌를 향해 중얼거리더니 다시 한번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환성을 질렀다. 《소대장님, 멋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침방울이 하나도 튀지 않고 저 바위밑까지 가닿았거던요. 이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마 우리 소대가 큰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저녁엔 제일 좋은 숙영지가 차례지고 술도 넉넉히 받게 될것 같습니다.》 《앞으로!》 기꾸찌는 미처 곤도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날카롭게 소리치며 앞으로 나갔다. 등성이에 올라서니 눈바람이 귀뿌리를 쌩쌩 째고 지나간다. 위장포는 말할것도 없고 개털외투자락까지 아래도리를 마구 휘감고 세차게 펄럭거렸다. 기관총수는 바람에 날려 총신을 내댈수 없는 형편이였다. 《개같은놈들!》 기꾸찌는 누구에게라없이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얼굴전체를 덮고 있던 두툼한 가제마스크를 훌 벗어집어넣고 벌떡 일어났다. 유격대는 불과 500~600메터앞 앙상한 이깔나무숲속에 점점이 흩어져있었다. 보매 그것이 주력부대는 아닌듯 하였으나 지금은 주력이냐 아니냐 하는것을 가릴 계제가 못되였다. 다문 얼마간이라도 타격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쉬지 못하게 해야 하는것이다. 기꾸찌가 막 돌격구령을 내리려고 하는데 왕청같이 이미 지나온 그 홈타기쪽에서 기관총소리가 자지러졌다. 기꾸찌는 무작정 권총 한발을 쏴버리고 눈구뎅이에 납작 엎드렸다. 기관총사격은 계속되였다. 기꾸찌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머리를 눈구뎅이에 묻고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을 살피는데 무엇이 자꾸 잡아당긴다. 얼결에 돌아보니 곤도가 외투자락을 끌어당기고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곤도옆으로 미끄러져내려가니 《가만히 계십시오. 이쯤하면 습격을 한셈이니까요. 높은곳에 있으면 총알에 맞기가 쉽습니다.》하고 눈구뎅이에 골을 파묻는다. 그제야 보니 자기가 섰던 자리는 등성이에서도 그중 두드러져 오른곳이였다. 주먹만 하게 뭉친 유글유글한 수치감이 명치끝까지 치밀어올랐으나 눈무지를 파헤치며 콩튀듯 하는 기관총알속에서 고개를 쳐들만큼 그렇게 강력한것도 못되였다. 한동안 머리를 처박고있으니 총소리가 즘즉해졌다. 정황이 어떻게 됐는가 하는것은 다음 문제고 우선 마스크를 벗어던져버린 볼편이 얼어들어 못견딜 지경이였다. 그래 골을 좀 쳐들사했더니 팍―팍― 하고 눈구뎅이를 파헤치며 총알이 날아왔다. 꼼짝 말고 그렇게 엎디여있으라는것이다. 그러나 산 사람이 어떻게 드러난 생살을 눈속에 그대로 묻고 세월없이 견딜수 있단 말인가? 견디다못해 다시 움씰거리니 이번에는 옆구리에서 억센 팔이 뻗어나와 목덜미를 잡아누른다. 곤도의 이 무례한 행동에 밸이 꿈틀했으나 다음순간 또다시 총소리가 울려왔기때문에 별수없이 눈속에 다시 골을 처박았다. 이 노릇은 정 못해먹겠다. 에익― 죽더라도 해봐야지… 기꾸찌가 발버둥치고싶은 충동에 번쩍 머리를 쳐들려고 하는데 무엇인가 푹신하고 뜨뜻한것이 볼에 와닿았다. 피발이 서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니 미즈시마의 녀자속옷이였다. 순간 도꾜 아오야마의 기꾸찌백작댁 자기 방의 안락한 정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영국식뻬치까는 언제나 포근한 온기를 내뿜고 푹신한 잠자리는 부드러운 살결처럼 탄력에 넘치는 그의 몸을 감싸안아주었다. 근위사단의 장교숙소는 또 어떠했는가, 도대체 도꾜에서는 아무리 한겨울이라도 이런 살인적인 추위나 눈구뎅이를 볼수가 없다. 기꾸찌는 눈물을 머금고 그 녀자속옷을 미즈시마에게 돌려주었다. 한쪼각 인간다운 체모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시뻘건 속옷을 눈우로 밀어낼 때 기꾸찌는 실로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면서 제발 미즈시마가 다시 그것을 자기에게 권하지 말았으면 하고 간절히 빌었다. 두번씩 돌려보낼만 한 힘은 자기 몸이나 넋속에 이미 남아있지 않다는것을 깨달았기때문이였다. 다행하고 그만큼 서운한 일이지만 미즈시마는 다시 그 목도리를 내밀지 않았다. 그 역시 동향인으로서의 자기 상관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그이상 더 강한것은 아니였던것이다. 유격대의 후위구분대는 근 한시간이나 기꾸찌소대를 그렇게 눈구뎅이속에 처박아두었다가 기본부대가 행군을 시작하여 멀리 사라지자 마지막 위협사격을 길게 남겨놓고 사라졌다. 14
한태혁은 몇번씩 거리에 내려가서 류수하부근에서 유격대의 한 간부가 최후를 마쳤다는것이 헛 소문이 아니라는것을 알아낸후로 몰라보게 침울해졌다. 《정지성동지, 이게 혹 1방면군이 다 잘못됐다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소.》 《설마 그렇기야 할라구. 하지만 어쨌든 재미없는 소식이야.》 정지성은 삭정이짬으로 눈가루가 비죽비죽 내민 포수막의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역시 마음이 번거로와 다사하게 말할 흥취가 없었다. 《넨장, 적들이 우리 사령부로만 밀려드는 까닭이 있단 말이야…》 태혁은 바닥에 깔린 묵은 쑥대를 질겅질겅 씹으며 이짬으로 쓰거운 풀냄새와 함께 이러한 말을 내뱉었다. 아이들처럼 무릎을 그러안고앉아 다시 새초를 씹고있는 태혁의 넙적한 등을 바라보며 지성은 한숨을 쉬였다. 여기는 유성촌 뒤산에서 골짜기를 두개 넘어 으슥한 관목숲속에 자리잡은 산막이였다. 이따금 포수나 나무군들이 거접하던 산막은 이 몇해째 《토벌》성화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지자 형편없이 퇴락해버려서 바람이 심한 날이면 제풀에 넘어질가봐 잠을 이를수가 없었다. 정귀하로인은 아들을 이 산막에 데려다놓고 자기가 올라올 때까지 얼씬 거리에 나타나지 못하게 단속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하고 지성은 한참이나 동안이 지나서 입을 벌렸다. 《그놈들이야 우리 사령부를 노리고 접어들건데 그게 뭐 특별한거야 아니지 않소.》 태혁은 힐끔하고 돌아보더니 입에 문 새초를 훌 뽑아 허공을 벴다. 《에익― 어쨌든 빨리 돌아가야지 이거 궁금해서 못견디겠소. 벌써 부대를 떠난지가 며칠째요. 잘하면 지금쯤 6도구어방을 지났을수도 있단 말이요.》 그제야 지성이도 허리를 일으키여 헐벗은 숲의 저끝을 내다보았다. 아버지는 오늘안으로 소금을 구해서 이 산막으로 실어오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있다. 태혁은 잠시 일어서서 서성거리더니 펄썩 주저앉아 다시 무릎을 그러안았다. 그러나 한참이 못되여 또 벌떡 일어났다. 《내 좀 내려갔다오겠소.》 《뭘 그러오. 지긋하게 좀 기다려보지.》 지성은 아무 보람이 없을줄 번연히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태혁은 아니나다를가 지성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더니 휭하니 산막을 빠져나갔다. 그 등에 대고 지성이 조용히 말하였다. 《멀리 가지 마오. 발자국을 내는것이 재미없소.》 그는 썰렁한 랭기속에 씁쓸하고 향긋한 풀 썩는 내를 들이키며 다시 드러누웠다. 그는 아버지를 믿었다. 아버지가 완고하다고만 알았지 그의 가슴에 억세게 뿌리내린 이 나라 인민으로서의 생활의식을 리해하지 못했던 그는 그날밤 돌변한 아버지의 뜨거운 숨결을 가슴벅차도록 느끼며 속으로 울었었다. 하기는 철들어서 오늘까지 아버지와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어본적이라고 별로 없는 부자간이였다. 바로 가든 외로 가든 어쨌든 아버지는 조선을 사랑하였고 그만큼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흠모의 정을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간직하고있었던것이다. 다만 그 감정은 아버지의 가슴속 가장 깊은곳에 소중히 감추어져있어서 거칠은 세파에 부대낀 완강한 체구와 굳어진 표정을 거쳐서는 좀체로 느끼기 힘들었을뿐이였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속깊은것인가. 피를 나눈 부자간이 이럴진데 남남끼리 그 인간의 진속을 리해한다는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 아버지는 혁명군에 필요한 소금전량을 자기가 해결하는것은 물론 지금 거리의 형편으로 보아 돈을 주고 사는것도 조련찮은 일이니 그 모든 일처리를 자기가 맡아하겠다고 자청해나섰다. 아버지는 용의주도하였다. 그는 마치 어디서 지하공작경험이라도 쌓은듯이 집안사람을 단속하였고 그럴듯한 구실을 꾸며 아들을 이 골짜기까지 안내하였으며 한태혁과의 련계를 지워주었다. 이튿날 산막에서 나란히 누워있을 때 태혁은 아버지를 잘못 리해하고있다는데 대해 매우 날카롭게 추궁하였다. 그 추궁을 지성은 걷잡을수없이 몰려드는 졸음속에서도 눈물겨웁게 들었던것이다. 한되나 한홉의 소금을 구한다는것이 곧 한사람의 동지를 구하는것과 맞먹을만큼 힘이 들었다. 소금이 통제품이라는것, 정로인이 그렇게 소금을 많이 쓸 일이 따로 없다는것을 다 아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는 소금을 사달라는 말을 꺼낼수조차 없었다. 따라서 부탁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경우는 곧 그 소금이 산으로 들어간다는것을 상대가 짐작했다는 말과 같은것이였다. 그러다가 혹시 사람을 잘못보고 실수를 하게 되면 정로인자신은 말할것 없고 온 집안이 도륙이 날것이고 자식과 자식의 혁명동지, 나아가서는 혁명군에게까지 루를 미칠것이였다. 그러기에 로인은 실로 한홉의 소금을 위하여 흰머리가 늘어날 지경으로 애를 태우고 속을 죄였지만 그 일을 목숨 내대고 해냈으며 한홉, 한되의 소금이 해결된 경위를 낱낱이 아들과 태혁이에게 아룄다. 지성은 솔곳이 잠에 취해들어갔다. 그러다가 소스라쳐 깨여났다. 어디선가 통나무 두드리는 소리가 난듯 하였다. 그는 서둘러 권총을 더듬어잡고 허물어진 귀틀짬으로 조심스레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무런 동정이 없다. 그러나 분명 무슨 소리가 났다는 생각이 있어서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잠시후 두 로인이 숲속에 나타났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구뎅이에 지팽이를 푹푹 박으며 힘차게 앞장서 올라오는것은 아버지였다. 달구지저고리에 풍뎅이를 깊숙이 눌러쓰고 큼직한 마대자루를 멜빵을 해서 가로 지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품이 꼭 사돈집나들이라도 가는듯 한 걸음이다. 그뒤로 좀 체소한 늙은이가 따라섰는데 묻지 않아도 장거리에서 란전을 내고있다는 주종섭로인일것이다. 전날 신갈파에 있을 때부터 사귄 사람으로 조국광복회에도 들어있던 로인이라는것이였다. 아버지는 자기 혼자 그 많은 소금을 다 구해내기가 어려울터인데 주종섭과 의논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아들의 의향을 물었었다. 지성은 태혁과 토론해보았고 태혁은 또 태혁이대로 거리에 나가 주로인의 사상경향을 료해한 다음 그렇게 해도 좋긴 하겠지만 일체 비밀이 새여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는것을 신신당부했었다. 아버지는 주로인을 데리고 곧장 산막으로 다가왔다. 지성은 일어나 두 로인을 맞으러 나가려다가 주저하였다. 한태혁은 왜 보이지 않는가? 혹시 길이라도 어긋났는가. 그가 우물거리는 사이 아버지는 벌써 숲을 벗어나 산막앞 공지에 들어서서 소리쳤다. 《이사람 지성이 없나!》 지성은 하는수없이 밖으로 뛰여나갔다. 그렇게 단속했건만 로인들이라 도무지 지하활동의 규범을 리해하지 못한다. 《아버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소리치지 마십시오.》 《허허허, 동갑이 이것 보게.》 하고 정귀하로인은 주종섭로인을 돌아보며 껄껄 웃었다. 《이사람이 내 아들일세, 김일성장군유격대에서 싸우는 내 아들이란 말일세, 어서 짐이랑 이리 벗게.》 지성은 주로인앞으로 가 공손히 인사하고 그의 짐을 받아내렸다. 아버지는 제발로 산막속에 들어가 쿵하고 짐을 부리웠다. 그러면서 자꾸만 뒤를 살피는 아들의 불안한 모습을 보자 히죽이 웃으며 말하였다. 《뭐 내가 조심성없이 군다고 그러나? 일없다. 저앞에 그 유격대가 있다. 옳지 저기 오지 않느냐? 보아라, 누가 오는가? 네 누이가 온다. 네 에미도 오겠다는것을 겨우 떼여놓고 왔다.》 지성은 들고 오던 짐을 그자리에 놓고 돌아섰다. 흰 눈벌에 새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까만 목도리로 머리를 폭 싸맨 녀인이 한손에 또아리를 들고 헐벗은 이깔나무숲속에 자태를 나타내였다. 그옆에 태혁이가 커다란 함지를 어깨에 메고 따라온다. 《누이―》 지성은 눈가루를 걷어차며 달려갔다. 《지성아―》 누이도 마구 달려왔다. 손을 마주잡고 서로의 눈길을 마주 들여다 보는 오누이는 다같이 눈을 슴뻑거리며 저들의 눈물을 누가 볼가봐 두려워하였다. 불과 엊그제 만났건만 그들은 이 눈벌우에서 실로 20여년만에 처음으로 만나는듯 한 크나큰 감동에 사로잡혀있었다. 비록 한지붕아래 태여나서 함께 자랐지만 철이 들자 그들은 헤여졌다. 하나는 시집살이로, 하나는 혁명의 길로― 그지간에 오고간 정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해도 언제나 그들의 생활감정은 몸이 헤여져있는것보다 더 멀리 헤여져있었다. 동생은 혁명을 더많이 생각하였고 누이는 남편과 살림과 또 짓밟힌 녀자의 신세를 두고 더많이 생각하였다. 이제 이 순결한 눈벌우에서 그들은 비로소 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오누이의 정을 느끼였다. 그들은 혁명의 길에서 이렇게 만난것이였다. 얼마후 누이는 불을 피우고 끓여가지고 온 콩나물국을 데웠으며 밤사이 빚어가지고 온 떡에 다시 김을 올렸다. 한편에서는 네 사람이 메고가게 짐을 갈라묶었다. 짐을 싸면서 보니 로인들은 소금만이 아니라 로동화 여덟컬레, 쌀 한말에 떡 한말을 해가지고 왔다. 지성은 뭘 이렇게 가져왔느냐고 중얼거렸고 태혁은 이제 이걸 가지고 사령관동지앞에 가면 필경 꾸중을 듣겠는데 야단났다고 진심으로 걱정하였지만 두 로인은 그저 흐뭇해서 껄껄 웃고만 있었다. 아무리 말려도 두 로인은 돌아갈 차비가 아니였다. 처음엔 짐이 무겁다고 우기다가 한태혁이 한손으로 짐 한짝을 닁큼 쳐들자 주로인이 성이 퍼렇게 나서 대들었다. 《젊은이, 사람 괄세를 그렇게 해서는 못씁느니, 우리가 중한 국사에 간참하려는것도 아닌데 어째 이다지 사람을 업수이 보나? 우리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그래 죽기전에 장군님을 한번 뵈옵고 이 나라 백성으로서 축수를 드리겠다는 이 늙은것의 청을 한번 들어주는게 그리도 힘드는 일인가?》 《임자네들이.》 하고 귀하로인도 웅글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겠으면 그러게, 우리는 우리대로 찾아가고야 말겠으니, 내 너 누이한테는 차마 그럴수 없어 말렸다만 지성이만 하더라도 엄연히 내 자식인데 내가 자식을 장군님슬하에 맡겨두고 모르고 지날 때면 또 몰라라 계신곳을 아는이상 인사를 여쭙지 않고 물러설수가 없네. 자고로 우리 하동정씨네 가풍은 그렇질 않아.》 그래도 지성은 뭐라고 용단을 내릴수 없었다. 로인들의 뜨거운 열정에 탄복해버린 태혁이가 먼저 에익 모르겠다 하고 부러져나오는바람에 지성이도 더는 고집을 못부리게 되여 짐을 네짝으로 가르기 시작한것인데 그때부터 산막안은 마치 명절날처럼 흥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처럼 기뻐 허허거리며 돌아가는 두 로인을 보고 누이도 눈물이 글썽해졌으며 태혁은 그 소라같은 주먹으로 몇번이나 코등을 문질러서 가뜩이나 언 코가 벌거우리하게 물들어있었다. 일찌감치 점심겸 저녁요기를 한 일행은 아직 해가 남아있어서 길을 떠났다. 커다란 무덤처럼 눈을 하얗게 쓰고 누운 산마루에서 누이는 손을 들어 바래였다. 한옆에 함지를 끼고 까만 목도리를 날리며 안타까이 손을 흔드는 누이의 모습은 그러지 않아도 자꾸만 흐려지는 눈앞을 더 뿌옇게 가리워놓았다. 누이는 눈덮인 숲속을 홀로 돌아갈것이다. 수정봉을 미처 내리기전에 날이 저물어 사나운 바람속에 짐승의 울부짖음소리가 울리여도 누이는 곧바로 걸어갈것이다. 그리도 가냘프고 청승맞아보이던 누이가 그렇게도 강한 녀자일줄은 미처 몰랐었다. 《아직 서있소.》 태혁은 뒤걸음을 치며 누이가 서있는 눈덮인 산마루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래도 지성은 돌아보지 않았다. 어릴 때도 느껴보지 못한 애틋한 정이 몸도 마음도 계급투쟁의 불길과 찬바람에 트고 타고 이겨진 이 나이에 와서 축축히 가슴속에 괴여드는것이였다. 《본시 그런 녀자요.》 이깔나무숲속에 들어가서 이제는 누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됐다는것을 온몸으로 느꼈을 때 축축히 젖던 그 가슴에 썰렁하게 불어치는 리별의 슬픔을 억지로 묵새기며 지성은 비로소 투박하게 말하였다. 본시 그런 녀자라는것은 지성이자신으로서도 뜻밖의 말이였지만 태혁은 당연한 말처럼 받아들였다. 《내 그럴줄 알았소. 그런데 매부는 없소? 왜 혼자 사오?》 《매부는.》 지성은 소금짐의 멜빵이 어깨를 파고드는듯이 고개를 휘저으며 괴롭게 내뱉었다. 《개새끼요.》 《개새끼라니?》 태혁은 놀라서 되물었다. 《내 그때 말하지 않았소? 내가 감옥을 살고 우리 아버지가 나때문에 가산을 불어먹자 차던졌다고…》 《들은것 같소. 그래도 모르겠군. 저렇게 알뜰한 녀자를 어찌면 그럴수 있단 말이요? 그래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다오?》 태혁은 그래도 아름다운 누이와 인연이 있은 인간이라 해서 그 거칠은 입을 가지고도 차마 욕을 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모르겠소. 운송점에서 굴러먹다가 어느 광산 덕대로 돌아다닌다더니 이번에 듣자니 신갈파어방에서 협잡군노릇을 하고다니더라오. 필경 개질이나 할놈이요.》 《그자식 이름이 뭐요?》 갑자기 거칠어진 태혁의 목소리에 지성은 피뜩 돌아보았다. 《왜 그러오? 최용수라든지 한다는가보오. 난 여태 만나본적도 없으니까…》 《최용수라… 내 그놈을 만나볼 작정이요.》 지성은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한마디 하고싶었으나 태혁의 어조가 하도 단호하다보니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두 로인은 뒤에서 유격대원들이야 따라오건말건 신이 나서 걸음을 다우쳤다. 자칫 잘못하다가 또 돌아가라는 소리라도 들을가봐 더욱 강심을 먹고 걸음을 다우치는것이였다. 15
한태혁이 소금공작을 떠난후에야 대렬에서 그가 차지한 공간의 폭이 뚜렷이 나타났다. 여느때도 대렬에 정상적으로 붙어있는 때가 드물었지만 한달째 적의 추격속에 계속되는 행군이다보니 매 전사의 위치와 역할이 두드러져오르는 모양이였다. 태혁이 없으니 우선 철구아주머니를 업고 가는것이 문제였고 숙영때마다 천막을 치는것도 문제였으며 그보다 더 절실하게는 대렬에 익살군이 없는것이 문제였다. 강철룡이 한태혁이대신 후위구분대에서 최병규를 보내주었고 전달장 강봉수도 이것저것 도와주었지만 최병규나 강봉수가 모든 일을 다 대신할수 있어도 태혁의 155절짜리 《세계혁명가》를 부를수는 없었고 더구나 능글맞은 그 익살을 흉내낼수는 없었다. 금숙은 자주 얼굴을 찌프렸다. 왜 그러느냐고 김정숙동지이가 물으면 당황하여 마치 피곤이나 하기때문에 그러는듯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벌써 이레째 소식이 없는 태혁이때문이라는것은 묻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정황이 급변한것은 그저께부터였다. 몽강숲속에서 어지간히 혼이 난 적들은 유격대가 낸 길로 수걱수걱 따라오기만 하였고 잘하는 경우에 소구분대로 후위에 접어들었다가 된벼락을 맞고 튕겨달아나는것이 고작이였는데 그저께부터는 무릅까지 빠지는 눈구뎅이를 무릅쓰고 골짜기와 릉선에 산개진을 치며 접어들었다. 반반히 닦아놓은 길을 따라오는데도 힘겨워하던놈들이라 생눈판에 산개진을 치노라고 맥을 다 빼서 벌써 사격진지를 차지할 때쯤 해서는 녹초가 되여 돌격을 한다는것이 변변히 소리도 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런 놀음을 패를 갈아대면서 하루에도 몇차례씩 들이대는것이여서 유격대의 행군은 굼뜨고 대원들은 더욱 지쳐갔다. 전투정황에 대처하다나니 갔던 길을 멀리 되돌아오게도 되고 곧추 가면 한나절에 가닿을수 있는 길을 사흘씩 걸려 가까스로 넘어서게도 되였다. 적들이 무었대문에 이처럼 발악적으로 접어드는가? 허기와 추위와 피곤에 지친 유격대원들의 머리속에 이러한 의문이 또 무겁게 틀고앉았다. 채옥은 김정숙동지의 어깨우에 고개를 놓고 간신히 걸음을 옮겨놓다가도 총소리가 자지러지는 뒤쪽을 자주 돌아보며 불안스레 속삭였다. 《언니, 적들이 저앞에도 있지 않을가요?》 《있을수도 있지.》 김정숙동지께서는 될수록 채옥을 편안하게 해주시려고 그의 가슴아래로 제 어깨를 깊숙이 들이밀면서 대답하시였다. 《하지만 앞에는 정치위원동지가 계시지 않아? 일없을거야.》 《그래두… 매일 저렇게 싸우면 탄알은 어디서 나요?》 《탄알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저께도 경위중대장동무가 보위단을 치러 가서 식량은 얼마 못구했지만 탄알은 넉넉히 가져왔대요.》 《그래요?》 《걱정할것 없어요. 식량은 전투때마다 생기는것이 아니지만 탄알이야 적들이 얼마든지 날라오지 않아요. 식량도 여태까지 지방인민들이 많이 보태주었지만 그래도 적들을 쳐서 해결한것이 더 많아요. 그러니 적들이 우리를 계속 따라오는 한은 그놈들이 우리 식량이랑 탄알까지 날라다준다고 볼수 있어요. 장군님께서 유격전쟁을 벌리실 때 그런것을 다 타산하신거예요. 그렇기때문에 유격대가 전투를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도 힘들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정말 그렇군요. 언니는 정말… 어쩌면 모든것이 그렇게 환할가…》 채옥은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지 김정숙동지을 황홀해서 바라보다가 그 어깨우에 얼굴을 갖다대고 정답게 비볐다. 그러나 사실 이때 김정숙동지의 머리속이 그렇게 밝은것은 아니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왜 보이지 않으실가? 혹시 그이께서도 전투에 참가하신게 아닐가? 김정숙동지께서는 문득 눈길을 들어 최병규를 찾으시였다. 병규는 여라문걸음앞에서 철구아주머니를 업고간다. 그뒤에 전달장 강봉수가 성림이의 어깨를 떠메고 따라간다. 옥금이도 금숙이도 금시 쓰러질것 같은 비틀걸음으로 커다란 배낭과 총들을 두세자루씩 메고 간신히 따르고있다. 사령관동지의 명령에 의하여 7련대와 기관총소대가 적을 막고있는사이 8련대와 독립대대가 헤치고나간 길을 따라 녀성들과 부상병들, 병약자들은 될수록 멀리 앞서나가게 되여있었다. 그런데 뒤쪽에서 총소리가 멎지 않으니 일껏 힘겹게 옮겨놓았던 걸음도 자꾸만 뒤로 지치려드는것이였다. 《병규동무, 힘들지 않아요?》 겨우 따라잡으신 김정숙동지께서는 무겁게 늘어진 철구아주머니의 뒤를 받쳐주며 물으시였다. 《나말입니까? 아무 일 없어요. 정말 정숙동무가 힘들겠습니다.》 병규는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미안한듯이 김정숙동지을 바라보았다. 이제 스물셋에 났다지만 어딘가 숫총각처럼 애돼보이는가 하면 어수럭해보이기까지 하는 병규였다.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밑에서 자란 그는 화전을 뚜지고 짐승잡이를 하는것밖에 딴 재간을 배우지 못하고 자랐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사냥총으로 곧잘 짐승잡이를 하던 그는 유격대에서 인차 명사수로 될수는 있었지만 정치활동가로 되기는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드는것이 사람들앞에 나서는것인데 소대장은 그 힘드는 가운데서도 그중 힘드는 녀성구분대의 호위임무를 그에게 맡긴것이였다. 《병규동무도 드살이 센 녀자들속에서 좀 치여봐야 해. 그래야 세상이 얼마나 무섭다는것을 알게 된단 말야.》 강철룡의 이런 말은 얼핏 보매 아무런 정치성도 없어보이지만 사실은 최병규를 이 어려운 행군과정에 단련시켜내자는 그다운 속구구가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그 《드살이 센》녀성들도 행군이 어려워질수록 얌전하고 정숙해져서 최병규를 그런 면에서 단련시키기는커녕 매번 얼굴만 붉히게 만들었다. 《사령관동지께서 어디 계신지 모르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 조용히 묻자 병규는 비로소 활기를 띠고 말하였다. 《앞에 나가계십니다. 뭐 전투는 별것 없는 모양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저놈들이 자꾸 접어드는것이 무슨 결정적인 타산이 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하자고 그러는 모양인데 든든히 혼을 내줘야 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그때문에 전투조직을 하시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김정숙동지께서는 힘없이 받아외우시며 다시 채옥의 어깨를 바싹 들이끼시였다. 사령관동지께 온전한 식사를 올리지 못한지가 벌써 나흘째나 된다. 비상용으로 아끼고 아껴오던 쌀주머니를 다 턴지도 이틀이 넘었다. 지금 쌀주머니에 남아있는것이란 전날 경위중대장이 해결해온 콩 몇줌뿐이다. 모든 대원들이 다 어려운 행군을 한다지만 사령관동지의 하루 행군량은 그중 많이 다닌다는 한태혁이나 강철룡이보다도 배이상이 될것이다. 가장 순조로울 때도 그이께서는 행군대오를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평균 몇번씩은 오르내리시는데다 대원들이 다 쉬거나 잠자는 때도 줄곧 전투나 행군에 대해 생각하시고 대원들의 정신상태와 그들의 건강이며 식량이며 군복에 대해 걱정하셔야 하며 간부들과 회의를 하시고 담화를 하셔야 한다. 힘들어하는 동무의 짐을 갈라 져주듯이 그의 한분께만 쏠리는 그 무거운 짐을 그 누구도 대신해드릴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그이께서 홀로 그 무거운 짐을 두어깨에 다 지시고 걸어가시기에 이 무서운 시련끝에도 승리의 새봄이 오리라는 확신이 있는것이지만 그 짐으로 하여 그이의 건강이 상한다는것은 곧 조선혁명전반에 끼치는 돌이킬수 없는 손실이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이께서 지금은 총소리 울리는 뒤쪽이 아니라 앞쪽에 나가계신다니 일단 마음이 놓이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몹시 휴식이 기다려지셨다. 그자신도 무척 견디기 어려운것을 느끼셨지만 어깨에 실린 채옥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는 반면에 기운은 점점 약해가는것이였다. 철구아주머니도 병규의 등에서 축 늘어져있다. 제일 든든한 편인 금숙이조차 이제는 입을 다물고 걸어가는데 자주 눈무지에 걸채여 비칠거리군 한다. 모두 지쳤다. 지금쯤 휴식한다면 사령관동지께 낟알섞인 음식을 대접할수는 없다 해도 어딘가 눈무지를 뒤져서 말라버린 산나물이라도 찾아내여 콩을 한줌 바스러뜨려넣고 함께 끓일수 있지 않을가, 밋밋한 산의 생김생김이며 빽빽한 잡관목무지로 보아 산나물이 많음직한곳이였다. 하지만 뒤에서 총소리가 멎지 않으니 어찌 휴식을 조직할수 있겠는가… 《아니?》 모두 단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숙이고 걷던 사람들이 우뚝 걸음들을 멈추었다. 제일먼저 멎어선 최병규가 김정숙동지쪽을 돌아본다. 《틀림없이 들었지요? 총소리가 틀림없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시며 저앞에 우뚝 솟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시허연 산덩어리를 쏘아보시였다. 그 뒤쪽에서 총소리가 울려온것이였다. 아마 지금쯤 앞장에 서있는 8련대와 경위중대는 그 산기슭 가까이 나가있을지도 모른다. 산너머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자지러졌다. 아무래도 전투가 붙은 모양이였다. 뒤에서 적의 추격을 물리치는 전투가 아직 진행되고있는데 앞에서 또 적이 달려든다면 이 일을 어찐단 말인가. 행군대오는 저절로 멈추어섰다. 최병규는 말없이 철구아주머니를 내려놓더니 어느새 한군데 모여선 녀대원들에게 부탁한다는 뜻의 눈짓을 해보이고 앞으로 달려갔다. 조금 지나서 강철룡소대장이 또 앞으로 달려갔다. 《산너머쪽이 아니예요?》 금숙이 가만히 속삭였다. 《그런것 같애. 벌써 8련대가 거기까지 나갔을가?》 김정숙동지께서는 무겁고 칙칙해보이는 구름이 형체도 없이 낮추 퍼져있는 우중충한 산너머를 쏘아보며 낮게 말씀하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 8련대와 함께 행군하고계셨다면 저 총소리를 어디쯤에서 듣고계실가? 《우리가 아무리 걸음이 늦어도 그렇게까지 떨어졌겠어요. 근 5리나 되겠는데…》 사실 5리까지는 몰라도 두어마장은 착실히 되는 거리였다. 거기까지 8련대가 벌써 나갔을리는 없다. 그렇다면 저것은 웬 총소리일가? 《척후가 적과 맞다들린게 아닐가요?》 《그럴수도 있지, 정말 그럴지도 몰라.》 김정숙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확신이 가지 않으시였다. 금숙이 역시 딱히 무슨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였다. 옥금이도 채옥이도 모두 묵묵히 총들을 가슴앞에 드리우고 전투준비를 하고있다. 성림이는 철구아주머니옆에 멍하니 서서 공허하리만큼 눈을 크게 뜨고 총소리 나는쪽을 바라보고있다. 지휘관과 전령병들이 앞으로 또 달려간다. 총소리는 그냥 세차게 자지러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총소리는 차츰 큰산 뒤쪽으로 해서 옆으로, 룡강산맥의 깊은 수림속으로 멀어져가는것이였다. 처음에는 총소리가 이동하는것이 아니라 굉장히 넓게 펼쳐진 전선이 앞에 쭉 가로놓인것처럼 생각되였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그것이 이동하는 전투서렬이라는것이 알려졌다. 그러자 대렬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누가 적을 유인하여 딴곳으로 빼돌렸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고 전위구분대에서 적을 답새기니까 놈들이 그쪽으로 내빼는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못있어 최병규가 기관총을 안고 돌아왔다. 녀대원들은 우르르 그에게로 몰려가서 둘러쌌다. 《어떻게 된거예요?》 《전투가 어디서 붙었어요?》 《8련대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저마다 중구난방으로 물어대는 소리에 최병규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설레설레 손을 내저었다. 《빨리 대오를 정돈하십시오. 8련대는 바로 이앞에 있어요. 거기 바로 사령부가 있습디다. 사령부에서는 지금 무슨 회의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제 소대장동무가 오시면 야단칠수 있습니다.》 《그럼 8련대도 그냥 행군을 해요?》 옥금이가 자기 책임을 느끼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대오는 멎어섰어요. 소대장동무가 저더러 대오를 세우고 잠시 휴식시키라고 해서 왔어요. 저것 보십시오. 사령부전령병이 뒤로 가지 않아요. 무슨 명령이 내린 모양입니다.》 최병규는 사실 아무것도 알아온것이 없었다. 그런데 눈가루를 뽀얗게 날리며 재영이가 후위쪽을 향해 총알같이 달려온다. 녀대원들은 길을 막고 그에게 무엇인가 물어보자고들었으나 재영은 재빨리 그런 눈치를 채고 바람처럼 옆을 휙 스쳐지나면서 《왔어요, 왔어요.》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가맣게 달아나버렸다. 그가 달려가는 후위쪽에서는 여전히 총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거예요.》 녀대원들은 다시 최병규에게 다가붙었다. 《글쎄 갑자기 저앞에서 총소리가 나고 전투가 붙은 모양인데 그래서 아마 멎어선것 같습니다.》 최병규는 녀성들의 초롱초롱한 눈길에 포위되자 어찌할바를 몰라 허둥거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야 누가 몰라서 묻나요? 그런데 그게 무슨 전투래요?》 하고 금숙이가 안타까와 발을 구르며 다우쳐 물었다. 《그걸 글쎄 아무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금 중대장동무랑 앞으로 나간것 같습니다.》 《아니 그럼 전투하는것은 우리 부대가 아닌 모양인가요?》 옥금이가 최병규의 성미를 아는만큼 안타까운것을 참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네, 우리 부대는 아닌데 갑자기 앞에서 총소리가 들입다나니까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 지금 대책을 토의하는것 같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지도를 꺼내보시더니 인차 재영동무를 부르시더군요. 벌써 짐작되시는게 계신가봅니다.》 그러면서 최병규는 자기 배낭에서 노루가죽을 떼내였다. 엉겁결에 내려놓았던 철구아주머니에게 깔아주자는것이였다. 이무렵 사령관동지께서는 행군서렬의 맨앞머리 8련대와 함께 행군하시다가 급작스레 나타난 정황을 처리하시기 위하여 오백룡을 앞으로 내보내신 다음 지도를 펼쳐놓으시고 차후 행동방향을 토의하고계시였다. 강봉수가 길다랗게 가로 누운 진대통의 눈을 쓸어내고 그우에 자리를 마련해드렸으나 그이께서는 거기에 지도를 펼쳐놓으시고 재영을 오중흡에게로 보내시였다. 뒤를 따라오는 적들을 호되게 족쳐 더는 바투 따라서지 못하게 하라는것이였다. 그러시고나서 그이께서는 지도를 오래오래 살펴보시였다. 9.18이전에 일본참모본부 륙지측량부에서 발행한 그 지도는 그사이 10여년간에 벌어진 지리적변화를 반영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6도구를 중심으로 이 일대에 급작스레 발전된 도로망도, 집단부락이며 림산기지들도 그 지도를 통해서는 알아볼수 없었다. 그러나 6도구는 이미 여러 차례의 전투를 통해 낯이 익은곳이였고 7도구골짜기 깊은곳만 해도 지난해에 황정해를 비롯한 소구분대 동무들이 목재소를 습격한적이 있어서 유격대에서는 파악이 있는곳이였다. 6도구로부터 15도구에 이르기까지 7도구하를 비롯하여 수많은 압록강의 지류들이 마치 바람받이에 선 나무가지처럼 북쪽으로 뻗어있었지만 그 강들은 몇몇 급류들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얼어붙어서 행군에 지장을 줄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적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장백, 국경지대에로의 진출을 막아보려고 이 일대에 강력한 집단을 조성해놓은 이때 대부대를 이끌고 다시 깊은 밀림속으로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비교적 주민지대와 가까운 압록강줄기로 계속 나가느냐 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적의 《토벌》력량이 벌써 행군로정앞에 나타나서 총소리를 울리고있다. 이런 형편에서 강화된 한개 려단의 적을 뒤에 달고 그 총소리앞으로 계속 다가간다는것은 스스로 적의 협공에 빠져들어가는것이나 마찬가지일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허기와 피로에 지쳐빠진 부대를 그대로 밀림속으로 이끌고 갈 형편도 못되였다. 아무리 들여다 보셔야 지도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았다. 뒤쪽에서 맹렬한 기관총사격소리가 울리여왔다. 재영을 통해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받은 7련대장 오중흡이 추격해오는 적을 본때있게 조겨대는 모양이다. 김일성동지께서 고개를 드시는데 오백룡이 헐썩거리며 달려왔다. 언제나 동작이 굼떠보이던 그가 숨을 가쁘게 쉬는것으로 보아 무던히 빨리 달린 모양이다. 하기는 행군서렬앞에서 총소리가 울린 그때로부터 그는 줄곧 달렸으며 근 세마장가까이나 되는 앞산기슭까지 나가 적정을 살피고 오자니 제아무리 큼직한 숨통이라도 가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사령관동지, 명령대로 적정을 알아가지고 왔습니다.》 《어떻습니까? 무엇이 앞에 나타났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도를 접으시려다가 다시 한곳을 찬찬히 살펴보시며 범상하게 물으시였다. 눈벌에 펴놓은 지도의 한끝이 바람에 날려 압록강을 표시한 우불구불 구부러진 푸른 줄을 눈가루로 가리워버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두툼한 손바닥으로 그 눈가루를 깨끗이 쓸어내시며 대답을 독촉하시듯 오백룡의 얼굴을 바라보시였다. 《사령관동지.》 오백룡은 차마 진실을 말하기가 힘에 겨운듯 너무나 태연하게 앉아계시는 사령관동지를 안타까이 바라볼뿐 인차 대답을 드리지 못하였다. 《적이 많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물으시였다. 《상당히 많은것으로 보입니다. 저 산뒤로 방금 총소리를 울리며 북쪽으로 달려간놈들은 발자국을 살펴보니 한개 중대가량 되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고 오백룡은 다시한번 갑자르다가 말을 이었다. 《산밑으로 강이 흐릅니다.》 《7도구하입니다.》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방금 접어나가시던 지도의 한쪽구석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였다. 《그래 그 강이 아주 얼어붙었습니까?》 《네, 꽁꽁 얼어붙어서 길이 나있습니다. 거기로 적의 대부대가 이동해간 흔적이 있습니다. 아마 적들은 6도구나 12도구 어방에 근거지를 잡고 골짜기들을 샅샅이 뒤져대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사령관동지께서는 매우 유쾌하신듯 소리내여 웃으면서 말씀하시였다. 《우리가 아직 오기도전부터 그렇게 뒤지려니 그놈들이 꽤 수고들을 하겠습니다. 그래 총소리는 웬 총소립니까?》 《전혀 영문을 알수 없습니다. 혹시 산림대같은것을 만나 추격해간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지 수백명놈들이 저 산뒤로 해서 밀림속으로 냅다 쳐들어갔는데 삽시간에 없어지고말았습니다. 그런데 맞불질을 해대는쪽도 만만치 않은것 같습니다. 산밑에 부상병들을 실어나른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장경수동무랑 그쪽으로 더 내보내고 저만 먼저 왔습니다.》 오백룡이 보고를 드리는동안 박덕산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눈을 쓸어낸 진대통우에 앉기도 하고 사령관동지께서 접으시다가 그대로 두신 지도의 한쪽구석 바로 장백, 림강 현계어방을 살펴보기도 하고 혹은 적이 벌써부터 유격대를 기다리며 빽빽이 모여들어있다는 눈앞의 산봉우리를 바라보기도 하였다. 모두 손이 곱아들어 입김으로 녹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맞비비기도 하는데 그럴수록 몸이 더 떨려나서 떡떡 이를 맞쪼았다. 구름은 여전히 무겁게 낮추 드리워있었다. 밤이 들기전에 바람이 터지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또 눈이 쏟아질것이였다. 《동무들 생각엔 어떻습니까?》 오백룡이 할 말을 다하고 고개를 수그리자 사령관동지께서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있는 지휘관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시였다. 《내 생각에는 지금 울린 총소리 그자체는 그리 대단한 의의가 있는것 같지 않습니다. 문제는 적이 적잖은 력량을 우리 앞길에다 배치해놓고 기다리고있다는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대부대로써 저놈들 몰래 이 지대를 빠져나가기는 아마 힘들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전투를 한다는것은 놈들의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결과밖에 가져올것이 없습니다. 지금 딱 좋기는 우리 동무들에게 식량이나 넉넉하고 옷이랑 두툼해서 다시 저 깊은 숲속으로 쑥 들어가는것인데 그렇게 할 형편도 못되였습니다.》 지휘관들은 누구도 입을 벌리지 못했다. 박덕산이 무엇인가 말할듯 고개를 쳐들었으나 그가 하고싶은 말은 이미 사령관동지께서 너무나 잘 아실 일이기때문에 입을 다물고 다시 괴롭게 고개를 숙여버렸다. 무거운 침묵이 눈벌우에 잦아들었다. 《아닙니다!》 불시에 사령관동지께서는 지도를 탁 접으시며 힘차게 말씀하시였다. 그것은 그 어떤 의견에 대해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혁명의 앞길을 막아서는 모든것, 모든 시련, 모든 난관에 대한 그이의 확고부동한 립장을 선포하시는 말씀이였다. 그이의 눈빛은 엄엄하게 빛나고 그리도 화기롭던 얼굴에는 준엄한 기상이 어리였다. 《아닙니다.》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다시한번 힘주어 말씀하시면서 지휘관들을 둘러보시였다. 《우리는 설사 식량이 넉넉하고 옷이 푼푼하다 해도 다시 숲속으로 적을 피해가지는 않을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거하고 힘을 받아야 할것은 나무의 숲이 아니라 인민의 숲입니다. 우리는 인민들속에 들어가야 하며 또 인민들은 우리를 기다리고있습니다. 장백, 국경지대로 그리고 국내에로 만난을 무릅쓰고 우리가 나가자는것은 결코 안온한 휴식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쳐들고있는 조선혁명의 기치를 인민들속에 휘날리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는 불과 몇백리길을 한달여에 걸쳐 선회하며 이렇게 간고한 행군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적이 앞에 있다고 우리가 다시 인민들이 있는곳으로부터 멀어질수는 없습니다. 동무들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지휘관들은 어느새 고개들을 꿋꿋이 쳐들고 그이의 힘에 넘친 모습을 지켜보고있었다. 그들은 눈앞에 닥친 너무나 엄혹한 시련에 부대끼는사이 저도모르게 당초의 행군목적을 뒤전에 밀어놓고 난국을 타개해보자던 스스로의 생각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사령관동지, 남패자에서 밝혀주신 사령관동지의 방침이 바로 그것이였습니다. 적들이 자꾸 앞뒤로 달라붙으니 좀 에돌기는 하더라도 우리는 어쨌든 사령관동지의 방침대로 인민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덕산이 지휘관들의 그런 심정을 대변하여 소박하게 말씀드렸다. 《옳습니다. 8련대 정위동무가 매우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민들속으로 간다고 해서 자막대기로 내그은것처럼 곧장 외곬으로 쳐나갈수는 물론 없습니다. 당장 저 뒤산에도 적이 있는데 그럼 우리가 저놈들과 이마받이를 할 필요가 있는가? 그럴 필요는 전혀 없으며 또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될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는가? 우선 부대를 은밀히 이 7도구골짜기쪽으로 빼서 작년에 우리가 들린 부후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거기로 나갈 때까지 적정을 완전히 장악해보면 알겠지만 지금 내 짐작에 앞뒤에 달린놈이 근 10만은 될듯 합니다. 이놈들을 그냥 끌고다닐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저놈들을 사처에 헤쳐놓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헤쳐지겠는가? 우리가 남패자를 뚫고 여기까지 나오는동안은 적들의 포위속을 뚫고나오자니 모든 부대가 한데 뭉쳐 적의 공격을 물리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이제 이대로 나간다면 적들은 이미 조성해놓은 력량상 우세로써 이 근방에서 능히 우리를 완전포위할수도 있을것입니다. 적들은 바로 그러한 정황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제놈들대로 천신만고하고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마 그 목적을 완전히 달성했다고 속으로 장담하고있을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야 합니다. 집중된 적의 력량에 대하여 재빠른 분산으로― 이것이 우리의 대답입니다. 이렇게 되면 적들은 또다시 우리를 따라 분산되지 않을수 없을것이고 사방에 널려서 우리를 찾아 헤맬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재빠른 기동으로 집중하여 사처에 흩어져있는 놈들을 답새겨야 합니다. 이것이 내 생각에는 오늘 우리앞에 닥친 군사적난국을 타개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것 같습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저 유명한 집중과 분산에 관한 전략과 전술은 이처럼 혁명의 길이 앞뒤로 완전히 막혀버린듯 한 엄혹한 정황하에서 섬광과 같이 출로를 비쳐주었다. 그 자리에 참가한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간부들은 가슴에 세차게 끓어번지는 감동과 기쁨으로 하여 그 전략과 전술의 천재성과 독창성을 전에없이 더 깊이 깨달았다. 《그러니까…》 강철룡은 너무나 흥분하여 한개 소대장인 자기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것도 돌아보지 못하고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다른 지휘관들 역시 강철룡이 전례에 없는 행동을 하고있다는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간절한 눈길로 강철룡를 바라보며 일상 말이 굳고 투박한 그가 이 감격을 어떻게나 잘 드러내주었으면 하고 속을 조이였다. 《이렇게 저 집중과 분산이라는 그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그놈들이 잔뜩 이렇게 모여들었을 때…》 강철룡은 연신 두손을 모았다 펼쳤다 하며 《이렇게, 이렇게.》하고 갑자를뿐 그것을 《집중과 분산》이라는 말 이외의 딴 말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그렇습니다. 강동무가 옳게 말했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사랑하는 전사의 진지하고 소박한 모습을 너그러이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우리가 이렇게 적을 눈구뎅이속에 잔뜩 끌어다 붙여놓고 슬쩍 몸을 빼는것이요. 술래잡기와 같은것입니다. 커다란 어마어마한, 수천만인민의 운명과 반만년의 력사를 내대고 하는 엄청난 술래잡기입니다. 혁명의 총소리로 손벽을 쳐서 눈을 처맨 저 일본제국주의라는 술래를 이 눈구뎅이속으로 끌어다 붙여놓고 우리는 다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사방에서 손벽을 쳐대야 합니다. 허허허.》 사령관동지께서는 허리에 두손을 짚고 서시여 낮추 뜬 구름이 천천히 바람으로 변해가는 아득한 설령들을 굽어보시며 통쾌하게 웃으시였다. 웬일인지 지휘관들도 함께 따라 웃고싶었으나 그들의 눈바람에 트실트실 타고 언 거칠은 볼편은 푸들푸들 가늘게 떨릴뿐이였다. 16
부후물등판을 향해가던 행군서렬은 어느 험한 벼랑굽이에서 또다시 멎어섰다. 척후로 앞장에 서서 길을 내며 나가던 장경수네 일행이 웬 로인 두사람과 맞다들었는데 그들은 둘다 숨이 간간해서 눈구뎅이에 파묻혀있더라는것이였다. 두 로인은 그들이 지고있던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짐짝 네개와 함께 사령부에 업히여왔다. 제몸도 가누지 못해 의식을 잃어가고있는 그들이 싱싱한 장정들도 지기 힘드는 그 짐짝들을 어떻게 지고왔겠는가 하고 로인들을 업고온 유격대원들은 떠들었다. 그런데 그 짐짝들이 모두 소금짐과 쌀짐이라는것이 알려지자 대오는 더욱 술렁거리게 되였다. 북덕령줄기에 잇달린 어느 등판에 이르자 부대는 적의 준동에 대처하여 행군한 자취를 말끔히 지우고 요소요소에 물샐틈없는 경계초를 세운 다음 련대별로 흩어져서 은밀히 숙영준비를 하였다. 7도구치기초입에서 진행된 간부회의의 결정에 따라 새벽에는 모두 전투에 떠나가야 하였다. 사령관동지의 명령에 의하여 두 로인은 의식을 완전히 차릴 때까지 기관총소대에서 돌보기로 하였다. 밤이 깊어서 두 로인은 차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다소 의식이 돌아오자 그들은 안타까와하며 뜻모를 소리를 몇마디씩 외우고는 다시 정신을 잃군 하였는데 그 말토막들을 이어놓으니 비상한 사건의 줄거리를 그릴수 있게 되였다. 그들은 정귀하로인과 주종섭로인이였다. 미구에 정신이 똑똑해진 그들은 지휘관들과 함께 앉아계시는 사령관동지께 안내되였다. 두 로인의 말을 통하여 얼마전 감투봉―별안간 총소리가 터져올랐던 그 산 이름을 감투봉이라고 한다는것이였다. ―기슭에서 정지성이와 한태혁이가 불의에 적들과 마주치게 되여 로인들만 몸을 피하게 하고 그들은 적을 달고 북쪽으로 달려갔다는것이 알려졌다. 로인들과 소금짐을 구원하며 미구에 이 부근에 들어설 사령부의 안전을 위하여 적을 유인해간 그들의 의도는 충분히 리해되였다. 그러나 그 엄청난 전투의 규모와 적의 력량을 생각할 때, 가뜩이나 약해진 지성의 몸을 생각할 때 누구나 불안한 마음을 누를수 없었다. 두 로인 역시 장군님을 만나뵈옵게 된것이 꿈만 같다고 연신 눈물을 머금더니 이윽고 시간이 흐르자 자주 먼산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뒤숭숭한 표정을 지었다. 정귀하로인은 입을 다물고 옆차기에서 쌈지를 꺼내였다. 입안이 타들어오는 모양이였다. 로인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담배대에 담배를 쟁이려다 장군님앞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도로 쌈지를 건사하려고 하였다. 《어서 담배들을 피우십시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다보니 담배를 권하는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덕산동무랑 강철룡동무도 담배를 피우십시오. 그러니까 놈들은 지금쯤 우리가 이 일대에 나오리라는 련락을 받고 기다리고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정지성동무와 한태혁동무의 유인전술에 쉽게 걸려들었을것입니다. 허허허, 그놈들이 이 깊은 눈속에서 실컷 산을 헤매게 됐습니다. 하지만 우리 동무들도 고생을 할것 같습니다. 지성동무는 몸이 약하니 이 눈속에서 적을 달고 산속을 달리기가 몹시 힘들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될수록 무거워지는 천막안의 분위기를 눅잦히시려고 별치 않은 일처럼 부드럽게 말씀하시였으나 실상 그이의 마음속은 안타깝게 죄여들었다. 《담배들을 피우십시오. 왜 도루 쌈지를 거두십니까? 가만! 강동무, 나한테도 담배를 한대 주십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두 로인이 담배를 피우기 저어하는 눈치를 읽으시자 강철룡이 앞에 손을 내미시며 먼저 담배를 말아무시였다. 그러시고나서 두 로인을 향하여 물으시였다. 《그놈들이 우리 동무들을 얼마나 바투 따라갔습니까?》 담배연기가 피여오르자 천막안의 분위기는 한결 누그러진듯 하였다. 두 로인도 꼿꼿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펴고 고깔불에 김을 문문 피워올리는 바지가랭이랑 번갈아 돌려대며 앞을 다투어 말을 섬기였다. 《바투 따라가나마나 그 사람들은 우리보구 자기들이 지고오던 짐은 눈구뎅이에 묻어놓고 이쪽 골짜기로 해서 곧장 몸을 피하라는것입니다. 우리가 어쩔바를 몰라 어물거리니까 둘이 또 한참 의논하더니 아마 내 보기에 한 뭐라는 그 젊은이가 이 형님네 지성이더러 우리를 데리고 가라는가 봅디다. 그런데 지성이 그 사람이 말을 듣지 않으니 정 하는수 없던지 한장사가 먼저 왜놈들이 기여오르는 골짜기비탈로 껑충 뛰여내리는데 내 옛말에 홍의장군 곽재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내 눈앞에 곽재우장군이 다시 태여났단들 그리 용맹스럽고 날랠가싶습디다요. 새까맣게 몰려드는 왜병들을 보고 〈이놈들아! 김일성장군님의 혁명군이 여기에 있다. 먼저 죽고싶은놈부터 차례로 올라오너라!> 이렇게 산천이 쩡쩡 울리게 소리치는데 우리는 그 용맹한 모습이 하도 대견해서 몸을 피하라던 당부도 잊어버리고 구경을 했습지요. 그런데 용맹한것은 한장사뿐이 아닙디다요. 우리 저 형님네 지성이도 내 지금이니말이지만 처음 보았을 때는 그닥잖게 생각한것이 사실이지요. 헌데 그 총알이 쌩쌩 지나는속에 우뚝 나서서 한바탕 연설을 해내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종섭이 이렇게 열을 올리며 말하자 정귀하로인은 어험어험 헛기침을 톺으며 외면하였다. 로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였다. 자기 아들의 칭찬을 듣는 부모의 그 값높은 겸허심을 그 아들의 생사를 념려해야 할 이 절박한 순간에 바라보시는 장군님의 가슴속은 저으기 번거롭고 저리시였다. 《그러다가 한바탕 속새포소리가 귀청을 찢어놓는바람에 우리는 눈구뎅이에 얼굴을 파묻었지요. 한참 그렇게 총소리가 콩닦는듯 하다가 좀 즘즉해지길래 고개를 들어보니 아니나다를가 그 사람들은 땅속에 잦아들었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형체도 없이 사라졌는데 왜병들이 잔뜩 꽁무니를 뒤로 빼고 우글우글 줄을 지어 감투봉비탈을 에돌아 달려가더군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얼마나 쏘아넘겼는지 왜놈들 송장이 대목장날 푸주간처럼 그 산비탈에 널리지 않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싸우는것을 보니 우리 늙은것들도 가만 있을수가 없어서 이 적은이와 의논을 하고 묻어놓은 짐짝들을 다 파냈습니다.》 정로인이 한참이나 동안이 지나서 이렇게 뜨직뜨직 뒤를 이었다. 《워낙 네사람이 가까스로 지고오던것을 둘이서 지고오자니 힘이 부쳐서… 그래 적잖이 시간을 끌었습니다.》 《우리 동무들 말을 들으셔야 하셨을걸 그랬습니다. 다행히 우리와 만났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할번 했습니까?》 장군님께서는 동상을 입은 두 로인의 꺼멓게 부어오른 손을 번갈아 쓸어보시며 안타까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지는 못할망정 만나뵙기전부터 걱정을 끼쳐드리게 되였으니 백성된 도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정귀하로인은 다시 머리를 수그리며 장군님의 손을 마주잡았다. 불시에 침묵이 깃들었다. 바깥에서는 바람소리가 사납게 울부짖고있다. 예견했던대로 잔뜩 흐렸던 날씨가 어느새 미친 바람을 불러온 모양이다. 외롭게 산속으로 달려간 전사들에게는 눈보라를 몰아올 바람이 아니라 차라리 눈이 오는것이 낫지 않았겠는가. 장군님께서는 문득 이러한 장풍속의 고깔불앞에서 정지성이 자기가 소금공작을 나가는 경우에 있을수 있는 여러 경우를 두고 열렬히 호소하던 목소리를 상기하시였다. 그때 정지성은 이미 제 힘으로 이런 험한 눈속을 행군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될만큼 수척해있었다. 그러나 사령관동지께서는 무서운 육체적고통과 정신적시련이 기다리고있을 그 길로 어려운 공작임무를 주시여 떠나보내시였다. 자기 역시 성실하게 살기를 원하는 인간인이상 인간이 발휘할수 있는 기적이 어찌 자기에겐들 있을수 없겠느냐고 그리도 간절하게 호소하던 그 열렬한 주장을 차마 꺾으실수가 없었던것이다. 지성은 사령관동지의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정신적시련만은 훌륭히 이겨냈으며 조선인민혁명군전사답게 자기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육체적시련은 예상보다 훨씬 더 간고하게 그 약한 몸을 덮치였다. 눈보라치고 바람 사나운 무인지경 눈덮인 밀림속에서 그가 쓰러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확신한다면 그 누구도 그것을 현실성있는 생각이라고 말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사령관동지께서는 지그시 눈을 감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는것이였다. 정지성동무는 돌아올것이다. 한태혁이가 이 시련속에서 언제나 웃으며 노래하는것이 결코 그가 천성적인 락천가가 돼서 그런것이 아닌것처럼 정지성이가 장사도 견디기 힘들 그 시련을 용감히 이겨내야 하는것은 그에게 육체적예비가 아직 남아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혁명의 요구가 그처럼 준엄하고 절박하기때문이다. 《아버님, 그리고 동무들, 정지성동무는 돌아올것입니다. 꼭 돌아올것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전사들이 그만한 난관에 꺼꾸러질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김일성동지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우렁우렁 천막안을 울리자 무거운 침묵에 잠겨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이때 멀지 않은곳에서 우지끈하고 눈사태에 밀린 고목이 생으로 나가넘어지는 소리가 천막안을 울리였다. 풍자락이 바람에 날리더니 미친듯이 뒤설레는 눈보라가 천막안으로까지 쳐들어왔다. 고깔불이 광풍에 휘말리여 춤을 추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일어서시여 천막자락을 꽁꽁 여며놓으시더니 다시한번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제아무리 눈보라가 사나워도 우리 혁명전사들을 쓰러뜨릴수는 없습니다. 아버님, 아까 한장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한태혁동무로 말하면 열세살에 어른들과 목고채를 맞메던 진짜 장사입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긴 노래를 제절로 지어서 부르는 동무입니다. 또 정지성동무로 말하면 빈 손으로 다닐 때도 머리속에 수백권의 책을 넣고다니는 유식한 동무인데다 왜놈감옥에서 쇠고랑을 차고앉아가지고도 왜놈들에게 욕질을 멈추지 않은 동무입니다. 그것은 아버님께서도 잘 아시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 동무들이 이런 넓은 천지에 나서서 왜놈 몇백명쯤 맞다들려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10여년을 이런 산속에서 싸웠겠습니까? 념려할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푹 놓으시고 요즘 살아가는 형편이야기나 좀 나눕시다. 유성촌근방에서는 작년년사가 어떠했습니까? 우리 동무들이 저 장백 19도구치기근방에 농사를 좀 지어봤는데 그쪽에서는 소출이 괜찮게 났다고들합디다만.》 장군님의 말씀에 두 로인은 물론 무거운 생각에 잠겨있던 지휘관들도 모두 마음들이 한결 개여올랐다. 《작년년사가 우리 고장에서도 괜찮은편이였습지요. 허지만 년사가 이런 말세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떻게 긁어가는지 저 밥술이나 먹는다는 형님네 집에서도 늘 봐야 대두박신세를 지는 형편이올습니다.》 《공출을 그렇게 긁어가는가요?》 장군님께서는 얼른 불곁으로 다가앉으시며 로인들의 이야기를 주의깊이 들으시였다. 《공출뿐이 아니지요.》 정귀하로인이 천천히 담배 한대를 다시 쟁이며 말하였다. 《무슨 세금이 그리도 많은지 사흘돌이로 이렇게 세겹으로 접힌 종이쪽 한장씩을 떨어뜨려놓고는 구장이 오지 않나 순경이 오지 않나 그저 비는 날이 없이 떨어가지요. 게다가 무슨 도로공사에 나오나라, 포대공사에 나오나라 해가지고는 제 논밭에 김이 성해 호랑이가 새끼를 치게 됐는데도 그걸 돌볼 짬이 없습니다. 장마당에 가보면 무슨 천값이로다, 기름값이로다 하는것은 날마다 값이 올라가는데 유독 낟알값만은 내려가게만 마련이니 이건 짜고들어 우리 농사군들을 죽이자는 수작이지 무어겠습니까?》 두 로인은 번갈아가며 세상살이 어려운 형편이며 억울한 사연들을 늘어놓았다. 장군님께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들으시였다. 그 과정에 주종섭로인이 유성촌 장거리에서 란전을 펴고있으며 바로 그런 연줄을 통하여 이번의 소금도 그리 힘들이지 않게 구할수 있었다는것을 아시게 되였다. 17
새벽이 되자 바람이 멎었다. 그처럼 소란스럽게 울부짖던 밀림도 눈보라도 가뭇없이 잠들어버렸다. 천막안에는 오직 우등불만 기세좋게 타오르는데 장작단에서 진이 끓는 소리, 양철주전자에서 김이 서리는 소리가 지새여가는 새벽의 정적을 더한층 강조해준다. 고깔불곁에 옹크리고 누은 재영은 개털외투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잠들어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아까까지 불을 지키고있던 강봉수도 어느새 장작단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버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보시던 잡지를 접어놓으시고 불곁으로 위태롭게 뻗어나오는 재영의 털외투를 여며놓으신 다음 자신의 자리에서 모포를 집어 강봉수의 어깨에 덮어주시였다. 생각같아서는 자리에 편안히 눕히고싶으시였으나 그러다 모처럼 든 잠을 깨워버리면 다시는 잘 생각을 안할뿐아니라 사령관동지앞에서 잠들어버렸다고 두고두고 자책을 할것이였다. 래일은 본격적인 전투를 해야 할것이며 그 뒤끝에는 전에없는 강행군을 들이대야 한다. 어제 혼마려단은 7련대에 의해 호된 불벼락을 맞은데다 사나운 눈보라에 막히여 일단 추격을 멈추었지만 어차피 부대의 행처를 알아낼것이며 앞에서 대기하고있는 적들 역시 혼마려단과 련계만 짓게 되는 날이면 곧장 부후물치기로 해서 몰려들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 집중되여 접어드는 적을 6도구와 림강―장백대도로방향 그리고 동패자부근의 세개 방향에서 타격을 주어 얼떨떨하게 만든 다음 다시 부대를 세개 방향으로 나누어 일행천리전술로 빠져나가야 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고르롭게 타오르는 우등불에 몇가치 장작을 덧놓으신 다음 조용히 자리로 돌아오시여 천막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시였다.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따금 어느 골짜기에서 쩡쩡 얼음 갈라지는 소리, 어디선가 눈무지 허물어지는 소리가 무중 들려오다가는 다시 괴괴한 정적에 빠져들었다. 숙영지를 돌고있을 풍기사령들의 발자국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잠든 동무들을 깨울가봐 무척도 조심을 두어 걸어다니는 모양이다. 정지성은 이 꽁꽁 얼어붙은채 만물이 숨죽어버린듯 한 밤에 어느 눈벌을 헤매고있는가, 그처럼 혈기왕성하고 생기발랄하던 한태혁이조차 이렇게도 조용한 밤에 큼직큼직한 발자국소리를 내며 돌아올수 없단 말인가.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무리 귀기울여보셔도 아무런 반응없는 바깥동정에 가볍게 한숨을 지으시고 다시 신문을 들여다보시였다. 남패자에서 장경수가 구해들인 그 신문, 잡지들은 이미 두달전의것들이라 이제 볼만 한것들은 별로 없었다. 내각총리대신이 한번 돼보겠다고 그처럼 미쳐날뛰던 전날의 조선총독 늙다리 우가끼대장이 장고봉사건바람에 들창이 나서 겨우 한자리 얻어 한 외무대신자리에서마저 쫓겨났다는것은 쓰거운 웃음을 금할수 없는 일이지만 마치 일본의 정계와 군부내에서의 의견불일치가 쏘련과 싸우느냐, 미, 영과 싸우느냐 하는 문제에 있는것처럼 여론을 오도해보려는 부르죠아출판물들의 잔꾀를 생각할 때 대쏘강경파로 알려져있는 우가끼가 물러났다는것은 그저 스쳐보낼 일 같지도 않으시였다. 그러시다가 문득 고개를 드시였다. 어디선가 멀지 않은곳에서 인기척소리가 느껴지셨던것이다. 《혹시…》 그이께서는 벌떡 일어나시였으나 잠시 생각하시다가 도로 앉으시였다. 일어나 바깥에 나가시였다가 기운차게 돌아오는 두 전사를 맞이하신다면 실로 그 순간에 체험하실 그 기쁨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소중한것을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으실것 같으시였다. 그러나 상봉의 환희가 크면 클수록 기대가 이그러졌을 때의 실망도 클것이였다. 더구나 부대의 급속한 대이동을 예견하고있는 이때 그 실망은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낼것이며 그 아픔은 오래오래 발목을 잡아끌고 놓지 않을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답답하게 죄여드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시며 귀를 강구시였다. (분명 발자국소리 같았는데…) 쩡하고 머지 않은곳에서 몹시 굳은 나무밑둥이 얼어터지는 소리가 한번 울려오더니 이어 괴괴해졌다. 다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겨울밤이 이렇게도 조용할수 있을가? 아마 비수같이 날카롭고 맵짠 강추위가 깡깡 얼어붙어서 바람조차 숨을 못쉬는 모양이다. (착각이였을가?)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천막자락에 손을 대시였다. 성에가 내불리다 못해 두툼한 얼음판이 드리워진듯한 천막자락은 몹시도 무겁게 느껴지시였다. (정동무와 한동무가 돌아왔다면 벌써 온 숙영지가 떠들썩해졌을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슬그머니 천막자락을 놓으시고 돌아서시였다. 그래도 차마 발걸음만은 떨어지지 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팔을 깍지끼시고 이윽히 너울거리는 우등불을 바라보시였다. 굽도리를 따라 줄을 친것처럼 성에가 가로세로 건너간 천막에는 빳빳하게 켕긴 벽에도 싸락눈을 쥐여뿌린것처럼 성에가루가 내불리여있었다. 몹시도 추은 밤이다. 너울너울 춤추는 불빛우에 정지성의 훌쭉한 얼굴이며 벙글벙글 웃는 한태혁의 얼굴이 삼삼히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군 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으시고 결단성있게 자리에 와앉으시였다. 다시 신문을 접어드시다가 아까 본 그 너절한 기사생각이 나시여 한옆으로 밀어놓으시고 이번에는 표지가 너덜거리는 잡지 한권을 집어드시였다. 어느 지물상에 가서 도배지밑지감으로 파는것을 사들였다는 그 잡지 역시 너절한 소리로 가득찬 너절한 휴지장이였다. 그러나 그 역시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이 태동하는 시대의 산물인것만큼 그를 낳은 모태의 병든 생리를 얼마간은 반영하지 않을수 없었다. 《국경경비실상ㅡ 총독부 경무국에서 최근 발표》― 이러한 제목을 읽으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너덜너덜해진 잡지의 표지를 더듬어보시였다. 《삼천리》 1938년 5월호였다. 《이제 소화 6년 9월 즉 만주사변발생이래 소화 11년 6월까지 대안만주에 출몰횡행한 공산당을 보건대 그 출몰회수 23, 928회, 연 인원이 1,369, 027인이라는 경이적 수자로 그 피해는…》 하고 살상피해 도합 20,465명을 각 항목별로 라렬한 다음 불사른 기관수 3,549건, 무기로획 3,179정, 금품로획 개략 2,752,078원이라고 극도로 수자를 줄여서 발표하였다. 《그만한 손실밖에 입지 않았다면 너희들이 그처럼 비명을 지를 까닭이 어디 있겠느냐, 하지만 우리 역시 그런 수자에는 그닥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쳐들고있는 혁명의 기발이지, 그것이 네놈들에게는 몇만명이나 몇십만명의 군대가 녹아난것보다 더 무서울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쓰거운 미소를 지으시며 보나마나한 앞부분을 몇줄 더 읽어나가시였다. 《…항일의식이 극히 왕성하며 수년간 결사적체험을 얻어서 점점 령리하게 되여… 정예의 기관총, 박격포 등 신무기를 가지고있다. 그리고 그들은 상당한 훈련과 통제있는 행동을 취하고…》 계속하여 총독부 경무국장은 보천보전투에 언급하였으나 그 실태만은 차마 까밝히지 못하고 아무튼 무시무시한 존재라는것을 졸렬하고 군색스런 표현으로 널어놓았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 너절한 종이뭉치를 훌 밀어놓으시였다. 그러나 손은 이미 습관적으로 또 다른 책을 집어들고계시였다. 처음부터 역겨운 생각이 드신 그이께서는 이번에는 아예 한중간부터 벌컥벌컥 책장을 번지시였다. 최남선이가 건국대학의 칙임교수로 부임한지 두달이 되는데 동양사를 가르친다는것이며 일본, 조선 합쳐서 6만여명의 전향자들이 《애국운동》을 일으켜 《시국대응합동위원회》라는것을 만들었는데 조선의 전향자수는 1만 2천여명으로서 그 대표로 박영희와 권일이 참가하여 회의 첫날 궁성요배를 했다는 등등 신통히 구역질나는 소리로만 책 한권을 다 메우고있었다. 《박영희라― 이놈이 열렬은 불타버리고 철저는 밑이 빠졌다고 뇌까린 바로 그놈이지… 과연 우리 조선에 이러한놈이 만여명이나 된단 말인가?》 김일성동지께서는 침중하신 목소리로 뇌이시였다. 저놈들이 저들의 피해수자는 흠뿍 줄인대신 이따위 너절한 인간쓰레기들의 수자는 까지껏 늘구었을것이 분명하지만 혁명을 모욕한자의 독기서린 말까지 상기하시고보니 분노가 가슴속깊이에서 소리없이 끓어오르시였다. 《열렬은 불타버리고 철저는 밑이 빠졌다고… 그래서 너희놈들은 궁성요배를 하고 칙임교수가 되여 우리 혁명가들에게 투항권고문까지 만들어냈단 말이지? 아니다! 우리는 불타버린것이 아니라 영원히 불타오를것이다. 그리고 철저히 밑이 빠질 때까지 네놈들 제국주의와 지주, 부르죠아를 쓸어버릴것이다. 열렬은 인민을 위한것, 참된 인간을 위한것이며 철저는 파쑈와 지주, 부르죠아들 그리고 그 머슴군들인 너희들, 인간의 탈을 쓰고 박쥐같이 행세하는 기회주의문사들을 위한것이다. 열렬도 철저도 영원히 생동한 공산주의자들의 구호로 남아있을것이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천천히 일어나시여 천막안을 거니시였다. 가슴이 답답하시였다. 정지성이와 한태혁이가 몇말의 소금을 위하여 지금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고있을지도 모르는 이때 그 아름다운 인간들을 모욕한 가장 추악한 인간들의 추악한 언행을 상기하시게 된것이 류혈의 싸움보다도 더 큰 전투의욕과 긴장을 느끼시게 하였다. 좁은 천막안은 안타까운 련민과 사랑 그리고 끝없는 분노와 용솟음치는 투쟁의욕이 해일처럼 함께 뒤설레이는 장군님의 가슴을 용납하기에는 너무나 숨가쁜 세계였다. 그이께서는 외투를 어깨에 걸치신채 천막자락을 들치시고 바깥에 나서시였다. 쨍하고 칼날같은 추위가 날카롭게 서슬을 돋치고있다. 빠지직빠지직 발밑에 밟히는 눈이 벌써 얼음장처럼 깡깡 얼어붙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하늘높이 걸려있다. 만물이 얼어터질것만 같은 이 혹한의 밤정경이 무엇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이리도 아름다운것인가! 우주가 무한대로 넓고 높다는것 그리고 무한히 아름답고 깨끗하다는것을 가슴 저리도록 느끼게 하는 그러한 달밤이였다. 그리고 혁명의 길은 무한히 넓고 아름답되 무자비한 희생과 철저한, 용서없는 대결을 요구한다는것을 사무치게 느끼게 하는 차겁고 맵짠 밤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숲속을 걸으시여 산말랭이로 오르시였다. 침엽수림인지 활엽수림인지 전혀 구별되지 않는 숲을 한참이나 걸어나오시니 문득 한옆으로 틔여지는 하늘에 다시 파란 별과 달이 나타났다. 파랗게 얼어서 떠는 그 별과 달을 바라보시니 마치 시간자체도 얼어붙은것처럼 느껴지시였다. 우리 혁명의 전사들은 지금 어느 눈벌을 기여오고있는가? 만물이 얼어붙은 이 추운 밤, 기한에 떠는 우리 인민들을 구원하자는 그렇게도 뜨겁게 불타던 그 심장을 가지고도 그들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한단 말인가. 사령관동지께서는 끝없이 넓게 펼쳐진 백설의 대지, 달빛 젖은 산줄기와 숲의 바다를 굽어보시면서도 좁은 천막안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답답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살을 저미듯이 찌르고드는 추위가 차라리 좋으시였다. 잠시 한자리에 서계시던 장군님께서는 군복 목단추 하나를 끌러놓으시고 어깨에 걸치신 털외투를 한번 추슬리신 다음 또다시 발길을 옮겨놓으시였다. 얼어붙어버린듯 한 시간은 그런대로 소리없이 흘러가고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 김일성장군님께서 거니시는 머리우에서 별빛들은 어느새 지새여가고있었다. 외투의 깃이 날렸다. 새벽바람이 터진것이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문득 발길을 멈추시였다. 발밑에 무엇인가 색다른 검은것이 눈속에 박혀있다. 그이께서는 허리를 굽히시고 눈과 함께 얼어붙은것을 뜯어내시였다. 산까치가 눈보라에 맞아 허공에서 태질을 당한 모양이였다. 날아가는 새조차 이렇게 구겨박힐 때 우리 동무들은 어디에 있었을가? 대렬은 눈사태 허물어지는 7도구치기의 사나운 골짜기를 톺아오르고있었다. 7련대는 그속에서 추격해오는 적들을 맞받아 결사적인 싸움을 벌리고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되였는가? 그이께서는 새까만 얼음덩어리로 변한 산까치의 매칠한 깃을 쓸어보시며 그들이 돌아와야 할 감투봉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시였다. 《과연 성화로군. 어떻게 세상을 혼자…》 이게 무슨 소린가? 그처럼 깊이 잠들어 영원히 깨여날것 같지 않던 바람이 다시 눈을 떴다. 나무가지가 설레인다. 침엽수림인지 활엽수림인지 구별하기 어렵도록 눈가루를 들쓰고있던 숲정수리에서 눈무지가 허물어져내린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바람소리였을가. 발밑은 눈사태가 나서 깎아지른듯이 솟아있는 벼랑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천천히 설레이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시며 방금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벼랑밑을 숨을 죽이시고 내려다 보시였다. 눈무지가 허물어져내린다. 저것도 바람작간일가, 하지만 자연의 조화로서는 너무나 규칙적이 아닌가? 《좀 가만있소!》 이번에는 퉁명한 소리가 똑똑하게 들리였다. 뒤따라 무엇인가 불만을 말하는 웅얼거림이 들려온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번쩍 머리를 쳐드시였다. 어느새 하늘에는 새별만이 반짝이고 달빛은 서산마루에 걸려 색이 희슥히 바래여버렸다. (우리 동무들이 돌아오는구나!) 그것을 느끼시는 순간 김일성동지께서는 힘차게 걸음을 옮기시였다. 그들이 올라오기 편하게 발로 눈구뎅이를 하나하나 다지시여 홈타기를 만들며 내려가시는 장군님의 가슴은 행복감으로 달아오르시였다. 이윽고 눈가루같은 단김을 내뿜으며 정지성을 업고 올라오던 한태혁은 저앞에서 눈길을 내고계시는 사령관동지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아차!》 그는 당황하여 업고있던 지성을 내려놓았다. 《사령관동지께서 나오셨소.》 이렇게 속삭이는 한태혁의 목소리는 벌써 떨리고있었다. 《뭐요?》 하나의 얼음덩어리처럼 굳어져있던 정지성은 벌떡 일어섰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여전히 발로 눈을 다지시며 천천히 내려오시고계시였다. 정지성은 서둘러 눈두덩을 비볐다. 성에가 어찌나 두텁게 앉았는지 어지간히 비벼서는 말끔히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광란하는 눈보라, 눈사태, 강추위속에서도 가슴속에 포근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던 그 사랑의 품만은 마음의 눈이 뚜렷이 밝혀주었다. 《사령관동지!》 두 전사는 가파로운 눈벼랑을 허둥지둥 달려올라갔다. 몇걸음 못가서 두사람 다 눈무지를 안고 뒤로 미끄러져내렸다. 《천천히 홈을 내며 올라오시오. 천천히―》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급히 몇걸음 내려오시다가 다시 눈벌에 두손을 짚고 허둥지둥 올라오는 두 전사에게로 손을 뻗치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 내뻗치신 두손을 각각 하나씩 움켜잡은 전사들은 와락 그이의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지성은 그이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버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어깨에 걸치고계시던 털외투를 추슬러내리시여 물결치는 지성의 앙상한 어깨를 감싸안으시였다. 《고생들을 했구만.》 사령관동지께서는 관골과 코등이 하얗게 얼어버린 한태혁을 사랑에 넘쳐 바라보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사령관동지, 그런데 소금짐을 잃어버리고 왔습니다. 사실은 지금 소금짐을 찾노라고…》 한태혁은 저으기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외로 꼬며 거북하게 말씀드렸다. 《그래서 이런 비탈로 올라옵니까?》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너무나 진실한 인간들이 차라리 안타깝게 생각되시여 말씀하시였다. 《내 동무들의 심정을 알만 합니다. 지성동무의 아버지를 찾아다녔겠지? 그래 동무들이 이런 고생을 하며 혁명을 하는데 우리 아버지들이라고 왜 무심하겠습니까? 소금짐은 왔습니다. 로인들도 역시 동무들처럼 이미 혁명의 품을 찾아왔습니다.》 《예?》 사령관동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있던 정지성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저희 집 아버지가?…》 《그렇습니다. 두 로인께서 네짝이나 되는 소금짐을 다 지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흘러내리는 털외투를 다시 지성의 어깨우에 끌어올려 감싸안으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아마 동무의 아버지는 혁명군이 아직 천리밖에 있다고 해도 그냥 씩씩하게 찾아왔을것입니다. 아버지는 동무들이 적들을 달고 달려갔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면서도 전혀 걱정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아무튼 로인들은 동무들이 다 축지법이나 하는 장사로 알고있단말입니다. 허허허.》 《사령관동지, 고맙습니다.》 지성은 다시 사령관동지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유격대에서는 그중 나이 많은 축이고 인테리가운데서도 세상 쓴맛을 다 보아온 인테리라 지성이가 그렇게 사령관동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우는것이 한태혁이에게는 다소 뜻밖이긴 하였으나 어쩐지 그의 가슴도 자기의 감격만이 아닌 동무의 진정의 발로가 가져다주는 눈물때문에 흥건히 젖어들었다. 그러나 투박한 사나이인 그는 이런 때 어울리는 차분한 말을 할줄 몰랐다. 《에―참, 그럴줄 알았으면 그 산림대의 산막에 들려서 만두라도 몇개 얻어먹고 오는건데… 정말 배가 고파 혼났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한태혁의 희떠운 소리를 너그럽게 웃으며 받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사랑하는 두 전사를 한옆에 하나씩 끼시고 이미 내놓으신 눈홈을 따라 숙영지로 오르시였다. 《사령관동지!》 한참 올라가던 한태혁이가 문득 심중한 목소리로 불렀다. 《왜 그럽니까?》 《제 이 코를 좀 봐주십시오. 어떻게 이상해졌습니다. 그전에 7련대 4중대에 있던 장동무가 눈구뎅이에 하루 묻혔다가 동상을 입어서 발가락을 잘랐다는데 이거 제코가 그렇게 되면 야단 아닙니까?》 《어디 봅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태혁의 코와 볼에 동상이 왔다는것을 느끼고계셨기때문에 긴장되시여 한손으로 태혁의 든든한 턱을 받치시고 동쪽으로 얼굴을 쳐들게 하시였다. 동쪽하늘에 금빛노을이 뻗쳐오르고있었다. 《일없겠습니다. 가만, 이렇게 눈가루로 문댑시다. 동상을 입기는 했으나 가볍습니다. 눈으로 문대서 녹이면 떨어지지는 않겠습니다.》 한태혁은 사령관동지께서 눈을 한웅큼 움켜쥐시고 문대려드시자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일없겠습니까?》 《일없습니다. 이리 오시오. 또 녀대원들에게 성화를 먹일 생각은 말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억지로 한태혁의 어깨를 잡아당기시여 손에 움켜쥐신 눈으로 그 사나이답게 생긴 코등을 박박 문대시였다. 눈가루가 흩어져서 목덜미로 흘러들자 태혁은 흠칠흠칠 놀라며 기회만 있으면 사령관동지의 손에서 벗어져나보려고 버드럭거렸다. 몹시 얼얼한 모양이였다. 마치 어린 자식을 닥달하는 부모와 같이 새벽바람부는 산말랭이에 서시여 세상만사를 잊으신듯 그 일에 정신을 다 팔고계시는 사령관동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지성은 거듭 눈을 슴뻑거렸다. 그는 사령관동지의 포근한 털외투를 어깨에 걸친채 그냥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있었지만 몸은 벌써 극도의 정신적긴장끝에 찾아든 너무나 큰 안정감에 익숙해질수록 걷잡을수 없는 잠에 빠져들어가는것이였다. 잠시후 사령관동지께서는 다시 두 전사를 량어깨에 끼시고 한발자국한발자국 눈홈타기를 톺아 가파로운 산정으로 오르시였다. 부채살마냥 뻗쳐오른 새벽노을이 순결한 눈세계를 연분홍빛으로 물들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 오르시는 눈벼랑은 마치 수정으로 깎아낸 층층계처럼 그 연분홍빛 눈벼랑너머 아득히 사라져간듯 하였다. 18
동이 터가지고도 겨울날의 밀림이 밝자면 한시간은 잘 걸리였다. 어둑어둑할 때부터 작식대원들은 아침준비를 서둘렀다. 그래도 군수관은 역시 군수관이였다. 먹을만한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왔고 실지 먹지 못해 쓰러지는 사람이 련대마다 늘어갔지만 아무 수도 쓸수 없었던 조진범이 일단 소금이 나타났다는 이 마당에 이르자 이 배낭 저 배낭을 들추어서 갖가지 예비를 다 꺼내놓았다. 산나물 말린것도 있고 어느 채마밭에서 걷어온 시래기도 있었으며 많지는 못해도 버섯까지 몇줌 꺼내놓았다. 게다가 전날 잡은 노루고기가운데서 소금이 없어 먹지 못하겠다고 내놓은 녀대원들의 몫까지 그의 배낭에서 나왔다. 백두산근거지때부터 차던 축구뽈까지 들어있는 조진범의 배낭은 원래 화수분이라고 소문난 유명한 배낭이였다. 두 로인이 지고온 낟알은 구분대별로 골고루 분배하고 나머지는(나머지란 몫은 정하기에 달린것이니 아무리 물건이 적을 때도 딱 맞아떨어지는 법이란 없다. 항차 오늘 굶더라도 래일 잘 먹이기를 좋아하는 속깊은 군수관이 있는 조건에서 나머지가 어찌 없겠는가.) 다시 군수관이 관리하는 배낭들속에 깊숙이 간수되였다. 소금이 생기니 시래기나 마른 산나물로 국도 끓일수 있고 거기에 낟알을 두고 죽도 쑬수 있다. 고기까지 몇점 두게 되면 그것은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음식이다. 오래 주렸던 몸이라 된밥을 먹기보다는 차라리 이러한 죽이 더 좋을수도 있다. 취사장들은 흥성거렸다. 지쳐서 늘어졌던 작식대원들이 날파람이 일어서 분주히 돌아갔다. 특히 7련대의 일부는 아침식사를 마치면 인차 전투에 떠나야 하였다. 사령관동지의 작전적구상에 의하여 세개 방향에서 일제히 적을 치게 되였는데 7련대에서 선발된 습격조는 림강―장백 대도로방향으로 진출하게 되였다. 그들은 거리가 제일 멀기때문에 맨 선참으로 떠나고 뒤를 따라 8련대의 습격조는 6도구방향으로, 경위중대의 일부와 독립대대는 동패자부근의 목재소들을 향하여 떠나게 되여있었다. 날이 밝자 날씨는 여전히 맵짰으나 흥성거리는 숲속의 분위기에 알맞게 밝은 해빛이 눈벌을 비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배낭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다니던 쌀주머니와 방금 군수관에게서 타가지고온 쌀과 산나물을 벌려놓고 한참이나 고개를 기웃거리며 궁리를 하였다. 철구아주머니가 그렇게 헛소리를 치며 남의 등에 업혀오던 사람같지 않게 일어나서 죽에 둘 산나물을 다듬겠다고 하도 성화를 대는바람에 어쩔수 없이 밀어맡기였다. 산나물이래야 행군도중 휴식때마다 양지바른 산기슭이나 숲속의 눈을 헤치고 말라붙은 고사리며 곰취따위를 한잎 두잎 뜯어서 모은것들이다. 녀대원들의 배낭을 다 들추어도 한바구니가 되나마나한데다 어찌나 깐깐하게 골랐던지 다시 다듬을나위도 없이 깨끗한것이였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끼니를 끓이게 된 이때 작식대원이 누워있을수 없다는 철구아주머니의 말은 녀자치고 누구에게나 다 리해되는것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소금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간밤부터 궁리하신대로 한줌 되락마락하게 남아있는 콩을 가지고 자반을 만들리라 작정하시였다. 작식대의 우등불은 언제나 불이 괄다. 전령병들이나 기관총수들은 기회있을 때마다 작식대에 가장 좋은 나무를 해들이군 하였다. 그러니 산나물 몇줌을 두고 죽을 쑤는것은 삽시간에 끝낼수 있다. 그전에 콩자반을 만들어야 오래간만에 사령관동지께 소박하나마나 좋아하시는것을 올릴수 있을것이다. 김정숙동지의 마음은 밝았다. 《소금이 생길줄 알았으면 미리 콩을 불쿼두는건데 마른것을 갑자기 졸여서 굳어지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중 자그마한 양은소랭이에 방금 씻어가지고 온 콩을 두고 소금물을 쳐서 슬슬 저으시며 가벼운 마음으로 걱정을 하시였다. 《첫끼는 아무래도 좀 딱딱하겠지.》 하고 철구아주머니도 다 다듬어 눈녹인 물에 씻어서 불군 산나물을 한줄기한줄기 더듬어보며 실눈을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손길을 멈추고 먼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번 전투에서 저놈들을 다 물리치게 되면 어떻게 될가? 곧 장백으로 나가게 될가?》 《그야 조국으로 진출하여 유격전을 크게 벌리자는것이 사령관동지의 방침이니까 그놈들이 또 따라온다 해도 장백으로 나갈건 틀림없겠지요뭐.》 김정숙동지께서는 벌써 졸아드는 양은소랭이를 군복치마자락으로 감싸서 쳐들고 한편으로 장작을 한옆으로 헤쳐서 불길을 수그러뜨리며 말하였다. 《너무 갑자기 졸이면 간이 배지 않아서… 그런데 날씨는 그냥 풀리지 않아요. 이젠 좀 풀릴것도 같은데…》 김정숙동지께서는 손등으로 이마전을 가리우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이시였다. 파랗게 높이 개인 하늘에 얼어서 식어버린듯 한 겨울의 해가 엷은 빛을 뿌리고있었다. 철구아주머니는 입을 다물고 시름없이 나무등걸에 기대앉아있다. 아무래도 몸이 걱정인 모양이다. 《장백에 나가도 그냥 전투를 해야 할텐데… 혹시…》 철구아주머니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얼핏 김정숙동지를 곁눈질해보았으나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런 눈치를 채고도 알은체하실수가 없었다. 철구아주머니의 걱정은 너무나 현실적인 근거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적의 포위와 추격을 물리치며 나오는 길이였으니 어쩔수 없었지만 이제 낯익은 장백땅에 들어선데다 더욱 전투와 행군이 간고해질 가능성이 많으니 어딘가 안전한 밀영이나 지방조직에 앓는 사람들을 맡겨두고 전투부대만 떠날수도 있다는것은 어느모로 보나 있음직한 일이였다. 밀림의 분위기가 흥성거리고 전투를 떠나는 대오가 숲속을 누벼나갈 때 한시도 사령부를 떨어져서는 살것 같지 못하다는 철구아주머니가 그 일을 걱정하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였다. 《언니, 우리도 식사를 서둘러야겠어요.》 금숙이가 쌀을 씻어들고 달려오며 말했다. 《그래, 준비는 다 됐어. 얼른 안치자구.》 김정숙동지께서는 알맞춤하게 졸여진 콩자반을 내려서 조심스럽게 덮어놓고 소랭이들을 주런히 걸으셨다. 죽을 다 안치고 여러 소랭이에 골고루 화기가 미치게 불을 지피시니 숲속이 훤히 밝아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서둘러 품속에서 곱게 수놓은 길쑴한 주머니를 꺼내셨다. 굽도리를 색실로 감친 그 좁다란 주머니에서 은수저 한벌이 나왔다. 그것은 김정숙동지께서 언제나 따로 건사해가지고 다니시는 사령관동지의 수저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이어 배낭속에서 기와가루주머니를 꺼내여 펼쳐놓으시고 한점 흐린데 없는 수저에 기와가루를 묻히셨다. 그리고는 찬바람아래 소매를 걷어올리고 수저를 닦기 시작하셨다. 짬만 있으면 닦는 수저였다. 사치한것이라고 있을수 없는 험한 밀림속에서 제아무리 어려운 전투정황에 부닥쳐도 언제나 김정숙동지의 마음속처럼 반짝거리는 귀중한 은수저였다. 그가 사령관동지의 식사를 받들게 되면서 첫 전투에 나가 모든것 다 뒤로 미루고 구해온것이 이 은수저였다. 그것은 단지 사령관동지의 식사를 좋은 수저로 받들고싶다는 생각때문에만 그런것이 아니시였다. 유격대의 식량이란 태반이 적들을 쳐서 빼앗은것들이였다. 더구나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처리되는 식량이였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여기저기 옮아다니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십상 모르는 일이였다. 그러기에 어떤 독물이든지 닿기만 하면 흐려드는 은수저를 구하기 전까지는 오백룡이도 다른 간부들도 마음을 놓지 못해하였다. 그런데 김정숙동지께서 일부러 전투에 나가 은수저를 구해왔을뿐아니라 그것을 식사때는 말할것 없고 짬만 있으면 닦으시는것을 본 다음부터 그 문제에 대해서만은 마음을 푹 놓는 눈치들이였다. 보얀 은백색바탕에 기와가루가 그리는 푸릿한 무늬가 아침해살아래 연보라빛으로 아롱거리는 숟가락을 새하얀 숫눈우에 올려놓고 저가락을 집어드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다시 그것을 쳐드시고 앞뒤로 뒤집어보고 손바닥으로 쓸어보군하시였다.아무리 부드럽게 쓸어도 손바닥의 잔금이 그대로 드러나는것을 보시고야 마음을 놓고 저가락을 박박 문대여나가셨다. 금숙은 김정숙동지의 옆얼굴에서 률동적으로 흔들리는 귀밑머리를 실눈을 짓고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거들고싶지만 이 일만은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는 김정숙동지이시기때문에 번히 눈앞에 놓인 저가락 한짝을 보고도 그냥 가만히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하기는 이런 때 김정숙동지의 모습을 바라보고있느라면 꼭 그이께서 닦고있는것이 바로 자기의 마음속같이만 생각되여 그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제 가슴에 옮겨놓고싶을뿐 다른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동무 봤어?》 김정숙동지께서는 기와가루 묻은 손등으로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기시며 밝은 목소리로 넌지시 물으셨다. 《봤어요.》 금숙은 피뜩 고개를 돌려 김정숙동지의 눈치를 살피더니 짤막하게 대답했다. 《정말 동상을 많이 입었어?》 《아무 일 없어요. 사령관동지께서 손수 문대주시구 해서 아무 일 없대요.》 《사령관동지께서? 어느새 사령관동지께서 다 아셨을가? 새벽에 돌아왔다면서…》 김정숙동지께서는 저쯤 바라보이는 사령부천막을 돌아보며 물었다. 《만나뵙자마자 제코가 일없겠습니까 하고 엄살부터 부렸다는걸요. 참, 사령관동지께서 꾸중을 하실 대신 그렇게 갓난애기처럼 얼려만 주시니… 그래서 그 동문 더 희뜩해서 돌아가지요뭐.》 김정숙동지께서는 다시한번 사령부쪽을 돌아보시였다. 커다란 사나이가 응석을 부리며 서있는 광경이며 사령관동지께서 그들을 기다리시다 못해 남 다 자는 한밤중에 눈벼랑을 거니시며 애타게 기다리시던 모습 그리고 돌아온 대원들이 하도 반가우시여 눈으로 코등과 볼을 문대주시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가슴속이 무둑하게 감격이 차오르고 코마루가 알싸하게 매워왔다. 《정말 상한것은 정지성동지래요. 한태혁동무는 배고파 죽겠다고 취사장으로 달려오는걸 내가 말렸어요. 그런데 정지성동지는 아마 일어나지 못한 모양이예요. 그래서 아버지랑 또 같이 온 그 로인이 거기에 붙어앉아있는데 얼핏 보니까 몹시 안색이 흐렸어요.》 《왜 그렇지 않겠어. 정말 여느 사람이 그런 일을 겪었다면 진작 주저앉고말았을것 아니야. 그래서 이런 눈구뎅이에 묻혀 얼어죽고말았을거야.》 《정말 정지성동지가 그렇게 굳센 동진줄은 난 몰랐어요.》 금숙이도 자랑에 차서 속삭이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죽은 벌렁벌렁 끓는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모두를 그렇게 굳센 투사들로 길러내시니까 그렇지. 이 세상에 사람처럼 귀중하고 힘찬것이 없다고 늘 가르치시지 않어. 난 정말 남패자에서 다른 부대 동무들을 만났을 때 직접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싸우는 우리의 행복을 새삼스럽게 느꼈어.》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윽한 눈매로 활짝 개여오른 하늘 한끝을 바라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등판이 높아서 곧추 바라보아도 퍼런 하늘이 맞바라보였다. 19
김일성동지께서 천막안에 들어서시니 강봉수랑 재영이가 아침식사를 받아올 차비를 하고있었다. 《벌써 식사가 다 됐소?》 사령관동지께서는 전에없이 밝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우등불앞에 가앉으시였다. 《전투에 나가는 동무들은 벌써 다하고 경위중대랑 기관총소대는 지금 막 시작하려는중입니다. 그런데 정숙동무가 찬을 만드느라고…》 강봉수가 오히려 거북한 어조로 아침이 늦어지는 까닭을 말씀드렸다. 《정숙동무가 또 찬을 만들었단 말입니까? 허허허, 굉장한 성찬이 나오겠구만, 그렇다면 기다려야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사실 마음속이 무거우신데다 입안이 깔깔하시여 무엇을 드실 생각이 없으시였다. 《예, 콩장을 좀 했답니다. 이제 가져올것입니다.》 강봉수가 미처 말을 맺기도전에 다급한 발걸음소리가 다가왔다. 김정숙동지이시였다. 사령관동지의 식사를 받들기 위하여 그가 사령부의 풍으로 무수히 드나드셨지만 바람처럼 소리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군 하시는 그의 조용하고 다심한 성미를 잘 아는 강봉수도 재영이도 눈이 둥그래졌다. 사령관동지 역시 이상한 생각이 드시였다. 도대체 전투정황이 아닌 조건에서 경황없이 덤비거나 내달리는 김정숙동지의 모습은 보신적도 없고 상상하실수도 없으시였다. 《사령관동지!》 김정숙동지께서는 어찌나 세차게 달리셨는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이마를 가리웠으나 그런것을 돌아볼 경황도 없이 천막안으로 뛰여들어 곧장 사령관동지앞으로 달려오셨다. 그리고는 재영이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숨가쁘게 말씀하셨다. 《사령부에는 소금이 오지 않았습니까?》 《소금? 갑자기 소금은 왜 찾소?》 사령관동지께서는 김정숙동지의 말뜻을 새기실수가 없으시여 이렇게 되물으시면서도 역시 재영이쪽을 바라보시였다. 《소금말이예요? 우리는 가져온것 없어요.》 재영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듯 미심쩍게 말하였다. 《그럼 혹시 누가 먹지는 않았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더욱 다급한 목소리로 안타깝게 물으셨다. 《아니요. 언제 먹을 사이가 있어요? 밥도 못먹었는데…》 재영은 점점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눈을 디룩거리며 대답하였다. 《왜 그럽니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어쩐지 심상치 않은것을 느끼시고 조용히 물으시였다. 그러자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우에 두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떨구어버리셨다. 《아, 다행입니다. 소금을 아무도 잡숫지 마세요. 정말, 정말, 아무도 소금을 들지 마세요. 그 소금은 무서운 소금이예요.》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놀라시여 한쪽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고 물으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너무나 억이 막혀 두손을 움켜잡고 비틀며 어깨를 들먹거리시였다. 《제가 부주의해서… 하마트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이윽고 김정숙동지께서는 정신을 수습하시고 말씀드렸다. 《제가 모처럼 소금이 생겼기에 콩자반을 만들었습니다. 사령관동지께 올리려고 사령관동지의 수저로 딴 그릇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은수저가 자꾸만 흐려들었습니다. 암만해도 이상하길래 소금을 한줌 불속에 넣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불이 펄펄 일었습니다.》 《뭐요? 그렇다면 독약이 들었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김일성동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강봉수도 재영이도 벌떡 일어났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더는 드릴 말씀이 없어 그저 고개를 떨구고 울기만 하였다. 하마트면 큰일날번 했다가 다행히 별일없이 수습됐다는 크나큰 기쁨이 그처럼 강의하던 녀전사의 마음을 걷잡을수 없이 뒤흔들어놓은것이였다. 《나가봅시다. 경위중대에는 알렸습니까?》 《예, 금숙동무가 달려갔습니다. 8련대랑 독립대대에도 옥금동무가 갔는데 아마 습격조에 나갈 동무들은 아침식사가 끝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위중대에 오니 의견이 분분하였다. 여기에 비서처에서도 기관총소대에서도 다 모여들어서 떠들어대고있었다. 《콩장이 그렇다고 죽까지 못먹을거야 있소. 난 배가 고파 죽겠는데…》 죽사발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뻗대는것은 장경수였다. 《죽에도 소금이 들었어요. 동무는 알만한 동무가 왜 이렇게 미련을 부려요. 어서 죽사발을 내세요.》 금숙이가 안타까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참 난 무슨 소린지… 7련대 습격조는 그 죽을 먹고 전투에 벌써 떠났는데 재채기도 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소?》 장경수는 죽을 꼭 먹고싶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것이 있어서 자꾸 따지고든다. 《한동무, 이거 대체 어떻게 된 판이요?》 강철룡이 옆에 서서 엉거주춤 바라보고있는 한태혁에게 물었다. 세상 반죽좋은 한태혁이도 제가 가져온 소금에 독약이 들었다는 바람에 골이 뗑해서 입만 우물거릴뿐 말을 하지 못한다. 금숙이가 낯빛이 파랗게 질려서 이제는 구구하게 누구의 의견을 들을것도 없다는듯이 죽사발들을 걷어모아 소랭이에 쏟아부었다. 《쌍, 빌어먹을 두상들, 당장에 달아매고말아야지.》 장경수가 죽사발을 빼앗기고 비서처 천막쪽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특무가 분명하군.》 누군가가 뒤전에서 웅얼거리는데 최병규가 태혁이쪽을 눈짓하며 그 사람의 옆구리를 건드린다. 태혁이 듣는데서 너무 그러지 말라는것이다. 한태혁은 술렁거리는 동무들을 얼빠진 사람처럼 바라보더니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놓았다. 안될 때라 고개를 숙이고 가던 그는 죽소랭이를 안고 흥분해서 종종걸음을 치는 금숙이와 딱 마주쳤다. 《동무는 뭐예요? 책임감을 좀 느껴요!》 하마트면 죽소랭이를 안고 나가넘어질번한 금숙은 맵짜게 내쏘았다. 그래도 한태혁은 멍하니 금숙이의 할딱거리는 모양을 바라볼뿐 말을 하지 못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코등과 관골이 푸르죽죽하게 언데다 간밤에 눈으로 문대는바람에 가죽까지 벗겨져서 보풀이 인것처럼 꺼칠해진 한태혁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시였다. 일부 대원들이 이미 소금을 먹은 이때 그 소금에 독약이 들었다는것은 전투에서 한두사람이 실수를 한것과 같은 일로 볼수가 없다. 실로 혁명전반의 운명이 이 문제에 걸려있다고 볼수도 있다. 독을 친 소금을 먹은 7련대의 습격조는 이미 전투에로 떠나갔다. 만일 소금에 독약이 든것이 사실이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독될수 있다. 적은 불과 20리 안팎에서 포위를 형성하고있다. 이런 형편을 한태혁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다. 그런데 그 소금인즉 바로 그자신이 동상을 입으며 갖은 고생끝에 구해온 바로 그 소금인것이다. 마침 오백룡이 나타났다. 《로인들은 눈치를 챘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무거운 어조로 물으시였다. 《아직 자고있습니다.》 오백룡이도 고개를 숙인채 낮게 말씀드렸다. 《정지성동무는?》 《그 동무도 아직 깨여나지 못했습니다. 아주 곯아떨어져서…그냥 두면 며칠이라도 잘것 같습니다.》 《그럼 그 동무들은 일단 그냥두고 경위중대에서 소금을 모두 회수하시오. 군수관을 불러서 내준 량과 쓴 량을 대조해서 하나도 남기지 않도록 하시오. 강봉수동무는 박덕산동무에게 가서 8련대와 독립대대의 출발을 중지시키시오. 그리고 경위중대도 전투에 나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대신 기관총소대의 일부를 7련대습격조가 간곳으로 내보내시오. 그 동무들이 만일 독을 먹은채로 전투에 진입했다면 사태가 험해질수 있습니다. 그러니 건장한 동무들로 조직하여 될수만 있으면 그 동무들을 전투전에 따라잡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백룡이와 강봉수가 달려간 다음 사령관동지께서는 한태혁을 데리시고 사령부로 가시였다. 한태혁은 소금을 구해들이던 경위를 다시 낱낱이 말씀드렸고 거기에 관련됐던 모든 사람들의 동향과 그후 움직임에 대해서도 다 보고하였다. 한태혁이나 정지성이가 사업한 경위를 보건데 주종섭로인이 란전에서 어떤 사람들과 관계했는가 하는것이 좀 미타할뿐 그밖에는 사람들을 고르는 문제로부터 소금을 사들이고 짐을 꾸리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빈구석이라고 있어보이지 않았다. 《나가보시오.》 이야기를 마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침울하게 앉아있는 태혁에게 말씀하시였다. 《나가되 내 한가지 과업을 주겠습니다. 동무는 절대로 이러한 일때문에 고민하고있다는것을 동무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사태는 엄중합니다. 여기서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단순히 동무들의 부주의나 어떤 개별적인물의 작간이라면 차라리 사태가 그렇게 엄중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이제 시험을 해봐야 알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소금을 먹고도 아직 아무일 없는 동무들도 있습니다. 례를 들면 7련대에서 내보낸 습격조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러니 생각보다 문제가 더 엄중한것 같습니다. 동무도 이런 점을 생각해서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며 이 후과를 어떻게 수습할것인가에 대하여 연구해보시오. 얼굴을 찌프리고 다녀봐야 우리 혁명에 아무런 도움도 못줍니다. 주종섭로인이 어떤 사람들과 접촉하였으며 소금이야기를 어떤 사람들이 알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동무가 알수 있는데까지 기억을 더듬어서 문제를 잘 해명하도록 해보시오.》 한태혁이가 나가자 뒤미처 박덕산이 달려오고 잇달아 오백룡, 군수관, 조직과장, 강철룡들이 달려왔다. 소금은 거두어들인대로 불에 넣어봤는데 다 독이 들어있다는것이 판명되였다. 그런데 이미 죽을 먹은 사람들이 더러 있건만 모두 아무렇지도 않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소금을 못먹게 한데 대해 대단히 의견이 많다는것이였다. 한편 경위중대와 기관총소대에서는 자기들의 기본임무가 있는것만큼 당장 두 령감을 달아매자고 떠드는 동무들도 있는가 하면 작식대에서 공연히 콩장같은것을 만들어가지고 죽마저 못먹게 했다고 부어오른 천진한 동무들도 있다는것이였다. 독립대대의 신대원들가운데는 소금을 그냥 먹겠다고 나서는 동무들까지 있다고 한다. 《우선 로인들을 좀 만나보는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조직과장이 갱핏한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띠고 의견을 말씀드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너울거리는 불빛을 바라보실뿐 조직과장의 의견에 대해서는 못들으신것처럼 잠자코 계시였다. 《이게 참 조화는 조화가 들었단 말입니다. 내가 군수관사업을 몇삼년째 해오지만 이런 일이라고는 없었는데…》 평소에 그렇게도 태평스럽던 군수관이 뚱뚱한 몸집을 거북살스럽게 틀며 옆사람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그러나 박덕산이도, 오백룡이도 입을 꾹 다물고 오직 사령관동지만 지켜볼뿐 그의 난처한 립장을 변명해줄 생각은 하는것 같지 않았다. 《7련대습격조가 떠난지 얼마나 됐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천천히 회중시계를 꺼내보시더니 누구에게라없이 물으시였다. 《이젠 거의 한시간가까이 되였습니다.》 《기관총소대동무들이 따라잡자면 아직도 한시간나마 있어야 하겠군.》 사령관동지께서는 혼자말처럼 조용히 외이시더니 다시 우등불을 바라보시였다. 무거운 침묵이 천막안에 잦아들었다. 어디서나 불행은 외따로 찾아오는 법이 없다. 남패자를 떠나 벌써 한달나마 련속되는 전투와 강행군속에서 옷은 다 처지고 몸은 극도로 지쳤다. 벌써 낟알을 보지 못한지가 열흘 가까이나 된다. 그런데 적은 앞뒤에 달리고 추위는 갈수록 맹위를 휘두르고있다. 장백지경에 들어서니 눈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령하 40도의 혹한도 살이 비죽비죽 내민 옷도 다 해진 신발도 그리고 주림과 피곤도 지어 앞뒤에 수만씩 달리여 접어드는 원쑤들도 혁명전사들의 앞길을 멈추어세우지 못할것이다. 다만 1방면군방향에서 적지 않은 손실이 있은듯한 불길한 소문이 떠도는 이때 적지 않은 전사들이 독친 소금을 먹고 중독됐다는 사실만은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였다. 이것이 어찌 우연한 사실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두 로인가운데서 누가 원쑤와 관련되여있을것인가? 정지성의 아버지가 그러한 소금을 일부러 지고왔다면 정지성은 그것을 몰랐겠는가? 하기는 정귀하로인이 완고하다는것은 그의 아들인 정지성이도 내놓고 말하고있다. 거기에다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그 집안에 불행밖에 가져다준것이 없는 사위란놈이 주구로 전락된 사실까지 이 사건과 결부시키려드는 동무도 없지 않았다. 그럼 주종섭로인은 어떤 사람인가? 유성촌으로 이사오기전에 한때 조국광복회에도 관계했다는 그가 무엇때문에 그사이 조직과의 련계를 끊고 란전을 벌리게 됐는가? 그가 조직과의 관계를 흐지부지해버렸을 때는 아직도 압록강연안, 특히 하강구에서 우리 혁명의 기세가 매우 높은 때였다. 어쨌든 그 소금을 사들여서 꾸려온것이 그들 두 로인이니 우선 그들을 문초해보는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것이였다. 박덕산도 오백룡이도 그리고 차츰 더 뒤꼬여드는 배를 움켜안은 강철룡도 모두 말라드는 입안을 침으로 추기며 사령관동지의 안색만 지켜본다. 그이의 침묵은 참으로 이 엄혹한 시대의 세기적인 중압을 하나의 좁은 천막안에 다 몰아온듯 하였다. 참혹한 시련을 앞에 두고 묵묵히 생각에 잠기신 그이의 모습을 본다는것은 마치 혁명과 조국자체의 운명을 보는듯 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동무들!》 마침내 그이께서는 고개를 드시였다. 그러나 생각했던것과는 달리 그이의 음성이나 안색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시였다. 《참으로 좋지 못한 징조입니다. 아마 놈들은 우리와 결판을 내자고 할것 같은데 별수없이 여기서 싸워야 하겠습니다.》 지휘관들은 그이의 부드러우신 목소리를 침중한 낯빛으로 들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용히 말씀을 이으시였다. 《죽을 먹은 동무들을 안전한곳으로 철수시키고 7도구치기방향과 부후물방향을 경위중대에서 맡아서 경계초소를 배치하시오. 전투준비를 철저히 갖추어야 하겠소. 중독증상이 나타나면 미리 재물을 밭아두었다가 먹이고 심한 동무들은 토하게 하거나 총기름으로 가지고 다니는 피마주기름이 있을수 있으니 그것들을 거두어서 먹이도록 해보시오. 군의동무에게 무슨 제독작용을 하는 약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조직과장동무는 군의와 잘 협의해서 필요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시오. 그리고 8련대와 독립대대의 예비탄약들을 모두 경위중대와 기관총소대에 넘기도록 하시오.》 지휘관들은 사령관동지의 말씀이 차츰 깊어감에 따라 그 말씀에 깃들어있는 사태의 엄중성을 현실적인 감각으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지휘관들이 명령을 받고 다 돌아간 다음에도 김일성동지께서는 고깔불앞에서 움직이지 않으시였다. 시간은 매우 굼뜨게 흘러가는듯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 어떤 결정적인 사태에 대한 초조한 기다림에서 오는 감정일뿐 예견했던 불행은 련달아 일어났다. 군의가 배낭을 다 털어서 인동이며 차전자며 길경이며 하는 제독에 좋다는 약재들을 달여먹이고 녀대원들의 배낭을 들추어서 녹두와 마른 미나리도 삶아먹였지만 배를 움켜쥐고 돌아가거나 구토설사를 만나 축 늘어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당장 배를 안고 돌아가는 동무들에게는 피마주기름을 먹여서 설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놓고보니 가뜩이나 굶은 사람들이 아주 맥을 놓고 주저앉아버렸다. 녀대원들은 우등불자리에서 재를 모아 재물을 밭기도 하고 군의가 시키는대로 약을 달이고 아예 드러누운 환자들에게 새로 쑨 미음을 떠넣기도 하고 이렇게 분주히 돌아갔지만 그들의 눈에는 모두 눈물이 글썽거리였다. 이런 판에 7련대의 습격조가 돌아왔다. 그들을 데리러 간 기관총소대동무들도 왕복 60리를 달려오다보니 아주 늘어지다싶이 되였지만 습격조의 형상은 말이 아니였다. 어떤 사람은 아예 늘어져서 기관총수들이 업고오는 동무도 있고 거의 눈벌을 엉금엉금 기는 동무들도 있다. 그렇게 참혹한 형상이 되였건만 그들은 숙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로 비서처의 천막에 달려들었다. 꼬여드는 배를 움켜잡고 흰이를 드러내며 《특무를 죽여라!》하고 로인들의 멱살을 잡아끌어내였다. 《바른대로 대라! 소금에 독을 친게 누구야! 어떤놈이 왜놈의 개야?》 한 대원이 어금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치자 눈벌을 짚고 몸을 뒤틀던 다른 대원이 절컥하고 총을 겨누어대며 《비켜라! 비켜! 긴 말 소용없다. 당장 쏘아죽이겠다!》하고 소리쳤다. 오백룡이와 조직과장이 나서서 말리려 했으나 어떻게나 악들이 났는지 도무지 말에 날이 서지 않았다. 《아, 얼마나 악독한 종자기에 제 나라를 독립시키겠다는 혁명군을…》 이렇게 땅을 치고 웨치면서 눈물을 머금는 대원이 있는가 하면 지휘관들가운데는 사령부의 안녕을 물어보려고 안타까이 경위중대동무들을 찾다가 사령관동지께서 무사하시다는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는 동무도 있었다. 이런 날카로운 분위기속에서 태혁이와 지성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서있었다. 태혁은 사령부에서 나오는 길로 곧장 지성을 불러내였으나 선뜻 입을 벌릴수가 없어 한참 갑자르는 판인데 경위중대의 결패 사나운 동무들이 달려들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였고 그것이 오백룡이와 조직과장에 의해 겨우 수습되자고 하는 판에 다시 7련대의 습격조가 나타나서 또 이 소동이였다. 태혁이는 새삼스럽게 할 말이 없었고 입을 벌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 정귀하로인이 혼자힘으로 소금을 다 구하기 힘들기때문에 잘 아는 주종섭로인과 의논해보는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을 때 그 문제를 주로 처리한것은 지성이가 아니라 자기자신이였다. 주로인의 사상동향을 료해한것도 그였다. 신갈파에서 유성촌으로 이사온 경위와 조국광복회조직에서 떨어져나온 문제에 대해 지성이가 꺼림직한 소리를 했을 때 주로인네 일가가 생활난에 몰리여 가재수근방의 처가집을 의지해가게 된 사정이며 처가집의 도움으로 란전이나마 벌리게 됐는데 그 처남이 몹시 완고하다는 조건을 고려할 때 새로 이사온 고장에서 다시 조직과 선을 잇지 못할수도 있지 않느냐고 눌러버린것 역시 태혁이였다. 오늘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사령관동지께서 이번 공작임무의 중요성에 대해 그처럼 강조하셨건만 자기는 전혀 신중성없이 덤벙덤벙함으로써 결국 혁명전반에 돌이킬수 없는 위험을 조성해놓았다. 그는 특별히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일이 주종섭로인에게서 벌어졌으리라고 단정했다. 정귀하로인이 자기 아들 죽으라고 독을 칠수야 없지 않는가. 그러니 결국 주종섭로인에게 의심이 갈밖에 없는것이다. 그건 그렇다. 그래서 령감을 달아맨다치자, 그렇게 하면 이 사태가 수습되는가? 적들은 사면팔방에서 포위하여 접어드는데 조선인민혁명군은 독소금을 먹고 쓰러졌다. 이 일을 한태혁이 자기가 목숨을 내놓고 막을 길이 있다면…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은 없다. 자기는 백번 천번을 죽어도 조국과 혁명앞에 진 이 크나큰 죄를 씻지 못할것이다. … (아, 이 어리석은 인간아, 더러운 자유주의자야!) 태혁은 머리카락을 쥐여뜯으며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었지만 욕조차 시원한것이 나오지 않았다. 그옆에서 정지성은 마치 허울만 남은 사람처럼 자기 아버지와 주종섭로인을 저주하는 혁명동지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악몽이라면 이런 끔찍한 악몽이 어디에 또 있을것인가. 그런데 동지들의 분노는 또 얼마나 정당한가? 이것은 어떤 부자간의 의리나 몇몇사람의 신임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실로 수천수만의 혁명가들과 애국자들이 잃어진 나라를 찾고 짓눌려 허덕이는 겨레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와 청춘과 생명을 내바치며 싸워온 그 조선혁명의 명맥이 끊어지게 된 심각한 국면이다. 지금도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원쑤들의 야수적인 고문아래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동지도 있을것이다. 바로 이 시간에도 놈들의 사형장에서 《혁명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며 머나먼 이곳 혁명의 사령부를 향하여 마지막 웃음을 짓는 동지도 있을것이다. 그리고 오직 김일성장군님 한분만을 믿고 살아가는 2천 3백만 인민이 있다. 그 모든 인민의 념원과 숙망, 고귀한 청춘과 피와 열정이 이 정지성이 한사람의 경거망동으로 하여 한장 휴지처럼 찢기고 구겨지고 불타버릴 위험앞에 놓여있다. 아, 그런데 나자신은 또 그 혁명의 승리를 얼마나 열렬히 바랐던가, 반평생의 모든 노력을 다 바쳐 그리도 힘들여 톺아오른 혁명의 이 령마루에서 나는 마침내 천추에 용서받지 못할 반역자로, 배신자로 락인찍히고말았구나. 결국 인간이란 이렇게 되고마는것인가? 그는 입으로 터져나오려는 알수 없는 어떤 발악적인 웨침을 가까스로 눌러잡으며 자기가 이 비극적인 정황에서 마지막 주검이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20
동쪽으로는 부후물의 등판이 저렇게 바라보이고 서쪽으로는 밋밋한 이깔나무숲을 넘어 7도구치기의 골짜기가 까맣게 내려다보였다. 그 틈바구니로 7도구하의 얼어붙은 흐름이 부옇게 흐린 해빛아래 번들거렸다. 감투봉에서 북덕령까지 남북으로 련결하는 산들은 그닥 가파롭지는 않았지만 모두 눈덮인 밀림으로 가리워진데다 길이 넘게 쌓인 눈이 릉선이고 골짜기고 일매지게 문대버려서 어디에 발붙일만한곳이 없었다. 혼마소장은 부후물방향에서 진공해오는 야마하라련대가 유격대의 퇴로를 든든히 차단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상공에 비행기가 나타나서 선회하기 시작하고 이어 6도구에 옮겨앉은 데라시마중장의 지휘부에서 어서 공격을 하라고 두세번 독촉을 해도 그는 그냥 기다렸다. 모리는 지금 사처에 널어놓은 자기의 특무들로부터 유격대가 소금을 먹고 중독됐다는 소식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새벽에 6도구방향으로 나가던 한개 부대가 되돌아섰다는 보고는 이미 들어왔었다. 이제 어디서든지 유격대가 배를 안고 돌아간다는 보고만 들어오면 냅다 갈길판이다. 야전전화기쪽을 돌아보며 신호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혼마소장의 가슴은 상사말뛰듯 높뛰였다. 북덕령방향을 안타까이 지켜보는 그의 쌍안경의 시야는 얼어들어 눈금마저 가리워버렸다. 그의 가슴은 차츰 초조감에 볶이우기 시작하였다. 비행기들은 그냥 상공을 맴돈다. 지상부대가 전투를 해야 비행사들도 방위를 가려보겠는데 저렇게 새하얀 눈벌만 깔려있으니 어디다 대고 폭탄도 떨굴수 없고 기관총도 갈길수 없는것이다. 혼마는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여 뾰족한 턱에 걸린 마스크가 떨도록 강마른 볼편을 신경질적으로 씰룩거리며 몇걸음 앞으로 나갔다. 눈무지를 짚고섰던 군도가 허망으로 빠져들어갔다. 혼마는 당황하여 뒤로 물러서며 겨우 군도를 뽑아내였다. 이때 전화종소리가 다급하게 울리였다. 기다리고기다리던 모리의 목소리가 웨쳐댄다. 그 역시 극도로 흥분한 목소리였다. 유격대는 배를 안고 돌아간다, 30분후이면 그 증상이 절정에 이를것이다, 유격대가 완전히 전투력을 잃어버린 그때를 타서 일제히 공격하라― 이러한 말을 들은 혼마는 수화기를 놓기도전에 부르짖었다. 《전투준비!》 그것은 희디흰 눈벌에 해가 확 퍼진 겨울날 늦은 아침의 일이였다. 화력구성이 높지 못한 당시의 조건에서도 한개 대대나 겨우 전개할만 한 전선에다 증강된 부대까지 합하여 4개의 보병련대와 4개의 비행중대가 동원되여 하나의 밋밋한 눈덮인 봉우리에 일제히 총부리를 겨누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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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무렵 사령관동지께서는 오중흡의 도착보고를 받고계시였다. 오중흡이자신은 무슨 중독이 온것 같지 않았으나 쓰러진 대원을 업고 60리길을 달려온 그의 얼굴은 말이 아니였다. 《사령관동지, 7련대는…》 한손을 살쩍어방에 갖다대고 보풀인 입술을 버석거리며 여기까지 말한 오중흡은 그만 눈물이 그렁해지더니 고개를 숙이였다. 그리고는 닭알만 한 그 무엇을 꿀꺽 하고 삼킨후에야 가까스로 말을 이었으나 종시 여미지는 못하였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면목이 없습니다.》 평생 그러한 보고를 드린적 없는 그의 눈굽에서는 마침내 굵은 눈물방울이 배여나와 동상에 얼룩진 푸르죽죽한 볼을 타고 쭈르르 흘러내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의 눈물이 단지 대오에 중독자를 낸것때문만이 아니라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계시였다. 그이의 가슴도 찌르르 저려드시였다. 《중흡동무, 전투야 내가 중지시킨것인데 뭘 그러오. 그만두고 빨리 후과를 수습해야겠습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내 걱정은 마오.》 그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지쳐서 금시 쓰러질것만 같은 중흡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안으시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이듯 말씀하시였다. 《중흡동무, 진정해서 습격조동무들을 안전지대로 데리고 가시오. 그 동무들은 치료를 받도록 해야겠습니다. 여기 일은 걱정할것 없소.》 마침 군의가 급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를 오중흡에게 딸리여 함께 내보내시였다. 고개를 떨구고 비칠거리며 걸어가는 오중흡의 뒤모습을 바라보시니 가슴을 아프게 허비고드는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시였다. 그이께서는 천천히 숲속으로 걸어나가시였다. 4개 련대의 적이 좌우로 전개해있다는 감투봉릉선은 허연 눈발속에 태연한 침묵을 가장하고있다. 과연 적들이 혁명군의 이런 형편을 눈치채고있을것인가? 또다시 급한 발걸음소리가 다가왔다. 비서처의 날카로운 분위기를 수습하러 갔던 조직과장이였다. 《사령관동지, 그놈이 자백했습니다.》 《그놈이라니 누구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놀라시며 급히 물으시였다. 《그 정지성동무의 아버지와 함께 온 로인말입니다. 그놈이 제가 소금을 사서 독을 쳤다고 제입으로 말했습니다. 그래 일단 묶어놓았는데 어떻게 처리하랍니까? 인차 어떻게 처리해야 할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조직과장은 불안스레 적진쪽을 돌아보았다. 그에 대한 대답이기나 하듯이 눈덮인 산줄기너머로 적비행기편대가 골짜기를 누비며 날아왔다. 사령부천막주변에 모여들어 웅성거리던 모든 지휘관들과 전사들의 눈길이 일제히 하늘로 쏠렸다. 《모두 짜고들었구만.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겠소.》 누군가가 이를 갈며 부르짖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아츠러운 폭음을 남기고 부후물등판쪽으로 선회하는 석대의 적비행기편대를 쏘아보시다가 혼자말처럼 다시 물으시였다. 《그 로인이 제가 독을 쳤다고 말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동무들은 당장 쏘아죽이겠다는것을 겨우 눌러놓고 왔습니다. 지금 경위중대장동무가 거기에 남아있습니다.》 《로인이 독을 쳤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받아외우시다가 문득 고개를 드시고 엄하게 지시하시였다. 《조직과장동무는 재봉대동무들을 데리고 가서 군의동무를 도와주도록 하시오. 아니 재봉대동무들은 내가 보내겠습니다. 동무는 곧 비서처로 가시오. 7련대동무들이 흥분할수 있습니다. 무슨 불상사가 나지 않도록 그 동무들을 잘 수습해서 안전한곳으로 보내시오. 다른 동무들은 다 전투준비를 철저히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천막들을 거두고 행군준비를 하며 초소를 인계받은 경위중대동무들은 자기 초소를 모두 진지화해야겠습니다.》 이렇게 급히 명령하신 그이께서는 지휘관들과 전령병들의 복창소리도 다 들으시기전에 서둘러 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그러나 미처 열걸음도 걸으시기전에 그이의 발걸음은 떠졌다. 어느새 그이의 가슴에는 하나의 무거운 생각이 크게 자리를 틀고앉아 다른 모든 생각을 압도해버렸다. (주로인이 적의 주구란 말인가? 생활경로도 떨떨하지만 어딘가 약삭바르고 세상살이에 닳아빠진 령감 같다고 어떤 동무가 말했었지. 게다가 제입으로 자백까지 했다니 별로 따져볼것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 무엇때문에 이처럼 서둘러 가는것인가? 적들이 인차 접어들것은 명백한데 차라리 전투준비를 더 철저히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면서도 무슨 까닭인지 김일성동지의 발길은 여전히 비서처쪽으로 향하고 계시였다. 비서처천막이 저만치 바라보이는데까지 오시니 벌써 흥분한 대원들의 웨침소리가 울리여왔다. 그런데 미처 그곳까지 이르시기전에 김일성동지의 발걸음은 멎어섰다. 재봉대천막안에서 흐느낌소리가 울려나오고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따갑게 귀전을 후볐다. 천막자락을 들추시니 고깔불 한옆에 녀대원들이 모여들어 안타깝게 채옥이를 부르고있다. 《채옥동무, 채옥동무.》 《채옥아―》 울음섞인 목소리들을 가려들으실 사이도 없이 그이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으시였다. 채옥이가 그 독소금을 그중 먼저, 그중 많이 먹었으리라는것은 누구의 설명없이도 인차 짐작할수 있는 일이다. 《어떻게 됐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 급히 다가가시자 둘러쌌던 녀대원들이 눈굽을 훔치며 일어섰다. 좌우로 갈라지는 그들사이로 불곁에 누운 채옥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미 고통의 단계는 지나가버린듯, 모포우에 반듯하게 누운 채옥은 멍하니 눈을 뜬채 까딱 움직일줄 모른다. 급히 무릎을 꿇고 살펴보시니 얼굴은 푸른 기가 도는데 앙다물린 입갓으로 한줄기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있다. 숨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언제 이렇게 됐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급히 채옥의 늘어져있는 손목을 더듬어잡으시며 물으시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뒤전에서 흐느끼고계시던 김정숙동지께서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대답하셨다. 《모두 급해서 돌아치다나니 주의를 돌리지 못했습니다. 물을 길으러 벼랑으로 내려가다가 혼자 쓰러져있는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 수고를 끼칠가봐 혼자 기여나간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발견했을 때는 아직 정신이 있었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 소금을 드시지 않으셨다는 말을 듣더니 그만…》 김일성동지께서는 벌써 고개를 돌리시고 차츰 경련이 넓게 번져가는 처녀의 얼굴을 살피고계시였다. 손수건을 꺼내여 입가의 피를 훔쳐주시니 창백하게 질린 그 얼굴에 당장 웃음이라도 피여날듯 처녀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동무들의 빨래를 걷어안고 개울가로 내려가던 그날밤, 그이의 뒤를 따라오며 그렇게도 밝게 웃던 그 모습이 그대로 어리여있었다. 그이의 가슴은 갈갈이 찢어지는듯 저리고 아리시였다. 채옥의 손목을 잡으신 그이의 손은 떨리였다. 약하게지만 아직도 맥박은 뛰는것 같았다. 비서처쪽에서는 더욱 세찬 부르짖음이 울리여온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용히 처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시였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으셨지만 한자리에 앉아계실수 없는 그이시였다. 《울지들 마시오. 울기는 이릅니다. 맥박이 있습니다. 어서 군의동무 있는데로 옮겨가시오. 동무들은 모두 준비를 해가지고 가서 군의동무를 도와야겠습니다. 채옥동무의 입으로 피가 흐르는것을 보면 아마 식도나 어디가 상한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나 채옥동무를 살려내야 합니다. 모두 혁명동지를 구원하기 위하여 할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 합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다시한번 간절한 눈길로 채옥을 굽어보신 다음 천천히 천막밖으로 나가시였다. 누가 들것을 가지러 총알같이 달려나간다. 피마주기름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과연 의식을 잃은 채옥이가 다시 피여날것인가… 비서처앞에서는 흥분한 목소리들속에 절컥절컥하고 격발기를 제끼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이께서는 번쩍 고개를 드시여 그쪽을 바라보시였다. 주종섭로인은 커다란 이깔나무에 꽁꽁 묶이여있었다. 그밑에 정귀하로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땅을 꽝꽝 치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좀 떨어진곳에서 정지성이와 한태혁이가 두손을 내민채 고개를 푹 떨구고있다. 자기들도 묶으라는것이다. 오백룡과 조직과장은 흥분한 동무들을 달래느라고 하지만 그들자신도 격분하여 말소리가 여느때없이 거칠었다. 그들이 침착성을 잃을만큼 흥분한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고생이면 이만저만한 고생인가. 그것도 제 한몸이나 잘살자고 하는 고생이 아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다 외면하고 가족도 사랑도 청춘도 재능도 모든것을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바치며 무서운 고난속에 싸우고있는 그들이다. 그들이 헤여나기 어려운 고통의 절정에서 바로 그들을 위해 그 모든것을 참아온 인민가운데서 그렇게도 악착한 배신자를 만났으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비서처는 불과 스무나문걸음앞에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동지의 발걸음은 그 스무나문걸음의 거리를 극복하는데 실로 천리길을 가는것보다 더 큰 힘을 들이시였다. 남패자골안에 리경락이가 나타났을 때 그이께서는 혁명의 한길에 순결한 청춘을 바친 잊을수 없는 전우들을 생각하시였다. 그런 아름다운 인간들속에서 저도 혁명한다고 우쭐대던 인간이 그처럼 추악한 몰골로 나타났을 때 인간정신의 천태만상을 생각하시지 않을수 없었다. 리경락의 변절로 말하면 뜻밖이였고 그만큼 더 괘씸하기도 하시였다. 그런데 낯도 설고 친교도 없었던 한 장거리로인의 배신이 그때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허비고드는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기는 이 정황은 남패자에서의 정세보다 몇갑절 더 날카롭고 준엄하다. 조선혁명이 이제는 문자그대로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고도 볼수 있다. 혁명군을 죽이기 위하여 소금에 독을 쳤다는 하나의 령감을 달아맸다고 해서 풀릴 정황이 아니였다. 하늘에서는 적기들이 그냥 언 산발을 물어뜯으며 찬바람을 썰고 다닌다. 음침한 침묵속에 도사리고있는 저 산줄기들에 얼마나한 적들이 독소금에 중독된 혁명군의 진지를 노리고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동지의 사색은 무슨 까닭인지 준엄한 정황 그자체보다도 이깔나무에 매달린 체소한 로인의 가련한 모습에서 벗어날수 없으시였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놓고계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순시도 지체할수 없는 급박한 현실적인 정황에로 돌아오시였다. 그이께서는 뚜벅뚜벅 비서처 천막앞으로 다가가시였다. 끓어번지던 흥분은 삽시에 가라앉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가뜩이나 차디찬 산정의 공기를 얼어붙이였다. 주종섭로인은 피뜩 장군님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정귀하로인도 땅을 치던 주먹으로 제 무릎을 꽉 움켜쥐고 몸만 떤다. 주로인을 달아맨 이깔나무앞까지 오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로인의 몸을 파고드는 바오래기를 한번 만져보신 다음 고개를 돌리시였다. 배를 움켜안고 앉아있던 7련대의 한 전사가 그이의 눈길을 느끼자 일어서보려고 한쪽무릎을 일으켜 세우다가 뒤꼬여드는 아픔때문에 도로 주저앉으며 신음소리를 낸다. 경위중대동무에게 업혀가던 한 동무는 신음소린지 울음소린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데 잘 들어보니 저주의 목소리였다. 그런중에서도 역시 가슴아픈 형상은 독소금을 지고온 네사람― 이미 나무에 달아매인 주종섭로인과 땅바닥에 주저앉아 제 무릎의 살점을 뜯어낼듯이 움켜쥐고 몸을 떠는 정귀하로인 그리고 그의 아들과 한태혁의 모습이였다. 그들이 그처럼 처참한 표정으로 서있는것은 보매 자신들의 죽음때문만도 아닌듯 하였다. 몇몇사람의 죽음으로써는 도저히 수습할길 없는 엄청난 후과에 너무나 절망하여 그처럼 허탈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있는듯 하였다. 《그래 로인이 소금에 독을 쳤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까맣게 질리여 조막만 하게 졸아든듯 한 주로인의 푹 수그린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시다가 물으시였다. 그 물으심을 통해서는 아직도 그이의 가슴에 소용돌이치고있을 분노의 격랑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예, 제가 쳤습니다.》 주로인은 소스라치듯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애원하듯 간절한 목소리로 재빨리 대답하였다. 장군님께서는 허둥거리는 그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시다가 다시 물으시였다. 《우리 있는데 제발로 걸어왔습니까?》 《아닙니다. 저 유격대동무들이 못간다고 그렇게 말리는것을 제가 저 어수룩한 령감을 꼬드겨서 억지로 끌어왔습니다.》 《그것은 무슨 목적으로 그랬습니까?》 사령관동지의 어조는 차츰 엄격해졌다. 그에 따라 옆에 서있는 사람들의 긴장도 더 꽛꽛하게 죄여들었다.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똑똑히 대답하시오. 그래 소금에 무슨 독을 쳤습니까?》 《예?》 주로인은 다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가 도로 푹 떨구더니 잠시 어깨를 파고드는 바줄이 켕기는지 거북하게 몸을 뒤틀었다. 《무슨 독을 쳤느냐 말입니다.》 《예, 저 비상을 쳤습니다. 비상을 소금에 쳐서 섞었습니다.》 《비상은 어디서 났습니까?》 《그것은 저 왜놈들이… 일본사람들이 주었습니다.》 《그럼 저 정로인이 구한 소금에는 어떻게 비상을 쳤습니까? 언제 어떻게 쳤습니까?》 김일성동지의 목소리는 이제는 뚜렷이 분노를 드러내고있었다. 그때문엔지 주로인은 점점 더 허둥거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오돌오돌 떨뿐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한참이나 숨가쁜 침묵이 흐른 뒤에야 그는 가까스로 입을 벌렸다. 《그것은 저… 그날… 떠나올 때 말입니다. 짐을 네짝으로 갈라묶었습니다. 그때 슬쩍…》 《그때 정귀하로인도 우리 동무들도 그리고 음식차비를 하는 지성동무의 누이도 모르게 슬쩍 독을 쳐서 골고루 섞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일은 바로 그렇게 되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이미 주로인의 말을 듣고계시지 않았다. 그이께서는 옆에 앉아있는 정귀하로인앞으로 돌아서시여 조용히 물으시였다. 《소금 두말은 아버님께서 여기저기서 몇되씩 구하셨다는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제일 많이 사오기는 우리 이웃에 사는 김덕팔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소금가게의 주인집에 장작을 해다대군 했기에… 그런데 그 짐을 꾸릴 때 저도 산막에서 떠난적이 없었는데… 모를 일입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혹 그 김덕팔이가…》 정로인은 엄청난 사태와 풀리지 않는 의문때문에 말끝을 여미지 못하고 장군님의 준엄한 안색만 우들우들 떨며 지켜보았다. 《악착한놈들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니 천천히 눈벌을 걸어나오시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악착한놈입니다. 한시바삐 저를 릉지처참을 해서 징계하여주십시오.》 겁에 질려 떨고있던 주로인이 멀어져가시는 김일성동지께 매여달리듯 간절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돌아보지도 않으시였다. 모두 숨소리를 죽이고있는 숲속에 천천히 저만치 걸어가시였다가 되짚어 돌아서시군 하시는 장군님의 발걸음소리만 혁명의 운명을 조이듯 시간의 흐름을 새기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그시 눈을 감으시였다. 조선혁명이 헤쳐온 10여년의 로정, 눈덮인 산야와 수렁길, 적탄이 비발치는 아득한 초원과 불뿜는 재빛포대들우에 휘날리던 기발, 피에 젖고 적탄에 찢기고 비바람, 눈서리에 씻기여도 불타는 심장들을 불러 수십만리 혁명의 길우에 세차게 나붓기던 조선혁명의 붉은 기발이 떠 올랐다. 과연 그 기발이 이 7도구 막바지 북덕령가까운 산기슭에 묻혀야 한단 말인가! 이때 눈을 걷어차며 숨가쁘게 달려오는 발자국소리가 그이의 생각을 중단시켜놓았다. 새로 배치한 경위중대의 경계초소에서 달려온 최병규였다. 《사령관동지! 적들이…》 그는 미처 말을 못맺고 숨을 헐떡거리며 감투봉뒤쪽과 부후물골짜기쪽을 돌아보았다. 《적들이 밀려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천천히 다가가시여 최병규의 가쁘게 오르내리는 어깨를 가볍게 잡아주시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으시였다. 최병규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눈에 함뿍 눈물을 담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령관동지, 앞에서도 오고 뒤에서도 오고… 사방에서…》 《많습니까?》 《새까맣게 골짜기를 덮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동무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시오. 소대장동무에게 전투준비를 잘하도록 이르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침착한 목소리로 이르시고 최병규를 오던 방향으로 돌려세워주시였다. 산골에서 태여나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는 순박한 기관총수는 한쪽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들이마시며 달려갔다. 긴급한 정황보고를 들은 모든 전사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고 사령관동지옆으로 모여들었다. 정귀하로인과 주종섭로인도 고개를 들었다. 금숙이와 함께 이깔나무숲속으로 달려가시던 김정숙동지께서도 사령관동지곁으로 모여들었다. 강봉수와 김재영이도 달려왔다. 업혀가던 7련대동무들, 그들을 업고가던 경위중대와 기관총소대동무들까지 만사를 다 집어던지고 사령관동지 곁으로 빽빽이 죄여들었다. 《동무들!》 사령관동지께서는 몸가까이 다가오는 사랑하는 전사들을 일일이 굽어보시며 친근한 목소리로 부르시였다. 눈물이 그렁한 눈들이 일제히 그이를 지켜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이제 돌이켜보면 조선혁명이 걸어온 길우에 가슴아픈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습니다. 치마말기에 두자루 권총을 넣고 다니며 원쑤와 맞다들면 쌍권총으로 적을 마구 쏘아눕히던 아름답고 대담무쌍하던 녀공청원도 있었고 맑스와 레닌의 책들을 뜬금으로 좍좍 내리외우던 나어린 혁명가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미 우리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모두가 그렇게 사랑하던 재봉대의 채옥동무는 지금 독소금에 중독되여 거의 사경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가슴아프게 생각하는것은 우리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 희생된 이러한 동무들때문만이 아닙니다. 참으로 가슴아픈것은 혁명하겠다는 사람들의 참된 지향이 짓밟히는것이며 그 붉은 마음들이 헛되이 고통을 겪는것입니다.》 그이께서는 천천히 눈길을 돌리시여 뒤전에 고개를 떨구고 서있는 정지성과 한태혁 그리고 정로인과 나무에 묶이여있는 주종섭로인의 모습을 더듬어보시다가 말씀을 이으시였다. 《세상사람들은 흔히 승냥이때문에 노한 호랑이를 달래자면 개라도 집어던져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그러한 희생자가 우리앞에 서있습니다.》 장군님의 말씀은 혁명군대원들에게는 인차 리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눈을 끔뻑거리며 그이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있는데 불시에 주로인이 소리쳤다. 《아니올시다. 장군님, 제가 모든 일을 저질러놓았습니다. 저 형님이나 유격대동무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돈에 눈이 어두워 그놈들과 짜고 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말은 전혀 못들으신듯 아까와 똑같이 담담한 어조로 말씀을 이어나가시였다. 《우리 혁명이 행군을 많이 해왔지만 아마 이해의 겨울처럼 간고한 행군은 처음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레전에 소금을 꼭 구해야 하겠기에 사람을 보내자고 하는데 정지성동무가 자진해서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사실 정동무를 보낼 생각이 아니였습니다. 그 리유는 동무들이 다 잘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정지성동무는 한사코 자기가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동무들, 그럼 정지성동무는 무엇때문에 그처럼 고생스럽고 위험한 길을 기어코 가겠다고 나섰겠습니까? 그것은 정지성동무가 육체적으로 편안하기보다는 혁명의 승리를 더 바랐으며 자기 일신의 안락보다는 혁명동지들을 더 생각하고 자기의 목숨보다는 혁명가로서의 도리를 더 중하게 생각하였기때문입니다.》 밀림은 숨소리 하나 바람소리 한점 들리지 않았다. 얼어붙은듯이 숨죽이고있는 이 엄숙한 정적속에서 누군가가 울음을 씹어삼키는 소리가 간간히 새여나왔다. 《정지성동무와 한태혁동무는 함께 떠났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는것을 나는 짐작합니다. 정지성동무는 다름아닌 그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처럼 성실한 아들을 키워서 우리 혁명에 내보낸 아버지의 마음을 나는 그 누구의 보증없이도 믿습니다. 유성촌은 지금 놈들의 〈토벌〉거점의 하나로서 군대, 경찰들이 욱실거리고 특무, 밀정 망에 뒤덮여있습니다. 그래도 정귀하로인과 주종섭로인은 우리 혁명군을 생각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네말이나 되는 소금을 구했습니다. 만일에 주로인이 자백한것과 같이 다른 마음을 조금이라도 먹었거나 하다못해 내키지 않는 일을 마지못해 한것이라면 그들은 소금을 구해서 유격대원들에게 내주기만 하였어도 되였을것입니다. 그런데 두 로인은 우리 동무들이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이 여기까지 소금을 지고왔습니다. 보시오, 한태혁동무는 눈속에서 얼마나 뒹굴었던지 동상이 얼굴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스럽게 가지고온 소금에 독이 있어서 우리의 일부 동무들이 중독되였습니다. 이때를 기다리고있었다는듯이 적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저렇게 밀려들고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여기서 목소리를 높이시며 손을 드시여 눈덮인 7도구 골짜기쪽을 가리키시였다. 《어떤 동무들은 정귀하로인과 특히 주종섭로인을 의심하는것이 사실입니다. 로인의 자백에 그럴듯 한 점이 없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정지성동무와 한태혁동무는 저렇게 풀이 죽어있습니다. 155절짜리 노래를 지어 언제나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무슨 일을 시켜도 막히는 법없이 잘해치우던 우리의 우수한 혁명전사 한태혁동무가 저렇게 참혹한 모양을 하고있는것을 나는 처음 봅니다. 그리고 저 정지성동무의 아버지를 보십시오. 저 주종섭로인을 보십시오. 우리 혁명군을 그렇게도 믿고 그렇게도 사랑하던 저 로인들이 마땅히 우리 혁명의 력사에 남겨야 할 훌륭한 일을 해놓은 이때 저렇게 묶이우고 송구한 표정으로 서있어야 합니까? 나는 이것이 가슴아픕니다.》 엄숙한 침묵은 더욱더 깊이 가라앉았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별안간 먼 골짜기에서 총소리가 터져올랐다. 적들이 마침내 공격을 시작한것이다. 숨을 죽이고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듣고있던 사람들이 얼핏 눈길을 그쪽으로 돌렸으나 인차 사령관동지의 바위처럼 태연하신 모습을 지켜보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등뒤에서 울려오는 총소리는 전혀 못느끼시는듯 잠시 말씀을 끊으시고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조용히 주로인앞으로 다가가시였다. 그이께서는 단단히 옭매여놓은 바줄의 매듭을 주저없이 푸시며 말씀하시였다. 《아버님, 무엇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우리 혁명군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아버님의 심정은 짐작이 갑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혁명군들이 소금을 먹고 쓰러졌다니 미안하고 송구하고 또 같이 온 정로인이나 우리 두 동무에게 책임이 돌아갈것 같으니 차라리 로인님이 그 모든 죄책을 받아안자는것 같은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장군님.》 주로인은 어깨와 팔이 이미 풀렸건만 묶였던 자세그대로 꼿꼿하게 서서 어깨를 떨며 목메인 소리를 내였다. 《사실 제가 모든 일처리를 잘못해서 이렇게 된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지 마십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바줄의 마지막돌기를 풀어헤쳐 땅바닥에 집어던지시며 엄하게 말씀하시였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로인님은 우리 혁명군을 믿어야 하고 우리는 또 아버님들 같은 인민들을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이 있기때문에 우리는 이 어려운 고난속에서도 혁명의 승리를 내다보는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버님께서 우리 동무들이 좀 흥분했다고 해서 그런 마음에도 없는 죄를 쓰고나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아버님의 그 착한 마음이 결국 우리들에게는 가슴아픈 상처를 남기게 하고 저 간악무도한 왜놈들의 죄는 감싸주게 합니다.》 흥분해 부르짖던 전사들도 지휘관들도 모두 김일성동지의 살을 저미듯 아프게 떨려나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떨구었다. 부쩍 고조되던 총소리가 무슨 까닭인지 좀 즘즛해졌으나 그런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아직은 그 참뜻이 똑똑히 새겨지지 않으나 김일성동지의 예지와 사랑이 빚어내는 간곡한 말씀에 죄지은듯 목메여 서있었다. 《장군님, 저는 늙은 목숨 하나 내던지면 저 혁명군들의 분을 얼마간이라도 가라앉힐수 있으려니만 생각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듣고보니 저는 사람구실도 나이구실도 못했습니다. 제 이 죄를 무엇으로 씻는단 말입니까. 저는 그저 이 일이 놀랍기만 하고 저한테서밖에 잘못될 구석이 없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로인은 미처 말끝을 마무리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속에서 흐느낌을 누르는 숨가쁜 소리가 울려나왔다. 《진정하십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로인의 어깨를 다정히 쓸어주시며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이러한 일은 우리 조선사람이 아무리 나쁜 마음을 먹어도 해낼수 없습니다. 내 보기에 소금은 가게방에서 이미 독을 쳐가지고 팔려나온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짓을 할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보십시오. 적들이 어떻게 되여 우리 동무들이 독친 소금을 먹은 그 즉시에 쳐들어오지 않고 지금에야 쳐들어오겠습니까. 유성촌에는 적의 눈초리들이 구석구석 박혀있습니다. 그놈들이 한꺼번에 몇말씩 되는 소금을 구하러 다닌다는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어디로 가리라는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독을 치되 한꺼번에 죽어넘어지게 독을 친다면 한두사람은 상하게 할수 있어도 우리를 몽땅 없애기는 어렵다는것을 그놈들도 타산한것입니다. 아마 놈들은 우리가 모두 마음놓고 소금을 먹은 다음 맥을 놓고 앓게 됐을 때 힘을 총동원하여 접어들 계획을 세웠을것입니다.》 이때 그이의 말씀을 확증하듯이 부후물등판너머에서 아까보다 훨씬 많은 적 비행기편대가 요란한 폭음을 울리며 날아넘어왔다. 놈들은 숲우를 낮추 떠서 겹으로 된 날개를 기우뚱거리며 골짜기를 샅샅이 훑어갔다. 김일성동지를 둘러싸고있던 유격대원들은 모두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여전히 이깔나무에 의지해 서있는 주종섭로인도 정귀하로인도 이제는 자신의 처지는 잊어버리고 오직 황홀한 눈길로 김일성동지의 모습을 지켜보고있었다. 그이께서는 비행기소리와 함께 이제는 훨씬 가까운곳에서 다시 자지러지는 총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시더니 주로인의 어깨를 따뜻이 그러안으시며 말씀하시였다. 《교활하고 악독한놈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자니 곡절이 많습니다. 무척 놀라셨겠는데 용서하십시오. 우리 동무들의 마음을 리해해주십시오. 모두 저놈들의 간악한 계책때문입니다.》 《제 무슨 말로 장군님의 성덕을 여쭙겠습니까? 장군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제 차라리 죽어 우리 혁명군의 분한 마음을 다소라도 풀어주고싶은 마음이 오히려 더 간절해집니다.》 그러면서 주로인은 마침내 어린애와 같이 어깨를 들먹거리며 울었다. 별안간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 만세!》하는 목소리가 비행기의 발동소리를 제압하며 숲속을 울렸다. 정귀하로인이였다. 그는 주름진 얼굴에 함뿍 눈물을 담고 다시 두팔을 높이 쳐들며 웨쳤다. 《우리 장군님 만세!》 그러자 유격대원들도 주종섭로인도 지휘관들도 한꺼번에 팔을 쳐들고 목소리를 합쳐 만세를 불렀다. 《김일성장군 만세!》 《만세!》 《만세!》 오백룡이도 강철룡이도 사령관동지를 향하여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그들의 근엄한 얼굴에는 눈물이 줄줄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중후한 간부들의 그러한 감격이 더구나 만세소리를 고조시켰다. 조직과장도 군수관도 다 자기들의 가슴에 넘치는 남다른 격정을 모두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만세의 환호속에 담아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한태혁과 정지성만이 터실터실한 이깔나무줄기를 안고 목메여 울뿐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북받쳐오르는 감격의 울음때문에 몸도 가누기 힘들어하였다. 혁명의 로전사들과 무쇠같은 유격대원들 그리고 나어린 대원들과 순진한 처녀들, 인민들의 그처럼 열광적인 만세소리를 들으시는 김일성동지의 눈굽에도 뜨거운것이 괴여올랐다. 참으로 인간이란 고상하고 아름다운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아름다운 진실을 확인하였을 때 이렇게도 기뻐하는것은 다름아닌 사람의 본성이 이 우주의 그 무엇과도 비길수 없을만큼 아름답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동무들!》 사령관동지께서 손을 높이 드시여 흥분한 사람들을 제지하시며 말씀하시였다. 《우리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아직 많습니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것 같습니다. 적들이 이제는 위험한 계선까지 다가왔습니다. 여태까지 우리의 주력부대들은 조선혁명과 그 사령부를 믿음직하게 호위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사령부가 조선혁명과 그 주력부대를 보위하여야 할 정황에 놓였습니다. 조선혁명의 사령부는 조선혁명을 위한것입니다. 동무들! 혁명을 지키기 위하여 모두 일어나 용감히 싸웁시다!》 사령관동지의 힘찬 호소에 또다시 산을 떠옮길듯 한 우렁찬 만세소리가 화답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앓는 동무들을 신속히 대피시키신 다음 몸소 전투부대를 이끄시고 경위중대의 전연으로 달려나가시였다. 21
실로 치렬처절한 싸움이였다. 눈보라가 휘날렸다. 무수하게 엇갈리는 탄알이 눈무지를 파헤치며 때아닌 눈사태를 몰아왔다. 산도 숲도 눈벌도 총소리에 휘말려들고말았다. 뚜루룩― 뚜루루 뚜루루 뚜루룩― 기관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한태혁, 최병규, 여기에 소대장 강철룡의 기관총까지 합하여 함께 불을 뿜어대니 차겁게 얼어붙었던 눈벌에 돌개바람이 휩쓸듯 연분홍빛 눈보라가 날렸다. 련발로 마구 쏘아대는 사격이지만 이름높은 명사수들의 총구에서 날아나는 총알들은 눈속에 처박힌 적들의 몸뚱아리를 에누리없이 찾아갔다. 눈보라밑에서 선지피가 흩날렸다. 개가죽외투가 너덜너덜 헤쳐지더니 누덕쪼박이 되여 날려간다. 《악-》외마디 비명과 함께 눈덮인 릉선을 내리구르는놈, 두더지처럼 눈구뎅이로 파고드는 놈, 어떤놈은 무슨 영문인지 벌떡 일어나 하나의 장벽처럼 마구 쏟아져내려오는 탄막앞에 가슴을 내대였다가 삽시에 란도질을 당한 고기점이 되여 눈우에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였다. 그래도 뒤쪽에서는 군도가 번쩍거린다. 《돌격! 돌격!》 적들은 벌써 벌겋게 피로 얼룩진 눈벌로 악을 쓰며 기여올라왔다. 그뒤에는 또 개털외투자락이 펄럭거리고 군도가 번쩍거리고 총신이 갈대숲처럼 설레인다. 《허리춤을 푹 늦구라구.》 강철룡은 최병규의 신경질적으로 떨리는 팔을 한손으로 누르며 속삭였다. 《왜 이렇게 떨릴가요?》 최병규는 순진하게 소대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추워서 그렇지.》 강철룡은 생각해볼것도 없이 대답했다. 《추워서 그럴게 뭡니까?》 저쪽 아름드리 이깔나무뒤에서 한태혁이가 말참견을 한다. 《쓸데없는 소리! 동무는 그만큼 겪고도 아직 세상 쓴맛을 다 모르겠는가. 알지? 저 자루목같은데까지 끌어붙이자구. 그래야 잘 맞을거란 말이야. 태혁이, 덤비지 말라구!》 강철룡은 제 할말을 다 하고는 눈속에 묻힌 바위뒤로 돌아갔다. 이런 눈속에서 어떻게 그런 묘한 바위를 찾아냈는지, 역시 소대장은 싸움군이라고 한태혁이도 속으로 감탄하였다. 태혁은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꼭 첫 싸움에 참가했을 때같은 흥분을 누를수가 없었다. 그날 7련대 4중대 1소대의 3호병이였던 그는 새로 받은 99식보총을 다루기가 아름차서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탄알을 공중으로 날려보냈었다. 적들은 자꾸만 저렇게 기여올라오는데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겨냥한 적의 대가리는 까딱도 않고 그냥 기여오르기만 하였다. 《지그시, 대가리를 겨누지 말고 저 버드럭거리는 다리를 겨누고… 그렇지, 총구를 더 좀 낮추어서… 이젠 지그시 방아쇠를 당겨보시오.》 누구의 목소린지 등뒤에서 상사말이 뛰는것처럼 뒤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런 말이 울리여왔다. 이야기를 듣고보니 훈련 때 거듭주의를 들은 말들인데 한번 총소리가 터져오르자 다 잊어버렸던것이다. 태혁은 마음이 푹 가라앉아 방아쇠를 당겼다. 적의 철갑모가 데구루루 산릉선을 타고 굴러떨어지더니 그놈은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가 모재비로 나가번져졌다. 누구였을가? 그제야 태혁은 목소리의 임자를 찾아 뒤를 돌아보았다. 사령관동지께서 갈대 설렁거리는 릉선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계시였다. 《아, 장군님!》 신입대원 한태혁은 첫 전투에서부터 김일성동지의 손길아래 사격술을 익혀왔다. 무수한 전투과정에 그가 쏜 탄알이 실로 몇바리는 잘될것이고 이제 그는 어떤 어려운 정황과 지형속에서도 마구 내갈기는 련발사격에서조차 탄알 하나에 꼭꼭 한놈이상씩의 적을 명중시킬수 있는 명사수로 자라났다. 그런 태혁의 무쇠같은 심장이 오늘 또다시 첫 전투의 그날처럼 설레인다. 눈물로 이깔나무그루를 적시며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섰을 때 독소금의 래력을 밝히시며 혁명전사 한태혁의 깊이 간직한 충성심을 그리도 깊이 헤아려주시던 장군님의 그 목소리, 그 모습은 갈대 설렁거리던 이도강부근의 그 전투장에서처럼 그의 가슴을 충성의 한마음으로, 오직 충성의 한마음으로만 불타오르게 하였다. 《지그시… 총구를 더 좀 낮추어서… 이젠 지그시 방아쇠를 당겨보시오.》 그날의 그이의 목소리가 다시금 귀전에 쟁쟁히 울려오는듯 하다. 뚜루룩― 불줄기가 날아간다. 총신이 전사의 마음처럼 뒤설레인다. 어느새 화끈하고 기관부가 달아오른다. 그것은 꼭 전사의 마음과 같다. 《쏘아라! 쏘아라!》 강철룡소대장이 연방 소리친다. 뚜루룩 뚜루룩― 뚜뚜뚜루룩 세개의 기관총이 련달아 탄알을 퍼부었다. 휴―퍽! 퍽! 적탄이 날아와 나무가지를 쓸어눕히고 의지하고 누운 이깔나무줄기에 벌둥지같이 구멍을 뚫어놓는다. 눈가루가 날려 눈앞이 자욱해졌다. 《젠장!》 태혁은 벌떡 일어났다. 《엎드렷!》 어디선가 엄한 목소리가 울려온다. 태혁은 찔끔하여 엎드리며 돌아보았다. 불과 20메터도 되나마나한곳에 김일성동지께서 손수 기관총을 잡으시고 엎드려계시였다. 순간 태혁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바로 뒤에 장군님께서 계신다! 어찌하여 장군님께서 이런데까지 나오셨단 말인가. 하기는 뒤에서도 총소리가 자지러진다. 개놈들! 내 편안한 날 죽을수는 있어도 너희놈들이 한놈도 이 계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기전에는 절대로, 절대로 죽을수 없다. 우리의 장군님께서 안전하신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기전에는 내 이 총으로 사격을 멈출수 없다. 금숙동무야, 제발 탄알만 떨구지 않게 해다오. 태혁은 침착하게 나무그루뒤에 엎드려 한눈을 쪼프리고 지그시 방아쇠를 당겼다. 부르르 총신이 떤다. 불줄기가 날아간다. 군도를 휘두르던놈이 허공을 베며 나가넘어진다. 그옆의 놈은 메뚜기처럼 강둥강둥 뛰더니 대가리를 눈구뎅이에 파묻었다. 어느새 새하얗던 눈벌이 푸주간처럼 되였다. 《태혁아! 잘한다! 이제는 총을 좀 식혀라!》 꽁무니를 빼는 적들을 향하여 그냥 갈겨대는 태혁에게 강철룡이 말했다. 어느새 그는 담배 한대를 말아물고 연기를 피워올리고있었다. (역시 내가 좀 덤비는군.) 그는 소대장이 신대원시절처럼 친근하게 불러주는것은 고마왔지만 어쩐지 계면쩍었다. 그러나 그는 익살을 부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 사격좌지를 다시 손질하였다. 뒤에 김일성동지께서 계신다. 이 사격좌지를 철벽으로 다져서 적들이 이 부근에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한다. 태혁이가 사격좌지를 든든히 꾸리는것을 보더니 최병규도 나무뿌리밑을 깊숙이 파기 시작하였다. 《태혁동무, 탄알이 오는가보오. 덤비지 말고… 그렇지, 납작 엎드려서 기여가오.》 강철룡은 다시 정중한 어조로 태혁에게 주의를 주었다. 태혁은 기여가던 걸음을 멈추고 소대장쪽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적들이 일단 물러선 틈을 타서 녀대원들이 탄알배낭을 지고 기여왔다. 태혁은 김정숙동지이와 나란히 기여오던 금숙이가 자기와 시선이 마주치자 새끼손가락을 살짝 까부려 이마를 가리우는 머리를 쓸어넘기는것을 보았다. 22
장갑을 끼고 막 역으로 나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기다리기에 지쳤던 하시모도는 얼른 자리에 도로 주저앉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나다, 어떻게 됐느냐?》 《혼마는 더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모리는 처음부터 변명조로 말하였다. 《뭐야? 어째 혼마가 말을 듣지 않는단 말이냐? 거기에 데라시마중장은 없는가? 대체 그 말라빠진놈이 무슨 말을 듣지 않는단 말이냐?》 하시모도는 책상을 탕 치며 신경질적으로 부르짖었다. 그는 얼른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차시간이 다 되여온다. 이럴줄 알았으면 비행기를 준비시키는건데 한개 배우를 군용비행기에 태워 동행하기가 무엇하여 기차로 떠나자던것이 뜻밖에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그는 무엇인가 웅얼거리는 모리의 말을 참을성있게 들으며 반질거리는 검정털외투밑에 화려한 치포자락을 벌려놓은채 한쪽다리를 꼬고 앉은 진백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진백란은 어느새 하시모도의 눈길이 자기에게 쏠린것을 눈치채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살짝 웃었다. 새빨간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면서 잣알같은 흰이가 나타나자 하시모도는 가슴을 예리한 칼끝으로 찔린것모양 낯을 찌프리며 소리쳤다. 《빌어먹을것들! 그래 그건 그렇다치고 그사이는 무엇을 했단 말이냐? 네놈이 공격을 시작한다고 보고한것이 열시반이였다. 그런데 이게 몇시기에 아직 끝장을 못보았단 말이냐. 소금에 독을 친것은 사실인가? 그들이 소금을 먹은것은 사실인가? 그런데 2만명이 달라붙어서 그것을 요정내지 못해!》 진백란이 또 시계를 들여다본다. 지금쯤은 벌써 일등차의 특별석에 나란히 앉아있어야 할 시간인데 어쩌면 아직 이런 살벌한데 앉아 욕설만 퍼붓고있느냐 하고 알수 없다는듯이 눈을 치떠본다. 빌어먹을 년! 하시모도는 그를 꾀여내여 모처럼 이번의 도꾜려행을 화려하게 장식해보려고 아마가스에게 거의 위협하다싶이 하였었다. 아마가스는 하시모도의 속을 뻔히 알고있었지만 중국미인의 노래가 조선이나 일본에서도 반드시 국책수행에 유익하리라는 그의 말을 반박할 건덕지가 없었다. 아마가스가 비록 노리개감이지만 진백란과 같은 미인을 남에게 쉬 양보할리가 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마가스가 독종이라도 관동군의 실권자가 내라는데야 제 본처나 딸이라도 내놓지 않고 배길수가 없는것이다. 《그래 혼마는 밤에는 싸울수가 없다는것인가?》 모리는 또 우물쭈물한다. 《이놈아! 왜 똑똑히 대답 못해!》 하시모도는 마침내 악을 썼다. 《그놈이 유격대와 싸우기 위해 1년이상 내한훈련을 시켰다고 뽐내던 려단은 다 어디로 갔느냐? 때려죽일놈들! 나라의 밥을 그만큼 축냈으면 천황페하를 위하여 한몸을 서슴없이 바치는 충용심이 있어야 할것 아닌가? 응! 네놈들에게 공급을 못했느냐, 총을 안주더냐? 대포와 비행기까지 보내주었지? 그런데 독소금을 먹고 눈속에 쓰러진 유격대를 수만명이 포위하여 다섯시간이상을 공격해도 요정을 못내고… 뭐 어째? 사상자가 천명은 넘는다고… 그러니 어쨌단 말이냐? 군대가 모자라느냐?》 하시모도는 이 손 저 손으로 수화기를 옮겨쥐며 겨우 손수건을 찾아 이마에 내밴 진땀을 훔쳤다. 《각하! 김일성장군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고있습니다. 혼마가 이제는 넋이 나가서… 하기는 제가 현지에 나가보니 숲속은 이미 어두워서 자칫하다가는 우리 편끼리 싸우기가 쉽습니다. 워낙 거리가 밭고 좁다란 골짜기가 돼서…》 모리의 웅얼거림은 더구나 하시모도의 부아를 돋구어주었다. 《그러면 더욱 좋을것 아니야? 어디야, 7도구치기라는데가 어디야? 가만 지도를 가져오너라!》 하시모도는 벽에 걸린 지도를 돌아보다가 진백란의 옆에서 서성거리며 출발시간을 기다리고있는 참모에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걸상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제 이다가끼륙군대신과 아나미륙군인사국장한테서 한꺼번에 전보가 날아오고 오늘 오전에는 또 고급부관 데라구라대좌에게서 며칠전에 보낸 편지가 날아왔었다. 1월 4일부로 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는 마침내 페하앞에 사표를 냈으며 내각총사직을 선포했다는것이다. 지금 원로 사이온지를 중심으로 후계내각조직문제를 둘러싸고 분분한 론의가 벌어지고있는데 잘못하다가는 고노에를 넘어뜨린 그 여파로 군부자체가 영향을 입을 가능성이 많으며 특히 정부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이 감퇴될 우려가 있으므로 속히 상경하여 대응책을 강구하라는 내용이였다. 오는 길에 서울에 들리여 조선총독 미나미대장과 조선군사령관 나까무라대장을 구슬려놓는것도 필요하리라는 고급부관의 암시까지 읽은 하시모도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시모도는 오늘아침 6도구에 나가있는 모리중좌로부터 조선인민혁명군이 소금을 먹고 전투에 나섰다가 되돌아갔으며 혼마의 려단과 이미 림강―장백 현계에 배치했던 무다구찌려단, 야마하라련대들이 든든히 포위진을 쳤고 그밖으로 네개의 위만군대대와 현지의 경찰무력들이 만단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에 사령관과 참모장을 만나 도꾜로 출장을 갈 의향을 말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소멸은 이미 시간문제로 남았다. 김일성장군의 유격대가 만주에서 없어졌다는 이 소식이면 일본정계와 군부를 마음대로 쥐락펴락 할수 있을것이였다. 그의 눈앞에는 보라빛 환영이 너울거렸다. 왕년의 륙군원로격인 미나미를 만나는것도 좋을것이다. 그도 한때 관동군사령관이였다. 그가 종시 이룩하지 못했던 그것을 바로 자기 하시모도 간지가 완수하였다는것을 그 로인에게 말했다고 해서 나를 허영심이 강한 사나이라고 력사는 감히 말하지 못할것이다. 어찌 미나미나 나까무라뿐이겠는가? 오늘 도꾜 한복판에 틀고앉은 이다가끼나 도죠 역시 같은 몰골이 아닌가. 도죠는 어찌나 독을 썼던지 《면도칼》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게 되였지만 실상 만주에서 이룩한것이 없다. 이때 하시모도의 머리속에 문득 진백란―이찌가와 요시에 생각이 떠올랐다. 하시모도는 완강한 정신적활동과 견인불발한 노력을 위하여 극도로 검박한 생활을 해왔으며 자기 일생일대의 위업을 완성하기전에는 녀자를 가까이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었다. 그런데 이제야말로 미인을 데리고 도꾜로 가볼만 한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가 만영에다 전화를 거니 아마가스는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제 정부를 내놓기는 꺼려하였지만 우격으로 내밀어 저렇게 눈부시게 단장한 진백란은 려행준비를 다 갖추고 벌써 한시간이상 자기 방에서 기다리고있다. 그런데 일이 무슨 모양인가? 수원으로 데리고 가기로 한 젊은 작전참모가 림강―장백부근의 5만분지1 지도 몇장을 가지고 와서 책상우에 펼쳐놓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소장각하, 차시간이…》 하시모도는 피뜩 참모를 쏘아보았을뿐 차시간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아무런 대척도 하지 않고 소리쳤다. 《자, 좌표를 불러라, 뭐? 북위 41도 삼십몇분? 삼십팔분―동경 127도― 가만있거라.》 하시모도는 작전참모에게 손을 내밀었다. 젊은 소좌는 재빨리 책상우에서 색연필케스를 집어 내밀었다. 《똑똑히 불러라, 먼저 유격대의 전선을 불러라! 이놈아! 전선도 모르는놈이 무슨 전투지휘를 하느냐! 거기에 데라시마중장이 있는가? 좋다! 그럼 데라시마한테 전화를 돌려라. 너는 데라시마방으로 가서 대기하여라. 데라시마와 이야기가 끝나면 너와 다시 말하겠다.》 하시모도는 얼마후 전화에 나온 로장 데라시마를 다시 호되게 추궁한후 사단지휘하에 있는 전체 무력을 7도구치기일대에 투입할것이며 다시 신경에서 한개 비행련대를 증강해주고 위만군 1개 려단을 증강하되 오늘밤과 늦어도 래일 오전중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을 최종적으로 소멸하고 이번 작전을 종결지을데 대해서 싸늘한 위협을 섞어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모리를 호출하여 이번에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모리과장, 모리중좌는 잘 듣거라. 지금 고노에내각이 총사직하였다. 군부에서는 내가 빨리 도꾜에 와서 모종의 중요한 문제토의에 참가하라는 련락이 왔다. 나는 이미 출발준비를 다 갖추고 조선총독각하 및 조선군사령관각하와 래일 서울에서 만나기로 전보를 다 쳐놓았다. 그런데 너의 부주의로, 알겠는가? 귀관의 불성실한 근무로 말미암아 나의 출장을 중지하지 않을수 없다. 이것은 리경락사건이후 두번째로 되는 귀관의 태만행위이다. 차후로 이러한 일이 다시 없기를 바란다.》 말을 마치자 하시모도는 피곤한듯이 걸상에 몸을 젖히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작전참모와 진백란이 눈이 둥그래서 한꺼번에 엉거주춤 허리를 일으켰다. 하시모도의 감겨진 망막앞에는 요염하게 웃으며 돌아가는 진백란의 아름다운 몸뚱이가 천수보살모양으로 겹치고 뒤엉켰다. 《참모!》 하시모도는 벌떡 허리를 일으켜 앉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래일 10시경에 떠날수 있도록 정찰기를 준비시켜라. 그리고 저 녀자를 돌려보냇!》 《옛.》 진백란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발딱 일어났으나 하시모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방금 그려넣은 지도의 전술부호들을 쏘아보며 피가 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진백란은 독기가 풍겨오는 하시모도의 유리같이 랭랭한 옆모습을 한참 쏘아보다가 눈물이 그렁해져서 말하였다. 《저 래일 몇시에 오랍니까?》 《래일은 올 필요없다. 군용비행기에 녀자는 탈수 없으니까. 돌아가서 아마가스에게, 내가 감사하다고 하더라는 인사를 전해주기 바란다.》 진백란은 인사도 없이 몸을 흔들며 나가더니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버릇없는 년!》 하시모도는 당장 집어살킬듯이 이미 닫겨진 문을 쏘아보다가 억지로 참고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래 이 골짜기 하나를 가지고… 김일성장군이 정말 축지법을 하는게 아닐가?… 김일성장군의 이런 전법을 일본의 그 누가 상상이라도 할수 있겠는가…》 그는 안타까와 지도를 움켜쥐고 와들와들 살을 떨다가 머리를 싸쥐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나가라! 모두 나가라!》 려행가방을 들고 망설이던 젊은 참모는 불시에 터져오른 사나운 목소리에 목을 움츠리며 문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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