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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1  

 

아무리 걸어가도 밀림의 끝은 나지지 않았다. 락엽은 만물을 삼켜버린듯 하다.

발등까지 묻히는 락엽층을 지겨디디고 진대통을 타고넘으면 발밑에서는 껄쩍하게 썩은 물이 해여진 신창으로 스며들었다. 바람은 며칠째 잠들줄 모르고 사정없이 숲을 흔들어댄다. 사흘전에 첫눈이 내려 포근히 쌓여있더니 간밤에는 그것마저 말끔히 날려버렸다. 아침나절 서리를 쓰고누웠던 나무잎들이 하늘로 휘말려올라가고 어찌다 한두잎 남아있던 활엽관목의 잎사귀들이 잔가지들과 함께 분질러져서 허공을 맴돌다가 태질을 당하군 한다.

장엄한 조락의 계절을 맞이한 몽강 남패자의 대밀림은 얼핏 보매 바람소리, 잎지는 소리,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 나무와 나무가 맞비비고 맞부딪치는 소리, 그우에 눈가루가 휘날리고 충충 괴였던 들크무레하고 씁쓸한 마가을의 냄새가 허공을 떠돌아 어디라없이 부산한 느낌을 자아냈다.

엄청나게 큰 텅 빈 흉가에 홀로 들어섰을 때처럼 무시무시한 정적과 공허감이 그가운데 음침하게 가라앉아있다.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이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종소리라도 아득히 울려올듯, 별안간 천둥번개가 이 아름드리 거목의 바다를 단번에 휩쓸어버릴듯, 마구 뒤엉킨 나무와 풀, 덩굴과 이끼의 습한 그늘에서 두억시니가 불쑥 튀여나와 이를 갈며 덮치려들듯 온갖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생각이 덜미를 꽉 움켜잡고 놓지 않았다.

인섭은 점점 걸음을 옮겨놓기가 두려워졌다. 귀전에서 버스럭하고 나무잎이 지면 등줄기로 쭈룩하고 식은땀이 미끄러져내려간다.

그래도 멈추어서지 못하는것은 앞에서 길을 내며 가는것이 이 괴물같은 숲에 비해서는 너무나 아름답고 가냘파보이는 처녀이기때문이였다.

(대체 길을 알기나 하는가? 하기는 길이 어디 있기나 해야 말이지…)

인섭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치떠 여라문걸음 앞에서 걸어가는 김정숙동지의 모습을 더듬어보았다.

큼직한 토스레자루로 만든 배낭우에서 실한 머리태가 흔들거린다. 윤기 반들거리는 그 굵직한 머리태는 실한 푼수치고는 짧은 폭이였다. 배낭과 목도리자락에 가리워진 색바랜 진자주빛 저고리는 임을 받치고계시는 소매 한끝과 어깨에 기운 자리가 있었지만 단단한 몸매에 꼭 어울려서 화려한 인상까지 자아냈다. 벌써 열흘가까이 계속되는 숲속의 행군이였다. 하지만 그이께서는 변함없이 검정고무신에다 통버선을 단단히 죄여신으신 발로 억세게 풀숲을 헤쳐가신다. 나무덩굴이 앞을 막으면 지팽이로 후려치군 하시는데 그럴 때나 뒤따라오는 인섭을 한번 돌아보실뿐 그저 신접힌 사람처럼 앞으로만 가신다.

자기를 하강구련락소까지 안내해준 장경수는 이제 만나서 사령부로 데리고갈 공작원이 유격대에서도 유명한 명사수이며 사령관동지의 큰 신임을 받고있는 혁명가라고 귀띔해주었다.

그래서 인섭은 장경수보다 훨씬 거쿨지고  지숙한 혁명가를 머리속에 그려보았던것이다. 경수가 한걸음먼저 길을 떠난 며칠후에 김정숙동지께서 오셨다. 수수한 농촌처녀차림이지만 아무리 토스레로 가리우려 해도 가리워지지 않는 별같은 눈에 놀라버린 인섭은 어쩐지 장경수에게 또한번 얼리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산판에서 련락소까지 오는 사이 인섭은 여러차례 장경수의 능청스런 장난에 걸려 애를 먹군 하였었다. 장경수가 말하기는 그게 다 유격대에 들어가는 시험이라는것이였다.

산판에서 왜놈십장을 도끼등으로 때려눕혀놓고 숲으로 깊숙이 들어가있던 인섭은 유격대에 들어가 싸우는 길밖에 달리는 살길이 없었기때문에 어떤 시험이라도 달게 여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숲은 너무나 무시무시하다. 20도구골안의 숲도 결코 호락호락한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거기서는 해종일 걷느라면 토장도 나지고 산막도 있고 언젠가 사람이 지나간 오솔길 같은것을 만날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가도가도 인간세상과 더욱더 멀어진다는 느낌이 돌뿐 어디에도 인적이 스친 흔적을 찾아볼수 없다. 그러고보니 어쩐지 제발로 걸어간다기보다 숲의 망령에게 빨려들어가는듯 한 생각이 앞섰다.

압록강줄기를 타고 오르내리며 처서판에서 된장독이나 축낸 인섭이였다. 그도 숲에 들어서는 막히는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건 바다에 비길지 굴속에 비길지 모를 무시무시한 숲속이다. 그속에서 열흘가까이 헤매고보니 얼이 들락날락할 지경이였다.

그는 또다시 김정숙동지를 서둘러 따라잡았다. 이번에도 딱히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알수 없는 불안때문이였다.

《공작원동지, 저 아직 멀었소다?》

인섭은 정작 바투 다가가보니 새삼스럽게 물어볼 말도 따로 없어서 또다시 이런 막연한 질문을 되풀이하였다.

《이젠 공작원이라고 하지 말아요. 정숙이라고 부르라는데두 그래요.》

하며 김정숙동지께서는 걸음발을 늦추고 웃으며 돌아보시였다. 하얀 이속이 드러나자 가는 땀발이 내솟은 얼굴은 한층 더 그윽한 빛을 내뿜었다. 어찌나 아름답던지 인섭은 그것 역시 이 무시무시한 숲이 빚어내는 또 하나의 조화가 아닌가싶어 저도 모르는사이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거 이런데서도 꽤 사람들을 찾아낼수 있겠소다?》

《정말 숲에 처음 들어온 사람같군요. 길을 다 물어가지고 떠났는데 왜 못찾겠어요. 보세요. 우리 동무들이 지나가지 않았어요?》

하고 김정숙동지께서는 한곳을 가리키며 웃으시였다.

인섭은 김정숙동지의 눈길을 따라 락엽층이 푹신하게 깔린 흑갈색의 질쩍한 땅바닥을 분주히 더듬어보았다. 그것이 비록 유격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좋았다. 무엇인가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하는것이 있다면 무턱대고 반가울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더듬어보아야 눈에 뜨이는것이라군 없었다. 벌써 사흘전에 내린 첫눈이 녹아 락엽층은 질쩍하게 물기를 머금고있는데 그우에 채로 친듯 한 이깔나무의 곱고 보드라운 잎이 한벌 노랗게 깔려서 헐벗은 숲은 마치 자기의 온몸을 누군가의 제상에 내맡긴 수난자의 모습처럼 쓸쓸하고 서글픈 느낌을 자아냈다. 다람쥐가 지나간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인섭의 커다란 눈이 다시 김정숙동지에게로 돌아서자 그이께서는 상글상글 웃으시였다. 그 치마말기에 검게 번쩍거리는 권총이 감추어져있으리라고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신갈파의 고등계형사놈이 일부러 강을 넘어와서 길목을 지키고있다가 그 행장이며 짧은 머리태에는 주목을 돌리였으나 설마 그렇게도 곱살한 처녀의 몸에 손가락만 대면 불을 뿜는 총까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때문에 숲속깊이까지 따라왔다가 까마귀밥이 되고말았다. 별안간 권총을 뽑아들고 형사놈앞으로 맞받아나가시는 김정숙동지를 보고 인섭이 역시 눈을 화경같이 흡떴었다. 그래 인섭은 장경수의 말이 빈말이 아니였구나 하는것을 창황중에 되새겼던것이다.

《저게 보이지 않아요?》

하고 김정숙동지께서는 의아쩍게 파고드는 인섭의 순박한 눈길에 그냥 웃음을 지어보이시며 몇걸음 걸어가서 비벼던진 나무잎사귀 한잎을 주어드시였다. 그제야 보니 흔해빠진 락엽더미우에 버려져서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사람손으로 부스러뜨린것이 분명한 잎사귀줄기였다.

《아마 우리 동무들에게 담배가 떨어진 모양이예요. 그러고보니 여기로 지나간건 저 북만이나 두만강쪽에서 온 부대가 틀림없어요. 사령관동지의 친솔부대라면 설마 나무잎을 말아피울 형편이겠어요. 그냥 전투를 했는데…》

인섭은 침착하게 웃으시는 김정숙동지의 눈에서 자신의 눈길을 떼지 못한채 하나의 볼품없는 나무잎줄거리를 받아쥐였다.

《그러니 이 숲속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 짐작이 안가오다. 이게 그러니…》

하고 인섭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함정을 늘이고있는듯 한 대밀림의 속을 들여다보았다.

락엽이 휘날린다. 첫눈에 얼고 찬서리에 가드라든 황갈색의 나무잎들이 몸부림치며 떨어져서 덧쌓인다. 선채로 말라버린 잡초의 줄기들이 땅을 치며 통곡하듯 끝없이 떨어져내리는 락엽속에 애처롭게 뒤척거리고있다.

그러다 고개를 쳐든 인섭은 번쩍 눈을 떴다. 숲바닥에서는 뭇생명이 조락의 철을 맞이하였건만 이 대밀림의 주인인 이깔나무의 우듬지들은 화려한 장식을 다 벗어던진 지금에 와서야 한바탕 사나운 계절과 맞서볼만 하다는듯이 재빛하늘을 향해 어깨겯고 소리치며 설레이고있었다.

《아마 지금쯤 수많은 부대들이 모여들었을거예요. 우리도 머지 않아 사령부에 가닿을거예요. 회의에 늦지 말아야 하겠는데…》

김정숙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정색하고 어딘가 먼곳을 더듬어보시였다. 그리움이 함뿍 어린 그 눈에는 방금까지 떠돌던 순진한 웃음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이 소란한 시절에 괴물같은 숲속으로 신입대원을 데리고 혁명의 사령부를 찾아가는 로숙한 유격대공작원의 진중한 표정이 깃들었다.

인섭은 한결 불안이 가라앉았다. 우선 길을 헛들지 않았다는것 그리고 이 숲속에 자기들 두사람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것이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었다.

김일성장군님을 인차 뵈옵게 된다는 생각이 현실적으로 떠오르자 걸음발에 힘이 뻗쳤다. 자신만 생기면 김정숙동지께서 아무리 숲속걸음에 익숙하시다 하더라도 뒤질 까닭이 없다. 그는 오히려 김정숙동지의 앞에 서서 굵은 나무뿌리가 드러난 홈타기를 껑충껑충 뛰여넘기도 하고 버섯뭉치들을 짓뭉개며 진대나무우로 기여오르기도 하였다.

김정숙동지의 확신에 찬 말은 허망한것이 아니였다. 반나절이 못가서 성긴 봇나무숲이 나타났다. 한결 세상이 밝아졌다. 그러자 문득 저앞에서 유격대군복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분명 누군가를 찾아나온듯 인적을 발견하자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걸음을 다우쳤다.

서둘러 다가오는 유격대원들을 보고 김정숙동지께서도 멎어서시고 인섭이도 주춤했다. 인섭은 사람그림자만 보아도 기쁠것 같았으나 정작 사람이 나타나자 왜그런지 섬찍한 생각이 앞섰다. 하기는 그믐밤같은 숲속에서 느닷없이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것이 그닥 기분이 좋을수는 없는것이다.

김정숙동지 역시 놀라시였다. 그러나 그이의 놀람은 후미진곳에서 사람을 만났다는것때문이 아니였다. 그이께서 놀라신것은 불쑥 나타난 사람이 유격대원이기때문이 아니라 몹시 낯익은 사람이기때문이였다.

나이가 마흔가까이 돼보이는 앞선 사람은 살집좋은 몸매에다 틀스러운 차림을 한 사람이였다. 그닥 험해지지 않은 여름군복에 권총갑을 느직이 걸치고 큼직한 군용가방을 허리아래 드리운 그 사람은 4~5년전 김정숙동지께서 사령부의 파견으로 적구의 중심거리에 나가 공작하실 때 한번 만나보신적이 있는 엄광호였다. 그후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에 나온 다음에는 그의 안해되는 순화와 한 농촌에서 공작하셨기때문에 이따금 들리는 그를 그때마다 만나실수 있었다. 그무렵 그는 허름한 춘추외투와 혼솔이 나들나들해진 양복에다 모자채양으로 깊숙이 눈등을 가리우고 다녔었다. 작년에 그가 후방밀영에 가있다는 뜬소문은 들으시였으나 아무래도 군복을 입은 엄광호를 그려내실수가 없었다.

그러한 그를 이 숲속에서 맨 선참으로 만나게 됐다는것은 정말 상상밖이시였다.

《아니, 정숙동무 아니요?》

처음에는 무턱대고 마주 다가오던 엄광호도 김정숙동지를 알아보고 우뚝 멎어서며 소리쳤다. 여전히 석쉼한 큰 목소리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엄광호동지! 정말 여기서 엄광호동지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에게로 달려나가며 말씀하시였다. 엄광호도 마주 달려왔다.

《나역시 그렇소. 그런데 이게 얼마만이요? 우리가 17도구에서 만났던것이 재작년 겨울이던가, 아니 작년 초봄이였지, 그런데 무척도 변했구만, 이제는 아주 몰라보게 됐는데…》

《엄광호동지도 변했어요. 이태도 못됐는데… 정말 군복을 입으니 척 어울리는군요.》

《진작 입었어야 했던것이지. 그러나 혁명정세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단 말이요. 그바람에 나의 청춘은 저 저주받을 소부르죠아들의 거리에서 다 시들어버렸소. 허허허.》

엄광호는 살집좋은 몸을 덜썩거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색하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사령부는 어디에 있소? 사령관동지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예?》

김정숙동지께서는 놀라서 되물으시였다.

《사령부라니요? 우리는 사령부를 찾아오는 길인데요. 그럼 엄광호동지도 지금 이리로 들어오는 길인가요?》

《허, 이런.》

하고 엄광호는 같이 온 대원쪽을 돌아보고나서 대답하였다.

《우리야 여기 도착한지 여러날째 되지요. 그런데 그저께 7련대가 먼저 도착해서 집결구역을 외곽에서 지키게 되였단 말이요. 그때 오중흡동무가 말하기를 오늘쯤 김일성동지께서 친솔부대를 거느리시고 도착하신다는게 아니겠소. 여기 군장동무가 어서 바삐 마중을 나가서 길안내를 해드리라고 해서 이렇게 50리가까이나 나왔는데 워낙 내숭스런 숲이 돼서 만나뵙기가 헐치 않구만. 난 발자국소리가 나길래 영낙없이 사령부의 척후라고만 생각했지.》

얼마후 네사람은 한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같이 사령부를 찾아보자는것이였다.

《성림동무, 인사하오. 내 언젠가 말한적이 있었지. 김정숙동무라고 유명한 지하공작원동무요.》

걸음을 옮겨놓기에 앞서 엄광호는 이렇게 자기 동행에게 인사를 시켰다. 김정숙동지 역시 새로 유격대에 입대하러 가는 박인섭에게 엄광호를 소개하시고나서 겸사겸사 물으시였다.

《저 엄광호동지는 지금 후방밀영에 계신다지요?》

《그렇소. 얼마전부터 군수처사업을 하고있소. 헌데 박인섭동무라고 했던가요? 그래 박인섭동무는 이제 새로 유격대에 입대하러 들어온단 말이지요? 이런 때에…》

엄광호는 걸음을 옮겨놓으려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돌아서서 인섭의 어질게만 생긴 투박한 모습을 아래우로 뜯어보았다.

가뜩이나 생소한 유격대지휘관앞에서 적잖게 주눅이 들어있던 인섭은 눈섭이 시꺼먼 엄광호의 부리부리한 눈이 똑바로 겨누고들자 얼굴이 불깃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사령관동지께서 말씀이 계셨어요. 그런데 조직이 시련을 겪다나니 련락이 늦어졌지요. 이번에도 마침 장경수동무가 공작원들을 소환하러 나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인섭동무는 지금도 외딴 산막에 숨어있어야 할번했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무엇때문인지 인섭을 두둔하는 투로 변하는 자신의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단숨에 여기까지 말씀하시였다.

《그야 좋은 일이지요. 내가 말하는것은 오늘날 혁명정세는 겉보기에 매우 간고한듯 하지만 역시 인민의 혁명적지향은 꺾을수 없다는 그것입니다. 이 리성림동무도 저놈들이 우리 남만부대가 외차구에서 몰살을 당했다 어쨌다 하고 헛소문을 돌리던 그 무렵에 입대했으니까요.》

엄광호는 활달하게 몸을 돌려 뒤따라선 리성림을 가리켰다.

《시련이야 언제나 있게 마련이지요.》

하고 리성림이라는 그 청년은 스스럼없이 김정숙동지를 바라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잘 발달된 몸매에 밝은 표정을 짓고있는 그의 말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자아냈다.

《적들은 벌써 유격대가 창건된 첫날부터 유격대의 〈소멸〉에 대해 떠벌이지 않았습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성림의 미끈한 몸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시였다. 우리 신대원이 어떠냐는듯 한 엄광호의 눈짓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시며 너그럽게 웃으시였다.

인섭이만이 눈이 둥그래졌다. 다시 장경수의 지꿎은 말들이 생각났다. 제국주의멸망의 불가피성이요, 공산주의승리의 필연성이요 하고 그가 그렇게 힘든 질문을 퍼부은것도 까닭없는 일이 아니다. 저 사람도 신대원이라는데 얼마나 그럴듯 하게 말할줄 아는가. 혹시 김일성장군님께서 무슨 말씀을 물으시면 어떻게 한다…

불시에 인섭의 가슴에는 새로운 불안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한참 말없이 걷다가 이렇게 물으시였다.

《일이라니?》

사위를 둘러보며 앞서 걷던 엄광호는 의아쩍게 돌아보았다.

《이런 때라니 무슨 뜻이예요?》

《아, 그말 말이요? 역시 날카롭군.》

하고 엄광호는 입가에 웃음을 짓더니 뒤따라오는 두사람을 돌아보았다. 자신만만해보이던 그의 표정은 한순간에 긴장되였다.

《정세가 몹시 험해졌소. 백두산쪽에서도 적들이 대검거선풍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소.》

두 신대원과 어지간히 거리가 벌어졌을 때 엄광호는 귀전에 대고 수군수군 말하였다.

《지금 이 몽강 숲속에 저놈들이 새까맣게 덮였소. 벌써 우리가 도착하기전부터 기다리고있단 말이요.》

《그놈들이 유격대가 여기에 모인다는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이예요?》

김정숙동지께서도 긴장되여 날카롭게 물으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 계시게 될 이 숲속에 적의 대부대가 벌써 와서 기다린다는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설마 사령관동지께서 그런것을 내다보시지 않고 회의를 소집하셨을까닭은 없겠지만 적들이 백두산지구와 국경연안일대에 대병력을 풀어놓고 공산주의자들의 《완전소멸》을 기한다고 떠벌이고있는 오늘 놈들의 그 《토벌》의 기본대상이 되고있는 혁명의 사령부가 바로 그놈들이 기다리고있는곳으로 진출한다는것을 무심히 생각할수는 없었다.

《그놈들이라고 장님들만 모였겠소?》

엄광호는 뒤따르는 동무들이 무슨 눈치라도 채지 않았는가 하여 뒤를 돌아보더니 한층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놈들이 〈열하원정〉에 나선 부대들을 기다리고있다가 그달음으로 뒤쫓아온것 같소. 우리는 타격을 많이 입었소. 사령관동지께서 최춘국련대를 보내주시지 않았더면 아마 몰살당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렇게 타격을 입은 부대들의 문제를 중요하게 보시고 아마 혁명에서 일대 전환을 일으킬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시자는것 같소. 하기는 이해 겨울을 우리가 어떻게 견디는가 하는것이 문제요. 저놈들이 온통 산과 숲을 다 덮었으니 그가운데서 종전과 같은 유격전쟁을 진행하겠는가 하는것이 문제란 말이요. 내가 보건데 〈열하원정〉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것을 시사해주는것 같소. 하기는 이것은 내 개인의 생각이오만…》

김정숙동지께서는 엄광호의 석쉼한 목소리를 듣고있는 사이 가슴이 답답해서 목에 돌려감은 목도리를 끌러놓았다. 종전과 같이 유격전쟁을 하기가 어렵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기는 적의 대부대가 집결되여있다는 계선에서 회의를 부르셨다는것이 보통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설마 유격전쟁자체가 문제시된단 말인가?

김정숙동지께서는 더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더욱 걸음을 다우치시였다. 남패자의 숲속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첫소리가 심상치를 않다. 한시바삐 사령관동지를 만나뵙고 복잡하게 엉클어진 혁명의 정세를 정확하게 리해하고싶으시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또 있단 말이요.》

김정숙동지의 초조해지는 마음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듯 잠자코 따라걷던 엄광호가 다시한번 뒤를 돌아보더니 수군거렸다.

《오중흡동무네 초소에 이상한자가 나타났다질 않소.》

《이상한자라니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더는 말씀을 하고싶지 않으시였으나 어쩔수 없는 힘에 끌려 캐물으시고야 말았다.

《글쎄말이요. 뭐 사령관동지의 동창생이라고 자처한다는데 장경수가 하는 말은 그놈이 관동군의 특무라는거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엄광호를 찬찬히 뜯어보시였다. 무엇인가 불쾌한 인상이 머리속을 휙 스치고 지나갔다.

《걸읍시다. 저 동무들이 들으면 재미없소.》

그러면서 엄광호는 고개를 숙이고 수걱수걱 걸음을 옮겨놓았다. 김정숙동지께서도 하는수없이 따라걸으시였다.

《지금 장경수가 그쪽에 나가 공작하고있지요.》

하고 엄광호는 걸으면서 말을 이었다.

《장경수가 그놈과 맞다든 모양이요. 헌데 오백룡동무가 한태혁이를 데리고 그리로 갔소. 아무래도 그놈과 무슨 상관이 있는것 같소. 벌써 어저께 떠났는데 아직 오지를 않는구만. 하기는 여기서 오중흡동무네 있는데까지는 70리나 되니까… 바로 그앞에 적들이 있소.》

《한태혁동무랑 가는것을 보았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긴장되여 다우쳐물으시였다.

보았지요. 나도 따로 묻지 않았고 그 동무들도 별말은 하지 않았소만 그게야 짐작못하겠소. 사령부가 아직 집결구역에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경위중대장이 한태혁이 같은 싸움군을 데리고 떠난다는것이 여간해서 있을 법한 일이요.》

하기는 엄광호의 말이 그럼직하였다. 장경수가 공작지에서 적의 특무놈을 만났다는것이나 행군중인 사령부를 앞질러 경위중대장이 한태혁이를 데리고 어딘가로 떠났다는것이나 다 보통일이 아니다. 대체 적의 특무면 특무지 어떤 놈이기에 감히 사령관동지의 동창생이라고 자처한단 말인가.

김정숙동지의 마음은 더욱 번거로와지셨다. 그이께서는 국경연선에서 벌어졌던 피비린내나는 적의 야수적 《토벌》과 대검거선풍을 피뜩 머리속에 그려보시였다. 백두산지구일대에 끓어번지던 혁명의 기운은 된서리를 만나 적잖게 기세가 숙어들었다. 조직이 수많이 파괴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조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적구의 중심에 스며들어 나날이 험해가는 백색테로의 광란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몸서리를 치며 복수를 다짐하시던 일이 새삼스럽게 눈앞에 밟혔다. 사령관동지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던 날 압록강물결을 굽어보며 다지던 맹세도 떠올랐다. 사령관동지를 만나뵙기만 하면 그 모든 분하고 치떨리던 사연을 말씀드리고 다시금 그리운 전구로 돌아가리라던 그 다짐은 장차 어떻게 될것인가. 적의 대부대가 기다리고있다는 숲속, 7련대초소에 나타났다는 정체불명의 사나이―

남패자의 대밀림은 그 웅숭깊은 표정 그대로 무엇인가 운명의 수수께끼같은 괴이한 사변들을 허다하게 마련해놓고 기다리는듯 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시였다. 설레이는 나무가지들만 첩첩할뿐 하늘은 한점도 내다보이지 않는다. 답답하시였다. 어깨를 파고드는 배낭끈을 벗겨서 한옆으로 옮겨놓으시는데 별안간 총소리가 자지러졌다.

《이게 뭐요?》

엄광호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인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따라오던 신대원들도 멎어섰다.

총소리는 그들이 지나온 뒤쪽 아마 30~40리나 됨직한곳에서 울리여왔다. 그것은 한두발의 총소리가 아니였다. 대부대와 대부대가 맞불질을 하는 치렬한 전투의 메아리였다. 밀림의 촘촘한 나무들은 훌륭한 공명장치였다. 콩볶듯 자지러지는 총소리뒤로 엇갈리는 사람들의 웨침소리조차 웅글은 화음이 되여 울리여오는것만 같다.

《이게 어떻게 된거요? 동무들은 적을 못봤소?》

삽시에 얼굴이 꺼멓게 질린 엄광호가 엄격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는 전혀 못봤어요. 하기는 우리는 좀더 북쪽으로 치우쳐온것 같아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불안스런 눈길을 그쪽에 보낸채 대답하시였다.

《사령부가 저쪽으로 올 까닭은 없고… 전투가 붙었다면 틀림없이 유격대와 왜놈들의 전투겠는데…》

엄광호는 여전히 접전소리가 그치지 않는 동남쪽 보이지도 않는 숲속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웬 전툴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엄광호의 차츰 심각해지는 표정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물으시였다.

리성림과 박인섭도 난데없이 뒤쪽에서 터져오른 총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다가 엄광호의 말을 안타깝게 기다렸다.

그러나 엄광호는 입맛을 쩝하고 다실뿐 잠시 말이 없더니 걸음을 옮겨놓았다.

《걸읍시다. 유격대가 있고 왜놈들군대가 있는데 전투가 있기야 보통이지요.》

엄광호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듯 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김정숙동지께만 겨우 들리게 신음하듯 웅얼거렸다.

《이거 암만해도 심상칠 않소. 우리가 포위된게 아닌지 모르겠소.》

김정숙동지께서는 엄광호의 심각해진 얼굴을 피뜩 돌아보시였다.

정세의 준엄성은 아무리 치여다보아도 하늘을 드러내지 않는 숲의 표정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크게 번져가는 총소리의 메아리에 그리고 빗장을 지르듯 입을 다물어버린 엄광호의 무거운 낯빛과 두 신대원들의 허둥거리는 걸음걸이에 충분히 반영되여있는듯 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걸음을 다우치시였다. 한시바삐 사령관동지를 만나뵙고싶으시였다.

총소리는 차츰 북쪽으로 옮겨가면서 멀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반원을 그으면서 천천히 가라앉는 그 총소리의 메아리는 집결구역이 포위된것 같다는 엄광호의 말을 형상적으로 확증하는듯 하였다.

2

 

조용하던 남패자골안의 정적을 뒤흔들어놓은 총소리는 인차 가라앉았지만 그 총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에 던져준 파문은 컸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집결구역에 나타난 최춘국련대가 치른 전투의 메아리였다는것은 곧 알려졌지만 아군의 배후에 그러한 적의 대부대가 나타났다는것은 장차는 몰라도 지금 당장은 누구에게나 불안을 느끼게 하는 뜻밖의 정황이였다.

여태까지 알려진 적의 전선은 사령부가 자리잡은 함지박같은 골안에서 서남쪽으로 70리가량 상거한 한 농촌에서 시작되여 북쪽으로 우불꾸불 뻗어가다가 이도하의 여윈 개울가에서 끝났었다. 그런데 이제는 적의 전선이 커다란 고리모양으로 이어진셈이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미 도착한 부대들과 새로 나타난 최춘국련대를 풀어 원형방어진을 형성하게 하신 다음 사태의 급속한 변화에 대처하여 계획하신 일들을 서둘러 처리해나가시였다.

그러나 일은 너무나 많았고 계획하신 사업들은 어느것 하나 빼놓을만 한것이 없었다.

김정숙동지께서 가시고 이어 최춘국이와 함께 따라들어왔던 각 부대 지휘관들마저 각기 자기 위치로 가버리자 천막안은 조용해졌다.

전령병들이 낮에 겨우 마련해놓은 책상우에는 벌써 문건이며 출판물이며 편지봉투들이 수북이 쌓이였다.

최춘국의 보고에 의하면 남패자의 동쪽에 새로 나타난 적은 무다구찌소장이 지휘하는 한개 려단의 병력으로서 사령관동지께서 추측하신대로 행군과정에 불의에 조우했기때문에 서로 불질을 한것이지 적들 역시 지금 당장은 크게 싸움을 벌릴 의사가 없는것 같다고 한다.

그럼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포위를 든든히 해놓고 우리와 흥정을 해보자는것이지. 교활한 놈들.》

김일성동지께서는 홀로 외우시며 방금 보다가 두신 편지 한통을 집어드시였다. 그것은 두툼한 봉투에 활달한 붓글씨로 《조선인민혁명군 총사령관 김일성장군 친전》하고 사령관동지의 명함만 밝혔을뿐 편지를 낸 사람의 주소도 없고 사령관동지의 주소 역시 없는 대신 봉투의 한귀를 어이고 매깃을 꽂아놓은 색다른 편지였다.

이러한 편지는 유격대창건초기에 구국군이며 산림대에서 급한 정황을 알리기 위하여 사령관동지께 통보를 올릴 때 자주 쓰이던 편지로서 그후 백두산근거지가 창설되자 근거지주변의 인민들속에서 김일성장군님께 꼭 알리고싶은 사연이 있을 때 새깃을 꽂은 편지를 써서 보내군 하였다. 그것이 장군님께 전달되는 경로는 다양하였다. 가장 널리 퍼진 방법은 편지를 써서 한밤중에 이웃집에 떨어뜨리는것이였다. 그러면 이웃집에서는 새깃을 보고 인차 김일성장군님께 가는 편지라는것을 알고 다음집에 떨어뜨린다.

그다음집에서는 또 다음집에 떨어뜨리고 이렇게 하여 한 동네를 다 돌면 다음동네로 옮겨진다. 그러는 과정에 편지는 조직원의 손에 가닿게 마련이고 그다음부터는 조직의 선을 따라 결국 사령부까지 찾아오게 되는것이였다.

무산 옥암동의 류석진이라는 로인이 보낸 그 편지도 바로 그러한 편지들가운데 한통이였다. 로인이 소덕수에 건너와서 띄운 그 편지를 김정숙동지께서는 200리나 떨어진 하강구의 련락소에서 찾아가지고 오시였다.

편지가 소덕수에서 하강구련락소까지 200리나 허궁 날아온것은 그 어간에 있던 혁명조직과 조직원들이 다 잘못됐다는 말이 아닌가고 지휘관들은 불안을 금치 못해하였다. 있음직한 일이였다. 그러나 다른편에서 볼 때 원쑤들의 야수적인 탄압속에서 일부 혁명조직들이 파괴되고 많은 혁명가들이 검거투옥된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에 보내는 편지를 이렇게 200리씩이나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옮겨놓았다는것은 우리 인민들의 가슴속에 조선인민혁명군을 믿는 마음이 여전히 억세게 살아있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였다.

한때 천도교를 믿었다는 류석진로인도 편지에서 바로 인민들의 그러한 심정을 토로하고있었다.

《무릇 세상만물이…》

하고 류석진로인은 편지에 썼다.

《뿌리내릴 땅이 있고 숨쉬는 하늘이 있듯이 만방의 백성들이 나라가 있어 편안한 생을 도모하거늘 우리 배달민족에 이르러서는 저을사, 정미, 경술년의 국치를 당함에 무궁화근역의 반만년력사가 한장 휴지로 돌아가고 마치 뿌리뽑히운 수목의 신세와 같이 섬오랑캐의 구두발에 짓밟히게 되였으니 그 가련한 정상을 어찌 말과 글로 다 그려낼길이 있사오리까.

이 땅에 태를 묻은자 모두가 늙고 젊음을 가리지 않고 저마다 이를 갈고 주먹을 부르쥐며 국권을 수복하고 나라를 다시 찾을 날만 고대하더니 하늘이 조선을 버리지 않아 김일성장군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나이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령솔하시는 조선독립유격대의 왜적 치는 소리 하늘땅을 뒤흔드는가운데 이 나라 백성들의 주린 얼굴에도 화색이 돌고 허기진 창자를 움켜쥐고도 오히려 원쑤를 벼르는 기상이 장하니 이는 곧 음달에 생을 부지하던 푸성귀가 해빛을 만나 활개치며 일어남과 같음이라 비록 리치는 그렇다 하나 장군님을 우러러 받드는 이 나라 겨레의 심정을 어찌 다만 푸성귀의 해빛을 만난데 비기오리까.》

이러한 투로 씌여진 류석진로인의 그 짧지 않은 편지에 담긴 기본내용은 국경연안에 살판치는 적들의 탄압만행을 고발하는것이였고 그중에도 조선인민혁명군을 다 《소멸》하였다고 쥐여치는 적들의 간악무도한 악선전에 통분함을 참지 못해 이 한을 풀어달라고 절절히 호소한것이였다. 겸하여 로인은 자기네 동네형편과 집안형편도 간단히 덧붙였다. 동네의 구장소임을 맡아보는 리덕선이라는자가 한때 혁명군과 관계를 맺고있었는데 그놈이 요즘에 와서 적들의 악담패설에 넘어가 주구로 변했으니 다시는 그놈과 련계를 가지지 말라는 당부며 그놈때문에 자기의 손녀딸 류진옥이 동네를 뛰쳐났는데 혹 진중에 나타나면 잘 거두어달라는 부탁 역시 로인의 깊은 마음속을 엿보게 하는것이 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물론 류석진로인이 생소한 사람이였지만 무산 옥암동에 대해서는 지금 비서처에 있는 정지성이 입대전에 활동하던 곳이라 깊은 관심을 가지신적이 계시였고 류로인의 손녀딸 류진옥도 정지성의 영향아래 혁명에 눈뜬 아름다운 처녀로서 기억에 남아있는 이름이였다.

뜻밖에 날아든 편지가운데서 낯익은 고장과 낯익은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신 장군님께서는 어쩐지 정다운 고향사람들을 만나시는듯 마음이 훈훈해지심을 느끼시였다. 그러나 지금 그 정다운 고장과 정다운 사람들은 사나운 피바다, 불바다에 휘말리여 구원을 부르고있다.

편지나 보고에 반영된 시련은 그런대로 추측이라도 할수 있지만 마지막 떠나온 김정숙동무조차 련계를 못짓고 말았다는 13도구 구룡리일대의 형편은 어떻게 되였는지 짐작조차 할수 없다. 13도구 일판에 신갈파의 형사들까지 몰려들었다는 장경수의 보고를 받으신 다음부터 사령관동지께서는 그곳 조직의 형편을 내내 궁금하게 기다리시였으나 김정숙동무도 그들과 련계를 못취했다는것으로 보아 어떤 피비린 참극이 벌어졌을지 십상 모른다.

(우리 동무들은…)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깃털편지의 알른거리도록 진한 붓글씨를 이윽히 바라보시며 마음속으로 생각하시였다.

(깃털편지가 200리나 허궁 날아왔다든가, 무산 옥암동의 구장이 적의 주구로 변했다든가, 혹은 남패자의 동쪽에 또 한개 려단의 적이 새로 나타나 포위를 형성했다든가 하는것자체를 대단히 중시하고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현상들임에 틀림이 없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침내 일어서시여 천막안을 몇걸음 거니시다가 그대로 외투도 걸치지 않으신채 바깥으로 나서시였다.

땅거미가 서서히 밀려들고있다. 물주전자를 들고 달려오던 김재영이가 어느새 천막안에 들어갔다가 재빨리 되나와서 뒤를 따른다.

(그러나 그것들이 저놈들의 일관한 정책의 산물이라는 그것을 우리는 더 중시해야 할것이다. 《동아신질서건설성명》이라고? 이런것이 바로 그놈들의 그 간악한 심보를 드러내고있다.)

그이께서는 저녁안개가 떠도는 쓸쓸한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시며 생각을 좇으시였다.

(저놈들이 끝내 중국인민의 장기전에 끌려들고 말았으니 헤여나기 어렵게 된셈인데 그래도 만주에 가지고있는 근 20개사단이나 되는 군대를 까딱 건드리지 않는다는것은 우리와 기어이 끝장을 보자는것이겠지.)

김정숙동지께서 가지고 오신 출판물들가운데는 최근 신문들도 있었다. 11월 4일부 신문들은 일제히 《동아신질서건설성명》이라는것을 실었다. 고노에총리대신의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를 골자로 하는 그 3원칙이라는것의 본질은 앞으로 차츰 밝혀지겠지만 어쨌든 사탕발림의 감언리설로 중국측과 타협을 함으로써 부리나케 다그어대던 전쟁을 일단 고착시키고 숨을 돌려보겠다는것만은 누구에게나 뻔한 속심이였다.

저놈들이 그렇게 급해맞아 돌아가던 중일전쟁을 일단 선반우에 올려놓았으니 이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마음놓고 해보자고 접어들것이 틀림없다. 아니 바로 그것을 위해서 중국과의 화평교섭이요, 장고봉사건이요 하는 연극을 꾸몄다고 보는것이 보다 과학적일것이다.

(주력만 해도 근 20개 사단이나 되는것들이니 헐치는 않겠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이 겨울에 벌어질 원쑤와의 혈전을 눈앞에 그려보시며 전에 없던 긴장을 느끼시였다.

혈전의 서막은 이미 올려진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것은 김정숙동지의 보고에도, 최춘국련대가 방금 치르고 온 전투에도 그리고 류석진로인의 편지나 정지성이가 종합해온 수많은 출판물들의 자료들에도 뚜렷이 반영되여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급작스레 산그늘이 짙어지면서 바람결이 차지는것을 느끼시고 고개를 드시였다. 깊은 생각에 잠겨계셔서 그런지 이날따라 골짜기도 오솔길도 숲도 생소하게 느껴지시였다. 그이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시고 사위를 둘러보시였다.

그것은 꺼멓게 말라 시들어버린 억새밭이 저녁바람에 설렁거리며 설레이는 밋밋한 언덕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언제 어디서 손에 꺾어드셨는지 모르는 싸리가치로 풍성한 새밭을 툭툭 치시며 다시 천천히 언덕을 오르시였다. 그러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시였다. 저앞에서 쿨럭쿨럭하는 웅글은 기침소리가 났다. 어느새 재영이가 가슴앞에 드리운 기관단총을 틀어쥐고 그이 앞을 막아섰다.

기침소리는 불과 10여메터앞에서 울리더니 이어 억새밭이 갈라지면서 커다란 사나이가 엇비듬히 언덕을 내려간다. 실한 몸매에 다 해여진 여름군복을 날리며 허리를 치는 억새밭을 천천히 헤치고가는 그 사람은 통 세상일에 감각이 있는 사람같지를 않다. 꼿꼿이 머리를 쳐들고 가기는 해도 공허하게 눈을 흡떴을뿐 그 망막에 무슨 표상이 떠오르는것 같지도 않다. 그렇지 않다면 불과 여라문걸음 뒤에서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렇게도 느끼지 못할수가 없는것이다.

어깨박죽과 소매자락이 너덜너덜한 군복짬으로 생살이 마가을 찬바람속에 그대로 드러나있어도 추위 역시 느끼는것 같지 않다.

왜 그런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허비는 그 무엇이 쌀쌀한 저녁바람속에 내풍긴다. 더구나 탄알자욱이 숭숭한 군모밑으로 흘러내린 어지러운 붕대의 빨간 피빛이 그 가슴아픈 인상을 강조해주었다.

《주영찬중대장입니다.》

김재영이 긴장을 늦추며 사령관동지의 귀전에 대고 속삭였다. 기관단총의 총구는 내리웠으나 전령병의 목소리는 무슨 까닭인지 몹시 조심스럽게 울리였다. 나어린 전령병 역시 그 가슴아픈 인상에 압도된것이였다.

《주영찬이? 저 마인구철교를 사흘동안이나 견지했다는 그 동무요?》

김일성동지께서도 그 사람에게 들릴가봐 저어하시듯 낮은 목소리로 물으시였다.

《그렇습니다. 요즘 내내 검토를 받고있답니다. 그래서 저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무엇을 검토받는단 말이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번쩍하고 눈을 빛내시며 엄한 목소리로 물으시였다.

《모르겠습니다.》

김재영은 마치 주영찬이 비판을 받는것이 자기 잘못이기나 한것처럼 꺼져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지그시 입술을 깨무시며 저물어오는 남패자골안을 바라보시였다.

주영찬은 《열하원정》에 참가한 부대들가운데서도 가장 용감하고 가장 성실한 공산주의자로 알려져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한번도 그를 만나보신적이 없었으나 여러 보고들에 반영된 주영찬의 이름을 기억하고계시였고 특히 이번 원정에서 적의 강화된 방어선을 육탄으로 헤치고 마인구철교를 탈취하여 사흘동안이나 견지하였다는 그것만으로도 능히 그를 영웅으로 부를수 있다고 생각하시였다. 그런 그가 무엇때문에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하기는 그곳 지휘관의 보고에 의하면 주영찬중대는 그 전투에서 전멸되였다고 한다. 그래서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저 동무를 부르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분함을 이기시지 못하여 급히 소리치시였다.

김재영의 말을 들은 주영찬은 우뚝 억새밭 한가운데 멎어서더니 멍하니 언덕우를 치여다본다. 연한 노을빛이 번져가는 억새밭은 벌써 서리발을 머금어 뿌연 빛으로 번쩍거리며 굼실대는데 허울만 남은것 같은 커다란 사나이가 누데기군복을 너풀거리며 서있는 모양은 혁명의 풍상고초속에 태여나시여 이날 이때까지 싸움의 험한 길을 헤쳐오신 김일성동지의 눈에도 너무나 가슴아픈 인상을 자아냈다.

세상에 소문이 뜨르르하던 용감한 유격대중대장 주영찬이 불타는 넋은 어느 광야에 쥐여뿌리고 오늘은 저렇게 짓이겨진 떡잎처럼 어설프게 서있는가?

《이리 오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한손을 들어 부드럽게 말씀하시고는 이어 그가 다가오는것을 기다리실수가 없어 서둘러 억새밭을 헤치고 나가시였다.

《중대장동무, 동무가 그 유명한 주영찬동무지요?》

김일성동지께서는 탄알이 꿰고나간 군복의 어깨를 다정히 어루만지며 물으시였다.

주영찬은 여전히 얼빠진 사람처럼 사령관동지의 모습을 바라보고섰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쩍 벌어진 두어깨가 넘실거리는 억새밭 한가운데서 물결이라도 탄듯 세차게 들먹거렸다. 그 물결치는 어깨밑에서 씹어삼키는 흐느낌과 함께 고통에 짓눌리우는 사나이의 몸부림소리가 울리여나왔다.

《사령관동지, 제 이렇게 큰 죄를 짓고 오매에도 그립던 사령관동지를 뵈올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더니 주영찬은 군모를 벗어서 움켜쥐고 깊이 머리를 숙였다.

《제 무슨 면목으로 사령관동지께 보고를 올리겠습니까. 저는 죄인이올시다.》

물결치는 주영찬의 어깨를 따뜻이 쓸어주시던 김일성동지의 손길은 허공에서 멎었다.

이럴수가 있는가. 어찌 주영찬이 내앞에서 이럴수가 있는가.

사령관동지께서는 손을 내리시여 뒤짐을 짚으시고 이제는 하늘조차 어두워오는 숲우를 바라보시였다.

《내 몇해전부터 주영찬이 잘 싸운다는 소문을 들었소.》

김일성동지께서는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러나 오늘 정작 만나보니 동무를 만나지 못한것보다 내 마음이 더 섭섭하오. 주영찬이 이렇게 나약한 인간인줄 난 상상도 못해보았소. 대체 동무가 무슨 죄를 그리 크게 지었소? 동무들은 기병이였지? 마인구철교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밤낮을 달린끝에 말들은 다 쓰러져버려서 동무들은 알몸으로 그 철교에 육박해갔다지? 그래 여기서 동무가 지은 죄가 대체 무어냐말이요? 내 여기서 혁명가의 긍지를 다 집어던지고 아이들처럼 눈물을 흘리는 이름난 공산주의자 주영찬의 이 꼴을 보는것이 참으로 섭섭하오.》

《사령관동지!》

주영찬은 마침내 울음소리를 터뜨리더니 그이의 넓은 가슴에 쓰러지듯이 얼굴을 묻어버렸다.

《사령관동지,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전우들을 다 죽이고 혼자 살아온 제가 어찌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사령관동지, 제발 저에게 합당한 벌을 주십시오.》

주영찬은 흐느끼며 끅― 끅― 목메이는 소리로 토하듯이 부르짖었다.

《영찬동무.》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등을 다시 어루만지시며 부드럽게 부르시였다.

《내 동무의 심정을 리해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가가 이러면 안됩니다. 동무의 과오에 대해서는 내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중대를 잃었으니 중대장이 책임감을 느끼는것은 응당한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넋빠진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방법으로는 과오를 고칠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던 그이께서는 문득 입을 다무시였다. 주영찬의 등을 어루만지시는 손끝에 해여진 옷자락이 드러나고 그짬으로 미처 아물지 못하여 갈아번진 밭이랑처럼 길게 부풀어오른 상처가 만져졌다.

《이건… 그때 당한 상처입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하시던 말씀을 중단하시고 부드럽게 상처를 덮으며 물으시였다.

《저…》

격정에 목이 메여 흐느껴울던 주영찬은 사령관동지의 물으시는 말뜻을 새겨듣지 못하여 더듬거렸다. 그것이 김일성동지께서는 더 가슴아프시였다.

찬찬히 더듬어보시니 한뽐이나 되는 그런 상처가 네군데나 되였다. 그래도 본인은 그런것쯤 남이 물어도 알아듣지 못할만큼 감각이 없다. 주영찬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 어떤 상처보다도 그를 괴롭히는것은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마인구에서 창격전을 했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손바닥으로 상처를 따뜻이 감싸주시며 조용히 물으시였다.

《예, 총알이 떨어져서 철장대로 치고 총창으로 찌르고 하다가 모두 그놈들의 총에 맞고 칼에 찔렸습니다. 전 철교밑으로 굴러떨어졌는데 어떻게 되여 멀리 떠내려오다가 강낭밭에 떠밀려나와서 눈을 떴습니다.》

《그러니 동무의 죄는 그렇게 불사신처럼 살아난데 있었군. 주영찬동무, 내 동무에게 한가지 과업을 주겠소. 아니 과업이라기보다 혁명전우로서 한가지 이야기할것이 있소.》

《예? 사령관동지, 제게 명령을 주십시오. 제 이 마당에 혁명의 요구라면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아직도 흐느낌소리를 그치지 못한채 억새밭 한가운데 꿋꿋이 허리를 펴고 서는 주영찬을 엄한 눈길로 바라보시였다.

《내 이야기하자는것이 바로 그것이요. 동무는 혁명가로서의 자기 자랑을 소중히 생각해야겠소. 다시는 주영찬이 얼빠진 사람처럼 남패자골안을 떠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내 귀에 들리지 않게 해주기를 바라오. 나머지 문제, 중대를 잃은 동무의 책임이나 전투의 경위에 대해서는 동무네 지휘관들과 회의에서 론의해보겠소.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자기 넋까지 잃어버리면 과오를 고칠수도 없소. 자기 신념을 굽히지 말아야 하오. 내 이야기하고싶은것은 이것이요.》

주영찬은 김일성동지의 자애에 넘치는 엄한 눈을 다시금 얼빠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닭알 같은 그 무엇이 그의 두드러진 울대뼈를 꿀꺽하고 울리며 넘어갔다. 그것은 다시금 터져나오려는 사나이의 오열이였는지 모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한참이나 말못하고 서있는 주영찬을 바라보시다가 왜 그런지 자신의 눈굽도 화끈해오는것을 느끼시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사령관동지!》

뒤에서 주영찬의 목메여 부르는 소리가 울리였으나 그이께서는 돌아보지 않으시였다. 싸리가치는 언제 어디서 버리셨는지 껄껄한 억새줄기를 맨손으로 움켜쥐고 잡아뽑으시며 걸음을 다우치시는 그이의 물기어린 눈빛에는 한창 불타오르는 노을빛이 어리여 이 저무는 남패자의 대밀림속에서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는것을 예고하는듯 하였다.

 

3

 

사령관동지께서 경위중대숙영지에 돌아오시였을 때 8련대 정치위원 박덕산이 소리없이 옆에 따라섰다.

2사부대에 가봤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덕산이 곁에 나타났다는것을 느끼시는 순간부터 될수록 생각에서 빨리 깨여나 현실로 돌아오려고 애쓰시였다. 박덕산이 사령관동지 옆에 소리없이 따라선다는것은 곧 어떤 위험이 닥쳤다는것, 적어도 그것을 박덕산은 느끼고있으며 그래서 사령관동지를 몸으로 보위하기 위해 나타났다는 사실을 이제는 사령관동지께서도 알고계시였다.

그래 사령관동지께서는 앞뒤를 살펴보셨지만 특별한 정황은 느껴지시지 않았다.

사실은 무슨 정황이 있을수 없었다.

7련대가 외곽에서 경계진지를 차지하고있고 그안에 다시 8련대가 주위를 둘러싸고있으며 회의에 참가한 수많은 부대들이 집결된 숙영지중심부에 경위중대가 있고 그속에 사령부가 위치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산의 표정은 무거웠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런 그의 낯빛이 눈앞에 닥친 어떤 정황이라기보다 점점 준엄해지는 정세에 대한 걱정때문이며 우선은 적의 대부대가 동쪽에 나타나 포위를 형성한것과 같은 상서롭지 못한 일들때문이라고 짐작하시였다.

덕산은 2사부대에 가서 군복과 식량 정형을 알아보았는데 역시 딴 부대나 마찬가지라고 극히 실무적인 보고를 간단히 드리고는 말없이 따라걸을뿐이였다. 이것은 그가 큰 시름에 잠겼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였다.

전투나 행군때 덕산이 불쑥 옆에 나타나면 김일성동지께서는 본능적으로 사위를 살펴보게 되시였다. 그러면 의례 어디선가 불의에 적의 기습이 있기도 하고 혹은 뜻밖의 방향에서 적탄이 날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덕산은 말없는 가운데 정황을 능숙하게 처리하였고 사령관동지께서도 어떻게 말리실수 없게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로 사령관동지를 보위하였다. 그런 때의 덕산의 표정은 무거우면서도 확신이 있었고 과묵한 그로서는 그런 때 오히려 많은 말을 하였다.

입이 무겁기로 유명한 덕산이였다. 원채 우람찬 몸집에 입이 무겁고 행동거지가 틀지다보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하기 어려워하였다. 그런 그가 지방에 나가 공작할 때면 마치 입안의 혀처럼 나긋나긋해진다니 참으로 사람의 성미란 모를 일이다.

덕산이가 입이 무겁지만 지금처럼 표정자체가 무거워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적의 몇만의 군대가 무어기에 덕산동무까지 이처럼 생각이 깊어졌는가?)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슬쩍 덕산의 얼굴을 곁눈질해보며 생각하시였다.

(하기는 이것이 무슨 개별적인 적부대들의 움직임에 대한 문제가 아니지. 저놈들이 중일전쟁을 뒤로 밀어놓은 이때 모든 힘을 긁어모아 우리를 포위해놓고 주구를 들여보냈으니 그 수작이 궁금할수도 있지.)

사령부의 장풍에서 새여나오는 불빛이 봇나무의 성긴 숲사이로 가물거리였다.

《사령관동지.》

마침내 덕산이 한걸음 다가서며 입을 벌리였다. 지나친 긴장때문인지 그의 목소리는 석쉼하게 갈려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시였다.

《한가지 물어봐도 좋겠습니까?》

《덕산동무, 왜 그러오?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사령관동지께서는 그의 태도가 어쩐지 안타깝게 생각되시여 되물으시였다.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 회의말입니다.》

하고 덕산은 조심스럽게 사령관동지의 안색을 살피더니 그이의 얼굴에서 뒤를 재촉하시는 뜻을 읽자 힘들게 물었다.

《회의를 며칠이나 예견하십니까?》

《회의기간말이요? 알만합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비로소 덕산이 그처럼 낯빛이 무거워진 까닭을 짐작하시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씀하시였다.

《회의는 아마 10여일이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가 능숙하게 하면 그보다 더 좀 빨리 끝날수도 있겠지. 그러나 최소한 1주일이상은 걸릴것으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1주일이상이란 말입니까?》

박덕산은 고개를 떨구며 힘겹게 말했다.

《그렇소. 1주일이라는것은 순조로울 때의 경우지. 그이상 걸릴것입니다.》

《적들은 이미 사령부가 이곳에 들어온것을 알고있는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리경락이가 찾아온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덕산은 다시한번 힘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발걸음을 멈추고말았다.

《덕산동무.》

김일성동지께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시였다. 덕산은 멈추었던 발걸음을 떼여 사령관동지 가까이로 다가왔다.

《예.》

《너무 걱정 마시오.》

덕산은 사령관동지의 목소리가 너무나 친근하게 울려와서 오히려 가슴이 죄여드는지 마른침을 삼킬뿐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별일 없을것입니다.》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조용히 말씀을 이으시였다.

《하기는 우리가 지난겨울에 마당거우에다 저 동무들까지 다 부를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그러나 그때 저 동무들은 벌써 료동벌판으로 내달려갔었지. 그것이 잘못된 길이고 오늘 우리앞에 닥친 많은 문제들이 그 후과라는것을 리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못하오. 그러다나니 지금은 그때보다 더 위험한 길을 달려가자고 하오. 유격대가 산을 버리고 적의 강화된 요새와 도시로 총공격을 들이댄것이 좌경모험주의였다면 오늘은 거기서 타격을 입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하공작이나 하면서 다시 기회를 보자는 립장에 떨어지고있소. 적들이 수십만의 대병력을 풀어서 밀림을 샅샅이 뒤져낼 차비니 유격대가 어디서 이 겨울을 배겨내겠는가 하는것입니다. 만일 이런 동무들의 머리를 바로잡아놓지 않는다면 한편에서는 적들의 대대적인 공세와 다른 한편에서는 제정신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의 편향으로 말미암아 혁명은 헤여날길 없는 위험에 빠지고말거요.

그러니 회의를 해야겠습니다. 한 열흘 걸리면 문제가 풀리겠지. 하기는 열흘이란 적은 시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사상문제가 아니라 무슨 실무적인 문제의 토의라면 아마 많은 문제를 해결할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사상문제란 복잡하고 그만큼 어렵고 중대한 문제란 말이요.》

덕산은 천막에서 새여나오는 불빛에 우렷이 떠오르는 사령관동지의 부드러운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젊고 활기에 넘친 김일성동지의 안색에서는 어디에도 준엄한 정세에서 오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덕산은 다시한번 마른침을 삼키였다.

그것은 사령관동지의 일상적인 모습이였다. 그러나 수만을 헤아리는 적의 강화된 포위속에서 적어도 열흘이상의 회의를 예견하시는 오늘 이 밤에 그러한 사령관동지의 모습을 뵈옵게 되는 덕산으로서는 새삼스럽게 크나큰 민족적자부심과 흠모의 정을 가슴뿌듯이 느끼는것이였다. 동시에 적들이 누구보다도 혁명의 사령부를 노리고있는 이때에 그 위험속에 그이를 그냥 모실수밖에 없는 준엄한 정황은 그의 가슴을 비장한 감회에 잠기게 하였다.

《덕산동무, 내 동무들의 심정을 짐작합니다. 회의를 하는데 하필 적의 포위속에서 할 맛이야 있는가 하고 생각하는 동무들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형편이 그렇게 되였습니다. 장백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그렇고 국내형편을 봐도 그렇소. 이해 겨울은 우리가 가는곳 어디에나 적의 포위가 뒤따를것입니다. 적들이 이 지구에 밀도를 강화한것은 우리가 여기에 나타났기때문입니다. 우리가 딴곳으로 옮겨가면 그때는 그곳에 적이 몰려들것입니다. 그래서 이 회의를 하자는것입니다.  피해다니다가는 혁명은 영영 죽고말것입니다. 피해다닐것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내쳐야 하겠는데 그러자면 우리가 의거해야 할 힘을 똑똑히 알고 헤치고나가야 할 과녁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큰힘을 가지고있으면서도 그것을 잘 몰라서 공연한 피를 흘리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내 이제 저 언덕을 거닐다가 주영찬동무를 만났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시면서 이미 어둠속에 묻혀든 그 언덕쪽을 뒤돌아보시였다.

《저도 만났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덕산의 목소리도 저으기 갈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역시 주영찬에게서 가슴아픈 인상을 받았다는것을 알아보시고 말씀하시였다.

《참으로 사상문제란 복잡합니다. 내 그 동무를 보니 어떻게 하든지 회의를 성과적으로 내밀어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회의는 우리가 근거지에서 반〈민생단〉투쟁의 잘못을 바로잡던 요영구나 다홍왜회의때보다 더 복잡하고 긴장된것이 느껴집니다. 문제는 일부 지휘관들과 당조직책임자들뿐아니라 주영찬이 같이 성실한 혁명가들속에도 적잖게 큰 문제가 있다는 거기에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주견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머리에는 그보다 몇갑절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회의를 잘해봅시다.》

《알겠습니다.》

덕산은 똑바로 서서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을 드렸다.

《그런데 덕산동무, 우리가 회의를 하면서 꼭 풀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는데…》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새로운 문제의 허두를 떼여놓으시고 덕산의 표정을 주의깊이 살피시였다.

《무슨 문제입니까? 회의를 열흘이나 예견하신다면 그사이에 많은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덕산은 걸음을 옮겨놓으시는 사령관동지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몹시 말씀 떼기를 주저하시는 그이의 안색때문에 다시 긴장되였다.

적의 중중첩첩한 포위속에서 열흘이상의 회의를 예견하시는 김일성동지께서 그처럼 힘겹게 생각하시는 문제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나하고 같이 군수처에 들려갑시다. 조진범동무를 만나 천이랑 솜이 얼마나 있는지 좀 알아봅시다.》

《그건 저도 대충 알고있습니다. 이번에 동복들을 모두 해입혔기때문에 그닥 많은 량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덕산은 차츰 의아쩍은 생각이 더 깊어져 고개를 기웃거리며 말씀드렸다.

《아니요. 그래도 가봅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간청하시듯 발걸음을 멈춘 덕산의 한손을 잡아이끄시면서 조용히 귀전에 대고 속삭이시였다.

《덕산동무, 우리 저 동무들에게 옷을 해입힙시다. 최춘국동무네랑 남만의 동무들을 보니 모두 옷이 말이 아닙니다. 벌써 첫눈이 내렸는데 어떻게 그 옷을 입혀가지고 전투에 내보내겠습니까?》

덕산은 우뚝 서버렸다. 그 역시 가슴아프게 생각한 문제였지만 이 골안에서 옷을 지어입힐 생각은 애초에 해보지를 못했다.

한두벌이라면 몰라도 남만의 항일련군들이 다 모여들었는데 어떻게 누구는 해입히고 누구는 안해입힌단 말인가.

《왜 말이 없소? 힘들것 같습니까? 물론 힘이야 들겠지.》

사령관동지께서는 박덕산이 입을 다물고 섰으니 하는수 없이 돌아서시여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그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니 덕산이도 차마 침묵을 지킬수가 없었다.

《저 얼마나 예견하십니까?》

《무엇말입니까? 수자말입니까? 그야 몽땅 다 해입혀야지.》

《예?》

박덕산은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쳤다.

《왜 그럽니까? 물론 우리에게 있는 천만 가지고는 모자랄것입니다. 태부족이라고도 할수 있겠지. 그러나 이제 주영찬동무를 보니 지금 당장 그 동무들의 상처받은 마음은 가려주지 못해도 상처받은 몸이나마 감싸주고싶습니다. 덕산동무, 가서 어떻게 하든지 방법을 탐구해봅시다. 전투를 해서라도 이 문제를 꼭 풀어야겠습니다.》

《사령관동지!》

덕산은 때마침 솟아오르는 초생달빛아래 우렷이 떠오르는 사령관동지의 모습앞에 눈을 슴뻑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몇몇 부대의 옷을 해결하는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처럼 거북스럽게 서있던 덕산이였으나 모든 부대에 몽땅 동복을 해입히자는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듣자 힘이 넘쳐나 덕산이 독특한 웅글은 목소리로 잘라서 말씀드렸다.

《알겠습니다. 제 전부대를 동원하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령관동지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고맙소. 덕산동무의 말을 들으니 내 가슴이 좀 열립니다. 오늘밤은 좀 잘것 같소. 자, 어서 군수처에 가봅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덕산의 손을 억세게 잡고 흔드시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4

 

남패자에 모여든 모든 부대 동무들에게 몽땅 새 군복을 해입힐데 대한 사령관동지의 긴급명령은 정황이 정황이였던만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그이의 명령은 그 어떤 전투임무보다도 더 엄격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비상한 열정속에서 집행되였다.

치밀한 조직사업이 진행되였다. 군수관 조진범은 부족되는 천과 솜을 전량 확보할것이며 정치위원 박덕산은 군수처의 요구에 따라 후방물자해결을 위한 공작원을 파견할 책임을 지게 되였다.

사령부 조직과장에게도 이 사업을 보장하기 위한 많은 일거리가 떨어졌으며 직접 군복을 짓게 되는 재봉대에는 갑자기 림시인원이 늘어나서 재봉이나 재단에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다 동원되였다. 재봉대는 남패자골안에 도착하여 미처 숙영준비도 갖추기전에 그 모든 일을 경위중대에게 밀어맡겨버리고 밤낮없이 솜옷을 지어내는 긴장한 전투에 들어서게 되였다.

전처럼 사령부작식대에서 공작하시게 된 김정숙동지께서도 재봉대에 동원되시였다.

매츨한 봇나무숲가에 주런이 내지은 재봉대천막에서는 밤낮없이 재봉기 돌아가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군수처일군들이 천퉁구리며 솜퉁구리를 메다나르고 먼저 된 군복을 묶어내느라고 무시로 드나들었다.

부산하고 분주한 가운데서도 생활은 흘러 남패자골안치고도 가장 바쁜 이 천막들속에서는 재봉기소리만 못지 않게 신바람이 난 처녀들의 맑은 웃음소리와 노래소리가 새여나와서 앞을 지나는 거칠한 항일련군부대 전사들의 걸음을 멈추어세우군 하였다.

《참, 태혁동무가 있었으면 이번에 영낙없이 재봉대에 붙잡혀오는건데…》

하고 채옥이가 실밥을 물어끊던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해쭉 웃으며 금숙이를 장난궂은 눈길로 돌아보았다.

금숙이는 들은체도 않고 부지런히 솜을 둔 소매를 누벼나갔다. 하기는 비서처의 정지성이며 강철룡소대장까지 동원되여왔으니 제손으로 곧잘 군복을 지어내군 하는 한태혁이면 첫 줄에 뽑혀나왔을것이였다.

《에그, 그런 엉터리라구야.》

하고 나이 지긋한 장철구아주머니가 우스워죽겠다는듯이 허리를 잡고 웃으며 송곳자루로 금숙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장철구 역시 경위중대 작식대원인데 이번에 동원되였다.

《아이 왜 이래요? 수다스럽게는 구네.》

태혁의 이야기만 나오면 의례 껴들리우게 마련인 금숙이는 새침해서 눈을 흘겼으나 입가에 자꾸만 피여나오려는 웃음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철구아주머니가 아직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지만 백두밀영에 있을 때 태혁이가 제손으로 제 옷을 짓는다고 덤비다가 소매를 거꾸로 달아서 온 밀영에 소문을 놓던 일을 누구나 상기하게 되였다.

《그래도 태혁동무는 무서운데가 있어요.》

하고 재봉대책임자 옥금이가 한참 웃다가 침착하게 발을 달았다.

《그렇던 사람이 요즘은 재봉기를 얼마나 잘 돌려요. 난 채옥동무보다 잘 돌리는것 같던데 뭘 그래.》

채옥은 자기가 처음 사령부 재봉대에 동원되여왔을 때 자꾸만 일하는데 나타나서 우스개판을 만들어놓군 하는 태혁이를 별난 사람이라고 옥금이에게 뒤소리를 한 일이 있기때문에 일부러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본시 7련대 재봉대원인 그는 그때도 지금처럼 한꺼번에 수백벌의 군복을 지어야 할 급한 과업이 제기되여 동원되였던것이다. 그때부터 채옥이는 사령부 재봉대원들과 같이 생활할 때가 많았다.

《참, 그런데 태혁동무는 어째 아직 안돌아왔다오?》

열심히 단추구멍을 뚫고있던 장철구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이런 말을 던져서 천막안은 조용해졌다.

태혁이는 경위중대장과 함께 남패자를 먼 외곽에서 지키고있는 7련대초소로 떠나간이후 사흘이 되는 오늘토록 아직 돌아왔다는 소식이 없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무의식중에 천막통기창을 통하여 이미 얼어붙은 개천가에 큰 가마를 걸고 새 광목에 물을 들이느라고 떠들썩하고있는 남자들에게로 눈길을 보내시였다. 그들은 대개 경위중대에서 뽑혀온 사람들인데 모두 재봉이나 염색에 대해 제나름의 경험과 견해를 가지고있어 말썽이 없이는 광목 한마도 처리할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직위나 년령에서뿐아니라 이를테면 염색이나 재봉 문제에서 단연 권위자라고 할만 한 사람은 강철룡이였다. 그렇다고 볼수밖에 없는것이 근거지시기이래 유명한 싸움군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전투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던 그가 일단 염색문제에 들어서자 대단히 말이 많아져서 천막안에서는 그저 들리느니 강철룡이의 떠들썩한 목소리뿐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보아도 한태혁이 돌아왔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70리라면 꽤 먼 거리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너무 오래 걸리지 않는가. 감히 사령관동지의 명함을 거들면서 찾아온 놈에 대한 처리문제이니 간단할수는 없겠지만 김정숙동지께서는 어쩐지 태혁이가 돌아오는 문제에 대해 왼심이 쓰이시였다.

해질무렵이였다.

어느새 하늘은 높이 개였으나 쌀쌀한 바람이 그 푸른 하늘에 을씨년스런 얼룩을 지어놓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종일 재봉기앞에 앉아계셔서 그런지 눈앞이 어질어질해와서 일감을 가지러 일어났던김에 천막밖으로 나오시였다. 엷은 가을해빛이지만 갑자기 바깥에 나서니 눈이 시고 머리가 휘 내둘리였다.

그래 옆에 선 봇나무줄기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고계시는데 등뒤에서 별안간 사람들이 떠들썩들대는 소리가 울려왔다.

많은 부대들이 모여든 지금 숲속에서 떠드는 소리가 울리는것은 조금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지금 울려오는 소리는 어딘가 류다른데가 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눈을 번쩍 뜨고 돌아서시였다.

그러자 듬숭듬숭 들어선 새하얀 봇나무그루들의 매츨하고 정갈한 모습이 안겨왔다. 그 나란히 줄지어선 봇나무들아래로 경위중대장 오백룡이 천천히 걸어온다. 그는 언제 봐야 지내 품이 넓어보이는 군복우에 목갑총을 넙적다리께까지 느직이 걸치고 사흘씩이나 걸려 70리밖을 다녀온 지금도 바로 보초교대나 시키고 돌아오는 사람처럼 태연하고 심상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것이였다. 대체 그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다는것을 넘겨짚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 그는 그자신이 죽기전에는 그 태연한 표정도 그 덤빌줄 모르는 동작도 달라지지 않을것이다.

오백룡이 재봉대천막 못미처 사령부로 가는 오솔길을 꺾어돌아서서야 두툼하게 솜을 둔 큰 저고리에 개털모자를 눌러쓰고 목자수건을 목에 둘러감은 처서군차림의 장경수와 태혁이가 나타났는데 그들 두사람사이에 낯선 얼굴이 끼여있다.

장경수가 절반은 둥글둥글해서 오백룡을 닮았다면 절반은 능청스러우면서도 날파람이 있어 태혁이와 비슷한데가 있었다.

그래서 부대에서는 속새포라는 별명이 있는가 하면 인절미라는 별명도 붙어있어서 전혀 종잡기 어려운 사람처럼 소문이 나있는데 그런 장경수가 공작지에서 만나 끌고온다는 문제의 그 사나이는 외양부터가 전혀 특징을 잡아내기 어려웠다.

우선 키가 그닥 큰 편은 아닌데 어딘지 모르게 너무 긴듯 한 느낌을 주었으나 어느 부분이 특별히 긴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견장만 뜯어낸 왜놈들의 모직군복을 입고 시뻘건 군용장화를 신은것은 원쑤들의 개라는것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는것이였으나 안경속에서 찌글사하게 미소를 짓고 특별히 붉게 보이는 입술을 벌려 누구에겐가 말이라도 걸어보고싶어하는듯 한 그 태연한 표정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기웃거리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더구나 그자가 사령관동지와 동창생이라고 자처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함부로 말을 걸게도 안되여 저쯤 앞세워놓고 웅성웅성하는데 오직 한태혁이만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따라왔다.

한태혁이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어느새 퍼져서 주런이 내친 재봉대천막에서도 단발머리들이 바느질감을 손에 든채 뛰여나왔다.

왜놈군용장화를 신은 허여멀끔한 안경쟁이는 일제히 쏘아보는 녀대원들의 반짝거리는 눈길에도 전혀 어줍어하는 빛없이 눈인사까지 건네며 천천히 걸어간다.

사나이의 그러한 태도는 모든 사람에게 알수 없는 반감을 자아냈다.

그러한 감정이 옆에서 따라가는 태혁이의 싱글벙글한 얼굴에도 번져갔다.

《싱겁게시리, 저런건 뭣하러 데려올가…》

이렇게 홀로 중얼거린 금숙이가 슬쩍 사람들 뒤로 빠지더니 태혁이곁으로 다가갔다.

태혁이가 그 눈치를 채고 한걸음 뒤로 떨어지자 금숙이는 우선 쌀쌀하게 한번 치떠보았다.

《잘 있었어?》

태혁은 금숙이의 눈길이야 어쨌든 반죽좋게 히쭉 웃으며 말하였다.

《잘 있지 않구요. 그런데 저건 뭐예요?》

금숙이는 섬세한 선을 그으며 곱게 굽어둔 턱을 쳐들어 휘적휘적 걸어가는 사나이를 가리켰다.

태혁은 금숙이의 턱을 따라 일단 그 사나이쪽을 돌아보고나서 다시 그 곱게 다듬어진 금숙이의 턱에 눈길을 돌렸다.

《저거? 글쎄… 저게 뭘가?》

태혁은 사실 그자를 한마디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우물거리는데 금숙이에게는 그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자가 사령관동지와 동창생이라는것이 사실인가말이예요?》

《응, 그건 아마 사실인 모양이야.》

태혁은 금숙이의 날카로운 어조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태평스럽게 대답하였다.

《아이, 어쩌면 그렇게 경각성이 없어요? 사령관동지와 동창생이라는것을 똑똑히 알아보지도 않고 사실인 모양이라니… 참 어처구니없군요.》

《하… 이건 뭘 이리 까다롭게 야단이요? 그건 이제부터 알아보면 될것이고…》

《아니, 사령관동지의 동창생이라는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란 말이예요?》

《간단한 문제야 아니겠지. 하지만 사령관동지께도 동창생이야 있을수 있지 않소?》

《누가 없대요. 참 기가 막혀서… 어쩌면 이렇게 태평일가?…》

《태평이나마나 내가 얼마나 혼이 났기다 그런 소리 하오. 좌우간 저자가 별로 좋은 일을 가져온것 같지는 않소. 내 이제 저자를 사령부에 데려다주고 와서 내가 혼난 이야기를 들려주지.》

《흥, 그따위 소리 누가 듣고싶대요.》

《안들으면 제 손해지 별수 있나. 참 내 이번에 담배쌈지를 저 7련대 친구한테 떼우고왔는데 하나 기워주오.》

《별 렴치없는 소리도 다 하네. 지금 재봉대에 일이 얼마나 쌓여있는지 알기나 해요.》

그러면서 금숙이는 홱 돌아서서 종종걸음을 쳤다. 그러거나말거나 태혁은 뒤걸음질을 하면서 한손을 쳐들고 소리쳤다.

《내 저녁에 쌈지 가지러 갈테요―》

나무뒤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무심히 듣고계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시였다. 그들을 보고있느라면 아무리 골치아픈 생각을 하다가도 절로 웃음이 떠오른다.

김정숙동지께서 재작년에 부대를 떠나가실  때도 태혁이와 금숙이의 사이는 저러하였다. 아무일에나 막히는 법없는 끌끌한 기관총수 한태혁이와 아름답고 깔끔한 재봉대원처녀의 사랑은 유격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들자신은 전혀 아닌보살하고있었다. 태혁이는 워낙 성미가 그런 사람이라 누가 놀려주기라도 하면 오히려 좋아라고 씨물씨물 웃었지만 금숙이는 발끈하고 대들어서 더 수상한 눈치를 드러내군 하였다.

《저 동무들도 입대하러 오는 동무들이오다?》

인섭이가 군수처천막쪽에서 새옷을 타입고 나오다가 김정숙동지께 다가왔다. 그제야 멀어져가는 태혁이와 장경수의 뒤모습을 바라보시니 신통히도 얼마전의 박인섭이 같은 차림을 하고있다.

《모르겠어요? 저앞에 가는것은 장경수동무 아니예요? 그리고 이쪽 동무는 한태혁이라고 유명한 기관총수예요. 유명한 익살군이구…》

《그래요?》

박인섭은 놀라서 되묻더니 의논조로 말하였다.

《그럼 가서 인사를 해야겠소다. 이렇게 군복이랑 타입은데다 점심먹구는 7련대로 떠나가야 한다우다.》

그는 도착하는 날로 사령관동지를 뵈옵고 7련대로 배치되였다. 그사이 산속에서 고생을 했으니 군복을 타입을 때까지 며칠 쉬면서 로독을 풀고 가라는 김일성동지의 배려에 의하여 여직까지 경위중대에서 묵고있었는데 오늘 7련대로 가는 통신원편에 같이 떠나게 되였던것이다.

《후에 만나보세요. 지금은 장동무가 사령관동지께 가는 길이예요.》

《그래요? 그런데 저, 저사람은 무슨 사람이오다?》

리경락이에 대해 전혀 예비지식이 없는 인섭이도 어쩐지 가운데 끼여가는 멋없이 긴듯 한 인간이 어색하게 보였던지 이렇게 어정쩡한 질문을 하였다.

《저 사람말이예요?》

김정숙동지 역시 그자의 정체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것을 느끼시며 다시한번 리경락의 뒤모습을 바라보시였다. 그자는 사령부천막앞에 이르자 뒤짐을 짚고 그앞에서 서성거리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분명 천막안에 계시였다. 그런데 한걸음 먼저 들어간 오백룡이 되나오더니 경위중대쪽으로 턱질을 하였다. 장경수와 한태혁은 그 턱질을 그대로 받아옮기며 리경락이에게 걸을것을 요구하였다. 리경락은 거기서 직각으로 꺾어져 나무그루사이로 사라졌다.

《저 사람이 무언지 나도 똑똑히는 모르겠어요. 아마 포로로 잡아온 모양이예요.》

김정숙동지께서는 한참 동안이 지난 다음에야 이렇게 말씀하시고 입술을 지그시 깨무시였다.

《포로우다?》

인섭은 놀라서 마주 받아외웠다. 그는 막 타입고나온 군복을 어색하게 쓸며 눈을 끔쩍끔쩍하였다. 무엇인가 그에게도 비상한 충격이 느껴졌던것이다.

 

5

 

초저녁에 바람질을 하며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사이 내린 눈이 무릎까지 치게 쌓였다. 이렇게 내린 눈은 이제는 녹지 않을것이다. 봄이 오기까지 밀림은 그 눈속에 묻혀있을것이다. 소란스럽게 휘날리던 락엽도 서글프게 서있던 헐벗은 나무들도 불안스럽게 그 모든 음향들과 어수선한 소문, 뒤숭숭한 추측들도 다 물러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준엄한 시절이 시작된다는 선고인양 천지의 모습은 하루아침에 그리도 몰라보게 변해버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숫눈길을 밟으시며 생각에 잠겨 걸으시였다.

더는 회의를 미룰수 없다. 재봉대에 천을 대주어야 하겠는데 워낙 량이 많다보니 힘이 든다. 그러나 무조건 20일이내에 새옷들을 해입혀서 전투에 내보내야 한다. 어디서 모자라는 천을 구할것인가?

김일성동지께서는 간밤에도 눈내리는 기나긴 밤을 고스란히 밝히시며 회의준비를 하셨건만 그냥 줄어들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을 머리속에 하나하나 점찍어나가시며 숲속을 걸으시였다.

하늘은 자욱히 흐리고 밀림은 바람 한점 없이 고즈넉한 정적에 휩싸여있다.

흰눈을 듬뿍 쓰고 선 이깔나무에서 바람도 없는데 눈이 제 무게에 눌리여 허물어져내린다.

오솔길이고 새로 낸 통로고 다 눈에 묻혀서 어디가 어딘지 통 분간되지 않는다.

전에 7련대 진지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지점까지 오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시였다.

바로 7련대방향에서 숙영지중심으로 걸어온 발자국이 나있었다.

이 새벽에 누가 벌써 70리길을 걸어왔는가? 7련대에서 떠났다면 그때는 아직 눈이 내리고있었겠는데…

사령관동지께서는 무심히 발자국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걸으시였다. 혹 오중흡이 무슨 보고를 하려고 전령병을 보낸것일가? 아니면 련대장자신이 회의가 궁금하여 떠나온것일가?

7련대에서 왔다면 오중흡이자신이기 쉽다. 오중흡이가 그 눈속에 자기자신이 떠나올수는 있어도 대원들을 보냈을수는 없다.

굉장한 사변이라도 있었다면 모르지만…

그러나 성큼성큼 옮겨놓여진 큼직큼직한 발자국에서는 묵직한 무게는 느껴질지언정 그 어떤 급한 사연을 생각케 하는것은 없었다.

아니나다를가 발자국은 사령부천막과는 딴 방향으로 멀어져간다. 이상한 일이다. 7련대에서 왔다면 응당 사령부에 먼저 들려야 하지 않겠는가?

김일성동지께서는 가볍게 고개를 기웃해보시고 여전히 생각에 잠기신채 신선한 눈냄새를 맡으시며 걸으시였다.

뜻밖에도 발자국은 재봉대천막입구로 사라졌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떠들썩한 녀자들의 웃음소리가 새여나오는 천막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시였다.

마치 명절날 같다. 정말 손벽을 짜락짜락 치며 웃어대는 소리도 들린다. 채옥이가 분명하다.

그런데 웅글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여왔다.

《허허허, 그런 소리 마오. 그건 절대비밀이요!》

사령관동지의 추측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오중흡의 목소리였다. 그는 몹시 거북해하며 진심으로 부탁하고있다.

《정말 부탁이요. 7련대에서 말파리를 습격했다는것을 사령관동지께서 아시면 몹시 걱정하실거요. 사실 얼마 되지도 않는 천인데 동무들이 천을 아껴서 보장했다면 되지 않소.》

《정말 그건 어려운 부탁이군요.》

하고 옥금이가 역시 진정이 어린 목소리로 걱정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매일 두번이상씩 꼭꼭 들리십니다. 그러나 련대장동지의 심정은 알겠습니다. 이제 군수관동지가 오면 토론해보겠어요. 아직도 장경수동무가 가져오기로 된 천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 무거운걸 련대장동지가 혼자 지고오셨어요?》

《그걸 어떻게 혼자 지고오겠소? 몇동무 같이 지고오다가 저앞에서 돌려보냈지. 사령관동지께서 아시면 재미없으니까… 그래 이만하면 천은 자랄것 같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말끝마다 사령관을 거들면서 저런 능청스런 궁리들을 하고있다. 그러고도 중흡이자신은 아닌보살하고 사령부에 나타나서 적들이 기관총을 어디다 얼마나 걸었다느니 오래간만에 만두국을 해먹었더니 누구누구가 배탈을 만났다느니 하는 소리를 할것이다.

산도 숲도 흰눈에 묻힌 이른아침이다. 눈밑에서 이도하의 개울물이 돌돌거리며 흘러간다. 눈속에서도 아직 흐름은 멎지 않았다.

개울가에 서시여 슴슴한 물비린내를 맡으시며 신선하고 정갈하고 아름다운 대자연을 천천히 굽어보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홀로 외우시였다.

《할수 없지, 속는척하는수밖에…》

오중흡이와 당장 만난다는것이 피차 거북할듯 하시여 숙영지를 멀리 에돌아 다시 사령부천막 가까운 그 길언저리로 나오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아직도 한줄기로 아득히 뻗어있는 중흡의 발자국앞에 서시였다.

세상 아무도 아직 걸어가지 않은 숫눈우에 혁명을 위한 충성의 한마음을 간직한 공산주의자의 듬직한 발자국이 맨처음 찍혀졌다는것은 얼마나 뜻깊은것인가.

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서너사람이 져야 할 량을 련대장자신이 몰래 지고 와서 그런 능청스런 거짓말을 하고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후 힘있게 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

 

사령관동지께서 박덕산과 함께 사령부에 돌아오시니 마침 최춘국련대장이 오중흡이와 함께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사령관동지의 명령으로 적이 새로 포위진을 친 동북방향에 자기부대를 배치하고 방어선을 꾸린 정형을 보고하러 온것이였다.

도착하는 날 피뜩 만나들보기는 했으나 급변한 새 정황때문에 인차 떠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던 최춘국이라 이렇게 오붓하게 만나기는 모두 처음이였다. 더구나 전령병 김재영은 같은 동네 출신의 옛 중대장을 만나 얼마나 반가왔던지 서로 얼싸안고 돌아가며 분주탕을 피우고있다.

최춘국은 그 옛날 온성이며 왕청땅에서 차세실이도 하고 월농사도 하고 머슬살이도 하던 사람으로서 련대장이 된 오늘까지도 투박한 사투리를 그대로 쓰고있다.

《이게 뉘기야? 재영이 네가? 굉장하구만!》

사령관동지께서는 사랑하는 전사의 름름한 모습과 언제 보나 변함없는 그 소박한 말투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너그러운 미소를 그리시였다.

재영은 억센 팔을 뻗치고 그러안으려드는 옛 중대장을 얼굴이 발깃해서 바라보더니 그 팔에 매달려 강둥강둥 뛴다.

《네가 장군님 품에서 이렇게 자란걸 너 아버지에게 보여주고싶구나. 야― 참 별일은 별일이다.》

최춘국은 길다랗게 치째진 유순해보이는 눈을 슴벅거리며 슬그머니 재영을 놓고 돌아섰다. 그러다가 자기가 너무 수다스럽게 굴었다고 생각되였던지 덕산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덕산동지, 그렇지 않소다? 어째 정치위원동지는 그저 입만 벙글써해가지구있으니 통 속을 모르겠당이.》

《허허허.》

박덕산도 오중흡도 소리내여 웃었다.

김일성동지께서 높이 추켜든 항일무장투쟁의 기치를 따라 거의 같은 시기에 원쑤의 무장을 빼앗아메고 갓 조직되기 시작한 유격대에 찾아와서 간고한 혁명의 산하를 넘어 오늘은 다같이 혁명의 지휘성원으로 자란 그들은 남달리 친한 사이였지만 함께 있는 날이 쉽지 않았다. 그러니 사령관동지앞에서 이렇게 만나는것이 마치 뿔뿔이 나가있던 형제들이 부모의 집에 돌아와 오붓한 옛 보금자리에서 회포를 나누는것처럼 더없이 즐거운것이였다. 그중에서도 최춘국은 몇해전부터 간고한 전투로정을 헤쳐왔다.

이번만 해도 적들을 견제하여 모든 부대를 먼저 보내놓고나서 맨 뒤에 남패자에 도착한 그였지만 어디에도 그런 티는 없고 그저 사령관동지의 품에 돌아온것이 기뻐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듯이 안절부절못해 돌아간다.

큰 간부의 그런 천진한 모습을 보시는 사령관동지께서도 가슴이 쩡하게 젖어드시였고 입가에서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날줄 몰랐다.

《여기 군장동무가 나를 만나기만 하면 최동무이야기요. 참, 최동무네가 수고를 많이 했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최춘국이 칭찬 같은것을 몹시 듣기 거북해하고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올 기미만 보이면 자꾸만 피하자고드는바람에 여태 하실 기회가 없었던 말씀을 터놓으시였다.

《그것은 사실말입니다. 저 그때…》

최춘국은 아니나다를가 얼굴이 벌개서 눈줄곳을 몰라 허둥거리며 공연히 군복자락을 주물렀다. 마치 수집은 처녀처럼 어쩔바를 몰라하는 몸집 우람찬 련대장의 군복은 총알이 꿰고나간 자리가 여기저기 있었다.

사령관동지께서도 차마 그것을 바로 보기가 힘드시여 눈길을 돌리시였다.

그이께서는 사선을 헤치고 이곳 남패자까지 찾아온 모든 부대들과 모든 전사들에게 아낌없이 높은 평가를 주시였다.

동무들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며 《불사조들》이라고 불러주셨을 때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혁명 만세》를 소리높이 불렀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보다도 그러한 평가를 주고싶으신 최춘국에게만은 그 말씀을 하실수가 없었다. 만약 사령관동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최춘국은 정말 거북해서 마주서있기를 괴로와할지도 모른다. 최춘국은 본시 그런 사람이였다.

그우에 오중흡이 또한 말이 적은 사람이였다. 이들 세동무들가운데서 막내동생격인 오중흡은 얼핏 보매 선비같이 곱살한 얼굴에 단정한 몸매와 옷차림으로써 늘 유표하게 두드러지는 사람이였다. 처녀처럼 사근사근하고 얌전한 그였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선동연설도 곧잘하는 그였지만 그 모든것을 혁명과업으로 하는것이지 자기의 개인적취미를 가지고는 코노래 한번 부르지 않는 사람이였다. 근거지에서도 그래 부대에서도 그래 얌전하고 곱살한 그는 녀성들속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지만 그자신은 녀성들곁에 가기를 제일 싫어하였다. 그래서 오중흡이 주변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사실 오중흡에게 무슨 말주변이 필요하겠는가? 지금도 저렇게 시치미를 뻑 따고 그저 빙그레 웃고있지만 그의 마음속은 이른새벽 숫눈벌에 큼직큼직하게 찍어놓은 그 발자국이 훌륭히 드러내고있다.

제일 나이 어린 오중흡이까지 그런 성미다보니 이들 세사람은 다같이 좋다는것이 고작 입을 벙싯하게 벌리고 눈을 끔뻑거리며 크고 우람찬 몸집들을 서로 애무하듯 바라볼뿐 통 말이 오가지 않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서로 말을 찾지 못해 거북해하는 그들을 보시자 문득 이렇게 모두 한자리에 모인 기회에 리경락이를 함께 만나보는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이 드시여 재영을 부르시였다.

《경위중대에 가서 그자를 데려오라고 하시오. 내 이제 지휘관동무들에게 재미있는 구경을 하나 시키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재영은 힘차게 대답하고 의젓한 몸가짐으로 돌아서서 달려나갔다.

춘국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일일이 놀라와하는 표정으로 그 과장된 동작을 바라보았다.

재영의 발자국소리가 멀어진 다음 김일성동지께서는 세 지휘관의 얼굴을 번갈아보시며 진중한 표정으로 말씀하시였다.

《오중흡동무는 이미 만나보았으니 잘 알지만 리경락이란 놈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장경수동무의 말을 들어보면 그자가 우리를 만나자고 작년부터 많은 애를 쓴 모양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여기서 말씀을 일단 끊으시고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

《작년겨울에 그놈은 우리 할머니를 이 숲속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나를 만나보겠다고 발광을 한 모양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알고있었지만 만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때문에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냥 둘수 없기도 하고 또 다른 사정도 있어서 장경수동무의 보고를 받고 들여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회의를 해야겠기에 당분간은 저놈들이 불질을 못하게 눌러놓아야 합니다. 그런 사정이 있다는것을 지휘관동무들이 미리 알아두는것이 필요합니다.

여태까지 그놈과 접촉한 오중흡동무나 오백룡동무의 말에 의하면 그놈자신은 무슨 타산이 없고 그저 왜놈들이 총칼로 내모니 하는수없이 들어온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동무들은 사령관의 동창생이 나타났다고 웅성거리는 모양인데 사실 그놈은 내가 화성의숙을 다닐 때 함께 다녔고 길림에 있을 때도 한동안 같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놈도 곧잘 조선독립을 떠벌이군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자 인차 변절한 모양입니다. 저놈이 지은 죄가 있으니 동창생이요 뭐요 하고 떠벌이지만 실상 우리에게서 어떤 옛정의 같은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믿고 나타났는가? 이미 접촉한 동무들의 말과 같이 하나는 일제의 굉장한 군사력을 등에 대고있고 다른 하나는 겁이 나지만 제 상전이 총칼로 내모니 하는수 없이 찾아오게도 됐을것입니다. 이제 보면 알겠지만 매우 뻔뻔스러운 놈입니다.》

사령관동지의 말씀은 세 지휘관의 가슴을 찔렀다. 사령관동지의 립장에서 볼 때 그놈을 대하시는것이 얼마나 괴로우시겠는가 하는것은 작년 마당거우에서 할머님 소식을 보고받으신 자리에 함께 있었던 덕산이와 오중흡이는 능히 짐작할수 있는 일이였다.

그런자를 불러들여 만나시겠다는 사령관동지의 결심의 동기를 비로소 알게 된 그들은 깊이 머리를 수그렸다.

최춘국은 오중흡이를 먼저 만나서 그런자가 나타났다는 말은 이미 들었었고 그자가 바로 작년에 사령관동지의 할머님을 련행해다닌 흉악무도한 원쑤라는것도 알게 되였다.

길다랗게 치째진 춘국의 눈은 비수처럼 번쩍거렸다. 소라 같은 주먹이 부르르 떨고있다.

《춘국동무, 흥분하지 마시오.》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도로 자리에 앉으시며 웃으시였다.

《내가 긴 이야기를 하였지만 결국 한마리의 새양쥐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수많은 쥐새끼를 보게 될것입니다. 예로부터 역병이 돌 때면 쥐가 성하는 법입니다. 오늘같이 파쑈의 열병이 무섭게 번져가는 때에 쥐새끼가 날뛰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허허허, 무산 옥암동에 사는 한 농민은 오뉴월 개천에 벌레가 성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령관동지의 목소리는 이미 부드러워지고 그이의 얼굴에는 화기가 돌았으나 세사람은 누구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

무엇인가 신성을 모독당한듯 한 분노가 무겁게 뒤골을 눌러서 머리를 들수가 없었다.

천막안에는 고깔불에서 서린 연기가 가볍게 떠돌고 양철주전자에서 물끓는 소리가 솨― 솨― 울려나왔다.

숲속도 천막안도 몹시, 지나칠만큼 몹시 조용하였다.

 

6

 

장경수는 개털모자를 한손에 구겨쥐고 큰 저고리를 입은채로 사령부천막안에 들어섰다. 적구에서 돌아올 때의 행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목에 질끈 동였던 수건을 풀어버린것뿐이였다.

차림이 그 모양이라 세상 반죽좋은 그도 사령관동지께 어떻게 보고를 드렸으면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이는 모양이더니 허리를 겁석 구부리며 절 한번을 깊숙이 하였다.

《사령관동지, 죄송합니다. 저놈이 내 정체를 알면 재미없을것 같아서…》

무거운 생각에 잠기여 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있던 세 지휘관은 괴이한 모양을 하고 나타난 장경수를 보고 놀랐으며 특히 박덕산은 성이 나서 입술을 꾹 다물었으나 제꺽 그 눈치를 알아챈 장경수가 어찌나 능숙하게 돌려맞추는지 그만 빙그레 웃고말았다. 아무러면 리경락이가 장경수의 정체를 모르고 여기까지 따라왔겠는가.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사령관동지께서 리경락이 처리를 어떻게 하실지 아직 모르는 지금 형편에서는 경수의 말대로 그가 여태 행세해온 목재판의 유사노릇을 그대로 하는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놈하고 앞으로 공작을 계속할 생각입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웃으며 물으시였다.

《그건 어떻게 되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놈이 줄을 늘여놓은 그 가게방에는 몇번 더 다녀와야 할것 같습니다. 조직과장동무가 어떻게 다그어대는지… 당장 광목 열통하구 솜신 200컬레를 구해오라고 합니다. 사실 이런것은 전투를 한탕 해서 해결하는것이 빠르지 그놈 상고머리두상하구 흥정을 하자니 골이 쏘아서… 저 정치위원동지는 제가 뭐 이런 꼴을 하고싶어 그러는줄 아시는 모양인데 참 답답합니다.》

장경수는 유격대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능란한 말재간을 여기서 또 펴놓을 잡도리였다.

덕산은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고싶었으나 사령관동지앞이라 억지로 참고 외면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령관동지께서 사랑하시고 자기자신 가장 미덥게 생각하는 장경수가 혹시 이 엄숙한 정황에 어울리지 않는 실수나 할가봐 은근히 왼심이 씌여졌다.

장경수는 부대내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마 지금 당장 복잡하고 위험하고 어려운 공작임무가 제기되여 사람을 보내게 된다면 누구나 먼저 머리속에 그리는것이 장경수일것이다. 그는 능숙한 지하공작원이였고 대담무쌍한 정찰병이였으며 용감한 전투원이였다.

지난해 여름 보천보전투가 있은 직후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국내조직과 련계를 지을겸 적정도 정찰할 임무를 받고 혜산에 건너갔던 그는 변절자의 밀고로 추격을 당하게 되였다. 내뛴다고 뛰는것이 큰길로 나와 장거리에 접어들게 되였다. 산으로 붙기는 다 틀렸고 거리에서 우물거리다가는 미구에 붙잡히고말것이였다. 그는 주재소앞으로 곧장 달려갔다. 순사가 뒤짐을 지고 으슬렁거리고있었다. 옆집은 육고였다. 어떤 왜년이 대패밥에 싼 고기를 받아쥐려하고있었다. 장경수는 술에 취한것처럼 비틀거리며 옆에 다가가 다짜고짜 계집년을 힘껏 떠밀쳤다. 왜년은 육고에 매단 고기덩어리를 쓸어안고 넘어지면서 빈지문을 자빠뜨려놓았다. 유리창이 쟁그렁 하고 마사졌다. 째지는것 같은 계집의 비명소리와 함께 육고집주인이 식칼을 들고 뛰여나오고 주재소의 순사가 칼자루를 움켜쥐고 달려왔다. 장경수는 다음 골목까지 뛰는척하다가 순하게 붙들렸다.

주재소에 끌려간 장경수는 실컷 매를 맞은후 이틀밤 구류를 살고 나왔다. 바깥에서는 이미 유격대공작원을 수색하는 소동은 지나가고 그는 육고집주인과 다시 눈싸움을 하면서 유유히 거리를 빠져나왔다.

작년에 리경락이가 할머님을 련행해 다닌다는 소식을 가지고온것도 그였다.

그는 그때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여 사나이울음을 터뜨리며 그놈을 쏘게 해달라고 사령관동지께 애원했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전에없이 엄한 목소리로 그를 타이르시고 한동안 공작에 내보내지 않으시였다. 그대신 장경수와 함께 기관총소대의 두 명물중의 하나인 한태혁을 지방공작에 내보내시였으나 장경수보다 훨씬 밸머리가 사나운 태혁은 돌아가며 실컷 싸움만 했을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어려운 적구공작은 장경수, 어려운 군사임무는 한태혁― 이런 식으로 소문이 나게 되였다.

《가게방의 상고머리라는것이.》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세 지휘관쪽을 돌아보시며 설명하시였다.

《한때 독립군 뒤바라지를 하던 령감인데 한쪽은 장경수동무를 통해 우리와 련계를 가지고있고 한쪽은 리경락의 앞잡이를 통해 왜놈들과도 련계를 가지고있는 두길보기를 하는 령감입니다. 아마 그 령감의 손을 거쳐 통제품들이 많이 빠져나가는것을 눈치채고 왜놈들 특무기관이 주목한 모양입니다. 그건 그렇고 장경수동무는 그자와 따로 할 말이 있습니까?》

《뭐 별로 이야기할것은 없습니다만 혹시 그놈이 거짓말이라도 할것 같아서…》

장경수는 사령관동지께서 리경락을 심문하시는것을 몹시 보고싶은 모양으로 그로서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말하였다.

《일없습니다. 난 오늘 그놈의 거짓말을 좀 들어보자는것입니다. 그러니 장동무는 돌아가서 밀린 학습이나 하시오. 래일쯤은 아마 동무가 또 그 상고머리한테 좀 다녀와야 할것 같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놈을 들여보내랍니까?》

《그놈은 동무가 안내해왔으니 여기까지 데려다주고 가야지.》

《알았습니다.》

장경수는 시원하게 납득이 된 얼굴이였으나 천막출입문자락을 들칠 때 슬쩍 박덕산을 돌아보고 한마디 훈수를 해주면 어떠냐는듯 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후 장경수는 리경락을 앞세우고 다시 천막안에 들어섰다.

《장군님, 이 사람이 바로 그 리경락이라는 사람입니다.》

장경수는 들어서는참 허리를 겁석하고 목재판 유사투로 리경락을 소개하였다.

《아주 급한 볼일이 있다기에 제가 유격대어른들에게 전했더니…》

장경수의 연기는 그럴듯 하였으나 아무도 주의를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박덕산과 최춘국은 처음 보는 리경락을 당장 집어삼킬듯이 쏘아보고있었고 오중흡은 보기가 역하다는듯이 외면하고있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자리에 앉으신채 꺼꺼부정하고 천막안에 발을 들여놓는 그자를 한번 훑어보시고나서 이어 장경수에게 눈길을 돌리시며 말씀하시였다.

《한유사가 이번길에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럼 우리 경위중대에 나가 잠간 기다려주십시오.》

장경수는 인사를 하고 나갔다. 엇바뀌여 재영이가 봇나무장작을 한아름 안고 들어와서 스러져가는 불판에 새나무를 지피였다.

천막안은 또다시 불길이 피여오르는 소리, 양철주전자에서 솨―솨― 물끓는 소리가 울려올뿐 끝없이 조용해졌다.

리경락은 이때에야 자기 몸집이 멋없이 긴것을 느끼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였다.

10년만의 상봉이였다.

그는 공작반을 떠날 때부터 오늘의 이 상봉을 위하여 면밀한 계획을 짰고 구체적인 말마디들을 하나하나 준비했었다. 더구나 김일성장군과 만나는 첫마디 말은 몇번이고 입안에서 외워보기조차 하였었다.

화성의숙에 함께 다닐 때와는 피차의 처지가 너무나 달라졌지만 어쨌든 자기는 동창생이라는 립장을 내우길것이고 그에 따라 말투도 화전의 뒤산이나 길림 우마항거리를 함께 거닐 때처럼 허물없는 친근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할 생각이였다.

7련대초소에서 어마어마한 유격대의 무력과 그 물샐틈없는 경비태세를 보고 어지간히 주눅이 들었고 거기서 사령부까지 들어오는 사이에 층층으로 늘어선 방대한 군사력과 왜놈의 정규군도 멀리 미치지 못할 정연한 질서에 간이 오물어들어 안올데를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워낙 생감등때기 같은 그의 얼굴에는 이렇다할 변화가 없었다. 속이 떨려나면 오히려 헤식은 웃음을 짓고 누군가를 잡고 롱지거리를 하자고드는 질기고 굳은 그였다.

경위중대병실에서 날 저물기까지 기다리는 길지 않는 사이에도 구슬알처럼 반짝거리는 나어린 대원들과 잘 자란 참나무처럼 미끈미끈한 사나이들의 구김살없는 생활을 충분히 느낄수 있었던 그는 자기가 준비해가지고 온 말들가운데서 많은 부분이 유격대의 실정과 맞지 않는다는것을 통감했으나 그 역시 어떻게 변통수가 생기려니 하고 배포유하게 틀고앉아있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상봉의 시각이 정작 닥친 이 순간에 그는 아래다리가 후두두 떨리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천막에 들어설 때 김일성장군의 눈길이 번쩍하고 자기 정수리에 겨누어지는 순간 리경락은 등으로 서늘하게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똑똑히 느꼈고 그때부터 그는 제몸을 될수만 있으면 작게 만들려고 무의식중에 애를 쓰게 되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긴 몸집은 여전히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김일성장군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화전에서 《ㅌ.ㄷ를 조직하신것도 알고있었고 길림의 거리에 혁명의 선풍을 몰아오신것도 알고있었다. 일제와 군벌정권의 우두머리들을 공포에 몰아넣었을뿐아니라 수백만 국내외의 민중에게 희망의 등대로, 찬란한 향도성으로 솟아오르신 그 명성에 감탄하여 그자신도 한때는 혁명가행세를 하고 다니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땅바닥을 기여다니는 파충류였지 하늘을 날으는 대붕은 아니였다. 벼랑끝에서 나는 시늉을 하자마자 골짜기에 구겨박힌 그는 일제의 류치장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 시기 김일성장군께서는 이미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시여 일제에게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시였다.

김일성장군과 친교가 있었다는 리경락의 경력은 일제의 사상문제전문가들과 조선, 만주의 실권자들속에서 대단한 주목을 받게 되였다.

세상에는 기이한 밥벌이방법도 있다. 이 10년가까운동안 리경락은 주로 김일성장군과 한때 친교가 있었다는것을 밑천으로 일제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아왔고 적지 않게 큰 권력까지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사냥군이 날고기를 먹여가며 매를 기를 때 먹인것보다 더많은 고기를 잡아내기 위한것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자기의 처세수단이 대단히 위험하다는것을 깨달은것은 작년부터 김일성장군의 고향 만경대에 드나들게 되고 마침내는 장군님의 할머님을 밀림으로 련행해내도록 강요당하게 되였을 때에야 깨달았다.

그러나 아무리 속이 떨려도 이미 물러날 길은 없었다. 뒤에는 관동군 보도과장 모리 이사무의 권총과 군도가 항상 정수리를 겨누고 있었으며 아무데나 푼푼하게 마련되여있는 교수대의 올가미가 어느때든지 그의 길다란 목을 조일수 있었다.

내친 걸음이니 다리가 떨리더라도 눈을 질끈 감고 갈데까지 갈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때묻은 주구 리경락은 마침내 조선혁명의 사령부인 이 천막안까지 발길을 들여놓게 되였다.

그는 내심 왜놈들이 떠들어대는 유격대에 대한 《토벌》성과를 어느 정도 믿었었고 그자신 선무공작때문에 산으로 다니면서 얻은 체험을 통하여 험준한 산악과 밀림에서 10년간의 유격투쟁을 전개한다는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리라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길림시기 만사람의 촉망을 한몸에 받던 젊은 혁명가 김일성장군의 그 준수하게 빛나던 모상도 적잖게 거칠어지고 간고한 생활의 흔적을 감출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준비해가지고 온 많은 말들이 이런 타산우에 서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정작 눈앞에 떠오르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 김일성장군의 모습은 어떠한가.

참으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많이도 변하셨다. 그러나 그 변화는 그가 타산한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일어났다.

수수한 여름군복에 권총을 느직이 허리에 차신 장군님의 온몸에서 내뿜기는 서리발찬 위엄은 동양제패를 꿈꾸는 일제의 군벌들이 벌벌 떠는 까닭을 한눈에 짐작할수 있게 하는것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얼굴모습은 그 옛날 학생시절과 다름없는 품위와 조화, 활기를 간직하고있었으며 후리후리한 몸매는 용솟음치는 젊음과 불붙는 정력과 강철같은 힘을 드러내고있었다.

한순간 번개같이 불을 뿜던 장군님의 눈은 어느새 호수같이 시원히 가라앉아 따뜻한 웃음을 담고있다.

간고한 혁명의 시련은 장군님을 무척도 변하게 하였지만 그것은 장군님의 모든 비범하고 초인간적인 자질들을 더욱 완성하고 더욱 빛내이고있을뿐 어느 한곳에도 리경락이 그가 더러운 손을 뻗쳐 매달릴만 한 구석은 엿보이지 않았다.

리경락은 절망인지 오열인지 모를 그 무엇이 가슴에 꽉 들어차는것을 느꼈다. 숨이 가빴다.

김일성장군님!》

그는 여태 외우고 외워온 친구사이의 말투를 별 타산없이 내버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불렀다.

그러나 금강력사처럼 앉아있는 세 지휘관은 말할것 없고 불을 지피는 나어린 전령병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다만 김일성장군님께서만은 빙그레 웃으시였다.

《리경락군이 우리 혁명군을 찾아온다는것은 뜻밖이군. 그래 그사이 잘 있었소?》

그이께서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책상밑에 빈채로 있는 통나무걸상을 눈으로 가리키시였다.

리경락은 장군님앞까지 기계적으로 다가가기는 하였으나 혼자 펄썩 앉는다는것도 멋적고 그렇다고 따로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눈만 꺼벅꺼벅 하였다.

《앉으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다시한번 자리를 권하시고나서 세 지휘관을 돌아보시였다.

《우리가 유격투쟁을 벌린지 10년이 돼오지만 이러한 손님을 맞아보기는 처음인듯 합니다. 동무들, 인사를 하시오. 이사람은 한때 화성의숙에서 독립군령감들한테 총애를 받던 리경락군입니다. 길림에 나와서도 독립군에서 중대장까지 지낸적이 있고 조선독립을 위해 많은 연설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리경락을 향해 미소를 지으시였다.

《인사들 하시오. 우리 혁명군의 간부들이요. 오중흡동무와는 이미 구면일것이고 이쪽 키큰 동지는 정치위원 박덕산동지요. 관동군 특무기관에 정치위원 박덕산동지에 대한 자료가 적잖게 있을터이니 막 모르는 처지는 아니겠지. 그리고 이쪽 동지는 경위련대장 최춘국동지요. 이번에 관동군이 〈열하원정〉부대를 다 〈섬멸〉했다고 좋아할 때 옆구리를 후려쳐서 관동군의 위신을 좀 깎아내린것이 바로 이 최춘국동지요. 어떻소? 들은 기억이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박덕산동지는 비슷한것 같은데 최춘국동지는 우리가 가지고있는 사진에 비해보면 좀 축간듯 하군요. 아마 지난 여름부터 동서로 용전분투하느라고 그렇게 됐겠지요. 저로서는 유명한 여러 혁명가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만나뵙게 되여 여간 영광스럽지를 않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리경락은 속이 떨려나는것을 감추기 위하여 일부러 손세까지 써가며 류창하게 인사말을 엮어나갔다.

박덕산과 최춘국은 대뜸 동지라고 부르며 나서는 이 뻔뻔스러운 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으나 지방공작을 한 경험이 많은 덕산이 역시 먼저 입을 벌렸다.

《우리도 당신에 대해 막 모르는 처지는 아닌데 사진까지 가지고 연구하지 못했소. 어쨌든 이렇게 알게 된것이 뜻밖이요.》

그러자 최춘국이도 벌떡 일어났다.

《내가 최춘국이오다. 그래 당신이 저 관동군과 무슨 관계가 있소다?》

춘국의 투박하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은 리경락의 유들유들한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다. 너무나 순진하고 솔직해서 무슨 말롱간이나 계교를 부릴수 없는 이런 투박한 사나이와 첫 대면을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해서는 리경락이조차도 준비를 못해왔던것이다.

《뭐 관계가 있다기보다…》

그가 어물어물하며 말끝을 얼버무리려들자 김일성장군님께서 뒤를 받쳐주시였다.

《허허허, 리경락군, 량해하시오. 보면 짐작하겠지만 최춘국동지는 방금 도착하다보니 당신의 형편에 대해 아직 잘 모르오. 이 기회에 나도 그렇고 우리모두가 리군이 우리를 찾아온 목적을 똑똑히 아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습니다. 내 짐작에는 리군이 관동군 보도과가 아니라 아마 좀더 책임있는 기관의 위임을 받고 왔을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야 더 이를데 없는 말씀이지요.》

하고 리경락은 다시 활기를 회복하여 허리를 펴고 안경알속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번갈아보며 말을 섬겼다. 그것은 될수 있는대로 직접 김일성동지의 눈길을 마주대하지 않기 위한 계교였다.

《관동군 보도과가 아무리 큰 권한을 가진 부서라 하더라도 이러한 문제를 한개 부서에서 취급하는 법은 없으니까요. 저는 이제 방금 김일성장군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보도과가 아니라 직접 우에다대장과 이소다니참모장의 위임을 받고 조선인민혁명군과 관동군 사이의 화의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전선을 넘어온것입니다.》

《당신의 용감성은 우리도 평가합니다. 헌데 당신이 말하는것을 들어보면 보도과는 아주 보잘것이 없는 대신 이제 그 무슨 대장이라는자는 굉장한 권한이라도 있는듯이 말하는데 그자가 최근에 총리대신이라도 됐습니까?》

《예?》

리경락은 김일성동지의 가볍게 물으시는 말씀에 여기가 질려 무춤 고개를 들더니 이어 헤식은 웃음을 지으며 바싹 다가앉았다.

《예. 장군님 말씀의 뜻을 알만 합니다. 물론 우에다대장이 총리대신이 된것은 아니고 여전히 관동군사령관자리에 있기는 합니다만 실상 관동군사령관의 권한이 적은것이 아닙니다. 관동군이 만주의 실재상 주인이고 또 일본제국의 위력을 지탱하고있는것이 관동군이라는것은 일본에서는 하나의 상식으로 알려져있으니까요. 그런것만큼…》

《허허허.》

김일성동지께서는 껄껄 웃으시더니 일어서시여 방안을 거니시였다.

《리경락군은 여전히 말을 할줄 압니다. 나는 방금 들은 몇마디 말을 통해서도 일본제국주의의 진실의 한끝을 엿본듯 합니다. 그래 그자들이 무슨 위임장같은것이라도 써주고 당신을 우리에게 들여보냈습니까?》

《저 위임장말입니까?》

리경락은 다시 좀 당황한듯 번쩍 고개를 들더니 세 지휘관들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나서 저으기 난감하다는듯이 중얼거렸다.

《위임장은 못가져왔습니다. 또 가져올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혁명규률이라는것을 잘 모르기때문에 장군님과 저의 친분관계를 과대평가하고있지요. 이 점에 있어서는 저 역시 같은 오유를 범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담보같은것이 필요하다면 그런것은 어느때든지 받아올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에는 사실 우에다사령관은 모르겠지만 이 사업을 직접 관할하고있는 하시모도부참모장은 아직 소장이지만 실상 관동군의 실권을 다 쥐고있고 또 일본정부나 군부를 한손으로 쥐락펴락하는 사람인것만큼 이 담판이 결코…》

《됐소, 됐소. 우리는 뭐 그자들의 직급이 낮은것을 타발하는것이 아니라 리군의 용감성이 하도 놀라와서 물어봤을뿐입니다. 설사 그자들이 무슨 천국의 옥황상제라 하더라도 대단할것 없습니다. 그보다는 나 역시 옛친구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는것이 좋을듯 합니다. 리군은 어떻습니까? 꼭 그자들의 심부름군노릇을 해야겠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걸상에 반쯤 엉뎅이를 놓고 몹시 불편하게 앉아있는 그를 측은한 눈매로 바라보며 물으시였다.

리경락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재영동무, 더운물을 한잔씩 주시오. 손님이 아마 첫추위에 몸이 얼어드는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김일성동지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만약 리군이 무슨 딱한 사정이 있어서 꼭 그자들의 말을 전갈해야 할것 같으면 그것은 천천히 들읍시다. 우리는 당분간 이 숲속에 있겠으니 시간은 아마 충분할것입니다. 오늘밤은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친구간의 허물없는 이야기나 나눕시다. 나는 지금도 화전 뒤산에서 독립운동의 새 로선을 탐색해야 한다고 부르짖던 리군의 열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 그때는 리군이 오늘 이와 같은 옷이 아니라 그때 우리가 늘 동경을 가지고 이야기하던 강감찬장군이나 을지문덕장군 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날것 같더니 참 사람일이란 예측하기 어려운것입니다.》

재영이 이런 숲속에서는 뜻밖이리만큼 사치한 다섯개의 차잔을 벌려놓더니 그와는 대조적으로 투박한 물주전자에서 김이 세차게 피여오르는 더운물을 따랐다.

리경락의 앞에 놓인 차잔에 물을 따를 때 재영은 슬쩍 그자의 정수리를 쏘아보았으나 리경락은 그냥 고개를 숙이고있을뿐 움직이지 않았다.

김일성장군님.》

이윽고 리경락은 뜨거운 차잔을 움켜쥐듯이 그러잡더니 마실 생각은 않고 장군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실 나도 인간이 아닙니까. 나도 조건만 그렇게 되지 않았더면 강감찬장군까지는 몰라도 이런 옷을 입게는 되지 않았을것입니다. 인간이란 별수 없더군요. 몇달동안 붙박이로 매를 맞고 잠을 못자고 물을 매일 몇초롱씩 들이키며 고문을 당하고보니 내 입에서도 열변이 기여들어가고맙디다. 어찌겠습니까. 나 역시 먹고 자고 물과 공기를 마셔야 살아가게 마련된 인간이 아닙니까.》

《인간이라…》

사령관동지께서는 별안간에 미친듯 한 열정을 가지고 주어섬기는 리경락의 말끝을 받아외우시며 차잔의 김을 천천히 부시였다.

그러시다가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보시오. 여기서 계선이 갈라지는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때문에 그럴수 없다고 보는것을 이 사람은 바로 인간이기때문에 그럴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있습니다. 참으로 리경락군의 이 말은 화전 뒤산에서의 열변보다 몇갑절 더 많은것을 생각케 합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사실 이때 많은것을 생각하게 되시였다. 인간옹호의 열정이 가슴속깊이에서 천천히 끓어올랐다. 그 열정을 부채질하듯 리경락은 말을 이었다.

《장군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것도 지당한 일입니다. 사실 이런 빙천설지에서 금수도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고초를 겪는것을 어찌 징역살이에 비기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영웅들만 사는것이 아닙니다. 저 집안 가까운 의군골이라는 동네에는 장군님과 친교가 있던 사람 300여명이 모여있습니다. 그들은 관동군과 조선총독부에서 이 10년래에 모아온 사람들이지요. 그가운데는 혁명을 하다가 체포되여 감옥살이를 하던중에 끌려나온 사람도 한두사람 있습니다. 그밖에 나처럼 장군님과 함께 학교를 다닌 사람들, 림강이나 무송같은데서 장군님의 이웃에 살았다는 사람들, 지어는 장군님을 보지도 못했지만 그저 장군님의 부모님에게서 신세를 많이 졌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팔도구에서부터 김형직선생님의 뒤를 캐고다녔다는 손세심이라는자도 거기 와있습니다. 나도 가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생각할 때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인간이니 별수 없지 않겠는가,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생각하군 합니다.》

《그래야 당신도 인간이라고 할수 있겠으니까 그럴테지.》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낮게 말씀하시며 리경락을 곧바로 바라보시였다.

경락은 장군님의 눈빛을 바로 볼수가 없어 유들유들하게 쳐들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헌데 나를 위해 일본군벌들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모아두었다니 나로서는 가만히 있을수 없는 일이군. 그래 그자들이 그 사람들을 모아들인 목적은 결국 당신처럼 나하구 무슨 흥정을 하는데 쓰자는것이요?》

장군님의 어조는 전에없이 무겁고 거세여졌다. 그에 따라 리경락은 차츰 낯빛이 질리면서 말수더구가 줄어들었다.

《글쎄올시다. 하여튼 그 사람들은, 저 관동군 간부들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모아들인 사람들을 대단히 우대를 합니다. 아마 김일성장군과 관계되는 사람들은 무조건 심중히 취급할데 대한 무슨 지시가 전부터 있은듯 한데 그런 사정은 나도 똑똑히는 모릅니다.》

《허허허, 김일성장군이 진작 그것을 알았으면 저 우에다나 이소다니한테 감사장이라도 하나 써보냈을걸.》

장군님께서는 곧 얼굴의 긴장을 푸시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씀하시였다.

박덕산은 조심스럽게 장군님의 안색을 살피였다. 장군님께서 자신을 제3인칭으로 부르실 때는 대체로 노하셨을 때의 일이다.

만일 주책없는자가 그런것도 모르고 장군님께서 웃으신다고 좋아서 너절한 말을 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였다.

덕산은 장군님께서 이자를 불러들이신 까닭을 아는만큼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보, 고작 대우를 잘한다는것이 그따위 옷밖에 못얻어입었소?》

《왜요? 옷이야 내 마음대로 입을수 있지요. 이건 내가 숲속으로 들어오다나니 이런것이 적당할것 같아서 입은것이고… 하기는 옷이나 봉급 같은것도 등차가 있기는 합니다.》

리경락은 이미 인간생활에서 고상한것과 너절한것을 가려낼 능력을 못가지고있었다. 그렇기때문에 덕산의 질문에 풍기는 야유조도 느끼지 못했으며 더욱 자신의 속물적인 대답이 혁명밖에 모르는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불러일으키리라는것을 예상할수가 없었다.

《야ㅡ 참 별일은 별일이다.》

최춘국은 너무 어처구니없어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그래 당신이 그놈들한테 돈을 얼마나 받소?》

《돈이야 물쓰듯 하지요.》

하고 리경락은 이때라는듯이 희떠운 어조로 주어대기 시작하였다.

《봉급이야 군속월급이 그리 많다고 볼수는 없지만 그래도 민간회사의 고원이상은 될겁니다. 허지만 그런게야 잡비도 되나마나고 사실 일본사람들이 특무기관사업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내가 이쪽 사업을 맡기전에는 북지에도 나가있었는데 그때 경기가 좋았지요.》

리경락은 화제가 날카로운 계선을 넘어서자 저으기 혀바닥의 긴장이 풀린듯 하였다. 그는 여태 매만지고만 있던 물잔을 입술에 갖다대고 두어모금 마시더니 야릇한 웃음을 짓고 세 지휘관들을 번갈아보았다.

《혁명가들은 돈을 멸시하지요. 나 역시 한때는 돈같은것을 지어 역겹게 생각했던 그런 천진하고 랑만적인 시절도 있었던것입니다. 지금도 동지들은 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비웃고있겠지요. 그러나 맑스가 지적한바와 같이 돈이란 위력한것입니다.》

오중흡은 맹렬히 밭은기침을 깇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령관동지앞이라 터져나오려는 욕설을 가까스로 참고있는데 경락의 수작이 차츰 더 더러운데로 기울어지는바람에 생리적으로 옥죄여드는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 밤의 이야기를 오래 끄는것이 재미없다고 생각하시였다. 그래 실무적인데로 화제를 돌리시였다.

《이야기가 매우 구수합니다. 특히 리경락군이 아직도 맑스의 학설을 잊지 않고있다는것은 놀랄만 합니다.

모처럼 이야기가 구수하게 번져가는데 참 유감스럽구만. 어찌겠소. 오늘은 우리에게 딴 일이 또 있으니 이만 하는것이 어떻겠소?》

《좋습니다.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수 있습니다.》

리경락은 어느 정도 혀가 풀리는김에 이야기를 더 좀 하고싶었지만 김일성동지의 의사를 거역했다가는 뒤가 좋지 않을것 같아 선뜻 찬성하였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기다려줄가? 그렇게 얼마든지…》

장군님께서는 슬쩍 리경락의 표정을 곁눈질해보며 말씀하시였다.

《그야 뭐 어렵겠습니까. 내가 편지만 한장 쓰면 되겠는데요. 사실 내가 떠나올 때 그쪽과 그런 의논을 다 해놓고 왔습니다.》

《그건 아주 잘됐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한테 편지를 한장 쓰시오. 쓰되 아직 나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비치지 말고 내가 저 백두산어방에 있는 모양인데 이곳 혁명군을 통해 련계를 짓는중이니 1주일가량 기다려야 할것 같다는 식으로 쓰시오. 알겠소?》

《저 그것은…》

리경락은 다소 당황하여 다른 의견을 내놓으려 하였다. 시간여유를 얻는데 굳이 그런 말을 해서 후날 자기 립장이 곤난하게 안해도 일없지 않겠느냐 하는것을 말하고싶었던것이다. 그러나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으시였다.

《그렇게 하시오. 편지는 오늘중으로 써서 정치위원동지에게 제출하시오. 편지내용을 정치위원동지가 검열할것이요. 그런 다음에 정치위원앞에서 봉인하여 저 목재소의 한유사에게 전하시오.》

《알았습니다.》

박덕산이 벌떡 일어나서 차렷자세를 하고 대답을 올렸다. 리경락도 따라일어서서 대답을 드릴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그의 대답은 금시 땅속으로 잦아들것처럼 가냘프게 떨려나왔다. 어쩐지 이것이 자기 무덤에 한발을 들여놓는것과 같은 불안한 예감이 뒤골을 쳤던것이다.

 

7

 

데라시마중장은 대단히 성급한 로인이였다. 륙사 17기생으로서 한때 명석한 지력을 가진 전도유망한 장교로 치부되여 참모본부에서 일한적도 있었으나 바로 그 성급한 성미때문에 이다가끼륙군대신의 눈에 나서 부장자리에서 현지사단장으로 따돌리웠다.

그러나 음흉한 이다가끼가 데라시마를 내보내면서도 그자신의 필생의 사업이라고 할 괴뢰만주국을 유지하는데 중추적역할을 놀아야 할 사단을 그에게 떠맡긴것은 비록 성급하여 음모를 같이 하는데 쓸모가 적지만 천황페하라면 늙은것이 소학생처럼 얼굴이 빨개서 꼿꼿이 일어서는 그 우매한 충성심이 한몫 쓸것을 타산한것이라는 군부내의 여론도 있었다.

어쨌든 우직하고 성급하게 일생을 살아온 데라시마중장은 만주에 와서 벌써 일년째 사단을 끌고다니지만 여기서는 도꾜의 이다가끼보다 더 까다로운 음모가들에게 둘러싸여 마치 참새가 왕거미줄에 걸린것 같이 안타깝고 성가시여 살이 내릴지경이였다.

그의 생각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 광막한 만주벌판을 샅샅이 들추다가 겨우 행방을 찾아낸 오늘에 와서 다시 또 무엇을 기다리자는것인지 통 짐작할수가 없었다.

하기는 김일성장군부대를 남패자골안에서 발견해낸것은 그자신의 휘하 정찰병이나 《토벌대》가 아니라 관동군사령부에서 직접 지휘하는 특수선무공작반,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도과장 모리 이사무중좌의 특무들이 알아낸것이였다.

그렇다 하여 그 특무들이나 선무공작반에서 그들자신이 신출귀몰하다고 벌벌 떠는 김일성장군의 유격대를 직접 어찌할수는 없을것이 아닌가. 혹 그럴수 있다면 중장 데라시마의 휘하 장병과 이번에 그의 지휘하에 새로 들어온 만여명의 위만군, 경찰 기타 병력은 무엇을 위해 이 험지로 1년이상을 끌고다닌단 말인가.

그런데 그들 음모가들은 총공격명령을 내리려드는 그의 목덜미를 번마다 잡아 누르는것이였다.

《괘씸한것들, 례의범절을 모르는 놈들, 저희놈들이 사관학교에 다닐 때 생각을 해서라도 어찌 그럴수 있단 말인가.》

데라시마는 그 옛날 이 지방의 큰 토호가 살았다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음침한 집안에 꾸린 사단장실안을 뒤짐을 짚고 오락가락하며 혼자 소리내여 중얼거렸다.

한때 사관학교에서 교관노릇도 한적 있는 그는 곰곰히 따져보니 관동군 부참모장겸 특무부장 하시모도나 보도과장 모리가 다 자기 제자라는것을 알게 되였는데 이것은 새로운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것이였다.

데라시마는 짓밟힌 자존심때문에 숨이 가빴다. 엄청나게 큰 방에 비해서는 기형적이리만큼 작게 뚫린 록색뼁끼칠을 한 창문에 다가가니 멀리 숲가에 저녁노을이 불그스레 비껴있었다.

그것은 이 동란의 때에 아무 공훈도 없이 귀한 로년의 한해가 또 속절없이 저물어간다는 애상적인 감회를 자아내게 하였고 실컷 배갈이라도 들이키고 저 걷잡을수 없이 막막한 자연을 향하여 한바탕 칼부림이라도 해보고싶은 광적인 열정을 촉발하는것이였다.

 

보아라 흥안령 뻗어내린 저 벌판을

나라 지킨 부형의 넋 잠들어있다

 

그 숲속에서 관하부대들이 어딘가로 행진하면서 부르는 군가소리가 아슴푸레 들려왔다.

금년 들어 갑자기 퍼지기 시작한 《관동군의 노래》였다.

그러자 옆칸인 부관실에서 젊은 부관놈이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류행가조로 흥그럽게 그 노래의 뒤를 잇대는것이였다.

 

정예로운 우리 무력 그 위세에

동맹국 인민들 편안하여라…

풍운에 몸바치는 관동군…까…

 

그리고는 이어 휘파람으로 처음부터 그 잡스러운 가락을 불어대는것이였다.

잔뜩 이마살을 찌프리고있던 데라시마는 휘파람소리에 군화장단까지 섞여들자 더는 참을수 없어 소리를 치려고들었다.

이때 마당에서 당직장교가 사복을 입은 사람 하나를 데리고 급히 부관실로 들어서는것이 눈에 띄여 자연 휘파람소리도 멎고 데라시마의 주의도 그리로 쏠리고말았다.

사복쟁이는 모리보도과장이 거느리고있는 특수공작반의 특무였다. 그는 리경락이 보낸 편지를 거리에 있는 《선만상회》의 상고머리주인한테서 넘겨받아가지고 부랴부랴 의군골의 공작반으로 찾아가다가 데라시마사단의 근무병졸에게 걸려 당직장교에게까지 끌려온것이였다.

부관으로부터 이러한 전말을 보고받은 데라시마는 반백이 된 다부룩한 코밑수염을 쭝긋거리며 사뭇 으르렁거리는 투로 중얼거렸다.

《내 이놈의 스파이놀음에 끝장을 내고말아야지.》

그는 다짜고짜 엄중히 밀봉한 그 편지의 중등을 잡고 투박한 한쪽 손가락으로 그 끝을 집게처럼 움켜쥐였다.

데라시마가 보총의 총신이라도 휘여낼만 한 힘을 써서 봉투를 막 찢으려 하는 순간이였다.

사단지휘부 앞마당에 승용차 한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급정거를 하더니 차바퀴가 미처 멎기도전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모리중좌의 안경알이 번쩍거렸다.

모리는 현관보초의 경례에는 곁눈질도 팔지 않고 곧장 사단장실을 향하여 다가왔다.

눈치를 챈 부관이 급히 대기실로 뛰여나갔지만 모리는 뚱뚱한 몸집으로 젊은 부관을 떠밀다싶이하면서 사단장실로 이미 들어서고있었다.

그는 건숭 경례를 붙이더니 대뜸 《뜯어보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것은 물론 한개 중좌가 중장각하에게 묻는 말투는 아니였다.

《이것말인가?》

데라시마는 맹렬한 기세로 막 찢으려다 못한 그 봉투를 엉거주춤 내밀었다.

집어닥치듯이 봉투를 빼앗아쥔 모리는 필적과 봉인을 세밀히 들여다보았다.

데라시마는 무테안경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모리의 눈을 두려움에 차서 바라보았다.

《다행입니다.》

막 찢으려다만 봉투의 이지러진 끝을 과장한 동작으로 쓸어펴며 모리는 야릇한 미소를 띠고 말하였다.

이때 데라시마는 자기의 처지에 어울리는, 말하자면 한개 중좌앞에서 중장이 응당 유지해야 할 체면을 차리기 위하여 호령 한마디를 할 차비였다.

《대체 너희들은 이게 무슨 장난질인가?》

이러루한 막연하면서도 보편타당성있는 질책을 뱉어놓으려던 입은 불시에 전화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는바람에 다물어지고말았다.

부관이 제꺽 수화기를 들더니 이어 사단장에게 넘기며 말하였다.

《혼마소장입니다. 각하와 바꾸어달라고 합니다.》

데라시마는 찌뿌둥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받아쥐였다.

지금 유격대와 일선에 대치되여있는 려단장 혼마는 바로 방금 도착한 편지를 가지고 유격대구역에서 사람이 넘어갔다는것을 보고하면서 공격명령을 언제 내릴터인가고 야유조의 정중성을 띠고 묻는것이였다.

《공격명령? 흥, 그게 언제쯤 있겠는지 나 역시 알 길이 없네. 여기 내 방에 와계시는 중좌각하께서 혹시 아시겠는지…》

데라시마는 이렇게 비틀린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모리를 피뜩 돌아보았다.

랭담하고 딱딱하던 모리의 얼굴에 뜻밖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만 더 참으라고 하십시오. 이제 무한3진을 함락시킨것보다 더 큰 공적이 중장각하 휘하의 사단 장병들에게 차례질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리는 데라시마의 의사여부는 묻지도 않고 봉투를 안주머니에 소중히 건사하면서 덧붙이였다.

《나는 이 밤으로 사령부에 올라가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모리가 가볍게 경례를 하고 나가버리자 데라시마는 수화기에서 시끄럽게 무엇인가를 독촉하는 혼마소장에게 역증을 터뜨렸다.

《자네는 무엇을 자꾸 묻는가. 긴 말이 필요없단 말야. 물샐틈없이 경계진을 치고 한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란 말야. 내가 래일 나가보겠지만 조금이라도 소홀한 점이 있었다간 려단장이하 전체 려단 장병들을 엄벌에 처하겠단 말야!》

데라시마는 한바탕 밸풀이를 하고는 저쪽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였다.

새까만 승용차가 노을비낀 숲가로 달려가는것이 보이였다.

 

정예로운 우리 무력 그 위세에

동맹국 인민들 편안하여라

 

아까보다 퍽 가까이에서 행진하는 부대가 부르는 《관동군의 노래》가 들려왔다.

《흥, 정예로운 우리 무력의 위세라고… 어디에 그 위세가 있느냐 말이야, 노상 벌벌 떨기만 하는 주제에…》

데라시마는 성이 나서 중얼거리며 마침 자기 방으로 물러나가는 젊은 부관놈의 빤빤한 뒤통수를 송곳처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모리는 그길로 사단지휘부와 50리가량 떨어진 의군골에 있는 자기 공작반에 돌아와서 앞으로 리경락이와 련계를 지을 대책을 세워놓고 곧 신경을 향해 떠났다.

자동차가 널직한 대륙의 밤길에 나서자 모리는 푹신한 좌석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쳤다. 그리고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귀를 눌러서 진물을 닦아냈다.

피곤하였다. 현지에 내려와서 근 한달동안 밤잠이라고 자보지 못한데다 어디 피곤하다는 말 한마디 비쳐볼 사이도, 비쳐볼 대상도 없는 생활이였다. 리경락을 유격대에 들여보낼데 대한 과업은 그가 하시모도소장에게서 직접 받았고 또 직접 집행하게 되여있었던만큼 그 누구에게 밀어맡기고 나앉을 형편이 못되였다. 공작반에는 자기의 부하이면서도 직접 하시모도에게 보고를 하게 되여있는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것을 그자신이 잘 알고있었다. 게다가 데라시마따위 부대지휘관들이 자그마한 실수라도 알아내기만 하면 당장 물고를 내자고들것이였다.

그러나 그 모든 난관도 이제는 지나간 일로 되였다. 아무리 지독한 고통이라도 추억속에서는 얼마든지 견딜수 있는것이며 지어 그것은 안온한 생활에 대한 추억보다도 달콤한것이다.

모리는 안주머니에 깊숙이 간직한 리경락의 편지를 군복우로 쓸어보며 홀로 빙그레 웃었다.

실로 한달여에 걸치는 로심초사가 이 한통의 편지속에 빛나는 열매를 맺고있는것이다.

하시모도소장은 이 한통의 편지를 위하여 한달정도가 아니라 이태이상의 장구한 시일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수 있다.

지금 륙군대신으로 영전해간 이다가끼가 총무부장시절에 하시모도도 그 부하참모로서 만주사변을 조작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마침내 오늘의 만주국을 만들어내였다. 이다가끼뒤로 특무부가 갈라져나오면서 그 부장자리에 들어앉아 헌병사령관까지 겸임하고있던 도죠 히데끼가 참모장으로 올라가자 하시모도는 대체 지금의 중좌 대좌 급들과 같은 륙사 26기생이였으나 벌써 소장으로 발탁되여 특무부장겸 부참모장자리에 올라갔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그때까지도 아퀴짓지 못하고있던 관동군의 제일선인 유격대와의 전쟁을 끝내는데 가장 큰 힘을 기울였다.

모리가 자주 듣게 되고 또 느끼는바이지만 하시모도는 만주사변을 조작할 때만 결코 못지않은 정력과 지혜를 이 사업에 바치고있었다.

사실 남보다 두서너단계를 한꺼번에 뛰여넘어 40대의 젊은 나이에 벌써 소장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 누구도 소장이 그의 힘에 알맞는 자리라고 생각지 않는 하시모도였다.

하시모도는 참모본부에서 근무할 때 벌써 오늘의 만주국을 구상하고 억지로 떼를 써서 이다가끼밑에 들어갔고 그 구상을 이다가끼와 함께 실천에 옮겼다. 따라서 만주에서 무엇인가 일을 하다가 본국의 요직에 올라간 령감들은 이랬거나 저랬거나 하시모도의 덕을 안입은 사람이 없기때문에 새파란 소장이지만 그가 도꾜의 군부나 정계에 나타나면 백발이 성성한 대장, 중장들이 먼저 인사를 하는 형편이였다. 하시모도가 만주사변의 직접적인 설계자라는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였다. 따라서 대재벌들이 그를 통해 만주의 리권을 지금이라도 떼내여볼가 하고 자동차를 선물한다, 별장을 지어준다하며 야단이였다. 지어 어떤자는 제 딸을 그의 침대에 들여보내기까지 하였다.

지금 관동군안의 실정을 두고보아도 사령관 우에다나 참모장 이소다니가 다같이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판이다. 그러고보면 만주의 실제주인은 부의나 우에다가 아니라 바로 하시모도 간지소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것이다.

《빨리 몰게.》 하고 모리는 운전수에게 중얼거리듯 말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때 륙사 동창생으로 료정출입을 같이 한적도 있지만 오늘은 아득히 높이 올라가버린 하시모도를 충심으로부터 존경하여 마지않는 그는 자기의 공이자 동시에 하시모도의 오랜 심사원려의 산물인 봉투를 그앞에 내대는 순간의 행복을 미리 머리속에 그리며 어느새 혼곤히 꿈나라에 빠져들어갔다.

 

8

 

관동군사령부의 현관앞에는 이날 유난히 자동차들이 많이 늘어서있었다. 일본의 성곽처럼 기와를 올린 현관부분의 거의 모든 창문들에는 카텐이 걷어져있었다. 이것은 그 방 주인들이 대체로 자기 자리에 앉아있다는것을 말해주는 동시에 많은 손님들이 또한 이 으리으리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건물에 찾아왔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였다.

명색이 만주국주재 일본대사관과 함께 있는 건물이지만 대사자체가 사령관 우에다대장의 겸직이라 집안을 돌아다녀봐야 외교관 비슷한 얼굴은 별로 없고 중대가리장교들만 분주히 래왕하였다.

모리가 사령부 하시모도소장의 방에 들어섰을 때는 상당히 이른 때였지만 대기실에 벌써 손님이 와 기다리고있었고 앞선 면회자가 부장과 면담중에 있었다.

대기실에 기다리고있는 손님은 뜻밖에도 젊은 아름다운 녀성이였다. 사실 그것은 한마디로 젊고 아름다운 녀성이라고 스쳐버릴수 없는 그런 특출한 녀성이였다. 그저 보통 아름다운것이 아니라 대단히 아름다왔다. 섬세하고 정교한 눈, 코, 입, 귀는 말할것 없고 백자기와 같이 희고 부드러운 살갗에 균형이 잘 잡힌 아름답고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있었다. 그러한 몸매를 보라빛 가을들꽃무늬가 박힌 일본기모노로 감싸고있는데 새하얀 왜버선이 꽤고있는 앙증스런 죠리의 정갈한 모양이 대륙의 황량한 숲속에서 적잖이 거칠어진 모리의 눈을 아프도록 날카롭게 자극하였다.

급한 마음에 조심성없이 문을 쾅 닫으며 조급히 장갑을 벗던 모리는 그 아름다운 녀인을 보자 주춤하고 멎어섰다. 그러자 젊은 녀인은 소리없이 허리를 일으키더니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차림으로 보아서는 일본식트레머리를 높직이 틀어올렸음직한데 머리만은 현대적으로 가볍게 굽실거리는 파마머리였다.

그 검고 숱많은 머리의 윤기때문인지 일본옷을 걸치고있는데도 현대의 첨단에 서있는 녀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하기는 이만한 나이에―스무나문살 남짓해보였다.― 제혼자걸음으로 관동군사령부 부참모장실에 나타났다면 보통녀자는 아닐것이지만 그런 분수치고는 너무나 순진해보이였다.

모리는 잠시후에야 제정신을 차렸다. 초면의 젊은 녀성앞에서 허둥지둥한듯 한 제 몰골을 돌이켜보자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출입문을 두드렸다. 안에 면담자가 있다지만 이번 공작과 관련된 문제에 한해서는 어느때나 자유롭게 드나들수 있게끔 약속이 되여있었기때문에 꺼리낄것이 없었다. 안에서 하시모도소장의 약간 신경질이 섞인 대답소리가 들리자 모리는 저도모르게 문제의 그 녀성쪽을 돌아보며 량해를 구하듯 《실례합니다.》 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하시모도는 모리를 보자 차겁고 랭담해보이던 얼굴에 일순 긴장한 빛을 띠우며 벌떡 일어났다.

《모리군, 언제 왔나?》

《새벽에 도착하였습니다. 각하.》

《그래… 그럼…》

다음 말을 잇대려던 하시모도는 손님이 있다는것을 상기하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로서는 뜻밖이리만큼 친절한 어조로 접객탁자에 마주앉아있는 손님에게 말하였다.

《기꾸찌군, 이거 안됐구만. 잠시 자리를 비워줄수 없겠나. 갑자기 급한 일이 제기되여서 어쩔수 없네그려.》

《네, 알겠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손님은 벌떡 일어나서 삽삽하게 말하였다. 그는 불과 스물댓살났을가말가한 애숭이중위였다.

모리는 내심 고개를 기웃거렸다. 바깥에서는 애젊은 녀성이 기다리고있는가 하면 안에는 또 이런 애숭이중위가 앉아있다.

대륙을 쥐락펴락하는 하시모도소장의 방에 륙군원수가 앉아있다는것보다 한개 중위가 손님노릇을 하고있다는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수 없었다.

중위는 아직도 새것인 군모를 옷걸개에서 벗겨들고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선뜻 나가기가 아쉬운듯 잠시 쭈밋거렸다.

그 눈치를 재빨리 간파한 하시모도는 《잠간.》하고 그를 멈추어세웠다.

《마침 만난김에 인사를 드리게. 이분은 보도과장 모리 이사무중좌시네.》

《네, 그렇습니까? 소문은 도꾜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제 기꾸찌 고사부로중위올시다. 앞으로 많이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기꾸찌는 관동군에서도 유명짜한 활동가와 면식을 익히게 된 기쁨을 감추지 않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저 기꾸찌대장의 막낭아들이네.》

《저 군사참의관이였던 기꾸찌백작말씀입니까?》

하고 모리는 젊은 사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인사삼아 물었다.

《그렇네. 이제는 옛일로 되였지만 저 미노베의 〈천황기관설〉을 국회에서 냅다 조겨서 정계쇄신의 계기를 열어놓은분 아닌가. 그분의 아들 셋이 다 군대에 복무하지만 아마 아버지의 패기를 제일 많이 타고난것이 이 고사부로군인것 같네. 근위사단에서 복무하였는데 그 사치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마다하고 떼를 써서 이렇게 풍운약동하는 대륙으로 찾아왔단 말이거던. 나는 젊은 장교들의 이러한 패기를 볼 때마다 제국의 양양한 전도를 내다보며 흐뭇한 생각을 금할수 없네.》

《지당한 말씀입니다. 소장각하께서 참모본부의 요직을 단연 뿌리치고 당시는 아직도 누구것이 될지 막연하던 이 대륙에 진출하여 제국의 제일생명선을 확보한것과 같은 대장부의 포부가 오늘날 우리 장교교육의 중대한 받침돌로 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모리는 아첨을 하면서도 천하게 들리지 않도록 저 역시 감회깊은 어조로 은근하게 말하였다.

《나야 이렇게 밤낮 부질없이 뼈를 깎고있을뿐이지 본시 둔재라 이를만 한 가치가 없네. 문제는 이 청년들이 어떻게 이 대륙에 틀고 앉느냐에 달렸지. 자, 그럼 기꾸찌군, 잠간 나가 기다려주게. 참, 바깥에도 손님이 있겠군. 이리 오게.》

그러면서 하시모도는 기꾸찌의 손을 잡고 제먼저 대기실로 나갔다. 기다리고있던 젊은 녀성이 소리없이 일어섰다.

《이거 미안하오. 저 사이또군에게서 왔지요?》

하고 하시모도는 젊은 녀자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녀자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얼른 넓다란 왜옷소매속에서 옷과 같은 감인 차곡차곡 접힌 책보를 꺼내여 소개신이라도 찾는지 뒤적거렸다.

《일없소. 일없소. 조금 있다 만납시다. 잠간만 기다려주시오.》 그러면서 기꾸찌를 향하여 뜻있는 눈짓을 하며 《부탁하네.》 하고 문을 닫았다.

《나는 기꾸찌중위입니다.》

단둘이 남게 되여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음 기꾸찌는 용기를 쥐여짜서 간신히 자기 소개를 하고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이리로 오신지 오래됩니까? 어디서 근무하시는지 성함은 어떻게 부릅니까?》

깊숙이 떨구고있던 고개를 들어 무엇인가 대답하려 하던 녀자는 기꾸찌가 한꺼번에 질문을 퍼붓는바람에 도로 고개를 숙이고 방그레 미소를 띠였다.

《저 미안합니다. 혹시 실례가 되였다면 용서하십시오.》

기꾸찌는 아름다운 녀인의 숙보는듯 한 미소를 눈치채자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지면서 황급히 발명하였다.

《아니야요. 다만 저는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대답을 할줄 모르기때문에… 호호호.》

딱한듯이 웃음을 지어보이는 녀자의 얼굴은 대단히 생동하고 매력이 있었다.

《녜, 그렇습니까. 나는 원래 무인이라 다소 성미가 급합니다. 녀성들에게는 물론 이러한 성미가 마음에 안들테지만 말입니다.》

기꾸찌는 별안간 자기 선배들의 호걸풍을 본따려고 애쓰면서 틀스럽게 말하였다. 그것은 보기에 거북할만큼 어색하였으나 녀자는 너그럽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저는 별로 남의 성미를 탓할만큼 원만한 녀자가 못돼요.》

《참 다시한번 묻습니다. 성함은 어떻게 부르십니까?》

《이찌가와 요시에라고 해요. 1주일전에 비행기로 건너왔어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아직 호텔에 있어요.》

《호텔이라니? 그럼 야마도호텔에 계신단 말입니까?》

기꾸찌는 기쁨에 넘쳐 부르짖었다.

《그래요.》

《그런걸, 한집에 있으면서도 그것도 적어도 닷새이상 같이 있으면서도 여적 만나지 못했군요.》

기꾸찌는 방금까지 틀스럽게 굴던것을 어느새 집어치우고 그 나이의 경박한 청년장교답게 두서없이 주어섬기기 시작하였다.

《나도 이곳에 도착한지 이레가까이 돼옵니다. 나는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조선에서 한달가량 묵다가 왔지요. 그래 하시모도상하구는 잘 아는 사인가요?》

《보시구서도 몰라요? 난 그이와는 생면부지야요. 우리 사장님께서 소개신을 써주면서 비행기를 태워보냈어요.》

《사장이라니 누구신가요?》

《저 콜롬비아에 있어요. 혹 〈빨간 딸기에 내 마음 싣고〉라는 노래를 들어보셨는지…》

《오―라, 그러니 가수였군요. 참 유감스럽게도 난 아직 그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노래는?》

《전 아직 신인인걸요. 가지 양성소를 나왔어요.》

활기있게 번져가던 담화는 문득 끊어졌다. 기꾸찌는 상대가 류행가수라는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어쩐지 자기가 숙보이지나 않을가 하는데 신경을 쓰게 되였고 그때문에 적잖이 몸이 굳어졌는데다 더욱 나쁘게는 얼마 안되는 사이에 이 초면의 녀성에게 걷잡을수없이 반해버렸던것이다.

그러나 성악배우라고는 하지만 보매 아직도 순진한 상대방 역시 그런 경우에 초면의 남자를 적당히 구슬려넘길만 한 수완은 없는듯 하였다.

그들은 서로 눈길을 내리깔고 몰래 상대방을 훔쳐보며 갈수록 무겁게 내리누르는 침묵의 중하에서 벗어나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좁은 대기실안은 두사람의 가쁜 숨소리만 가득차서 더욱 가슴을 답답하게 할뿐이였다.

문득 방문이 열리였다. 두사람은 죄라도 지은 사람들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방에서 나온 하시모도는 두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뒤따라 나가던 모리중좌가 오히려 친절하게 한마디 하였다.

《잠간만 더 기다려주시오. 소장각하는 몹시 분주하셔서… 이제 사령관각하에게 다녀와야 합니다.》

두사람이 나가버리자 기꾸찌도 요시에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털썩 도로 주저앉았다.

《참 되는대로 해먹는단 말이야.》

기꾸찌는 누구에게라없이 불평조로 두덜거렸다.

《정말… 그래요.》

녀자 역시 아무 뜻도 없이 이렇게 긍정하며 호―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9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 문화의 어머니이다.》

불과 4~5년전에 이러한 문구로 시작된 유명한 륙군 판프레트사건의 조직자의 한사람이며 《천황기관설》을 비롯한 민간인의 주제넘은 구설을 일거에 얼어붙게 하는데서 만만찮은 패기를 보였던 왕년의 군무국장 이소다니중장도 관동군참모장이라는 큼직한 감투를 뒤집어쓰고 몇해 시달리는 사이에 적잖이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는 자기 처지를 알게 되였으며 잔명을 보존하고 허수아비자리라도 지키기 위해서는 천황의 말보다 젊은 참모장교들의 말을 더 잘 들어야 한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리하여 하시모도는 머지 않아 이소다니도 륙군대신 한자리를 시켜 도꾜로 딸굴 때가 되였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소다니의 전임자 도죠 히데끼가 륙군차관으로, 고이소가 조선군사령관으로 그리고 그 전임자인 이다가끼가 륙군대신으로 나가있듯이 이소다니도 군부나 정계에 내보내면 관동군과 만주국의 리익을 위해 필요한 활동을 할것이였다.

사령관 우에다대장은 그만 못지않게 고분고분하였지만 하시모도보기에는 예순네살이라는 나이때문인지 총각장군이라는 별명까지 듣게 된 그 괴벽성때문인지 무기력하고 어린애처럼 단순하여 아직도 황도파와 통제파사이의 파쟁후과가 깨끗이 가셔지지 않은 복잡한 군부에서 한모를 막을만 한 기력이 부족하였다.

저들의 운명이 하시모도의 손아귀에서 놀아난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두 로인(지금 그들은 관동군사령관이며 주만대사인 우에다대장의 넓고 호화로운 방에 앉아있었다.)은 하시모도의 말을 주의깊이 듣는듯 하였으나 실상 리경락이가 어쨌고 데라시마사단이며 모리공작반이 어쨌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고 다만 하시모도가 그의 구상대로 조선인민혁명군사령관 김일성장군과의 교섭에 성공하는 경우에 그것이 자기들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것인가 하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하시모도 역시 그들의 그런 마음속을 손금보듯이 꿰뚫어보고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대장, 중장이며 사령관이고 참모장이였다. 따라서 부참모장이며 특무부장인 자기는 응당 제국의 운명과도 관련되는 중대문제를 처리하는데서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외관상 절차를 깍듯이 밟아야 하는것이다.

《그러면 데라시마중장에게 대장각하의 명의로 우리 공작반의 계획을 그대로 집행하도록 명령을 주겠습니다.》

하고 하시모도는 리경락의 편지를 소중히 접어 서류끼우개에 간수하고 일어섰다.

《그렇게 하게. 아무튼 김일성장군을 돌려세울수만 있다면 우리는 동양신질서는 말할것 없고 세계에다 신질서를 세우는것도 어렵지 않을터이니 그런 고마울데가 어데 있겠는가.》

우에다의 로인다운 말에 이소다니도 한마디 께끼였다.

《여부가 있습니까. 사실 이것은 우리가 중국이나 쏘련을 처먹는데도 문제가 있지만 저 도꾜 한복판에 앉아있는 제노라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조선과 만주가 위태위태한 지경이니까 더 큰 문제이지요.》

《그건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하시모도는 일단 이소다니의 아는척하는 말을 긍정해주고나서 덧붙이였다.

《그러나 도꾜에도 어리석은 사람만 있는것은 아니지요. 참모본부에 이시하라중장이 있고 또 이다가끼대신도 있는것만큼 만주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충을 아마 우리만 못지않게 잘 리해하실것입니다.》

하시모도의 비수같은 말 한마디에 이소다니는 삽시에 얼어들어 무엇인가 말하고싶은듯이 입술을 우물거렸으나 종시 말은 새여나오지 않았다.

참모장의 딱한 립장을 건져주기 위하여 우에다는 딴에 기지를 발동하여 화제를 돌렸다.

《참 소문에 듣자니 시게미쯔가 쓰딸린에게 빌붙어 가까스로 장고봉사건을 수습했다는것 같은데 그것때문에 우리가 무슨 말을 듣지나 않겠나?》

하시모도는 빙그레 웃었다.

《무슨 말을 들을게 있습니까. 제국의 안전을 위하여 관동군이 이만한 군사력을 유지하는것이 필요하다는것을 리해못하는자들은 그런 수치쯤 당하는것도 필요하지요. 그들은 김일성장군이 거느리고있는것이 한개 게리라에 불과하다는 백일몽을 공공연히 꾸고있으니 불에 잘 달군 쇠꼬챙이로 뒤덜미를 든든히 찔러놓을 필요가 있는것입니다.》

《허허허, 옳은 말이여, 옳은 말이라니까… 그자들을 이 만주벌판에 끌어내다놓고 김일성장군유격대가 어떤 강적인지 한번 제눈으로 보게 했으면 좋겠다니까…》

이소다니는 하시모도의 비유가 대단히 마음에 든다는듯이 몸을 덜썩거리며 웃었다. 그는 이렇게 하여 자기의 실언을 아무쪼록 잊어달라는 간청을 하고있는것이였다.

하시모도는 그의 불쌍한 연기를 너그럽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알아본 이소다니는 눈을 슴뻑거렸다. 그 눈에는 감사의 정이 차넘치고있었다.

《하기는.》 하고 우에다는 심중한 낯빛을 하고 하시모도를 바라보았다. 큰 문제는 아니지만 참모장과 하시모도 사이에 헝클어졌던 감정이 쉽게 풀리자 로인다운 잔근심이 또하나 떠올랐던것이다.

《장고봉사건이야 우리가 다 예견하고있은 일이지만 이번의 일도 그렇게 순조롭게 돼야 하겠는데… 김일성장군이 과연 우리 뜻대로 움직여주겠는지…》

《일이 없을것입니다. 김일성장군으로 말하면 력사에 보기 드문 걸출한 장군이며 혁명가인것이 사실이지만 그 역시 인간입니다.》

하고 하시모도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일정한 생존조건하에서만 생을 부지할수 있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가 넉넉히 20만정도의 군대를 풀어 든든한 포위를 형성하고 일체 외계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다음 공작을 들이대면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이번 모리군이 가지고온 리경락의 편지는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주는것입니다. 리경락은 김일성장군을 만났을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김일성장군 아니고는 유격대의 전체 운명을 걸고있는 이러한 교섭에 어떤 태도나 립장을 표시할만 한 사람이 없다고 나는 보고있습니다. 따라서 1주일만 기다려달라는것은 김일성장군자신이 결심을 채택할 시간적여유가 필요하다는것을 말해준다고봅니다. 이것은 우리의 타산이 틀림없이 들어맞으리라는 밝은 전망을 준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하시모도의 론리적인 설명에 두 로인은 감탄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눈구석 한귀에 감출수 없는 회의가 도사리고있었다.

(김일성장군때문에 그렇게 혼들이 났으니 무리도 아니지. 그러나 내가 이번에 유격대 역시 인간이라는것을 이 완고한 늙은이들에게 똑똑히 인식시키고야말걸.)

하시모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거뜬한 기분으로 사령관실을 나왔다.

그는 자기 방에 돌아오는길로 기다리고있던 두 청춘남녀를 다시 만나보았으며 이어 그들을 자기 차에 태워 모리와 함께 만영리사장 아마가스에게 보냈다.

이찌가와 요시에를 데리고온것은 실은 아마가스의 간청에 의한것이였다. 기꾸찌는 녀자가 아마가스에게 간다니까 등달아 자기도 그 유명한 사람을 한번 만나보았으면 좋겠다고 졸라대여 하는수없이 딸려보냈다.

여느때 같으면 극비의 성격을 띤 이러한 일에 아무 관계도 없는 경박한 애숭이를 딸려보내는 일 같은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오늘 하시모도는 기분이 좋았다. 이다가끼요, 도죠요, 이시하라요 하는 한다하는 인물들이 갖은 꾀와 수단을 다 써봤지만 종시 어찌할수 없었던 김일성장군의 유격대를 자기 대에 와서 자기 손으로 완전히 없애버릴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니 흥분을 진정시킬래야 진정시킬수가 없었다.

후날 안정된 일본제국의 식민지 만주대륙을 활보할 때 후대들은 마땅히 이 하시모도 간지의 수고를 잊지 말아야 할것이며 그들이 세계에로 비약의 나래를 펼칠 때 자기 하시모도가 이 무시무시한 대륙을 어떻게 길들였는가 하는데서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당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생각하였다. 그래 아마가스의 이번 계획도 그런 의미에서 적잖이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것만큼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장교에게 후날 기억을 되살릴만 한 실마리라도 남겨두는것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에서 기꾸찌를 함께 만영으로 보냈던것이다.

10

 

거세게 다그어대던 첫 추위가 제풀에 누그러져서 푸근한 날씨가 시작되였다.

눈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지에 까시시해 앉아있던 메새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니며 번지르르 녹아나는 논벌에 연분홍빛 아지랑이가 피여올랐다. 노랗게 떨어진 아직도 물기머금은 봇나무의 락엽들이 서리가 녹자 해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도하의 개울물도 살얼음이 녹아 번들거리며 흘러갔다.

이렇게 아침나절 한때는 봄날처럼 따뜻해졌으나 해가 서북쪽숲정수리우에 기울어질 때면 어느새 우중충한 구름이 몰려와서 이처럼 포근한 날씨가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는것을 위협조로 예고하는것이였다.

력사적인 남패자회의가 시작되였다.

남북만주의 광활한 지대에서 모여온 각 부대의 책임자들과 정치위원들, 15개 련대의 련대장이상 군사간부들과 련대정치위원들이 참가한 회의는 처음부터 긴장되였다.

회의를 위하여 경위중대에서 특별히 마련한 큰 천막안은 긴장되다못해 어쩐지 비장한 느낌까지 자아냈다.

모두 혈전을 헤쳐온 오래간만에 만나는 전우들끼리였지만 간단히 인사들을 나누었을뿐 별말이 오가지 않았고 구수한 롱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김일성동지께서 사단장이상간부들을 데리시고 회의장에 들어서시니 모두 뻑뻑 빨아대던 담배를 비벼끄고 일제히 일어났다.

한눈에 긴장된 지휘관들의 낯빛을 읽어보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미소를 띠우시며 옆에 있는 사단장에게 낮게 말씀하시였다.

《분위기가 매우 엄숙합니다.》

그러시고는 장내를 향하여 손짓을 하시며 말씀하시였다.

《모두들 앉으시오. 참가해야 할 동무들이 다 왔습니까?》

천막출입문가에 서있던 조직과장이 모두 참가했다고 말씀드렸다. 그이께서는 장내를 죽 살펴보시였다. 개별적인 지휘관들은 사령관동지의 눈길이 자기에게 미칠 때마다 가볍게 일어나서 눈인사를 올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휘관 한사람한사람을 그렇게 다 확인하시고 그들과 가벼운 미소로써 눈인사를 교환하신 다음 말씀하시였다.

《회의를 시작합시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밭은 기침소리가 울리고 자리를 고쳐앉느라고 잠시 부산해졌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일어서시여 개회선언을 하시고 이어 현정세와 금후 반일유격전쟁의 전략적방침에 대한 보고를 하시였다.

유럽에서 도이췰란드와 이딸리아에 의하여 세계대전의 위험이 갈수록 짙어가고있다면 동양에서는 일본에 의하여 세계대전의 전야에 바투 다가섰다는것을 지적하시면서 김일성동지께서는 노기띤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지난 3월에 오스트리아를 병탐한 나치스도이췰란드는 달포전에 드디여 남부체코의 슈데덴지방을 떼먹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도이췰란드 뮨헨에서 자본주의렬강들은 히틀러에게 체코를 제물로 바치는데 아무 꺼리낌없이 동의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뮨헨협정의 침략적본질을 폭로하시면서 이와 같은 자본주의렬강의 공공연한 결탁은 세계대전이 이미 시간문제로 남았다는것을 예고한다고 말씀하시고 이어 얼마전에 발표된 고노에내각의 《동아신질서건설성명》에 언급하시였다. 계속하여 김일성동지께서는 최근의 중일전쟁의 추이와 장고봉에 대한 일제의 침략에 대해 지적하신 다음 유격대의 형편과 국내에서 진행된 인민들의 투쟁을 분석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여기서 주로 지난해 8월, 중일전쟁의 개시와 관련하여 진행된 조선인민혁명군지휘관 및 병사대회에서 제시된 혁명로선을 실천하는 과정에 각 부대들이 걸어온 전투로정과 성과들을 개괄하시고 이어 예견되는 치렬처절한 결전에 대처하는데서 준비가 부족한 군사, 정치적결함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언급하시였다. 전투로정을 개괄할 때나 편향을 지적하시면서 될수록 사상적분석을 피하시고 사실자체를 객관적으로 개괄하신데 그치신것은 앞으로 각 부대 지휘관들이 자기 부대의 활동정형에 대하여 보충적보고를 할것을 예견하신것이였고 또 사실자체가 전략전술상의 이러저러한 편향을 너무나 잘 말해주고있었기때문에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자기스스로 거기서 교훈과 경험을 찾게 하시자는 의도에서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나타난 사실을 두고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기탄없이 의견을 교환하여 견해의 완전한 일치를 보자는 의도가 계셨기때문이였다.

사령관동지의 이 모든 타산들이 정확했다는것이 첫날 회의과정에 벌써 너무나 뚜렷이 증명되였다.

사령관동지의 보고에 이어 보충보고를 제기한 각 부대 지휘관들, 특히 《열하원정》에 참가한 부대의 지휘관들은 전투로정을 개괄하면서 개별적인 실례들은 풍부하게 들었지만 그들이 유격전술의 근본원칙과 모순되는 길로 나간데 대해서나 그러한 좌경모험주의적진출을 하게 된 정세분석에서의 주관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중 한 지휘관은 자기 보충보고에서 부르짖었다.

《실례로 주영찬동무는 자기 중대를 인솔하여 마인구철교지점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는 오후 네시에 명령을 받고 한시간이상 꾸물거린다음 다섯시에야 떠나서 300리길을 가는데 10시간을 허비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미 1,000여리의 행군을 한 뒤끝이고 식량과 말먹이가 부족되는 조건에서 전투과업이 제기되니 애로가 있었던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혁명가가 혁명이 제기하는 임무를 이와 같은 육체상의 피곤이나 후방조건때문에 흥정할수는 없는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영찬중대는 로상에서 많은 말이 쓰러지고 절반가까운 락오자를 낸 다음 소수인원이 날이 다 밝아서야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또 정찰을 하는데 근 한시간 가까운 시간을 허비한끝에 겨우 돌격에로 이전하였는데 그 결과는 비참할수밖에 없었습니다. 100여명의 대원들은 거의다 희생되고 중대는 겨우 철교의 절반을 점령했으나 사흘도 유지하지 못한채 적의 강화된 반돌격에 의하여 탈환당하고말았습니다. 10여명 남았던 전사들은 겨우 철교의 한끝과 철길을 폭파하고 다시 여섯명의 희생자를 낸 다음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마인구전투에서 주영찬중대는 괴멸되였습니다. 그러나 중대장 주영찬은 살아있습니다. 주영찬동무는 자기의 안일해이한 사상과 무책임한 전투 조직 및 지휘로 이와 같이 돌이킬수 없는 손실을 혁명앞에 끼치고도 살아있단 말입니다. 나는 그의 보고가운데서 처처에 박혀있는 비겁한 자기 변명과 불가피한 사정에 대한 암시를 여러번 느꼈습니다만 오늘 김일성동지께서 몸소 참석하신 이 회의마당에서 엄숙히 묻는바입니다. 주영찬동무는 그처럼 불가피한 사정이 첩첩하여 아무런 전투성과도 없었고 태반의 대원들이 다 희생된 그 전투에서 그자신은 어떻게 살아날수 있었느냐고말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시고 장내를 천천히 훑어보시였다. 남만부대의 지휘관이 자기 산하의 몇몇 중대장들을 회의에 참가시켜야 하겠다고 제기하기에 무슨 까닭인가 했더니 바로 이때문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출입구쪽 구석에 웅크리고앉은 주영찬의 커다란 몸매를 안타깝게 바라보시였다.

지금 참가대상도 아닌 간부들의 회의에 오직 비판을 받기 위하여 불리여온 그는 커다란 몸매를 옹송그리고 고개를 푹 떨구고앉아있는데 재봉대원들이 새로 지어 갈아입힌 새 동복이 오히려 그의 피투성이 넋을 더 아프게 자극하는것만 같았다.

저녁바람 설레이는 억새밭 등성이를 허울만 남은 인간처럼 정신없이 헤매이던 그 모습이 눈앞에 밟히였다. 그가 자기 부대에서 얼마나 몰리였겠는가 하는것은 지금 한창 열을 올리고있는 그 지휘관의 보고 한끝을 들어보기만 해도 능히 짐작할수 있다. 주영찬이 비록 탄알을 맞받아칠수 있는 강철이라 하여도 저런 비판앞에서 견딜수는 없을것이다.

김일성동지의 눈앞에는 혁명의 길우에 순결한 피를 휘뿌리며 쓰러진 용감한 혁명전사들과 전우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라서 마치 살아있는듯 벙글벙글 웃으며 지나가는 환상이 얼른거리였다.

그이께서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시였다.

《아니다. 이것은 무서운 착오이다. 사람이 제정신을 잃으면 사실자체가 이처럼 거꾸로 서는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우시며 회의의 난항을 현실적으로 예감하시였다.

 

11

 

기꾸찌는 그날 만영에서 이찌가와 요시에와 헤여진후 려관에서 사흘동안 그 녀자를 기다렸으나 웬일인지 돌아오지 않았다. 하도 궁금하여 여기저기에 수소문하는 과정에 요시에를 중국녀자로 만들어 《일만친선》을 선전하는데 리용하려고 일부러 선발해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기꾸찌는 분하였으며 그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설마 그렇게 유명하고 당당한 사람들이 순진한 처녀를 그런 미끼로 쓰기 위하여 꾀여낼수가 있을가싶었다. 그러나 모리를 통해 요시에가 사흘밤 아마가스의 방에서 자고나온 다음 중국옷으로 갈아입고 새로 조직중인 《대지극원》이라는 흥행단체에서 출연준비를 하고있다는 확실한 소식을 얻어들은 다음 기꾸찌는 모든 미련을 버리고 신경을 떠났다.

사단에 도착하니 아버지의 옛 부하였던 데라시마중장은 대단히 반가와하였으며 자기 숙소에서 며칠동안 함께 지내자고 하였다.

그러나 기꾸찌는 쌀쌀히 뿌리치고 자기 소대를 찾아 숲속으로 홀로 들어갔다.

사령부에서도 그래, 사단에서도 그래 이런 험지에서 직접 소대나 중대를 지휘한다는것은 힘에 겨울테니 참모부에서 일하도록 하라고 타일렀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사실 처음 도꾜에서 근위사단복무를 거절하고 만주로 떠나올 때는 저 역시 이시하라나 하시모도와 같은 지모의 책사로서 만주만 한 또하나의 대륙을 식민지화하는 꿈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그가 존경하여마지 않는 선배들과의 접촉은 자기의 렬등감을 아프도록 깨치게 하였으며 자기의 지혜나 담력으로써는 그들의 흉내도 내기 힘들다는것을 사무치게 깨닫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그는 어쩐지 그 누군가에게 배반당한듯 한 분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만주와 도꾜의 군부내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있는 청년장교들의 화려한 공훈담을 들었을 때 그리도 영웅심을 자극하던 그 기발하고 대담무쌍한 음모와 계략들이 이제는 다 시들하게 생각되였으며 어쩐지 생리적인 염오감을 자아냈다.

그는 숲으로 가고싶었다. 음모가 아니라 문자그대로 군인으로서 정정당당하게 싸우고싶었다. 그것이 사나이다운 일이지 으리으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순진한 처녀를 꾀여내여 릉욕하고 그것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선전무대에 내세우는따위 비렬한 행동을 오랜 명문가의 후손인 자기는 도저히 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실 요시에에게 반해버렸었다. 하시모도와 아마가스의 그 음산한 음모의 희생으로 만들기에는 너무나 깨끗하고 순진한 처녀였다. 그러나 그의 첫사랑은 싹트자마자 무참히 짓밟혀버렸다. 그리하여 기꾸찌는 적잖이 감상적으로 돼버렸으며 어쩐지 유격대의 《토벌》을 위하여 간다는것이 사랑을 위해 순사를 하러가는것처럼 생각되는것이였다.

그것은 며칠동안 푸근하던 날씨가 갑자기 사나와져서 일본에서는 한겨울에도 볼수 없는 맵짠 추위를 몰아온 날이였다. 한낮때였지만 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앙상하게 헐벗은 이깔나무가지들이 창대처럼 하늘높이 솟아 바르르 몸을 떨고있었다. 그 나무가지끝에서 아츠러운 휘파람소리가 연방 귀청을 따갑게 울려주었다.

후방물자를 실은 자동차를 타고 련대까지 온 기꾸찌는 거기서 이래저래 두어시간 지체하였다. 그가 중대를 거쳐 자기 소대가 위치하고있는 제일선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땅거미가 설핏하게 깔려들고있었다.

해가 기울자 어수선하던 하늘이 자욱히 흐려들면서 바람까지 터졌다.

중대에서 소대까지 오는 사이 자기 소대 관할하에 있다는 두개의 경계초소를 지났으나 두곳 다 개털외투에 개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추위에 잔뜩 옹송그리고있는 병졸의 몰골을 보아온 기꾸찌는 벌써 속이 부걱부걱해왔으나 그를 안내해오는 중대의 특무상사는 례사롭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소대주둔구역에 오니 여기저기 우등불이 타오르는 천막이 보이고 장작단을 안고 달려가는 근무병의 모습이 얼씬거릴뿐 전투부대다운 긴장이나 규률은 약에 쓰재도 찾아볼수 없었다.

《어이 그 누가 없는가? 소대장님이 오셨다―》

특무상사가 몇번이나 이 천막 저 천막에 대고 소리쳐서야 개털모자를 쓴 대가리가 몇개 비죽이 내밀더니 이윽고 한 천막에서 《그 누구야?》 하고 털부숭이상사 한놈이 개털외투에 팔을 꿰며 으슬렁으슬렁 걸어나왔다.

《오이, 곤도, 신임소대장님이시다. 인사를 드려라.》

《특무상사님, 먼길에 수고하셨습니다.》

털보는 기꾸찌쪽은 본체도 않고 특무상사에게 은근한 인사를 하더니 애숭이장교를 아래우로 훑어보는것이였다.

기꾸찌는 이 털보가 소위 구워서도 데쳐서도 먹을수 없다는 그 로병이라는것을 대뜸 알아채고 어금이를 깨물었다.

《제가 곤도 기미유끼상사올시다. 련락을 받고 침실을 준비해놓았습니다. 침실로 안내할가요, 아니면 식당으로 안내할가요. 하기는 여기는 술집같은것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꽤 독한 술이 있습니다.》

털보상사는 벌써 개털외투깃사이로 사치한 기꾸찌의 장교복을 들여다보고 모멸에 찬 미소를 띠우며 능글맞게 말하였다.

《소대를 집합시켯! 나는 여기에 자러 온것이 아니다.》

《저 소대는 막 식사시간을 앞두고 몹시 분주한데요.》

《이자식아!》

기꾸찌는 한손에 들고있던 전투가방의 끈을 움켜쥐고 곤도의 볼따귀를 바람소리가 나게 후려갈겼다.

《네놈이 아직도 기률규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자기 상관을 어떻게 영접해야 하는지 내가 가르쳐주마.》

《아이쿠!》

볼따귀로 날아드는 가죽끈을 막는 사이 새까만 장교장화끝으로 정갱이를 사정없이 내질리운 곤도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마. 마.》

특무상사가 두사람사이를 막아나서 겨우 기꾸찌를 진정시키고나서 말하였다.

《오래동안 소대장이 결원이 돼서 좀 허술한데가 있기는 합니다마는 곤도로 말하자면 충성심이 강한 하사관입니다. 소대장님, 아무쪼록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나는 너그러운것을 모른다. 어서 빨리 소대를 집합시켜! 어떤 놈이든지 내앞에서 건달을 피우다간 용서없이 처벌을 받을줄 알어, 상사! 당장 3분내로 소대전원을 내앞에 정렬시키란 말야!》

《핫!》

능글맞게 굴던 털보상사는 삽시에 길 잘든 개새끼와 같이 고분고분해져서 꼿꼿이 일어섰다.

《소대 모엿!》

범없는 골안의 이리처럼 그리도 무섭게 굴던 털보가 여지없이 맞아 늘어지는 꼴을 천막자락틈으로 겁에 질려 내다보고있던 졸병들은 집합구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달려왔다.

기꾸찌는 그들의 동작을 매서운 눈길로 쏘아보고있었다.

상사는 말할것 없고 모든 하사관들과 상등병, 일등병, 이등병들이 죽을 기를 써서 새로 부임한 사나운 소대장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고 달렸다.

그러나 기꾸찌가 보기에 근위사단의 그 정연한 맛과 같은것은 찾아볼래야 볼수가 없었다. 하기는 옷주제부터가 추위를 막는것을 위주로 삼다보니 개털외투에 개털모자를 쓰고 개털군화를 신은 꼴이 군대라기보다 지리교과서에 나오는 북방의 원시인을 방불케 했다. 그런 가위에 이런 비상소집을 당할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었던지라 기를 쓰고 달리기는 하지만 형편없이 시간을 끌었다. 또 나오는 놈마다 행장이 일정치가 않았다. 외투를 입고 나오는 놈, 천막안에 퍼더앉았다가 달려나오는 모양으로 겨우 웃도리나 꿰여입고 나오는 놈, 한손에 야전밥통을 든 놈… 별의별 놈이 다 있었다. 기꾸찌는 독사처럼 약이 올랐으나 방금 상사를 조기고난 뒤끝이라 억지로 성을 누르고 지켜보고있었다.

소대가 다 정렬되여 상사가 보고를 하러 나왔을 때는 3분의 세곱이나 되는 8분 20초가 지난 뒤였다.

기꾸찌는 천천히 시계를 들여다보고나서 보고를 받았다.

(이놈들을 몽땅 땅바닥을 기게 해줄것인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신경에서부터 준비해가지고온 화려한 부임연설을 언제 해볼 겨를이 없을것 같았다.

원채 머리속에서 생각할 때는 가장 우수한 소대를 반듯하게 정렬시켜놓고 비장한 감회와 넓은 아량을 한데 섞어 부하들을 눈물겨운 감동에로 몰아가자는것이 연설의 골자로 되여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타산이 빗나갔다는것이 명백해졌고 피차 흉금을 터놓고 비장한 감회에 잠길 그런 분위기도 깨여진지 오랬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부임하자마자 소대의 상사를 병졸면전에서 버릇을 가르치는것은 독특한 통솔방법의 하나라고 볼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네놈들이 나를 허술하게 보지는 못할테지… 이렇게 생각한 기꾸찌는 애숭이모상에는 어울리지 않게 틀스러운 걸음으로 두어걸음 대렬앞으로 다가가서 입을 벌렸다.

《에― 나는 너희들의 소대장으로 부임되여온 기꾸찌 고사부로중위이다. 바야흐로 아시아의 풍운 급함을 고하고 세계에…》

하고 기꾸찌는 이 밀림에서 자기와 자기의 부하들이 천황페하를 위하여 마땅히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장엄한 연설을 벌릴 심산으로 허두를 떼였다.

그러나 이날은 기꾸찌에게나 그의 부하들에게나 재수없는 날이였다.

기꾸찌가 가죽장갑을 와락와락 벗어 한손에 움켜쥐고 막 세계에 신질서수립의 기운이 태동하고있음을 소리높이 웨치려 할 때 숲속에서 장작을 한아름 안은 이등병 한놈이 걸어나오다가 한참 멍청히 서서 바라보는것이였다.

기꾸찌는 맥이 탁 풀리고 한편에서는 억지로 가라앉혔던 약이 되살아났다.

《저게 무슨 자식이야?》

기꾸찌가 묻자 상사가 소리쳐 대답했다.

《옛, 미즈시마 2등병입니다.》

《어서 불러왓!》

《옛!》

상사는 선자리에서도 능히 소리칠수 있었으나 소대장에게 절대복종한다는것을 보이고싶어 미즈시마 2등병이 서있는곳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이놈아! 새로 오신 소대장님께서 너를 부르신다. 급보롯!》 미즈시마 2등병은 정신이 번쩍 들어 장작단을 안은채로 달려왔다.

달려오면서도 미즈시마는 낯선 소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보매 곱살하게 생긴것이 설사 기합을 넣는다 해도 따귀나 한두개 얻어맞고 끝장나리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비교적 침착한 태도로 경례를 붙이고 보고를 하였다.

《소대장님, 3분대 2등병 미즈시마는 당신의 분부대로 왔습니다.》

《흠― 미즈시마 2등병인가?》

기꾸찌는 미즈시마의 퍼렇게 언 볼과 삐여져나온 관골, 버룩한 코구멍 그리고 북두갈구리같은 손을 낱낱이 뜯어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입대했는가?》

《넷, 소화 12년 9월 20일 히메지에서 입대했습니다.》

《히메지에서? 그럼 효고가 고향인가?》

《네, 그렇습니다.》

《흠―》

기꾸찌는 꼿꼿이 서있는 미즈시마 2등병곁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말하였다.

《효고에는 나의 외가집이 있어 나도 자주 다녀보았다.》

《그렇습니까?》

미즈시마는 눈을 빛내이며 환희에 찬 목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그러니 너는 이를테면 나와 동향인이나 같다.》

《넷, 그렇습니다. 영광이올습니다.》

《이놈아, 그런데 이게 무슨 본때야!》

기꾸찌가 이와 같이 별안간에 소리를 지르는바람에 미즈시마는 자동인형처럼 빳빳이 고개를 쳐들었다. 동시에 대렬에서도 잠시 누긋해졌던 긴장이 전류처럼 되살아났다.

《이건 뭐냐?!》

기꾸찌는 다짜고짜 미즈시마가 쳐들고있는 장작단을 나꿔채며 부르짖었다.

《넷 하사님 명령으로 장작을 해왔습니다.》

《장작을? 흠, 우선 이것으로 불을 때기전에 네놈의 버릇부터 고쳐야겠다. 팔을 내짚고 엎드렷!》

미즈시마가 장작단을 안고 달려온것은 크나큰 실책이였다. 우등불에 지피기 좋게 잘라온 봇나무의 가느다란 통장작은 불을 지피기보다는 개처럼 땅바닥에 엎드려있는 그의 엉뎅이와 등때기를 사정없이 조기는데 더욱 적당한듯 하였다.

! 퍽!

기꾸찌는 이를 사려물고 개털외투가 갈가리 찢어져달아나도록 사정없이 내려조겼다.

미즈시마는 장작이 제등을 내리칠 때마다 땅바닥을 핥을듯이 처박혔다가 농민의 완강한 의지로 다시 일어나군 하였다.

그는 흑흑 가쁜 숨소리를 내며 고개를 휘저었으나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말해! 무엇때문에 혼자 숲속에서 꾸물거렸어? 바른대로 댓!》

기꾸찌는 그냥 장작을 휘둘렀다.

《바른대로 대지 못하겠어?》

《넷, 사실은…》

《사실은 어쨌어?》

《사실은…》

팔뚝같은 봇나무장작은 마침내 개털외투를 찢어놓고 아래바지까지 너덜거리게 만들어놓았다. 미즈시마는 땅바닥에 온몸을 구겨박은채 배암처럼 몸을 뒤틀뿐 다시는 팔을 뻗치고 엉뎅이를 쳐들지 못했다.

《바른대로 댓!》

《사실은…》

《사실은?》

《사실은 유격대가…》

《뭐 유격대? 유격대가 어쨌단 말이야?》

기꾸찌는 순간 매질을 멈추고 부르짖었다.

《사실은 유격대가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바람에 구경을 하다가…》

《뭐야? 개자식! 유격대가 춤을 추어? 네놈이 나를 허수아비로 아는구나.》

기꾸찌가 으드득 이를 가는바람에 미즈시마는 당황하여 화닥닥 몸을 돌려대고 소리쳤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지금도 저렇게 노래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뭐야?》

기꾸찌는 자기앞에 짐승처럼 나딩굴어있는 미즈시마의 눈길을 따라 숲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야릇한 선률이 울려오는것 같기도 하여 그쪽으로 귀바퀴를 돌려대니 때마침 불어오는 저녁바람에 틀림없이 무엇인가를 두들겨대는 장단소리와 신바람나서 먹여대는 선소리의 메아리가 울려오는것이였다.

《저게 유격대가 분명한가?》

기꾸찌는 장작개비를 미즈시마의 허리를 겨누어 힘껏 내던지며 이번에는 곤도상사를 향해 사나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유격대는 이맘때면 의례 춤을 추고 노래를 합니다.》

곤도의 침착한 대답에 기꾸찌는 눈길 줄데를 몰라 허둥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하시모도상의 말과는 딴판이 아닌가.)

소대는 그의 앞에 침통한 표정으로 정렬해있었다.

그러나 기꾸찌는 다시는 연설을 할 흥취를 잃고말았다.

 

12

 

오늘 회의는 전에없이 빨리 끝났다. 처음 한동안은 복잡하게 헝클어져서 언제 가야 끝을 볼지 전망이 막연하였으나 김일성동지의 능숙한 회의지도로 어느새 론의는 제곬으로 모여들고 마치 뒤엉켰던 실꾸리가 풀려나가듯이 솔솔 풀려나갔다.

이제는 많은 문제들이 명백하게 갈라졌으며 전반적으로 회의를 결속지을 때가 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회의의 전망이 뚜렷해진 오늘 일찌감치 모임을 끝내시고 적들과 대치된 일선경계진지를 몸소 돌아보시였다.

7련대의 일부 전선은 거의 적과 말을 주고받을수 있을만큼 다가서있는데도 있어서 오중흡이나 오백룡이 거듭 앞을 막아섰으나 그이께서는 단연 뿌리치시고 하나하나의 진지와 적들의 배치정형, 무장상태 그리고 그 분위기며 사기 같은것을 꼼꼼히 살펴보시였다.

그리고나서 련대장의 천막으로 들어가시여 일부 중대의 배치를 고칠데 대한 의견을 주시고 아울러 앞으로 전투가 진행될 경우를 생각하여 현재 대치된 선에서 그대로 허위진지를 유지하여 적들로 하여금 우리가 배치를 변경했다는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라고 이르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7련대에서 저녁식사를 하시고 밤에 적들의 야간행동성격을 더 좀 살펴보신 다음 사령부로 돌아가실 계획이시였다.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온 경위중대의 호위성원들은 사령관동지께서 일을 보시는동안 7련대동무들과 함께 즐거운 오락회의 한때를 보내게 되였다.

오늘 련대지휘부 가까이에 있는 4중대에서는 사령관동지를 호위하여온 경위대원들까지 참가하여 춤판이 더욱 흥성거렸다.

하루동안의 훈련과 학습과제를 마치고 천막으로 돌아온 전사들은 큼직하게 피워놓은 우등불두리에 모여앉아 손벽을 치고 하모니카를 불어대고 구새먹은 통나무를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여기는 적들과 가장 가까이 접근된 전선이라 적들의 경계진지에서 살펴보면 우등불빛에 비치인 유격대원들의 얼굴특징을 하나하나 다 가려볼수도 있을것이였다. 그러나 두려울것은 없다.

짜그르르 터져오른 박수와 《나오시오》, 《나오시오》 하고 웨쳐대는 독촉에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며 일어선것은 한태혁이였다.

《이거 손님을 이렇게 일으켜세우는 법이 어디에 있소.》

그는 벌쭉벌쭉 웃으며 우등불을 둘러싼 동무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따 무던히 비싸게는 군다. 그 오늘밤은 아예 한중간쯤부터 시작해서 끄트마리를 좀 들읍세.》

명사수로 이름난 4중대의 신길남분대장이 삿대질을 하며 응수를 하였다.

《그래그래, 이번에는 아예 그 아프리카 어디쯤부터 시작하지.》

《아프리카보다 유럽 한복판에서부터 해제끼라구. 혁명이야 그놈들 부르죠아가 많은데서부터 시작해야지.》

사방에서 저마다 옆사람의 무릎을 비집고나서며 떠들어댔다.

《이거 난산데…》

한태혁이 다시 뒤덜미를 문지르자 함께 온 장경수가 행전을 친 그의 실한 다리를 갈겨놓았다.

《이건 뭐야. 한다하는 기관총수가 계집애처럼 수집어하니…》

《옳지, 이거 장경수가 큰소리다. 그럼 어디 두고볼가…》

장경수의 말 한마디에 잔뜩 승기가 돋친 한태혁은 부르짖었다.

《내 노래를 하면 다음 지명권은 나한테 있소.》

《그야 여부가 있나. 어서 부르기나 하라구…》

군중의 열렬한 환호에 한태혁은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이번에는 한옆에 와 선 7련대전령병 상철을 곁눈질해보았다.

《인디아부터 해요. 인디아가 좋아요.》

상철은 눈을 새별처럼 빛내이며 가만히 속삭였다.

한태혁은 그 커다란 눈을 꺼벅꺼벅하더니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곤륜산맥 날아넘어 구름속을 들어가니

높기도 하여라 저 산 이름은 무엇이냐

히말라야산줄기가 백설 이고 선 가운데

세계에 으뜸가는 에레베스트산일세

 

한태혁은 별안간에 점잔을 빼며 굵고 텁텁한 목소리를 뽑아내기 시작하였다.

 

간지스강 굽이굽이 흘러가는 기슭마다

절간이라 사당이라 인디아혁명 간고하다

 

누가 지었는지 《세계혁명가》라고 불리우는 이 노래는 한태혁의 말에 의하면 총 155절이나 된다는 어마어마한것인데 아직 아무도 처음부터 마감까지 들어본 사람이 없다.

155절이라니 설마 그런 노래가 있을수 있겠는가 하고 그 누가 의심쩍은 표정을 지을라치면 한태혁은 대뜸 성이 나서 팔을 부르걷고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기를 쓰고 주어섬겨도 고작 20절을 부르기전에 중단하지 않을수 없는 사정이 생기군 하였다. 그것도 매번 한태혁이쪽에서 막혀본적은 없고 오늘밤과 같이 엉큼한 친구들이 밑창을 들추어보자고 중등부터 하라, 꼬리부터 하라 해도 어떻게 된판인지 태혁은 눈섭 하나 까딱 않고 슬슬 뽑아넘기는것이였다.

똑똑한 소린지 모르기는 하지만 그의 뒤를 잘 캐는 사령부의 나어린 전령병들가운데는 이 노래가 155절이 되겠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앞으로 무한히 더 길어질것이라는 소문이 돌아가는데 한태혁이가 비서처의 정지성비서에게 졸라 이 노래의 가사를 새로 보충하는것을 직접 보았다는 말에 비추어보면 막 웃어버릴수도 없는 말이였다.

어쨌거나 한태혁의 155절짜리 노래는 어디에 가나 소문이 자자하였고 인기가 대단하였다. 그는 무슨 오락회에서건 이 노래 하나만 가지면 어떤 노래의 명수도 능히 제압할수 있었고 그가 일어서기만 하면 오락회는 그것으로 끝나게 마련이였다. 실로 155절짜리 노래를 다 듣자면 시장하고 지루해서 견디지 못할것이였다.

하지만 유격대원들은 한태혁이만 보면 《세계혁명가》를 졸랐다. 곡은 단순하고 앞머리는 하도 들어서 뻔드름하였지만 그 노래가운데는 어쩐지 세계혁명문제를 가슴에 품고 눈보라 비바람속을 헤쳐가는 유격대원들의 당당한 자부심이 반영되여있는듯도 하고 또 세계 수많은 나라들의 초보적인 지리적표상을 안겨주어서 그들의 포부를 더 높고 더 넓은데로 이끌어가는것이였다. 게다가 한태혁의 노래하는 모양 또한 구경스러웠다. 목소리는 특별히 좋다고 할만 한것은 못되였으나 굵고 텁텁한데다 가사의 내용에 따라 여러 나라 사람들의 모양을 흉내내는데 어떤것은 얼토당토 않는것도 있었지만 어딘가 이국적인 맛을 돋구어주어서 흥취가 있었다. 그래 처음에는 딴일로 돌아가던 사람들도 다 모여들고 나중에는 재봉대며 작식대의 녀동무들까지 155절자리 노래를 듣겠다고 모여들어 오락회판은 점점 커지고 흥성거렸다.

어느새 인디아혁명을 끝마치고 동남아시아일대를 혁명의 폭풍속에 몰아넣은 한태혁은 인디아양의 호호바다를 넘어 아프리카땅으로 훌쩍 건너갔다.

 

수천만년 노예살이 피땀으로 빚었는가

피라미트 스핑크스는 나일강에 어려있고

아라비아사막에 순례자떼 흐르는데

락타등에 몸을 실은 타반머리 저 나그네…

 

한태혁이가 에짚트혁명의 간고성에 대해 열을 올려 노래하고있을 때 김일성동지께서 오중흡과 함께 슬그머니 우등불뒤전에 와 서시였다.

오백룡과 전달장 강봉수 그리고 김재영이가 그이를 좌우에서 옹위하고 섰지만 그이께서는 한태혁의 노래에 끌리시여 차츰 군중의 한가운데로 섞여드시였다.

오락회의 분위기를 깨뜨릴가보아 그이께서 미리 엄하게 단속하셨기때문에 오중흡이나 오백룡이도 묵묵히 그이뒤에 따라설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태혁의 노래에 정신이 팔려버린 전사들은 누구도 자기들의 한가운데에 사령관동지께서 와계신다는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허허허, 꼭 에짚트사람같군. 저 동무가 어디서 저런 노래를 다 배웠을가…》

그이께서는 하도 신통하여 홀로 나지막하게 말씀하시였다.

《쉿, 떠들지 마오다. 저게 형편이 없는 동무라오다.》

하고 옆에 서있던 나이 좀 들어보이는 한 전사가 노래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수군수군 속삭였다.

《내 사령부에서 듣자니까 기관총 잘 쏘지, 명창이지, 뭐 어디서 대학까지 댕기다왔다는 소문도 있는데 아무튼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다니는 동무니까 못배운게 있겠소다?》

우릉우릉하는 불빛때문에 모상이 똑똑치는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시니 며칠전에 내려보내신 박인섭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나무그늘로 몸을 감추시며 그의 친절한 설명을 그럴듯하게 듣는척하시였다. 한태혁이가 그런 소문을 낼만도 하였지만 떠돌아가는 말을 그대로 믿고 옮기는 박인섭도 어수룩하다는 느낌보다 오히려 듬직한 생각이 더 가시였다.

《하기는 그렇군. 하지만 대학을 다니다왔다는것은 모를 소린데…》

김일성동지께서는 일부러 미타한 소리를 한마디 해보시였다. 인섭은 힐끔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난감하게 됐다고 생각하시였다. 그러나 박인섭은 그늘이 짙어서 그런지 아니면 노래에 하도 정신이 팔려서 그런지 아무런 눈치도 못채고 중얼거렸다.

《마당거우에서 대학을 나온 동무가 수태는 된다는데 그 동무라고 대학을 못댕겼겠소다? 저것 보랑이. 세상 모르는게 없다니까…》

그러면서 인섭은 제 가락으로 놀아나는 태혁의 손짓, 몸짓에 혹해서 혀를 끌끌 차기까지 하였다.

 

지브랄타르해협을 한번 훌쩍 건너뛰면

인민전선 항쟁의 불길 대륙에 타오르네

스페인의 용감한 빨찌산들 어디 계신가

프랑코파쑈독재 살판치는 마드리드야

 

사령관동지께서는 한태혁의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이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하시여 억지로 웃음을 참으시고 뒤로 빠져나오시였다.

《저게 155절짜리 노래겠습니다?》 하고 호젓한 숲속길에 들어서시였을 때 사령관동지께서는 오백룡에게 넌지시 물으시였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부쩍 늘었다고도 합니다.》

오백룡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강봉수쪽을 돌아보았다.

《재영동무가 그러는데.》

하고 강봉수가 그이곁으로 다가서며 말씀드렸다.

《정지성동무가 최근에 유럽부문에 대한것을 적어도 열절은 더 써주었다는것입니다.》

《허허허, 참 대단하오. 대단한 노래요. 한태혁동무가 마당거우에서 학습때문에 쩔쩔매던 생각을 하면 저렇게 굉장한 노래를 왼금으로 외워서 거침없이 불러댄다는것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람이란 신기한것입니다. 나는 한태혁동무의 재간이 얼마나 되겠는지 도모지 대중할수가 없습니다. 소문에 듣자니 저 동무는 군복도 재봉대원들 못지않게 잘 짓는다는데 그것은 사실입니까?》

《아마 사실일것입니다. 뭐든지 한번 하자꾸나 하면 해내고야 마는 친구니까… 그대신 좀 걷잡기는 힘든 동뭅니다.》

오백룡이 어딘가 좀 못마땅해하는듯 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의 생각에는 어쩐지 한태혁의 덥적거리고 덜렁거리는 성미가 사령관동지의 호위성원으로서는 부적당한 품성이라고 느껴졌던것이다.

《허허허, 그런 한태혁이도 종시 해결하지 못한것이 있지. 그 동무는 나한테 와서 로골적으로 지하공작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비위가 상해서 자꾸 주먹이 먼저 나간다는것이지요. 이 부면에서 한태혁동무는 아직 혁명의 요구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매우 흥미있는 좋은 동무입니다.》

이날저녁 사령관동지께서는 7련대에서 식사를 하시고 밤에 다시 방어전연을 돌아보신 다음 밤길을 걸어 사령부로 떠나시였다. 70리길이였다.

이런 때 밤길을 걸으시는것이 재미없다고 모두 말렸지만 래일 회의도 있고 또 당초에 그럴 계획으로 떠나신 길이기때문에 듣지 않으시였다.

해질무렵부터 바람질을 하던 숲속은 밤이 들자 뜻밖에 조용해졌다. 가볍게 땀발이 서서 먼길을 걷는데는 차라리 나무가지끝에 설레이고 옷자락에 감도는 미풍이 시원한 맛을 돋구어 좋았다. 10리를 못갔는데 달까지 솟아올랐다. 아래가 약간 이지러진 달은 자주 숲끝에 숨어 모습을 볼수 없었지만 깊은 숲속 어디에나 푸른 달빛을 뿌려주었다. 태고의 밀림이라 그 달빛때문에 길을 가려볼수는 없다 해도 푸르게 아롱지는 나무잎의 그 생신성과 그때문에 더욱 우중충해지는 진한 그늘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서 어디에나 절경을 빚어내였다. 여기에 밤새마저 목청을 가다듬고 우는것이여서 이 밤, 이 남패자의 깊디깊은 밀림속에 태동하고있는 력사의 용암이 분출직전에 있다는 느낌은 그 어디에서도 느낄수 없었다.

길을 잘 아는 오중흡이 기관총을 멘 장경수와 함께 길라잡이로 앞장을 서고 오백룡이 역시 기관총을 멘 한태혁을 데리고 후위를 섰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전달장 강봉수와 재영이를 데리시고 가운데로 걸으시였다.

이렇게 하는것은 어느모로 보나 필요한것이고 합리적인것이였다. 오중흡이와 오백룡이 행군계획을 세울 때 김일성동지자신께서도 그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나 정작 길을 떠나 이렇게 잠풍하고 달빛에 젖어 설레이는 숲속을 구성진 밤새소리를 들으며 걸으시자니 다감한 생각이 가슴에 넘치시여 앞선 오중흡이나 장경수에게 말을 걸기도 하시고 혹은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셨다가 한태혁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시였다.

사실 지금 외양은 이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숲속이지만 수만의 적이 포위진을 치고있는 조건에서 사령관동지를 밤길에 모시고가는 이들 여섯사람은 그 누구도 말을 해볼 생각은 없었으며 오백룡이나 오중흡은 너무나 긴장되여 바싹 말라드는 입안을 자주 혀바닥을 내둘러 추기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도 그들의 그런 심정을 짐작하고 계시였다. 그러나 원쑤들의 중중첩첩한 포위속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밤, 거침없이 내달리는 무한히 자유로운 사상의 약동을 느끼시는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들의 지나치게 굳어진 마음이 오히려 안타까우시였다.

생각하면 이러한 밤길에 김일성동지의 수많은 사상이 싹트고 무르익었다.

이제는 벌써 10년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락엽이 휘날리고 외로운 억새꽃이 서리내린 언덕에 젖어서 설레이던 료하기슭을 걸어 하투부락에서 소오가자로 돌아오군 하시던 그 늦가을의 밤길에서 그이께서는 오늘의 항일무장투쟁의 전모를 가슴속에 그리시였다. 명월구회의가 있은 직후인 31년의 겨울에도 이러한 밤길을 수많이 걸으시며 하나 둘 조직에 묶어나가시던 그 청년들의 모습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간부들로 자라난 오늘의 오중흡이며 박덕산의 모습을 그려보시였고 한 부락에 7~8명에 지나지 않던 그 무장소조를 키우시여 강대한 일본제국주의를 력사의 쓰레기통에 처넣을 무적의 혁명무력을 꾸려나가실 가지가지 구상을 무르익히시였다.

자꾸만 옷자락에 매달리는 나어린 동생을 사랑하는 어머님의 무덤가에 떼여놓으시고 벌써부터 광야에 미친듯이 설레이던 눈보라속을 뚫고 동기행군의 길에 오르시던 1932년의 그 늦가을도 이해처럼 철이 일렀었다. 눈보라의 장막에, 밀림을 울리는 바람소리에 지워도지워도 떠오르던 언 두부모가 댕그랗게 놓인 량강구의 그 객주집이며 기어이 형을 따라가겠다고 안타까이 조르던 철주의 목소리가 이제는 먼 옛일로 되여 다시는 눈에 밟히지 않을것인가, 다시는 귀전을 아프게 허비지 않을것인가.

철주는 이미 혁명의 길에 쓰러졌다. 너무나 젊고 너무나 깨끗한 철주의 피가 어느 광야에 뿌려졌는지 벌써 세월의 돌이끼가 두텁게 깔려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모습마저 망각의 너울에 가리워 희미해질것인가! 열혈시인 김혁이, 혁명의 풍운아 최창걸이 우리의 가슴에서 사라질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잊지 못할 잊을수 없는 추억이 많다. 그러나 가슴아픈 그 추억들이 혁명의 이 길에 걸채이는 상처는 아닐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저 이깔나무 우듬지사이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과 같이 우리의 앞길에 아름다운 빛발을 뿌려줄것이다. 그러고보면 곡절많은 조선혁명의 길우에 얼마나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있는가.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걸음을 멈추시고 하늘을 올려다보시였다. 때마침 숲정수리는 성기여져서 구름 한점 없이 개인 밤하늘에 쥐여 뿌린듯이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있었다.

《남패자라…》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무수한 별들을 하나하나 세여보실듯 고개를 젖히고 더듬어나가시며 혼자소리로 외우시였다.

별들은 그이의 가슴속 깊으나깊은곳에서 힘차게 태동하고있는 사상을 리해하기라도 하는듯 저마다 미소를 짓는것이였다.

《그렇지.》 하고 그이께서는 그 별들을 향하여 다시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무엇이라는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퍽 가까이 다가왔던 오백룡과 한태혁이도 달빛아래 서계시는 사령관동지의 모습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저만큼 앞서서 멀어져가던 오중흡이네도 걸음을 멈춘듯 와시락거리던 풀대소리가 가뭇 조용해졌다.

《어서 오시오. 왜 그렇게 섰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오백룡이쪽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부르시였다.

오백룡은 몇번 망설이다가 어서 앞서시라는 청을 드릴 작정으로 그이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미처 오백룡이네가 다가서기도전에 말을 거시였다.

《처음 장백에 나와 그놈들 〈동기토벌〉을 본때있게 때려준것이 아마 이때쯤 되지 않습니까?》

《네, 그런것 같습니다.》 하고 오백룡은 얼결에 대답을 올렸다가 잠시 생각하고 뒤를 잇대였다.

《〈3.1월간〉창간호를 내느라고 출판소에 늦도록 계시다가 사령부로 돌아오실 때 꼭 이러한 달밤을 걸은 생각이 납니다.》

《참, 그랬던것 같소. 나도 생각이 납니다. 좋은 밤입니다. 래일 회의만 아니라면 이렇게 밤새도록 숲속을 거닐어보고싶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으시며 말씀하시였다.

오백룡은 묵묵히 뒤를 따를뿐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않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피뜩 입을 꾹 다문 그의 근엄한 옆얼굴을 돌아보시였다.

묻지 않아도 찬성할수 없다는 그의 엄격한 표정을 읽으시고 그이께서는 홀로 미소를 지으시였다.

당초에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다. 어찌나 조심을 두는지 그를 움직인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입으로 반대할 때는 그래도 나은 편이였다.

《사령관동지, 사령관동지 한분만 바라보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우리 인민들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몸을 삼가주십시오.》

하고 눈물이 그렁해서 애원할 때는 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오늘만 해도 그는 길을 떠날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의례 오백룡이 반대할것을 타산하신 그이께서는 오늘 래일 회의를 결속하실 작정이라는것을 미리 귀띔하시고 그러니 부대가 뚫고나갈 방도를 미리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복해서 가까스로 길을 떠나셨던것이다. 그래도 그이께서는 간단히 재영이나 데리고 오중흡과 함께 갔다가 돌아오실 작정이였다. 그런 생각을 터놓았더니 오백룡은 펄쩍 뛰였다. 그러면서 마치 70리라는 길이 몇천리나 되는듯이 70리, 70리 하고 곱씹으면서 그길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내우기는것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하는수없이 이 걸음이 적에게 알려져도 재미없고 또 부대내에도 널리 소문낼 일은 못되기때문에 될수 있는대로 적은 인원으로 가야 한다는것을 한참 설복하시였다. 그래 가까스로 장경수와 한태혁에다 자기와 강봉수가 따라가야겠다는 정도로 결정을 보고 물러섰다.

《흥, 그거면 두어중대는 데리고가는셈이군. 장경수나 한태혁이가운데 한 동무면 되지 둘씩 다 데려갈 필요야 어디 있소?》

가까스로 타협을 봐놓고도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어 이렇게 말씀하시니 오백룡은 비로소 낯색이 좀 풀리여 말하는것이였다.

《뭐 그래도 든든히 하는 편이 좋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건넌다지 않습니까.》

《그렇게 매번 조심조심 가다가 언제 우리가 공산주의까지 가보겠습니까. 조선인민혁명군사령관이 경위중대장을 잘못 만났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 신중한 낯빛으로 말씀하셨으나 오백룡은  끄떡도 하지 않고 길떠날 차비만 하였다. 예비탄창을 전투가방이 모자라게 쑤셔넣는 그 진지한 모양을 보시니 사령관동지께서는 새삼스럽게 그들의 뜨거운 사랑이 가슴에 마쳐와 얼굴을 돌리시였다.

지금도 오백룡은 그이의 다감한 말씀에 끌려들어 혹시 다소라도 긴장을 늦구게 될가봐 그것만이 걱정인듯 연신 뒤쪽을 살피는가 하면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었다.

《사령관동지. 저…》 하고 불쑥 한태혁이가 입을 벌리였다.

오백룡이 못마땅한듯이 희뜩하고 돌아보는 눈길이 밤눈에도 엄한 빛을 뿌렸으나 사령관동지께서는 한태혁이가 먼저 말을 걸어준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우시였다.

당초에 이 좋은 밤길을 어떻게 조심만 하면서 걸을수 있단 말인가.

《뭘 그러오?》

사령관동지께서 부드럽게 물으시니 한태혁은 오백룡이쪽을 피뜩 돌아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내친김에 불쑥 물었다.

《저 회의가 아직도 오래 갑니까?》

《회의가?》

그것은 사령관동지께도 다소 뜻밖의 질문이였기때문에 무의식중에 받아외우시고나서 되물으시였다.

《그건 어째서 묻소?》

《하도 이상해서 그럽니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전 유격대에서 회의를 이렇게 오래 할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처음에야 유격대에서 회의같은것이 있으리라는것도 생각 못했습니다만…》

《허허허, 유격대에서 이렇게 회의를 오래 할줄 몰랐단 말이지? 허허허, 참 그럴듯한 말이요.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

사령관동지께서 웃으시자 따라 빙그레 웃던 한태혁은 여기서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왜 놀랐습니까?》

《설마 사령관동지께서 저희들과 같이 생각하실수가 있겠습니까.》

한태혁은 시쁘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외면하였다. 그의 생각에는 사령관동지께서 롱으로 하시는 말씀이라고 느껴졌던것이다.

《허허허, 사령관이라고 해서 어떻게 만사람의 마음속을 일일이 다 꿰뚫어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서로 같지 않던 사람의 마음이라도 지금은 꼭 한마음한뜻으로 만들어야 하겠으니 오래 걸리더라도 회의를 계속할수밖에 없었던것입니다. 내 말을 알만합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한태혁의 얼굴을 들여다보시며 친절하게 물으시였다.

《글쎄 알것 같기도 합니다만…》

하고 한태혁은 어쩐지 겁먹은듯 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며 오백룡이쪽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회의를 끝맺게 된것 같습니다. 한태혁동무는 회의를 끝맺게 됐는데 무슨 할 이야기가 없습니까? 회의에 제기하고싶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내가 대신해서 발표할터이니…》

《제가 무슨 의견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

한태혁은 다시 한참 망설이다가 번쩍 고개를 들고 말씀드렸다.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아직도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허허허.》

김일성동지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이러한 말이나 뜻을 비친것은 한두사람이 아니였다. 지어 박덕산이나 최춘국이같은 간부들조차 회의기일을 두고 의문을 표시하였었다.

이것을 조성된 정세의 준엄성을 잘 리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의문이라고 한마디로 밀막아버리기는 쉬웠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치부해버린 다음 닥쳐올것은 혁명의 운명자체가 걸려있는 시련이였다. 이 시련은 결코 외형상의 규률이나 회의의 절차상결정만으로는 이겨내기 어려울 그런 간고성이 예견되는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깡그리 헤쳐놓고보니 복잡한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사람들이 제일 리해하기 힘들어하는것이 이를테면 국제당의 로선이라는것도 비판적으로 대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주영찬중대의 괴멸을 두고 실로 가슴아픈 비판과 자기비판이 오고갔지만 그 비극에 직접 관련되여있는 사람중 그 누구도 그 비극의 직접적원인으로 된 《열하원정로선》자체를 의문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론의가 심화되자 문제의 본질은 밝혀지지 않을수 없었다. 이 원정에 참가한 부대의 지휘관들은 자기 책임도 있고 오랜 혁명투쟁과정에 굳어진 관습도 있어서 처음에 완고한 립장을 취하였으나 알수 없는것은 엄광호같은 사람의 태도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처음 회의를 소집하실 때의 의도도 계셨던만큼 될수록 발언을 적게 하시고 짤막한 질문이나 간단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의사의 표시에 머무시였다. 그대신 그이의 뜻을 받들어 박덕산이나 오중흡, 최춘국 같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간부들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들이 제기된 문제를 정확하게 해명하며 조성된 정세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에 맞게 우리의 유격전쟁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가야지 먼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주관주의적판단에 혁명의 승패문제를 내맡길수 없다는것을 빈틈없이 론증하였으나 그때마다 엄광호와 몇몇 지휘관들은 의도는 어쨌든 고전의 명제들을 교조주의적으로 외우면서 회의의 전진을 방해하였다. 하기는 그러한것이 예견되였기때문에 회의기간을 상당히 오래 끌것으로 내다본것이였고 그 과정이 복잡하리라는것도 타산한것이였다. 그러나 회의의 진행과정을 주의깊이 살펴보면 교조주의가 이제는 적지 않게 머리를 수그린것이 확실하고 뒤로 돌아가는 반향을 들어봐도 어느 정도 문제의 본질을 리해하기 시작한것이 사실이였다.

그만하면 대성과라고 볼수도 있었다. 공산주의운동이 시작되여 한세기가 지나는 동안 국제당의 로선을 절대시해온 공산주의자들속에서 변화된 현실을 똑바로 보고 교조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혁명의 원리를 적용하는 새로운 관점을 세운다는것이 쉬운 일일수 없다. 그런데 조선혁명의 현사태는 먼곳에 앉아있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아마도 공산주의운동력사상 가장 처참한 시련이 되기 쉬운 그 국면에 직접 맞서있는 사람들이 자기 인민의 리익과 자기 나라의 실정에 꼭 들어맞는 로선을 세우며 그 로선을 피투성이 되더라도 관철해나갈것을 요구하고있는것이다.

《한태혁동무가.》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달빛에 환하게 떠오를만큼 웃으며 말씀하시였다.

《이상하게 생각하는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사람들의 사상이 완전히 하나로 되기란 그리 쉬운것이 아닙니다. 실례로 한태혁동무와 나사이에도 의견차이가 있습니다.》

《예? 제가 사령관동지와 다른 의견을? 그건 전혀 있을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아무데나 막히는것을 모르는 부접좋은 사나이 한태혁도 사령관동지의 이 말씀에는 당황하여 몸둘바를 몰라 허둥거리였다.

《잘 생각해보시오.》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여전히 웃는 빛으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가령 동무가 155절짜리 굉장한 노래를 배웠는데 나는 그것을 절대 지지합니다. 나는 아까 처음으로 그 노래를 들어보고 155절을 다 부르자면 몇시간이나 걸리겠는가 계산까지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조국을 해방한 다음 극장같은데 동무를 내세운다고 합시다. 그러면 한동무는 하루밤 공연을 맡아할수 있을게 아닙니까.

나는 수많은 관중들을 모아놓고 동무를 척 내세운 다음 우리 인민들에게 우리 유격대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것을 자랑하고싶은 생각이 치밀었습니다. 아마 동무가 155절짜리 노래를 해놓고 관중들을 향하여 우리모두 혁명에 떨쳐나서자고 한마디 하면 몽땅 호응해나서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글쎄… 전 아직 그런것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한태혁은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대답을 올렸다.

《허허허, 아직 생각을 못해봤다?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것도 생각해보는것이 필요합니다. 유격대원의 모든 말과 행동은 혁명에 리로운것으로 되여야 합니다. 어쨌든 이 문제에서 동무와 나의 의견은 비슷이 맞아떨어졌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다시한번 한태혁의 눈치를 살펴보시며 웃음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실례를 들어 동무는 지하정치공작같은것은 그닥 대수롭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동무와는 반대로 적들속에 들어가 인민들에게 혁명을 선전하고 광범한 혁명력량을 묶어세우는것을 대단히 중요한 일로 보고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동무와 나 사이에 의견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사령관동지!》

한태혁은 고개를 푹 떨구며 거의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한동무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전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꼭 훌륭한 지하공작원이 되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령관동지의 뜻과 어긋난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사령관동지께서 바라시는 일을 외면할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능숙한 정치공작원이 되기 위해 애를 쓰겠습니다.》

《허허허, 좋은 일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한동무는 아마 마음만 먹으면 정치사업도 잘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사업이란 어디 일정한 장소에 가서만 하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숲속이든, 거리 한복판이든 사람만 있으면 어느때나 정치사업을 하여야 합니다. 아마 한동무가 눈부신 정치사업을 많이 할 기회가 머지 않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분명 무엇인가 앞날을 내다보시며 하시는 말씀이였으나 한태혁은 그것만은 아직 딱히 리해하지 못했다. 흥분한 탓도 있고 다른 편으로는 이 순간에 번쩍하고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를 꼭 말씀드리고싶은 욕망이 앞선때문이기도 하였다.

《사령관동지.》

하고 한태혁은 순진한 눈빛으로 사령관동지를 쳐다보았다. 사령관동지께서 너그러이 웃으시며 고개를 돌리시자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이제사 저도 회의를 오래 하게 되는 까닭을 리해하였습니다. 그들도 모두 저와 같이 생각하겠지요. 모두 제딴에는 사령관동지께 충실하자고 하는데 그렇게 마음먹은대로 안되는것이 아닙니까?》

《허허허, 비슷한 말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사람의 사상이란 힘찬것인 동시에 매우 복잡한것입니다. 사상이 뭉치면 강철보다 더 굳어지지만 자칫하면 팥죽처럼 풀어지기도 하는것입니다. 매 사람의 사상을 강철처럼 단련해낸다는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야기가 오래 끌자 앞서가던 오중흡이네가 자주 멎어서는 눈치가 알렸다.

오백룡이도 안타까운듯 한참씩 혼자 떨어졌다가 따라서기도 하였다.

한번은 부리나케 걸음을 다우쳐 따라오더니 어디 가까이에 큰 짐승이 있는것 같다고 코방울을 흐물거리며 이깨우기도 하였다.

아닌게아니라 바람결에 노린내가 풍겨왔다.

《무엇 같습니까? 호랑이는 아니겠지요?》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저으기 흥미를 느끼며 물으시였다.

《호랑이일수도 있습니다. 강철룡동무가 호랑이자국을 봤다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오늘 호랑이까지 만날수 있다면 이 밤이 더욱 뜻깊게 느껴질것 같은데… 웬걸 호랑이가 나타나겠습니까? 족제비나 여우 같은것이겠지요.》

사령관동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오백룡은 몹시 속이 황황한듯 아무런 대답도 드리지 않고 한태혁을 시켜 뒤를 단단히 경계하도록 한 다음 앞으로 급히 나가 오중흡이에게도 무엇인가 단속을 하였다.

노린내는 근 10리나 따라왔지만 종시 호랑이형체는 보이지 않고 어느새 8련대의 경계초소에서 내비치는 불빛이 숲사이로 얼찐얼찐 나타났다.

동쪽하늘이 희붐해졌을 때 사령관동지께서는 사령부가 자리잡은 낯익은 둔덕우에 오르시였다.

 

13

 

남패자회의가 오래 끌었던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동지의 결론을 특별한 관심속에 기다리고있었다.

회의에 직접 참가한 간부들은 말할것도 없고 일반대원들까지도 누구나 회의장쪽으로 자주 눈길을 돌리게 되였다.

사실 회의자체도 긴장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였지만 회의 바깥의 정세도 긴장될대로 긴장되여서 7련대의 경계진지들에서는 적들이 더는 이 침묵속의 대결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징조들이 이모저모로 나타났다.

적들은 이 며칠사이에 완전 전투태세로 넘어가서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쳐나올 차비였다.

전에 보이지 않던 산포들이 나타나서 포신을 쳐들고있다는 정찰보고도 여러군데서 들어왔다.

한편 장경수는 모리중좌의 선무공작반에서 리경락의 다음 련락을 초조하게 기다리고있는데 신경의 사령부에서 더는 참아내지 못할것 같다고 불안해한다는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왔다.

리경락은 그날 사령관동지께서 만나보신 다음 경위중대병실옆에 그대로 연금되여있었다.

사령관동지의 지시로 박덕산정위가 한번 만나보았을뿐 다른 사람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채 1주일이란 시일이 흘러갔다. 그래서 리경락이도 미칠지경으로 초조해하는 눈치라고 전령병들은 말하였다.

이 모든 움직임들이 직접적으로는 회의에 반영되고 그 여파가 그대로 재봉대에 미쳐왔다. 처음 사령관동지께서 전체 부대 전사들에게 모두 겨울옷을 지어입힐데 대한 명령을 내리실 때는 아득하게만 생각되던 아름찬 일감이였다. 그러나 그사이 모든 재봉대원들이 사령관동지의 높은 뜻을 받들고 밤에 낮을 이어대며 긴장한 전투를 벌린 결과 이제는 큰 덩어리일감을 얼추 죽여놓았다. 아직 여름옷을 입고있는것은 뒤져서 도착한 소부대성원들이나 개별적인 공작조뿐이였다. 그러다나니 경위중대성원들을 내놓고는 동원로력도 다 돌아갔다. 그런데 군수관 조진범은 그 느릿한 성미에도 불구하고 전에없이 일을 다그쳐댔다. 군수관이 그 모양이니 본시가 팩팩한 조직과장이 나타날 때는 더 말할것이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면서 동떠졌던 조직과장의 발걸음이 어제오늘은 아침저녁 두차례씩 들리는것도 성차지 않아 회의 휴식짬에도 달려오군 하였다.

눈치가 빠른 처녀들은 이제 회의가 결속단계에 들어섰다는것, 회의만 끝나면 부대는 또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는것을 제꺽 눈치챘다.

재봉기는 불이 일듯이 돌아가고 재봉대원들의 두팔에는 자개바람이 일었다. 이제는 염색도 재단도 다 끝났기때문에 김정숙동지께서도 옥금이와 함께 재봉기를 돌리시는데 어찌나 세차게 돌려대는지 솜을 두는 장철구같은 로축과 단추구멍을 뚫는 정지성이같은 동원로력들이 산더미같이 쌓이는 일감속에서 쩔쩔매며 돌아갔다.

태혁이는 한줄에 몇감씩 이어져나오는 소매며 등폭을 쭉쭉 잡아뜯어서는 제짝에 맞추어 척척 이어놓는데 북두갈구리같은 손으로 마구 얽어매는것 같지만 정작 돼나오는것을 보면 제법 알뜰하게 감쳐놓았다.

그래도 옷을 받으러 온 리성림은 매번 태혁의 일솜씨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언제나 일손이 굼떠서 쩔쩔매는 정지성이보다 그에게 더 많이 붙어서 미타한 소리를 하였다.

《요즘 가져간것은 더러 의견이 있어요. 소매가 안맞는다는 동무도 있고… 어제 한 동무는 두 소매가 기장이 각각 다르다고 그러는걸 내가 겨우 설복했지요.》

《동무, 그 바늘에 실 좀 꿰여주오.》

태혁은 성림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들은척을 안했다. 사실 겉보기에 손이 지내 커서 바늘을 쥐고 어깨를 맞추어나가는것이 꼭 코끼리가 닭알상자를 다루는것 같지만 본인당자는 제 솜씨가 옥금이보다도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다는 자부심을 가지고있었다.

《소매가 안맞는다는 동무가 있으면 몽땅 데려오오.》

한태혁은 리성림이 꿰여서 내미는 바느실을 받아쥐고 제법 머리밑을 슬슬 긁으며 말하였다.

《제 팔이 짝짝이면 짝짝이겠지 사령부재봉대에서 지어낸 군복소매가 각각이라니 말이 되오?》

《허―》

리성림이 너무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리는바람에 정신없이 일손을 놀리던 재봉대원들이 모두 까르르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태혁이가 재봉대에 나타나자 시도 때도 없이 이런 웃음판이 벌어지군 하였다.

그가 공작을 나갔다 보고 왔다는 소리를 들어보면 어마어마하였다. 7련대 전연에 있는 적들만 해도 만명이 넘는다느니, 그것들이 왜놈들중에서도 그중 독종만 긁어모은것들이라느니, 실전경험도 제일 많은 부대들이라느니, 통화로부터 남패자숲속까지 군대와 후방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한 군용도로가 새로 생겼다느니 하는 태혁의 이야기는 매번 재봉대원들의 표정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그러루한 말끝에는 의례 어떤 왜놈장교가 밤길을 가다가 썩은 고목등걸을 보고 《유격대다!》하고 냅다뛰는바람에 비상소집이 일어나서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유격대에서도 너무 시끄러워 밤새 잠을 못잤다는따위 이야기를 덧붙여가지고 우스개판을 만들어버리군 하였다.

그러나 리성림은 태혁의 그런 성미를 잘 몰랐기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웃음판에 섭쓸리게 되지 않았다.

그가 돌아간 다음 김정숙동지께서 태혁이를 돌아보시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태혁동무는 점점 왜 그래요? 실없는 소리만 하고…》

《내가 뭐랍니까?》

태혁은 시치미를 뻑 따고 능청을 떨었다. 그러나 김정숙동지의 빛나는 눈길이 말없이 바라보자 히죽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친구 별로 희떱게 굴길래 한마디 했지요. 뭐랍니까. 웃는 소린데…》

《그 동무는 신대원이예요. 그 동무들에게 모두 새옷을 지어입히려고 하시는 사령관동지의 뜻을 생각해보세요. 그 동무들에게 조금이라도 섭섭한 생각이 가게 해서 되겠어요?》

태혁은 입을 비죽 내밀고 가만히 앉아 수걱수걱 일손을 다우쳤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시였다.

태혁이가 그렇게 뚜해서 앉아있는것은 그가 자기 잘못을 깊이 뉘우친다는 표정이였다.

《태혁동무.》

잠시 침묵이 흘렀을 때 출입문 가까이 앉아있던 정지성이가 옷무지속에서 얼굴을 쳐들고 엄한 목소리로 불렀다.

태혁은 대답을 못하고 우묵한 눈확속에서 침착하게 바라보는 정지성의 눈을 약간 두려움에 차서 바라보았다. 부대내에서 제일 친한 사이로 소문이 나있지만 식자반 학습강사인 지성은 아무때나 그의 이름을 불러놓고 헐치 않은 질문을 들이대군 하는데 벌써 이런 군중속에서 격식바르게 이름을 부르는것이 심상치를 않다.

태혁의 표정이 긴장되자 철구아주머니며 채옥이는 입을 싸쥐고 고개를 숙였다.

정지성은 워낙 순한 성미인데다 유격대에 들어온지도 3년나마 되여서 좀 여윌사한 몸집과 우묵한 눈확만 제하고 보면 오히려 텁텁한 인상을 자아냈지만 일단 학습문제에 들어서기만 하면 여간 엄격한것이 아니였다.

요즘 회의가 진행되면서부터는 특히 사람들의 이름을 자주 불러대는데 아마 머지 않아 있게 될 사령관동지의 결론을 더 잘 리해시키기 위하여 그로서 남다른 타산을 하고있다는것을 대개는 짐작들 하고있었다.

《오늘 학습준비를 했습니까? 오늘은 경위중대학습을 보러 올 사람들이 많을지 모릅니다.》

아니나다를가 정지성은 조용하나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성림이때문에 궁해진데다 녀성들앞에서 다시 이런 질문을 받고보니 태혁의 립장이 저으기 난감할듯 하였으나 그쯤한 일에 굽어들 태혁이가 아니였다.

《학습준비를 했지요. 내 뭐 특별히 누가 보러 오기때문에 준비를 한건 아니지만 아무러문 한태혁이가 경위중대 망신이야 시키겠소다?》

《아주 좋은 말입니다. 그럼 한가지 물어봅시다.》

한태혁이가 배심이 있다면 정지성에게는 어떤 롱간에도 넘어가지 않는 원칙성이 있다. 김일성동지께서 이끄시는 혁명대오에 들어서기까지 온갖 시국풍조에 부대껴온 그의 피맺힌 운명의 로정이 그런 기질을 길러낸것이다.

《우리 혁명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정지성의 질문은 명확하고 그만큼 엄격하였다.

《그야 장군님께서 다 밝혀주시지 않았습니까?》

《장군님께서 어떻게 밝혀주셨습니까?》

《자, 이거 한태혁이를 아직 작년도 한태혁이로 안다. 그럼 내 한번 말해보라오?》

태혁은 여태 주무르고있던 일감을 한쪽으로 밀어놓더니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별안간 아이들처럼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에서 조선혁명의 동력을 똑똑히 찍어주셨는데 그것은 말이우다. 첫째 로동자, 둘째 농민 그 다음 좀 적극성이 부족하지만 청년학생, 지식인, 소자산계급 아무튼 왜놈 제국주의를 미워하는 사람은 다 될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악질이 아닌 민족자본가나 종교인들도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끌어들일수 있다고 하셨단 말입니다. 그것이 왜 그런고 하니…》

《됐습니다. 아주 잘 대답했습니다. 그럼 청년학생, 지식인, 소자산계급들이 적극성이 부족하다는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예? 그것도 내가 말하랍니까?》

태혁은 냅다엮어대던 기세가 꺾이자 다시 눈을 꺼먹꺼먹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성은 그를 똑바로 쳐다본채 놓아주지 않는다. 태혁이가 좀 급해나서 사위를 돌아보는데 재봉대원들은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면서도 그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있다. 사람이 많지 못하면 우물우물해서 굽때넘길수도 있겠지만 이건 분위기가 지내 엄숙하여 롱으로 굼땔 판이 못되였다.

《그건말이우다.》

하고 태혁은 잠시 갑자르다가 아까보다는 그닥 자신이 없는 투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들이 뭘 그래도 좀 가지고있단 말이우다. 그래서 혁명하는데 결사적이 되지 못한단 말이우다. 지식인이나 청년학생들도 다 돈푼이나 있어서 공부를 했을게니까 아는것은 본때있게 많아도 정 급할 땐 로동자나 농민 같을수야 없지요. 그런데 학습강사동지에게 내가 한가지 물어봐도 좋겠소다?》

정지성은 비로소 빙그레 웃었다. 태혁이가 빠져나갈 구멍수를 용하게 찾아냈다고 보았기때문이였다.

《물어보시오. 동무들이 다 들었지만 태혁동무는 기본적으로 옳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무엇을 물어보자는것입니까?》

지성은 천막안 사람들에게 자기가 태혁의 질문을 받아주는 까닭을 설명하고나서 다시 태혁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거 좀 별난 질문같은데…》

하고 태혁은 뒤더수기를 문지르며 지성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아무 질문이라도 좋습니다. 모를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누구에게나 물어보아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그럼 말하겠소다. 내가 두루 세상을 돌아보니 우리 장군님 말씀대로 확실히 로동자나 농민들은 모두가 시원시원하고 혁명적입니다. 뭐 사람마다 죽지 못해 살아가니 기왕 죽을바엔 한바탕 해보자고 할만도 하지요. 그런데 어떤 패들은 화술이나 마시고 녀편네하고나 해보는 한심한 친구들도 있고 너절하게 지주놈에게 빌붙어가며 사는 농사군도 있더란 말이우다. 뭐 긴말할것 없이 우리 아버지도 혁명 같은것은 바이 모르고 죽었으니까요. 그런데 강사동무는 지식인이지요? 그러면서도 강사동무는 누구보다도 혁명에 적극적이 아닙니까?》

《하하하, 아주 묘한 질문입니다.》

정지성은 한참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그러나 천막안의 다른 사람들은 좀 어색한 웃음을 띠였을뿐 별로 따라 웃는 사람이 없었다. 태혁의 질문이 좀 우스운 질문이기는 해도 어쨌든 그 해명이 궁금했던것이다.

지성은 그런 분위기를 인차 눈치채고 다시 진지한 표정이 되였다.

《나자신에 대한 문제는 내가 뭐 특별히 혁명에 적극성을 발휘한것도 없고 또 지금은 그것을 해명하는것이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우선 이 문제에 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사상을 정확하게 리해하기 위하여 피차 토론해봅시다.》

하고 지성은 잠시 천막안을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바로 그저께 학습에서 배운것처럼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청년학생들과 지식인문제에 대해 그들이 과학과 진리를 탐구하였기때문에 정의감이 강하고 선진사상과 시대발전의 추세에 민감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중 선진분자들은 맑스―레닌주의를 먼저 배워서 로동자, 농민들을 계몽시키고 혁명운동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 나라의 지식인들은 직접 일제의 억압과 차별대우를 받고있기때문에 혁명성이 더 강하다고 장군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그들은 자산계급이나 소자산계급출신이기때문에 태혁동무의 말과 같이 소극적인 측면을 가지게도 되는것입니다. 그럼 일부 선진적인 지식인들보다 혁명에 더 소극적인 어떤 개별적인 로동자나 농민이 있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우선 그들이 아직 혁명에 각성되지 못한 사정과 관련되는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들가운데 극히 부분적인 사람들은 일제와 지주, 자본가들의 장구한 억압과 착취 과정에 일정하게 낡은 사상, 특히 그놈들이 설교하는 굴종사상에 속아넘어가는 사람도 간혹 있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이런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현상이며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을 잘 교양하여 자기의 계급적처지와 힘을 일깨워주기만 하면 그런 사람들도 결국은 혁명에 떨쳐나서게 되는것입니다. 이와 같이 혁명의 동력을 놓고 이야기할 때 로동자 혹은 지식인이라는 말은 어떤 개별적인 사람들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 계급이나 계층의 전반적사람들이 처해있는 사회적인 처지, 경제적인 처지를 종합해서 그 공통적인 성격을 규정하는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어떤 개별적사람들이 특별한 사정때문에 좀 삐여져나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김일성장군님의 규정은 더할나위없이 정확한것입니다. 가령 소나무는 굉장히 큰 나무고 개암나무는 훨씬 작은 나무입니다. 그러나 어떤 소나무는 바위밑에 뿌리를 내려서 잘 자라지 못하고 어떤 개암나무는 기름진 땅에 뿌리를 잘 내려서 소나무보다 더 큰 경우도 있는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소나무가 개암나무보다 큰 나무라는 생각을 버릴수는 없습니다. 알만 합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정비서동무는 굉장히 큰 개암나무인셈이우다.》

한동안 지성의 설명을 듣느라고 잔잔해있던 천막안에 다시 까르르하고 웃음이 터졌다. 지성이도 따라웃었다.

그러나 그는 인차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나는 결코 큰 개암나무가 아닙니다. 나에게는 아직도 뭘 가지고있는것이 지내 많습니다. 허접스레한 찌꺼기가 많단 말입니다. 우리모두가 혁명앞에 닥친 시련을 두고 생각할 때 나는 때때로 나 개인의 생각에 잠겨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걸 뿌리뽑아던져야 하겠는데… 자꾸 발목에 감겨들지요. 허허허, 인테리가 혁명에서 소극적인 까닭은 이런데도 있습니다. 알만 합니까?》

지성은 롱조로 말끝을 맺었으나 무엇때문인지 천막안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얼마후 정지성은 자기가 신문에서 발취한 정세자료를 가지고 사령부로 올라갔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 태혁이가 김정숙동지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저 정지성동무한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왜 무슨 말을 해요?》

《아닙니다. 전에없이 생각이 깊어진것 같아서 그러지요. 이제 한 말도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금숙동무가 말하기는 무슨 편지가 왔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예요.》

하고 김정숙동지께서는 천천히 일감을 누벼나가며 말씀하셨다.

《사령관동지께 무산에 사는 한 로인이 편지를 올렸는데 그 로인의 손녀딸이 놈들의 탄압때문에 집을 뛰쳐났다는군요. 물론 그 동네 조직도 다 마사지고… 그런데 알고보니 정지성동무가 유격대에 입대하기전에 그 동네에서 지하사업을 했대요. 그때부터 그 로인의 손녀딸이라는 처녀와 남다른 사이였던 모양이예요. 로인의 편지를 보면 아마 그 동네에 아주 못된 주구놈이 들어앉아있는 모양 같아요. 장군님께 그놈을 처단해달라는 청을 드렸어요.》

태혁은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일손도 멈추고말았다. 한참후에야 겨우 생각을 수습한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모르겠는데요. 그게 글쎄 보통문제는 아니라 해도 그만한 일때문에 정동무가 그렇게 깊이 생각할거야 없지 않습니까? 허접스레한걸 많이 가지고있다는게 그게구만.》

《정말 태혁동무는 태평이라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답답한중에도 우스운 생각이 드시여 재봉기손잡이를 돌리다 말고 손등으로 입을 가리시였다.

《그럼 태혁동무는 금숙동무가 훌 없어져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예요? 그리고 어제까지 자기가 공작대상으로 삼고있던 놈이 적의 주구로 변해서 조직을 파괴하고 혁명동지를 밀고한다 해도 깊이 생각할게 없겠어요?》

《그야 물론…》

한태혁은 슬쩍 금숙이쪽을 돌아보았다. 한사람 건너 저쪽에서 열심히 재봉기를 돌리고있는 금숙이는 이마전으로 흘러내리는 굽슬굽슬한 머리를 쓸어올릴뿐 이쪽 이야기에는 통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손등에서 새끼손가락이 멋을 부려 빳빳이 일어선것을 보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나같으면 더 하겠지요.》

그래놓고 다시 곁눈질을 해보니 금숙이는 가볍게 코방귀를 뀌며 얼굴을 돌린다.

태혁은 히쭉 한번 웃고나서 이번에는 신중한 표정으로 수군수군 물었다.

《그 녀성동무가 조직원인가요?》

《그렇대요. 지성동무가 교양해서 조직에 인입했다니까요. 그런데 집안은 봉건가정이래요. 할아버지가 한때 천도교를 믿은적도 있대요.》

《집안이야 뭐랍니까? 게다가 조직원이라는데 무슨 일이 있단 말입니까?》

《그 조직이 모두 피투성이 되지 않았어요? 하강구아래로는 조직들이 어떻게 되였는지 형편조차 알길이 없어요. 그런데다 지성동무말을 들어보면 그 진옥동무, 그 동무 이름이 진옥이래요. 류진옥이라고… 그런데 진옥동무는 그런 시련속에서 꿋꿋이 견디여낼만 한 녀자같지 않다는거예요. 들국화 같다나요. 난 그런 사이가 아니라도 적구에 남겨두고온 동무들이 걱정스러워요. 믿음이 가면서도 한편 그 모진 시련을 어떻게 견디여낼가 하고말이예요. 조직은 없고 적들의 악선전만 들려오는속에서 가냘픈 처녀가 홀로 싸워간다는게 말과 같이 쉽지는 않아요.》

《흠― 듣고보니 심중하군. 그러고보니 우리 정비서동무 속이 깊기는 깊소다.》

태혁은 새삼스럽게 지성이가 사라진 천막 바깥쪽을 돌아보며 무겁게 중얼거렸다.

14

 

새하얀 들국화가 산과 들에 다투어 피여난 어느 가을날, 야학에서 나란히 돌아오던 정지성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달빛아래 은은하게 떠오르는 그 꽃과 자기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로 비슷한데가 있다고 말했었다.

진옥이가 옥암동 집을 떠난것은 들국화가 한창 피여나기 시작할 때였다. 그러나 강을 건너 소덕수에서 열흘가까이 지체한 다음 다시 백바위골 5촌아저씨네 집을 바라고 길에 나섰을 때는 찬바람이 썰고 다니는 황량한 들판에서 뭇꽃들이 이미 시들어가고있었다.

아무데서도 조직의 선을 찾을수 없었다. 간데족족 피비린 백색테로가 미쳐날뛰고있었다. 자기가 옥암동을 떠났듯이 기왕에 다소라도 련계가 있었던 사람들은 거의 잡혀갔거나 몸을 피하고 없었다. 만일 리덕선이네 집과 혼사문제까지 나서지 않았더면 집을 뛰쳐날 결심까지 못할번도 했던 자기 처지를 생각할 때 그곳 조직들에서 겪을 시련과 참변은 진옥의 가슴에 아픈 상처와 함께 아직도 자기 개인의 감정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있는 자신에 대해 커다란 뉘우침을 느끼게 했다.

쓸쓸한 산길을 혼자 걸으며 어디선가 간고한 혁명의 길을 걷고있을 지성을 생각했다. 그가 자기를 들국화에 비긴것은 저렇듯 바람부는 산기슭에 의지가지없이 떨고있는 가련한 모습과 비슷해서였을가… 때마침 마방골어방의 그 산기슭에는 잎끝에 황이 들기 시작한 들국화가 새하얗게 피여서 찬바람에 떨고있었다.

다리도 아팠다.

들국화덤불속에 앉아 지성이와 함께 야학을 꾸리고 청년조직을 내오고 하던 즐거운 나날들을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꽃덤불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올줄이야 어떻게 알았으랴. 머리끝이 쭈뼛해진 진옥은 소스라쳐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세발자국도 떼지 못해서 멎어섰다. 《물, 물…》하는 그 가래끓는 소리는 분명 구원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조심조심 풀덤불을 헤치고보니 온몸이 피자박이 되다싶이한 중년사나이가 쓰러져있었다. 자기 속옷을 찢어서 상처를 처매줄 때 진옥은 그 사람이 총에 맞았다는것을 알았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때 벌써 생명의 위험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죽어가는 혁명가를 그대로 둘수는 없었다. 대충 피를 훔쳐낸 다음 가까스로 등에 업고 일어서니 그 사람은 어떻게 정신이 들었는지 등을 떠밀며 땅바닥으로 미끄러져내렸다.

《고맙소, 구룡리 허정학이네 집에… 굴뚝밑에 문건이 있다고… 부탁하오…》

그것이 아마 그 사람의 유언이였는지 모른다.

다시 정신을 잃은 그를 업고 주막까지 내려오니 진옥의 몸은 한증을 하고난 사람처럼 땀에 떠있었다. 주막에서는 그를 아버지라고 말하고 꿀 한사발과 미음을 구해먹였으며 다시 상처를 처맸다. 깜빡거리는 주막집의 고콜불아래 시간을 다투는 낯모르는 사람의 생명을 지키며 밤을 새우는데 난데없이 개짖는 소리가 나더니 형사놈들이 달려들었다.

《흥, 내가 벌써 15도구에서부터 뒤를 따르고있었다는것은 몰랐을테지? 다 죽어가는 송장을 잡지 못해 그냥 둔줄 알아? 바로 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있었단 말야. 바로 대!》

딱 바라진 어깨우에 목을 아예 생략해버리고 설구운 벽돌장같은 상판만 올려놓은듯 한 그 형사놈은 13도구경찰서 취조실에서 마주 앉자마자 이런 말을 했었다.

진옥은 모든것을 다 숨김없이 말하였다. 그 사람의 상처가 보통 상처가 아니라는것을 눈치챘으나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버리고 갈수가 없었다는것도 감추지 않았다. 단지 자기가 길을 떠나 불과 10리도 못되는 마방골 산기슭에서 쉬게 된것이 시들어가는 들국화때문이라는것만은 말할수 없었다. 그때문에 그 벽돌장 같은 놈은 미리 계획된 련락이라고 트집을 잡았다. 그 다음부터 진옥은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철필대를 손가락짬에 끼우고 비틀었으며 혈관이 다 들여다뵐것 같은 여린 볼편에 구렁이가 감기도록 따귀를 후려쳤다. 철필촉으로 손톱밑을 쑤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옥의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가 말할수 있는것이 있다면 구룡리 허정학이네 집 굴뚝밑에 문건이 있다는 말뿐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목숨과 같은것이였다. 아니 그 사람에게는 목숨보다도 더 귀중한것이였다. 그날 같이 묶이여온 그 사람은 저 앞 복도에서 갈라져갔는데 여직 소식을 모른다. 이 벽돌장같은 인백정들의 손아귀아래서 그 생명이 얼마나 부지되겠는지…

진옥은 제아무리 원쑤들이 악을 쓰며 날치여도 자기를 그렇게 오래 잡아둘 건덕지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옥암동에 조회를 해봐도 그래 그리 멀지 않은 백바위골 아저씨에게 알아봐도 그래 그리 나쁜 회답이 올 까닭은 없었다. 그런데 근 한달이나 끌었다.

오늘아침에야 벽돌장같은 형사놈은 전에없이 삽삽한 어조로 말하는것이였다.

《죄가 없어서 내놓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돼. 동정심이라는것도 아무데서나 보이는게 아니란 말야. 백바위골에 가서 인차 경찰에 신고하고 매번 관할구역을 떠날 때는 사유를 알리고 떠나야 해.》

진옥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길뿐 고문을 당할 때나 취조를 당할 때와 꼭같이 입을 봉하고있었다. 첫날 말을 들어보았을뿐 내내 진옥의 침묵에 습관이 된 형사놈도 거기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잠시 담배를 피우며 앉아있던 그놈은 불쑥 무슨 생각이 났던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저께 허정학이는 죽었어. 네가 꿀물이랑 먹인것보다 제국경찰은 몇배나 더 값비싼 약을 써주었건만 종시 죽고말았지. 그래서 너도 나가게 된거야. 그러니 사람이 사는것보다 죽는편이 더 고마울 때도 있다는거야. 하하하.》

진옥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종시 최후를 마쳤구나. 하기는 그날 그 산기슭에서 이미 숨이 간간해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달가까이나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냈을것인가. 이 백정같은 놈들이 그 사람의 입에서 비밀을 뽑아내자고 무슨 짓인들 안했겠는가.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놈들을 기쁘게 해줄 말을 한마디라도 했을수가 없다.

그 사람의 굳은 절개는 까닭없이 오래 끈 자기의 류치기간과 이 뜻밖의 석방이 잘 말해주고있다.

구룡리 허정학― 아는것이란 이것밖에 없는 혁명동지, 그 동지의 보지도 못한 숭고한 최후를 머리속에 그리며 진옥은 속으로 눈물지었다. 그리고 들국화 피여 흐트러진 그 산기슭에 처량하게 앉아있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꾸짖었다.

정지성은 자기가 너무나 가냘파보여서 들국화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부터 진옥은 뭇꽃이 다 시들어진 찬바람속에서도 서리를 맞아 오히려 아름답게 피여나는 들국화처럼 억센 인간이 되리라 마음다지는것이였다.

낮에도 알전등이 빨갛게 매달려있는 컴컴한 복도에 나서자 형사놈의 말투는 더욱 은근해졌다.

《뭐 나삐 생각지 말라구. 우리도 직책상 불가피한 일이니까. 그대신 진옥씨도 조심해야겠어. 고등과까지 졸업했으면 인테린데 이런 초비상시국에 국민의 본분을 지킬줄도 알아야지.》

이놈이 갑자기 이렇게 친절해진것을 보면 그 사람이 죽은때문만 아닌것 같다.

무산에 조회를 해봤는가? 그렇다면 군청에 있는 리덕선의 아들놈이 자기와 혼담이 벌어지고있는 녀자니까 놓아달라고 대답했을수도 있다.

혹은 백바위골아저씨에게 조회가 갔을수도 있다. 아저씨는 안면이 넓으니 그길로 무슨 수를 썼을는지 모른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진옥의 마음은 사람 죽어가는 아우성소리가 그치지 않는 이 푸주간같은곳을 벗어난다는것이 특별히 기쁘게도 생각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 끔찍한 울안에서 이런 인백정같은 동물들과 날마다 눈싸움을 계속하고싶지도 않았다.

《왜 벌써 내놓나?》

어떤자가 뒤에서 분주히 다가오더니 앞질러나가면서 말했다. 그놈은 여치처럼 길다란 다리를 가진 키꺽다리였다.

《어, 뭐 다 해명됐어. 그저 그러루한 〈동지〉야.》

《그래? 미인을 놓아주어서 섭섭하겠는걸.》

그렇게 분주히 걸어가던 키꺽다리는 일부러 돌아서서 진옥의 높이 쳐든 하얀 얼굴을 추잡한 눈길로 뜯어보았다.

《흥, 별수 있나, 계장님의 엄명인데… 그래 어디로 이리 분주히 가나?》

《구룡리에.》

《알만하이, 신갈파의 최형사신세가 되지 말게.》

《피차일반이지.》

여치다리는 총총히 사라지고 목대없는 놈은 현관앞에서 자기 방으로 꺾어지면서 다시 진옥이더러 한마디 했다.

《백바위골에 꼭 가겠어?》

《…》

《흥, 제꺽제꺽 시집이나 가서 아들딸 낳고 살게지. 그래서 내 계집애들 공부시키는 자식들 심보를 모르겠다니까.》

그리고는 휙하고 복도 굽인돌이를 꺾어 돌아갔다.

진옥은 똑같은 걸음, 똑같은 자세로 현관을 지나 보초소를 벗어났다.

바깥에 나서니 해빛이 눈에 부셔 머리가 휘 내둘리였으나 찢어진 치마폭을 걷어잡고 꼿꼿이 행길까지 걸어나왔다.

구룡리는 큰 길을 벗어나서도 15리나 되였다. 비석골나루를 건너 간신히 한 고개를 넘으니 힘이 진하여 저절로 무릎이 절컥하고 접히였다. 한달가까운 류치장살이에 옷주제도 말이 아니거니와 몸도 몹시 상했다.

부서져나가는듯 한 다리를 주무르며 산기슭을 바라보니 어디에도 들국화는 보이지 않고 언제 내렸는지 모를 눈이 희슥희슥 깔려있었다.

덜컹덜컹하며 소달구지가 고개를 올라온다. 나루에서 5리나마 걸었어도 행인 하나 만날수 없는 쓸쓸한 산길이였다. 달구지는 13도구거리에서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오던 여윈 암소가 끄는 달구지였다. 갈비뼈가 알른거리는 소를 아껴선지 짐이라고 이불 한채 얹혀있을뿐인데 더벅머리 달구지군은 물론 옆에서 따라걷는 환갑 넘어보이는 할머니도 탈 궁리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사기짐이나 실은듯이 무척도 천천히 고개를 오르고있다.

인적없는 쓸쓸한 산길에 여윈 암소가 끄는 그 달구지는 어쩐지 진옥의 가슴에 까닭없는 슬픔을 몰아왔다. 그는 삐걱거리는 달구지의 바퀴살이 눈앞에서 커다랗게 확대되여 천천히 돌아가는것을 지켜보았다. 황토진흙이 게발리고 군데군데 파리찌같은 좀이 먹은 그 바퀴살이 몇고패 구을더니 녹아없어지듯이 뿌옇게 흐리고말았다.

삐걱삐걱 덜커덩― 달구지는 여전히 고개를 오르고있다. 진옥은 불시에 흐려드는 눈을 남에게 보이고싶지 않아 얼굴을 돌렸다.

《새 애기는 어디로 가나?》

달구지바퀴 구으는 소리는 저만치 멀어졌는데 바로 머리우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는 하얗게 세였어도 허리만은 꿋꿋한 할머니가 이윽히 내려다보고있었다. 진옥은 어쩐지 낯선 길손이라기보다 이웃집 어려운 어른을 만난것 같아 허리를 일으키며 조용히 대답했다.

《구룡리에 갑니다.》

《구룡리에? 거기에 아는 집이라도 있나?》

《그저 좀… 아직도 멉니까?》

《한 댓마장 되지. 새 애기도 저 경찰에서 나오지?》

로인은 여전히 조용한 눈길로 찬찬히 바라보며 물었다. 진옥은 선뜻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어물거리며 눈길을 피했다.

할머니는 알만 하다는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떡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 임자 나오는것을 다 봤네. 그 나이에 경찰에 드나들자니 오죽하겠나. 헌데 구룡리에는 누구네 집을 찾아가나? 내가 구룡리에 사네.》

진옥은 할머니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자세히 뜯어보았다. 거칠은 자연과 고역에 탄 얼굴빛은 질그릇처럼 고동색이 도는데 그우에 세월이 깊숙한 이랑을 수없이 파헤쳐놓았다. 그러나 늙고 여윈 그 모습 어딘가에 진실하고 억센것을 간직하고있는 로인이였다.

《저 구룡리에 허정학이라고… 혹 아시는지요?》

진옥은 특별히 감출것도 없다고 생각되여 스스럼없이 터놓고 물었다.

《허정학? 그사람을 어떻게 아나?》

로인의 어조는 갑자기 엄격해졌다.

달구지는 점점 멀어져간다. 진옥은 걸음을 옮겨놓으며 대답했다.

《저도 잘 몰라요. 그저 피뜩 만나 부탁을 받았길래…》

로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걸음을 옮겨놓았다. 달구지는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뿌연 하늘이 한옆으로 펼쳐지고 산굽이에서 쌀쌀한 눈바람이 휘몰려왔다. 할머니는 흰 머리를 날리며 성큼성큼 고개마루에 올라서더니 진옥을 돌아보고 심상한 어조로 말했다.

《정학이 그 사람은 죽었네.》

《저도 알고있어요. 경찰서에서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래? 그럼 새 애기가 혹시 우리 정학이를 구완해주었다는 그 새 애기가 아닌가?》

로인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다급히 물었다. 우리 정학이라는 말에 진옥이도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가 마방골 뒤산에서 그분을 만났댔어요. 그럼 할머님께서?》

《그렇네. 내가 정학이 그사람의 에밀세. 저 원쑤놈들이 우리 아이를 그렇게 죽여놓고 찾아가라길래 내가 오늘 찾아오는길일세. 저기 달구지에 실려가는것이 바로 그 사람일세.》

《할머니!》

진옥은 무엇때문엔지 여태 가슴에 하나가득 괴여있으면서도 터칠기회가 없었던 그 눈물을 왈칵 쏟아놓으며 로인의 앙상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할머니는 진옥의 물결치는 등을 어루만지며 잠시 묵묵히 서서 뿌연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신을 실었다는 달구지는 고개를 오를 때나 같은 속도로 천천히 산굽이를 돌아 내려가고있다. 삐걱―삐걱― 구슬픈 바퀴소리는 적막한 산길에 흐느낌처럼 긴 여운을 끌었다.

《이러지 말게. 로상에서 이러면 못쓰네.》

로인은 아까보다 더욱 석쉼하고 엄해진 목소리로 이렇게 타이르더니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울고싶은 심정으로 말하면 에미된 내 마음인들 편할수야 없지. 허지만 기왕 그렇게 된걸 시신우에 눈물을 쏟아준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나. 아예 울음을 그치게. 이 세상은 울어서는 못사는 세상이야.》

할머니는 그냥 눈발을 머금은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조용 말을 이어나갔다. 로인의 발걸음은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빨라지기도 하고 떠지기도 하였다. 그것이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평온할수 없는 마음을 드러내고있을뿐이였다.

산굽이를 돌아섰을 때 할머니는 갑자기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그 애가 임자한테 무슨 문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던가? 임자가 받았다는 부탁이 무언가?》

《문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제가 바로 그때문에…》

진옥은 눈물에 젖어드는 긴 살눈섭을 슴뻑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어서 말하게. 내가 구룡리의 부녀회원이네. 지금 저놈들이 또 우리 동네를 뒤지러 떠났다는 소식이 왔네. 그 문건이 어디 있다던가?》

《굴뚝밑이라고 했어요.》

《굴뚝밑? 알만하네. 어서 가야겠네. 그 문건이 김일성장군님께 올리는 여러 조직의 보고라네.》

그러면서 할머니는 걸음을 다우치더니 더벅머리 달구지군에게 소리쳤다.

《이사람 창수, 어서 길을 다우치게.》

진옥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달구지와 로인을 바라보았다. 달구지는 시신을 싣고 고개길을 급하게 내려가고있다. 할머니는 한손으로 달구지채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그 이불짐같이 보이는 아들의 시신을 조심스레 눌러주며 따라간다. 할머니는 몇십년을 잠자는 아들의 이불깃을 저렇게 조용히 여며주며 험한 세상을 살아왔을것인가. 오늘 아들은 자라 그 역시 살쩍에 흰 머리가 섞이기 시작했고 혁명의 한길을 걷다가 어머니보다 앞서 영원의 잠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래도 늙은 어머니는 아들이 들추는 달구지때문에 잠을 깰가봐 두려워하듯이 저렇게도 조심스레 시신을 다독거리고있는것일가?

그런데 그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 한방울 없다.

아들이 남기고 간 혁명사업을 잇기 위하여 로부녀회원은 아들의 시신을 싣고 흰 머리를 날리며 억세게 걸어가고있었다.

진옥은 눈물을 거두었다.

이젠 구룡리에 꼭 들려가야 할 일은 끝난셈이다. 그러나 그도 뒤질세라 달구지를 따라잡았다.

단 하루밤이라도 좋을것 같았다. 끝까지 혁명절개를 지킨 동지와 그 동지의 훌륭한 어머니를 위하여 그들의 아프고 쓰릴 가슴을 위로하며 죽은 사람에게는 투쟁의 맹세를, 산 사람에게는 이 백색테로의 칼부림을 맞받아 조직을 찾고 싸움의 길을 찾아갈 방도를 다지고 또 묻고싶었다.

15

 

어제밤부터 터진 무서운 추위에다 사나운 눈바람까지 덮쳐들어 맹수의 울부짖음처럼 밀림을 울리고있었다.

그러나 천막안은 물을 뿌린듯 조용하였다.

대원들의 생활조직때문에 좀 늦어진 박덕산이가 천막자락을 들치고 들어가 조직과장이 내준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는 회의장안의 엄숙한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다가 오히려 걸상을 넘어뜨릴번 하였다. 그래도 회의참가자들은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태풍을 예고하는듯 한 느낌이였다.

그러나 실상 이 숨막히는듯 한 분위기속에서 일어서신 김일성동지의 결론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너무나 조용하신 어조로 시작되였다.

《내 보기에 이제는 많은 문제들이 명백해진듯 한데.》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천막안을 둘러보시였다.

각 부대의 지휘관, 정치일군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그이의 말씀을 받아적기 시작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앞으로 미진한 문제들이 또 생각나면 따로 들어보기로 하고 기본회의는 이만 끝내자는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딴 의견들이 없겠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 다시 좌중을 둘러보셨으나 아무도 고개를 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것을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토론과정에 여러 동무들이 말했지만 사실 지난 1년동안 우리가 거둔 성과가 적은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앞으로 전진해야겠고 또 우리앞에 닥친 정세가 매우 긴박한 관계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결함들을 많이 내놓고 비판했지만 이것은 우리가 해놓은 일이 적다거나 우리 혁명을 전진시키는데서 아무런 역할을 못하였다는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지난 1년동안 우리는 참으로 력사에 자랑할만 한 고귀한 기여를 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엄연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김일성동지의 결론은 허두에 벌써 사람들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잔뜩 긴장돼서 연필을 달리던 지휘관, 정치일군들이 하나, 둘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숨가쁘도록 긴장된 분위기속에서 장군님의 연설을 듣기 시작한것이 사실이였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여전히 우등불가에서 말씀하실 때나 나란히 행군길을 걸으면서 담화를 나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그런 어조로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이것은 벌써 회의참가자들에게 신심과 활기를 주었고 제기된 문제를 제머리로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난해 7월이래 각 부대들이 이룩한 중요전과들을 개괄하시면서 말씀하시였다.

《일부 부대들과 개별적전투원들의 투쟁성과와 오유에 대한 문제도 우리는 이번 회의의 정신우에 똑바로 서서 평가해야 합니다. 〈열하원정로선〉의 좌경모험주의적본질에 대해서는 이미 옳게 분석이 되였지만 이 그릇된 〈로선〉에 의해 희생된 개별적 부대나 전투원들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례를 들어 어떤 동지들은 유격전술의 기본원칙에 모순되게 평야지대로 진출하였으며 적의 강화된 요새를 향하여 돌격해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이 무모한 행동이며 그러한 행동을 강요한 〈로선〉이 결코 혁명적인것이 아니라 정세판단에서의 주관주의와 소부르죠아적조급성의 산물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혁명의 원리를 심오하게 학습하지 않을 때 주관적으로 아무리 혁명에 충실하려 해도 오히려 오유를 범하게 될수도 있다는 심각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동시에 그릇된 〈로선〉과 그에 의해 희생된 동지들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군마조차 쓰러지는 험한 길을 내달려갈 때 그들의 가슴에는 혁명에 충성다하려는 붉은 한마음이 깨끗이 간직되여있었던것입니다.

동무들! 비록 그들이 그릇된 로선과 그릇된 전술의 희생이 되였다하더라도 그들은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여 적의 한 우두머리를 쏘아눕힌 사람에 대해 수많은 노래와 글을 쓴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조국과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한두해도 아니고 10여년을 이 밀림속에서 싸우다 목숨까지도 바치며 장렬히 전사한 혁명전우들을 어찌 잊을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들의 공적여하를 불문하고 그들의 혁명정신은 우리와 함께 전세계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그날까지 우리의 혁명대오에 언제나 함께 서서 나가고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렁찬 박수가 터져올랐다. 어느새 회의참가자들의 눈시울은 축축히 젖어서 불깃해졌다. 김일성동지의 말씀에 저마다 무엇인가 열렬히 호응하고싶어하는 표정들이였다. 회의 첫무렵에 주영찬중대의 전투행동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들이대던 동무들도 눈물이 그렁해서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쳐댔다.

주영찬중대가 용감하게 잘 싸웠으며 누구보다도 숭고한 희생정신을 발휘했다는것을 한 부대에서 싸운 그들이 모르겠는가. 그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원칙》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지 않을수 없었던 그들의 가슴이야말로 피눈물에 젖었었다.

이제 혁명의 위대한 수령님께서 교조와 주관의 껍데기를 한칼에 베여던지시고 그속에서 질식할번 했던 진실을 만사람앞에 드러내시였다.

그리고 그 껍데기에 겹겹이 휘감기여 육체적희생우에 정치적생명마저 희생될번 했던 혁명전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구원해주시였다.

김일성동지의 목소리는 전에없이 높지는 않았지만 그이께서 밝히시는 위대한 진리를 담기에는 이 천막안의 회의장이 너무나 좁게 느껴졌으며 이 순간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안겨온 그이의 거인적형상을 담기에는 어쩐지 이 세계자체가 너무나 좁게 느껴지는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말씀을 끊으시고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리셨다가 더한층 웅글진 목소리로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동무들, 우리는 여러날에 걸치는 회의과정에 지나간 일들은 비교적 상세히 론의하였지만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업에 대해서는 아직도 언급이 덜 된 문제들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여기서 명백히 해야 할 문제는 우리앞에 닥친 정세가 류례없이 간고하다는 사실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미 보고에서 언급하신 국제, 국내 정세의 엄혹성을 다시한번 개괄하신 다음 혁명이 생사존망의 갈림길에 놓인 이때 오직 하나 조선혁명의 기치를 굴함없이 추켜들고나가는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있을뿐이라고 하시면서 그앞에 가로놓인 당면한 군사정치정세를 분석하시였다. 이어 그이께서는 적의 대무력에 의한 포위, 혁명조직의 전면적파괴, 인민들과의 련계의 두절, 여기에다 례년에 없는 사나운 추위까지 겹친 엄혹한 시련과 난관을 사실그대로 지적하시고나서 아군의 실태에 대해 언급하시였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혁명무력은 그 창건초기에 비해서는 무장이나 수에 있어서 그리고 개별적전사들의 정치군사적준비상태에서 비할바없이 장성강화되였으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는 적들과의 단위당 화력대비에 있어서도 몇곱절 우월합니다. 실례로 적들은 병사 50명당 기관총이 한문밖에 돌아가지 않지만 우리는 10명당 하나이상의 기관총을 가지고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들과의 력량대비에서 비할수 없이 불리한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출로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이 겨울에 우리 혁명을 어떻게 고수하고 전진시켜야 하며 그것을 담당수행할 힘은 어디에 있는가?

동무들!

실로 우리앞에 닥친 문제는 바로 이것이며 이 문제인즉 다름아닌 우리 조국의 운명을 판가리하고 우리 민족의 반만년력사를 끝장내느냐 륭성번영의 새 시대로 이끌어가느냐 하는 문제인것입니다.》

김일성동지의 말씀이 끊어지자 숨을 쉬는것 같지 않게 긴장되여있던 회의참가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단김이 새여나왔다. 너무 답답하여 목깃을 터놓는 사람도 있고 입술을 앙다물고 보이지 않는 천막밖 밀림을 쏘아보는 사람도 있다. 박덕산은 아까 혁명앞에 닥친 난관에 대한 그이의 말씀을 적다가 흥분한 나머지 부러뜨린 연필을 어떻게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옆에 앉은 조직과장의 연필을 말없이 빼앗아서는 놓친 부분을 숨을 씩씩거리며 써나갔다.

할일없이 연필을 빼앗긴 조직과장은 대신 받아쥔 심이 뚝 부러진 연필을 한심하게 들여다보고있는데 매사에 세심한 오중흡이 안주머니에서 알맞춤하게 깎은 짤막한 연필꽁다리 하나를 내주어서 심이 부러진것을 덕산의 학습장우에 척 가로놓아주었다.

덕산은 걸거친다는듯이 연필을 확 밀어던져버렸다.

엄광호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으나 몹시 담배를 피우고싶은듯 몇번이고 쌈지를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군 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난관이 너무나 엄혹하기때문에 일부 동무들가운데는 본의아니게도 적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아군의 힘을 과소평가하면서 지금은 혁명이 퇴조기에 들어간만큼 이해 겨울의 우리 전략을 단순히 력량을 보존하고 시련을 모면해나가자는 방향으로 세워야 한다는 동무들도 있다고 하시면서 이것은 중일전쟁의 발발을 대사변의 도래로 보고 적이 집결된 도시와 평야지대로 총공격을 개시한 《열하원정로선》의 뒤면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속하시였다.

《우리가 주저앉으면 혁명은 아주 죽어버릴것이며 조선은 영영 망하고말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서 또다시 조국으로 나가야 하며 암담한 조선의 하늘에 혁명의 불길을 지펴올려야 합니다.

우리는 지하깊이 들어간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자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주며 그들을 조직에 묶어세우기 위하여 활발한 정치공작을 진행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혁명은 조선인민혁명군의 눈부신 군사정치활동을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히 요구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들이 우리를 대부대로써 격파하려고 시도하는 조건에서 우리 역시 대부대로써 이를 맞받아쳐야 하며 무장투쟁을 더욱 광활한 지대에로 확대발전시켜야 합니다.

수십만의 적들이 중중첩첩한 포위를 늘이고있는 조건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동무들! 나는 이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동지의 다음 말씀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세차게 설레이던 고깔불이 천천히 너울거리였다.

밀림의 바람소리는 잠시 잦아드는듯 하더니 숨을 좀 돌리자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계속하여 일제는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것을 못구하도록 하고 4면8방에서 포위를 하여 조이면 어쩔수 없이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고 종당에는 괴멸되고말것으로 타산하고있다고 하시면서 이러한 타산은 새삼스러운것이 아니라고 실례를 들어 지적하시였다.

《우리가 10년전에 항일무장투쟁의 첫 무장을 원쑤들에게서 빼앗아낼 때 그 력량대비는 오늘보다 더욱 불리했지만 일제는 우리를 굶겨죽이고 얼궈죽이지 못했을뿐아니라 그 악착한 〈토벌〉만행속에서 유격대는 오히려 장성강화되여 오늘은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일제의 숨통을 디디고 선 거대한 력량으로 자라났습니다.》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라자구골안에서 적의 중중첩첩한 포위를 뚫고나오던 1932년의 겨울과 소왕청방어전투의 경험들을 언급하시고나서 힘찬 목소리로 계속하시였다.

《그후에도 이와 같은 시련은 몇십 몇백번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조선혁명은 어떻게 되였습니까?

조선혁명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날을 따라 더욱 큰 힘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써 그 난관과 시련들을 이겨냈습니까?

그 어느때나 우리는 적들보다 무장이나 병력에 있어서 불리한 처지에 있었기때문에 군사적우세로써 적들을 격파한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 어느때나 적들보다 우세하고 그 어느때나 우리에게 승리만을 담보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이며 조국의 자유와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모든것을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숭고한 애국주의정신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을 창조할수 있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기적을 낳을수 있었습니다.

개처럼 사느니 차라리 사람답게 죽기를 원하는 숭고한 혁명사상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의 유격대원들은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세끼 배불리 먹고 털옷을 뜨뜻이 껴입은 적들이 극복하지 못하는 눈보라속의 강행군을 보장할수 있었고 수천명의 적을 한두사람의 지혜로써 소멸해치우는 대담하고 통쾌한 전투를 벌릴수 있었습니다.

동무들, 오늘 우리에게 그러한 힘, 그러한 혁명정신이 없단 말입니까?

그러한 힘, 그러한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마다에 용솟음치고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앞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숨통을 면바로 겨누고 쳐들어갈 혁명의 뚜렷한 진로가 있습니다.

자기 힘에 눈뜨고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자유로운 생활을 체험한 인민의 힘, 혁명가의 힘은 무적입니다.

나는 이러한 힘이 우리에게 있기때문에 적의 강화된 포위를 능히 짓부시고 광활한 지역에 유격투쟁을 확대발전시킬수 있으며 또다시 국내에 진출하여 조국인민들의 가슴에 혁명의 불씨를 심어줄수 있다고 확신하는것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연설의 마감부분에서 유격투쟁을 벌릴 중요지역들과 전체 부대들을 세개의 방면군으로 편성하여 이해 겨울의 전략적과업을 수행할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시였고 몇가지 실무적인 문제들과 조직적대책에 대해서 언급하시였다.

오후 회의에서는 김일성동지께서 제기하신 과업들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직사업이 벌어졌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남만일대에서 활동하게 된 제1방면군의 력량을 보충해주기 위하여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시였다. 즉 최춘국의 경위련대를 송두리채 제1방면군에 배속시켜주시였던것이다.

동만일대로 진출하게 된 제3방면군에도 끌끌한 련대들과 명사수들의 집단을 아낌없이 떼주시였다.

김일성동지자신께서는 나머지 부대들로써 제2방면군을 편성하시고 그중 치렬한 격전이 예견되는 백두산지구로 진출하시려는것이였다.

개별적인 전사들과 부서들, 무기들, 피복, 식량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처리문제가 토의되였다.

후방물자들의 태반은 친솔부대에서 가지고있는것이였는데 그것들도 모두 골고루 헤쳐 될수록 다른 부대에 많이 돌아가게 분배하시였고 로약자와 신입대원들, 녀성대원들을 친솔부대의 끌끌한 대원들과 바꾸시였다.

정 심한 부상자들과 환자들은 엄광호의 인솔하에 후방밀영으로 들여보내시였다. 회의과정에 엄광호의 발언을 몇번 들으신 그이께서는 교조주의의 때가 많이 오른 이 사람이 그 어느때보다 창조적군사정치활동을 요구하는 이번 동기작전의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우리라는것을 타산하시고 종전과 같이 비교적 안전한 후방밀영에 보내여 그곳 성원들과 함께 학습시키는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신것이였다.

회의는 기본적으로 끝난셈이다.

회의에서 하신 김일성동지의 연설내용이 전해지자 남패자의 숲은 설레이였다.

눈보라는 아우성치고 추위는 만물을 얼구었으나 유격대원들은 모두 천막속에서 뛰쳐나와 환성을 올리였다.

특히 이번 기회에 친솔부대에 배속되게 된 동무들은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여 배낭을 안고 눈무지우를 껑충껑충 뛰며 제2방면군 주둔지로 찾아왔다. 그런 사람들가운데 리성림이도 끼여있었다.

16

 

이튿날 해질무렵이였다.

리경락은 강철룡소대장에게 끌리여 숲속에 나섰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강철룡은 턱질로 어서 가자고 할뿐 입을 벌리지 않았다.

리경락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아마 김일성동지께서 부르시려니 생각하고 군말없이 따라나섰다.

얼어붙은 이도하기슭을 따라 찬바람을 맞받아가는데 한 녀대원이 얼음구뎅이앞에 쪼그리고 앉아 쌀을 씻고있다가 허리를 일으켰다.

하얗게 얼어붙은 봇나무숲을 배경으로 발갛게 언 두볼을 쳐들고 일어선 처녀의 모습은 한순간에 리경락의 걸음을 멈추어세웠다.

그는 자기나름으로 이른바 아름답다는 녀성들을 적잖이 보아왔다.

그러나 얼어붙은 강가에 일어선 그 밀림의 처녀는 그가 알고있는 소위 미인들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있었다.

처녀는 분명 아직 자기를 바라보고있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못느끼는 모양이였다. 흩어진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며 먼 숲속을 바라보던 처녀는 머리를 나무그루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할것인가?

눈을 감고 머리를 젖히고 선것은 더 멀리, 더 멀리로 마음속 눈길을 달리기 위해서가 아닐가!

아침마다 분첩으로 볼을 두들기고 커다란 체경앞에 서서 몸매와 옷맵시를 깐깐히 살피는 많은 미인들이 저 처녀가 바라보는 마음속 시야가운데서 무엇을 느낄수 있을것인가.

그 처녀의 아름다움은 꾸민것이 아니라 내풍기는것이였다.

그러기에 그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나눌수는 없었다. 그래서 인상은 더욱 강렬하였다.

처녀는 분명 미래를 그려볼것이다. 혁명의 앞길을 생각할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 고향과 조국,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을 안타까이 그려볼것이다.

리경락이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는, 오래전에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린 아름답고 고상한것을 그 처녀는 너무나 많이 가지고있다.

리경락은 언젠가 그런것들을 두고 자기 목숨과 저울질을 했었다. 그때 저울대는 자기 목숨쪽으로 어방없이 기울었고 그리하여 그 모든것을 내던져버렸다. 오늘 그것들을 목숨보다 귀중히 간직하고있는 사람들앞에, 바로 그때문에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인간형상앞에 서고보니 그리도 소중하게 간직한 자기의 육체가 바로 그시각부터 썩어들고있었다는것을 불현듯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아무리 기름을 지우고 분을 개여발라도 송장을 아름답게 만들수는 없다.

《뭘하오? 어서 걷소!》

턱없이 크게 울린 강철룡의 목소리에 리경락은 소스라쳐 머리를 쳐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떨구고 수걱수걱 걷기 시작하였다.

리경락은 자기의 죽음을 예감하였다.

문득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던 때의 광경이 선히 눈앞에 떠올랐다. 자기의 옹색하고 너절한 처지를 너그럽게 리해해주시면서 길림시기 이야기를 그이께서 비쳤을 때 자기도 인간이기때문에 개질이라도 할수밖에 없었다고 희떠운 수작을 널어놓은것을 상기하였다. 그때 장군님의 너그럽던 얼굴에 어리던 준엄한 표정과 눈길에 타오르던 노기―그때부터 김일성장군님의 부드럽던 안색은 완전히 실무적으로 변해버렸다.

왜 두무릎을 꿇고앉아 적들이 총칼로 내모니 어쩔수 없이 들어왔다고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빌지 못했던가. 그때 그런 용기가 없었다면 그후에 박덕산정위가 와서 생각이 달라진게 없느냐고 다시 물었을 때라도 같잖은 《교섭》같은것을 깨끗이 집어던지고 김일성장군님을 다시 만나뵙게 해달라고, 자기는 천추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지만 그이께서는 전부터 자기 잘못을 뉘우친 사람은 언제나 용서해주셨다고 간청하지 못했던가. 그것이 김일성장군님께서 마지막으로 베풀어주신 기회였건만 자기는 뱀혀바닥같은 독스런 혀바닥으로 그 구원의 동아줄을 스스로 물어끊어버렸다.

이제야 모든것이 명백해졌지만 조선인민혁명군은 절대로 총을 놓지 않을것이다. 그 단호한 결심을 온 세상에 선포하기 위하여 자기를 죽일것이다.

어찌하여 이처럼 론리적이고 이처럼 명백한 생각이 이제야 떠올랐는지 놀랄 지경이였다. 너무나 대조되는 눈부신 아름다움앞에 선 그 순간에 자기의 더러운 몰골이 감출수 없이 드러난때문일는지 모른다.

 

×

 

이에 앞서 김일성동지께서는 최춘국, 박덕산, 오중흡을 비롯한 간부들을 거느리시고 경위련대에 와계시였다.

사령관동지의 배려에 의하여 모두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필요한 무기와 장구들을 공급받은데다 회의기간 충분히 휴식을 한 전사들은 사기가 높았으며 그쯘히 행군과 전투준비를 갖추고있었다. 남패자의 적 포위를 돌파하고 자기 활동구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작전계획은 이미 사령관동지께서 작성하시여 그를 위한 준비를 최춘국, 오중흡 등에게 시켜놓으신터이였다.

이제 작전준비정형을 돌아보시니 오중흡련대나 최춘국련대나 다 물샐틈이 없었다.

여기에 기초하여 사령관동지께서는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빠져나갈 방향과 서렬을 정하시고 전투와 행군에서 지켜야 할 원칙들을 제시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직접 돌파구가 열리게 될 최춘국련대로 데리고 오신것이였다.

적의 기본집체는 7련대전연에 대치되여있었다. 그밖에 사면으로 남패자를 포위하고있는 적들가운데서 비교적 강한 전선이 동북방향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 동북방향에 기본타격을 가하시여 돌파구를 형성하고 이 방향으로 증강되여오는 적의 기본집체를 7련대전연에서 타격하여 허물어뜨릴 작전적구상을 무르익히시고 미리 그에 대한 준비를 시켜오시였다.

이 구상은 한태혁이가 155절짜리 노래를 한 20절 부르나마나하는 동안에 그이의 머리속에 섬광처럼 떠오른것이였다.

작전의 총적구상과 의도 그리고 자기 부대가 수행해야 할 전투임무와 과업들은 쉽게 리해되였다.

사기앙양된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보신 사령관동지께서는 부드럽게 말씀하시였다.

《전투는 밤이 깊어서 하게 됩니다. 이제 강철룡동무가 리경락을 데리고나갈것입니다. 그를 처단하는 총소리가 울리게 되면 최춘국동무는 불을 걸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모든 부대는 일체 행군과 전투준비를 빈틈없이 갖추어놓고 대기하여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알았습니다.》

지휘관들의 힘찬 대답소리는 땅거미 깔려드는 고즈넉한 숲을 울리였다.

그길로 지휘관들은 각기 자기 부대로들 달려갔다.

마감으로 걸음을 옮겨놓으려던 최춘국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들어 사령관동지를 바라보았다. 길게 치째진 그의 눈에는 노을이 어려있었으나 어쩐지 움직이지 않는 그 동자에 물기가 어리여 보라빛 색조를 빚어내는듯 하였다.

《사령관동지.》

그는 그이곁으로 다가오며 어색해하는 목소리로 불렀다. 두툼한 입가에 어설픈 웃음을 짓기는 하였으나 웬일인지 목소리는 떨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가슴이 선뜩한것을 느끼시였다.

《왜 그럽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또 멀리 사령관동지곁을 떠나가자니 여기 남는 동무들이 부러워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그럼 저는 저녁에 전투를 하고 그길로 떠나가겠습니다.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커다란 사나이는 소녀처럼 수집게 말을 떼더니 입술이 푸들거리는바람에 온전히 말끝을 맺지도 못하고 외면하였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서있는 춘국을 바라보시자니 그이께서는 다시금 가슴속이 아릿해오시였다.

《어찌겠습니까? 최춘국동무가 우리와 함께 그냥 있을수 없는것은 혁명의 요구가 그렇기때문입니다. 래년 춘기공세때까지 섭섭한대로 견디여봅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춘국의 듬직한 몸매를 더듬어보시며 될수록 정에 끌리지 않으시려고 애쓰시였다. 그러나 어느새 그이의 손은 춘국의 거칠어진 손등을 어루만지고계시였다.

《알고있습니다. 제 그것을 몰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우다. 그저… 래년봄까지 뵙지 못한다는것이 너무 아득한 생각이 들어서 그러지오다. 그래두 뭐 견딜수는 있습니다. 여태까지도 제가 사령관동지곁에 있은 날이 얼마 되지 않지오다.》

그러더니 춘국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왜놈들속에 소문이 난 그 치째진 커다란 눈이 번쩍하고 불을 뿜었다. 그는 탄력있게 똑바로 서더니 경례를 붙이며 힘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사령관동지,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나 역시 최동무의 건강을 빌겠습니다. 래년봄에 만나면 아마 그때는 오래 같이 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춘국의 손을 다시한번 굳게 틀어잡으시고 힘을 주시였다.

정은 덧쌓이고 겹쳤으나 숲속에는 이미 땅거미가 안개처럼 밀려들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멀어져가는 최춘국의 뒤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시였다. 어쩐지 속이 텅 빈것처럼 허전하시였다. 남패자골안에 들어서서 오늘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하신 적막감이 가슴을 채웠다.

(이상한 일이군.)

그이께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시며 이제는 나무그루사이에 가리워져 옷자락만이 얼씬거리는 최춘국을 다시한번 돌아보시였다.

생각하니 장군님께서도 안타까우시였다. 아무리 함께 있고싶어도 언제나 험한 싸움길로 떠나보내시지 않을수 없는 그였다.

어디에 내보내도 실수 없는 그, 중중첩첩한 적 포위속에 내띄워도 중대를 련대로, 련대를 려단으로 만들어가지고 웃으며 돌아오던 그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중 무거운 임무를 맡긴것이지만 그가 헤치고가야 할 싸움길을 생각하시니 가슴이 저리시였다.

17

 

남패자골안에서 한밤중에 울린 한방의 총소리는 데라시마중장관하 장병들에게 대단히 큰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열흘나마 노래소리만 울려오던 숲속에서 아닌밤중에 총소리가 울렸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혹 누가 오발이라도 한것이 아닐가?

그러나 요즘 험악하게 번져가는 쌍방의 분위기며 정보관계자들의 이마우에 새겨지는 깊은 주름살로 미루어보아 오발로 단정하고 마음을 놓게 되지를 않았다.

아니나다를가 얼마가 못지나 더 먼 야마시다련대의 전연에서 자지러지는 사격소리가 뒤따랐다.

수많은 기관총의 야무진 일제사격소리와 련달아 터지는 수류탄소리는 숲정수리를 붉게 물들이는 불빛과 함께 어마어마하게 터져오른 전투의 규모를 짐작케 하였다.

데라시마중장은 잠옷바람으로 사무실에 달려나와 야마시다대좌의 긴급보고를 받았고 그 자리에서 관하 전체 부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출동은 매우 굼떴다.

늙은 데라시마중장이 다시 잠자리에 가서 잠옷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다음에도 명령을 받으러 오는 지휘관은 한사람도 없었으며 전화를 걸어오는데도 없었다.

그사이 야마시다대좌는 두번이나 전화통에 대고 소리쳤다.

《적들은 벌써 8중대 전연을 치고 요구방향으로 빠지고있습니다. 3중대방향에서도 대부대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나로서는 지탱하기 힘듭니다. 적은 요구방향으로 진출할 기도인만큼 급히 증원부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인차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3시간만 견디여라.》

3시간은 고사하고 30분도 힘듭니다. 당장 눈앞에서 빠져나가는데요. 우리 방어선은 이미 허물어졌습니다.》

《바보같은 자식! 누가 방어선을 허물라고 했는가.》

《하! 적들이…》

데라시마는 화가 나서 전화수화기를 내동댕이치고 코를 벌름거리며 방안을 이리처럼 오락가락하였다.

제일먼저 달려온것은 모리중좌였다.

《무엇이 어째, 이놈!》

데라시마는 모리가 경례를 붙이기도전에 다짜고짜로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소리쳤다.

《총 한방 쏘지 않고 유격대를 전멸시킨다고 떠들어댄것이 네놈이지? 어디 다시한번 말해봐라, 손자병법이 어쨌어? 괘씸한놈!》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이러다간 재미없습니다. 내가 한 말은 모두 하시모도소장의 말입니다.》

모리는 투실투실한 로인의 살진 손아귀를 겨우 비틀어풀어놓으며 말하였다.

《뭐 하시모도의 말이라고?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그래 하시모도가 허물어지는 내 방어선을 수습해주겠다던가?》

데라시마는 하시모도란 말을 듣자 다시 약이 올라 접어들려 하였으나 이미 아까와 같은 무서운 기세는 올리지 못하였다.

《방어선이 허물어지는거야 각하의 책임이지요. 만일 포위진속에서 한사람의 유격대라도 새여나간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중장각하의 책임입니다.》

모리는 전화수화기를 한손에 잡으며 차겁게 말하였다.

《뭐 어쨌다고? 일은 네놈들이 저질러놓고 이제 와서는 전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이 간교한놈들!》

데라시마는 두주먹을 후들후들 떨며 씩씩거렸으나 모리는 돌아보지도 않고 전화질만 하였다.

그는 마치 제가 사단장이기나 한것처럼 각 부대장들을 연방 호출하여 견지하라는둥 어디로 진출하라는둥 하는 군사명령을 척척 떨구었다.

데라시마는 보다못해 부관놈을 데리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칠칠야밤이였다. 밀림을 울리며 불어대는 눈바람은 로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으며 실지로 사단을 움직이는것은 모리중좌가 아니라 자기 데라시마중장이라는것을 사단장병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였다.

마사병에게 호통을 쳐서 말을 끌어내게 한 데라시마는 만또자락을 날리며 숲으로 달렸다.

운동부족으로 위축되여있던 늙은 심장은 갑자기 과중한 부담을 받게 되여 숨가쁘게 뛰다가는 멎군 하였다. 데라시마는 그대로 안장에서 굴러떨어져 아무데고 네활개를 뻗고 드러눕고싶었다. 그러나 제국장군의 체모를 생각할 때 멎어설수 없었다. 그는 심장이 후두둑후두둑 무질서하게 뛰는것을 느낄수록 발악적으로 채찍질을 하였다.

사단주력인 혼마려단의 전연에 나오니 그제사 포들이 쿵쿵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이놈들아! 뭣들을 하는거냐, 야마시다는 유격대에 두들겨맞아서 다 박산이 났다! 어서 내밀란 말이다! 어서 돌격을 햇!》

혼마소장의 영접보고를 받기가 무섭게 소리친 데라시마는 그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부관의 가슴에 안긴 데라시마는 간신히 눈을 뜨더니 죽어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주머니에 약이 있다. 이놈아, 이게 무슨 향수내야? 내옆에서는 일체 향수내를 피우지 말란 말이다!》

이날밤 기꾸찌는 한방의 총소리와 먼곳에서 울려오는 격전소리에 당황망조하여 돌아가는 지휘관들과 병사들을 보고 격분하였으며 그 끝에 데라시마중장의 추태를 목격하게 되자 눈물겨운 비애를 느꼈다. 전 사단적으로 제일먼저 전투준비를 갖추고 나선것은 그의 소대였으며 캄캄한 어둠속에서 제국륙군의 명예에 손색없는 기동성과 질서를 보여준것도 그의 소대였다. 혼마소장은 그의 소대를 공격의 맨 앞장에 내세워주었다.

포사격이 미처 끝나기도전에 혼마소장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유격대의 진지는 거짓말처럼 쉽게 돌파되였다. 기꾸찌는 신경의 음침한 음모가들에 비해 자기가 얼마나 당당한가 하는 자부심을 가슴뻐근하도록 느끼며 눈물이 그렁해서 내달렸다.

《돌격앞으로!》

눈바람은 기승을 부리고 총포소리에 숲은 뒤설레였다.

기꾸찌는 칼을 내휘두르며 돌격서렬의 선두에서 달렸다.

전호가 나타났으나 유격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꾸찌는 칼을 휘둘러 허공을 베며 전호를 허궁 뛰여넘었다. 그것은 며칠동안 그가 감시를 계속해온 바로 그 전호이며 그 진지였다.

《적들은 도주하고있다. 한놈도 남김없이 죽여라!》

그는 기세충천하여 소리쳤다.

곤도상사는 그의 옆에 딱 붙어 달리면서 웨쳤다.

《소대장님, 위험합니다. 그쪽에 매복이 있을수 있습니다.》

역시 그는 로병답게 전투에서는 성실하고 용감하였다. 기꾸찌는 행복감을 느끼며 감격해서 마주 소리쳤다.

《어떤놈이든지 무섭지 않다! 내 이 칼로 우리 앞길을 막는자는 누구든지 베여버릴테다.》

그들이 유격대의 1선진지를 다 극복하고 숲속깊이 진출했을 때였다.

려단의 주력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유격대를 찾아 사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뒤쪽에서 난데없는 기관총의 일제사격소리가 울리였다. 등뒤에 불을 맞은 혼마려단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하나둘 쓰러져갔다. 겨우 정황을 판단하고 공격서렬을 돌려세웠을 때에는 벌써 시간이 적잖이 흘러버렸다.

뒤에 남겨두었던 예비대와 전진하다가 돌아선 부대가 유격대를 가운데 끼워놓고 조이려 하였을 때는 벌써 유격대는 행적을 감추고말았다.

그럭저럭 동이 터왔다.

혼마려단은 많은 희생을 낸데다 여지없이 기가 죽어 마치 죽지 부러진 날새모양으로 후줄근해서 텅 빈 숲속으로 쳐들어갔다.

날이 다 밝았을 때 그들은 유격대의 대부대가 숙영한 자리에 이르렀다.

싹 쓸어내고 간듯 검부레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숙영지였다고 짐작되는것은 우등불자리와 천막을 쳤던 자리, 얼어붙은 강을 까내여 물을 긷던 자리 같은것이 뚜렷한 흔적을 나타내고있기때문이였다.

한곳에서 시체 하나가 발견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때마침 말을 타고 달려온 데라시마중장과 모리보도과장은 그리로 달려갔다. 데라시마는 혼마소장의 지휘부에서 여러 시간 누워있다가 겨우 심장을 진정시키고 부하장병들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기 위하여 달려온것이였다.

죽은자는 락엽무지우에 반듯하게 누웠는데 두손으로 흙을 각각 한줌씩 움켜쥐고있었다. 흙빛으로 변한 얼굴에 안경이 번뜩거렸다.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가 두툼한 일본군복을 한절반 꺼멓게 물들여 놓았다.

그 가슴에는 흰 종이장 한장이 덮이여있는데 그것도 한절반 피에 물들어 검정자주빛을 띠고있었다. 피는 이미 흐를대로 다 흐른 모양으로 꾸둑꾸둑 얼어붙었다.

모리는 황급히 뛰여내려 죽은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보지 않고도 리경락이라는것이 명백하였지만 송장의 눈굽에 내밴 눈물자국을 확인하자 침을 뱉었다.

그는 리경락의 가슴에 붙어있는 종이장을 와락 움켜쥐려다가 소스라쳐 손을 도로 움츠렸다.

 

경고장

 

그 종이에는 큼직한 붓글씨로 이렇게 씌여있었다.

 

동창생이건 친척이건 관계없이 혁명을 배반하고 유격대를 해치려 드는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것이다.

 

모리는 몇번이고 손을 뻗치고싶었지만 왜 그런지 팔이 펴지지 않았다.

《그게 무엇인가?》

데라시마가 말우에서 그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리경락이올시다.》

모리는 심드렁해서 대답하였다.

한번 입을 벌리고나니 팔의 긴장도 풀리였다.

그는 스스럼없이 리경락의 가슴에서 경고장을 떼내여 누가 볼세라 차곡차곡 접었다.

이것이 말하자면 김일성장군의 최종회답인셈이니 응당 신경의 사령부로 올려보내야 할것이였다.

이때 한 졸병이 또 하나의 시체 비슷한것을 한절반 끌다싶이 하면서 업고왔다.

업히여오는 시체 비슷한것은 아무도 없는 전호로 그리도 용감하게 돌격해가다가 탄알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부상을 당한 기꾸찌중위였다.

그를 업고온것은 공교롭게도 미즈시마2등병이였다.

부대가 숲 종심을 향해 진군할 때 탄알에 쓰러진 소대장을 다른 병사들도 다 보았지만 어둠과 숲속 조건을 핑게대고 모두 모른체하였다. 유독 미즈시마만은 봇나무장작으로 개털외투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두들겨패던 그 소대장을 외면할수가 없었다.

(외가가 효고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동향인이나 같다고 했지…)

미즈시마는 무겁게 늘어지는 소대장을 업고 밤길 수십리를 걸어가는 고통을 자기가 왜 참아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근거라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사실 그가 기꾸찌중위와 동향인이라는것을 상기한것은 더는 그를 업고갈 기력이 없음을 스스로 느꼈을 때이고 처음에는 무슨 까닭도 충동도 없이 극히 자연스러운 생활감정으로 그렇게 했을뿐이였다.

미즈시마의 행동은 곤도상사의 찬양을 받았으며 그것은 인차 상부에 보고되였다.

데라시마중장은 이번 조선인민혁명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여 빛나는 공훈을 세운 기꾸찌 고사부로중위와 함께 미즈시마2등병을 표창할데 대한 명령서에 정중히 도장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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