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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편

 

12

 

설태섭은 다리가 휘친거려 걸음이 잘되지 않았다. 그는 온몸의 맥이 다 빠져버린듯 한 심한 허탈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공장에서 반키로 떨어진 철길주변에 있었다. 신혼살림을 시작할 때 기업소 건설직장에서 지어준 두칸짜리 단층집이였다.

서재로 쓰는 웃방은 두 부부의 책이 네벽을 가득 채워서 양복장, 이불장같은 가장집물은 거의다 아래방에 놓고 썼다. 양복장은 결혼식날 설계사업소에서 보낸것이고 이불장은 결혼식이 있기전에 책임비서가 가구공장에 특별히 주문하여 만들어온것이였다.

진료소일이 바쁜지 안해는 아직 오지 않아 부뚜막이 싸늘하였다. 솥뚜껑을 열어보니 강낭밥 한사발과 글쪽지 한장이 놓여있었다.

설태섭은 저도 몰래 긴 숨을 내그으며 종이장을 집어들었다.

《철심이 아버지.

미안해요. 도병원에 후송할 급한 환자가 생겨 오늘은 좀 늦어질것 같아요. 밥을 꼭 데워서 잡수세요.

찬장에 현아 할머니가 담가준 산나물김치가 있어요.》

종이장을 들여다보는 설태섭의 눈에 물기가 어리였다. 따뜻한 안해의 정이 담긴 글쪽지가 웬일인지 가슴을 얼얼하게 하였다.

철심은 설태섭이와 한정희사이에 태여난 이제 세돐 잡히는 아들이고 현아는 김경복과 고정순이의 딸이였다. 첫 자식은 부부의 사랑을 더 깊이 더 튼튼히 련결시키는 인전대와 같았다. 결혼초기에는 안해로부터 태섭동무로 불리우던 그가 이제는 철심이 아버지라는 따뜻하면서도 무거운 부름을 받고있었다. 문득 그는 첫아들이 태여났을 때 윤현덕실장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됐구만. 아버지란 그 말에 많은 의미가 있다네. 아버지가 된 다음에는 자기뒤로 이어질 수많은 후손들의 운명과 명예를 생각해야 하네.》

윤현덕실장이 왜 그런말을 했을가? 윤현덕, 강충현, 최강철 그들은 모두 아버지로 하여 운명의 곡절을 겪고 슬픔을 당했던 사람들이였다. 당은 그들을 차별없이 품어주었지만 머리에 새겨진 아버지의 오점, 가문에 찍혀진 그 얼룩점은 지워버릴수 없는것이다. 리력서를 쓸 때마다, 가계표를 써 바칠 때마다 그들은 즐거울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된 나로 하여 수많은 후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태섭은 비판을 받은 이 저녁 새삼스레 그것을 생각하며 불안을 느끼였다.

설태섭은 몹시 허기증이 났으나 솥뚜껑을 그냥 닫아버리고 아래목에 베개를 베고 누워버렸다.

눈을 감으니 종잡을수 없는 생각들이 갈피없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처녀와 함께 라북천의 동뚝길을 산책하던 6년전의 가을밤을 생각하였다.

그때 나는 얼마나 희망에 넘친 말들을 했던가.

《정희동무, 내가 <HM기>를 개발할 때쯤은 동무도 위대한 예술작품을 내놓게 될거요.》

《내가요?》

한정희는 영문을 몰라 눈이 올롱해서 반문하였다.

《그때는 우리들사이에 자식이 태여난단 말이요. 그거야말로 우리의 위대한 예술작품이지.》

《어마나!》

달빛에 비치는 한정희의 붉은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날밤 라북천기슭에서 그는 처음으로 이성을 포옹해보았었다. 그리고 그 밤에 사랑하는 처녀앞에서 20대의 박사가 되고 《HM기》개발에서 제1인자가 되리라고 굳게 맹세다지였다.

(아들은 벌써 세살이 됐는데 《HM기》는 서른세번이나 류산했군!)

설태섭은 한숨을 쉬며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태섭은 문밖에서 주인을 찾는 소리에 일어나앉았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주혁민책임비서였다. 설태섭은 그의 방문을 의외롭게 생각지 않았다. 사흘이 멀다하게 찾아오군하기때문이였다.

주혁민은 아래웃방을 둘러보고는 제집처럼 아래목에 올방자를 틀고앉아 베개를 무릎우에 올려놓더니 《베개가 방바닥에서 나딩굴고있는걸 보니 태섭의 심기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하고 반롱조로 말하였다.

《저야 늘 그렇지요 뭐. 우울증환자이니까요.》

설태섭은 비뚠소리를 하였다. 그는 왜 그런지 책임비서를 만나면 응석과 심술을 부리고싶어지는것이였다.

《왜? 오늘 비판이 잘 접수되지 않나? 태섭이, 비판을 잘 접수하고 삭이면 보약이 되지만 그걸 고깝게 받아들이면 독약이 돼. 오늘 동무의 비판받는 태도는 아주 옳지 않았소.》

태섭의 까만 눈동자가 한자리에 굳어졌다. 이날 회의장 뒤좌석에 주혁민이 와앉아있은것을 전혀 모르고있는 태섭은 누가 벌써 당위원회 문고리를 쥐고 들어가서 고해바쳤는가 하고 개탄하였다.

《책임비서동지, 전 모든걸 다 접수합니다. 그러나 모호수학과 미립자해석법에 대한 저의 연구를 현학적인것으로 비판하는데 대해선 접수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저에 대한 모욕이기전에 과학에 대한, 학문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 동무도 학문자체를 비판한게야 아니겠지. 학문을 대하는 동무의 태도와 립장을 놓고 말한거겠지. 태섭이, 약이 쓰지만 받아먹자.》

《알겠습니다, 책임비서동지!》

정신적으로 지쳐버린 설태섭은 그 무엇에 도전하거나 반발할 의욕조차 나지 않았다.

《접수하겠단 말이지. 고맙소.》

주혁민은 기쁜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머리를 돌리였다.

《동무네 설계조에서 계속 작업장에만 붙박혀있는데 바람을 쐐보지 않겠소?》

설태섭은 주혁민의 말뜻을 알수 없어 멍청히 앉아있었다.

주혁민은 《HM기》를 개발하고있는 다른 공장들에 가서 경험교환도 하고 기술협의도 하면 기분도 전환되고 여러모로 좋을것 같다고 하였다. 나이가 많은 윤현덕은 제일 가까운 함남도쪽에, 탁석준은 평남도쪽에, 설태섭은 ㄹ공장에 가서 《HM기》개발과 관련된 기술경험을 교환해보면 좋을것 같다는것이였다.

《전 반대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저하고 토론합니까? 실장동지도 있는데.》

《이제 실장동무하구두 토론하지. 그러니 동문 반대없단 말이지? 됐소. 형석광과 주물용모래가 떨어져서 우리가 직접 자동찰가지고 원천지에 가서 실어오자고 하는데 동무네가 그 자동차를 타고가도 될거요.》

《형석광을 실으려 그 먼델 간단 말입니까?》

설태섭은 억이 막혀 입을 딱 벌리였다.

《그럼 어찌겠나. 주물용모래, 용광로용형석광이 거덜이 나서 주물, 주강직장에서 아우성인데… 참 야단이요. 그 흔한 석탄마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가열로의 불도 꺼질 형편이요. 내가 래일부터 도당강습에 가게 되는데 형석광을 실러가는 차도 래일이나 모레쯤 떠나겠다고 하오. 동무네도 자동차편을 리용하겠으면 차비를 하오. 그럼 난 가겠소.》

주혁민은 무릎에 올려놓았던 베개를 밀어놓고 움쭉 일어섰다.  그는 밖으로 나가려고 문고리를 쥐였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돌아서서 부엌으로 내려가더니 솥뚜껑을 열어보는것이였다.

태섭은 얼굴이 화끈하였다.

주혁민은 솥안에 들어있는 밥그릇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그 옆에 놓인 글쪽지를 집어들었다. 입안으로 쑹얼거리며 글쪽지를 읽고난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부엌 한쪽에 무져있는 분비나무마들가리를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을 지피였다. 불붙는 아궁이안에서 마들가리튀는 소리가 들릴 때 주혁민이 입을 열었다.

《밥은 왜 안먹어? 동문 아주머닐 꽤 울리는것 같아.》

멍하니 서있던 태섭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와 얼른 고개를 돌리였다.

《밥 먹으라! 한정희 속태우지 말고.》

주혁민은 성난듯이 말하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태섭은 그를 바래주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있었다. 무엇때문에 자기가 울고있는지 알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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