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등록 |  학생가입 
첫페지로 손전화홈페지열람기
1. 자본주의적관계발생의 력사적전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자본주의적관계도 자기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발생발전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17세기이후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발전할수 있는 전제 조건들이 일정하게 마련되였으며 그에 토대하여 18세기중엽이후 일부 생산부문들에서 점차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이것은 우리 나라 력사발전의 합법칙적과정이였다.이러한 력사발전의 밑바탕에는 봉건적인 억압과 착취 특히는 신분적예속을 반대하는 피지배계급인민들의 줄기찬 투쟁과 생산을 발전시키기 위한 근로인민대중의 꾸준한 로동활동이 놓여있었다.

 

─ 자본주의적관계발생의 중요한 전제 무산자계층의 형성

자본주의적관계발생의 중요한 전제의 하나는 인신적예속에서 벗어나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우나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없는것으로 하여 자기의 로동력밖에는 팔것이 없는 무산자계층이 존재하는것이였다.

17~18세기경에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무산자계층이 적지 않게 생겨나고있었다.

이 시기 봉건적신분제도를 반대하는 피압박인민들의 투쟁이 날로 강화되고 상품화페관계가 장성하면서 봉건적토지소유관계와 착취관계의 여러 분야에서 신분적속성이 점차 해이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상품화페경제의 장성과 더불어 농촌에서 계급분화과정이 급속히 촉진되면서 토지를 잃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농민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였는데 이들은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 류랑의 길에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18세기이후 이러한 류랑민대렬은 전국적범위에서 부쩍 늘어났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국각지에서 류랑민이 수많이 생겨났는데 특히 삼남지방과 관서지방이 심하였다.

 

종래에도 토지에서 떨어져나간 류랑민들이 적지 않았으나 이들은 살길을 찾아 헤매이다가 결국 다시 토지로 되돌아와 봉건국가와 지주들에게 얽매여 봉건적인 억압과 착취를 당하군 하였다.그러나 17~18세기이후에 적지 않은 류랑민들은 도시와 농촌의 품팔이군으로 되였으며 부분적으로는 광산(금점,은점,동점)이나 수공업장(유기점,옹기점 등)으로 흘러들어 고용로동자로 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 자기의 로동력을 팔지 않고는 당장 먹고 살아갈수 없는 그러한 무산자들이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계층으로 뚜렷이 등장하게 되였다.

우리 나라에서 이러한 류랑민, 품팔이군의 발생과정은 돌연히 진행된것이 아니라 몇백년동안에 걸쳐 서서히 되였다.

18세기이후 고용로동은 상인지주, 부농들뿐아니라 봉건국가에 의해서도 널리 적용되고있었으며 그 범위는 수공업, 어업, 림업, 운수, 토목공사를 비롯한 여러 생산분야에로 확대되여갔다.

 

1794~1796년 봉건국가에 의하여 추진된 수원성축성공사와 그에 뒤이은 서호신축공사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품팔이군들을 고용하여 진행한것이였다.이때 봉건국가는 수원성건축공사비 80만량가운데서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38만 7 000량을 품삯으로 지출하였다.이 시기 고용로동이 얼마나 널리 적용되고있었는가 하는것은 18세기후반기에 하루 품삯이 어디에서나 25푼으로 된 사실 하나만으로도 능히 짐작할수 있다.

 

류랑민,품팔이군들가운데는 광산이나 수공업장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가 날로 늘어났다.

고용로동이 널리 적용되면서 그의 봉건적성격은 점차 약해져갔다.

봉건국가는 그전처럼 인민들을 순 봉건적성격을 띤 강제적인 부역로동에 제마음대로 자주 내몰수 없게 되였다.그리하여 품삯을 주고 고용하는 현상이 늘어났는데 이 경우 인신적예속관계는 부역로동에 비하여 현저히 약하였다.

이 시기 농촌에서의 계절적인 단기고용로동에서 봉건적성격은 매우 희박하였다.특히 광산들에서의 고용로동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였다.

이와 같이 부역로동이 점차 고용로동으로 바뀌여지고 고용로동에서의 봉건적성격이 희박해져간 주되는 요인은 봉건적예속을 반대하는 피압박인민들의 줄기찬 투쟁에 있었다.

고용로동이 널리 보급되고 그 봉건적성격이 약화,소멸되는 과정은 자본주의적고용로동이 발생하는 과정이였으며 그것은 아무러한 생산수단, 생활수단도 가지고있지 못하나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운》 로동력의 발생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것이였다.

 

─ 자본주의적관계발생의 중요한 전제 화페자본의 축적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하기 위하여서는 《자유로운》 로동력과 함께 많은 량의 화페재산(화페자본)이 축적되여야 한다.

우리 나라 봉건사회에서 착취자들이 돈(금속화페)의 형태로 많은 재부를 그러모은것은 17세기이후의 일이였다.물론 그 이전에도 착취자들이 물질적부를 독차지하고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주로 쌀,천 등의 현물이였다.

이 시기 농민들의 피땀을 빨아 그 누구보다도 많은 량의 화페재산을 그러모은것은 량반지주들이였다.

 

대부분의 지주들은 그 돈을 상공업이 아니라 토지를 사들여 봉건적착취를 강화하는데 돌리였다.그것은 지주의 대부분이 량반신분이였던 까닭에 그들이 봉건사회에서 천하게 여기던 상인이나 공장주로 되기를 몹시 꺼려하였으며 또 토지를 가장 《안전한》 착취수단으로 생각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량반사대부들의 그릇된 관점과 정치적제조건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봉건지주들의 수중에 들어간 돈은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생에 광범히 리용되지 못하였다.그러나 그 돈의 일부는 고리대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에 의하여 산업부문에 흘러들었다.

금속화페가 널리 쓰이게 되면서 상인들도 상당히 많은 량의 화페재산을 축적하였다.

이 시기 우리 나라 상인들가운데는 수십만량 지어는 그 이상의 돈을 모은자들까지 있었다.

 

새로운 상인계층의 대두는 개별적인 몇개의 도시나 지방에서뿐아니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벌어지고있던 현상이였다. 상품화페경제가 비교적 뒤늦게 발전한 함경도일대에서도 18세기이후 함흥상인, 원산상인, 북청상인 등의 진출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있었다.대상인들은 자신이 수공업공장주나 광산주로 나서는데서 신분적으로 꺼릴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상인들은 봉건량반지주들과는 달리 적지 않은 돈을 산업에 밀어넣고 돈벌이를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인들의 수중에 장악된 돈 즉 상업자본(상인자본)은 비교적 쉽게 산업자본으로 전환될수 있었다.

 

물론 상인들도 상업을 통하여 얻는 리윤이 더 클 때에는 자기의 돈을 산업에 돌리려 하지 않았기때문에 상인자본 전부가 산업자본으로 전환된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상인들이 자기의 돈을 리윤이 많은 일부 특수하게 유리한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였다. 즉 많은 화페자본을 축적한 일부 대상인들은 점차 유리한 산업부문들에 침투하여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우나 자기의 로동력밖에는 팔것이 없는 그러한 무산자들을 돈에 얽어매놓고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하게 되였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