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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진주에서 타오른 원한의 불길

평안도농민전쟁에서 큰 타격을 받은 봉건통치배들은 거기서 응당한 교훈을 찾을 대신에 그후에도 여전히 인민들을 억압착취하는데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썩어빠진 세도정치아래서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착취와 압박은 그 어느때보다도 가혹하였다.

17세기까지 봉건국가의 기본착취형태는 경지면적단위로 부과되는 전세와 공물, 부역착취였으나 17세기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대동법을 실시하여 공물과 부역의 많은 부분을 지세화하였으며 군포착취와 환자착취를 더욱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이것은 봉건정부를 반대하여 인민들이 또다시 투쟁에 일떠서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착취와 압박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일어나는 법이며 압제자들의 폭압이 강화될수록 그에 항거하는 인민들의 투쟁은 더욱 조직화되고 완강하여지는 법입니다.》

 

ㅡ 무제한한 3정착취로 인한 인민들의 처지

봉건통치배들에 의한 무질서하고 무제한한 3정착취는 인민들을 더욱더 도탄속에 몰아넣었다.

우리 나라 봉건말기에 전정과 군정, 환정을 3정이라고 하였다.

《전정》은 봉건국가가 토지를 대상으로 하여 농민들로부터 빼앗아내던 세금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다.

전정에 의한 착취 즉 조세제도에 의한 착취는 오랜 봉건시대를 통해서 봉건국가가 농민들로부터 빨아들이던 기본착취항목의 하나였는데 그것은 이 시기에 더욱 가혹해졌다.

 

조세가운데서 기본세수탈항목은 전세, 대동미, 삼수미, 별수미, 결미같은것이였다. 상품화페관계가 발전하는데 따라 봉건정부는 당시 인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이던 전세, 대동미, 결전을 비롯한 조세를 현물로가 아니라 돈으로 거두어들이였다.

 

조세의 화페납으로 말미암아 인민들은 돈을 마련해야 했고 이 과정에 더 많은 착취를 강요당하였다.

18세기 이후 봉건적착취에서 가장 혹독한것의 다른 하나는 《군정》 즉 봉건국가가 량인들에게 강요한 군포수탈이였다.

량인장정 한사람에게 부과되는 군포 2필값은 4량, 쌀로는 1섬에 해당되였다.

 

한집에서 아버지와 아들들을 포함해서 남정 3~4명이 군역을 지는것으로 보면 그것은 쌀로 45~60말을 내는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군포의 무거운 부담은 특히 량인들에게 집중되였다. 그것은 수많은 군역면제자들이 생겨난것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량인들은 한사람이 2~3명분의 군역을 걸머지게 되였다.

 

가혹한 군포수탈로 하여 군포징수대상자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봉건통치배들은 동네사람들과 일가친척으로부터 도망한 사람들의 몫까지 악착스럽게 받아냈다. 《린징》, 《족징》이란 이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은 군정착취의 가혹성과 악랄성을 그대로 표현한것이다.

3정가운데서 가장 파렴치하였던것은 《환정》이였다.

환정 즉 《환자에 의한 착취》는 봉건국가가 《빈민구제》라는 명목밑에 왕의 《어진 정치》에 대해 떠들어대면서 쌀을 가지고 감행하던 악독한 고리대착취였다.

환자는 봄에 농민들에게 고리대곡을 강제로 내리먹이고 가을에 가서 10%이상의 리자를 붙여 빼앗아내는 국가적착취였다.

 

환자에 의한 착취는 상품화페관계가 발전하는데 따라 더욱 심해졌다. 봉건관리들은 시장물건값을 조절한다는 구실밑에 상인들과 결탁해서 환자곡을 가지고 장사를 하였다. 그들은 흉년에 쌀값이 비싸지면 쌀값을 떨군다고 하면서 환자곡을 장에 내다팔기도 했는데 이것은 언제나 관리들이 폭리를 얻는 수탈공간으로 리용되였다.

 

이와 같이 3정착취는 19세기 전반기에 가장 가혹한 착취항목으로 되였고 모든 인민들의 원한과 증오의 대상으로 되였다.

봉건통치배들에 의한 무질서하고 무제한한 착취와 수탈로 하여 농민들은 도탄에 빠져 헤맸고 결국 통치배들을 반대하는 기운은 더욱더 높아지게 되였다.

 

ㅡ 1862년 진주농민폭동

3정착취와 가혹한 압박에 시달리는 인민들의 가슴속에는 착취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차넘쳤고 그것은 마침내 폭동으로 전환되였다.

농민폭동은 3정착취가 가장 심했던 경상도 진주지방에서 먼저 일어났다.

투쟁의 조직자들은 보름동안 품을 들여 폭동을 면밀히 준비하였다. 3정착취를 반대하는 항의문을 만들고 투쟁대오를 꾸리고 관리들을 규탄하면서 압력을 가하기 위한 방법들을 설정하였다.

1862년 2월 14일 전국적인 농민폭동의 서막을 연 진주농민폭동이 마침내 개시되였다.

 

격노한 농민폭동군에 위압된 병마사 백락신과 진주목사 홍병원은 악질아전들을 잡아다 곤장을 안기게 하고 환자페지와 강제적으로 징수하던 여러가지 비법적착취항목들의 중지를 《약속》한 공문서인 《완문》을 농민군에게 바치면서 그들을 기만하였다. 이렇게 되자 폭동군은 자기들의 투쟁이 승리한것으로 인정하고 2월 23일에 대오를 해산하고 모두 집에 돌아가버렸다.

 

진주농민폭동의 소식을 전해들은 봉건정부에서는 2월 29일 농민들의 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부호군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이전 경상도관찰사를 철직시키고 병마사 백락신과 진주목사 홍병원을 철직시켜 정배를 보냈다.

진주에 도착한 안핵사 박규수는 폭동에 가담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여 그중 100여명에게 악형을 가하였고 류계춘, 김수만, 리귀재를 비롯한 폭동지휘자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렇게 되여 진주농민폭동은 진압되게 되였다.

그러나 진주농민폭동군이 일으킨 투쟁의 불길은 삽시에 삼남일대와 전국각지를 휩쓸었다.

 

 

먼저 삼남지방에서 폭동이 크게 번져갔다.

경상도에서는 3월초부터 6월초에 걸쳐 10여개 고을에서 14차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가운데서 대표적인것은 단성, 함양, 선산, 개령농민폭동이였다.

 

개령농민폭동은 진주 다음가는 가장 크고 격렬한 농민폭동이였다. 4월 7일 개령농민 수천명은 리천장마당에 모여 투쟁을 벌렸다. 그들은 장마당가까이에 있는 부자 박경주와 상인들을 처단하고 읍안으로 진격하여 감옥에 죄없이 갇힌 인민들을 석방하였고 관청의 악질아전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폭동군은 투쟁의 성과를 계속 확대하지 않고 초보적인 승리에 만족하여 집에 돌아갔다. 그러자 봉건통치배들은 폭동지휘자들을 체포하여 학살하고 수많은 농민들을 혹독하게 탄압하였다.

 

전라도에서도 3월 말부터 5월 중순에 13개 고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익산과 함평의 농민폭동군은 큰 규모로 대오를 결속하고 투쟁함으로써 량반통치배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국왕 철종까지도 함평폭동은 전쟁보다 더 무섭다고 하면서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5월 이후 회덕을 비롯한 충청도의 8개 고을에서도 농민폭동이 련속 일어나 봉건통치배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농민폭동은 이해 6월 초까지 삼남의 여러 지역에서 계속 일어났다.

진주농민폭동으로 시작된 삼남각지 인민들의 첫단계의 투쟁은 6월초 경상도 밀양농민폭동으로 끝나게 되였다.

삼남지방에서 세차게 타번지는 농민폭동에 극도로 당황한 봉건정부는 인민들의 반항을 진압할 목적에서 1862년 5월 하순 3정개정을 실시할것을 토의하고 리정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교활한 봉건통치배들은 농민폭동이 다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자 리정청을 설치한지 4개월도 못되여 그것을 철페하고 다시 3정착취를 복구하였다.

환자를 비롯한 3정착취를 되살린 봉건정부의 배신행위는 농민들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냈다. 그리하여 인민들은 또다시 투쟁에 떨쳐나섰다.

 

인민들의 투쟁은 함흥에서부터 시작되였다. 이해 10월 24일 투쟁에 일떠선 수천명의 함흥인민들은 발악하는 아전들을 때려눕히고 감사가 도사리고있는 선화당에 쳐들어갔다. 폭동군중의 다른 한 대오는 감옥을 들부시고 죄없이 갇힌 모든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함흥인민들의 투쟁에 뒤이어 황해도 황주인민들이 투쟁에 떨쳐나섰다. 12월 7일 면의 수천명 인민들은 읍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집결해서 궁방의 가혹한 수탈행위를 규탄하면서 대오를 지어 황주읍성밑까지 쳐들어가 악질아전들의 집을 헐어버리고 악질군교들에게 된매를 안겼다.

 

이 시기에 모진 생활고에 신음하던 제주도인민들도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일떠섰다. 제주도인민들에게 강요된 착취항목은 화전세와 전복을 비롯한 진상품의 납부였다.

세차례에 걸쳐 진행된 투쟁을 통하여 제주도인민들은 악랄한 수탈을 감행하던 아전들에게 뭇매를 안기여 통쾌한 복수를 하였고 1만여명의 폭동군중은 제주도성안으로 쳐들어가 화전세의 삭감과 악질아전들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성안으로 쳐들어가 관청을 습격하고 원한의 전세착취대장을 불살라버렸으며 제주판관에게 관인과 병부를 바칠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인민들의 투쟁은 폭동지휘자들의 사상적제한성과 지휘능력부족으로 더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1862년 2월에 경상도 진주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농민폭동의 불길은 삼남 각지를 휩쓸어 한해동안에 40여개의 고을에서 일어나 전국적인 농민폭동으로 확대되였다.

그러나 농민폭동은 계속 발전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말았다.

농민폭동은 전국 여러곳에서 일어났지만 분산적으로, 개별적으로 일어났기때문에 봉건통치배들에 의해서 각개격파되고말았다.

이처럼 1862년 전국적인 농민폭동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봉건통치배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봉건제도의 해체과정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인민들에게 봉건통치배들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투쟁을 계속 확대해나가야만 그 성과를 공고히 할수 있다는 심각한 교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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