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후기신라에서 계급적모순과 대립은 극도로 첨예화되였다.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투쟁기세는 전국적규모에서 앙양되여갔다. 9세기전반기에도 농민폭동이 자주 일어났으나 주로 서부지방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이때에 와서는 온 나라를 휩쓸면서 직접 왕경을 위협하는 농민전쟁으로 확대되였다.
《착취와 압박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인민들의
△ 9세기말 인민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강화
9세기말 대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동기는 진성녀왕과 후기신라봉건통치배들의 부화방탕한 생활로 인한 인민대중의 착취와 억압의 강화였다.
집권 1년만에 죽은 정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진성녀왕과 후기신라의 봉건통치배들은 부화방탕한 생활만 추구하면서 인민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의 도수를 강화했고 그에 뒤질세라 지방귀족관료들의 탐오행위와 학정이 참을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민들의 투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 력사기록들에서는 진성녀왕이 부화방탕해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민심을 잃었기때문이라고 썼다.
그렇지만 폭동이 여러곳에서 때를 같이해서 일어났다는 그것이 인민들의 쌓이고쌓인 원한과 분노의 폭발이였다는걸 말하여준다. 진성녀왕의 어지러운 정사는 다만 그 동기로밖에 되지 않았다고 할수 있다.
당시 신라봉건사회는 이미 심각한 자체내부모순을 가지고있었다. 왕실과 수도안의 귀족관료들은 쪼들릴대로 쪼들린 인민들의 생활은 돌보지 않고 저들의 호사와 안일을 위해 인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있었다. 지방의 귀족관료들 역시 그에 뒤질세라 탐오와 학정을 계속하고있었다.
진성녀왕은 즉위하자부터 각간 위홍과 부화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으며 위홍이 죽자 젊은 남자 두세명을 몰래 궁실에 끌어들여 부화방탕하게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 나라의 정사까지 맡아 처리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국왕에게 아첨하고 총애받는자들은 제멋대로 날뛰였고 뢰물행위와 불공평한 상벌관계, 그리고 규률과 질서가 없고 안일과 해이만을 일삼는 현상들이 왕실과 봉건귀족들속에 만연되여 하나의 페풍으로 되고말았다.
이를 개탄해서 888년에 그 누구인가가 왕의 정치를 비난하는 글을 관청거리에 내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글은 다라니어(불교에서 쓰는 인디아의 글)로 《남무 망국 찰니나제 판니 판니 소판니 우우 삼아한 부이 사바하》 이렇게 되여있었다. 당시 인민들속에서는 이 글을 두고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찰니나제》란 말은 녀왕을 두고 하는 말이고 《판니 판니 소판니》는 소판 즉 세번째 벼슬등급에 있던 두 대신을 가리키는것이였다. 《우우 삼아한》은 세 아간 즉 여섯번째 벼슬등급이고 《부이》는 부호부인 즉 진성녀왕의 유모를 두고 하는 말로서 이들이 나라를 망칠것이라는것이였다. 다시말하여 녀왕과 그에게 아첨하고있는 대신들을 나라를 망칠 장본인으로 락인한것이였다.
이 글을 둘러싼 여론이 귀에 들어가자 진성녀왕과 그 측근자들은 당황해서 《범인》을 잡으라고 하면서 당시 대야주에서 숨어사는 왕거인을 지목하고 그를 체포, 투옥해서 죽이려고 하다가 때마침 짙은 안개와 구름이 끼고 우뢰가 울고 비와 우박이 쏟아지는 바람에 겁을 먹고 그를 놓아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인민들속에서 통치배들에 대한 분노와 항거의 목소리가 높았고 인민들의 투쟁기세가 앙양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부화방탕한 생활과 전횡을 일삼던 봉건관료들에 의해 국고는 텅텅 비게 됐고 국가재정은 바닥이 났다. 창고가 텅 비게 되자 곤경에 빠진 진성녀왕은 889년에 온 나라 각지에 관리들을 파견해서 강제로 조세를 빼앗아들이고 그를 반대하는 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도록 했다.
이렇게 9세기말 진성녀왕과 봉건통치배들에 대한 인민들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고 이로 인하여 각지 농민들이 거의 동시에 투쟁에 일떠섬으로써 대농민전쟁이 시작되였다.
△ 각지에서 치렬하게 벌어진 농민군의 투쟁
진성녀왕의 부화방탕한 생활과 후기신라봉건통치배들의 착취와 압박, 탄압에 항거해서 광범한 인민들이 투쟁에 일떠섰다.
지금까지 전하는 력사기록들과 단편적인 자료에 근거하더라도 이 시기 근 20개의 폭동군이 각지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중에서 사벌주농민들의 투쟁을 비롯한 대표적인 농민군들의 투쟁에 대해서 보기로 하겠다.
9세기말 농민전쟁의 첫 봉화를 추켜든것은 사벌주의 농민들이였다.
889년에 사벌주의 농민들은 원종과 애노의 지휘밑에 대오를 뭇고 신라 9주의 하나였던 상주를 들이쳐 장악한 다음 악질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보루까지 쌓아놓고 국왕이 파견한 정부군과 맞서 싸웠다. 봉건정부는 폭동이 일어나자 원종, 애노농민군을 진압하려고 많은 《토벌군》을 동원했으나 농민군의 기세에 눌리워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주변에서만 맴돌았다. 당황한 봉건정부는 《토벌군》의 우두머리를 갈아치우고 다시 내몰았으나 농민들의 세찬 반격에 부딪쳐 참패를 당하였다. 이것은 농민전쟁이 처음부터 매우 세차게 벌어졌다는걸 보여준다.
사벌주농민들의 투쟁에 뒤이어 전국각지에서 투쟁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졌다.
북부지역인 북원에서는 량길의 농민군부대가, 죽주에서는 기훤이 지휘하는 농민군부대들이 투쟁에 떨쳐나섰다.
북원농민군가운데서 가장 강한 부대는 궁예가 지휘하는 부대였다.
국왕이 될 야심을 품고있던 몰락한 신라왕족출신인 궁예는 전국 각처에서 농민폭동이 일어나자 이 기회를 리용해서 기훤이 이끈 농민군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환심을 사지 못하자 기훤의 부하인 원회와 신훤을 꾀여가지고 량길농민군에 가담했다. 그후 량길의 명령으로 기병 100여명과 함께 북원동쪽 군, 현탈환에서 공을 세우고 큰 신임을 얻게 되였다.
892년에 궁예가 지휘하는 농민군부대는 오늘의 남강원도 북부와 동북일대의 10여개 군, 현들을 기습해서 악질관리들을 처단하고 894년에는 오늘의 경기도와 황해도지방의 수십개 성들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896년에는 부평, 철성계선에서 서남쪽으로 림진강을 따라 더 진격해서 한주 철성군 동량현을 함락시키고 림진강을 건너 우봉군 림강현을 쳐서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여 농민군이 차지한 지역들에서는 봉건국가의 지방통치체계가 대부분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궁예는 이 지방에서 옛 고구려를 회복하겠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이 지방은 원래 고구려땅이였다. 이곳에는 고구려사람들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있었다. 그들은 항상 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무너뜨린 신라통치배들을 저주하고있었으며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를 다시 일떠세울것을 생각하고있었다. 궁예는 바로 인민들의 이러한 지향을 리용했던것이다.
그후 궁예는 량길의 부대에서 떨어져나와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후기신라의 서남부지방에서도 많은 농민군들이 활동하였다.
892년에 후기신라의 서남부해변가일대에서는 견훤이 지휘하는 농민군부대의 활동이 시작되였다. 상주 가은현의 농민출신이며 서남해안 방위군 비장이였던 견훤은 이 기회에 자기의 정권야욕을 실현할 야심밑에 폭동군을 뭇고 왕경 서남 주, 현들을 들이쳐 이르는 곳마다에서 농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불과 한달사이에 5 000여명의 대부대로 자라난 견훤의 농민군은 무주, 완산주를 련속 들이쳐 점령하였다. 이렇게 견훤은 오늘의 공주이남 충청도일대와 전라도의 대부분지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후기신라의 서남부지역 농민군부대들의 투쟁가운데서 특별히 주목을 끈것은 붉은바지농민군의 활동이였다.
이 붉은바지농민군은 신라왕조를 뒤집어엎을 결심밑에 많은 고을들을 들이치면서 락동강을 건너 신라의 수도 왕경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수백리 먼길을 거쳐 수도의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해서 봉건귀족관료배들과 그 추종자들을 처단하고 집과 사찰, 재물들을 불태워버리면서 봉건통치배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붉은바지농민군의 모량리습격이 있은 다음해인 897년 10월 진성녀왕은 공포에 질려 자기 측근들에게 왕위를 내놓을 의사까지 표명했다고 한다.
신라왕과 상층귀족들이 둥지를 틀고있는 수도가까이까지 공격해들어갔다는것은 붉은바지농민군의 투쟁기세가 매우 높았다는걸 보여주는 동시에 이들이 봉건국왕까지 처단할 결심을 가지고 싸움에 나선 사람들이였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이 시기 신라의 령역밖에 있던 대동강이북지역의 고구려유민들이 신라의 각지 농민들의 투쟁에 합세해서 신라봉건국가를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섰다. 평양일대를 거점으로 해서 벌어진 검용이 지휘한 《붉은 옷》부대, 《누런 옷》부대들의 활동은 그 뚜렷한 실례로 된다. 이들의 활동은 신라인민들의 투쟁을 고무하고 신라봉건통치배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을뿐아니라 그후 고구려ㅡ발해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고려인민들의 북방진출에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9세기말농민전쟁은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지난날 우리 인민의 중세계급투쟁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대규모적인 투쟁으로서 그 어떤 원쑤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우리 인민의 강의한 투지와 억센 힘을 널리 시위하였다.
이처럼 농민군들은 자기들의 피어린 투쟁을 통해서 악질관료들과 토호들을 처단하고 넓은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신라봉건국가를 멸망의 구렁텅이에로 몰아넣었고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