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등록 |  학생가입 
3. 세나라시기의 문학과 예술유산

삼국시기 우리 선조들은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수많이 남겼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자기 조국의 력사와 자기 민족의 우수한 문화유산에 대하여 잘 알아야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적자부심과 긍지감을 간직하게 됩니다.》

 

△ 삼국시기의 문학유산

삼국시기 문학은 고대문학의 성과에 토대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삼국시기에 구전설화문학이 빨리 발전하였다. 삼국시기의 설화문학은 신화창조의 단계를 멀리 벗어나 그 형식에서 전설, 민화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주제별로 보아도 력사설화와 생활세태설화, 우화 등으로 세분되여나갔다.

삼국시기의 설화유산가운데서 대표적인것으로는 고구려의 《동명왕전설》(​주몽전설)과 백제의 《온조전설》을 비롯한 건국설화들, 《을지문덕이야기》, 《록족부인전설》​, 《연오랑과 세오녀》 등을 들수 있다.

 

력사이야기: 온조왕과 비류-백제건국 이야기, 수나라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연오랑과 세오녀이야기​

 

삼국시기에 설화문학과 서사문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그에 토대하여 소설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산문발전에서 이룩된 가장 중요한 성과의 하나였다.

삼국시기의 대표적인 소설작품으로서는 고구려의 《온달전》, 백제의 《도미전》, 신라의 《설씨의 딸》, 《박제상전》과 같은 이야기체소설작품과 《토끼와 거부기》 와 같은 우화체소설작품을 들수 있다.

삼국시기의 이름난 이야기체형식의 소설인 《온달전》은 고구려인민들의 생활과 념원, 슬기와 애국심을 잘 보여주고있다. 이 소설에는 가난한 온달이 무술을 열심히 련마하여 고구려의 어엿한 장수로 자라나 외적과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이야기가 담겨있다.

 

력사이야기: 온달과 공주

 

《도미전》은 신분은 비록 천하나 의리에 밝은 도미와 용모가 어여쁘고 마음씨가 착하며 절개가 굳은 그의 안해의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왕(백제의 개루왕)의 추악성과 대조적으로 보여주었고 《설씨의 딸》은 봉건적학정밑에서도 이웃사이에 서로 믿고 도와나서는 근로인민들의 아름다운 정신도덕적풍모를 잘 그리였다. 그리고 《토끼와 거부기》는 우리 나라 우화소설창작의 오랜 력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있다.

 

력사이야기: 절개 높은 도미의 안해​, 의리를 지킨 설씨의 딸​

 

삼국시기에 시가문학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세 나라 인민들은 많은 가요들을 창작하였다. 이러한 가요들에는 착취계급에 대한 반항정신과 함께 외적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나가려는 인민들의 강한 애국적감정이 반영되여있다. 또한 인민들의 창조적로동생활도 생동하게 그려져있다.

고구려가요는 고유한 민족적정서와 선률로 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불리워왔다. 《래원성》,《연양》,《명주》,《동동》 등은 그러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특히 오랜 세월을 두고 불리워진 《동동》은 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1년을 12달에 담아 노래한 달거리형식의 긴 절가이다. 가요에는 매 절마다 《아으 동동다리》 라는 후렴구가 있어 절가로서의 면모가 잘 나타나있다.

 

백제의 가요로서는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지리산》, 《정읍사》 등이 있다. 오늘까지 가사가 남아 전해지는 《정읍사》는 가난한 녀인이 멀리 떠나 고생하는 남편(보짐장사군)을 그리는 애틋한 감정을 노래한 절가형식의 서정가요이다.

신라에서도 《도솔가》, 《희소곡》을 비롯한 적지 않은 가요들이 창작되였다. 이 가요들은 근로인민들의 로동과정에 창작된것들이다.

삼국시기에 가요와 함께 한자 또는 리두와 같은 서사수단을 리용하여 여러가지 형식의 서정시작품들이 창작되였다.

이 시기 한시작품으로서 오늘까지 전해내려오는것으로는 《우중문에게》, 《꾀꼬리노래》, 《외로운 바위》, 《인삼노래》 등 고구려의 한시작품들을 들수 있다.

 

서정시 《우중문에게 》는 612년전쟁시기에 을지문덕이 적장 우중문에게 보낸 편지형식의 작품이다.

이 서정시에는 《신통한 전략》, 《기묘한 전술》 등의 과장된 표현과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리》 등 야유조의 표현을 통하여 적을 추어주는체 하면서 그들의 허장성세하는 몰골을 조소하고있다.

이 시에는 고구려인민들의 투쟁모습이 직접 묘사되여있지는 않으나 서정적주인공의 주정토로의 밑바탕에 그들의 애국심과 불굴의 투지, 슬기로운 기상이 깔려있다.

 

삼국시기에 신라에서 향가가 새롭게 발생하였다.

향가란 리두로 창작된 시가로서 사뇌가라고도 한다. 향가에는 4구체로 된것도 있고 8구체, 10구체로 된것도 있는데 그중 가장 세련된 형식은 10구체이다. 이 시기에 창작된 향가로서는 《풍요》, 《서동요》, 《혜성가》를 들수 있다.

 

《풍요》는 7세기 전반기 령묘사라는 사찰의 부처를 만드는데 동원된 인민들이 흙짐을 져나르면서 부른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래에서는 봉건적인 압박과 착취밑에서 고역과 빈궁에 시달리던 가난한 인민들의 사회적처지와 불교교리로 인민들을 속이고 략탈하던 승려들의 악랄성을 보여주고있다.

 

이렇듯 삼국시기에 서정시문학이 크게 두 갈래 즉 한자서정시와 향가형식으로 갈라지면서 발전하였다.

 

△ 음악과 예술

세 나라에서는 음악과 무용도 발전하였다.

삼국시기에 우리 선조들은 노래와 함께 기악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였다.

《음악만 놓고보더라도 우리 나라는 세계적으로 악기가 맨먼저 발전한 나라의 하나입니다.》

우리 나라의 음악, 민족악기는 남달리 일찍부터 발전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고대시기의 악기유산에 기초하여 더 많은 악기들을 새로 창안제작하였다. 6세기에 가야사람 우륵이 가야금을 만든 사실, 비파, 저대 등이 새로 나온것은 그 뚜렷한 실례의 하나로 된다. 이리하여 삼국시기에 우리 나라 민족악기는 벌서 수십여가지에 이르게 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리용한 악기만도 38종이나 되였다.

삼국시기 우리 선조들은 새로운 악기들을 창안제작하였을뿐아니라 훌륭한 곡들도 많이 만들고 연주기술도 끊임없이 높여나갔다.

 

우륵은 수많은 가야금곡을 창작하였으며 많은 가야금명수들을 키워냈다. 왕산악은 100여편의 악곡을 창안한 재능있는 작곡가였을뿐아니라 거문고의 명수였다. 그가 거문고를 어찌나 잘 탔던지 그 가락에 맞추어 날아가던 학이 춤을 추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신라의 백결선생도 이름난 음악가, 기악연주가로서 널리 알려져있다.

 

세 나라시기에 악기의 연주형식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고구려무덤벽화자료에 의하면 악기연주는 크게 독주와 합주로 갈라져있었는데 합주는 같은 악기들을 가지고 하는것과 서로 다른 악기들을 배합하여 하는것으로 나뉘여져있었다.

삼국시기에 이렇듯 기악이 음악의 독자적인 한 분야로 확고히 등장하여 크게 발전한 사실은 당시 우리 나라 음악의 높은 발전수준을 잘 보여준다.

 

 

음악과 함께 무용예술도 발전하였다.

삼국시기의 무용은 그 형식과 양식이 다양하였다. 고국원왕릉, 약수리벽화무덤, 고산동10호무덤, 통구제12호무덤, 춤무덤 등 고구려고분벽화자료들에 의하면 이 시기 춤에는 독무와 쌍무, 군무 그리고 칼춤, 창춤, 북춤 등이 있었다. 이 시기에 벌써 탈춤도 나타났다.

세나라의 발전된 음악과 무용은 일본을 비롯한 이웃나라들에 널리 퍼져 이름을 떨치였다.

삼국시기에 미술분야에서도 큰 성과가 이룩되였다.

삼국시기의 미술 특히 이 시기 그림을 대표하는것은 고구려무덤벽화들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옛날 고구려무덤벽화만 보아도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뛰여난 미술적재능을 가지고있었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벽화들은 그 묘사의 생동성과 다양한 생활세부, 변하지 않는 색갈로 하여 세계적으로 관심을 크게 집중시키고있습니다.》

고구려벽화는 현재까지 100여개 알려져있는데 벽화의 주제와 내용이 다양하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처음에는 무덤벽에 주로 인물풍속도를 많이 그리였다.

 

 

인물풍속도들에는 왕이나 지방관이 정사를 보는 장면, 행차하는 장면을 비롯하여 야장일과 베를 짜는 장면, 말을 타고 활을 쏘면서 산을 주름잡아달리며 맹수들을 사냥하는 장면, 씨름을 하거나 수박을 하는 장면, 적들의 성을 공격하거나 적병의 목을 베는 전투장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 부엌에서 밥을 짓거나 우물에서 물을 긷는 장면 등 다양한 생활세부가 생동하게 펼쳐져있다.

고구려의 이러한 인물풍속도로서 유명한 벽화들은 고국원왕릉(안악3호무덤)과 덕흥리무덤, 씨름무덤의 벽화들이다.

 

고구려에서는 후에 무덤벽에 사신도를 그리는 풍습이 생겼다.

사신도는 무덤의 네 벽에 청룡(동), 백호(서), 현무(북), 주작(남)등 환상적인 방위신(동물)들을 그린것이다. 사신도의 주제는 비록 환상적인것이였으나 화가들은 억센 힘과 사나운 성격을 가진 실제 동물의 기질을 일반화함으로써 환상적인 동물그림에서 힘있는 박력과 생동감을 나타내였다. 특히 강서세무덤의 사신도는 중세세계미술사에서 걸작의 하나로 높이 평가되고있는 이름난 작품이다.

고구려무덤벽화에는 인물풍속도, 사신도, 천문도, 풍경화, 장식화 등이 있다.

고구려무덤벽화들은 거의다 여러가지 색갈로 그린 아름다운 채색화들일뿐아니라 힘있고 고상한 조선화의 고유한 필치를 잘 갖추고있다.

 

백제, 신라, 가야의 그림유산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무덤벽화를 비롯한 여러가지 사실을 통해 이 나라들의 회화미술도 높은 발전수준에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무덤벽화로서는 백제의 송산리제6호무덤, 신라의 어숙지술간무덤과 순흥벽화무덤, 가야의 고아동벽화무덤 등의 벽화들이다.

 

삼국시기의 그림은 비록 지배계급의 강요로 묘사대상의 범위가 제한되여있고 종교적관념에 기초한 환상적요소가 많으나 회화분야에서 창조된 높은 기교와 고유한 특성은 그후 조선화발전을 위한 귀중한 밑천으로 되였다.

삼국시기에 조각가들은 돌, 흙, 나무, 금속(금, 동) 등 여러가지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조각품들을 창작하였다.

 

이 시기 조각품들가운데는 인간생활을 비교적 진실하게 묘사한것들이 적지 않다. 흙으로 빚어 구워낸 신라의 도용들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불교의 침습과 함께 조각의 주제 역시 차츰 부처조각에로 기울어지게 되였다.

부처조각에서는 머리와 얼굴, 몸과 손발가짐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종교적도식이 강요되였다. 그러나 삼국시기의 조각가들은 그런 속에서도 조각미술을 점차 발전시켜나갔다.

 

초기의 부처조각은 일반적으로 형태가 곧고 몸가짐이 굳으며 단조롭게 앞면만을 처리한 유치하고 도식적인것이였으나 후에는 점차 인물의 자세에 변화를 주고 립체감을 나타내게 되였다.

평양의 대성산성과 황해북도 곡산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금동부처는 이미 초기조각의 부족점을 상당히 극복한 우수한것들이였다.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백제의 벼랑조각부처인 서산마애삼존불과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은 당시 우리 나라 조각미술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준다.

삼국시기에 공예미술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삼국시기 공예미술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한 분야의 하나는 금속공예였는데 이 시기의 금속공예품들가운데는 세계에 널리 알려진것들이 많다.

고구려의 금속공예는 삼국시기 금속공예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와 대성구역 청암동에서 나온 뚫음무늬금동장식품, 평안남도 강서군(발굴 당시) 약수리벽화무덤과 대동군에서 나온 금귀걸이 등이 다 우수한 공예품들이다. 그가운데서도 특히 룡산리의 뚫음무늬금동장식품이 유명하다.

 

해모양뚫음무늬금동장식품은 복숭아씨를 절반 갈라 한쪽으로 조금 기울인것 같은 형태로 되여있는데 장식품전면에는 타오르는듯 한 구름무늬를 봉황무늬와 결합하여 새겨넣었고 한가운데에는 해를 상징하여 세발까마귀를 뚫어새겼다. 그리고 금동투각판뒤에는 화려한 금록색의 딱장벌레날개를 깐 나무판을 대여 금빛과 선의 효과를 돋구었다.

 

고구려뚫음무늬장식품들에서 볼수 있는 거침없이 흐르는듯 한 박력있는 장식무늬, 금동판과 장식판의 미묘한 색조화는 고구려사람들의 진취적이고 락천적인 기상과 정교로운 투각솜씨, 섬세한 예술적재능을 유감없이 과시하고있다.

신라의 금관과 금귀걸이, 금동신, 금목걸이와 팔찌 등 귀금속공예품들은 신라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신라의 금관은 여러개가 알려져있지만 그가운데서 가장 훌륭한것은 경주의 황남동 98호무덤과 금관무덤에서 나온것이 대표적이다. 얇은 금판을 정교하게 오려서 안팎 두개의 관을 각이하게 만들고 거기에 수십개의 굽은 구슬과 백수십개의 보요(흔들림장식)를 금실로 달아맨 금관무덤의 금관은 화려하고 섬세한것이 특징이다.

 

섬세한 솜씨로 화려한 돋을무늬장식을 한 금귀걸이들 역시 모양이 다양하면서도 장식적효과를 유감없이 나타낸 걸작품들이다. 신라의 금귀걸이들가운데서는 경주의 부부무덤에서 나온것을 제일 잘된것으로 친다.

금속공예의 우수한 솜씨는 라주금동관을 비롯한 백제의 각종 장식품들, 가야의 금관을 비롯한 치레거리들에도 뚜렷이 나타나있다.

삼국시기의 공예발전에서 기와벽돌공예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소박하면서도 굳센 고구려의 막새무늬와 풍만하고 부드러운 백제의 막새무늬, 섬세하고 화려한 신라의 막새무늬 등에는 당시 우리 인민들의 다양한 감정세계가 잘 나타나있다. 특히 백제의 벽돌들에 새겨진 풍경무늬, 꽃무늬, 불꽃무늬, 룡무늬, 봉황무늬 등은 그 도안구성이 세련되여있을뿐아니라 조각수법이 정교하여 널리 알려져있다.

 

삼국시기의 공예품들은 주로 왕을 비롯한 귀족들의 사치한 생활에 리용되였고 따라서 공예품의 미술적표현에서도 사치한 요소와 환상적요소를 많이 가지고있다. 그러나 삼국시기의 우수한 공예품들은 우리 선조들의 높은 창조적지혜와 예술적재능이 깃들어있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의 하나이다.

재능있고 지혜로운 세 나라 인민들은 창조적로동과 뛰여난 활동으로 건축예술을 한층 높은 단계에로 끌어올렸다.

삼국시기 봉건통치배들은 저들의 《위엄》을 뽐내며 사치한 생활을 위해서 인민들의 피땀을 짜내여 수도를 호화롭고 웅장하게 건설하였다.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집안)과 평양성, 백제의 사비성과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는 월성, 금성 등이 그러하였다.

 

 

고구려는 427년에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오면서 대성산일대에 안학궁을 건설하였다. 안학궁은 약 38만㎡의 토성안에 길이 87m나 되는 중궁을 중심으로 정연하게 배치된 20여채의 건물과 회랑으로 이루어진 대건축군이였다. 안학궁의 중궁은 우리 나라 력대 왕궁건물들가운데서 제일 크고 웅장한것이였다.

고구려는 평양성(오늘의 평양중심부)을 건설하고 586년에 그곳으로 수도를 옮기였다.

평양성은 4개구역으로 되여있는데 모란봉일대를 북성, 만수대를 중심으로 한 구역을 내성 , 평천구역일대의 넓은 구역을 외성, 외성과 내성사이를 중성이라고 불렀다. 성벽의 둘레는 16㎞이고 총연장길이는 23㎞였다.

 

 

수도 평양성은 우리 나라 력사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던 고구려의 위용과 건축술의 발전면모를 잘 보여준다.

삼국시기 건축예술의 발전모습은 당시의 사찰과 탑건축을 통해서도 찾아볼수 있다.

동명왕릉앞에 서있었던 고구려의 정릉사는 약 3만㎡의 넓은 부지에 들어앉은 1탑 3금당식의 큰 사찰이였다. 정릉사의 탑은 8각나무탑이였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 8각탑가운데서 제일 오랜것으로 알려져있다.

신라 경주의 황룡사는 처음에 1탑 1금당식으로 건설되였으나 후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1탑 3금당식 사찰로 개조되였다. 이것은 목조건축물로서는 당시 가장 높은것이였다.

전라북도 익산군에 있던 백제의 미륵사는 중탑과 동탑, 서탑 등 3개의 탑과 금당을 가진 독특한 형식의 사찰이였다.

삼국시기 건축술의 발전면모는 무덤건축을 통해서도 엿볼수 있다.

집안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장군무덤은 높이 13m, 길이와 너비가 각각 34m나 되는 큰 돌기단돌칸무덤이다. 이 무덤은 모두 7층으로 되여있는데 우로 올라가면선 일정한 비률로 줄여 쌓았기때문에 웅장하면서도 안전한 감을 준다.

고국원왕릉, 강서세무덤을 비롯한 고구려의 돌칸흙무덤들도 우수한 건축물로 널리 알려져있다.

삼국시기의 도성과 왕궁, 사찰과 이름난 무덤들은 모두 봉건통치배들의 계급적지배와 사치생활, 종교선전에 리용되였고 근로인민들의 피땀을 짜내여 지은것들이기때문에 거기에는 인민들의 원한과 피눈물이 고여있다. 그러나 한편 당시의 이름난 건축물들에는 그것을 직접 건설한 우리 선조들의 우수한 건축기교와 예술적재능이 깃들어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 민족의 귀중한 유산의 하나로 된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