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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유민집단의 남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앞으로 력사자료들에 기초하여 6가야문제를 심중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김수로세력은 《하늘》의 지시로 가락땅에 남하했다고 하였다.

고구려나 부여, 신라의 건국설화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하늘》이란 《북쪽》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설화는 북쪽에서 내려온 세력이 이미 이곳에 있던 토착세력인 9한과 결탁하여 나라를 세운 사실을 반영하고있다.

 

설화는 6가야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형제》 즉 혈연적관계에 있는 세력들로서 이들이 다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중 김해땅에 먼저 내려간것이 금관국의 김수로라고 하였다. 그러나 6가야에 다같이 내렸다고 하는 《형제》들은 금관가야국과 사실상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금관가야에 내려간 북쪽의 세력은 나무곽무덤을 장법으로 하는 집단이였다.

 

금관가야국은 북쪽의 세력 다시말하여 고조선유민들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였다. 이것을 고조선의 묘제의 하나인 나무곽무덤을 통하여 보기로 한다.

 

△ 기원을 전후한 시기의 나무곽무덤은 가야전반에 퍼지지 못하고 극히 제한된 일부 지역에서만 나타났다.

전반적인 가야묘제에서 볼 때 나무곽무덤은 이례적이였다.

잘 알려져있는것처럼 가야의 기본묘제는 수혈식돌곽(돌칸)무덤이다. 이 무덤형식은 가야 전지역에 널리 분포되여있다.

경상북도 고령과 성주, 대구 등지에는 수혈식돌곽무덤의 변형이라고 할수 있는 수혈식의 상자식돌관무덤과 돌곽무덤(활석식돌곽무덤과 판석식돌곽무덤이 있다.)이 주류를 이루며 일부 횡혈식돌칸무덤이 있다.

 

부산 오륜대무덤떼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3세기경까지 축조된것인데 수혈식돌칸무덤 28기, 고인돌무덤 1기, 독무덤 1기로서 나무곽무덤은 단 한기도 없다. 부산 화명동무덤떼는 7기의 소형수혈식돌칸무덤들로 이루어져있으며 부산 반여동(해운대구)무덤떼는 16기의 수혈식돌칸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그밖에 토광나무곽무덤 2기, 독무덤 1기로 되여있다. 그리고 김해 례안리유적은 방형과 장방형의 돌칸무덤 115기가 기본이고 나머지는 움무덤(39기)과 독무덤(22기이상)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와 반면에 토광나무곽무덤은 경상북도 경산 림당동과 부산 복천동, 경상남도 합천 봉계리, 저포리, 창원 도계동, 김해 대성동, 칠산동, 례안리 등지에서 볼수 있다.

나무곽무덤은 가야전반에 걸쳐 널리 분포된것이 아니라 금관가야국의 수도였던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락동강하류좌우안의 좁은 범위에 몰켜있다. 함천 등지의것은 축조시기가 늦으며 그것은 금관가야국의 쇠퇴이후 그 지배세력이 그 일대에로 이동해간것으로 추측된다. 요컨대 나무곽무덤은 가야묘제에 시원을 둔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례적이며 《특수》한 묘제로 되는것이다.

또한 나무곽무덤의 연원과 계승성을 가야지역에서는 찾을수 없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것처럼 가야의 가장 이른 시기의 무덤구조형식이 나무곽이라면 그에 선행하는 묘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무로 짜서 만든 무덤이 어떻게 되여 돌발적으로 재료가 완전히 다른 돌로 바뀌여졌는가를 밝혀야 한다. 그러나 나무곽무덤의 연원은 가야지역에서 찾을수 없으며 그다음에 오는 수혈식돌곽무덤사이에는 그 어떤 계승성도 찾아볼수 없다. 말하자면 나무곽무덤은 가야지역에서 고립적으로 존재한것이다.

 

본래 진국의 묘제 특히 가야에 앞선 변진시기의 묘제의 기본은 돌곽돌무덤, 돌관무덤, 돌돌림무덤 등 돌로 무덤칸을 구성하는것이였다.

가야시기에 들어와서는 기본묘제가 수혈식돌곽무덤으로 전환되는데 그것은 전시기의 돌곽(돌칸)무덤을 발전적으로 계승한것이다.

한편 진국 동남부에 있던 변진지역에서 나무곽무덤은 B.C. 1세기경에 와서 급작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그러면 나무곽무덤은 어떤 원인으로 갑자기 가야에 출현하였으며 그 연원은 어디에 있는가.

가야지역에서 나무곽무덤은 김해 대성동과 칠산동, 례안리 등 김해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과 부산 복천동 등 금관가야국의 왕족을 비롯한 지배층이 쓴 무덤형식이다. 이러한 고위지배층에 한해서 쓰인 나무곽무덤이 광범한 범위에서 쓰인 돌곽(돌칸)무덤과 함께 존재한것이다.

 

김해일대에 기원을 전후한 시기 갑자기 나무곽무덤이 그 지배층속에서 나타난것은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나오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김수로세력과 결부되여 설명되여야 한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도 가야의 지배층(김수로)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수 없》는 세력이였다. 바로 이 지배세력이 남하하여 김해일대의 토착민들로 형성된 가야소국우에 덮쳐 전체 6가야의 맹주적지위에 올라앉은것이였다.

 

나무곽무덤이 북쪽에서 내려왔다는것은 우선 이 묘제가 고조선에 계보를 두고있는데서 찾아볼수 있다. 말하자면 고조선유민집단의 일부가 변진-가야지역에로 이동정착하게 된것이다.

고조선의 묘제는 돌무지무덤, 돌관무덤, 움무덤(도광나무곽)으로서 여기에는 중국 료녕성 심양시 정가와자 6 512호무덤과 같이 이른 시기의 나무곽무덤이 있으며 고조선중심부에 위치한 평양시 락랑구역 정백동과 남사리, 황해남도 은률군 운성리, 남포시 강서구역 태성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도 나무곽무덤이 적지 않게 분포되여있다. 특히 남사리일대에서 드러난 대형나무곽무덤은 가야묘제의 연원을 밝혀준다.

나무곽무덤이 북쪽에서 내려왔다는것은 또한 김해 대성동무덤떼에서 이른바 《북방유물》들이 드러난 사실을 가지고도 말할수 있다.

대성동무덤떼에서 가장 이르다고 하는 29호무덤에서는 이른바 《스키타이》계통의 청동단지와 500여점의 질그릇과 판모양철제품, 갑옷류 등 유물이 드러났다.

1992년말에는 김해 량동리에서 청동단지가 또 드러났다. 235호무덤에서는 청동단지가 50여점의 철기와 청동기 1점, 오랜 《북방식굽은구슬》과 함께 드러났다. 청동단지는 고조선사람들이 만들어 쓴 생활도구로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문화유물이 아니다. 가야지역에서 이와 같은 청동단지가 드러난것은 바로 고조선사람들이 남하하여 정착하였기때문이다.

 

고대시기 고조선과 부여, 구려에서는 기원전시기 커다란 정치정세의 변동으로 하여 일부 집단들이 남하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세력들은 소백산줄기를 넘어 변진땅에 들어왔다. 이 세력들은 경주지방에 들어가 정착하기도 하였고 경산 림당을 거쳐 곧바로 남하하기도 하였다. 경산과 경주, 김해와 부산 복천동에 나무곽무덤이 집중되여있는것은 바로 이때문이며 그들의 남하진출로정과 정착지를 밝혀준다.

 

남하집단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경주와 김해일대에 들어왔는데 그들은 다같이 나무곽무덤을 사용하였다.

1세기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변한과 진한땅에 많이 들어갔을 때이다.

 

 

옛 기록들은 고조선과 부여, 구려의 일정한 주민집단들이 남부지역에 이동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상의 사실들은 나무곽무덤을 기본무덤풍습으로 하던 김수로세력 즉 고조선유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이미 있던 가야의 토착세력과 융합되여 지배세력으로 되였으며 그후 전체 6가야의 맹주국으로 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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