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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군사조직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법은 국가의 주요한 통치수단으로서 국가와 함께 발생하고 발전하여왔습니다.》

법과 군사조직은 원시공동체사회가 무너지고 사회가 적대되는 리해관계를 가진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으로 갈라져 그들사이에 치렬한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계급사회로 되면서 착취계급이 피착취근로대중에게 자기의 의사를 강요하고 그에 복종시키는 계급적지배의 수단으로 국가와 함께 발생하였다.

 

법은 착취계급의 계급적지배의 수단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고대조선의 노예주들은 선행한 원시공동체사회의 관습들가운데서 유리한것들만을 살려 그것을 가기들의 리익에 맞게 수정보충하거나 필요한 행동규범을 새로 더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법을 제정하였으며 국가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통치수단으로서의 법도 더욱 정비완성하여나갔다.

고대조선의 법가운데서 옛 기록에 전해져오는것은 범죄자들의 처벌과 관련한 몇가지 조항뿐이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먼 옛날부터 고조선에는 《범금8조》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조항은 철저히 노예주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것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 조항에서는 사람을 죽인자는 즉시에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의 노예소유자들이 살인범을 죽이는것은 물론 그 가족들을 노예로 만들었다는것을 의미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자는 곡식으로 보상한다고 한 둘째조항은 첫째조항과 마찬가지로 노예주들의 생명을 보호하며 공물배상과 같은 경제적제재조치로서 노예주들에 대한 인민들의 반항을 억압하기 위한것이였으며 또한 곡식을 배상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것이였다.

셋째조항에서 남의 물건을 훔친자는 도적맞힌자의 노예로 되며 만일 죄를 벗으려면 50만의 돈을 내야 한다고 한것은 노예주들의 재산을 법적으로 보호하며 그들이 노예를 얻는 원천을 권력으로 뒤받침하여놓은것이였다. 

 

사실상 《범금8조》의 존재자체는 당시사회에서 심각하게 벌어진 계급투쟁의 필연적산물이였으며 강력한 국가권력과 법적통제밑에서도 인간의 자주성을 지켜나가려는 피착취계급의 투쟁은 고조선에서 노예제의 멸망과 사회발전의 전과정을 촉진시킨 추동력으로 되였다.

 

부여에도 노예제적질서를 유지공고화하기 위한 가혹한 법률이 있었다.

부여국가는 노예주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노예제도를 공고화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만든다.》는 법률을 제정하고 노예주들을 반대하는 인민대중의 투쟁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법률제도가 구려와 진국에도 존재하였으리라는것은 의심할바없다.

고대조선에는 법률제도와 함께 범죄자들을 잡아가두기 위한 감옥이 있었다.

 

감옥은 수도뿐아니라 전국도처에 있었는데 여기에는 법의 제재대상으로 되였던 《죄인》들이 감금되였다. 그가운데서도 가장 중한 범죄자들은 영고나 무천과 같은 《국중대회》를 계기로 제가들의 《합의》에 의하여 처형하였다.

 

이처럼 고대조선에서의 법률제도는 노예소유자적사회경제제도의 반영으로서 노예주들이 자기들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강제수단이였다.

 

△ 고대조선의 군사조직

고대조선에서는 계급적지배를 유지강화하며 침략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상비적인 군대를 가지고있었다.

 

고대조선에서 군인으로 될수 있었던 계층은 노예소유자귀족, 호민, 자영소농민층들이였으며 노예와 하호는 군인으로 될수 없었다. 노예소유자귀족들은 군사지휘관으로 되였으며 자체의 부담으로 무기, 무장을 갖출수 있었던 호민, 자영소농민층들은 군대의 주력을 이루었다.

 

국왕은 전군에 대한 지휘통수권을 가졌으나 지방군에 대한 지휘통제는 실제상 후국왕들에게 맡겨졌다.

고조선에는 중앙군과 지방군이 있었는데 이는 륙군과 수군으로 편성되여있었다.

 

 

륙군은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무기, 무장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으나 대체로 활, 단검류와 장검, 방패, 창, 도끼, 과, 쇠뇌, 갑옷 등이였다. 

 

수군도 상당한 정도로 발전되여있었는데 B.C. 2세기 전반기 만의 정변시기에 준왕이 수천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배길로 마한에 갔다는 기사는 고조선의 수도가까이에 항구가 있었고 그곳에 수천명을 운반할수 있는 배들이 많았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고조선에는 많은 상비군이 있었다.

B.C. 323년경에 연나라 역왕이 동쪽 고조선땅을 빼앗으려고 하므로 고조선왕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치려고 하였다는것은 당시 고조선이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부여에서도 어떤 외적의 침략도 능히 막아낼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있었다.

부여사람들속에서는 상무기풍이 강하게 지배하였다. 부여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하였고 사냥경기도 자주 진행하군 하였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존대하였다. 

 

옛 기록에서 부여사람들이 《몸집이 크고 성격이 굳세며 용감한》기질을 가지고있다고 한것은 우연하지 않다. 부여사람들의 강한 상무기풍은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였다.

 

부여에는 비교적 정연한 군사지휘체계와 병역제도가 세워져있었다.

군대의 최고지휘권은 왕에게 있었다. 국왕밑에 가들이 거느린 기본전투부대들이 있었다.

부여의 병력수는 B.C. 246년에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동원한 군대수가 5만명이나 되였던것으로 미루어보아 수만명이상이라고 볼수 있다.

 

❖ 력사이야기:《포개쌓은 알을 무너뜨리지 말라》

 

진국도 강한 군대를 가지고있었다.

진국의 군대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여있었으며 그가운데서 주목되는 력량은 보병이였다.

 

진국말기에 신(新)라 침략군 1 500명을 단꺼번에 포로하여 노예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있는것으로 보아 당시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진국의 개별적인 변방소국들도 국가방위의 의무를 담당하였던 조건에서 자체의 군대를 가지고있었다. 그것은 변방소국들에 군사관계사업만을 전문적으로 맡아보는 관직인 우보가 있었으며 한번 전투에 천명의 기병이 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별적인 소국들의 군대는 하나의 지방군으로서 진국의 군사체계의 한 구성요소로 되였다.

구려도 상당히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있었다고 짐작된다. 구려는 동방의 천년강국으로 그 위력이 널리 알려졌던 고구려의 전신국으로서 당시 군사력발전수준에서는 고조선과 부여, 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을것이다.

이처럼 고대조선국가들의 군대는 다른 나라들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노예소유자적왕권의 안전에 장애로 되는 노예를 비롯한 피압박근로대중의 반항을 진압하기 위한 폭력수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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