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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검성이 배반에 울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동요분자들은 왕과 대신인 성기를 암살하고 적들앞에 투항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정세는 급격히 악화되고 고조선왕조는 무너지고말았습니다.》

앞에 있는 대적보다 내부에 숨어있는 한명의 배신자가 더 위험한 법이다. 이놈들은 형세가 좋을 때에는 충신인체 하며 충신의 얼굴을 그려붙여가지고 다니다가도 불리해지면 순간에 간신으로 변하여 외세에 지조를 팔고 애국을 물어뜯는다.

왕검성이 만조선군민들의 높은 항전기세에도 불구하고 함락당하고 그로 하여 고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빠지게 된것은 이런 추악한 배신자들때문이였다.

 

△ 만조선의 상층내부에서 나타난 반역자들에 의한 의거왕의 살해

순체가 양복의 군대를 병합한 후 전쟁은 네번째 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루선장군의 군사까지 자기 휘하에 거머쥔 순체는 솜씨를 보이려했던지 침략무력을 총발동하여 왕검성에 대한 검질긴 공격을 들이대기 시작하였다. 한나라침략자들과 성방어군사이에는 반년동안이나 치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한나라군대가 충차로 성을 공격하면 성안에서는 불화살을 날려 불태워버리고 성벽을 깨려고 쓸어들면 끓는 물을 부어 적들을 쓸어눕히군 하였다.

 

우거왕이 부수도 왕검성에까지 나와서 나라의 운명을 걸고 싸움을 지휘하였으므로 성방어군들의 기세는 충천하였고 의지 또한 굳세였다.

적아간의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적의 포위속에서 싸우다 보니 희생자도 적지 않고 무기와 군량사정도 어렵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대신들속에서는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지어 우거왕에게 《강화》요청을 하며 투항을 설교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중신들이라는 로인, 한음, 왕협이 달아났다는 보고를 받은 우거왕은 성이 독같이 났다. 그는 반역자들의 가족들을 잡아가두고 종신노예로 만들것과 경계를 엄하게 하여 성을 넘어 적진으로 도망가는 자는 즉석에서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변절자들의 투항으로 왕검성의 방어는 더욱 곤난해졌으나 비온뒤 땅이 굳어지듯 애국적인 만조선군민들은 완강한 의지를 가지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왕검성에서 적아간의 공방전은 B.C.108년 여름까지 계속되였다.

이렇게 되자 감히 도망은 못가고 형세만 관망하고있던 니계상 참은 더욱 절망에 빠졌다. 평소에 로인, 한음들과 한배속이던 자기를 이번 일로 저으기 수상쩍은 얼굴로 보군 하는 우거왕의 눈총도 두려웠지만 전쟁에서의 승산도 있어보이지 않았던것이다. 궁하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법이라 막바지에 몰린 참은 자객을 시켜 우거왕을 살해하고 적진으로 도망쳤다. 이때 왕자 장(장각이라고도 한다)을 비롯한 일부 왕족들과 고위관리들도 투항하였다.

그러나 왕검성방위자들은 동요하지 않고 반침략투쟁을 계속하였다.

 

△ 고조선의 멸망

왕검성방위자들은 국왕이 살해되고 여러 고위관리들이 투항하여 성방위력이 약화되고 붕괴상태에 빠졌으나 대신 성기장군을 지휘자로 내세우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 엄혹한 판국에서 군민들은 성기장군의 드높은 애국심과 항전의지를 알게 되였다. 군민들의 한결같은 추천으로 새로 성방어지휘자로 된 성기장군은 대오를 수습하고 성벽을 보수하는 한편 비상한 투지를 가다듬고 방어전을 지휘하였다.

 

갖은 방법을 다하여 거듭 공격해보았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가자 순체는 투항해온 우거왕의 아들 장과 로인의 아들 최를 성안으로 들여보내여 고조선군민들을 회유, 기만하게 하였다.

성기는 이들을 응당 반역자로 처단하여 목을 베여 처형해야 하였으나 《신하》의 도리로 임금의 아들을 어찌 처형하랴 하는 생각으로 그들을 내버려두었다.

결국 우거왕의 아들 장과 로인의 아들 최는 경계가 약해진 틈을 리용하여 성기장군을 살해하였다.

력사이야기: 반역자의 말로​

성기장군을 잃은 후에도 왕검성의 방어자들은 적의 포위공격을 물리치기 위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통일적인 전투지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더 견지하지 못하고 성은 함락되고말았다.

 

부수도 왕검성은 비록 함락되였으나 고조선인민들은 침략군이 더 깊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강하게 방어함으로써 한나라군대로 하여금 압록강하구 북쪽, 본계, 무순계선에서 더이상 나오지 못하게 가로막았고 고구려인민들과 합세하여 한때 청원현, 신빈현서부까지 침입해들어왔던 적들을 서쪽으로 격퇴하였다.

 

한나라침략자들은 부수도 왕검성을 점령한 다음 이곳을 중심으로 한 만조선의 일부 지역에 락랑, 현도, 진반, 림둔 등 이른바 《한4군》을 설치한다고 하였다.

력사이야기: 옮겨진 《점제비》

압록강이남의 고조선중심령역을 비롯한 만조선의 전지역에서는 인민들의 반침략투쟁이 계속되였으나 고조선통수부가 부수도에 나가 전쟁을 지휘하다가 패함으로써 사실상 만조선은 붕괴되고말았다.

만조선왕조는 부수도 왕검성의 함락과 국왕, 왕자이하 고위관료들이 살해되거나 투항한것으로 하여 결국 종말을 고하였다.

B.C. 109 ~ B.C. 108년 고조선-한전쟁은 항전대오, 전투대오안에서 통일단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대렬안에서 투항분자가 생겨나면 전쟁에서 승리할수 없으며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기였다.

만조선이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은 그후 일정한 시기까지 압록강하류 남쪽지역에서 황룡국, 안평국, 락랑국, 예맥소국 등 여러 소국들로 갈라져있다가 고구려에 의해 통합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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