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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없이 파탄된 한나라의 수륙병진공격​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조선인민들은 전쟁 첫 시기에 바다와 륙지에서 동시에 밀려드는 한나라침략군의 대규모적인 공격을 성과적으로 물리쳤습니다.》

고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였던 섭하가 만조선의 비왕을 살해한것은 국가의 존엄을 훼손하는 엄중한 도발행위였으며 만조선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서 료동군동부도위의 소재지를 기습하고 섭하를 처단해버린것은 정정당당한 자위적조치였다.

그런데 한무제는 이것을 구실로 고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도발하였다.

 

 

△ 고조선-한전쟁의 시작, 한나라의 수륙병진계획

한무제는 죄인들까지 긁어모아 대규모적인 침략군부대를 꾸리고 남월과 흉노 등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양복이나 순체와 같은자들을 장수로 임명하여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B.C.109년 가을에 루선장군 양복이 거느리는 5만의 수군과 좌장군 순체가 거느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륙군이 바다와 륙지에서 동시에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B.C. 109년 가을 한무제는 수군을 제(오늘의 산동반도)에서 출발시켜 고조선의 렬구(오늘의 료하하구)에 상륙시킨 다음 패수를 건너 공격해오는 륙군과 합세하여 왕검성(부수도 왕검성)을 침공할 수륙병진작전을 꾀하였다.

 

무제는 이들에게 신표로 부월을 안겨주며 두 장군이 반드시 료동의 왕검성(고조선의 부수도)에서 만나 합세하여 그 성을 함락시킨 다음 그 기세로 기본수도 평양 왕검성까지 석권하라고 일렀다.

한무제가 만조선의 부수도를 먼저 공격하라 한것은 우선 륙군이 고조선의 저항을 극복하면서 평양 왕검성까지 도달하자면 시일이 걸릴것을 타산한것이였다. 또한 수군이 아직 평양쪽 배길에 익숙하지 못한데다 먼 바다항행에 견딜만큼 싸움배가 든든치 못하였으므로 부득이 그중 파악이 있는 발해연안의 렬구에 수군을 상륙시켜 배후로부터 고조선의 전연방어군을 들이친 다음 륙군과 합세하여 평양 왕검성으로 밀고나가도록 하려는데서였다.

 

한나라침략군이 변경을 넘어섰다는 급보가 봉수대들을 거쳐 수천리 떨어진 왕검성의 궁안에 날아들자 우거왕은 나라의 중신들과 관료들을 궐내에 불러들여 방비대책을 토론하였다. 토의끝에 고조선군은 료동의 패수(대릉하)계선과 부수도 왕검성에 기본방어군을 편성배치하고 패수계선에서 적의 공격을 좌절시킴으로써 놈들의 수륙병진계획을 분쇄할 전술을 세웠다.

 

우거왕은 중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가 직접 부수도로 가서 이 싸움을 지휘할것을 결심하였다. 그바람에 고위관료들과 태자를 비롯한 일부 왕족들도 우거왕을 따라 료동행을 하게 되였다. 왕의 행차와 수만의 군사들이 떠나는 날 온 평양 왕검성(수도성)이 떨쳐나 바래주며 승전을 기원하였다.

드넓은 료동평야에 전쟁의 불구름이 몰아쳐왔다.

부수도 왕검성에 도착한 우거왕은 패수방어선으로 가장 믿는 장수를 보내며 거기서 반드시 적의 예기를 꺾어놓으라고 신신당부하였다.

 

△ 한나라침략군의 수륙병진계획의 파탄

한나라 륙군과의 첫 싸움은 패수에서 벌어졌다.

패수의 지방군과 왕검성에서 떠나온 중앙군이 합세하여 편성된 고조선의 강력한 패수서군은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있다가 패수를 도하하려는 순체의 료동군사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안기였다.

 

선참으로 건너오던 졸정 《다》가 거느린 료동지방출신 군사들은 대안의 험한 지형지물에 의거하여 쏘아대는 고조선군사들의 비발치는듯한 화살세례에 태반이 하백의 룡궁구경을 가게 되였다. 가관은 좌장군 순체앞에서 선봉을 자청하여 흰목을 쓰던 《다》가 군사를 내몰고서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다리야 날 살리라 줄행랑을 놓았으나 그 《죄》로 참형을 당한것이였다.

 

고조선의 패수서군은 적들의 도하를 성과적으로 물리치고 배다리도 불살라버림으로써 적 륙군의 료동진출에 치명적타격을 주었다.

 

 

한나라의 수군의 처지도 같았다.

루선장군 양복이 5만의 군사들을 수백척의 싸움배에 갈라싣고 제에서 떠나 왕검성의 이웃인 렬구(료하하구)에 도착한것은 그로부터 수십일이 지나서였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목선으로 발해를 건느자니 룡왕신에게 절만도 수백번하며 여기에 겨우 닿았다. 그리고도 하늘이 돈잎만하게 보였던지 양복은 7천의 군사를 선발대로 보내여 왕검성(부수도)을 함락시킨다고 장담해나섰다.

 

원래의 계획으로 말하면 렬구에 도착하여 대기하고있다가 순체의 부대가 패수계선의 고조선방어진을 돌파하고 진격해온 다음 합동하여 왕검성을 포위공격하게 되여있었다. 그러나 륙군이 첫 전투에서 패하여 거기서 눌러앉아있으니 안달이 나기도 했으나 보다는 단독으로 왕검성을 함락시켜 이름을 크게 떨쳐보리라는 공명심이 굴뚝같은 그는 기다리지 않고 수군만으로 왕검성을 《포위》공격하였다.

 

우거왕의 군대가 모두 패수쪽으로 몰려가서 순체에게 붙잡혀있으니 왕검성이 텅 비여있으리라고 타산한 양복은 왕검성에 대한 공격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자기 군막에서 막하 장수들을 신칙하여보낸 양복이 불안한 생각에 잠못들고 귀뚜라미소리를 세고있을 때 별안간 《와ㅡ》하는 함성이 사방에서 터졌다. 그리고는 여기저기에서 홰불이 강물처럼 흐르더니 자기 군사들이 창칼에 찔리고 도끼에 장작패우듯 녹아나는 소리가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양복이 장막을 젖히고 칼을 빼들며 나오는 서슬에 소고삐 서너기장쯤되는 앞에서 여기를 바라고 달려오던 고조선군사 셋이 장창을 내질렀다. 다급히 칼을 들어 옆으로 쳐내려 했으나 셋이 장창을 모두어쥐고 내지르는것인지라 그 힘이 어찌나 센지 그는 칼을 떨구고 궁둥방아를 찧고말았다.

이제는 다로구나 하고 지옥의 환상이 머리속을 아찔하게 치는데 군졸 하나가 다행히 그를 제꺽 둘쳐업고 산속으로 내뺐다. 등에 업혀 어느 산속으로 경황없이 가고있던 그는 얼마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업고 헐떡이는 군졸에게 물었다.

고조선군사들의 기습으로 하여 살아남은것이 없는것같다는 군졸의 말에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와 가슴을 쳤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한나라군대가 왔다는것을 알면 기가 질려 성안에 들여박혀있으리라 생각했던 고조선군사들에게 되게 얻어맞았으니 양복은 후회가 막심하였다.

 

그때 왕검성에서는 이미 사전정찰을 통하여 양복이 허풍에 뜬 자라는것과 그가 끌고 온 부대가 수적으로도 적고 전투력도 약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방어군은 그날 밤으로 성문을 열고 노도와 같이 밀고나가 적들을 호되게 족친것이였다.

 

10여일만에야 살아남은 군사의 일부를 그러모은 양복은 저들이 둔치고있던 렬구로 황황히 내빼고말았다.

수륙병진계획에서 바다로부터의 공격임무를 맡았던 양복의 수군도 이렇게 여지없이 패하고보니 수륙병진이 아니라 수륙병퇴가 되고만 셈이였다.

이처럼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 일떠선 슬기롭고 용감한 고조선인민들은 침략자와의 첫 싸움에서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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