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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의 나라 진국​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조선, 부여, 진국의 력사를 잘 풀어야 우리 나라 고대사의 체계를 바로세울수 있고 삼국의 사회경제적성격문제도 명확하게 밝힐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고대사의 체계를 바로 세우자면 고조선, 부여, 구려와 함께 조선중남부지역에 자리잡고있던 진국의 력사를 바로 해명하여야 한다.

원래 B.C. 3 000년기 후반기에 조선중남부지역은 단군조선의 판도안에 들어가게 되였으며 고조선의 영향밑에 점차 고대사회에로 이행하게 되였다. 

 

△ 후국으로서의 진국이 고조선왕조로부터의 분립

당시 조선중부이남지역에 새로 형성된 크고작은 수많은 소국들은 단군조선왕조의 후국으로 존재하면서 일정한 의무를 걸머진 동시에 중앙왕조의 선진적인 사회제도와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자기 세력을 강화하여나갔다.

조선중남부지역의 고대주민들은 따뜻한 기온과 한강, 금강, 락동강, 영산강, 섬진강을 비롯한 크고작은 강하천류역에 펼쳐진 비옥한 충적지 등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을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농업을 비롯한 여러가지 생산활동을 적극 벌려나갔다.

B.C. 2 000년기에 이르러 조선중남부지역의 생산분야에서 벼농사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였다.
 

경기도 려주군 흔암리 12호집자리와 김포시 가현리 니탄층, 전라남도 라주시 가홍리의 영산강지류 부식토층, 경기도 고양시 대화리 부식토층과 하남시 미사동유적, 광암리고인돌무덤, 부천시 고강동집자리 등에서 벼와 조를 비롯한 낟알들이 나왔다.

 

이것은 한강, 금강류역의 충적지대에서 벼농사가 진행되였으며 벌방농사에 별로 뒤지지 않았다는것을 의미한다.

조선중남부지역주민들이 큰 부락을 이루고살았다는 사실을 통하여 당시에 농업이 발전되였음을 알수 있다.

 

청동기시대로부터 고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는 여러 시대의 유물이 포함되여있는 송국리유적은 길이 2km, 너비 1.5km되는 대규모의 유적으로서 지금까지 드러난 집자리는 모두 19개이다. 그중 정리된 살림집 12개는 직경이 4m안팎의 원형움집과 길이 약 6m, 너비 4m정도의 모가 죽은 장방형의 움집이였으므로 매개 집은 단혼적인 개별가족들의 살림집이였다고 인정된다.

 

단혼적인 가족의 개별가옥들로 구성된 큰 부락 또는 큰 부락을 중심으로 가지를 쳐나간 수많은 독립적인 작은 촌락들이 늘어난 사실과 그에 따라 수많은 무덤떼가 형성되였다는것은 농업 특히 알곡작물재배가 급속히 늘어나 인구가 증대되여갔다는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농업의 발전이 한편으로 수공업생산의 발전과 상품류통을 크게 자극하여 로동생활조건과 식생활조건, 위생문화적인 생활조건을 개선하게 하였으며 필연적으로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기때문이였다.

인구의 급속한 증가는 당시의 조건에서 주민집단들 서로의 경제적리해관계의 대립을 첨예화시켰으며 농경지쟁탈전을 위한 분쟁을 야기시켰다.

중부조선남부지역에서 드러나는 환호목책시설들이 그러한 사실들을 보여주고있다.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 A지구 동쪽강안에서 발견된 목책유적과 부여군 송국리에서 발견된 목책렬, 경상남도 울산시 응촌면 검단리에서 대규모의 집자리유적과 유적을 둘러싼 환호시설이 나타난것은 당시 이러한 목책, 환호들이 대규모마을들을 둘러싼 군사시설이였으며 이미 마을을 단위로 한 소국들사이에 정치적 및 경제적리해관계의 충돌과 자체보위의 목적으로부터 이런 시설물들을 세울 정도로 집단들-촌락들의 호상관계가 대립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중부이남지역에 존재한 소국들가운데서 새로 자라난 정치적주도세력으로 하여금 물질적 및 군사적기반을 강화하는데로 나가게 하였으며 결국은 단군조선왕조의 지배와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분립과정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진국의 성립

분립경향이 점차적으로 짙어가던 시기 삼한지역의 세력들은 단군조선으로부터 후조선에로의 왕조교체가 있은 B.C. 15세기 중엽에 그것을 현실로 되게 하였다.

 

B.C. 3 000년기 중엽이래 종주국으로서 조선중남부지역을 천수백년동안이나 후국으로 통치해오던 단군조선에서는 B.C. 15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분립세력들의 장성과 인민들의 투쟁 그리고 국고의 고갈, 자체내부모순에 의해 교체되는 사변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단군조선의 후국으로 있던 여러 지방세력들이 분립하였는데 조선중남부지역의 소국세력들도 례외로 될수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되는것은 평양일대의 대형고인돌무덤과 맞먹는 큰 규모의 막돌고인돌무덤과 2중뚜껑고인돌무덤이 축조된 사실이다.

이 무덤들은 비록 서북조선에서 발생하여 파급된 무덤형식이긴 하지만 일정한 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과정에 지방적특색을 강하게 나타냄으로써 우의 고인돌무덤들과 구조상에서 구별된다.

충청북도를 북쪽계선으로 하여 그 남쪽지역에만 분포되여있는 이 형식의 고인돌무덤들은 조선중남부지역의 무덤가운데서 가장 크고 웅장한것이다.

막돌고인돌무덤의 대표적인것은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상갑리에 있는 고인돌무덤인데 뚜껑돌의 크기가 6.5m, 너비 5.3m, 두께 2m에 달한다. 무덤은 뚜껑돌아래의 막돌고인돌사이가 빈공간으로 되여있는데 이 공간이 주검칸으로 쓰이였다.

 

2중뚜껑고인돌무덤의 대표적인것으로 창원시 덕천리 1호무덤을 들수 있다. 이 무덤은 뚜껑돌의 무게가 30t이 넘고 무덤구뎅이의 크기가 길이 8m, 너비 6m, 깊이 4.5m인데 무덤구역시설도 대단히 큰 대형무덤이다. 규모에서 평양일대의 대형오덕형고인돌무덤과 맞먹는 조선중남부지역의 이러한 특색있는 고인돌무덤들을 축조하는데 채석과 석재가공, 조립을 위한 기술집단과 함께 수많은 로력이 동원되였을것이다.

 

대형고인돌무덤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진 무덤떼의 이러한 구성상태는 무덤에 묻힌 사람들이 대단한 권세를 가진 고위층이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다음으로 주목되는것은 비파형단검, 비파형창끝 등의 청동무기류가 성행하게 된것이다.

비파형단검, 비파형창끝 등의 청동무기류가 나온 대표적인 유적으로서는 송국리돌관무덤, 우산리유적, 오림동유적, 적량동유적, 운대리고인돌무덤, 진동리돌관무덤, 덕치리 2호고인돌무덤, 평려동고인돌무덤 등을 들수 있는데 여기서 나온 비파형단검들은 대체로 B.C. 2 000년기 후반기의것이라고 할수 있다.

조선중남부지역에서 특대형고인돌무덤들과 이 지역에서만 특징적인 청동무기류들이 대량 출토된것은 비파형단검이나 비파형창끝을 소유한자들의 수가 늘어났으며 이 지역에 군림하고있던 정치집단이 큰 세력으로 자라나 독자성을 유지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이렇게 일찍부터 고조선에 대하여 반독립상태로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라난 조선중남부지역의 소국정치집단은 처음에는 3개의 큰 집단 즉 마한, 진한, 변한 련맹체들을 이루었으며 B.C. 12세기경에 하나의 통일적인 고대국가 진국(辰國)을 형성하였다.

 

 

진국은 북쪽으로 후조선(고조선)과 린접하였으며 동, 서, 남 세면이 바다에 면해있었다. 진국의 북변은 시기에 따라 얼마간 변동이 있었을수 있으나 말기에 그 서쪽은 오늘의 례성강계선이였고 그 동쪽은 강원도 중부계선이였다. 진국의 마한은 오늘의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지역을, 진한은 락동강동쪽의 경상남북지역과 강원도의 남부지역을, 변한은 락동강하류 서쪽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남북도의 일부 지역을 차지하고있었다.

진국은 처음에 마한의 월지국(月支國)에 수도를 정하였다가 말기에는 남쪽의 건마국(乾馬國)으로 옮겼다. 월지국은 오늘의 직산일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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