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밀영과 지역적령도거점​ 마련

 

 

국내에 진출하시여 백두산밀영건설을 지도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주체25 (1936). 9 ]

 

국내의 백두산지구에 전반적조선혁명의 중심적령도거점을 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장백의 넓은 지역과 장차로는 국내종심깊이 근거지를 확대하며 더 나아가서는 무장투쟁의 불길을 북부조선으로부터 중부, 남부조선에 이르는 전국적판도에로 번져가게 하는 동시에 당조직건설과 통일전선운동을 확대발전시키고 전민항쟁준비를 강력히 추진시키려는것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전략적구상이였다.

 

백두산지구는 군사지형학적견지에서 볼 때 천연요새를 이루고있는 대산림지대로서 아군이 지키기에는 유리하고 적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한 지대였다. 백두산주변일대는 주민들의 반일감정이 남달리 강하고 혁명의 대중적지반도 좋은 곳이였다. 백두산지구에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조선혁명운동전반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올리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는 전략적지대를 확보하면 민족의 모든 력량을 반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킬수 있었고 전민항쟁의 승리를 이룩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러한 구상밑에 주체25(1936)년 9월 20일 몸소 국내 백두산지구의 소백수골에 진출하시였다.

 

 

백두산밀영의 사령부와 사령부의 내부

 

밀영후보지선정을 위하여 국내 백두산지구에 선발대로 파견되였던 성원들의 안내를 받으시며 소백수골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도를 펼쳐놓으시며 참 좋은 자리를 찾아냈다고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소백수골은 동강회의직후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과업을 받고 백두산지구로 먼저 파견되였던 김주현, 리동학 , 김운신 등에 의하여 탐색된 국내의 첫 밀영후보지로서 사령부가 위치하게 될 곳이였다. 소백수골에서 서북방향으로 40리가량 되는 곳에는 백두산이 솟아있고 20리쯤 되는 지점에는 선오산, 동북방향으로 15리정도 떨어진 수림속에는 간백산이 각각 솟아있었다. 소백수골 뒤에는 사자봉이 길게 가로놓여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날인 9월 21일 소백수골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지휘성원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남호두를 떠나 백두산에 이르기까지의 원정에 대하여 총화하시였다. 그리고 백두산근거지창설을 적극 다그칠데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하시고 구체적인 분공도 조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백수골에 꾸려지는 백두산밀영은 전반적조선혁명의 중심적령도거점으로 되여야 하며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하여 백두산주변의 북부조선일대와 서간도일대에 각이한 사명을 가진 밀영들을 건설하고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게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그리고 백두산근거지를 튼튼히 꾸리고 점차 국내의 백무고원, 개마고원, 랑림산줄기로 뻗어나가면서 근거지를 국내의 종심깊이 확대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밀영건설을 1차적과제로 내세우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혁명의 중심적령도거점으로 될 밀영건설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그리하여 짧은 기간에 소백수골안에 백두산밀영이 꾸려지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백두산밀영은 조선혁명의 본거지로, 중심적령도거점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백두산밀영은 조선혁명의 책원지인 동시에 심장부였으며 우리의 중핵적인 작전기지, 활동기지, 후방기지였다.》

 

그때는 소백수골의 밀영을 《백두산1호밀영》, 《백두산밀영》 또는 《백두밀영》이라고 하였다. 밀영의 안전과 비밀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거기에는 사령부직속 부서성원들과 경위대를 포함한 일부 골간부대만 있게 하고 출입도 엄격히 제한단속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수많은 위성밀영들을 꾸리도록 하시였다.

 

백두산밀영망에 속한 위성밀영들은 조선쪽에도 건설되였고 중국쪽에도 꾸려졌다.

 

국내의 백두산지구에는 사령부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접수소인 동시에 대기소, 면담소, 숙소, 강습소, 훈련소, 출판소 등으로 리용된 사자봉밀영과 소부대가 들어가 활동할수 있게 된 곰산밀영, 재봉소, 무기수리소, 병원, 후방련락소 등으로 이루어진 소연지봉밀영 그리고 선오산밀영, 간백산밀영, 무두봉밀영을 비롯하여 각이한 사명과 임무를 지닌 밀영들이 건설되였다.

 

국내 백두산지구에 꾸려진 백두산지구비밀근거지의 밀영들은 비밀을 보장하기 위하여 백두산1호밀영, 2호밀영, 3호밀영 등으로 불리웠으며 항일무장투쟁을 국경일대와 국내깊이에로 확대하기 위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작전기지, 활동기지, 후방기지로서 그리고 백두산주변과 주민지대를 혁명화하고 장악통제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간도일대의 대산림지대에는 곰의골밀영, 홍두산밀영, 지양개밀영, 이도강밀영, 횡산밀영, 리명수밀영, 부후물밀영, 청봉밀영과 무송지구의 밀영들을 비롯한 수많은 위성밀영들이 꾸려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밀영망을 형성하는 사업과 함께 백두산주변지역에 지하혁명조직을 내오고 인민들을 혁명화하기 위한 사업을 힘있게 벌리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구상하신 백두산근거지창설은 백두산지구에 밀영들을 건설하는것과 함께 백두산기슭의 주민지대들에 지하혁명조직을 건설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정치공작원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백두산주변 주민지대는 형식상 적들의 행정권이 미칠뿐 실제에 있어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장악통제하는 혁명화된 지역으로 전변되였다.

 

그리하여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국내와 서간도 넓은 지대에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 백두산근거지가 창설되게 되였다.

 

1930년대 전반기 두만강연안에 창설되였던 유격구는 고정된 유격구를 유격활동의 본거지로 삼은 근거지로서 눈에 보이는 공개적인 혁명근거지였다면 백두산근거지는 밀영들과 지하혁명조직들에 의하여 군사정치활동을 전개한 보이지 않는 혁명근거지였다. 대산림지대에 설치된 조선인민혁명군의 은페된 밀영들과 그 주변지역 인민들속에 깊이 뿌리박은 지하혁명조직으로 구성된 반유격구형태의 백두산지구의 근거지는 혁명의 강력한 성새였다.

두만강연안에 창설되였던 유격구에서는 근거지안의 인민들이 인민혁명정부의 시책속에서 살았다면 1930년대 후반기에는 지하조직망에 망라된 인민들이 표면상으로는 적의 통치를 받았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의 지령과 로선에 따라 움직이였다. 또한 1930년대 전반기에는 유격구사수를 위한 방어에 큰 힘을 넣어야 하였지만 1930년대 후반기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였다.

 

백두산근거지가 창설됨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은 적들의 폭압과 《토벌》공세가 강화되는 속에서도 공고한 전략적기지에 의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해나갈수 있게 되였으며 조선혁명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를 더욱 철저히 실현하여 항일혁명의 전성기를 펼칠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백두산근거지를 창설하신 후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을 국내각지에 파견하시여 군사정치활동에 유리한 산림지대에 여러가지 형식의 비밀근거지들을 대대적으로 꾸리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정력적인 지도밑에 북부조선일대의 창평, 풍산, 후창, 후치령, 랑림, 부전, 신흥, 위원, 창성, 오가산지구와 중부조선일대의 덕천, 양덕, 안주, 평성, 구월산, 신평, 곡산, 토산, 판교 그리고 태백산지구와 지리산지구를 비롯한 전국각지의 중요지대들에 비밀근거지들이 꾸려졌다.

 

이 비밀근거지들은 백두산밀영에 자리잡은 조선혁명의 사령부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해당 지역에서 벌어지는 무장투쟁과 전민항쟁준비사업 등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는 지역적령도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화; 두산의 천연요새​

        학습자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 제13장 5. 백두산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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