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하유격구역창설을 시범으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20(1931)년 독창적인 유격근거지창설방침을 제시하시고 몸소 시범을 창조하시여 그것을 일반화하도록 하시였다.

유격근거지를 창설하여야만 적들로부터 유격대와 혁명군중을 보호하고 혁명력량을 급속히 확대강화할수 있으며 그에 의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조선혁명을 힘있게 발전시킬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유격근거지창설의 중요성과 의의를 깊이 헤아리시고 이미 주체20(1931)년 겨울명월구회의에서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고 그에 기초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벌릴데 대한 사상을 제시하시고 그것을 항일무장투쟁을 벌리는데서 나서는 중심과업의 하나로 내세우시였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열린 소사하회의에서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창설에 관한 문제를 의제로 제기하시고 그 실현에서 나서는 당면과업과 방도들을 구체적으로 밝히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근거지창설의 중요성을 깊이 명심하고 이미 이룩하여놓은 성과에 토대하여 유격근거지창설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전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유격근거지창설사업에서 중요한것은 유격근거지창설지역을 옳게 선정하는것이라고 하시면서 유격근거지창설조건이 갖추어져있고 유격대들이 조직되여 활동하고있는 지역들에서부터 유격근거지를 꾸려야 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를 창설하고 거기에 혁명군중을 집결시키며 그들의 생활조건을 보장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릴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또한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창설사업과 병행하여 반유격구창설사업을 적극 추진시킬데 대하여서도 강조하시였다.

《기쁨싣고 달리는 말발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소사하회의후 해방지구형태의 근거지인 유격구를 창설하는 사업을 적극 밀고나가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한 첫단계의 사업으로서 농촌을 혁명화하는데 큰 의의를 부여하시고 두만강연안의 여러 지방들에 당 및 공청의 유능한 지도핵심들을 파견하시였다.

 

그리하여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여 무장투쟁이 힘있게 벌어지는 가운데 두만강연안의 넓은 지역이 빠른 속도로 혁명화되여갔다. 혁명화된 농촌지역은 유격구가 꾸려질 때까지 반일인민유격대가 발을 붙이고 활동할수 있는 림시거점으로 되였으며 유격근거지를 꾸릴수 있는 지반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몸소 소사하유격구창설사업을 시범적으로 진행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21(1932)년 5월 중순 소사하에서 소사하 구당 및 혁명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유격구역을 창설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인민들을 혁명화하기 위한 사업을 더욱 강화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그리고 5월 하순에는 소사하의 구당비서와 구농민협회 회장을 부르시여 유격근거지창설사업정형을 료해하시면서 유격구역창설사업에서 나타난 편향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도밑에 주체21(1932)년 5월말 안도현 소사하에는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해방지구형태의 근거지인 소사하유격구역이 창설되게 되였으며 이를 계기로 유격구창설사업은 빠른 속도로 진척되였다.

 

유격근거지를 꾸리기 위한 우리 혁명의 전략적과업은 항일무장투쟁을 그 요람기에 말살하려고 미쳐날뛰던 일제의 무차별적인 《토벌》에 의하여 어려운 난관에 부닥치게 되였다. 1932년 봄 관동군과 조선주둔군은 이른바 간도처리방책을 모의하고 조선주둔군소속의 림시파견대를 동만 4개 현에 투입하여 모든 촌락들과 시가지들을 불바다, 피바다로 만들었다.

 

 

일제의 《토벌》만행으로부터 혁명군중을 보호하는 문제는 조선혁명의 운명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유격부대들과 혁명조직들이 발악하는 일제침략자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는 한편 안전한 산간지대들을 확보하고 거기에 혁명군중을 집결시키도록 긴급조치를 취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취하신 조치에 따라 각지의 혁명군중은 무장대오의 호위를 받으며 집단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일제의 통치체계에서 벗어난 산간지대농촌마을로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그때 왕청현에서는 현성(백초구)으로부터 100리나 떨어진 소왕청과 대왕청의 대수림지대로 깊숙이 이동하였다. 농호가 수십호밖에 되지 않던 소왕청의 좁은 골안에 1, 000명도 넘는 사람들이 단번에 들어온것을 비롯하여 안전지대로 집결한 인민들의 수는 무려 수만명에 이르렀다.

동만의 산간지대로 들어온 사람들가운데는 혁명에 참가할 각오가 되여있거나 실천투쟁속에서 직접적으로 단련되고 풍부한 투쟁경험을 가진 정수분자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두만강연안 산간지대는 주민구성이 매우 좋고 튼튼한 군중적지반을 가진 해방지구로 전변되여갔다. 유격구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다나니 처음에는 식량이 걸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콩죽도 먹고 그것이 떨어지면 송기떡, 고사리, 도라지, 더덕, 둥굴레 같은것도 삶아먹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혁명가를 부르며 주먹을 흔들면서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친일파를 타도하자고 소리높이 웨쳤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남만과 북만일대에 진출하여 활동하시면서도 유격구창설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고 세심히 지도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통신원들을 보내시여 두만강연안일대에서 유격구가 창설되여가는 정형을 수시로 료해하시였으며 그곳 혁명조직들이 적들의 《토벌》로부터 해방지구를 보위하기 위한 방위체계를 튼튼히 세우며 혁명군중의 생활을 안착시키고 반일인민유격대의 후방사업을 믿음직하게 보장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려나가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정력적인 지도에 의하여 유격구창설사업은 빠른 속도로 진척되였다.

 

주체21(1932)년 봄부터 주체22(1933)년 초까지사이에 두만강연안의 산간농촌지대들인 중국 안도현의 소사하, 다진강을 중심으로 한 지대를 비롯하여 왕청현의 소왕청, 가야허, 요영구를 중심으로 한 지대, 연길현의 왕우구, 해란구, 석인구, 삼도만, 위자구를 중심으로 한 지대, 화룡현의 어랑촌, 우복동을 중심으로 한 지대, 훈춘현의 대황구, 연통라자, 리수구를 중심으로 한 지대들에는 적들의 통치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방지구형태의 근거지인 유격구가 창설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정력적인 령도에 의하여 짧은 기간에 두만강연안의 넓은 지역에 해방지구형태의 근거지인 유격구가 창설되게 되였다.

 

                일화: 다진강으로 옮긴 유격구

                학습자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3권 7장 1.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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