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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집아들의 도움을 받으시며

장울화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주체14(1925)년 4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무송제1소학교에서 공부하시던 시절 제일 친하게 지내신 부자집 아들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장울화는 나의 혁명활동을 도와주다가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병보석으로 나와서도 나의 안전을 위해 사진현상약을 먹고 최후를 마친 렬사입니다.》

 

 

장울화는 비록 부자집에서 나서 자랐지만 위대한 수령님의 인품에 매혹되여 소학교시절은 물론 항일무장투쟁준비시기에도 그이의 혁명활동을 적극 도와나섰다.

 

항일무장투쟁준비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있던 때인 주체19(1930)년 여름 조선혁명은 종파사대주의자들의 모험적인 책동으로 하여 엄혹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종파사대주의자들은 5.30폭동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을 대신 국제반전일을 계기로 이해 8월 1일 길돈철도연선지방을 중심으로 또다시 무모한 폭동을 일으켰다. 8.1폭동을 기화로 적들은 5.30폭동때 일으킨 검거선풍을 더욱 확대하면서 애국적인민들을 닥치는대로 체포구금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만주각지에서 우수한 지도핵심들이 무리로 붙잡혀 희생되고 조직에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이 조직선을 잃고 흩어지게 되였다. 적들의 거듭되는 탄압앞에서 일부 단련이 부족한 사람들은 신심을 잃고 혁명의 전도에 대하여 우려하고있었다. 사태는 날로 험악해지고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 엄혹한 시련을 이겨내기 위하여 적들의 폭압을 맞받아나가 혁명동지들을 보호하고 파괴된 혁명조직들을 복구정비하기 위한 투쟁을 벌릴것을 결심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체없이 폭동이 휩쓴 지역들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시여 혁명군중이 종파분자들의 선동에 더는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하시는 한편 길림과 교하, 돈화를 비롯한 적들의 폭압이 가장 심한 지역에는 자신께서 가기로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안녕이 곧 조선혁명의 운명과 잇닿아있음을 잘 알고있는 혁명동지들은 저마다 그이께서 가시려는 곳에 자기들을 보내주실것을 간청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동지들의 진정을 고맙게 여기시면서도 애써 씨를 뿌리고 키워온 혁명조직들이 위험에 처해있는데 어떻게 앉아있겠는가고 하시면서 한몸의 위험을 무릅쓰고 결연히 길을 떠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파괴된 혁명조직들을 복구정비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선의 고비들을 헤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처음으로 가신 곳은 길림이였다. 이미 예견하신 일이지만 길림의 사태는 너무도 험악하였다. 거리와 골목마다 경찰과 특무들이 욱실거리였고 조선사람만 보면 무턱대고 잡아가두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지하에 들어간 조직들을 찾아낸다는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변장하시며 조직에 관계했던 성원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쉬임없이 걷고 걸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길림에 여러날 묵으시면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핵심들을 만나시여 조직들의 형편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시고 파괴된 조직을 빨리 복구하며 적들의 탄압으로부터 조직을 튼튼히 지켜내기 위한 대책을 하나하나 세워주시였다. 살벌한 길림의 한복판에서 오매에도 그리던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게 된 지하조직성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김일성동지의 신변을 결사보위할 굳은 결의를 다지였으며 하루빨리 8.1폭동의 후과를 가시기 위해 활기를 띠고 일떠섰다.

 

길림의 혁명조직들이 그 어떤 백색테로선풍에도 주동적으로 대처할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도를 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해룡, 청원일대로 험난한 길을 이어가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중국인신사로 변장하시고 길림본역에서가 아니라 적들의 경계가 덜 미치는 변두리역에서 해룡행렬차에 오르시였다. 적들의 감시와 수색은 차칸에서도 계속되였다. 바로 이때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뜻밖에도 무송소학교시절의 동창생인 장울화를 만나시여 위기를 넘기게 되시였다. 

 

장울화는 중국인대부호출신이였으나 위대한 수령님의 교양과 지도를 받고 혁명의 길에 나선 청년으로서 그이를 끝없이 존경하고 따랐다. 그는 심양으로 공부하러 떠나면서 그이를 만나뵈옵고저 길림에 들렸다가 행처를 찾지 못하여 그대로 가던 길이였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보기 위해 해룡으로 가는중이라고 하면서 너무도 반가와 어쩔줄을 몰라하며 위대한 수령님을 1등칸으로 모시였다. 그날따라 순사들이 승객들에 대한 조사를 심하게 하였지만 신사옷차림을 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무송일대에서 손꼽히는 부자의 아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시는것을 보고 공손히 허리굽히며 지나갈뿐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울화의 도움으로 해룡역까지 무사히 가시였으나 역두의 경계가 역시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길림시교외의 자그마한 역에서 해룡행렬차를 타고 떠나셨다는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적들은 서둘러 해룡에 있는 일본령사관에 련락하여 해룡역에 물샐틈없는 수사진을 펴고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가병까지 거느리고 아들을 마중하러 나온 장울화의 아버지의 고급마차를 타시고 적의 경계망을 벗어나실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울화와 함께 해룡시내에 있는 고급려관에서 2~3일간 계시면서 그를 반일사상으로 교양하시였다. 그때 장울화는 자기도 투쟁을 하기는 하여야겠는데 집에서 허락하겠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였다. 그러는 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가 없어지는데 집이 다 무엇이냐고 하시면서 부모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혁명을 해야 한다고, 그것이 중국을 위한 길이고 중화민족을 위한 길이다, 일제놈들이 쳐들어오면 그때에는 조선사람들뿐아니라 중국사람들도 같이 들고일어날것이라고 일깨워주시였다.

장울화는 위대한 수령님께 혁명의 길에서 끝까지 싸울 결의를 다시금 굳게 다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룡과 청원사이에 파견한 조직성원을 만나시기 위하여 그곳을 떠나려 하시자 장울화는 놈들의 경계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혼자서 어떻게 그 위험한 곳에 가겠는가고 하면서 그이의 신변을 걱정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위대한 수령님을 돕고 보호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고 하면서 그이께서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실수 있도록 자기네 고급마차에 태워다 드리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장울화의 도움으로 해룡현과 청원현의 경계에 있는 조직성원인 중국동무의 집에 머무르시면서 이 일대의 혁명조직들의 대오를 수습할수 있게 하신 다음 다시 길림을 거쳐 교하로 가시였다.

교하지방의 형편도 길림일대와 다를바 없었다. 5.30폭동과 8.1폭동후 적들의 검거선풍으로 혁명조직들은 혹심하게 피해를 입었으며 모두 놈들의 검거를 피하여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조직성원들을 찾을 길이 막연하였다. 그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는 조직성원을 만날 때까지 림시로 몸을 숨기고 지낼수 있는 생활거처가 필요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모로 생각하시던 끝에 아버님의 지도를 받던 독립운동자들을 찾아가기로 하시였다. 나라를 찾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고 아버님과 친분관계도 있었던것만큼 얼마간의 도움을 받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저 독립군 중대장을 하던 사람에게 들리시였는데 그는 수령님을 대하자 몹시 반가와하면서도 자기에게 화가 미칠가봐 겁부터 먹고 떨고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자들을 잘 후원해주던 사람의 집을 찾아가셨는데 그도 역시 반갑게 맞아주기는 하였지만 중국음식점에 가서 식사 한끼를 대접하고는 그길로 헤여지자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사상적결합이 아닌 인정만 가지고서는 혁명투쟁을 함께 해나갈수 없다는것을 체험하게 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독립운동자들과 헤여지신 후 거리에 나서시여 혁명운동에 참가하던 한광의 집을 찾으시였다. 그러나 집에는 그도 없고 한영애도 없었다. 옆집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모르겠다고 하여 인차 돌아서시려는데 어느놈이 벌써 고자질을 했는지 경찰들이 막 뒤쫓아오고있었다. 사태는 매우 위급하였다.

그 순간에 옆집 아주머니는 그이를 바라보다가 누구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변이 위험한것 같은데 어서 부엌으로 들어오시라고 하면서 업었던 아이를 재빨리 그이께 업혀주었다. 그리고는 대답은 자기가 다하겠으니 부엌에 가만히 앉아서 불이나 때라고 이르는것이였다. 뒤따라 온 경찰들이 문을 열어제끼고 방금 이리로 온 청년이 어디로 갔는가고 묻자 주인아주머니는 청년이라니, 어떤 청년말인가, 우리 집에는 아무도 온 사람이 없다고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경찰들은 어디로 갔을가 하고 머리를 기웃거리며 다른집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경찰들이 다시 나타나서 심부름을 시킬것이 있으니 위대한 수령님을 나오라고 밖에서 소리쳤다.

그때에도 아주머니는 밖으로 나가면서 앓는 사람이 어떻게 심부름을 가겠는가, 정 바쁜일이라면 내가 대신 갔다오겠다고 하고서는 그놈들이 시키는 심부름을 갔다왔다.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기발하고 지혜있는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시였다. 저녁에야 밭에 나갔던 집주인이 들어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밤 혁명을 하다가 조직과의 련계가 끊어져 속수무책으로 있다고 하는 집주인의 안내로 교하시내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외딴초막에 은신처를 정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생판 모르는 초면이지만 생사를 가리지 않고 희생적으로 도와나서는 교하의 그 이름모를 아주머니의 행동을 통하여 혁명하는 사람들이 생명까지도 서슴지 않고 의탁할수 있는 결백하고 견실한 의리는 역시 근로하는 인민들속에 있다는것을 절감하시였다.

이튿날 새벽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처럼 애써 찾으시던 한영애를 만나시고 그를 데리고 할빈으로 가시였다.

 

한영애는 바로 그전날 위대한 수령님을 위험한 고비에서 구원해준 그 아주머니한테서 소식을 듣고 날이 밝자 달려왔던것이다. 적들의 광란적인 폭압만행으로 동지들이 체포되고 조직이 파괴되여 어찌할바를 모르고있던 그는 사선을 헤치고 그곳까지 오신 그이를 뵈옵자 너무도 고맙고 감격에 북받쳐 한동안 말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다가 뜨거운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그에게서 간도의 형편을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놈들이 당장 쳐들어오겠는데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서 그놈들과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조직들을 빨리 수습하고 인민들을 각성시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조직과의 련계가 끊어져 안타까와하는 한영애를 데리고 할빈으로 가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교하에서 머나먼 할빈으로 가신것은 그곳 혁명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였다. 중요하게는 할빈에 있는 국제당련락소를 통하여 국제당과의 련계를 가지시려는데 있었다. 5.30폭동과 8.1폭동에 대한 국제당의 견해를 알고싶으시였고 그것이 국제당의 지령에 의한것인가, 아니면 종파분자들이 제멋대로 생각해낸 망동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국제당이 그런 지령을 내렸다면 론쟁을 해서라도 그 수레바퀴를 멈춰세우시고싶었던것이다.

주체19(1930)년 8월 하순 할빈에 도착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할빈부두가의 상부가입구에 있는 국제당련락소에 찾아가시여 련계를 가지시고 그곳 일군들에게 한영애를 소개하신 후 5.30폭동과 8.1폭동으로 하여 동만에 조성된 사태와 카륜회의정형에 대하여 통보하시였다. 

 

국제당련락소에서도 두차례의 폭동에 대해서는 모험주의라고 평가하였다. 련락소일군은 카륜회의에서 채택된 결정들이 다 조선의 실정에 맞고 혁명의 원칙에도 부합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맑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대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립장은 고무적인것이라고 격찬하면서 새로운 당창건방침을 내놓으시고 그 모체로 되는 기층당조직으로 건설동지사를 내오신것은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국제당으로부터 우리 혁명의 생명으로 되는 자주성의 원칙, 창조성의 원칙 그리고 새로 내세운 모든 로선에 대한 전적인 지지를 받으시였으며 길동지구 공청책임비서사업을 맡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정세가 너무 살벌하여 경관들이 드나들지 않는 백계로씨야인들이 경영하는 고급려관에 드시였지만 려관에서 식사를 할만한 돈이 없어 거리에 나가서 값눅은 강낭지짐 한두점으로 끼니를 에우군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이곳에서 어려운 나날을 보내시면서 할빈지구의 지하혁명조직들을 찾으시여 어떤 정황에 부닥쳐도 흔들림없이 조직을 지켜낼수 있도록 모든 대책을 세워주시였으며 조직들간에 서로 련계를 취해주시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려나가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할빈에서 계획하신 일을 성과적으로 마치시고 8.1폭동의 피해를 제일 많이 입은 돈화지구로 나가시였다.

 

돈화는 이 폭동의 근원지였고 중심무대였다. 여기에는 일제침략군의 한개 수비대 본부와 길림총령사관산하의 분관이 있었으며 구동북군의 한 련대본부가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헌병, 경찰, 특무들이 욱실거리고있었으므로 낮에는 중국 산동옷을 입고 중국말을 하시면서 조직성원들을 찾아다니시였으며 밤에는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하시며 혁명조직들을 복구정비해나가시였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돈화현성 서문밖에 있는 중학교에 여러차례 나가시여 반일연설도 하시고 청년학생들을 만나 교양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폭동의 후과를 수습해놓으시고 돈화에서 길동지구공청위원회를 조직하시였으며 이어 주체19(1930)년 가을 두만강연안일대로 떠나가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의 감시와 수사의 그물을 헤치시며 걸으신 간고하고 험난한 수천리길에서 언제나 동지들과 혁명군중을 굳게 믿으시고 그들에게 튼튼히 의거하여 위험한 고비들을 넘기시였으며 강철의 의지와 완강한 혁명적전개력으로 시련을 겪고있는 혁명조직들을 수습정비하시였다. 이 과정에 반혁명의 공세앞에서 겁을 집어먹거나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리고 동요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시면서 혁명가의 신념에 대한 문제를 두고 많은것을 생각하게 되시였다.

 

이 나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만민을 공감시키고 불러일으킬수 있는 정확한 혁명로선과 전략전술이 있고 자체의 혁명력량이 있다는것을 체득할 때에 생기며 투쟁을 통하여 굳어지는 법이라는 철리를 더 깊이 간직하게 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정력적인 지도와 헌신적인 투쟁에 의하여 위기에 처하였던 혁명조직들은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억세게 뿌리내리게 되였으며 위축되였던 혁명군중은 다시금 투쟁의 길에 떨쳐나서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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