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중심의 력사관과 그 부당성

 

1. 서론

 

신라중심의 력사관과 그 부당성을 정확히 리해하여야 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우리 나라 력사가 고구려중심의 력사라는것을 정확히 인식할수 있으며 지난날의 력사책들의 제한성을 바로 평가하고 조선중세력사에 대한 외곡책동을 저지시킬수 있다.

7세기이전 삼국시기의 력사는 강대한 고구려의 선도적이며 중심적인 역할에 의하여 발전하였다. 그리고 7세기말~10세기초 발해와 후기신라가 병존한 시기에는 발해가 후기신라보다 강대한 나라로 존재하였으며 고구려를 계승하여 세워진 고려는 발해유민들을 포섭하고 후기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여 우리 나라에서 첫 통일국가로 출현하였다.

고구려중심의 력사관에 기초하여 삼국시기와 발해, 후기신라시기, 고려시기의 력사가 과학적으로 정립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외의 일부 력사학자들은 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조선중세력사를 신라를 중심으로 발전한듯이 인식하고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지난날의 력사책들이 신라중심의 력사관에 기초하여 신라중심의 체계로 서술되였다고 말하는 경우에도 그 부당성에 대한 연구는 전면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 론문에서는 신라중심의 력사관이 생겨나게 된 사회력사적배경과 그 과정, 이러한 관점과 립장이 부당하다는데 대하여 밝히려고 한다.

 

2. 본론

 

신라중심의 력사관은 한마디로 말하여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력사가 발전하였다고 보는 견해와 관점이다. 다시말하여 7세기이전 삼국시기에 신라가 력사발전에서 중심적역할을 하였을뿐아니라 7세기이후에는 삼국을 《통일》한 후기신라만 존재하였으며 후삼국을 이어 고려가 《재통일》을 이룩한것으로 보는 견해와 관점이다.

신라중심의 력사관은 크게 두가지 내용을 담고있다. 하나는 7세기이전 삼국시기에 신라가 력사발전에서 중심적역할을 하였다고 보는 견해와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7세기이후시기는 《통일신라》시기이며 그것이 고려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와 관점이다.

1세기 초중엽부터 10세기초의 우리 나라 력사에서 신라가 우리 민족사의 중심에 서있었다는 이러한 견해와 관점은 력사적사실과는 맞지 않는 부당한것이다.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첫 봉건국가로 등장한 고구려는 삼국가운데서 제일 강대하고 발전된 나라였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보다 먼저 봉건사회에 들어섰으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가장 발전된 나라였다. 또한 백제, 신라와의 관계에서 언제나 주도권을 잡고 삼국의 통일과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런것으로 하여 고구려는 당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나라였으며 우리 민족의 통일적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중심적역할을 논 나라였다. 고구려가 력사발전에서 논 중심적인 역할은 그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고려에로 이어져갔다.

삼국의 력사발전에서 논 천년강국 고구려의 선도적이며 중심적인 역할과 관련한 력사적사실에 대하여서는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12세기초 이전시기의 사람들도 잘 알고있었다. 발해의 임금들이 자기 나라의 정식국호가 발해이면서도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서는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였으며*¹ 고려시기의 사람들도 국호를 고려(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하면서*² 그 전통과 문화를 이어나간것은 그것을 말해주는 하나의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¹《속일본기》 권10 성무천황 신구 5년 1월 갑인

*²《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무인 원년 6월

 

오래동안 전해오던 고구려중심의 력사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기인 12세기초이후 돌변하였다. 다시말하여 삼국시기의 력사가 마치도 신라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기정사실이며 후삼국을 이어 고려가 《재통일》을 실현한듯이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였다.

《신라중심의 력사서술체계는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에 물젖은 봉건사가들에 의하여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게 꾸며진것입니다.》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에 물젖은 봉건사가들에 의하여 꾸며진 신라중심의 력사서술체계는 신라중심의 력사관에 뿌리를 두고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견해와 관점은 일정한 사회력사적배경과 해당 계급과 계층의 요구와 리해관계에 의하여 가지게 된다. 신라중심의 력사관도 바로 그렇게 세워지게 되였다.

김부식을 비롯한 봉건사가들이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게 《삼국사기》를 신라중심으로 꾸미게 된것은 12세기 전반기의 시대적배경과 봉건지배계급의 요구와 리해관계에 따른것이였다.

《삼국사기》편찬직전 고려의 형편은 매우 복잡하였다.

밖으로는 북쪽 녀진인들이 세운 금(金-1115년 성립)나라가 새롭게 큰 나라로 대두하여 서쪽의 료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는 한편 고려에 대하여 사대할것을 강요하면서 계속 압력을 가하고있었다.

한편 서경(평양)의 묘청일파는 인종왕에게 지금 서경땅에 왕의 《기운》이 돌고있는것만큼 거기에 도읍을 옮기게 되면 나라가 크게 부흥할것이고 금나라도 항복해올것이며 그밖에 36개 나라가 복속해올것이라는 지리풍수설을 내들고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것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국왕 인종과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의 관료들은 나약성을 나타내면서 금나라에 대한 사대굴종의 길로 나갔다. 서경에 대화궁(현 위치: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 1동)을 건설하고 국왕을 옮겨오는 방법으로 권력을 잡으려던 서경량반관료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파탄되자 정변을 일으키고 대위국이라는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서경인민들의 투쟁은 오래가지 못하고 《토벌군》과의 치렬한 공방전끝에 진압되고말았다.

묘청일파가 고구려의 옛수도인 평양에 도읍을 옮기면 고구려옛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있는 금나라까지도 항복해올것이라는것을 강조한것은 그것이 비록 지리풍수설에 기초한 비과학적인것이기는 하나 거기에는 옛 고구려를 동경하며 그 옛 령토를 회복하고 강대한 나라로 발전할것을 바라는 인민들의 지향이 반영되여있었다. 묘청일파가 정변을 일으키자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합류해나선것도 바로 그때문이였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북쪽에서 새로 일어난 금나라에 대하여 사대의 길로 굴러떨어진 집권세력과 그를 반대하는 반사대세력사이의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편찬이 시작되였다. 김부식이 《삼국사기》편찬을 끝낸것은 묘청의 정변을 진압한 때로부터 9년이 지난 1145년이였지만 그 준비는 정변을 진압하고 돌아온 직후에 인차 시작되였다. 김부식이 묘청의 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후 공신칭호와 함께 감수국사로 임명되였다는것은 그것을 시사해준다.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고려의 최고위급 원로대신의 한사람으로서 금나라에 대한 사대를 주장한 중심인물이였으며 묘청일파의 정변당시에는 반사대투쟁에 궐기한 인민들의 투쟁을 앞장에서 탄압한 《토벌군》의 우두머리였다. 이러한 시대적배경하에서 그의 금나라에 대한 사대적립장은 그대로 《삼국사기》편찬에 반영될수밖에 없었다.

그는 《삼국사기》편찬에서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로 발전할것을 바라는 인민들의 념원을 묵살하는 한편 저들의 사대적립장을 합리화하는데 초점을 집중하였다. 《삼국사기》편찬에서 그에게 나선 긴절한 문제는 고려의 력사적연원을 고구려와 직접 잇닿지 않는것으로 꾸미는것이였다. 당시 김부식은 묘청의 란에 합세한 인민들이 서경에서 죽음도 두려움없이 《토벌군》과 결사적인 투쟁을 벌리는것을 직접 체험하였다. 김부식은 그것이 결코 묘청개인에 대한 환상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내세운 구호에 고조선,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로 발전할것을 바라는 인민들의 념원이 반영되여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때문에 그는 그들의 투쟁을 진압하는것만으로는 그들속에 새겨져있는 강대한 고구려에 대한 동경심을 뿌리뽑을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가 우리 나라 력사상에 천년강국으로 존재해있은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고 또 그 나라를 계승하여 발해가 신라와 함께 병존해있은것도 엄연한 사실이였다. 그러므로 옛 고구려땅을 차지하고있는 금나라에 대하여 사대정책을 실시하는 집권층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과 항거의 기운이 사라질수 없으며 그것이 어떤 조건이 성숙되면 쉽게 묘청의 란과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날수 있다는 위구심을 가지게 하였다. 때문에 김부식은 신라의 력사를 기본으로 하고 고구려의 력사를 깎아내리며 발해의 력사를 배제하고 후기신라를 이어 고려가 세워진것으로 《삼국사기》를 꾸미는것이 가장 적절하고 합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김부식은 그렇게 하여야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강국으로 만들려는 인민들의 지향을 꺾어버리고 또 력사문제를 둘러싼 금나라와의 시끄러운 분쟁도 무난히 넘길수 있다고 타산하였다. 그리하여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에 물젖은 봉건사가들은 신라중심의 력사관에 서서 《삼국사기》의 서술체계를 꾸미였으며 집필을 다그쳐 1145년에 완성본을 내놓게 되였다.

12세기초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에 물젖은 고려봉건사가들에 의하여 생겨난 신라중심의 력사관은 그 이후시기 봉건사가들에게 전수됨으로써 그들도 신라중심의 견해와 관점에 기초하여 조선력사편찬을 진행하게 하였다.

남먼저 사회발전단계에 들어섰고 국력이 제일 강하며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서 큰 역할을 한 나라를 중심으로 력사발전을 보는 견해와 관점은 과학적인 력사관으로 되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를 중심에 내세우는것은 비과학적인 력사관으로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의 력사를 전하는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신라중심의 력사관이 비과학적인 견해와 관점이라는것을 명백히 찾아볼수 있다.

신라중심의 력사관이 부당하다는것은 우선 삼국가운데서 봉건사회에 제일 늦게 들어섰고 고구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으며 군사적으로 약한 신라를 력사발전의 중심에 놓고본 사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삼국가운데서 신라는 제일 늦게 봉건국가로 등장하였다.

우리 나라와 중국동북지방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존재한 우리 나라의 고대노예소유자국가들은 고조선과 부여, 구려, 진국이였다.

고대노예소유자국가들이 붕괴되면서 봉건국가들이 세워졌다. 고구려는 B.C. 277년(B.C. 3세기 초엽)에 세워지고 후부여는 B.C. 2세기초, 백제는 B.C. 1세기말, 신라는 A.D. 1세기 초중엽, 가야는 A.D. 1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보는바와 같이 신라는 고구려보다 대략 3세기, 백제보다 1세기정도 늦게 봉건사회에로 이행한 나라였다. 이것은 삼국시기 력사에서 신라가 뒤자리에 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신라는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신라가 고구려정치제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최고권력자였던 군주의 지위에서 찾아볼수 있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에서 군주의 정식칭호는 왕이였으나 내용상으로는 대왕-천자에 해당하였다. 신라사람들은 고구려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천자, 천손이 다스리는 신성한 나라로 자부한것*처럼 소국단계의 자기 나라 건국시조를 하늘과 결부시켜 천자, 천손으로 간주하고있었다.

 

* 《모두루묘지》

 

그리고 국력의 장성에 발맞추어 신라국왕들은 점차 대왕-천자로 자부하기도 하였다.*

 

* 《진흥왕순수비》, 《삼국유사》권1 기이(《도화녀와 비형랑》, 《하늘이 준 옥띠》, 《선덕왕이 세가지 일을 미리 알다》, 《태종춘추공》)

 

신라의 통치체제는 고구려의 중앙관직, 관등제도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는 고구려초기의 중앙관제를 본따 대보제를 내오고 A.D. 10년(남해차차웅 7년)에 석탈해를 대보로 임명하여 그에게 군국정사 즉 군사와 정치에 관한 사무를 맡기였으며 뒤이어 58년(탈해니사금 2년)에는 호공, 그 얼마후에는 김씨왕족의 조상인 김알지를 대보자리에 앉히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지방통치제도를 본받아 주, 군, 현제를 실시하였으며 그것이 군사적성격을 띠고 큰 고을이 작은 고을을 장악지배하는 령속관계를 이루게 하였다. 지방관직도 505년부터 고구려와 같이 주의 장관을 군주, 도독이라고 하였다. 그밖에도 신라가 6세기 중엽이후에 자기의 독자적인 년호를 제정한것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기때문이였다.

신라는 낮은 자세에서 고구려와의 국교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와 신라는 248-449년 6월경까지 오래동안 평화적국교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두 나라의 관계는 대등하지 않았다. 신라는 245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데다가 또 평양일대로의 진출이 강화되자 248년 2월에 먼저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관계를 가질것을 제기하여 두 나라사이에 국교가 시작되였다. 두 나라사이에 국교가 맺어진 후 호상래왕이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391년까지 140여년간 사신들이 왕래한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392년에 고구려사신이 신라를 방문하였다. 그때 신라의 나물왕은 《고구려가 강성하다 하여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고구려에-인용자) 볼모》*로 보냈다. 그로부터 10년후인 401년에 실성이 돌아오자 나물왕은 미사흔의 형 복호를 또 볼모로 보냈다. 신라왕이 고구려를 강성한 나라로 인정하면서 볼모를 보낸것은 자기 나라가 고구려와 대등한것이 아니라 약소국이라는것을 자인한것으로 볼수 있다. 한때 신라사람들은 고구려를 대국*²으로, 형*³으로 자기 나라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나라로 대하면서 상하관계를 맺었으며 신라왕은 고구려왕앞에서 노객(奴客)이 될것*4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1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나물니사금 37년

*2 《삼국사기》권15 렬전5 박제상

*3 《증원고구려비》 1행

*4 《광개토왕릉비》 9년 기해

 

신라는 문화적으로도 고구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고구려에 의해 삼국의 통일이 성과적으로 추진되고 세나라사이의 접촉이 잦아지기 시작하면서 고구려의 발전된 문물은 신라에 깊숙이 침투해들어갔다.

신라는 군사적으로 매우 약한 나라였다. 400년에 백제, 가야, 왜련합군이 신라에 침입하였을 때 고구려가 5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신라를 구원해준 사실*은 그 하나의 실례이다. 지어 고구려군대는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의 수도와 요충지들에 주둔하기까지 하였다.

 

*《광개토왕릉비》 10년 경자

 

또한 5세기말 신라는 자체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낼수 없는 형편에 처해있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백제와의 군사적련합으로 그에 대항하군 하였다. 신라가 치렬하게 싸우던 백제와 련합하게 된것은 475년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한 후부터였다. 481년 신라는 백제, 가야의 원병과 함께 호명 등 7개성을 빼앗고 미질부로 진격해오는 고구려군의 진격을 막았으며*¹ 494년에는 3 000명의 백제군의 증원을 받아 견아성을 포위한 고구려군을 겨우 격퇴시킬수 있었다.*²

 

*¹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제3 소지마립간 3년 3월

*²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 3년 7월

 

그 보상으로 495년 백제의 치야성이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였을 때에는 신라장수 덕지를 보내여 증원함으로써 백제군을 포위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 4년 8월

 

이렇게 5세기말에 신라는 혼자의 힘으로써는 고구려의 공격을 막지 못할 정도로 군력이 약하였다. 그러다가 6세기 초중엽 가야를 통합하여 일정하게 국력을 회복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을 기회로 이 나라들의 일부 령토를 침식하였다. 이것은 7세기초에 들어서면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군의 공격을 받게 된 시발점으로 되였다. 이 시기에 들어와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적대결상태는 현저히 완화되고 두 나라는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이행하였다.

602년 백제가 신라의 소라, 외석, 천산, 옹잠성을 공격한데 이어 608년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616-624년에 백제는 신라의 모산성, 가잠,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혈)책을 빼앗았다. 백제의 공격으로 많은 성들을 빼앗긴 신라는 626년 고구려에 청병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백제의 공격은 계속되여 626년에 주(왕)재성이 함락되고 627년에는 서쪽국경의 2개성이 또 함락되였다. 630년대에 들어와서도 백제의 공격은 계속되였으며 642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이해 7월에 백제의 의자왕이 대군으로 미후성 등 신라서변의 40여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8월에는 대야성을 점령하였다.*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선덕왕,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643년에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가 화친한 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더 드세찬 공격을 받아 또다시 여러 성들을 빼앗겼다.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공격전으로 막다른 처지에 빠진 신라는 648년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여 군사적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그후 654년말, 655년에는 고구려, 백제군에 의하여 신라북쪽의 33개 성이 또 격파당하였다.

신라가 군사적으로 약한 나라였다는것은 상비무력수에서 고구려와 대비해보아도 알수 있다. 고구려의 상비무력은 30만명이였고 전시에는 최고 100만명까지도 동원시켰다.* 그러나 신라의 상비무력은 10만명, 전시에는 20만명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 《구당서》 권199 렬전149 발해말갈, 《삼국사기》권46 렬전6 최치원

 

이처럼 신라가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군사적으로 매우 약한 나라였다는것은 신라가 삼국시기 력사발전의 중심에 놓일수 없다는것을 말하여준다.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은 폭력으로 다른 민족을 압살하려고 덤벼드는 외적과의 싸움에서 가장 격렬한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따라서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서 큰 역할을 한 나라를 력사발전의 중심에 놓는것은 력사를 대하는 옳은 견해라고 말할수 있다.

봉건중국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사대를 일삼던 신라의 통치배들은 외적의 침략을 받는 동족의 나라들을 도울 대신 그것을 기화로 자기의 령토를 넓히였다. 심지어 신라는 648년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패강(대동강)을 계선으로 하여 신라와 당나라가 땅을 나누어가진다는 비밀협약을 체결하였으며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리였다. 이렇게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 나선것이 아니라 외세와 야합하여 동족의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민족의 발전에 엄중한 위기를 조성한것이 바로 신라였다.

제반 력사적사실들은 삼국가운데서 봉건사회에 제일 늦게 들어서고 국력도 가장 약하였으며 이웃나라들의 영향을 받았을뿐아니라 반침략투쟁이 치렬하게 벌어지던 시기에는 동족의 나라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선 나라가 신라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라를 삼국시기 력사발전의 중심으로 보는것은 부당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내놓은 견해와 관점외에 다른것이 아니다.

신라중심의 력사관이 부당하다는것은 다음으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인정하고 후기신라와 병존한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의 력사를 조선력사에서 완전히 배제한 사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이 부당한 리론이라는데 대하여서는 이미 명백히 밝혀졌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실현한 나라가 아니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라당련합군에 의하여 무너진 후 대동강을 계선으로 하여 그 이남에 후기신라가, 그 이북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국이 세워져 200여년동안 존재하였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에 대한 지향도 그를 실현할만 한 힘도 없었다. 삼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린 나라는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였다.

력사적사실은 신라중심의 력사관을 가진 사대주의봉건사가들이 주장하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이 부당하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들은 신라중심의 력사관으로부터 7세기말~10세기초의 조선력사서술에서 발해를 의식적으로 배제하였지만 실지 력사자료들을 보면 후기신라의 북쪽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동족의 나라 발해가 존재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였다.

발해건국의 중심세력은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유민폭동군 부대였다. 696년에 영주지방에 살고있던 고구려유민들과 말갈인들은 당나라강점자들을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고구려유민폭동군은 대조영이 지휘하였고 말갈폭동군은 걸사비우가 지휘하였다.

그런데 그후 말갈인부대는 격파당하고 걸사비우는 전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유민폭동군 부대는 계속 승승장구하였다. 고구려유민군은 대조영의 지휘밑에 동쪽으로 진격하여 698년에 발해국창건을 선포하였다. 이상의 건국과정은 발해국을 세운 세력이 고구려유민들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는 고구려의 정치제도와 경제, 문화를 계승발전시킨 나라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뒤를 이어 천자국-황제국의 체모를 갖춘 나라로 등장하였다.

발해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왕을 황상(皇上), 대왕(大王)이라고 칭하였으며* 고구려시기에 년호를 사용하던 전통을 이어받아 자기의 독자적인 년호를 사용하였다.

 

*《정효공주묘비》

 

발해는 고구려시기에 더욱 발전풍부화된 우리 민족의 문화와 풍습을 이어받았다. 건축분야만 보아도 발해의 수도 상경성안의 궁성이 궁전건물들의 배치와 개별적건물들의 구조 등에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의 안학궁과 거의 같은것과 발해의 불교사찰에 고구려시기의 독특한 1탑 3금당식 절배치양식이 계승된것, 고조선, 고구려시기의 오랜 전통인 살림집의 난방시설이 발해로 이어진것, 고구려시기의 돌칸흙무덤형식이 발해로 계승된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문화와 풍습을 이어받았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발해와 고구려의 계승관계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던것은 당사자인 발해사람들과 그 시대 주변나라 사람들이였다. 그러므로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인가 아닌가 하는것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발해사람들 그리고 후기신라와 당나라 그밖의 일본사람들의 견해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당사자인 발해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것을 확신하고 또 당당히 선포하였다.

발해국의 창건자인 대조영이 건국직후에 자기의 맏아들에게 계루왕이라는 칭호를 준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계루라는것은 원래 고구려왕실의 상징으로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계루왕이라는 말은 고구려왕이라는것과 같은 뜻이다.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자마자 자기의 맏아들에게 이런 칭호를 준것은 자기 나라가 고구려 계승국이라는것을 내외에 명백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후 제2대 무왕 역시 727년 일본에 보낸 첫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고 부여이래의 풍속을 지키고있다.》고 하면서 《전날의 관례대로》 즉 이전 고구려시기의 관례대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다고 하였다.*

 

*《속일본기》 권10 성무천황 신구 5년 1월 갑인

 

발해사람들은 그후에도 자기 나라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것을 일관하게 강조하였다. 발해왕들은 일본에 보낸 편지 마지막에 보통 《고(구)려왕》 아무개라고 썼고 발해사신들은 자신을 《고(구)려사신》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발해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있던 동시대의 주변나라 사람들도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후기신라의 관로 최치원은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집결시켜 발해를 세웠다고 하였으며*¹ 《구당서》를 편찬한 후진의 류후도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을 《고려별종》(고구려에서 갈라진 족속)이라고 하였다.*²

 

*¹《삼국유사》 권1

*² 《구당서》 199 하 렬전149 하

 

일본왕은 759년, 771년에 발해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을 정식으로 《고구려국왕》이라고 명기하였으며 발해사람들을 《고구려사신》이라고 부르고 발해에 파견되는 저들의 사신도 《고구려에 보내는 사신》이라고 불렀다.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였다는것은 발해사람들자신이 확인하고 후기신라와 당, 일본 등 동시대 주변나라사람들이 다같이 인정한 엄연한 사실이였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을뿐아니라 후기신라보다 강한 나라이기도 하였다.

한가지 자료로서 후기신라의 최치원이 작성하고 신라왕의 명의로 당나라에 보낸 《사불허북국거상표》에 《지난 건녕 4년(897년) 7월에 새해축하사신으로 파견되여간 발해의 왕자 대봉예라는 사람이 당나라의 외교의례석상에서 자기 나라를 신라보다 웃자리에 놓아달라고 요청한데 대하여 당나라측에서는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의식에서 어느 나라의 이름을 먼저 부르고 뒤에 부르는가 하는것을 그 나라가 강한가 약한가 하는데 따라 정한것도 아닌데 이제 어떻게 이미 정해놓은 나라들의 자리순위를 그 나라가 강성해지거나 쇠약해진다고 하여 바꾸겠는가. 마땅히 옛 관례대로 시행할것이다.>》*라고 한것을 들수 있다.

 

*《동문선》 권33 표전 사불허북국거상표

 

발해는 건국의 담당세력으로 보나, 국가들사이의 계승성을 밝히는 징표로 보나, 당대 사람들의 력사적인식의 견지에서 보나 틀림없이 고구려의 계승국이였으며 오히려 후기신라보다 강한 나라였다.

신라중심의 력사관이 부당하다는것은 다음으로 고구려를 계승하여 세워지고 첫 통일국가로 출현한 고려를 《통일신라》를 이어 세워진 나라로 본 사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 고려는 신라를 이어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였다.

고려는 원래 고구려땅(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차지하고 세워진 궁예의 태봉국을 뒤집어엎고 918년에 선 나라였다. 고려를 일떠세운 기본세력집단, 성립초기의 고려의 기본주민은 고구려남부지역에서 살고있던 고구려유민들이였다. 태조 왕건의 먼 조상인 호경은 옛 고구려령역이였던 백두산일대에서 내려온 사람이였으며 그의 할아버지벌되는 작제건도 고구려사람이였다. 뿐만아니라 고려건국에서 주동적역할을 한 세력들, 건국초기 고려의 기본주민집단도 고구려사람들의 먼 후손들이였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것은 왕건을 비롯한 고려사람들이 새로 선 나라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것을 선언하기 위해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선포하였을뿐아니라*¹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을 일떠세우려고 한데서도 잘 알수 있다. 새 나라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간단하게 고려라고 부른 전례에 따라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달았다. 때문에 993년 고려-거란담판때 서희는 《우리 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러니 나라이름도 <고려>라고 달았다》*² 라고 당당히 선언하였던것이다.

 

*¹ 《고려사》 권1 태조 원년

*² 《고려사》 권94 렬전7 서희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이였기때문에 고구려의 건국시조 동명왕을 숭배하였고 고구려의 옛수도 평양(서경)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고려사람들은 고구려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무덤을 보호하였을뿐아니라 사당을 지어놓고 국가적으로 정기적인 제사를 지내였다. 고려에서는 왕의 명의로 계절마다 제사를 지냈으며 해당 관청에서 매달 두차례(초하루날, 보름날)의 제사의식을 진행하였다. 또한 고려는 고구려의 옛수도 평양을 중시하면서 수도 개경건설에 앞서 평양건설부터 진행하였으며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시키고 나라의 제2수도로 만들었다.

고려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시한것은 태조 왕건이 생전에 무려 10차나 서경을 방문하였고 죽으면서 앞으로 왕들이 평양에 가서 100일간씩 묵으면서 정치를 할데 대하여 유언까지 남긴 사실 그리고 태조, 정종, 인조왕때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여러번 시도한 사실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고려가 평양을 중시하고 여기에 수도를 옮기려고 한것은 고조선, 고구려의 옛수도였던 평양에 의거하여 고구려와 같은 강국을 일떠세우려는데 있었다.

고려는 고구려의 삼국통일지향을 이어받아 국토의 통일을 실현한 나라였다. 고려는 건국 첫 시기부터 통일정책을 내세웠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통일지향을 계승한것이였다. 고려말에 리제현이라는 관료와 국왕이였던 선효왕사이에 고려 태조 왕건의 정책을 놓고 이야기가 벌어진 일이 있었는데 이때 선효왕은 《… 우리 태조(왕건)가 새 나라를 세운 이후 아직 신라와 후백제를 차지하기도 전에 자주 서도(서경)에 가서 북쪽변두리를 순찰하군 하였는데 그것은 동명의 옛땅(고구려의 옛땅-필자)이 력사적으로 전해내려오는 우리 나라의 옛땅인것만큼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고 말겠다는 큰뜻을 가지고있었기때문이였다. 어찌 신라의 령토나 차지하고 압록강까지 수복할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것이 아니였다. 참으로 우리 태조의 도량과 계략은 크고 원대한것이였다.》*라고 말하였다.

 

*《고려사》 권2 태조 26년 리제현찬

 

이것은 고려가 태조 왕건당시부터 대동강이남의 후백제, 후기신라와 함께 그 이북의 옛 고구려땅을 다 통합하여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를 일떠세울 목표를 내세웠다는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고구려가 내세웠던 통일정책과 매우 근사하다는것은 더 강조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고려는 국토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남과 북 두 전선에서 힘찬 투쟁을 벌리였다. 고려는 북방의 옛 고구려령토를 차지하고 발해유민들을 포섭하기 위한 투쟁을 힘차게 벌려 압록강이남지역을 차지하였으며 수십만의 발해유민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대동강이남의 후백제, 후기신라통합에 큰 힘을 넣어 936년에 국토의 통일을 일단락짓고 첫 통일국가로 등장하였다.

고려는 고구려의 문화와 풍습을 이어받은 나라였다. 고구려와 고려건축유적의 계승관계와 고구려에서 건국시조의 무덤을 옮겨가는 풍습, 10월에 진행되던 《동맹》을 고려시기 팔관회로 계승한 사실은 그 대표적실례로 된다.

이것은 고려가 신라의 문화를 이어받은것이 아니라 고구려시기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한 나라였다는것을 명백히 말하여준다.

 

3. 결론

 

신라중심의 력사관은 고려의 관료였던 김부식 등이 12세기 전반기의 국내외정치정세와 봉건지배계급의 리해관계에 따라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게 꾸며놓은 견해와 관점이였다.

력사적사실은 신라가 삼국가운데서 봉건사회에 제일 늦게 들어서고 국력이 가장 약한 나라였고 고구려가 무너진 이후 우리 나라 력사는 신라만이 존재한 《통일신라》시기의 력사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후기신라가 병존한 시기의 력사였으며 고려가 《통일신라》를 이어 세워진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하여 세워진 첫 통일국가였다는것을 명백히 증명하여준다.

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우리 나라 력사는 신라를 중심으로 발전한것이 아니라 강대한 고구려를 중심으로 발전하여왔다.

우리는 신라중심의 력사관과 그 부당성을 옳게 인식하고 우리 나라 력사를 주체의 력사관에 기초하여 서술해나가야 할것이다.

 

실마리어 신라, 발해, 력사관

김일성종합대학 박사 부교수 전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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