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심 관 ​

고려시기 봉건국가가 지방에 세력지반을 가지고있는 중앙관료들에게 해당 지방에 대한 일정한 통제권을 부여하기 위하여 주던 명예벼슬이다.

935년에 투항해온 신라의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한것이 사심관제도의 시작으로 되였다. 그후 여러 《공신》들도 자기 본 고장의 사심관으로 되였다. 사심관의 임무는 해당 지방에서 지방토착세력인 부호장이하의 향리들을 장악통제하고 봉건적신분제도를 엄격히 유지하며 부역을 《고르게》하고 풍속을 《바로잡는》다는것이였다.

996년에 제정한 사심관에 대한 규정에 의하면 대체로 남자장정이 500명이상 있는 고을에는 4명, 300명이상 있는 고을에는 3명, 그 이하의 고을에는 2명의 사심관을 두기로 하였다.

11세기 초에는 본인의 아버지나 친형제가 호장으로 있는 고을에는 그를 그곳의 사심관으로 보내지 않게 하였다.

1019년에는 사심관을 그 지방사람들과 기인의 추천에 의하여 임명한다고 하였으며 그후에도 사심관을 임명하고 단속하는 규정들이 나왔다. 고려봉건국가에서 사심관제도를 실시한것은 건국초기 중앙집권적인 지방통치제도를 확립하지 못한 조건에서 지방세력을 회유하여 중앙정권에 복종시키기 위한것이였다. 그러나 사심관들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여 그들의 할거적경향이 심해지고 그들과 중앙정권의 모순은 더욱 커가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봉건정부는 사심관들이 넓은 지역에 세력을 뻗치는것을 제한할 목적으로 1134년에 대신들은 5향(부모, 본인과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및 처의 고향)가운데서 세곳의 사심관을, 그밖의 관리들은 5향가운데서 본인의 고향을 제외한 한두곳의 사심관만을 겸할수 있게 하였다. 또한 한곳의 사심관으로는 문관과 무관을 엇바꾸어 임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심관제도는 더욱더 문란해졌고 그로 인한 페단이 심해졌으며 봉건통치유지강화에 방해가 되였다.

당시 고려의 전국각지는 사심관들의 착취대상으로 되지 않은 곳이 거의 없게 되였다. 중앙집권적봉건통치질서가 어지러워진 12세기이후 사심관들은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하여 많은 땅을 차지하고 조세를 수탈하였으며 인민들을 억압하여 노비로 만들고 사사로이 형벌을 가하는 등 온갖 만행을 감행하였다. 인민들은 봉건국가와 사심관들에 의한 2중, 3중의 억압착취밑에서 신음하게 되였다. 반동적인 사심관제도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이 강화되고 또 사심관제도가 왕권강화에 대립적요소로 된다고 인정한 봉건정부는 1283년에 일단 사심관제도를 페지하였다. 그후 다시 사심관이 나온 일이 있으나 1318년에 주, 군의 사심관을 완전철페하였다. 그러나 얼마안되여 권세있는 토호들이 제멋대로 사심관행세를 함으로써 그 해독이 이전보다 더 심해졌다. 그리하여 다시 국왕의 명령으로 이러한 현상을 엄격히 금지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사심관행세를 하는 자들이 봉건국가의 법질서를 위반하고 자기 소유로 만든 농민들의 토지와 사람들을 찾아내여 본래대로 소속시키는 국가적조치가 취해졌다.

그후 1369년 신돈은 사심관제도를 복구하여 자기가 5도사심관이 되려하였으나 그의 세력의 지나친 증대를 꺼려한 국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CAPTCHA Image
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