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대답
《사회주의는 사상을 틀어쥐면 승리하고 사상을 놓치면 망한다는것이 력사에 의하여 확증된 진리이다.》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사상을 생명으로 하는 사회입니다.
사회주의의 공고발전과 그 운명은 사상을 확고히 틀어쥐고나가는가 못나가는가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사회주의건설의 비결은 사상을 기본으로 틀어쥐고 인민대중을 사회주의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켜 사회주의사상진지를 굳건히 다지는데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사상에 의하여 향도되고 사회주의사상을 기본추동력으로 하여 발전하는 사회입니다. 때문에 사상을 틀어쥐고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준비시키는 사업을 어떻게 하는가에 사회주의의 운명과 전도가 달려있습니다.
사상사업에서는 한걸음의 양보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시기 사회주의를 건설하던 동유럽나라들이 바로 그렇게 되였습니다. 이 나라들은 경제건설에만 치중하면서 물질문화생활이 높아지면 사상의식도 그에 따라 개변될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상사업을 홀시하였습니다. 그러다나니 제국주의의 사상문화적침투를 막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이 들이민 서방문화에 물젖은 사람들속에서 사상적와해와 변질이 일어났습니다. 공공연히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사회주의를 비난하던 끝에 나중에는 서방식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사회주의제도를 반대하여나섰습니다. 결국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되는 비극적인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여러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의 붕괴과정은 사회주의사회에서 사상을 양보하면 자본주의사상이 침습해들어와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병들게 되고
세계를 제패하려는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나라들과 반제자주의 길로 나아가는 나라들을 과녁으로 정하고 더욱 교활하고 악랄하게 책동하고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그것은 제손으로 제눈을 찌르는것과 같은 자멸의 길입니다.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와의 싸움은 경제력과 군사력의 대결이기 전에 사람들의 정신력, 사상의 대결입니다.
사회주의의 원쑤들의 책동이 로골화될수록 사상을 기본으로 틀어쥐고 사상사업을 앞세워나가는 여기에 사회주의위업을 전진시키며 승리적으로 완성해나갈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사회주의건설의 력사적 경험과 교훈은 사회주의가 사상을 틀어쥐면 승리하지만 사상을 놓치면 망한다는 진리를 뚜렷이 확증해주고있습니다.
허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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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탁아소는 해방후
탁아소를 꾸리는 사업이 기본적으로 끝나가던 주체36(1947)년 5월 어느날
탁아소가 꾸려져 어린이들을 받아 보육하기 시작한지 얼마후인 그해 7월 어느날
우리 나라에서 참다운 인민적인 어린이보육교양의 력사는 이렇게
오늘 우리 인민들은
김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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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개조의 력사적순차성문제와 3대개조사업에서
3대개조사업의 력사적순차성에 관한 문제는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착취사회에서는 인민대중의 사회정치적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개조사업이 전면에 나서게 되며 사회주의제도가 수립된 다음에는 자연개조사업과
이와는 달리 3대개조사업에서
이렇게 놓고볼 때 3대개조사업의 력사적순차성에 관한 문제와 3대개조사업에서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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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3대헌장의 력사적지위를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조국통일의 기치이며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정당하고 현실적인 투쟁강령이라는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강령이라고 하면 정당, 정치단체 또는 국가가 자기의 지도사상, 조직의 성격과 특징, 투쟁목적과 과업, 그 실현방도 등의 기본내용들을 집약적으로 밝힌 문헌을 말합니다. 조국통일3대헌장이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정당하고 현실적인 투쟁강령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것은 거기에 조국통일의 목표와 투쟁목적, 그 실현방도가 집약되여있기때문입니다.
《조국통일3대원칙과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은
조국통일3대원칙은 조국통일문제를 민족의 의사와 리익에 맞게 민족자체의 힘으로 풀어나갈수 있는 근본립장과 근본방도를 천명한 조국통일의 초석입니다. 조국통일3대원칙은 북과 남이 7.4공동성명을 통하여 확인하고 내외에 엄숙히 선포한 민족공동의 통일대강입니다.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은 온 민족의 단합을 이룩하여 조국통일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강령입니다. 이 강령에는 민족대단결의 목표와 리념적기초, 단결의 원칙과 방도가 전면적으로 명시되여있습니다.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은 통일국가의 전모와 그 실현방도를 밝힌 설계도입니다. 여기에는 나라의 통일을 북과 남의 사상과 제도를 서로 용납하는 기초우에서 가장 공정하고 순조롭게 실현할수 있는 기본방도가 제시되여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정세가 어떻게 변하고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든 조국통일3대헌장에 기초하여 자주통일위업을 실현해나가야 합니다.
박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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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반동들은 1905년초에 독도를 일본땅으로 만든다는 이른바 《내각회의》결정을 조작하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시마네현고시》제40호를 날조해냈습니다.
사마네현청은 1905년 2월 22일부로 된 《시마네현고시》제40호를 조작하면서 《북위 37° 9′30″, 동경 131° 55′, 오끼섬으로부터 서북 85mile에 있는 도서(작은 섬)를 죽도(다께시마)라고 부르며 오늘부터 본현소속 오끼도사의 소관으로 정하였다.》고 지방관보인 현보에 게재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방신문인 《산잉신붕》에 자그마하게 보도하였습니다.
일본정부는 날조된 《시마네현고시》제40호를 합리화하고 이를 계기로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인 독도를 강탈할 목적밑에 시마네현을 내세워 2005년부터 오늘까지 해마다 이른바 《다께시마의 날》이라는 년례적인 광대극을 벌리면서 독도가 《일본고유의 령토》라는 망언을 늘어놓고있습니다.
그러면 일제가 《시마네현고시》제40호를 날조한 경위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시마네현고시》제40호는 물개잡이를 하던 어업가 나까이 요사부로가 독도수역의 물개잡이로 인한 리득을 《안전하게》, 《영구히》 확보하려는 타산밑에 독도에 대한 임대를 일본정부에 청원한 때로부터 시작됐습니다.
1903년에 나까이의 임대청원서를 접수한 일본 내무성은 독도가 조선령토라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에 처음에는 나까이의 청원서를 기각시켰습니다. 그러나 나까이의 청원서를 받아쥔 외무성과 농상무성의 관리들은 나까이의 청원서를 구실로 독도를 강탈할 흉모를 꾸미는데 달라붙었습니다.
당시 조선침략의 일선에 서있던 해군성과 외무성은 나까이에게 독도는 조선이나 일본 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무주지》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독도의 물개잡이를 독점하려면 그 섬을 일본령토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물개잡이허가신청서를 조선정부에 제출할것이 아니라 독도의 일본령토편입 및 임대청원서를 일본정부에 요구하라고 사촉했습니다.
이렇게 되여 나까이는 독도를 일본령토에 편입하고 자기에게 대부하여달라는 청원서를 1904년 9월 29일 내무성, 농상무성, 외무성에 제출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제출된 나까이의 청원서를 가지고 일제는 이를 승인하는 형식을 취하여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령토에 편입한다는 내각결정을 내렸고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 현고시 제40호로 독도를 《다께시마》라고 명명하여 시마네현의 소관으로 한다는것을 고시했습니다.
시마네현지사가 1905년 2월 22일에 이러한 고시를 낸것은 1905년 2월 15일 내무대신이 내각의 결정에 따라 독도의 령토편입을 현내에서만 고시하고 지방신문에만 보도하도록 지시했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본정부가 될수록 저들의 행위가 비법이고 대외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알려지는것이 저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였기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독도가 저들의 령토라고 우겨대는데서 위력한 증거라고 하는 《시마네현고시》제40호의 조작경위입니다.
《시마네현고시》제40호를 조작한 경위를 놓고보아도, 현시기에 와서 《다께시마의 날》행사라는것을 년례적으로 벌려놓고있는것을 보아도 일본은 독도가 일본땅이라는것을 적극 여론화하여 앞으로 독도를 무력으로 강탈할수 있는 유리한 국제적환경을 마련하자는데 그 흉심이 있는것입니다.
일본이 독도가 저들의 령토라고 아무리 피대를 돋구어대도 독도는 철두철미 반만년의 유구한 우리 민족사와 더불어 한치도 떼여놓을수 없고 그 누구도 감히 넘겨다볼수 없는 조선의 신성한 령토입니다.
백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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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가장 인민적이며
이에 대하여서는 많은것을 가지고 이야기할수 있지만
이처럼
김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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