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1 장

6


온종일 병마도감의 별관에 들어앉아 옛말책이나 번지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난 남권부는 해가 아직 서쪽하늘에 높이 걸려있건만 때이르게 집으로 향하였다.

마음이 쓸쓸하고 무거워서인지 그의 얼굴은 침울해보였다.

그는 박원작에 대한 시기와 불만으로 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아침 병마도감에 나오니 파발군이 공문서가 든 가죽주머니를 전해주었다. 경군의 군사들을 내려보내겠으니 병마도감사가 직접 그들과 함께 수질구궁노를 가지고 개경으로 올라오라는 조정의 분부가 적힌 공문서였다.

박원작이 수질구궁노를 만들었다는 표문을 올렸다니 그 답서가 떨어진것이였다.

남 잘되는 소리를 들어 밸이 꼴려서인지 남권부는 명치밑이 아파났다. 그래서 공문서를 박원작에게 넘겨주고 별관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느라 여느때는 들여다보지도 않던 책까지 집어들었던것이다.

그러나 글줄대신 박원작의 얼굴이 얼른거려 분을 삭일수 없었다.…

에익,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치미는 분을 누를길 없어 관가의 솟을대문같이 큰 대문을 발로 걷어차며 집에 들어서던 남권부는 눈이 금시에 떼꾼해졌다. 몸집이 곰처럼 우람한 사내가 륙간대청마루에 우뚝 서있었던것이다.

《남공! 날세, 나야!》

광대뼈가 두드러진데다 너럭바위같이 큰 얼굴의 조득국임을 알아본 남권부는 너무 반가와 눈물이 찔끔 나왔다.

《조공! 잘 왔네!》

남권부는 달려가 조득국의 손을 잡고 소리쳤다.

《이보오, 어데 있나? 술상을 차려야지!》

부엌에서 마씨가 얼른 대꾸했다.

《인차 들여가요.》

은방울 굴리는듯한 마씨의 랑랑한 목소리에 남권부는 한결 더 기분이 좋아졌다.

좀 있어 부엌데기들이 넓은 방에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 이어 그 큰 음식상을 세사람이 둘러앉았다.

조득국은 한때 남권부와 자별한 사이였다.

몇해전까지 서경류수부에서 사록참군사인 7품벼슬을 지낸바있는 조득국은 사람들로부터 무뢰배라는 뒤말을 듣던 인물이였다. 본시 그는 고려사람이 아니고 녀진족이였다.

녀진은 대체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며 달게 섬기는 《하내녀진》과 제멋대로 놀아나는 《하외녀진》으로 나눌수 있다.

《하내녀진》이던 조득국의 아버지는 거란오랑캐의 등쌀을 피해서 동족의 나라 고려로 넘어가는 발해유민들속에 끼여 압록강을 건너왔다.

고려사람으로 귀화한 그의 아버지는 조씨성으로 개명하고 아들에게 은인의 나라에 보답이 되는 의로운 일을 하라는 뜻을 담아 득국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거란군이 쳐들어왔을 때 솔선 군사로 나간 그의 아버지는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나라에서는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의 공을 생각하여 조득국에게 서경의 학사원에서 공부를 할수 있도록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다.

서경의 학사원은 고려최초의 이름있는 지방학당이다.

학사원을 마치고 서경류수부의 리속으로 들어간 조득국은 군사일을 맡아보는 사록참군사로까지 출세하였다.

허나 그는 아버지의 뜻과는 어긋나게 나라의 리득을 좀먹는 탐관이 돼버렸다.

재물욕이 굴뚝같은 그는 서경군에게 내주는 재물을 뜯어먹다 못해 나중에는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에까지 꺼리낌없이 손을 뻗쳤다가 그 죄로 형을 받고 삭탈관직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탐욕을 버리지 않고 돈벌이에 혈안이 되여있었다.

허나 남권부에게 있어서 조득국은 자기를 잘살수 있도록 해준 《은인》이였다.

서경에 온 그 이듬해 봄일것이다.

서경군에게 내주는 《신기한 병기》들을 받아가려고 병마도감을 찾아온 조득국은 남권부를 마치 구면지기이라도 한듯 친절하게 대하였다. 어찌나 친절하게 달라붙는지 남권부는 조득국이 달라는대로 수질노와 화약을 몇번 넉넉히 내주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 이듬해에 집을 한채 마련해주었다. 지금 쓰고사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바로 그때 조득국이 사준 집이였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통이 큰 사람도 있는가! 응당 서경군에 주어야 할 병기를 조금 후하게 내준게 무슨 큰 덕이라고?…

그 감지덕지한 은혜에 남권부는 조득국의 청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줄 심정으로 등이 달아 들뛰였다. 그래서 조득국이 달라는대로 서경군에 제일 우선적으로 《신기한 병기》들과 화약을 내주었다.

박원작도 서경군을 우선시하는 남권부를 지지해주었다. 그러나 박원작은 그 대가로 남권부가 무엇을 받아먹는지는 알수 없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서경군에 줄 병기를 타갈 때면 조득국은 인사차림이라면서 남권부의 소매속에 은덩이를 하나씩 꼭꼭 찔러넣군 하였다.

어찌 그뿐이랴.

색시가 없어 고독하게 홀로 산다는걸 알고는 《서경미인》이라 소문난 마씨까지 안겨주었다.

참말이지 조득국은 세상에 둘도 없는 은인이였다. 하기에 남권부는 그가 이태전에 삭탈관직을 당했건만 여전히 친형보다 더 각근하게 대해주는 처지였다.

마씨가 술좌석임을 까맣게 잊고 제 생각에 빠져있는 남권부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이보세요, 참군사어른의 목젖 떨어지겠네요.》

펄쩍 놀란 남권부는 이어 껄껄 웃어댔다.

《조공! 내 너무 기뻐 제정신이 아니라오. 그저 조공을 봐야 사람사는 락을 알겠다니까. 자, 마음껏 드소.》

권커니작커니속에 술잔을 몇번 돌리고나자 둘 다 거나해졌다.

《조공, 요즘은 어떻게 지내오?》

취기가 올라 시뻘개진 조득국이 마씨가 들려주는 술잔을 받아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아무때건 운수가 좋지. 내 천성이 수렵을 좋아하는지라… 산판으로 말을 달리며 산짐승을 쏘아잡는 재미야말로 천하에서 제일가는 재미라니까. 이런 재밀 모르고 골아픈 벼슬살이를 한게 억울하오.》

마씨가 교태를 부리며 작은 입을 열었다.

《아이, 조정엔 인재가 없는가봐요. 인재가 인재를 알아본다고 참군사나리를 그냥 내버려두는걸 보면 참 기가 막혀요. 나라님도 무심하지. 무술에 출중하신 참군사나리에게 북계군을 통솔하는 병마사를 맡겨주셨다면 아마 거란을 평정한지 오랬을거예요.》

남권부가 술기를 살려 보탰다.

《그 말 한마딘 바로했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데 어느때건 조공에게 그런 날이 올거요.》

그러나 두툼한 입술짬으로 술을 부어넣은 조득국이 도리머리를 하였다.

《벼슬이란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나오. 그러니 그런 소린 그만두기요.

참, 요즘 듣자니 박원작이가 수질구궁노란걸 또 만들었다면서? 그 사람 정말 운수가 좋단 말야. 잘되는 놈은 자빠져도 떡함지에만 자빠진다고 그 사람이 그런것 같애.》

그 말에 기분이 붕 떴던 남권부는 시새움이 울컥 나서 오만상을 찌프렸다.

《남공은 갑자기 몸이 편찮소?》

남권부는 한숨을 내뿜었다.

《제길할, 요즘 내 팔자가 기구해진것 같소. 박원작이 그 작자는 제 홀로 임금의 은총을 독차지하고 군기감으로 출세해갈것 같은데… 나한텐 앞이 막혀있소그려.》

조득국이 벌쭉 웃으며 저가락으로 상을 두드렸다.

《남공! 그대의 앞이 막혀있는게 아니라 내보기엔 그대의 눈이 멀었소.》

《그건 무슨 소리우?》

《국자감까지 나왔다면서 남공은 왜 이런 말을 생각지 않소? 닭의 부리는 될지언정 소꼬리는 되지 말라! 남공한테 운이 틔였단 말이요. 박원작이 개경으로 출세해가면 병마도감은 남공의것이 될게 아닌가.》

남권부는 코김을 내불었다.

《모르는 소리. 〈신기한 병기〉를 만드는 일이 뭐 그리 떡먹듯 쉬운줄 아오? 나한텐 병마도감사자리가 고양이 소대가리 맡은 격이란 말이요.》

조득국이 게걸스레 웃고나서 큰 주먹을 상우에 올려놓았다.

《이보게, 남공. 배안에서 일을 다 배워가지고나온 사람이 있는가. 나도 뒤에서 힘껏 떠밀어주겠으니 한번 해보라구. 그렇지! 개경친구인지 학우인지 하는 그 리자연공에게 병마도감을 맡게 해달라구 글월을 쓰게. 사실 이 나라에선 〈신기한 병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자 부자이고 권세가란 말이요. 내 말이 틀리오?》

그 말에 남권부의 귀가 번쩍 열렸다. 그렇지 않아도 리자연에게 개경의 관청에로 전직시켜달라는 글월을 쓰자고 하면서도 좀더 대세를 관망하려고 늦잡았댔는데 조득국의 말대로 병마도감을 맡겨달라고 하면 큰복이 될것이다. 사실 서경의 병마도감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래등같은 기와집이며 부귀를 바랄수 있었겠는가. 박원작이도 그렇다. 그가 만일 병마도감사가 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온 조정이 다 아는 유명한 인물이 될수 있었겠는가. 임금의 안중에도 들수 있는 자리가 바로 병마도감의 주인자리가 분명하다. 그까짓 병마도감을 움직이는 일도 뭐 어려울게 없다. 《신기한 병기》는 장공인들이 만드는것이고 그들에게 호령만 칠줄 알면 되는것이다.

그러고보면 조득국이 역시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다.

남권부는 사기가 나서 부르짖었다.

《조공, 고맙소. 내 당장 병마도감을 맡겨달라고 리공에게 글을 쓰겠소. 아! 내 눈에 흙이 들어간대도 조공의 은혜만은 잊지 않겠소.》

《친구사이에 그런 말은 말게.》

두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한바탕 웃어댔다. 허나 남권부는 조득국의 웃음속에 숨어있는 음흉한 속심을 아직은 알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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