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4 장

13


천균노가 성공했다는 병마도감에서 보내온 공문서를 받아든 최충의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고진감래라고 박원작이 온갖 고생끝에 드디여 나라에 복을 주는 천균노를 만들어냈다.

복은 쌍으로 안온다했지만 이번에는 나라에 복이 쌍으로 겹쳐든셈이다.

그토록 방대한 공사여서 짧게 잡아 두해는 걸려야 한다고 여겼던 북계구간의 장성공사가 지금의 기세를 늦추지 않는다면 넉넉히 몇달안에 끝을 볼수 있을것이다. 단 한해사이에 엄청난 일감을 해제끼고 북계구간의 장성공사를 마친다면 그것은 실로 기적이 아닐수 없다.

그래 이것이 나라의 복이 아니란 말인가.

이게 다 군력을 떨치려는 마음으로 충만된 고려군사들이 제몸을 돌보지 않고 일한 결과이며 또한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수십만 백성들이 한사람같이 떨쳐나선 결과이다.

장성공사가 예상외로 잘 진척되는 속에서 북계의 수만군사가 한해겨울을 날수 있는 군량도 넉넉히 마련해놓았다.

어찌 그뿐이랴. 언제나 눈을 밝혀 거란군과 녀진의 동태를 제때에 알아내여 그들의 있을수 있는 침입을 얼마든지 쳐물리칠수 있게 변방을 지키는 군사도 이전보다 더 많이 주둔시켜놓았고 성들마다에는 뢰등석포같은 《신기한 병기》들까지 그쯘하게 갖추어놓았다.

이러한 때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천균노가 성공했다는 쾌보가 날아들었으니 어찌 서경행을 하지 않을소냐.

최충은 곧 부하들을 불러 장성공사와 관련하여 제기될수 있는 일감들을 위임하고 나어린 전령과 우봉전령만을 대동한채 서경으로 말을 달렸다.

그가 며칠동안 말을 달려 서경성에 입성했을 때는 한낮무렵이였다.

그러나 서경에서는 여러 기쁜 소식을 다 합쳐도 보상못할 가슴아픈 비보가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박원작이 병으로 끝내 쓰러졌다는 소식이였다.

크게 놀란 최충이 《서경명의》를 데리고 경상골을 찾았을 때는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있었다.

최충이 병문안을 온것을 안 박원작은 안깐힘을 다해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박공!》

《사부님!》

박원작은 두팔을 벌리는 최충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여윌대로 여윈 그의 몸이 최충의 가슴을 허비였다.

《내가… 내가 무정했소. 일만 일이라면서 나라에 보배인 자넬 돌보지 못했어.》

박원작이 가냘프게 패인 어깨를 오르내리며 애원했다.

《사부님, 그런 말씀 마소이다. 사부님이 아니였다면 소생의 오늘이 어찌 있겠소이까. 사람이 죽고살고 하는건 다 천명이니 조물주도 어찌할수 없소이다.》

박원작의 앙상한 몸을 어루만지는 최충의 얼굴로 눈물이 흐르고있었다.

그런 스승과 제자를 지켜보는 리순일이며 김충지, 여러 행수들과 《서경명의》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 사람! 이젠 앉게.》

박원작을 부축하여 자리에 앉힌 최충은 《서경명의》에게 눈길을 주었다.

《의원님!…》

《판병마사어른! 너무 상심마소이다. 이런 훌륭한 인재는 염라대왕이 불러가지 못하오이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서경명의》의 안색은 밝지 못했다.

그는 박원작의 손목을 조심히 부여잡았다.

싸늘하게 식은 병자의 손목에서 약한 맥이 알릴락말락 느껴졌다.

생의 기력이 쇠진해버린 꺼져가는 맥이였다.

그는 자기도모르게 한숨을 쉬고나서 박원작의 배에로 손을 옮겼다.

더운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배를 더듬어보니 대뜸 명치아래의 부위에서 돌덩이같은것이 만져졌다.

주먹만한 혹을 가지고 지금껏 일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천하의 그 어떤 명의일지라도 손을 쓰지 못할것이다. 이미 병자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서 마지막생의 불꽃을 태우고있었다.

《의원님! 어떻소이까?》

《서경명의》는 기대가 실린 최충의 눈길을 차마 마주볼수 없어 고개를 수그렸다.

고개를 숙이고있느라니 격한 마음이 꿈틀거렸다.

병이 왜 이렇게까지 빨리 악화되였을가.

이미 지어준 약이면 두달은 아직 먹고도 남는다. 그 약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환생약》은 못될지라도 배안에 든 작은 혹쯤은 서서히 없앨수 있다.

적어도 몇해는 살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병자가 죽게 된것은 약의 탓이 아니라 그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이다. 그만큼 약을 번지면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어쩜 그 당부를 소홀히 했는지…

아니, 이건 병자의 탓만도 아니다.

사람의 병을 고쳐주려는 의원의 지성이 뜨겁지 못하다보니 약이나 지어주고 약을 번지면 안된다는 말을 한두번 해주는것으로 그치고말았다.

아, 의술은 인술인데 좀더 관심을 두고 약을 꼭꼭 들도록 했다면 이렇게까지는 안되였을것이다.

대답을 못하는 《서경명의》를 대신해서 박원작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 너무 상심마소이다. 요즘 배아픔이 좀 덜어진걸 보면… 하늘이 살리려고 재생의 바줄을 내려주려는가 보오이다.》

최충은 박원작의 손을 꼭 감싸쥐였다.

《이 사람아!…》

《사부님! 사부님이 오셨으니 됐소이다. 사부님을 모시고 온 장안이 들썩하게 천균노를 쏘겠소이다.》

《거야 그래야지. 온 나라가 들썩하게 포성을 울려야 하구말구.》

이윽고 박원작은 방 한켠에 말없이 앉아있는 대씨로인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천균노를 만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좀전에 찾아온 그였다.

대씨로인은 그동안 아들이 군교로 가있는 구주에 가있다보니 천균노의 소식엔 깜깜이였다. 그는 어제 서경으로 돌아왔다.

박원작은 대씨로인을 다시 보게 된것이 무등 기뻤다. 그가 아니였다면 어떻게 천균노를 상상이나 할수 있었으랴.

그 하나만으로도 금방석에 앉혀야 할 로인이다.

박원작은 자기의 눈길을 읽는 대씨로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이어 그의 눈길은 대씨로인의 곁에 앉은 돌석이에게로 옮겨졌다.

앞으로 이 박원작이란 사람의 목숨은 며칠 더 가지 못할것이다.

며칠후에 화약의 비방을 알고있는 사람은 저 돌석이 한사람뿐일것이다.

그토록 크게 믿었던 남권부가 렴탐군들에게 굴복하여 화약의 비방까지 내놓았다고 하니 천벌을 어찌 면할소냐.

사람의 속을 알기란 참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저 돌석이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화약의 비방을 지킬수 있을가. 나라를 위하고저 뼈심을 들여 일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지조가 굳센 법이니 저 돌석이를 믿고 화약의 비방을 맡기는것이 옳을상싶다.

박원작은 최충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부님! 소생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부탁?!… 어서 하게.》

《사부님! 지금 화약의 비방을 죄다 알고있는 사람은 저기 저… 염초장행수밖에 없소이다. 앞으로도 그한테만 그걸 맡겼으면 하오이다.》

최충은 눈을 슴벅이며 나직이 응수했다.

《알겠네. 잘 알겠어. 염초장행수가 그 비방을 지키도록 돕겠어.》

한시름 놓인 박원작은 불현듯 깨달아지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고구려의 천균노가 어이하여 후세에 전해지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였다.

틀림없이 고구려의 선조들은 망국이 닥쳐오자 천균노같은 위력한 병기들이 적국의 손에 들어가는것을 원치 않았을것이다.

그래서 천균노와 같은 《신기한 병기》들과 염초를 만드는 비방을 깡그리 없애버렸을것이다.

이제는 알만하다. 나라가 없어지면 겨레의 제일가는 보배들이 선참으로 사라져버릴수 있다는것을!

지금껏 풀리지 않고있던 의문이 말끔히 가셔지자 박원작은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다시는 망국의 설음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망국의 설음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자나깨나 자기를 지켜낼수 있도록 병기를 서슬푸르게 벼려야 하리. 바로 그걸 바랐기에 아버지는 나라가 평온한 시절에도 목숨을 바친것이 아닌가.

이 땅을 노리는 외적들을 공포에 벌벌 떨게 하는 위력한 병기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병기를 만들어내는 일은 머리가 비상한 인재와 그 인재를 믿어주고 떠밀어주는 몇몇 조정대신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선조들이 물려준 삶의 터를 더 잘 가꾸어나가려는 마음을 간직한 백성들이 떨쳐나서야만 빛을 볼수 있는 법이다.

조정대신들은 바로 그걸 알아야 하리. 천균노는 이 박원작이 아니라 장공인들 바로 충의로운 서경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 박원작은 별로 큰 우여곡절이 없이 뜻을 성취한게 아닌가.

허나 박원작은 제아무리 신기한 재간을 부리는 세찬 병기일지라도 그 위력은 나라를 지키려는 불타는 마음으로 굳게 뭉쳐진 백성들의 단결된 힘보다 클수 없으며 천하를 진감시킬수 있는 강력한 병기를 가진 나라도 조정이 병들어 민심을 잃는다면 망국의 쓴맛을 당할수 있다는 진리를 알수 없었다.

더불어 겨레의 자랑인 《신기한 병기》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조정아래에서는 무용지물로 버림을 받거나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것도 알지 못하였다.

최충도 아니, 그 당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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