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4 장

11


너무도 피곤하여 잠에 들었던 심국종은 누군가 몸을 흔드는 바람에 후닥닥 깨여 일어났다.

《엉?!… 어―》

심국종은 방에 차려놓은 밥상을 가리키며 밥을 먹으라고 손시늉을 하는 벙어리녀인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요즘 남의 눈을 피해 야밤삼경도 마다하고 뛰여다니느라 너무도 지친탓에 녹초가 되여 굳잠에 빠졌댔다.

바로 이런 때 김충지가 뛰여들었다면 꼼짝할새없이 오라를 지웠을것이다.

오라를 진 제 몰골을 그려보니 가슴이 터져나갈듯 들뛰였다. 생전 처음 사람(메득)을 찔러죽인 그날밤은 어둠속에서 누군가의 억센 손이 덜미를 움켜잡는듯 하여 한잠도 못잤다.

남을 때리고도 발편잠을 못잔다는데 사람을 죽인자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간밤에 또 조득국이란 녀진사람을 죽였다. 바로 그때 대문이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나서 정신없이 도망쳐나왔다.

분명 김충지가 또 꼬리를 물었댔을것이다. 과연 검질긴 놈이다.

심국종은 처음 김충지를 알게 되였을 때 벌써 식자풍인 그가 기껏 련장행수나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여 그를 주의깊게 살펴보았고 그가 최충의 수제자이며 박원작을 도와 천균노도 만들어내고 화약의 비방도 지켜야 할 일감을 맡았다는것을 알아냈다.

그뿐아니라 밤이면 자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김충지임을 잘 알고있었다.

심국종은 시간이 흘러 가슴이 가라앉자 아직 벙어리녀인이 방안에 서있음을 알아보았다.

《나가봐.》

심국종의 손짓에 벙어리녀인은 깍듯이 절을 하고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나갔다.

벌써 날이 밝았는지 초불을 켜지 않은 방이지만 환했다.

심국종은 한껏 기지개를 켜고는 벌렁 자리에 드러누웠다.

해가 높이 떠오를 때까지 늦잠을 자면서 병마도감을 뚜꺼먹기는 오늘이 처음이였다. 하긴 이제 더는 병마도감에 나갈것도 없으니 머리쓸것도 없다. 오늘로써 병마도감과도 서경땅과도 영영 인연을 끊게 될것이다.

심국종은 천정을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젖비린내나는 김충지따위가 날 잡아보겠다구?》

심국종은 정신나간 놈처럼 끅끅대며 웃어댔다. 어찌나 웃어댔는지 눈물이 다 찔끔찔끔거렸다.

눈굽을 문지르며 그는 《주석지신이라 자처하는 최충이 과연 소문만 요란한 헛자배기야!》하고 씨벌이더니 또 웃어댔다.

조정에 없어서는 안된다는 명관 최충이 코흘리개같은 김충지에게 박원작의 뒤를 지켜주는 일감을 맡긴걸 보면 그 사람의 수완도 가히 알만 하다.

그덕에 바라는걸 어렵지 않게 획득했으니 최충을 고맙게 여겨야 할것이다.

심국종은 꿈만 같아 가슴을 어루만지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김충지가 젖비린내나는 덕에 고려의 제일가는 국보인 화약의 비방을 송두리채 훔쳐낼수 있었다.

토끼도 세굴을 판다는데 거처지를 한군데 정하지 않기를 참말 잘했다. 하기에 검질기게 꼬리를 물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김충지를 마음먹은대로 따돌릴수 있은것이고 귀신이 곡할 지경으로 둔갑하여 꾀하는바를 거침없이 치를수 있은것이다.

그는 서경에 온지 며칠새로 거처지를 두군데씩이나 정해놓았다.

보통문근처에는 장공인들이 다 아는 집을 정해놓고 늙은 하녀를 하나 두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모르게 박원작이와 한마을의 제일 으슥진 집을 한채 샀다.

등잔불밑이 어둡다고 박원작이와 한동네에 그를 해칠 사람이 산다고 그 누가 생각이나 할수 있으랴. 이 집에 심국종이 살줄은 귀신이나 알것이다.

심국종이 지금 배포유해서 드러누워있는 이 집이 바로 그 집이였다.

그는 이 집에 벙어리녀인을 두고 집을 돌보게 하였다. 그는 벙어리녀인앞에서 해주에서 온 장사군으로 행세했다.

돈이 넉넉하니 장사군행세쯤은 어렵지 않았다.

속이 뜬뜬해서 가슴을 어루만지던 심국종은 품속에서 유지에 싼 종이묶음을 느끼자 으흐흐― 하고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불과 몇장밖에 되지 않는 얄팍한 종이묶음이 장차로 막대한 재부를 가져다줄것이다.

《아, 스즈끼야, 넌 드디여 태묻은 섬나라로 돌아갈수가 있겠구나.》

심국종은 불쑥 귀에 설은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나앉았다.

《스즈끼야!》

혀꼬부라진 이름이 바로 심국종의 본명이였다.

심국종은 끝이 뾰족한 조개턱을 부여잡고앉아 제 본색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는 고려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고려의 동해건너 섬나라의 헤이안경(교또)에서 스즈끼란 이름을 가지고 왜인으로 태여났다.

헤이안경은 왜나라의 도읍이였다.

당시 섬나라를 쥐락펴락하면서 왜인들을 다스린 사람은 옛적에 백제에서 바다를 건너간 박달겨레의 후손이였는데 후지하라씨라고 불렀다.

후지하라씨네는 대대로 《섭정》과 《관백》이라는 섬나라의 최고관직을 차지하고 왜왕보다 더 센 권력으로 왜인들을 좌지우지하였다.

무지한 섬나라에서는 땅과 노비를 빼앗기 위한 토호들간의 싸움으로 피가 흐르지 않는 날이 없었다.

토호들은 저마다 자기의 땅과 재산을 지키고 남의것을 강탈하기 위하여 사무라이라고 하는 무사들을 가지고있었다. 끝없이 탐욕을 부리는 토호들간의 세력다툼은 숱한 사무라이들이 피를 흘리게 하였다.

싸움에서 이기면 제가 섬기는 상전으로부터 쌀과 재물을 받아 가족을 먹여살릴수 있고 패하면 목을 잘리워야 하는게 사무라이들의 처지였다.

그칠새없는 란리속에서 섬나라의 동북땅에 웅거한 미나모또씨라는자가 맞다드는 적수들을 쳐부시고 급속히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미나모또씨는 수많은 사무라이를 거느리게 되자 어벌차게도 후지하라씨를 몰아내고 권력을 찬탈할 야심을 품었다.

그는 《청화천황》의 피줄이라 자칭하면서 반역을 꾀하였다.

그러나 후지하라씨와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산간벽지로 쫓기우는 신세가 된 미나모또씨는 그 분풀이로 평소에 밉게 보던 부하 몇을 끌어내다 목을 치게 하였다. 그들중의 한사람이 심국종의 애비였다.

잔꾀가 여간아닌 심국종의 애비는 자기를 살려준다면 당장 고려에 가서 위력한 병기를 구해오겠노라 장담했다.

그의 장담이 미나모또씨의 마음을 움직여냈다.

송나라까지 굴복시킨 천하강국 거란과 싸워이긴 고려국이라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위력한 병기가 있을상싶어보였다.

미나모또씨는 심국종의 애비가 어려서 어떤 중한테 고려말을 배웠다는것을 알고 은덩이까지 내여주며 한해안에 고려의 병기를 얻어오지 못하면 그의 식솔을 몽땅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덴겁한 심국종의 애비는 남몰래 외아들인 그를 업고 섬나라를 떠나왔다.

심국종의 애비는 도적고양이마냥 재밤중에 고려땅에 내려 명주고을로 기여들었다.

안해를 잃은 홀아비로 행세한 그는 다른 나라 사신들이 드는 림영관곁에다 거처를 정했다.

명주는 동해바다가의 고을이여서 군사들이 적지 않았다.

한해가량 명주에 터를 잡고 군사들과 접촉하였건만 별로 이렇다할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림영관에 머무르는 역관(통역관)들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역관 한명을 돈으로 매수하여 그의 연줄을 타고 개경으로 올라갔다.

개경이라면 미나모또씨가 준 분부를 얼마든지 실행할것 같았다.

역관의 소개로 례부상서댁의 사환군이 된 그는 능란한 처세로써 벼슬아치의 환심을 샀다.

몇해동안 애쓴 덕에 개경에 든든히 터를 잡긴 했지만 렴탐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럭저럭 세월은 류수처럼 흘러 심국종이 어른이 되였다.

심국종으로 이름을 고친 스즈끼는 어릴적에 글방에 다니였다.

심국종이 장가들 나이에 이르자 애비는 그에게 제 본색을 털어놓았다.

그때까지 남의 집 사환질이나 해먹는 아버지의 비천한 신분을 원망하면서 벼슬길에 오를수 없는 제 신세를 한탄하던 심국종은 자기의 본색을 알게 되자 바싹 마른 섶단에 불달린듯 재물에 대한 욕심이 걷잡을수없이 타올라 혈안이 되였다. 그는 뒤늦게나마 고려의 위력한 병기를 만들어내는 비결을 훔쳐가지고 섬나라로 돌아가서 일확천금할 꿈을 꾸었다.

애비는 뜻을 이루고 돌아가자면 고려조정에서 권세있는 벼슬아치들을 등에 업어야 한다면서 그를 리자봉네 집 사환군으로 들이밀었다.

애비 찜쪄먹게 역바르고 간특한 스즈끼는 인차 리자봉의 총애를 차지하게 되였다. 이어 그의 연줄을 타고 군기감으로 들어갔다.

군기감에 리속으로 들어간 그는 곧 실망하고말았다.

군기감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 활이나 창같은 병기들만 만들고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서경의 병마도감에서 《신기한 병기》를 만들고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되였다.

화약이란걸 《신기한 병기》에 재우고 쏘면 화살을 천보나 멀리 날리며 지어는 뢰성벽력이 일면서 바위돌까지 내던져 적진을 짓뭉갠다니 정말 그런 병기만 있다면 섬나라의 주인자리도 빼앗아가질수 있을것 같았다.

심국종이 리자봉을 찾아가 서경의 병마도감으로 보내주기를 청하자 남권부가 화약의 비방을 빼내오지 못해 안달아하던 그는 쾌히 그 청을 들어주면서 오히려 이리이리하라는 밀령까지 주었다.

서경으로 떠나기에 앞서 심국종의 애비는 아들을 꿇어앉히고 이런 훈시를 주었다.

화약의 비방을 걷어쥐자면 남권부를 틀어쥐고 그자를 미끼처럼 써먹으라.

돈은 얼마든지 주겠으니 사람들에게 선심도 쓰고 힘들더라도 땀흘려 일해서 박원작의 눈에 들어야 한다. 뜻을 성취하려면 갖은 권모술수를 다해야 한다.

애비의 훈시를 가슴에 새기고 병마도감에 발을 붙인 심국종은 악을 품고 《신기한 병기》를 만드는 재주를 익히는 한편 화약의 비방을 뽑으려 획책했다.

심국종은 남권부를 사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집에 드나드는 조득국이도 화약의 비방을 노리고있다는것을 간파했다.

도적이 도적을 가려본다는 그런 심리가 조득국의 정체를 알아보게 한것이였다.

이제는 그 비방을 손에 넣었으니 섬나라로 돌아가는 일만이 남아있다.

며칠전 심국종은 서경에 비단을 사러온 개경장사군을 통해 아비에게 보내는 글월을 부탁했다.

그러니 며칠후면 아비가 배를 끌고 황주목의 아사나루로 올것이다.

《암, 만사가 뜻대로 될것이다. 오늘 해저물면 조용히 서경성을 빠져나갈테다. 으흐흐…》

심국종은 배고픔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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