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2 장

10


이른아침 련장칸의 넓은 뜨락에 웅장하게 일떠선 두개의 철덕을 돌아보는 박원작은 마치 길손으로 찾아든듯 눈앞의 현실이 놀랍기만 하였다.

설전으로 철덕을 쌓자고 일판을 벌려놓긴 했으나 일이 그렇게 빨리 그리고 나무랄데없이 훌륭하게 마무리될줄은 몰랐다. 진정 하나의 마음으로 뭉쳐진 사람들의 힘은 무궁한것 같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건만 련장칸을 도와 온 병마도감이 지어는 바쁘다고 할수 있는 염초장에서까지 장공인들이 밀려와 철덕을 쌓았다.

박원작은 본래 새로 쌓는 두개의 철덕을 종전의 철덕곁에다 나란히 세우려고 했다. 지붕을 더 높이 고쳐세우면 만근이 넘는 놋쇠를 녹여내는 철덕도 꽤 앉힐만 했다.

그런것을 김충지의 의견을 받아들여 달리했다. 김충지는 수만근의 놋쇠를 녹여내여 천균노를 부어내려면 넓은 뜨락에 철덕을 내다 쌓아야 일하기가 편리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물론 한지에 철덕을 쌓으면 날이 구질거릴 때 일하기가 불편스러울것이다. 허나 그런 날에는 높이 채붕을 씌우면 될것이다.

하여 련장칸의 넓은 뜨락에서는 철덕을 쌓는 공사가 벌어졌다.

보통 놋쇠 2근을 녹이는데 숯 1근을 태워야 한다. 결국 만 5천근의 놋쇠를 녹이는 철덕에는 숯이 7 500근 든다. 숯 7 500근이면 쉰섬이 넘는다. 만 5천근의 놋쇠와 쉰여섬의 숯을 넉넉히 넣을수 있게 하려면 적어도 철덕을 7자폭에 스물댓자 높이로 쌓아야 할것이다.

장공인들은 종이장에 그려준대로 철덕을 쌓느라 열성이 이만저만 아니였다.

철덕의 안은 진흙과 모래를 섞어 두께가 두자 남짓하게 다져 쌓았고 겉은 성돌같이 네모지게 다듬은 큰돌을 일매지게 쌓았다. 다 쌓아놓으니 정말 굉장히 큰 철덕이 되였다.

얼핏 보면 개경 만월대앞에 있는 첨성대인듯 싶었고 어찌보면 거대하게 큰독인듯 하였다.

그들은 아찔하게 높은 철덕우로 누구나 쉽게 오르내릴수 있도록 철덕에 붙여서 돌계단을 갈지자로 쌓아올렸다. 그것은 종이장에 그려넣지 못한것이였다.

힘든 일을 함께 해봐야 사람됨을 알수 있다고 철덕을 와닥닥 쌓는 공사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낸것도 기쁜 일이 아닐수 없다.

이미 친숙해진 근달행수와 같은 오랜 장공인들, 메득이와 같은 젊은 장공인들은 말할것도 없고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심국종의 열성도 대단하였다.

그가 아니였다면 공사는 그렇게 빨리 끝을 보지 못했을것이다. 그가 어떻게 마음을 움직여냈던지 장사군들이 수십대의 마차에 진흙과 모래며 돌을 실어오고 삯군들도 모여들어 일손이 부족한줄 몰랐다. 그리고도 모자라 심국종은 제일 힘든 철덕안을 쌓는 일에 뛰여들어 비지땀을 흘렸다.

실로 뜻밖에 《복덩이》가 굴러든셈이였다. 그런 사람이 많아야 병마도감이 흥한다.

박원작이 이런 생각에서 철덕주위를 돌고있는데 남권부가 소리없이 다가왔다.

《박공, 오늘은 쉬는 날인데도 나왔소?》

여느날과 달리 인상좋은 웃음을 지은 남권부를 보니 박원작은 기분이 더욱 흥그러워졌다.

하긴 오늘이 섣달 그믐날이니 누구나 다 새해맞이로 흥이 나 하는것이다.

박원작은 뜻대로 철덕을 번듯하게 쌓은 기쁨을 안고 장공인들에게 새해를 맞으면 한 열흘 푹 쉬라는 분부를 내렸다.

《나한테야 병마도감을 돌아보는게 제일가는 락이 아닌가. 그런데 공은 어떻게 나왔소?》

《좋은 친구는 친구의 마음을 따른다고 난 박공이 여기에 나와있을줄 알았소.》

《고맙네.》

이어 박원작은 한숨을 지었다.

《박공, 난 자네가 한숨짓는 까닭을 잘 아네.》

박원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옛말에 사람의 한생은 고개 또 고개를 끝이 없이 넘다마는 한세상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틀린것 같지 않다. 어쩜 나라위한 걸음걸음에 걸리는것이 그리도 많고 막아서는 곤난 또한 그리도 많은지…

철덕도 쌓고 천균노의 형체도 그려냈건만 이번에는 놋쇠라는것이 애를 먹였다.

새해에는 개경군기감에서도 뢰등석포를 만들게 되였으니 놋쇠는 더 부족하게만 되여있다.

이럴줄 알았으면 미리 놋쇠를 당겨다놓았을걸. 이제라도 최충에게 이런 딱한 사정을 알려야 하지 않을가?

박원작은 번기의 편에 주어 병마도감의 실태를 담은 글월을 최충에게 보내면서 놋쇠를 구해달라는 청은 차마 쓰지 못하였다. 천리장성을 쌓아야 하는 어렵고 긴급한 중임을 맡고있는 스승에게 덧짐을 짊어놓는것 같아서였다.

아니면 임금에게 놋쇠를 풀어주십사 하는 표문을 올릴가? 임금의 어지만 내리면 놋쇠 수만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라에 구리돌을 캐내는 큰 동소들이 여러개나 있지 않는가.

《박공, 놋쇠때문에 너무 마음쓰지 마오. 아무렴 나라에 애국충정의 마음을 깡그리 바쳐가는 그대를 하늘이 굽어살피지 않을라구.》

박원작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남권부가 고마와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남공은 어찌보면 고명한 복술가(점쟁이)인듯싶고 또 어찌보면 식리명사(세상리치를 안다는 이름난 선비)같기도 하오. 어쩌면 그렇게도 남의 속을 환히 들여다보는지…》

《거 듣기 좋구만. 세상에 칭찬하는 소리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더군.》

《남공, 놋쇠를 구할 무슨 방책이 있으면 어서 내놓게나.》

남권부는 얄궂게 웃으며 박원작의 타는듯한 눈길을 피했다.

이제 놋쇠 3만근을 가져올 길이 열렸다고 말해주면 박원작은 호박이 넝쿨채로 떨어진것처럼 좋아할것이다. 너무 기뻐 이 남권부를 하내비로 여길지도 모른다.

《남공! 내 애간장을 그만 태우고 어서 속시원한 말을 좀 하라구.》

남권부는 간절한 빛이 가득 어린 박원작의 눈을 마주보며 못이기는척 입을 열었다.

《이건 사실 새해나 맞고 내 조용히 거래길에 나설려고 한건데… 거 안북부(안주)에 있는 어떤 장사군에게 놋쇠가 있다누만.》

당장 손을 뻗치면 놋쇠를 받아올수 있는 어떤 관청과 줄을 놓을줄 알았는데 기껏 장사군이란 말인가.

박원작은 어이가 없어 입을 쩝쩝 다셨다. 장사군의 수중에 수십만근의 놋쇠가 있다한들 무슨 큰 돈이 있어 그걸 사온단 말인가.

그림의 떡같은 일이지…

《박공! 그 장사군이 말일세. 단번에 놋쇠를 많이 사가면 눅게 팔겠다누만. 내 집에 천균노 하나쯤 만들 놋쇠를 사올 돈은 여유가 있으니 이 바쁜 대목에서 내 어찌 모른다고 하겠나. 그러니 돈은 념려말고 새해를 맞고는 철덕에 불을 지필 차비를 하자구.》

박원작은 남권부의 말이 영 곧이 들리지 않아 그를 외면해버렸다.

이 사람이 누굴 놀리자는건가. 아무리 갑부래도 그렇지 공적인 일에 쓰라고 단번에 놋쇠 3만근을 살 묵돈을 내놓을 위인이 어데 있겠다구…

《박공! 지금 박공과 나는 한배에 탔다고 할수 있지 않는가. 친구를 위할겸 나라를 위한 일인데 돈이야 두었다 이런 일에 쓰라는거겠지.》

《?!…》

박원작은 남권부의 진지한 태도가 놀랍기만 하였다.

《난 뭐가 뭔지 모르겠네, 남공.》

《박공! 정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먼저 놋쇠 3만근을 당겨쓴 셈치고 후날 우에서 그만한 량의 놋쇠를 받아 돌려주게.》

그제서야 박원작의 얼굴에서 그늘이 가셔졌다.

《남공! 그게 참말인가?… 고맙네!》

흥분한 남권부는 하마트면 《고맙다는 인사는 내게 하는게 아닐세.》하고 말할번 하였다.

사실 남권부는 천균노를 만드는데라면 단 한근의 놋쇠나 동전 한잎도 거저 바치고싶지 않았다. 하기에 박원작이 철덕쌓기공사를 벌려놓았지만 놋쇠를 구해들이는 일에 전혀 머리를 쓰지 않았다.

우에서 놋쇠를 가져가라고 기별이 내려오면 마차행렬이나 끌고 개경걸음을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였다.

지금까지 놋쇠를 부족하지 않게 실어올수 있은것도 그의 수완이 뛰여나서가 아니라 나라의 군사를 총 주관하는 서눌판도병마사가 북계병마도감에 그 우선권을 부여하기때문이였다.

며칠전 저녁 남권부가 집에 들어가니 멀리로 사냥을 갔다던 조득국이 와있었다.

그는 남권부를 만나자바람으로 서경에 와서 들었다면서 천균노란 병기를 병마도감에서 만든다는게 참말인가고 물었다.

남권부가 참말이라면서 그러나 3만근의 놋쇠에 목이 메여 언제 만들지 모르겠다고 대꾸하자 그는 그게 무슨 희소식이기라도 한듯 기뻐하였다.

도대체 조득국이 기뻐하는 까닭을 몰라 의아해하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안북부에는 나와 절친한 장사군이 있는데 그한테 놋쇠가 아주 많다네. 자네가 화약 몇백근과 수질구궁노 몇개를 뽑아주기만 하면 난 천균노 한개쯤 만들 놋쇠를 돌려주겠네. 그걸 병마도감에 바쳐 천균노를 만들도록 하라구. 그럼 자넨 온 병마도감의 인망을 살수 있고 또 후날 나라에서 내주는 그만한 량의 놋쇠를 받아 팔면 크게 횡재할수 있을거네. 이게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때기가 아닌가.》

듣고보니 그야말로 일석다조의 폭리가 아닐수 없었다.

조득국은 화약과 수질구궁노를 빼내려면 돈이 들겠다며 주먹만한 은덩이까지 하나 내주었다.

돈벌이만 할수 있다면 화약이 아니라 대궐에 바치는 진상품에라도 손을 댈 판인데. 방법은 간단하였다. 이전처럼 군진들에서 화약과 《신기한 병기》들을 받아갈 때 장부에서 롱간을 부려 수량을 덧붙이면 그만인것이다.

남권부는 하마트면 조득국이와의 관계를 드러낼번한 자기를 속으로 꾸짖으며 딴전을 피웠다.

《박공, 공의 일이 잘돼야 내 일도 잘될게 아닌가.》

《아니, 공이 아니였다면 내 어찌 뜻을 이룰수 있었겠나. 난 앞으로도 공만을 믿겠네.》

《그렇게 믿어주니 내 더욱 분발하겠네. 자, 이젠 집에 들어가 쉬자구.》

박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발편잠을 잘것 같군.》

《암,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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