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1 장

2


박원작이 거처를 정한 집은 경상골에 있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는데 웃방을 환히 밝힌 쌍초대는 박원작의 모습을 대낮처럼 드러냈다.

시원하게 펼쳐진 넓은 이마, 그아래에서 정기가 번쩍이는 어글어글한 반달눈…

앉은뱅이책상을 마주한 박원작은 오늘 낮에 있은 수질구궁노의 위력사격때 체험했던 흥분을 되살리며 일찌기 떠나간 아버지와 스승 최충을 생각했다.

십년 공부라더니 8년세월을 하루와 같이 나라의 병기를 일신시키려 분발한 끝에 아버지가 바라고바라던 그 소망을 이루었다. 아버지가 그려보았던 팔우노며 수질노, 뢰등석포들을 다 만들어냈을뿐아니라 새로운 수질구궁노까지 나라앞에 내놓았으니 이제는 나서 자란 개경으로 떳떳이 돌아갈 때가 되였다.

오늘의 공적은 바로 그 뿌리에 깊은 연원이 있을진대 독불장군이라고 스승이 힘써주지 않았더라면 어림도 없었을것이다.

박원작의 생각은 8년전으로 거슬러갔다.

8년전 박원작의 벼슬은 병기를 만드는 일과 전혀 인연이 없었다. 그때 나라의 병기를 만드는 군기감에서 주부(정8품관)라는 말직벼슬을 지낸 아버지의 뜻을 따르자고 하니 제일 큰 장애물이 관직을 옮기는 일이였다.

학식도 깊고 매사에 깐진 그의 일솜씨를 헤아려서인지 조정에서는 박원작에게 임금의 행차시에 앉을자리며 수라상, 물품을 차리는 일을 주관하는 상사국의 상사봉어를 맡겨주었다. 정6품관으로서 벼슬품계는 비록 높지 못해도 상사봉어는 상사국의 주인자리였다.

임금을 충정으로 받들어모심이 신하된자의 제일가는 도리이고보면 상사봉어를 그만두고 병기를 만드는 관청으로 전직하겠다는것은 사실 불충하고 무엄한 청이 아닐수 없었다.

그렇다고 화약을 구워내는 비방과 함께 화약의 힘으로 오랑캐를 물리칠수 있는 《신기한 병기》들을 만들어낼수 있는 비결을 남겨준 아버지의 뜻을 외면할수도 없었다. 상사봉어의 직분은 아무나 맡아할수 있지만 《신기한 병기》를 만드는 일은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닌것이다.

박원작은 생각다못해 나라의 정사를 펼치는 중서문하성에서 우간의대부벼슬을 하는 최충을 찾아갔다. 그에게 있어서 최충은 스승이고 은인이였다.

최충을 처음 만나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벌써 스무해가 지나갔다.

그가 17살나던 봄날이였다. 박원작의 집은 개경 오정방 지네산기슭의 사직동마을에 있었다. 토지신과 오곡신에게 올리는 제를 보려고 사직골에 왔던 최충은 우연히 박원작이네 집앞을 지나다가 느티나무아래에서 책을 읽는 그를 보게 되였다.

더하고 덜고 곱하고 나누는 비결을 적은 산학에 대한 책이 최충과 박원작의 인연을 이어놓았다고 할가.

남들같으면 사서3경을 따라외우느라 열성이겠는데 산학책에 심취되여있는 박원작을 보고 최충은 걸음을 멈추었다.

《젊은인 어찌하여 산학을 파고드나?》

자색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붉은 띠를 띤 그우에 누런 금어(물고기모양의 금장식품)를 찬 벼슬아치가 말을 건네자 박원작은 너무 긴장하여 미처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한참만에 박원작은 산학을 배우는것은 아버지의 분부라고 대답하였다.

《아버지의 분부란 말이지. 옳아, 옳은 분부시다. 산학을 통달한 사람들이 많아야 나라의 문명이 빨라질수 있는거니까. 바란다면 나도 자네의 글공부를 돕겠네.》

이렇게 되여 박원작은 최충을 알게 되였고 그의 문하가 되였다.

최충의 집에는 고금동서의 책이 가득하였다. 산학에 대한 책들도 적지 않았다. 박원작은 그 책들을 마음껏 볼수 있었다.

한해가 지나자 최충은 그를 국자감의 산학과에 넣어주었다.

정말 꿈같은 일이 아닐수 없었다. 아버지가 벼슬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보잘것없는 군기감의 말직벼슬을 하는 집 자식이 국자감에 들어간다는것은 실로 하늘의 별을 따는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였다.

국자감은 나라에서 제일 큰 학당으로서 국자학과, 대학과, 사문학과, 률학과, 서학과, 산학과 등 6개의 학과가 있었다.

정작 산학과에 들고보니 박원작은 한미한 집안출신으로서 분에 넘치긴 해도 아수한감을 금할수 없었다. 앞으로 높은 벼슬을 지내려면 국자학과나 대학과, 적어도 사문학과쯤은 다녀야 한다고 생각됐던것이다.

말타면 견마잡히고싶다더니 무슨 변덕이 이렇담. 분발하고 또 분발해서 국자감시절에 산학을 배우면서 국자학과와 대학과의 학문을 자습으로 습득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배심을 가지고 박원작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국자감을 마친 후에도 최충은 박원작이 더 깊은 학식을 닦도록 남다른 관심을 돌려주었다. 하여 과거에 급제할수 있었고 상사봉어로까지 출세한것이였다.…

스승의 집이 있는 부산동을 찾아가니 최충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찾아온 사연을 들은 스승은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었다.

《벌써 그랬어야지. 난 언제건 이런 날이 오리라고 믿었네.

그러나 상사국에서 전직하려면 상감마마의 어지를 받아야 해. 그러니 자네가 직접 상주문을 올리라구.》

그날로 박원작은 화약을 쓰는 병기를 만들고싶다는 상주문을 지어올렸다.

며칠후, 상사봉어 박원작을 북계병마도감의 주인인 병마도감사로 전직시킨다는 어지가 떨어졌다.

리부에 나가 임금의 어지를 받은 그날 박원작은 스승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되였다.

그가 쓴 상주문이 올라가자 최충은 곧 임금을 청대하였다.

만사에 달통한 넓고 깊은 학식을 소유했을뿐아니라 청렴하고 강직한 최충을 사람들은 《조정의 송죽》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임금은 그에게 충언을 하는 우간의대부직을 맡긴것이였다.

최충은 박원작이 찾아온 날 벌써 맞춤한 자리를 생각하고있었다. 그자리가 바로 서경에 있는 북계병마도감의 주인인 병마도감사직이였다. 그자리야말로 박원작이 자기의 뜻을 한껏 펼수 있는 명당자리였다.

나라의 형편을 손금보듯 환히 꿰들고있는 최충은 북계병마도감의 실태를 잘 알고있었다.

북계를 지키는 군사들에게 병쟁기를 만들어보내주는 서경의 병마도감은 개경의 군기감 못지 않게 재간좋은 장공인들이 많고 시설도 그쯘하였다. 게다가 북계병마도감의 벼슬품계가 정6품이니 박원작의 상사봉어와 같았다.

나라의 법에 벼슬품계는 30개월에 네번 일한 성적을 매겨 《상》을 받았을 때라야 한품계 올려줄수 있게 되여있다. 그러니 박원작을 기일을 끌지 않고서도 전직시킬수 있는 자리는 동급벼슬인 북계병마도감사였다.

어떤 일이든 그 성패여부는 일을 맡은 사람에게 어떤 권한을 부여해주는가에 크게 달려있는 법이다.

북계병마도감사자리에 박원작을 앉히면 병마도감의 주인인 까닭에 누구에게도 제압당하지 않고 마음먹은대로 만사를 내밀수 있을것이다. 허나 개경군기감은 사정이 다르다. 거기에는 3품관인 판사아래에 4품, 5품관들인 감, 소감 등 여러 벼슬아치들이 또 있어 군기감으로 박원작을 돌려놓는다 해도 자기 생각대로 일판을 벌리기 어려웠다.

더우기 군기감은 박원작에게 아물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입혀놓은 곳이다.

최충은 박원작을 제자로 삼은 그날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주부라고 하는 군기감의 말직벼슬을 하던 박원작의 아버지는 보다 위력한 병기를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이였다.

군기감의 벼슬아치들은 그가 하는 일은 애당초 허황한짓이라면서 훼방을 놀았다. 벼슬아치들은 고구려의 조상들이 염초를 구워내서 그것을 재운 불화살로 적진을 불태웠다는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군기감의 벼슬아치들이 일찌기 그의 주장을 허심하게 받아들였더라면 고려는 이미전에 화약을 가질수 있었을것이다.

그는 그후 어려운 속에서 《신기한 병기》에 쓸 새로운 화약을 굽다가 뜻밖의 재변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을 참작하여 최충은 박원작을 서경으로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아뢰였다.

최충의 도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박원작이 부임지로 떠나자 북계군을 통솔하는 병마사에게 그가 요구하는것이라면 다 들어줄것을 긴히 부탁도 하였고 여러차례 서경에 내려와 병마도감의 실정을 알아보고 걸린 일감을 풀어주었다.…

웃방문이 열렸다.

안해 해연이 조용히 들어서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다 뜬눈으로 밤을 밝히겠나이다.》

박원작의 얼굴에 미소가 어려들었다. 한떨기 꽃처럼 청초한 젊은 안해를 대할 때면 마음이 즐거워지는 그였다. 서경미인을 안해로 맞았으니 이 또한 복이다.

《이젠 그만 앉아계시고 내려가 쉬시오이다.》

박원작은 벌씬 웃으며 대꾸했다.

《목소릴 낮추오. 그러다 애가 깨여나겠소.》

《깨여나면 뭐라오이까.》

해연에게 이끌린 박원작은 아래방으로 내려가 잠자리에 들었으나 스승에 대한 생각은 인차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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