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9세기 신라의 형편

장보고

신라의 해상활동가.

그의 이름은 옛문헌에 궁북 또는 궁파로도 적혀있다. 고향과 집안래력은 알수 없으나 그는 헤염을 잘 쳤고 무예에 남달리 뛰여났다고 한다.

그가 살던 시기인 8세기-9세기에 신라상인들은 조선서해를 건너 당나라에 가서 신라방을 이루고살았다.

장보고는 9세기 초에 당나라 서주땅에 가서 소장이란 군관으로 있었는데 당나라해적무리들이 신라의 해안지대주민들을 랍치해가는 만행을 보고 격분하여 본국으로 돌아와 국왕에게 연해지방에 대한 해적들의 침략만행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오늘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할것을 제의하였다.

828년 그는 청해진대사(장관)로 임명되여 1만명의 해군부대를 거느리고 중국, 일본으로 통하는 바다길의 요충지대를 장악통제하면서 조선서해, 조선남해를 굳건히 지켜 해적들을 모조리 섬멸함으로써 그후 신라의 연해지방에 해적들이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그뒤로 청해진은 신라와 당나라, 신라와 일본 및 당나라와 일본사이의 해상교통과 무역의 가장 큰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그는 또한 대외무역활동도 활발히 벌려 큰 상인세력으로 자라났다.

당시 그의 이름은 당나라와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의 군사정치적세력은 상당히 강대해져서 그는 신라봉건왕실에서의 왕위쟁탈전에까지 끼여들게 되였다.

그는 부하 정년에게 5 000명의 군사를 주어 839년에 김우징(신무왕)을 왕자리에 올려 세우는 정변을 돕기까지 하였다.

장보고는 국왕으로부터 《감의군사》의 칭호와 2 000호의 《식읍》(식실봉)을 받았으며 신무왕이 죽자 그의 아들 문성왕은 또다시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의 칭호를 주고 그의 딸을 왕비로 맞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높은 골품을 얻으려던 장보고의 욕망은 완고한 신라귀족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닥치게 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장보고는 드디여 청해진에서 왕정에 반기를 들었다.

신라왕조는 청해진의 세력이 너무도 강대하여 토벌할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자객을 보내여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장보고는 지방상인출신의 봉건관료로서 그의 활동은 계급적 및 시대적제약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심하게 나타나고있던 당나라해적들의 만행을 제압하고 신라사람들의 해외진출을 도운것은 그의 업적으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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