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놈의 마술자루

김 명 철

 

 

 

따뜻한 봄은 버들골마을에도 왔습니다.
하늘에선 종다리가 날아예며 우짖었고 들판에선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여올랐습니다.
양지쪽엔 노란꽃다지들과 보라색제비꽃들이 활짝 피여났습니다.
토방에서 농쟁기들을 손질하던 박서방은 일손을 멈추었습니다.
《봄은 왔는데 종자가 없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앞벌을 바라보며 박서방은 한숨을 쉬였습니다.
요즘 버들골마을사람들은 종자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이 좋은 봄철에 때를 맞춰 씨를 뿌려야겠는데 종자가 없으니말이예요.
예로부터 농사군은 죽어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해농사를 짓고나면 꾸어먹은 보리쌀빚이요, 소작료요, 종자값이요 하며 권지주한테 다 떼우다나니 사람들은 겨우내 멀건 죽물로 근근히 살아갔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종자가 있을수 있겠습니까.
박서방은 안타까왔습니다. 이러다간 올해 농사를 못 지을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한숨만 쉴뿐 이렇다할 그 무슨 뾰족한 수가 없으니 가슴만 답답했습니다.
《아무래도 권지주한테 가서 종자를 꾸어오는수밖에 별도리가 없지.》
박서방이 손질하던 농쟁기들을 치우는데 범이 제소리하면 온다고 뜻밖에도 권지주가 마당으로 들어서는것이였습니다.
《농사지을 차비를 하댔나?》
권지주는 토방에 걸터앉았습니다.
《헌데 무슨 근심이라도 생긴게 아닌가?》
권지주가 별로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예, 씨를 뿌려야겠는데 집집마다 종자가 없으니 참 야단이웨다.》
박서방은 공손히 대답했습니다.
《음, 내 이럴줄 알았네. 자, 어서 이걸 받게.》
권지주는 선듯 허리춤에서 자루 하나를 꺼내더니 박서방에게 주었습니다. 그 자루는 비단천으로 만들었는데 겉은 빨갛고 노랗고 하얀 깨알같은 점들이 촘촘히 박힌 한말이나 채울가말가한 그리 크지 않은것이였습니다. 비단자루는 무척 화려해보였습니다.
《박서방, 이 자루를 흔들면서 〈복복 복자루야, 나오너라.〉하며 필요한 종자들을 부르게. 그러면 생겨날걸세.》
권지주는 의기양양해서 말했습니다.
박서방은 빈 자루에서 어떻게 종자가 생겨난다고 하는것인지 통 알수 없어서 머뭇거리기만 했습니다.
《허허,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게지. 그럼 한번 해보라구. 어서.》
권지주가 거듭 재촉해서야 박서방은 비단자루를 흔들었습니다.
    복복 복자루야
    나오너라 수수종자
그러자 이것 보세요.
정말 비단자루가 불룩해지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엉?!》
박서방은 둥그래진 눈으로 권지주를 쳐다보았습니다.
권지주는 빙그레 웃으며 손짓을 했습니다.
어서 자루를 헤쳐보라는 뜻이였습니다.
박서방은 자루를 헤쳤습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자루안에는 붉은 밤빛색의 수수종자가 가득히 들어있었던것이였습니다.
《진짜 수수종자구만요?》
박서방은 너무도 신기해서 수수종자만 들여다보았습니다.
석달 가물에 단비라더니…
박서방은 감지덕지해하며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보라구, 이젠 내 말을 믿겠나?》
권지주는 제법 껄껄 소리까지 내며 웃었습니다.
《정말 고맙수다.》
그렇게도 안타까이 속을 태우던 종자가 눈앞에 생겨난것을 보니 권지주가 무척 고마왔습니다.
《이러지 말게. 나두 사람인데 어떻게 소작인들의 걱정을 모른다고 하겠나. 이보라구 박서방, 올해는 산기슭이든 골짜기든 자네들 마음대로 밭을 일구게. 내 3년동안은 땅값도 종자값도 안 받겠으니 농사를 지어 다 먹으란 말일세. 그러니 마을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주게. 뭐니뭐니해도 소작인들이 잘살아야 나도 기쁠게 아니겠나.》
권지주는 동정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순간 박서방의 눈은 퀭해졌습니다.
《뭐라구요? 그게 정… 말이웨까?》
이것은 서쪽에서 해가 떴다는 소리보다 더 놀라운것이였습니다.
박서방은 지금 자기가 꿈을 꾸고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혹시 잘못 듣지 않았는가 해서 슬그머니 귀를 꼬집어보았습니다.
귀가 아픈걸 보니 꿈은 아니였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박서방은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한마을 이웃끼리 뭘 그러나. 박서방, 이 비단자루는 우리 집의 보물이라네. 그러니 온 마을이 다 쓰고는 꼭 돌려주게.》
권지주는 흡족해하며 돌아갔습니다.
(사람이 저렇게도 달라질수 있단 말인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권지주를 바라보던 박서방은 이집저집 뛰여다니며 소리쳤습니다.
《다들 모이라구요. 종자가 생겼수다.》
떠들썩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종자가 생겼다니 웬말이요?》
사람들의 물음에 박서방은 비단자루를 보여주며 방금 권지주가 한 말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뭐? 마음대로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라구?》
《게다가 3년동안은 값도 안 받겠다니 이게 어찌된 일이요?》
《욕심이 땅껍데기보다 더 두터운 권지주가 어째서 선심을 쓰는지 모르겠군.》
사람들은 머리를 기웃거렸습니다.
《내 오늘 보니까 권지주가 확실히 달라졌습디다. 자기는 소작인들이 잘살아야 기쁘대요.》
박서방은 싱글거리며 말했습니다.
《그게 정말이요? 참 모를 일이군.》
《고간에 쌀이 썩어나니 이제야 마음이 달라졌는가?》
《하긴 권지주도 사람인데 그럴수 있지.》
마을사람들은 십분 그럴수 있다면서 빨리 종자가 생겨나게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박서방은 비단자루를 흔들면서 말했습니다.
    복복 복자루야
    나오너라 기장종자
그러자 이번에도 비단자루가 불룩해지더니 노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기장종자가 가득찼습니다.
《야! 정말 기장종자가 생겨났구만.》
사람들은 《옛말에 보물망치가 있었다더니 이 자루는 보물자루일세.》하고 희한해하며 자기 집에서 필요한 종자들을 말했습니다.
박서방은 흥이 나서 연방 불렀습니다.
자루속에서는 강냉이종자를 부르면 강냉이종자가 생겨나고 콩종자를 부르면 콩종자가 생겨났습니다. 찰조종자를 부르면 찰조종자가 한가득 찼고 팥종자가 나오라면 어김없이 팥종자가 나왔습니다.
《권지주의 선심덕에 이젠 살았구나.》
사람들은 종자를 안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장서방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우두커니 서서 보기만 하는것이였습니다.
《아니, 자네들은 왜 그러고 서있나? 어서 종자들을 가지고 가라구.》
박서방의 말에 장서방은 머리를 저었습니다.
《싫네. 난 권지주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고싶지 않네. 멀어도 고개너머 친척집에 가서 종자를 얻어다 심겠단 말일세.》
장서방은 미타해하면서 그냥 돌아갔습니다.
《참 성미도… 꼭 소발통 한가지라니까. 그래 자네들도 같은 생각들인가? 이보라구, 우리가 당장 땅에 심을 종자가 없어서 얼마나 안타까와했나? 그런데 이렇게 제 눈으로 종자를 보면서도 무엇을 의심스러워하는가 말일세.》
박서방은 그들에게 종자를 안겨주었습니다.
《글쎄, 그렇긴 한데…》
사람들은 머밋거리다가 종자를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날부터 사람들은 저저마다 밭을 일구었습니다.
박서방도 땅을 뚜졌습니다. 돌은 춰내고 나무뿌리와 풀뿌리는 모조리 캐냈습니다.
그러느라니 몹시 지쳤으나 밭을 한뙈기한뙈기 일구는 재미에 조금도 힘든줄을 몰랐습니다.
며칠사이에 여기저기에 밭들이 생겨났습니다.
(버들강가 습지엔 수수를 심고 샘골밭엔 강냉이를 심어야지. 그리고 불당골등판엔 콩과 찰조를 심으면 되고… 가만, 기장은 어느 밭에 심을가?)
박서방은 속구구까지 해가며 씨를 뿌렸습니다.
(올가을부터는 배불리 먹게 되겠구나.)
벌써 그의 눈앞엔 김이 물물 나는 밥그릇을 앞에 놓고 좋아서 웃는 어린 자식들의 얼굴이 보이는듯 했습니다.
며칠사이에 씨뿌리기를 다 끝낸 박서방은 인츰 김매기에 달라붙었습니다.
씨붙임이 잘된 곡식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습니다.
(가을부터는 살림이 좀 펴이겠구나.)
박서방은 큰 풀은 뽑고 작은 풀들은 호미로 박박 긁어주었습니다. 거름도 주고 북도 듬뿍이 주며 세벌, 네벌 김을 부지런히 돌려맸습니다.
실하게 자란 곡식들은 어느새 꽃이 피고 이삭을 쭉쭉 빼물었습니다.
드디여 가을이 왔습니다.
밭들을 돌아보는 박서방의 마음은 흐뭇했습니다. 어느 밭이나 할것없이 농사가 잘되였던것이였습니다.
(이젠 잘살게 되였구나.)
박서방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 비꼈습니다.
입에서는 흥얼흥얼 코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에헤라 농부들아
     낟알들이 익어간다
     짧은 낫 날을 세워
     어서 빨리 가을하세
박서방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래일은 강냉이가을을 해야겠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다음날이였습니다.
허리에 낫을 차고 샘골밭으로 나간 박서방은 흠칫 놀랐습니다. 강냉이가 한이삭도 보이지 않았던것이였습니다.
《아니?》
박서방은 두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습니다.
그러나 팔뚝같은 이삭들은 어디로 갔는지 빈강냉이대만 후줄근해 서있었습니다.
《어이쿠, 이게 무슨 일이람.》
박서방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봄내, 여름내 얼마나 땀흘리며 애써 지은 낟알입니까.
그런데 그 낟알들을 하루밤새에 다 잃었으니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박서방은 억이 막혔습니다.
《어느 놈이 훔쳐갔느냐?》
한동안 얼빠진듯 멍청해있던 박서방은 힘겹게 일어섰습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다리를 옮기던 그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른 집 강냉이밭들은 어떤가 해서였습니다. 살펴보니 다른 집 밭에도 한이삭의 강냉이도 볼수가 없었습니다.
(큰 도적이 들었댔구나.)
터벌터벌 걸어오던 박서방은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웬일인가 해서 가보았더니 저마다 어제밤 강냉이를 잃었다면서 웅성거렸습니다.
(그러니 온 마을의 강냉이를 다 도적질해갔구나. 어벌도 크지.)
박서방은 기가 찼습니다.
며칠이 또 지나갔습니다.
어느날 박서방은 버들강가 수수밭으로 나갔습니다.
탐스러운 이삭들마다 얼마나 수수가 도글도글 잘 영글었는지 몰랐습니다. 불어오는 선들바람결에 금시 수수가 자르르 쏟아질것만 같았습니다.
(빨리 수수가을을 해야지. 강냉이는 잃었지만 수수가 있으니 그럭저럭 겨울은 날것 같긴 한데.…)
이튿날 지게를 지고 수수밭에 다달은 박서방의 눈은 또다시 둥그래졌습니다. 아니 글쎄 빈이삭만 남은 수수대가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대고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엉? 수수도 훔쳐갔구나.》
박서방은 앞이 캄캄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쭈르르 흘렀습니다.
올가을부터는 배불리 먹으며 잘살겠구나 하고 바라던 꿈이 이렇게 산산이 깨여질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무리 잘살아보려고 아득바득 애를 써도 팔자탓은 할수 없구나.)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있던 박서방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삭에서 수수알만 뽑아갔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과연 이런 재간을 부릴수 있을가? 그렇다면 귀신이?…)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날 집집마다 수수가 없어졌다면서 온 마을이 벅작 떠들었습니다.
이상한 일은 다음날에도 일어났습니다.
낟알이 다 익어서 가을을 하려고 밭으로 가보면 콩이건 팥이건 몽땅 없어졌습니다. 물론 섶과 깍지는 서있는 그대로 놔두고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집들에서는 살아갈 길이 막막해서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또 어떤 집들에서는 뼈심들여 지은 낟알을 몽땅 잃은것이 너무도 분해서 땅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실컷 잘 처먹으라고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당장 도적놈을 잡아 주리를 비틀자고 윽윽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울고 불며 주먹을 흔들어야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을엔 쉬쉬한 소리까지 돌았습니다.
온 마을의 낟알은 다 없어졌지만 장서방네 낟알만은 한알도 없어지지 않았다는것이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직 장서방네 밭만은 한번도 다치지 않았던것이였습니다. 그러니 장서방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밤이 이슥해서야 자리에 누운 박서방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도적은 어떤 놈일가? 어째서 그렇게 많은 낟알을 훔쳐갈가? 그리고 장서방네 낟알만은 왜 다치지 않았을가? 하여튼 이상해. 여기엔 분명 그 무슨 쪼간이 있는게 틀림없어.)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뒤척거리던 박서방은 종내 자리에서 일어나고야말았습니다.
밖으로 나온 박서방은 장서방네 집으로 갔습니다.
장서방도 역시 잠들지 못하고있었습니다.
《여보게 장서방,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나도 여직 그 생각을 하고있었네. 이 밤중에 밭에 나가볼가 하던 참일세.》
《그래? 그럼 함께 나가보세.》
박서방과 장서방은 밭으로 나갔습니다.
초저녁에 떴던 초생달은 이미 기울어진 뒤여서 사위는 어두웠습니다.
그들이 강냉이밭에 다달았을 때였습니다.
뜻밖에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복복 복자루야
    들어오라 강냉이
그러자 또 다른 말소리가 났습니다.
《더 크게 말하라요. 그렇게 작게 말하면 비단자루가 못 듣는단 말이예요.》
《누가 들을가봐 그래.》
어둠속에서 쑥덕거리고있는 놈들은 권지주와 그의 녀편네였습니다.
《여보, 마을놈들은 우리가 밤마다 이 비단자루로 온 마을의 낟알을 몽땅 날라들이는줄은 꿈에도 모를테지요?》
《그렇구말구. 바로 쓰면 종자자루, 뒤집으면 소원자루. 이 비단자루는 정말 우리 집의 복자루거던. 보라구, 봄에 이 비단자루로 선심을 썼더니 온 마을이 죽을둥살둥을 모르고 얼마나 농사를 잘 지었는가 말이야. 래년에 이웃마을까지 선심을 쓰면 우린 일등부자가 돼, 일등부자.》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고을원도 임금도 부럽지 않지요.》
그놈들은 제풀에 흥이 나서 너털웃음까지 터뜨렸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장서방이 《에익, 저놈들을 그저…》하며 벌떡 일어서려고 하였습니다.
《가만 있게. 장서방, 좀 더 두고보자구.》
박서방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또다시 권지주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온 마을의 낟알을 몽땅 날라오는 이 비단자루가 어째서 장서방네 낟알만은 못 가져올가?》
그러더니 권지주는 목소리를 좀더 높이였습니다.
   복복 복자루야
   들어오라 강냉이
하지만 그 소리에도 비단자루는 커지기만 할뿐이였습니다.
권지주는 등이 달아 연방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봄에 가져왔던 그 종자자루가 도적자루였구만.》
박서방이 속삭였습니다.
《헌데 저 권지주한테 비단자루가 어떻게 생겼을가? 참 이상하거던.》
장서방의 말에 박서방도 머리를 기웃거렸습니다.
사실 비단자루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것은 권지주밖에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날마다 어떻게 하면 더 잘살수 있을가 하고 궁리하고 궁리하던 어느날이였습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난 권지주가 기지개를 켜는데 까마귀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까욱― 까욱―
그 소리에 꿈자리가 사납다고 툴툴거리던 권지주가 마루를 쾅쾅 굴렀습니다.
《이놈의 까마귀, 방정맞게 굴지 말고 썩 사라지지 못할가? 퉤.》
그러자 뜻밖에도 담장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말을 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중은 왜 내시우? 잠을 자며 헛소리치는걸 듣고 도와주려고 했는데…》
거쉰 목소리로 주절대는 까마귀를 권지주는 놀란 눈으로 보았습니다.
(엉? 까마귀가 말을 다 하다니… 가만, 예로부터 까마귀는 령험하다고 했지.)
권지주는 낯색을 달리하며 한숨을 푹 쉬였습니다.
《까마귀야, 요즘은 막 미칠 지경이구나. 어떻게 하면 더 잘살수 있을가 하고 궁리하는데 영 방책이 떠오르지 않으니 말이다. 어서 나를 좀 도와주렴.》
그 말에 한동안 머리를 기웃거리던 까마귀가 마루에 날아와앉더니 말했습니다.
《참, 그 신기한 자루가 있으면 좋겠는데요.》
《신기한 자루라니? 그게 어떤 자루인데?》
호기심이 부쩍 동해난 권지주는 다급히 물었습니다.
《그건 마술쟁이들한테 있는 자루인데 천년동안 구름을 오리오리 실로 꽈서 만든 마술자루이지요. 봄에는 〈복복 복자루야 나오너라.〉하고 종자를 부르면 어김없이 그 종자가 생겨나고 가을에는 자루를 뒤집어 〈복복 복자루야 들어오라.〉하고 낟알이름을 부르면 그 종자로 심어가꾼 낟알을 다 걷어들이는 아주 신기한 자루지요. 마술쟁이들이 그 자루로 헐하게 농사짓는걸 내 몇번 봤수다.》
까마귀의 말에 권지주의 욕심이 꿈틀꿈틀 살아났습니다.
(뭐, 마술자루? 그런 자루가 있으면… 그렇지, 봄에는 농군들에게 종자를 주고 가을에는 온 마을의 낟알을 몽땅 걷어들일수 있지. 그렇게만 되면 값을 내라, 빚을 내라 목청을 돋구며 농군들하고 싸움을 하지 않아도 손쉽게 고간을 그득그득 채울수 있을텐데.)
권지주의 눈알이 뱅그르르 돌아갔습니다.
《까마귀야, 그 마술자루를 어서 나에게 가져다주렴.》
권지주가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그러면 나에게 매일 고기를 줄수 있나요?》
《뭐, 고기?》
권지주는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제놈의 밥상에 놓여있던 잉어 한마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내 평생소원만 풀어준다면야 이까짓 잉어가 대수겠느냐.》
권지주는 까마귀에게 잉어를 던져주었습니다.
《그럼 약속했수다. 참, 마술쟁이들이 하는 말이 그 자루가 있는데서 불소리를 하면 안된다고 했수다.》
잉어 한마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난 까마귀는 어데론가 날아갔습니다.
그날부터 권지주는 까마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흘이 지나도록 까마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흥, 괜히 아까운 잉어만 떼운것 같수다.》
까마귀가 날아간쪽을 얼빠진듯 바라보고있는 권지주한테 녀편네가 눈을 흘겼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틀림없이 그놈의 까마귀가 날 속인것 같거던.》
권지주는 중얼거렸습니다.
이때 자루를 입에 물고 까마귀가 나타났습니다.
《왔구나, 왔어. 어디 보자. 그런데 왜 늦었느냐?》
권지주는 까마귀가 가져온 자루를 닁큼 그러안았습니다. 그 자루는 비단자루였습니다.
《말도 마시우. 이 자루를 훔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우?》
까마귀의 말에 권지주는 《수고했다. 자, 어서 고기를 먹거라.》하며 잉어를 또 던져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루가 정말 마술자루가 옳긴 옳으냐?》
권지주는 자루를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머리를 기웃거렸습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한번 써보시구려.》
까마귀의 말에 권지주는 비단자루를 한번 써보았습니다. 비단자루는 정말 제놈의 욕심에 꼭 맞는 자루였습니다. 그대로 쓰면 종자가 생겨나고 뒤집으면 두배, 세배로 커지며 그속에서 생겨난 종자를 심어서 가꾼 낟알은 몽땅 날라왔으니까요.
이렇게 권지주한테 마술자루가 생겼던것이였습니다.
그래서 봄에는 종자자루로 선심을 썼고 가을에 와서는 그 종자에서 생긴 온 마을의 낟알들을 몽땅 날라들여 자기 집 쌀고간을 그득히 채웠던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친척집에서 종자를 얻어다 심은 장서방네 낟알만은 아무리 신기한 마술자루라 해도 날라올수가 없었던것입니다.
권지주는 빈자루를 발로 툭툭 찼습니다.
《집안에 앉아서 말만 하면 온 마을의 낟알을 몽땅 날라오던 비단자루가 왜 이 모양이야. 밭에까지 나와 빌어도 소용이 없으니, 참.… 비단자루가 어째서 장서방네 밭에서는 재간을 못부릴가?》
《혹시 다른 종자를 심지 않았을가요?》
《글쎄… 옳아, 분명 그런것 같애. 그렇다면 장서방이 비단자루의 재간을 어떻게 알았을가?》
《그러게 말이예요. 이젠 어떻게 하면 좋을가요?》
녀편네가 울상이 되여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긴, 손으로라도 걷어가야지. 밭에까지 나왔다가 그냥 갈수는 없어. 자, 어서 아구리를 크게 벌리라구.》
권지주는 강냉이이삭을 와락와락 땄습니다.
박서방과 장서방의 눈에서는 불이 일었습니다.
(네놈이 그래서 선심을 썼댔구나. 그런줄도 모르고 우리가 못사는것이 팔자탓이라고만 생각했으니… 아, 그러니 저놈들은 날이 갈수록 더 교활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피땀을 짜내는구나.)
박서방은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었습니다.
저런 화려한 비단자루속에 감춰진 검은 속심을 모르고 권지주가 달라졌다느니, 고맙다느니 하고 생각했던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늦게나마 깨달았던것이였습니다.
《이놈들아.》
박서방과 장서방은 더는 참을수가 없어 주먹을 부르쥐고 놈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으악.》
갑자기 울리는 벼락같은 고함소리에 권지주와 녀편네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겁에 질린채 헐레벌떡거리며 간신히 대문안에 들어선 권지주와 녀편네는 마당가에 꼬꾸라지고말았습니다. 너무 혼쭐이 나서 정신을 잃었던것이였습니다.
한참만에야 권지주가 비틀거리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아이쿠, 비단자루를 안 가지고 왔구나.》
그 소리에 거품을 물고 눈알만 띠그룩거리던 녀편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뭐라구요? 그게 없으면 우린 어떻게 해요. 빨리 집으로 오라구 빌자구요.》
권지주와 녀편네는 땅에 머리를 쪼아박으며 싹싹 빌었습니다.
    복복 복자루야
    돌아오라 집으로
바로 이때 박서방과 장서방은 비단자루를 가지고 마을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비단자루가 생각나십니까? 권지주놈이 봄에 들고왔던 종자자루입니다.》
박서방은 모든 사실들을 자세히 까밝혔습니다.
《그러니 저 비단자루가 온 마을의 낟알을 몽땅 훔쳐갔단 말인가?》
《그때 별로 이상하다 했더니 그런 검은 속심이 있었댔구만.》
《결국 저놈들의 선심이란 우리들의 목숨을 조이는 올가미였어요.》
마을사람들은 격분해하였습니다.
이럴 때 박서방의 손에 쥐여진 비단자루가 갑자기 풀럭풀럭거렸습니다. 날아가려고 말이예요.
그러자 박서방도 끌려가는것이였습니다.
《박서방, 왜 그러나?》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비칠거리는 박서방을 붙들었습니다.
《글쎄 나도 모르겠수다. 이 자루가 풀럭거리니 저절로 끌려가우다.》
박서방은 영문을 몰라하다가 《에익, 이따위 도적자루는 불을 달아 아예 없애버려야 해.》하고 말했습니다.
순간 박서방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비단자루에서 불이 확 타오르는것이였습니다.
《엉?!》
뜻밖의 일에 박서방은 비단자루를 훌 버렸습니다.
마을사람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비단자루는 기다리기라도 한듯 불이 달린채로 권지주놈의 집으로 쏜살같이 날아갔습니다.
《도적자루가 불을 달고 제집으로 가는구만.》
《권지주놈을 닮은 욕심자루이니 그놈한테 갈수밖에 없지.》
마을사람들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 시각, 두손을 싹싹 빌며 어서빨리 내 집으로 날아오라고 애걸복걸하던 권지주와 녀편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습니다.
불자루가 집안으로 날아들어오니까요.
《아니, 저 불… 가라, 가라, 내 집에서… 어서 가… 라.》
권지주와 녀편네가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불은 벌써 집에 붙었던것이였습니다.
《불… 을 꺼라.… 내… 집이 다… 탄다.》
삼단같이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돌아가던 권지주와 녀편네는 《내 돈… 내 쌀… 내 재산…》 하며 불붙는 집안으로 뛰여들어갔습니다.
하긴 제정신이 아니였으니까요.
그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와집이 와르르 무너져내렸습니다.
《복자루가 불자루가 되여 기와집을 다 태웠구나.》
《꼴 좋다. 욕심때문에 영영 뒈졌구나.》
하하하…
호호호…
꾸역꾸역 피여오르는 연기를 보며 마을사람들이 터치는 통쾌한 웃음소리는 밤하늘가로 울려갔습니다.
《자, 권지주놈이 없어진 이 기쁜 날에 우리 모두 춤이나 춥시다.》
박서방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놋양푼을 두드리고 물소랭이에 바가지를 띄워 장단을 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잠을 자던 별들도 눈을 반짝 뜨고 재미나게 내려다보았습니다.
버들골마을사람들의 흥겨운 춤판은 밤깊도록 끝날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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