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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봉건왕조시기 서원이 지방통치체제에 미친 부정적영향(1)

 

1. 서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 력사에서 아직도 과학적으로 해명하여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가르치신바와 같이 력사분야에서는 아직 과학적으로 해결해야 할 연구대상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그중의 하나가 조선봉건왕조시기 서원이 사회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서원에 대하여 교육사적인 측면에서 개괄하는 정도로 그쳤을뿐 조선봉건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서원이 미친 부정적영향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존재한 서원은 그 발생초기에는 나라의 교육사업에 긍정적기여를 하여온 교육기관의 하나로서 중세교육사에서 자못 의의를 가지였다.

그것은 1582년 리이가 작성한 《학교모범》의 내용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모두 16개 조항으로 구성되여있는 《학교모범》은 배우는 사람들의 학습태도와 학습방법, 학습기풍 등 교육에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고도 폭넓게 밝히고있으며 우리 인민의 전통적미풍량속과 관련한 내용을 규제하고있다. 이와 함께 학습방법과 학습공정, 학습일과조직과 관련한 일부 문제들을 비롯하여 교육학과 교육심리학발전에 일정한 긍정적의의를 가지는 문제들이 강조되고있다.

이러한 교육방법과 교육규정은 서원생들속에 건전한 학습태도와 기풍을 세우고 그들이 그 요구대로 생활하게 하는데서 그리고 서원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체모를 갖추어나가는데서 일정한 긍정적의의를 가지였다.

그러나 서원은 봉건제도의 점차적붕괴와 더불어 자기의 긍정적측면을 상실하고 교육기관이라기보다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봉건적착취와 수탈을 악랄하게 감행한 착취기관으로, 봉건통치배들속에서 벌어진 사화, 당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당파의 소굴로, 각양각색의 사회적악페를 조장시킨 반동기관으로 전락되여 력사발전에 적지 않은 부정적영향을 미치였다.

 

2. 본론

 

2.1 서원의 발생과 변천과정

 

서원은 16세기중엽 부단히 변화되는 사회력사적조건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다.

서원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글방》이라는 뜻으로서 교육에 리용되는 건물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우리 나라 고전문헌에서 《서원》이라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것은 15세기초부터였다.

《세종실록》의 자료에 의하면 세종이 《만약 선비가 개인으로서 서원을 설치하고 생도들을 가르치는자가 있으면 보고하게 하고 상을 주라》고 한 기록과 《1420년 평안도 함종현에서 생원 강우량이 서원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에서 서원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 《세종실록》 권9, 2년 9월 기축

 

여기에서 보다싶이 15세기 서원은 지방의 봉건유생들이 자기가 사는 곳에 개인적으로 교육건물을 갖추어놓고 량반자식들에게 교육을 주던 서당과 같은 의미로 쓰이였다.

1541년(중종 36년) 당시 경상도 풍기군의 군수였던 주세붕(1495-1554)이 자기 재산과 일부 사람들이 기증한 재산으로 고려시기 유교생리학전파와 연구에서 큰 공로를 세웠다고 하는 안유(안향)가 살던 집터자리에 《회헌사》라는 사당과 함께 교사를 갖추어놓고 그 지방유생들을 모집하여 봄, 가을마다 안유를 제사지내면서 한편으로는 유교성리학의 륜리도덕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이 교육건물이 현재 고전문헌들에서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로 보는 《백운동서원》이다.

그후 이 서원은 1550년(명종 5년) 리황(1501-1570)의 제의에 따라 《소수서원》이라는 첫 사액서원으로 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 나라 력사에서 서원의 발생의 시초라고 말할수 있다.

서원이 발생하게 된 사회력사적조건은 첫째로, 고려멸망후 조선봉건왕조의 성립을 반역적인 찬탈행위로 간주하는 이른바 《유학정통자》들이 새 정부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내려가 학문연구와 제자교육에 종사하는 경향이 뚜렷해진것과 관련된다.

고려시기부터 자기의 발전을 걸어온 문도교육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서면서 봉건정부의 직접적인 지지밑에 유교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사설교육기관으로 한층 발전하였다.

문도교육자들은 교육에서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를 중요한 륜리도덕적관계로 설정하고 스승을 부모처럼 섬겨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모든 문도들은 제각기 자기 스승을 따르면서 점차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였다.

이런 현상이 문도들속에서 날이 갈수록 적극화됨에 따라 16세기중엽에 이르러 유학자들과 일부 량반관리들속에서는 서원창설의 목소리가 울려나오게 되였다.

또한 문도교육관계자들이 일부 서당들에서 진행하는 문도교육을 점차 서원을 통한 교육으로 발전시켜 거기에서 취급하던 륜리도덕이 그대로 서원의 교육내용으로 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서원이 문도교육관계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문도교육이 발전하는 과정에 발생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서원발생의 사회력사적조건은 둘째로, 15세기말~16세기 전반기에 수차에 걸쳐 봉건통치배들 내부에서 일어난 《사화》(선비탄압사건)와도 적지 않게 관련된다.

《사화》는 봉건통치계급내부에서 중앙의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목적밑에 4차에 걸쳐 오랜 봉건관료들인 훈구파세력과 신진세력인 지방선비출신량반들인 사림들간에 벌어진 정치적란투극이였다.

훈구파들의 무능성에 대하여 시기질투하던 사림들은 중앙정계에서 서로 야합하여 그들을 몰아내고 저들이 실권을 쥐려고 하였다.

그러나 훈구파들은 국왕을 등에 업고 1498년 《무오사화》로부터 시작하여 1504년 《갑자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1년 《을사사화》를 통하여 사림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이렇게 훈구파들로부터 호된 타격을 받은 사림들은 저들의 정치경제적지반을 닦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지방들에 내려가 서원을 설립하게 되였다.

이와 같이 서원은 16세기중엽 부단히 변화되는 사회력사적조건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으며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대대적으로 설립되게 되였다.

사림들의 주동적인 역할에 의해 16세기중엽에 발생한 서원은 그후 유교교화를 중시하는 봉건국가의 관심과 보호속에서 점차 전국의 여러곳에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서원설립은 전국 각지에서 활발히 벌어지기도 하고 량적으로 증대하기도 하였으며 강화되기도 하면서 부단한 변천과정을 거치였다.

서원의 변천과정은 그 시기적특징에 따라 크게 세시기로 구분해볼수 있다.

첫시기는 백운동서원이 세워진 16세기중엽~17세기초에 해당된다.

첫시기에 해당되는 16세기중엽~17세기초의 서원은 당시 쇠퇴해가던 나라의 교육을 추켜세우기 위한 방향에서 활발하게 진행된것으로 특징지을수 있다.

첫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그 설립목적으로 보나 운영과정으로 보나 유학계의 본보기인물을 적극 내세워 그들의 유지를 이어가며 학문을 발전시키고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목적을 두고있었다.

백운동서원이 창설됨으로써 16세기 급속히 쇠퇴해가던 나라의 교육사업은 서원에 의해 다시 추설수 있는 밑바탕을 가지게 되였으며 서원을 통하여 학문상 우수한 인재들이 양성되게 되였다.

백운동서원이 얼마후 첫 사액서원으로 되면서 사액제도가 나오고 그런 사액서원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자 일부 봉건관리들속에서 서원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져 서로 경쟁적으로 서원을 창설하고 이를 통한 교육사업을 중시하게 되였다.

서원설립의 첫시기 그 창설과 운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들로는 주세붕, 리황, 리이, 김계휘, 서구연을 비롯한 진보적인 학자들과 관리들이였다.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은 황해감사를 하는 기간 1549년 황해도의 해주에 문헌서원을 세웠고 리황과 리이는 학문연구만이 아니라 후대교육사업에도 종사하면서 자기가 있는 곳에 도산서원, 이산서원, 역동서원, 소현서원을 세웠으며 기타 적지 않은 학자들과 봉건유생들, 토호들, 량반관리들에 의해 전국의 여러곳에 서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증보문헌비고》에 렬거된 서원관계자료를 통하여 알수 있지만 중종시기(1506-1544)에 전국에 불과 3개에 지나지 않던 서원이 명종시기(1546-1567)에는 서원과 사액서원이 도합 21개, 선조시기(1568-1608)에는 75개로 대폭 증가하여 전국의 서원수는 100여개에 달하였다.

 

* 《증보문헌비고》 권211, 212, 213

 

우에서 보는바와 같이 중종시기에 발생한 서원이 선조시기 즉 16세기 후반기~17세기초에 본격적으로 설립된것을 알수 있다.

선조시기 서원창설수는 앞선 시기에 비해 거의 3배 그중 사액서원수는 4배로 증가하였다. 이 시기 서원창설수가 많아지게 된것은 선조통치기간이 길었다는데도 있지만 여러면에서 서원창설의 유리한 조건이 조성된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우선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사림세력들을 정계의 중요직책에 많이 올려앉힌것과 관련된다.

15세기말~16세기 전반기 4차에 걸쳐 훈구파에게 얻어맏기만 하던 사림들이 16세기중엽이후에는 선조를 등에 업고 다시 중앙의 정치무대에 진출하게 되였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1545년 《사화》시기 처형당한 많은 사림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적지 않은 사림들을 중앙의 높은 관리로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사림세력들은 정치무대에서 절대적우세를 차지하게 되였으며 정권내부는 사림량반일색으로 꾸려지게 되였다.

사림들은 저들의 지위가 높아지게 되자 저들의 정치적웅거지였던 서원의 창설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이를 장려해주었던것이다.

선조시기 서원창설수가 많아지게 된것은 또한 이 시기 당파가 발생하여 파벌들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여가던 시기였던것과도 관련된다.

16세기중엽이후 정부안에서는 봉건통치배들속에 당파가 형성되여 저들의 당파적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당쟁이 벌어졌다. 이 당파싸움은 중앙의 세정승으로부터 지방의 시골량반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어느 당파에 가담하지 않고서는 관직에 붙어있을수 없을 정도로 심각화되여갔다. 따라서 당쟁과정에 중앙은 물론 지방의 통치배들은 자기 당파의 정치경제적지반을 축성하고 후비를 양성하는데서 서원에 대한 관심 즉 어느 지방에 누구를 제사지내는 서원을 세우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가지고 서원창설과 사액요청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였다.

이러한 요인들에 의하여 선조시기 서원창설수는 다른 선행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아졌으며 서원이 점차 흥성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서원설립의 둘째시기는 17세기초~18세기 전반기를 포괄한다.

이 시기 서원설립의 특징은 그것이 본격적이고 대대적이며 광범하게 진행되여 18세기 전반기에는 최절정에 이르렀다는것이다.

17세기초~18세기 전반기에 서원수는 전국에 588개에 달하였다. 특히 숙종시기(1675-1720)에 서원설립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숙종시기 설립된 서원은 대부분 첩설서원들이였다. 

원래 봉건국가에서는 한 서원에서 이미 제사지내고있는 인물은 다른 서원에서 제사지내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를 세워놓았다. 그러나 지방세력들은 이에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면서 서원을 마구 첩설하여 이런 현상이 숙종시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1655년과 1657년에는 첩설서원과 조정의 승인없이 세운 서원을 없애버리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 《증보문헌비고》 권210

 

숙종시기 첩설서원들이 많이 생겨나게 된것은 통치배들간의 권력쟁탈전이 맹렬해져 중소지주들의 몰락이 촉진되는 반면에 대지주들이 더욱 장성하였으며 인민들에 대한 조세, 환자, 공물, 군포착취가 더욱 파렴치한 형태로 감행된것과 관련된다.

이 시기 선행시기에 볼수 없었던 대농장들이 출현하고 상품화페관계가 농촌에 깊이 침투되여 인민들의 계급분화가 가일층 촉진되였으며 통치배들의 무제한한 착취와 수탈로 하여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지고 류랑의 길에 나서게 되였다.

1705년(숙종 31년) 봄 경상도에서는 5만 3 000명의 류랑민이 생겨났으며*1 1717년(숙종 43년) 봄 충청도에서는 도 인구의 10%이상에 달하는 10만여명의 농민들이 착취자들의 등살에 못이겨 제고장을 떠나갔다.*2

 

*1 《숙종실록》 권41, 31년 2월 을유, 3월 임인

*2 《숙종실록》 권59, 43년 계해

 

이렇게 수많은 농민들이 제고장을 떠나 류랑민으로 되자 착취자들은 강제적 또는 기만적방법으로 그들을 예속시키려고 획책하였다. 당시 봉건국가로부터 일체 잡다한 역을 면제받고있던 서원은 이것을 미끼로 농민들을 자기들에게 투탁해오도록 조장시켰다. 이로부터 많은 토지를 장악할수 있게 될것을 타산한 서원설립자들은 저들의 수중에 토지를 대량 거두어들이고 그로 인한 봉건적착취와 수탈을 강화할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하고 그것이 누구를 제사지내는 서원이든 관계없이 첩설서원들을 대대적으로 창설하였다.

이 시기 봉건착취자들이 서원을 대대적으로 창설하고있는데 대해 대사성을 하던 김만중은 1683년(숙종 9년) 《서원은 한개 도에 80~90개를 설치하고있으면서 왕왕 토지를 모으고있다.》고 하였으며 1700년(숙종 26년) 《여러명의 대신들이 왕에게 서원으로 모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있다고 하면서 그들을 모조리 조사하여 군적에 충당하자》고 하였다.

 

* 《증보문헌비고》 권 210

 

이렇듯 18세기 전반기까지 서원의 설립수가 많아진것은 봉건통치배들이 저들의 경제적리권과 치부, 봉건적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요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서원을 대대적으로 첩설하였기때문이다.

서원설립의 셋째시기는 18세기중엽~19세기 전반기를 포괄한다.

이 시기 서원의 설립은 앞선 시기와는 달리 그 수가 더 늘어나지 않고 그 대신 서원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반동적기능이 강화된것이 특징이다.

《증보문헌비고》의 자료를 통하여 18세기중엽~19세기 전반기까지의 서원설립정형을 보면 현저히 줄어든것을 알수 있다.

경종시기(1721-1724)에는 6개, 영조시기(1725-1775)에는 9개, 정조시기(1777-1800)에는 4개, 순조시기(1801-1834)에는 2개로 점점 적어지다가 현종시기(1835-1849)에 이르러서는 서원이 전혀 설립되지 않았다.

 

* 《증보문현비고》 권210, 211, 212, 213

 

이 시기 서원의 설립수가 더 늘어나지 못하고 점차 없어지게 된것은 변화된 일련의 정치경제적요인들과 관련되여있다.

지난 시기 서원이 지나치게 팽창되면서 그로 인한 사회적페단이 더는 막을수 없는것으로 되였으며 이로부터 봉건정부는 서원설립금지대책을 세웠다.

앞에서도 언급되였지만 숙종시기 서원설립이 본격화되면서 전국에 229개의 서원과 사액서원들이 생겨나게 된것은 봉건정부의 위기를 촉진시켰고 이로 인하여 서원설립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매우 분분하게 제기되였다.

이런 속에서 숙종은 1714년 법적으로 서원설립금지령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지방세력들은 교모하게 종래 서원이라고 하던 이름을 사당이라고 바꾸어가며 서원설립과 관련된 봉건국가의 조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그 창설에 광분하였다.

그리하여 숙종시기 발표된 이 령이 경종시기를 거쳐오면서 흐지부지되게 되였다. 영조는 날로 장성해가는 지방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1741년 4월 서원설립에 관한 금지령을 다시 내리고 1714년 이후 세운 서원과 사당을 모조리 철거시키며 이 령을 집행하지 않으면 해당 도의 관찰사는 파직시키고 고을원은 잡아가두며 서원설립을 앞장에서 제창한 유생은 5년간 과거응시를 정지시키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강경조치에 의해 1714년 이후 설립되였던 300개의 서원과 사당이 강제철거당하였으며 지방세력들은 서원설립에 관한 문제에서 봉건국가로부터 일정한 타격을 받게 되였다.

 

* 《증보문헌비고》 권210

 

그러자 지방세력들은 종래의 수법을 바꾸어 정부에서 탄압하는 서원을 내오기보다 기성서원에 의거하여 그것을 더 공고확장해나가는것이 유리하다고 타산하고 그 강화에 치중하게 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 서원들은 종전보다 그 규모가 커지고 더욱 반동화되였던것이다.

이처럼 서원은 백운동서원의 설립을 시작으로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조선봉건왕조말기까지 계속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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