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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고대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에 대한 연구(2)

2. 2. 피지배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

 

2. 2. 1. 고대초기 피지배계급신분의 구성

고대에 피지배계급신분은 크게 평민과 노예로 구성되였다.

평민은 노예사회에서 일정한 생산수단을 가지고 자체로 경리를 운영해나가는 계층으로서 국가의 기본수탈대상이였다.

평민은 전조선(단군조선)시기부터 있었다. 《규원사화》에 나오는 《세민》, 《소민》, 《서민》 등은 우리 나라에서 평민이 전조선시기부터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 《조선단대사》(고조선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체99(2010)년 136페지]

 

《삼국지》와 《후안서》도 피착취계급, 피지배계급인 《민》(民)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문헌에 나오는 《민》은 곧 고대평민을 가리킨다. 이러한 평민들은 직업적으로 자영소농민이 기본이고 그외에 수공업자 등도 있었다.

노예는 최하층신분으로서 원시사회말기 계급의 발생과 함께 출현하였다.

노예사회에서 노예는 인간의 모든 권리를 노예주에게 빼앗기고 철저히 예속된 소유물이였으며 말하는 도구였다. 노예는 죽어도 무덤을 쓰지 못하고 오히려 노예주가 죽으면 노예주를 따라 산채로 무덤에 순장되였다.

평민신분과 노예신분은 고대 첫 시기부터 피지배계급신분이였다.

 

2. 2. 2. 고대후기 피지배계급신분의 분화

피지배계급신분인 평민과 노예는 노예사회가 점차 발전하면서 그 구성에서 여러 계급신분층으로 분화되였다.

 

평민신분층의 분화

《삼국지》에 실린 자료는 평민신분층에서 분화가 일어났다는것을 보여준다.

《읍락에는 호민과 민이 있고 하호는 모두 <노복>이 된다.》(邑落 有豪民 民(名) 下戶皆爲奴僕》)*

 

* 《삼국지》 권30 위지 동이렬전 부여

 

이 자료를 통하여 부여의 평민신분이 호민과 일반적인 민, 하호로 분화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먼저 고대후기에 평민신분층에서 호민(豪民)이 분화되였다.

호민은 평민의 상층으로서 문자그대로 《부유한 백성》이였다.

호민의 신분적성격에 대하여 《한서》 식화지에는 호민이 자기의 땅을 하호에게 빌려주어 10분의 5세를 받아먹는다고 하였다. 《한서》의 자료는 봉건사회초기 중국의 호민을 념두해두고 그 성격을 규정하였지만 우리 나라의 호민과 그 성격에서 다를바 없었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의하면 고대부여에 호민이 있었다.

고대부여의 호민이 언제부터 있었겠는가. 《규원사화》에는 《민》이나 《세민》 등은 나타나지만 《호민》이란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여이전의 단군조선시기에는 호민이 없었을것이다.

이렇게 호민에 대하여 전하는 자료는 없지만 평민신분층가운데서 비교적 경제생활이 넉넉하였던 일부 자영소농민들로부터 호민이 생겨났다.*

 

*《조선단대사》(고조선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체99(2010)년 147페지]

 

자영소농민들가운데 일부 부유한자들이 노예주지배계급에게 붙어 토지를 넓히면서 소농민적토지소유관계를 확대해나갔다. 그 과정에 원래 평민이였던 부유한자들은 호민으로 되였으며 그들은 착취자로 등장하였다. 호민들이 읍락에 틀고앉아 하호들을 노복처럼 부려먹었다고 전하는 자료는 그것을 증명해준다.

호민의 출현시기는 노예사회후기였다고 본다.

이렇게 평민신분층에서 분화된 호민들은 공동체경리와 자영소경리의 파산으로 몰락된 일부 하호들을 자기 땅에 얽매여놓고 착취한 결과 착취자로 되였다. 호민들은 점차 비대해져 노예제말기-봉건사회초기에는 대부호로 자라나 해당 지방의 유력자로 등장하게 되였다.

호민에는 비교적 많은 토지를 가진 부유한자가 기본이였다. 지어는 몇명의 노예도 소유하고있었다.

하지만 호민은 어디까지나 노예사회가 발전하면서 평민신분의 분화과정에 출현한 새로운 착취자일뿐 당시 많은 비중을 차지한것은 아니였다고 본다.

다음으로 고대후기에 평민신분층에서 하호(下戶)가 분화되였다.

하호에 대하여서는 지금까지 각이한 견해가 있다.

그러한 견해를 보면

첫째로, 하호는 곧 노예라는것이다. 여기서는 특히 공납노예가 기본이였다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둘째로, 하호는 피정복민과 씨족공동체원이라는것이다.

셋째로, 하호는 노예적예속상태에 있는 예농층이라는것이다.

넷째로, 하호는 《민》에 속하는 사회의 기본생산자이며 절대다수가 농촌공동체원이라는것이다.

다섯째로, 하호는 농노라는것이다.

여섯째로, 하호는 하층빈민일반으로서 공동체가 분해되면서 생겨난 어제날의 공동체농민이였다는것이다.

일곱째로, 하호는 신분적으로는 《민》(民)으로 인정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노예로서 착취당한 빈민들이라는것이다.

이 견해들을 종합해보면 하호는 공납을 바치는 노예나 정복당한 공동체농민 혹은 봉건사회의 농노로 보았다는것을 알수 있다.

하호는 《빈민》(貧民)을 의미하였다.

하호는 당시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주변나라들인 고대중국과 왜나라에도 있었다.

전국시기 제나라의 수도 림치에 있었던 7만호의 하호들은 매호당 남자 3명을 계산하여 21만명의 군대를 낼수 있었다. 중국의 경우 하호는 일반빈민을 가리키는 범칭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하호는 왜나라에도 있었는데 《삼국지》 왜전에는 《그 풍속에 대인은 모두 4~5명의 처를 데리고 살고 하호도 간혹 2~3명의 부녀를 거느리고있다.》*고 하였다. 이것과 같은 내용을 전한 《후한서》의 기록에는 왜에 녀자가 많아서 대인들은 4~5명의 처를 두었고 그 나머지사람들은 2~3명의 처를 두었다고 한다. 이 두 기록을 따져보면 하호가 어떠한 계층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대인》과 대칭되는 일반백성을 부른 말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 《삼국지》 권30 위지 동이렬전 왜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 하호가 어떤 빈민층이였는지 하호에 대하여 서술한 《삼국지》와 《후한서》의 대표적인 자료들을 놓고 분석하기로 한다.

《읍락에는 호민과 민이 있고 하호는 모두 <노복>이 된다.》

《적이 있으면 제가가 스스로 일어나 싸우고 하호는 식량을 날라다 그들을 먹인다.》

《큰 군장이 없고 한대이래로 후, 읍군, 삼로 등의 관리들이 있어 하호를 지배한다.》

《혹 호민(豪民)의 밭을 갈아 10분의 5세를 문다. 사고가 말하기를 <하호는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것이다. 자기의 땅이 없어서 호부(豪富)집땅을 경작하여 10분의 5세를 본주인에게 가져다준다.>》

하호에 대한 이 기록들을 보면 크게 두가지 내용을 알수 있는데 하나는 하호가 노예와 구별되는 계층이라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호가 국가 혹은 개별적인 지주에게 부세를 무는 농민이였다는것이다. 즉 하호는 평민의 최하층으로서 봉건사회의 전형적인 소작농이였다고 보게 된다.

봉건사회의 전형적인 소작농인 하호가 부여와 같은 고대국가들에서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봉건사회의 소작농인 하호가 출현하게 된 경위가 봉건사회이전 노예사회말기와 관련되여있었다는것을 시사해준다. 고대하호에 대한 신분적규정은 여기에 주목을 돌리고 노예사회에서 하호가 출현하게 된 경위를 먼저 밝혀야 한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소작농은 생산수단에 대한 완전소유가 아니라 토지소유자로부터 땅을 빌려서 경작하는 불완전한 토지소유자이다. 토지를 빌린 대가로 토지소유자에게 수확량의 일부를 바치면서 살아가는데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서 볼 때 아무러한 생산수단도 소유하지 못한 피착취자였다.

하호의 출현과 관련된 자료는 구체적으로 알려진것이 없지만 발생의 견지에서 본다면 하호는 노예사회가 발전하면서 공동체경리의 침식과 노예제경리의 확대로 파산몰락된 공동체농민들에게서 산생되였다.

원래 원시사회에서 공동체경리는 공동체적토지소유에 기초하여 토지를 분여받아 경작하였으며 붕괴후 국가성립이후에는 국가와 공동체상층에 일정한 수확물을 바치는 형태로 진행되였다. 그러나 노예사회가 점차 발전하면서 노예주들의 끊임없는 탐욕과 노예제경리의 확대로 말미암아 공동체경리는 점차 침식되여갔으며 공동체자체가 해체되는 결과가 빚어졌다.

이렇게 되여 공동체토지도 점차 국가 또는 개별적인 대노예주들의 수중에 장악되였으며 공동체성원들은 생산수단이 없는 노예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이런 상태에서 몰락된 대부분의 공동체원들은 토지의 소유자들에게 땅을 부칠것을 요구하였으며 그들에게 인신적으로 예속까지 되면서 토지를 빌려 개인경리를 운영해갈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평민에서 하호가 산생되게 된 기본요인이였다. 다시말하여 사회의 피압박근로인민들을 예속화하려는 노예주계급의 끊임없는 탐욕과 그로 인한 노예제경리의 확대로 말미암아 노예사회후기에 평민에서 하호로 부단한 계급분화가 일어났다.

한편 평민에서 분화된 하호는 노예소유자적경리에 얽매인 새로운 농민 즉 소작농으로 전환되였다. 하호를 《어제날의 공동체농민》이였다고 보았던 선행견해는 이와 같은 점을 중요시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러한 경제관계는 노예사회말기의 태내에서 자라난 봉건적토지소유관계의 싹이라고 볼수 있고 이것이 장차 봉건적생산관계로 이어졌을것으로 보인다.

그뿐아니라 하호는 자영소농민들도 파산몰락되여 적지 않은 구성을 이루었다.

자영소농민들은 원래 원시사회붕괴후 공동체해체로 산생된 자유로운 농민들로서 처음에는 얼마만한 토지를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자영소농민들은 거듭되는 국가적인 부역과 병역, 가혹한 조세착취와 끊임없는 전쟁 등으로 령락되고 종당에는 파산몰락되여 생산수단을 잃게 되였으며 점차 노예 또는 하호로 굴러떨어졌다.

그것은 우선 하호의 대부분이 노예와 같은 예속적인 처지에서 국가와 노예주들에게 가혹한 착취를 당하여 사회의 빈민층으로 굴러떨어진데서 찾아볼수 있다. 당시 하호의 처지가 얼마나 가난하였으면 남의 옷을 빌려입고 나들이를 갔다고 한다.*1 일부는 그래도 자기 도장과 옷을 구비할 정도로 비교적 부유해지는 경우*2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하호들은 모두 가난한 백성들이였다.

 

* 1,2 《삼국지》 권30 위지 동이렬전 한

 

그것은 또한 하호의 일부가 노예사회말기에 새로 자라난 호민과 같은 중간층에게 착취를 당한 자료에서 찾아볼수 있다. 봉건사회초기 하호가 호민에게 10분의 5세를 바쳤다는 자료는 그 이전 노예사회말기에도 그러한 착취관계가 있을수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호는 공동체농민이나 자영소농민, 수공업자 등 평민들이 파산몰락되여 구성된 평민의 하층이며 그들은 생산수단이 없는것으로 하여 착취계급에게 예속되여 착취를 당하였다. 하호는 노예사회말기 계급분화과정에 많이 생겨났으며 점차 그 수가 증대되였다.

 

노예신분층의 분화

노예사회 첫 시기에 출현한 노예신분은 점차 노비로 불리웠고 소유관계에 따라, 노예로 된 경위에 따라, 종사하는 직분에 따라 명백히 구분되였다.

우선 노예신분은 노예사회후기에 이르러 노비로 불리웠다. 범금8조에는 《도적질한자는 남자의 경우 그 집의 노로, 녀자인 경우 그 집의 비로 만든다.》는 조항이 있다. 범금8조는 후조선시기의 발전된 성문법인데 이와 같은 조항이 명기된것은 후조선시기에 들어와서 노예신분을 명백히 노비로 불리웠다는것을 보여준다.

《삼국지》를 비롯한 문헌들에도 우리 나라 노예사회나 봉건사회에서 최하층신분이였던 노비(奴婢)가 기록되여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정식 노비라고 표현한 자료는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살인한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만든다.)와 《其遠處直如囚徒奴婢》(그와 멀리 있는 곳은 죄수와 노비와 같다.)를 비롯하여 여러곳에 있다.

 

이상의 자료들을 통하여 노예사회에 처음부터 출현한 노예신분이 후조선시기이후 노비신분으로 불리웠다는것을 알수 있다.

또한 노예사회후기에 이르러 노비의 소속관계가 공노비, 사노비로 명백히 구분되였다. 범금8조에서 도적질한자를 도적맞은자의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는것은 사노비의 존재를 보여준다. 노비의 소속관계에서 사노비가 존재하였다면 명백히 공노비도 존재하였을것이다.

이처럼 고대후기에 이르러 노예신분이 노비로 불리웠으며 소속관계에서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였다는것을 증시해준다.

 

2. 3. 고대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의 특징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우리 나라 노예사회에서 계급신분은 국가의 성립과 함께 형성되고 노예제도가 발전한 이후 그 구성이 더욱 세분화되였다.

고대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는 일련의 특징을 띤다.

그것은 첫째로, 고대 우리 나라에서의 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가 고조선을 중심으로 진행된것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조선일대의 고인돌무덤과 집자리, 귀틀무덤의 자료들은 고대지배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가 고조선에서부터 시작되였다는것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대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과정이 고조선을 중심으로 진행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다시말하여 단군조선시기 처음으로 출현한 노예주귀족신분인 가는 후국으로 있던 부여, 구려, 진국에까지 전파되여 당시의 국가와 사회에서 특권귀족신분으로 존재하여왔다.

둘째로, 계급신분의 분화는 고대초기에 거의 진행되지 않았으며 후기에 이르러 적지 않게 진행된것이다.

평민신분층에서 호민, 민, 하호로 분화되였다고 전한 부여의 자료는 노예사회말기의 형편을 반영한것으로 본다. 그뿐아니라 노비에 대하여 명기한 범금8조도 고조선초기의 법이 아니라 후조선시기의 발전된 성문법이였다.

고대계급신분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현존하는 자료를 보아도 초기에 구성된 계급신분이 변화가 없다가 노예사회후기에 와서 자료들이 나타나는데서 찾아볼수 있다.

셋째로, 평민층에서 하호가 많이 생겨나는 방향으로 피지배계급신분구성의 분화가 진행된것이다.

하호에 대하여 전하는 《삼국지》에 씌여진 자료를 보면 지배계급, 착취계급이 의거하는 생산자대중에 노예 못지 않게 하호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있었다고 볼수 있다. 더우기 자료에서 전한것처럼 하호가 종사하는 업종도 전업적인 농사일외에 소금구이, 물고기잡이 등 다양하였다.

지배계급, 착취계급이 하호를 노복처럼 부려먹었던 리유는 바로 하호가 농업을 비롯하여 생업을 담당한 자영소농민, 수공업자 등이 파산몰락되여 이루어진 최하층이였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전반에서 하호의 비중은 국가의 기본수탈대상인 평민을 부단히 분화시켜 그를 예속화하고 착취하려는 노예주계급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게 불어나게 되였다.

 

3. 결론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우리 나라 노예사회에서 지배계급신분은 처음에 특권신분인 귀족이 대가와 소가로 구분된 가로 구성되였으며 그 말기에는 여러개의 신분 및 관료등급으로 분화되였다.

피지배계급신분은 초기 평민과 노예로 구성되였던것이 노예사회가 발전하면서 그 말기에 이르러 평민신분층에서 호민, 민, 하호로 그리고 사회의 최하층신분인 노예(노비)신분에서 소속관계에 따라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분화되였다.

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는 곧 노예사회말기에 이르러 계급신분관계의 째여진 양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나라 고대사회의 노예제적성격이 강화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나라 중세 계급신분제도의 력사가 고대계급신분의 분화로부터 시작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앞으로도 고대계급신분제도에 대한 연구를 더욱 심화시켜 우리 나라에서의 계급신분제도의 력사를 깊이 해명하여야 할것이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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