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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고대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에 대한 연구(1)

1. 서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착취사회에서는 생산수단과 국가주권을 가지고있는가 가지고있지 못한가 하는데 따라 사회가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여지며 피착취계급, 피지배계급이 인민대중의 기본구성부분을 이룬다.》

생산수단과 국가주권의 소유관계에 관한 문제는 착취사회에서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가르는 기본징표이다.

우리 나라 고대사회에서는 노예주계급을 한편으로 하는 지배계급, 착취계급과 평민, 노예를 다른 편으로 하는 피지배계급, 피착취계급으로 갈라져 계급적대립과 투쟁이 사회관계의 기본으로 되여왔다.

노예사회에서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을 틀어쥔 노예주계급은 저들의 정치경제적특권을 정당화하고 더 많은 피압박인민대중을 예속화하기 위하여 신분제도를 만들어냈다.

신분제도는 노예사회나 봉건사회에서 사람들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서 일정한 권리와 의무를 법적으로 규정하여 그것을 대대로 이어받게 한 제도이다.

지금까지 보면 우리 나라 노예사회에서의 계급구성, 신분구성에 대하여 적지 않게 론의하였다.

《조선단대사》와 《부여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비롯한 여러 도서들에서는 우리 나라 노예소유자사회에서 지배계급으로 귀족신분이 있었고 피지배계급신분으로 평민과 노예가 있었다는것과 그 계급신분관계를 서술하였다.

특히 《조선단대사》에서는 자영소농민층이 점차 분화되여 호민과 하호가 되였다는데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였다.

선행한 연구에서 우리 나라 고대시기 계급신분의 기본구성과 일부 분화에 대하여서는 론의하였지만 계급신분의 전반적인 견지에서 그것이 노예사회발전과 함께 어떻게 분화되고 공고화되였는가에 대하여서는 밝히지 못하였다.

고대계급신분의 구성이 어떻게 분화되여 공고화되였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신분제도사의 첫 시기에 해당되며 또 지배계급, 착취계급의 인신적지배 및 착취관계의 반동적성격과 관련된것으로 하여 이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분화란 본래 하나이던것이 여러 갈래로 나뉘여지는것 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게 한다는 뜻으로서 계급신분구성에서의 분화라고 하면 계급신분구성이 초기에 비하여 후기에 와서 몇개의 등급으로 갈라지게 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이 론문에서는 여러 자료들을 통하여 고대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2. 본론

 

2. 1. 지배계급신분의 구성과 분화

 

2. 1. 1. 고대초기 지배계급신분의 구성

고고학적자료를 통해 본 대귀족신분과 중, 소귀족신분

고대노예소유자사회에는 지배계급신분으로 귀족이 있었다.

우리 나라의 첫 고대국가 고조선에서 특권신분은 대귀족과 중소귀족으로 구성되여있었다.

고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돌무덤은 그 일단을 잘 보여준다.

현재 학계에서는 대형 또는 특대형고인돌무덤이 상층지배계급의 무덤으로서 그 크기는 노예주귀족관료들의 권력과 재부에 비례한다고 보고있다. 이 무덤들은 노예주계급에게 인신적으로 예속되여 지배와 착취를 당하던 노예와 평민들의 강제적집단로동의 창조물이였다.

대체로 고인돌무덤들은 그 뚜껑돌의 무게에 기초하여 세등급으로 나눌수 있다.

대급은 뚜껑돌이 70~100t으로, 중급은 40~70t으로, 소급은 10~40t으로 되여있다.

여기에 동원된 로력과 축조과정도 간단치 않았다. 초보적인 추산에 근거해도 대략 50t급의 무덤축조에는 2 000~2 300여공수가 들었는데 이것은 한공수가 매일 17~18시간 가동하는것으로 계산해도 매일 460명의 로력이 10일간, 230명의 로력이 20일간 만가동해야 할 로력이였다.

 

* 《고조선사회의 계급, 계층별구성》 력사과학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체95(2006)년 2호 26페지]

 

50t급의 무덤축조에 이만한 로력과 공수가 든다면 70~100t급에는 거의 두배의 로력과 공수가 들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엄청난 로력과 공수가 투하된 고인돌무덤의 크기에 따라 노예주계급이 소유하였던 권력과 재부의 크기에서도 차이와 등급이 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실례로 고조선지역에 분포되여있는 고인돌무덤들가운데서 178개정도를 선정하여 대중소급으로 나누어보면 뚜껑돌의 길이가 5m이상의것이 16기, 3~5m정도의것이 44기, 1~3m정도의것이 118기로 되는데 이에 따라 노예주계급의 권력과 재부의 크기가 구분된다. 즉 제일 큰것은 전체 수의 9%, 중간정도의 크기를 가진것은 전체 수의 24.7%, 작은것은 66.3%이다.

 

* 《고조선사회의 계급, 계층별구성》 력사과학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체95(2006)년 2호 27페지]

 

이 사실은 특대형의 고인돌무덤의 주인공은 국왕과 왕실귀족들 그리고 대신급의 고위관료들로, 중간크기급의 주인공들은 중간급노예주관료들로, 작은 크기급은 여러 하층노예주관료들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고인돌무덤의 등급크기에서 보여주는바와 같이 고인돌무덤의 주인공들은 해당한 등급과 차이를 가지고 권력과 재부를 차지하였던 대, 중, 소노예소유자들이였다.

한편 작은 크기급이하의 고인돌무덤들은 사회적지위가 높은 평민들의 무덤으로 추정할수 있다. 초보적인 계산에 의하더라도 4~5t정도의 고인돌무덤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 크기의 무덤주인공들은 부락우두머리의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였거나 상층평민이였을수 있다.

고인돌무덤만이 아니라 고대집자리유적을 통해서도 권력과 재부를 독차지하였던 노예소유자계급의 면모가 나타난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고대집자리유적들을 살펴보면 하나의 유적에서도 면적이 넓은 집자리에서는 희귀하고 값진 유물들이 많이 드러나는 반면에 면적이 좁은 집자리들에서는 유물이 적게 나오거나 그 질적상태도 높지 못한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였다.*1 그것은 석탄리유적 1기층의 집자리들가운데서 면적이 38㎡인 14호집자리와 면적이 14~15㎡정도인 6호 및 15호집자리에서 나온 유물들 그리고 남양리유적 1기층의 집자리들가운데서 면적이 48㎡정도인 19호집자리와 면적이 14㎡정도인 6호집자리에서 나온 유물들을 대비하여보면 알수 있다.*2 그리고 면적이 48㎡인 신흥동유적의 2호집자리에서 나온 유물의 량과 가지수가 규모가 작은 다른 집자리들에 비하여 많은 사실도 그것을 증명해준다.

 

* 1,2 《팽이그릇시기 집자리유적에 관한 연구》 사회관학출판사 [주체92(2003)년 208페지]

 

이상의 고고학자료들은 고대초기 지배계급신분이 크게 대귀족신분과 중, 소귀족신분으로 구성되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문헌자료에 반영된 귀족신분의 구성

우리 나라 노예소유자사회에서 특권신분, 귀족신분은 《가》(加)였다.

부여와 구려에서 가는 대가(大加)와 소가(小加)로 구분된다.*

 

* 《부여 및 후부여사》 김형직사범대학출판사 [1992년 84페지]

《조선단대사》(구려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체99(2010)년 81페지]

 

원래 가는 전조선시기에 중앙관직명으로 처음으로 나타났고 그 이후 부여와 구려에 전승된것이였다.

《규원사화》에는 전조선시기의 중앙관직으로 단군8가(9가)가 나온다. 가는 전조선의 후국으로 있던 부여와 구려에도 있었다.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부여와 구려의 제가들인 6가에 대해서 상세히 서술하였다.

중앙관직으로 출현한 단군8가가 단군조선에서 갈라져나온 부여, 구려에서 제가로 불리웠다. 제가(諸加)는 여러명의 가를 말하는데 이 가가 노예사회의 귀족신분이였다.

가를 노예사회의 귀족신분으로 보게 되는것은 우선 제가의 원래 의미가 확대되여 귀족관료들의 집단을 나타내기때문이다.

고대국가들에서는 년차별로 제가평의회가 열리였다. 제가평의회는 여러명의 가들이 모여 진행하는 귀족민주주의적합의기구를 말하는데 여기에 참가하는 가들에는 중앙관직의 8가(단군조선의 8가)나 6가(부여와 구려의 6가)만 참가한것이 아니라 지방의 여러 가들도 참가하였다.

때문에 합의기구의 이름도 중앙관료인 8가나 6가만이 참가하는 대가회의가 아니라 많은 가들이 참가한다는 의미에서 제가평의회(諸加評議會)로 불리웠다고 본다.

가를 노예사회의 귀족신분으로 보게 되는것은 또한 부여의 제가들이 순장할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

《삼국지》(三國志)에 반영된 부여의 순장자료에는 제가들이 죽으면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은자는 수백명이나 순장한다. 장례를 후하게 하여 곽을 쓰고 관은 쓰지 않는다.》*고 씌여있다.

 

* 《삼국지》권 30 위지 동이렬전 부여

 

부여의 순장과 관련한 이 자료에서 부여의 제가들이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은자는 수백명》(多者百數)이라고 쓴 부분은 적은자도 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묵자》(墨子)의 절장론(節葬論)에 《천자가 순장하는데 많은자는 수백명이고 적은자는 수십명》(天子殉葬多者百數, 少者十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과 부여의 순장자료를 대비해보면 부여의 제가들속에서 적게 순장하는자도 있었다는것을 시사하여준다. 그러므로 부여에서 제가가 죽은 후 《다자순장》(多者殉葬)한자는 대가급이고 《소자순장》(少者殉葬)한자는 소가급이였을것이다.

부여에서 대가급의 노예소유자는 100여명정도의 노예를 순장할수 있었고 소가급의 노예소유자는 수십명정도의 노예를 순장할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있었다.

이렇게 부여에서 순장할수 있는 권력을 지닌 가는 대가와 소가로 구분되여있었다.

가를 노예사회의 귀족신분으로 보게 되는것은 또한 《가》라는 이름이 중앙관직명으로만 쓰인것이 아니라 고대이후시기 특정한 신분을 통칭하는것으로 불리웠기때문이다.

고추가를 문벌이 가장 높은 귀족신분층으로 본 고구려의 자료는 가를 관직명으로만 볼수 없다는것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고추가는 전신국인 구려의 제가였으며 이전 연나부왕족가문의 유력대신들이였다. 신흥한 고구려정권이 그들의 이전 지위를 고려하여 작위를 수여하였는데 그것은 실지 관직이 아니고 특권만을 가진 귀족칭호였다.[《조선단대사》(고구려사) 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체96(2007)년 26~27페지]

 

우의 사실은 가가 관직명이 아니라 귀족신분층을 가리키는 칭호라는것을 보여준다.

그뿐아니라 전조선이래로 중남부조선지역으로 전파된 관직명 《가》는 그 이후 한, 한기, 거슬한(거서한, 것한), 가한, 극한으로 되여 귀한 사람, 큰어른 등을 의미하는 말로 되였다.* 이것도 역시 가라는 의미가 관직명이 아니라 특권을 가진 귀족관료층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 《조선단대사》(고조선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체99(2010)년 92~93페지]

 

이와 같이 가는 권력의 정도에 따라 노예를 순장할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등급에 따라 의상도 각이하게 착용할수 있는 지배계급신분이였다.

지배계급신분인 가에는 단군조선의 중앙관료인 단군8가가 속하였고 그 이후 부여에서 중앙의 6가를 비롯한 여러 대가들과 대사, 대사자, 사자 등과 같은 소가들이 속하였다.

고대귀족신분 가를 좀더 넓게 보면 대가에는 중앙의 8가나 6가뿐아니라 변방의 후왕과 속령의 우두머리들이 속하였고 소가에는 중앙의 가들밑에 있었던 중소관료들과 후왕과 속령우두머리에게 소속되여있는 중소관료들, 일부 공동체상층들이 속하였을것이다.

이러한 귀족신분 가가 신분으로 고착된 시기는 대체로 단군조선성립이후라고 보아진다. 그것은 단군조선초기 중앙관직명으로 출현한 가가 대가와 소가로 구분된 귀족신분으로 되기에는 어느 정도 과도기가 필요하였기때문이다.

제반 사실은 고대초기 귀족신분은 크게 대가귀족신분과 소가귀족신분으로 구성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2. 1. 2. 고대말기 지배계급신분에서 여러 등급으로 분화

고대초기 대귀족신분과 중, 소귀족신분으로 구성되였던 지배계급신분은 점차 고대말기에 이르러 여러 신분등급으로 분화되였다. 그것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조선일대에서 나타난 귀틀무덤을 통하여 찾아볼수 있다.

여러 귀틀무덤들을 조사하여 분류해보면 여기에 묻힌자들의 신분규정은 매우 엄격하였다. 귀틀무덤의 크기와 형식, 유물의 가지수와 량을 따져보면 무덤에 묻힌자들을 9개의 신분등급으로 구분해볼수 있다.*1

이 유적을 남긴 정치세력은 고조선이 멸망한 후 그 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락랑국이나 《조선후국》의 통치집단이였다.*2

 

* 1,2 《귀틀무덤을 남긴 정치세력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95년 1호 11~15페지]

 

물론 이 무덤들이 노예제말기 혹은 봉건사회초기에 해당되는 무덤이지만 고조선유민들이 세운 락랑국이나 《조선후국》의 통치집단이 남긴 무덤인것만큼 무덤에 반영된 귀족들의 신분등급은 그 이전 고조선말기의 귀족신분등급을 이어받은것이다.

 

 

그러므로 표에 반영된 9개의 신분 및 관료등급은 선행한 고조선말기 귀족신분의 양상을 적으나마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하여 꼭 고조선말기에 9개의 신분등급으로 분화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귀틀무덤의 시기는 어디까지나 노예제말기부터 봉건사회초기까지로 규정되는것만큼 노예사회말기로 한정시켜본다고 하여도 9개의 신분등급이하로 되여야 한다. 따라서 고대귀족신분은 노예사회말기에 이르러 9개이하정도의 신분등급 또는 폭넓게 여러 신분등급으로 분화되였다.

앞에서 고인돌무덤자료를 통하여 고조선시기 노예주계급은 대귀족, 중, 소귀족신분으로 구성되였다는것을 보았다. 이것은 력사자료와 결부하여 볼 때 초기노예주계급의 신분등급이 70~100t급노예주는 대가급귀족신분층으로, 40~70t급과 10~40t급사이의 중, 소노예주는 소가급귀족신분층으로 구성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노예사회말기에 이르러 귀틀무덤자료에서 보는바와 같이 신분 및 관료등급이 9개이하 등급 혹은 여러 등급으로 분화되였다.

앞선 시기와 후시기 귀족신분의 무덤자료들은 지배계급신분의 등급이 엄격하였다는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사회발전과 더불어 귀족신분의 분화가 진행되였다는것을 시사하고있다.

이렇게 노예사회초기 대가급과 소가급으로 구성된 귀족신분은 오랜 세월이 흐른 노예사회말기에 이르러 여러 등급으로 분화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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