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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조선에서 감행된 일본침략자들의 금광리권강탈책동과 그 침략적본질

 

2. 본론


2. 2. 일본침략자들이 조선에서 감행한 금광리권강탈책동의 시점 및 단계(2)

 

일본침략자들은 무엇보다먼저 영흥금광채굴권을 강탈하기 위하여 미쳐날뛰였다.

함경도 영흥금광은 18세기 후반기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사금광산으로서 이 금광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원산개항(1880년 3월)초기에 매우 높아졌다.

원산항의 개항을 계기로 일본의 제1은행이 원산에 지점을 설치한데 이어 약 20개에 달하는 일본인경영상사들이 련이어 이곳에 지점을 두었다. 이 회사들을 통해 원산항에서 많은 금이 류출되였는데 조선산 금수출액은 수출품의 8/10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원산부근에서 사금수출이 제일 많았던 금광은 장연, 영흥 등이였다. 특히 함경도지역의 금광에 대한 관심은 일본만이 아니라 청국도 례외로 되지 않았고 실지 1884년 5월이후 청국상인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청일량국상인들간의 대립이 더욱 격렬해졌다. 결국 일본침략자들은 청국에 선손을 빼앗길세라 영흥금광채굴권확보에 본격적인 관심을 돌리고 강행적으로 추진시켰던것이다.

당시 영흥금광형편을 보면 1885년 광산의 감독관인 현두성과 유력자인 렴지호라는 두 민간인이 통리기무아문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채굴 및 수세권을 장악하고있는 사설광산이였다. 그후 북청부사 리용익이 영흥에 파견되여 영흥금광의 리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원산항의 무역총액에 영향을 줄 정도로 채굴량을 늘여나갔다.

영흥금광의 실정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한 일본외무경 이노우에는 한성주재 일본공사를 사촉하여 타국인이 손을 대기 전에 광산채굴권을 획득할데 대한 훈령을 내렸다. 그리고 1887년에 일본인광산기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영흥금광의 8개소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조선국 함경도 영흥지방 금갱의 실황》이라는 보고서와 광물견본이 일본외무성에 발송되고 이에 따라 일본정부는 일본인거류민들을 부추겨 조선봉건정부 및 회사, 개인들과 약조를 맺는 방법으로 광산채굴권을 획득하기 위한 책동에 미쳐날뛰였다.

영흥금광리권을 강탈해내기 위한 일본침략자들의 책동은 이 지방관료들의 봉건적착취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과 부사 리용익의 파면, 그로 인한 채굴작업의 중단 등의 원인으로 파탄되고말았다.

일본침략자들은 또한 경상도에 있는 창원금광의 리권을 강탈하기 위해서도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창원금광은 《광석의 품질이 좋아 광석 1t 을 캐내면 그가운데서 평균 금과 은 600원의 가치를 생산할수 있어 매일 2t의 광석을 캐낸다면 한달에 3만 6 000원, 적어도 3만원의 금을 얻어낼수 있다.》고 하였다.*

 

* 《일본외교문서》(일문) 24권 304페지

 

창원금광은 182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하여 광산합영회사인 의신회사의 사원 박인룡, 방흥완, 최명완 등이 1885년 통리기무아문에서 채굴권을 허가받은 이후 그 개발사업이 보다 활성화되였다. 그러나 채굴과정에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면서 의신회사는 경영위기에 직면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이를 좋은 기회로 삼고 일본인자본가 우마끼 겐조를 의신회사에 침투시켜 경상도 창원군의 룡택금광채굴권허가를 받아내도록 부추겼다. 우마끼는 형식상으로는 의신회사에 고용된것으로 되여있었으나 채굴에 필요한 자금과 의신회사에 납부할 특허료, 의신회사가 통리기무아문에 납부하게 되여있는 세금까지 다 부담하게 되여있은것으로 하여 실제상으로는 창원금광채굴권을 독점한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창원금광에서 채굴된 광석품질을 시험한 결과 고품위광석에 해당하며 앞으로 부산항에서의 금무역에 큰 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결론을 찾은 일본반동정부는 농상무성 광산국장을 비밀리에 창원지역에 파견하였다. 부산령사의 소개로 우마끼를 만나 그의 고용인의 명목으로 창원금광에 대한 시찰을 성과적으로 진행한 광산국장의 보고에 기초하여 일본반동정부는 이 금광에서의 우마끼의 채굴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각방으로 노력하였다.

우마끼는 통리기무아문이 의신회사에 10년간의 채굴허가를 준 기회를 리용하여 1887년 5월에 창원금광채굴에 대한 《약증서》(《제1차 창원개광약단》이라고도 함)를 맺으려고 시도하였다. 13개 조로 된 이 《약증서》에는 의신회사가 우마끼를 간사로 리용하여 그에게 10년간 창원부내 금동광산의 채굴을 위임한다는것과 그 대가로 우마끼가 채굴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며 리익의 1/10을 의신회사에 납부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여있었다.*

 

* 《일본외교문서》(일문) 20권 244페지

 

통리기무아문에 제출된 《창원개광약단》은 독판 김윤식 등의 반대로 거절당하였으나 그후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조선봉건정부의 우유부단성으로 하여 다시 상정되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채굴권의 위임기한을 15~20년으로 할것을 요구하였으나 의신회사의 반대로 10년으로 확정되였다. 그후 1888년 1월 우마끼와 조선봉건정부사이에 선금 2만원을 먼저 납부하는 대가로 20년간의 창원금광채굴권을 허가해주며 광무국에 납부하는 순리익의 3/10가운데서 매해 천원씩을 20년간 갚는다는 내용의 《제3차 창원개광약단》이 합의되였으나 역시 청나라의 방해로 체결되지 못하였다.*

 

* 《일본외교문서》(일문) 21권 228~229페지

 

일본침략자들은 세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891년에 들어와 또다시 일본공사관을 사촉하여 밀양부사 정병하와 광무국 총판 한규로 등과 창원금광채굴권을 장악하기 위한 외교교섭을 벌렸다. 그리하여 1891년 10월 28일 우마끼와 의신회사, 광무국이 모여앉아 《제4차 창원개광약단》을 체결하였다.

여기에서는 의신회사에 고용된 우마끼를 10년간 해임하지 않고 특별히 보호해준다는것과 광산개발기간을 10년간으로 한다는것, 채굴지구는 광무국이 정하는 창원내 룡택지역으로 한다는것, 조선인을 광부로 고용하며 개발에 필요한 기계와 자금은 우마끼가 부담한다는것, 개광전에 내는 선금을 만원으로 하며 세금은 년간 사금 300량으로 한다는것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여있었다.

4차례에 걸쳐 체결된 《창원개광약단》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창원금광채굴의 일본측 담당자는 우마끼 겐조로 되여있었으나 실지 처음 채굴에 착수한 사람은 후루가와재벌이였다.

후루가와는 창원금광채굴을 조선의 광산진출의 첫 돌파구를 여는 계기로 간주하고 우마끼의 창원지구의 룡택금광개발에 대한 청탁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현지에 일본인기사가 파견되고 창원지구의 7개 갱구에서 사용하게 될 광산용폭약문제가 토의되였으며 일본외무성과 내무성, 경시성사이에 충분한 합의를 진행하였다.

그는 창원금광채굴을 위해 한달에 3 000원의 자금을 투자하면 500원정도의 순리익을 볼수 있다는 타산밑에 시굴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수입이 100원에 불과한데다가 앞으로 창원에서 좋은 품질의 금광을 발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타산하자 1892년 12월에 와서 철수하고말았다.

창원금광에 대한 채굴은 그후 우마끼에 의해 1894년 4월부터 다시 진행되였으나 갑오농민전쟁의 발발과 을미사변을 계기로 한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의 앙양으로 본격적인 채굴에 이르지 못한채 중지되고말았다. 실지 창원의 룡택금광에 건설되였던 건물과 기계는 물론 거의 모든 시설들이 전부 반일의병부대들의 공격을 받아 파괴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의 창원금광획득기도는 완전히 파탄되고말았다. 하지만 일본침략자들은 그후에도 집요하게 별의별 오그랑수를 다 써가며 우리 나라의 여러 금광리권강탈을 위해 미쳐날뛰였다.

일본침략자들의 금광리권강탈책동은 1890년대 중엽이후에 들어와 유미렬강들이 차지하고있던 금광들까지 포함하여 우리 나라의 금광전반을 독점하기 위한데로 집중되였는데 이것을 셋째 단계로 볼수 있다.

1890년대로 말하면 우리 나라를 저들의 독점적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일본의 침략책동이 본격화된 시기였다고 할수 있다.

일본침략자들은 갑오농민전쟁을 조선에서 청나라세력을 밀어내고 독점적지배권을 확립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결국 1894년 5월부터 6월 중순까지 기간에 1만 2 000여명에 달하는 침략군이 우리 나라로 물밀듯이 쓸어들었고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청나라세력을 조선에서 밀어낼수 있는 확고한 전망을 열어놓았다. 한편 일본침략자들은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 등 우리 나라의 반일애국적이며 진보적인 세력 및 운동들을 야수적으로 탄압말살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1896년부터는 우리 나라의 금광전반에 대한 리권독점에 달라붙었다. 사대에 물젖은 조선봉건왕조의 통치배들은 유미렬강들의 강압에 굴복하여 1896년에는 미국에 운산금광리권을, 1898년에는 도이췰란드에 당현금광리권을 넘겨주는 매국배족적행위를 감행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이미 조선에서 일부 광산들의 리권을 차지한 유미렬강들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그들의 리권을 《이양》받거나 조선봉건왕조로부터 광산리권을 빼앗는 방법으로 금광들을 략탈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1899년 12월 1일 일본공사 하야시를 내세워 조선봉건정부에 황해도의 장연금광과 경기도의 안성금광 그리고 충청남도의 직산금광에 대한 리권을 넘겨줄것을 강박하였다. 그런데 이 금광들은 다 궁내부소속으로서 조선봉건정부로서는 허락하기 힘든 요구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시부자와 등 자본가들을 내세워 어떻게 하나 금광리권을 빼앗아내기 위해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직산금광은 1899년에 이미 후꾸지라는 일본인이 와서 조선인금광업자를 매수하여 채굴하고있는 광산이였다. 친일파인 최광순을 앞잡이로 내세워 채굴지를 넓혀나가던 후꾸지는 조선봉건정부가 금광리권양도를 단호히 거절하자 《선채굴강행, 후특허권요구》라는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하나 저들의 략탈적목적을 이루어보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유미렬강들에게는 금광리권을 넘겨주면서 일본인에게만 허용해주지 않는것은 불평등하다고 강짜를 부렸다. 그러면서 기어이 직산금광리권을 빼앗아내려고 책동하였다.

당시 조선봉건정부는 일본도 역시 한성ㅡ인천사이 그리고 한성ㅡ부산사이 철도리권을 가지고있는것만큼 리익분배에서 균등하다고 하면서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사태가 저들에게 불리하게 번져지자 일본침략자들은 1899년 8월 일본인자본가 시부자와를 내세워 친일파인 최광순으로부터 그가 소유한 직산군 보덕원에 있는 금광채굴권을 빼앗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직산군 보덕원에 있는 금광은 운산금광과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 전국에 있는 금광가운데서도 품위가 매우 좋은 곳인데다가 이 지방옆에 한성ㅡ부산철도가 놓이게 되면서 캐낸 광석을 략탈해가는데도 아주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있었다.

일본공사 하야시는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이 앙양되면서 광산경영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저들의 정부에 군함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봉건정부를 위협해줄것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1900년 7월에 일본침략자들은 끝끝내 무력까지 동반하여 직산금광리권을 25년기한으로 강탈해내는 날강도적인 행위를 감행하였다.

이처럼 우리 나라에서 일본침략자들의 금광리권강탈책동은 1870년대 중엽이후부터 계획화되고 1882년부터 실천단계에 들어갔으며 1880년대 중엽이후부터 1890년대까지의 전기간에 걸쳐 교활성과 악랄성을 띠고 로골적으로 감행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박사 부교수 오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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