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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력사적지위를 통하여 본 고조선-고구려-고려의 계승관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적으로 볼 때 평양은 우리 나라의 고대국가였던 고조선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고대문화도 평양지방에서 제일 발전하였습니다. 평양은 지난날 강성했던 고구려의 수도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수도는 해당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라고 말할수 있다. 그런것으로 하여 수도의 력사적지위와 계승문제는 그 나라 민족사의 정통을 이어주는데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평양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로서 반만년의 유구한 우리 민족사가 시작되고 민족사의 정통을 이어주는 민족의 발상지, 민족문화의 중심지, 조선민족의 자랑스러운 성지이다. 

이 글에서는 고대, 중세시기 평양의 력사적지위를 통하여 고조선-고구려-고려의 계승관계에 대하여 밝히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평양은 우리 나라 첫 고대국가였던 고조선의 수도였으며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다.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였다는것은 여러 문헌자료를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는 단군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기록되여있고 《삼국사기》에서는 평양이 선인 왕검이 도읍한 곳이라고 하였으며 《고려사》에서는 평양이 3조선(단군조선, 후조선, 만조선)의 수도였다고 하였다.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로서 성지, 문화적중심지였다는것은 고고학적자료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왕들이 죽으면 그 무덤을 수도부근에 만드는것이 관례로 되여있었는데 평양의 강동에는 고조선의 건국자인 단군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일대에 우리 나라 고대초기 지배계급의 무덤인 고인돌무덤들이 1만 4 000여기나 분포되여있는데 그가운데서 평양에만도 왕릉급으로 인정되는 특대형고인돌무덤들이 집중되여있다.

 

한편 평양은 단군조선시기 성곽의 집중적분포지였다. 평양시 대성구역일대에는 단군조선시기의 수도성인 왕검성으로 인정되는 청암동토성(아래성)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100여리 사이를 두고 동쪽에 황대성, 서쪽에 성현리토성, 남쪽에 지탑리토성, 북쪽에 덕산토성 등이 있다. 

이처럼 평양은 우리 나라에서 첫 고대국가였던 고조선이 건국한 곳이였으며 근 3000년간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우리 민족사의 발상지였다.

 

다음으로 평양은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가장 강하였던 고구려의 수도로서,고조선의 계승국으로서 고구려의 지위를 확고히 고수하였다.

고구려는 근 1000년에 걸치는 존재기간 평양에 대한 여러차례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가운데는 247년(동천왕 21년) 평양성에로의 천도, 343년(고국원왕 13년) 평양 동황성에로의 천도와 같이 림시로 수도를 옮기는 경우도 있었고 427년 평양성에로의 천도와 같이 정식으로 수도를 옮긴 경우도 있었다. 또 평양 장안성과 같이 한 지역에서 위치를 옮긴적도 있었다.

여기에서 427년 평양성에로의 천도는 고구려력사뿐아니라 삼국시기의 전반력사에 큰 영향을 준것으로 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것이였다.

그런데 이러한 평양천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목적에서 단행되였는가 하는 경위는 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고구려가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데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아주 짧은 기록만을 전하고있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15년, 권37 지리지 고구려)

 

평양에로의 림시천도의 경우에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체적인 경위가 전해지고있다. 실례로 247년 평양에로의 림시천도였는데 246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공으로 부수도 환도성이 자기의 구실을 할수 없게 되자 247년(동천왕 21년) 2월 평양에 왕성을 쌓고 종묘, 사직과 백성들을 옮긴것이 천도경위였다. 또 343년 평양에로의 림시천도는 342년 전연의 모용황이 침공하여 환도성이 다시 파괴되였을 때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이 부수도였던 환도성과 그리 멀지 않아 안전을 담보할수 없다고 보고 평양동황성으로 옮긴것이 천도경위였다.

 

이와는 대조되게 삼국시기의 력사발전에서 중요한 사변의 하나였던 427년의 평양천도경위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기록도 전해지지 않고있다.

우에서 본바와 같이 기록에 나타나는 평양천도는 246년 위나라와의 전쟁, 342년 전연과의 전쟁으로 하여 일어난 사건이였다. 그러나 427년의 천도전야에는 그와 류사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3세기나 4세기의 평양천도가 불가피한것이였다면 5세기의 평양천도는 의도적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427년 고구려의 평양천도의 경위를 밝히는것은 결국 그 의도가 무엇이였는가를 밝히는 문제에 귀착된다. 그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를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조건에서 고구려의 평양천도경위는 천도이전시기의 력사발전과정 즉 고구려를 둘러싼 대내외정세와 그에 대처한 고구려의 정책을 통하여 해명할수밖에 없다.

4세기 말엽에 이르러 고구려력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변은 370년대 전반기에 있은 유주진출과 그에 뒤따른 고조선옛땅의 완전수복이였다.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는 세기적인 투쟁이 빛나게 결속되고 서북방정세가 점차 완화되여감에 따라 고구려는 자기의 주공방향을 남쪽으로 돌리게 되였다. 특히 이 시기 남방에서 백제가 급속히 강화되여 고구려에 대항해나서게 된 조건에서 백제를 견제하는것이 긴절한 과업으로 제기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370년대초 이후 삼국통일을 위한 남방진출을 기본정책으로 내세우고 이 사업에 달라붙었다.

 

따라서 평양천도의 경위는 4세기말엽 이후시기 력사발전의 기본흐름으로 된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과정속에서 보아야 한다.

고구려의 세력확장은 광개토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갔다. 그 과정이 광개토왕릉비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여있다.

광개토왕시기 고구려의 세력확장의 주되는 방향은 남방진출이였으며 그와 병행하여 395년의 비려정벌, 398년의 식신정벌, 410년의 동부여정벌을 비롯하여 북쪽방면에로의 진출도 있었다.

고구려의 세력확장과정을 통하여 알수 있는것은 고구려가 자기의 기본정책을 삼국통일에 두고있었으며 또 여기서 주도세력으로 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4세기말~5세기초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틀어쥐고 당시의 정세를 좌우지하는 강대한 나라였다.

평양천도는 바로 이러한 환경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면 다른데도 아닌 평양이 천도의 대상으로 정해지게 된 리유가 무엇이였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을 밝힐수 있는 실마리를 247년 평양에로의 림시천도사실에서 찾을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동천왕21년(247년)에 고구려는 평양성으로 수도를 림시로 옮기면서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거처이다.》라고 전하였다.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

 

기록에서 평양이 본래 《선인 왕검의 거처》라고 한것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결국 이때 평양으로 천도한것은 환도성이 파괴된데도 원인이 있지만 주되는것은 평양이 《선인 왕검의 거처》였기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인 왕검의 거처》란 두말할것도 없이 고조선의 시조 단군이 살던 곳 즉 고조선의 수도를 가리킨것이다.

고구려시조 동명왕(고주몽)이 단군의 아들로 묘사되기도 하였다는 점을 념두에 둘 때 이것은 고구려사람들이 평양을 자기 조상의 발상지로 간주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삼국유사》 권1 왕력 고구려 동명왕)

따라서 평양에로의 천도는 평양지방을 개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상의 도읍을 찾아서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에 다시 돌아온것이라고 할수 있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옛 수도였던 평양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삼국통일위업을 거의 완성단계에 올려놓았으며 백제, 신라에 영향력을 강화하여 정치, 경제, 문화의 여러 부문에 걸쳐 민족의 공통성과 단일성을 더욱 공고히 하게 하였다.

결국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민족의 통일적발전의 중심지로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였다.

이처럼 427년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우리 민족사의 정통을 이어주고 우리 민족국가들의 계승관계를 뚜렷이 하는데서 중요한 사변의 하나로 되였다.

 

다음으로 평양은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가 매우 중시한 수도로서 고조선-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고려의 지위를 더욱 고수하였다.

평양은 고려사람들이 매우 중시한 곳이였다.

 

고려태조 왕건은 평양을 서쪽의 도읍이라는 뜻에서 《서경》이라고 부르도록 하였으며 남방의 정세가 복잡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26년간 무려 10여차례나 방문하였다. 그리고 20여차에 걸쳐 서경건설과 관련한 조치를 취하여 서경의 지위를 높이였다. 특히 왕건이 말년에 남긴 《10훈요》에서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와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요. 대업만대의 땅》이라고 하면서 왕들이 해마다 100일간 서경에 머물러 정사를 보면서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것을 특별히 강조한 사실은 고려지배층안에서 평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태조 왕건의 이 《훈요》는 그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대로 집행되지는 못하였으나 고려 전반기만 하여도 11명의 왕들이 무려 38차나 서경에 체류하면서 정사를 보았다.

 

고려는 건국직후에 수도 개경건설에 앞서 평양복구에 착수하면서 평양을 대도호부로 정하고 서경으로 승격시켜 그 지위를 수도와 거의 대등한 위치에 올려세웠다. 이에 따라 서경에 중앙통치기구를 모방한 분사제도와 류수관제, 수도에만 두게 되여있는 경기가 설치되고 제일먼저 학교가 설립되여 교육문화의 중심지로 되였다.

또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기 위한 사업도 적극 추진되였다. 그러한 첫 사업으로서 왕실계통의 족속들과 심복관리들, 일반인민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947년에는 서경의 왕성을 쌓았고 1011년에는 서경 황성을 쌓고 궁전과 사찰, 제사시설들을 건설, 보수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려 《황도》로서의 면모를 끊임없이 갖추었으며 그에 토대하여 947년과 949년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서경천도를 시도하였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자처했다는것을 념두에 둘 때 평양의 중요성이란 다름 아닌 고조선, 고구려의 수도였다는데 있었다고 보는것이 어느모로 보나 타당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의 자기의 성격을 명백히 하려고 한것이다.

 

이것은 993년 고려를 침략한 거란침략군과의 담판석상에서 애국명장인 서희장군이 《우리 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그래서 국호도 고려라고 했고 수도도 평양에 정했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사실과(《고려사》 권 94 렬전 서희) 1135년 《묘청의 란》 때 묘청일파가 독자적인 년호를 제정하여 쓰며 왕을 황제라고 부르고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에 수도를 옮김으로써 나라의 위력을 떨치자고 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고려의 서경천도는 여러가지 조건으로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중요한 정치군사적중심지의 하나로 튼튼히 꾸리기 위한 고려봉건국가의 조치에 따라 평양은 고려시기에 중세도시의 면모를 훌륭히 갖추게 되였으며 제2수도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이처럼 고려는 평양을 매우 중시하면서 고조선-고구려의 계승성을 더욱 고수하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평양은 고대, 중세시기 존재한 우리 나라 력대 국가들인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계승성을 확고히 보장한 우리 민족과 그 통일적발전의 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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