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품에서 영생하는 애국의 삶
ㅡ 애국인사 홍동근 ㅡ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 참된 삶을 빛내인
《사람은 자기 개인의 리익보다 조국과 민족의 리익을 더 귀중히 여기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서 삶의 보람과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홍동근선생은 남조선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 조국의 통일, 해외동포들의 단합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애국인사이다.
홍동근목사는 1926년 평안북도 피현군에서 출생하여 남조선과 일본, 미국 등지에서 그리스도교목사로 활동해왔다. 그는 일찍부터 나라의 독립을 위한 길에 나섰던 아버지의 영향속에서 애국, 애족의 마음을 간직하고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1921년에 처음으로
당시 어린 홍동근선생은 자기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일을 도와 자주 외투주머니에 돈(군자금)을 넣고나가 은행에 보내던 일들과 집에 자주 드나드는
어렸을 때 문학에 뜻을 두고있었던 홍동근선생은 1943년에 중학공부를 마치고 대학 문학과를 지망하였으나 학도병에 걸려들어 그것을 피한다는것이 그리스도교에 입교하게 되였고 나중에는 목사가 되였던것이다.
목사로서 해외에서 활동하던 홍동근선생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애국, 애족의 뜻이 간직되여있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 남조선에서 《유신》독재를 반대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하였으며 통일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그러던 그가 조국의 따사로운 품에 안기게 된것은 1980년대 초였다.
당시 서유럽자본주의사회에서 살고있던 적지 않은 해외동포들이 공화국에로의 방문을 말그대로 《대용단》으로 여긴것처럼 홍동근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자본주의사회에서 우리 공화국에 대한 악의에 찬 비방선전만을 해왔기때문에 해외동포들에게 있어서 공화국의 사람들이 한혈육으로 인식된것이 아니라 티끝만한 인정도 없고 겨레도 모르는 《빨갱이》, 《악한》으로 간주되여있었던것이다.
하기에 해외동포들은 우리 공화국에로의 방문의 길에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한번은 고향에 있는 선친들의 산소에 술이라도 부어야겠다는 생각만은 지울래야 지울수 없었다. 그러기에 처음 《대용단》을 내리고 공화국에로의 방문길에 나선 해외동포들가운데는 유서까지 써놓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홍동근선생도 이러한 사람들중의 하나였다.
그가 고향을 방문해야겠다는 말을 꺼내자 그의 안해 홍정자는 북에 가면 죽는데 제정신인가고 무작정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십년세월 부모님들께 자식의 효도를 못하였다는 죄책감을 항상 안고 살던 그로서는 안해의 말에 흔들릴수 없었다. 조국으로 떠나기 전날 안해는 온밤 눈물을 흘리며 생리별이나 당하는것처럼 통곡하면서 그를 만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기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태평양을 날아넘는 비행기안에서 전날밤을 밝힌 그였으나 눈한번 붙여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공화국북반부에서 자기를 어떻게 대해주겠는가 하는 근심과 기대, 망설임이 엇갈린 불안한 심정이 그를 그토록 긴장시켰던것이다. 비행기가 중국 베이징비행장에 내려 수속을 하는 동안 그는 드디여 내가 《공산국가》에 들어섰구나 하는 공포감으로 하여 도저히 마음의 안정을 이룰수 없었다. 비행기가 압록강을 날아넘을 때 그는 시창아래로 10대에 떠나 수십년세월 한시도 잊어본적이 없는 정든 고향 피현땅을 눈물속에 찾느라고 애를 썼다.
그의 이런 불안감과 망설임을 약간이나마 풀린것은 평양비행장에 내린 그때부터였다. 평양비행장에서는 해외교포총국(당시)에서 일한다고 자기 소개를 한 사람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띠우며 《목사님의 조국방문을 열렬히 환영한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고려호텔에 려장을 풀고 다음날부터 계획된 방문일정에 따라 평양시와 그 주변을 참관하면서도 홍동근의 심중에는 고향 피현에 가고싶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겠는가 하는 근심이 떠나지 않았다. 드디여 어느날 안내원에게 자기의 속생각을 조심히 내비치게 되였다. 그런데 안내원은 너무나도 선뜻 인차 고향을 찾아가자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평생소원이다싶이 하였던 고향방문이 실현되게 되였다. 며칠후 고향으로 가는 차안에서 홍동근은 이제 자기를 맞아줄 일가친척들은 대체 누구누구이며 그들이 자기를 어떤 낯으로 대할것인가 등 가지가지의 근심과 우려, 기대, 희망 등으로 마음의 안정을 이룰수가 없었다. 그런데 승용차는 피현쪽이 아니라 어느 탄광지역으로 들어가는것이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피현에 있던 그의 집이 구장으로 이사하였던것이다.
그는 구장에서 천만뜻밖에도 정정하게 살아계시는 늙은 어머니를 만나게 되였다. 이제는 세상을 떠났을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는데 수십년세월 문안인사 한번 변변히 올리지 못한 불효막심한 자식인 그가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떤 심정이였겠는가.
늙은 어머니는 몇십년동안 자기의 품을 떠났던 아들이였지만 반가움보다도 50이 넘은 그를 어린 아이처럼 무릎을 꿇게 하고는 장시간 욕부터 하였다고 한다. 글을 배우지 못한 어머니인지라 처음하는 꾸짓음이란 가서 살데가 없어서 우리와 제일 원쑤진 나라에 가서 사느냐 하는것이였다고 한다. 죄를 지은 자식인지라 홍동근선생은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예》, 《잘못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어머니가 욕을 하면 다시 머리를 숙이기를 몇십번이나 반복하였다.
그러나 그런 죄의식은 순간에 사라지고말았다.
멀리 미국땅에서 사는 아들이 어머니를 찾아왔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탄광마을에 퍼져 동네사람들이 닭알이며 감자 등 소박한 음식들을 가지고와서 어머니와 아들의 수십년만의 해후를 진심으로 축하하였으며 어떤 늙은이들은 홍동근의 손을 잡고 눈물을 떨구며 울기까지 하였다..
홍동근으로서는 상상밖의 일이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의 참뜻을 문자그대로 페부로 체험하는 그런 일들이 매일 매시각 벌어졌다.
다음날 아침부터 탄광마을의 청신한 공기를 마시면서 조카들의 손목을 잡고 산보길에 나선 홍동근은 자기가 옳은 결심을 하였다는것과 다시는 내 조국, 어머니품을 버리지 말고 고향의 어머니와 조국동포들앞에 떳떳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였다. 후날 그는 그때 자기가 받은 충격을 평생 잊을수 없노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파란만장의 이역살이를 하던 홍동근선생은 드디여 조국의 품에
홍동근선생은
당시 홍동근선생이 그리스도교목사로서 해외에서 벌린 애국활동에 대해 보고받으신
그리하여 그는1990년대 초부터 2001년 초까지
동포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면서 조국에 오게 된 그는 남다른 책임과 의무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때 그는 자기가 초빙교수가 되였다는것을 소개한 해외동포사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을 보여주면서 《
그는 우리 당의 크나큰 믿음과 신임에 보답하고저 정력을 다하여 우리 공화국의 현실을 해외에 널리 선전하였으며 공화국에 대한 글들을 많이 발표하여 동포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초빙강사로서 강의를 통하여
한번은 그가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
또 한번은 그가 강좌선생들에게 다음날에 할 강의안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조선의 모세 –
(※ 모세는 유태교의 조상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교신자들이 하느님의 예언자로 보고있는
그가 공화국에 와서 강의를 하고있을 때
회고록을 받아안은 홍동근목사는 흥분된 마음으로 밤을 밝히면서 단숨에 그 책을 다 읽었다. 며칠후 그가 자기가 본 회고록을 선생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너무나도 많은 페지들에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밑줄이 그어져있었다.
그가
(※ 그리스도교에서는 설교를 할 때 언제나 그 주제가 되는 성경의 구절을 읽고 시작하는것이 관례이다. 목사가 회고록을 읽어주고 강의를 시작한것에 대해서는 이러한 리해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에 그는 밤을 새워가면서
그후 어느 해인가 조국을 방문한 그는 뜻밖에도 자기가 쓴 글을
그는 그후에도 조국에 오는 기회에 회고록 3, 4권에 대한
1994년
그는 그때 공화국에 와서 받은 감상에 대해 그후 여러 기회에 자기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는 영결식장에서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고, 인민의 마음속에
애도기간 홍동근선생은
그때
그때의 격정을 자주 이야기하면서 그는
1994년 겨울 다시 조국을 방문한 그는
이렇게
언제인가는 안해가 자기에게 총련의 학생들이 원산부두에 내리는데 그들모두가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있더라고 하면서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이말을 하면서 해외에서 사는 동포들에게 그처럼 성스럽고 거룩한 땅이 바로 조국이라고 말하였다.
홍정자는 조국을 여러차례 방문하는 기회에
이와 같이 홍동근선생은 우리
재미동포전국련합회 고문이였던 홍동근선생은 생의 마지막시기에도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위업에 이바지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왔다.
이미 도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와
선생은 오랜 기간의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2001년 11월 조국에서 글을 집필하던 중 책상을 마주한채 세상을 떠났던것이다.
주체90(2001)년 11월 11일 재미동포 홍동근선생이 조국에 체류하던중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에 접하신
11월 17일 홍동근선생의 가족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선생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는 영결식은 11월 19일에 진행되였다.
이렇게 되여 고인과의 영결식은 근 10일간이나 늦어져 수륙만리 이국땅에 있던 유가족들이 고인의 령전에 도착한 다음에야 거행되였던것이다.
참으로 홍동근선생은
홍동근선생의 애국의 삶은 해내외 애국적인 종교인들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당의 품이야말로 애국, 애족, 애민을 지향하는 민족성원모두를 안아주는 대하와 같은 품이라는것을 말해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