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6월 2일
오늘 량귀동녀와 이렇게 만나니 매우 반갑습니다. 량귀동녀와 1936년에 청구자밀영에서 헤여졌으니 우리는 58년만에 만난셈입니다.
나는 량귀동녀를 잊지 않고있었지만 소식이 없다보니 어디에서 살고있는지 알수 없었고 또 늘 사업이 바쁘다보니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량귀동녀가 조국이 해방된 다음 나에게 편지라도 하였더라면 우리는 인차 만날수 있었을것입니다. 량귀동녀를 너무 늦게 찾은것이 가슴아픕니다. 량귀동녀가 지금까지 나를 만나지 못한것이 자기의 잘못이라고 하는데 량귀동녀를 제때에 찾지 못한데는 우리 일군들의 잘못도 큽니다. 한때 우리 당안에 기여들었던 반당종파분자들은 나와 연고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나를 만나지 못하게 방해하였습니다. 당력사연구소가 조직된지 오래 되였지만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전원회의가 있은 다음에야 혁명력사자료발굴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와 연고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제때에 찾아낼수 없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량귀동녀를 만나고보니 량성룡의 생각이 납니다. 량귀동녀의 아버지 량성룡은
나는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선포한 다음 1933년 봄에 투쟁무대를 안도로부터 왕청으로 옮겼습니다. 그때 왕청에 가보니 량성룡이 유격대를 조직하였는데 그 력량이 70∼80명정도 되였습니다. 량성룡은 유능한 유격대지휘관이였습니다. 그는 1935년에 왕청현에서 있은 한 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애지중지 키워온 유자녀들이 이제는 모두 50살, 60살, 70살이 되였으며 그들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하고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혁명의 대는 든든합니다. 세계에는 우리 나라처럼 혁명의 대를 튼튼히 이어가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혁명적당들과 진보적인민들이 우리 인민이 대를 이어 사회주의를 굳건히 지키고있는데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습니다. 이전 쏘련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진 다음 다시 공산주의적정당들이 많이 조직되였는데 이 당들도 한결같이 우리 당의 로선과 정책이 정당하다고 하면서 우리 혁명위업에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오고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청구자밀영에서 북만원정에 데리고갔던 최춘국부대를 비롯하여 동만의 부대들을 북만의 부대들에 떨구어놓고 20명도 못되는 경위대원들을 데리고
나는 《민생단》혐의자들을 대담하게 믿고 그들로 새로운 부대를 조직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민생단》혐의자들을 다 모이게 한 다음 그들이 보는데서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태워버렸습니다. 나는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태우면서 그들에게 《민생단》은 일제놈들이 만든것인데 지금부터 이 자리에는 《민생단》에 든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 동무들이 실지로 《민생단》에 들었다면 무엇때문에 지금까지 일제놈들에게 투항하지 않고 산에서 고생하면서 우리를 따라다녔겠는가, 동무들이 오늘부터 《민생단》이 아니라는것을 선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을 믿어주는것이 너무 고마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나는 《민생단》혐의자들로 새로운 부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나는 마안산아동단원들에게 옷도 해입혔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어머님께서 주신 돈 20원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돈 20원으로 무송시내에 내려가 천을 사오게 하였는데 그 천을 가지고서는 아동단원들에게 옷을 다 해입힐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송에 있는 장울화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장울화는 나의 편지를 받고 많은 량의 천을 사서 보내주었습니다. 나는 그 천으로 아동단원들뿐아니라 《민생단》혐의를 받았던 대원들에게도 옷을 다 해입혔습니다.
장울화는 중국사람인데 우리의 투쟁을 목숨으로 도와준 나의 혁명동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무송에서 이름난 큰 부자였습니다. 나는 장울화가 유격대에 들어와 싸우겠다고 하는것을 만류하고 아버지가 큰 부자라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무송에서 지하공작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송에 《형제사진관》을 차려놓고 사진업을 하면서 혁명사업을 하였습니다. 나는 장울화를 1932년에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다음 남만원정을 할 때 만났고 1936년에 무송현 묘령에서 만났습니다. 그후 대영온천마을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대영온천마을에서 나를 만나고 간 장울화는 그해 가을 갑자기 헌병대에 끌려갔습니다. 적들에게 그를 밀고한것은 한때 백산청년동맹 무송현지회 회장으로 활동한 일이 있는 정학해였는데 그는 나의 소학교시절의 동창생이였습니다. 정학해는 초기에 혁명바람을 피우면서 얼마간 돌아다니다가 일제놈들에게 체포된후 변절하여 《귀순공작대》에서 주구노릇을 하고있었습니다. 어느날 정학해는 장울화를 찾아와 자기가 지금
적들은 장울화를 통하여 우리 사령부의 위치와 무송지구지하조직망을 알아내려고 그에게 온갖 악행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들에게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울화는 적들의 고문이 심해지면 정신을 잃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헛소리로 나의 위치와 조직선을 루설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며칠간만이라도 집에 나와있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장울화의 아버지는 헌병대놈들에게 돈과 뢰물을 먹이고 아들을 병보석으로 집에 내왔습니다. 장울화는 집에 나와있으면서 나에게 적들이 특무를 파견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찾고있으니 사령부의 위치를 빨리 옮기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 다음 사진현상약을 먹고 자결하였습니다. 장울화는 나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는 해방후 장울화가족들의 소식을 모르고있다가 1985년에야 그의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장울화의 아들 장금천이 보낸 편지를 받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우리 나라를 방문한 기회에 그에게 장금천을 만나려고 하니 우리 나라에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장금천이 우리 나라에 오게 되였습니다. 장울화의 아들 장금천이 아주 똑똑합니다. 장울화의 유가족들이 우리 나라를 여러번 방문하였습니다. 장울화의 안해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때문에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최근년간에 장울화의 유가족들이 자주 우리 나라에 오는데 그의 손자와 외손녀는 평양에 있는 국제관계대학에서 공부하고있습니다.
량귀동녀가 전문진동무를 쏘련에 같이 들어갈 때 알게 되였다고 하는데 전문진동무의 70돐생일상과 80돐생일상을
량귀동녀에게 아들 3명, 딸 3명과 손자, 손녀 11명이 있으면 자손들이 많습니다. 량귀동녀의 아들딸들은 이국땅에서 살지만 조국을 잊지 말고 외할아버지처럼 훌륭한
량귀동녀는 이번에 조국에 온 기회에 병치료를 받고 가야 하겠습니다. 먼저 이를 해넣는것이 좋겠습니다. 이를 해넣자면 한달가량 시일이 걸려야 합니다. 우리 의사들이 량귀동녀를 진찰해보고 영양부족으로 몸이 쇠약해졌는데 영양을 보충하고 몸관리를 잘하면 인차 건강이 회복될것이라고 합니다.
량귀동녀의 남편이 백내장에 걸렸다고 하는데 빨리 고쳐주어야 하겠습니다. 백내장을 제때에 치료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눈이 못쓰게 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백내장을 수술하고 인공수정체를 해넣는것이 좋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인공수정체를 만드는데 백내장을 수술한 다음 그것을 넣으면 일생동안 일없습니다. 얼마전에 우리 의사들이 100살난 로인의 두눈을 수술하고 인공수정체를 해넣었는데 앞을 잘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로인이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량귀동녀의 남편을 조국에 데려다 치료해주어야 하겠습니다. 량귀동녀의 남편이 지금 살고있는 까자흐스딴에서 눈치료를 받을수도 있겠지만 거기에서는 사회주의가 무너져 국가병원이 개인병원으로 되였으므로 백내장을 수술하고 인공수정체를 해넣는것과 같은 치료는 돈이 많이 들기때문에 받기 곤난할것입니다. 량귀동녀가 건강을 회복한 다음 돌아가 남편을 조국에 데리고오게 할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시일도 오래 걸리고 려비도 많이 들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까자흐스딴에 있는 우리 나라 대사관일군들에게 과업을 주어 량귀동녀의 남편을 조국에 빨리 데려내오도록 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량귀동녀의 남편을 조국에 데려내오는 문제를 당에 보고하고 대책을 세우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량귀동녀의 남편에게 다른 병은 없다고 하므로 눈만 치료하면 앞으로 한 10년이나 20년은 건강하게 살수 있을것입니다. 이번에 량귀동녀를 찾았는데 남편까지 잘 치료하여주면 우리가 량귀동녀부부에게 행복을 안겨줄수 있습니다. 량귀동녀와 그의 남편을 잘 치료하여 《신혼부부》처럼 만들어 까자흐스딴에 들여보내야 합니다. 량귀동녀가 자기 가정에 돌려주는 배려에 대하여 고맙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조국과 자기
량귀동녀는 이제부터 마음을 푹 놓고 병치료를 한 다음 조국의 여러곳을 참관하는것이 좋겠습니다. 앞으로 량귀동녀의 남편이 조국에 와서 눈치료를 받은 다음 내가 량귀동녀를 다시 만나줄수도 있습니다.
량귀동녀는 조국에 머무르는 기간 당력사연구소 부소장동무와 같이 다니면서 조국의 현실을 보고 많이 배우는것이 좋겠습니다. 제기할 문제가 있으면 당력사연구소 부소장동무에게 제기하여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인차 알수 있습니다.
량귀동녀는 이번에 조국에 대하여 알게 된것만큼 앞으로 해마다 조국에 오는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조국을 더 잘 알게 되고 조국에 대한 정도 더 두터워질수 있습니다. 지금 재로씨야동포들가운데서 조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재로씨야동포인 정일심이 해마다 조국을 방문하고있는데 올해에도 자식들을 데리고 조국에 와서 휴식하고 얼마전에 돌아갔습니다. 정일심은 안동수의 부인입니다. 량귀동녀가 조국에 오려면 려비가 걸릴수 있는데 려비는 우리가 대주겠으니 해마다 아들, 딸, 손자, 손녀를 데리고 조국에 와서 휴식하는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온천이 많기때문에 조국에 오면 온탕도 하면서 병치료도 할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라가 많지만 우리 나라처럼 살기 좋은 나라는 얼마 없습니다. 우리 나라 사회주의는 인민이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여있고 모든것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누구나 다 먹고 입고 쓰고사는데 대하여 걱정하지 않고있으며 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을 국가로부터 보장받고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무료의무교육제와 무상치료제의 혜택으로 모든 사람들이 돈 한푼 내지 않고 배우며 병치료를 받고있습니다. 아마 세상에 돈을 전혀 받지 않고 공부시켜주고 병을 치료해주는 나라는 우리 나라밖에 없을것입니다. 만일 나라가 분렬되여있지 않고 미제국주의자들과 직접 맞서있지 않다면 우리 인민은 지금보다 더 유족하게 잘살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이 남조선을 강점하고있는 조건에서 조국을 통일할 때까지 여러가지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면서 긴장하게 살며 투쟁하여야 합니다.
이번에 량귀동녀를 찾은것만큼 이제부터는 내가 아버지의 심정으로 량귀동녀의 건강과 생활을 직접 책임지고 돌봐주겠습니다. 까자흐스딴의 수도에 우리 대사관이 있기때문에 필요한 때에는 거기에 가서 조국에 전보도 칠수 있을것입니다. 량귀동녀는 나를 아버지로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