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강을 건느지 마소.》
폭양에 찌물쿠던 기장밭에 아리수의 서늘한 바람이 페장까지 시원하게 불어와 정신없이 호미질하던 려옥의 땀에 젖은 잔등을 식혀주었다.
그제야 호미를 놓고 하늘을 쳐다보니 꼭뒤에서 지글거리던 해가 어느새 저편 산등성이우에 노루꼬리만큼 사이두고 기울어져 있었다. 사그러져가는 여름해의 락조를 받아 아리수물결이 오색금을 수놓으며 뒤재였다.
《에구머니, 랑군이 돌아올 때가 되였겠네.》
어려운 살림에도 배사공노릇하는 남편과 의좋게 살아가는 려옥이여서 그는 얼른 뒤거두매를 하고 강변의 초가로 달음질쳐갔다.
초가집의 삽짝문으로 들어서던 순간 려옥은 뜻밖의 광경에 주춤거렸다. 여느때같으면 하루종일 배를 부리고 피로한 속에서도 웃는 얼굴로 울안에 들어서며 어린 아들애를 버쩍 쳐들어 애무해주군 하던 랑군이 오늘은 웬일인지 토방에 앉아 기둥에 기댄채로 쓸쓸히 무슨 곡조인가를 부르고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것 같은 애절한 곡조였는데 마지막대목에서는 애간장을 태우는것만 같았다.
인기척에 움쭉 몸을 돌린 남편이 엉거주춤 일어서며 《이제 들어오우?》한다.
《랑군은 어찌하여 안색이 어두우며 이자 부르던 그 노래는 무슨 노래나이까?》
《허, 오늘 본 웬 부부의 불행이 남의 일 같지 않아 그러우.》
《오늘 새벽 건너편 대부나리의 짐을 건늬여주라는 령을 받고 새벽달을 이고 나선것은 당신이 아는게고…》
이렇게 말꼭지를 떼는 곽리자고의 얼굴에는 추연한 빛이 어리였다.
아리수의 배군노릇 십여년에 굳어진 습관대로 꼭두새벽에 귀족나리의 짐들을 건늬여준 다음 삭줄을 다시 매고 노대를 제자리에 맞추어놓던 그는 절버덕 절버덕하는 강자갈 밟히는 소리에 소리나는곳을 살펴보았다.
새벽안개를 밀어제끼며 웬 사람이 병을 들고 이쪽으로 허겁지겁 뛰여오는게 아닌가. 아래턱을 부르르 떨며 격분으로 이그러진 얼굴에 백발이 가득 흩날리며 강물에 들어서는 모습이 도무지 제정신가진 사람같지 않았다. 한여름이긴 해도 새벽무렵이면 몸을 움츠릴만큼 차거운 아리수이다.
《저, 저런…》 저도모르게 혀를 차며 부르려는데 그 뒤로 웬 녀인 하나가 뒤쫓아오며 앞서 물에 들어선 사람을 찾고 찾는것이였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그래도 백발의 《미친》사람인듯 한 남자는 여전히 강복판으로 나가는것이였다.
정갱이를 치던 물이 어느새 허리를 치고 가슴을 쳐도 막무가내였다. 허우적거리며 몇번 물우로 솟구치는것 같더니 동그란 물결만 남기고 쑥 빠져들어갔다.
녀인은 그예 통곡하며 땅을 쳤다. 그러더니 공후를 부둥켜안고 타면서 통곡절반, 노래절반 하는데 흐느끼는듯 마는듯 그 노래소리 또한 애절하기 그지없어 곽리자고의 마음도 자연히 비통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녀인은 곡을 마치자 자기도 몸을 던져 빠져죽고말았다.
《아마도 가슴터질 사연이 있었던게지요?》
《글쎄, 요새 조세를 수탈해가는 관가의 행패가 무쌍하고 땅 떼워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니 그런 사람들이겠지.》
《그 노래가 아까 부르신 그 노래겠지요?》
곽리자고는 려옥의 동실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들을수록 자기네와 같은 못사는 사람들의 불행이 가슴을 파고들어 려옥은 저도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려옥도 곡조를 아는 노래로서 당시 고조선에서 널리 불리워진 노래이지마는 로파가 강물에 빠져 죽은 남편을 두고 지어부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의 내용으로 하여 더욱 가슴치는듯 하였다.
려옥은 솟구치는 격정을 이길수 없어 벽에 기대여 놓았던 공후를 끌어당겨 줄을 고누기 시작하였다.
《둥둥 둥-둥기 당당-》
공후의 13줄이 살아 움직이는듯 바르르 떨며 《공무도하가》의 선률을 이루어나갔다.
님아 강을 건느지 마소
그예 님은 건느시네
강물에 빠져 죽었으니
어저 님을 어이하리
다정다감하고 소리에도 밝은 려옥이였던지라 남편으로부터 들은 노래가락이 손색없이 그의 손길에서 흘러나왔다.
남편을 부르는 애타는 웨침, 남편을 잃은 녀인의 통곡이 고저를 이루고 장단을 맞추는데 거기에 려옥의 청아한 목소리까지 합쳐지고보니 듣는 사람의 간장이 어찌 녹아내리지 않으랴.
《성님, 그 노래 나도 좀 배워주오.》
어느사이엔지 문턱에 와앉았던 이웃의 려용이란 아낙네가 간청하였다.
려옥이 《공무도하가》를 재현하여 지은 《공후인》은 고조선사회의 가난하고 무권리한 하층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으며 이웃나라에까지 보급되게 되였다.
하기에 중국의 서진(265년-316년), 혜제때(291년-306년)의 사람인 최표는 《고금주》라는 책에서 이 노래의 창작동기와 가사에 대해 전하면서 고조선에서 우수한 민간음악들이 배출된 사실을 전하였던것이다.
그후 우리 나라 중세문인들인 한치윤, 차천로, 박지원도 이 노래를 전하면서 고조선문화가 높이 발전한데 대하여 감탄해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