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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존재한 우리 나라 봉건국가.

발해는 고구려유민들이 옛 고구려땅에 세웠던 강력한 봉건국가였다.

성립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은 당나라 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벌렸으며 고구려장수였던 걸걸중상은 동모산(오늘의 돈화 오동성)을 중심으로 당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을 묶어세우고 684년에 진국을 세웠다. 진국은 발해국과 직접 이어지는 나라로서 점차 큰 세력으로 장성하였다.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은 698년 천문령전투에서 당나라군대를 격파하고 동모산에서 발해의 창건을 선포하였다. 수도는 중경, 상경, 동경 등 여러곳에 옮겨졌으며 마지막에는 상경에 다시 자리잡았다. 발해의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사람들이였고 말갈족도 일부 포함되여있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그 문화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켰으며 주변 여러 나라들의 거듭되는 침입을 막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발해국은 건국후 근 230년동안 존재하면서 나라의 륭성을 이룩함으로써 주변나라들로부터 《해동성국》(동방의 륭성하는 나라라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령역

발해는 광활한 령토를 가지고있었는데 남쪽은 서부의 대동강류역에서부터 동부의 덕원에 이르는 계선을 경계로 하여 신라와 접하였고 동북쪽은 오호쯔크해, 동쪽은 조선동해, 서쪽은 료하계선에 이르는 지역을, 북쪽은 흑룡강이북계선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였다.

계급신분관계

발해봉건국가에서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사이의 계급적대립과 투쟁이 사회관계의 기본을 이루고있었다.

발해에서 지배계급은 봉건지배계급으로서 그 대부분은 신분적으로 여러 계층을 이루고있는 귀족들이였다. 그들은 많은 토지와 노비를 가지고있었고 일정한 절차를 밟아 관리로 등용될수 있었다. 피지배계급의 대부분은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고있는 농민들이였고 이밖에 적은 수의 전업수공업자, 상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평민이였으나 봉건국가와 개별적봉건관료, 지주들로부터 가혹한 억압착취와 심한 천대를 받았다. 발해에는 가장 천대받는 신분으로서 적지 않은 수의 노비주민들도 있었다. 그들은 봉건국가기관이나 귀족, 지주들에게 예속되여 농사를 짓거나 그밖의 고되고 힘든 로동을 강요당하였다. 귀족들은 하나 또는 몇개 부락의 전체 주민들을 거의 노비에 가까운 신분으로 만들어 저들에게 예속시키고 억압착취하였는데 이런 부락들을 부곡이라고 하였다. 발해에는 말갈족도 얼마간 살았는데 그 상층부는 나라의 지배계급대렬안에 흡수되였다. 그러나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사는 말갈족들은 그 경제, 문화수준이 뒤떨어졌던 탓으로 하여 발해사람들의 지배를 받고있었다. 말갈사람들은 발해사람들을 《두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러한 관계는 종족적모순을 불가피한것으로 만들었고 그 모순은 발해말기로 오면서 점점 더 첨예화되여갔다. 발해의 지배계급내부에서도 그 문벌과 종족출신에 의하여 일정한 구분들이 있었다. 대씨, 고씨, 리씨, 장씨, 양씨, 오씨 등은 그중 높은 문벌이였고 그들중에는 봉건국가의 요직들을 차지하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있는 자들이 많았다. 신분에 따라 문무관리의 벼슬등급을 따로 정하고 그에 의하여 관직에 오르는 한도를 제정한 점은 고려나 조선봉건왕조시기와 대체로 비슷하였다. 이밖에도 발해에는 훈작제도 즉 세운 공로에 따라 상주국, 주국 등의 훈급을 주는 제도가 있었고 또 공, 후, 백, 자, 남의 작위제도가 있었다. 이 모든 복잡한 계급신분관계는 통치배들이 봉건적계층제도를 강화하여 정권을 독차지하며 인민들에 대한 계급적지배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설정되고 유지된것이였다.

통치제도

발해의 통치제도는 선행국가인 고구려의것을 많이 계승하였다.

발해국가의 중앙정부기구는 3성6부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각 관청들이 배합되여 구성되였다. 3성이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개 성을 말하는것이며 6부란 정당성관하의 충부, 인부, 의부, 지부, 례부, 신부 등 6개의 행정부를 의미하는것이였다. 그밖에 중앙관청들로는 중정대, 전중시, 종속시, 문적원,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사선시, 주자감, 항백국, 화간원 등이 있었다. 이러한 중앙통치기구외에 정연한 지방행정기구가 있었는데 발해에는 후왕에게 통치권을 위임한 지역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지역은 직할지로 되여있었으며 거기에 따르는 지방통치기구가 존재하였다. 발해봉건국가는 일부 말갈족부락에 대하여서는 자치를 허용하고 그 장관과 일부 관리만을 임명하여 통치하는 《번》(속령)제도도 실시하였다. 발해에는 지방행정구역단위로서 5경15부, 62주가 정비되여있었고 각 주의 밑에는 여러개의 현들이 있었다. 지방행정기구로서 수도 상경룡천부를 비롯한 5경과 나머지 10부에는 다 도독을 두었고 그 관하 62개 주에는 자사를, 현들에는 현승을 두어 통치하였다. 발해봉건국가의 관료제도에는 각종 직무에 따르는 문무관직들과 함께 관료들의 상하귀천을 구별하는 각종 봉건적계층제도가 안받침되여있었다. 벼슬등급은 1품에서 9품에 이르는 9등급으로 나누고 같은 등급안에서도 또 정, 종으로 구별하였으며 일부 등급에서는 정, 종안에 다시 상, 하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각 계층들에는 해당한 이름을 붙였는데 대부, 랑, 장군, 교위 등이 그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에 의하면 발해에서 3품이상의 공복(평상시 관료들의 례복) 복색은 보라색이고 홀은 상아홀이며 패물은 금어대였다. 4품, 5품의 공복은 비색(짙은 붉은빛)이고 홀은 상아홀이며 패물은 은어대였다. 6품, 7품의 공복은 연한 비색이고 8품, 9품의 공복은 록색(푸른색)인데 이것들의 홀은 다 나무홀이였다. 발해의 통치제도는 중앙집권적원칙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한 봉건통치배들의 권력을 철저히 감싸주며 봉건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반인민적인 제도였다.

 경제

 넓은 령토안에서 산줄기와 강하천, 해안과 산지, 평야 등 다양한 지리적조건과 각이한 기후풍토를 가진 발해에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농업과 수공업을 비롯하여 광업, 수산업, 대내외상업 등 경제를 여러모로 발전시켰다.

 농업

 발해에서 농업은 경제생활의 기본을 이루고있었다. 농업생산은 주로 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기름진 남쪽지방과 중부평야지방에서 발전하였다. 곡식은 조, 보리, 콩, 수수, 밀, 기장 등 밭곡식이 위주였고 남부지방에서는 벼도 재배되였다. 벼의 명산지는 중경현덕부아래 로성지방이였고 콩의 명산지는 동경룡원부일대였다. 남새류가운데서 특히 많이 재배된것은 아욱이였다. 누에치기도 널리 보급되여있었다. 과일로서는 환도의 추리, 락유의 배 등이 이름났다. 집짐승으로서는 말, 소, 양, 돼지 등을 많이 길렀다. 드넓은 초원지대를 가지고있던 발해에서는 부여, 고구려때이래의 발전된 축산업의 토대에 기초하여 집짐승기르기가 매우 발전하였으므로 이웃나라들에 좋은 말도 많이 수출하였다. 말은 솔빈수(수분하류역)의것이 제일 이름났고 돼지는 막힐부(송화강류역)가 명산지였다. 넓은 산림을 끼고있던 발해에서는 사냥도 매우 발전하였다. 사냥의 주요대상은 토끼, 사슴, 사향노루, 범, 곰 등이였는데 그중 백두산(태백산)의 토끼와 부여부의 사슴이 유명하였다.

 수공업

 발해에서는 직조업과 도자기생산, 옥돌, 나무, 뼈, 금속 가공 등 수공업이 발전하였다. 천으로서는 룡주의 명주, 현주의 삼베 등이 유명하였다. 비단제품가운데서 어아주, 조하주와 같이 무늬를 넣은 질좋은것들은 다른 나라에 적지 않게 수출되였다. 삼베도 《60종포》, 《세포》 등으로 알려진 매우 가는 실로 짠것이였는데 이것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매우 귀중히 여긴것들이였다. 흰 가는 모시도 생산되였다. 발해는 고급도자기류의 생산에서도 유명하였는데 도자기로서는 은색, 황색, 연록색, 자지색 등의 유약(사기물)을 바른 자배기, 단지, 버치, 목 긴 단지, 벼루 등이 많이 생산되였고 자기로서는 흰색, 우유빛색, 청회색, 검은 색의 보시기, 단지, 대접 등이 다량 생산되였다. 기와 및 벽돌수공업도 높은 수준에 이르고있었다. 기와가운데는 록색, 흑갈색, 황색유약을 바른 수기와, 암기와, 막새기와 등과 이밖에 치미, 괴면, 장식화판 등 장식기와들이 생산되였다. 벽돌가운데는 네모형, 긴 네모형벽돌, 멈추개벽돌 등 여러가지 형태의것과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것들이 이름있었다. 발해사람들은 금, 은, 동, 철 등 금속광물들을 채취하여 제련, 제철함으로써 갖가지 금속제품들을 만들어냈다. 발해에서는 또한 나무, 옥돌, 가죽이김수공업도 발전하였는데 마뇌잔 등은 다른 나라들에까지 수출되였다.

 상업과 대외무역

 발해에서는 농업과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상업도 현저히 발전하였다. 나라의 령역이 매우 넓고 지방마다 물산이 각이한것은 국내상업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되였다. 주요도시, 행정중심지들에는 시장이 설치되고 교역이 활발히 벌어졌으며 알곡, 천 등 현물화페와 함께 금속화페도 일부 류통되였다. 발해상인들가운데는 대외무역에도 종사하는 대상인들도 적지 않았다. 발해에서의 대외무역은 후기신라와 당나라, 일본 등을 대상으로 하여 진행되였다. 후기신라와는 국가적무역이외에 국경지대에서 사무역을 통하여 적지 않게 진행되였다. 발해에서는 당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히 진행되였는데 713년에 두 나라사이에서는 국가적무역외에 사절단일행을 따라 가는 상인들의 상적거래도 허용할데 대한 협약이 이루어졌다. 8세기 중엽 당나라의 동북부에 리정기 등의 번진세력이 강화되였을 때에는 그것들을 중개로 하여 당나라와의 무역거래를 진행하였다. 일본과의 무역은 727년에 국교가 맺어진 다음부터 시작되였다. 발해 말기까지 여러차례의 사절단교환이 있었는데 그 주되는 목적은 물자의 교역에 있었다. 871년에 발해상품에 대한 대금으로 일본왕실이 지불한것만 하여도 40만량에 달하였으니 무역의 규모를 짐작할만 하다. 이러한 대외무역에서는 왕실과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에 필요한 사치품과 의약품 등이 주되는 품목을 이루고있었다.

 군사제도

 발해봉건국가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한편 인민들의 반봉건투쟁을 진압하는데 필요한 무장력을 가지기 위하여 여러가지 제도들을 내왔다. 국왕호위군으로서 금군이 있었다. 발해국가의 륭성기에 그 중앙군은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위, 북좌위, 남우위, 북우위 등의 이름을 가진 10개 위의 군단들로 꾸려졌다. 매 위에는 무관으로 대장군 1명, 장군 1명이 배치되여있었다. 그리고 매개 위밑에는 령(련대급) 같은 군사단위들이 있었고 거기에는 해당한 여러 계층의 무관들이 배치되여있었다. 중앙군의 임무는 평시에는 국왕과 왕궁, 중앙관청들의 보위, 의장병으로서의 근무수행, 봉화대의 관리, 국가적건설공사의 보장 등이였다. 전시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 싸우는것이였고 또 인민들의 폭동과 내란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진압하는 임무도 지니고있었다. 지방군으로서 경, 부, 주, 현의 행정관들인 도독, 자사, 현승 등의 지휘를 받는 해당 지역 군대가 있었다. 그밖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대들에는 독립적인 군사집단들이 배치되여있었다.

 대외관계

 당나라와의 관계

 당나라와의 관계는 705년 당나라 시어사 장행급의 발해방문을 기점으로 맺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당나라임금이였던 중종은 지난날 고구려유민들에게 취하였던 저들의 그릇된 태도를 사과하고 발해의 건국을 축하하는 한편 외교관계설정을 희망하여왔다. 발해는 당나라의 이 제기를 접수하고 왕자 대문예를 보내여 답례를 표시하였다. 713년 돌궐과 해, 거란 등 북방종족들의 공격으로 궁지에 빠진 당나라는 사신 최흔을 보내와서 그전날 《발해말갈》이라고 그릇되게 부르던 발해의 국호를 시정하고 《발해》라고 바로 부르겠다는것과 적대시정책을 그만두겠다는것을 약속하였다. 이것은 발해의 위력이 강화된 조건에서 할수없이 취한 조치였다. 당나라는 그후 동북방종족들에 대한 지배가 어느정도 가능해지자 발해에 대한 침공기도를 다시금 드러내놓았다. 726년에 당나라통치배들은 자기 나라에 온 흑수말갈족의 추장들을 꾀여 흑수말갈지역에 《흑수주》라는 저들의 《기미주》를 설치하고 흑수말갈군대를 자기 나라 관할하에 속한 무력의 한부분으로 개편하였다. 이것은 발해를 앞뒤에서 공격하려는 당나라와 흑수말갈의 음모였다. 이에 대처하여 그후 발해는 흑수말갈에 대한 징벌과 당나라 등주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다. 발해가 취한 단호한 조치로 하여 당나라의 침공기도는 분쇄되고 두 나라사이에는 다시 평화적인 관계가 회복되게 되였다. 그리하여 서로 사신들을 교환하게 되였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무역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무역을 통하여 발해의 비단들과 베, 다시마, 솜, 배, 추리 등 특산물들이 당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당나라의 등주에는 《발해관》이라는 초대소가 있었고 포구들에는 발해의 무역선들이 정박해있군 하였다. 그리고 두 나라사이에는 문화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였다.

 일본과의 관계

 발해와 일본사이의 관계는 727년 녕원장군 고인의를 비롯한 24명의 발해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시작되였다. 이때 발해의 무왕 대무예는 일본국왕에게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알리고 두 나라사이의 정상적인 래왕을 바란다는 국서를 보냈다. 이후부터 두 나라는 활발한 대외관계를 가졌는데 국서들에서 여러차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의 발해의 지위가 확인되였다. 발해국왕은 758년에 보낸 국서에서 자기를 직접 《고려(고구려)국왕》이라고 하였으며 771년에 보낸 국서에서는 고구려왕실이 하던것과 같이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썼고 일본국왕도 답서에서 발해국왕을 《고려국왕》이라고 불렀다. 빈번한 사신래왕을 통하여 발해는 경제교류도 활발히 진행하였으며 발전된 문화를 일본에 널리 소개하였다. 859년 정당성 좌윤 오효신은 《장경선명력》이라는 천문력서를 일본에 전해주었으며 763년경 일본사신 다까노 우찌유미는 발해에 와서 학문과 음악을 배워갔다.

 종말

 발해에 대한 침공준비를 여러해동안에 걸쳐 진행하여온 거란은 924년 6월-12월사이에 토혼, 당항 등 주변종족들에 대한 정복전쟁이 끝나자 925년 윤12월에 침공의 예봉을 발해에로 돌리였다. 거란군은 대병력으로 먼저 발해의 서쪽국경 중요요새였던 부여성을 포위공격하였다. 부여성의 발해군민들이 용감히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수적으로 현저히 우세하였던 적들은 3일만에 부여성을 강점하고 926년 1월에는 계속 동쪽으로 침입하여 발해수도인 상경룡천부 서쪽에서 발해의 수도방위군을 격파하고 궁성이 있던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적의 대군앞에 질겁한 발해국왕 대인선을 비롯한 통치배들은 일신의 안일만을 위하여 적들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용감한 발해군사들과 인민들은 투쟁에 일떠서 성안의 무기고에서 병쟁기들을 거두어가려는 적들을 처단하였다. 폭동에 궐기한 발해군사들과 인민들은 국왕에게 항복을 취소하고 다시 선전포고를 하게 하였다. 이에 질겁한 적들은 대군을 내몰아 더욱 잔인하게 쳐들어왔다. 이번에도 발해 군사들과 인민들은 침략군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국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이 투항함으로써 발해왕조는 229년만인 926년 자기 존재를 끝마치게 되였다.

 문화

 발해인민들은 발전된 고구려의 문화를 이어받아 그것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발해의 문화유적들과 유물들은 많이 없어져 오늘 전해지는것이 극히 적으나 그것으로써도 당시 발전된 발해문화의 이모저모를 엿볼수 있다. 특히 발해문화는 이웃나라들에 알려져 그 나라들에서 높이 평가되였다.

 1) 사상과 종교

 발해의 지배사상은 《천손사상》과 《무인도》였다. 《천손사상》은 시조 동명왕이 천제의 아들이였다는 고구려건국전설을 이어 고구려의 계승자인 자기들도 하늘의 후손 즉 《천손》이라는 발해통치배들의 사상이였다. 이 사상은 왕실에 대한 신성화와 절대적순종을 강요할 목적으로부터 조작된 사상이였으나 여기에는 자기 나라가 강대하였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자부심과 긍지가 반영되여있었다. 《무인도》는 고구려사람들의 상무적기풍을 이어받아 형성된 사상이였다. 《발해사람 셋이 모이면 맨손으로 호랑이도 때려잡는다》는 이야기는 《무인도》가 고취되여 강한 상무적기풍이 지배하게 된 발해사람들의 기상을 전하는것이다. 발해에는 이밖에 봉건사회에서 흔히 볼수 있는 각종 신에 대한 신앙도 남아있었다. 그것은 제사풍습과 관련된 유적유물들을 통하여 알수 있다. 발해에는 또한 유교, 불교 등 외래종교들도 전파되여 봉건통치를 미화하고 인민들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는 해독적작용을 하였다.

 2) 과학기술

 발해의 봉건통치배들은 과학기술발전에 일정한 리해관계를 가지고있었으므로 문적원, 주자감 등을 두어 도서를 관리하고 귀족자제들에 대한 교육을 맡아보도록 하였다. 높은 수준에 이른 력학(력서편찬과 관련한 학문)은 발해의 과학발전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발해학자 오효신은 859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선명력이라는 천문력서의 사용방법을 그 나라에 전해준 일이 있었다. 이것은 그후 일본에서 800여년간 사용한 당시로서는 매우 발전된 력서였다. 상경유적의 돌등제작과 궁전건축에서 응용된 수학지식을 통해서도 발해의 높은 과학기술수준을 알수 있다. 돌등의 8각형 또는 원형으로 된 바닥돌, 기둥, 불집, 지붕 등은 바닥단의 한변의 길이를 단위로 하여 다양한 비률로 설계하고 제작한것이다. 발해에서는 약학도 상당한정도로 발전하였는데 여러가지 귀중한 약재들이 생산되여 다른 나라들에 수출되였다. 발해의 제철기술, 금, 은, 동의 제련기술, 가죽, 옥돌가공기술, 유리 및 도자기제조기술, 방직기술 등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기술에 토대하여 만들어진 제품들은 적지 않게 다른 나라에 알려졌다. 발해에서는 선박제조기술도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고 어구제작기술과 어로기술도 발전하였다.

 3) 말과 글

 발해사람들은 고조선이래의 조선말을 썼다. 그것은 그들의 성과 이름에서 찾아볼수 있다. 서사어로는 일반적으로 한자와 한문을 리용하였고 한자 아닌 특수한 글자를 만들어 한자사용의 보충적수단으로 썼다.

 4) 문학

 발해의 문학은 그 주제사상적내용에서 애국적기백이 강하고 예술성에서 서정성과 서사성이 강한것이 특징적이다. 발해의 문학작품은 당나라, 일본 등지에까지 알려져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것들은 지금 거의나 전해지지 않고 몇몇 시인들의 작품만이 다른 나라 책들에 남아있을뿐이다. 8세기 중엽에 창작된 양태사의 시 《밤의 다듬이소리를 듣고》, 8세기 초엽에 활동한 왕효렴의 시 《출운주에서》 등은 먼 타향에서 자기 조국과 고향, 가족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예술적으로 잘 형상한 작품들로 알려져있다. 양태사, 왕효렴, 배정(9세기말) 등은 일본땅에 사신으로 가서 그 나라의 문화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5) 건축

 발해에서 건축술도 상당한정도로 발전하였는데 우선 도시건축은 상경룡천부유적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40여리둘레의 정방형 도성안에 외성, 황성, 궁성들의 구획을 정연하게 설정하고 구획사이에 대도로들을 규모있게 뽑은것 등은 고구려 안학궁의 건축양식을 계승발전시킨것이다. 살림집과 절간 등의 건축도 구들에 의한 난방과 돌을 다듬어 많이 쓴 건축방법,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규모, 대칭과 대조, 시력의 착각을 리용한 과장의 응용 등에 의하여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성건축도 산성, 평지성, 강변보루와 같이 여러가지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무덤건축은 돌칸흙무덤과 돌곽흙무덤, 벽돌무덤, 움무덤 등 여러가지 형식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인정되는것들은 호화롭고 규모도 큰것들이였다.

 6) 공예

 발해인민들은 고구려공예의 우수한 전통을 이어받아 공예술을 더욱 발전시키였다. 무엇보다도 도자기공예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발해의 도자기는 그 종류와 크기, 형태와 색갈, 바탕흙과 무늬 등이 매우 다종다양하였으며 실용성과 예술성이 잘 결합되여있었다. 841년에 발해에서 당나라에 수출한 보라색자배기(자자분)는 크기가 반섬들이나 되는것인데 무게는 새털과 같이 가벼웠다고 한다. 발해에서는 기와공예도 발전하였는데 발해의 기와는 일반적으로 그 형태와 크기, 색갈이 다양하고 질이 굳어 실용적가치가 있었으며 예술적처리도 잘된것들이였다. 발해기와에는 암기와, 수기와, 수기와막새, 치미, 괴면기와, 기둥밑치레기와 등 종류가 다양하였다. 수기와막새는 그 수법과 무늬장식이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웅건한 맛을 주면서도 매우 아름다운것으로 특징이 있다. 벽돌공예도 발전하였다. 발해의 벽돌에는 4각형벽돌, 한끝이 뾰족한 벽돌, 멈추개벽돌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가운데서 4각형벽돌이 가장 많은데 이런 벽돌에는 아름다운 꽃무늬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무늬를 돋우어 새긴것들이 많다. 발해사람들은 고구려사람들처럼 돌다루는 기술도 가지고있었으며 따라서 발해에서는 돌공예도 발전하였다. 발해에서는 금속공예도 높은 수준에 있었다. 발해유적에서 나온 청동으로 만든 말탄 사람조각품은 높이가 불과 5.2㎝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치레거리이지만 말과 말장식, 사람을 생동하게 형상한것으로 하여 발해금속공예의 발전수준을 잘 보여준다.

 7) 조각

 발해사람들은 조각술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녕안현 동경성의 옛 절터에 남아있는 상경돌등은 굳은 돌인 용암을 쪼아 8각지붕의 정자건물형식을 본따서 만든것인데 마치도 만문한 나무를 깎아만든듯 한 감을 주는 조각품으로서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걸작의 하나로 평가되고있다. 발해에서는 불교가 널리 보급되면서 부처조각품도 많이 제작되였다. 상경룡천부 제2절터와 훈춘의 팔련성터에서 나온 돌부처들은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얼굴표정, 균형잡힌 체구, 두툼하게 입은 옷의 선명한 주름, 전체적으로 느끼는 웅건성 등 그 주제와 형상, 조각기법에서 고구려의 조각술을 계승발전시켰음을 잘 보여준다. 발해의 높은 조각술은 또한 정혜공주무덤에서 나온 2개의 돌사자조각품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넙적한 받침돌우에 앞발을 버티고 앉아있는 사자의 모양을 형상한 이 조각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대가리를 쳐들고 사나운 이발을 드러내여 울부짖는듯한 모습을 하고있어 맹수로서의 사자의 힘과 탄력을 생동하게 엿볼수 있게 한다.

 8) 음악과 무용

 발해에서는 인민음악으로 보이는 《납소리》, 《진소리》, 《신소리》, 《소리고》 등의 노래들이 적지 않게 창작보급되였다. 이와 함께 직업음악도 상당히 발전하여 《릉절》, 《부수》, 《팔선》 등의 악곡들이 전해지고있다. 또한 탄쟁, 추쟁, 봉수공후, 수공후, 와공후, 비파, 오현, 의취적, 저, 생, 호로생, 소, 소피리, 도피피리, 요고, 제고, 담고, 구두고, 철판, 패, 대피리 등 고구려의 악기를 리용, 개량한 악기들이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악기의 발전에 따라 음악연주분야에서도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져 나라에는 가무예술가들로 무어진 《교방》이라는 국가기구까지 있었다. 이러한 예술인들의 음악공연은 중국과 일본에 널리 알려졌다. 발해에서는 음악과 함께 무용도 발전하여 군중가무인 《답추》도 광범히 보급되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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