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등록 |  학생가입 
첫페지로 손전화홈페지열람기
 

조선봉건왕조 이전시기 우리 민족의 원시조

단군에 대한 숭배의식

 

10월 3일은 우리 민족의 원시조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고 시조왕으로 즉위한 날이다. 우리 민족은 이날을 천지개벽한 명절날, 개천절이라고 하고있다.

단군이 동방에서 처음으로 국가를 세움으로써 우리 나라에서는 원시시대가 끝나고 우리 민족은 국가시대, 문명시대에 들어서게 되였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건국시조로서 우리 민족에게 선진문명을 가져다주었으며 조선민족이 단일민족으로 발전할수 있는 실제적담보를 마련하여놓았다. 이러한것으로 하여 우리 선조들은 단군을 우리 민족의 원시조로 숭배하면서 그와 관련한 숭배사상과 여러가지 의례풍습을 이루어놓았다.

이 글에서는 조선봉건왕조이전에 존재한 력대국가들의 단군숭배의식에 대해서 밝히려고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금까지 단군은 신화적인 존재로 전해져왔습니다. 단군이 신화적인 존재로 전해오게 된것은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이 원시조인 단군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면서 그에 대한 여러가지 전설을 많이 지어낸것과 관련되여있습니다.》

 

조선민족의 원시조 단군에 대한 숭배의식은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첫 국가가 존재하였던 고대조선시기에 형성되였다.

고대조선시기 우리 인민들속에 퍼져있던 단군숭배의식에 대하여서는 고조선건국설화인 《단군신화》가 잘 보여주고있다.

《단군신화》에서는 하늘나라왕의 아들 환웅이 아버지가 선정해준 삼위태백지역에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는데 그 과정에 단군을 낳았다고 전하고있다. 그리고 신화에서는 단군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여 오래도록 통치하다가 후에는 산신이 되였다고 끝을 맺고있다.(《삼국유사권1 고조선, 《제왕운기》 하권 동국군왕개국년대 병서 참고)

선행한 원시신화유산들에 토대하고 거기에 고조선 건국전야의 사회상과 국가건립의 사실을 반영하여 하늘신의 후손인 환웅이 곰씨족의 녀자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고 그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웠다는 내용으로 구성된 《단군신화》는 고조선에 널리 파급되였고 당대의 사람들은 고조선의 건국자이고 민족의 건국시조인 단군을 하늘신의 아들로 내세우고 숭배하였다.

한마디로 단군은 고대조선시기에 우리 민족의 첫 국가 고조선을 건립한 건국자로 숭배되였다.

사실 우리 민족사를 돌이켜볼 때 가장 큰 력사적사변의 하나는 통일적인 중앙집권적국가의 출현, 단군조선의 성립이라고 할수 있다.

B.C. 30세기초 단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조선일대에 《조선》 (단군조선)이라는 나라를 수립한것은 민족형성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대사변이였다.

공화국 력사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수립된 후 점차 강성하여 주변지역에 널리 퍼져사는 같은 갈래의 씨족, 종족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나갔으며 마침내 B.C. 3천년기 중엽에는 그 령역이 조선반도의 대부분을 포함하여 료하류역, 송화강상류지역까지 확장되였다.[《고조선력사개관》사회과학출판사, 주체88(1999)년, 51~58페지 참고]

우리 민족의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한 단군조선의 성립에 대해 력사기록에는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나라를 세웠다.》(동사강목1권 상)고 전하고있다.

우리 민족의 형성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고조선국가가 민족의 건국시조 단군에 의해 성립된것으로 하여 단군은 당시 사람들의 칭송과 찬사를 받지 않을수 없었으며 그 과정에 단군에 대한 숭배사상이 싹트게 되였던것이다. 그리고 단군은 우리 겨레에게 문명을 가져다주고 나라를 세워주었으며 겨레가 대대손손 복락을 누릴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신성스러운 왕으로 부각되게 되였다. 그리하여 고조선건국설화인 단군신화가 태여나게 되였던것이다.

이처럼 조선민족의 원시조 단군에 대한 숭배의식은 고대조선시기에 형성되게 되였다.

 

조선민족의 원시조 단군에 대한 숭배의식은 다음으로 삼국시기와 발해시기에 와서 사람들속에서 우리 겨레의 시조로 높이 내세우는 숭배사상으로 승화되였다.

고구려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건국시조 단군을 우리 겨레의 시조로 열렬히 숭배하였다는것은 고구려시기에 단군릉이 개축된 사실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단군을 열렬히 숭배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주체82(1993)년에 단군릉이 발굴된 이후 그에 대한 공화국 고고학계의 연구가 심화되면서 강동의 단군릉이 고구려시기에 개축되였다는것이 밝혀졌다.

단군이 고구려가 존재하던 시기보다 훨씬 앞선 수천년전에 생존한 인물이라는것을 념두에 둘 때 고구려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온 단군의 무덤을 보다 안전하게 보존할수 있는 고구려형식의 무덤으로 개축하였다는 사실은 원시조 단군에 대한 고구려사람들의 숭배의식이 매우 강하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그리고 무덤을 쓰고 제사를 지내는것이 우리 민족의 풍습이라는것을 념두에 둘 때 고구려사람들이 단군릉을 개축하고 매해 제사를 지내지 않을수 없었다고 볼수 있다. 그것이 단군에 대한 숭배사상을 더욱 조장시키는 계기로 되였을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구려사람들이 단군을 숭배하였다는것은 고구려시기 구월산에 단군과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를 제사지내던 삼성사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삼국시기에 존재한 신라도 선진문화를 가진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이주해간 사람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세워진 나라였으므로 자기의 건국자 박혁거세와 함께 민족의 원시조 단군을 숭배하였다.

후기신라의 유명한 화가인 솔거가 자기가 이름난 화가로 될수 있은것은 단군에게서 붓을 받는 꿈을 꾸고 그 붓으로 그림을 그렸기때문이라고 하면서 단군화상을 근 1 000상이나 그려 널리 보급하였다는것은 신라에서 단군을 우리 겨레의 시조로 인정하고 숭배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이다.(《근역서화징권1 참고)

당시 솔거가 그린 단군화상이 후세에까지 오래동안 전해지면서 집집마다 걸려있었다는것은 단군에 대한 숭배가 당시 민간에도 깊이 침투되여있었다는것을 짐작할수 있게 한다.

이처럼 조선민족의 원시조 단군에 대한 숭배사상은 고대조선시기에 형성되여 삼국시기에로 이어지면서 널리 숭배되게 되였다.

삼국시기 민족의 원시조 단군에 대한 숭배의식은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시기에도 널리 퍼지게 되였다.

그것은 발해에서 단군왕조의 력사를 정리편찬하는 사업을 매우 중시한 사실을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발해에서는 성립초기에 벌써 《단군봉장기년》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협계태씨족보》라는 력사책에서는 《발해의 검교태위 반안군왕 대야발이 천송7년(715년) 3월 3일 왕(대조영)의 명령을 받아 <단군봉장기년>이라는 책의 서문을 지었다.》(《협계태씨족보권1, 선조세계)고 전하고있다. 물론 책이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수 없지만 책의 이름으로 보아 단군왕조의 왕세계와 왕위전승에 대한것이 간단하게 서술되여있었을것이라고 보고있다.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에서 초기에 《단군봉장기년 편찬하였다는것은 발해왕조가 단군과 관련한 력사적사실에 매우 큰 관심을 두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당시로 말하면 발해왕조가 국가건립의 초기로서 복잡하고도 중대한 국사들이 수많이 제기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단군과 관련한 력사적사실에 매우 큰 관심을 두고 단군관련서적을 왕의 명령에 의하여 편찬하였다는것은 이 사업이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진행되였다는것을 보여주는것으로 된다.

발해왕조가 단군과 관련한 력사적사실에 큰 관심을 둔것은 그것이 단군왕조와 자기 왕조의 력사적계승성을 밝히는 중요한 사업이기때문이였다고 볼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발해에서 단군을 국가적규모에서 민족의 시조로 숭배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조선민족의 원시조 단군에 대한 숭배의식은 다음으로 고려시기에 와서 그 전시기에 비하여 더욱 고조되였다.

고려사람들은 단군을 우리 나라 력사상 처음으로 국가를 세운 건국시조로, 조선민족의 원시조로 내세우고 숭배하였다.

고려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존재하였던 우리 나라에서 첫 통일국가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나라이다.

고려사람들의 단군숭배는 고려국가의 수도를 단군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에 정하려고 한 사실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고려국가는 성립직후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황페화되여있었던 평양을 복구하는 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은 새 왕조의 성립을 선포한지 3개월밖에 안되는 918년에 당시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평양을 복구할데 대한 령을 내리였다. 왕건은 평양복구를 위해 여러 고을의 인민들을 평양으로 이사시키도록 하였으며 고위관리들을 파견하여 평양건설을 다그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평양에 중앙통치기구의 축소판과 같은 《서경문사》관제를 실시하였다.  

당시 고려가 평양을 매우 중시한것은 서북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거점을 꾸리기 위해서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여기에 장차 고려국가의 수도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932년  《서경을 복구하고 주민들을 이주시키는것은 … 장차 이곳에 수도를 정하려 한것이였다.》고 하였다.

왕건이 고려초기 평양을 그토록 중요시하고 수도로까지 정하려 한것은 그곳이 바로 단군이 태여난 고향이였고 단군조선의 수도였기때문이였다. 다시말하여 국토통합을 힘있게 추진시키고있던 고려는 통일위업실현에서 단군이 우리 나라 력사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면서 수도로 정한 평양이 차지하는 의의를 중시한 결과였다.

고려국가가 단군의 도읍지인 평양에 수도를 옮기려 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고려에서 단군을 적극 내세우고 숭배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고려에서는 단군에 대한 숭배를 적극 장려하면서 단군제사를 국가적, 사회적관심속에서 성대하게 진행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실록에 《(1392년 8월)고려에서 진행하여온 단군에 대한 제사를 평양부가 맡아 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태조실록권1 원년 8월 경신)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고려시기 해마다 전통적으로 단군제사를 진행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단군릉발굴과정에 무덤앞에서 고려시기의 유약을 바른 기와쪼각이 발견되였는데 그것은 고려시기에 그 무덤앞에 제당이 있었으며 거기에서 제사를 지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고려에서는 평양과 구월산, 강동에 사당을 지어놓고 국가적 또는 전사회적인 규모에서 단군제를 성대하게 지내였다.

고려사람들의 이러한 사상감정을 반영하여 《삼국유사 서술한 일연(1206-1289)이나 《제왕운기 편찬한 리승휴(1224-1300)는 다같이 저서에서 우리 나라 력사를 단군으로부터 시작된것으로 기록하였던것이다.

이처럼 고려시기 단군숭배의식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사상감정을 계승한것으로서 사람들속에 널리 퍼져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봉건왕조 이전시기 우리 민족의 원시조 단군에 대한 숭배의식은 고대조선시기에 형성되여 삼국시기, 발해와 고려시기로 이어져오게 되였다.

 

김일성방송대학 리영남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