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전반기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과
확대강화를 립증하는 반증자료연구 2)
2. 본 론
2.1.2.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과 관련한 반증자료
반증자료들은 다음으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자면 사람문제, 무기문제, 반일부대와의 관계문제를 비롯하여 군사정치적으로 제기되는 많은 난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반증자료들은 우선
일제의 기록문건들에서는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무장대오의 골간을 튼튼히 꾸리고 반군사조직들을 수많이 내오고 무장대오를 꾸려나간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립증하고있다.
동만 각 현에서 활동한 반군사조직들의 활동에 대하여 반증자료들에는 《공비(적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모독한 말)는 … 연길, 화룡, 왕청, 훈춘의 각 현에 현위원회를 밀설하고 다시 이것들을 수개의 구, 세포로 구분하여 극히 교묘한 잠행운동을 가지고 당세의 확장, 농민의 적화를 획책하는 한편 적위대, 무장유격대를 조직하고 … 있다.》(《외무성경찰사》SP 205-5 8 419페지),《… 로동조합 및 로동자들의 투쟁은 무장조직을 가지고 보장하도록 반드시 로동자자신의 무장조직인 로동자규찰대를 건설하여야 할것이다.
로동자규찰대원은 반드시 로동자군중속에서 가장 용감한 전투적증견분자들로서 모든 투쟁과 행동에서 가장 용감하게 적과 싸우며 적의 파괴행동에 저항하며 회의, 시위, 파업운동을 보호하며 로동자들의
그와 같은 부단한 투쟁속에서 군사적기술과 전투기재에 숙련하며 나중에는 … 혁명군대로까지 발전시켜야 한다.》(《간도지방공산당의 결의, 지령 및 선전문》1932.3.14 재간도총령사관 경찰서 제목 10 5페지),《소년선봉대의 긴급임무.
(1) 과거의 조직은 부분적인데 우리들의 혁명승리는 도저히 무산계급의 부분을 가지고서는 원쑤를 공격할수 없으므로 우리들은 공장, 광산, 철도의 로동자들속에 우리의 조직을 가져야 한다. 농촌에서도 각 부락마다에 우리의 력량이 필요하며 역시 로동자들가운데 사람을 파견하여 사업시키며 다음으로 지금 소년선봉대가 있는 지방의 분대 또는 소대에서는 책임적으로 각 농촌에 소년선봉대를 조직할것이다. 우리 조직은 널리 혁명화할것을 요구하고있다.
(2) 우리들은 종래 기념일에 제하여 선전공작을 한것뿐이다.
소년선봉대원은 일상적인 선전자이며 역시 조직자인 동시에 장래의 혁명군인인것이다. 투쟁기념일 또는 투쟁에 제하여 선전대를 조직하여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선전하며 어떤 때라도 우리들과 같은 옷없고 먹을것 없는 도시로동자 및 농촌의 무산계급에 힘있게 경상적으로 선전할것이다. 특히 각개 소년선봉대동지들은 가정을 혁명화, 조직화하는것이 가장 필요하다.
(3) 소년선봉대는 무산계급청년가운데서 가장 피끓고 용감한 분자이다. 그러므로 근로청년의 … 향상적, 활발적, 영웅적투쟁조직으로서 가장 혁명적이며 결사적이며 용맹한 무산청년의 반군사조직이다. …
그러므로 대원은 더욱 힘있게 각개 투쟁에서 청년군중을 발동하여 선봉적으로 나와 승리를 보장하도록 투쟁할것이다.
…
소년선봉대는 광범한 무산계급청년가운데서 가장 용감한 분자로서 조직된 군사적조직이다. 그것은 산업별로 조직할것이며 즉 도시, 공장, 농촌, 광산, 학교 등을 중심으로 조직할것이다.》(《간도지방공산당의 결의, 지령 및 선전문》1932.3.14 재간도총령사관 경찰서 제목 33 1~4페지),《각개 부대는 군사적기술과 소질이 풍부한 동지를 소년선봉대에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정상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할것이다. (보초, 탐정, 무기 사용 및 수리, 군사행동상의 수기신호 등 )》(《현대사자료》제30권 미스즈서방 1976년판 135페지)라고 썼다.
이 자료들은
반증자료들은 또한
이에 대하여 일제의 비밀문건들에는 《그러나 필요한 무기는 셀수 있을 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
밀림속에서 우등불을 에워싸고 몇번이고 몇번이고 앞날의 전술을 다듬은것 같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내놓은 안은 세사람을 한 소조로 해서 일본군병사, 경찰들을 무장해제하여
2개월후 간도의 산림속에 모인 때는 벌써 각 조에는 2, 3정의 사냥총과 권총 등이 있었으며 인원도 2배로 증가되여있었다고 한다.》(《세계의 움직임》1950.5 일본 외무성정보문화국 20페지),《로두구탄광(연길현)에서의 전화에 의하면 이 탄광부속 경찰서ㅇㅇㅇ은 21일(1932.3)22시경 … 습격당하여 비치된 소총 5정을 탈취당했다.》(《외무성경찰사》SP 205-5 9 966페지), 《훈춘현 대황구에서 … 조선인, 중국인이 혼합된 공비단…이 그곳을 습격하고 장총 13정 및 탄약 2 000발을 빼앗아가지고 북쪽으로 철수했다.》(《외무성경찰사》SP 205-5 10 047페지),《5월 1일 23시 15분 훈춘 동문 북쪽 성벽이 파손된 곳으로 … 적 14명, 5명이 침입하여 보안대 9명(총기 12정)을 포로하여갔다.》(《외무성경찰사》SP 205-5 10 059페지)라고 썼다.
이 자료들은 적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하는것을 무기해결의 기본방도로 내세우고 동만의 전 지역에서 무장을 얻기 위한 혁명조직들의 투쟁이 활발해졌으며 이 투쟁이 전민항쟁의 개시를 위한 서막으로, 예비적인 싸움으로 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반증자료들은 또한
1930년대의 전례없는 흉작과 그에 따르는 혹심한 기근은 동만지방에서 추수투쟁에 이어 새로운 대중투쟁을 벌릴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
춘황투쟁을 통하여 일제와 반동지주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소규모유격대와 혁명조직들이 더욱 단련되고 수많은 로동자, 농민, 애국청년들이 혁명적으로 각성되게 되였다.
춘황투쟁에 대하여 당시 신문들은 대대적으로 소개하였다.
일제의 어용신문들인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춘황투쟁에 대하여 《6일 무장한 공산당 약 40명은 연길현 춘양방면에 나타나서 동지 농민 약 400명을 … 출동케 하여 지주의 저장해둔 곡식을 강제로 분배시키고 또 폭행을 했기때문에 백초구로부터 보병단 14명, 령사관 경관 5명이 출동하여 지난 왕덕림토벌로 주둔중인 배영장이 지휘하는 부대와 협력하여 진압에 노력중이라고 한다.》(《동아일보》1932.3.9), 《18일 간도 로두구에서 농민 30여명이 … 창고에 쌓아놓은 곡식을 기민들에게 분배하라고 고함을 치며 일대 소동을 일으키다가 다수한 사람이 검거되였는데 국자가부근의 농촌에서도 시위사건이 있었고 간도일대의 기근은 이제 절정에 달하여 각지에서 군중은 봉기하는터이며 당국에서는 최후의 복안(複案)을 결정한다.》(《조선일보》1932.3.22),《24일부터 26일까지 국자가로부터 동편 6리쯤 되는 걸만동에 공산당 500여명이 출현하여 주구청산, 곡물강제분배 등 폭동을 일으켰다.》(《동아일보》1932.3.31),《27일 함북 상삼봉대안 개산툰에 공산당 150명이 습격하여 곡물창고를 파괴하고 곡물을 탈거하였으므로 상삼봉으로부터 경부보 1명, 순사 3명이 무장출동경계중이다.
대안일대의 형세가 불온하므로 국경경찰관은 이상히 긴장하였다.》(《동아일보》1932.3.29),《… 간도에는 22일 밤에 돌연히 … 공산당의 폭동이 뒤를 이어 일어날 형세이라 한다.
이 까닭에 보위단과 공안대, 중국군 등에도 동요되여 전간도는 일층 전란의 와중에 싸이게 되였으므로 총독부에서는 간도 총령사관의 500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진압하기가 용이치 아니한 까닭에 혹은 함경남북도의 국경방면도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으므로 전기 3도 경찰부에 대하여 국경방면을 엄중히 경계하라고 금 23일 아침에 전명하였다 한다.
그와 동시에 만일의 경우에 비코저 함북경찰부에 300명 경관에게 대기명령을 내리였다.
작 22일 밤에 경성역을 출발하여 북행한 전중(田中)보안과장은 전기 300명 경관을 총지휘하리라 한다.》(《동아일보》1932.3.24)《… 일본경찰대는 만주국군헌과 협력하여 각 방면에 출동진압중이나 폭동범위가 너무도 광대하여 용이하게 진압되지 않는다 한다.》(《조선일보》1932.3.30)라고 전하였다.
이 자료들은 춘황투쟁이 처음에는 경제적요구를 내걸고 비폭력적인 형태로 진행되다가 점차 차량투쟁, 탈량투쟁으로, 일제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치투쟁,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 과정에 인민대중의 혁명적기세가 더욱 높아지고 일제의 만주침공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을뿐 아니라 많은 혁명투사들이 자라나고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이 튼튼히 축성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반증자료들은 또한
당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사업앞에 나서는 엄중한 난관의 하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한 구국군의 적대행동이였다.
만주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있던 중국인반일부대들은
그들은 하나와 같이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일본놈의 앞잡이로 보았으며 조선사람들을 만주대륙에 일제침략군을 끌어들인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구국군의 완고한 상층부는 조선사람은 공산당이며 공산당은 파쟁군이며 파쟁군은 일제의 앞잡이라는 제나름의 공식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조선의 청장년들을 가차없이 박해하고 학살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반일부대와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유격대의 존재와 활동을 합법화할수 없고 유격대를 합법화하지 않고서는 대오를 확대할수 없으며 공개적인 군사활동을 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반일인민유격대창건사업앞에 가로놓여있던 가장 큰 난관의 하나가 극복되게 되였다.
반일련합전선이 형성된데 대하여 당시 일제의 출판물들은 《동만지방에 있어서도 반일적기운이 급격히 증대하여 중국군경의 배반도망이 련속하여 일어났다.
…
더우기 반변에 의하여 도처에 조직된 반일구국군에 무장유격대원을 참가시키며 또한 당의 영향하에 있는 각종 대중단체를 총동원하여 식량의 공급, 정보의 제공, 근거지부근의 경계 등에 당하게 하며 또한 도시습격시에는 이와 련합하여 정황정찰 … 등을 감행하였다.》(《만주공산비의 연구》제1집 만주국군정부 고문부 1936년 77~78페지),《만주사변후 전만에 걸쳐 군경의 반란도주가 계속되고 간도에서도 1931년에는 약 240명, 1932년에는 약 2 240명의 다수에 달하였으며 … 공비는 이와 같은 정세를 포착하여 선전선동을 진행하고 반란병사의 규합에 노력한 결과 더욱더 세력을 증대하…는데 이르렀다.》(《만주공산비의 연구》제1집 만주국군정부 고문부 1936년 164~168페지), 《① 공산당 …은 이번의 사변을 리용하여 중국관민의 반일기세를 조장하는 동시에 조선인, 중국인로농군중의 적화를 계획하고 일본군경의 틈을 타서 선전대, 모연대 등을 서너사람이나 네댓사람씩 각지에 파견하여 일반주민들에게 주의의 선전을 하며 한편 자산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조달하고있다.
② 또 … 각 현, 각 구의 각급 당부와 련락하여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등을 리용하여 반일병사동맹 또는 구국군후원회 등을 조직하여 반란병비 기타 비적들에게 직접 또는 간접으로 편의를 주고 최근에는 … 전 만주에서 반란병비를 통일하여 공산당의 지도하에 적위군을 조직하도록 비밀리에 교섭중이라는 취지이다.》(《외무성경찰사》SP 205-5 7 794~7 795페지),《현재 동녕현부근에서 활동하는자는 모두 … 공산당으로서 이를 결성한 분자의 대부분은 조선인공산당원이다.
… 만주사변이 폭발되자 이들 공산당원들은 점차 반만, 반일군에 들어가서 그 활동이 점차 활발하게 되였다.
이와 함께 리광이 …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구국군의 별동대가 되여 박ㅇㅇ, 오ㅇㅇ, 전ㅇ 등의 선전원들을 배치하고 표면으로는 반일반만운동에 핑게하고는 …주의의 선전을 계속하였다. …》라고 썼다. (《소비공작에 따르는 공산당의 성쇠개황》제2권 21~23페지)라고 썼다.
이러한 자료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반일부대와의 련합전선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 그들을 반일투쟁에로 이끌어나갔으며 별동대의 명칭을 띠고 유격대의 합법적활동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처럼 반증자료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