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중심의 력사관과 그 부당성(1)
1. 서론
지금 반동적인 일부 어용사가들은 소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후 시기에 와서야 우리 민족이 《전일민족으로 발전할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신라중심의 력사관을 류포시키고있다.
이것은 조선민족의 형성발전시기를 수천년간 끌어내리고 우리 나라의 력사를 외소화하는데 그 부당성이 있다.
신라중심의 력사관과 그 부당성을 정확히 리해하여야 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우리 나라 력사가 고구려중심의 력사라는것을 정확히 인식할수 있으며 지난날의 력사책들과 오늘의 그릇된 주장들의 제한성을 바로 평가하고 조선중세력사에 대한 외곡책동을 저지시킬수 있다.
7세기이전 삼국시기의 력사는 강대한 고구려의 선도적이며 중심적인 역할에 의하여 발전하였다. 그리고 7세기말~10세기초 발해와 후기신라가 병존한 시기에는 발해가 후기신라보다 강대한 나라로 존재하였으며 고구려를 계승하여 세워진 고려는 발해유민들을 포섭하고 후기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여 우리 나라에서 첫 통일국가로 출현하였다.
고구려중심의 력사관에 기초하여 삼국시기와 발해, 후기신라시기, 고려시기의 력사가 과학적으로 정립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외의 일부 어용사가들은 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조선중세력사를 신라를 중심으로 발전한듯이 외곡하고있다.
이 론문에서는 신라중심의 력사관이 생겨나게 된 사회력사적배경과 그 과정, 이러한 관점과 립장이 부당하다는데 대하여 밝히려고 한다.
2. 본론
2.1 신라중심의 력사관이 생겨나게 된 사회력사적배경
신라중심의 력사관은 한마디로 말하여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력사가 발전하였다고 보는 견해와 관점이다. 다시말하여 7세기이전 삼국시기에 신라가 력사발전에서 중심적역할을 하였을뿐 아니라 7세기이후에는 삼국을 《통일》한 후기신라만 존재하였으며 후삼국을 이어 고려가 《재통일》을 이룩한것으로 보는 견해와 관점이다.
신라중심의 력사관은 크게 두가지 내용을 담고있다. 하나는 7세기이전 삼국시기에 신라가 력사발전에서 중심적역할을 하였다고 보는 견해와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7세기이후시기는 《통일》신라시기이며 그것이 고려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와 관점이다.
1세기초중엽부터 10세기초의 우리 나라 력사에서 신라가 우리 민족사의 중심에 서있었다는 이러한 견해와 관점은 력사적사실과는 맞지 않는 견해와 관점이다.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첫 봉건국가로 등장한 고구려는 삼국가운데서 제일 강대하고 발전된 나라였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보다 먼저 봉건사회에 들어섰으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가장 발전된 나라였다. 또한 백제, 신라와의 관계에서 언제나 주도권을 잡고 삼국의 통일과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런것으로 하여 고구려는 당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나라였으며 우리 민족의 통일적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중심적역할을 논 나라였다. 고구려가 력사발전에서 논 중심적인 역할은 그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고려에로 이어졌다.
삼국의 력사발전에서 논 천년강국 고구려의 선도적이며 중심적인 역할과 관련한 력사적사실에 대하여서는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12세기초이전시기의 사람들도 잘 알고있었다. 발해의 임금들이 자기 나라의 정식국호가 발해이면서도 왜나라에 보내는 국서에서는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는것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오래동안 전해오던 고구려중심의 력사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기인 12세기초이후 돌변하였다. 다시말하여 삼국시기의 력사가 마치도 신라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기정사실이며 후삼국을 이어 고려가 《재통일》을 실현한듯이 되였다.
《신라중심의 력사서술체계는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에 물젖은 봉건사가들에 의하여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게 꾸며진것입니다.》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에 물젖은 봉건사가들에 의하여 꾸며진 신라중심의 력사서술체계는 신라중심의 력사관에 뿌리를 두고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견해와 관점은 일정한 사회력사적배경과 해당 계급과 계층의 요구와 리해관계에 의하여 가지게 된다. 신라중심의 력사관도 바로 그렇게 세워지게 되였다.
김부식을 비롯한 봉건사가들이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게 《삼국사기》를 신라중심으로 꾸미게 된것은 12세기 전반기의 시대적배경과 봉건지배계급의 요구와 리해관계에 따른것이였다.
《삼국사기》편찬직전 고려의 형편은 매우 복잡하였다.
밖으로는 북쪽 녀진인들이 세운 금(金-1115년 성립)나라가 새롭게 큰 나라로 대두하여 서쪽의 료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는 한편 고려에 대하여 사대할것을 강요하면서 계속 압력을 가하고있었다.
한편 서경(평양)의 묘청일파는 인종왕에게 지금 서경땅에 왕의 《기운》이 돌고있는것만큼 거기에 도읍을 옮기게 되면 나라가 크게 부흥할것이고 금나라도 항복해올것이며 그밖에 36개 나라가 복속해올것이라는 지리풍수설을 내들고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것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국왕 인종과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의 관료들은 나약성을 나타내면서 금나라에 대한 사대굴종의 길로 나갔다. 서경에 대화궁(현 위치: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1동)을 건설하고 국왕을 옮겨오는 방법으로 권력을 잡으려던 서경량반관료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파탄되자 정변을 일으키고 대위국이라는 나라를 선포하였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토벌군》과의 치렬한 공방전끝에 진압되고말았다.
묘청일파가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에 도읍을 옮기면 고구려옛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있는 금나라까지도 항복해올것이라는것을 강조한것은 그것이 비록 지리풍수설에 기초한 비과학적인것이기는 하나 거기에는 옛 고구려를 동경하며 그 옛 령토를 회복하고 강대한 나라로 발전할것을 바라는 인민들의 지향이 반영되여있었다. 묘청일파가 정변을 일으키자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합류해나선것도 바로 그때문이였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북쪽에서 새로 일어난 금나라에 대하여 사대의 길로 굴러떨어진 집권세력과 그를 반대하는 반사대세력사이의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편찬이 시작되였다. 김부식이 《삼국사기》편찬을 끝낸것은 묘청의 정변을 진압한 때로부터 9년이 지난 1145년이였지만 그 준비는 정변을 진압하고 돌아온 직후에 인차 시작되였다. 김부식이 묘청의 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후 공신칭호와 함께 감수국사로 임명되였다는것은 그것을 시사해준다.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고려의
그는 《삼국사기》편찬에서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로 발전할것을 바라는 인민들의 념원을 묵살하는 한편 저들의 사대적립장을 합리화하는데 초점을 집중하였다. 《삼국사기》편찬에서 그에게 나선 긴절한 문제는 고려의 력사적연원을 고구려와 직접 잇닿지 않는것으로 꾸미는것이였다. 당시 김부식은 묘청의 란에 합세한 인민들이 서경에서 죽음도 두려움없이 《토벌군》과 결사적인 투쟁을 벌리는것을 직접 체험하였다. 김부식은 그것이 결코 묘청개인에 대한 환상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내세운 구호에 고조선,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로 발전할것을 바라는 인민들의 념원이 반영되여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때문에 그는 그들의 투쟁을 진압하는것만으로는 그들속에 새겨져있는 강대한 고구려에 대한 동경심을 뿌리뽑을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가 우리 나라 력사상에 천년강국으로 존재해있은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고 또 그 나라를 계승하여 발해가 신라와 함께 병존해있은것도 엄연한 사실이였다. 그러므로 옛 고구려땅을 차지하고있는 금나라에 대하여 사대정책을 실시하는 집권층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과 항거의 기운이 사라질수 없으며 그것이 어떤 조건이 성숙되면 쉽게 묘청의 란과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날수 있다는 위구심을 가지게 되였다. 때문에 김부식은 신라의 력사를 기본으로 하고 고구려의 력사를 깎아내리며 발해의 력사를 배제하고 후기신라를 이어 고려가 세워진것으로 《삼국사기》를 꾸미는것이 가장 적절하고 합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김부식은 그렇게 하여야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강국으로 만들려는 인민들의 지향을 꺾어버리고 또 력사문제를 둘러싼 금나라와의 시끄러운 분쟁도 무난히 넘길수 있다고 타산하였다. 그리하여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에 물젖은 봉건사가들은 신라중심의 력사관에 서서 《삼국사기》의 서술체계를 꾸미였으며 집필을 다그쳐 1145년에 완성본을 내놓게 되였다.
12세기초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에 물젖은 고려봉건사가들에 의하여 생겨난 신라중심의 력사관은 그 이후시기 봉건사가들에게 전수됨으로써 그들도 신라중심의 견해와 관점에 기초하여 조선력사편찬을 진행하게 하였다.
남먼저 사회발전단계에 들어섰고 국력이 제일 강하며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서 큰 역할을 한 나라를 중심으로 력사발전을 보는 견해와 관점은 과학적인 력사관으로 되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를 중심에 내세우는것은 비과학적인 력사관으로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의 력사를 전하는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신라중심의 력사관이 비과학적인 견해와 관점이라는것을 명백히 찾아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