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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전반기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과

확대강화를 립증하는 반증자료연구 1)

1. 서  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 시기에 벌써 무력건설을 혁명의 근본문제로 보시고 무장대오를 조직하는 사업으로부터 항일혁명투쟁을 시작하시였습니다.》
  조직적인 무장투쟁은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주류로, 최고형태로 되며 혁명무력의 창건과 강화발전은 무장투쟁의 개시와 확대발전을 성과적으로 담보하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실현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조직적인 무장투쟁뿐이라는 확고한 립장을 지니시고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 시기 무력건설을 혁명의 근본문제로 내세우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국가적후방도, 정규군의 지원도 없이 강대한 침략세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어렵고도 간고한 조건에서도 자체의 힘으로 혁명무력을 창건하고 확대강화하시여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시였으며 이 과정에 식민지, 반식민지나라들에서 혁명무력건설의 빛나는 본보기를 마련하시였다.
  당시 일제의 비밀문건자료들과 출판물들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도서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혁명적무장력인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시고 정치군사적위력을 끊임없이 강화하신데 대하여 립증하고있다.
  이 글에서는 1930년대전반기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과 강화발전과정을 반증하는 자료들을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은 그 시작부터 전 과정이 조선혁명가들의 자주적인 투쟁이였으며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련하신 우리 혁명의 주체적력량에 의하여 이룩되였다는것을 밝히려고 한다.

 

2. 본  론

2.1.1.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과 관련한 반증자료

 

193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식민지민족해방혁명에서 혁명적무장력의 형태와 건설방식에 대한 문제는 미해명문제였으며 그런것으로 하여 조선혁명에서 혁명무력건설은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자체의 힘으로, 자체의 실정에 맞게 풀어나가면서 진행하여야 하는 전인미답의 길이였다.
  강도 일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자면 장기전에서 능히 자체의 력량을 보존확대해나가면서 적의 력량을 부단히 소멸약화시킬수 있는 혁명무력을 가지고있어야 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개시하시면서 그 첫 사업으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사업을 조직령도하시였다.
  일제의 비밀문건자료들과 출판물들을 비롯한 반증자료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위한 투쟁을 이끄신데 대하여 객관적으로 립증하고있다.

반증자료들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제의 만주침공으로 조성된 정세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시고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며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신데 대하여 립증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도발한 일제는 《후방의 안전》 보장한다는 구실밑에 조선인민에 대한 폭압공세를 전면적으로 강화하였으며 특히 간도를 비롯한 만주의 조선인거주지역들에서 우리 인민에 대한 폭압만행을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침략자들과 조선인민사이의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은 극도로 첨예화되였으며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우리 인민의 폭력적진출은 급격히 앙양되였다.

조성된 정세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혁명군대의 창건을 더는 미룰수 없는 초미의 문제로 제기하였다.

한편 이 시기 위대한 수령님의 정력적인 활동에 의하여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혁명군대를 창건할수 있는 제반 조건과 가능성이 충분히 갖추어졌다.

무장투쟁과 혁명무력의 믿음직한 핵심골간이 꾸려지고 정치군사활동경험도 축적되였으며 대중적지반이 닦아지고 군사활동의 중심지도 마련되였다. 또한 일제의 만주침공으로 군벌통치가 와해되고 일제의 통치기구는 아직 서지 않아 전 만주가 무정부상태에 놓여있었으며 중국인민들도 대중적으로 일어나 반일투쟁을 벌리고있었다.

항일대전의 개시와 함께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지체없이 창건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닥쳐온것이였다.

조성된 정세의 긴박성과 유리한 환경을 과학적으로 통찰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0(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소집하시고 유격전을 기본형식으로 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으며 그 실현을 위하여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는것을 첫째가는 과업으로 내세우시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의 력사적사실을 수록한 출판물들의 반증자료들이 립증해주고있다.

해방후 서울에서 출판된 도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는 《19세 소년의 몸으로 일찍 복잡다단한 만주사회에서 동지들의 기대와 민중의 총애를 일신에 모으고 남북으로 치주(뛰여다닌다는 뜻)하여 청년운동과 반제투쟁에 정열을 경주하던 김성주-김일성(일명 한별) 그후는 어찌 되였던가?

광막한 료하평원(오가자)에서 원기를 기르고 억센 송화강(할빈)의 파랑(거센 물결이라는 뜻)으로 몸을 닦은 그는 … 무송의 산악지대로 돌아갔다는것은 기술(이미 썼다는 뜻)한바이어니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김일성 오래동안의 침묵을 깨뜨리고 동천에 높이 솟은 새별과도 같이 일본제국주의의 근본적타도와 동방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치를 선명히 하고 나타났다.》(《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2 동방문화사 서울 1946년 66페지)라고 썼다.
  다른 도서에서는 《그해(1931년-주)의 가을 9월 18일 밤의 일이였다.
  봉천(지금의 심양)가까이에서 철도선로가 폭발에 의하여 날려갔다. 그러자 일본군은 <장학량군대가 했다.>고 하면서 곧 장학량군대에게 쳐들어갔다. 장학량군대는 패배하여 중국본토쪽으로 도망쳐갔다. 사실은 만주를 노리고있던 일본군대는 선로에 화약을 설치하여 날려보내고는 이것을 장학량군대의 탓이라고 하여 전쟁의 계기로 하였던것이다.
  일본군은 련이어 군대를 파견하고 삽시에 만주전체를 점령하여버렸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일본에 대한 원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무렵 20살이 되신 김일성장군님은 동만주에서 가장 우수한 청년지도자...이시였다.
…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지향하는 마음은 더욱 강해지시였다. ...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무기를 잡고 싸울 때가 되였다!>고 생각하시였다. <우선 유격대를 만들고 그것으로부터 강한 인민의 군대를 조직하는것은 혁명승리의 열쇠다.>》(《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강학관 1963년판 101~103페지 참조)라고 서술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은 항일무장투쟁의 개시와 반일유격대를 창건할데 대한 방침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객관적정세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신데 기초하여 제시하신 방침이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의 발전을 의미하는 력사적사변임을 뚜렷이 립증해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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