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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이야기

 

스스로 찾는 일감

 

항상 무거운 배낭을 메고다니는 사람, 이것은 천리마구역 강선2동에 사는 김영숙동무를 두고 그곳 주민들이 하는 말이다.

그는 구역안의 곳곳을 다니며 파비닐박막, 각종 수지병, 파섬유, 파고무, 파고철 등을 수집하는족족 종류별로 선별하여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를 비롯한 여러 단위에 보내주군 한다.

지금으로부터 9년전 김영숙동무가 처음 그 일을 시작했을 때 그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자식들은 남보기 부끄럽다고 하며 제발 그 일을 그만두라고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하루도 그 일을 중단해본적이 없었다.

그가 량심으로 새겨가는 지원일지의 첫 페지에는 이런 글이 씌여져있다.

《조국을 위한 길에 작은것이란 있을수 없다. 꾸준히 한길을 걸어가자.》

결코 즉흥의 감정이 아니였다. 한때 저 하나만을 생각하며 길을 잘못 들었던 자기를 품에 안아 내세워준 나라의 은덕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는 불같은 일념으로 고동치는 그의 심장의 맹세였다.

그렇게 그는 9년세월 파고철 10여t, 장갑 1만여컬레를 비롯한 많은 물자를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에 보내주었다. 합금철직장, 가스발생로직장을 비롯한 련합기업소의 로동계급을 찾아가 자기 손으로 마련한 물자들을 안겨줄 때가 그에게 있어서는 생의 제일 기쁜 순간으로 되고있다.

하기에 힘들지 않은가고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군 한다.

《스스로 걷는 길이여서 그런지 힘든줄 모르겠습니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얼마전 본사편집국으로 혜산시 혜장동에서 살고있는 한 영예군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지난 7월 어느날 자기 집에 여러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복도와 부엌, 세면장과 함께 베란다까지 외장재를 칠해주고 집수리까지 말끔히 해준 다음 이름도 남기지 않고 가버렸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수 없다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일이 있기 며칠전에 한 녀인이 살림집보수정형을 알아보러 찾아왔다고 하길래 난 그저 해당 사업소에서 왔겠거니 하고 무심히 생각했댔습니다. 그런데 그후 그 녀인이 사람들과 함께 와서 벽체미장도 다시 해주고 외장재도 번듯하게 칠해주었는데 집이 얼마나 환해졌는지 금방 새집에 이사온것만 같았습니다. 그저 남긴 말은 이 외장재는 자기들이 새로 연구하여 만든것인데 오래동안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것뿐이였습니다.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거절하고 이름만이라도 대달라고 해도 그저 친동생이 와서 집을 꾸려주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며 웃기만 하였습니다. 그들의 소행을 꼭 신문에 소개해주십시오.》

그는 계속하여 이런 일이 혜명동에서 사는 다른 영예군인의 집에서도 있었다고 하는것이였다.

영예군인들이 꼭 찾고싶어하는 고마운 사람들, 우리는 많은 품을 들여 그들을 찾았다. 그들은 다름아닌 혜산재경건구제작소 작업반장 리순영동무와 그의 작업반원들이였다.

우리가 전화로 영예군인들의 인사를 전하자 리순영동무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 인사를 받기에는 아직 한 일이 너무도 적습니다.》

그의 꾸밈없는 진정을 안아볼수록 우리의 가슴속에는 비록 이름도 남기지 않았건만 이렇듯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아 내 조국땅 그 어디서나 따뜻한 사랑과 정이 끝없이 넘쳐흐르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뜨겁게 갈마들었다.

 

다산모가 흘린 눈물

 

한달전 어느날 밤이였다. 대관군 읍초급녀맹위원회 한영애동무는 밤새 잠을 이룰수 없었다.

여섯번째 자식을 낳은 박영란동무의 집구들에 불이 잘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자꾸만 되살아났던것이다. 지난 시기 많은 자식을 낳아 군에서 다산모로 소문난 그의 가정을 위해 늘 왼심을 쓴다고는 하였지만 아직도 자기들의 성의가 모자란다는 생각이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초급일군들의 협의회에서 박영란동무의 집수리를 해줄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한영애동무는 초급일군들에게 애국자라는게 다른 사람인가, 박영란동무처럼 자식들을 많이 낳아 키우는 사람이 바로 애국자가 아니겠는가, 우리 힘을 합쳐 이번 기회에 그의 집을 번듯하게 꾸려주자고 절절히 호소하였다.

이렇게 되여 많은 초급일군들이 떨쳐나서게 되였다. 세멘트며 혼석 등 건설자재를 마련해가지고 산모의 집으로 간 그들은 그날로 부뚜막을 다시 쌓고 온돌수리도 깨끗이 해주었다.

하루종일 땀흘리며 도배를 하고 외벽에 산뜻하게 외장재까지 칠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박영란동무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그가 흘린 눈물, 정녕 그것은 서로 돕고 위해주는 덕과 정을 체질화한 아름다운 사람들속에서 산다는 무한한 행복감의 분출이였다.

 

주체111(2022)년 9월 14일 《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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