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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한 헌신으로 이어진 값높은 한생

 

구성시 차흥1동에서 사는 전시공로자 최금산로인에 대한 이야기

 

 

만나보니 이 땅 어디서나 볼수 있는 평범한 로인이였다. 그러나 그의 한생의 이야기는 결코 범상치 않았다. 준엄한 1950년대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위대한 전승을 안아오는데 기여한 전시공로자여서만이 아니였다. 전후에도 당이 맡겨준 초소에서 자동차조향륜을 틀어잡고 충성과 애국의 운행길을 달려왔으며 년로보장을 받은 때로부터 지금까지 20여년간 마을주변에 푸른 숲을 펼쳐가며 나라와 인민을 위한 좋은 일을 수많이 찾아한 그의 한생의 갈피갈피에는 남모르게 새겨간 아름다운 헌신의 자욱들이 저 하늘의 뭇별마냥 무수히 반짝이고있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사회주의건설의 년대들마다 우리의 전쟁로병들과 전시공로자들은 포연탄우를 헤치며 피흘려 싸우던 전화의 그때처럼 살고있는가를 항상 자각하며 변함없는 복무의 길을 걸어왔으며 새세대들도 강직하고 견결하게 살며 투쟁하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구성시 차흥1동에서 살고있는 최금산로인, 마을사람들속에서 애국자아바이로 불리우는 그의 한생은 우리에게 전승세대의 참인간상과 고결한 풍모를 가슴뜨겁게 그려주었다.

 

변함없이 붉게 타는 마음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최금산로인은 년로보장을 받았다.

누구나 때가 되면 년로보장을 받기마련이다. 그것은 공민의 권리인 동시에 국가가 베풀어주는 혜택이다. 그러나 수속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아직 오륙이 성한데 집에서 터밭이나 가꾸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허전했다.

이런 생각으로 집앞에 이르러서도 선듯 들어서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그의 눈가에 마을뒤산의 빈 골짜기가 비껴들었다. 나무 한대 없는 그곳에서는 장마철이면 사태가 나군 하였다. 시련을 겪고있는 조국의 모습이 누런 빛갈이 도는 생땅이 드러난 그 골짜기에 그대로 함축되여있는듯이 안겨왔다.

날이 저물도록 그 골짜기를 다 밟아본 그는 집에 들어와 안해인 강병패녀성에게 물었다.

《저 골짜기에 다락밭을 만들어 과일나무를 심는것이 어떻겠소?》

강병패녀성은 깜짝 놀랐다. 군사복무시절부터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운전사로 일해온 남편에게는 나무를 심고 가꾸어본 경험도 지식도 없었던것이다. 그의 속생각을 다 읽은듯 최금산로인은 말했다.

《이 어려운 때 나라를 위해 큰일은 못해도 짐이야 되지 말아야지. 그리고 이젠 우리도 한생을 총화할 때가 되여오는데 이 땅에 무엇이든 남기는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다음날 이른아침 그는 산에 올랐다. 한정보가량 되는 경사지는 물매가 몹시 급한데다가 돌서덜이였다. 그 많은 돌들을 다 추어내고 밭을 만들자면 얼마나 많은 품이 들겠는지 쉽게 짐작할수 있었다. 그러나 신바람나게 일손을 놀리는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일이 힘든만큼 나라에 더 많은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다락밭을 잘 만들려면 돌담을 든든히 쌓아야 하는데 여기에 이렇게 돌이 많으니 그 걱정은 안해도 되겠소.》

이렇게 성수나서 말하였지만 그가 왜 모르랴. 돌걱정을 안해도 되는 대신 그만큼 흙과 거름을 날라야 한다는것을.

그때부터 그는 산에서 살다싶이 하였다. 삽이며 곡괭이 지어 함마까지 들고 산에 오르면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식사도 하지 않고 해가 떨어져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안해가 산에 오른적도 여러번이나 된다. 그러다 끝내는 안해도 아예 밥보자기를 싸들고 따라나서고말았다.

이듬해 봄부터 다락밭의 모양이 잡히기 시작하자 최금산로인은 이웃농장에 가서 수백그루의 복숭아나무모를 구해왔다. 그리고 기술도서를 놓고 밤새껏 익힌대로 한그루한그루 정성담아 심고 가꾸었다.

드디여 첫 복숭아를 수확하는 때가 왔다. 땅은 땀을 흘린것만큼 열매를 준다고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복숭아를 보는 강병패녀성의 마음은 기뻤다. 저만한 량의 복숭아면 손자들에게도 실컷 먹이고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남편의 노여움을 사게 될줄이야. 복숭아를 따서 세간난 자식들에게 보내주자고 하는 그의 말에 남편은 버럭 화를 냈다.

《우리가 우리 살림이나 자식들만을 위해서 숱한 고생을 했소? 》

얼마후 새빨갛게 익은 복숭아를 정성들여 따놓고 최금산로인은 안해에게 말했다.

《우리 이 복숭아를 병사들에게 보내줍시다.》

강병패녀성은 눈굽이 확 달아올랐다. 남편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자기가 왜 그 마음을 미처 몰랐던가.

최금산로인은 전시공로자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군자리의 병기공장이 수풍으로 이동전개되였을 때 열다섯살 중학생이였던 그는 선참으로 달려갔다. 그만하면 큰 체격이였던 그는 나이를 속이고 공장에 입직하였다.

아직은 부모의 슬하에서 응석을 부리며 자라야 할 나이, 손에 연필을 들고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때에 병기공장에서 수류탄을 만들던 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간직되여있었는가.

조국이 있고서야 나의 학교, 나의 행복, 나의 미래도 있다!

이것은 해방전 돈이 없어 교실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피눈물나는 생활과 꿈같이 흘러간 해방후 5년간의 행복한 생활과정에 그가 뼈에 사무치게 체득한 진리였다.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그의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였다. 허나 육체는 비록 로쇠했어도 열다섯살 어린 나이부터 가슴속깊이 간직한 나라위한 애국의 마음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바로 그래서 상처입은 조국땅을 자기의 더운 품에 선듯 그러안았던것이다.

알알이 고른 복숭아를 조국보위초소들과 유치원, 탁아소들에 보낼 때 그의 입가에서는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었소》의 흥겨운 노래소리가 그칠줄 모르고 흘러나왔다.

한해두해 세월이 흘러가면서 다락밭의 면적도 차츰 늘어났다. 황량하던 골짜기에는 그가 애써 여러곳에서 구해온 갖가지 과일나무들이 뿌리내렸다. 해마다 마을사람들을 불안케 하던 산사태도 옛말로 되였다.

거기에 슴배인 전시공로자의 헌신의 땀과 노력을 두고 누구나 감동을 금치 못해할 때 그는 자기 집 뜰안에 나무모밭을 만들었다. 이웃들은 저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욕심두 원. 골짜기에도 나무모밭이 있는데 터밭까지 갈아엎다니…》

그러나 거기서 키운 나무모들이 얼마후 마을사람들의 집으로 고스란히 옮겨올줄 누가 생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집집마다 나무모를 나누어주며 그가 하는 말은 또 얼마나 심금을 울렸던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집집마다 과일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지 않았소. 그 뜻을 받들어 저 골짜기뿐 아니라 우리 마을도 과일나무속에 묻히게 합시다.》

그렇게 그가 애써 키운 과일나무모들은 이웃집들에뿐 아니라 조국보위초소들과 일터와 학교들에도 옮겨졌다.

그러던 어느날 최금산로인은 새로 제정된 군자리로동계급훈장을 수여받게 되였다. 그의 주름진 얼굴로는 뜨거운것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조국이 시련을 겪을 때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였고 특출하게 위훈을 세운것도 없는데 어제는 불타는 고지에서 싸운 용사들과 꼭같이 1950년대 위훈자로 내세워주고 오늘은 또 이렇듯 크나큰 영예를 안겨준 어머니당과 조국, 고마운 그 품을 위해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복무의 길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로부터 얼마후 그는 자전거에 몸을 싣고 집을 나섰다. 어느한 군에 있다는 수종이 좋은 과일나무모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200리길을 꼬박 자전거로 달려 가져온 나무모를 새로 조성한 다락밭에 심을 때 나이가 동갑인 한 로인이 물었다.

《이제 나무를 심으면 열매달리는것을 임자가 꽤 볼수 있을가.》

그러나 최금산로인은 헌헌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못봐도 우리 후대들이 그 덕을 보지 않겠소. 그리고 그만큼 우리 조국이 아름다와지지 않겠소.》

그때 그의 나이는 81살이였다.

 

공백이 없는 아름다운 삶

 

우리는 처음 최금산로인이 년로보장을 받은 후에 나라를 위한 좋은 일을 찾아한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의 한생의 갈피갈피를 헤쳐보니 진주보석같은 하많은 이야기들이 그냥 쏟아져나왔다.

최금산로인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병기공장에서 일하면서 자동차운전사가 될것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때 그는 볼반공이였다. 이깔나무로 기둥과 보를 세우고 가마니로 천정과 옆면을 둘러막은 건물 아닌 《건물》에서 맵짠 강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일해도, 피대를 돌리느라 손이 터져 피가 흘러나와도 그는 힘든줄도 아픈줄도 모르고 매일 계획을 200%이상 수행하군 했다.

볼반에서 수류탄부분품이 하나씩 가공되여나올 때마다 그는 큰소리로 이렇게 웨쳤다.

《미국놈 또 잡았다!》

그는 자기의 피와 땀이 진하게 슴배여있는 수류탄이 하루빨리 전선의 용사들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런 마음에서 그는 불비속을 뚫고 무기와 탄약을 전선으로 나르는 자동차운전사들을 존경했고 운전사들은 또 운전사들대로 자기들이 공장에 오기만 하면 선참으로 달려와 전선소식을 묻는 그를 남달리 사랑했다.

그래서 《자동차운전사의 노래》가 보급되기 바쁘게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노래의 선률과 함께 앞으로 자동차운전사가 될 꿈이 자리잡게 되였다.

그 꿈은 전후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이루어지게 되였으며 그때부터 년로보장을 받을 때까지 그는 줄곧 자동차운전사로 일해왔다. 그 나날 그는 휘발유절약기를 만들어 나라살림살이에 적지 않은 리득을 주었다. 30대중엽에 벌써 1급운전사였던 그는 못쓴다고 내버려두었던 차를 개조하여 새것처럼 만들었다.

이처럼 40년세월 그가 달려온 운행길에는 단 한번의 탈선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위훈은 단지 운행길에만 새겨져있은것이 아니였다.

수십년전 여름 비내리는 날에 있은 일이다. 구성시의 산골길을 따라 달리던 그는 뜻밖의 광경에 차를 멈추었다. 이깔나무 한그루가 뿌리를 반나마 드러내놓고있었던것이다.

경사가 심한 곳이다보니 뿌리를 덮었던 흙이 비물에 다 씻겨내려간 모양이였다. 차에서 내린 그는 지체없이 뿌리우에 흙을 덮어주고 주변에 있는 돌들을 모아 나무둘레에 쌓고 그안에 또다시 흙을 채워넣었다.

그후에도 그는 그곳을 지나갈 때면 수십그루의 나무둘레에 모두 돌담을 쌓고 버팀목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남모르게 한 그 일이 어느한 신문사에 전해졌다. 어떻게 되여 그런 소행을 발휘할수 있었는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무 한그루한그루가 다 나라의 귀중한 재부가 아닙니까.》

얼마나 소박한 마음인가. 허나 조국의 귀중함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못하고서는 그런 말, 그런 일을 할수 없는것이다.

나라를 위해 필요한것이라면 무엇이든 자기가 수행해야 할 분공으로 받아안는 참된 공민이 바로 최금산로인이였다.

1960년대중엽 삭주군에서 살 때 그는 새끼돼지 두마리를 집에 가져왔다. 그것을 밑천으로 축산을 본때있게 하여 인민군대를 원호하려는 마음에서였다. 그 돼지를 키우느라 제일 고생한 사람은 그때 새색시였던 강병패녀성이였다. 직장일도 할래, 시부모와 시동생들 그리고 갓 태여난 자식까지 돌볼래, 거기다 난생처음 해보는 축산까지 하느라 그는 며칠새 몰라보게 축갔다. 하여 그는 어느날 운행길에서 돌아온 남편앞에서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러는 안해의 손을 꼭 잡고 남편은 이렇게 타일렀다.

《물론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탓할 사람은 없소. 하지만 나라를 위한 일을 놓고 이건 내몫, 저건 네몫 하고 가르면 우리 조국이 어떻게 천리마를 타고 내달리겠소. 지금이야 두몫, 세몫씩 일해도 성차지 않은 천리마시대가 아니요.》

그날 강병패녀성은 소중히 간수하였던 천리마휘장을 꺼내보았다. 그것은 처녀시절 구성방직공장에서 정방공으로 일할 때 수여받은것이였다. 천리마휘장을 쓸어보는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내가 일터를 떠났다고 늘 계획을 넘쳐하고 뒤떨어진 동무들을 위해 도와나서던 천리마기수의 그 정신까지 잊었단 말인가. 그렇다. 나는 어디서 살든, 무슨 일을 하든 한생 천리마기수로 살아야 한다. …

그들부부는 축산에 더욱 적극적으로 달라붙었다. 첫해에 500kg의 고기를 생산한 그들은 다음해에는 목표를 더 높이 세우고 돼지뿐 아니라 염소와 닭도 길러 인민군군인들에게 보내주었다.

지금 최금산로인이 살고있는 곳과 이웃한 마을에서 살고있는 김규연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린 같은 마을에서 살았수다. 그의 집에서 퍼그나 떨어진 산골짜기에 돌서덜밭이 있었는데 어느해인가 온 집안이 달라붙어 그걸 일구어서 강냉이, 콩, 감자, 호박을 심었습니다. 그것으로 사료보장을 하였지요. 마을에서는 그 집을 〈500kg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도 그 마을에는 〈500kg집〉에 대하여 추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수다.》

그후 직무변동으로 최금산로인과 헤여졌던 김규연로인은 오랜 세월이 흘러 그가 일하는 사업소에 책임일군으로 임명되여왔다. 그때에도 그는 운전사라는 변함없는 직업과 더불어 나라를 위한 여러가지 좋은 일을 계속 찾아하고있었다.

김규연로인은 말을 이었다.

《솔직히 좋은 일도 한두번이지 그렇게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수십년을 한본새로 산다는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에게는 지원증서도 한장 없습니다.》

한생토록 많은 일을 하였는데 훈장이나 증서가 하나도 없는것이 아쉽지 않은가고 하는 그의 물음에 최금산로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한 일이자 우리자신을 위한 일인데 대가를 바라겠습니까. 내 량심에 만족하면 그만이지요.》

결국 그의 애국헌신의 수십년을 추억할수 있는것은 《500kg집》, 그 한마디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김규연로인은 그 정신세계에 반하여 지금도 최금산로인과 둘도 없는 벗으로 가깝게 지내고있다고 하는것이였다.

김규연로인도 뜨거움에 젖어 추억한것처럼 그렇듯 나라를 위하여 많은 일을 찾아한 최금산로인, 그러나 늘 한 일이 적다고, 나라앞에 빚을 지고있다고 생각한 그였기에 년로보장을 받은 다음에도 또다시 황량하던 골짜기에 과수원을 조성하였던것이다.

최금산로인의 한생은 이렇게 흘러왔다. 열다섯살에 조국보위성전에 나섰던 그때로부터 87살이 된 지금까지 그의 한생은 줄곧 조국과 인민을 위한 헌신으로 이어졌다.

순간의 공백도 없이 참된 애국과 헌신으로 이어진 생 그리고 그 한구간한구간이 남들의 두배, 세배맞잡이였던 전시공로자의 참된 삶에 수많은 사람들이 진심어린 경의를 드리고있다.

주체111(2022)년 8월 17일 《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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