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에 없는 군사적기적이 창조된 조국해방전쟁
청소한 우리 공화국이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미제와 그 추종세력을 때려부시고 우리의 령토와 자주권을 피로써 사수해낸 때로부터 어언 69년이 흘렀다.
《력량상 대비가 안되는 이 전쟁에서 우리 군대와 인민은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발휘하여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미제침략자들을 타승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영예롭게 수호하였으며 세계전쟁사에 일찌기 있어본적이 없는 기적을 창조하였습니다.》
우리 인민군대에 의하여 미제가 당한 처참한 패배에 대해 미국의 한 잡지는 《미군의 손실은 아메리카인이 다섯번의 대전쟁 즉 독립전쟁, 1812년전쟁, 메히꼬전쟁, 미국-에스빠냐전쟁 및 필리핀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다 합친것보다 2배이상 더 많다.》라고 전하였다.
세계전쟁사에는 창건된지 2년 밖에 되지 않는 청소한 조선인민군과 100여년의 침략력사를 가진 포악한 제국주의 괴수, 2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비대해진 미제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조국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세계전쟁사에 없는 군사적기적들은
전쟁은 적대되는 무장력의 조직적인 충돌로서 무장력은 사람과 무기로 이루어진다. 부르죠아군사리론가들은 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고 보는데로부터 군사기술적우세를 내세우는 방향에서 군사리론을 전개하며 전술을 세운다. 이것은 본질에 있어서 무기만능론이다. 무기만능론은 무기가 우수하면 싸움에서 이기고 무기가 좋지 못하면 싸움에서 패한다는 리론이다. 부르죠아군사리론가들이 떠들고있는 《함대중심론》이나 《항공우위론》, 《땅크중심론》은 다 무기만능론의 변종이다.
전쟁개시 3일만에 적의 침공을 저지시키고 즉시적인 반공격으로 적의 아성인 서울을 해방한 군사작전은 세계전쟁사에 없는 특출한 기적이였다.
즉시적인 반공격에 나선 인민군용사들
지난 전쟁들에서의 경험을 보면 적방어의 가장 약한 고리에 타격력량을 집중하여 승리를 이룩하는것이 어길수 없는 공식으로 되여있었다. 이것은 공격의 전과를 올릴수 있는 일반적군사원칙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적의 아성인 서울을 전쟁개시 3일만에 해방한 이 승리는 우리
서울을 해방한 인민군땅크병들을 환영
주문진해전에서 승리를 이룩한 1950년 7월 2일은 세계해전사에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군사적기적의 날로 기록되여있다.
서울해방작전을 승리에로 이끄신
적함선집단의 무력은 1만 7 300t급 중순양함 1척, 1만 4 000t급 경순양함 1척, 3 500t급 구축함 1척, 함선승무원 3 500여명, 무장장비는 203mm대구경포를 비롯하여 각종 포 170여문에다 여러개의 어뢰발사장치로 되여있었다.
《바다우에 떠다니는 섬》이라고 불리우는 중순양함 《볼티모》호는 길이 205m, 무게 1만 7 300t, 병력수는 1 700여명, 각종 함포 69문에 비행기까지 탑재하고있었다. 당시 이런 중순양함 1척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으로는 무려 1만 3 000척의 어뢰정을 만들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인민군대의 어뢰정은 길이 21m, 무게 17t 어뢰 2발, 12.7mm고사기관총 1정, 전투인원은 7명이 전부였다.
중순양함 《볼티모》호를 격침시킨 인민군대의 어뢰정
병력수나 배수량, 무장장비에 있어서 도저히 대비할수 없는 적아간의 대결에서 우리의 인민군해병들은 단 4척의 어뢰정으로 미제의 중순양함 《볼티모》호를 격침시키는 세계해전사에 일찌기 있어본적 없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뿐이 아니다.
적비행기사냥에 떨쳐나선 녀성고사기관총수들
갱도전법, 땅크사냥군조운동, 저격수조활동, 기동고사포병중대활동, 직사포조활동 등
세계전쟁사에 없는 군사적기적들은
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은 전선과 후방이 따로 없이 천만이 하나로 뭉쳐 결사적으로 싸운 전인민적항전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화선공개당총회에서 1211고지를 사수할것을 결의다지는 전투원들
리수복영웅은 18살의 꽃나이에 불뿜는 적의 화구를 몸으로 막고 대오의 진격로를 열어놓았으며 조군실영웅은 두팔과 두다리가 부상당하자 턱으로 중기관총의 압철을 눌러 적들을 쓸어눕히고 조국의 고지를 영예롭게 사수하였다. 우리의 애젊은 민청원들만아니라 수많은 유명, 무명의 영웅전사들이 한치의 땅을 사수하는데 자기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다.
조선인민군 1개의 포병중대와 단 4문의 포, 1개의 보병중대뿐인 월미도에 미제는 5만여명의 대병력과 수백척의 함선, 약 1 000대의 비행기를 투입하였다. 군사전문가들은 미제가 계획한 인천상륙작전은 엄청난 력량상차이로 군사기술력의 대비가 1:2 000으로 전혀 대비도 되지 않는 격전이였다고 평하였다.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전쟁들에서 《군사가》로 명성떨쳤다고 자처하던 미제의 5성장군 맥아더와 23살의 애젊은 조선인민군 해안포병중대장과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월미도의 해안포병들
단 4문의 해안포로 이렇듯 방대한 무력과 맞선 월미도용사들은 무비의 희생성과 대중적영웅주의를 발휘하여 전투에서 구축함 3척을 포함한 각종 함선 13척을 격침격파하고 적들의 인천상륙을 3일간 지연시킴으로써
1950년대 조선전쟁에서 미제와 그 추종세력들의 군사작전에 참여했던 뽀르뚜갈 전 대통령 고메스는 자기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터놓았다.
《당시 미국이 만든 조선전쟁의 모든 작전계획들은 미국과 그 편에 선 서방나라의 국가수뇌들과 참모장들, 수많은
미국의 《이름있는
전쟁에서 패망한 미제
정전협정문건에 수표하는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실로 조국해방전쟁의 빛나는 승리는
오늘 우리 혁명의 진두에는
우리 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