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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이야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서로 돕고 이끌며 단합된 힘으로 전진하는 우리 사회의 본태와 대풍모를 적극 살려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요람이고 행복의 보금자리인 내 조국을 사회주의 우리 집이라고 부르고있다.

사회주의 우리 집! 비록 말은 짧아도 정다운 그 부름에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를 온 나라 대가정의 어버이로 높이 모시고 그 어떤 시련과 난관속에서도 모두가 고락을 함께 하며 희열과 랑만, 생기와 활력에 넘쳐 생활하는 인간사랑의 화원의 참모습이 비껴있다.

하기에 우리는 사회주의 우리 집에서 날에날마다 꽃펴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여기에 전한다.

 

두개의 저금통장

얼마전 우리가 화목하고 단합된 집단으로 알려진 평양지하상점을 찾았을 때였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어느한 사무실에 들어서니 일군들이 두개의 저금통장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알고보니 그들이 그토록 관심하는 그 저금통장들에는 깊은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6년전 어느날이였다고 한다. 그날 초급당비서 박근숙동무는 아직 애티를 채 벗지 못한 두명의 청년을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일군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이들은 학원을 갓 졸업한 청년들이라고 소개하면서 우리가 이들의 부모가 되여주자고, 그렇게 하는것이 우리 원아들을 그처럼 아끼고 사랑하시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뜻을 받드는 길이 아니겠는가고 절절히 이야기하였다.

그때부터 그 청년들은 상점의 일군, 종업원들과 한식솔이 되였다. 일군들과 종업원들은 그들이 마음편히 생활할수 있도록 보금자리도 꾸려주고 계절별로 옷과 신발도 마련해주었으며 친부모의 심정으로 보약재까지 구해주며 뜨거운 정과 사랑을 부어주었다.

그 나날 그들은 키도 마음도 몰라보게 성장하였으며 그처럼 열렬히 희망했던 조선인민군입대의 꿈을 이루게 되였다.

초소로 떠나는 그들을 바래워주고 돌아온 날 저녁 박근숙동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런 생각이 떠날줄 몰랐다.

(초소에 세운것만으로는 어머니구실을 다했다고 말할수 없다. 이제 제대되여오면 가정도 이루어야 할텐데 그들의 먼 장래까지 책임지는것이 바로 친부모가 아니겠는가.)

그는 다음날 저금소로 향하였다. 그리고는 그들을 위해 새 저금통장들을 만들어 첫 저금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얼마후부터 그 저금통장은 상점일군들과 종업원모두의 관심사가 되였다. 저저마다 부모된 심정에서 저금을 하기 시작했던것이다.

사연깊은 두개의 저금통장에 대한 이야기,

정녕 그것은 내 조국이야말로 부모잃은 사람은 있을수 있어도 불행한 사람이란 있을수 없는 하나의 화목한 대가정임을 다시한번 가슴치게 새겨보게 하는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본사기자 강금성

 

50여년을 하루와 같이

락원기계종합기업소의 로동계급과 그 가족들이 1년 365일을 하루와 같이 매일 아침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남신의주체신소 락원체신분소 공훈우편통신원 최영희동무이다. 그의 나이는 73살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단발머리처녀시절부터 오늘까지 우편통신원의 길을 이어온지도 어느덧 50여년, 인간의 한생과도 맞먹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걸음새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꿈많고 포부많은 처녀시절에 스스로 우편통신원이 될 결심을 품으며 그는 생각했다.

우리 인민들에게 새 소식, 기쁜 소식을 제일먼저 알려주는 보람은 얼마나 크고 남다른것인가.

더우기 처녀통신원이라고 기특해하고 사랑해주며 가는 곳마다에서 떠받들어주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그는 자기의 직업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비오나 눈오나 바람이 부나 변함없이 이어가야 하는 우편통신원의 길은 결코 헐한 길이 아니였다. 실로 한번 택한 길을 끝까지 멈춤없이 간다는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온 나라가 허리띠를 조이던 고난의 나날 어디라없이 어려움이 겹쳐들던 그때 그의 마음속에도 주저와 동요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이겨냈고 당에서 맡겨준 초소를 굳건히 지켜냈다.

《로동신문》을 남먼저 읽으면서, 당의 목소리를 안고 인민을 찾아 누가 알아주건말건 묵묵히 먼길을 걸으면서 당을 따라 일편단심 한길을 걸을 신념을 벼려온 그에게 있어서 우편통신원은 직업이기 전에 영예이고 행복이였던것이다.

좋은 날보다 어려운 날에 변심없이 새겨온 그의 량심의 자욱자욱을 더없이 소중히 여겨주는 어머니당의 품속에서 그는 공훈우편통신원으로 성장하였다.

만사람의 축하를 받은 그날 그는 이렇게 맹세다지였다.

숨지는 마지막순간까지 락원의 로동계급을 위해 당보를 나르겠다고.

오늘도 그는 그 맹세를 지켜 이른새벽 남먼저 출근길에 오른다.

 

                                                                                                     본사기자 조향선

 

한식솔이 된 사연

두해전 3월 어느날이였다. 밤은 깊어가건만 맹산군 대와리 29인민반에서 사는 김영순동무는 좀처럼 잠을 이룰수 없었다.

눈을 감고있어도 귀전에서는 낮에 만났던 마을사람의 말이 떠날줄 몰랐던것이다. 년로보장을 받고 집에 들어와 자식없이 홀몸으로 산다는 덕천시의 한 녀성, 한생을 누가 보건말건 맡은 혁명초소를 굳건히 지키면서 성실한 로동으로 조국을 받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새겨보느라니 왜서인지 그가 남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늙은이가 여생을 즐겁게 보낼수 있도록 내가 친자식이 되여 돌봐줄순 없을가.)

하지만 쉽게 결심을 내릴수 없었다. 그러는 그에게는 사회와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미풍소유자들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던 때가 되새겨졌다. 깊은 감동속에 그려보던 그 미담의 주인공들, 그들도 자기와 같은 이 땅의 평범한 공민들이였다.

그는 그들의 곁에 자기를 세워보았다. 그럴수록 그들처럼 살려는 결심이 굳어지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자기가 꽤 자식구실을 할수 있겠는가 하는 위구심도 생겼다.

얼마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남편인 서영욱동무에게 로인을 집에 데려다 모시려는 자기의 속마음을 내비쳤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편은 《결코 말처럼 쉽지는 않을거요. 허나 우리가 성의를 다한다면 얼마든지 친자식구실을 할수 있을거요.》라고 하며 적극 지지해주었다.

이렇게 되여 그들부부는 그 로인과 한식솔이 되였다.

날과 달이 흐를수록 로인을 위하는 그들의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다. 식사때마다 로인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한가지라도 더 놓기 위해 정성을 다하였고 계절이 바뀔 때면 감기에 걸릴세라 늘 마음썼다.

이런 그들을 볼 때마다 로인은 《친자식이면 이보다 더할가.》라고 하면서 눈굽을 적시였고 스스럼없이 내 아들, 내 딸이라고 정담아 불렀다.

이런 아름다운 인간들이 많아 사회주의 우리 집에는 언제나 따뜻한 정과 사랑만이 흘러넘치고있다.

 

                                                                                                    본사기자 김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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