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은 만난을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으로 빛나는 승리의 력사를 창조한 영웅적투쟁 2)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혁명은 남달리 어려운 길을 걸어왔으며 시련의 고비를 수없이 넘어오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항일혁명전쟁과 조국해방전쟁, 전후복구건설을 비롯하여 우리 혁명앞에는 엄혹한 시련이 수없이 가로놓여있었지만 우리 수령님께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강철의 의지를 지니시고 난관을 맞받아나가시였으며 비범한 령도력으로 혁명과 건설을 끊임없는 앙양에로 이끄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기묘하고 령활한 유격전술과 전법으로 일제침략자들에게 참패만을 안기시고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조하신 기묘하고 령활한 유격전술과 전법은 강한 적을 약자로 만들어 전투에서 주도권을 틀어쥐고 승리할수 있게 하는 위력한 무기였다.
당시 항일무장투쟁앞에는 유격근거지에 대한 일제의 대규모적인 《토벌》로 하여 시련과 난관이 가로놓이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0(1931)년 겨울명월구회의와 이듬해 봄에 열린 소사하회의에서 유격근거지창설방침을 제시하시고 두만강연안일대에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와 반유격구, 유격활동거점으로 이루어진 유격근거지창설사업을 현명하게 이끄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두만강연안의 넓은 지역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됨으로써 조선혁명의 책원지, 반일인민유격대의 군사전략적기지, 후방기지가 마련되고 주체적혁명력량이 강화되였으며 인민의 새세상이 펼쳐지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일제의 한 출판물은 다음과 같이 썼다.
《…흥미의 초점으로 되는것은… 저 산간의 자연요새를 리용하여… 완전한 <…왕국>(주―유격구역을 말함.)을 세우고있는 사실이다. 왕국에는 정부가 있다. …왕국내의 인민은… 토지를 정부로부터 분여받아 지정된 논과 밭을 경작하며… 로동에 종사…한다. 또한 왕국은 일정한 지역을 차지하고있다. …그들은 그들이 정한 경계선의 요소요소에 감시소를 설치하고…엄중하게 경비하고있다. …
이상과 같이 이 간도지방의 유격구역은 토지, 인민, 주권의 세가지를 완전히 갖추고있으며 이것을 운영하여… 단일국가를 형성하고있다.》(《동양》 1934년 2월호, 동양협회, 92~93페지)
두만강연안에 창설된 유격구를 《동양평화의 암》으로 간주한 일제는 그것을 요람기에 압살해버리려고 대규모적인 《토벌》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1933년 2월중순 왕청현 요영구유격구에 대한 《토벌》작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으나 4월 중순에는 포와 비행기의 엄호밑에 1500여명의 대병력으로 조선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소왕청유격구를 포위하고 집요한 공격을 해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미 유격구방위를 위한 전략전술적대책에 따라 견고한 방어진지에 의거하여 령활한 유인매복전과 습격전으로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고 놈들에게 섬멸적타격을 가하시였다. 유격대와 유격구인민들은 무비의 희생성과 용감성, 대중적영웅주의를 발휘하여 영웅적으로 싸움으로써 우세한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소왕청유격구를 사수하였다.
유격구《토벌》에서 또다시 된타격을 받은 일제는 이번에는 방대한 병력으로 유격구들을 《최종소탕》하기 위한 대규모적인 동기《토벌》공세를 감행하였다. 이로 하여 왕청, 연길, 화룡, 훈춘일대의 유격구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성된 군사정치정세에 대처하여 주체22(1933)년 10월 십리평회의에서 모든 유격구들에서 일제의 대규모《토벌》을 격파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시였으며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마촌작전)를 조직지휘하시였다.
일제는 소왕청유격구에 공세의 예봉을 돌리고 이 일대에 5 000여명의 정예병력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였다. 그때 유격구에는 2개 중대 유격대병력밖에 없었다. 이것은 력량상 군사학적으로 대비할수 없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량상 엄청나게 우세한 적의 공격에 대처하여 유격대와 함께 소왕청관내의 전체 인민을 전민항전에로 불러일으키시였으며 기묘하고 령활한 유격전술과 전법을 활용하면서 적을 무자비하게 타격소멸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면적인 방어전을 펴고 집중사격과 작탄세례, 돌세례로 파도식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소멸하도록 하시였으며 적의 대병력이 련속 투입되자 유인기만전술을 위주로 하는 신축자재한 기동과 적극적인 방어활동에 의한 소모전에로 이행하여 유격구역의 종심깊이에로 적을 유인하면서 매복전, 저격전, 숙영지습격전, 불무지작탄전 등 천변만화의 전법으로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고 섬멸적타격을 가하게 하시였다.
적들은 거듭 참패를 당하면서도 수적, 기술적우세를 믿고 계속 병력을 증강하면서 소왕청유격구역을 기어이 압살하려고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정황에서 적들과 계속 정면으로만 맞서싸우면 엄중한 후과를 가져올수 있다고 보시고 유격구와 인민을 보위하는 유격구방어전과 함께 적들의 종심에 들어가 적의 배후를 타격하여 전투국면을 전환시킬 대담한 작전을 펼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적의 배후를 타격할데 대한 작전은 적의 공격기도를 결정적으로 좌절시키고 군사행동의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쥘수 있게 하는 가장 현명한 전술적방침이였다.
그러나 종파사대주의자들과 군사모험주의자들은 조성된 정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도 없이 무턱대고 적과의 정면대결을 고집하면서 《적이 쳐들어올 때 군대가 유격구밖으로 나간다는게 말이 되는가, 그것은 인민들이야 어떻게 되든 군대만 살고보자는 사상이다.》고 터무니없는 까박을 붙이는가 하면 적배후교란전은 비맑스주의적인것이라고, 현실도피적이고 투항주의적인것이라고 하면서 반대해나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종파사대주의자들과 군사모험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장과 책동을 분쇄하시고 주체23(1934)년 2월중순 몸소 소왕청유격구역을 방어하던 유격대의 한개 편대를 친솔하시고 적후방으로 진출하시여 량수천자의 일제경찰 및 위만군, 자위단을 습격소탕하신데 이어 신남구, 북봉오동, 사동 동골의 적들을 련속타격하시였으며 적들의 《토벌》거점의 하나인 대두천에 대한 습격전투를 진행하시였다.
이에 당황한 적들은 유격구역을 조이고있던 포위망을 풀고 본래의 소굴로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하고 세련된 령군술에 의하여 90여일간에 달한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마촌작전)는 유격대와 인민들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의 승리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조하신 난관을 맞받아나가는 공격정신과 그에 기초한 변화무쌍한 유격전술과 전법의 빛나는 승리였으며 각 현의 유격구들에 가해진 위기를 해소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하고 세련된 령군술과 기묘하고 령활한 유격전술과 전법에 의하여 유격구방위를 위한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이룩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앞에 가로놓인 시련과 난관은 타개되게 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은 승리적으로 전진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단행한 몽강현 남패자로부터 장백현 북대정자에로의 100여일에 걸친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기묘하고 령활한 유격전술과 전법으로 당시 항일무장투쟁앞에 가로놓인 시련과 난관을 맞받아 뚫고나가 타개하시여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시였다.
고난의 행군은 행군기간으로 보나 그 간고성으로 보나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있었던 종래의 여러 차례의 행군과는 대비도 할수 없는 모진 시련과 난관으로 일관된 행군이였다.
고난의 행군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도보로 대엿새면 가닿을수 있는 거리를 100여일동안 쉬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하루에도 몇차례씩 적들과 전투를 하며 모진 고난을 헤쳐나간 행군이였다.
고난의 행군을 단행하게 된 동기는 1938년말~1939년초 우리 혁명앞에 매우 어렵고 복잡한 난국이 조성된것과 관련되였다.
이 시기 혁명앞에 조성된 하나의 난국은 조선혁명을 압살해버리기 위한 일제의 반혁명적공세가 그 어느때보다 강화된것이였다.
중일전쟁을 도발한지 불과 1년사이에 중국의 넓은 지대를 강점한 일제는 기고만장하여 1938년 11월에 《동아신질서》수립을 떠들면서 《후방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대규모적인 《토벌》과 애국적인민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만행을 더욱 악착스럽게 감행하였다. 한편 조선인민혁명군을 내부로부터 와해하려고 혁명의 변절자들로 《귀순공작반》이니, 《선무반》이니 하는따위의 반혁명기구를 조작하고 와해책동을 악랄하게 벌리였다. 그리고 《혜산사건》이라는것을 조작하여 백두산서남부와 압록강연안의 국내에서 대검거선풍을 일으켜 조국광복회를 비롯한 혁명조직들을 파괴하고 수많은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을 체포, 구금, 학살하였다.
이 시기 혁명앞에 조성된 다른 하나의 난국은 국제당에 있던 일부 사람들의 좌경모험주의책동으로 하여 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있던 동북항일련군안의 일부 부대들이 열하원정을 단행하는 과정에 커다란 피해를 입은것이였다.
조성된 난국을 어떻게 타개하는가 하는것은 실로 항일무장투쟁, 우리 혁명의 운명과 관련되는 사활적이고 절박한 문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주체27(1938)년 11월 남패자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시였다.
남패자회의는 완전히 적들에게 로출된 위험한 정황속에서 10여일간 진행되였다.
적들은 남패자수림지대에 1만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들이밀어 포위진을 형성하였고 심지어 혁명의 변절자들인 박차석, 리종락에게 《귀순공작》임무를 주어 밀영에까지 들여보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자들을 역리용하여 여유작작하게 회의를 계속하시였으며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고 혁명을 계속 전진시키자》라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설에서 조선혁명앞에 조성된 난국에 대하여 분석하신 다음 이 난국을 타개하고 조선혁명을 계속 앙양에로 이끌기 위하여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시급히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일대에로 진출할데 대한 전략전술적방침을 제시하시였다.
그리하여 당시 엄중한 난국을 타개하고 조선혁명의 주체성을 더욱 강화할수 있는 앞길이 환히 열려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후 맞받아나가는 공격정신에 기초하여 기묘하고 령활한 전술과 전법으로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고난의 행군을 현명하게 이끄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난의 행군 전 과정에 병력의 령활한 집중과 분산, 능숙한 이동을 배합하는 전술과 전법으로 항상 주도권을 견지하시고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압록강연안에로의 행군을 시작한 고난의 행군 제1단계에서는 대부대의 집단행동을 하면서 추격하는 적을 물리치도록 하시였으며 장백현 7도구치기에서부터 시작된 제2단계에서는 변화된 정황에 대처하여 분산행동에로 넘어가도록 하시여 적들에게 일대 혼란을 주고 놈들을 분산약화시켜 타격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성된 정황을 예리하게 판단하시고 밀림지대에 적들이 집중될 때에는 적들의 주의가 덜 미치고있는 야산지대에로, 적이 야산지대에 집중될 때에는 밀림지대에로 빠지는 등 군사활동을 능숙하게 조직지휘하시여 적들로 하여금 피동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하시였다. 이와 함께 적들이 숙영할 때에는 놈들의 숙영지에 대한 야간습격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시고 소부대를 파견하여 적의 배후를 습격하도록 하시여 적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타격을 가하도록 하시였다. 또한 조선인민혁명군이 숙영하고있을 때 적이 포위공격하거나 행군과정에 앞뒤로 달려들 때에는 기묘하게 살짝 빠져나가 자취를 감춤으로써 적들끼리 싸움을 벌리게 하는 등 신출귀몰의 유격전법을 활용하여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결속할수 있게 하시였다.
참으로 고난의 행군의 승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주체적인 유격전술과 전법, 탁월한 령군술의 빛나는 승리였다.
고난의 행군의 승리로 하여 당시 조선혁명앞에 조성된 난국은 타개되였으나 1939년 가을에 이르러 항일무장투쟁앞에는 또다시 엄혹한 시련이 닥쳐왔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적극적인 군사정치활동에 극도로 당황한 일제는 관동군사령관직속으로 길림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의 간판밑에 20여만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밀영들을 봉쇄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최종적으로 소멸하며 혁명조직들을 전면적으로 파괴하기 위한 미증유의 《대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에서 공격의 주되는 화살을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와 주력부대에 돌리며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의 뒤를 계속 따라다니는 《장거리추격》전술을 집요하게 감행하게 하였다.
적들의 기도를 천리혜안의 예지와 과학적통찰력으로 꿰뚫어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에 대처하여 유격전의 요구가 구현된 새로운 작전과 전술로 격파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8(1939)년 10월상순 안도현 량강구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시고 적의 대규모적인 《토벌》공세를 격파하기 위하여 백두산동북부일대의 광활한 지역에서 대부대선회작전을 전개할데 대한 새로운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대부대선회작전은 주로 밀영을 중심으로 군사정치활동을 전개하던 종래의 작전과는 달리 대부대로 광활한 지역을 부단히 선회하면서 적들을 족치는 작전이였다. 다시말하여 대부대선회작전은 광활한 지역을 부단히 류동하면서 일행천리전술, 유인기만전술과 같은 여러가지 전법으로 적들을 불의에 족치기도 하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기도 하면서 적들을 소멸약화시키는 작전이였다.
이 새로운 방침은 적들의 전례없는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주동적으로 격파하고 항일무장투쟁과정에 달성한 성과를 공고히 하고 그것을 백두산동북부의 광활한 지역에 확대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을 계속 줄기차게 발전시켜나갈수 있게 하는 적극적인 방침이였다.
이 새로운 방침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주도권을 계속 틀어쥐고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비할바없이 우세한 적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타격소멸할수 있게 하는 령활한 방침이였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의 력량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적들의 《토벌》작전을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으로 격파하고 항일무장투쟁을 끊임없이 확대발전시켜나갈수 있게 하는 가장 적극적이며 주동적인 방침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묘한 군사적지략과 령활한 전법으로 대부대선회작전을 승리에로 조직령도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부대선회작전의 첫 단계로서 돈화원정을 단행하시였다.
돈화원정의 목적은 화라즈에서 돈화로 빠져나갔다가 몽강, 무송쪽으로 진출함으로써 대부대이동로정을 위장하는 동시에 적들을 될수록 이리저리 끌고다니면서 최대한 맥을 빼놓아 춥고 지쳐서 꼼짝할수 없게 하자는데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부대이동로정을 위장하기 위하여 부대의 이동방향을 급속히 변화시키는 전술로써 적들을 화룡, 안도일대의 산골짜기에 몰아넣고 수백리를 강행군하여 돈화오지에 이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돈화원정과정에 사도황구부근의 숙영지에서 반일청년동맹회의를 소집하시여 전투를 앞두고 모든 지휘관들과 대원들을 각성시키기 위한 사상동원사업을 진행하신 후 주체28(1939)년 12월 17일과 24일 륙과성전투와 쟈신즈전투를 조직지휘하시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고 대부대선회작전의 첫 단계를 빛나게 장식하시였다. 이 전투들을 계기로 200여명의 로동자들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다. 로동계급출신의 청년들이 이처럼 단꺼번에 혁명군에 입대한것은 항일유격대의 건군력사에 커다란 경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의 병력을 돈화오지로 유인하신 후 은밀히 남쪽으로 부대를 이동시켜 송화강류역의 무송현 백석탄밀영에서 40여일간의 군정학습을 조직하시여 신대원들을 정치군사적으로 준비시키신 다음 대부대선회작전의 제2단계로 넘어가 군사정치활동을 적극 벌리시였다.
작전 제2단계의 로정은 백석탄으로부터 백두산동북부의 무인지경인 이도백하, 삼도백하, 사도백하를 지나 국내에 진출했다가 화룡현을 거쳐 안도현으로 돌아가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9(1940)년 2월 부대를 이끄시고 백석탄을 떠나 두만강연안의 국경일대에 진출하신 후 새로운 정황이 조성되자 3월 11일 적《토벌》거점의 하나인 대마록구목재소습격전투를 조직하시였다.
적들은 멀리 북쪽에 있는줄 알았던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불쑥 화룡, 안도현경의 국경가까이에 나타나 대마록구를 들이치자 기절초풍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 《토벌》에 총력을 집중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3월 25일 홍기하골짜기에서 기묘한 유인매복전으로 《상승부대》, 《토벌의 왕자》로 자처하면서 조선인민혁명군《토벌》에 앞장섰던 악질적인 《마에다토벌대》를 전멸시키시였다.
홍기하전투를 계기로 하여 대부대선회작전은 조선인민혁명군의 빛나는 승리로 결속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앞에 가로놓인 시련과 난관은 타개되게 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에서 참패를 거듭한 일제는 패배를 만회하여 체면을 유지해보려고 《동남부치안숙정토벌공작》기간을 연장하고 전례없는 대규모적《토벌》공세를 또다시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인민혁명군앞에는 련이어 시련과 난관이 가로놓이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9(1940)년 4월초 안도현 화라즈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시고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적극적인 분산활동으로 이행할데 대한 새로운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이 방침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주도권을 계속 틀어쥐고 도처에서 성시와 집단부락들을 습격함으로써 적들을 분산시켜 각개격파할수 있게 하는 령활하고 적극적인 방침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화라즈회의후 4월중순부터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의 분산활동을 령활하게 조직지휘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9(1940)년 4월중순 동시타격전으로 소사하류역의 동남차와 양초구집단부락의 적들을 습격소탕하시였으며 안도현성의 동쪽에 있는 남2도구, 북2도구, 신성툰에 대한 동시타격전을 벌리신 다음 8련대를 두만강연안으로, 7련대와 경위중대를 안도현북부로 파견하시여 매일같이 적을 타격하게 하시였다. 6월에는 반복타격전으로 이미 타격하였던 동경평과 상대동부락을 다시 타격하시였으며 그후에도 몇개 부락에 대한 동시타격전을 벌려 수많은 적들을 소멸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처럼 대부대선회작전에 이어 4개월간에 걸치는 소부대에 의한 분산활동으로 일제의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주고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시였다.
항일무장투쟁력사에는 이밖에도 1930년대중엽 일제의 식민지파쑈통치와 《내선일체》, 《동조동근》을 더욱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우리 인민의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한 책동으로 조성된 난국, 조선인민혁명군이 다 녹아났다는 일제의 악의에 찬 기만선전으로 하여 1939년중순 국내에 조성된 난국을 비롯하여 헤아릴수 없는 난국이 끊임없이 겹쌓였으며 그 하나하나가 조선혁명의 운명을 구원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난국중의 난국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필승의 신념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무비의 담력과 배짱, 래일에 대한 확신을 지니시고 변화무쌍하고 령활한 유격전술과 전법으로 맞받아나가 이 난국들을 타개하시면서 승리의 길을 열어나가시였으며 마침내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시였다.
참으로 항일무장투쟁은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세계전쟁사상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전무후무한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으로 빛나는 승리의 력사를 창조한 영웅적투쟁이였다.
만난을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으로 빛나는 승리의 력사를 창조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멸의 업적은 우리 혁명의 만년재보로서 세기와 더불어 길이길이 빛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