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등록 |  학생가입 
첫페지로 손전화홈페지열람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농업협동화를 빛나게 실현하신 력사적공적 1)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혁명의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 나섰던 농업협동화가 승리적으로 완성된 때로부터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도시와 농촌에서 낡은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것은 사회주의혁명의 기본과업이였다.

낡은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데서 농촌경리를 협동화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개인농민경리를 사회주의적집단경리로 개조하는것은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를 종국적으로 없애는 가장 어렵고 복잡한 사회적변혁이였다. 특히 이러한 변혁은 공업화의 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못한 식민지, 반식민지나라들의 경우에 있어서 더욱더 어려운 과업으로 제기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우리 당은 농업협동화를 우리 식으로 짧은 기간에 빛나게 실현하는 력사적공적을 이룩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 농업협동화의 완성은 우리 당이 내놓은 농업협동화방침의 빛나는 승리였으며 우리 나라 농촌에서 일어난 위대한 변혁이였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농업협동화를 빛나게 실현하신 력사적공적에서 중요한것은 무엇보다먼저 기술적개조에 앞서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독창적인 길을 밝혀주신것이다.

해방후 실시된 토지개혁은 농민들을 지주의 착취와 압박으로부터 해방하는 거대한 사회경제적변혁이였으나 그것은 농촌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농민경리를 그대로 두고서는 착취와 빈궁의 근원을 완전히 없앨수 없었으며 농민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개선할수 없었다.

농촌에서 온갖 착취적요소를 완전히 청산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면 개인농민경리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여야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농촌경리의 사회주의적개조는 전후시기에 농촌경리의 주인인 농민들자신의 생활상요구로 나서고있었다.

3년간의 가렬한 전쟁과정에 농촌경리의 물질기술적토대는 혹심하게 파괴되고 농민의 거의 40%가 령세농민의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농촌에는 부림소나 농기구가 얼마 없었고 로력도 매우 부족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개인농민경리를 그대로 두고서는 농업생산력을 빨리 발전시킬수 없었고 전후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나섰던 식량문제도, 농민생활문제도 풀수 없었다. 개인농민경리가 그대로 존재하는 조건에서는 계획적으로 급속히 발전하는 공업에 농업을 따라세울수 없었으며 결국 전반적인민경제를 성과적으로 발전시켜나갈수 없었다.

전후 우리 나라에는 농업협동화를 맡아할 혁명력량도 충분히 마련되여있었다. 우리 농민들은 해방후 새 생활을 창조하기 위한 투쟁에서 특히는 가렬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정치사상적으로 각성되고 혁명적으로 단련되였으며 농기계임경소를 리용하고 품앗이반, 소겨리반과 부업협동조합을 조직운영하는 과정에 집단경리의 우월성을 인식하게 되였다. 반면에 부농을 비롯한 농업협동화를 반대하는 세력은 매우 약화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42(1953)년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전원회의를 비롯한 여러 회의들에서 농촌경리의 기술적개조에 앞서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할데 대한 농업협동화방침을 제시하시였다.

농촌경리의 기술적개조에 앞서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것은 농업협동화에 대한 기존공식에 구애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길이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사람들은 공업화를 실현한 기초우에서 농업협동화를 추진시킨 경험만을 알고있었으며 이것은 농업협동화에서 어길수 없는 하나의 법칙으로 되여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어떤 기존공식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에 구애됨이 없이 우리 나라의 구체적현실로부터 출발하시여 생산력과 기술의 발전수준이 비교적 낮고 공업화가 실현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혁명력량이 준비되고 사회발전의 요구가 성숙된데 따라 농촌경리의 기술적개조에 앞서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진리를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산력과 기술의 발전수준은 비교적 낮다 하더라도 현실이 농촌경리의 사회주의적개조를 절실히 요구하고 또 그것을 담당하여 수행할수 있는 력량이 있을 때에는 농촌경리의 기술적개조에 앞서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농촌경리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데서 나서는 근본문제는 농촌경리의 기술적개조와 경리형태개조의 호상관계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것이다.

농촌경리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데서 기술개조문제가 농촌경리를 협동화할수 있는 물질기술적토대를 축성하는 문제, 농업생산력의 발전수준을 보장하는 문제라면 경리형태의 개조문제는 농촌경리분야에서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문제, 개인농민경리를 집단경리로 개조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경리형태의 개조가 실천적으로 농촌경리를 협동화하는 문제라면 기술개조문제는 어디까지나 농촌경리를 협동화하기 위한 객관적, 물질적조건으로, 전제로 되는 문제이다.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데서 현대적기술의 도입이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것은 사실이지만 경리형태의 개조가 기술발전수준에 의하여 좌우되거나 결정되는것은 아니다.

농촌에서 경리형태를 개조하는 주체는 현대적기술수단이 아니라 농민대중이다.

생산력과 기술의 발전수준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농민들이 생산관계의 개조를 요구하지 않고 그것을 감당할만한 혁명력량이 준비되여있지 않으면 낡은 생산관계를 새로운 사회주의적생산관계로 바꿀수 없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농업협동화를 실현하는데서 결정적조건은 농촌경리가 현대적기술로 장비되여있는가 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농업협동화가 농민들자신의 생활적요구로 나서고있는가, 그것을 맡아할만한 혁명력량이 준비되여있는가 하는데 있다고 교시하시였다.

대중의 생활적요구와 주체적인 혁명력량이 생산관계의 변혁, 사회발전전반에서 결정적요인으로 된다는 명제는 사회적변혁에 관한 리론발전에서 력사적전변을 일으키게 한 위대한 수령님의 위대한 발견이였다.

전후시기에 농촌경리의 직접적담당자인 농민들자신이 농업협동화를 절박한 생활적요구로 내세우고있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혹심한 피해를 입은 농민들은 전후에 이렇게나 저렇게나 부림소와 농기구 등 생산수단을 합치고 로력을 서로 협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농사를 지울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자신이 협동화를 절박하게 요구하였다.

전후시기에 농업협동화를 맡아할만한 혁명력량도 준비되여있었다.

3년간의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은 농촌경리를 참혹하게 파괴하였지만 그대신 미제침략자들을 물리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 나라 농민들은 계급적으로 각성되고 혁명적으로 단련되였다.

전쟁의 시련속에서 우리 나라 농민들은 우리 당의 정책과 인민정권의 모든 시책의 정당성을 생활적으로 깊이 느끼였고 조선로동당과 공화국정부가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것을 더욱더 실질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그 어느때보다 철석같이 더 튼튼히 뭉쳤다.

이것은 그때까지 개인농민경리에 기초하여 살아오던 농민들이 협동경리를 받아들일수 있는 전제로 되였다.

다시말하여 협동화를 지지하고 그것을 맡아 수행할만한 혁명력량이 충분히 준비되여있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렇듯 농촌경리의 기술적개조에 앞서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할데 대한 방침은 기술개조와 경리형태개조와의 호상관계, 농업협동화의 실현조건에 대한 새롭고도 과학적인 해명에 기초한 혁명적이며 독창적인 방침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농업협동화운동을 벌리는데서 반드시 지켜야 할 지도적원칙들을 명확히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원성의 원칙을 중요하게 내세우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2(1953)년 12월 16일 농업생산합작사, 전선공동작업대 일군협의회에서 하신 연설 《농업협동조합을 조직운영하는데서 나서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를 비롯한 여러 로작들에서 농업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운영하는데서 자원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도록 할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농업협동화는 낡은 생산관계를 새로운 사회주의적생산관계로 개조하는 심각한 변혁인것만큼 그 담당자인 농민대중이 자원적으로 참가하여야만 성과적으로 실현될수 있었으며 협동화된 다음에도 그 경리가 공고한것으로 될수 있었다.

그러나 자원성의 원칙을 지킨다는것은 농업협동화운동을 자연발생성에 내맡긴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은 아니였다. 

협동화가 좋다고 해서 모집식으로 조직하거나 농민들을 강제적방법으로 협동조합에 끌어들인다면 그들의 정치적열성을 마비시키게 되며 로농동맹을 약화시키고 농민대중을 혁명의 편에 튼튼히 묶어세울수 없다.

우리 나라의 실천적경험은 농민들속에서 사상교양사업을 강화하고 농민들의 정치적각성을 높이며 실물교육을 통하여 협동경리의 우월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원적으로 나서게 할 때 협동화의 근본목적을 달성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 농촌의 복잡한 계급관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한데 기초하시여 가장 정확한 계급정책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3(1954)년 12월 27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하신 연설을 비롯한 여러 로작들에서 농민들을 협동경리에 받아들이는데서 우리 당이 견지하고있는 계급정책을 옳게 인식하고 그것을 농업협동화운동에 철저히 구현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우리 당의 계급정책을 밝혀주시였다.

농업협동화운동에서 우리 당의 계급정책은 빈농에 튼튼히 의거하여 중농과 동맹하면서 부농을 제한하며 개조하는것이였다.

전후시기 농민의 각이한 계층들이 협동화운동을 대하는 태도는 서로 달랐다.

빈농은 정치적각성이 매우 높았으며 자기의 경제적처지로부터 협동화를 절실히 요구하고 우리 당의 농업협동화정책을 적극 지지하였다.

따라서 빈농에 튼튼히 의거하여 그들의 핵심적역할을 높이는것은 농업협동화운동을 건전한 토대우에서 힘있게 밀고나갈수 있게 하는 가장 원칙적인 정책이였다.

한편 중농은 자기의 토지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자기힘으로 농사짓는 소소유자로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갈것인가를 망설이고있었다.

농업협동화에 대한 태도를 보면 토지개혁후에 중농으로 된 사람들은 협동화를 지지하는 립장이였고 원래부터 중농이던 사람들은 동요하고 주저하면서 두고보자는 태도였다.

우리 당은 우리 나라 부농의 특성과 그들이 전쟁시기에 거의 파산되였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부농을 청산하지 않고 제한하며 점차 개조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원래 보잘것없던 우리 나라 부농은 토지개혁당시 그 지주적측면에 타격을 받아 약화된데다가 전시에 경제적토대에 혹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그 수도 농촌주민구성에서 0.6%에 지나지 않았다. 전후시기 우리 나라 부농들에게 남아있는것이란 얼마간의 땅과 남을 착취해먹으려는 사상밖에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3(1954)년 11월 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하신 결론을 비롯한 여러 로작들에서 우리는 로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 근로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며 부농경리를 제한하며 사회주의경제법칙이 농업까지 포괄할수 있도록 농촌을 점차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실로 기술적개조에 앞서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할데 대한 농업협동화의 새로운 길을 밝혀주신것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사회주의혁명리론발전에 쌓아올리신 불멸의 력사적공적으로 된다.

 

박사 부교수 박영철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