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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은 만난을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으로 빛나는 승리의 력사를 창조한 영웅적투쟁 1)

 

혁명의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다. 조선혁명은 류달리 간고하고 복잡하였으며 그 길에는 헤아릴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 앞을 가로막아나섰다. 조선혁명은 그 개척기로부터 장구한 기간 겹쌓이는 시련과 난관을 뚫고나가지 않으면 승리적으로 전진시킬수 없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혁명은 남달리 어려운 길을 걸어왔으며 시련의 고비를 수없이 넘어오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항일혁명전쟁과 조국해방전쟁, 전후복구건설을 비롯하여 우리 혁명앞에는 엄혹한 시련이 수없이 가로놓여있었지만 우리 수령님께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강철의 의지를 지니시고 난관을 맞받아나가시였으며 비범한 령도력으로 혁명과 건설을 끊임없는 앙양에로 이끄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혁명을 이끄시는 전기간 고난과 시련이 앞길을 막아나설 때마다 조금도 동요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으시였으며 필승의 신념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강철의 의지로 그것을 맞받아 뚫고나가시여 역경을 순경으로,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는 기적의 력사, 승리의 력사를 창조하시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국가적후방도, 정규군의 지원도 없이 말그대로 적수공권으로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의 100만대군과 맞서싸운 력사에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항일무장투쟁이였다.

장구한 항일무장투쟁의 나날 어느 하루도 시련과 난관이 앞을 가로막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때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으로 승리를 안아오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의 전기간 철두철미 자주적립장을 확고히 견지하시면서 혁명앞에 가로놓인 시련과 난관을 타개해나가시였다.

자주적립장은 혁명투쟁에서 혁명가들이 지녀야 할 근본립장이다. 자주적립장을 확고히 견지하여야 혁명적원칙을 굽히지 않고 어떠한 난관과 시련도 배심있게 맞받아 뚫고나갈수 있으며 승리할수 있다.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부닥친 난관은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앞두고 조성된 난관이였다. 그것은 공동의 원쑤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련합전선을 형성하여 함께 싸워야 할 중국인반일부대들의 조선공산주의자들과 혁명군중에 대한 무분별한 적대행위였다.

9.18사변직후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고 구동북군에서 떨어져나온 애국적인 군인들과 관리들, 농민들로 이루어진 민족주의군대인 중국인반일부대들은 만주의 산간도시들과 농촌지역을 차지하고있었다. 그들은 반일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자체의 계급적제한성과 정치적락후성으로 하여 일제와의 투쟁에서 불철저하고 동요가 심하였을뿐 아니라 일제의 기만선전과 민족리간책동에 넘어가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일본놈의 앞잡이》, 《중국인민의 재산을 략탈한다.》고 하면서 적대행동을 서슴지 않고 감행하여나섰다. 더우기 그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조선사람 일반에 대하여서도 저들의 비위에 약간만 거슬려도 닥치는대로 학살하군 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방들에 조직된 유격대의 소조들은 일제침략군과 반일부대의 완전한 《포위》속에서 한발자국도 공개적으로 움직일수 없는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였다. 이것은 반일인민유격대창건앞에 조성된 엄중한 난관이 아닐수 없었으며 이 난관을 타개하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은 일제를 반대하는 우리 인민의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중대한 문제였다.

이 중대하고도 사활적인 문제는 조선혁명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시고 모든 문제를 언제나 자주적립장에서 풀어나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빛나게 해결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성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하여 주체21(1932)년 4월 상순 안도현 소사하에서 혁명조직책임자회의를 소집하시고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시였으며 몸소 안도현성에 있는 반일부대 두령인 우사령과 직접 담판하실 단호한 결심을 내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지들이 한결같이 만류하였으나 일신상의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박훈, 진한장, 호지민, 그밖의 중국청년 한명을 데리시고 우사령을 찾아 떠나시였다.

일행은 도중에 《우사령》이라고 쓴 기발을 날리며 행군해오고있던 반일부대와 맞다들게 되였는데 그들은 다짜고짜 일행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준렬히 규탄하시고 우리는 급히 상의할 문제가 있어 당신네 사령한테로 찾아가는 길이니 사령한테로 안내하라고 이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위풍에 위압된 반일부대 병사들은 일행을 저들의 참모장(류본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참모장은 길림육문중학교시절 위대한 수령님의 의 스승이였으며 그 시절에 벌써 수령님의 높은 덕망과 비범한 담력, 뛰여난 인품을 잘 알고있는 사람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사연을 알게 된 참모장의 노력에 의하여 우사령과의 담판은 성사되였으나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오해와 편견으로 담판은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론리정연하고 정당한 주장, 넓은 도량과 고결한 인품에 끌리여 그처럼 완고하던 우사령도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반일부대 병사들이 유격대에 입대하기 위하여 연길에서 푸르허로 넘어오던 조선청년 70~80명을 붙잡아 성시로 끌고온것으로 하여 성사되여가던 담판에 장애가 뜻하지 않게 조성되였다.

우사령은 그들이 모두 일제의 앞잡이라고 하면서 총살하려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사령을 만나 공산당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그의 견해가 체험에 기초한것이 아니고 소문을 듣고 생긴 오해이라는데 대하여 설득력있게 하나하나 일깨워주시면서 체포한 조선청년들을 무턱대고 죽일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대로 일제와 싸울수 있게 하여주는것이 항일구국에 나선 우사령과 같은 사람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의무이며 도리라고 공명정대하고 사리정연하게 말씀하시였다.

우사령은 더는 자기의 립장을 고집하지 못하고 반일련합전선실현의 요구에 응해나섰으며 감금하였던 70~80명의 조선청년들로 조선인별동대를 조직하자는 위대한 수령님의 제의도 적극 받아들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정치적안목과 견결한 반일사상, 깊고도 넓으신 도량과 포옹력, 인내성있고 진지한 설복에 의하여 반일부대와의 관계를 개선하여 유격대를 합법화하기 위한 담판은 성과적으로 종결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처럼 자주적립장을 확고히 견지하시고 혁명앞에 가로놓인 난관을 배심있게 맞받아나가심으로써 반일부대와의 반일련합전선문제를 빛나게 해결하시였으며 주체21(1932)년 4월 25일 드디여 우리 인민의 첫 주체형의 혁명적무장력인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였다. 그리고 5월 1일에는 안도현성에서 시민들과 반일부대 장교들과 병사들의 열렬한 환영과 축하속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열병행진을 성대히 거행하시였다.

5.1절에 안도현성에서 진행한 열병식은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과 그 위력을 온 세상에 널리 시위하고 일제에게 커다란 정치적타격을 준 력사적사변이였으며 우리 인민에게 자기의 진정한 혁명군대를 가지게 된 기쁨과 조국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안겨주고 현성안에 주둔해있던 우사령부대를 비롯한 중국인반일부대들의 반일기세를 높여주고 그들을 크게 고무추동한 일대 경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30년대중엽 동만의 유격구들에서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의 배타적목적과 종파적야욕을 달성하기 위한 책동으로 하여 우리 혁명앞에 엄중한 난국이 조성되였을 때에도 자주적립장에 서시여 그것을 맞받아나가 타개하시였다.

정치적으로 암둔하고 권세욕에 눈이 어두운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은 일제의 간계에 넘어가 반《민생단》투쟁을 협애한 민족배타주의적목적과 불순한 종파적야욕을 실현하는데 악용하였다.

그리하여 동만의 유격구들에서는 《민생단》이 없는 반《민생단》투쟁이 계속되였으며 《민생단》이 아닌 견실한 조선혁명가들이 《민생단》으로 몰려 무리죽음을 당하는 참사가 벌어지고 특히 조선혁명의 핵심력량인 우수한 조선인간부들이 대대적으로 제거되는 현상이 발로되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만주국군정부의 비밀출판물에는 《…민생단은 …공산주의박멸운동을 개시하였으나 실제활동으로서는 별로 볼만한것은 없었다. 그러나 민생단의 성립이 공산주의진영내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컸다.》 (《만주공산비의 연구》 1 만주국군정부 고문부 1936년 113페지)고 썼으며 일제의 비밀출판물도 《조선인배척이 더욱 격화되여 종래의 간부이하 일대 숙청이 벌어짐에 이르러 유력한 간부들까지도 드디여 청산…하는 현상이 나타나자… 이 기회에 즈음하여 중국인유력간부를 후임으로 충당하는외에 중국인중심주의를 관철시키려고 민생단혐의의 명목으로써 조선인배척정책을 감행》 (《최근 만주에 있어서의 공산운동의 현황검토》재만일본제국대사관 경무부 1935. 7. 31.  48~49페지)하였다고 썼다.

동만의 유격구들에서 벌어지고있던 이러한 사태는 조선혁명의 주체성을 고수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엄중한 난국이 아닐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한몸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왕청현 다홍왜에서 진행되는 회의에 참가하기로 결심하시였다.

유격대지휘관들은 당시 《민생단》문제로 하여 살벌한 분위기가 떠돌고있었으므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다홍왜로 가시는것만은 삼가하실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길은 죽든지 살든지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길이다, 내가 만일 다홍왜로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멸을 가져올뿐이다, 우리앞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운명을 구원하고 조선혁명을 위기에서 건질수 있는 심각한 기회가 왔다, 대결은 피할수 없고 흑백은 반드시 갈라져야 한다고 하시며 결연히 다홍왜로 떠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4(1935)년 2월 24일부터 3월 3일까지 진행된 다홍왜회의에 참가하시여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장의 허황성과 반동성을 철의 론리로 발가놓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저 동만에 있는 조선사람의 70%, 조선혁명가들의 80~90%가 《민생단》이거나 그 혐의자들이며 유격구가 《민생단》의 양성소라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 어떤 물질이든지 본래의 구성요소에 다른 요소가 80~90%이상을 차지하게 되면 그 물질은 다른 물질로 변하게 되는것이다, 이것은 과학이라고 하시면서 반《민생단》투쟁을 극좌적으로 벌리는 그들의 반혁명적인 책동을 준렬히 단죄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조선사람은 소수민족이기때문에 다수민족을 지도할수 없으며 조선사람은 간부로 될수 없다고 하는 좌경기회주의자들의 민족배타주의적이며 비과학적인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규탄하시고 소수민족이건 다수민족이건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능력을 위주로 하여 간부들을 선발하는 원칙을 지킬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특히 중국땅에서 활동하고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의 구호를 들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배타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비판하시면서 강도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강토와 도탄에 빠진 우리 민족의 운명을 구원할 숭고한 사명을 지닌 공산주의자들은 어느때, 어디에서 투쟁하든 절대로 조선민족해방의 구호를 버릴수 없다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것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고 대신할수도 없는 자주적권리이며 신성한 의무라고 강력히 주장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요영구회의에서도 다시금 반《민생단》투쟁의 좌경적편향을 폭로하시고 그를 바로잡기 위한 현명한 조치를 취하시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견결한 자주적립장에 서시여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의 책동을 저지파탄시키심으로써 조선혁명은 위기에서 구원되게 되였다.

❖ 주체25(1936)년 2월 남호두회의에서는 다홍왜회의와 요영구회의의 론점에서 핵심으로 되는 중요한 몇가지 문제를 국제당에 제소하기 위하여 모스크바에 갔다온 위증민이 그에 대한 국제당의 견해와 지지를 전달하였다. 국제당은 지난날 간도에서 벌어진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이였다는것을 인정하고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것이 그 누구도 훼방할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라고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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