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과 일본상품배척투쟁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과 일본상품배척투쟁은
당시 세차례에 걸치는 산동출병으로 중국대륙에 촉수를 깊숙이 뻗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침략을 위한 군사적준비를 진척시키는 한편 그 준비작업의 한 고리로서 오래전부터 추진시켜온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완공하려고 서둘렀다.
길회선이란 만주의 성소재지 길림과 조선의 북부국경도시 회령사이를 련결하는 철도를 말한다.
일제는 길림ㅡ회령철도를 비롯한 만몽5철도가 완성된다면 전만주와 조선을 련결하는 대우회선을 얻게 되고 북만주로 통하는 직통선을 얻게 되므로 병력과 필요한 전략물자들을 아무데나 다 보낼수 있고 조선의 민족해방운동까지도 탄압할수 있다고 보고 길회선철도부설공사에 큰 의의를 부여하였다.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저지시키기 위해서는 과감한 실력투쟁이 필요하였다.
회의에서는 투쟁과정에 들어야 할 구호와 투쟁방법, 행동방향을 토의하고 구체적인 분공조직도 하였다.
회의에서는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투쟁이 반드시 조중인민의 공동투쟁으로 되여야 한다는 립장으로부터 삐라, 성토문, 프랑카드를 비롯한 모든 선전물들을 조선글로도 쓰고 중국글로도 쓰기로 하였다. 거리에서 하는 선동연설도 두 나라 말로 하기로 하였다.
주체17(1928)년 10월 26일 새벽 선전대는 날이 새기 전에 길림의 거리들에 삐라를 뿌리고 격문을 붙이였다. 2~3명으로 무어진 소년회의 감시조들도 날이 밝자 지정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날 아침 각 학교의 학생들은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교정에서 모임을 가지고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성토문을 발표한 다음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거리는 삽시간에 수천명의 학생들로 차고넘치였다. 그들은 《일제침략자들을 타도하자!》, 《일제의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반대하여 투쟁하자!》라는 조선글로 된 프랑카드와 《타도 일제》, 《타도 매국노》, 《회수길회선》이라고 중국글로 쓴 프랑카드들을 들고 거리를 누비면서 신개문밖에 있는 성의회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수백명의 군대와 경찰이 대렬의 앞길을 가로막아나섰다.
대렬은 규찰대를 선두로 어깨를 겯고 군경들의 총검을 헤치면서 앞으로 나갔다. 성의회마당에서는 군중대회가 진행되였다.
모임을 끝낸 군중은 더욱 기세충천하여 일본령사관이 자리잡고있는 신시가쪽으로 행진해갔다. 일본령사관앞에서 반일구호를 힘있게 부르며 기세를 올린 시위군중은 대마로, 북경로, 중경로, 상의가 등 길림의 여러 거리를 뒤덮으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길림의 시위투쟁에서 타격을 받은 일제의 철도회사는 길돈선철도개통식을 무기한 연기하였다. 일본장사군들은 상점을 버리고 자기들의 령사관으로 도망쳐들어갔다.
시위투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고조되였다.
길림에서 시작된 반일투쟁은 만주 전지역에로 번져갔다. 장춘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은 이 투쟁에 호응하여 타도제국주의와 6대철도반대 구호를 들고 치렬한 투쟁을 벌리였다.
할빈과 천진에서도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결사적인 련대투쟁을 벌리였다.
연길지방 조선동포들도 떨쳐나섰다. 시위가 점점 더 큰 규모로 확대되였을 때
투쟁은 무려 40여일동안이나 계속되였다.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으로 하여 일제가 받은 타격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