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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17세기 시문학에 구현된 반침략애국정신(1)

 

서 론

 

위대한 령도자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끊임없이 달려드는 외적의 침략을 걸음마다 짓부시고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지켜낸 자랑찬 반침략투쟁력사를 가지고있습니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끊임없는 외적들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지켜온 애국심이 강한 인민이다.

조선문학사에는 력사적으로 우리 인민의 반침략애국정신을 구현한 훌륭한 시작품들이 수많이 기록되여있다.

1592년-1598년의 임진조국전쟁과 1627년의 정묘호란, 1636년의 병자호란을 계기로 17세기 조선문학사에는 반침략애국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진보적시인들의 노력이 작품들마다에 력력히 새겨져있다.

리안눌과 권필, 차천로, 김창흡, 정두경, 리수광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의 시작품들에서는 전쟁의 엄혹한 시련속에서 발휘된 우리 인민의 반침략애국정신을 각이한 시적계기를 통하여 토로하고 민족적각성을 환기시키고있다. 이것은 17세기 진보적시창작경향의 일단을 보여주고 우리 나라 중세시문학의 가치와 의의를 부각해준다.

 

본 론

 

2.1. 17세기 반침략애국정신을 구현한 시창작의 사회문화적요인

 

임진조국전쟁과 정묘, 병자호란은 조선봉건왕조의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이러한 변화는 자연히 문학의 새로운 발전방향을 규제하였다.

17세기에 반침략애국정신을 반영한 시문학이 활발하게 창작된것은 이 시기 복잡다단한 사회적환경, 사회문화적요인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무엇보다도 7년간의 임진조국전쟁이 17세기이후 력사발전에 미친 커다란 영향과 교훈이다.

7년간의 임진조국전쟁에서 우리 인민이 승리할수 있은것은 전쟁의 기본담당자인 애국적인민들과 군인들이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희생적으로 용감하게 싸운데 있었다.

리순신, 곽재우, 김응서, 정문부, 권률 등 당시 이름을 떨친 군사지휘관들과 의병장들의 능숙한 전투지휘도 전쟁승리를 보장하는데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임진조국전쟁이 승리로 끝났으나 침략자들이 우리 인민에게 끼친 피해는 막대하였고 전쟁이 주는 교훈도 그만큼 큰것이였다.

7년간에 걸치는 임진조국전쟁은 인민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거대한 힘을 자각하게 하였고 전후 사회의 전반령역에서 자기들의 요구를 내세우고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서게 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반면에 봉건통치배들은 전쟁을 통하여 무능성과 비겁성을 여실히 드러내놓았고 전후에도 막대한 인적, 물적피해를 가시고 도탄에 빠진 인민들의 생활을 안착시킬 대신 권력쟁탈을 위한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치렬하게 벌리였다.

봉건통치배들은 별치 않은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의 비방중상을 그치지 않았던것이다.

병자호란때 침략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있는 속에서도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치렬한 론쟁을 한것이라든가 1659년 5월 효종의 상사와 1674년 2월에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상사시 상복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두차례의 례론, 갑인(1674년), 경신(1680년), 기사(1689년), 갑술(1694년) 등 4차례의 환국(정국을 뒤집어놓는다는 뜻)이 일어나 서인과 남인사이에 부단한 정권교체가 일어난것 등은 17세기 당파싸움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뚜렷한 실례이다.

17세기에 들어와 우심해진 당쟁은 조선봉건왕조를 내리막길에 들어서게 하였으며 진보적인 문인들은 임진조국전쟁의 교훈으로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의도에서 임진조국전쟁의 력사적현실을 반영한 시가작품들을 수많이 창작하게 되였던것이다.

다음으로 임진조국전쟁후에도 여전히 외세의 침략위협이 실제적으로 존재하였으며 새로운 전란이 계속된것이다.

임진조국전쟁은 끝났으나 북방의 침략세력에 의해 전쟁의 위협은 의연 계속되였으며 외래침락자들에게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소극적인 항전태도를 취하고있는 봉건통치배들과 달리 애국적인민들은 또다시 반침략투쟁에 떨쳐나서게 되였다.

정묘호란때인 1627년 2월 의병장 정봉수가 수십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룡골산성으로 들어가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용감히 싸웠으며 소위포의병부대가 2월 15일 덕천산에서 평화적주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략탈한 적들을 불의에 기습한것을 비롯하여 정주와 선천, 룡천과 철산 등 청천강이북지역을 중심으로 적들을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였다. 병자호란때에도 인민들은 국왕을 비롯한 통치배들의 투항주의적행동과는 달리 자기 고향과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용맹을 떨쳤다. 선천의 홍천감과 전세록, 지득남, 안주의 리여각, 평산의 민응남 등은 의병대를 조직하여 용감히 싸웠고 기타 평양, 경기, 호남일대에서도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줄기찬 투쟁이 벌어졌다.

임진조국전쟁후에 벌어진 두차례의 전란은 당시 사람들을 외적을 반대하여 떨쳐나서게 할수 있는 문학작품 그중에서도 다른 문학형태에 비해 짧으면서도 기동적인 시작품의 창작을 절박하게 요구하였다.

이렇듯 임진조국전쟁과 뒤이어 일어난 정묘, 병자호란은 그 이후시기 많은 사람들이 외적에 대한 각성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것을 느끼게 하였으며 이로써 17세기 전기간에 걸쳐 반침략애국정신을 구현한 시문학이 줄기차게 창작될수 있었다.

다음으로 선진적인 사상으로 출현한 실학사상의 영향이다.

실학사상에서 중요한 구성부분을 이루는것은 국방사상이다.

실학자들은 임진조국전쟁초기의 패배상과 봉건통치배들의 무능성을 인정하면서 임진조국전쟁시기의 력사적교훈을 잊지 말고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할데 대한 진보적인 국방사상을 내놓았다.

리수광은 《임진왜란때에 왕이 서쪽으로 피난가게 되자 국내가 텅 비고 적병이 사방에 차서 나라의 명령이 시행되지 못하여 거의 달포동안 무정부상태에 있었다. 이런 때에 령남에서는 곽재우, 김면, 호남에서는 김천일, 고경명, 호서에서는 조헌 등의 발기에 의하여 의병이 소집되고 사방에 격문을 돌리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애국심이 앙양되고 지방의 각 주, 군들에서 선비들이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청하는자가 무려 백명은 되였다. 그러므로 왜적을 섬멸하고 국가를 회복하게 된것은 곧 의병의 힘이였다.》고 하면서 봉건통치배들의 무능성과 의병들의 애국적행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리수광은 나라의 국방력강화를 위한 양병론, 장수론, 병기론을 제기하였다. 리수광은 양병론에서 군사를 착실히 꾸릴것을 주장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실학을 체계화한 반계 류형원도 자기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인민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수단으로 된 군포법을 없애며 종래의 중앙군편성에서 일정한 장수에게 일정한 부대가 속해있지 않고 일정한 부대에 일정한 장수가 배치되여있지 않았던 불합리한 제도를 없애고 부대가 고정된 장수의 지휘밀에서 훈련을 받으며 전투에도 참가하도록 할데 대한 방안을 내놓았다.

실학자들의 견해를 통해서 알수 있듯이 17세기에 실학자들을 비롯한 진보적인 지식분자들은 임진조국전쟁의 경험에 비추어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할데 대한 개혁적견해들을 내놓았고 이를 반영한 문학작품들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던것이다.

실학자들이 일단 유사시에 외래침략자들에게 대처할수 없는 국내의 안일한 상태와 무방비상태에 대하여 심각히 분석하고 애국적인 국방사상을 제기하였으나 태평성세만 부르짖으면서 안일한 생활에 파묻혀있던 통치자들은 여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실학자들의 의도는 당시의 봉건사회제도하에서는 결코 실현될수 없었다.

 

2.2. 시문학에 구현된 반침략애국정신

 

2.2.1.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계기로 발휘된 애국심의 시적일반화

 

17세기에 우리 민족이 겪은 련이은 전란은 진보적문인들로 하여금 나라의 운명을 두고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였고 자기들의 작품에 반침략투쟁에서 발휘된 우리 인민의 애국정신을 적극 반영하도록 하였다.

1636년 청나라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왕과 봉건통치배들이 맺은 《화의》는 우리 인민의 민족적의분을 불러일으켰으며 진보적문인들로 하여금 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수많이 창작하게 하였다. 이들이 창작한 작품들에는 애국, 우국의 감정이 짙게 어려있었으며 외래침략세력에 대한 증오심이 강하게 반영되여있었다.

치욕적인 《화의》를 반대하여 투쟁한 척화파인사들인 정은(1569-1641)과 김상헌(1570-1652)의 시를 비롯하여 장유(1587-1638)의 《보검》, 리안눌(1571-1637)의 많은 시작품들, 홍익한(1586-1637), 윤집(1606-1637), 오달제(1609-1637) 등 척화삼학사의 작품들과 김준룡(?-1641)의 《남한산성이 함락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경(1586-1669)의 《삼전비》, 리소한(1598-1645)의 《탄금대》, 김정후(1576-1640)의 《밤에 두견새소리 들으며》, 김남중(1596-1663)의 《괴로움을 잊으려고》, 조상위(1582-1657)의 《수항정에서》(3수), 정두경(1597-1673)의 시작품들, 김득신(1604-1684)의 《변방의 노래》(6수), 김창흡(1653-1722)의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아침에 남한산성을 떠나며》,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짓는 노래》 등 많은 작품들에서 시인들은 각이한 시적계기를 통해 나라일을 걱정하는 우국지심을 토로하였다.

1636년 국방강화를 위한 10가지 방책을 작성제출하고 청나라의 침략이 감행되자 끝까지 싸울것을 주장한 정두경은 반침략애국주제의 시작품들을 많이 남긴 시인들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전쟁을 전후하여 지은 시 《변방의 노래》, 《백마타고 출전하며》, 《김절도사에게》,《수성성에서 밤에 피리소리를 듣고》, 《종군의 노래》, 《절도사 김준룡과 작별하며》등에서 원쑤격멸의 애국적지향을 다양한 소재와 시적계기를 통하여 폭넓게 노래하고있다.

시 《종군의 노래》에서는 8월 변방성에 뽕잎이 시드는 광경을 대하는 구체적인 정황과 계기를 설정하고 서정적주인공-병사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큰 공 세우라》는 고향사람들의 당부를 새겨안고 변방에서 또다시 한해를 보내면서 자기의 본분과 의무를 다해가는 애국적기개를 잘 보여주고있다.

 

성우에선 매일밤 슬픈 노래 울리고 

전장터엔 어느때야 피자욱이 마르랴 

새로 산 보검을 기둥에 걸어놓고

바라노라 장수따라 오랑캐목 벨것을 

 

시에서는 오랑캐들을 쳐물리치는 전장의 처절한 환경을 시적으로 묘사하면서 어서빨리 침략자들을 물리칠 결사의 각오를 다지는 서정적주인공의 비장한 심중을 격조높이 노래하였다.

시 《절도사 김준룡과 작별하며》에서는 외적을 쳐부시러 나가는 전인민적인 투쟁감정을 바다로 흐르는 시내물에 비유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면서 절도사 김준룡을 고무격려하고 원쑤를 격멸시켜주길 바라는 시인의 애국의 마음을 노래하고있다.

...                                  ...   

오랑캐 막는 싸움 더없이 급하니      

그 누가 싸움터로 나갈 근심 하는가   

장군이 말을 타고 달려나가면         

갖옷입은 천명군사 옹위해가리        

 

《오랑캐 막는 싸움 더없이 급하니/ 그 누가 싸움터로 나갈 근심 하는가》라는 이 시구에는 바로 자기 하나의 안락보다도 나라 위해 싸우다 죽는것을 더없는 긍지로 여기며 한몸바쳐 원쑤들을 격멸하기를 바라는 서정적주인공의 간절한 당부가 력력히 어려있다

...                                       ...

담장밑에 울고있는 벌레소리 괴로워라     

풀우에 떨어지는 락엽들도 근심일세       

서쪽 국경으로 외적이 쳐들어온다니      

서리발 긴 칼을 칼집에서 뽑노라          

 

우의 시는 김남중의 7언률시 《괴로움을 잊으려고》이다. 시에는 서정적주인공이 병석에 있으면서도 서쪽 국경으로 외적이 침입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연히 떨쳐일어나 싸울 결의를 가다듬는 애국의 기상이 잘 나타나고있다.

김준룡의 서정시 《남한산성이 함락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5언절구의 짧은 형식으로 유구한 력사를 두고 나라의 존엄을 지켜온 우리 인민의 불굴의 애국적기개를 훌륭히 표현하였다.

 

충신은 나라 위해 죽어야 하리          

죽지 못한다면 그 무슨 충신이랴       

문득 일어서서 큰 칼을 휘두르노니      

이 땅의 강물은 왜 덧없이 흐르는가     

 

이것은 침략자들과 치욕적인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에 접한 시인의 피의 절규이다.

충신이라면 언제나 나라위해 결사의 각오가 되여있어야 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 몸바칠수 없다면 충신이 아니라고 한 시인의 이 절규에는 우리 인민들의 열렬한 애국심, 주화론자들에 대한 강렬한 비난의 감정이 반영되여있다.

당시 세상에서 척화삼학사로 알려진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의 작품들과 조경의 《삼전비》, 김준룡의 《남한산성이 함락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자전쟁의 불미스러운 결말을 반영하고있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은 전쟁이 일어난 당시 모두 태학관에서 학문연구에 힘쓰고있던 비교적 나이젊은 선비들로서 치욕적인 《화의》를 반대하는 의로운 투쟁의 앞장에 서있었다. 주화파세력들은 《화의》가 이룩되자 그것을 반대한 이들이 적들에게 끌려가 스산한 이국땅의 무주고혼이 되게 하였다.

홍익한의 7언률시 《심양옥중에서 답청일에 느낀바 있어》, 윤집의 7언절구 《섣달그믐날 밤에》, 오달제의 7언률시 《어버이생각》, 5언률시 《안해 남씨에게》 등은 자신의 앞날을 가늠할수 없는 이국의 옥중에서 지난날의 일들과 고향에 대한 생각, 부모처자에 대한 그리움을 읊고있다.

오달제의 시들인 《어버이생각》이나 《안해 남씨에게》에서는 이국에 끌려와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를 그리워하는 간곡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그것을 조국애의 감정과 융합시키고있다.

 

우리 사랑 얼마나 소중하랴

서로 만난지 두해도 못되였네

만리길 아득히 헤여졌으니

백년의 언약이 허사로구나

먼먼 이국 땅 편지인들 보낼소냐

산도 아득하여 꿈길도 더디여라

내 살아남길 바랄수 없으니

배안의 아이나 부디 잘 기르오  

 

서정시 《안해 남씨에게》는 이렇게 자기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이제 더는 만날수 없다는것을 각오하고있는 서정적주인공이 안해에게 남기는 유언이라고 할수 있을만큼 진실하고 순결한 감정의 토로인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뜨겁게 울려준다.

척화삼학사중에서 오달제는 제일 젊은 20대의 선비였다. 그는 당시 늦었다고도 할수 있는 스물이 퍽 넘어서 백년해로를 기약하였던것으로 하여 안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것인가를 페부로 깊이 느끼고있었다. 그러나 먼 이국땅의 옥에 갇힌 몸으로 편지한장 보낼수 없고 살아나가기를 바랄수 없는 처지에서 심중에 고패치고있는 뜨거운 마음을 《배안의 아이나 부디 잘 기르오》라는 결구에 담아 토로하고있는것이다.

시의 이 결구는 참으로 깨끗하고 절개굳은 인간의 심장의 메아리로 독자들의 심금을 강하게 울려주고있다.

이 시기 시문학에는 김정후의 7언절구 《우연히 읊노라》와 《밤에 두견새소리 들으며》와 같이 외적의 침입으로 인민들이 당하는 불행과 고통, 나라가 당한 치욕에 대한 수치감을 강하게 토로하면서 애국의 감정을 환기시키는 작품들도 있다.

김정후의 2편의 서정시는 전쟁으로 나라가 당한 치욕을 두고 몸부림치는 인민들의 분노를 절절한 서정으로 노래하고있다.

시 《우연히 읊노라》가 전쟁으로 입은 조국의 상처를 두고 피눈물을 뿌리는 인민들의 분노를 토로하고있다면 시 《밤에 두견새소리 들으며》는 그 치욕을 씻기 위한 투쟁으로 만백성을 깨우치려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준 작품이다.

 

동해의 물로 나라의 치욕을 씻어야 하리

북극성처럼 그 누가 만백성의 마음 밝히랴 

밤중에 나라 위해 한없는 눈물 흘리노니

두견새도 깊은 숲속에서 피 토하며 우누나 

 

바로 이 시들에는 거듭되는 외적의 침입을 반대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떨쳐일어나 조국의 존엄을 지켜 영용하게 싸운 우리 인민들의 불타는 애국심이 정서깊은 시형상으로 일반화되여있는 한편 통치배들의 비굴성과 무능성때문에 굴욕을 겪은데 대한 시인의 울분이 진하게 흐르고있다.

조경의 고시 《삼전비》도 우와 같은 경향의 작품으로서 나라가 당한 수치에 대한 울분과 원쑤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강렬하게 맥박치는 작품이다.

시의 앞부분에서는 글씨를 잘 쓰고 문장을 잘 만드는 사람들은 나라에서 중히 여기며 아이들에게 명필들의 글씨를 본따라고 타이르고 그 이름 떨치기만 하면 뭇사람들이 우러러 본다고 하면서 글씨 잘 쓰는 사람들을 《신선》이라 한다는 전제를 주고있다.

그러나 시의 다음부분에서는 그 전제에 완전한 부정을 가하고있다.

 

누가 알랴 사람의 일 기쁨이 뒤바뀜을         

문장 글씨 오히려 원쑤의 일을 도왔구나       

그대는 보지 못하였나                       

삼전나루의 일곱자 비석                     

물결치듯 호탕한 문장글씨 기이하도다         

나란히 전자체로 새겨진 세명의 이름          

오랑캐 아이들속에서나 높이 떨치리           

 

시에서는 이처럼 강렬한 주정토로로 삼전도의 비석에 글을 쓴자들을 역설적인 방법으로 예리하게 타매하고있다. 시의 마지막 결구에서 《더럽도다/ 문장과 글씨로 이름높은자들/ 그 재간 조선에선 길이 찬양 받지 못하리》라고 웨치고있다. 시는 앞에서 제시된 전제를 완전히 뒤집는 특이한 서정전개방식으로 민족의 원쑤들에게 추상같은 저주를 보내고있는것이다.

김창흡의 시《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아침에 남한산성을 떠나며》, 《남한성을 바라보며 짓는 노래》에서는 조국방위성전에 떨쳐나 용감히 싸운 인민들의 애국적투쟁과는 대조되게 침략자들의 위세에 눌리워 겨레의 운명은 안중에도 없이 비겁하게 행동한 통치배들의 용납할수 없는 처사를 강하게 비난하였다.

 

지사의 강개한 마음 끝이 없어        

옛 고을 찾아와 눈물 홀리는데         

긴 강도 수치를 흘러보내지 못하여     

물 마시는 말조차도 부끄러워하네 

     

시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시에서 긴 강도 수치를 흘러보내지 못하여 강물을 마시는 말도 부끄러워한다는 표현은 패전의 수치감에 대한 가슴아픈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아침에 남한산성을 떠나며》에서 시인은 높다란 성가퀴와 요란한 무기고를 차려놓았건만 《어찌하여 오랑캐를 막지 못했나》라고 반문하면서 력사의 그 교훈을 되새겨볼수록 도무지 진정할수 없는 자기의 비분강개한 심정을 이렇게 터치였다.

 

큰 강은 망망히 흐르고

가을의 찬기운 거친 베옷 뚫고든다

강개한 이 마음 또한 속절없어 

먼길을 찾아 오르내렸어라  

삼전비엔 오랑캐글 새겨있으니  

현성엔 썩은 선비만 있었더라   

 

또한 시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짓는 노래》에서는 고구려의 호걸들이 마련한 전통이 있고 험준한 지세가 있어도 《위기보다 먼저 안전만을 생각》한 위정자들의 처사로 나라가 전례없는 수치를 당했다고 하였으며 시《다시 짓노라》에서도 《방비책을 모두 갖추었더라면/리해관계 세밀히 따져봤을》것이라고 하면서 적들이 쳐들어온 다음에야 부랴부랴 론쟁만 거듭한 조정의 추태에 환멸을 금할수 없다고 노래함으로써 남한산성에서 당한 치욕의 근원을 무능하고 비겁한 썩은 선비들과 량반통치배들에게서 찾고있다.

 

 

 

김일성종합대학 김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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